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4장 : 대적을 이기는 방법
< 사사기 4장 : 대적을 이기는 방법 > 23년 4월 16일 일요일 / 강성찬 형제님
이번 시간에는 사사기 말씀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사기 4장입니다.
"에훗의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매 여호와께서 하솔에 도읍한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 그들을 파셨는데 그 군대 장관은 이방 하로셋에 거하는 시스라요 야빈왕은 철병거 구백승이 있어서 이십년 동안 이스라엘 자손을 심히 학대한고로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 그 때에 랍비돗의 아내 여선지 드보라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는데 그는 에브라임 산지 라마와 벧엘 사이 드보라의 종려나무 아래 거하였고 이스라엘 자손은 그에게 나아가 재판을 받더라 드보라가 보내어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을 납달리 게데스에서 불러다가 그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하지 아니하셨느냐 이르시기를 너는 납달리 자손과 스불론 자손 일만명을 거느리고 다볼산으로 가라 내가 야빈의 군대 장관 시스라와 그 병거들과 그 무리를 기손강으로 이끌어 네게 이르게 하고 그를 네 손에 붙이리라 하셨느니라 바락이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나와 함께 가면 내가 가려니와 당신이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나는 가지 않겠노라 가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가리라 그러나 네가 이제 가는 일로는 영광을 얻지 못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여인의 손에 파실것임이니라 하고 드보라가 일어나 바락과 함께 게데스로 가니라 바락이 스불론과 납달리를 게데스로 부르니 일만인이 그를 따라 올라가고 드보라도 그와 함께 올라가니라 모세의 장인 호밥의 자손 중 겐 사람 헤벨이 자기 족속을 떠나 게데스에 가까운 사아난님 상수리나무 곁에 이르러 장막을 쳤더라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이 다볼산에 오른 것을 혹이 시스라에게 고하매 시스라가 모든 병거 곧 철병거 구백승과 자기와 함께 있는 온 군사를 이방 하로셋에서부터 기손강으로 모은지라 드보라가 바락에게 이르되 일어나라 이는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네 손에 붙이신 날이라 여호와께서 너의 앞서 행하지 아니하시느냐 이에 바락이 일만명을 거느리고 다볼산에서 내려가니 여호와께서 바락의 앞에서 시스라와 그 모든 병거와 그 온 군대를 칼날로 쳐서 패하게 하시매 시스라가 병거에서 내려 도보로 도망한지라 바락이 그 병거들과 군대를 추격하여 이방 하로셋에 이르니 시스라의 온 군대가 다 칼에 엎드러졌고 남은 자가 없었더라 시스라가 도보로 도망하여 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의 장막에 이르렀으니 하솔 왕 야빈은 겐 사람 헤벨의 집과 화평이 있음이라 야엘이 나가 시스라를 영접하며 그에게 말하되 나의 주여 들어오소서 내게로 들어오시고 두려워하지 마소서 하매 그 장막에 들어가니 야엘이 이불로 덮으니라 시스라가 그에게 말하되 청하노니 내게 물을 조금 마시우라 내가 목이 마르도다 하매 젖부대를 열어 그에게 마시우고 그를 덮으니 그가 또 가로되 장막문에 섰다가 만일 사람이 와서 네게 묻기를 여기 어떤 사람이 있느냐 하거든 너는 없다 하라 하고 그가 곤비하여 깊이 잠든지라 헤벨의 아내 야엘이 장막 말뚝을 취하고 손에 방망이를 들고 그에게로 가만히 가서 말뚝을 그 살쩍에 박으매 말뚝이 꿰뚫고 땅에 박히니 시스라가 기절하여 죽으니라 바락이 시스라를 따를 때에 야엘이 나가서 그를 맞아 가로되 오라 내가 너의 찾는 사람을 네게 보이리라 바락이 그에게 들어가 보니 시스라가 죽어 누웠고 말뚝은 그 살쩍에 박혔더라 이와 같이 이 날에 하나님이 가나안 왕 야빈을 이스라엘 자손 앞에 패하게 하신지라 이스라엘 자손의 손이 가나안 왕 야빈을 점점 더 이기어서 마침내 가나안 왕 야빈을 진멸하였더라"(삿 4:1-24).
이런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게 됩니다. 여기 사사기의 말씀에서는 이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기업에 들어갔을 때에 이제 그 가운데 있었던 일들을 계속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반복해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 하나님께 불순종하게 되고 그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벌을 내리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신실하게 벌을 내리시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들이 범죄였을 때마다 그것을 그냥 두고 보시는 것이 아니라 그때마다 항상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첫 번째로 기억해야 될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벌 주시는 데 있어서도 신실하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증거입니다. 사생자의 경우, 자기 자식이 아닌 경우, 그냥 아무렇게나 자라도 되는 경우 하나님께서는 내버려 두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경우가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아들로서 우리가 하나님을 본받아야 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잘못했을 때마다 신실하게 징계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가운데서 돌이켜서 자신의 잘못을 깨우쳐서 하나님께 간구하였을 때 또한 그때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변함없이 은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그들이 여러 번 잘못하지만 그들에게 이제 너희들이 그렇게 여러 번 구원해 주었는데도 아직도 배우지 못했느냐고 포기해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그들을 구원하시고 다시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그러한 반복되는 상황 가운데서 이제 하나님께서 그들을 징계하시기 위해서 이용하는 이방 족속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방 족속들이 여러 다른 지역에서 쳐들어오는데요.
또한 다른 족속들이 쳐들어오게 되는데요. 그들이 각각 그리스도인들이 마주하게 되는 여러 대적들을 상징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어떨 때는 메소포타미아에서 들어오기도 합니다. 그것은 이제 가난안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죠. 그런데 그 멀리 떨어진 곳에서 아브라함이 메소포타미아를 떠나서 가나안으로 오게 된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 살고 있었던 세상을 말하고 있습니다. 때때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으로 돌아가겠다. 자주 말을 합니다. 옛날에 구원 받기 전에 살았을 때가 더 낫다. 그리스도인들도 말로는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지만은 '구원받았을 때처럼 그때 자유롭게 마음대로 살 수 있었는데' 하면서 그때를 더 좋았다라고 마음속으로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다시 한 번 그 세상에 쓴 맛을 보게 하십니다. 그 메소포타미아에서 쳐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 그래. 구원 받기 전에 세상에 살았을 때가 이런 거였지. 그들의 노예로서 어떠한 참된 기쁨을 주지 못하는 그런 세상에 속아 살았었지.'라고 다시 한 번 기억하고 이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또 어떨 때는 이제 모압이 쳐들어오게 됩니다. 이제 모압이라는 것은 아브라함하고 아브라함의 조카인 그 롯의 자손들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육신적인 관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압 자손은 롯이 딸하고 관계를 맺어서 낳게 된, 나쁜 육신적인 방법으로 낳은 자손들입니다. 그는 우리의 그 타락한 육신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게 될 때에 때때로 육신을 추구하게 됩니다. 육신은 항상 내가 편한 것, 내가 위주입니다. 내가 편한 것,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것, 육신적인 만족을 주는 것, 또는 내가 높아지는 것, 이게 육신입니다. 다 전부 나, 나, 나, 입니다. 그래서 이 모압 왕이 쳐들어온 것을 보면은 그 모압 왕의 생김새가 묘사가 되어 있습니다. 그는 비둔한 자라고 되어 있습니다. 자신의 정욕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는 안락한 것을 좋아합니다. 서늘한 곳에 누워 있습니다. 그는 높은 것을 좋아합니다. 자기가 보좌에 앉아서 곡물을 받고 사는 것입니다. 이게 이제 육신의 모습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육신을 추구했을 때 이제 이런 모압 왕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그에게 곡물을 바치게 됩니다. 우리의 몸이 마땅히 하나님께 드려야 되는데 그 몸을 이용해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육신을 만족시키는 데 사용이 되는 것입니다. 전혀 가치가 없는 그런 데에 우리의 시간과 노력이 사용이 돼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여기서는 이제 가난한 왕 야빈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야빈의 뜻이 의미가 있습니다. 야빈의 뜻이 지혜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 지혜입니다. 신약 성경에서도 이 마귀적인 지혜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 땅 가운데 사람들 간의 분쟁을 일으키고 서로 자기를 높이려고 자랑하는 세상적이고 육신적이고 마귀적인, 위에서부터 온 지혜가 아니라 마귀로부터 온 지혜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게 그 가난한 왕 야빈이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하솔이라는 곳에 살고 있습니다. 이 하솔이라는 것이 이제 벽으로 둘러싸인 성벽을 말을 하고 있습니다. 신약 성경에서도 하나님을 대적하여 높아진 그 지식에 대해서 '그 성과 같다'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견고하게 쌓아진,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강력은 그 하나님을 대적하여 높아진 그 진을 부시는 능력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가나안왕 야빈는 사단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그리스도인의 대적들이죠. 세상과 육신과 사단이 그리스도인의 대적입니다. 이 사단은 그 밑에 많은 부하들을 거느리고 있습니다. 마귀들을, 귀신들을 부리고 있는 것이죠. 마찬가지로 이 가난한 왕 야빈도 시스라라는 군대 장관을 두고 있습니다. 이 시스라라는 이름 자체가 군대 진열이라는 뜻입니다. 어떤 군대 체계를 가지고 있는 거죠. 사단의 조직이 이렇습니다. 우리가 사단에 대해서 너무나 과대평가할 필요는 없지만 또한 과소 평가에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미 우리를 싸워 이기려고 군대를 조직해 놓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에 대해서 이제 지혜롭게 대응해야 될 것입니다.
우리가 또한 한 가지 기억해야 되는 것은 그는 이미 패배한 왕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자신이 이겼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십자가로 승리하셨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골로새서 3장에 보면은 "정세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정사와 권세가 이 공중에 악한 영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주님께서 달려 죽으실 때에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마치 진 것처럼 보였지만 오히려 그것은 그 악한 영들의 정체를 드러내고 십자가로 승리하신 것입니다. 실제로 이 하솔의 도읍한 가나안 왕 야빈은 여호수아서에 이미 한 번 나옵니다. 이 사사기가 기록된 것보다 100년 전의 일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때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하솔왕 야빈과 싸웁니다. 그리고 그때 하솔왕 야빈이 완전히 망합니다. 완전히 졌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단은 이미 완전히 패배한 그런 대적입니다. 성경은 여러분 사단을 멸하시고, 십자가에서 사단을 멸하시고,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의 힘을 완전히 무력화시킨 것입니다. 우린 이것을 기억해야 됩니다. 그것은 이미 진 왕이다. 하지만 사단이 여전히 지금 여기 그 가나안왕 야빈이 군대 장관 시스라를 데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공격하는 것처럼 그 진 왕 사단이 여전히 지금도 그리스도인들을 괴롭힐 수는 있습니다. 학대할 수는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깨어 있어야 됩니다. 그 사단의 궤계에 속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여기 보면 그 가나안왕 야빈이 이제 시스라와 함께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떻게 학대하였는지를 보게 됩니다. 이 4장과 5장에도 그 일에 대해서 이제 드보라와 바락이 노래로서 이 전쟁을 기록한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전쟁을 이기고 이 노래를 기록한 것입니다. 거기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떠한 학대를 받았는지를 보게 됩니다.
"아낫의 아들 삼갈의 날에 또는 야엘의 날에는 대로가 비었고 행인들은 소로로 다녔도다 이스라엘에 관원이 그치고 그쳤더니 나 드보라가 일어났고 내가 일어나서 이스라엘의 어미가 되었도다 무리가 새 신들을 택하였으므로 그 때에 전쟁이 성문에 미쳤으나 이스라엘 사만명 중에 방패와 창이 보였던고"(삿 5:6-8).
우선 첫 번째로 그때는 대로, 큰 길이 비었습니다. 그 큰 길로 사람이 다니지 못한 것입니다. 그 가나안 왕의 학대로 인해서 그들을 무서워해서 그들이 그들을 괴롭히고 있으므로 눈에 잘 띄는 대로로 다니지 못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이 대로라는 것은 이제 영적인 상징을 생각해 볼 때에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삶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삶이 큰 길로 정로로 반듯한 길로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이 가난한 왕을 두려워해서 타협해서 그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그렇게 하다가는 망할 것 같으니까, 세상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게 되니까, 내가 원하는 이익을 얻지 못하게 되니까, 이제 소로로 다니는 것입니다. 작은 길로 꾸불꾸불한 길. 여기서 이 소로라는 것은 내 생각대로 다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내 생각이 옳은 대로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단이 지금도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하라고 위협하고 있는 것입니다. 때로는 핍박으로, 때로는 달콤한 속삭임으로, 유혹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게 너한테 더 이익이야. 더 쉬워. 그렇게 해서 네 생각대로 하게 만듭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렇게 살다가는 너의 생명이 위험해. 때로는 핍박과 위협으로 대로로 다니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 가운데 관원들이 그치게 됩니다. 우리가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대로 했을 때 금방 인도자들은 사라져버리게 됩니다. 인도자들은 계속해서 우리 가운데 세워져야 됩니다. 인도자가 없는 경우에 그 무리가, 그 지역 모임이 얼마나 황폐하게 되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고 내 생각대로 지금 당장 나한테 편한 대로 나한테 이로운 대로 살다가는 금방 관원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8절에 보면 "전쟁이 성문에 미쳤으나" 성문이라는 것은 이 이스라엘 시대에 판결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재판석과 같은 그런 곳입니다. 성문에서 이게 옳고 이렇게 살아야 된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이제 이런 분별이 내려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의 분별이 정확하게 판단이 내려져야 되는 바로 그 장소가 이제는 사람들의 의견이 난무하는 전쟁터가 되는 것입니다. "내 생각엔 이렇게 한 게 맞아." "아니야 저렇게 하는 게 맞아." 서로 무엇이 분명히 옳은지를 알지 못하고 자기 주장만 하는, 육신적인 싸움만 일어나는 전쟁터가 되는 것입니다. 이게 가나안의 학대를 받을 때에 일어나는 모습이었고 또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사단의 위협과 유혹 가운데서 겪게 되는 그러한 고통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고통의 문제의 시작은 8절에 나온 것처럼 "우리가 새 신들을 택하였으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 하나님이 아니라 다른 신들을 택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전심으로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들을 택한 것입니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이 우상을 따라다니지는 않죠.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이 아니라 다른 물질이라는 우상에 또한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에 그 자리를 내어주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의 결과는 우리가 읽은 것처럼 소로로 다니고 관원이 그치고 성문에 전쟁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이 가운데 드보라와 바락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드보라와 바락을 보게 될 때에 이러한 싸움 가운데 누가 필요한지를, 무엇이 필요한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드보라는 그가 4장으로 돌아왔을 때에 5절에 "에브라임 산지 라마와 베델 사이 드보라의 종려 나무 아래에 거하였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가 거한 장소는 그가 어떠한 삶을 살고 있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라마는 높은 곳을 뜻하는 그런 이름입니다. 그는 높은 지역에 산 것입니다. 실제로 이제 라마가 위치한 곳을 보면은 이스라엘의 높은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이스라엘 지형을 보면 중요한 도시들이 전부 산지에 놓여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이렇게 길게 봤을 때에 이제 여기 갈릴리 호수, 그다음에 요단강, 그다음에 이제 사해, 이렇게 쭉 강이 흐르고 여기 골짜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골짜기 양 옆으로 산지가 이렇게 형성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산지에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그런 도시들, 헤브론, 베들레헴, 예루살렘, 라마, 이렇게 쭉 산지를 따라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라마가 그 높은 산지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위치적으로 높은 곳에 있었을 뿐만 아니라 드보라가 위에 것을 찾는, 이 땅의 것을 찾는 사람이 아니라 높은 영적인 수준을 유지하면서 살아가고 있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가나안과 싸움은 영적인 싸움입니다. 혈과 육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이 하늘에 속한 악한 영들과 싸우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높은 영적인 수준을 유지하고 있어야 됩니다. 드보라가 그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여선지자'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말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사사기 5장에 보면 이게 드보라와 바락이 노래하였다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 보면 드보라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성경에 보면 노래가 기록된 것을 보게 되는데요. 특히 노래가, 이제 여자들이 부른 것들이 있습니다. 미리암이 그랬고 그리고 여기 이제 드보라가 그렇고 또 신약 성경에 보면은 이제 마리아가 그런 노래를 부르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 노래들을 보면은 성경적인 수준이 굉장히 높습니다. 그 성경을 인용하고 그 뜻을 파악해서 그것을 알맞게 노래로 만들어내는 능력이 깜짝 놀랄 수준입니다. 자매님들이라고 해서 성경을 몰라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매님들이 성경을 더 가까이 하고 잘 알고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드보라가 그러한 사람이었습니다. 드보라는 이 노래 가운데서 옛적에 하나님께서 그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실 때에 그 땅을 진동시키신 것처럼 지금 이 전쟁에서도 하나님께서 땅을 진동시키시고 비를 내려 그 폭우로 가난한 왕들의 병거들을 다 쓸어버렸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과거에 어떻게 행하셨고 그리고 지금 또 어떻게 행하시는지를 연결해서 노래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잘 기억하고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여기 벧엘은 특별히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얼마나 가깝게 교제 가운데 있었던 사람인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가나안 왕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인도하는 것입니다.
또한 바락은 어떻습니까? 바락은 "납달리 게데스에서 불러다가" 이 게데스라고 되어 있는데요. 게데스라는 곳이 성소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는 곳입니다. 바락은 기도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에베소서 6장에서 그 악한 영과의 싸움에서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게 됩니다. 그것은 성령의 검, 말씀이고 또한 모든 기도가 필요한 것을 보게 됩니다. 항상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를 가까이 했을 때에 우리는 사단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얻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참 우리 모두가 이러한 본을 누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 싸움은 우리의 육체적인 힘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싸움이고 말씀과 기도로 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가 이 하나님께 대하여 우리가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는가? 이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여기 보시면 3절에 봤을 때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이제 6절에 보면은 중간에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하지 아니하셨느냐" 이렇게 돼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를 구해주십시요, 라고 간구했을 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뭐냐면은 명하시는 것입니다.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어려움이 닥쳤을 때, 우리가 시험에 빠지게 되었을 때, "하나님 여기서 도와주십시요." "우리를 구원해 주십시요."라고 이렇게 기도합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뭐냐면 그 어려움들이 이제 싹 없어지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간구했고 하나님께서 그 어려움들을 어느 한순간에 싹 없애주시기를 바라게 됩니다. 그런데 그전에 어떤 일이 먼저 있냐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게 먼저 있는 것입니다. 회복은 우리가 그냥 간구해서 받는 것이 아닙니다. 회복이라는 것은 우리가 간구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명령을 듣게 되었을 때, 그 명령을 따랐을 때,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여선지자 드보라를 통해서 바락으로 하여금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다볼산으로 올라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하지 아니하셨느냐" 이렇게 돼 있습니다. 이거를 해야 됩니다. 이것이 승리의 길입니다. 이것은 사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가난한 왕 야빈과 시스라는 철병거 900승을 가지고 있고 또 많은 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군대를 대항해서 이제 군대들을 모아서 다볼산으로 올라가는 것은 많은 용기와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했을 때에 그 믿음을 발휘했을 때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행했을 때, 믿음으로 그렇게 따랐을 때, 그다음부터는 하나님께서 놀랍게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그것을 경험을 해야 되는 것인가 우리가 4장 말씀 읽은 대로 "하나님께서 너의 앞서 행하지 아니하시느냐" 이제부터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앞서 행하시고 하나님께서 폭우로, 사사기 5장에 보면은 비를 내리셔가지고 폭우로 그 철병거 900승을 아무 쓸모없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가난안 병사들은 도망가고 몰살당하고 이제 그들의 군대장관 시스라는 겨우 발로 도망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 지혜는 우리가 눈으로 봤을 때 우리가 쉽게 이길 수 없을 것 같고 그것이 굉장히 커 보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겸손하게 하나님 말씀에 단순히 순종했을 때에 항상 우리에게 승리가 주어진다는 것을 이 말씀에서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앞에서 사사기에 나오는 여러 가지 대적들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세상과 육신과 사단이 있습니다. 그리고 적들과 싸우는 모습을 보면 약간씩 다른 것을 보게 됩니다. 세상과 육신과 사단에 대해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어떻게 싸워야 될지를 구체적으로 각각의 경우에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세상과 싸움에 있어서는 우리가 구별되는 것입다.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과 결혼하지 않는 것입니다. 옷니엘이라는 그 세상과의 싸움에서 승리로 이끌었던 이스라엘의 사사는 세상과 분명히 구별된 사사였습니다. 다른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그 이웃 족속들하고 연혼하고 그들의 딸과 결혼하고 그러한 사람이었으나 그는 분명하게 이스라엘 족속 중에서 결혼하고 분명하게 구별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가 세상과의 싸움에서 승리로 이끕니다.
육신과의 싸움에서는 그 모압 왕을 에웃이라는 사람이 칼로 찔러서 승리하게 됩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하는 칼로서 육신을 상징하는 모압 왕과 단둘이 그 골방에서 그를 찔러 죽이게 되는 것입니다. 육신은 우리가 골방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싸워 이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사단과의 싸움은 이제 에웃 하나가 아니라 여기서 드보라가 바락에게 말한 것처럼 그 "스불론과 납달리 족속을 일 만 명을 이끌고 다볼산으로 올라가라" 말한 것처럼 함께 싸우는 것입니다. 스불론이라는 것은 '함께'라는 뜻이고 납달리는 '싸우다'라는 뜻입니다. 그들의 이름의 뜻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함께 싸우는 것'입니다. 사단과의 싸움은 우리가 다 함께 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4장 읽은 것처럼 여러 이스라엘 지파들이 함께 같이 와서 싸우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사기 5장에 보면은 함께 싸운 지파들을 그 노래 가운데서 칭찬해 주는 것들이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사단과의 싸움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함께 싸우는 것입니다. 이것과 관련해서 베드로전서 말씀을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벧전 5:8-9).
여기 베드로전서 5장에서는 우리의 대적 사단 마귀에 대해서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가 계속해서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삼켜버릴 자를 찾고 돌아다니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사자에 대해서 어떻게 싸워야 될 것을 말하고 있냐면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데, 그 이후에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 이것이 형제들과 함께 싸우는 것이라는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나 혼자만 그 사단과 맞닥뜨려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형제들도 동일한 싸움을 싸우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특히 이 베드로전서 우리가 읽은 구절의 앞부분을 보면 교회에 대해서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5장 2절에 보면 인도자들에 대해서 말을 하고 있습니다. "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벧전 5:2-3).
가나안 왕이 그 이스라엘 백성들을 학대했을 때 관원들이 사라진 것을 보게 됩니다. 성문에 전쟁이 있었던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을 사단이 공격할 때 그가 중점적으로 하는 것은 이 지역 모임을 공격합니다. 그리고 지역 모임의 인도자들을 공격합니다. 그들을 사라지게 만들어 버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어떻게 사라지게 만들어 버리냐면 부득이하게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인도자들이 인도해야 되는데 그걸 귀찮아 하게 하고 억지로 하게끔 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을, 그리고더러운 이익을 위해서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돈을 보고 그 일을 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리고 주장하면서 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이게 성문에서 인도가 아니라 싸움이 일어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게 사단의 공격인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5절에 보면 인도자들뿐만 아니라 젊은 자들에게도 말하고 있습니다.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벧전 5:5).
그 모임에서 인도함을 받는 자들, 젊은 자들은 겸손하게 그 장로들을 따를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단이 공격하는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사단은 사람들로 하여금 교만을 부추깁니다. "너는 더 좋은 대접을 받을 만해. 이제 너는 너 목소리를 낼 때가 됐어." 사단이 우리 마음속에 하는 속삭임입니다. 이렇게 공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이제 장로들을 순복하지 못하고 모임은 분란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사단의 공격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단의 궤계를 잘 알고 속지 말고 주의해야 되는 것입니다. 인도자들은 항상 주님을 의지해서 이 양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들에게 본을 보이며 다른 이익이 아니라 아버지의 양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양을 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도함을 받는 자들은 사단의 속삭임에 넘어가지 않고 계속 겸손한 마음으로 장로들의 인도함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게 함께 싸우는 것입니다.
다시 이제 사사기로 가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사기를 보면 이제 실제로 있었던 일을 기록한 4장이나 그 노래를 기록한 5장이나 그 인도자들이 헌신하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칭찬을 합니다. 드보라의 노래에 보면 그 인도자들의 칭찬에 대해서 인도자들을 칭찬하고 또 그 인도함에 대해서 백성들이 잘 따라오는 것을 또한 칭찬합니다. 드보라의 노래에 중요한 두 가지 요소가 그겁니다. 인도자들이 헌신하였고 백성들이 잘 따라왔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승리를 주셨음을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그들을 따르지 않았던 지파들이 또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게 우리가 주의 깊게 생각해 봐야 되는 것입니다. 여기 이 사사기 4장이나 5장 두 군데 모두 그들을 따르지 않은 지파들이 그들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나중에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어떠한 평가를 받을지를 한번 생각해 봐야 됩니다. 여기 그들 지파가 따르지 않은 이유가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르우벤은 그 양 치는 곳에 앉아 있었습니다. 5장 16절에 보면 자기들은 지금 자기 일이 있는 것입니다. 양을 쳐야 되는 것이 있기 때문에, 그리고 다른 지파들 길르앗, 단, 아셀도 자기들이 배에서 해빈에서 장사해야 되는 일이 있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일이 있기 때문에 지금 이 하나님의 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함께 협력해서 싸워야 되는데도 불구하고 바락이 그들을 부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나가지 않은 것입니다. 그들은 그게 기록이 됩니다. 참 우리는 때때로 많은 이 땅의 일들이 우리의 마음을 빼앗고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참으로 무엇을 위해서 부름을 받았는지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주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내 생활에 얽매일 것이 아니라 부르신 자를 기쁘게 해드려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첫 번째 목표가 돼야 됩니다.
여기 이제 특징적으로 메로스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5장을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호와의 사자의 말씀에 메로스를 저주하라 너희가 거듭 거듭 그 거민을 저주할 것은 그들이 와서 여호와를 돕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도와 용사를 치지 아니함이니라 하시도다 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은 다른 여인보다 복을 받을 것이니 장막에 거한 여인보다 더욱 복을 받을 것이로다"(삿 5:23-24).
여기 이제 야엘에 대해서 잠깐 말씀을 드리자면 우리가 읽은 대로 아마 성도님들이 잘 아실 것이기 때문에 간단히 말씀을 드리겠습니다만, 이 야엘은 그 가나안의 군대장관 시스라를 그 장막 말뚝으로 살쩍이라고 되어 있는데요. 관자놀이를 그 텐트를 치는, 이 사람들은 이제 돌아다니면서 텐트를 치고 사는 그런 나그네들이었습니다. 야엘은 그래서 그런 장막 말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텐트를 칠 때 그 텐트를 고정시키는 장막 말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뚝을 박는 망치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장인의 망치라고 되어 있는데요. 그러니까 일하는 사람들의 큰 무거운 망치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군대장관 시스라가 잠들었을 때에, 시스라가 병거들이 모두 물에 잠겨버리고 걸어가지고 그 야엘이 사는 장막에 와서 나 좀 숨겨달라고 했을 때 그 가운데서 들어가서 잠을 자게 됩니다. 그리고 그가 자고 있을 때에 야엘이 장막 말뚝으로 그의 머리에 대고 장인의 망치를 가지고 쳐서 그 관자놀이를 뚫어서 죽인 것입니다. 이건 굉장히 또한 상징적인 그런 면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시스라는 그 세상의 지혜를 앞장서서 전파하는 군대 장관입니다. 그 세상의 지혜가 아무리 화려해 보이고 맞는것 같고 사람들 눈에 보기에 그게 정말 진리인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은 단지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져버리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 장막 말뚝, 그리고 방망이, 이게 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상징적으로 사용되는 그러한 단어들입니다. 그가 이제 최종적으로 그 시스라의 숨을 끊어놓게 됩니다. 여기서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23절과 24절에서 그 야엘이 한 행동이 메로스 거민들과 대조적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메로스라는 지역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지역 사람들에게 '저주하라'고 돼 있습니다. 반대로 24절에서는 야엘은 복을 받는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왜 메로스가 저주를 받냐면은 그 싸움을 돕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특별히 메로스와 야엘이 이제 대조적으로 이렇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비교해서, 그걸 생각해 봤을 때 메로스도 결정적인 찬스를 얻었던 것입니다. 야엘이 그런 것처럼 야엘이 자기가 살고 있는 집에 군대 장관 시스라가 들어와가지고 잠을 잔 것처럼 메로스도 그 가난안 병사들이 도망가는 그 길목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조금만 힘을 보태면 완전히 그들을 멸절시킬 수 있는 그런 찬스가 그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걸 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저주를 받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생각해 보게 됩니다. 때때로 "나도 하나님의 일을 하고 싶어. 그런데 나는 그런 결정적인 찬스가 안 와. 나는 그냥 그냥 특별한 은사가 없는 그런 형제야." 또는 "나는 그냥 집안일을 하는 자매야. 나에게 무슨 그런 중요한 일이 맡겨지겠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안 하죠. 하지만 바로 그러한 곳에 하나님의 일을 그것도 결정적인 일을 할 수 있는 찬스가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야엘은 그리고 그 기회를 잡은 것입니다. 그냥 집에서 집안일 하고 있는 여자인 야엘에게 그 기회가 온 것입니다. 우리의 대적의 장관의 숨을 마지막으로 끊어놓을 수 있는 마무리를 할 수 있는 찬스가 그 여자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할 기회가 나한테 주어지지 않는다라고 생각하는 그 순간, 그 사람에게 그 기회가 주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또 이제 한 가지를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읽은 대로 이 4장과 5장은 이제 여자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들이 굉장히 중요한 일을 합니다. 드보라가 여자였고 야엘이 또한 여자였습니다. 우리는 이 싸움에서 자매님들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들이 자기에게 주어진 위치를 벗어나서 그 중요한 일을 한 것이 아닙니다. 여기 드보라의 경우에는 그가 항상 격려하는 위치에서 하게 됩니다. 드보라가 앞장서서 칼 줘바, 해가지고 자기가 칼을 들고 그 군대를 이끌고 가는 그런 역할을 하지 않습니다. 드보라는 항상 바락을 격려해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매님들의 중요한 역할이 첫 번째가 격려하는 것입니다. 바락은 당신이 나와 함께 가지 않으면 나는 갈 수 없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이제 바락의 연약한 면이기도 하지만 또 한 가지 생각하게 되는 것은 사실 형제들이 다 그런 존재입니다. 형제들이 이제 앞에 나와서 막 이렇게 하니까 용기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모든 형제들이 전부 자매가 도와주지 않는다면, 자매가 격려하지 않는다면은 못 가는 존재입니다. 그게 하나님께서 돕는 배필로 자매님들을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그 아내가 남편을 격려해야 됩니다. 자매들이 이제 형제들이 어떤 일을 할 때마다 조언을 해줍니다. "이게 좀 부족했어. 이게 좀 잘못됐어." 아주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잘못하다가 보면 비난이 돼버립니다. "왜 이렇게 못해?" 이렇게 돼버리는 거죠. 실제로 제가 만나는 형제님들이 그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을 저한테 실제로 얘기를 해서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그게 이제 들어야 되는 꼭 필요한 평가지만 또한 자매님들이 지혜 가운데서 정말 격려가 되게끔 말해 주시기를 바라게 됩니다. 뭘 아셔야 되냐면 자매들이 형제를 인정하지 않으면 할 수 없어, 라고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게 얼마나 필요한 힘이 되는지 자매님들은 잘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자매의 격려가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건 단지 말뿐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죠. 계속 형제를 지지하고 있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줘야 되는 것입니다. 그 드보라의 이름의 뜻이 꿀벌이라는 뜻입니다. 왜 이제 꿀벌이라는 뜻이 되냐면은 꿀벌이 그 단어 자체 문자적으로는 규칙적으로 움직이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제 꿀벌이 항상 규칙적으로 움직입니다. 어떤 장소를 다른 꿀벌한테 알려줄 때도 규칙적인 어떤 패턴대로 날아서 그 장소를 안내를 하는 것입니다. 자매님들이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변함없이 형제들을 따뜻하게 격려해주고 또한 자매님들이 또 하나님 앞에서 행동하고 그들이 기도하고 말씀 보고 그런 있는 그런 모습들 자체가, 꾸준하게 그렇게 하고 있는 모습 자체가 격려가 됩니다.
조금 이제 말이 길어지지만 잠깐 말씀을 드리자면 몸이 어려워졌을 때, 모든 인도자들이 다 사라져 버렸을 때, 그때 그 모임을 모임의 명맥을 유지하게 되는 것은 꾸준하게 변함없이 규칙적으로 계속적으로 하던 대로 이제까지 해왔던 대로 하고 계시는 자매님이 결국엔 그 모임에 그 숨을 이어가게 됩니다. 중국에도 그런 모임이 있습니다. 형제들이 없는 모임이에요. 그래서 이제 모임으로 모이지도 못하고 만찬 예배도 드리지 못하고 있는 그런 모임이었습니다. 근데 어떤 한 자매님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형제도 없으니까 인도자도 없으니까 뭐 주일에 뭘 모이냐? 이렇게 할 법도 한데 계속 일요일에 모여서 자매님들끼리 이제 성경 보고 읽고 기도하고 헤어지고 그렇게 했습니다. 몇 년을 그렇게 했습니다. 그게 이제 그 모임에 숨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가게 하는 힘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이제 모임으로 세워져서 또 함께 예배를 드리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이제 야엘의 모습입니다. 이 야엘도 자신의 섬김의 범위를 넘어서서 막 나서서 한 것이 아니라 장막에서 하게 됩니다. 장막에서 우리의 가정을 뜻하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그가 마무리를 짓습니다. 사실 이 가정이 하나님의 전투에서 마무리를 짓는 공간입니다. 거기서 세상의 지혜가 이 장막 말뚝을 받아서 꿰뚤어지는 것입니다. 자매님들이 가정에서 이 일을 해야 됩니다. 자기 자녀들을 키우면서 거기서 세상 지혜의 끝장을 가정해서 봐야 되는 것입니다. 이런 집회에서 이제 이런 말씀 교제를 하고 나서 이제 각각 집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결국 우리는 집으로 돌아가게 되니까요. 그때 이제 형제가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이런 이런 말씀을 들었고 우리가 이제 그렇게 살아야 되겠다."라고 형제가 말합니다. 그리고 그때 마무리를 자매님이 지어줘야 됩니다. "그래 맞아. 그렇게 살아야지."라고 해야지 우리의 대적이 끝난 것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그걸 놓아줘서는 안 됩니다. 형제가 "우리 이제 그렇게 말씀대로 살아야겠다." 했는데 자매가 "아니, 그래도 이런 경우도 있잖아. 현실이 이렇잖아."라고 그 대적의 숨을 다시 살려줘서 돌려보내면 안 되는 것입니다. 가정이 그 대적의 끝을 볼 것이냐, 아니냐, 결정짓는 장소입니다. 자매님들이 그 중요한 섬김의 영역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단과 또 육신과 이 세상이라는 우리의 대적을 계속 맞닥뜨리고 싸우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역사를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싸워야 될지를 교훈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참으로 신실하시고 동일하셔서 지금도 여전히 동일하게 역사하시고 믿는 자들에게 순종하는 자들에게 승리를 가져다 주고 계십니다. 참으로 이러한 승리가 이 대전 중구 모임에 또한 동일하게 있고 이러한 승리 가운데서 모임이 계속적으로 견고하게 세워져 가기를 바라게 됩니다. 이상으로 말씀 마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