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나 2-4장 : 요나의 기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두번째 기회 > 기드온 쿠 형제님
요나서 2장 6절부터 3장 5절까지 읽도록 하겠습니다. 형제님께서 읽어주시겠습니다.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삽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 무릇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 물고기에게 명하시매 요나를 육지에 토하니라"(욘 2:6-10).
"여호와의 말씀이 두번째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니느웨는 극히 큰 성읍이므로 삼일길이라 요나가 그 성에 들어가며 곧 하룻길을 행하며 외쳐 가로되 사십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 니느웨 백성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무론 대소하고 굵은 베를 입은지라"(욘 3:1-5).
그리고 3장 10절부터 4장 전체를 읽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감찰하시고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욘 3:10).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하시니라 요나가 성에서 나가서 그 성 동편에 앉되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그늘 아래 앉아서 성읍이 어떻게 되는 것을 보려 하니라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 넝쿨을 준비하사 요나 위에 가리우게 하셨으니 이는 그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 괴로움을 면케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 넝쿨을 인하여 심히 기뻐하였더니 하나님이 벌레를 준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 넝쿨을 씹게 하시매 곧 시드니라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준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쬐매 요나가 혼곤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 넝쿨로 인하여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찌라도 합당하니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 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 이만 여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욘 4:1-11).
그리고 마태복음 12장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38절부터 41절까지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속에 있으리라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어니와 요나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으며"(마 2:38-41).
읽는 것에 도와주신 형제님께 감사를 드리며 또한 주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복 주시리라 믿습니다.
우리가 이제 세 장을 살펴볼 텐데요. 이것은 각 장이 길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이제 3개의 장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전체적으로 자세하게 살펴보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최대한 이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기회를 통해서 여러분께서 이 요나서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되고 그리고 또한 구약 전체적으로 또 관심을 가지고 읽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신약에 대해서는 모두 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때로 이 구약 성경은 멀리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시간을 통해서 이 구약 성경이 참으로 우리에게 많은 빛을 던져주고 있다는 것을 보고 관심을 더 쏟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요나가 바다에 던져진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즉시로 그 바람과 파도가 잔잔하게 됩니다. 우리가 이 노래 전반부는 읽지 않았지만 거기서는 그가 얼마나 깊이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는지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2장 6절에서는 내가 산에 뿌리까지 내려갔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산은 실제로 그의 뿌리가 바다 깊은 곳까지 내려가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그리고 요나가 말하기를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랫도록 막았다고 합니다. 그는 가라앉고, 가라앉고, 또 가라앉은 것입니다. 참으로 그가 받았던 그 압박과 공포는 실제적이었던 것입니다. 요나는 그 가운데서 기도합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도망갔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하나님께서 그를 위하여 큰 물고기를 예비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하시고, 6절 후반부에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라고 노래합니다. 그리고 9절 마지막 부분에 "구원은 여호와께로 말미암았나이다" 그것이 여호와께서 어떻게 그를 구원하셨는지를 결론적으로 말해주고 있는 구절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살리시고 그가 썩어지지 않도록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 큰 고래가 그를 건져 올린 것을 이렇게 묘사한 것입니다. 그 깊은 곳으로 빠져들어갈 때에 이러한 단어들이 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오해하지 않길 바랍니다. 요나가 가라앉고 있을 때에 이제 종이와 연필을 꺼내가지고 이러한 것을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나중에 구원받은 후에 돌아보면서 이것을 기록한 것입니다. 이것을 나중에 기록했습니다. 그가 이 가운데서 떠올리게 됐던 그 생각들을 나중에 적은 것입니다. 그가 가라앉는 순간에 느꼈던 그 감정들을 여기에 기록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기록은 성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 중에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시편 22편과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42편과 거기서 유사한 구절들을 발견해 볼 수 있습니다. 거기에 42편에 우리 구주의 그 감정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분의 머리를 둘러싼 많은 물결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많은 시편들이, 특별히 메시아 시편들이 구주께서 고난받으실 때에 그분이 느꼈던 감정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나는 그러한 성경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때때로 이렇게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주님께서 오지 않으셨다면, 주님이 오시기 전에 제가 먼저 죽게 된다면, 제가 이 땅에 그 마지막 순간 가운데 제가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요? 그리고 그때 제가 드리는 기도는 어떤 것이 될까? 우리는 이제 그 날이 올 것을 알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오시지 않으시면 우리는 그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성경에서 사람들의 마지막 때에 말했던 것이 기록된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윗의 마지막 말을 봅니다. 또한 모세의 마지막 유언의 기록을 봅니다. 또한 야곱의 마지막 말을 봅니다. 또한 우리는 그 주님의 마지막 말씀을 그 계시록의 마지막에서 또한 보게 됩니다. 사람들이 죽기 전에 하는 그 마지막 말은 아주 중요한 말입니다. 그 사람이 마지막 내뱉는 말은 그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을 반영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여기 기록된 이 말은 요나의 그 마지막 말입니다. 그는 비록 불순종한 종이었지만, 하지만 그가 했던 사실상 그의 마지막 말인 이 기록은 너무나 아름다운 것을 아름다운 성경의 노래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에 대해서 나중에 다시 상세히 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 이제 지금 요나는 물고기 배 속에 있습니다. 이것은 어떤 상황일까요? 제가 여러분과 함께 이와 같은 것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요. 이것을 다시 한 번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말씀드리길 원합니다. 이 땅에서 주일 학교 선생만큼 중요한 자리는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저의 주일학교 선생님이셨던 분들을 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그들 중에 어떤 분들은 먼저 소천하신 분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분을 기억하고 정말 존경하는 마음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때때로 그 주일 학교 선생님들이 그림을 잘못 그릴 때가 있습니다. 단지 선생님일 뿐만 아니라 이제 주일 학교 학생들을 위한 그런 그림 성경책이 잘못된 그림을 우리에게 제시할 때가 있습니다. 저는 요나가 그 물고기 뱃속에서 아주 편안하게 있었다라고 생각하면서 자랐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저는 아주 깜짝 놀라면서 그 실제를 깨달았던 것입니다. 저는 그전에는 요나가 물고기 배 속에서 의자에 편안하게 앉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 성경책에는 요나는 심지어 테이블도 그 앞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램프도 있었고요. 그런데 거기에는 그래도 차를 마시는 그림은 아니었습니다. 요나가 어디서 의자를 얻었겠습니까? 요나가 어디서 그 상을 얻었겠습니까? 어디서 그 램프가 났던 것입니까? 그래서 사실 그것은 요나가 실제로 경험한 그러한 실제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 그림은 지금 우리가 모인 이 공간과 같이 아주 넓은 공간이었는데요. 그리고 그 한가운데 요나가 있습니다. 아주 편안하게 앉아 있는 그림이었습니다. 하지만 실제는 전혀 그와 다릅니다. 실제로는 요나가 그 물고기 뱃속에서 지금 요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서는 완전히 젖어버리는 그런 상황입니다. 거기는 아주 넓은 공간도 없습니다. 아주 냄새가 나고요. 아주 어둡고, 그 고래가 트름하는 것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고래가 또 뭘 먹는 거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은 아주 좁은 그런 공간이었습니다. 거기엔 많은 산소도 없습니다. 아주 그냥 호흡하기가 어려운 순간입니다. 아주 끔찍한 그런 장소입니다. 그래서 거기서 고난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하나님께서 그를 위한 구원의 방편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이 예비하신 큰 물고기였습니다.우리는 1장 마지막 구절에서 요나가 3일 3야를 물고기 배에 있었다라고 기록을 봅니다. 이 물고기에서 3일 밤 3일 야를 지낸다는 것은 과연 어떠한 것일까요? 이것은 아주 끔찍한 경험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또한 그를 위한 하나님의 구원이었습니다. 제가 목포에 있을 때에 우리는 특별히 이 3일 밤, 3일 낮이라는 표현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또한 마태복음 12장에 나와 있는 그 표현입니다. "요나가 삼일 밤낮을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처럼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속에 있으리라" 제가 목포에서 말씀드린 것을 다시 반복드리지는 않겠습니다만, 주님께서 금요일날 죽으셨다는 것만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목요일에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다고 말합니다. 어떤 이상한 그리스도인들은 또한 수요일에 다니셨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또 목요일이거나 저처럼 또 금요일에 달렸다고 합니다. 여러분께서 어떻게 생각하시든지 간에, 그런데 어쨌든 그것을 이제 밤낮 사흘이라고 표현하고 계십니다. 금요일에 주님께서 죽으셨다면 그 부활하신 것이 3일 밤 3일 낮이 안 되는데요? 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3일 낮이고 그리고 밤은 단지 2밤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목요일에 죽으셨어야 된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분들은 한 가지 사실을 놓치고 있습니다. 목요일에 죽으셨다면 역시 또 사흘 밤낮이 안 됩니다. 그래서 낮이 4번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 가지고 어느 날에 죽으셨다고 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신약 성경에서 그분께서 사흘 만에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오직 그 요나의 사건을 인용하신 부분에서만 밤낮 사흘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밤낮 사흘을 어떻게 계산해야 됩니까? 제가 빠르게 말씀을 드리자면 이 밤낮 사흘이라는 것은 유대인의 특별한 표현입니다. 그것은 문자적으로 그 사흘 낮과 사흘 밤을 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주일 새벽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그것 가지고 그 세 개의 밤이 되진 않습니다. 하지만 이 사흘 밤낮이라는 것은 유대인의 표현에 있어서 하나님의 목적이 다 이루어지는 기간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 기간이 이제 온전히 다 회전되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계획이 완전히 이루어지는 때가 밤낮 사흘이라는 표현입니다. 우리는 에스더서에서 그가 사람들에게 왕을 만나러 가기 전에 기도를 요청하는 것을 봅니다. 에스더는 사람들에게 이제 사흘 밤낮을 기도해 달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 기간이 다 채워지지 않고 사흘째 되는 날 그는 왕을 만들어 갑니다. 그래서 거기서도 이 밤낮 사흘은, 에스더서에서 이 정해진 목적을 다 완수하는 기간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 사흘이 다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흘째 그는 왕을 만나러 나아갑니다. 마찬가지로 주님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바로 금요일 유월절에 주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십니다. 그리고 이제 사흘째 되는 그 주일에 주님께서는 부활하십니다.
우리는 나중에 하나님께서 니느웨의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봅니다. 이것은 단지 요나와 그와 관련된 경험일 뿐만 아니라, 요나는 그들에게 있어서 특별히 그 부활의 표적이 됩니다. 이제 사람들은 항상 표적을 구합니다. 그리고 이제 유대인들이 주님께 그 표적을 요청했을 때 요나의 표적 외에는 너희에게 보일 것이 없다고 하십니다.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신 의미는 이것입니다. 성경 자체가 충분한 증거다. 바로 이 성경이 너희가 원하는 표적이다. 요나가 경험한 그 표적 그것이 너희들이 알아야 되는 전부다.
특별히 여기 있는 젊은 성도님들께서 이제 그 은사주의 운동에 대해서 잘 알기를 바랍니다. 그들은 많은 기적적인 은사를 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초자연적인 은사를 더 이상 추구하지 않습니다. 그 미래를 예언하는 그 선지적인 예언을, 그 은사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우리 가운데 방언의 은사를 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두 표적의 의사입니다. 그것은 사도 시대 때 있었던 은사들입니다. 하지만 더 이상 우리는 그것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완성된 성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완성된 시기에 살고 있습니다. 사도 시대 때는 그런 의사들이 필요했기 때문에 주어졌던 것입니다. 이제는 성경이 완성됐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될 모든 것들이 벌써 이 성경에 기록되어 완성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유대인들에게 주님께서는 표적을 주지 않겠다라고 거절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정말로 강한 그 증거는 바로 이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입니다. 바로 이것보다 더 놀라운 기적은 없는 것입니다. 이것보다 더 놀라운 표적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께서 죽으시고 그리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이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이, 바로 이 복음이 우리가 믿을 수 있다는 그 신뢰의 증거입니다. 만약에 그리스도의 부활을 우리가 증가할 수 없다면 이 성경도 마찬가지로 그걸 증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그리스도의 부활이 분명하기 때문에 참으로 이 성경이 분명하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는 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이 참된 것이라는 것을 증거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가장 큰 표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보다 더 확실한 예언이 있다고 말씀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바로 우리 손에 든 이 성경이 그 증거입니다. 그들은 표적을 구하였고 이제 그런 자들에게 나를 보라고 주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불신을 책망하십니다. 그리고 사실 간접적으로 요나도 그가 불순종한 것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니느웨 사람들의 믿음을 칭찬하신 것입니다. 그 니느웨 사람들은 어떻게 그 하나님 말씀에 금방 반응해서 믿었습니까? 그 요나의 전도에 그들은 즉시로 반응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유대인들을 봐라. 너희들이 가지고 있는 그런 많은 유산과 그런 말씀에도 불구하고, 그 구약의 많은 부분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너희들은 아직도 불신 가운데 있다. 이제 다른 표적들을 구하고 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을 겁니다. 그래서 이 니느웨 사람들이 너희들을 책망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이 니느웨 사람들은 이 구약 성경에서 이제 유명한 사람들로 칭찬을 받습니다.
우리는 이제 이 3장과 또 2장을 말씀을 드리고 있는데요. 우리는 이 3장에 나와 있는 사람들과 이 요나와 대조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드린 대로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께 응답하였습니다. 배가 응답하였고, 그리고 제비가 다리가 달려서 응답하였습니다. 그리고 폭풍과 바다가 걸어가서 흉흉하였습니다. 그리고 선원들은 믿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큰 물고기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움직였습니다. 그리고 니느웨 성읍 사람들이 얼마나 그 하나님 말씀에 빠르게 반응하였습니까? 그리고 2장 마지막 절에,
"여호와께서 그 물고기에게 명하시매 요나를 육지에 토하니라"(욘 2:10).
그래서 주님께서 물고기에게 말씀하시고, 처음에는 여호와께서 요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요나는 도망쳤습니다. 그리고 이제 여호와께서 물고기에게 말씀하셨을 때 물고기는 순종합니다. 나귀가 순종하였고 물고기가 순종합니다. 이제 저는 어떻게 물고기가 요나를 토해냈을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이제 큰 고래가 육지로 다가와서 이제 그를 뱉어냅니다. 이제 요나가 거기서 나옵니다. 여러 가지 참치와 다른 것들이 함께 나왔겠죠. 아주 흠뻑 젖어서 냄새가 나는 대로 나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물고기가 요나를 어디에 토해냈습니까? 큰 물고기가 목포에 그 선착장으로 와서 그 어 시장에 토했을까요? 또는 말레이시아에 있는 크렌 항구에 가서 거기에 요나를 토해냈을까요? 그게 아니고 그 물고기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 딱 그 장소에 요나를 토해냅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싫어요. 저는 다시스로 갈 거예요." 하나님께서 물고기에게 니느웨로 가라고 했었을 때 그리고 그 물고기는 그대로 니느웨로 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이때에 요나를 그 해안가에 토해냈습니다. 그리고 이제 요나는 둘러봅니다. "엇, 니느웨잖아." 여러분이 가고 싶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거기에 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성취되는 그 날은 항상 오는 것입니다.
이제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 요나에게 임합니다. 여러분께서 이제 돌아가셔서 여러분 스스로 이것을 한번 조사해 보시길 바랍니다. 이제 성경에서 "두 번째"라고 기록된 부분입니다. 두 번째라는 것은 이제 두 번째 주시는 기회죠.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두 번째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그 두 번째 기회를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두 번째 기회를 주시지 않았다면 여러분과 저는 이 자리에 없을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이 두 번의 기회보다 더 많은 기회를 우리에게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490번의 기회를 주십니다. 그리고 또는 70번의 기회를 7번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7년의 그 안식년을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하지 않았고 그들은 결코 그 안식년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 70번에 걸쳐서 그 7년의 안식년은 지켜지지 않은 것입니다. 그 70회에 걸쳐서 그들은 총 490년 동안 그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유대를 바벨론에 포로되게 하신 이유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이방 땅에서 그들이 지키지 않은 그 7년째 안식일을 70번 안 지킨 것을 70년 동안 포로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70번의 기회를 주셨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이제 요나에게 있어서는 두 번째 기회입니다.
이제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합니다.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라. 그리고 저 큰 성읍에서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그래서 하나님의 명령은 처음과 동일했습니다. 바뀌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이 시간에 따라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이지 않습니까? 단순하고 그리고 직접적입니다. 그리고 항상 동일합니다. "일어나서 가라." 그래서 이번에는 요나가 3절에 일어납니다. 그리고 니느웨로 갑니다. 제가 이 단어를 앞에서 말씀드렸죠. 그리고 바다가 갔고요. 그때는 요나가 가지 않았을 때입니다. 이때는 요나가 일어나서 니느웨로 갑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말씀대로입니다. 그런데 니느웨는 극히 큰 성읍입니다. 니느웨를 여기서부터 끝까지 가려면 3일 길이 걸립니다. 서울보다 더 큰 것입니다. 서울에서 이 처음부터 끝까지는 어느 정도 길이가 됩니까? 3시간 정도 걸릴지 모르겠는데요. 하여튼 니느웨처럼 삼일 길은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 나와 있는 것처럼 3일 길입니다. 여기 4절에, 요나가 그 성에 들어가며 하룻길을 행합니다.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외칩니다. 그리고 5절에 니네의 백성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무론대소하고 굵은 베를 입습니다. 여기서 기록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습니까? 그것은 모든 도시를 다 도는 데 3일 길이 걸리는 것이었지만, 그는 이 도시를 3일길을 걸으면서 이 말씀을 선포해야 되는 그런 책임을 받았지만, 그런데 그가 한 전부는 단지 하룻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첫째 날 그가 그 도시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을 때, 그리고 즉시로 그 전체 성읍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한 것입니다. 그는 자기의 여정을 짧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다시 이틀을 더 해야 되는 것을 없애버린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이 니느웨 사람들이 얼마나 빠르게 그 말씀의 회개하였는지를 기록하는 것과 그리고 그 말씀은 그 니느웨 백성들 중에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왕에까지 들린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회개는 왕으로부터 또한 시작합니다. 그들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인도력을 사용해서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돌이킵니다. 그리고 또한 여기 사람들뿐만 아니라 거기 있는 짐승들도 그 베 옷을 입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이 보인 그 회개는 아주 전반적인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성읍의 생명을 살리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에 대해서 요나는 싫어합니다. 이것에 대해서 우리는 4장에서 그의 심리적인 것을 보게 됩니다. 저는 이 요나에 대해서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왜 여기서 요나가 싫어하는지 많은 사람이 궁금해합니다. 하지만 그 성읍의 전체가 다 회개하고 생명을 구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그 하나님의 종에게 가장 큰 보상은 그 복음을 듣고 구원받은 사람들이 아닙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이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게 될 때에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을 듣고 기울이는 사람들이 그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의 큰 보상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바로 그러한 결과를 여기서 보았습니다. 여기에 12만 명이 그 말에 반응한 것입니다. 예, 우리 말로는 12만 명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오순절에 구원받은 사람보다 더 많지 않습니까? 이것은 사도행전 2장에 나와 있는 사람보다 더 많은 수가 아닙니까? 12만 명이 이제 하나님께 돌아와서 생명을 건진 것입니다. 누가 이와 같은 큰 열매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결과를 보고 요나가 아주 싫어한 것입니다.
이 가운데 있는 형제님들께서 이제 다른 나라의 멀리까지 가셔서 복음을 전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참으로 그런 분들에게 참 안부와 또한 기도를 하게 됩니다. 참으로 이 복음 사역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참으로 이 모임이 이 복음의 씨앗을 뿌리게 될 때, 이것은 우리가 피하지 못할 어떤 한 상황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복음 전도하는 일을 멈출 때에 이 모임의 간증이 점점 희미해져 가는 것을 우리는 피할 길이 없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그래서 특별히 격려를 하는 것입니다. 매주마다 복음집회를 해야 됩니다. 그것은 멈추지 말아야 됩니다. 그리고 주일 학교도 계속해서 해야 됩니다. 이것은 복음 사역에 있어서 가장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많은 모임들이 슬프게도 이제 더 이상 복음집회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 복음집회를 또는 한 달에 한 번씩 하는 것으로 줄이기도 합니다. 이 아이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잘 모르고 배우지 못하고 자랍니다. 그러면 이제 그 모임의 간증을 지켜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분명히 한 가지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모임은 반드시 그 수가 적어지고 적어져 갈 것입니다. 이 복음 사역을 결코 등한히 여기지 않길 바랍니다. "아유, 많이 오지도 않는데요." 거기에 불신자가 한 명이라고 없다고 할지라도 여러분께서는 충성스럽게 그 복음집회를 하셔야 됩니다. 그리고 그때 이제 신자들은 여러 영혼들을 초청해서 데려오는 데 열심을 낼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의 개인적인 접촉을 통해서, 그리고 복음 전도지를 돌리는 것을 통해서,
제가 미국에서 대학교 공부를 하였는데요. 그때 이제 주일 밤마다 복음집회가 있었습니다. 제가 아주 존경하는 분이 거기에 계십니다. 그때 저는 학생이었습니다. 그리고 때때로 이제 복음 집회가 시작되기 전 오후 시간을 그분의 집에 가서 보냈습니다. 그리고 제가 여기 앉았고 그분이 이제 맞은편에 앉아서, 그리고 이제 의자에 앉아 있죠. 그리고 옆에 전화가 있습니다. 주일 오후에는 그분은 이제 전화번호부를 펴고, 그때는 이제 핸드폰이 없는 시기입니다. 그래서 이 전화번호부에 이름과 그 전화번호가 적혀 있죠. 그래서 그 주일 오후 몇 시간을 전화를 들고 "여기 찬 씨, 여기 한번 복음 집에 오십시오. 안 된다고요? 정말 왔으면 좋겠는데." 그 다음에 "기드온, 여기 복음 집에 한번 와." 그 명단을 쭉 계속 전하는 겁니다. 어떤 사람도 오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오기도 합니다. 그리고 매주 오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 일을 매주 하는 그 사람의 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 잃어버린 영혼들에 대한 마음입니다.
이 복음을 계속 전하길 바랍니다. 그렇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그 대가를 모임이 치르게 될 것입니다. 그 수가 줄어들고 점점 그 모임이 희미해지는 간증을 낼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우리는 또한 이 복음 전도의 실질적인 교훈을 받게 됩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일어나서 가라고 말씀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 복음을 위한 부름에 응답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이러한 부름에 여러분 응답하고 있습니까? 이 복음 집회에 내가 마지막으로 친구를 데려온 적은 언제입니까? 내가 어떤 기여를 해서 어떤 사람이 구원받은 마지막 때가 언제입니까? 저는 이것을 저에게도 질문해봅니다. 여러분께서 이제 핸드폰을 들고, 여기에 500명의 연락처가 아마 있을지도 모릅니다. 여러분께서 여러분의 페이스북에 갔을 때, 그 어떤 사람들은 2천 명이나 되는 그 페이스북 친구를 가지고 있는데 어떻게 그렇게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수년간 한다고 해도 3천 명이 안 될 것 같습니다. 여러분께서 2천 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참으로 이 가운데서 여러분이 하실 수 있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500명의 연락처를 알고 있다면, 여러분의 또한 친척들은 어떻습니까? 여러분께서 사랑하는 분들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부모들은 어떻습니까? 여러분께서 밖에서 아주 친하게 지내는 친구들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이제 어떤 그룹이라고 부를 만한 그런 친구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그룹들을 단지 우리의 사업을 위해서만 사용합니다. 하지만 그중에서 어느 누구도 복음 집회에 데려오지는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일어나서, 가서 전화를 거라는 그런 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 땅 끝까지, 멀리까지 가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 지구상의 가장 남쪽 끝까지 가보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친구들을 이와 같은 집회에 데려오는 걸 초청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어나서 가라고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이 복음 사역을 하는 것은 놀라운 사역입니다. 그리고 이 영혼이 구원받은 것을 보는 것은 놀라운 축복입니다. 그리고 이 니느웨에서 일어난 일을 보시기 바랍니다. 참으로 그 복음 전도자에게 얼마나 큰 상급이고 기쁨이겠습니까?
우리는 이제 2장을 보게 될 때, 왜냐하면 우리는 2장과 4장을 동시에 보고자 합니다. 요나가 바다로 던져졌을 때에 그는 무엇을 하였습니까? 기도하였습니다. 그것이 2장 1절이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욘 2:1).
그것이 바로 그가 머릿속에서 떠올랐던 생각들이 그다음에 나와 있는 것이고 이것이 종이에 펜으로 적은 것은 아닙니다. 그는 그 깊은 곳으로 가라앉아 가면서 이 생각을 하였던 것입니다. "나는 산의 뿌리를 보았고 그리고 바다 풀이 내 머리를 쌌나이다. 하지만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또한 7절이 놀라운 것을 말합니다.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삽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욘 2:7).
우리가 어려움 가운데 있을 때에, 우리가 깊음 가운데 빠져갈 때에, 우리가 아주 절망적인 그 순간을 맞닥뜨렸을 때, 이것은 삶과 죽음의 그 절체적인 상황일 때, 여러분이 병에 들었을 때, 여러분의 사업가 또는 직장에서 실직하였을 때, 그것이 어떠한 문제든지 간에, 우리가 해야 될 첫 번째 일은 무엇입니까? 이 세상의 사람들은 그런 상황에서 첫 번째 하는 것은 이제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속한 우리가 하는 첫 번째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그분께 요청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나는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삽더니" 여러분께서는 얼마나 많은 그 어려움을 통과해 오셨습니까?
여기 이 가운데 많은 이제 공학도들, 또한 이제 이과생들이 있을 것입니다. 저도 이제 그러한 이제 공학도였습니다. 물론 이제 배운 것을 많이 잊어버렸습니다. 하지만 제가 기억하고 있는 것, 한 가지가 이것입니다. 그 빛의 속도가 우주에서 가장 빠른 최고의 속도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이제 '광년'이라는 단위를 사용합니다. 광년이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여기서 이제 과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이 이 광년이 뭘 말하는지 아실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광년이라는 것은 그 시간을 측정하는 단위 아닙니까? 여러분이 시험에서 그렇게 대답한다면 틀린 답이다, 할 것입니다. 이 광년이라는 것은 시간을 측정하는 것이 아니라 거리를 측정하는 단위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10광년, 10광년이라는 것은 빛의 속도로 이동하는 우주선을 타고 이동했을 때에 10년이 걸려야 가는 거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과학자들은 천광년이라는 것을 말하기도 합니다. 이 천광년이나 되는 거리를 이제 그것을 이동해야 된다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이 천광년이 떨어져 있는 그 거리는 우리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 거리이겠습니까? 이제 이중에 몇 분 성도님들께서는 며칠 전에 우주 천문관을 방문하였습니다. 이제 대전에 있던 그런 과학관이었습니다. 이 중에서 어떤 분들은 거기에 아예 가보시지 않은 분들도 있을 건데요. 한국 사람들이 아직 가지 못한 곳을 말레이시아 사람들이 가보았습니다. 사실 세상에서 이런 일이 많이 발생합니다. 거기서 이제 한 다큐멘터리를 보았습니다. 참으로 그 큰 우주 가운데서 이 지구가 얼마나 작은지를 우리는 체감할 수 있었습니다. 이 태양계를 벗어나는 데만 해도 그렇게 빠른 속도로 가도 수많은 시간이 수년이 걸립니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이 각 은하가 얼마나 큰지 정말로 의아해합니다. 수천 년의 광년으로 가도 이제 그 은하수의 끝자락만 겨우 도달할 뿐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넘어서서 그 우주의 끝에 가는 것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거리는 우리가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빛의 속도보다 더 빠르게 운동하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렇게 제가 말한다면 당신은 무슨 물리학을 배운 겁니까? 말할 것입니다. 금방 빛의 속도보다 더 빠르게 운동하는 것은 없다고 했는데요. 하지만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기도가 그 빛보다 더 빠르게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외칠 때에, 우리의 그 말이 즉시로 그 하늘에 있는 보좌 앞에 다른 것입니다. 즉각적으로, 어떤 것보다 더 빠르게 움직입니다. 여러분의 그 기도가 얼마나 빠르게 움직이는지 여러분은 실감을 하실 것입니다. 요나는 그 바다의 깊은 곳에 있었습니다. 그는 이제 고래의 뱃속에 있었습니다. 그는 이제 그 깊은 가운데 있다고 그가 말하고 있습니다. 누구도 그 요나의 소리를 들을 수 없는 그런 위치입니다. 하지만 여호와께서 그를 들으신 것입니다. 7절에서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 바로 그 바다의 깊음 가운데서 그 기도가 즉각적으로 예루살렘에, 그 거룩한 성전에 임한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얼마나 놀라운 것입니까? 여호와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바로 이 기도가 즉각적으로 은혜의 보좌에 다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와 같이 기도할 수 있습니다. 어떠한 어려움 가운데서 도움을 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합니다. 바로 기도가 이 우주상에서 어떤 것보다도 더 빠르게 움직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그리고 물고기를 예비하셔서 그를 삼키게 하십니다. 그리고 이제 요나는 하나님에 대한 감사를 표합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어려운 가운데 있을 때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게 될 때가 있습니다.
요나가 이 어려움 가운데 있을 때에 이렇게 기도한 것은 또 이제 한 가지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상황 가운데서 이제 또 요나는 새로운 문제에 다다르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이제 4장에서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 그때 요나가 또 기도합니다. 2장에 나와 있는 기도와는 또 완전히 다른 것을 보게 됩니다. 2장에서는 그의 기도는 영적인 것이었습니다. 그의 기도는 하나님의 보좌에 다달았습니다. 그의 기도는 하나님에게 있어서 응답되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볼 때 요나는 이제 영적이고 경건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제 이 요나가 두 번째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두 번의 기회를 주셨는데, 이 두 번째 기회는 그에게 더 좋은 두 번째 기도가 나와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두 번째 기회는 그에게 있어서 끔찍한 두 번째 기도가 나오게 됩니다.
이제 요나는 그가 전도한 12만 명이 구원받은 것을 보았습니다. 왕으로부터 그냥 평범한 백성들까지 말입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여러분은 당장 이제 본국으로 12만 명이 구원받았습니다, 보고를 보낼 것입니다. 이것은 하늘에도 이제 기록적인 그런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요나의 반응은 굉장히 놀라운 것입니다. 집회 끝난 다음에 요나가 왜 이렇게 했는지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을 저에게도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몇 가지 가능성을 이제 제시해 드리겠습니다. 이 니느웨는 그 시리아의 제국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시리아는 점점 더 강력한 나라를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시리아는 이미 이스라엘에게 위협이 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니느웨에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을 때, 요나는 생각하기에 아니 왜 하나님께서 우리의 대적이 될 수 있는 나라에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하실까? 이것이 이제 한 가지 가능성이죠. 때때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합니다. 우리가 그것을 이해한다는 것은 굉장히 놀라운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해서 우리가 온전히 이해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시점에는, 우리가 그 모든 것을 다 함께 생각해낼 수 없을 때는, 아니 왜 하나님께서는 내 나라에, 위협이 되는 그 나라에 복음을 전하라고 하실까라고 할 때, 그는 다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걸 잘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해할 것을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물론 이해한다면 그것은 아주 좋은 것입니다. 하지만 먼저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도 항상 사실인 것입니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다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해하지 못한 때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순종을 구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순종할 때에, 하나님의 말씀에, 그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동할 때에, 그리고 자주 우리는 그렇게 행동한 후에 나중에 뒤돌아보면서 그 뜻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래서 한 가지 더 가능성을 이렇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이 이유로 요나를 니느웨에 보냈다고 생각합니다. 그 모든 성읍의 사람들이 회개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 가운데서 이렇게 행하신 것입니다. 이제 이 시리아는 결국에 그 북쪽 열 지파를 다 멸절하는 나라가 됩니다. 하지만 이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위해서 시간을 벌고 계시는 것입니다. 니느웨가 이 시점에 회개하지 않았다면, 이 열 지파는 그것보다 더 먼저 사라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요나에게 하나님께서 하길 원했던 것은 이스라엘에게 회개할 시간을 더 주신 것입니다. 바로 그 때가 오기 시작 전까지, 이제 시리아가 와가지고 그들을 다 없애버리기 전까지, 요나는 그렇게 했습니다. 참 그 순간에는 요나는 자기가 이것을 해서 이스라엘의 많은 백성의 수를 또한 구했다는 것을 몰랐지만 말입니다. 어떤 이유든지 간에 우리는 이것을 아주 교조적으로 말씀드리지는 않습니다마는, 가장 중요한 부분은 바로 이 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때라도 나의 책임은 그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순종할 때에, 그리고 보통 시간이 흐름에 따라 하나님께서 그것을 결국에는 이해하도록 하십니다.
여기서 이 요나는 이 일에 대해서 아주 싫어합니다. 그리고 이제 기도할 때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욘 4:2).
그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인애가 크시고 노하기를 더디 하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는 실제적으로 그래서 하나님의 그 은혜와 자비에 대해서 불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인애가 크신 그 하나님에 대해서 불평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선지자는 바로 그가 그런 하나님의 자비를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바로 그에게 하나님의 자비가 임했다는 것을 그는 잊어먹고 있는 것입니다. 그 깊은 바다 가운데서 하나님이 그를 구원하셨다는 것을 그는 금방 잊어먹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도망간 그런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은혜를 베푸신 것을 잊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그를 구해내셨는데도 말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사실상 요나는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에게는 은혜로우실 수 있지만, 니느웨 같은 다른 사람에게는 은혜로우시면 안 된다." 그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 아주 꼬여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우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은혜롭게 대해야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오래 참으시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서로 사랑하는, 그런 말씀을 배우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나는 이 가운데서 스스로 죽기를 원합니다. 이것을 연극적으로 과장된 표현인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어떤 사람들은 굉장히 말할 때에 이제 과장해서 말하죠. 여러 이제 작은 문제인데도 말입니다. "아유~ 죽겠네!" 하고 말합니다. 이제 조금 해가 따가워도 "나 이거 너무 뜨거워 죽겠네!!"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이 요나가 그런 사람일지 모르겠습니다마는 그 요나는 아 죽는 게 낫겠다라고 말합니다. "제 목숨을 취하십시오. 더 이상 살기 원하지 않습니다!" 이건 마치 그냥 어린 아이들이 그냥 응석을 부리는 모습과 같지 않습니까?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만약에 주님께서 내 삶을 취하신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여러분께서 이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저에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께서 이제 여러분의 우리 가운데 쓴 것에 대해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것은 악을 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근데 그런 쓴 태도를 가질 때가 있습니다. 다른 동료 신자들에게, 그리고 우리의 다른 인생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루시는 여러 가지 일들 가운데서, 여기에 그 요나의 마음속에 있는 쓴 것을 보게 됩니다. 요나는 왜 하나님이 이 가치 없는 니느웨 사람들을 구원하시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마치 엘리아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엘리아는 말하기를 "이 이세벨이 내 목숨을 찾고 있나이다. 나는 그 하늘에서 불을 내려서 이런 일을 했는데, 그 바알의 선지자들을 다 물리쳤는데, 하나님의 백성들을 다시 돌이켰는데, 그런데 하나님께서 왜 이세벨이 다시 내 목숨을 찾는 데에 허락하신 것입니까? 주님 제 목숨을 그냥 가져가십시오. 저는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것을 때때로 주의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엘리야의 소원을 들어주십니다. 그리고 이제 엘리사를 보내서 그의 자리를 대체하게 합니다. 이 요나도 더 이상 살기 원치 않습니다, 말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4절에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네가 왜 화를 내고 있느냐 요나는 이것에 대해서 대답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요나는 성에서 나가서 그 성편 동편에 앉습니다.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습니다. 그리고 그 그늘 아래에 앉아서, 그 니느웨에 이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지켜보고 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이러한 요나가 지금 어떠한 가운데 있는지를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텐트에 앉아 있고 이렇게 팔짱 끼고 보고 있는 것입니다. "니느웨가 어떻게 되는지 한번 보겠어. 내가 얼마나 시간 낭비했는지, 아니 왜 하나님이 여기를 보내신 거야? 니느웨가 이거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에게 말이야." 거긴 그렇게 앉아서, 그런데 이제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서 뭔가를 하십니다. 6절에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넝쿨을 준비하사 요나 위에 가리우게 하셨으니" 그는 이제 텐트가 있었죠. 그것은 한국의 서울처럼, 지금처럼 아주 더웠습니다. 그런데 여러분께서는 저에게 자주 이렇게 물어봅니다. "형제님에게도 덥나요?" 여름이 얼마나 긴가요? 이제 한 번만 대답하고 다시는 안 하겠습니다. 저의 여름은 12달입니다. 겨울이 없습니다. 봄도 없고요. 겨울, 가을도 없습니다. 그리고 모든 해가 전부 여름입니다. 그리고 모든 날이 33도입니다. 멋진 나라죠, 덥습니다. 그런데 때때로 이 서울이 더 더운 것 같습니다. 여러분의 그 더움은 조금 다릅니다. 오분 안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시간은 여러분보다 더 더운 기후입니다. 이제 요나가 이 텐트 안에 있고요. 그리고 그 뜨거운 열기 가운데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에게 좋은 일을 해 주십니다. 이제 하룻밤 사이에 어떤 나무가 자라게 하신 것입니다. 여기에 박넝쿨이라고 되어 있는데요. 여기서 이 박넝쿨이 사실 뭔지 사람들이 궁금해합니다. 어쨌든 그것은 아주 큰 나무고 그에게 그늘을 제공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휴식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가 지금 쓴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가 지금 화를 내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제 그 그늘을 만들어주시고 잠시 쉴 수 있도록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처음으로 요나가 기뻐한 게 나옵니다. 그리고 심히 기뻐하였다라고 합니다. 이 아주 쓴 것을, 아주 화를 내는 선지자가 처음으로 기뻐하게 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불평만 했던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 그늘을 얻게 되자 그가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다음에 하나님께서 벌레를 보내십니다. "하나님이 벌레를 준비하사" 처음에는 박넝쿨를 준비했고 이제는 벌레를 준비하십니다. 그 박넝쿨이 하룻밤 사이에 자랐습니다. 이것은 아주 기적적으로 자란 것이죠. 그리고 이제 벌레가 옵니다. 제가 이제 작년에 이 한국에 왔을 때에, 제가 이것을 녹음하고 있어서 말을 조심해서 해야 되는데요. 제가 목포에 있었을 때입니다. 거기서 여러 종류의 음식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모두 저를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식탁에 놓은 것마다 다 먹으니까 사람들이 놀라서 저를 쳐다보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제 작년에 목포에 갔을 때, 그 상에 여러 가지 것을 놓아주셨는데 아주 이상한 것이 있었습니다. 여기에 작은 그릇에 벌레가 담겨 있었습니다. 제가 그것을 보고, 그 벌레도 저를 보고 있었습니다. 형제님들이 "먹어요, 먹어요." 했죠. 한국 사람들은 제가 그 벌레를 먹는 것을 보기 위해서 아주 흥분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통역사 형제님이 "먹으라고 하네요."라고 통역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제 인생 가운데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누가 젓가락을 들고 그 벌레를 먹는지를 관찰하였는데, 제가 조금 기다리면서, 좀 더 기다리면서, 계속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누구도 그 벌레를 드신 분이 없었습니다. 저도 벌레를 먹지 않았습니다. 한국 사람들도 그 벌레를 먹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이 제가 그 벌레를 먹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누구도 벌레를 먹지 않았는데도 말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벌레가 여기 나와 있습니다. 이 벌레는 우리가 먹으라고 준비된 것이 아닙니다. 이 벌레는 다른 것을 먹으려고 준비된 것입니다. 그는 그 박넝쿨 전체를 먹어버렸습니다. 이건 무슨 벌레입니까? 이 박넝쿨은 요나에게 그늘을 주었고, 아주 큰 나무였을 것입니다. 기적적으로 그 하룻밤 사이에 박넝쿨이 자란 것입니다. 그런데 그 벌레가 그 큰 나무를 먹는 것도 또한 기적입니다. 이것은 이제 슈퍼벌레입니다. 아주 그냥 상어 같은 이빨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다. 나무를 그렇게 먹어 치운 것입니다. 그래서 이튿날 요나는 나무가 사라져버린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나무가 시들어버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제 다른 것을 준비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박넝쿨과 벌레를 보내셨고, 하나님께서는 이제 다시 바람을 보내십니다. 그것은 동풍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해가 떴는데 한국의 해처럼 강력한 해가 떴습니다. 제가 요나가 대머리였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그가 대머리였으면 더 안 좋은 상황이었겠죠. 뜨거운 빛이 요나의 머리를 쬐었습니다. 그리고 요나는 이제 정신이 혼미하였습니다. 이제 요나는 다시 과장해서 말합니다. 이제 "사는 것보다 죽는 게 낫겠다. 이제 사는 게 난 싫다." 이제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다시 그 성내는 것이 합당하냐? "그 박넝쿨로 인해서 네가 성내는 것이 합당하냐?" 하나님께서는 다시 한 번 두 번째로 이 성내는 것이 합당하냐라고 물으십니다. 그리고 요나가 대답합니다. 요나가 그렇다라고, 합당하다라고 말합니다. 성내는 것이 합당하다라고 말합니다. 이 성내는 게 지금 잘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는 죽는 것까지 이렇게 말해 버립니다. 참 요나는, 이런 사랑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이제 마침내 마지막으로 말씀하십니다. "너는 그 박넝쿨에 많은 걸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박넝쿨을 네가 아꼈다. 네가 그것을 심는 데 노력도 기울이지 않은 것이다. 그냥 하룻밤 사이에 그 위에 자란 것이다. 네가 어떤 수고도 하지 않고, 심지도 않고, 기르지도 않은 것이다. 그런데 하룻밤 사이에 시들었고, 그런데 내가 그것을 준 것을 취하였다고 너는 왜 그렇게 화를 내고 있느냐? 그렇다면 니느웨에 있는 그 12만 명의 사람들은 무엇이냐? 참으로 너의 그 자아가 느끼고 있는 그럼 분노의 가치가 없는 그 12만 명의 생명이냐? 그 큰 성읍의 니느웨 사람들을 구하지 말아야 되냐? 그 가운데 있는 많은 남녀와 많은 짐승들을 그냥 버리는 것이 맞냐?" 참으로 요나에게 있어서는 우선순위가 잘못되어 있습니다.
이제 집회 끝난 후에 저한테 와서 이 요나가 어떤 사람인지 한번 설명해 보시기 바랍니다. 참으로 이것은 사실 근데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도 아주 이 세상의 사소한 것들에 너무나 집착돼서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그 큰 그림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있어서 더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하는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아주 작은 사소한 다툼에, "아유, 왜 이렇게 생겼어라고 말해가지고 나는 그 하고 더 이상 말하지 않겠어." "저 사람이 만드는 김치가 더 잘 만드는데"라고 말했다고, "내가 앉을 의자에 네가 앉았어." 아주 그냥 작은 것들, 단지 우리를 그냥 사로잡아가 버리는 작은 것들, 그냥 요나의 그 박넝쿨, 그냥 그늘, 조금 편안하게 지내는 것, 그런 것에 사로잡혀서 정말로 중요한 것을 완전히 놓쳐버리고 있는 요나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의자와 상에 집착합니다. 그리고 음식에 집착합니다. 물론 그것은 필요하고 중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것이든지 간에 이 물질적인 것들은 이 영적인 것들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가장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것에 순종하는 것은 또한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복음이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마음속에 있는 그 모든 중요한 것들입니다. 이제 우리의 우선순위를 그분의 우선순위와 일치되게 해야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주실 수가 있고,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취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박넝쿨를 주시고, 그리고 그 박넝쿨를 취하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인생에 있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에 우리의 마음을 두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더 주실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적게 주실 때도 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우리의 마음은 항상 그분에게 중요한 것에 초점을 취하고 있어야 됩니다.
정확하게 4시 반입니다.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축복해 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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