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봉래 형제님/느헤미야

느헤미야 6장 : 인도자를 향한 원수의 세가지 공격

박이레 2024. 10. 4. 15:38

< 느헤미야 6장 : 인도자를 향한 원수의 세가지 공격 > 한봉래 형제님

이 시간에는 제가 계속 느헤미야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느헤미야 6장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말씀을 먼저 읽어보겠습니다. 구약 성경 느헤미야 6장 1절부터 16절까지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산발랏과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 게셈과 그 나머지 우리의 대적이 내가 성을 건축하여 그 퇴락한 곳을 남기지 아니하였다 함을 들었는데 내가 아직 성문에 문짝을 달지 못한 때라 산발랏과 게셈이 내게 보내어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오노 평지 한 촌에서 서로 만나자 하니 실상은 나를 해코자 함이라 내가 곧 저희에게 사자들을 보내어 이르기를 내가 이제 큰 역사를 하니 내려가지 못하겠노라 어찌하여 역사를 떠나 정지하게 하고 너희에게로 내려 가겠느냐 하매 저희가 네번이나 이같이 내게 보내되 나는 여전히 대답하였더니 산발랏이 다섯번째는 그 종자의 손에 봉하지 않은 편지를 들려 내게 보내었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이방 중에도 소문이 있고 가스무도 말하기를 네가 유다 사람들로 더불어 모반하려 하여 성을 건축한다 하나니 네가 그 말과 같이 왕이 되려 하는도다 또 네가 선지자를 세워 예루살렘에서 너를 들어 선전하기를 유다에 왕이 있다 하게 하였으니 이 말이 왕에게 들릴찌라 그런즉 너는 이제 오라 함께 의논하자 하였기로 내가 보내어 저에게 이르기를 너의 말한바 이런 일은 없는 일이요 네 마음에서 지어낸 것이라 하였나니 이는 저희가 다 우리를 두렵게 하고자 하여 말하기를 저희 손이 피곤하여 역사를 정지하고 이루지 못하리라 함이라 이제 내 손을 힘있게 하옵소서 하였노라"(느 6:1-9).

그다음에 이제 10절입니다. 세 번째 사건입니다.

"이 후에 므헤다벨의 손자 들라야의 아들 스마야가 두문불출하기로 내가 그 집에 가니 저가 이르기를 저희가 너를 죽이러 올터이니 우리가 하나님의 전으로 가서 외소 안에 있고 그 문을 닫자 저희가 필연 밤에 와서 너를 죽이리라 하기로 내가 이르기를 나 같은 자가 어찌 도망하며 나 같은 몸이면 누가 외소에 들어가서 생명을 보존하겠느냐 나는 들어가지 않겠노라 하고 깨달은즉 저는 하나님의 보내신바가 아니라 도비야와 산발랏에게 뇌물을 받고 내게 이런 예언을 함이라 저희가 뇌물을 준 까닭은 나를 두렵게 하고 이렇게 함으로 범죄하게 하고 악한 말을 지어 나를 비방하려 함이었느니라 내 하나님이여 도비야와 산발랏과 여선지 노아댜와 그 남은 선지자들 무릇 나를 두렵게 하고자 한 자의 소위를 기억하옵소서 하였노라 성 역사가 오십 이일만에 엘룰월 이십 오일에 끝나매 우리 모든 대적과 사면 이방 사람들이 이를 듣고 다 두려워하여 스스로 낙담하였으니 이는 이 역사를 우리 하나님이 이루신 것을 앎이니라"(느 6:10-16).

아멘. 느헤미야서는 저희들이 다시 이때까지 스토리를 잠깐 보면,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이제 바벨론에서 이제 포로 끝나고 이제 고레스 왕이 돌아가라, 그래서 이제 돌아간 사람들이죠. 돌아간 사람들이 예루살렘 이제 옛날 이스라엘 땅에서 가나안 땅에서 이렇게 살고 있는데, 이들이 어떻게 지내나에 대해서 느헤미야가 늘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첫 번째로 관심이 있어요. 관심을 가지고 있었더니, 동생 하나냐가 마침 예루살렘을 갔다 왔어요. 그래서 그 예루살렘의 어려운 형편을 이야기를 합니다. 성은 훼파돼 있고, 문도 다 불타 있는 그대로다. 느부갓네살이 와서 다 불태워버린 그대로다. 이런 소식을 듣고 느헤미야가 울고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은혜로 아닥사스다왕이 왕에게 이야기를 하니까 "그럼 네가 갔다 와라. 네가 뭘 원하느냐?" "제가 가서 이렇게 성문을 제대로 좀 건설하고 오겠습니다." "얼마나 걸리겠느냐?" 그래서 이제 "얼마 걸리겠습니다." "그리고 뭐가 필요하냐?" 그래서 이제 온 거죠. 이제 와서 거기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우리가 성문을 건설하고 성벽을 지어서 다시는 수치를 당하지 말자." 그래서 이제 함께 이제 막 건설한 게 3장이죠. 그리고 이제 이렇게 저희들이 이제 늘 하는 말이죠.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사단도 일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그 말씀대로 또 주님을 섬기려고 하면 일이 형통한 게 아니고 꼭 방해하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이제 이때, 이와 같은 이제 사단의 방해를 어떻게 느헤미야가 극복하고 6장에 와서 드디어 성을 완성합니다.
우선 하나 보겠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이제 사단도 일한다. 주님을 열심히 섬기고 한마음이 되었을 때 나쁜 일이 생기면 그걸로 실망해서는 안 되고, 오히려 아무 일도 없으면, 사단의 공격이 없으면, 우리가 일하지 않는 겁니다. 이렇게 한번 생각해 봐야 되고요.
그다음에 이제 또 하나 교훈은, 일을 시작하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저 사람들을 불러일으켜서 우리가 말씀을 살펴보고, 말씀대로, 살고 교회를 세워보자. 이때도 굉장히 이것도 굉장히 중요한 일인데요. 보통 이제 이렇게 하죠. 이것을 끝내는 게 더 중요합니다. 시작보다, 시작을 잘한 것보다 마무리를 잘하는 게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이제 이게 마무리 작업입니다. 마무리를 할 ,때 이제 거의 완공되었다라고 할 때 사단의 공격이 또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완수하는 일에도 여러 가지 주의해야 될 일들이 있다는 거죠.

그래서 이제 저희들이 4장, 5장, 6장이 이제 느헤미야가 성벽을 이렇게 건설하는 일을 방해하는 사람들의 방해 작업들이 나와 있는데요. 4장은 이렇게 했죠, 항상 이렇게 했죠. 항상 외부적인 공격이 있습니다. 5장은 내부적인 분열이 있습니다. 그래서 외부의 적이 이제 위협하기도 하고 핍박하기도 하고 이런 일이 있는 거죠. 그거보다 더 어려운 것은 내부적으로 분열을 일으키는 일들이, 성벽을 짓다 보니까 부자들이 있고 가난한 사람이 있고, 또 하필이면 또 기근은 들고 그러니까 가난한 사람들이 빚을 얻고, 부자한테 빚을 얻고, 딸들을 종으로 팔고, 막 이런 문제가 5장에 있었던 거죠. 그래서 이제 4장, 5장은 외부적인 공격, 그다음에 내적인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다음에 6장은 다시 외적인 공격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4장하고 비교해 보면 사단에 대해서 성경이 두 가지를 말합니다. 하나는 "사단이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는다." 베드로전서 5장이죠. 그리고 베드로는 이렇게 말하죠. 우는 사자처럼 이렇게 사단이 공격해 올 때, 삼키려고, 위협하고, 공격할 때 베드로의 해결책입니다. "대적하라 그러면 저가 물러나리라" 이게 이제 해결책입니다. 그래서 이제 적이 굉장히 위협적이고 무서운 것처럼 보여도 우리가 담대하게, 사단은 이미 패배한 적이고 우리 안에 계신 이가 사단보다 더 세상에 있는 보다 더 크다, 라고 하는 담대한 믿음으로 대결하면 이게 해결책이고요. 그다음에 이제 두 번째는 사단이 고린도후서 10장인가요? "사단이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다" 이렇게 돼 있습니다. 사단은 두 가지, 사단이 우리를 돕겠다는 거예요. 우리 편인 것처럼 보여요. 그랬을 때, 이 6장이 그러니까 이제 4장은 베드로전서 5장입니다. 사단이 위협하고, 핍박하고, 공격할 때입니다. 그때 느헤미야가 담대하게 이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음으로 이제 이 대결한 거고요.
그다음에 이제 6장은 사단이 자기를, 이제 느헤미야를 위하는 척합니다. 어떻게 위하는 척했냐면 첫 번째, "오너 평지에서 만나자. 이렇게 만나자. 우리 협상 같이, 이야기 같이 대화하자. 같이 좀 시간을 함께 좀 보내보자." 이렇게 느헤미야를 위하는 척을 합니다. 두 번째는 편지를 보냅니다. 편지를 보내서 "너한테 이런 나쁜 소문이 있는데, 이거 우리 같이 한번 해결해보자." 이게 이제 두 번째고요. 이제 세 번째는 이제 내부 이스라엘 사람을 사용해서 공격하는 거죠. 이스라엘 사람한테 뇌물을 줘서 느헤미야를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네가 느헤미야를 잘 이야기해서 성전 안에 숨어라. 이렇게 이제 세 가지로 이 사단이 우리를 위하는 척합니다. 이제 이렇게 했을 때 이제 느헤미야가 이 세 가지 타협책을 어떻게 방어했는가, 하는 것이 이제 6장의 주된 내용입니다.
우선 하나 보시면 4장과 6장을 다시 한 번 하나만 더 차이를 말씀드려보겠습니다. 4장에서는 이제 산발랏과 도비야, 이런 사람들이 이제 공격을 했는데 이스라엘 전체를 공격합니다. 이스라엘에게 어려움을 주는, 그런데 6장에서는 누구에게 집중하냐면 느헤미야에게 집중합니다. 그래서 하나는 이스라엘 전체를 향한 공격이 있었고, 그다음에 6장에서는 느헤미야를 타겟으로 합니다. 그래서 항상 저희들이 그 인도자들을 위해서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모임을 인도하는 분들이 여러 가지 위험에 노출돼 있는 거죠. 물론 성도들도 마찬가지지만, 또 인도자들을 향한 특별한 공격이 있다. 이렇게 볼 수 있고요. 그런데 인도자들에게는 위협과 공격보다도 어떤 식으로 하냐면 위해주는 척합니다. 인도자들을 자기가 걱정하는 척하는 것입니다. 광명의 천사로, 그래서 인도자들에게, 느헤미야에게 특별히 필요한 게 뭐냐? 분별력입니다. 어떤 사람이 "만나자." 그래요, 만나자. 그래서 좋은 뜻으로 만나자, 오노 평지에서 한번 만나자, 교제하자. 이야기해보자라고 하는 건데, 그의 속 마음은 해치고자 하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를 끌어들여서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제 그랬을 때, 이제 느헤미야에게 참으로 필요한 것은 겉으로 하는 말 아닌, 그의 속 의도를 알아내야 되는 분별력이 필요하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행히 이제 느헤미야가 와서 처음에 시작한 게 아니고 이제 마무리 작업을 할 때, 이때쯤 느헤미야가 분별력을 가지고 행동합니다. 그런 내용이고요.

첫 번째 보겠습니다. 이제 만나자, 오노 평제에서 만나자라고 하는 것은 이런 의도를 갖습니다. 느헤미야는 지금 자기가 총독임에도 불구하고 이 성벽을 건설해야 된다.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고 거기에 문짝을 달아야 된다라고 하는 이 일에 자기도 동참합니다. 총독이라고 특별히 따로 있는 게 아니고 계속 자기도 돌 가지고 이런 일들을 계속하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저희들이 이제 성벽 건설할 때 봤는데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 이렇게 성벽 건설하는데 그중에 단 한 명도 건축에 전문적인 사람이 없습니다. 전부 장사하던 사람, 제사장, 이런 사람들, 이게 평소에는 안 해본 일이에요. 이게 자기 직업이 아니에요. 그런데 지금 다 이렇게 돌을 쌓는 이 일을 하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이 일을 계속하다 보니까 너무 힘이 드는 거죠. 그러고 있는데 제안이 들어온 거예요.
산발랏이, 산발랏은 그 이스라엘 인근에 있는 어떤 민족의 인도자입니다. 그가 이 엘 이스라엘 총독에게 "우리가 만나자." 오너 평지 좋은 곳에서, 평야지대에서 한번 만나자라고 하는 것은 이제 어떤 분은 이걸 이런 식으로 봅니다. '정상회담을 하자' 입니다. 예를 들면, 한미 정상회담을 하자. 예를 들면 이제 새로 대통령이 뽑혀 있고, 여기도 뭐 선거가 있고, 그러니까 한번 외교적인 행사를 하자고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은 뭘 의미하는 거냐면 총독 느헤미야에게 너는 총독 아니냐? 네가 다른 일반 평민하고 똑같이, 막 그냥 지금 고생스럽게 일을 하는데 다시 한 번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너는 인도자다. 너는 특별한 계층에 있다. 그리고 우리 특별한 사람들끼리 한번 정상회담을 해서 이 고생스러운 일에서 잠깐 벗어나보자라고 하는 제안입니다.
이제 이 제안을 느헤미야가 받고, 그러면 잠시 일을 쉬고, 예를 들면 이제 국가 간의 일이니까 외교적인 일이 필요하죠. 이게 필요한 일입니다. 이거 쓸데없는 거 아닙니다. 이거 하면 안 되는 불법적인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거 한번 이거 해야 될 필요도 있는 거 아닌가? 라고 하는 생각이 드는 거죠. 그런데 이제 느헤미야가 이걸 거절합니다. 이게 얼마나 끈질기게 하냐면 네 번이나 하자고 합니다. 네 번이나 정상회담을 하자. 그리고 느헤미야가 네 번이나 똑같은 대답을 합니다. 이제 대답한 이유가 뭐냐 하면, "나는 지금 하나님이 맡긴 위대한 일을 하고 있다." 산발랏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돌멩이 가지고 맨날 저기 노가다판에서 지금 땀 흘리고 고생스럽게 힘쓰는 일을 하고 있는데, 그거 멈추고 잠시 잠시 좋은 곳에서, 사람들은 예를 들면 뭐죠? 기자들이 막 이제 취재할 거고 무슨 오늘 회담 주제가 뭡니까? 이슈가 뭔데요? 그러면 앞으로 어떻게 보관을 가지고 해결하려고 합니까? 막 이제 이렇게 이렇게 하려고 하겠죠. 그리고 이제 아주 좋은 식당에서 편안한 호텔에서 한 2박 3일, 혹은 3박 4일간 쉬면서 이런 걸 하겠죠. 그리고 느헤미야도 사람이기 때문에 자기 마음에 너무 이게 힘들고 저것도 해야 될 일이니까 한번 저렇게 쉬어볼까 하는 마음이 왜 없겠습니까? 그런데 그가 결정할 때는 뭘로 결정하냐면, 내가 지금 돌멩이에 뭐 이거 치우고 거기다가 돌멩이를 쌓고 하는 일이, 이 일이 인간적으로 볼 때 고생스럽고 사회적으로 볼 때 천한 일처럼 보이지만 그는 영적으로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하고 있는 이 일이 하나님이 나에게 하라고 주신 위대한 일이다. 이게 그 대답입니다.
잠깐 저희들에게 적용해 보겠습니다. 저희들이 모임에 이제 오는 거죠. 교회 집회에 오는 거죠. 와서 여러 가지 일들을 합니다. 어떤 분은 자리를 정리하기도 하고, 어떤 분은 기도하기도 하고, 또 어떤 분은 말씀을 전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 일들을 합니다. 그런데 그중에서 내가 하는 일이 어떨 때는 이거 뭐 별 의미도 없는 것 같고, 별로 중요한 일같이 보이지 않고, 그리고 힘든 일이고, 맨날 해야 되는 수고가 들어가는 일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맡긴 위대한 일이다. 대체할 수 없는, 하나님의 교회가 말씀대로 되어가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누군가는 감당해야 되는 일이다. 희생이 필요하지만 이것은 가치 있는 일이다라고 하는 감각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맡긴 이 일을 중단하고 내가 거기를 왜 가겠느냐? 이렇게 말하는 거죠. 그래서 이 일은 중단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 일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이 일은 반복적이지만 계속 되어야 하고, 우리가 생각할 때 무의미한 계속적인 반복을 하나님이 사용하셔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무슨 위대한 일이 일어나지 않아도,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고 사람들이 감동하는 일이 지금 당장 일어나지 않지만, 우리가 하고 있는 이 단순 반복적인 일을 계속할 때에 언제 일어났는지 모르지만, 어떻게 일어났는지도 모르지만,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가 하고 있는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별 의미 없어 보이는, 그리고 수고로운 일이 하나님이 나에게 맡긴 위대한 일이다. 이 부분을, 이게 이제 느헤미야가 가진 분별력이고 지혜로움입니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이 맡긴 일이 되는 거고요.

다시 잠깐 생각을 해보면 우리가 항상 두 번째로는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내가 이 일을 중단하고 왜 거길 가겠느냐?"라고 하는 것은 뭘 말하고 있냐면 우선순위를 잘 분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선순위, 총독이니까 가서 정상회담도 해야 되겠죠. 그리고 뭐 필요하면 하겠죠. 그런데 지금은, 지금 내가 해야 될 일은 성벽을 건설하는 수고로운 작업이다라고 하는 우선순위를 놓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들도 이 우선순위에 대해서 항상 마음에 두고 있어야 합니다. 다른 거 할 수도 있죠. 그런데 가장 우선적인 일은 하나님이 나에게 맡긴 이 일을 수행하는 것이다.
우선순위는 제가 여러 번 말씀드렸는데요. 이거 마태복음 6장이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면 먹고 마시는 것은 하나님이 해결하십니다. 먹고 마시는 일을 하기 위해서 이게 중요하니까, 이게 긴급하니까, 하나님 일을 중단하면 우선순위를 바꾸는 것입니다. 항상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면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책임질 것입니다. 이걸 우선순위를 바꾸지 말아야 합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우선순위는 이거였죠. 속을 먼저 깨끗하게 해야 겉이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겉을 먼저 깨끗하게 한다고 속이 깨끗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속을 먼저 깨끗하게 하면, 겉은 나중에 자연스럽게 따라올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려고 하는 것은 마음의 중심입니다. 행동을 변화시키려고 하지 않고 마음을 변화시키려고 하는 것이 우리 우선순위입니다. 그다음에 이제 세 번째, 다른 사람은 눈의 티를 빼려고 하지 말고 내 눈에 대들보를 먼저 빼야 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비판하려고 하는 마음이 들 때마다, 내가 먼저 변화되어야 된다. 지적하려고 하는 것은 내 문제보다 작은 것일 수 있다. 이 생각을 늘 해야 합니다. 이게 우선순위입니다. 성도님들이 이렇게 지금 나에게 맡긴 일이 하나님의 위대한 일이다. 그리고 우선순위에 있어서 혼돈이 없어야 된다. 이게 느헤미야가 첫 번째로 한 일에 대한 저희들의 적용입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보겠습니다. 두 번째 이제 편지를 보냅니다. 그런데 이 편지를 봉하지 않았어요. 산발랏이 느헤미야에게 보낸 편지인데, 이 편지를 이렇게 보내는 과정 중에 그 편지를 전달하는 사람들이 다 읽고 그 편지 내용을 다 소문으로 퍼뜨러뜨리도록 의도한 것입니다. 봉하지 않고 보내는 편지가 어디 있습니까? 느헤미야한테 보내는 게 아닙니다. 느헤미야한테 편지 보낸 것처럼 가장했고, 느헤미야를 걱정하는 것처럼 보여도, 느헤미야를 해치는 일입니다. 느헤미야에 대한 비판이 편지 안에 적혀져 있고, 그것을 전달하는 사람들이 쓱 보고 다른 사람한테 "내가 봤는데 둘이 이런 이야기하고 있어." 이렇게 하는 거죠. 이 일에 대해서 이제 어떻게 느헤미야가 하냐면 이제 그 편지 내용은 이것입니다. 소문이 있는데 느헤미야 네가 왕이 되려고 한다. 느헤미야 네가 성을 왜 짓냐? 성벽을 건설하는 이유가 뭐냐? 네가 그 성에서 왕이 되려고, 그 왕이 되려고 했다고 하는 것은, 네가 지금 현재 페르시아 제국의 반역자가 되는 것이다. 지금 이렇게 하는 거죠. 그리고 네가 한 사람, 네가 어떤 선지자, 이스라엘은 이제 그런 거죠. 선지자가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백성에게 전하는 선지자를 하나 세워서 그 선지자로 하여금 하나님이 너를 왕으로 세웠다라고 하는 말을 하려는 선지자까지 이렇게 섭외돼 있다는 걸, 내가 이런 소문이 있다. 이거 큰일 나지 않았냐? 우리가 이 문제를 같이 의논해서 해결하자라고 하면서 사실은 이 소문만 퍼뜨리는 거죠. 그러니까 이제 느헤미야의 경우는 이겁니다. 자기에 대해서 나쁜 소문이 떠도는 거예요. 느헤미야는 사실 말로는 말씀대로 성벽을 재건한다고 하지만, 그의 진짜 의도는 자기가 왕이 되려고 하는 것이다라고 하는 잘못된 소문이 퍼트려져 있을 때 어떻게 할 거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도 이제 성도님들이 이제 생각해 보셔야 됩니다. 나에 대해서 누군가가 막 이제 비난하는 거예요. 나는 그런 의도가 없었는데, 나는 이제 비난하는 일이 생길 때 우리가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대처입니다. 느헤미야는 어떤 말이 딱 들리면 자기 안에 실제로 그런 게 있는가 자기를 살핍니다. 내가 정말 왕이 되려고 했나? 내 안에 조금이라도 그와 같은 의도가 있었나? 살펴봅니다. 그리고 자기가 말합니다. 나는 어떤 경우도 왕이 되려고 하지 않았다라고 하는 겁니다. 자기 중심을 살핀 다음에, 그다음에 두 번째 변명하지 않습니다. 누가 뭐라고 말해도 변명하지 않습니다. 그건 이제 변명을 하면 논쟁을 해야 되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 어떻게 하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는 이렇게 믿습니다. 시간이 가면 해결된다. 시간이 입증할 것이다. 자기에게 그와 같은 의도가 없었음을, 지금은 막 떠들어도, 사람들이 일시적으로 막 흥분해서 뭐라고만 말해도, 이거 시간이 지나면 잠잠해집니다. 그래서 시간에게 맡겨둡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자기의 삶이 입증할 것입니다.
자기가 왕이 되려고 했는지, 그래서 왕 같은 일을 하는지, 내 삶이 입증될 것이다. 그리고 대응하지 않습니다. 대응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맡깁니다. 이게 이제 쉽지 않지만, 저희들이 비난받을 때 여러 사람들이, 다 저 형제는 좀 이런 이래 이런 경향이 있어. 그리고 저 형제가 뭐 이런 사람이거든, 이라고 하는 소리가 들릴 때 이 느헤미야의 이 대응 태도를 저희들이 배워야 합니다. 특별히 인도하는 사람들이 이와 같은 비방 가운데 들어가기가 쉽고, 그때 대응하려고 하거든요. "아니거든, 나 그렇게 한 적 없고 그렇게 말한 적 없고, 나 의도는 그런 게 아니거든." 이렇게 이제 변명하지 않고 시간에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이건 잠깐 다른 성경 하나를 잠깐 보고 오겠습니다. 신약으로 와서 로마서 한번 보시죠. 로마서 1장, 사도 바울의 경험을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어떠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 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함이니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을 인하여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형제들아 내가 여러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롬 1:10-15).

이제 사도바울 서신 중에, 나머지 교회 서신들은 사도바울이 다 세운 교회에 쓴 겁니다. 고린도전서, 후서, 사도바울이 고린도에 가서 복음 전하고 세워진 교회에 쓴 거죠. 빌립보서도 마찬가지죠. 그런데 사도바울이 가지도 않았고 사도바울이 직접 세우지도 않았지만, 사도바울이 쓴 서신이 두 개입니다. 로마서하고 골로새서입니다. 로마서는 사도바울이 로마에 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로마에 있는 성도들을 성도들에게 편지를 쓴 거고요. 골로새서는 사도바울은 에베소에서만 복음을 전합니다. 에베소에서, 두란노 서원에서 이렇게 3년이나 말씀을 전하죠. 그런데 에브라가 이제 골로새 사람이거든요. 그런데 에베소에 와서 사도바울에 의해서 복음과 교회 진리를 듣고, 자기 고향 골로새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구원받은 성도가 생겨서 거기 이제 골로새 교회 일꾼인 거죠. 그래서 사도바울이 골로새 교회에다가 편지를 씁니다. 골로새 교회의 문제를 듣고 편지를 씁니다. 사도바울은 가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제 로마서는 이런 문제가 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에 여러 번 가고자 하였습니다. 아마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로마가 사실 그 당대 세계의 수도죠. 그래서 이제 복음이 로마에 들어가면서 사도행전이 끝나죠. 그래서 이제 로마에 들어가야 되는데, 여러 번 가려고 했는데 하나님이 막으셨습니다. 이상하게 못 가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제 자기가 로마에 가는 것이 이제 사도 바울의 오랜 기도 제목입니다. 로마서 15장에 가면 내가 저기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예루살렘을 거쳐서 그다음에 이제 로마도 가고, 그다음에 서버나까지 가기를 원한다. 이게 사도바울의 계획입니다. 그래서 여러 번 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계속 하나님이 막았습니다. 그때 그가 이제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왜 막으시지? 라고 이제 자기를 점검합니다. 이게 자기를 점검하는 내용입니다. 자기를 점검하는 내용은 다시 보겠습니다. 로마서 1장에서 10절 보시면 "어떠하든지 하나님의 뜻 안에서 나아갈 길을 얻기를 구하노라" 계속 이제 좌절되니까 그는 이제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뜻이면 가겠습니다. 이렇게 이제 물러섭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하나님이 원하실 때, 원하시는 방법으로 로마에 가겠습니다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자기의 계획을 맡깁니다. 그리고 이제 저희들이 잘 아는대로 사도바울은 이렇게 이제 로마에 가고 싶었습니다. 자유인으로, 사도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로마에 있는 성도들을 만나기 위해서 방문하길 원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뜻은 뭐죠? 사도바울이 죄수로 가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자유인으로 들어가는 거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상한 계획을 갖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도 바울이 로마에 죄수로 갇혀서 가길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도들을 만나서 복음을 전하는 게 아니고, 뭐죠? 가이샤의 집사람. 그러니까 그가 반역자로 들어가고 그러다 보니까 로마 황제의 직속 부대가 그를 감시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에게 복음이 들어갑니다. 다시 말하면 사도바울이 자유인으로 갔다면 만나지 못했을 로마 황제의 군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하나님 뜻입니다. 그래서 그가 사도바울이 자유인으로 가려고 계획을 세울 때마다 막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막힐 때, 우리는 하나님이 이거 이거 당연한 거고, 이게 선한 의도인데, 가서 복음 전하고 성도 위로하겠다는 건데, 하나님 왜 막으시지? 왜 잘 갈 수 없을 때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다른 뜻을 갖고 계신 건 아닌가? 그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이게 이제 사도바울이 자기를 점검하는 거고 느헤미야가 자기를 점검하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이제 두 번째 보겠습니다. 10절 그랬고요. 하나님 뜻 안에서 해야 된다. 그다음에 11절 내가 이렇게 로마에 가서 로마에 있는 성도들을 보기를 심히 원했습니다. 여러 번 시도했으니까 얼마나 원했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심히 원했을 때, 내가 성도들을 보고 방문하려고 하는 내 의도가 뭔가를 점검합니다. 의도가 뭐지? 내가 뭘 보고 싶어 하는 거야? 우리 성도들 만나가지고 뭘 원하는 거야? 하고 자기를 물어봅니다. 자기를 물어봤더니 첫 번째가 은사를 사용하기를 원한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하나님으로부터 은사를 받았습니다. 그 은사를 사용해서 로마에 있는 성도들을 견고하게 만들려고 하는 의도가 자기 의도라고 하는 걸 확인합니다. '그렇지, 이 이유지.' 그다음에 두 번째 의도는 그다음에 이제 서로 만나면 피차 간에 위로받기 위해서다.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세상 가운데 유혹도 많고 반대도 많고 헛소문도 많고 그렇습니다. 그래서 성도들끼리 만나 순전한 말씀 교제를 통해서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고 이렇게 하는 거죠. 그래서 사도바울이 자기 마음을 살펴보니까 내 은사를 사용하고, 그런데 내 은사로 사용해서 일방적으로 내가 유익을 끼치는 사람만 되는 게 아니고, 나도 로마 성도들을 통해서 위로받고, 이게 이제 사도 바울의 의도인 거죠. 그다음에 13절은 여러 번 가기 가고자 한 것을 여러분들이, 이제 내가 왜 안 오나, 사도바울은 왜 안 오나? 이러지 말고 내가 여러 번 가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못 갔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은사를 사용하고, 사도 바울도 위로받고, 이 교제는 일방적이지 않습니다. 피자 간에 교제하는 거고요.
그다음에 세 번째, "열매 맺도록" 열매를, 그러니까 구체적인 열매를 계획하면서 가는 것입니다. 이번에 갈 때는 어떤 일이 일어나야 된다. 어떤 증거가 나타나도록 기도하며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열매에 대해서는 저희들이 몇 가지 찾아보겠습니다. 열매 그러면, 항상 기억하는 것이 첫 번째 열매, 성령의 열매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인격적인 변화'입니다. 교제를 통해서 인격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사랑과 또 온유함과 또 겸손함과 이런 것들이 생기는 거죠. 서로 이제 말씀 교제하고 나면, 정말 이렇게 그 사람의  삶에 대한 태도, 이런 것들이 달라져야 되는 거죠. 그다음에 두 번째 열매는 성도님 잘 아시는 대로 히브리서 13장에 보면 '입술의 열매'가 있습니다. 입술의 열매는 뭐죠? 예배 때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입술로 하나님을 찬양하죠. 이제 마음에 있는 것을 입술로 표현해서 하나님을 찬양하죠. 지역 모임에서 형제들이, 그렇게 이제 됐을 때 그러니까 이제 그 열매 중에 하나는 이렇게 방문하여 교제하고 서로 위로받고 함으로써, 로마 교회의 예배 시간이 하나님 앞에 좀 더 성경적이고 합당한 예배가 드려지는 것, 이게 사도바울의 목표입니다. 그다음에 이제 또 이제 열매 중에 하나는 이제 로마서 6장을 하나 보겠습니다. 열매라는 단어를 쓰는데요.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롬 6:20-21).

"너희가 그때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그러면 이제 아무런 제약 없이 막 죄짓고 살 때 그들의 삶의 모습을 말합니다. 삶의 행동, 무슨 열매를 맺었느냐? 어떻게 살았냐? 그런데 지금은 22절,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롬 6:22).

이게 삶의 변화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이 서로 말씀으로 교제하고, 특별히 사도바울과 같이 은사 있는 분들의 이렇게 특별한 집회를 끝나고 나면 실제 삶의 변화가 있습니다. 이렇게 집회에 참석, 또 성도를 대하는 태도, 그리고 거기에서 섬김, 이런 데서 이제 삶의 변화가 있는 거죠. 그리고 이제 마지막으로 열매에 대해서 하나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열매는 인격적인 변화입니다. 두 번째는 행동의 변화입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는 이건 이제 안 찾겠습니다만 누구는 아시아의 첫 열매니라. 고린도전서 16장에 나오죠. 그래서 세 번째 열매는 구원받아서 교회에 더해지는 일입니다. 사도바울은 이걸 원한 것입니다. 내가 로마에 왜 가려고 하지? 로마에서 이미 구원받은 성도들이 견고해지는 것, 그리고 나 자신도 위로받는 것, 그러면 이런 일들이 일어나면 그게 구체적으로 어떤 결과를 가져오냐 하면, 예배 시간이 풍성해지고, 성도들의 삶이 변화되고, 그다음에 또 하나,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서 교회에 더해지고, 내가 이걸 위해서 간다라고 하는 자기 마음에 목표를 점검해보고 계속 기도하는 것입니다. 주님 제가 다른 이유가 아닙니다. 제가 혹시 사도로서 당시 제일 큰 도시를 한번 가겠다, 이런 인간적인 야망이 아니고 영적인 이유를 가지고 제가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제 한 거죠.
그리고 이제 하나만 더 보겠습니다. 다시 로마서 1장 다시 오시면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 안에서 그다음에 자기가 가려고 하는 목적, 그리고 14절, "내가 빚진 자다" 다시 말하면 자기의 부르심입니다. 사도바울은 헬라이나 야만인에게 복음을 증거하도록 부름 받은 사람이다. 이게 자기의 일 중에 하나입니다. 이건 내가 마땅히 해야 될 일이구나, 이 세 가지를 그가 점검합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좌절되었지만, 그는 하나님께서 그러면,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가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기도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 기도를 응답하셔서 그로 하여금 로마의 가이샤의 반역자라고 하는 죄수로 이렇게 로마에 도착하게 됩니다. 그리고 놀라운 일이 벌어지죠. 가이사의 집 사람들이 구원받고, 그다음에 또 하나 사도바울이 셋집을 얻었는데 계속 와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전파하되 막는 자가 없었더라. 이게 기도 응답입니다.

그래서 이제 이제 사도바울은 자기를 이렇게 점검해 봅니다. 그리고 느헤미야도 자기를 점검합니다. 이제 비판하는 소리가 들리니까 자기를 점검해 봅니다. "그리고 나에게 그와 같은 의도가 없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이게 이제 느헤미야의 두 번째 대응입니다.

그다음에 이제 세 번째, 어떤 이스라엘 사람이 저기 막 안 나오니까 두문불출하니까 찾아간 거죠. 신방 간 거죠. "왜 그래?" 그랬더니 "누가 나 죽이려고 해요. 그래서 내가 무서워서 나갈 수가 없어요. 그리고 여기 집에 있다고 해결책이 아니고 숨을까 봐요." "왜 어디로 숨으려고 하는데?" 그랬더니 "그런데 사실 그 사람이 나만 죽이려는 게 아니고 당신까지 죽이려고 해요. 그러니까 우리 같이 성전의 성소에 들어가서 숨읍시다." 성소, 지성소가 있는데 지성소는 안 되죠. 그러니까 성소까지 들어가서 숨읍시다, 이렇게 제안을 하는 거죠. 느헤미야가 "그래ㅡ 누가 나를 죽이려고 해? 그럼 그럼 그것도 겁나는 일이네. 자객을 보낸다니, 무섭네. 피하기는 피해야 되겠네."라고 생각을 한 거죠. 그런데 성소에 숨자고 딱 했을 때 그가 깨닫습니다. 이건 말씀은 어긋나는 거니까 이건 나를 두렵게 만들려는 거다.
이거 이제 성경에서 예를 하나 찾아보겠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말씀을 어긴 대표적인 사람이 누구냐 하면 사울 왕입니다. 사무엘이 그랬거든요. 이제 블레셋이 쳐들어올 때 사무엘이 "일주일을 기다리십시오. 나를 기다리고 내가 와서 하나님께 제사드린 후에 블레셋과 전쟁합시다." 이렇게 한 거예요. 그런데 사울이 이렇게 보니까 이제 전쟁하러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여 있는데, 블레셋은 이미 딱 진치고 있고, 그런데 보니까 사무엘이 늦게 오고, 그러니까 이스라엘 군인들이 막 흩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사울이 어떻게 하죠? 이러다가는 싸울 군사 다 잃어버리겠다. 군사들 다 도망가면 저 블레셋 다 어떻게 싸우냐? 전쟁에 지는 것은 명확하다. 그래서 어떻게 하죠? 사무엘을 안 기다리고 자기가 제사를 지내버립니다. 이게 뭐죠? 그가 왕 자리에서 쫓겨나는 일입니다. 그가 두려움으로 사무엘의 말을 어겨버립니다. 그리고 사무엘이 오니까 사무엘이 "아니, 왜 기다리라고 했는데?" 그랬더니 그렇게 변명합니다. 합리화합니다. 이게 이제 계속 망하는 거죠. "잘못했습니다. 제가 두려움 때문에 말씀을 어겼습니다. 이제 어떡하죠? 이 죄를 어떻게 처리해야 좋겠습니까?" 하고 이걸 죄라고 부르고, 잘못이라고 시인하고, 그리고 하나님 은혜를 구해야 되죠. 그러나 그렇게 안하고 변명합니다. 그리고 이제 사울은 왕의 자리에서 쫓겨나는 거죠.
또 하나 해보겠습니다. 골리앗이 이제 3M 가까이 되는 키에 어마어마한 무기를 가지고, 사람이 혼자 들기도 어려운 것을 자기는 창으로 씁니다. 무게가 어마어마하거든요. 그런데 그걸 막 휘두르는 거예요. 우리는 들고 있어라 그래도 무거운데, 그리고 그가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가 너희를 모독했다. 자존심이 있으면 한 명이 나와서 너랑 싸우자." 이렇게 하죠. 아무도 못 싸웁니다. 하나님을 모독했는데도 못 싸웁니다. 다윗이 싸웁니다. 다윗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요? 아니, 골리앗하고 다른 이스라엘 군인이 못 싸우면 다윗은 게임이 안 되죠. 다윗은 어쩌자고 "내가 골리앗과 싸우겠나이다." 했을까요? 그는 왜 골리앗을 두려워하지 않았을까요? 그에게는 말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말씀인가요? 여러 말씀이 있는데 그중에 하나 제가 인용해 보겠습니다. 창세기 12장에 보면 이제 다윗은 아브라함 후손이잖아요. 이스라엘인입니다. 아브라함 후손입니다. 하나님이 창세기 12장에 아브라함한테 이렇게 약속했습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를 내가 축복하겠다." 그래서 요즘에도 많은 분들이 그러죠. 저희들이 이스라엘을 위해서 기도해야 됍니다. 이 약속이 변치 않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위해서 기도하면 우리가 이스라엘을 축복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한다. 이제 이렇게 말하는 거죠. 그리고 또 하나입니다. 이스라엘을 저주하면 그가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이게 아브라함에게 준 약속이고 이들은 그 아브라함의 후손들입니다. 우리는 조금 이제 다를 수 있지만, 그런데 이렇게 약속이 돼 있어요. 그런데 이제 골리앗이 어떻게 했죠? 이스라엘을 모독했습니다. 다윗은 확신합니다. 그는 죽었다. 이스라엘 하나님을 모독하고 살 자가 이 세상에 있습니까? 없습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이 통치합니다. 하나님이 원칙 하나를 세우셨어요.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를 내가 복 주겠다. 아브라함을 저주하는 자를 내가 저주하겠다." 그래서 골리앗과 다윗이 싸울 때 다윗이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칼과 창으로 내게 오지만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네게 간다." 그는 계속 말씀을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두렵게 할, 그리고 디모데후서는 이런 게 있죠. 사도바울이 디모데에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고" 디모데가 이제 굉장히 조심스러운 성격이고 그래서 이제 굉장히 신중하죠. 그래서 어떤 일 하는 것을 굉장히 계산하는 거죠. 그런데 계산하는 건 좋지만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권하는 거죠. "은사를 불일 듯하게" 하나님이 네게 주신 은사를 사용하는 데 있어서 누가 방해하거나, 비판하거나, 무시하고 하나님이 준 은사 아니냐? 불일 듯 해라, 이렇게 하는 거죠.
그래서 이제 이런 기절들을 보면서 저희들이 적용할 수 있습니다. 왜 두려워하는가? 두려워하지 말아야 될 때 두려워하면 안 됩니다. 느헤미야에게 괜히 겁을 준 거죠.  골리앗이 막 두려움을 주는 거죠. 그런데 다윗은 그 두려움을 갖지 않습니다. 왜요? 말씀을 근거로 그 두려움을 이겨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디모데도 여러 가지 성격적으로, 또 여러 가지 상황적으로 두려운 일이 있을지라도 사도바울이 말합니다. 은사를 불일 듯 해라. 은사를 사용하는 데 있어서는 두려워하지 마라. 하나님이 디모데를 전도자로 세우셨어요. 그리고 아마 사도바울의 뒤를 이어서 여러 지역 모임을 돌보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빌립보도 가고, 고린도도 가고, 막 이렇게 가는 거죠. 에베소교회도 가고, 그런 일을 하는 데 있어서 외부의 적이나 누군가가 뭘 해도 절대로 두려워하지 말고 은사를 사용해라, 이렇게 하는 거죠.

이제 느헤미야가 이제 세 번 반응을 합니다. 하나는 잠깐 쉬고 총독으로서 일을 한번 해보자. 느헤미야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 돌멩이를 치우고 벽을 건설하는 일이 하나님이 내게 맡긴 위대한 일이다. 이보다 위대한 일은 없다. 이게 느헤미야 분별입니다. 그리고 이제 편지 봉하지 않고 막 소문을 낼 때, 자기를 살피고 하나님 앞에서 확신을 가지고 주님께 맡기고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숨자라고 했을 때, 말씀과 어긋나는 것은 절대 안 한다. 말씀을 어긋내는 것은 이건 다 가짜들이다. 이게 느헤미야가 가지고 있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이게 일을 마무리할 때, 어떤 사람은 한 생애가 주님 앞에서 이제 마감될 때, 혹은 하나님의 일이 완성될 때 있었던 사단의 공격입니다. 그래서 일을 시작할 때의 공격보다 이 일을 완성할 때의 공격에 대해서 이게 이제 타협책이죠. 저희들이 분별력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합당하게 결정해서 그다음에 그다음에 딱 나오는 거죠. "이제 완공되었더라." 52일 만에 완공되었더라. 그리고 그다음에 이렇게 나옵니다. 이제 이 적들이 느헤미야를 막 이제 두렵게 하려고 했거든요. 그런데 이번에는 거꾸로 됩니다. 자기들이 두려워하게 되었더라. 자기들이 낙심하게 되었더라. 그게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결론적인 진술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완성하게 되면, 우리를 반대했던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우리를 반대했던 사람들이 부끄러워할 것입니다. 이 일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이루어내고 주님 앞에 가고, 또 저희들이 섬기는 모임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형태로 세워지고, 이와 같은 일들이 있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