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 교회의 복음전도 >
2020년 3월 20일 금요일 / 한봉래 형제님
< 13. 교회의 복음전도 >
오늘은 노만크로포트 형제님 책의 11장입니다. 제목은 지역교회가 복음 증거를 어떻게 할 것이냐하는 내용을 다뤄보겠습니다. 지역모임에서 복음집회를 하는거죠. 지역모임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지역모임이 해야 합니다. 이것을 어떻게 증거할 것인가, 또 성경은 뭐라고 말하고 있는가를 살펴보는 것인데요. 우선 말씀을 한군데 먼저 찾아보겠습니다.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침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막 16:15-16).
주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제자들을 모아놓고 부탁하신 말씀 입니다. 주님은 하늘로 가시고 열한제자는 이 땅에 남아 있어야 합니다. 그들이 남아 있어야 하는 이유, 그 중에 하나죠.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16절에 보면 "믿고 침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라고 했는데요. 그냥 믿는 사람이 구원을 받지 믿고 침례받는 사람이 구원받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런데 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만약 믿고 침례를 안받아도 구원을 못받는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약간 모순처럼 느껴집니다. 성경의 모든 구절이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라고 했지, 침례는 구원받은 사람이 받는 것입니다. 침례 받았다고 구원받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받은 사람이 구원받은 증거로, 구원받은 결과로 침례를 받는 것입니다. 여기 하나만 독특하게 써진 것입니다. 그래서 이 부분을 저희들이 어떻게 이해하냐면 믿은 다음에 침례를 받아야만 구원을 받는다고 해석할수 없습니다. 저희들이 성경 해석을 할때, 다른 성경 구절들과 조화되도록 해석해야 합니다. 다른 명백한 구절들과 이 구절을 모순되게 해석하면 안됩니다. 그리고 해석 원직 중에 하나가 애매한 구절을 가지고 분명한 구절을 부정하면 안됩니다. 이것이 성경 해석의 일반적인 원칙이기 때문에요. 그래서 일반적으로 이해 합니다. 믿는 사람이 구원받습니다. 그런데 침례를 받는것을 넣은 이유는, 이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믿고 침례받지 않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나는 믿는데 침례는 나중에 받겠다." 이런 사람이 역사적으로는 대표적으로 로마 황제, 기독교를 공인해 줬던 로마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있습니다. 이분이 로마의 황제가 되기 전에, 전쟁을 합니다. 자기의 정치적인 적이 있었고 전쟁을 합니다. 여기서 그가 이기면 황제가 됩니다. 지면 역적이 되는 것이죠. 그 전투를 하기전날, 그가 꿈에 십자가를 봤다나요, 어쨋다나요. 그리고 그가 싸우는 군대의 깃발을 십자가로 합니다. 그리고 승리합니다. 그리고 그가 기독교 핍박을 그칩니다. 그 전까지는 기독교인들을 굉장히, 초기에 기독교 핍박이 굉장히 심각했지요. 그래서 아마 로마에 여행을 가면 카타콤을 구경하십니다. 거기는 지하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믿으면 지하로 숨어야 했습니다. 완전히 지하동굴에서 살아야 했던 기독교 핍박의 역사가 보통 200년간 지속됩니다. 그리고 그 기독교 핍박을 끝낸 황제가 콘스탄디누스 대제 입니다. 이분이 기독교의 핍박을 그치고 그동안 기독교인들이 본 손해를 보상하고 그리고 기독교의 대표적인 인물들을 국가의 자문위원으로 쓰고, 정책을 바꿉니다. 이게 기독교가 타락하게 된, 핍박을 통해서 기독교는 변질되지 않습니다. 뭣때문에 변질되냐면 사회가 인정하고, 사회에서 높은 지위를 주고, 이때 항상 타락합니다. 어째든 콘슨탄티누스 대제, 이분이 자기도 믿어야 할것 아니예요? 꿈에 십자가도 보았는데.. 이분이 믿는다고 고백 합니다. 그런데 이분이 아주 유명한것이, 믿는다고 하고 침례를 안받습니다. 침례를 받으면 그대로 살아야 하거든요. 침례는 그냥 형식이 아니고 앞으로 이렇게 살겠다고 하는 공개적인 선언이거든요. 그러니까 침례를 받으면 예배도 드려야 하고 복음도 전하고 성경도 읽고, 성경에 써진대로 살고 해야 하잖아요. 그게 하기 싫은 거예요. 그래서 "나는 죽기전에 침례 받겠다." 라고 했던 유명한 사람입니다. 이분 구원받지 않았습니다. 그런사람은 구원받은것이 아닙니다. 이 구절이 이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믿는다고 하면서 침례를 미루는 사람은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럴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 구절을 해석하는 것으로, 이 구절은 침례가 구원의 조건이다가 아니고, 구원받은 사람이 침례를 받는 것입니다. 이 구절이 독특하게 쓰여진 이유는 믿고 침례받지 않은 사람이 없다. 믿는 사람이 침례를 거부할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그 다음에 두번째를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9-20).
이 구절도 굉장히 유명한 구절이죠. 저희들이 주님의 가장 큰 명령이다라고 부르는 구절 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승천하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주셨던 명령입니다. 그리고 교회가 이 명령을 순종합니다. 이 명령을 순종해서 교회가 복음을 증거합니다. 교회가 왜 복음을 증거해야 하느냐, 어떻게 복음을 증거해야 하느냐, 하는 것들의 기준이 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보시면 강조점이 어디 있냐면 19절, "너희는 가서 제자를 삼아" 라고 되어 있습니다. 복음을 전해서 구원받게 해라고 하지 않고, 마가복음은 그렇게 표현되어 있지요. 그런데 마태복음은 "제자로 만들어라" 입니다. 제자는 주님을 배우는 사람입니다. 주님에게서 계속해서 주님을 따라가고 주님 말씀을 순종하고 주님을 배우고 주님을 달망가는 사람, 이것이 제자 입니다. 제자에 대해서는 나중에 저희들이 여러 다른 구절들을 통해서 "이런 사람은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내 제자가 되려면 뭘 어째야 하고" 이런 구절들이 복음서에 많이 있는 것이죠. 그 구절들을 여기에 함께 집어넣어서 이해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는 사람, 주님을 위하여 자기 아비나 누구라도 더 사랑치 않는자는 합당치 않고" 이런 구절들이 들어가는 거죠. 그래서 구원만 받았다. 나는 이제 천국에 간다. 이렇게 만들면 안됩니다. 제자를 삼아라. 이렇게 되어 있고요. 그 다음, 두번째 침례를 주고, 반드시 침례를 주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 20절에 보시면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모든것을" 그래서 보통 이렇게 말하죠. 마태복음 28장에 모든이라는 단어가 몇개가 나옵니다. 18절에 보시면 "모든 권세" 19절에 보시면 "모든 족속" 20절에 보시면 "모든것" 하나라도 빼면 안됩니다. 뺄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이것은 구원에 대해서도 가르쳐야 할 뿐 아니라 교회에 대해서도 가르쳐야 하고 성도의 삶에 대해서 ㅏ가르쳐야 하고 그 다음에 미래에 대해서 가르쳐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어떻게 경영하시는지, 주님 오실때 어떻게 오실 것인지, 이런 것들을 다 가르쳐서 지키게 해야 합니다. 이게 마태복음 28장에 강조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한 구절을 더 보겠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이것은 잠깐 4절을 먼저 보시면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 가서 제자 삼으라고 명령하시고, 하신 말씀 입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 앞에서는 가서 제자 삼으라 하셔놓고, 다시 떠나지 말고 기다리라 하십니다. "내가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약속하신 것은 성령이죠. 성령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제자들이 명령 받았으니까 세상에 나가면 안됩니다. 성령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리고 8절, 성령을 왜 기다리느냐 하면, 성령이 오셔야 주님의 명령을 순종할 수 있는, 주님의 명령을 이룰 수 있는 힘을 갖기 때문입니다.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고 침례를 주고 가르치고 하는것을 제자들이 할 능력이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이고 이것은 영적인 것입니다. 그것을 육신적인 사람의 힘으로 이루어낼수 없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잘 기억해야 합니다. 인간의 능력으로 이룰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명령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제가 늘 생각하는 건데요. 예수님께서 열두제자에게 "너희는 가서 제자를 삼으라" "가르치라" 그러면 열두제자가 모여서 세계지도를 놓고 "베드로 너는 이쪽으로 가라. 요한 너는 이리로 가고"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명령은 끝났고, 그 다음부터 사람들이 그 명령을 받아 이루어내고가 아닙니다. 명령을 하셨을뿐 아니라 그 명령을 이루게하시는 분이 주님입니다. 사실은 주님만이 그 명령을 이루실수 있습니다. 다만 우리를 사용하실 뿐입니다. 우리의 책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영혼들을 구원하시는 것은 주님이 하시는 것이지 우리가 할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의 능력을 받아야 한다. 성령의 능력으로 해야 한다. 이것이 주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을 모아놓고, 이 제자들이 교회를 세울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게 주신 명령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하신 명령들을 어떻게 이루어 갔는지를 보시겠습니다. 우선 잘 아시는 구절을 다시한번 보시겠습니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엡 4:11).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명령하셨습니다. "복음을 증거해야 한다" 그런데 교회가 그것을 할수 있도록 하나님이 교회에 세운사람을 보면 거기에 전도자가 있습니다. 전도자를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명령하시고 그 명령을 이룰수 있는, 성령이 오시면 능력을 받아서 그 일을 이룰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다시 구체적으로 표현된 것이, 주님께서 교회에게 주시는 여러 교회를 세우는 사람이 사도, 선지자입니다. 사도 선지자는 교회의 터를 닦습니다. 이분들은 성경을 완성 합니다. 그리고 교회의 기본적인 모습을 예루살렘 교회를 통해서 형성 시킵니다. 교회가 처음에 어떻게 했는가 하는 본을 딱 보입니다. 그리고 교회에 관한 말씀을 완성 시킵니다. 이것이 사도와 선지자가 터를 닦는 사람입니다. 그 다음 터를 닦아놓고 나면, 그 다음에 이 터대로 해야 합니다. 이 일을 실제로 하기 위해서 주님이 전도자를 교회에 주십니다. 그리고 교사를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몸인 교회, 말하면 우주적인 교회에 전도자를 세우십니다. 이유가 무엇이냐면 주님의 복음전파의 명령을 실제로 수행할수 있는 사람입니다. 또 하나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 1:21).
저희들이 계속 해온대로 에베소서는 우주적인 교회를 다룹니다. 그래서 거기에 있는 전도자들은 한 지역교회에 속한 사람은 아닙니다. 물론 모든사람은 지역교회에 속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순회 전도자 입니다. 이 지역 저 지역을 다니면서 복음을 증거하도록 하나님이 은사를 주신 분입니다. 그 다음 고린도전서는 지역모임입니다. 고린도라고 하는 구체적인 특정한 지역에 있는 지역교회 입니다. 이 교회와 관련해서 쓴 많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느냐? 전도 입니다.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다도" 그래서 특별히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노만 크로포트 형제님이 이 부분을, 지역모임의 복음집회 입니다. 지역모임이 복음 집회를 하고, 그 복음집회에서 복음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이 전도는 전파 합니다. 선포합니다. 지역모임이 주님 이름으로 모여서 기도하고 그 다음에 그 지역모임에서 정한 사람이, 강단에 올라가서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합니다. 공적으로, 하나님의 복음을 주님의 이름으로 교회가 공적으로 선포 합니다. 이 두가지 방법으로 주님께서 복음전도의 명령을 수행할수 있도록 교회에 주신 두가지 입니다. 이것을 보면 저희들은 이렇게 결론을 내릴수 있습니다. 지역교회는 어떻게 복음을 증거하느냐? 여러가지 다양한 방법이 있지만, 주님이 주신 방법은 첫째, 하나님이 세운 복음전도의 은사가 있는 분을 초청해서 복음을 증거합니다. 이것을 특별복음집회라고 합니다. 저희들은 보통 목,금,토,일 하지요. 서양모임을 보면 최소 2-3주, 이렇게 복음을 전합니다. 어떤 서양모임은 간증을 들어보면 날짜를 안 정하고 합니다. 보통 한 2주 예상을 했는데 영혼들이 더 오면 연장 합니다. 저희들은 한명을 초청하는데요. 서양에서는 늘 최소한 두명을 초청합니다. 그렇게 약간의 차이가 있는데 그것을 성경에서는 그것까지 말하고 있지 않으니까 어째거나 저희들이 참고해 볼수 있습니다. 이런식으로 지역모임이 은사있는 전도자를 초청해서 특별복음 집회를 한다. 이것이 에베소서 4장을 지역교회가 적용한 것입니다. 두번째, 고린도전서 1장 21절을 적용하면 지역모임의 일곱개의 집회가 있습니다. 지역모임은 일곱개의 집회를 해야 합니다. 그 중에 한가지가 복음집회 입니다. 자체적으로 복음집회를 매주 하는거죠. 그리고 그때, 저희들의 아직 구원받지 않은 자녀들도 있고 여러 믿지않는 사랑하는 가족들, 친구들, 초청해서 복음집회를 하는거죠. 대전중구 모임은 매주 주일날 복음 전하는 시간이 있는거죠. 그렇게해서 이 두가지를 통해서 복음을 증거케 하셨다. 그래서 우리가 고안해 놓은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명령하시고 그 명령을 교회가 순종할수 있도록, 해낼수 있도록 주님께서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따라 저희들이 그렇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행 9:15).
이 부분은 사도바울이 구원 받을때, 사도행전 9장에서 구원을 받죠. 사도행전 8장에서는 에디오피아 내시가 구원받고 사도행전 9장에서는 바울이 구원받고 사도행전 10장에서는 고넬료가 구원 받지요. 그래서 노아의 세 아들이 구원받습니다. 그런데 하여간 사도바울의 구원에 대해서는 어떻게 표현 되어 있느냐면, 사도바울의 구원과 아나니아를 통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누구에게 복음을 전하냐면 주로 이방인, 사도바울은 이방인의 사도이지요. 그리고 왕, 임금들이니까, 아그립바 왕이라든지, 당시의 로마황제, 네로, 이런 임금들,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들, 유대인에게도 복음을 전합니다. 이방인, 유대인, 임금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택한 그릇입니다. 노만크로포트 형제님은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해야 하지요. 그럼 사람들은 늘 무슨 생각을 하냐면 방법을 생각한다고 합니다. "복음을 어떻게 전할까?" 방법을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구절을 놓고 이 형제님의 코멘트는 하나님은 복음을 전해야 하겠는데, 그때 하나님이 쓰시는 방법은 사람입니다. 사람을 생각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사람과의 차이 입니다. 제가 이런표현을 쭉 해왔는데요. 어떤 체제가 유지되죠. 예를들면 우리나라같은 경우, 고려가 있고 조선이 있고, 그 다음에 지금 같으면 대통령제를 하고 있는 정치체제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헌법을 바꿔보자, 대통령을 5년 단임하지말고 4년 연임제로 하자 라고 체제를 바꾸려고 합니다. 이 체제를 바꾸려고 할때 사람들이 쓰는 방법은 전쟁입니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바꾸려면 전쟁을 합니다. 새로운 힘, 새로운 군대를 가진 세력이 과거의 기득권 세력을 없애고 자기들이 정권을 잡고 합니다. 요즘 우리나라는 민주주의니까 투표를 통해서 헌법을 바꿉니다. 이것이 항상 사람들이 쓰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태어나게 하십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사사 시대를 끝내고 왕의 시대로 넘어갑니다. 그러면 이때 하나님이 쓰시는 방법이 무엇이냐면 사무엘을 태어나게 하십니다. 저희들이 사무엘상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에게 말씀하시거나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든지,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라든지, 이렇게 말할수 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어두운 시대입니다. 암흑의 시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시대, 이 시대에서 사람들이 우상숭배하고 범죄했기 때문이지요. 이 시대에서 다시 하나님이 다윗을 일으키시고 이렇게 하기 위해서 제일먼저 하는것이 무엇이냐면, 한나라고 하는 여인이 아이를 못가지게 합니다. 브닌나는 애가 있는데 자기는 애가 없어요. 애가 없는 정도가 아니고 브닌나가 그렇게 자기를 괴롭히는 거예요. 그래서 이 여인이 굉장히 고통스러워 합니다. 그리고 그 여자가 기도하게 만듭니다. "하나님 저에게 아들을 주시면 제가 이 아이를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한 여인의 고통스러운 상황과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그에게 아들을 주십니다. 그 아들이 사무엘입니다. 그리고 사무엘이 사울왕을 세우고, 사울왕을 하나님이 폐하니까, 다윗을 왕으로 세우고 이 일을 합니다. 그가 하나님의 사람이고, 그가 마지막 사사고 선지자고 왕을 세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역사를 전환시키려고 할때에 사람을 태어나게 합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고통 받습니다. 원래는 야곱의 아들 60명이 애굽으로 내려가고, 그때는 요셉이 애굽의 총리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 내려갈때는 환영 받습니다. 왜냐하면 요셉의 가족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너희들이 원하는 땅에서 살아라." 합니다. 이스라엘이 고센땅에서 삽니다. 그런데 상황이 바뀝니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이 들어섭니다. 이때가 역사적으로 보면 애굽의 정권이 바뀝니다. 이집트를 통치하는 민족이 바뀌어버립니다. 그러니까, 전통적인 애굽인이 통치하지 않고 외부에서 애굽을 정복 합니다. 그리고 이 외부의 정복자는 "요셉이 누구냐?" 그래서 이 사람들을 노예로 삼아 벽돌을 만들게 하는 상황으로 바뀝니다. 그래서 이제 아들을 낳으면 강에 던지라고 하는 굉장히 고통스러운 상황으로 들어갑니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 노예된 상태라고 하는 이 체제를 출애굽 시키고 가나안으로 넣고, 이렇게 확 바꾸려고 하는 방법, 하나님이 쓰시는 방법이 모세를 태어나게 하십니다. 아들을 낳기만 하면 전부 강에 던져야 하는 그 시대에, 이 시대를 바꾸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 사람을 태어나게 합니다. 잠깐 적용해 보겠습니다. 우리들의 경우도, 상황을 바꿔야 한다. 우리들에게도 복음이 능력있게 전해져야 한다. 그래서 우리 주위에 구원받는 영혼들이 더해져야 한다. 그러면 우리가 생각하는것은 방법을 추구합니다. 전도지를, 좋은 전도 방법, 하나님이 하시는 것은 우리 가운데 사람을 태어나게 합니다. 은성이를 위해서 기도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아이를 통해서 상황을 바꾸실지 모릅니다. 또 형제 자매님들 결혼하셔서 하나님이 쓰시는 아이, 이것이 자매님들의 기도 입니다. 결혼하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자녀를 주셔서 이를 통해서 한 시대와 역사를 바꾸는 일을 하십니다. 저희들이 특별히 다음세대, 어린아이들을 잘 가르쳐서, 복음전도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어떤 기법이 아니고요. 영혼에 대한 사랑입니다. 어떤 한 영혼을 사랑하고 그가 하나님을 알기를 소망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가 먼저 하나님을 잘 알고, 구원의 기쁨, 또 하나님을 아는 영광의 놀라움, 이런것들을 경험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렇지못한 사람을 안타깝게 생각할거 아니예요? 그래서 그런 사람이 나오고 그렇지못한 다른 영혼들을 안타까이 여겨서 그들에게 복음으로 다가갈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쓰시는 방법은 사람이다 입니다. 방법이 아니고 사람이다. 그래서 사람을 길러야 합니다. 이것이 강조점입니다. 조금 더 가보겠습니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 16:8).
교회가 복음을 증거하는것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이 교회를 세울 제자들에게 하신 명령을 교회가 이어받아서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 두개를 본 거죠. 마가복음을 보고, 마태복음을 보고, 그 다음에 사도행전 1장까지 세개의 말씀을 보았습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서는, 그러니까 마가복음에서는 구원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 마태복음에서는 가르침입니다. 구원뿐만이 아니고 다 가르쳐야 합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1장 8절에서는 능력입니다. 우리의 힘으로 할수 있는것이냐? 그래서 저희들이 예수님의 명령을 들으면 우리 힘으로 못하는 것들입니다. 이것은 영적인 것들입니다. 하나님만이 하시는 것들입니다. 하나님이 실제로 교회에 순회 전도자를 세우십니다. 그 다음에 지역교회에 복음집회를 명령하시고 하나님께서 해 나가시는것이죠. 우리는 그것을 이루어낼수 있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영적인 능력입니다. 영적인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능력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성령님이 그 능력의 근원입니다. 그래서 복음증거에서 제일 중요한 구절이 요한복음 16장 8절인데요. 어떤 사람이 죄인인것을 깨닳아야 합니다. 내가 죄인임을 깨닳아야 구원받습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의롭게 될수 있다. 이같은 죄인도 예수님의 피로 하나님 앞에 의인이 될수 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믿지 않으면 심판 받는다. 그것을 거부하면 심판 받는다. 이것이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한 개념이죠. 이것을 누가 가르쳐낼수 있느냐? 물론 우리가 말씀으로 증거해야 하지만, 말한 우리의 말이 힘이 있는게 아닙니다. 성령님께서 그 말을 사용하셔서 말씀을 사용하셔서 그 심령속에, 정말 내가 죄인이구나를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기만 하면 의롭게 되는구나. 이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하는 자는 영원한 불못의 심판속에 들어가는구나. 하는것을 그가 깨닳아야 합니다. 이것을 누가하느냐면, 성령님이 하십니다. 제가 한번 설명드린거 같은데요. 이 구절은 이런뜻이 아닙니다. 어떤 믿지 않는 사람이 있는데 성령님께서 그에게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깨닫게 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믿지 않는사람에게 그렇게 역사하시지 않습니다. 성령님은 믿는자에게 역사 합니다. 믿는자 안예 계시고, 그래서 성경이 말하고 있지 않지만 이 가운데에 성도들의 복음증거가 들어갑니다. 성도들이 복음을 증거할때 그때, 성령께서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서 그들의 마음속을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만히 있는데 성령께서 그 사람의 마음을 책망하셔서 "내가 죄인임을 알았습니다." 이런일은 없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우리의, 혹은 교회의, 복음증거를 통해서 성령님께서 역사하셔서이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말씀 드리면 항상, 중요한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데요. 제일 중요한 것은 우리가 복음에 합당하게 살고 있어야 합니다. 자기가 삶은 그렇게 안살면서 복음만 그렇게 전하면 성령이 사용 안합니다. 스스로 모순되게 살면서 복음만 번지르르하게, 말만 잘하면 되는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설득력이 없습니다.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그가 구원받아야 하고요. 그리고 그의 삶이 정말 복음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떻게 하냐면 정말 죄를 미워하고 정말 죄가 얼마나 하나님께 끔찍한 것인가 하는것을 실감하고 그리고 우리가 이땅에서 완벽하게 의롭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순종해서 살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심판받지 않지만, 백보좌 심판은 없지요. 그러나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할줄 알고, 이런 사람이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때 그것이 힘이 있고 하나님이 사용하시고 하는거죠. 하여간, 능력은 성령님께 있다. 우리는 증거할 책임과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 책임이 있다. 여기까지해서 일단 주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열한제자들에게 하신 마지막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세 복음서에 주님께서 명령하셨습니다. "너희는 가서 복음을 증거해라" 주님이 이렇게 명령하셨을뿐 아니라 교회가 그 명령을 이룰수 있도록 어떤 배려를 해주셨는지를 살펴보았고요. 그 다음 우리들이 개인적으로 복음을 증거해야 하는 이유가 여러가지가 있는데요. 이것을 보겠습니다.
"이 교훈은 내게 맡기신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좇음이니라"(딤전 1:11).
여기보시면 사도바울이 어떤식으로 표현했느냐면, 복음을 '하나님의 복음'이라고 했습니다. 맞는거죠. 복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거니까, 그런데 가운데 뭐를 넣었냐면 "영광의 복음"이라고 했습니다. 복음이 영광스러운 것이다. 복음 자체가 영광스럽고 혹은 복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그것이 영광의 복음이겠죠. 저희들이 복음을 증거하는 동기, 그렇게 해야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이런것이 약간 갈등이 되는데요. 그러면 안되지만 복음집회를 하는데요. 요즘같은 경우는 구도자들이 잘 없습니다. 옛날에는 그래도 구도하는 영혼들이 있으니까 구도하는 영혼들이 찾아와서 숫자가 어느정도 되면 모임에서 복음집회를 한번 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기도하고 복음집회하면 구도자들이 나와서 구원도 받고 했거든요. 그런데 우리나라가 국민소득이 지금 3만불을 넘어가면서, 보통 만불, 이만불이 넘어가면서 꼭 법칙은 아닌데, 만불, 이만불, 선진국으로 넘어가면 구원의 역사가 확 줄어듭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하나님 없이도 살만하거든요. 사람은 보통 구원을 어떻게 받느냐면 잘 살다가 구원받는 경우가 잘 없습니다. 다 하나님이 한번씩 낮추셔야 하거든요. 그러고서 주님께 오는거죠. 요즘에는 구도자 한명 얻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기도하고 이런 상황속에서도 우리가 복음집회를 꾸준히 해야 합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는거죠. 저희들이 주일마다 하는 집회에 구도자가 없다 할찌라도, 사실은 구도자가 있습니다. 저희 자녀들이 있지요. 그런데 설사 없다 할찌라도 복음집회를 계속해야 하는 이유 입니다. 복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음집회의 목표는 복음을 증거해서 영혼을 구우너하겠다에 있지 않습니다. 그것만은 아니다 입니다. 복음을 통해서 예수님의 은혜와, 예수님의 희생과, 그리고 예수님의 사랑이 선포되기 때문에 그것을 듣는 성도들이 다시한번 우리의 구원에 대해서 감사하고, 구원을 확인하고, 그리고 이 복음에 합당하게 살것을 다시한번 생각하게 되는 기회 입니다. 그래서 "복음집회는 구원안받는 사람들이나 드는거지, 구원받은 우리는 다 아는거고" 그러면 안되는거죠. 저희들이 학생캠프 할때에, 제일 뭐가 어려웠었느냐면 복음집회 끝난후에 개인상담을 시켰어요. 그런데 학생들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개인상담이예요. 자기 개인적인 이야기를 해야 하잖아요. 그러니까 잘 아는 사람도 아니고, 온갖 자기 마음속 비밀을 털어놓아야 하는데 쉽지 않지요. 그러니까 어떤일이 벌어졌냐면 구원받은 사람은 개인상담에 안들어가도 되고, 그러니까 구원받은 사람이 좋아하는게 뭐냐면 개인상담 빠져도 된다. 이것이 특권이 되는거예요. 그래서 그러지 말고 구원받은 사람도 다 상담하자 그렇게 한거죠. 하여간 복음집회를 통해서 성도들도, 복음집회에 느긋하게 참석하면 안됩니다. 저희들도 복음집회, 마포모임도 하는데요. 주일날 오후 5시, 왜 그런가 싶지만 서양모임에 가보면 복음집회 30분전에 기도 합니다. 구도자 데려온분들 데리고 30분간 기도 합니다. 저희들은 기도할 방이 없어서, 15분 전에 복음집회전에 기도를 꼭 합니다. 성도집회 전에도 기도해야 하지요. 모든집회 전에 기도를 해야 하는데 특별히 복음집회를 위해서 무릎꿇고 주님께서 역사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복음집회를 통해서 계속 주님의 영광과, 우리의 책임과, 이런것이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복음집회는 구원받은 사람은 느긋하게 참석하는것이 아니고 기도하고 거기서 나오는 말씀을 통해서 주님의 영광을 다시보고 이런 시간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 다음에 다시 요한복음 4장 4절을 보겠습니다.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요 4: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 4:34).
성도님들이 잘 아시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주님께서 복음을 전하시는 장면 입니다.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쌔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요 4:3-4).
보통 당시에 유대인들이 갈릴리를 갈때, 남쪽은 유대고요. 예루살렘의 남쪽은 유대고요. 위에는 갈릴리입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가 사마리아 지역입니다. 그런데 사마리아는 혼혈족입니다. 북이스라엘, 옛날 열지파 북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서 멸망 당하고 그리고 남쪽에 있는 두 지파는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 당합니다. 그런데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당한 유대, 이 두지파는 70년 포로이후 돌아옵니다. 그래서 이들은 민족이 보존 됩니다. 그런데 열지파는 앗수르가 어떻게 정책을 했냐면요, 바벨론은 끌고가고 다시 풀어 줍니다. 풀어준 것은 페르시아 제국이 풀어줍니다. 이것이 국가의 정책이 다른 것입니다. 바벨론은 자기들이 정복한 나라를 전부 중앙집권 정책을 폅니다. 그래서 지방은 다 망하게 놔두고 중앙에 온 말자와 자원을 집중시킨 것입니다. 이렇게 바벨론은 통치를 했다가 페르시아 제국은 통치 방법을 바꿉니다. 중앙 집권을 했더니 지방은 약해져서 세금을 잘 내지를 못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다시 지방분권을 합니다. 그래서 전부 풀어줍니다. 지방으로 돌아가라. 정책을 바꾸는거고 그 배후에 하나님의 손길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들의 생각이 바뀐것은 무엇이냐면 주님께서 뜻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유대를 회복시키기 위해서 이렇게 바꾼거죠. 그래서 하여간 유대인은 보존이 됩니다. 유대는 두가지 지파죠. 베냐민 지파와 유다 지파 입니다. 유다지파가 강하기 때문에 거기를 보통 유다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지금도 사람들이 유대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것이 정통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열지파는 이스라엘인데 여기는 앗수르가 어떻게 정책을 취했냐면요. 앗수르는 자기들이 정복한 민족을 섞어버렸습니다. 이 지방에 있는 사람을 저기로 보내고 저쪽 지방에 있는 사람을 여기와서 살아가지고 완전히 정체성을 바꿔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사마리아에 원래 열지파 유대인들이 있었는데 전부 끌어다가 다른 나라로 보내서 혼혈, 결혼을 시켰습니다. 그리고 다른쪽 이방민족이 와서 사마리아에서 살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피가 섞여버립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그들이 순수한 유대민족이 아니다, 그래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서로 무시 하는거죠. 무시 당하니까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대인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서로 상종을 안하죠. 그래서 코스를 보면 이렇게 갑니다. 유대에서 가려고 하면 사마리아를 통과 안하고 요단강을 건너서 쭉 올라갔다가 다시 요단강을 건너와서 유대로 갑니다. 복잡한거죠. 그렇게 했는데 주님은 사마리아를 통과 합니다. 왜요? 주님께서 사마리아를 통과한 것은 코스 때문이 아닙니다. 좀 단축해서 가려고, 빨리 가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거리의 이유가 아닙니다. 거기 한 영혼이 있었기 때문 입니다. 여기보면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 이것이 영어를 쓰면 머스트(must)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습니다. '반드시' 그렇게 강요되었다 입니다. 왜요? 하나님께서 주님의 마음속에 한 영혼에 대한 부담과 그를 구원하기로 아버지 하나님과 주님 사이에 영원 전부터 계획이 계셨고 그 계획의 때를 따라가신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잘 아는대로 요한복음 3장에 보면 이 '머스트' 라는 단어가 몇번 나오죠. 7절에 보면 "네가 거듭나야 하겠다" 거듭나야 하겠다, 이것은 반드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못들어 갑니다. 그래서 거듭나야 합니다. 그다음 30절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겠다." 이것이 반드시 예수님은 높아져야 하고 사람은 낮아져야 하고 사람은 거듭나야 하고 주님이 흥하여야 하고 우리는 쇠해야 합니다. 그리고 4장에는 사마리아로 가셔야 합니다. 이것이 3장 4장에있는 머스트라고 하는 단어가 쓰인 구절들이고 그것을 통해서 저희들이 영적인 의미들을 찾아볼수 있는 것이죠. 그래서 본입니다. 주님께서 복음을 전하신 분입니다. 그 마음속에 강권함이 있는 것입니다. 반드시, 하지 않을수 없는 이와같은 마음이 있는거죠.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이 전도자들의 놀라운 고백 입니다. 자기가 복음을 전해서 그것으로 인해서 상 받을수 없다.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있으리로다." 이렇게 말하는 이런 심령이 복음을 전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자기가 복음에 빚진자다.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불러 복음을 전하는 자,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여러번 이야기 하는거죠. 전도는 은사가 아닙니다. 이것은 모든 성도가 하는 것입니다.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진고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것이 없노라"(살전 1:8).
여기보면 데살로니가 교회인데요. 아까 복음전도의 본은 우리 주님을 볼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영혼을 향한 갈증으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아까 설명을 안했는데요. 34절에 보면 사마리아 여인에게 복음을 전하시고 나서 주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내 양식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이니라" 제자들은 그동안 음식을 사러 갔다와서 주님께서 사마리아 여인과 말씀하시는 것을 보고 이상히 여깁니다. 그렇지만 물어볼수도 없고 그래서 음식을 내놓으시면서 "잡수시지요" 했을때 주님 말씀입니다. "내 양식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이것이니라" 복음을 전해서 어떤 영혼을 구원하고 또 하나, 그를 어디로 이끄냐면 그를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데까지 이끄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신거죠. 그렇게 해 놓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것이 내 양식이다" 주님이 이 땅에서 하시고자 했던 것은 복음을 증거해서 그 영혼이 구원받고, 그 다음에 아버지 하나님께 예배드리도록, 여기까지 주님이 가신거죠. 두번째 지역모임입니다. 지역모임이 복음을 잘 증거해서, 그 지역모임이 참 복된 모임이다. 본이 되는 모임이라고 할수 있는것이 데살로니가 교회 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를 보면, 7절에 보시면 마게도냐, 아가야, 그리스는 땅이 두개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위에가 마게도냐고 아래가 아가야 입니다. 땅이 남북으로 합쳐진, 마게도냐에 있는 교회는 빌립보 입니다. 그다음에는 데살로니가 그 다음에는 베뢰아, 베뢰아에 교회가 세워진것 같지는 않은데요. 하여간 베뢰아가 있었고요. 그리고 남쪽으로 가면 고린도 , 그 다음에 아테네, 아테네는 모임이 없었습니다만, 이런데가 아가야 입니다. 그런데 이 데살로니가 교회는, 마게도냐는 자기지역입니다. 아가야는 다른 지역입니다. 우리로 치면 북한 입니다. 그래서 마게도냐 아가야에 믿음의 본이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8절을 보면 마게도냐 아가야 뿐만 아니라 "각처에 퍼지므로" 그러니까 자기 나라를 떠나서 외국에까지, 그러니까 자기지역 그 다음에 자기 나라의 다른지역, 그리고 외국에까지 데살로니가 교회가 본이 되었습니다. 어떻게해서 데살로니가 교회가 됬냐하느냐면, 데살로니가 교회의 장점을 보시겠습니다. 저희들이 잘 아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살전 2:13).
사도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생각할때마다 감사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면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이 전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저희들이 성경을 읽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하죠. 그런데 정말 성경은 하나님이 나에게 하시는 음성이다. 권위있는 사랑의 명령이다. 이렇게 대한 것입니다. 이것이 데살로니가 교회의 본이 될수 있는 이유 입니다. 말씀을 말씀답게 말씀으로 본거죠. 그 다음에 두번째 보겠습니다. 1장으로 오셔서요, 1장 3절입니다.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살전 1:3).
사도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생각할때마다 이게 생각났습니다.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 입니다. 믿음은 반드시 행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역사" 입니다. 믿음은 말이 아닙니다. 믿는다 그러고 가만히 있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야고보서를 봐야 합니다. 믿음이 있고 행함이 없는것은 죽은 믿음이다. 그렇게 되어 있는거죠. 행함이 믿음과 함께 일해야 한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믿는다고 말할뿐 아니라, 그러니까 말씀을 배우면 그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을뿐만 아니라 그 말씀대로 행한 것입니다. 그 말씀대로 산 것입니다. 두번째, "사랑의 수고" 입니다. 사랑하면 수고 합니다. 이건 저희가 이 구절을 설명할때마다 늘 그런건데요. 사랑의 수고는 어머니들을 보면 압니다. 어머니들이 자녀를 기를때에 정말 수고 합니다. 일일히 먹여줘야 하죠. 목욕시켜줘야 하죠. 똑같은 것을 반복해서 말해야 하죠. 잘못하면 때리고 설명해줘야 하죠. 이것이 사랑의 수고 입니다. 저같으면 성질나서 때려놓고, 그런데 그렇게 하지않고 계속해서 끊임없이, 사랑의 수고 입니다. 그렇게 성도들이 성도를 사랑하고 영혼을 사랑해서 성경을 한번 설명했는데 못알아 들어요. 그래서 질문을 또 합니다. 그러면 다시 설명하죠. 그래도 또 못알아 들어요. 어떡할까요? "테이프 들어." 그렇게 안하고 더 자세히 수고하고.. 복음 전할때도 그렇지요. 구도자들이 얼마나 약속을 어깁니까? 모처럼 갖다 예배당에 앉혀놔도 말씀 잘 안듣고 딴 소리하고.. 밉지요. 자기를 위해서 구원받으라고 하는 것인데, 이렇게 사정을 하는거죠. 이것이 수고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세번째 입니다. "소망의 인내" 입니다. 저희들이 코로나 바이러스가 생각이 나서 생각하는 건데요. 주님이 곧 오실때가 된거 입니다. 성경에서 주님이 오신다고 하는 징조를 보통 크거 네개를 듭니다. 첫번째가 이스라엘의 독립입니다. 무화과 나무가 싹이 나는것을 보거든, 이스라엘의 독립, 지금 현재 중동에 이스라엘이 독립되어서 국가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것이 사인입니다. 이것이 멀지 않았다고 하는 사인입니다. 그 다음 두번째가 유럽 통합니다. 유럽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적그리스도가 거기서 나올 것입니다. 유럽통합이 이뤄져야 합니다. 유럽통합이 지금 진통을 겪고 있죠. 영국이 들어갔다가 브렉시트되었고, 그리스는 재정 상태가 나쁘니까 빼야되니 하면서도 다시 들어가고 합니다. 하여간 이것이 열 나라가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하늘에 있겠지만 이것은 징조로 보는 것입니다. 그다음 세번째, 종교계의 배교가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하던 사람들이 배교하기 시작 합니다. 천주교와 통합하고, 우리는 다같은 믿음이다. 지금도 코로나 바이러스 가지고 진짜로 믿는 사람은 욕먹게 되어 있습니다. 신천지를 말하면서 뭐라고 하느냐면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근본주의자들이 문제라고 합니다. 저희들이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근본주의자들입니다. 14만 4천은 14만 4천입니다. 그것이 12x12x1000 해서 많은 숫자다. 그것은 쓸데없는 소리 입니다. 다만 신천지가 말하는 것이 아니어서 그렇지, 14만 4천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문자적으로 이해한다는 것들은 주님이 재림한다는 것은 진짜로 오겠다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그렇게 오실것처럼 살아라는 것이지 주님이 어떻게 주님이 또 오냐?" 우리는 주님이 진짜로 온다고 믿습니다. 육체를 입고 눈으로 보이게 오신다고 믿거든요. 우리가 딱 욕먹을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몰라서 욕을 안하는것 뿐입니다. 그래서 세가지가 일어납니다. 이스라엘의 독립, 그리고 유럽통합, 그리고 세번째 기독교계가 믿는자에 대한 적대감, 그리고 그쪽은 굉장히 배교할 것입니다. 믿음에서 떨어지는 쪽으로 많이 갈 것입니다. 그리고 네번째가 전쟁과 지진과 역병입니다. 이것이 네가지 증거입니다. 이 네가지가 주님이 다시 오신다고 하는 세대에서 주님께서 경고하신 징조들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다 일어나고 있어요. 하나도 안빼놓고 싹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저희들이 두려워하거나 일상적인 생활을 바꾸거나, 저희들이 마포모임에서 베드로후서 하는데요. 지금은 구원의 날, 그리스도의 날입니다. 그런데 주의 날, 주의날이 올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날이 올것입니다. 그런데 주의날에는 주님께서 공중에 오시고 이 지구는 사라질 것입니다. 우리는 이 지구가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천지는 없어집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간단히 말하면요. '신천지'를 만듭니다. 새 하늘과 새 땅, 그것을 약자로 하면 신천지 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렇게 됬을때에 저희들이 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오심이 가까이 왔을때에 이렇게 말하는 자들은 저는 맞지 않는다고 봅니다. "주님이 언제 오시니까 어디로 모여라" 예를들면 다시 모이려면 베다니로 모여야 합니다. 주님의 지상재림은 베다니로 하실 것입니다. "모여라. 우리가 거기 모여서 주님을 기다리자." 그러면 이단입니다. 주님이 언제오셔도 좋도록 우리는 주님이 주신 일상 생활을 열심히, 성실하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어떤분이 유명한 말을 했잖아요. "내일 지구 종말이 올찌라도 나는 오늘 사과나무를 심는다." 이것이 옳은 태도 입니다. 우리는 바꾸면 안됩니다. 물론 더 분발하고 이런 필요는 있지만, 더 기도하고, 더 많이 모이고, 더 영혼을 사랑하고, 더 성도를 섬기고 더 열심히 주님을 섬기고 이것은 해야 하죠. 그러나 무엇을 바꾸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오셔도 상관없이 살았다는 거잖아요, 바꾼다는 것은 스스로 자격없음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언제 오셔도 좋도록 살고 있었습니다. 주님이 오신다는 것이 가깝기 때문에 더 열심히 그 길을 갈뿐이지 이것을 바꾼다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망의 인내 입니다. 소망이 있기 때문에 반드시 그리스도인은 핍박을 받습니다. 세상에서 미움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이렇게 표현합니다. "세상이 감당치 못하느니라" 이 사람들을 감당치 못합니다. 세상은 이 사람들과 어떻게든 잘 지내보려고, 어떻게든지 기독교계와 협조하고 하려고 노력하지만 감당이 안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코로나 바이러스를 가지고 어떻게 하면 되냐면, 세상과 타협하려면 이렇게 하면 됩니다. 안모여야 합니다. 안 모이는 정도가 아니라 이렇게 가는 겁니다. "우리 안 믿을게" 그렇게하면 세상에 제일 좋아합니다. "그래 믿지 말아. 왜 믿어?" 그러면 세상과 화평할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서 이상한, 문자적이고 근본주의자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서 세상과 화평하게 지낼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입니다. 주님이 마태복음 5장에서 그러셨죠.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를 핍박하거든 기뻐 뛰놀라. 너희앞의 모든 선지자들이 그와같이 핍박을 받았느니라" 그래서 우리들이 잘못해서 도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뭔가를 잘못해서 비난받는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이것은 안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믿었기 때문에 말씀대로 순종했기 때문에 핍박을 받으면 기뻐해야 합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 교회가 어떻게 복음이 그렇게 잘 전해졌느냐? 그들이 복음을 전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삶이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말로 전하는게, 말로 전하지요. 그러나 말로만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 중요한것은 아까도 말씀 드렸지요. 어떤 방법으로 전하냐, 복음 메세지가 얼마나 감동적이냐가 중요한것이 아니고 전하는 사람이 누구냐 입니다. 그 사람이 정말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지옥에 대한 그 끔찍함을 알고, 그리고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해서 감격하고, 이런 사람이 전했느냐? 옛날에 그런 예화가 있는데요. 어떤사람, 서양이니까 낭독같은 것 합니다. 집회 끝나고, 음악회같은 낭독을 합니다. 아주 목소리도 좋고, 요즘으로 치면 아나운서 해가지고 가끔 다큐멘터리 보면 그런,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거죠. 그 당대의 유명한 아나운서가 시편 23편을 쭉 낭독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사람들이 정말로 좋은 음성과 필요한 부분에 감정을 넣어서 정말 시편 23편을 어떻게 이렇게 감동적으로 낭독을 했느냐? 했습니다. 그 사람이 지나가고 나서 목소리도 나쁘고, 그러나 주님을 섬기는 전도자가 읽습니다. 어떤것이 진짜 입니까? 목소리 좋은 사람이 잘 분위기를 살려서 읽는것이 아니고, 시편 23편을 경험한 사람, 하나님이 진짜 자기 생애의 목자였던 것을 경험한 사람이 그냥 읽는 것입니다. 기교없이. 그런데 사람들이 다 그 앞에, 이것이 진짜다, 이것이 낭독이다. 그래서 저희들이 복음 전도가 그렇게 되기를, 저희들에게 부족이 있어도 기도하고 그와같은 반전을 일으킬수 있는 사람들이 지금 우리 가운데 자라고 있고, 이렇게 되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행 11:20).
저희들이 한번 다룬건데요. 안디옥 교회 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에서 보면 가장 주목받는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가 하나 있고요. 그런데 예루살렘 교회는 주로 유대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방인으로만 이루어진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최초의 교회가 안디옥 교회 입니다. 그리고 안디옥 교회가 사도바울을 파송해서 1차, 2차, 3차 전도여행이 이 교회의 기도 가운데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안디옥 교회의 성립을 이야기 할때 20절을 보시면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여기에 동사가 두개 쓰입니다. 안디옥까지 간 사람, 예루살렘에 핍박이 있으니까, 안디옥으로 흩어진 사람이 헬라인 그러니까 이방인에게도 '말했다.' 라는 단어가 쓰이고요, 주 예수를 '전파했다'는 단어가 쓰입니다. '말했다'와 '전파했다' 입니다. '말했다,' 이것은 개인적인 전도 입니다. '전파했다,' 공중복음 집회 입니다. 교회의 공적 복음집회입니다. 이 두개가 사용됩니다. 그래서 '말했다'고 하는것은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 사람들이 일상생활을 한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살다가 안디옥에 와서 살게 되었습니다. 안디옥에 와서 집을 구해야 합니다. 부동산을 가야 합니다. 거기 싼 집이 있나.. 또 안디옥 시장에 가야 합니다. 애들 학교 보내야 합니다. 그래서 어느 학교가 좋은가, 어느 학교가 히브리어를 가르치는가, 이렇게하면서 사람들과 접촉하게 됩니다. 이와같은 접촉을 통해서 복음이 증거 됩니다. 우리의 일상적인 삶을 해야 합니다. 일상적인 삶을 성도답게 살아야 합니다. 성도의 삶은 영적으로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상적인 삶을 성도로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해서 알게되고, 신뢰하게 되고, 하나님이 좋은 관계를 맺게 해주신 분들을 안디옥 모임의 복음집회에 초청해서 복음을 교회가 증거 합니다. 그랬을때, 여기까지 20절은 우리 책임입니다. 21절, 주님손에 달린 것입니다.. 결과는 주님의 손에 달린 것입니다. 주님이 돌아오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결과에 대해서는 너무 민감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물론 주님께서 많은 열매를 주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은 그러나 안주신다 해도, 혹은 소수와 함께 산다고 해도, 그것에 대해서 너무 상대 비교하거나.. 모임을 이렇게 평가하면 안되지요. "어디 모임은 몇백명이 모인다는데, 거기 모임은 좋은 모임이고, 우리는 몇명밖에 못모이는데 약한 모임이다." 아닙니다. 그것은 세상 관점입니다. 우리는 그런 관점에 있지 않고 우리 가운데 주님이 계시고, 성령이 인도하시고 말씀이 있고, 충분한 것입니다. 항상 하나님으로 충분하다. 하나님이 계시면 모든 것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으면 아무리 많아도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20절은 그와같이 복음을 증거했고, 21절, 결과는 주님의 손에 맏긴다. 여기까지가 저희들이 살펴볼수 있는 복음전도, 하나님, 주님께서 어떻게 명령하셨고 그 명령을 수행할수 있도록 어떤 것들을 주님께서 공급해 주셨고, 우리는 주님이 주신것을 사용해서 어떻게 하느냐. 특별 복음집회에 전도자를 초청해서 자체 복음집회를 한다. 그리고 자체복음 집회를 하기 위해서 성도들이 일상적인 삶 속에서 사람들을 사귀고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다. 이게 쭉 해온 방법입니다. 그리고 제가 잠깐 말씀을 드리면, 서양을 따라가자는 것이 아니고 서양은 저희들보다 앞서 갔거든요. 그래서 서양이 경험한 것들을 참고로 합니다. 사실 서양 가보면 저희들보다 더 복음 전하는 것이 어렵고 사람들이 다 세상 즐거움이 있어서 교회는 텅텅비고 그렇습니다. 그와같은 상황 속에서 어떻게 모임이 기도하면서 이것을 타개해 나가고 있는가를 보면, 주로 많이 쓰는것이 저희들과 유사 합니다. 시소라고 해서 청년들이 여름에 많이 모여서, 주로 방학때에 어느 특정한 지역에 성도님들이 모여서 복음을 전합니다. 예를들면 벤쿠버같은 항구, 배들이 정착해 있으면 거기가서 전도지를 뿌리고, 전도지뿐만 아니라 CD도, 전에 오셨던 조나단 블락 형제님 같은 경우는 노숙자들에게 전도지와 양말을 드립니다. 계속 그렇게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열심히 합니다. 그래서 주로 젊은 청년들이 함께 모여서 어떤 특정한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는 일들을 꾸준히 해 오고 있다는 거고요. 그 다음에 주일 아침에 교회가 없는 지역도 주일학교를 합니다. 주일학교부터 공략을 해라. 그래서 어린 아이들, 약간 양면이 있는데요. 부모님들이 애 보는것이 힘들거든요. 지금도 개학이 늦어져서 난리 인데요. 애 보는것이 쉽지 않습니다. 애들이 에너자이저 잖아요. 그래서 애들을 교회가 잠깐 데려가서 놀리고, 만들기도 하고 성경 이야기도 하고 몇시간 후에 돌려보낸다 하면 많이 보내 줍니다. 그래서 어린이들을 그런식으로 보통 주일날 아침에, 오전에 이와같은 일을 해서 나중에 그 부모들에게까지 복음을 전하려고 하는 이와같은 일을 하는것 같고요. 하여간 저희들도 기도하는 가운데 저희들의 상황과 형편에 따라 어떻게 주변에 복음을 전할수 있는가를 지역모임 형제님들이 기도하는 가운데 이런것들을 조금씩 해볼수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예를들면 전도지를 돌려본다든지, 주일학교 학생들을 모을수 있나, 어린아이들을 모을수 있나 보고요.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것은 아까 이야기 한대로 사람들이 길러져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 주님이 은사를 주신 전도자, 영혼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복음을 증거하고자 하는 사람이 일어나야 합니다. 항상 방법이 아니고 사람입니다. 저번에도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기이한 것은, 주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모세는 나일강에 던져졌지요. 석달을 부모님 밑에서 크다가 석달된 애가 강에 던져집니다. 그 아이를 바로의 공주가 키웁니다. 그 아이가 불쌍해서 키웁니다. 유모를 데려오라고 하죠. 그래서 모세 어머니가 젖을 먹이는 거죠. 언제까지 젖을 먹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세살 된 아이에게 무슨 교육을 얼마나 시키겠습니까? 그런데 모세가 40세가 되었을때 그가 이스라엘 백성편에 선다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어릴때에 교육을 하면 얼마나 하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생애를 그가 결정할수 있는 좋은 토대를 준 것입니다. 사무엘도 마찬가지 입니다. 사무엘도 한나가 낳아서 젖 떼고는 엘리 제사장곁에 줍니다.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도 안믿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제사를 멸시하고 부도덕하고 그 가운데서 사무엘이 자랍니다. 그 다음에 또 보면 누구를 들수 있느냐면, 신약에서는 또 디모데를 들수 있습니다. 디모데는 자기집이 아버지는 안믿는 사람이었습니다. 헬라인입니다. 어머니와 할머니는 유대인이어서 구약성경을 쭉 배웁니다. 그런데 어느날 하나님이 그에게 이와같은 변화를 주십니다. 저희들도 애들에게 그림성경, 최근에 그림성경을 보다가, 그림성경도 잘못 써진거 보면 열불 납니다. 하여간 없으니까 그림성경을 보여주면서 성경 이야기를 하고 그러죠. 디모데도 어릴적에 할머니 어머니로부터 그와같은 소리를 들었는데, 어느날 이 말씀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말슴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것이 디모데전서 3장 16절입니다. "아, 어머니가 가르쳐 준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구나."를 깨닫습니다. 그리고 10대 때에 사도바울이 자기 지역에 옵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합니다. 복음을 전하는데 이주 이상한 일이 일어납니다. 시도바울이 기적을 행합니다. 그러니까 그 마을에 있는 사람들이 다 놀라서 사도바울을 신이다 라고 해서 꽃도 가져오고 사도바울에게 제사드리려고 할때 사도바울이 금지 합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이게 신으로 추앙하려고 하는 마음이 미움으로 변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을 죽이려고 합니다. 참 이상하지요. 예수님도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때, 사람들이 나귀타고 오신 예수님, 그 밑에다가 옷을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고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해놓고, 이것이 주일입니다. 그렇게 해놓고 금요일에 십자가에 못박으라 합니다. 사람들은 참 이상하죠. 사람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단이 영향을 주면 확 뒤집어집니다. 그래서 디모데는 보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어떻게 기적을 행했는가, 그런데 사람들의 잘못된 제안에 어떻게 거부했는가? 그리고 그것 때문에 돌에 맞아 거의 죽은것 같이 보입니다. 그것을 디모데가 경험 합니다. 그래서 성경과 사도바울의 본, 이 두개를 통해서 디모데가 구원받고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커 나갑니다. 그래서 저희들도 기도하는 거죠. 자녀들에게 성경을 가르칩니다. 기도제목은 딱 하나 입니다. 애들이 이 말씀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을수 있기를, 그리고 두번째 우리 가운데 정말 말씀대로 사는 한 사람, 하나님의 말씀이면 어떤 우상숭배도 반대하고, 그리고 말씀대로 돌에 맞아 죽는다 할찌라도, 그 자리를 걸어가는 하나의 본, 이게 있으면 저희들 가운데 디모데같은 사람이 일어나서 충성되게 그 다음세대를 끌어갈것입니다. 주님께서 이같은 은혜를 저희들에게 주시기를 기도하고 저희들이 교회적으로 주님이 말씀하신 이 복음전도의 책임을 다할수 있는가? 제일 중요한 것은, 특별 복음집회, 그리고 자체복음 집회, 그리고 성도님들 개인적인 삶. 이 세가지 기본적인 틀입니다. 주님께서 저희들에게 이 일을 능히 감당하고 주님 오실때에 주님앞에 칭찬받게 되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