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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말씀 필기 노트</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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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각종 성도집회, 강단 말씀을 속기록한 글을 올리는 블로그 입니다.</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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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hu, 28 May 2026 12:22:13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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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anagingEditor>박이레</managingEdi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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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말씀 필기 노트</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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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성도가 걷는 광야의 삶의 목적</title>
      <link>https://leerenote.tistory.com/1989</link>
      <description>&lt;p data-ke-size=&quot;size16&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amp;lt; 성도가 걷는 광야의 삶의 목적 &amp;gt; 강성찬 형제님 / 26년 4월 26일 일요일&lt;br&gt;&lt;br&gt;&quot;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길을 행하였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백성이 모세를 대하여 원망하여 가로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시니 그가 물에 던지매 물이 달아졌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쌔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 물샘 열 둘과 종려 칠십주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quot;(출 15:22-27).&lt;br&gt;&lt;br&gt;우리가 금방 읽은 부분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해서 그리고 이제 막 홍해를 건넌 후에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22절에 보면 이제 &quot;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quot;라고 되어 있습니다. &lt;br&gt;그런데 여기서 그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을 얻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물을 물이 있는 곳에 발견해서 물을 마셔봤더니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부분에 있어서 굉장히 좀 이상한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고, 참 놀랍게 그들을 구원하시고, 또 홍해를 건너게 하시고, 또 그 홍해도 정말 기적적으로 홍해의 바닷물이 갈라져서 그 바닷물 사이를 마른 땅으로 건너게 하시고, 그 뒤를 쫓는 모든 바로와 군대를 수장시킨 그 놀라운 승리를 하신 그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그렇게 놀라운 아주 이스라엘에게 좋은 일들이 일어날 것 같은데, 지금은 갑자기 홍해를 건넌 이후에 그들에게는 지금 물이 없는 그 광야가 펼쳐지고 있는 것입니다.&lt;br&gt;우리는 이제 이것을 통해서 '구원받고 난 이후에 우리의 삶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서 교훈을 이제 받고자 합니다. 이 출애굽기를 보시면 이제 우리의 구원에 대해서, 그리고 그 구원 이후의 삶에 대해서, 이제 여러 가지 그림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lt;br&gt;&lt;br&gt;여기 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 양으로 구속함을 입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그 애굽에 있는 이제 모든 장자들을 죽이시는 그 심판을 하실 때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양을 잡아서 그 양의 피를 자기 집의 그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면 하나님께서, 그 장자를 멸하시는 그 심판자께서 그 집에 피가 발라져 있으면 그 피를 보고 넘어가겠다. 그 집 안에 있는 사람들은 멸하지 않고 심판을 면하게 하겠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이제 어린 양을 잡아서 그 피를 그 집 앞에, 그 좌우 인방과 문설주에 바르고 그 집 안에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 피가 발라져 있는 집 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구원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그 집에 이르지 않았습니다. 그 날을 이제 '유월절'이라고 합니다. 그 심판이 이제 넘어갔기 때문에, 그 유월되었다라는 것을 말하는 그 뜻에서 이제 유월절이라고 합니다.&lt;br&gt;그리고 그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건너서 지금 이곳에 오게 된 것입니다. 그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 피로 받은 구속은 우리가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받은 구원'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흘리신 피, 그것을 나를 위해서 흘리신 것으로 믿는 사람들, 이제 그게 그 피가 발라져 있는 집 안에 있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믿은 사람들은 심판을 받지 않고 구원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그 구원을 얻은 자들은 바로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서, 그 노예되었던 것에서 벗어나서 이제 자유롭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런 사람들에게 이제 꽃길만 걸을 것 같은 그런 사람들에게, 왜 여기 앞에 이제 광야가 놓여 있는 것입니까? &lt;br&gt;여러분들이 구원을 받고 나서 이제 처음으로 경험하는 것이 이제 이러한 경험입니다. 구원받고 나서 모든 것이 이제 순조롭게 잘될 것 같은데, 구원받고 나서 생각지 않았던 다른 어려운 것이 있는 것입니다. 물이 쓴 것입니다. 예전에는 이 맛이 아니었는데, 물이 쓴 것입니다. 사람이 바뀐 겁니다. 예전에는, 구원받기 전에는 세상에서 아무 문제없이 잘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구원받고 나니까 세상이 광야처럼 변한 것입니다. 더 이상 세상이 예전처럼 즐겁지가 않은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이 예전에 주었던 그 물이 이제 쓴 것입니다. 더 이상 옛날 사람처럼 똑같은 입맛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뭔가 다른 것을 기뻐하고 좋아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제 그러한 사람에게 세상은 이 광야와 같은, 이제 다른 환경이 돼버린 것입니다. &lt;br&gt;&lt;br&gt;이러한 삶을 사는 우리에게 인생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우리는 구원받기 전에도 그 인생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을 합니다. 특별히 이제 '죽음'이라는 것 앞에서 죽음은 그 인생에 여러 가지 쌓아온 것들을 모두 다 이제 앗아가 버리는 것입니다. 힘들게 많은 수고를 했던 그 모든 것들을 다 이 땅에 내려놓고 떠나야 되는 그 죽음입니다. 그런 죽음을 생각할 때 '인생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제 구원받고 나서는 또 다른 관점에서 그 인생의 의미를 생각하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그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죽음 이후에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영원한 나라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이제는 죽음 이후에 그 영원한 나라가 있는데, 그 앞에 '우리의 인생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런 생각을 또 하게 되는 것입니다.&lt;br&gt;이제 어떤 형제님이 이런 비유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어떤 부자가 이제 페인트 공을 고용을 해서 어떤 담을 페인트를 칠하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담은 그냥 다 이제 낡은, 이제 조그마한 볼품없는 그런 담이었습니다. 이제 그런 담을 페인트 칠을 해 봐라, 이렇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페인트 공은 이 담벼락에 뭐 무슨 중요한 담벼락이라고 하면서, 그냥 대충 금방 설렁설렁 칠하고 다 끝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래도 맡은 일이니까 열심히 그 벽을 아주 꼼꼼하게 잘 깨끗하게 칠해 놨습니다. 그런 그 주인이, 그 부자가 그 일을 맡긴 것은 그 담벼락을 칠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사실은 그 부자가 가지고 있는 이제 궁궐 같은 저택, 그 아름다운 저택을 큰 저택을 이제 페인트를 칠해야 되는데 누구를 고용을 해야 되는지, 이제 그것을 뽑기 위해서 한 테스트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허름하고 작은 담벼락을 꼼꼼하게 칠한 페인트공을 택해서 자신의 큰 저택을 이제 칠하게 한 것입니다.&lt;br&gt;참 우리 사람들도 그 중요한 일이 있다면 정말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이제 인생의 의미가 이제 그런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의미는 앞으로의 영원한 나라에서, 그 영원 가운데서 해야 되는 것을 이제 준비하는 그런 기간입니다. 그 영원한 나라에서 제대로 일을 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기간이 이제 우리 짧은 인생의 의미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인생 가운데서 '영원한 나라에 합당한 자'로 하나님께서는 '만들어 가고 계시는 것'입니다.&lt;br&gt;&lt;br&gt;이것과 관련돼서 이제 신명기 8장 말씀을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lt;br&gt;&lt;br&gt;&quot;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하려 하심이니라&quot;(신 8:2-3).&lt;br&gt;&lt;br&gt;&quot;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quot;(신 8:16).&lt;br&gt;&lt;br&gt;여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앞으로 40년간 광야를 횡단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이제 가나안 땅, 약속의 땅으로 40년 후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40년 광야에서 그들이 행한 것을 '시험한 기간'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마치 그 페인트공을 시험한 것처럼, 이때는 이제 시험한 기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의 하나님께서 하고 계시는 것은 &quot;너를 낮추시며&quot;입니다. 그들을 겸손하게 낮추시는 것이 그 광야 기간 동안 행하신 일입니다.&lt;br&gt;그리고 그것이 우리 인생 가운데서도 이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입니다. 잠깐 이 모세 오경에 대해서 이제 전체적으로 이제 말씀을 드리자면, 1. 맨 첫 번째 '창세기'에서는 이제 하나님께서 이제 '한 나라'를 만들어 가시는 그런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이제 사람은 범죄하였고 타락하였는데, 이제 하나님께서는 이제 그런 가운데서 다시 이제 회복하시기 위하여 여러 가지 역사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이제 그중에 하나가 이제 한 나라를 세우시는 것입니다. 이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으로 말미암아 이제 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세우시는 것이 이제 창세기에 들어가 있습니다. 2. 그리고 그다음 책이 이제 '출애굽기'입니다. 이제 출애굽기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종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마치 이 죄의 종 되어 있는 것처럼 바로의 노예로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구원자 모세를 보내서 '구원하시는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이제 양의 피로 말미암아, 홍해를 건너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그들을 구원하시고 바로의 손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하는 그 구원의 역사가 출애굽기에 들어가 있습니다. 3. 그리고 나서 나와 있는 것이 이제 '레위기'입니다. 레위기에서는 그들을 구원하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과 어떻게 '교제'를 하시는지, 그들과 '함께 어떻게 거하시는지', 그 근거와 그 '교제의 행함'이 나와 있습니다. 그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룩하신 하나님과 계속적으로 교제할 수 있는 근거는 그 레위기에 담겨 있는 '제사'로 말미암은 것이고, 그 하나님과 교제하는 가운데 계속적으로 행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성별될 것'을 또한 레위기에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제 그런 것들이 레위기에 담겨 있습니다. 4. 그리고 이제 '민수기'에서는 그러한 그들이 어떻게 광야를 행하는지, 실제 그들의 '인생의 삶의 모습'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대해서 교훈하고 있는 책이 이제 민수기입니다. 그 민수기는 그들의 40년간의 광야 생활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5. 그리고 여기 신명기는 신명기 책 전체적으로가 하나의 '긴 말씀'입니다. 그 어떤 말씀을 하고 있냐면, 이제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될 텐데 이 신명기 이후에 이제 여호수아서에서 그들은 이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갑니다. 그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데 '준비하는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들이 그 들어간 땅에서 이제 어떻게 행해야 되는지, 그 준비하는, 이때 필요한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신면기는 그 '기업을 얻기 위해서 준비시키는' 이제 그런 책인 것입니다.&lt;br&gt;앞에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의 인생은 그 영원한 나라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지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마련하신 그 기업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어떠한 준비가 필요한지를 말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광야 생활입니다. 그리고 그 신명기, 우리가 금방 읽은 8장 2절 말씀에서는 그 중요한 것 중에 하나로 '우리를 낮추시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기업을 얻기 위해서 우리가 필요한 준비가 낮아지는 겁니다. &lt;br&gt;&lt;br&gt;여러분은 그 기업을 얻는다는 것이 왜 낮아져야 되는 것인지를 이제 궁금해하실 것입니다. 사실 모든 기업을 얻으려면은 이 땅에서도 높아지는 게 준비가 아니겠습니까? 여러 가지 이제 학벌을 쌓고, 또 여러 가지 필요한 지식을 익혀서, 많이 높아져서, 그래야지 재벌의 후계가 이루어지고, 이제 그렇게 되는 것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선 이상하게도 낮아져야 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면은 그 하나님의 나라는 낮은 자가 큰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의 나라의 원리가 낮은 자가 그 나라를 제대로 받아서 제대로 다스리는 그 나라이기 때문입니다.&lt;br&gt;그 부분을 잠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누가 복음 22장 24절입니다.&lt;br&gt;&lt;br&gt;&quot;또 저희 사이에 그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저희를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너희는 그렇지 않을찌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두목은 섬기는 자와 같을찌니라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quot;(눅 22:24-30).&lt;br&gt;&lt;br&gt;여기서도 우리 주님께서 그 하나님 나라에서 '다스리는 자'를 언급을 하시는데, 특별히 그 다스리는 자를 언급하시면서 '섬기는 자', '낮은 자'가 바로 그들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 제자들은 보통 사람들이 그런 것처럼 '누가 크냐?'라고 다투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항상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내가 당신보다 더 낫다라고 주장하기를 좋아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는 정반대다. 낮은 자가 오히려 큰 자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낮은 자리에서 다른 사람을 섬기는 사람, 그 사람이 큰 자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그런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낮은 자리에서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사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전혀 자기를 위하는 그런 이기적인 마음 없이, 다른 사람을 위해서 일하신 바로 그분이 가장 크신 분이 아니겠습니까? 섬기는 자가 그 하늘 나라에서는 큰 것입니다. 그가 그 하늘 나라에 가장 적합한 사람입니다. 그가 그 하늘 나라를 다스리기에 합당한 사람입니다.&lt;br&gt;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인생 가운데서 여러 가지로 시험하시면서, 그리고 우리를 낮추십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닮아가도록 만드십니다. 놀라운 말씀 중에 하나는 로마서에서 우리를 &quot;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quot;라고 말씀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 부분 잠깐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로마서 8장입니다.&lt;br&gt;&lt;br&gt;&quot;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quot;(롬 8:17).&lt;br&gt;&lt;br&gt;여기에 이제 하나님의 자녀면 또한 이제 &quot;후사&quot;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후사라는 게 '후계자'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냥 후계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후계자다.'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계자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참 이게 놀라운 것이 그리스도는 무엇을 기업으로 받습니까? 이 후계자라는 것은 그 기업을 받는 사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무엇을 자신의 기업으로 받는 분입니까? 우리가 히브리서에 보면 하나님께서 만유를 그가 후사로 받을 자라고, 그리스도께서 만유를 기업으로 받으실 자라고 히브리서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모든 만물을 자신의 기업으로 받으실 분입니다.&lt;br&gt;여러분은 이 우주가 얼마나 거대한지 생각해 보신 적 있습니까? 우리는 그냥 여기 대전에서, 그냥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동네만 인식하고 이제 살아가기 때문에 때때로 이 우주가 얼마나 거대한지 인식을 잘 못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비행기만 타봐도 금방 압니다. 비행기를 타고 하늘에 조금 올라가면 이 땅이 보이는데, 생각보다 놀라게 되는 것은 그 사람이 사는 지역이 너무나 좁다는 겁니다. 몇 시간 계속해서 황무지를, 이렇게 바다를 비행기가 횡단하는 것을 볼 때에 인간은 얼마나 좁은 데서 이렇게 살고 있나 이런 생각이 듭니다. 지구도 어마어마하게 큽니다. 근데 그 지구가 먼지에 비유해도 그것은 비유가 안 될 정도로 우주는 너무너무나 큽니다. 그런데 그 모든 우주를 그리스도께서는 기업으로 받으시는 겁니다. 그리고 그 기업으로 받으시는 그리스도와 함께, 그것을 함께 우리가 기업으로 받아서 받는 후계자라는 겁니다. 이게 하나님이 우리를 그와 같은 놀라운 자리로 부르셨다는 겁니다.&lt;br&gt;여기 로마서 8장 19절부터 이제 '피조물들'이 나옵니다. 19절에 이제 &quot;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quot;, &quot;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quot; 피조물들의 이야기가 쭉 나옵니다. 왜 갑자기 여기에 이제 피조물이 나오는지 생각해 보신 적 있습니까? 왜냐하면 그 피조물들이 우리한테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받을 그 기업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지금도 이 피조물이 이 모든 이 창조 세계가 어마어마합니다. 우리가 지금도 여행 가서 보면 대단하다, 이런 생각을 하죠. 그런데 우리가 보는 그 이 자연 피조 세계가 지금은 사람의 죄로 말미암아 허무한데 굴복해 있는 겁니다. 지금은 그 웅장하고 아름다운 모습이 온전히 다 완벽하게 나타나지 않은 그 피조물입니다. 그런데 그 피조물이 회복된다는 겁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다시 온전하게 회복돼서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겁니다. 우리가 받을 그 기업을 여기에게 쭉 설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피조물도 놀라운데, 온전히 회복된 그 피조물을 우리가 기업으로 받는다는 것을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업을 얻기 위해서는 우리가 낮아져야 된다는 겁니다.&lt;br&gt;사실 이 낮아진다는 것은 나중에 다시 이제 설명을 드리겠지만, 우리가 처음에 이제 낮아진다라고 생각되면 그냥 좀 볼품없는 이제 그러한 모습을 이제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결코 그렇지 않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앞에 이제 덕언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낮아진 사람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서 낮아진 사람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영광스럽게 높이십니다. 우리는 그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정말로 '낮아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받는다'는 겁니다. 이 광대한 피조물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것은 정말 얼마나 그 놀라운 영광이겠습니까? 얼마나 그 존엄한 그런 자리이겠습니까? 정말 낮아질 때 우리는 그 영광을 맛볼 수가 있습니다.&lt;br&gt;&lt;br&gt;그러면 다시 이제 광야 이야기로 이제 돌아오겠습니다. 우리는 광야에서 이제 여러 가지 어려움을 만납니다. 양식도 없고, 이제 물도 없는, 그런 고난 가운데서 이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그러한 가운데서 우리는 고난을 잘 받아야 됩니다. 그 시험을 통해서 '인내'를 배워야 됩니다. 잘 낮아져야 됩니다. &lt;br&gt;그런데 이제 그것의 반대가 뭐냐면 '원망'하는 겁니다. 우리가 읽은 출애굽기 15장에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사흘길을 가서 물이 없으니까 어떻게 했습니까? 원망했습니다. 그들은 즉시로 원망합니다. 사실 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의 여정을 특징을 지어보자면 원망하는 겁니다. 원망하는 게 계속 나옵니다. 지금 당장 여기 15장에서도 이제 원망하는 게 나왔고, 그들은 이제 출애굽기 16장에서 먹을 것이 없다고 원망합니다. 그다음 장 17장에서는 또 물이 없다고 원망합니다. 그들은 그 광야의 걸음을 전부 원망으로 특징을 삼아서 하고 있습니다.&lt;br&gt;우리는 이제 원망해서는 안 됩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민수기는 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통과한 그 여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민수기가 총 36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구조를 한번 살펴보면 재미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데 광야 생활을 이제 40년 동안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40년간 원망한 기간은 성경이 아주 짧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그들에게 유익이 없었던 겁니다. 거기에 그들에게 바라는 그 '배움'이 없었던 겁니다. 사실 민수기 1장부터 이제 14장까지는, 14장이라는 그런 분량에서는 '열하룻길'의 일을 담고 있습니다. 시내산에서 가나안 땅 경계까지, 가네스 바네아까지는 열하룻길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게 이제 1장부터 14장까지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제 그 가나안 땅 앞에서 그들 거기서도 원망합니다. 그때 여기서 다 죽게 되었다라고 원망하고 안 들어갑니다. 그 약속의 땅에 안 들어가고 38년 동안 광야를 배회하게 됩니다. 그것은 이제 6장이라는 짧은 그런 길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슬픈 일들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거기에 이제 고라 자손들이 반역하는 것, 이제 모세가 이제 실수하는 것, 또 아론이 이제 죽음으로써, 그 38년의 기간이 끝나는 때가 이제 그 6장 가운데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아론의 죽음의 기록 이후에, 21장부터 이제 36장까지 나머지 이제 16장이 이제 다시 그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진하는, 가난안 땅 앞으로 가는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lt;br&gt;여기서 이제 우리가 알게 되는 교훈은 '원망하는 시간은 우리의 인생의 걸음에서 의미가 없어진다'는 겁니다. 우리의 인생은 원망하지 않아야지 의미가 있는 겁니다. 그 고난을 잘 받을 때의 의미가 있는 겁니다. 이제 올해가 이제 26년도이고, 제가 이제 마포 모임에 더해진게 96년이기 때문에 이제 30년이 됐습니다. 이제 한 세대가 지난 건데요. 그래서 사실 이제 여러 성도님들하고 오랫동안 이제 있게 됩니다. 그런데 이제 그중에 이제 안타까운 건 뭐냐면, 어떤 분들은 원망하는 분들이 있어요. 저는 처음에는 그게 '성격이 그런가?'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좀 원망이 많다. 보통 어떤 좀 어려운 일이 있으면 먼저 원망이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30년이 지난 지금에 봤을 때, 그 원망하는 분들은 지금도 그래요. 이게 그분들에게 있어서는 그 시간이 허투루 지나간 겁니다. 원망이 이렇게 무서운 겁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처럼 그래선 안 됩니다. 불평하는 사람은 자라지가 않는 겁니다. 이 원망은 낮아지는 것과 반대입니다. &lt;br&gt;사람들이 왜 원망하냐면 자기가 이런 대접을 받아서는 안 된다,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생각할 때 '나는 이 정도 높은 자리에 있는데, 나는 이 정도 되는 사람인데, 나는 이 정도 대우를 받아야 되는데,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대우하셔야 되는데!'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나한테 이렇게 하시면 안 되지.' 지금 물이 있고 양식이 있어야 되는데,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원망은 낮아지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들이 받고 있는 대우가 지금 좋은 대우입니다. 고난이라는 것은, '이거, 왜 이렇게 안 좋지?' 하고 있는 대우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지금 최선의 대우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들의 가치 판단이 잘못됐기 때문에 이게 지금 안 좋은 배우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지, 사실 홍해를 건너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그 수르 광야로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물 없는 곳으로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최선의 길로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나쁜 대우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lt;br&gt;&lt;br&gt;이 광야길에서 우리가 원망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이것을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베푸신 '최선의 길'이라고 이해해야 됩니다. 지금 당장 내가 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먼저 이해해야 됩니다. 우리가 잠깐 이제 고린도전서 말씀을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lt;br&gt;&lt;br&gt;&quot;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quot;(고전 5:7-8).&lt;br&gt;&lt;br&gt;여기서도 다시 이제 출애굽기를 인용해서 말을 하고 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그 출애굽기의 이야기를 적용하고 있습니다. 앞에 말씀드린 것처럼 이제 구원받은 사람들은 유월절 양으로 구원받고, 그 유월절 양은 여기 기록된 것처럼 '예수그리스도'를 말을 하고 있습니다. &quot;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quot;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유월절 양은, 우리에게 있어서 십자가에 달려서 피를 흘리신 그리스도입니다. 이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받았죠. &lt;br&gt;그리고 나서 이제 출애굽기를 읽어보면 하나님께서는 &quot;무교절을 지키라&quot;라고 말씀하십니다. 무교절이라는 것은 이 '누룩이 없는 빵을 먹는 것'을 말합니다. 누룩이 빵에서 제거된, 그 빵을 부풀게 하는 그 누룩이 제거된 빵을 먹으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게 뭘 우리에게 상징하고 있냐면, 누룩이라는 것은 성경에서 죄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 구원받은 자들은, 유월절 양으로 구원받은 자들은 이제 자기의 삶 가운데서 죄를 인식하고 그것을 이제 제거해야 된다는 것을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이제 구원받은 사람의 해야 될 일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lt;br&gt;그래서 이제 8절에 유월절 양으로 구원받은 사람들은 &quot;묵은 누룩을 내어버리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을 내어버릴 것&quot;을 말을 하고 있습니다. '묵은 누룩'이라는 것은 '예전부터 가지고 있었던 누룩'을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예전부터 가지고 있었던 나의 잘못된 가치관, 나의 잘못된 욕심, 이런 것들을 내어버리라, 그 정욕대로 살지 말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광야 생활을 잘 걸어가기 위해서는 이 묵은 누룩을 내어버려야 됩니다. 세상에서 가지고 있었던 그 가치관들, 세상에서 좋다고 생각하던 그 가치관들, 이제 그런 것들을 하나씩 내어버려야 됩니다. 그리고 나의 욕심, 내가 이거 좋아하는 건데, 이것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높은 자리에 두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를 낮춘다는 것은, 낮아진다는 것은, 나의 좋아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위에 두는 것입니다. 이게 자기를 낮추는 것입니다. 이게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는 것입니다.&lt;br&gt;그리고 또한 &quot;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quot;라고 되어 있습니다. 복음서에 보면 우리 주님께서 바리새인들, 사두개인의 누룩을 조심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리새인들은 위선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람들한테 인정받으려고 더 그럴듯하게 자기가 좋은 사람인 것처럼 포장하는, 이제 그런 것을 누룩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또 그런 누룩을 버려야 되는 겁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이제 인정받고자 하는, 우리는 진실된 사람이 돼야 됩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가 기본적으로 그런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사람의 시선에만 좋아 보이고자 하는 그런 유혹을 계속 내려놔야 됩니다. 계속 진실하고 담백하게 살도록 노력해야 됩니다. 정말 내가 하는 말 그대로 그 의미를 닮아서 다른 사람에게 말을 하고, 나한테 부족함이 있더라도 그것을 그대로 정직하게 내어 보이고, 우리는 그럴 때에 이 낮아진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게 더 우리에게 자유를 주고 편안함을 주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사두개인들은 그들은 여러 가지 종교적인 일을 하고 있지만, 영적인 일을 하고 있지만, 오히려 물질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런 가운데서 돈을 취하고, 오히려 그 종교를 이용해서 이익을 챙기는 이제 그런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그런 누룩을 또한 피해야 됩니다. 이 세상의 '물질적인 그런 유혹'에서 벗어나서 경건하게 사는, 이제 그런 것이 자기를 낮추는 것이고, 이 누룩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물질적인 가치관에서 벗어날 때,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그런 유혹에서 벗어날 때, 우리는 원망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lt;br&gt;&lt;br&gt;그런데 이제 사실 이게 쉽지 않다는 것을 또 우리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우리 주님께서 도와주고 계십니다. 여기 보면 그 이제 물이 썼을 때, 이제 나무를 그 물에 던져 넣으라라고 하시고, 그 나무를 물에 넣었더니 그 물이 달아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lt;br&gt;이게 굉장히 이제 상징적으로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바가 있는데, 이제 성경에서 특별히 이 '나무'라고 되어 있는 것은 우리 주님의 십자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quot;주님께서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친히 우리 죄를 담당하신&quot; 그 나무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누룩들을 내어버리는데, 이 무교절을 지키는데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주님의 도우심을 구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 힘으로는 그 누룩을 쉽게 버리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나무에 달리신 예수그리스도의 그리스도를 의지할 때에, 우리는 그와 같은 일을 행할 수 있습니다.&lt;br&gt;왜냐하면 그분께서 모든 시험을 우리와 같이 받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분도 우리가 광야에서 이 인생에서 받는 모든 괴로움을 당하신 분이시고, 그리고 그 모든 괴로움 가운데 스스로 낮추시고, 그리고 이기신 분입니다. 우리는 그분을 통해서 정말 이것이 복된 일이구나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 가지, 마태복음 4장 말씀을 보겠습니다.&lt;br&gt;&lt;br&gt;&quot;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quot;(마 4:3-4).&lt;br&gt;&lt;br&gt;여기 우리 주님께서 이제 시험을 받으시는 장면입니다. 그 광야에, 아무런 양식이 없는 그 광야에 이스라엘 백성이 행하였던 것처럼, 이제 우리 주님께서도 그 양식이 없는 광야에서 40일을 주리시고 계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이제 사단이 나와서 이렇게 시험합니다. &quot;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quot; 사단은 항상 이런 시험을 합니다. 우리의 자존심을 자극해서 &quot;네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를 증명하라.&quot; 그리고 그게 안 된다면은 원망해라. 네가 대단한 사람인데, 그게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지 못한다면 너는 원망해도 돼. 네가 지금 마땅히 음식을 먹어야 되는데, 그 음식이 없다면은 원망하는 게 당연하다. 아니, 당연히 먹을 게 있어야지, 어떻게 40일 동안 먹을 게 없냐? 원망해도 된다. 이제 이렇게 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너의 능력을 사용해 가지고 너 마음대로 떡을 만들어서 먹어라, 이렇게 하는 겁니다.&lt;br&gt; 그런데 이제 우리 주님께서는 참 놀랍게도 그 시험을 자신을 낮추심으로 이기십니다. 정말 하나님의 아들의 그 능력을 사용해서 정말 그 돌을 떡덩이가 되게 해서, 그래서 떡을 드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하시고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여전히 나는 더 굶주리겠다, 말씀하시고 단지 이렇게만 말씀하십니다. &quot;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다.&quot; 이게 참 절묘한데, 낮아졌지만 굉장히 높아진 장면입니다. 낮아졌지만, 온전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그 낮아졌지만, 사람의 존재를 사단은 &quot;야, 사람은 먹어야지.&quot; 이 정도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는 단지 그냥 먹어야 사는 짐승의 수준이 아니라, 사람을 어느 정도까지 높이냐면 &quot;사람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존재다.&quot;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이고 계시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는 낮아졌을 때, 정말 이 높은 영광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 주님만이 사람의 존귀함을 제대로 나타내신 분입니다. &lt;br&gt;우리 주님은 정말 양처럼 온전히 낮아지시고, 이제 순종하신 분이지만, 그 레위기의 제사에 보면 이제 양을 제사로 드리고 또한 동시에 또 염소를 제사로 드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양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낮아지고, 이제 순종하는 모습을, 우리 주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염소는 잠언에 보면은 위풍 있게, 당당하게 걷는 짐승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 염소는 그 하나님의 말씀을 쫓아서 흔들림 없이 정말 위험 있게 걸어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양인 동시에 또한 그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순종하는 가운데서 그 고귀함을 그대로 나타내신 것입니다. 낮아졌지만 그 기업을 받기에 합당한 모습을 보이신 것입니다. 이 사단의 시험에서도 온전히 낮아졌지만, 또 온전히 위험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lt;br&gt;바로 이 부분이 또한 신명기 우리가 읽었던 그 말씀을 그대로 인용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신명기 8장 읽었던 그 말씀을 우리 주님께서는 그대로 이용해서 그 시험을 이기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의 걷게 하신 그 의도를 설명하신 것이 그 8장에 있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그것을 정확하게 아시고, 그리고 그 광야에서 그 광야의 의미를 말해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명기 8장 16절에 이렇게 읽었습니다. &quot;그렇게 낮추신 것은 반드시 너로 하여금 복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quot;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quot;너를 낮추신 것은 반드시 너로 복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quot; 이것이 이제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우리가 낮아져야만 받을 수 있는 복이 있습니다. 낮아져야 우리는 그 나라에 합당한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그것을 보이셨습니다. 낮아졌을 때 얼마나 그 나라에 합당한 모습인지를 보이셨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정말 그런 사람이 하나님 나라를 다스리기에 합당한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사람,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사람, 그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인생을 지금 인도하고 계십니다. 그것이 우리의 인생의 모습입니다. &lt;br&gt;&lt;br&gt;참으로 여기 있는 모든 분들이 참 이와 같이 낮아지는 삶을 살기 바랍니다. 그와 반대로 원망하는, 내가 받아야 되는 대우를 지금 받지 못하고 있어서 원망하면서 우리의 인생을 낭비하지 않길 바랍니다. 계속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러한 합당한 삶을 살기를 바라게 됩니다.&lt;br&gt;&lt;br&gt;&lt;/p&gt;</description>
      <category>강성찬 형제님/성도 말씀</category>
      <author>박이레</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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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Mon, 25 May 2026 22:27:21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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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성경읽기 : 요한일서 5장 7-12절(요약)</title>
      <link>https://leerenote.tistory.com/1998</link>
      <description>&lt;p data-ke-size=&quot;size16&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성경읽기 : 요한일서 5장 7-12절(요약)&lt;br&gt;&lt;br&gt;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거를 받을찐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도다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것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요일5:7-12, 개역한글)&lt;br&gt;&lt;br&gt;- 전의석 형제님 사회 : 5장 6-13절은 증거에 대한 내용이 많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증거는 사람의 증거보다 큰 것을 말씀합니다. 14절부터는 갑자기 내용이 바뀌어서 기도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부분도 이 두가지와 연관을 가지며 교제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기도 그 자체에 대해서 저희들이 배울수 있는것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일치된 기도로 구할 때에 들으심을 봅니다. 마지막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며,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심을 말씀합니다. &lt;br&gt;오늘은 먼저 6-13절을 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lt;br&gt;&lt;br&gt;Q. 7-8절을 저희가 교제하는데요. 영어성경과 우리나라 성경이 해석이 좀 다릅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7절에서 &quot;하늘의 성령&quot;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8절에서는 &quot;땅위의 증거&quot;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어떻게 보시는지 교제 부탁드리겠습니다.&lt;br&gt;&lt;br&gt;- 최재홍 형제님 : 7절에 &quot;증거하는&quot;이 나오는데 시제가 형재 능동 분사입니다. 과거에 한번 증거한 것이 아니라 이 증거가 계속해서 연속돼고 있음을 말씀합니다. 성령님은 지금도 계속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증거하고 계십니다.&lt;br&gt;예수님께서 침례받으실 때에 성령께서 비둘기같이 임하셨고, 또 아버지께서 이는 내 아들이라고 증거하셨습니다. 또 주님의 공생애 기간동안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셨습니다. 성령님은 주님의 공생애 시작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셨고, 또 지금도 계속 증거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아버지, 성령님이 동일하게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합니다.&lt;br&gt;8절에 &quot;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quot;라고 하는데 이 모든것이 하나를 뜻한다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물과 피로 오신 분입니다. 요단강에서 침례받으신 예수님과 십자가에서 피흘리신 예수님이 동일하며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동일하게 계속해서 증언하고 있습니다. &lt;br&gt;8절에서 물은 예수님께서 죄인들의 자리까지 참된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피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흘리심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합니다. 이것이 저희들에게 주신 확실한 증거임을 말해주는 구절이라고 생각합니다. &lt;br&gt;&lt;br&gt;- 김윤철 형제님 : 요한일서는 &quot;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하려 함이라&quot;는 목적으로 쓰여졌습니다. 그리고 5장은 그 서신의 절정을 이루고 있습니다. 1-5절은 세상을 이기는 믿음을 다루었습니다. 6절은 예수님께서 물과 피로 이 세상에 임하셨음을 선언합니다. 7절부터는 이를 증거하는 셋을 말씀합니다. 세 증인, 성령과 물과 피에 대해서 이것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생각해 보아야 할것 같습니다. &lt;br&gt;예수 그리스도께서 물과 피로 이 땅에 임하셨습니다. 물에 대해서 생각할 때에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옆구리를 병사가 창으로 찔렀을 때에 물과 피가 나왔습니다. 이를 요한은 바로 곁에서 보았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죽음이 역사적으로 이루었음을 나타내는 증거이자, 주님의 피가 우리의 죄를 깨끗하게 하실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나타냅니다. 사도는 앞서 요한일서 1잘 7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심을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공의의 요구를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완전히 충족시켰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lt;br&gt;마지막으로 성령은 세 증인 중에 유일하게 인격적인 증인입니다. 물과 피가 역사적인 증인이었다면, 성령은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는 증인이십니다. 성령은 진리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증언은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있습니다. &lt;br&gt;&quot;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quot;(8절) 이 세가지 증거는 모두 다른 증거이지만 모두 동일한 하나님의 증거를 나타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사람이시고 완전한 하나님으로 오셨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lt;br&gt;신명기 19장에서는 두세증인으로 증거를 확증한다고 했습니다. 주님에 대해서는 그보다 더 확실한 세 증인으로 증거를 확실시 하셨습니다. &lt;br&gt;&lt;br&gt;- 김보영 형제님 : 7-8절을 교제하기를 원합니다. 성령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 증거를 전적으로 신뢰할수 밖에 없는 이유가 성령께서 진리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진리는 절대적으로 참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완전한 사람이시며 완전한 하나님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모든 사람의 죄를 대속하여 십자가를 지셨음을 확실하게 증거합니다.&lt;br&gt;또 주님을 성령과 물과 피가 증거한다고 말씀합니다. 이를 요약하면 그 증언의 확실성을 말합니다. 재판을 할때에 한사람의 증언이 아니라 두 세사람의 증거를 요구하는 것처럼, 오직 우리 주님만이 유일하게 인류의 구원자가 되심을 성령과 물과 피로 증거함으로 인해서 주님의 메시아로써의 모든 사역을 확실하게 인정케 하는 것입니다. &lt;br&gt;&lt;br&gt;- 전의석 형제님 : &quot;성령은 진리니라&quot; 예수님께서도 성령(보혜사)께서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또 주님께서 희생하신 물과 피가, 성령과 물과 피가 하나로 일치함을 말씀합니다. 또 진리 가운데로 같이 나아갑니다. 이 세가지가 각각 증거하면서 하나가 됨을 말씀합니다.&lt;br&gt;그리고 9절에서 이것이 하나님의 증거이기 때문에 전적으로 신뢰할수 있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저희가 두세사람의 증거를 받아들입니다. 사람의 증거도 이같이 받아들여지는데, 하나님의 증거는 얼마나 더 크게 받아들여야 하는가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아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주님을 아시는 것이 더 큰 가치를 갖고 중대하기 때문에 더 큰 것입니다. &lt;br&gt;요단강과 변화산상에서 아버지께서 주님을 증거하십니다. 그같은 하나님의 증거는 주님의 인격과 사역을 온전히 아시는 가운데서 증거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저희는 그 증거를 받을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증거를 받은 사람은 그 마음안에 증거가 있습니다.(10절)&amp;nbsp;&amp;nbsp; &lt;br&gt;10절을 보면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와 하나님을 믿지 않는자가 나옵니다. 하나님의 증거를 받는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지만, 하나님의 아들을 믿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저희가 이렇게 이어서 교훈을 받을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lt;br&gt;&lt;br&gt;- 김윤철 형제님 : 9절의 말씀을 볼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크고 결정적인 증언이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입니다. 10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결정적인 증언은 그 아들을 믿는자에게는 자기안에 증거가 있음을 말씀합니다. 이 내적 증거가 무엇인가 생각해 볼 때에 &quot;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quot; 라는 말씀이 에베소서에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이심을 증거하십니다. &lt;br&gt;이래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듭니다. 이 말씀은 성경에서 가장 엄중한 말씀 중에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믿지 않는것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거짓말할수 없는 분임을 히브리서는 말씀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분으로 만드는 것은 하나님께 도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된 인간의 본질임을 생각하게 됩니다. &lt;br&gt;10절의 증거의 구체적인 내용을 11-12절에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음을 선언합니다. 이는 완료형입니다. 그것이 이루어졌고 지금도 그 효과가 유효합니다. &quot;그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quot; 예수님이 생명 자체이십니다. 우리의 영생이 완전한 이유는 우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완전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손안에 있는것은 타인에게 우리가 빼앗기지 않는다는 안전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11절까지 교제했습니다.&lt;br&gt;&lt;br&gt;- 최재홍 형제님 : 9절에 사람들의 증거를 받는다는 말씀이 있는데요. 앞서 말씀해 주신 것처럼, 사람들의 증거를 받는것은 그 말을 신뢰하고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또 그 증거의 권위에 대해서 말씀해 줍니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도 사람들의 말의 증거를 받아들이고 삽니다. 그렇다면 거짓말하실수 없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더 받아들일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의 증거는 제한된 지식 안에서 나오지만, 하나님의 증거는 전지전능하심 가운데 나오는 것입니다. 변화산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이심을 친히 증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삶 가운데서도 여러가지 표적들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셨습니다. 또 제자들은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목격한 증인들입니다. &lt;br&gt;하나님의 아들, 영생과 구원, 죄사함에 대해서 계속해서 증거하고 계시는데요. 이것은 전 인류가 들어야 하는 중대한 증거이고, 증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또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해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이를 믿으라고 증거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 증거를 받는 사람은 이 증거를 받아들일수 밖에 없음을 사도요한은 말씀합니다. &lt;br&gt;&lt;br&gt;- 장승훈 형제님 : 저희가 요한일서 1장 1절을 교제할 때에 &quot;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quot;을 요한복음의 태초와 다름을 교제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요한일서에 나온 주님께서 이땅에 임하신 것(침례를 받으신 부분)으로 이해했고요. 그래서 지난시간 교제했던 6절에서 &quot;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quot;에서, 물을 주님께서 침례받으신 것으로 분별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lt;br&gt;그리고 이어서 7-8절에서 성령과 물과 피가 함께 증거합니다. 이 셋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 주님께서 요단강가로 나오셔서 침례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십니다. 침례라는 것은 죽음이라는 것을 가정하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죄가 없으신 거룩하신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죄인의 자리에 서시고 침례에 순종하셨습니다. 곧,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침례를 받으실 때에 하늘로써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하셨습니다. 이를 성령께서 증거하셨습니다. 그 침례와 성령이 연결되어 있고, 또 성령은 뒤에 오게 될 십자가 사건을 말씀합니다. 그리고 주님은 요한복음 16장에서 성령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과 오실것을 말씀합니다. 또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셔야 성령이 오심을 말씀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에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자 물과 피가 쏟아졌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올리우심을 받으신 후, 오순절에 성령께서 임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세가지는 서로가 연결되어 있고, 이 세가지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lt;br&gt;&lt;br&gt;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찌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행2:36, 개역한글)&lt;br&gt;&lt;br&gt;그러한 관점으로 6절 이하를 이해해 볼수 있습니다. &lt;br&gt;10절부터는 아들에 관한 하나님의 증거입니다. 성령께서 친히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하십니다. 또 성령께서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십니다. &quot;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거를 받을찐대&quot; 그 사람의 증거를 받는 사람도 있고 받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처럼 성령의 증거를 받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받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가 됩니다. &lt;br&gt;재미있는 것은 받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인데, 받지 않는자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로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lt;br&gt;&lt;br&gt;- 김보영 형제님 : 10절에서 &quot;아들을 믿는 자는&quot;이라고 합니다. 이는 과거에도 믿었고, 현재에도 믿고, 미래에도 변함없이 믿는자를 말합니다. 그는 그 안에 그리스도께서 영생을 갖게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원한 영생을 얻는것은 우리의 구원자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것 뿐입니다. &lt;br&gt;반대로 그 증거를 믿지 않는, 아들을 믿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그 사람이 거짓말쟁이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임을 생각하게 됩니다. &lt;br&gt;&lt;br&gt;- 김민원 형제님 : A. 아까 형제님께서 질문하신 것중에 영어 성경으로 &quot;증거하는 이가 셋이니&quot;에서 다른부분에 대해서 살펴보면요. 7절은 &quot;증거하시는 이가 셋이니&quot;라는 표현이 다시 있습니다. '하늘에서' 증거하는 이가 셋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늘에서 아버지, 말씀, 성령'이 셋이 증거하심을 말씀합니다.&lt;br&gt;8절에서는 &quot;이 땅에서&quot; '성령과 물과 피'가 증거하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이 셋이 또 하나임을 말씀하십니다.&lt;br&gt;이 부분은 삼위일체이신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증거하고 계심을 말씀하시고요. 또 성령님께서 이 땅에서도 물과 피로 함께 증거하고 계심을 묵상하게 됩니다. &lt;br&gt;그렇다면 왜 '하늘에서' 증거하고 계심이 빠져 있는가를 생각활 때에 더 묵상이 필요해 보입니다. '땅에서' 증거하는 이라는 내용은 또 다른 그리스도 성경에서는 그러한 표현이 없다고 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좀더 묵상이 필요해 보입니다.&lt;br&gt;&lt;br&gt;- 전의석 형제님 : 저희나라 성경은 다비성경을 그대로 가져온 것으로 보입니다. 다비 형제님은 그 부분이 불필요하다고 보고 이 부분을 빼신것 같습니다. 여러 논란이 있는 것 같습니다. 7절은 '홀리 스피릿'이고, 8절은 '더 스피릿'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묵상하는 가운데 앞선 형제님들께서 오시면 질문해 보면 좋겠습니다. &lt;br&gt;주님께 맡기고요. 오늘은 이것으로 끝내겠습니다. &lt;/p&gt;</description>
      <category>대전 중구 성경읽기(요약글)/요한일서 성경읽기(요약)진행 중</category>
      <author>박이레</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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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mments>https://leerenote.tistory.com/1998#entry1998comment</comments>
      <pubDate>Sun, 24 May 2026 15:33:11 +0900</pubDate>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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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한나의 기도로 시작된 사무엘의 생애(요약)</title>
      <link>https://leerenote.tistory.com/1997</link>
      <description>&lt;p data-ke-size=&quot;size16&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성도 : 한나의 기도로 시작된 사무엘의 생애 / 26년 5월 24일 일요일(요약2) / 최재홍 형제님&lt;br&gt;&lt;br&gt;오늘은 사무엘에 대해서 간략히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그의 탄생 배경이나 그의 어린 시절, 노년 시절을 살펴보겠습니다. &lt;br&gt;&lt;br&gt;또한 사무엘 때부터 옴으로 말한 모든 선지자도 이 때를 가리켜 말하였느니라 (행3:24, 개역한글)&lt;br&gt;&lt;br&gt;그 후에 선지자 사무엘 때까지 사사를 주셨더니 (행13:20, 개역한글)&lt;br&gt;&lt;br&gt;사무엘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매우 독특한 위치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는 마지막 사사였고 첫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선지자 중에 첫 인물로 사도행전이 말합니다. 그리고 그는 사사시대의 끝에서 왕정시대를 열어가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lt;br&gt;&lt;br&gt;한나가 마음이 괴로와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서원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나를 생각하시고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사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삼상1:10-11, 개역한글)&lt;br&gt;&lt;br&gt;사무엘의 이름의 뜻을 살피면, 그 뜻은 '하나님께서 들으셨다.'라는 뜻입니다. 한 여인의 눈물어린 기도가 있었고, 그 기도의 응답으로 사무엘이 태어났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고 또 그 들은 말씀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전해줬습니다.&lt;br&gt;그 당시 하나님의 장막이 실로에 있었지만,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불량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을 가로챘고, 또 회막에서 수종드는 여인들과도 잠자리를 가졌습니다. 엘리의 두 아들은 제사장으로써 백성들을 하나님께 가까이 인도해야 했던 사람들이었지만, 오히려 앞장서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멸시했습니다. &lt;br&gt;그리고 엘리 제사장에 대해서 잠시 살펴보면, 엘리 제사장의 큰 실패중에 하나는 영적으로 어두운 가운데, 자기 아들들의 죄를 단호하게 다루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그 죄를 바르게 처리하지 못했습니다. 자기의 아들들이기에 사랑으로 보듬은 것으로도 볼수 있겠지만, 그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고 오히려 그 아들들을 부피시키고 죽이는 일이었습니다.&lt;br&gt;&lt;br&gt;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였더라 (삿21:25, 개역한글)&lt;br&gt;&lt;br&gt;이는 눈에 보이는 왕이 없었다는 뜻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하나님을 자신들의 실제적인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 눈에 옳아보이는 것을 따랐습니다. 지도자들은 부패했고, 제사장들은 성소를 더럽혔습니다.&lt;br&gt;이렇게 어두운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이라는 한 사람을 준비하셨습니다. 한나라는 한 여인의 기도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회복시키는 한 준비를 하셨습니다. 사무엘의 생애는 어머니인 한나의 고통과 기도로 시작되었습니다. 한나는 자녀가 없었고, 그 당시 문화로 이해해 볼때에 자녀가 없다는 것은 깊은 수치와 고통이었습니다. 그러나 한나는 이를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께 서원하고 기도했습니다. 아들을 주시면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겠다고 서원합니다. 그리고 한나는 자기의 서원대로 행합니다. 한나는 단순히 자신의 고통을 풀고자 서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인도자를 위해서 구한 것입니다. 한나는 그래서 자기의 품에만 두지 않을 아들을 구했습니다. &lt;br&gt;&lt;br&gt;그러므로 나도 그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 하고 그 아이는 거기서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삼상1:28, 개역한글)&lt;br&gt;&lt;br&gt;사무엘은 어린 시절부터 엘리 곁에서 여호와를 섬겼습니다. 한나는 사무엘이 젖을 뗀 후에 그를 실로로 데려가 여호와께 드렸다고 말씀합니다. 아마도 못해도 성윤이나, 서윤이의 나이때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이런 아이를 자심의 품에서 떠나보내고 여호와께 드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나는 하나님께 받은 것을 다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lt;br&gt;이 실로의 영적인 상태나 엘리의 아들들의 부패를 보면 또 사무엘이 자랐던 환경이 좋지 못했습니다. 부패가 심각했습니다. 그러나 한나는 사무엘을 엘리의 손에 맡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맡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드린 아이를 지키실 것을 믿은 것입니다. 사무엘은 그래서 어린 시절, 부패한 하나님의 집에서 자라나게 됩니다.&lt;br&gt;사무엘은 어렸을 때에 세마포 에봇을 입고 여호와 앞에 섬겼다고 기록합니다. 세마포의 흰색은 순결을 상징합니다. 엘리의 두 아들은 부팼지만, 어린 사무엘은 하나님 앞에서 순결한 상태로 섬겼습니다. 그는 주변의 어떤 환경을 핑계삼지 않았습니다. 좋은 환경에서 반드시 사람이 좋아지는 것이 아니고, 또 나쁜 환경에 있다 하더라도 그 사람이 반드시 나쁘게 되는 것이 아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lt;br&gt;&lt;br&gt;또 성경을 보게 될 때에 성경은 반복해서 사무엘이 &quot;여호와 앞에서&quot;라는 내용이 사용됩니다. 그는 사람의 앞이 아니라 여호와 앞에서 행했습니다. &lt;br&gt;&lt;br&gt;여호와께서 임하여 서서 전과 같이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가로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삼상3:10, 개역한글)&lt;br&gt;&lt;br&gt;사무엘은 &quot;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quot;라고 합니다. 이는 단순히 귀로 듣겠다는 뜻이 아니라, 그 하시는 말씀을 순종하겠다는 뜻도 담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듣는것이 어떻게 순종과 연관되는지 생각하게 됩니다.&lt;br&gt;이는 저희가 삶 속에서도 경험하는 일입니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집에서 엄마가 &quot;엄마 말을 들어.&quot;라고 한다면, 엄마 말을 듣고 그대로 행동하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은 엄마의 말을 듣고 순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주 성경에서 &quot;들으라&quot; 라고 말씀합니다. &quot;이스라엘을 들으라&quot; 이는 역시 단순히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들은것이 순종으로 나타나야 함을 말씀합니다. &lt;br&gt;사무엘은 자신을 '종'이라고 말합니다. 종은 자신의 뜻을 앞세우지 않고 단순히 듣고 순종하는 자입니다. 사무엘은 말씀을 귀로만 듣는자가 아니고 그 말씀을 발과 행동으로 순종하여 행할 준비가 된 사람이었습니다. &lt;br&gt;&lt;br&gt;또 사무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후에 엘리의 집에 하나님의 심판의 내용을 전해야 했습니다. 어린 사무엘에게는 이 말을 하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좋은 내용도 아니고 하나님의 심판의 내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엘리에게도, 또 백성들에게도, 또 사울에게도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됩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한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백성들에게 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lt;br&gt;또한 사무엘은 평생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사사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와 제사장직의 실패라는 어두운 시대에 사무엘을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사사로 세우셨습니다. 사무엘은 또 해마다 이스라엘을 순회하면서 다스렸고 라마로 돌아와서도 이스라엘을 다스렸습니다. 그는 긴 생애 가운데 꾸준히 그 사역을 충성스럽게 섬겼습니다. &lt;br&gt;&lt;br&gt;그리고 사무엘이 노년이 되었을 때에 백성들이 사무엘에게 요구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에게 왕을 세워달라는 요구였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보면 사사로써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사무엘을 거절한 것으로 볼수도 있지만, 이스라엘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왕으로써 거절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결국 인간 왕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lt;br&gt;&lt;br&gt;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삼상8:7, 개역한글)&lt;br&gt;&lt;br&gt;제가 이 내용을 백성들에게 들으면 바로 화를 내거나 그랬을것 같은데요. 그러나 사무엘은 바로 분노하지 않고 이 내용을 하나님 앞으로 가져오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사무엘은 이 백성들의 말을 하나님께 가져가서 기도합니다. 또 노년에도 백성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을 멈추지 않고 계속합니다. &lt;br&gt;&lt;br&gt;내가 여기 있나니 여호와 앞과 그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내게 대하여 증거하라 내가 뉘 소를 취하였느냐 뉘 나귀를 취하였느냐 누구를 속였느냐 누구를 압제하였느냐 내 눈을 흐리게 하는 뇌물을 뉘 손에서 취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그것을 너희에게 갚으리라 그들이 가로되 당신이 우리를 속이지 아니하였고 압제하지 아니하였고 뉘 손에서 아무 것도 취한 것이 없나이다 (삼상12:3-4, 개역한글)&lt;br&gt;&lt;br&gt;12장 내용을 다 읽어보시면, 사무엘이 백성들 앞에서 자기의 삶을 공개적으로 검증받는 내용입니다. &lt;br&gt;백성들은 사무엘이 아무도 속이지 않고, 압제하지 않고, 어떤것도 빼앗은 적이 없다고 증언합니다. 사무엘은 앞선 엘리의 두 아들과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lt;br&gt;&lt;br&gt;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치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도로 너희를 가르칠 것인즉 (삼상12:23, 개역한글)&lt;br&gt;&lt;br&gt;백성들은 왕을 요구함으로써 하나님의 통치를 거절했지만, 사무엘은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기를 멈추지 않겠다고 얘기하고 또 그대로 행했습니다. 사무엘은 항상 백성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그들이 다른 길로 가려고 할때 그들을 포기하지 않고 바른길로 인도하려 했던 사람입니다. &lt;br&gt;&lt;br&gt;사무엘이 자라는 환경이 좋은 환경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순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또 백성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또 사울왕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실망하지 않고 그 다음왕인 다윗에게로 그 왕권이 넘어갔음을 보인 사람이었습니다.&lt;br&gt;오늘은 간략하게 사무엘의 어린 시절과 노년에 대해서 살펴봤는데요.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세상도 부패하고 악한 세상이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하나님의 자녀와 같은 삶을 살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lt;/p&gt;</description>
      <category>대전 중구 모임(요약글)/최재홍 형제님(요약)</category>
      <author>박이레</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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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un, 24 May 2026 12:48:42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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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복음 :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요약)</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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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lt;p data-ke-size=&quot;size16&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복음 :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 26년 5월 24일 일요일(요약1) / 김윤철 형제님&lt;br&gt;&lt;br&gt;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있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그 안에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 [물의 동함을 기다리니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동한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거기 삼십 팔년 된 병자가 있더라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 가니라 &lt;br&gt;이 날은 안식일이니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대답하되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 한대 저희가 묻되 너더러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하되 고침을 받은 사람이 그가 누구신지 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핍박하게 된지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요5:1-18, 개역한글)&lt;br&gt;&lt;br&gt;이 일은 이천년 전에 예루살렘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하시는 말씀을 듣기를 바랍니다.&lt;br&gt;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수도입니다. 그 수도에는 여러개의 성문이 있었는데, 양문은 양들이 드나드는 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문 옆에 베데스다라는 연못이 있었습니다. &lt;br&gt;베데스라는 뜻은 자비의 집, 은혜의 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수 있다는 이름입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전혀 은혜롭지 않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많은 병자들이 그 연못가에 누워 있었습니다. 그들은 천사가 가끔 내려와 물을 흔들때에 가장 먼저 못에 뛰어든 사람은 어떤 병이든지 낫는다는 소문을 듣고 사람들은 다 그곳에 모여 있었습니다.&lt;br&gt;&lt;br&gt;그리고 어느날 예수님께서는 그 근처를 지나게 되셨습니다. 여러분 또한 삶 가운데서 이 베데스다 연못가에 있었을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여러분의 곁에 예수님이 지금 서 계십니다. 우리의 인생 가운데서는 왜 이렇게 슬픈일, 고통받는 사람, 아픈사람, 힘든 일들이 많을까요? 인생이 처음부터 이렇지 않았음을 성경은 말씀합니다. 세상이 처음 창조될 때는 고통도, 슬픔도, 죽음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이 모든것이 인생에 들어왔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범죄했기 때문입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고, 이 세상에는 고통과 슬픔과 죽음이 들어왔습니다.&lt;br&gt;베데스다 연못가에 누워있는 수많은 병자들의 모습도 세상에 죄가 들어온 결과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지은 가장 큰 죄는 사람이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우리에게 눈과 손과 발을 주신 모든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며 동행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죄로 말미암아 눈이 있어도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발이 있어서 하나님을 향해서 걷는것이 아니라 죽음을 향해서 갑니다. 또 손이 있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짓는 손이 되었습니다. &lt;br&gt;&lt;br&gt;본문으로 돌아가 38년된 병자를 보겠습니다. 사람의 인생에서 38년이 얼마나 긴 시간이겠습니까? 그가 어떠한 심정으로 38년을 누워 있었는지 알수 없습니다. 그는 병이 낫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베데스다 연못의 소식을 듣고 그 연못가에서 오랜시간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그 낫는 방법은 애초부터 그에게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가장 먼저 들어가야 하지만 그는 스스로 움직일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lt;br&gt;베데스다 연못가에는 수많은 병자들이 누워 있었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한다 했지만, 결국 그들을 구하는 것은 가장 먼저 들어가는 행위였습니다. 어떻게 보지 못하는 자가 물이 동함을 보겠습니까? 걷지 못하는 자가 어떻게 물속에 가장 먼저 들어가겠습니까? &lt;br&gt;사람들은 저마다 저마다의 방식대로 하나님의 앞에 서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뜻대로 하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큰 죄를 짓지만 않으면 된다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기의 행위로 의롭다함을 얻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quot;율법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라&quot; 우리의 열심이나 의로움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하심을 얻을 단 한사람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심판을 받아 마땅한 존재들일 뿐입니다.&lt;br&gt;&lt;br&gt;예수님께서 38년된 병자에게 물으셨습니다. &quot;네가 낫고자 하느냐?&quot; 그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lt;br&gt;&lt;br&gt;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요5:7, 개역한글)&lt;br&gt;&lt;br&gt;이 대답속에는 두가지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1. 나는 혼자이므로 할수 없습니다. 2. 나를 도와줄 누군가가 필요합니다. 이것은 오늘 이 자리에 있는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고백입니다. 구원은 내가 이룰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데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또 나를 구원하실 구원자가 필요하다는 고백이 필요합니다. 여러분이 이 고백을 하는 순간 예수님께서 여러분 곁에 찾아오실 것입니다.&lt;br&gt;여러분들은 지금 어떤 자리에 서 계십니까? 아직도 스스로의 힘으로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애쓰고 계시지 않습니까? 아니면 자신의 한곌르 깨닫고 은혜를 구하는 자리에 와 계십니까? 부디 여러분께서 모든것을 내려놓고 예수님께 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lt;br&gt;&lt;br&gt;예수님은 &quot;네 자리를 들고 일어나 걸어가라&quot;라고 한마디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한마디에 그 병자는 바로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갈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일이 어떻게 일어날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말씀만으로 하늘과 땅, 세상 모든것을 창조하셨습니다. 이분은 하나님이 친히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신 분이십니다. &lt;br&gt;&lt;br&gt;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2:6-8, 개역한글)&lt;br&gt;&lt;br&gt;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quot;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quot;고 하셨을 때에 유대인들이 격분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분명하게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인생을 구원하실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lt;br&gt;&lt;br&gt;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롬5:6, 개역한글)&lt;br&gt;&lt;br&gt;우리가 아무런 능력도, 자격도 없을 때에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lt;br&gt;&lt;br&gt;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롬8:3, 개역한글)&lt;br&gt;&lt;br&gt;우리가 할수 없는 일을 하나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죄인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죽게 하신 것입니다. &lt;br&gt;&lt;br&gt;유대인들은 병자가 고침을 받았다는 사실보다 안식일의 규례를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예수님은 왜 굳이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셨을까요? 안식일에 고치시지 않았다면 유대인과 부딧칠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분명한 의미가 있습니다.&lt;br&gt;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신 이후 7일째 되는날 안식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범죄로 인해서 그 안식이 깨졌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일하심으로 참된 안식이 오직 예수님께로만 나옴을 보이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수치와 고통과 저주가 쏟아지는 그 십자가를 피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 이루었다고 외치셨습니다. 이는 모든일을 완수하였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더이상 뭔가 해야 할 일이 없는 것입니다.&lt;br&gt;그리고 주님께서는 삼일만에 다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사망의 값을 다 치루시고 부활하심으로 주님의 십자가의 사역이 완전히 완성되었다는 것을 보이셨습니다. &lt;br&gt;&lt;br&gt;38년된 병자를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물으셨을때 그가 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는 그냥 누워만 있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quot;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quot; 그 말씀을 들었을 때에 그가 곧 나았습니다. 그가 한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일어난 것입니다.&lt;br&gt;구원도 이와 같습니다. 내가 뭔가를 잘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신일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내 의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lt;br&gt;&lt;br&gt;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5:24, 개역한글)&lt;br&gt;&lt;br&gt;우리 인생은 모두 베데스다 연못가에 서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붇들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자신입니까? 아니면 주님입니까? &lt;br&gt;38년된 병자는 연못가에 누워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를 움직이게 한 것은 연못에 들어가는 행위가 아니라 주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동일하게 여러분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십자가에서 여러분들을 위해서 죽으신 주님을 붙드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게 될 것입니다.&lt;/p&gt;</description>
      <category>대전 중구 모임(요약글)/김윤철 형제님(요약)</category>
      <author>박이레</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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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un, 24 May 2026 12:47:43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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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덕언 : 누가복음의 저자 누가(요약)</title>
      <link>https://leerenote.tistory.com/1995</link>
      <description>&lt;p data-ke-size=&quot;size16&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덕언 : 누가복음의 저자 누가 / 26년 5월 24일 일요일(요약) / 전의석 형제님&lt;br&gt;&lt;br&gt;오늘은 누가복음을 쓴 누가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lt;br&gt;&lt;br&gt;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군 된 자들의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줄 알았노니 이는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로라 (눅1:1-4, 개역한글)&lt;br&gt;&lt;br&gt;저희들이 믿는 바는 이 성경을 쓴 유일한 이방인인 누가가 쓴 누가복음의 내용임을 생각하게 됩니다. 사도바울은 서신에서 믿는 할례당인 유대인을 언급하고 그 다음에 누가를 언급합니다. 그래서 저희는 누가가 이방인이었다고 믿게 됩니다.&lt;br&gt;주님께서는 완전하고 온전하신 사람이셨습니다. 그럼 왜 주님의 사람이심을 주님의 형제인 야고보나 유다가 누가복음을 기록하지 않고 이방인인 누가를 하나님께서 사용하셨는지 생각하게 됩니다.&lt;br&gt;저희는 주님께서 유대인을 뛰어넘어서 온 세상 만민 가운데 뛰어나신 분이심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의 족보는 마태복음의 족보와는 다릅니다. 마태복음은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아브라함과 다윗의 계보를 이어 오신 왕으로 기록합니다. 하지만 누가복음의 계보는 아브라함과 다윗을 뛰어넘어 아담의 계보까지 가십니다. 이 완전한 사람은 유대인을 뛰어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분이십니다. 이 예수님을 추적하고 그 근원부터 자세히 살펴가면 점점 더 하나님으로 가까이 가게 되고, 또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만 말미암아 하나님께로 갈수 있음을 알게 됩니다.&lt;br&gt;&lt;br&gt;이 서신을 받는자는 '데오빌로 각하'입니다. 그는 로마의 관리였던것 같습니다. 그 이름의 뜻은 '데오'가 헬라어로 '신', '빌로'는 '친구'라는 뜻입니다. 그래서&amp;nbsp;&amp;nbsp;'하나님의 친구'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이방인들은 자기들의 이방신을 생각했겠지만, 그리스도인인 누가에게 있어서 데로빌로의 이름의 뜻은 달랐습니다.&lt;br&gt;누가는 이 데오빌로를 향해서 이 편지를 쓴 것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편지를 이 복음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주셨습니다. 이 편지를 쓰는 일에는 특별한 계시나 환상이 없었습니다. 모든 일을 자세히 살펴서 이 일을 자세히 기록합니다. 누가의 데오빌로를 향한 관심과 헌신이 참 수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좇아서 할 때에,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을 가지고 할 때에 주님께서는 그 일을 놀랍게 사용하심을 생각하게 됩니다.&lt;br&gt;&lt;br&gt;누가는 사도행전에 처음 등장합니다. 누가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하였습니다.&lt;br&gt;&lt;br&gt;바울이 이 환상을 본 후에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드로아에서 배로 떠나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압볼리로 가고 거기서 빌립보에 이르니 이는 마게도냐 지경 첫성이요 또 로마의 식민지라 이 성에서 수일을 유하다가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처가 있는가 하여 문밖 강 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더니 (행16:10-13, 개역한글)&lt;br&gt;&lt;br&gt;15장, 14장,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것은 바울과 실라, 바울과 디모데, 등으로 3인칭 시점으로 기록되어 있다면 16장에서는 처음으로 &quot;우리가&quot;로 자신을 포함한 2인칭 시점으로 기록됩니다. 그래서 16장에서 누가가 합류한 것으로 보입니다. 16장은 빌립보가 그 배경인데요. 루디아라는 여자가 처음으로 구원을 받았고, 귀신들린 여종과, 빌립보 간수가 구원받습니다. 누가는 빌립보에 그냥 남습니다. 그래서 17장에서는 다시 3인칭 시점으로 &quot;저희가&quot;로 사용됩니다.&lt;br&gt;그러면 누가가 왜 빌립보에서 이와같은 일을 겪게 되었는가 생각하게 됩니다. 누가는 바울과 실라와 함께 함으로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힙니다. 그러나 이 일은 매우 놀라운 결과로 나타납니다. 빌립보 간수가 구원받고, 놀라운 얘기를 듣습니다. 이제 누가는 바울을 버리지 않고 빌립보에 남습니다. 누가는 바울과 떨어지지 않는, 사랑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계기는 하나님께서 감옥에서도 함께하시는 놀라운 사역을 보았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lt;br&gt;또 바울은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놀라운 사람이었지만, 왜 그 육체에 가시가 있었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물론 이는 바울이 자고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또다른 이면으로는 그 가시를 치유하기 위해서 의원인 누가가 바울과 항상 함께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에서 바울의 자세한 행적이 기록됩니다.&lt;br&gt;그리고 누가와 바울은 20장에서 다시 함께하게 됩니다.&lt;br&gt;&lt;br&gt;그들은 먼저 가서 드로아에서 우리를 기다리더라 우리는 무교절 후에 빌립보에서 배로 떠나 닷새만에 드로아에 있는 그들에게 가서 이레를 머무니라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저희에게 강론할쌔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행20:5-7, 개역한글)&lt;br&gt;&lt;br&gt;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갈것을 결심합니다. 그런데 성도들은 바울을 아끼는 마음으로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고 합니다. 그가 예루살렘에 가면 잡힐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갈것을 말씀합니다. &lt;br&gt;&lt;br&gt;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보라 내가 너희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지금은 너희가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줄 아노라 (행20:23-25, 개역한글)&lt;br&gt;&lt;br&gt;바울은 이를 개의치 않고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lt;br&gt;&lt;br&gt;수일 후에 벨릭스가 그 아내 유대 여자 드루실라와 함께 와서 바울을 불러 그리스도 예수 믿는 도를 듣거늘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시방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하고 동시에 또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바라는고로 더 자주 불러 같이 이야기하더라 이태를 지내서 보르기오 베스도가 벨릭스의 소임을 대신하니 벨릭스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을 구류하여 두니라 (행24:24-27, 개역한글)&lt;br&gt;&lt;br&gt;벨릭스라는 사람은 2년동안 바울을 구류하여 두었습니다. 예루살렘에 가서 잡혀서 2년동안 구류되었습니다. 그러면 누가는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저는 누가가 낙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사역을 하는 사도가 2년이나 잡혀있었지만, 하나님께서 더 큰일을 준비하심을 믿었을 것입니다. 누가는 2년이라는 시간을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준비했습니다. 그 일은 바로 누가복음을 기록하는 일이었습니다. 그가 예루살렘과 가이사랴를 돌아다니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이 누가복음을 기록합니다. 누가복음만이 주님의 어린시절과, 엘리사벳과 사가랴의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마리아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마리아 본인이 자세한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마리아의 찬가라든지, 목자들 앞에 나타난 천사들이 주님의 탄생을 찬양했던 일이든지, 나인성의 과부의 일이라든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라든지, 이 각각의 개인의 일들은 모두 예루살렘 성도들을 만난 후에 기록한 일이었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lt;br&gt;2년이라는 시간동안 바울이 구류된 일은 그 일 배후에 하나님의 놀라운 깊이와 높이와 넓이가 다른 뜻이 있었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 일은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갈 결심을 하지 않았다면 있을수 없는 일이었을 것입니다.&lt;br&gt;&lt;br&gt;&lt;br&gt;&lt;/p&gt;</description>
      <category>대전 중구 모임(요약글)/덕언 말씀(요약)</category>
      <author>박이레</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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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un, 24 May 2026 12:46:22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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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시편 23편 :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title>
      <link>https://leerenote.tistory.com/1986</link>
      <description>&lt;p data-ke-size=&quot;size16&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lt;br&gt;&amp;lt; 시편 23편 :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amp;gt; 메튜 카인 형제님 / 26년 4월 19일 일요일&lt;br&gt;&lt;br&gt;예, 이제 한 번의 집회가 남았습니다. 제가 통역하는 형제님께 오늘 매우 힘이 든 하루였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지만 참 즐거운, 참 기쁜 그 피로감이 있습니다. 이 마포 모임 성도님들에게 특별한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참 여기 한국 방문하는 기간 동안에 저에게 베풀어 주신 그 모든 친절에 감사를 드립니다. 참 이곳에 제가 처음 도착했을 때 저의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았는데도 저를 여러 가지로 도와주시고, 또 여러 집회에 함께 참석해 줌으로써 동역해 주신 것에 대해서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또한 통역해 주신 김형제님과 또 강형제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여기 있는 분들이 알아차리셨겠지만, 참 이 자켓을 입지 않고 또 힘들게 그렇게 일을 하신 두 분을 아실 것입니다. 참 이 통역을 해서 말씀을 전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lt;br&gt;이제 우리가 함께 성경을 펴서 여러분이 잘 알고 계시는, 아마도 제일 잘 알려진 시편인 시편 23편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참 오늘 이 시간 여러분이 알지 못하는 어떤 다른 새로운 것을 말하고자 함은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이 내용을 잘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을 다시 한 번 우리에게 새롭게 상기시키고, 또한 격려를 받기를 원합니다.&lt;br&gt;&lt;br&gt;&quot;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quot;(시 23:1-6).&lt;br&gt;&lt;br&gt;참으로 어느 누구보다도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돌보시는 분입니다. 여기에 우리가 익숙한 그런 구절이지만, 참 이건 놀라운 표현입니다. &quot;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quot; 참 그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나의 목자'라는 것입니다. 참 이것에 대해서 여러분이 잠시 생각을, 또한 우리의 마음을 이 앞에 두고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참으로 어느 누구보다도 우리 자신을 주님처럼 잘 돌보실 수는 없는 것입니다. 바로 그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lt;br&gt;여기 시편에는 세개에 아주 중요한 그럼으로 인한 선언이 나옵니다. &lt;br&gt;1. 우선 23편 1절에 &quot;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quot; 그래서 저는 이 영어 성경 구절을 읽을 때에 이것을 이렇게 조금 다르게 읽곤 합니다. &quot;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시기 때문에 내게 없는 것이 없다.&quot; 그래서 첫 번째 우리가 고백하는 것은 '내가 필요한 모든 것을 나는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lt;br&gt;2. 그리고 4절에 &quot;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quot;을 두 번째로 말하고 있습니다.&lt;br&gt;3. 그리고 세 번째로 6절 마지막 부분에 &quot;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quot;&lt;br&gt;참 아주 담대하고, 참 아주 귀중한 그러한 고백인 것입니다. 나는 내가 필요한 모든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나의 목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가 두려워하지 않는다'라고 고백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할 것이라는 고백에서는 '여호와께서 나를 초청하신 주인'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 가지 측면에서 이러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온전하게 보호'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lt;br&gt;&lt;br&gt;그래서 우리는 네 가지 소주제를 가지고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 우선 첫 번째로는 '하나님께서 모든 충만을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하나님의 충만하심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필요한 모든 것을 가지고 계신 가운데서, 우리를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게 하시는 것입니다. 2. 그리고 4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제공하시는 '안전'을 말하고 있습니다. 3. 그리고 5절과 6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공급하시는 '공급'을 말씀하고 있습니다.&lt;br&gt;그리고 첫 번째 하나님께서 모든 '필요한 것을 제공'하시는 분이라는 것에 대해서 그분이 '충만'하신 것에 대해서 먼저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로 인해서 내가 부족함이 없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께서는 영원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나를 만드신 분이고, 그리고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입니다. 그 모든 것을 가지고 계신 분이 바로 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분이 나의 목자이기 때문에, 나의 필요한 모든 것을 나는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1절은 특별히 내가 필요한 모든 것을 내가 가지고 있는 그 이유로, 바로 이 '여호와가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 달려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여기서 &quot;여호와&quot;라고 하나님을 그분의 이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름의 뜻은 '우리와 언약하신', 하나님과 '언약을 신실히 지키시는 분'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출애굽기 3장에서 그 불타는 떨기나무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시하실 때 사용하신 이름입니다. 모세는 이제 그가 받은 사명 가운데서 주저하면서 &quot;누가 나를 보냈다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quot;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quot;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quot;라고 말씀하시면서 바로 이러한 내가 너를 보냈다라고 말하라고 하셨습니다. 참으로 그것은 내가 '항상 존재해 왔고 그리고 항상 존재한다'는 것을 말하는, 그분은 스스로 존재하는 분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그분의 이름입 바로 하나님께서 임재하고 계신 그 떨기나무가 불에 타고 있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불에 타서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 떨기나무가 불에 타고 있지만, 그것이 사그라들지 않은 것처럼 하나님의 존재에 있어서 어떠한 다른 연료가 필요하지 않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며 그분이 존재하시기 위하여 다른 어떠한 필요 조건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충만하신 분'이며, 다른 환경에 종속되는 분이 아니며, 그분은 온전히 홀로 만족되는 분이다. 이것을 알려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의 능력은 결코 사그라들지 않습니다. 그분이 가지고 계신 자원은 결코 마르지 않는 것입니다. 그분의 신실하신 사랑은 항상 넘쳐 흐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온전히 모든 필요를 채우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특별히 신약적인 영어 단어로 하나님의 '아세이트'라는 영어 단어를 사용해서 그분의 스스로 모든 필요를 채우시는 면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다른 외부에 종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존재를 위해서 다른 무언가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다른 환경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들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lt;br&gt;그런데 참으로 감사한 것은 스스로 온전히 충만하신 분께서 자기 중심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영원히 스스로 충만하신 바로 그분께서, 이제 시편 23편을 통해서 그분이 우리와 같은 인생을 지금 얼마나 자상하게 돌보고 계시는지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분은 '주'시며, 그분은 '왕'이시며, 또한 그분은 '나의 목자'이신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환경 가운데 일어난 일들은 이제 그러한 것들로 인해서 나의 태도가 바뀌어 버립니다. 무엇이 일어나면 그것에 대응하면서 나의 모습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변의 모든 일들이 다 잘 진행되고 있을 때, 이제 나는 너무나 활기차고 기분이 좋고 이제 세상의 정점에 서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런데 아주 작은 슬픈 소식 하나만 들려와도 우리는 금방 낙심되고, 슬픔에 잠기고, 그리고 힘이 빠져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과 저에게는 참으로 너무나 공감되는 그러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목자이신 하나님께서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참 &quot;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동일하시다.&quot;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다른 사람들이 그분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승인을 갈망하는 그런 분이 아니었습니다. 참 우리와 상관없이 그분은 예전에도 그러신 분이었고, 또 현재도 그러신 분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아세이트'라는 단어가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스스로 충만하신 것'을 말하고 있는 단어가 말하는 바입니다. 그분은 사람들의 존재와 상관없이 그분은 과거에도 그러신 분이고, 지금도 그러신 분인 것입니다. 바로 그분으로 말미암아 나는 필요한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lt;br&gt;&lt;br&gt;23편 1절은 이와 같은 아주 놀라운 담대한 고백을 하고 있는 구절입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히브리 원어에서는 이것이 단지 '4개의 단어'로만 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어로서는 네 단어인데, 영어 단어로서는 10단어입니다. 그리고 제가 들리기에는 한국어로는 한 27 단어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단지 4개의 히브리어 단어지만, 참 여기에 거대한 파도와 같은 아주 커다란 충격을 우리에게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lt;br&gt;참 이 신뢰하는 것, 우리가 만족하는 것, 이것은 우리가 일터에서 열심히 노력해야만 얻는 그런 것으로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 신뢰와 이런 만족감, 이것은 여러분이 어떤 돈을 많이 벌어야지만 누릴 수 있는 그러한 것으로 제공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 신뢰하고 만족이라는 것은 어떤 탐심과 대조적인 것으로 여기에 제시되어 있습니다. 신뢰하고 만족하는 것은 세상적인 것, 그것을 추구하는 것과 대조되는 것으로 여기에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신뢰와 탐심을 이제 여러분이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는 것과 대조되는 것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과 대조되는 것으로 이 구절은 말하고 있습니다. 참 여기서 나오고 있는 이 신뢰와 만족감은 내 스스로 내가 가진 것보다 더 많이 얻어야 되겠다고 추구하고, 내가 저것을 탐내고, 그런 것으로 인해서 얻어지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참 내가 더 많은 것을 가지고, 내가 어떤 것을 추구하고, 더 높은 것을 구하는 그런 것이 우리에게 만족을 준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lt;br&gt;성경이 말하고 있는 그 복된 길은 &quot;그 죄를 사함을 받는 자가 복이 있다&quot;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1절에서는 이것을 말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얼마나 많이 가졌든지 간에, 여러분이 더 많은 것을 추구하든지 간에, 사실 여러분은 지금 여러분에게 필요하지 않는 것을 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이 실제로 정말로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이었다면, 그것은 여러분에게 이미 주어졌을 거라고 이 구절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나의 목자 때문에 그분을 모시고 있는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많은 필요들을 이 시대에 말하고 있지만, 제가 여러분들을 둘러보면 여러분들은 모두 적당한 옷을 차려 입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가운데 어느 누구도 배고파서 굶주리고 있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만약에 그런 분이 있다면은 집회 후에 저에게 오셔서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물론 그분과 좋은 불고기 식사를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바로 이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주께서 여러분의 목자시면, 여러분의 모든 필요한 것을 지금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라도 이제 잠시 멈춰서 깊게 우리는 안도의 호흡을 하면서, 하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 감사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시고, 하나님께서 지금도 나를 돌봐주시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진심으로 언제나 감사드릴 수 있습니다.&lt;br&gt;&lt;br&gt;그리고 2절에서는 그 &quot;양을 푸른 초장에 누이시는 모습&quot;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는 아주 만족한 그 양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실 양을 그렇게 누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양들이 이제 온전히 안도하고 만족했을 때, 그 목자가 모든 필요한 것을 공급했을 때, 그 양들은 그렇게 풀밭에 누워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quot;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셨다&quot;라고 말한다는 것은 이제 나는 그 목자를 신뢰하고 있다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때에만 양이 눕기 때문입니다.&lt;br&gt;더 찾아볼 필요는 없습니다마는 잠시 마가복음 6장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거기서는 많은 무리가 주님께로 모여들었고, 우리 주님께서는 그들을 보고 &quot;그들이 목자 없는 양같이 불쌍히 여기시며&quot;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참 영적인 목자로서 그들을 대하시며, 그들에게 가르치심으로써 영적인 양식을 주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때 이 많은 무리들은 굶주렸고, 그리고 이미 날이 늦었습니다. 제자들은 이런 가운데 걱정을 하였고, 그들이 어떠한 먹을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마가복음에 기록된 우리 주님의 말씀은 이것입니다. &quot;이제 그들을 푸른 풀밭에 앉게 하라.&quot; 그것은 마치 이 시편의 23편 말씀과 같은 것입니다. &quot;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quot; 그분은 선한 목자로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고 있습니다.&lt;br&gt;2절과 3절에서는 '4개의 동사'가 나오는데 그 모든 행동을 바로 이 목자께서 행하고 계십니다. 2절에 &quot;나를 누이시며&quot;, &quot;인도하시고&quot; 3절에 &quot;소생시키시고&quot;, 그리고 다시 한 번 &quot;인도하시는도다.&quot; 우리 주님께서 그 모든 것을 아시고, 나의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홀로 스스로 모든 필요한 것을, 충만하신 분인 주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lt;br&gt;&lt;br&gt;이제 그 다음 부분으로 이 주님께서는 '우리를 어느 장소로 인도하고 계시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그 장소는 바로 &quot;푸른 초장&quot;이고 &quot;쉴만한 물가&quot;이고 그리고 의의 길입니다. 그래서 우선 첫 번째 두 장소를 살펴보겠습니다. 1. 우선 첫 번째가 푸른 초장이고, 2. 두 번째가 아주 잔잔한 쉴만한 그 물가입니다.&lt;br&gt;저는 몇 년 전에 이제 헬리팩스의 도심의 중심지로 이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제 친구는 저의 그런 모습을 보고 교회에 그 넓은 집을 놔두고 이제 번잡한 도시 가운데로 들어가는 저를 이상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참 이 헬리팩스가 이 서울 시내만큼 복잡한 곳은 아니지만, 그래도 시내이기 때문에 거기도 아주 분주한 곳이 됩니다. 그런데 사실 저는 도시에서 사는 걸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그 도시의 여러 가지 모습들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도시에 살다 보니 이제 그 시골 풍경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를 저로 하여금 느끼게 합니다. 그 도시 바깥에 그 한적하고 그 고요한 풍경의 모습을 다시 그리워하게 됩니다.&lt;br&gt;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 아주 조용하고 차분한, 그런 톤으로 그리신 것을 느끼신 적 있습니까? 주로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색깔이 초록색, 파란색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실 우리의 눈이 아주 강렬한 색깔을 피해서, 그 피곤함을 덜어줄 수 있도록 부드러운 색깔로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시간을 사람들이 인공적으로 만든 그 빛으로 눈을 혹사시키고 있습니다. 네온 사인이라든지, 여러 가지 화면들이 그렇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많은 시간을 이제 사람들이 만든 공간 안에서, 이제 사람들의 밝게 만든 빛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 그 푸른 초장이 무엇인지를 잘 모를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간이 날 때마다 이제 밖으로 나가서 초록색 잔디를 보고자 하고, 파란색 그 물을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목자께서 우리를 진정한 그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참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너무나 많은 스트레스와 불안과 그리고 긴장감을 조성하고 있습니다. &lt;br&gt;그런데 바로 목자께서는 그러한 세상 가운데서 우리를 어떻게 인도하실지를 아는 분입니다. 참으로 이 목자와 함께 지내보신다면 여러분은 스스로 그곳을 떠나서 혼자서 방황하는 것을 다시는 원치 않으실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quot;나를 따르라.&quot; 이것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quot;나를 따르라. 그리하면 쉼을 얻으리니&quot; 참으로 아직 이 주님을 알지 못하고 여러분의 어깨에 여러분의 그 걱정과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면, 이 주님께 나오시기 바랍니다. 23편, 이 시편에서는 바로 이 영혼이 잔잔하게 쉴 수 있는 것을 그림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푸른 초장으로, 쉴만한 물가로 그 영혼을 인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그분 앞에 나오는 것이, 그분을 따르는 것이 지혜로운 길입니다.&lt;br&gt;&lt;br&gt;그리고 이제 그다음 구절에는 &quot;의의 길로 인도&quot;하고 계십니다. 이 '길'이라는 것은 특별히 여러 가지 마차들이, 트럭들이, 그런 무거운 짐차들이 다녀서 그 길이 닦여져 있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길은 '누군가가 먼저 지나가서 그 길이 만들어져 있는 것'을 말하고 있는 길입니다. 바로 그 길을 먼저 가신 분이 이 목자이신 주님이십니다. 그분께서 '순종하심'으로 그 '의의 길을 먼저 가신 분'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른다면 우리는 분명히 맞는 길을 가고 있다는 확신을 누릴 것입니다. 그분께서 그 길로 가시고 이제 우리에게 &quot;나를 따라오라.&quot;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참으로 옳은 길로 가셨습니다.&lt;br&gt;'데이비 깁스'라는 분이 이 시편 23편에 대해서 이제 이렇게 교제하신 적이 있습니다. 참 여러분들이 이 내용에 대해서 이제 잘 주의 깊게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quot;여러분은 지금 현재 그 옳은 의의 길로 가고 있습니까? 그런데 어느 누구도 모르는 여러분의 생각이 그 길을 벗어나고 있지는 않습니까?&quot; 23편은 우리 주님께서 복음으로 인도하시는 길 외에, 그것보다 더 푸른 초장은 없다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혹시 이럴 때가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의 길이 옳다는 것은 내가 알고 있습니다. 그 길로 가야 되는 건 알고 있는데, 혹시 저 길이 더 푸른 것은 아닐까요? 거기가 더 행복한 길은 아닐까요? 우리가 혹시 이렇게 생각할 때가 있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지금 현재 의의 길로 가고는 있지만, 여러분의 생각은 지금 다른 곳에 향해 가고 있지는 않은 것입니까? 그것까지도 지금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지금 위험 가운데 노출되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증거입니다. 발은 이쪽으로 가고 있지만, 여러분의 마음속으로는 주님이 인도하시는 방향이 아니라 다른 쪽으로 마음이 향하고 있는 위험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의의 길로 따라가는 데서 조금 피곤하고 지치기 시작하여, 이제 주님을 따라가는 길에서 조금씩 벗어남이 마음속에 이미 생겨나고 있지 않습니까? 참 여기에 여러분과 주님이 지금 가까이 걸어가고 있다고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그 똑같이 가고 있다가 아주 살짝 그 각도가 벗어난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단지 한 2도 정도가 어긋난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아주 작은 차이였지만, 걸어가면 걸어갈수록 그 간격은 더욱 벌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 23편의 3절 말씀은 이 아주 중요한 질문을 우리에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길로 가기를 원하는가?' 그것을 지금 걸어가고 있다면 그 마음속은 어디를 원하는가를 질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 누구를 따라가고 있는가?' '나는 결국에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를 질문하고 있습니다.&lt;br&gt;참 우리는 놀라운 목자를 따라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목자를 따라가는 그 길은 이 위험한 세상 가운데서, 많은 시험이 있는 가운데서 걸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는 푸른 초장으로 우리를 인도하시고,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고, 의의 길로 인도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 주님께서는 &quot;나의 영혼을 소생시킬 필요&quot;가 있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주님께로 다시 우리를 끌어당기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잠깐 다르길로 벗어나서, 우리는 진흙창에 빠져서, 아주 더러워진 채로 발견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내 자신도 그러한 진흙탕에 빠져 있는 모습을 발견할 때가 있지만, 그러한 순간에 정말로 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우리 주님께서 나의 목자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그분에게로 나를 당기시고 나의 영혼을 소생시키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 가운데는 예전에는 우리 주님과 아주 가깝게 걸어가신 분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가운데서 지금 잠시 벗어났다면, 이제 우리 주님께서는 다시 한 번 여러분의 마음을 흥분시키시고, 다시 한 번 그분의 길로 회복시키셔서 그분의 풍성한 가운데 따라오도록 만드시는 것입니다.&lt;br&gt;&lt;br&gt;우리는 의의 길로 따라갈 때에 이 '성경책'이 우리에게 얼마나 필요한지를 보게 됩니다. 바로 여기에 그 하나님의 뜻이 담겨져 있는 의의 길로 인도하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분의 말씀으로, 이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해 순종함을 배우고, 그리고 절제하고, 그분을 따라가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0장에서는 &quot;내 양은 나를 알며, 내 목소리를 듣는다.&quot;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은 바로 우리 '목자의 음성'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 책을 따른다면 우리는 결코 주님을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lt;br&gt;우리 하루의 일과 가운데서도 너무나 많은 다른 목소리들이 우리에게 들려집니다. 참 우리 주위의 많은 방송의 소리들이, 여러분의 직장에서 다른 친구들의 그 외침이, 여러분의 학교에서 친구들의 목소리가, 그리고 소셜미디어에서 많은 내용들이, 여러분의 머리를 혼란스럽게 하고 계속 흔들어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성경 말씀을 통해서 그 목자의 음성을 듣고 우리는 다시 되돌아와야 되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하고 계신 것처럼 이와 같은 집회에 나와서 이 성경 말씀을 함께 듣고, 또는 개인적으로 성경 말씀을 묵상하면서, 계속 이 목자의 음성을 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필수적인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 앞에서 어떤 것이 바른 방향인지 우리의 그 초점을 다시 재조정해야 되는 것입니다.&lt;br&gt;그리고 바로 '목자'께서는 '여러분을 인도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그 목자께 얼마나 '귀중한 존재'인지를 알고 계셔야 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여러분을 다시 회복시키기 위하여, 그 양 무리에 두시기 위하여 어떠한 대가를 치르셨습니까? 그분께서는 결코 그분의 소중한 양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으실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 주님께서는 개인적으로, 그 각각의 양들을 소중히 여기시고 돌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시편 23편에서 강조하고 있는 바입니다. 바로 그분은 '나의 목자'신 것입니다.&lt;br&gt;&lt;br&gt;그런데 우리가 4절을 보게 될 때 놀라운 면이 있습니다. 이 4절에 보면 영어 성경에는 이제 굉장한 반전을 예고하는 그러한 표현이 여기 들어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3절에서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데, 그러한 가운데서도 우리가 예상치 못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4절에서 그러한 가운데서 '주님이 제공하시는 안전'을 보게 됩니다. &lt;br&gt;어떤 사람들은 여러분이 이러한 바른 길로 간다면 여러분의 삶이 아주 쉽고 편안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이 아주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이제 여러분이 교회에서 잘 섬긴다면,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아주 좋은 직장을 줄 거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자녀들은 아주 훌륭한 아이들이 될 거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자동차도 결코 수리할 필요가 없을 거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이 땅에서 아주 넓은 집을 차지하게 될 거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아주 건강하게 늙은 노년까지 살고, 또한 많은 자손을 둘 거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복을 얻겠다는 그러한 복음에 대해서, 이 4절 말씀은 아주 반대로 그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아주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된다면 어떠한 어려움들도 없을 거라는 그런 성경적인 교리는 전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lt;br&gt;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잘 살고 있지만, 여러 가지 고난과 어려움을 만나면서 '왜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러한 일을 허락하셨는지' 궁금해하게 됩니다. &quot;저는 이것은 불공평하다고 생각합니다. 참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 아닙니까? 그런데 왜 저한테 하시는 일은 선하지 않는 일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까?&quot; 그것에 대해서 6절은 대답하고 있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잠시 후에 다루어 보겠습니다. &lt;br&gt;그런데 사실 공평하지 않는 말은 이것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셨다가 이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인도하셨을 때, &quot;어,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벗어난 것이다.&quot;라고 말한다는 것이 잘못된 것입니다.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신 그 목자께서, 그 동일한 목자께서 또한 우리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참 여러분이 통과하고 있는 그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주님의 골짜기가 아니라고 오해하지 않길 바랍니다. 그래서 이 4번 주제에 대해서 1. 첫 번째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우리의 삶은 골짜기가 있다'는 것입니다. 2. 그리고 두 번째로 그러한 '골짜기 가운데서 주님이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3. 주님께서는 그러한 골짜기에서 우리를 위해서 무장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lt;br&gt;삶은 이 '어둠의 골짜기'가 있습니다. 한국어 성경에 어떻게 되어 있는지 확인을 하였습니다. 여기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고 했을 때 이것은 단지 사망을 겪는 그것만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분명히 사망을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망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와 같은 어려운, 어두운 경험을 말하고 있습니다. 참 우리는 얼마나 많은 수천보다 더 &quot;아이고, 내가 죽겠어!&quot;라는 그런 말을 하곤 합니까? 그 영어 표현으로도 아 거의 죽을 뻔했네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사실 실제로 죽진 않았지만 실제로 그런 경험 가운데서 그 죽음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것을 사망의 골짜기라고 부릅니다. 여기 양들이 그 푸른 초장을 지나온 양들이 있습니다. 참 목자가 그들과 함께 있고, 그 옆에는 쉴 만한 물가가 흐르고 있고, 하늘에는 이제 햇빛이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목자는 이제 그들의 집과 더 가까운 더 풍성한 초장이 있는 곳으로 양을 인도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목적지로 가기 위해서는 아주 깊고 좁은 협곡을 통과해야만 합니다. 그 해는 거의 질 것 같고, 그리고 그 산에 가로막혀서 진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제 산 그늘이 져 있고 모든 것이 아주 어두워져 보입니다. 그리고 그 숲에 숨어 있는 늑대와 코요태와 그 들짐승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제 양들은 '나는 이 골짜기를 통과하지 못하고 죽겠구나.'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인생이 때때로 그와 같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불확실하고, 지금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가운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의 건강에 문제가 있고, 또한 재정적인 문제로 있어서, 내가 이것을 어떻게 해결해야 될지 모르는 상황 가운데 있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인간관계에 어떤 문제가 있어서 매우 수치스럽고, 이것을 어떻게 해결해야 되는지 모르는 상황 가운데 있습니다. 참 우울증과 많은 걱정 가운데서 사실 거의 죽은 것 같은 느낌을 가지고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그러한 골짜기가 우리 삶의 일부분입니다.&lt;br&gt;그런데 이러한 환경 가운데서 우리가 안전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를 이 구절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안전을 &quot;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 때&quot;에 얻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골짜기가 다 끝나서야 그 안전을 확보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서도 안전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이 골짜기는 우리의 여정의 일부분입니다. 하지만 그 골짜기가 결코 우리의 최종 목적지는 아닙니다. 우리의 최종 목적지는 '여호와의 집'입니다. 우리가 사망의 골짜기로 다닐 때는 우리의 목자께서 이 GPS 같은 것이 없어서 길을 잃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제 내가 어느 길로 인도해야 될지 모르겠다라고 해서 이 길로 인도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소리입니다. 참 그분께서는 여호와이시고, 그분께서는 진실과 사랑이 충만하신 분입니다. 이 선한 목자께서 우리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전체를 걸쳐서 우리를 함께 인도하고 계십니다.&lt;br&gt;&lt;br&gt;그리고 여기 4절에서는 아주 큰 전환점이 나옵니다. 우리는 1절에서 &quot;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quot;, &quot;그가 나를 누이시고&quot;, &quot;그가 나를 인도하시고&quot;, &quot;소생시키시고 인도하시는도다&quot;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 말 성경에서는 이제 &quot;주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quot;라고 되어 있는데요. 4절에서 이제 앞에서는 계속 &quot;주께서&quot;라고 되어 있었는데, 여기서는 &quot;당신이&quot; 우리 말에서 이제 '주께서'라는 것이 그냥 대명사, 이제 '당신이'라고 원어에는 되어 있습니다. 이 시편 기자인 다윗은 그 위험하고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 그때 더욱 주님이 자신과 가까이 있다는 것을 느낀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 주님에 대해서 &quot;당신이&quot;라고 부르고 있습니다.&lt;br&gt;이전까지는 그 목자께서 다윗 앞에서 부르시면서 &quot;내가 여기 있다. 다윗아, 나를 따라오너라!&quot; 이렇게 부르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다윗은 지금 이 어둡고 어려운 순간에, 우리 주님께서 바로 그의 옆에 붙으셔서 그와 함께 있으면서 &quot;내가 지금 너와 함께 있다.&quot; 이것을 다윗은 느낀 것입니다. &lt;br&gt;그리고 이 히브리어 단어로 이 시편 23편을 펼쳐보면, &quot;주께서 나와 함께하신다.&quot; 이 표현이 이 시의 가장 중심부에 놓여 있습니다. 히브리어에서는 어떤 시를 기록할 때에 가장 중요하고 중심되는 주제를 그 모든 시의 '가운데' 놓여지게 만듭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가는 위험하고 어려운 순간에, 바로 &quot;'당신이 나와 함께하심으로' 내가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quot;라고 가장 강조해서 가운데 두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lt;br&gt;때때로 이제 아주 오래된 도시, 그래서 다 부서지고 폐허가 되신 도시를 지나갈 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잠깐 다른 이야기를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 도시를 지나가면서 자기 가족을 태우고 가는데, 이제 뒷자리에 있는 아이들에게 &quot;누가 이 도시에 들어가서 혼자 한번 밤을 새우고 나올 수 있겠냐?&quot;라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그 뒷자리에 앉아 있는 모든 아이들은 어느 누구도 감히 나서서 자신이 하겠다라고 말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오래된 무너진 빌딩 앞에서 &quot;그러면 이 건물 안에 들어가서 밤을 지새우고 나온다면 100만 달러를 주겠다. 누가 하겠느냐?&quot;라고 물었습니다. 그래도 그 뒷자리에 와 있는 아이들 어느 누구도 자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아빠는 아이들에게 다시 한 번 이렇게 물어보았습니다. &quot;이제 내가 함께 그 밤을 지낸다면, 누가 나와 함께 갈래?&quot;라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 있는 모든 아이들이 내가 그렇게 하겠다라고 말했습니다. 참 그와 같은 차이를 만들어내는 게 무엇입니까? 다른 어떤 돈이 아니라, 바로 '누가 우리와 함께 했는지'가 그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참으로 바로 이러한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가신다. 이것이 우리의 모든 태도를 바꾸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안전을 주고 계십니다.&lt;br&gt;&lt;br&gt;잠깐 연습 문제를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한 가지 문제를 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께서 생각해 보시고 이제 속으로만 한번 답변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소리 내서 답변할 필요는 없는데요. 이제 질문은 이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두려움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다른 다음 문제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이 두려워하고 있는 바로 그 문제가 주님께서 다루기에 너무 큰 문제입니까?' 참 여러분이 이 질문에 대답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그 여러분의 문제를 주님 앞에 맡겨드린 적이 있습니까? 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갈 때에 바로 주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lt;br&gt;물론 다윗이 그냥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분명히 이 무서운 골짜기를 갈 때에 그 위협 가운데서 두려움을 느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 두려움을 주님께로 가져가서 맡긴 것입니다. 그분에게 맡기고 그분이 자신과 함께함을 알고 평안을 누린 것입니다. 다윗은 주님께서 아주 경험이 많은 목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주께서 가지고 계시는 두 개의 목자의 도구를 보게 됩니다. 그래서 세 번째로 말씀드린 것 같이 우리 주님께서는 지팡이와 막대기로 무장하시고 그 죽음의 골짜기에서 우리를 보호하고 계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lt;br&gt;이 '막대기'는 단지 목자가 지팡이로 사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양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목자가 가지고 있는 특별한 무기입니다. 우리는 사울 앞에서 다윗이 그가 사자와 어떻게 싸웠는지를 말할 때 이를 기억할 것입니다. 때때로 그 막대기 꼭대기에는 철로 쌓여져 있고 그래서 그 막대기가 아주 강력한 공격 무기가 되도록 만듭니다. 그리고 시편 2편에서는 오늘 오전 시간에 다루었듯이, 이제 그 왕께서는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우리의 목자는 그냥 연약한 힘없는 자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목자께서는 이 막강한 힘을 가지고 계신, 그 근육을 가지신 능력의 목자이시며, 우리가 대하는 모든 위협을 다 폐퇴할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막대기는 심판의 날, 그 마지막 날에 이 양들의 수를 계수할 때 사용될 것입니다. 그 막대기 아래로 양들을 지나가게 하시며 그 양들의 수를 세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막대기는 그 '양들의 안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막대기가 그 목자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을 볼 때에 양들은 자신들이 안전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lt;br&gt;그리고 이 '지팡이'라는 것은 그 주위의 '양들을 모아들이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양처럼 본성적으로 길을 벗어나는 경향이 있는 존재들입니다. 이러한 양들에게 그들의 길을 살짝 벗어날 때마다 목자는 지팡이로 다시 그들을 걸어서 데려오는, 교정하는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그림은 다시 한 번 이 목자께서는 우리의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신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필요한 회복을 주시는 분입니다.&lt;br&gt;&lt;br&gt;이제 마지막 남은 구절에서 이 '주께서 우리에게 공급하시는 것'을 말씀하겠습니다. 이제 여기서는 그 시편의 그림이 약간 달라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제 그 푸른 초장의 모습이 아니라, 이제 '상 앞에 있는 모습'입니다. 이제 목자의 손에 있는 지팡이와 막대기가 아니라 우리의 손에 있는 '잔'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이 상에 손님으로 초대되어 있으며 그리고 우리 주께서 그 초대를 하신 주인이십니다.&lt;br&gt;우리 캐나다에서는 손님이 우리 집을 방문하게 됐을 때, 이제 손님의 자켓을 받아서 그리고 벽 옷걸이에 걸어 놓는 것이 그 주인이 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제 여러분들이 그 방문한 손님에게 필요한 슬리퍼 같은 것을 제공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고대 이 시편에 기록된 시대에는 손님이 방문했을 때는 그들의 손님의 발을 씻겨주고, 그리고 그 기름을 발라서 그들에게 마치 향품과 같이 제공해 주는 것이 주인의 의무입니다. 이 23편에 나와 있는 이 기름 부음은 그와 같은 것입니다. 이것은 왕이나 제사장들에게 그들의 직분을 위해서 기름 부음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손님을 대접하는 그 '접대의 기름'을 바르고 있는 것입니다. &lt;br&gt;때때로 저는 어떤 어려움 가운데서 이제 나는 그냥 불쌍한, 돌보지 않는 그런 버려진 양이고 주님께서 나 같은 자를 관심을 둘까? 이렇게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어떤 놀랄 만한 그런 영적인 은사도 가지고 있는 것이 없고, 나는 아주 잘 알려진 그 가문에서 난 사람도 아니고, 그냥 맨 뒷자리에 앉아 있거나, 아니면 그마저의 자리도 나를 위해 제공되지 않는 그냥 아무도 모르는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구절을 다시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그 주님께서 우리를 그분의 상으로 초대하시고, 이제 결코 비어지지 않는 그 잔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가 시편 23편을 볼 때마다 우리가 바로 이러한 주님께 속한다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일인지를 우리는 다시 한 번 상기하게 됩니다. 참으로 이 목자께서는 우리를 돌보시고 우리에게 모든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고 계십니다.&lt;br&gt;1절과 3절에서는 우리를 '인도'하시고, 4절에서는 우리와 '함께' 하시고, 그리고 5절에서는 우리와 함께 따라오시면서 우리를 '초청'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6절에 &quot;정녕 나를 따르리니&quot; 참 따르시는 분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quot;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quot;&lt;br&gt;&lt;br&gt;우리는 지난 시간에 모세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는데요. 출애기 33장에 보면 모세는 그러한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모세에게 그 영광을 보이시며, 자신의 이름을 나타내시며, 나는 선하신, 그리고 자비하신, 그리고 신실하신 하나님이라고 계시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거기서 그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이라고 자신을 나타내십니다. 그래서 여기서 그 앞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말씀하시면서 말씀하신 그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여기 다윗을 따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이 하나님의 놀라운 성품들을 우리가 더욱 알고 경험하기를 원합니다. 이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계속 그를 따라가는 것입니다.&lt;br&gt;출애굽기에서는 그들을 실제로 따라가고 있는 존재들이 그 악한 바로와 군병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광야에서는 이제 그들이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그들을 따르고 있다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그 '집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해서 우리를 따라오는 것입니다. 제가 이 마포에서 말씀드렸는지 모르겠지만, 또 다른 집회에서 함께 이것을 말씀을 드렸습니다. '참 우리 인생의 모습이 광야를 지나가는 여정과 같다.' 하지만 우리가 그 출애굽한 것은 단지 목적 없이 광야를 배회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 주님께서 목자로서 우리를 분명한 방향으로 인도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집으로 인도하시고, 그리고 실제로 우리는 그 집에 거의 다달아 왔습니다. 참 우리 주님께서는 항상 선하시고 인자하심으로 우리를 대하셨습니다.&lt;br&gt;참으로 이 여호와의 집에 다다를 때까지, 이 목자께서 우리를 그분의 신실하심으로 그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돌보고 인도하심을 우리가 감사함으로 따라가게 되길 바랍니다. 여러분께서 경청해 주셔서 감사를 드립니다.&lt;br&gt;&lt;br&gt;&lt;/p&gt;</description>
      <category>외국 형제님/메튜 카인 형제님</category>
      <author>박이레</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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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at, 23 May 2026 19:08:52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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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복음 :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으라</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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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lt;p data-ke-size=&quot;size16&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amp;lt; 복음 :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으라 &amp;gt; 매튜 카인 형제님 / 26년 4월 19일 일요일&lt;br&gt;&lt;br&gt;안녕하십니까, 다시금 시편 34편으로 저희가 복음을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lt;br&gt;&lt;br&gt;&quot;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quot;(시 34:6).&lt;br&gt;&lt;br&gt;네, 매우 짧은 구절인데요. 저희가 다시 한 번 읽으면서 이해하도록 하겠습니다. &quot;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 모든 환란에서 구원하셨도다.&quot; &lt;br&gt;제가 한국을 방문하기 전에 처음으로 방문한 아시아 국가가 있는데요. 바로 2016년에 중국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북경에는 지하철을 이용하면서 그곳에 영어도 함께 적혀 있었기 때문에 이용하는 데 불편이 없이 잘 이용하였습니다. 제가 머물던 호텔에서도 조금만 이동하면 그 지하철에 닿았기 때문에 쉽게 이동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느끼기에는 당시 베이징이 조금 더 서울보다는 복잡한 곳이었고, 제가 그곳에서 버스를 탈 때 일이 있었습니다. 제가 그 버스를 타고 내릴 때 제가 내려야 될 그 정류장을 지나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버스에 사람들이 굉장히 많이 있었기 때문에, 제가 문까지 가기에는 어려웠고 제가 밀려서 그 버스 정류장에 내릴 수 없었습니다. 제가 당시에 약간 당황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있는 곳과 또 제가 가는 곳 그 루트만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정류장을 지나쳐서 당황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중국어라고는 &quot;어, 안녕하세요.&quot; 그리고 &quot;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quot;라는 것뿐이었기 때문에 제가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그 사람들이 가득 있는 버스 안에서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을 때, 제가 곤경에 처해 있다는 것을 생각하였습니다. 제가 생각한 부분은 이 시편 34편이었습니다. 제가 이 구절을 생각하면서 중국어로는 할 수 없었고, 제 말로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손을 들고 &quot;아!!!&quot; 라고 외쳤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서 제가 곤경에 처했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그 버스가 저를 위해서 내려줄 수 있었습니다. 제가 외쳤을 때 그 공격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lt;br&gt;조금 제가 재미있는 이야기로 시작을 하였지만,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원리를 담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곤경에 처해 있고, 여러분은 버스 운전사에게 부르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께 여러분 자신이 곤경에 처해 있음을 외쳐야 합니다. 이러한 곤경에 처해 있을 때 다른 분들도 이렇게 외쳤고, 자신이 위험에 처했다는 것을 알렸습니다. 여기 기자인 다윗도 마찬가지로 자신이 곤경에 처해 있을 때 하나님께 외쳤고 자신의 어려움을 고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다윗을 구해 주셨고 오늘도 여러분을 구원해 주실 수 있습니다. 여기에 있는 모든 믿는 자들도 이와 같은 같은 간증을 가지고 있습니다.&lt;br&gt;&lt;br&gt;저는 한 번 곤경에 처한 것이 아니라 여러 번 있는데요. 이 삶이라는 것이 참 어렵습니다. 여러분이 아직 나이가 어리다면 이 곤경에 처한 일이 많이 없을 수도 있지만, 제가 미리 말씀드리는 것은 살다 보면 인생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참 인생이 어렵고, 또 여러분이 곤경에 처해 있을 때에 주님을 부르시기 바랍니다. &lt;br&gt;제가 여러 가지 곤경에 처해 있었지만, 제가 가장 큰 곤경, 가장 큰 어려움은 바로 죄로 인해 하나님과 떨어져 있는 사실이었습니다. 큰 산처럼 생각이 되었고 그 산에 오를 수 없는 산처럼 생각이 되었습니다. 너무나 그 빚이 컸기 때문에 제가 그 빚을 갚을 수 없는 큰 빚이 있었습니다. 제가 그 빚을 갚을 수 없었기 때문에 제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오직 하나님께 외치는 것뿐이었습니다. 제가 한 유일한 것은 주님께 부르짖는 것이었고, 또 제가 부르짖었을 때 우리 주님께서 저를 구원하셨습니다. 하지만 제가 아는 것은 주님께서 이미 그 구원을 위해 저의 죄를 다 담당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lt;br&gt;아마 여러분들 중에 마음 가운데 어려움이나, 슬픔이 있는 분들도 있으실 것입니다. 아마 재정적인 경제적으로 어려운 일이 있으실 수 있습니다. 또 불안하거나 마음이 어려운 가운데 있으실 수 있습니다. 또 관계에 대한 문제도 있습니다. 하지만 가장 여러분에게 임박한, 가장 큰 문제를 오늘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 문제에 대해서 어 내려 놓으신다면 우리 주님께서 여러분을 바로 오늘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lt;br&gt;&lt;br&gt;1. 첫 번째 문제점은 바로 '심판'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죄로 인해서 그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에서는 저희가 &quot;죽음 이후에 심판이 있다&quot;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가장 극악한 죄인이라고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저의 마음의 죄나,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죄나, 모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lt;br&gt;제가 어렸을 때 여름에는 그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라는 그 섬에 항상 방문하였습니다. 여름방학마다 제가 그곳에 가서 재미있었던 것은 바로 고카트, 미니 레이싱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저보다 5살 어린 동생이 있는데요. 그와 함께 그 고카트를 즐기면서 재밌게 방학을 보냈습니다. 그 고카트장에는 정말 지금 제가 타서 스릴을 느낄 수 있는, 정말 실제 고카트 레이싱카가 있었고요. 거기에는 또 다른 이제 장난감같이 이렇게 매우 천천히 가는, 아마 2키로 3킬로 정도밖에 갈 수 없는 그런 장난감 카트도 있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내 남동생보다 내가 5살이나 더 나이가 많기 때문에 내가 더 능력이 있다.' 하지만 거기에는 한 가지 규칙이 있었는데요. 이 큰 정규 고카트를 타기 위해서는 그 신장이 커야 했습니다. 제 남동생의 경우에는 키가 작았기 때문에 당연히 그 작은 고카트를 탈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당연히 당당하게, 담대하게 가장 큰 거기에서 좋아 보이는 고카트에 탑승해서 있었을 때에 거기 진행 요원에 의해서 제지 당하게 되었습니다. &quot;잠시만요, 그 신장이 어느 정도 되는지 한번 체크해 보고 그 차에 탈 수 있는지 안 되는지를 보도록 하겠습니다.&quot;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것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어린 제 동생보다 제가 얼마나 키가 크고 당당하게 이 이것을 탈 수 있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가 키를 쟀을 때 아마 한 2cm 정도 되는 정도가 모자르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제가 깨닫게 된 것은 그 동생보다 제가 아무리 크다고 해도 그 고카트를 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기준에 제가 못 미친다면 그 카트를 탈 수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보다 제가 조금 더 컸고 그는 작았지만, 중요한 사실은 우리 둘 다 작았다는 것입니다.&lt;br&gt;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생각할 때 어떤 사람은 자기보다 더 죄를 많이 지었고, 극악무도한 사람이다라고 생각을 하겠지만, 우리 모두 다 죄인이라는 그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의 기준은 무엇이냐면 여러분의 친구도, 여러분의 가족도, 여러분 주위에 있는 사람도 아니고, 바로 우리 주님이, '예수 그리스도가 기준'인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다 죄를 지었고, 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고, 죄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달려 죽으셨습니다.&lt;br&gt;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기도 합니다. '심판이 아직 이르지도 않았고, 심판이 보이지도 않는데, 내가 그것을 걱정해서 뭔 상관이 있냐?'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마 이 종교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고, 허망한 것이고, 또 그리스도로 되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거짓된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심판이 이른 적도 없었고, 또 심판도 앞으로 이르지 않을 거야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십자가의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심판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죄가 없으신 분이시고, 죄를 지으실 수도 없는 분이시지만, 우리의 죄를 위하여 그 십자가에서 달려 죽으셨습니다. 이사야서 53장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이 죄를 다 담당해 주셨습니다. 우리 '주님의 죽으심'이 우리 '심판이 임박했다'는 것을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또한 우리 '주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것'이 그 '심판이 있다는 것'을 또한 증거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7장에서도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우리 주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이 심판이 있다는 것을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아직 심판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는 저희를 위하여 길이 참고 계십니다. 베드로후서에서는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quot;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고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시기까지&quot; 길이 참고 계시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이 죄를 안고 하나님을 마주하게 된다면 이것은 굉장히 위험한 것이고, 그 심판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반드시 그날에 일어날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이 심판이 이르기 전에 구원받아야 합니다.&lt;br&gt;&lt;br&gt;제가 실제로 경험했던 어렸을 때 있었던 일인데요. 제가 잠자리 들기 전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우리 주님을 처음 만났을 때였는데요. 저는 이 죄가 있었기 때문에 주님 앞에서 살 수 없는 자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곤 주님 앞에서 우는 것이었습니다. 34편 6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quot;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 모든 환란에서 구원하셨도다&quot;라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첫 번째 문제는 심판이 임한다는 것이지만, 두 번째 문제는 여러분이 죄가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2. 이 죄가 있다는 것은 여러분이 '속박 가운데에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죄가 있다면 바로 죄의 노예 중에 있다는 것을 로마서 6장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lt;br&gt;아마 여러분들 중에서는 '반지의 제왕' 그 책을 알고 계시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사우론'라는 그 캐릭터가 악한 영인데요. 그 반지를 찾기 위해서 굉장히 노력하고 있는 그런 내용입니다. 잔인하고, 또 증오하고, 이런 여러 가지 나쁜 것들이 그 반지에 담겨 있다는 것을 그 책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 반지가 얘기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 죄악된, 어마무시한 것이 그 안에 담겨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반지가 그 소설에서 힘을 가지고 있는데 이 사람들의 마음을 꿰고 사람들을 이렇게 속박하는 그런 반지입니다. 그래서 어떤 인물이 그 반지를 소유하게 되면 성격이 변화하게 되고 이상하게 됩니다. 이 바로 반지와 같은 것이 여러분의 죄의 힘을 보여줍니다. 이 반지를 소유하려고 하는 그 마음과 같이 여러분들이 그 죄를 소유하고 있다면, 그 더욱 죄 가운데 속박되어지고, 또 여러분은 죄 가운데 거하게 되는 가운데 그렇게 됩니다.&lt;br&gt;아마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죄 정도야, 내가 다 컨트롤 할 수 있다.' 하지만 아셔야 되는 것은 죄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고 더 깊고, 더 무섭다는 것입니다. 그 죄는 여러분이 갚을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죄입니다. 죄는 보아뱀과 같습니다. 좀 특별한 뱀인데요. 제가 그 뱀이 하고 있는 것을 보여드리겠습니다. 그 보아뱀이 완전히 이렇게 잡아서 삼켜버리는 것입니다. 점점 더 타이트하게 엉켜집니다. 더 강하고, 강하게 엉켜집니다. 아마 이 보아뱀의 그 속박에서 견뎌낼 수 있고 도망칠 수 있다라고 생각하지만, 그럴 수 없고 점점 더 강하게 움켜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의 모습과 같습니다. 죄는 여러분을 점점 속박하고, 속박하고, 속박해서, 여러분이 그 죄로부터 벗어날 수 없게 여러분을 움켜 짓는 것입니다.&lt;br&gt;이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힘은 바로 우리 주님, 주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셔서 우리를 속박 가운데서 벗어날 수 있도록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때 그 뱀의 힘을 이기셨습니다. 제가 부르짖은 것과 같이, 우리 주님께서는 제가 부르짖었을 때 우리 주님께서 이미 저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제가 이 복음을 전할 때마다 항상 마음속에 바라는 것은 여러분들과 이렇게 대화하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제가 가장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하나님께서 얼마나 당신을 사랑하시느냐'입니다. 그리고 더 잘 여러분들께 말씀드리고 싶어 하는 것은, 이 구원이 바로 임박하게 이루어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점점 나이가 들수록, 점점 어른이 될수록,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 주님께서는 여러분의 죄를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시편 34편의 기자가 말하는 것처럼 여러분도 하나님께 부르짖고, 하나님께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주님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건지실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곤경에 처해 있고, 또 하나님을 불렀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구원해 주십니다. 누가복음 18장에 세리가 했던 것과 같이 하나님께 구하는 것입니다. &quot;저를 긍휼히 여기소서.&quot;라고 부르짖었을 때에 우리 주님께서 그를 구원하셨습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걷는 장면을 기억하십니까? 그가 배에서 나와서 주님과 같이, 주님처럼 그 물 위를 걸었습니다. 하지만 큰 파도가 쳤을 때에 그는 두려움이 임했고 그는 가라앉아버렸습니다. 그가 이렇게 빠지게 되었을 때 그가 주님께 간구했던 것이 아닙니다. 그는 '아, 수영을 배웠어야 되는데!'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지금 자기가 어려움에 처했다는 것을 알았고 이렇게 외쳤습니다. &quot;주님, 저를 살리소서!&quot; 그는 전적으로 주님을 불렀고, 주님께서 이를 들으셨을 때 그는 구원받았습니다.&lt;br&gt;아마 인명 구조대가 그 사람을 구하기가 어려운 이유가 이러한 특별한 이유가 있다고 합니다. 두 가지가 있는데요. 실제로 그 사람이 곤경에 처했는지 안 처했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마 그 사람들은 자신이 곤경에 처하는 지 모르고 이렇게 발버둥을 치우면서 그 곤경에서 스스로 벗어나려고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해야 되는 것은 그가 곤경에 처했다는 것을 인지하고, 그 인명 구조대에게 빨리 구조를 요청하는 것입니다. 그는 계속해서 우리 주님께 구해야 합니다. 겸손하게 우리 주님께 나오시기 바랍니다. &quot;저는 구원하실 주님을 필요로 합니다.&quot; 이렇게 주님께 나아왔을 때에 주님께서는 그를 들으십니다. 이사야서 59장에서는 저는 눈 먼 자였고, 또 그는 들을 수 없는 자, 소경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께 구했습니다.&lt;br&gt;&lt;br&gt;2010년에 있었던 일인데요. '아이티'라는 곳에 지진이 있었습니다. 그 지진으로 인해서 굉장히 가난한 나라였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수천, 수만의 건물들이 붕괴되었습니다. 수색대들이 혹시 거기에 생존자가 있는지 계속 찾아다녔습니다. 지진이 난 지 15일 뒤에 한 희미한 음성이 어떤 더미 가운데에서 들려왔습니다. '달린'이라는 16살 정도 되는 소녀가 15일간 살아서 그곳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 소녀는 이렇게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아무도 나를 못 찾고 나는 여기서 죽게 되겠구나.' 거기에 어떤 한 남자가 도둑이 들지 않을까 해서 자신의 집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었습니다. 그에게 &quot;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quot; 희미하게 부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임마누엘과 그 친구들은 그곳을 손으로 파기 시작하였습니다. 프랑스 구조대들이 함께 그곳을 파서 그 그녀를 구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이 그 이름을 잘 기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의 이름은 바로 '임마누엘', 성경에 있는 임마누엘과 같았습니다. 이 작은 소녀가 곤경에 처해 있을 때 그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을 가진 분이 이를 듣고 그를 구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그 소녀와 같이 그 깊은 곳에 혼자 있지 않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죄 더미 안에, 여러분이 그 안에 있다면, 여러분도 그 소녀가 했던 것과 같이 하나님께 부르시기 바랍니다. &lt;br&gt;&lt;br&gt;저는 그 또 한 한 분을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실제로 시편 34편은 우리 주님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내용입니다. 히브리서 4장에서는 죽었던 자가 부르짖는 이 장면이 나와 있습니다. 겟세마네에서 우리 주님께서는 하나님께 부르짖고 눈물로 기도하였습니다. 제가 계속 말씀드린 것은 하나님께 기도했을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기도에 대해서 하나님의 응답은 무엇이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우리 주님께서 기도하셨을 때 그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것은 &quot;알겠다.&quot;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을 막으신 게 아니라,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것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하나님께 기도했을 때 받은 구속입니다. 주님께서 죽으셨지만 다시 하나님께서 살리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하나님께 기도했고,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하셨습니다.&lt;br&gt;우리 주님께서 부활하신 것이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바로 이 말씀에서 말씀하고 계신 복음입니다. 주님께서는 저희를 위하여 죽으셨고, 주님께서는 부활하셨습니다. 삼일째 되는 날에 많은 증인들 앞에서 부활하셨습니다. 우리의 범죄함 때문에 우리 주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우리를 의롭게 여기시기 위하여 부활하신 것입니다. 바로 주님만이 유일하게 죽으시고 부활하셨으며, 우리가 바라봐야 할 유일하신 구원자이십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6장은 말하고 있습니다. &quot;우리 주님을 믿으라 그러면 너희를 구원하실 것이다.&quot; &lt;br&gt;이곳에 계신 여러분들이 어떻게 구원을 받으셨는지는 제가 잘 모르겠습니다. 많은 분들이 저한테 와서 &quot;그리스도의 십자가까지는 왔는데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quot;라고 질문을 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어떻게 주님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이 시편 34편에서 저희가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 부르짖으십시오.' 저는 어떻게 어떤 것이 믿는 것인지,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한 분명한 사실은 주님께 부르짖었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0장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quot;우리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quot; 여러분이 지금 문제를 인식하고 있다면, 죄의 문제를 지금 인식하고 있다면, 주님께 나아와 주님을 부르짖으시기 바랍니다. 이 가난한 자가 시편 34편을 통해서 교훈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불렀을 때 주님께서 그를 구원하셨습니다. 들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lt;/p&gt;</description>
      <category>외국 형제님/메튜 카인 형제님</category>
      <author>박이레</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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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Fri, 22 May 2026 15:26:46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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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덕언 : 그 아들을 의지하는 복</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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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lt;p data-ke-size=&quot;size16&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amp;lt; 덕언 : 그 아들을 의지하는 복 &amp;gt; 메튜 카인 형제님 / 26년 4월 19일 일요일 &lt;br&gt;&lt;br&gt;안녕하십니까, 형제 자매님 여러분, &quot;할렐루야 영광의 주&quot; 이렇게 저희가 따라서 불러보았습니다. 형제님이 한국어 들리시는 대로 말씀하셨습니다. 시편 1편 보도록 하겠습니다.&lt;br&gt;&lt;br&gt;&quot;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quot;(시 1:1).&lt;br&gt;&lt;br&gt;여기서 주목할 것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시편 2편으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lt;br&gt;&lt;br&gt;&quot;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도다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 그 때에 분을 발하며 진노하사 저희를 놀래어 이르시기를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네가 철장으로 저희를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그런즉 군왕들아 너희는 지혜를 얻으며 세상의 관원들아 교훈을 받을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quot;(시 2:1-12).&lt;br&gt; &lt;br&gt;네, 오늘은 빠르게 이 2편에 대해서 말씀을 드릴 건데요. 세 가지 부분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저희가 1. 이 위치가 어떤지, 2. 이 구성이 어떤지, 3. 이 시편의 노래가 어떤지, 나누도록 하겠습니다.&lt;br&gt;여기 시편에 기록되어 있는 이 찬송은 어디에 기록되어 있는지가 중요한 부분입니다. 시편과 1편, 2편이 이곳에 위치하면서 시편의 전체적으로 어떻게 주제로 나아갈지를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편과 2편이 같이 있습니다. 시편 1편의 1절은 &quot;복 있는 사람&quot;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시편 2편의 마지막 절은 '우리 또한 복 있는 자'며 &quot;여호와를 의지하는 자가 다 복이 있도다&quot;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시편 1편은 '하나님의 법'에 대해서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시편 2편은 '하나님의 왕'에 대해서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lt;br&gt;그래서 여기에 큰 성을 생각하시면 되고, 또 그 궁전에 두 문이 있다고 보시면 되는데 그 두 문이 활짝 열려 있습니다. 시편 1편에도 이렇게 문이 활짝 열려 있고, 시편 2편에서도 문이 열려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1편과 2편이 모두 활짝 열린 문이 있습니다. 시편 1편에서는 하나님께서 그 길을 허락하여 주셨고, 그 길에 있는 자가 형통하리라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또한 2편에서는 우리 주님께서 그 길이 되시고 우리 주님이 드러나 있습니다. &lt;br&gt;&lt;br&gt;시편 2편의 2절에서는 &quot;그 기름 받은 자&quot;를 말씀하고 계시는데 이것은 우리 주님을, 그리스도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6절에서는 &quot;왕&quot;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7절에서는 &quot;내 아들을&quot;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구약 성경에서 유일하게 이 부분이 하나님에 대해서, 기름 부음 자에 대해서, 또 아들에 대해서, 또 왕에 대해서 한 번에 나와 있는 유일한 장입니다. 사도행전 4장에서 악한 영들이, 또 다른 사람들이 공격하려 할 때, 이 시편 2편을 인용하면서 우리 주님께서 기름 부으시고 왕이신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2편은 '유다의 왕'을 설명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지만, 가장 궁극적으로 우리 주님이신 &quot;왕 되신 주님&quot;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lt;br&gt;여기에서 가장 중요하게 봐야 될 곳은 7절인데요. &quot;너는 내 아들이다&quot;라는 부분입니다. 신약에서도 &quot;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라&quot;는 말씀이 있는 것처럼 저희가 여기의 여운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변화산 상에서도 우리 하나님께서 주님을 향해서 &quot;이는 내 아들이니 내가 기뻐하노라, 저의 말을 들어라.&quot;라고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lt;br&gt;여기에서 저희가 또 주목할 수 있는 부분은 &quot;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quot;입니다. 여기서는 우리 주님께서 안 계시다가 이 땅에서 오셨다, 갑자기 나타나셨다라는 부분이 아니라, 우리 주님께서는 하나님이시며 '영원히 계신 분이시지만 이 땅 가운데 보내주셨다'라는 말씀입니다. 저희가 구약을 이해하고 있다면요. 이 부분을 이해하기가 좀 쉬울 텐데요. 다윗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 왕국을 말씀하실 때가 있습니다. &quot;나는 너의 아버지가 되고 너는 나의 자녀가 되리라&quot;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다윗이 솔로몬 아들을 향해서 말한 대목이지만, 이것은 우리가 히브리서 1장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궁극적으로 우리 주님을 예표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우리 주님께서 찬양받으시는 이 장면을 알 수 있습니다.&lt;br&gt;저희가 신약에서 보면 '부활하신 주님'에 대해서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3장이 하나의 예 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우리 주님께서는 왕국으로 가셨습니다. 이것은 사실이며 분명한 이루어진 일입니다. &lt;br&gt;&lt;br&gt;저희가 이 찬송을 7절을 통해서 여러 찬송들이 불러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7절에서 저희가 조금 다른 방면에서 생각해 보면, 이 아들께서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왕께서, 여호와이신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어떻게 부르시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찬송을 부르십니다. 이 시편은 '찬송 시', '찬송가'이기 때문에 우리 주님께서 이 부분을 노래하신 것을 우리가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lt;br&gt;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시편의 찬송을 인용해서 찬양을 같이 하였을 것입니다. 그때 우리 주님께서도 이 찬송을 하시면서, 이 부분이 바로 당신을 말씀하고 계셨다는 것을 아셨을 것입니다. 이 시편의 깊이가 우리는 다 알지 못하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누구보다도 이해하고 이를 부르셨을 것입니다. &lt;br&gt;하지만 놀라운 부분은 우리도 우리 각자가 이 찬송을 부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희가 8절과 9절을 통해서 알고 볼 수 있는 것처럼, 주님께서 이렇게 오셔서 저희도 함께 찬양을 부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과 함께 왕으로서 그들을 통치할 것이고, 이것이 실제로 일어날 것입니다.&lt;br&gt;&lt;br&gt;마지막 시편의 구절로 와서 &quot;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quot;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복 있는 사람이 언급되어 있고, 또한 우리도 주님을 믿는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 있는 자가 됩니다. 처음에는 이 시편을 읽으면서 이 복 있는 사람에 대해서 누군지 잘 드러나 있지 않았지만, 이 혼란한 땅에서 어디가 안전하고 좋은 곳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안전한 곳은 유일하게 이곳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곳'입니다.&lt;br&gt;우리 주님만이 가장 복되신 분이시며, 주님만이 그 복을 소유하고 계시지만, 이 주님을 의지하는 자들을 함께 복 있는 자로 부르셨고 이를 저희가 누릴 수 있습니다. 이 복 있는 분은 바로 온전하신 주님이시며, 이 분을 의지하는 자가 함께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lt;br&gt;&lt;br&gt;주님께서 이 말씀을 저희를 복 주시기 바랍니다.&lt;br&gt;&lt;br&gt;&lt;br&gt;&lt;/p&gt;</description>
      <category>외국 형제님/메튜 카인 형제님</category>
      <author>박이레</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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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mments>https://leerenote.tistory.com/1984#entry1984comment</comments>
      <pubDate>Thu, 21 May 2026 18:48:00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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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3. 요단강 : 가나안에 속한 축복들, 영적인 전투</title>
      <link>https://leerenote.tistory.com/1979</link>
      <description>&lt;p data-ke-size=&quot;size16&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amp;lt; 3. 요단강 : 가나안에 속한 축복들, 영적인 전투 &amp;gt; 메튜 카인 형제님 / 26년 5월 18일&lt;br&gt;&lt;br&gt;예, 제가 드디어 이제 한국 찬송가를 일부분이나마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quot;영광 영광 할렐루야&quot;라는 그 구절은 제가 따라 부를 수 있었습니다. 저희가 함께 또 식사에 교제할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를 드립니다. 또한 이와 같은 토요일에 집회에 나와주시고 참석해 주셔서 감사의 말씀드립니다. &lt;br&gt;여호수아서 3장 말씀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먼저 말씀을 드린 후에 신약의 골로새서 말씀을 또한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여호수아서 3장 말씀 전체를 읽도록 하겠습니다. &lt;br&gt;&lt;br&gt;&quot;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서 이스라엘 사람들로 더불어 싯딤에서 떠나 요단에 이르러서는 건너지 아니하고 거기서 유숙하니라 삼일 후에 유사들이 진중으로 두루 다니며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너희는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메는 것을 보거든 너희 곳을 떠나 그 뒤를 좇으라 그러나 너희와 그 사이 상거가 이천 규빗쯤 되게 하고 그것에 가까이 하지는 말라 그리 하면 너희 행할 길을 알리니 너희가 이전에 이 길을 지나보지 못하였음이니라 여호수아가 또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스스로 성결케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 기사를 행하시리라 여호수아가 또 제사장들에게 일러 가로되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서 건너라 하매 곧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서 나아가니라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부터 시작하여 너를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크게 하여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는 것을 그들로 알게 하리라 너는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요단 물가에 이르거든 요단에 들어서라 하라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이리 와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하고 또 말하되 사시는 하나님이 너희 가운데 계시사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 히위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여부스 족속을 너희 앞에서 정녕히 쫓아내실 줄을 이 일로 너희가 알리라 보라 온 땅의 주의 언약궤가 너희 앞서 요단으로 들어가나니 이제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매 지파에 한 사람씩 십 이명을 택하라 온 땅의 주 여호와의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바닥이 요단 물을 밟고 멈추면 요단 물 곧 위에서부터 흘러 내리던 물이 끊어지고 쌓여 서리라 백성이 요단을 건너려고 자기들의 장막을 떠날 때에 제사장들은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에서 행하니라 (요단이 모맥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 궤를 멘 자들이 요단에 이르며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가에 잠기자 곧 위에서부터 흘러 내리던 물이 그쳐서 심히 멀리 사르단에 가까운 아담 읍 변방에 일어나 쌓이고 아라바의 바다 염해로 향하여 흘러가는 물은 온전히 끊어지매 백성이 여리고 앞으로 바로 건널쌔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 가운데 마른 땅에 굳게 섰고 온 이스라엘 백성은 마른 땅으로 행하여 요단을 건너니라&quot;(수 3:1-17).&lt;br&gt;&lt;br&gt;&quot;이스라엘 자손들이 여호수아의 명한대로 행하되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신대로 이스라엘 자손들의 지파 수를 따라 요단 가운데서 돌 열 둘을 취하여 자기들의 유숙할 곳으로 가져다가 거기 두었더라 여호수아가 또 요단 가운데 곧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선 곳에 돌 열 둘을 세웠더니 오늘까지 거기 있더라&quot;(수 4:8-9).&lt;br&gt;&lt;br&gt;&quot;그 날에 여호와께서 모든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여호수아를 크게 하시매 그의 생존한 날 동안에 백성이 두려워하기를 모세를 두려워하던것 같이 하였더라&quot;(수 4:14).&lt;br&gt;&lt;br&gt;&quot;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요단 가운데서 나오며 그 발바닥으로 육지를 밟는 동시에 요단 물이 본 곳으로 도로 흘러 여전히 언덕에 넘쳤더라&quot;(수 4:18).&lt;br&gt;&lt;br&gt;&quot;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너희 앞에 마르게 하사 너희로 건너게 하신 것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 앞에 홍해를 말리시고 우리로 건너게 하심과 같았나니 이는 땅의 모든 백성으로 여호와의 손이 능하심을 알게 하며 너희로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영원토록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라&quot;(수 4:23-24).&lt;br&gt;&lt;br&gt;왜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이와 같은 두 번의 큰 그 물을 건너는 사건이 있었던 것입니까? 우리는 홍해 사건이 보다 더 조금 유명한 것을 알고 있는데요. 그 홍해는 분명하게 이것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린도전서 10장에서 기록한 것 같이 이 홍해 사건에 대해서 이제 이스라엘 온 백성이 모세에게 속하여 홍해에서 침례를 받은 것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제 왜 다시 한 번의, 이 물을 건너는 요단강을 건너는 것이 필요하겠습니까? 우리가 지난 시간에 민수기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민수기에서는 두 번에 걸친, 두 번의 두 세대에 대한 이야기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새롭게 나타난 그 새로운 세대에 대해서 이제 그들도 이 새로운 물을 건너는 것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제 가데스에서 그들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하신 땅에 들어가기를 거절하였을 때, 이제 20세 이상으로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 죽게 됩니다. 그래서 이제 요단강을 건너는 것을 경험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홍해를 건너는 것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고, 그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제 홍해를 건넜던 과거 세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인도자로 따르며 그를 신뢰함으로 그와 함께 홍해를 건넜습니다. 하지만 이제 요단을 건너는 데 있어서는 새로운 인도자 여호수아를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단강을 건너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이 새로운 세대에게도 하나님께서는 은혜롭게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시며 그들이 왜 하나님을 의지해야 되는지, 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야 되는지를 가르쳐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lt;br&gt;&lt;br&gt;그런데 이들이 왜 두 번째로 이 물을 건너는 놀라운 사건을 경험하게 되는지, 또한 우리 신약 성도들에게 교훈을 가르쳐 주기 위한 것임을 보게 됩니다. 이 두 번째로 물을 건너는 데 있어서 이제 상징적으로, 또한 영적으로 우리에게 놀라운 교훈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lt;br&gt;'홍해'는 그들이 '무엇으로부터' 구원을 받았는지를 강조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애굽에서부터' 건짐을 받았으며 바로의 '노예된 상태'에서 건짐을 받은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도 우리의 대적에 그 노예된 가운데 있었으며 이제 우리는 구원을 받아서 그 굴레에서 벗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그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바로 우리가 그 사단의 권세에서 놓임을 받았다는 것이 이 홍해에서 말해주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으므로, 이제 사단의 그 손아귀는 더 이상 나를 다시 붙잡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홍해를 건넌 것은 우리가 '어디에서부터' 건짐을 얻었는지, 우리가 '어디에서' 나오게 되었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lt;br&gt;하지만 이제 '요단강'을 건너는 것은 우리가 '무엇을 위해서' 구원을 받았는지, 우리가 '어디로' 인도하심을 받는 것인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래서 오늘 이 '가나안에 속한 그 축복들'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또한 우리가 '영적인 전투' 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임을 또한 말해줍니다. 마찬가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그 안에서 많은 대적들과 전투를 벌였어야 되는 것처럼, 이제 구원받은 우리도 많은 축복을 누림과 동시에 또한 그 가운데 있는 많은 대적들과 영적인 전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lt;br&gt;이제 홍해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죽으신 것'이 강조되었다면, 이제 요단강을 건너는 데서는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은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해주신 일을 말할 뿐만 아니라, 이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되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요단강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골로새서에서 말하고 있는 그러한 내용입니다. &quot;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이제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 있느니라.&quot; 우리는 보통 '그리스도께서 나를 죽으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내가 죽었다고?' 이렇게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골로새서 말씀은 분명하게 &quot;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quot;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이제 잠시 후에 더 많은 것들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서 이 십자가의 두 가지 측면이 우리 신약 성경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교훈인 것입니다.&lt;br&gt;&lt;br&gt;그렇다면 이제 이 두 가지 측면을 다 이해한, 이 두 가지 측면의 십자가를 다 온전히 경험한 신자들이 누리는 복은 무엇입니까? &lt;br&gt;이제 20세 이상으로는 다 광야에서 죽게 됩니다. 그런데 그때 15세 정도 되는 한 젊은이가 있었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홍해를 건너는 경험을 하였고, 그리고 광야의 그 기간 동안 살아남았습니다. 그래서 그가 요단강 앞에 그 약속의 땅 경계에 다달았을 때, 그의 나이는 55세 정도가 되었을 것이고 이제 그도 아마 그의 딸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딸은 요단강을 건너는 가운데 그 아버지에게 이렇게 물었을 것입니다. &quot;아빠, 이게 아빠가 말했던 그 홍해를 건너는 것과 같은 건가요?&quot;라고 물었을 것입니다. 그때 그 아빠는 여러분이었다면 이렇게 대답했을 것입니다. &quot;좀 비슷한 점이 있다. 그런데 또 여기 다른 점이 있구나.&quot; 우선 같은 점에 대해서 말하자면 이제 물들은 뒤로 머물러 섰고 사람들은 마른 땅으로 가운데를 건너가게 됩니다. 그 결과로 인해서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 나타났고 그 뒤에 다른 이방 나라들은 하나님께 대하여 두려워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두 가지 모두 그 건넘으로 인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인도자에 대해서 더욱 신뢰하게 됩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14장의 마지막에 &quot;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또한 그의 종 모세를 믿었더라.&quot;라고 마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 4장에서도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quot;그들이 모세를 경외한 것처럼 이제 여호수아도 그와 같이 경외하였다.&quot;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제 자신의 딸에게 &quot;그래, 분명히 여기에 비슷한 점이 있다.&quot;라고 대답할 것입니다.&lt;br&gt;그런데 그가 제대로 그 상황을 이해한다면, 그에게 있어서 여기 분명히 비슷한 점이 있지만 또한 아주 다른 점이 분명하게 그에게 드러났을 것입니다. 참 여기에 특별히 젊은 형제 자매님 여러분들이 성경을 공부하게 될 때에, 다른 성경의 부분에서 같은 내용의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을 찾아볼 때가 있습니다. 그런 것을 발견하는 것은 아주 유익하고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도 유익한 성경 공부지만, 더욱더 여러분에게 많은 도움을 주는 가치 있는 성경 공부는 그 비슷한 두 가지 일들 가운데서 아주 '세세한 작은 차이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기에 더 덧붙인 것들을 그 의미를 찾아내고, 하나님께서 여기서 빼신 것을 왜 그렇게 하셨는지 그 의미를 찾아보면서 다른 점을 생각할 수 있다면, 여러분은 더 많은 것을 성경에서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선 대조되는 것을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 '홍해'는 그것이 '밤'에 일어난 것입니다. 하지만 이 '요단강'을 건너는 것은 '낮'에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가 홍해를 건너는 데 있어서는 어떠한 준비 과정이 없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지만 요단강을 건널 때는 여호수아가 이제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성별케 하라라고 준비시키는 것을 보게 됩니다. 2. 홍해는 이제 그 거대한 물이 '양쪽 벽'으로 세워져 쌓인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요단강에는 그렇게 벽이 쌓여진 것이 아니라 그 강의 흐름을 끊으시고 그 밑에가 '흘러가 버리고 위에는 세워진 것'을 보게 됩니다. 3. 그리고 출애굽기에서 홍해를 건널 때 이제 모세는 그의 '지팡이를 잡고' 그의 손을 앞으로 뻗어가지고 명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요단강을 건널 때는 여호수아가 그렇게 손을 들지 않습니다. 이때는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고' 그 요단강을 건널 때에 그 물이 갈라지는 것이 시작이 됩니다. 4. 그리고 요단강 홍해를 건널 때는 '애굽 병사들이 죽고 그들의 시체'가 해안에 누워 있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 결과입니다. 그런데 요단강을 건너고 그것이 끝났을 때는 '12개의 돌'이 요단강 안에 놓여 있게 되며 그리고 다른 12개의 돌이 강가에 세워지게 됩니다. &lt;br&gt;그리고 특별히 이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홍해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그들의 전투에서 건져내어 이제 '광야'로 들어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단강은 그들이 광야에서 나와서 이제 그들의 '전투'로 들여보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홍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을 설명하고 있었고, 그것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를 위해서 '무엇을 이루었는지'를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요단강에 건너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합하여지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부활'과 '합하여진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두 개의 건너가는 것이 있고 이것은 하나님의 두 가지 진리를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lt;br&gt;&lt;br&gt;이제 골로새서 2장에 가서 이것을 말씀하고 있는 신약 성경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lt;br&gt;&lt;br&gt;&quot;너희가 세상의 초등 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의문에 순종하느냐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이 모든 것은 쓰는대로 부패에 돌아 가리라) 사람의 명과 가르침을 좇느냐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데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좇는 것을 금하는데는 유익이 조금도 없느니라&quot;(골 2:20-23).&lt;br&gt;&lt;br&gt;&quot;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quot;(골 3:1-4).&lt;br&gt;&lt;br&gt;그래서 3장 3절에서 &quot;너희가 죽었고&quot;라는 말을 강조해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2장 20절에서도 &quot;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늘&quot;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참 이것을 제가 특별히 예의를 갖추어서 말씀을 드리는 것인데요. 우리가 죽은 사람에 대해서는 어떻게 대합니까? 우리는 장사합니다. 그래서 2장 1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lt;br&gt;&lt;br&gt;&quot;너희가 침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quot;(골 2:12).&lt;br&gt;&lt;br&gt;그래서 '요단강을 건너는 것'도 이 '침례에 대한 분명한 그림'입니다. 이 물이라는 것은 그 죽음과 또한 무덤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사람을 침내를 줄 때 우리는 그를 물 속 밑으로 내립니다. 그것은 마치 장사 지낸 것과 같으며 참 복음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장사되고, 그리고 다시 부활하신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복음을 믿는다면 여러분은 반드시 침례를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요단강 물 속으로 들어갔고, 그리고 그것을 건너서 다시 다른 편에 나왔을 때, 이제 그들은 새로운 땅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침례가 그림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상징'이지만 아주 큰 의미를 가지고 있는 상징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이제 '새로운 삶'으로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그리스도의 새 생명을 가지지 못한 자는 어느 누구도 침례를 받아선 안 되는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새 생명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 그 새로운 삶을 받은 자들이, 이 침례를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그리스도를 믿은 자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그분의 새로운 생명을 받은 자들이 공개적으로 그것을 이제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장사되었고, 다시 산 자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것입니다.&lt;br&gt;토미와 마가렛과 톰슨이라는 분이 이제 알래스카의 선교사로 1950년대에 방문하였습니다. 그 가운데 이제 코퍼 강이 있었는데요. 그것은 아주 물살이 굉장히 심해서 거기서 어떤 사람을 침례주는 게 적당하지 않는 그런 장소였습니다. 참 어떤 사람을 거기서 침례를 주다가 거기서 그 사람을 놓쳐서 그가 물살에 휩쓸려가 죽기라도 한다면 그것은 그 교회 간증에 도움이 되지 않다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약간의 그 지류를 발견하였고, 거기에 그 물살을 막을 수 있는 댐을 톰슨 씨는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침례식이 거행되게 될 때 모든 신자들은 그 작은 강의 한쪽 편에 모두 모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톰슨씨는 그 안에 들어가서 침례를 주기 시작하였고 침례를 받는 자들이 한 사람씩 들어와서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침례를 받고 올라오게 될 때 여전히 물살로 인해서 그들은 자연스럽게 다른 편에 가서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톰슨 씨는 그것을 이용해서 이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quot;이쪽 편에는 당신이 예전에 어디에 속했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때는 당신은 하나님께 거역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당신들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함께 죽었으며, 장사되었으며, 이제 살아나서 새로운 생명을 가진 그 편에 다다르게 되었습니다. 이제 여러분의 옛 삶은 모두 이쪽 편에 다 놓아두었고, 이제 여러분은 다른 편에서 하나님을 위한 새로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quot;라고 그는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그 다른 편에 젖은 옷으로 다시 나타나게 된 그 새로운 침례를 받은 신자들은 이 침례가 무엇인지를 잘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이 침례 자체가 우리에게 그와 같은 새로운 생명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침례를 통해서 이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이제 장사되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나서 새로운 삶을 산다.'&lt;br&gt;&lt;br&gt;이제 여기서는 제사장들이 그 '언약궤'를 메고 그 요단강을 건너게 되는데 그 의미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우리가 3장과 4장에서 이 제사장들이 그 언약궤를 성막에서부터 가지고 나와서 메고 가게 되는데, 그 장면이 굉장히 중요하게 언급이 되어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참 이 언약궤가 그 땅을 지나서 그 요단강까지 다다르게 되었습니다. 3장과 4장에 걸쳐서 여호수아는 그 언약궤를 계속적으로 언급하면서 강조해서 언약궤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막의 여러 기구들이 그리스도를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바로 이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그림입니다. 그리고 여호수아는 이렇게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quot;언약궤를 맨 제사장들의 발이 그 물가에 닿으면 그때 그 물이 멈춰주게 되고, 끊어지게 되리라.&quot; 제사장들의 발바닥이 요단물을 밟고 멈추면 요단물,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끊어지고 쌓여 서리라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바로 언약궤를 맨 제사장들이 그 물을 밟고 섰을 때,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른 땅으로 요단강을 건넜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언약궤를 맨 제사장은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고 이제 그 하나님의 임재가 그들과 함께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제 백성들은 그 언약궤가 있었던 장소에서 그 언약궤와 함께 그것을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된 것'을 보여주고 있는 그림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장사되고 부활하신 것을 우리는 그 동일한 장소에서 영적으로 동일하게 연합되어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골로새서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이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 것입니다. &lt;br&gt;그런데 여기에 더 상세한 것을 말씀을 드리자면 이건 제가 특별히 좋아하는 것인데요. 그 요단강의 차가운 물을 실제로 접촉해서 느낀 사람은 이 언약궤를 메고 있는 제사장들 뿐입니다. 왜냐하면 제사장들의 그 발바닥이 그 물을 접촉하였을 때 즉시로 그 물이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요단강을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이 실제로 그들은 물을 접촉하고 경험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우리에게 이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죄에 대해서 죽었지만 그것을 미처 느끼지 못한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그 차가운 물을 느꼈던 것입니다. 저를 위해서 그분께서만 오직 그것을 다루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6장에서는 이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quot;그리스도께서 한 번 죽으신 것은 죄에 대하여 죽은 것이다.&quot; 그래서 내가 그것을 실제로 느끼지는 못하는 것이지만, 저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분명하게 이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quot;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 나는 죄에 대하여 죽었다.&quot; &lt;br&gt;&lt;br&gt;그리고 여기에 요단강에 2개의 쌓인 '돌무더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가 기록하기를 오늘날까지도 그 돌 무더기가 남아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12개의 돌 무더기가 요단강 안에 쌓여져 있고, 그리고 또한 12개의 다른 돌무리가 그 강에서 3마일 정도 벗어난 길갈 쪽에 쌓여져 있습니다. 그래서 한 돌 무더기는 요단강 속에 지금 쌓여져 있고, 다른 한 돌 무더기는 새로운 땅에 쌓여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요단강 물을 멈추게 하실 때 그들이 건너는 위치에서 꽤 위에 부분에서 그 물이 멈추게 하셨습니다. &lt;br&gt;그리고 이 물이 어디서부터 흘러왔고 그것이 거기서 멈췄는지, 그 특별한 성읍에 대해서 하나님은 기록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아담'이라는 이름을 가진 성읍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아담이라는 이름을 가진 성읍을 오직 여기서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우리가 주의 깊게 그 의미를 생각해 봐야 하는 지점입니다. 이제 여러분이 커피를 두 잔 마신 것처럼 정신을 맑게 해서 잘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이제 다른 한 강에 대해서 먼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비유적으로 말씀을 드리는 강인데요. 이제 다른 한 비유적인 강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것은 이제 실제 어떤 성읍, 아담이라는 성읍에서 흘러내리는 강이 아니라 어떤 사람, 아담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 사람으로부터 흘러내리는 비유적인 강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왜냐하면 창세기 3장부터 이제 아담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으로부터 모든 인류에 흘러가고 있는 그 강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아담으로부터 흘러가고 있는 그 강에 대해서 성경은 &quot;옛 사람&quot;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옛 사람이라는 것은 우리 자신의 그 죄된 육신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옛 사람이라는 것은 아담으로부터 흘러나오고 있는 '아담에 속한 모든 인류'를 전체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옛 사람은 너무나 부패해서 이 옛 사람에 대해서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이제 죽어야 되는 것입니다. &lt;br&gt;그래서 로마서 6장에서는 &quot;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quot;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옛 사람은 언제 십자가에 못 박힘을 받은 것입니까? 로마서 6장에서는 &quot;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그 옛 사람도 십자가에 못 박혔다&quot;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옛 사람을 이미 심판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 그 아담에 속한 모든 부패한 인류를 십자가에서 심판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옛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힌 그 장소에서,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사람을 또한 창조하십니다. 이 옛 사람은 부패하였고 십자가에 못 박힘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장소에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라는 '새 사람'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그래서 아담에 속해 있지 않습니다. 그 연결고리는 끊어졌고,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속해 있습니다. 골로새서 3장을 보도록 하겠습니다.&lt;br&gt;&lt;br&gt;&quot;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버리라 곧 분과 악의와 훼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거기는 헬라인과 유대인이나 할례당과 무할례당이나 야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분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입고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quot;(골 3:5-14).&lt;br&gt;&lt;br&gt;우리는 9절과 10절에서 &quot;옛 사람&quot;과 &quot;새 사람&quot;을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 개의 돌 무더기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한 돌 무더기는 요단강 안에 있었고, 그것은 예전에 우리가 무엇이었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제 그 '물속에 있는 돌 무더기'는 내가 받았어야 마땅한 그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너무나 부패하였고 심판을 받아야 마땅한 그 옛 사람이 그 돌무더기가 보여주고 있는 그림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새로운 땅'에 또 쌓여져 있는 12개의 '돌 무더기'를 볼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 나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우리가 강 속에 있는 그 돌무더기와 같은 옛 사람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단강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다시 부활하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요단강이 내가 새로운 사람이 되었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가 마땅히 받아야 되는 그 형벌을 받은 그것을, 그 옛 사람을 강 속에 있는 돌 무더기가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새로운 땅에 있는 그 돌 무더기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가 어떠한 새 사람이 되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그림인 것입니다. 이 새로운 땅에 있는 12개의 돌 무더기는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인 것을 말해주고 있고, 내가 지금 무엇인지, '나의 새로운 정체성'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lt;br&gt;참 이 세상 사람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누구인가,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데 어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복음은 우리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복음이 말하고 있는 우리의 정체성은 우리가 열심히 노력해서 취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부터 말미암아 받은 정체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의 정체성'에 가장 중요한 부분은 '내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골로새서 3장은 이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quot;너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quot; 그리고 이제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이제 우리는 마땅하게, 또한 당연하게도, 위에 있는 것을 찾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계신 그 위에 것을 찾는 것이 그 새로운 생명에게 마땅한 것입니다. 참 그 생명이 이 세상에 대해서 죽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아서 그리스도 안에 감춰진 그 생명에게 있어서는, 이 세상 것에 마음을 두는 것이 마땅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 세상은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세상입니다.&lt;br&gt;그래서 우리가 마땅히 살아야 되는 삶을 살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정말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우리의 생명이 무엇인지를 까먹고 있을 때,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때, 그러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땅히 해야 되는 수준만큼 그리스도를 알고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참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은혜 가운데 인도하신 그 축복을 우리가 다 깨닫고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그 진리는 &quot;너희들이 이 세상에 대해서, 이 땅에 속한 것들에 대해서 죽었다.&quot;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그것에 대해서 &quot;저는 아직 그것에 대해서 죽었다고 느껴지지 않는데요?&quot;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quot;너희가 이 땅에 속한 것들에 대해서 느끼지 못한다.&quot;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quot;너희가 이 땅에 대해서 죽었다.&quot;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요단강을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발에 그 물을 느끼지 않은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요단강을 실제로 건넜다는 사실을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결코 그 십자가를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그 심판을 느끼지 못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저 대신 경험하였고, 그것을 느끼셨고, 이제 저는 그리스도께 속하여 그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결코 우리로 하여금 그 죽음을 느끼도록 노력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너희가 이미 죽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고, 이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그 사실에 기반해서 '하나님을 의지하여 살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구원을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이루시는 것이고, 여러분은 그 구원을 주신 것을 믿고 승리를 누리는 것입니다. &lt;br&gt;여러분은 지난 시간에 우리가 이 말씀을 한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quot;믿음에서 믿음으로&quot; 가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믿음만이 우리를 붙잡아주고 우리를 더욱 성장시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홍해에서 배운 것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고, 이제 그분께서 우리를 그 굴레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우리의 더 풍성한 이해를 그 위에, 십자가에 대한 더 풍성한 이해를 더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홍해에서 배운 것을 분명히 기억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을 분명히 기억하면서, 이제 그 요단강의 경험을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또한 '아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우리가 해야 되는 '책임'이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생명으로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lt;br&gt;우리가 땅의 것을 생각한다면, 참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나를 어떠한 존재로 만들었는지를 까먹고 그것에 합당하게 살지 못하고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을 실패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제 12개의 돌은 그 요단강 안에 있고, 또한 새로운 땅에 12개의 돌이 쌓여져 있다는 것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 그 교훈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가나안'이라는 것은 하늘나라에 대해서 우리에게 주로 보여주는 그림이 아닙니다. 그 가나안이라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오늘날 믿음으로 살고 있는 이 삶'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가나안의 삶은 '영적인 축복'과 또 '영적인 승리'를 누리는 곳입니다. 그래서 가나안에 들어가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많은 전투를 하게 됩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많은 영적인 전투를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lt;br&gt;그래서 여호수아가 그 가나안 땅에서 있었던 그 전쟁들을 기록한 내용들은 많은 면에 있어서 신약 성경에 에베소서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여호수아서에서는 가나안 땅에 대해서 젖과 꿀이 흐르는 그 축복의 땅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에베소서에서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받은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에베소서 6장에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어야 되는 것을 말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싸워야 되는 영적 전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여호수아에서 기록된 많은 전투들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앞에 말씀드린 것처럼 골로새서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요단강 그 경계까지 인도하는 장면을 집중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 에베소서에서는 그 요단강을 건너 들어가서 그 땅 안에서의 일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어떤 측면에서는 우리가 애굽에서 있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또 어떤 측면에서는 우리가 광야를 통과해 가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또 어떤 측면에서는 가나안 땅 안에서 전투하고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lt;br&gt;그리고 또한 우리가 여기서 기억하고 있는 놀라운 장면은 그들의 이러한 여정을 시작하게 했던 그 홍해 사건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여정의 마지막에 남아 있는 그 요단강을 건너는 것도 역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보여주는 그림입니다. 그래서 이 '십자가의 진리'가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시작점'이며, 또한 이 동일한 십자가의 진리가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그것을 여정을 '마무리하는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우리가 계속해서 십자가로 가까이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매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것은 참으로 우리에게 놀라운 유익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매주 그렇게 하고 계십니까? 만약에 여러분이 그렇게 하고 있다면 아주 좋은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이 십자가를 졸업하는 것이 아닙니다.&lt;br&gt;&lt;br&gt;이제 이 '요단강을 건너는 것'에 대해서 마지막 한 가지를 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저는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겠는데요. 저는 집회에서 졸아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좀 더 자세하게 그것을 말씀드리자면 제가 강대상에 있을 때 집회에서 존 적은 없습니다. 참 여러분께서 잘 해주고 계십니다. 참 이 통역을 통해서 이와 같은 오랜 집회를 듣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lt;br&gt;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가 죽은 후에야 그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제 모세가 광야에 있을 때에 그의 불순종한 죄로 말미암아 그는 그 땅에 들어가지 못할 것을 말씀을 듣게 됩니다. 그래서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모세가 죽은 후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모세는 어떤 측면에 있어서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 요단강을 건너는 부분에 있어서는 '모세는 율법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는 율법을 받아서 전해준 자였고 그 율법의 수혜자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율법을 상징하는 인물이었고, 이제 이스라엘 백성이 그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서 승리의 승리를 얻는 그 유일한 길은 이제 모세를 떠나서 이스라엘 백성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 들어가기 전에 죽었다는 것을 특별한 의미를 두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모세의 율법은 여러분을 구원할 수도 없으며, 이 모세의 율법은 여러분을 성화시킬 수도 없는 것입니다.&lt;br&gt;이 여호수아가 바로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들이는 것입니다. 이 여호수아가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이름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이 영적인 승리를 얻는 유일한 길은, 이 영적인 성장을 하는 유일한 길은, 율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또한 신약 성경에서는 그 율법이 성도들에 대해서 죽은 것뿐만 아니라, 성도들이 율법에 대하여 죽은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골로새서 2장 말씀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이 골로새서 2장에서 유대인들의 율법주의가 그들의 교회 안으로 들어와서 이제 이 복음과 그들의 율법을 지키는 행위가 섞여져서 그들에게 잘못된 가르침을 주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lt;br&gt;&lt;br&gt;&quot;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quot;(골 2:16-17).&lt;br&gt;&lt;br&gt;&quot;너희가 세상의 초등 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의문에 순종하느냐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이 모든 것은 쓰는대로 부패에 돌아 가리라) 사람의 명과 가르침을 좇느냐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데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좇는 것을 금하는데는 유익이 조금도 없느니라&quot;(골 2:20-23).&lt;br&gt;&lt;br&gt;이 율법주의, 이 율법을 지키는 행위는 우리를 조금도 거룩하게 만들지 못합니다. 여기 모세의 율법을 가리키는 &quot;안식일&quot;, 그리고 20절에 &quot;세상의 초등 학문&quot;들이 있습니다. 그 어떠한 경우에 있어서도 어떤 규칙을 지켜서는 우리 안의 거룩함을 만들어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와의 교제'만이 우리 안에서 오직 '거룩함'을 만들어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골로새서 3장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생명'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부주의하게 살아도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나의 절제 없이 살아도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어떤 계획 없이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내가 어떤 규칙을 지켜서 나에게 그리스도를 닮아내는 것을 만들어 갈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어떤 지켜야 되는 체크리스트가 있고, 내가 하나씩 이것을 지켰다고 하면서 우리의 거룩함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통해서, 그분을 배움으로써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이 영적인 훈련을 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우리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제 집회에 참석하고, 내가 오늘 읽어야 되는 한 성경 구절을 한 장을 읽었고, 교회에 헌금하고, 이제 그러한 것들이 궁극적인 우리의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영적인 훈련을 하는 것이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가 아니라, 그것은 하나님께 나아가고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방법이라는 것입니다.&lt;br&gt;그 율법을 준 모세가 그들을 인도하여 가나안 땅으로 들여보낸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그 예수의 이름 같은 것을 가지고 있는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였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은 그들에게 이러한 이러한 규칙을 지키라고, 그것을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일 때마다 그리스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그리스도의 영광과 그분의 아름다움을 말씀을 통해 드러내면서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제시하고자 노력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사는 것, 이 십자가의 빛 가운데 사는 것이 참으로 우리의 핵심적인 부분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이것을 기억해야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고, 그리고 나도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입었고,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그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는 그 위에 것을 찾아야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 부활하신, 참 승리하신, 영광 가운데 계신 이 구주를 모시고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얼마나 놀라운 것입니까? 참으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져 있는 것입니다.&lt;br&gt;&lt;br&gt;예, 감사를 드립니다.&lt;/p&gt;</description>
      <category>외국 형제님/메튜 카인 형제님</category>
      <author>박이레</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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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19 May 2026 19:39:12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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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성경읽기 : 요한일서 5장 4-6절(요약)</title>
      <link>https://leerenote.tistory.com/1994</link>
      <description>&lt;p data-ke-size=&quot;size16&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성경읽기 : 요한일서 5장 4-6절(요약)&lt;br&gt;&lt;br&gt;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요일5:4-6, 개역한글)&lt;br&gt;&lt;br&gt;- 김윤철 형제님 사회 : 오늘 본문에서는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인지 말합니다. 그래서 세상을 이기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또 예수께서 물과 피로 임하셨다는 뜻이 무슨 뜻인지, 성령께서 이를 증언하고 계시다는 것도 함께 교제하면 좋겠습니다. &lt;br&gt;형제님들께서 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lt;br&gt;&lt;br&gt;- 김윤철 형제님 : 사도요한 당시 교회 안밖으로 영지주의자들이 퍼지고 있었습니다. 사도는 이에 맞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으로 오신것을 증언합니다. 4-5절을 통해서 사도는 세상을 이기는 자가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임을 말씀합니다.&lt;br&gt;세상을 이긴다는 이김을 생각할 때에, 이 세상은 우리가 사는 이 땅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 세상의 체계와 가치입니다. 곧 죄입니다. &lt;br&gt;이기는 자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입니다. 거듭난 자, 곧 하나님의 자녀를 뜻합니다. 하나님께로 거듭난 자에 대해서 요한복음 3장은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거듭남은 우리의 공로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 생명입니다. &lt;br&gt;그리고 이기는 믿음은 믿음의 대상이 중요합니다. 이기는 자의 믿음의 핵심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믿는것이 세상을 이기는 힘입니다. 우리는 때로 세상의 위력과 힘과 고통 앞에서 이길수 있는 힘이 없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승리는 내 강함에 있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것이 우리의 승리입니다. 4-5절을 교제했습니다.&lt;br&gt;&lt;br&gt;- 전의석 형제님 : 4-5절에서 세상을 이긴것에 대해서 말씀하시는데요. 믿음으로 이겨야 함을 말씀합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내적인 것입니다. 내적인 것이 없는 상태에서 외적인 드러남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도 아니고 참된 진리가 아님을 말씀을 통해서 깨닫습니다.&lt;br&gt;영지주의자들뿐 아니라 이단 사상을 가진 자들이 외형적인, 행함에 더 치중합니다. 사실 믿음을 가지고 믿음을 통해서 의롭다 함을 가지고 세상에 이김을 드러내는 것인데, 행함으로 이기려 하는 것은 하나님께 결코 인정받을수 없음을 보게 됩니다.&lt;br&gt;그리고 그 내적인 변화는 성령과 물과 피입니다. 신명기에서 증인을 말할 때에 둘이나 셋을 말합니다. 우리의 내적인 변화의 증거는 성령과, 물과, 피로 확신할수 있습니다.&lt;br&gt;요한복음을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려 함입니다. 요한일서는 쓴 목적은 이 믿은 사람들이 그 생명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하려 함입니다. 이와같이 두 성경이 서로 상호 보완적으로 우리에게 교훈을 주고 계십니다.&lt;br&gt;&lt;br&gt;- 김윤철 형제님 : 6절을 보겠습니다. 물과 피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는데요. 물은 주님께서 요단강에서 침례를 받으시며 공생애의 시작을 알리셨습니다. 피는 십자가에서 흘리심으로 공생애의 완성을 보이셨습니다. 사도는 침례만이 아니라, 피까지, 십자가까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 사람이며 하나님이심을 말씀합니다. 또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르자 물과 피가 나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봐도 주님은 완전한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lt;br&gt;7절에서 증거하시는 이가 성령이심을 말씀합니다. 주님께서는 보혜사, 성령을 보내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성령님의 진리의 영이시므로 그분을 절대적으로 우리가 신뢰할수 있습니다. &lt;br&gt;&lt;br&gt;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히4:15, 개역한글)&lt;br&gt;&lt;br&gt;주님은 멀리 계신분이 아니라 우리의 연약함 가운데 함께 하시는 분입니다. 이를 통해서 주님께 감사드리게 되었습니다.&lt;br&gt;&lt;br&gt;- 김보영 형제님 : 4절을 더 붙여서 교제하기를 원합니다. &quot;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quot; 이 세상은 주님이 이기신 악의 세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로써 이 세상을 이긴다는 것은 주님의 십자가에 편승해서, 주님안에 있음으로써 이기는 것입니다. &lt;br&gt;오직 우리의 믿음이 세상을 이기는데, 그것은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사역으로 그 누구도 우리를 정죄할수 없고 대적할 수 없는 완전한 승리안에 두셨기 때문에, 그 무엇도 우리를 대적할수 없습니다. &lt;br&gt;5절에서 &quot;이기는 자가 누구뇨&quot; '이기는' 이는 원어적으로 마귀, 세상과의 싸움에서 계속해서, 끝까지 이기는 이김을 말씀합니다. 우리는 완전한 승리안에 있습니다. 그러한 측면에서 우리에게 굉장히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다. &lt;br&gt;&lt;br&gt;- 최재홍 형제님 : 4절에서 &quot;세상을 이기는&quot;에서 '이기는'이 현재형 시제입니다. 계속해서 이기는 이김입니다. 매일 자신과 싸우고 세상의 가치관과 싸우고 마귀와 싸우는 싸움이지만, 계속해서 이기는 승리를 말씀합니다. 과거의 단 한번의 승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승리로 말미암아 계속해서 세상을 이길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lt;br&gt;&quot;세상을 이긴 이김은&quot; 여기서 '이김'은 부정과거 시제입니다. 어떤 사건의 진행 사건을 길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완결된 사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언젠가 우리가 세상을 이길 승리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세상을 이긴 승리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미 승리한 편에 서서 싸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리하신 그 믿음의 길 가운데서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이기기 위해서 믿음으로 살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lt;br&gt;&quot;우리의 믿음은&quot;이라고 말씀하는데요. 우리의 믿음은 확실한 근거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또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을 믿고 신뢰하는 것입니다.&lt;br&gt;&lt;br&gt;4절에서는 우리들이 믿는 믿음을 구체적으로 말했고요. 5절은 그 믿음의 대상을 말해줍니다. 그리스도 밖에서는 세상을 이기는 방법이 전혀 없음을 말해 줍니다. &quot;예수께서&quot; 그 이름을 먼저 언급합니다. 그 이름이 성육하신 주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실제로 오셨던 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lt;br&gt;주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을 말해주고 있고요, 아버지와의 독특한 관계를 드러내기 위해서 다시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영지주의자들이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을 거짓되게 말했기에 사도는 이를 다시한번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lt;br&gt;4-5절을 같이 연결해서 짧게 살펴보면 거듭한 생명은 세상을 이기고 있고, 그 승리는 믿음으로 나타나고 있고, 그 믿음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 두고 있기 때문에 승리할수 있는 것입니다. &lt;br&gt;&lt;br&gt;- 전의석 형제님 : 저는 여기서 조금 다른 의견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윤철 형제님께서 말씀하신 물과 피입니다. '물'을 많은 형제님들이 '침례'로 보십니다. 그런데 저는 이 물이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 아닌가 싶습니다. 요한복음 4장, 7장에서 주님께서는 말씀을 물로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그런 말씀들을 생각해 보면 침례보다 말씀으로 보는것이 저는 조금더 와 닿는 교제인것 같습니다.&lt;br&gt;물론 주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에 물로 침례를 받으신 것으로 보는 분별도 좋습니다만, 물과 피라고 할 때에 이 말씀이 저희에게 얼마나 부합되는가를 생각하게 됩니다.&lt;br&gt;요한일서는 물과 피라고 할때, 물이 먼저 나옵니다. 요한복음은 피로 먼저 죄를 속하시고 물로 깨끗하게 하십니다. 요한일서는 이미 깨끗함을 받은 사람들이 물로 깨끗하게 하고 피로 구속함을 받은 사실을 강조하고자 이러한 순서로 기록된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lt;br&gt;&lt;br&gt;- 김보영 형제님 : 6절은 매우 난해한 구절이고 많은 견해들이 있습니다. 여기서 물이 무엇이냐 하는 것에 대해서, 침례로 보는 것이냐? 아니면 말씀으로 볼것이냐? 하는 분별에 대해서 혼란이 있습니다. &lt;br&gt;그런데 요한복음 3장에서 주님께서 니고데모에게 &quot;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수 없다.&quot;고 하십니다. 그러한 측면으로 보면 여기서 물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봐야 하는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lt;br&gt;&lt;br&gt;- 김윤철 형제님 : 형제님들의 교제에 공감하고요. 물은 말씀이 맞습니다. 그런데 여기 구절을 보면 &quot;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quot;라고 해서 '세상에 임하신 것'을 표현하는 과정에서 공생애의 시작을 물로 말씀드렸습니다. &lt;br&gt;&lt;br&gt;- 장승훈 형제님 :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요일5:11, 개역한글)&lt;br&gt;&lt;br&gt;하나님께서 저희에게 주신 생명은 예수님의 생명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안에 있는 증거가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요한일서는 여러 각도에서 말씀합니다. 1. 첫째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납니다.(2장) 의를 행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죄를 짓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는 완전주의자를 주장하지 않습니다. 완전주의를 표방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완전주의에 이르렀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2. 두번째는 형제를 사랑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3장) 3. 세번째는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 가운데 거하고자 합니다. 물론, 논외로 물에 대해서 형제님들 사이에 많은 의견이 분분하지만 한봉래 형제님은 이 물에 대해서 침례로 분별하시기는 했습니다.&lt;br&gt;그리고 영지주의자들은 이 세번째 측면에 있어서 완전히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요한일서는 성도들 가운데 생명이 있음이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quot;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quot; 이는 올바른 계명입니다. &quot;그 형제를 사랑할 것이라&quot; 이는 형제 사랑입니다. 이것은 김회상 형제님의 분별입니다. 그래서 의를 행하려 하는가, 형제를 사랑하려 하는가, 주님에 대한 올바른 분별을 드러내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lt;br&gt;&lt;br&gt;이제 5장으로 들어와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분별을 가진 사람이 믿는 자며, 형제를 사랑하는 자입니다. 그리고 5장 3절은 형제사랑과 여러가지가 섞여 있습니다. &quot;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quot;(4장 7절) 또 &quot;그 형제를 사랑해야 된다&quot;(21절)로 강도를 올립니다. 그리고 그 사랑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4장의 마무리가 5장 3절로 끝납니다. &lt;br&gt;&lt;br&gt;4절에서 형제님들께서 세상을 이기는 이김을 교제해 주셨는데요. 수양회때 교제를 바탕으로 저도 교제드리겠습니다. &quot;실제로 우리가 말씀대로 온전히 살수 있는가?&quot;라고 말할수 있는 부분이 있을수 있습니다. 분명하게 실제로 진리로 제시된 말씀이 있는데, 이를 부정하는 사람은 우리가 의심해 보아야 합니다. &lt;br&gt;요한일서는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어렵다고 하지 않습니다. 구원받은 모든 자는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기본이며, 마땅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lt;br&gt;이겼다는 것은, 우리가 말씀을 통해서, 아니면 성령님의 사역을 통해서 사람의 생각들이 거절되는 것입니다. &quot;우리가 세상에서 어떻게 의롭게 살수 있겠어? 그것은 이론적인 것이지 불가능한 거야.&quot;라는 생각들을 말씀을 의지하며 떨쳐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은 그와같은 마음으로 새롭게 태어난 자들이고, 그것이 세상을 이기는 이김임을 교제되었습니다.&lt;br&gt;그렇다면 이 이김은 무엇인가? 그냥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승리가 보장되는 것이냐? 질문할수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 때에 그 승리가 보장되는 것으로 저는 보고 있습니다.(4-5절)&lt;br&gt;&lt;br&gt;그리고 물과 피에 대해서요. 김윤철 형제님께서와 수양회 때에 주님의 공생애 사건의 시작의 침례와,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의 피로 교제되었습니다. 그런데 형제님들의 교제를 들을 때에 이를 요한복음과 연결해서 물을 말씀으로 분별해도 서로 연결이 됨으로 이해해 볼수 있겠다 생각됩니다.&lt;br&gt;하지만 사도요한이 무엇을 염두하고 물을 쓰셨는가는 좀더 공부해봐야 할것 같습니다.&lt;br&gt;&lt;br&gt;- 최재홍 형제님 : 저도 6절은 정확하게 모르겠습니다. 다만 요한은 서신서를 시작할 때에 계속해서 영지주의자들을 염두하며 서신을 씁니다. 그런데 영지주의자들 중에서도 많은 파가 있었다고 합니다. 많이 갈라진 분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각각 주장하는 바가 미묘하게 달랐기 때문에 요한사도는 그것들을 각각 염두해두며 논파합니다.&lt;br&gt;사도요한은 &quot;물과 피로 임하셨다&quot;고 말씀합니다. &quot;임하시니&quot;는 '부정과거 시제'로 사용되었습니다. 역사적으로 실제적으로 있었던 일에 대해서 기록하는 내용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된 사람이며, 하나님으로써 오신 것을 말씀하고 있고, 주님께서 육을 입으셨다는 것은 물과 피를 다 가지고 오셨다는 것입니다. &lt;br&gt;그 당시 영지주의자들은 어떤 자들은 주님의 신성만을 인정하는 부류들이 있었고, 또 다른 영지주의자들은 주님의 인성만 인정하는 부류들이 있었습니다. 또 어떤 영지주의자들은 주님께서 고난받으신 후에 그 신성이 올라가 버리셨다고 주장하는 부류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도요한은 이 '물과 피'를 말씀하며 주님께서 참된 인성과 신성을 가지신 사람이심을 말씀해주고 계시다고 생각합니다.&lt;br&gt;&lt;br&gt;- 전의석 형제님 : 여기서 저는 성령을 교제하고 싶습니다. 저희가 구원받은 후에 성령이 없이는 저희가 살수 없습니다. 창세기에서 천지 창조하실 때에 성령께서 제일 먼저 언급됩니다. &quot;하나님의 신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quot; 이처럼 성령님께서 매우 중요한 일을 수행하고 계심을 보게 됩니다. &lt;br&gt;구원받은 자들에게 믿음과 승리의 이김에 있어서는 성령님의 역할이 중요하고, 중요했고, 중요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비췸을 받습니다.&lt;br&gt;&lt;br&gt;- 김윤철 형제님 : 제가 한봉래 형제님 교제를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요한복음 4장에서 물은 말씀이라고 단정적으로 교제하셨거든요. 그런데 요한일서 5장에서는 또 물이 공생애 시작을 말씀하는 것이라고 하니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런데 재홍 형제님의 교제처럼 물과 치가 주님의 완전하신 사람의 몸을 입으심과 신성을 말씀하시는 것이라는 것이 참 좋은 교훈이 되는 것 같습니다. &lt;br&gt;&lt;br&gt;- 장승훈 형제님 : 형제님 말씀대로 요한복음 3장에서 니고데모와의 교제에서 물을 말씀으로 보시는데요. 또 성경에서 물은 두가지로 봅니다. 물은 말씀이나 성령으로 봅니다. 흐르는 물은 성령의 사역으로 봅니다. 그리고 요한일서 5장 3절에 나와 있는 이 &quot;물과 피로 임했다&quot;는 말씀은 요한복음 3장에 나온 물과는 다른것입니다. &lt;/p&gt;</description>
      <category>대전 중구 성경읽기(요약글)/요한일서 성경읽기(요약)진행 중</category>
      <author>박이레</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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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mments>https://leerenote.tistory.com/1994#entry1994comment</comments>
      <pubDate>Sun, 17 May 2026 15:55:45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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