2019년 3월 2일 토요일
강사 : 짐 자비스 형제님
동시통역 : 강성찬 형제님
<누가복음 10장_세가지 헌신 >
누가복음 10장에 그리스도인 한 가정에 대해서 보게 됩니다. 마리아와 마르다와 나사로가 있습니다.
"저희가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촌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가로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눅10:38-42)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요11:5)
마리아와 마르다와 나사로 가정에 있었던 일은 베다니에서 일어났던 일입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 성에서 아주 가까이에 있던 마을입니다. 베다니라는 이름의 뜻을 우리는 크게 두가지로 생각하게 됩니다. 첫번째는 '노래의 집', 다른 한가지는 '마찰의 집'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또한 그리스도인들의 하루하루가 어떠한 것인지 표본처럼 보여주는 표현 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역시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래서 이렇게 인생애 대해서 말한것이 참됩니다. "뒤돌아보면 인생은 슬픔 뿐이고 주위를 둘러보면 걱정 뿐이고 앞을 바라보면 두려움 뿐이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과거에 여러가지 어려움을 겪어 왔기 때문에 그것을 회상해보면 여러가지 슬픔이 우리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현재 여러가지 상황들을 살펴볼때 여러가지 걱정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장래에 무슨일이 일어날지를 생각해 보면 우리 마음속에 두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과거에 일어났던 일들 가운데서도 기쁨을 누릴수 있도록 우리 마음을 훈련해야 합니다. 그리고 현재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여러 일들을 걱정하는것이 아니라 기도하도록 훈련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장래를 생각할때에 우리는 주님을 의지함으로 그것을 능히 감당할 희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이와같이 마땅히 해야 하는, 과거를 바라보고 현재를 둘러보고 미래를 전망하는 것에 실패하기 때문에 많이 낙담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가정의 세 남매의 일을 바라보면서 그들이 어떻게 그리스도인으로서 헌신된 삶을 살아갈수 있는지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누가복음 10장에서 마르다의 경우에 그의 헌신은 그의 섬김과 관련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사로와 관련해서는 나사로를 보면서 그의 헌신은 그의 간증과 관련되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마리아의 헌신은 그의 예배와 그가 성경을 깊이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마리아가 신약성경의 인물 중에 괭장히 성경에 대해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마르다의 경우 누가복음 10장에서 그가 섬기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마르다는 이 상황 가운데서 주님을 섬기고자 하는 일에 괭장히 마음이 대단히 분주해 있습니다. 그는 이러한 긴장에 아주 압도되어 있습니다. 이 긴장이라는 것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아주 많은 압박을 주고 있습니다. 직장에서, 많은 일가운데서 우리는 긴장 가운데 있으며 또한 학교에서 우리는 많은 학업 가운데서 긴장 가운데 있게 됩니다. 또한 모임에서도 그러한 긴장이 있는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0장에서 그러한 마르다에게서 찾아보게 되는 세가지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우선 여러분에게 첫번째로 마르다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마르다가 주님을 위해서 식사를 준비하는것은 전혀 문제가 되는 행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앞에 말씀드린 것처럼 마르다의 그의 헌신은 그의 섬김과 관련되어 있고 마르다가 섬긴 것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마르다가 그가 섬기고 있는 것에서 눈을 들어서 마리아를 쳐다보게 된 것입니다. 마르다는 마리아가 게으르고 그가 마땅히 해야 할 책임을 감당하지 않고 있다고 생각했을것 같습니다. 그래서 첫번째로 이 긴장과 관련해서 살펴보게 되는 것은 마르다는 그와 같은 환경 속에서 그의 스트레스가 점점 증폭되는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마르다가 여러가지 해야할 일이 많이 쌓여 있었습니다. 그가 식탁을 준비하고 청소하고 여러가지 채소와 고기를 다듬일 많은 일이 쌓여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번째로 마르다에게 스트레스를 가져다 준것은 그러한 가운데서 매우 바빠진 것입니다. 저는 마르다가 그 집을 알맞게 정리하기 위해서 괭장히 분주했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래서 마르다의 긴장 속에서 그가 해야하는 많은 산더미같은 일들, 그리고 그가 그것을 바쁘게 처리해야 할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세번째로 마르다는 이것을 다루는데 있어서 현명하지 않게 행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마르다는 이와같은 일을 잘 처리해내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이와같은 질문을 해보겠습니다. 마르다가 이러한 상황 가운데서 이와같이 준비할때에 그에게 있어서 가장 나쁜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때때로 이러한 분주함 가운데서 여러가지 것들을 하는데 결과가 우리가 생각한 것처럼 심각하게 잘못되지 않은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마르다의 상황 가운데서 일어날 수 있는 가장 나쁜일은 고작 음식을 조금 태우거나 조금 늦게 음식이 준비되는것 뿐입니다. 그런데 마르다는 그것을 큰 재앙으로 생각하고 스크레스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도 동일하게 많은 분주함 가운데서 스스로 스트레스를 더욱 가중시키면서 우리는 그것을 괭장히 힘들어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저의 며느리의 부모님, 제 사돈이 저희를 방문하여 같이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제 아내가 이런말을 하는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겠지만 제 아내는 아주 좋은 요리사이고 그 식사를 위해서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서 스트레스가 점점 올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손님들이 우리집에 왔고 식사는 아주 맛있었습니다. 모든것이 잘 진행됬고 우리는 식사를 즐겼고 그리고 즐거운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캐나다에서는 식사후에 아주 단 디저트를 먹게 됩니다. 그리고 그 케익은 초콜렛 덩어리들이 있는 맛있는 드저트 였습니다. 그리고 그 케이크를 제 사돈과 제가 동시에 첫번째 입을 떠 먹게 되었습니다. 제가 그것을 한입 입에 담자마자 그것을 바로 뱉을수밖에 없었습니다. 아주 맛이 이상했던 것입니다. 초콜렛 밑에 있는 성분들을 모르는 이상한것을 사용했던 것입니다. 그 상자에 유효기간이 남아 있었지만 그 안에 있던것이 다 상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제 아내가 무슨일이 일어났는지를 금방 알아차렸습니다. 하지만 또 예비했던 다른 아이스크림이 그 시간을 마칠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소한 긴장들이 그리스도인들을 압박하고 난처하게 만듭니다. 이러한 긴장 가운데 마르다는 주님께 "이것을 왜 돌아보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던 것입니다. "내 동생이 왜 나를 이와같은 상황에서 돕지 않는것을 내버려 두십니까? 내 동생에게 말해서 나를 도와주라 말해 주십시요" 하지만 41절에서 주님께서는 마르다에게 부드러운 말씀으로 꾸짓습니다.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눅10:41).
주님께서 하시는 이 말씀이 마르다가 이와같은 것을 잘 처리하지 못해서 꾸짓는것이 아닌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마르다를 부드럽게 꾸짓으시며 이제 마리아에 대해서 말씀 하십니다. 참으로 마르다는 그의 헌신에 있어서 아주 훌륭한 섬김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의 보여주는 헌신은 그보다 더 높은수준의 헌신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받을 수 있는 교훈은 섬김이라는 좋은 헌신을 하고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생각해보아야 하는것은 이 헌신보다 더 좋은 헌신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있어야 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분주한 생활 가운데서 우리의 시간을 따로 떼어 주님의 말씀 앞에 엎드려 앉아있는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이제 요한복음 11장에서 나사로와 그의 헌신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는 요한복음 11장에서 나사로가 병들었고 그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주님께서 아심에도 불구하고 가지않고 다른곳에 그냥 머물렀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나사로가 그의 병가운데서 죽기까지 주님께서는 실제로 이틀을 더 유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베다니로 오셨을때 마르다는 첫번째로 주님께 나가서 이렇게 말한 사람입니다.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요11:21-22).
마르다는 주님께서 다른 죽은자들을 살리시는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실제로 그 오라비도 그렇게 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23절에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요11:23).
이것은 분명히 주님께서 나사로를 다시 살리시는 것이지만 나중에 있는 몸의 부활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부분 입니다. 그리고 마르다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요11:24).
그리고 32절에 마리아가 있는곳에 일행이 왔을때 마리아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요11:32).
여러분은 여기서 마리아가 마르다가 한 요청과 사실상 같은 요구를 한 것을 보게 됩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여기서 그의 발 아래 엎드려서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둘러싼 무리 가운데서 마리아가 주님 발 앞에 엎드려 눈물을 흘릴때 주님은 "그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라는 말씀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35절에 영어성경에서는 신약성경에서는 가장 짧은 구절이 나오게 됩니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그리고 흥미로운것은 헬라어로 가장 짧은 구절은 데살로니가 전서의 "항상 기뻐하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와같은 대조적인 짧은 구절이 베다니의 성격을 나타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노래의 집이며 또한 마찰의 집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주님을 둘러싼 무리들은 나사로의 무덤앞에 가게 되고 그 돌을 옮겨놓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43절에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자주 말씀 드리는것은 여기서 주님께서 "나사로야"라고 이름을 특정짓지 않으셨다면 "나오라"는 주님의 말씀에 모든사람들이 다 살아서 나왔을 것이라는 것을 말씀 드립니다. 그리고 44절에 나사로는 베로 동인채로 무덤앞에 나오자 주님께서는 그를 풀어서 다니게 하라고 말씀 하십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이 일은 다른 바리새인들과 유대인 지도자들의 시기를 더욱 크게 만들어 버립니다. 바로 이 사건은 주님을 대적하는 그 사람들이 주님을 죽이고자 결심케 만드는 그런 사건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와같이 살아난 나사로는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나사로가 한 말 자체는 성경에 기록된 것이 없는것을 압니다. 그러나 제가 말씀 드린것처럼 나사로의 헌신은 그의 간증과 관련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제 십자가에 가시기 전까지 나사로는 살아있는 주님의 능력을 나타내고 있는 살아있는 증거가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와같은 의문을 갖게 됩니다. 왜 사도는 나사로가 행한 말이라든지 행동을 자세하게 기록하지 않았을까? 만약 이와같은 일이 오늘날 일어난다면 나사로는 온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이 되고 각처에서 그의 말을 들어보자고 요청이 들어왔을 것입니다. 다시 살아난 나사로의 선교단체라는 것을 그가 만들고 아주 활발하게 활동할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사로가 살아났다'는 닷컴을 만들고 그것을 선전 할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가지 sns를 사용해서 그것을 퍼뜨릴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상하게도 나사로의 말에 대해서는 기록하지 않고 조용히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것을 통해서 주님을 위해서 증거하게 될때에 중요한 원리를 배우게 됩니다. 우리가 증거하는 것은 우리 자신에 대해서 증거하는 것이 아니고 나에 대해서 증거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증거하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며 우리는 오직 그분만이 영광을 받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요한은 성령님의 감동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의 이야기를 여기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비교했을 때 죽은 나사로가 살아난 이야기는 아무것도 아니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것은 놀라운 소식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영원토록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것을 더욱 더 담이 없이 알아가게 될 것입니다.
"예수의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줄 아노라"(요21:25).
요한복음은 이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그리고 이제 이 하나의 말씀에 대해서 온 세상의 책이 담을수 없는 수 많은 말씀에 대해서 말하면서 마치게 됩니다.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줄 아노라" 그래서 우리는 하늘나라에서 싱증날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그분으로 가득차서 계속해서 가득차며 온 영원을 보내게 될 것입니다. 나사로의 이야기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 사람을 어떻게 살리셨는가 하는 이야기 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장사되심과 다시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많은 사람들이 그와같은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생명의 부활로 나오는 사람이 있으며 심판의 부활로 나오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이 가정의 마지막 사람인 마리아의 헌신에 대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흥미로운것은 누가복음에서나 요한복음에서나 마리아가 주님의 발 아래 있는 것으로 발견되게 됩니다. 신약성경에서 21번 주님의 발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시편 22편에서는 "그들이 나의 손발을 찔렀나이다"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발에 대해서 마지막으로 말씀하고 있는 성경은 요한계시록 10장에서 한쪽은 땅에 한쪽은 바다에 둔 사람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2장 말씀을 잠깐 보겠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 사건이 유얼절 엿새전에 있었던 사건이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잡히시고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엿새전입니다. 누가복음 10장에서도 주님께서 이 가정에 초대를 받아 식사를 하시게 됩니다. 그리고 12장 2절에서도 마르다는 일을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여기서 마르다는 먼저 본 누가복음 12장에서의 마음의 상태와는 다르리라고 믿습니다. 이일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 마르다로부터 어떠한 불평의 말을 찾아볼수 없습니다. 그의 동생 나사로가 다시 살아났고 그의 마음속에 주님에 대한 감사로 넘쳐 흘렀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그의 헌신에 있어서 더 단계가 나아가서 예배로 주님께 헌신해 드리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부은 것입니다. 이 나드는 애굽에서 생산하는 것으로서 옥합에 담겨 보관이 됩니다. 그리고 이것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옥합이 깨어져야 그 안에 든 향유를 사용할수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사건이 이 사건이 첫번째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이것이 마지막으로 일어난 사건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누가복음 7장에서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서 한 여인이 이 똑같은 행동을 하는것을 보게 됩니다. 그는 죄인인 여자였고 그는 향유를 주님의 발에 붓고 그녀의 머리카락으로 씻었습니다. 참으로 그 여인은 자신의 죄가 사함을 받는것을 간절회 원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녀가 원하는것, 간구하는 것을 들으셨습니다. 그녀의 죄를 사해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 나와있는 행동은 누가복음에 나와있는 행동보다 조금 더 발전된 행동인 것입니다. 이것은 순전한 헌신으로 말미암은 곧, 장래에 무슨일이 일어날지를 내다보는 행동이었습니다. 그 향유를 주님의 발에 붓고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씻었을때 그 냄새가 방에 가득한 것을 보게 됩니다. 이 향유의 향기는 대단히 강해서 그것을 붓게 될때 그 냄새가 열흘간이나 집에 지속되게 됩니다. 그리고 그녀의 행동은 즉시 가룟유다에게 비난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7절에 이와같이 비난하는것에 대해서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요12:7-8).
주님께서는 여기 마리아의 예배와 성경을 이해한 것에 바탕한 예배에 댈해서 주님께서는 그녀를 칭찬하고 계신 것입니다. 특별히 자매님들께 이것을 통해서 격려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 여인이 주님의 발 아래 있었을때 무슨 일이 일어날지 그는 깊이 깨닫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여인이 알고 있는것을 다른 제자들은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누가복음 18장에서는 이 동일한 사건에 대해서 제자들도 알지 못하였다는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리고 이 말씀에 대해서 그들은 이 말씀을 알지 못하여 묻지도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주님이 어떤 일들을 겪게 되실지, 어떻게 그분이 죽으실지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니다. 하지만 제자들 중에 어느 누구도 바로 이때가 이 일이 일어날 때라는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 향유가 부어진 곳이 여기가 마지막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마태복음 26장을 가서 볼때에, 몇구절을 읽겠습니다.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을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우리라 하시더라"(마26:2).
그리고 이제 시간은 흘러서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전 이틀전입니다. 요한복음 12장은 유월절 엿새전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26장은 그로부터 4일이 지난 후의 사건입니다.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제자들이 보고 분하여 가로되 무슨 의사로 이것을 허비하느뇨 이것을 많은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 예수께서 아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사를 위하여 함이니라"(마26:6-12).
우리는 과연 이 여인이 누구인지를 궁금해 합니다. 그 날로부터 사흘이 지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향유를 부은 여인이 누구일까요. 어떤 사람들은 마리아가 다시한번 그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가 시작한 일을 완전히 마치고자 하는 행동을 하였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제가 생각하게 되는것은 사흘후에 하게 된 이 일은 한 여인이 옥합을 깨뜨렸을때, 온 베다니 전역에 그 소식이 퍼지게 됩니다. 그 마리아가 행한 일이 베다니에 소문이 났고 다른 한 여인이 그 소식을 듣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한 여인은 마리아가 한 것처럼 또 그와같이 하고자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 온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일어난 이 일에 관해서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보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12장에서는 오직 가룟유다만이 마리아가 한 일에 대해서 불만을 표시하였습니다. 하지만 마태복음 26장 8절에서는 제자들이 복수형으로 분하여 이것을 왜 허비하였는지 말하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다시한번 이것을 상기시켜 주십니다. "이 여인은 나의 장사할것을 예비하여 이렇게 하였다"
이제 질문은 이것입니다. 어떻게 마리아가 주님께서 죽으시고 장사될것을 그만 알수 있었는가, 그리고 여기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한 여인도 어떻게 주님의 죽으심을 알수 있었는가? 이것을 알수있는 유일한 방법은 주님께서 성경을 펴서 풀어서 그것을 가르쳐 주실때에 그것을 주의깊에 듣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구약 성경을 펴서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항상 가르치셨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24장에서 멸망의 가증한 것에 대해서 가르치십니다. 그것은 구약성경 다니엘 9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자들은 그 장과 관련된 진리에 대해서 더욱 더 물어보았을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다니엘 9장에 대해서 물어보았을때 또한 그들은 거기 나와있는 시간과 때에 대해서 물어보았고 주님께서는 그 시간과 때에 대해서 더욱 풀어서 알려주었을 것이라고 생각 됩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수백년전의 일부터 하나님께서 많은 것을들 파노라마와 같이 예언하고 계시는 장입니다. 그런데 이와같은 주제는 너무나 광범위해서 정말 몇시간의 교제의 시간이 필요할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여기서 말씀드리고자 하는것은 특별히 하나님께서 490년을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 다니엘의 70이레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69이레가 거기 진행이 되고 있습니다. 여기 히브리 언어는 7수에 대해서 해택(heptad)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 성경의 한 이레라고 말하는 것이 7년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69이레를 7년으로 곱한다면 483년이 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벽을 건설하라는 명령이 떨어진 후부터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하시는 순간까지 483년이 걸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풀어주시는 이 말씀을 주의깊게 듣고 있었다면 그들은 바로 이때가 그 메시아가 끊어질 때라는 것을 알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두 여인은 정확하게 유월절 엿새전, 그로부터 사일이 지난때에 옥합을 깨어 드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정확하게 그때를 이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참으로 이 두여인은 주님의 장사될것을 주님께 향유를 부어드림으로서 주님을 높여 드리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23장에서 우리는 주님의 장사된 몸에 붓기 위하여 또한 여인들이 향유를 가지고 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마가복음 16장에서는 그와같이 이른 아침에 온 여인들이 누구인지 그 이름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 온 여인들 중에서 그들과 함께 하지 않은 여인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바로 베다니 마리아 입니다. 그 이른 아침에 주님의 몸에 향유를 부어드리기 위해서 온 여인들도 괭장히 아름다운 일을 하고자 나아왔습니다. 그들의 동기도 순수하게 나온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베다니마리아가 깨달은것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장사된 후에는 부활하실것이기 때문에 그 몸에 부을 향유가 더이상 필요치 않다는 것을 그 여인들은 몰랐던 것입니다. 바로 그분은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마르다와 마리아와 나사로와 관련해서 여러 성경 본문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세사람을 통해서 우리가 주님을 향해서 드릴 수 있는 세가지 아름다운 헌신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우선 첫번째로 그것은 참되고 애정이 담긴 주님에 대한 예배임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두번째로 바로 그분에 대한 성경의 지식을 더 넓고 깊게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골로새서 2장 3절에 기록된 것처럼 "그(그리스도)의 안에는 모든 지혜의 보화가 숨겨져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형제 자매님들이 즐기는 기쁜 진리입니다. 그런데 제가 특별히 자매님들에게 이 말씀을 통해서 격려를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성경의 이 깊은 지식은 형제님들에게만 해당 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우리가 공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할때는 형제들이 앞에 나가서 하고 형제들이 잘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자매님들이 그러한 것때문에 '나는 성경을 깊게 연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참으로 모든 자매님들이 이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연구하고 그리스도에 대해서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한 연구는 단지 여러분의 영혼에 유익을 줄 뿐만 아니라 여러분이 깨닫는 것은 여러분의 남편과 그리고 여러분이 모임에서 대화를 나누는 많은 성도님들에게 유익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참 제가 캐나다에서 아직 젊은 설교자 였을때 이러한 지식이 많은 자매님들이 저에게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수양회나 여러 말씀 집회가 끝난 다음에 자매님들이 오셔서 제가 교제한 말씀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제가 그 말씀집회에 대해서 감사의 마음과 내용을 또한 전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또한 자매님들은 "짐 형제님, 그런데 이 주제에 대해서 이런부분, 저런 부분을 생각해 보셨나요? "하면서 여러가지 제안을 해주셨습니다. 정말 저보다 성경을 더 잘알고 계신 자매님들을 동경합니다. 그리고 도움을 주는 태도로, 사랑이 태도로 저에게 다가와서 저에게 말씀해 주신 자매님들을 존경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리아와 마르다 나사로에 대해서 보았습니다. 마르다의 헌신은 그 섬김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사로의 헌신은 그의 간증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말씀드린대로 마리아의 헌신은 예배와 그의 성경에 대한 깊은 이해와 관련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말씀들의 짧은 교제가 여기계신 여기계신 성도들로 더욱 깊은 헌신을 하게되는 격려가 되는 말씀이 되기를 바랍니다.
'외국 형제님 > 짐 자비스 형제님'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고린도전서 11장_ 머리되심 > (0) | 2021.07.24 |
---|---|
< 고린도전서 15장_부활 > (0) | 2021.07.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