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드온을 통해서 보는 모임생활
< 기드온을 통해서 보는 모임생활 > 2022년 11월 20일 일요일 / 한봉래 형제님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칠년 동안 그들을 미디안의 손에 붙이시니 미디안의 손이 이스라엘을 이긴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미디안을 인하여 산에서 구멍과 굴과 산성을 자기를 위하여 만들었으며 이스라엘이 파종한 때면 미디안 사람, 아말렉 사람, 동방 사람이 치러 올라와서 진을 치고 가사에 이르도록 토지 소산을 멸하여 이스라엘 가운데 식물을 남겨두지 아니하며 양이나 소나 나귀도 남기지 아니하니 이는 그들이 그 짐승과 장막을 가지고 올라와서 메뚜기떼 같이 들어오니 그 사람과 약대가 무수함이라 그들이 그 땅에 들어와 멸하려 하니 이스라엘이 미디안을 인하여 미약함이 심한지라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미디안을 인하여 여호와께 부르짖은고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한 선지자를 보내사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며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나오게 하여 애굽 사람의 손과 너희를 학대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너희를 건져내고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었으며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기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 너희의 거하는 아모리 사람의 땅의 신들을 두려워 말라 하였으나 너희가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느니라 하셨다 하니라 여호와의 사자가 아비에셀 사람 요아스에게 속한 오브라에 이르러 상수리나무 아래 앉으니라 마침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에게 알리지 아니하려 하여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더니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나의 주여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미쳤나이까 또 우리 열조가 일찍 우리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한 그 모든 이적이 어디 있나이까 이제 여호와께서 우리를 버리사 미디안의 손에 붙이셨나이다 여호와께서 그를 돌아보아 가라사대 너는 이 네 힘을 의지하고 가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비 집에서 제일 작은 자니이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하리라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내가 주께 은혜를 얻었사오면 나와 말씀하신 이가 주 되시는 표징을 내게 보이소서 내가 예물을 가지고 다시 주께로 와서 그것을 주 앞에 드리기까지 이곳을 떠나지 마시기를 원하나이다 그가 가로되 내가 너 돌아오기를 기다리리라 기드온이 가서 염소 새끼 하나를 준비하고 가루 한 에바로 무교전병을 만들고 고기를 소쿠리에 담고 국을 양푼에 담아서 상수리나무 아래 그에게로 가져다가 드리매 하나님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고기와 무교전병을 가져 이 반석 위에 두고 그 위에 국을 쏟으라 기드온이 그대로 하니 여호와의 사자가 손에 잡은 지팡이 끝을 내밀어 고기와 무교전병에 대매 불이 반석에서 나와 고기와 무교전병을 살랐고 여호와의 사자는 떠나서 보이지 아니한지라 기드온이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줄 알고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내가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하여 보았나이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안심하라 두려워 말라 죽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기드온이 여호와를 위하여 거기서 단을 쌓고 이름을 여호와살롬이라 하였더라 그것이 오늘까지 아비에셀 사람에게 속한 오브라에 있더라"(삿 6:1-24).
"손으로 움켜 입에 대고 핥는 자의 수는 삼백명이요 그 외의 백성은 다 무릎을 꿇고 물을 마신지라"(삿 7:6).
"삼백명을 세 대로 나누고 각 손에 나팔과 빈 항아리를 들리고 항아리 안에는 횃불을 감추게 하고"(삿 7:16).
"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를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니 당신과 당신의 아들과 당신의 손자가 우리를 다스리소서 기드온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하겠고 나의 아들도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삿 8:22-23).
잠깐 사사기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사사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땅에 들어가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셨죠. 가나안땅에 들어가면 가나안 족속을 진멸하고 그들과 어떤 관계도 맺지말라 하셨죠.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족속을 다 쫓아내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삽니다. 그러다가 그들과 결혼합니다. 며느리를 거기서 얻고 사위를 거기서 얻고, 여기까지는 문제가 없어 보이죠. 그리고 우상숭배를 합니다. 며느리가 가져온 우상, 사사위가 들여온 우상을 섬깁니다. 그렇게해서 타락하는 이야기죠. 그렇게하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섬겨야 하죠. 그런데 우상을 섬기죠. 그러면 하나님이 징계하시죠. 이웃 민족을 일으키셔서 이스라엘을 점령하게 만듭니다. 그럼 이스라엘이 고통스럽게 되죠. 그러면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잘못했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은 이렇게 해야 합니다. 자기에게 고통이 생기면 이 고통의 원인이 뭘까를 조사해야 합니다. 왜 이런일이 생겼지? 왜 우리 가운데 이런 비극들이 생기지? 그리고 원인을 어디서 잡아내느냐면 여기서 잡아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 다른 신을 섬겼기 때문이구나, 하는 결론에 이르러야 합니다. 우리가 뭘 잘못했다, 뭘 생각없이 했다가 아니고 우상을 섬겼기 때문이다, 라고 결론을 내려야 합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이 이제 회개합니다. "하나님, 하나님께 돌아가겠습니다. 우상을 버리겠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사사를 일으키십니다. 구원자를 일으키셔서 자기들을 정복했던 나라와 싸워서 다시 독립을 쟁취하고 이스라엘이 평안하게 살게 됩니다. 그런데 이게 반복이 되죠. 일곱번 반복됩니다. 이스라엘의 어떤 슬픈역사라고 할 수 있겠죠. 그 다음에 이제 반대로 보겠습니다. 하나님 쪽에서 보자면 이스라엘이 어떤 잘못을 해서 어떤 공통속에 들어가도 회개하기만 하면, 하나님께 돌아오기만 하면 하나님을 구원하십니다. 그들이 얼마나 강력한 적 밑에 있을지라도 얼마나 오랫동안 통치를 받았다 할지라도 그들이 회개하기만 하면 건져주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사사를 보면 13명 사사 중에 기드온은 한 가운데입니다. 소사사를 빼면요. 앞의 세명의 사사를 보겠습니다. 앞에 이스라엘이 어떤 민족에 의해서 점령을 당하냐면 첫번째가 메소포타미아입니다. 그 왕 이름이 구산리사다임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왕은 저희들이 이렇게 이해합니다. 이것은 세상을 의미합니다. 세상이 그리스도인들을 점령해버린 것입니다. 구산리사다임은 이중 악이라고 하는데 세상 임금이기도 하고 세상 신이기도 한, 메소포타미아 세상입니다. 왜냐하면 메소포타미아는 아브라함이 떠난 곳입니다. 아브라함이 거기를 떠나서 후손들이 가나안땅에 살고 있는데 메소포타미아가 와서 점령합니다. 하나님의 의도가 있는거죠. '너희들은 세상적이 되었다.' 그 다음 두번째는 모압왕 에글론인데요. 에글론은 묘사할때 보면 얼마나 비둔한지 그냥 칼로 찔렀는데도 칼에 기름이 있고 그러죠. 그래서 이것은 육신입니다. 두번째는 육신입니다. 세번째는 야긴이라고 하는 가나안왕인데 야긴이라는 이름은 그 뜻이 '지혜'라고 하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앞의 세개는 그리스도인의 적이 세개죠. 그런 책도 나왔는데요. 번역된게 있죠. 그리스도인의 적이 세개입니다. 세상, 육신, 사단입니다. 이 앞의 세개가 그것을 말합니다. 처음에 메소포타미아, 세상. 그 다음에 에글론, 육신. 그 다음에 야긴 '사단'입니다. 이 세가지에서의 싸움을 말하고요.
그 다음에 네번째로 들어옵니다. 네번째로 들어온게 기드온입니다. 기드온도 이렇습니다. 스토리를 잠깐 말씀드리면 이스라엘 백성이 또 잘못합니다. 제가 네가지로 사사를 살펴보고 있는데 이스라엘이 무슨 죄를 지었는가를 살펴보겠습니다. 그 다음에 두번째, 그 죄에 대해서 하나님은 어떤 민족을 일으켜서 징계하시는가. 그 죄와 딱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지은 죄를 상징하는 사람이 나옵니다. 여기서는 미디안이라고 되어 있는데요. 그들의 적은 누구인가. 그 다음에 세번째, 그들이 회개하면 하나님이 사사를 일으키시는데요. 사사의 특징이 누군가. 이 죄를 해결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죄와 반대되는 쪽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기드온의 특징은 뭔가 본다. 네번째, 기드온의 승리전략은 무엇인가. 그 사람은 어떤 전략으로 승리하는가.. 이 네가지를 봐서 영적인 교훈을 받으려고 합니다.
스토리를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또 범죄 합니다. 범죄 내용이 잘 안나와 있습니다. 범죄해서 미디안에 붙이시고 이스라엘이 고통스러우니까 하나님께 구합니다.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하니까 하나님이 첫번째로 선지자를 보내주십니다. 그래서 그들이 뭘 잘못했는지 선지자를 통해서 말하십니다. 내용이 뭐냐 하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기드온 시대에 이스라엘의 죄는 뭐냐하면 하나님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은 것입니다. 선지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들을 봐라. 하나님이 너희들에게 어떻게 했느냐?" 어떻게 했죠? 애굽에서 종되었는데 그것을 건져낸 것입니다. 그 다음에 가나안 땅에 있는 여러 족속들을 다 정복하고 가나안 땅에 살수있게 해 주신 분이 하나님입니다. 우리식으로 하자면 구원했을뿐 아니라 천국에 들인 것입니다. 예를들면 지역모임에 넣어놓은 것입니다. 그래놓고, 참 이상하죠. 구원받고, 죄 용서 받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면서 하나님 말씀을 안듣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죄목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삼으셨습니다. 그래놓고 우리가 불순종합니다. 왜요?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값을 치루고 산것입니다. 우리는 누구거죠?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피조물이기 때문에 원래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 다음에 두번째, 죄인이어서 지옥에 가야 되는데 새 새명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리고 놀라운 은혜 가운데 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보호와 영적인 돌봄 가운데 있습니다. 지역모임 안으로 들어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것입니다. 세가지 측면에서 하나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에서, 우리의 선택에서 하나님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죄입니다. 그랬을때 하나님이 어떻게 징계하시냐? 하나님은 반드시 징계하십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징계가 없으면 사생자라고 말합니다. 구원받았는데 하나님의 뜻대로 안사는데 평안하게 지낸다. 구원을 의심해야 합니다. 구원받고 불순종하면 여기서 불순종보다도 자기의 삶에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 안하면, 다시 말하면 구원받은 후에도 내가 주인이 되어서 살면 하나님이 징계하십니다.
어떻게 징계하시냐하면 여기서는 미디안인데요. 그것은 근거 구절은 제가 나중에 대겠습니다. 미다안과 아말렉 사람과 그 다음에 동방 사람이 오는데요. 이 동방사람은 나중에 보면 이스마엘 자손입니다. 이스마엘은 이렇게 되어있죠. 아브라함이 하갈을 취해서 이스마엘을 낳죠. 사라와의 사이에서는 이삭을 낳죠. 그런데 이스마엘을 쫓아냅니다. 하갈이 교만해져서 사라가 벌하니까, 도망갔다가 다시와서 순종하고 그 다음에 이스마엘 자손에 대해서는 성경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들나귀가 될 것이다. 그는 모든 사람을 칠 것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그를 칠 것이다." 이게 이스마엘에 대한 성경의 예언입니다. 교회로 와서 약간 비약적으로 저희들이 적용해 보겠습니다. 구원받은 후에 죄용서 받고 지역모임에 들어온 성도들이 자기들의 삶에서, 특별히 교회생활에서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런 죄를 범하면 하나님이 이스마엘을 보내서 칩니다. 이스마엘을 보내서 치면 어떻게 되냐면 성도들이 모두 적이 됩니다. 모든 성도들이 모든 성도들을 칩니다. 서로, 모임 안에서. 갈라디아서에 보면 "피차 물고 먹으면" 모든 성도들이 서로 공격합니다. 이런 일이 벌어집니다. 거기보면 이스라엘이 미디안이 오니까 어떤 형편속에 들어가냐면 자유롭게 대로를 다니지 못하고 전부 산에, 동굴 속으로 숨어버립니다. 그 다음에 곡식을 심어놨어요. 그리고 곡식을 거둘 가을이 되면 이 사람들이 와서 다 가져가 버립니다. 그래서 세번째, 그들에게 양식이 없습니다. 이 세가지입니다. 성도들이 자신의 삶에대한 주님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으면 첫번째입니다. 그들에게는 자유가 없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못돌아 다닙니다. 그리고 이 자유를 보통 이런식으로 이해합니다. 그렇게 살면 그 성도에게 주님의 인격이 안나안나타납니다. 주님의 성품, 주님의 관대함, 이런게 안보입니다. 그 다음에 두번째, 곡식을 거둘때에, 곡식을 심어놨는데 거둘때보면 와서 다 뺏어가버입니다. 그래서 열매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답게 살지도 못하고 또 열매에 대해서는 많은 형제님들이 어떻게 분별하시냐면 구원의 역사가 안일어납니다. 모임에 이런일이 있으면 봐야 되는데요. 성도들이 성도답지 않은 거예요. 그리스도인답지 않고 주님과 같은 인격과 성품이 안나타나고 그 다음에 모임에 구원의 역사가 없는 거예요. 그 다음 세번째, 결정적인 것입니다. 양식이 없어요. 교회에 말씀이 없습니다. 이게 성도들이 자기의 삶에, 자기를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흘리신 주님의 권리를 자기의 삶 가운데 인정하지 않으면 세가지 결과가 나옵니다.
자 그러면 이스라엘은 회개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지금 모임의 성도들이 왜 육신적일까? 우리 모임에는 왜 구원받은 사람이 나오지 않을까? 그리고 이제 말씀이 없다는 것은 이것입니다. 말씀 자체가 없을수도 있고요. 혹은 말씀을 전해도 전부 이렇게 생각합니다. '저건 누가 들어야 되는데. 하필이면 오늘 그 사람이 안왔네.' 그리고 '저 말씀은 누구를 겨냥한 말씀이야.' 이렇게 말씀을 전부 오해하게 만듭니다. 내가 들어야 하는 하나님의 양식으로, 말씀은 지식이 아니고 양식입니다. 그것을 먹고 내 속사람이 자라가야 됩니다. 그런데 이제 그렇게 안듣는거죠. 그런일이 생기면 회개해야 합니다. 모임에 성도들의 분열과 갈등이 나오면 회개해야 합니다. 이유가 뭐라고요? 우리 각자가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의 권리를 배제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서로 막 싸울때에 이렇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모임 안에서 막 갈등이 나오면 그 갈등에서 이기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떻게든지 논쟁해서 이겨서 이 싸움을 끝내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나중에보면 삼백명으로 싸우거든요. 많은 사람의 지지를 받아서 이 싸움을 이기려고 하면 안됩니다. 이 두가지를 조심해야 합니다. 모임 안에서 갈등이 생길때에 그 갈등, 논쟁이 되는 이슈, 그것을 성경을 들어서 이겨서, 내가 옳다. 이렇게 해서 해결하는게 아닙니다. 또 많은 사람, 둘다 성경을 대니까, 많은 사람이 나를 지지한다. 그래서 이 갈등을 해결하는 게 아닙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주권을 내 삶에서 인정하고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을 봐야 합니다. 그래서 특별히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보내서 이스라엘에게 그 잘못을 지적합니다. 내가 너희를구원했지 않느냐? 내가 너희를 가나안 땅에 넣어놨지 않느냐? 그런데 너희들이 내 말을 안듣고 있지 않느냐? 이것이 죄목입니다. 그리고 그 죄에 대한 결과가 미디안 사람, 이스마엘 사람들이 와서 막 흔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죄, 그리고 그 죄의 성격을 알려주는, 적 미디안과 이스마엘 사람의 특징을 드러냈고요.
그 다음에 세번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누구를 사용하시냐? 기드온을 사용하십니다. 그러면 기드온은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기드온에 대해서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특이한 것은 기드온은 주님이, 여호와의 사자니까 주님이죠. 주님이 먼저 딱 어딘가 자리에 앉으십니다. 기드온은 주님이 거기 있는지 모릅니다. 와서 포도주 틀에서 곡식을 타작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주님이 기드온에게 말합니다. "용사여 하나님이 너와 함께하시도다." 이 말이 무슨 뜻이냐? 지금 기드온은 미디안 사람을 두려워해서 미디안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포도주틀에서 타작은 안할거다. 포도주 틀은 어떤 곳이냐하면, 포도주는 술을 담그고 그러니까, 먼지나 그런게 나오면 안되는 곳입니다. 그리고 타작은 먼지가 일어나는 곳입니다. 그런데 포도주 틀에서 타작은 안합니다. 할수있는 곳이 아닙니다. 거기서라도 구차하게 어떻게 해서든지, 그렇지만 미디안이 두려우니까, 이것을 알면 뺏어갈거 아니예요. 그래서 몰래 자기 양식을 구하고 있는 사람을 주님이 사용하십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아는 사람을 하나님이 사용합니다. 이 상황을 누가 해결하느냐? 말씀을 가진 사람을 하나님이 씁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시죠. 기드온에게, 주님이 함께 계시는거죠. 주님이 그를 찾아오셨죠. 그리고 그에게 용사라고 부릅니다. 그는 용사 아닙니다. 두려워서 겨우 자기 곡식 만들고 있는데 무슨 용사입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자기 양식, 그래도 모임이 어지럽고, 사람들은 세상적으로 살고 그래도 자기 혼자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서 말씀으로 자기를 먹이고 있는 사람, 이 사람을 하나님이 사용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자기의 생애에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기드온을 사용하실때 보면 이렇게 하시죠. "용사여 하나님이 너와 함께하시도다" 그러니까 기드온이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이런 일이 있을리가 있습니까?" 그런데 여기서 잘 보시면 그 대화에서 어떤 차이가 있느냐면, 주님은 이렇게 기드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너와 함께하고 있다." '너'라는 단수를 쓰고 계십니다. 기드온과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거죠. 지금 보고 계시는 거죠. 그런데 기드온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어찌 이런일이 있겠습니까?" '우리'입니다. 기드온은 모임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기는 어떻게든지 혼자서 양식을 구해서 먹지만 자기가 구한 양식을 다른사람에게 줄수도 없습니다. 자기 먹을것도 부족한데, 다른 이스라엘 백성은 양식이 없이 굶고 있습니다. 자기가 그것을 도울길이 없습니다. 도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미디안과 싸워서 이겨야 합니다. 곡식 못뺏어가게, 그런데 그럴 수 있는 힘은 자기에게 없습니다. 그렇지만 자기 혼자라도 양식을 먹기 위해서 미디안의 눈을 피해서 양식을 구하고 있는데 하나님이 '용사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함께한다'고 하니까, "그럴리가 있습니까? 어떻게 하나님이 함께하는데 이럴수가 있습니까? 그리고 내가 무슨 용사입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겁니다. 하나님이 함께하면 하나님의 힘으로 싸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한다는 것을 안다면, 그리고 그 하나님이 전능한 하나님임을 안다면 그는 어떤 적도 물리칠 수 있는 용기를 가질 것입니다. 이게 주님이 하신 말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 말에 도달하기 위해서 그 과정이 필요한거죠. 우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안합니다. 하나님이 과거에 함께 하셨습니다. 출애굽할때, 가나안 정복할때 함께 하셨는데 지금은 함께 안합니다. 지금 함께 안해서 우리가 이 고통 가운데 있는데 뭐, 주님이 이렇게 말합니다. "네 힘으로 가서 싸워라. 내가 너를 보냈지 않았느냐. 네가 미디안을 한명 치듯이 칠 것이다." 하나님이 이렇게 약속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기드온을 쓰시는 이유는 첫번째입니다. 그가 혼자서 양식을 확보했기 때문입니다. 두번째, 연약을 강함으로 바꿀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약합니다. 그는 말하죠. 열두지파가 있는데 그 중에서 므낫세 지파가 제일 약합니다. 아비에셀 지파라고 했는데요. 므낫세 지파는 왜 약하냐면 가나안으로 올 때에 요단을 안건너가겠다고 한 지파가 있습니다. 요단 동편이 물도많고 풀도많고해서, 하나님의 뜻은 요단을 건너서 가나안 땅으로 가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요단을 안거안거너고 오른쪽에서 살게요. 한 지파가 두지파 반입니다. 그리고 므낫세가 반 지파 갈라집니다. 므낫세는 절반은 이쪽 절반은 저쪽 삽니다. 그래서 므낫세 지파가 제일 약합니다. 한 지파가 분열됐을때 제일 약합니다. 그래서 기드온은 잘 압니다. 분열만큼 약화시키는 것은 없다. 그래서 약하죠. 그런데 우리는 약하지만 언제 강하죠?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그리고 약한 사람이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더 원하게 되어, 오히려 강한 사람보다 더 강하게 될수 있습니다. 이것은 신약으로 와서 하나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사도바울이 자기 육체에 가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빼달라고 주님께 세번이나 기도합니다. 그랬더니 주님의 대답이 뭐였느냐? "네 은혜가 네게 족하다" 그리고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약해야 내가 강하다." 이 응답을 듣고 사도바울은 이렇게 바뀝니다. "내가 약한것을 자랑하리라" 그래서 구약에서는 기드온이 이것을 해냅니다. 자기는 약합니다. 잘 압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함께하면 강하게 된다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쓰는 것입니다. 신약에서는 사도바울입니다. 그는 사도라 일컬음을 받을 자격도 없습니다. 교회를 픽박했는데, 그는 그 몸을 볼때는 불품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을 묘사할때 보면 영화, 이런데 보면, 사도바울이 주로 대머리로 나옵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거죠. 볼품없는 사람, 하면 딱 외모가 하나님 일꾼다운 사람이 아닙니다. 보면 저 사람이 하나님의 일꾼일까, 싶습니다. 말도 못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를 쓰시면 하나님이 그를 사용하셔서 위대한 일을 이루셨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에게 그와같은 자격이 있었나요? 그가 그 일을 할만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나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쓰십니다. 왜요? 하나님이 하셨다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기드온이 그 사람입니다. 자기의 약함을 하나님의 함께하심으로, 강함으로 바꾸어내는 사람, 그래서 사도바울이 나는 연약하다. 나는 말을 못한다. 나는 외모가 별볼일이 없다. 그리고 말합니다. 외모가 있고 말도 잘하는 사람에게 말합니다. 나는 그 모든것이 약하다. 그러나 하나님이 당신을 쓰지않고 왜 나를 쓰겠느냐? 하나님이 나를 쓰신다, 입니다. 그래서 기드온은 첫번째, 자기 스스로 양식을 구해낸 사람입니다. 두번째, 자기의 연약을 알고 연약으로 인해서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연약한 자를 사용하시고 힘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거죠. "네 힘으로 싸워라." 이것은 기드온의 힘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미디안을 한 사람 치듯이, 미디안이 어마어마하죠. 그런데 한명 치듯이 칩니다.
그 다음에 세번째입니다. 기드온은 이렇게 합니다. 기드온은 이게 있는데요. 하나님이 나를 불렀다. "내가 너를 보낸것이 아니냐?" 이것이 중요합니다. 부름받은 사람입니다. 모임 안에서 내가 부름받았다. 이 개념이 있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 세번째, 기드온이 하는게 예배를 드립니다. 여기서부터 기드온이, 왜 기드온이 하나님이 이 시대에 썼는가가 나타납니다. 그 시대는 어떤 시대냐? 하나님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징계한 시대입니다. 이제 기드온이 하나님을 만난후에 제일먼저 한것, 하나님께 예배드립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다. 그래서 그가 양식도 없는데 많이 갖고 옵니다. 염소새끼 하나 잡고, 무교전병 가져오고, 국 많은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거거든요. 국을 쏟아버립니다. 그런데 이 부분은 조금 보겠습니다. 주님을 가리키는 건데요. 염소새끼는 번제입니다. 징승을 드리는 것은 번제를 드리는 거죠. 번제는 자원해서 드리는 것이고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여 드리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무교전병은 소제입니다. 소제는 주님의 흠 없는 생애를 가리킵니다. 주님이 그렇게 사셨기 때문에 주님을 따라가는 우리도 그와같이 살아야 됩니다. 그 다음에 국은 전제입니다. 부어드리는 거죠. 전제는 마지막 향기죠. 사도바울이 자기의 죽음을 전제라고 하죠. 자원해서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 흠없는 생애, 그것이 주는 감사함으로, 감동으로 내 자신을 기꺼이 주님께 헌신하고자 하는 마음, 이것을 표현합니다. 그리고 여기보면 뭐가 나오느냐? 이게 다 주님을 나타낸 겁니다. 바위위에, 지팡이를 가지고, 불이 오르고, 이것 다 주님이시죠. 언제냐하면 므리바에서 물이 없을때 하나님이 모세에게 명령하셨죠. 바위를 대하여 서라. 그리고 바위에게 명령해라. 그런데 명령을 안하고 모세가 바위를 두번 쳐버립니다. 그 바위가 주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을 따르는 반석이십니다. 그리고 지팡이, 주님이 맞으셨죠. 십자가죠. 그리고 불은 하나님의 심판, 이것이 전부 주님을 가리키는 거죠. 기드온은 말씀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보고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에게 합당한 권리와 주권을 드려야 된다. 이게 하나님께서 쓰신 사람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모두 성도들이 다 자기주장하고, 누구누구 비판하고, 서로 모임이 갈등 가운데 있을때 우리는 이렇게 해야 합니다. 그 싸움에 끼지말고, 그 싸움에서 이기려고 하지 말고, 내가 양식을 먹고 있는가?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있는가? 그리고 그와같은 것을 보면 그것을 내가 감당할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나는 약하다. 싸움은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해야된다. 그리고 싸움에서 이기려고 하지말고 내가 예배를 드리고 있어야 된다. 주님의 권리를 인정하고 있어야 된다. 이것이 이 전쟁의 큰 특징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냐면, 그 다음에 '여호와 살롬'을 잠깐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여호와살롬은 하나님께서 평안을 주시는 거죠. 여호와이레, 많이 있죠. 여호와 살롬 유명하죠. 기드온이 단을 쌓고 거기에 여호와 살롬을 붙입니다. 다시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는 것은 언제냐? 하나님이 권리를 받으실때 입니다. 하나님에게 마땅한 주권이 드려질때, 그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게 여호와 살롬의 의미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두가지를 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을 쓰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사람으로 전쟁을 이기게 하시는 거죠. 전쟁을 어떻게 하느냐? 두가지를 합니다. 첫번째, 숫자를 줄입니다. 원래 삼만명의 군대가 나왔어요. 그런데 숫자를 줄였어요. 왜요? 숫자로 이기는 전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승리하셔야 되는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숫자를 삼백으로 줄입니다. 그래서 나중에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렇게 오해합니다. 얼마나 교훈을 못받았느냐면, 기드온에게 와서 "당신이 승리를 주셨으니 당신이 왕을 하세요." 이게 기가막힌 이야기입니다. 누가 이기게 한거죠? 하나님이 한 거죠. 하나님께 마땅한 영광과 존귀를 돌려야 합니다. 그런데도 기드온에게 영광을 돌리고 기드온을 왕으로 삼으려고 합니다. 이게 영적으로 얼마나 분별력이 없는가, 하는것을 보이는 거죠. 그런데 기드온만은 영적으로 분별해 닙니다. "나는 왕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왕이시다." 그게 기드온에게는 너무 명백합니다. 삼백명으로 이겼는데 자기가 이긴 겁니까? 하나님의 승리가 분명한거죠. 그래서 하나님이 첫번째로 숫자를 확 줄입니다. 두번째입니다. 전쟁을 할때는 칼로해야 됩니다. 첫번째 사사 옷니엘은 칼로 합니다. 두번째 사사 에훗은 단검으로 합니다. 짧고 양날이 있는 검으로 합니다. 말씀으로 한거죠. 세번째 사사 드보라, 바락의 경우는 뭐로 하느냐 하면 말뚝으로 칩니다. 일상생활 용품입니다. 여자가 장막을 옮길때 쓰는 말뚝으로 죽입니다. 이게 각각 의미가 있습니다. 이제 네번째, 무기가 뭐냐? 항아리와 횟불입니다. 횟불로 이깁니다. 모임을 하나되게 만드는 것은 칼로 하는것이 아닙니다. 전쟁으로 이겨서 되는것이 아닙니다. 마음을 사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사느냐, 하는거죠. 이 대목은 신약으로 조금만 와서 보겠습니다. 고린도후서, 사도바울께서 이 비유를 들어서 씁니다.
"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 기록한바 내가 믿는 고로 말하였다 한 것 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는 고로 또한 말하노라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니 모든 것을 너희를 위하여 하는 것은 은혜가 많은 사람의 감사함으로 말미암아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고후 4:6-15).
신약성경으로 오면 고린도교회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세운 교회죠. 그가 고린도에 가서 1년 8개월 있으면서 모임을 세웠습니다. 브리스길라 아굴라 가정과 같이, 그가 장막을 만들면서 밤낮으로 수고해서 모임이 세워졌습니다. 2차 전도여행때에요. 사도바울이 2차 전도여행에서 가장 오래 머무른 교회입니다. 그런데 결과가 매우 안좋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을 보면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하고 있습니다. 그게 문제가 되는거죠. 고린도전서 5장을 보면 음행이 있었습니다. 고린도전서 6장을 보면 성도간에 소송이 있었습니다. 이게 지금 기드온 시대입니다. 구약의 기드온 시대에 기드온을 쓰신것하고 이 고린도 교회에서 사도바울을 통해서 주님께서 고린도교회의 문제를 해결해가시는 것과 병행이 되는 것입니다. 기드온이 집에서도 살고, 가나안 땅이니까, 자기들 집도있죠. 그 다음에 밭도 있죠. 자유롭게 농사도 짓고 이웃마을도 놀러가고 이렇게 살아야 되는데 미디안이 오니까 전부 무서워서 동굴에 숨어버리고 산에 굴파고 숨어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눈에 띄기만 하면 종삼고 죽여버리기도 하니까, 곡식 심어놓은 것 거둘수도 없고 먹을게 없고, 이와같은 상황속에서 기드온이 모든 군인들에게 이렇게 하죠. 삼백명에게, "내가 하는것처럼 해라." 나를 따라서 해라,입니다. 그리고 이 횟불을 항아리 속에 넣고 항아리를 깨면 횟불이 드러나고 미디안 군인들은 깜짝 놀라서 자기들끼리 싸워서 죽습니다. 이스라엘이 안죽입니다.
그것과, 이제는 고린도교회입니다. 고린도교회가 어떻게 되느냐면,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이렇게 말합니다. "예루살렘 교회를 도와야 된다. 예루살렘에 기근이 들어서 다른 모임에 헌금을 하자." 그랬더니 고린도교회에서는 헌금이 안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고린도후서 8-9장에서 마게도냐 교회의 예를 듭니다." 마게도냐 교회를 봐라." 마게도냐 교회는 아마 빌립보 교회겠지요. 거기는 핍박과 가난 가운데 넘치는 연보를 했던 것입니다. 고린도교회는 안나와요. 왜요? 서로 누구것이라고 그러는데 어떻게 거기서 열매가 나오겠습니까? 다른 모임을 향한 기도와 헌신이 어디서 나오겠습니까? 그래서 고린도교회를 사도바울이 어떻게 다루느냐 하는 건데요. 보면 이렇게 합니다. 고린도후서 1장 쪽에 보면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쓴 내용을 보면 자기가 아시아에서 죽을 고생을 합니다. 왜 그런 환난이 왔는지 모르겠지만 사도바울은 사형선고라고 느낍니다. 이제 영행을 하면 어떤 어려움 속에 들어갔는데 사도바울은 딱 이렇게 분별한 것입니다. 주님이 오라고 하시는 거다. 사형판결로 느낍니다. 그런데 죽지않고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은 죽는거 두려워하는 사람이 아니죠. 주님 앞에 갈 각오를 하고 있었죠. 그런데 분명히 사도바울이 볼때에 오라고하는 사인이었는데 주님이 살려 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다시 고린도교회에 이야기하는 거죠. 왜 그랬는가, 하나님께서,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만 의지하라고" 이것이 고린도후서 1장에서 말하고 있는것이 기드온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바울도 자기를 의지할 수 있습니다.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만 의지하라고 했다 그러면서 고린도후서 1장에 어떤 하나님을 이야기하냐면 '여호와 살롬'을 이야기 합니다. '모든 위로의 하나님' 이게 지금, 기드온과 고린도전후서가 같이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도바울이 항아리와 질그릇에 대해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나님이 질그릇에 횟불을 두셨다. 질그릇 안에 보배를 두셨다. 우리같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알게 하셨습니다. 우리같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교회에 속하게 하셨습니다. 놀라운거죠. 그런데 우리는 누구죠? 질그릇입니다. 우리에게는 그같은 보배를 담을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에게 이 놀라운 것을 주셨지요? 우리에게 뭔가가 없다고 하는것을 분명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요, 주권입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이 보이는 태도입니다. 잠깐 보겠습니다. 왜 우리같은 질그릇에 이 놀라운 보배를 담아 두셨는가? 7절에서는 우리가 분명히 확인해야 합니다. 능력은 하나님께만 있는거다. 우리는 능력이 없을지라도 하나님이 능력이 있으니까 우리 능력으로 하면 안되고, 우리의 약함을 하나님의 강함으로 바꾸어내야 합니다. 그 다음에 8-9절은 우리는 질그릇입니다. 그래서 8-10절까지 보겠습니다. 우리는 항상 예수 죽인것을 짊어집니다. 이것을 쉬운말로 표현하겠습니다. 우리는 항상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아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의 권리를 인정하고 주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예수 죽인것을 몸에 짊어지고, 그 다음에 11절, 왜 그렇게 하느냐? 주님의 생명이 나타나야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을 통해서, 모임 생활을 통해서 예수님이 누군가가 나타나야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질그릇이고, 우리는 겸손하게 낮춰져야 됩니다. 이 원칙이 지켜져야 되는 거고요. 그렇게 했을때에, 23절에 우리에게 믿음이 생깁니다. 우리가 굳게 믿음을 붙들 수 있습니다. 어떤 믿음이냐? 우리 안에 주님이 살아서 역사하고 계신다. 주님은 우리 모임안에 살아계신다, 라고 하는 믿음을 가질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12-13절입니다. 그리고 14절, 소망이 있습니다. 믿음이 있고 소망이 있습니다. 주님 공중에 오실 것입니다. 교회가 완성될 것입니다. 이제까지 우리의 섬김을 주님이 아실 것입니다. 사람에게 인정받지 않고, 상황으로 증명하지 않고, 참되신 주님께서 평가하실 소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게 14절입니다. 그래서 믿음과 소망과, 그 다음에 16절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사느냐? 우리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습니다. 14절, 다른 사람을 위해서, 성도를 위해서, 그런데 그게 전부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을 위해서 살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살고, 이것이 항아리와 횟불입니다. 이렇게 살때 미디안 사람들이 들어와서 온통 교회를 어지럽히고 성도들을 숨게 만들고 양식이 없게 만만들고 하는 문제를 해결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드온 시대와 그 시대의 문제점과 그리고 그 해결책을 보면 저희들이 교회 시대에도 얼마나 이와같은 위험속에 노출되어 있는가. 그리고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은 무엇인가라고 하는것을 교훈 받을수가 있습니다.
다시 요약을 해보겠습니다. 모임의 한 사람이라도 말씀을 통해 주님을 알아가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자기의 생애에 하나님의 권리를 인정하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 시대에 징계하신 이유가 뭐냐면, 하나님이 놀라운 은혜를 베푸셨는데도 하나님을 대접하지 않은 것입니다. 전부 하나님이 주신것을 내거라고 하고있는 것입니다. 전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해야 됩니다. 그리고 주권을 인정하지 않아서 문제가 생겼을때에도 해결방법은 다시 내가 내 삶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으로 해결해야지, 문제를 해결하는 것으로 해결할 수 없다. 이것이 기드온과 관련된 주님의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이와같은 것을 말씀을 통해 미리 배워놓고 만약에 우리 가운데 성도들이 주님이 주신 은혜지만, 주님이 주신 자녀고, 주님이 주신 직장이고, 주님이 주신 물질이고, 주님이 베푸신 시간들이지만, 이 시간들을 내것인양 쓴다면 내 권리인 것처럼 쓴다면, 주님께 묻지 않고, 물론 주님께서 우리에게 후히 주시고 누리게 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주님께 묻지않고 그것을 내 주권대로 쓰면 문제가 생깁니다. 어떤 문제가 생기느냐? 미디안 사람들이 옵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리스도의 성품을 나타내지 못하고 구원받은자 답지 못하고, 또 복음이 전해져서 영혼들이 구원받는 기쁨이 없어지고, 또 각 성도들이 개인적으로 성경을 읽어도 모르겠고, 모임에서 전해지는 말씀은 이런저런것으로 또 안듣고, 이런 상황으로 넘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다시 놀라지 않고 다시 기드온처럼 연약한 우리가 하나님의 양식을 다시 밟아내고, 양식을 어떻게든지 내고, 그리고 다시 항아리와 횟불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격이 없는데도, 우리에게 능력도 없고 우리에게 가치가 없는데도, 우리안에 놀라운 보배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 보배를 주신 하나님 앞에 합당하게 행해야 됩니다. 능력은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이제 저는 자기를 부인하고 살겠습니다. 이제 주님의 생명만이 나타나는 것이 저의 삶의 유일한 목표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살고 소망으로 살고 하나님을 위하여 살고, 그래서 주님께서 다시 저희들에게 하나님이 원래 주시고자 하였던 놀라운 은혜들은 누리며 다시 주님 공중에 오실때에 그 앞에 칭찬과 존귀로 설수 있도록 저희들을 인도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주님께서 이 말씀들을 통해서 저희들의 마음에 말씀해 주시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