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 인간은 무엇인가,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신가
< 복음 : 인간은 무엇인가,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신가 > 23년 3월 5일 일요일 / 한봉래 형제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 지혜를 자랑치 말라 용사는 그 용맹을 자랑치 말라 부자는 그 부함을 자랑치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찌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렘 9:23-24).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요 10:17-18).
"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 읽는 것을 듣고 말하되 읽는 것을 깨닫느뇨 대답하되 지도하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뇨 하고 빌립을 청하여 병거에 올라 같이 앉으라 하니라 읽는 성경 귀절은 이것이니 일렀으되 저가 사지로 가는 양과 같이 끌리었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의 잠잠함과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낮을 때에 공변된 판단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가히 그 세대를 말하리요 그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 하였거늘 내시가 빌립더러 말하되 청컨대 묻노니 선지자가 이 말 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뇨 자기를 가리킴이뇨 타인을 가리킴이뇨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행 8:30-35).
세군데 말씀을 읽었습니다. 우선 첫번째 말씀부터 설명드리겠습니다. 사람은 어떤 존재인가? 라고 하는 것입니다. 저희들이 세상에 태어나서 볼 때에, 저희들이 사람에 대해서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나는 나를 만든게 아닙니다. 내가 나를 만든게 아닙니다. 부모님이 태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부모님은 누구에 의해서 태어났죠? 그 부모님이 계십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를 보면 첫 번째로 이렇게 인식해야 합니다. 나는 피조물이다. 나는 스스로 존재한게 아니고 누군가에 의해서 이 세상에 태어나게 되었다. 이것이 자기에 대한 첫 번째 인식이어야 합니다. 그 다음 두 번째입니다. 사람은 어떤 존재냐? 사람이 살기 위해서 자기 스스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사람이 살려면 제일 먼저 필요한게 뭐냐하면 공기입니다. 고익는 주어져야 합닏나. 공기 없으면, 숨 못쉬면 당장 죽죠. 물 있어야 합니다. 공기, 물, 음식, 그래서 사람은 한번 존재하면 그대로 계속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계속적인 공급이 필요합니다. 이게 인간에 대한 두 번째 이해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아, 누군가가 나를 보내줬다. 누군가에 의해서, 무엇인가에 의해서 이리 보내진 존재다. 그 다음, 내가 계속해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계속적인 공급이 필요하다. 누군가가 나에게 계속 줘야 합니다. 이게 인간에 대한 이해인데요.
성경에서 말하는 첫 번째 사람 아담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아담도 하나님이 만드셔서 에덴동산에 두셨습니다. 아담이 첫 번째 사람입니다. 그가 보았을 때, 나는 내가 만든거 아니다. 누군가가 나를 이 세상에 살게했다, 라는 인식을 해야 합니다. 아담은 그걸 아주 분명하게 압니다. 우리보다 더 분명하게, 아담은 하나님이 나를 만드셔서 여기다 두셨구나를 압니다. 그런데 그가 에덴 동산에서 자기 마음대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계속적인 하나님의 도움이 있어야 그는 삽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선악과를 먹지 말라." 그런데 사단이 말합니다. "선악과 먹으면 좋다. 선악과 먹으면 네가 하나님이 된다." 이것이 사단의 유혹입니다. "네가 하나님이 되라." 마치 네가 너를 만든 것처럼 살고, 그리고 자기가 살기 위해서 필요한 것, 다 네가 통제 할 수 있는 것처럼 살아라. 계속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믿고 살지말고, 순종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러지 말고 그냥 네가 하나님이 되어라. 너는 네가 만든 것처럼, 그리고 네가 원하는 것, 자기 존재에 필요한 것들 다 알아서 하고 살면 어때? 하고 제안한 것입니다. 아담이 그 길을 선택합니다. "그래, 계속 하나님 밑에 있기보다 이렇게 살면 좋지 뭐. 이게 인간이 더 편한 거지. 더 내가 가치있는 것이 되는거지." 하고 선택합니다. 아담은 그랬고요.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인류 역사가 쭉 진행이 되어서 사람들은 아담도 모르고 그냥 자기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예레미야라고 하는 사람을 통해서 사람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들은 피조물이다. 너희들이 너희들의 존재를 만들지 않았다.
그 다음에 두 번째, 사람들은 다 이것을 인식하는 거죠. 그런데 사람들이 뭘 선택하느냐면 내가 무엇인가를 의지해야 합니다. 의지하며 살아야 하는데 사람들이 무얼 선택하느냐면 아까 예레미야에서 말씀을 드렸는데요. 어떤 사람은 자기 지혜를 의지합니다. 지식이 많아서 내가 이 지식을 가지고 세상을 산다.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공부를 잘해서 이것을 가지고 좋은 회사를 다니고, 그리고 그거 가지고 회사에서 일 잘하고, 승진하고, 그래서 자기 지혜를 의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또 공부를 못하는 사람도 있죠. 그런 사람들은 또 뭐가 있느냐면 힘이 있습니다. 운동을 잘해요. 손흥민처럼, 운동을 운동을 얼마나 잘하는지 그의 운동 실력을 인정해서 돈도 주고, 차도 주고, 막 이러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의 힘을 의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내 힘으로 산다. 아주 나쁜 말로는 깡패들이 그렇게 말하죠. "나는 내 주먹을 믿는다." 자기 주먹을 믿고 삽니다. 그것을 의지해서 사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을 다 싫어하세요.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지혜를 의지하지 말라. 그 다음에, 힘을, 용기를 의지하지 말라. 그리고 또 하나입니다. 부를 자랑하지 말라. 어떤 사람은 부모님께 건물 한채 물려받아서 평생 거기서 자기가 살 수 있는 돈이 나와요. 그러니까 나는 공부 안해도 되고, .하기 싫은 노동 안해도 되고, 나는 내 하고 싶은거 하면서 산다. 돈은 건물에서 다 나오니까. 하나님이 이런거 싫어하십니다. 지혜를 의지하지 말고, 힘을 의지하지 말고, 그리고 부를 의지하지 말라. 그리고 뭘 의지해야 되느냐? 사람은 뭘로 살아야 되느냐?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야 된다, 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아는 것, 이제 저희들이 만약 하나님보다, 내 지식, 내 힘, 내 지식, 내 통장을 의지하고 있다면 아담이 범한 실수를 똑같이 하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그렇게 했거든요. 내가 아담입니다. 독같이 하나님을 의지하여 나는 하나님이 만든 존재입니다. 내가 살아가기 위해서 하나님은 나를 한번 만들었을 뿐 아니라 나를 살아가기 위해서 지금도 지구의 공기를, 사람들이 얼마나 오연시키는지 모릅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아직도 숨쉴만한 공기를 주고 계십니다. 지금도 물을 주고 계십니다. 지금도 우리가 먹을 것들이 자라나도록 풀과 동물들을 다 하나님이 다 키워내고 계신 것입니다. 어떤 과학자들이 그렇게 말하죠. 이 지구가, 그러니까 지구와 태양과의 거리가 만약 조금만 앞에 있으면 사람이 못삽니다. 조금만 뒤로가도 못삽니다. 그런데 정확하게 지구와 태양의 거리를 만들어 놓으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이 간격이 좁혀지지 않고 운행하도록 지금도 하나님이 손으로 붙들고 있습니다. 이게 한번 만들어 놓으면 그냥 계속 영원히 가는거 아닙니다. 지금도 이 지구를 만드시고 이 지구가 계속 그와 같이 운행되도록 보존하고 있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말합니다. "너희는 만들어진 존재다. 너희들에게는 내가 필요하다." 그런데 아담이 하나님 아닌 것을 의지합니다. 하나님이 아닌 것이 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선악과는 나쁜게 아닙니다. 선악과는 보기에도 아름답고 먹음직한 좋은 열매입니다. 하나님이 나쁜 것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게 나쁜것이 아닌데 하나님보다 그것을 의지하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지혜는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지혜를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의 힘, 몸, 중요한 것입니다. 운동도 하고 건강하게 키워내야 됩니다. 그런데 이 몸을 의지하면, 하나님이 아닌, 하나님을 대체하는 것으로 의지하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돈도 주님이 주신 물질이고 주님 감사하게 주신 용도를 따라 잘 써야 합니다. 돈도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돈을 하나님 대신 의지하면 문제가 오는 것입니다. 그 문제가 아담에게서 왔는데요. 아담에게서 어떤 문제가 밝혀 졌느냐면 사람이 죽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에덴에서 사람을 처음 만드실 때는 죽지 않게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죽음이라고 하는 것이 오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가시냐면 예수님을 통해 풀어가십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피조물이고 하나님의 계속적인 공급으로 살아야 하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을 의지해서 사망이 왔습니다. 이제 예수님을 통해서 이 사망의 문제를 해결합니다. 그리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이분을 나의 하나님으로 인정해야 된다. 그리고 그분을 계속해서 의지해야 된다. 이게 성경이 말하는 인간의 죄에 대한 해결책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이 해결 할 수 없는 이 죽음을 정복하신 분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에 대해서 제가 말씀을 드리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나는 스스로 목숨을 버린다." 누가 예수님을 죽인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힘이 없어서 죽은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죽습니다. 그리고 삼일 만에 부활하십니다. 스스로 살아나십니다. 이게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하는 건데요. 저희들이 성경을 안찾고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죽음은 저희들이 다 죽어야 되죠. 참 안타까운 것입니다. 죽음처럼 우리를 슬프게 만드는게 없는데요. 이 죽음이 여러가지 문제가 있지만 사람이 죽음을 싫어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다. 죽음이 무서운 이유는 첫 번째, 언제 죽을 것인지를 죽음이 결정합니다. 내가 결정하지 않습니다. 언제 죽을지를 모릅니다. 죽는다는 것은 다 압니다. 그런데 언제 죽을지 모릅니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죠. 우리는 자녀들 다 키워놓고, 또 시집 장가도 보내고, 그리고 손주들도 보고 기뻐하다가 그 다음에 죽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죠. 물론 그런 분도 있습니다. 그런데 저희들이 아는대로 어린이 병원에 가보면 어린아이입니다. 어떤 아이는 태어난지 얼마 안됐습니다. 그런데도 암에 걸려서 그런데 와 있습니다. 그래서 보면 굉장히 마음이 아픈거죠. 그래서 죽음이 두려운 이유는, 첫 번째 죽음의 시점을 죽음이 결정한다는 겁니다. 우리들은 다 교회에 왔다가 돌아가고 아무 일도 없기를 바라지만 아무도 모릅니다.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릅니다. 그게 죽음의 두려운 점입니다. 그 다음 두 번째, 죽음은 죽음의 방법을 죽음이 결정합니다. 저희들같은 노인들은 뭘 걱정하냐면 제발 치매만 안걸렸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민폐가 되잖아요. 자식도 못알아보고, 벽에다 막 칠하고, 이거 어떡합니까? 그런데 아무리 그렇게 원해도 자기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죽는 방법을 죽음이 결정합니다. 교통사고로 죽을지, 암으로 죽을지, 또 다른 사고로 죽을지 아무도 모릅니다. 이게 죽음의 특징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죽음을 보면 예수님은 두가지를 예고합니다. 나는 언제 죽는다를 예수님이 결정합니다. 어떻게 죽는다도 예수님이 결정합니다. 그 다음에 언제 다시 살아난다도 예수님이 결정합니다. 예수님이 다 결정해요. 그러면 이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죽음이 건드릴 수 없는 분입니다. 그 대목을 성경을 통해서 몇 군데만 찾아보겠습니다.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을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우리라 하시더라 그 때에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가야바라 하는 대제사장의 아문에 모여 예수를 궤계로 잡아 죽이려고 의논하되 말하기를 민요가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말자 하더라"(마 26:2-5).
"명절을 당하면 총독이 무리의 소원대로 죄수 하나를 놓아 주는 전례가 있더니"(마 27:15).
"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웠더라"(마 27:32).
"저희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마 27:35).
마태라는 사람이 제자인데요. 예수님 십자가에 못박힌 장면을 이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어떤 대화가 오고가고 있느냐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틀 후에" 하루 이틀 지나고 삼일 째에 유월절이라고 하는 명절이 있습니다. 유대인의 명절입니다. 우리로 치면 구정과 같은 그런 명졀입니다. 그 명절이 이틀 후에 있게 되는데 "내가 이틀 후에, 유월절이라고 하는 명절에 죽을 것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고 죽는 방법도 말씀하십니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을 것이다." 그런데 저희들이 그 다음 성경을 보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제사장입니다. 그게 당시의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입니다. 오늘날로 치면 대통령이고 국회의원이고 이런 분들이죠. 그분들이 모여서 의논을 합니다. 예수님을 죽이기는 죽이되, 예수님 안되겠다, 죽여야 되겠다. 그런데 명절에는 죽이지 말자. 왜냐하면 이분들은 정치인들입니다. 그래서 유월절이라고 하는 명절에 예루살렘이라고 하는 이스라엘 수도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옵니다. 사람들이 너무 많으면 그 사람들 가운데는 예수님께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 예수님이 병을 고쳐 주시고 또 귀신을 쫓아내 주시고 그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이 예수님 좋아하는 사람들이 섞여 있는데, 명절에 죽이면, 사람들이 군중심리로 어떻게 변할지 모르니까, 자기들은 정치인들인데, 정치인들은 늘 백성들의 인기를 생각하죠. 백성들의 여론 동향을 생각하는 거죠. 그래서 그때는 위험하다. 그때는 죽이지 말자. 그러면 생각해 보십시요.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이 파하고자 하는 날에 예수님은 자신이 죽을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성경이 왜 이것을 기록했느냐? 이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는 날, 죽는 시간을 스스로 정하신다. 사람 중에 자기가 죽을 날짜를 미리 알고 그날 딱 죽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러면 예수님 이분은 누구입니까? 자기가 죽을 날짜를 정하고 내가 그날 죽는다. 그리고 두 번째입니다. 죽는 방법도 정하십니다. 십자가에 못박힐 것이다.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각 나라마다 사람을 죽이는 방법이 정해져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어떤 사람이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지어서 재판을 받고 그 다음에 사형 판결을 받으면 사형 집행을 하는데요. 우리나라는 사형 집행을 지금 안하고 있습니다. 사형 판결까지만 하고 집행은 안합니다. 그래서 사형 폐지국가에 속합니다. 이게 논란이 있습니다. 사형 시키자, 하는 것도 있고 그래도 어떻게 인간이 인간을 죽이냐? 그래서 사형을 하지 말자. 그래서 무기징역만 하자. 이런게 있는데요. 우리나라도 지금 그쪽에 서 있는데요. 하여간 만약 우리나라에서 사형 집행을 하면 목을 매어 죽입니다. 교사형이라고, 죽이는 방법이 다 있습니다. 군인이 만약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를 하면 총살합니다. 또 유명한게 프랑스에서 혁명이 일어났을 때, 기요틴이라고 하는 사람 목을 밑에 놓고, 위에서 작두같은 것을 뚝 떨어뜨려어서 죽이는, 아주 끔찍하게, 사람들에게 보이는 공개적인 처형 방법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각 나라마다, 또 시대마다 사람을 죽이는 방법이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사형에 해당하는 사람이 나오면 어떻게 죽이게 되어 있느냐? 관습이 돌로 쳐서 죽입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에서 첫 번째 순교자가 스데반인데요. 스데반을 죽일 때 돌로 쳐서 죽입니다. 사도바울이 옷을 맡아 두었습니다. 돌로 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유대인입니다. 유대인으로서 유대인에게 종교 재판을 받아 죽으시면 돌에 맞아 죽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십자가에 죽는다." 십자가에 죽으려면, 이스라엘은 돌로 쳐 죽이는 문화입니다. 그런데 십자가로 죽이는 방법을 채택한 나라가 이스라엘을 정복해야 합니다. 이것이 로마입니다. 로마가 십자가 처형을 사형 방법으로 정합니다. 십자가는 너무 잔인한 방법이어서 로마도 자기나라 사람들은 십자가로 죽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로마는 세계 제국이니까 자기들이 정복한 나라, 정복된 민족 가운데 사형에 해당하는 사람만 십자가로 죽입니다. 그런데 이 로마가 이스라엘을 정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로마는 이렇게 합니다. 이스라엘에게, 세계 제국이니까, 각 나라를 직접 통치할 수 없잖아요. 너무 많은 나라를 점령해서, 그래서 각 나라에 자치권을 줍니다. 그리고 통치를 하는데요. 로마는 이스라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 당시 빌라도라고 하는 사람이 총독이었는데 이스라엘을 이렇게 다스립니다.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에게 권한을 다 위임합니다. 너희들이 다 처리해라. 단 사형을 시킬 때는 우리 허락을 맡아라. 사형 집행은 우리가 한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사형을 시키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자기들이 재판해서는 사형입니다. 그런데 시형 집행을 못합니다. 식민지입니다. 그래서 빌라도에게 데리고 갑니다. 그래서 빌라도가 다시 심문합니다. 그리고 빌라도는 놓아주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종교적인 문제거든요. 이것이 정치적인 문제거나 도덕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메시아가 맞니, 아니니 이런 문제거든요. 그래서 놓아주려고 합니다. 그런데 계속 압박을 가해서 사형 집행을 합니다. 그런데 그때, 로마의 방식대로 십자가 사형을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떤 분이냐면 자기가 죽는 시간을 자기가 정하십니다. 죽는 방법도 자기가 정하십니다. 그런데 죽는 방법을 정하셨다고 하는 것은 뭘 의미하느냐면 이분이 각 나라의 운명을 결정하는 겁니다. 로마를 강대국으로 키우고, 로마가 당시 세계의 가장 강국이 되게 하고, 로마가 이스라엘을 점령하게 하고, 이것을 할 수 있는 분이 자기의 죽음의 방법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이분이 죽는 시간을 정하고 죽는 방법을 결정했다면 이분은 누구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신데 사람이 되어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왜 죽습니까? 하나님이 사람한테 죽을 이유가 있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신데 사람에게 모독적인 죽음을 죽습니다.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닙니다. 이분이 삼일 만에 부활하십니다. 부활에 대해서는 다음번에 부활의 증거들에 대해서, 부활하십니다. 그렇게 하심으로서 하나님은 인간의 문제를 해결해 가십니다.
인간은 이해해야 합니다. 상식적으로 보면 사람은 피조물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만든게 아닙니다. 피조물일 뿐만 아니라 그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공급을 받아야 합니다. 자기가 만들지 않은 공기 마셔야 합니다. 자기가 의식하지도 못하지만 물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먹기 위해서 곡식들이 다 자라가야 합니다. 곡식들은 그냥 자라는게 아닙니다. 햇빛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태양을 만드시고 비춰주시는 분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은 생각해야 합니다. 나는 나를 만들지 않았다. 나는 계속적으로 무엇인가를 의지해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나를 안만들었지만 그래도 내가 주인이지 뭐, 내가 내 마음대로 사는거지.' 그리고 뭘 의지하느냐? 하나님이 아닌 지혜와 용기와 부를 의지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그것을 의지하지 말고 피조물인 인간들이 자기를 창조한 하나님을 의지해라. 하나님이 사람의 지혜보다 더 놀랍게 사람을 대우하신다. 사람의 용기보다 하나님이 훨씬 더 사람을 사랑하시고 돌보신다. 이 복된 길로 와라. 이게 성경이 말하고 있는 복은입니다. 그리고 이 복음을 믿을 수 있도록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오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떠남으로 가질 수 밖에 없었던 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합니다. 이 죽음의 문제를 가지고, 그리고 인류의 역사의 흐름을 가지고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입증합니다.
그러면 이런 주님을 믿은 사람 한 사람을 예를 들어서 보겠습니다. 누구나면 에디오피아 내시인데요. 예수님 거의 같은 시대인데요. 에디오피아는 지금도 있는 아프리카에 있는 나라죠. 에디오피아에 간다게라는 사람입니다. 이분이 에디오피아에서 꽤 높은 자리에 올라가 있습니다. 국고를 맡았다고 하니까, 우리로치면 재무부장관 쯤, 그래서 누군가가 국가에 어떤 물건을 써야 합니다. 세금을 걷고 사용하고 하는 것은 이 국고를 맡은 간다게의 싸인이 있어야, 도장이 있어야만 출납이 되는 아주 중요한 자리에 올라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이렇게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분은 아프리카에 태어나서 아프리카 식으로, 에디오피아 식으로 교육을 받고 그 사회에서 쭉 살았습니다. 그런데 잘은 모르지만, 나와있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이분도 여러가지 신을 믿고 있었습니다. 아프리카의 여러가지 신, 우리나라도 옛날부터 여러가지 신이 있었죠. 신을 믿고 살았는데, 신이라고 하는 것은, 종교라고 하는 것은, 항상 두가지가 핵심입니다. 각 나라마다 여러가지 종교가 있지만 그 종교의 공통점은 두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저희들이 보통 '진사'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는 대표적인 이야기가 뭐냐면, '심청전' 물론 지어낸 이야기지만 중국에 있는 상인들이 무역을 하기 위해서 중국에서 바다를 건너 한국에 와서 물건을 팔고 한국에 있는 물건들을 중국에 가지고 가서 또 팔고, 그래서 장사를 해서 이윤을 남기는 상인들이 왔다갔다 하다가 바다를 건너가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사람이 통제할 수 없는 힘입니다. 어떤 때는 파도가 치고 그러면 장사는 커녕, 물건을 다 잃어버리고 사람까지 죽는 경우가 있는거죠. 그래서 이 바다의 풍랑과 이 파도가 왜 우리를 공격하느냐? 그래서 이 풍랑 배후에 있는 어떤 신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파도에게 제물을 갖다 바칩니다. 제물을 갖다 바치면서 우리 이번에 운항하는 동안에는 좀 잠잠하게 있어다오. 그래서 심청이라고 하는 사람, 아버지가 봉사여서 공양미 삼백석, 줄테니까, 그거 갖다 삼백석 절에 갖다 바치면 아버지 눈 뜬다니까, 자기가 희생하고, 그래서 중국 상인에게 나에게 공양미 삼백석을 주면 내가 대신 바다에 제물로 들어가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종교라고 하는게 뭐냐면 전부 이겁니다. 어떤 알지 못하는 신이 있고 이 신이 우리를 헤꼬지 하니까, 해고지 하지 말라고 갖다 바치는 것, 이것을 진사라고 합니다. 어떤 신의 진노를 사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화내지 마세요. 조용히 계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쪽 절은 공양미 삼백석을 갖다 바치면, 어떤 분이 그것을 계산했어요. 그 당시 공양미 삼백석이면 오늘날로 얼마나 되느냐? 수억입니다. 오늘날로 치면 수억을 갖다 바쳐야 절에서 부처님이 우리 불쌍한 아버지, 앞 못보는 아버지 눈을 뜨게 해준다는 겁니다. 그래서 두번째가 '기복'입니다. 눈을 뜨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 이 신이 그 능력을 자기를 위해서 쓰지 않는 거예요. 그러니까 제물을 갖다 바치면서 그 능력좀 나를 위해서 써 주세요. 하는 겁니다. 이게 하나님과 너무 다릅니다. 아니 어떤신이 능력이 있는데 치사하게 돈을 받아야 그 능력을 사용해 줍니까? 이게 신입니까? 사람입니다. 사람만도 못합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그리스 로마 신화를 보면 이게 왜 신이냐면 능력이 있어서 신인지, 인격은 사람만도 못합니다. 교양있는 사람은 그렇게 안합니다. 뭐 조금만 질투하면 죽이고, 그래서 공양미 삼백석을 갖다 바치는 거예요. 그거 받고 능력을 사용하는 신, 이 신이 신입니까? 그 다음에 맨날 해코지 하는데 이거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거죠. 예쁜 처녀, 아직 제대로 살아보지도 못한 처녀, 그 처녀를 바다에 던지면, 그리고 그것을 받고 안전하게 운항한단 말입니까? 이런 신을 신으로 받을 수 있습니까?
에디오피아 내시가 아마도 나는 이런 종교에 질렸다. 나는 이런 신 싫다. 이런 신이 설령 있다해도 나는 이런 신 안믿겠다. 그래서 질린 겁니다. 어릴적부터 자기 나라에서 여러 신들,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하고, 저런 경우는 어떻게 해야하고, 무슨 종교적인 경험을 많이 했는데, 그는 이게 자기 마음에 설득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어떤 소식을 듣느냐면, 그런데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나라에서는 그는 어떤 신을 믿느냐면 창조주 하나님, 이 세상을 창조한 유일한 하나님 한 분, 그래서 사람은 피조물이다. 그리고 사람은 계속적으로 무엇인가를 의지해야 한다. 내가 그 하나님이다. 이렇게 말했는데 사람들이 이 하나님은 싫고 지혜와 부와 용기를 선택했기 때문에 할수없이 사람들이 죽게 됩니다. 이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그가 나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을래, 이렇게 한 것입니다. 에디오피아는 아프리카고 이스라엘은 중동입니다. 그러니까 먼 다른나라 신을 믿겠다고 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에디오피아 내가 구원받은 것입니다. 첫 번째, 그는 종교를 버리고 자기에게 익숙한 계속 자기가 보아온 미신을 버리고 성경의 하나님을 믿기로 결정합니다. 이걸 회개라고 합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 그런데 문제는 그 하나님을 믿기로 했는데,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이고 믿으려면 그 하나님께 나가려면 뭘 해야 되는가를 알고 싶어서 그가 바쁜사람이지만 일을 잠시 멈추고, 아마 대리인을 세워놓고 자기가 마차를 타고, 그 당시 마차니까 요즘으로 치면 BMW이런거 타고, 리무진 이런거를 타고 예루살렘까지 갑니다. 이 하나님을 어떻게 내가 알고 감사드리고, 이 하나님을 어떻게 기쁘게 해 드리고, 이 하나님의 뜻은 뭔지 또 배우고, 이렇게 하려고 예루살렘에 갑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을 갔더니 자기같은 이방은 안 넣어 줍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보면 그 성전은 어디까지 들어가느냐면 이방인과 여자들이 들어갈 수 있는 뜰이 여기까지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못들어 갑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남자들이 들어갈 수 있는 뜰이 있습니다. 여기까지 들어갑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남자 중에서 제사장만 들어가는 곳이 성소입니다. 그리고 제사장 중에서도 대제사장만 일년에 한번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지성소입니다. 그러니까 자기는 못들어 갑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좋은데, 이스라엘의 하나님같은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 하나님을 믿겠다. 이래야 하나님다운거지. 이게 진짜 하나님이지. 돈 받고 치료해지고 안주면 화내는 것이 무슨 신이냐? 이렇게 된거지요. 그런데 그 이스라엘 하나님에게 나갈 수 있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할 수 없이 성경책을 하나 사서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하나님 뜻 모르고, 하나님을 만나지도 못하고 돌아가는 거죠. 슬픈 길입니다. 가고 있는데, 성경 읽어야지 하고 성경 읽고 있었습니다. 그러고 있는데, 그가 이사야서 53장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찔림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글을 쓴 이사야라는 사람인가, 아니면 다른 누구를 말하는 건가? 이렇게 하고 있는데 빌립이 옵니다. 빌립이 와서 이렇게 질문합니다. "성경을 읽으시는 것 같은 성경을 이해하십니까?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어떻게 혼자 제가 알겠습니까? 누가 가르쳐 줘야지요." "그러면 제가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리고 물어보는 거죠. "이게 누굽니까?" 아주 정확하게 좋은 질문을 한거죠. 그래서 빌립이라고 하는 사람이 가르쳐줍니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이라고 하는 분이, 이분이 누구냐면 자기 스스로 목숨을 버린 분입니다. 그가 찔린것은 힘이 없어서 찔린 것이 아닙니다. 그가 상한것도 약해서 상한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자기가 원해서, 자원해서, 기꺼이 기쁨으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목숨을 버리시고 스스로 목숨을 버렸는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주님이 두가지를 다 하십니다. 나는 죽는날을 내가 정한다. 죽는 방법도 내가 정한다. 그리고 말하십니다. 나는 스스로 목숨을 버렸다. 내 죽음은 억울한 죽음이 아니다. 어쩔 수 없는 죽음이 아니다. 내가 원해서 죽는 죽음이다.
모든 사람들이 세상에 태어나면 이렇게 생각하죠. 잘 살아봐야 되겠다. 의미있게 살다가야 되겠다. 살려고 하죠. 그런데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라. 예수님이 사람이 되신 이유는 잘 살아보려고, 뭐 위대한 종교 창시자가 되고, 수많은 사람들을 이끄는 지도자가 되고가 아니고, 예수님이 오신것은 스스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죽기 위해서 왔다." 세상에 이런 분이 있습니까? "인자가 온 것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 주님은 죽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죽느냐? 힘이 없어서 죽는게 아니고 스스로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원하셨기 때문에 죽는 것입니다. 죽는걸 원하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예수님이 죽어야만, 예수님이 상하고 예수님이 찔려야만 이 에디오피아 내시가 하나님께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는 하나님께 나갈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 계신 곳에 못갑니다. 그런데 그 에디오피아 내시가 영적으로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갈 수 있도록,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갈 수 있도록 예수님이 찔리시고 상하신 것입니다. 빌립이 이것을 전한 것입니다. 예수님, 예수님의 십자가, 그리고 부활을 전한 것입니다. 그랬더니 이 에디오피아 내시가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이제는 예루살렘에 갔다가 돌아올 때는 좀 마음에 섭섭함이 있었는데, 해결되지 못한것이 있었는데 이제는 모든게 해결되서 그가 기쁨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 봐야 합니다. 나는 어떤 존재인가? 인간은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인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인간의 존재에 대해서 자기가 자기를 만들지 않았다. 저절로 태어난게 아니다. 누군가가, 무엇인가가 너를 존재하게 한 것이다. 두 번째입니다. 그냥 존재하면 되는게 아닙니다. 지금도 계속 내가 삶을 유지하게 하기 위해서는 나를 존재케하신 분의 계속적인 도움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거절했기 때문에 사람에게 죽음이 찾아온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제 거꾸로 말합니다. 이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심으로 이제 이분을 계속 의지하도록, 그리고 이분이 참 하나님이신 것을, 우리를 존재케 하신 분이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이 하나님이신 증거, 언젠가 모두 다 죽어야 되는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을 하신 것입니다. 죽는 시기, 죽는 방법을 결정하시고, 그리고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죽음이 의미가 있는것은 이분이 죽으심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분이 상함으로 우리가 고침을 받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죽을 수 밖에 없는 이 운명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실은 사람이 죽을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성경에서 뭐라고 표현하냐면 죄라고 표현합니다. 죄입니다. 그리고 이 죄는 성경 또 다른 곳에서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다." 이 죄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느냐면 피가 흘려져야 합니다. 어떤 피가요? 죄 없는 피가 흘려져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이신데도 불구하고 사람이 되어 오시고 그리고 십자가에 피 흘리고 죽으신 것입니다. 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자에게 영원한 생명과 구원이 주어지고 그는 자기가 누구인지, 하나님은 누구인지, 이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은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를 비로소 알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진리 가운데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 구원받은 이 에디오피아 내시를 성경은 그가 흔연히, 기쁘게, 구원받은 사람만 기쁩니다. 세상의 기쁨은 잠시 기쁘지요. 뜻이 이루어졌으니까. 그런데 구원받은 사람은 영원히 기뻐합니다. 세상이 줄 수 없고 빼앗을 수 없는 기쁨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알았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신다. 나는 죽어도 천국에 간다고 하는 놀라운 영적인 기쁨을 갖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와 같은 기쁨을 복음을 듣고 믿는 모든 분에게 지금도 주실 것입니다. 이같은 역사가 있기를 원하고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