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8. 성령 >
2019년 9월 6일 금요일 /한봉래 형제님
< 08. 성령 >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14:17).
저희들이 요한복음을 쭉 보면 13-16장까지는 주님께서 잡히시던 밤에, 체포되시던 밤, 금요일 십자가에 돌아가시니까 목요일 밤입니다. 목요일 밤에 만찬을 제정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가르치시는 내용입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삼일만에 부할하셔서 사십일간 지상에 계시다가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것입니다. 그리고나면 주님의 십자가를 믿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루게 되는 교회를 누가 인도할 것인가를 말씀 하십니다. 요한복음 13장은 "서로 발을 씻는것이 옳다." 하시고, 14장부터 16장에 이르기까지 성령님이 언급이 됩니다. 성령님입니다. 주님이 살아계실때는 교회가 형성되지 않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교회는 오순절에 시작합니다. 성령이 오셔야 시작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교회를 말씀하시면서 이 교회는 주님의 십자가 위에 세워지지만 그러나 이 교회를 실제로 이끄시는 분은 성령님이다. 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제는 주제가 성령으로 옮겨 갑니다. 지역모임의 주님이 예수님입니다. 지역모임의 주인은 예수님입니다. 그리고 우주적인 교회, 몸된 교회의 머리가 주님이십니다. 그것은 저희들이 보면 아는거죠. 교회의 머리와 지역모임의 소유주는 주님이십니다. 그런데 이 주님은 교회가 존재하는 동안 이 땅에 계시지 않고 하늘에 계십니다. 하나님의 우편에 계십니다. 그런데 교회는 이 땅에서 존재합니다. 그러면 이 땅에 존재하는 교회가 주님의 주 되심을, 우리 교회의 주인을 주님이심을 어떻게 나타낼 것인가? 그게 뭐냐면,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다.' 입니다. 성령님의 통치를 받을때에 그때 지역모임은 주인이 주님이심을 나타낼수 있습니다.
그럼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다는게 뭐냐? 하는 주제로 옮겨 갑니다. 제가 나눠드린 프린트는 책을 요약해 놓은 것입니다. 책은 윌리암 맥도날드 형제님의 책에서 성령님에 관한 부분하고 그 다음 노만 크로포트 형제님은 몇장에 거쳐서 하셨습니다. 그래서 맥도날드 형제님은 간단하게 언급 했고요. 오늘은 맥도날드 형제님 쪽, 내용을 다루려고 합니다. 그리고 다음번에 노만 크로포트 형제님이 다루신 부분을 다루려고 합니다. 저희들이 생각해 보려고 하는것은 지역모임에서, 대전중구 모임, 지역모임이 예수님이 주인이다. 이 교회를 세우신 분도 예수님이고 교회가 여러가 집회를 하고 여러가지 복음을 전하고 예배를 드리고 할때, 예수님을 주로 모신다고 하는 이와같은 것을 표현해야 하는데 그것은 우리 가운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보내주신, 이 성령님의 인도를 좇을 때, 이것이 예수님이 주인인 교회가 된다는 거죠. 두번째로 넘어가보겠습니다. 그럼 성령님은 어떤 분이냐? 무엇을 하시는 분이냐 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인것을 보겠습니다. 성령님이 하시는 일은 일단 셋으로 계산을 나눠보겠습니다.
첫번째, 믿지 않는 사람에게 성령님이 하시는 역할이 있습니다. 두번째, 믿는사람에게 성령님이 하시는 역할이 있습니다. 세번째, 교회에에게 성령님이 하시는 기능이 있습니다. 성령님이 역사하시는데 성령님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이 성령님은 지금 하늘에 계신 예수님을 대리해서 지금 이 지상에서 역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이 성령 시대입니다. 이 말을 다시 말을하면 교회시대입니다. 이 말을 또 달리 바꾸면 은혜의 시대 입니다. 저희들이 보통 고린도서에 나와있는데요. "지금이 은혜받을만한 때요. 지금이 구원의 날이라." 라고 하는 은혜의 시대 입니다. 믿기만 하면 누구나 구원받을수 있는 이 시대를 살아갑니다. 그리고 이 시대를 성령님의 시대, 교회시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하시는 기능, 셋으로 보겠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에게 성령은 어떻게 일하시는가? 믿는 사람에게 성령은 어떻게 일하시는가? 그 다음에 교회를 성령님은 어떻게 이끌어가시는가? 세가지 영역으로 보겠습니다. 첫번째, 보겠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구절이 있는데요. 대표적인 구절을 요한복음 16장을 찾았습니다. 아까 말씀드렸습니다만, 요한복음 13장에서 16장까지가 주님이 잡하시던 밤에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흔히 고별강론이라고 부릅니다. 헤어지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14장부터 16장까지 주로 언급되는것이 성령님입니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요16:8-11).
여기서 성령님이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그래서 여기서 성령님꼐서, 세상이니까 아직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우리나라 성경에는 세상이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약간 분류를 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을 보시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이렇게 표현되어 있는데가 있고요. 요한일서 2장에서는 "세상을 사랑치 말라"고 했습니다. 그럼 어떤때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렇게 사랑하셨고, 어떤때는 우리더러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니까 이상하잖아요? 그래서 요한복음 3장 16절은 세상이 아니고 세상 사람입니다. 그리고 여기있는 8절도 '세상'이 '세상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아직 구원받지 않은사람, 세상에서 살고있는 사람, 그 사람을 하나님은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독생자를 주신거죠. 그리고 성령님께서 하나님이 그토록 사랑하신 세상 사람들, 구원받도록 하시는 내용이 요한복음 16장에 나와 있고요. 나중에 다시, 저네 개요를 보고 설명하겠습니다. 두번째로 넘어가겠습니다. 성령님께서 세상과 관련해서 어떤 역할을 하시는가가 요한복음 16장에 나와 있고요. 두번째, 믿는 사람에게 성령님께서 무엇을 하시는가를 성경 네군데를 찾아보겠습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엡5:18).
믿는자에게 성령이 하시는것, 저희들이 한번 다룬적이 있는데요. 성령께서 충만케 하십니다. 신자들에게, 믿는자들에게 성령께서 하시는 것, 여러가지가 있지만 네가지만 찾아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엡4:30).
첫번째는 성령으로 충만해야 하고요. 두번째는 성령을 근심하게 해서는 안된다.
"성령을 소멸치 말며"(살전5:19).
세번째, 성령을 소멸치 말며 라고 되어 있습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5:16).
네번째, 여기서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행하다'라고 하는것이 한문인데요. 뭔가를 행동하다라는 뜻이 아니고요. 이 행하다라는 한자가 갈 행자 입니다. '가다'라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워킹, '걷다' 입니다. "성령을 따라서 걸어가라" 이것이 네번째, 믿는자와 관련된 성령의 역사 입니다. 성령께서 믿는 자들에게 충만케 하시고, 성령께서 믿는자 안에서 근심하실수 있습니다. 또 성령은 믿는자 안에 계시지요. 그런데 성령이 소멸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성령이 믿는자와 함께 동행하십니다. 여러가지가 있지만 이 네가지 것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성령께서 세상과 함께 어떻게 역할을 하시는가? 그리고 믿는자에게 성령께서 어떤일을 하시는가? 그리고 세번째 입니다. 교회와 관련해서 성령님께서 어떤일을 하시는가 하는것인데요.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요4:24).
성령님이 교회와 관련해서는 예배를 인도하십니다. 그 지역모임이 떡과잔을 놓고 주님께 예배드릴때 성령님께서 그 예배를 이끌어 가십니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고전3:1).
두번째, 성령께서 지역모임에서 영적인 사람들을 만들어 냅니다. 그 지역모임이 영적인 분위기가 되도록 영적인 모임이 되도록 성령께서 일하십니다. 그 다음에 나와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을 안읽고 하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2-14장까지 보면 성령께서 은사를 주시고(12장) 은사를 사랑으로 사용하게 하시고(13장) 그 은사가 사용되는것을 통제하게 하십니다.(14장) 반드시 두 세사람이 하게 하고 하나씩 하나씩 하게하고 또 다른사람에게 계시가 있으면 앞에 하던 사람은 멈추게 하시고 그래서 그그 은사가 지역모임에서 사용되는것을 통제하십니다. 이것이 지역모임과 관련해서 성령님이 하시는 기능 세가지 입니다.
예배를 인도하시고 그 교회가 영적인 교회가 되도록 말씀을 설명하시며 교회 내에서 은사가 사용되고 통제되도록 성령께서 인도해 가십니다. 성령께서 지금 저희들 가운데 하시는 일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 또 믿는 자들에게, 또 교회에게 이와같은 기능을 하십니다. 우리가 이것을 순종할때, "예수님이 지역모임의 주인이다"를 실현해 내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하나를 살펴보겠습니다. 우선은 성령님께서 믿지 않는자들에게 하시는 일입니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16:8).
"그가 와서" 이것은 성령님께서 강림하시면, 성령님은 오순절에 오십니다. 오순절 이후부터 성령님께서 믿지 않는 사람에게 이와같은 기능을 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책망 하십니다. "책망하다" 인데요, 혹은 번역을 세상 사람들에게 이와같은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혹은, 확신 시킵니다.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서, 그래서 성령께서 믿지 않는 사람에게 "내가 죄인이구나, 나는 내가 괜찮은 사람인줄 알았는데 복음의 말씀을 들어보니까 성경 말씀을 들어보니까, 내가 죄인이구나." 이렇게 하시는 것이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물론 우리도 최선을 다해서 죄에 대해서 설명 해야지요. 그렇지만 사람의 말로 설득되는것이 아니고 그 말씀을 성령님이 사용하셔서, 어떤 사람의 마음속네 '내가 죄인이다.' 라는 것을 알게 하십니다. 두번째, 죄인일뿐만 아니라, "아! 의인이 되었구나"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니까, 나같은 죄인도 믿기만 의롭게 되는구나." 의에 대해서 성령께서 믿지 않는사람의 마음속에 확신을 주시는 것입니다.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심판에 대해서, "나는 죽으면 끝인줄 알았는데, 하나님의 심판이 있구나. 죽음보다 더 무서운 것은 심판이 있구나." 이것을 하시는 분이 성령님입니다. 그런데 저희들이 하나 더 집어넣어야 할것은 성령님이 어떤 사람에게 직접 하시지 않습니다. 반드시 믿는 사람들의 복음의 전도를 통해서 하십니다. 조금 더 설명을 드리면요,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요16:9).
믿지 않는 사람이 자기가 죄인이구나, "내가 죄인이구나" 라는것을 성령으로 말미암아 알게 되는데, 그 죄의 핵심적인 내용이 뭐냐면, 믿지 않는것, 예수님을 믿지 않구나. 이게 죄의 핵심적인 내용이구나 라고 하는것을 성령께서 깨닫게 하십니다. 저희들이 여기서 잠깐 생각해 보면 믿는사람이, 예수님을 믿는사람이 아직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성경말씀을 펴서 들려주고 또, 자기의 간증도 하고 이렇게 합니다. 그러면 믿지 않는 사람이 들어보고 이 사람과 나의 차이가 뭔가? 했을때에 "아 이사람은, 예수님을 믿는구나. 그리고 나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것이 차이구나." 하는 것을 알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핵심적인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저희들이 어떻게하면 복음적인 삶을 살수 있느냐하면 믿지 않는 사람이 우리의 삶을 보고 "저 사람은 나와 똑같은데, 나와 비슷한 환경에 처해 있는데, 사는것도 유사하고 여러가지 형편도 비슷하고 그런데 저 사람에게는 나에게 없는것이 있는데, 예를들면 똑같이 병에 걸리기도 하고 어떤 사고를 만나기도 하고, 자녀를 키우는데 여러가지 어려움이 있고, 똑같은 사람인데, 나는 그러면 이런걱정도 하고 저런 걱정도 하고 어떤때는 절망하기도 하고 어떤때는 분노하기도 하고 이러는데, 이사람은 나와 똑같은데 이 사람은 나와 다른 거예요. 그래서 뭐가 다를까? 왜 저런 다른 반응이 나올까?"를 생각했는데 이 사람은 똑같은데 거기에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삶이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믿지 않는 사람의 삶과 차이가 나야 합니다. 우우리의 말이 다르며, 우리가 복음을 갖고 있지요. 그리고 우리의 삶이 달라야 합니다. 그랬을때 성령께서 우리의 말과 삶을 사용해서 믿지 않는 사람의 마음속에 "아! 내가 죄가 뭔지 안다. 그리고 죄의 핵심은 예수님을 안믿는것이다." 라고 하는것을 이해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께서 하시는 사역이고, 우리의 책임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믿지 않는사람과 다른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사용해서 성령님께서 분명하게 이 세상 사람에게 죄가 무엇인지, 죄의 핵심은 예수님을 밎지 않는 것에 있다는 것을 알게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9절입니다.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요16:10).
"의에 대하여라 함은" 그럼 뭐가 의인가요?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는것이 의입니다. 우리가 생각할때 의라고 하는 것은 옳은 행동, 선행, 다른사람 보기에 착한 일, 가난한 사람 돕고, 병든자를 돕고 하는 것이지만 진짜 의는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이땅에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내일 십자가를 지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가기 위하여 첫째,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두번째, 삼일만에 부활하셔야 합니다. 그리고나서 사십일만에 승천하셔야 합니다. 이 과정을 거쳐서 가십니다.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시고 그리고 높아지십니다. 이 과정이 우리의 의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실때 나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예수님이 부활하실때 그 부활이 내 생명이 되고 예수님이 하늘에서 통치하시면서 그것에 내가 순종하고, 이것이 의인 것입니다. 의의 핵심은 주님께서 아버지께로 가시는 그 발걸음에 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하며" 세상은 예수님을 보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하늘에 계시지만, 세상은 이제 "죽었으니까 없어졌겠지." 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우편에 계십니다. 그러나 세상은 예수님을 볼수 없습니다. 그런데 세상이 볼수 있는것이 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인입니다. 이세상에 살고있는 그리스도인, 그들이 모이고 있는 교회를 볼수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예수님, 이 땅에서 보이게 드러내는 것이 그리스도인이고 교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 사람과 달리 의롭게 살아야 합니다. "아, 저사람들을 보니까, 정말 의롭다. 죄를 무서워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려고 하고.." 이와같은 간증이 세상에 나타나야 합니다. 그때 성령께서 우리를 사용하셔서 우리의 말과 삶을 사용하셔셔 세상 사람들에게 "나는 의가 무엇인지 안다. 참된 의는 이것이다." 라고 하는 것을 가르쳐 주실 것입니다.
그 다음이 심판입니다.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요16:11).
11절은 심판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사람으로 오셨는데요. 사실은 하나님이십니다. 사람들은 이분을 그냥 사람으로 생각했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이분에 대한 첫번째 예언이 "여자의 후손"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범죄했을때, 하나님이 첫번째 해결책을 제시 하십니다.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밟을 것이다." 예수님은 여자의 후손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죽으십니다. 그러므로서 뱀의 머리를 밟습니다. 사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때에 하나님이 예수님을 심판하시지만 이것은 죄에대한 심판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죄가 예수님의 십자가로 용서되었다고 믿는사람들이 구원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심판입니다. 누구를 십판하느냐? 뱀을 심판하는 것입니다. 사단을 심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심판받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죄 없으신 분입니다. 그분은 죄의 대표로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십자가가 무엇을 심판하고 있는가? 예수님이 잘못해서 하나님께 진노의 심판을 받았는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거기에는 하나님의 약속에 따른 심판이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 임금, 사단이 심판을 받은 것이죠. 뱀의 머리를 밟으신 건데요. 여러가지 의미가 있겠는데요. 세상은 이렇게 가르칩니다. 지금도 어디 가니까, 코카콜라인가, 펩시콜라의 모토가 이것입니다. "지금을 위해서 사십시요." "지금을 즐겨라" 이것입니다. 그런식이거든요. 세상은 이렇게 가르칩니다. "지금 너 자신을 위하여 살라." 전부 세상의 가르침입니다. "네 자신이 그것을 해서 행복하면 그것 해라" 이것이 세상이 가르치는 가치 입니다. "너를 위해서 살라." "지금을 위해서 살라." "지금당장 목마르면 콜라를 마셔서 지금당장 나의 갈증을 해소시켜라." 건강을 생각하고 뭐를 생각하지 말고 지금 당장의 문제를 생각하라. 이것이 세상이 가르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가르칩니다. 지금을 위해서 살면 안된다. 죽은 후, 하나님 앞에 상 받을 인생을 살아야 한다. 이것이 성경의 가름임입니다. 이렇게 말하지요. "온 천하를 얻고도" 온 천하를 얻는것이 어마어마한 것이죠. "이 지구의 주인이 된다고 해도 자기 목숨을 잃어버리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성경은 지금을 위해서 살지말고 영원을 위해서 살아라 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가르침은, 나를 위해서 살지말고 하나님을 위하고 교회를 위해서 살아라. 자기는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교회를 세우고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고 그렇게 살아라 입니다. 이것이 세상과 성경이 충돌하는 대목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자기를 위해서 실컷 삽니다. 남 생각을 안하고 작, 가족을 위해서 삽니다. 그런데 만족 하느냐? 그들의 마음속에 만족이 없습니다. 만족하는척 생각하지만 이것이 허무한 것입니다. 그 다음에 지금을 위해서 삽니다. 그런데 만족함이 있으냐?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 이 만족함이 없는 세상속에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고 교회를 세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만족 합니다. 그래서 세상사람들이 봅니다. "나는 나를 위해서 살았는데 행복하지 않구나. 이 사람들은 자기를 부정하고 그 고난의 길을 기꺼이 가고 이렇게 살았는데 이 사람들이 행복하구나." 라고 하는것이 구분이 됩니다. 이 세상 임금이 심판 받았구나. 사단의 정책은 실패했다고 하는것이 분명하구나. 이것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한복음 16장에서 성령님께서 세상에 대해서 하는 기능입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이와같이 기능하시도록 우리의 삶이 분명한 간증을 나타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삶.
그다음, 무엇이 참된 의인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하심이 의가 되는 것, 그리고 성경의 가르침대로 살았을때, 자기를 부인했을때 생기는 만족, 이것을 가지고 세상 속에서 살고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책임이고 우리를 사용하셔서 성령님께서 이렇게 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이 증거되는 원칙 입니다.
두번째로 성령님께서 믿는자들의 안에 계시지요. 성령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때에, 자동적으로 믿는 그 순간 성령님께서 안에 계십니다. 이것이 구약성도들과의 차이 입니다. 구약성도들은 그렇지않습니다. 믿는 사람에게 다 있는 것이 아니고, 구약에서는 특별한 임무를 띄고 성령님께서 임하십니다. 사울에게 임하고 다윗이 범죄한 이후에 시편51편을 쓰지요. 밧세바와 간음하고 나단 선지자가 책망하고, 그랬을때에 그가 시편 51편을 씁니다. 거기에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주의 영을 내게서 떠나게하지 마옵시고" 당시의 두려움 입니다. 구약은 성령이 떠날수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일시적으로 성령이 임하고 임무가 끝나면 떠났습니다. 이것이 구약 성도 입니다. 신약의 경우는 아닙니다. 믿는순간 들어옵니다. 모든 성도에게, 그리고 떠나가지 않습니다.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도 함께 하십니다. 구원의 안정성입니다. 그런데, 이 성령께서 우리 안에 충만해야 합니다. 충만하지 않는것은 성령께서 근심하실수 있고 소멸될수 있습니다. 성령이 계시긴 한데 성령이 없는 사람과 똑같이 살수 있습니다. 이론적으로 믿어도 구원받지 않은 사람처럼, 세상 사람처럼 살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안에 계시긴 한데 항상 슬퍼하십니다. 성령이 기쁨으로 충만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책임은 성령과 함께 동행해야 합니다. 성령이 우리안에 있을뿐만 아니라 우리의 매일매일의 삶 속에서 성령이 함께해야 합니다. 이 네가지를 볼수 있습니다. 성령충만에 대해서는 에베소서 5장을 보겠습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엡5:18).
"술 취하지 말라" 성령충만을 성경이 비유를 사용하는데 술과 비유합니다. 사람이 술을 먹으면 걸음이 비틀비틀 거립니다. 걸음이 달라지죠. 걷는것이 다릅니다. 그것이 성령충만한 것과 똑같습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그가 걷는것이 다릅니다. 일반적인 사람이 걸어가는 모습이 아닙니다. 술 취하면 비틀거립니다. 이것은 부정적인거죠. 성령충만하면 보통 사람처럼 그렇게 안걸어 갑니다. 그 일상적인 삶이 다릅니다. 정말 주님의 길을 가고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걸음을 가고, 그렇게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술취하지 말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령충만을 받으라, 그러면 성령충만을 어떻게 받을것인가를 잠깐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저희와 함께 참예하는 자 되지 말라"(엡5:7).
문맥을 보시겠습니다. 성령충만하기 위해서, 혹은 성령충만한 사람의 결과 입니다. 첫번째입니다. 그는 분리된 삶을 삽니다. "저희와 함께 참예하는 자 되지 말라" 세상 사람과 구분된 삶을 삽니다. 세상 사람처럼 살지 않습니다. 돈을 추구하거나 명예를 추구하거나 쾌락을 구하거나 자기 중심적이거나.. 이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먼저 성령충만 하려면, 그리고 성령충만하면 세상 사람과 구분된 삶을 삽니다. 그 다음 15절을 보겠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엡5:15).
"지혜 있는자 같이 하여" 성경적인 지혜가 있습니다. 말씀이 말하고 있는 지혜, 세상적인 지혜 말고, 성경이 말하는 어떤 지혜를 갖고 있습니다. 지혜는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성경적인 지식이 있고 그 지식을 실제 삶에서 적용해 낼수 있는 지혜가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17절로 가겠습니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엡5:17).
주님의 뜻을 이해 합니다. 세상과 구분되고 성경지식을 삶에 적용하는 지혜가 있고 그 다음에 주님의 뜻을, 자기를 향한 주님의 선하신 뜻을 압니다. 이런 사람이 성령 충만 합니다. 성령 충만하기 위해서 세가지를 댄 겁니다.
세상과 달라야 한다. 말씀을 적용할수 있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주님은 자기를 향한 주님의 구체적인 뜻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이런 사람들이 성령 충만한 거죠. 그 다음에 성령 충만에 대해서는 전번에 수양회때 다뤘는데요. 다시한번 기억을 되살려서 보겠습니다. 사도행전으로 가겠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성령충만이 어떻게 표현되어 있느냐면 첫번째 사도행전 4장 입니다.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아"(행4:8).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
"저희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없이 말함을 보고 그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그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행4:13).
사도행전 4장에서 성령충만은, 성령충만 했을때 베드로가 말씀을 전합니다. 예를들면 11절을 보면 "건축자의 버린돌이 모퉁이 돌이 되었느니라" 이렇게 말합니다. 그랬더니 13절에 보니까 이 말씀을 듣는, 베드로를 반대한 사람들, 대제사장들, 서기관들이 어떻게 느끼냐면 "저 사람은 학문없는 범인인데" 신학을 한것도 아니고, 사도바울 같은 경우는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도 하고 그랬지만 이 사람은 그런 어떤 성경에 관한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가 한 말은 공부한 사람들의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기탄없이 말하는 거죠. 그래서 성령충만은 뭐와 관련되어 있느냐면, 만약 어떤 사람이, 저희들에게 적용해보면 이것입니다. "당신이 신학대학을 나왔느냐? 성경을 어디에서 배웠느냐? 어떻게해서 당신 성경을 설명하는 것을 어떻게 믿을수 있느냐? 그것은 객관적인 가르침이냐? 우리는 이렇게 알고있다." 이렇게 했을때에 어떻게 와야 하냐면, "우리도 이렇게 공부했다." 이렇게 하는것이 아니고 성령 충만함으로 그런 것들을 이겨내야 합니다. 그래서 무얼, 공부를 해서 알아내는 것이 아니고, 성경은 어떻게해서 아는거냐면 성령께서, 그러니까 그가 세상과 분리되는 삶을 살고 성경적인 지식을 적용해 내고 그리고 주님께서 나를 이렇게 부르시고 계신다는 확신 속에서 기도하고 성경을 묵상하고 또 앞선 많은 선진들의 가르침을 지역모임을 통해 배우고, 이렇게 해서 그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능력있게 전달할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강단에 서서 주님의 말씀을 전파하고 세상에서 복음을 증겋거하고 이런 일꾼이 될 것인가? 세상에서는 학문을 통해서 합니다. 시험을 보고 공부시키고, 그 다음에 합격하고 자격이 있다 생각하고..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하지 않고 성령께서 그를 부르셔서, 그가 말씀앞에 서고 기도하고 그래서 성령께서 일러주시는 말씀으로 전하고 있는가?
그 다음 두번째로 넘어가겠습니다. 성령충만이 사용되고 있는 곳입니다.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한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행6:5).
이게 뭐냐면, 모임안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우주적인 교회는 흠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역모임은 연약이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최초의 지역교회입니다. 성령께서 임하셨고 사도들이 인도자고, 굉장한 교회지요. 기적도 있었고 서로 물질을 나눠주는 굉장한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안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똑같은 과부인데, 누구는 헬라파냐, 헬라파는 외국에서 살다가 들어왔느냐, 히브리파는 거기서 계속, 본토에서 살던 사람이냐, 이것을 가지고 지역적인 것을 가지고 싸웠습니다. 인종문제, 이런 것들이 문제가 된 것이죠. 지역모임 안에서 사람들 사이에 있는 차별, 누구는 헬라파다. 이 땅에 속한 것 때문에 뭔가 차별대우를 받고 있다고 느낄때에 이것을 누가 해결하나요? 성령으로 해결하는 것입니다. 성령충만한 사람이, 땅에 속하고 사람에게 속한 것들을 능히 해결하고 하나님 앞에서 이와같은 것들이 무엇이 문제가 되느냐? 이렇게 해결할수 있는거죠.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행7:55).
스데반은 최초의 순교자 입니다. 굉장히 영광스러운 거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데반이 당하고 있는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가 복음을 전했는데 한명도 구원받지 않고 오히려 그가 죽습니다. 저희들의 경우에 복음을 증거하고 주님 앞에서 열심히 수고했지만 열매가 없을 수 있습니다. 열매가 없는 정도가 아니고 주님일을 했기 때문에 오히려 죽어야 합니다. 이것이 사람으로서는 이 상황을 통과해가야 한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어떤 어려움이 오면 이렇게 되면 좋습니다. 주님께 순종 했더니 주님께서 현실적으로 축복해 주셨다. 이러면 좋지요. 주님께 순종했더니 이렇게 해주셨다. 감사하지요. 그런데 처음에 저희들이 그런일도 많이 경험하지요. 그런데 우리가 두번째로 이런일도 경험 합니다. 주님께 순종했더니 억울해 졌다. 주님 말씀대로 했더니 손해가 났다. 이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때, 어떻게 이것을 이겨낼수 있는가? 성령으로 이겨냅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그때 주님의 영광을 보는 것입니다. 하늘이 열리고 내가알고 있고 나를 이끌어가시는 주님의 영광을 봅니다. 그분이 하나님의 우편에 계십니다. 그분이 자기를 영접하기 위해서 일어나 계십니다. 이것이 그로 하여금.. 굉장히 말도 안되는 상황이죠. 주님을 증거했는데 그들이 구원받기를 원해서 주님을 증거했는데, 믿기는 커녕, 마음이 강팍해 져서 돌을들어 그를 죽이는 상황에서 그가 두려워하거나 억울해 하거나, 혹은 다른감정을 갖지 않고 이들을 향하여 기도하고 그리고 주님앞에 흥쾌히 갈수 있는 이 놀라운 일들은 성령 충만한 사람이 걷는 길입니다.
"저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 권하니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행11:23-24).
안디옥은 이방인 지역입니다. 이방지역에 이방인이들이 복음을듣고 구원을 받아서 교회로 모이고 있습니다. 그것을 예루살렘 교회 바나바가 가서 봅니다. 그런데 저희들은 사도행전을 통해 잘 아는데요. 유대인과 이방인라는 것이 우리는 잘 실감이 안나는데, 유대인과 이방인이라는 것에는 어마어마한 간격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5장에 보면 구원받은 유대인들인데 이방인들도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해서 논쟁이 붇고 보통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우리 생각과 달리 보통 논쟁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교회에 속한 유대인인 바나바가 자기의 어떤 민족적 편견이 있을텐데 안디옥에 있는 이방인들이 구원받은 것을 보고 기뻐합니다. 이것이 아까 사도행전 6장에서도 나왔었죠. 헬라파니, 히브리파니, 하는 인간적인 기준들, 이 땅에 속하고 사람에게 속하고 사회에 속한, 이런 기준들을 확 뛰어넘는, 그래서 보고 기뻐합니다. 그가 안디옥 교회에 "여러분들은 예루살렘 교회를 따라가야 합니다." 이렇게 안합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하는것을 보고 배워야 합니다." 이렇게 안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이들에게 임했다. 그가 기뻐하고 모든 사람에게 이렇게 권합니다. "주님께 붙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붙드십시요." 이렇게 합니다. "예루살렘을 붙드십시요." 이렇게 안합니다. 이런 것들이 성령 충만한 사람입니다. 이것은 잘못하면, 성령충만하지 않으면 전부 인간적으로 흘러가버릴수 있는 것들이죠.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가로되 모든 궤계와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행13:9-10).
여기보면 사도바울이 책망 합니다. 8절에 보시면 박수 엘루마가 총독 옆에 있는데 총독으로 못믿게 하려고 하는 사람이죠. 이것을 책망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담대하게 책망할때 성령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징계할때, 그리고 책망할때 성령의 능력이 필요 합니다. 성령의 능력 없이는 이것이 책망이 안됩니다. 논쟁이 되어버리고 반발을 불러일으키고 사태가 복잡하게 들어가 버립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책망 합니다.
"이에 총독이 그렇게 된 것을 보고 믿으며 주의 가르치심을 기이히 여기니라"(행13:12).
이와같은 것들을 만들어 낼수 있는게 사도바울의 힘이 아니고 그 말씀이 아니고 성령께서 이 말씀을 사용하셔서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저희들이 수양회때 살펴본 어떤 경우에 성령충만이 사용되었는가, 하는 것들을 본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충만하려면 어떻게하여야 하는가 하는 쪽으로 오늘은 말씀을 살펴보고요. 사도행전 2장을 다시한번 보겠습니다. 사도행전 2장은 오순절에 성령이 임했을때 예루살렘에 있었던 백이십명의 성도들에게 성령이 임하지요.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2:4).
백이십명의 성도들이 성령을 받고 최초의 교회가 형성되는 거죠.
"베드로가 열 한 사도와 같이 서서 소리를 높여 가로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행2:14).
성령충만한 사람이 첫번째의 일이 뭐냐면, 첫번째 말씀을 전합니다. "에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것을, 영적인 것을 말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갑자기 방언을 하니까, 이들이 아침부터 술취했나 하는 것이죠. 이 영적을 현상을 베드로가 성경을 근거로 설명해 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령에 충만하려면 첫번째 말씀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그 말씀을 지금 어떻게 이루어가고 계신지에 대해서 감각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령 충만한 조건들 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계획하신 것중에 무엇을 성취하고 계신가? 그래서 그것을 사람들은 다 알지 못하고 이상하게 여기는 대목들을 이해할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령충만하기 위한 조건들이고요.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행4:31).
베드로와 요한이 핍박을 받다가 풀려나서 지역모임으로 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합니다. 두개 입니다. 성령충만 앞뒤로 두개가 있습니다. 기도와 말씀이 있습니다. 말씀을 잘 이해하고 먹고 있고 그리고 기도하는 사람들, 이사람들이 성령 충만 합니다. 그래서 지금 이 시대에 하나님이 무슨일을 하시는지 이해한 사람, 그리고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게 자신을 가꿔가는 사람, 그 다음에 사도행전 6장 3절을 보겠습니다.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행6:3).
어떤 사람이 성령 충만하냐 하면 모임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성령충만한 사람이 모임을 섬깁니다. 그렇지않으면 문제가 일어나죠. 모임을 섬기려고 할때 성령이 충만할수 있습니다. 하나만 더 보겠습니다.
"저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 권하니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행11:23-24).
여기도 모임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자기가 속한 모임뿐만 아니라 다른지역에까지가서 교회를 섬기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교회에 관하여 관심이 있는 사람이 성령이 충만한 것입니다. 성령 충만에 대해서 이 정도 하겠습니다.
그 다음 성령의 근심에 대해서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엡4:30)
우리안에 성령님이 계신데, 성령님은 인격체이십니다. 하나님이시면서 인격체이십니다. 감정이 있으시죠. 그래서 성령이 우리 안에서 근심하십니다. 근심하시는 이유, 딱 하나죠. 우리가 죄를 범할때 입니다.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것, 하나님을 슬프게 하는것,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이 싫어하는 행동을 할때 입니다. 이것에 대해서 좀더 구체적으로 가 보겠습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엡4:26).
분을 내는 것입니다. 화를 내는 것, 죄라는 것이 물론, 28절에 도적질하는 것이 나와 있습니다. 이것은 도덕적으로 잘못된 거죠. 도덕적인 범죄, 이것이 당연히 성령을 근심 시키죠. 그런데 아마 저희들 생각에 이런 도적질은 안할거 같아요. 왠만하면.. 그런데 도적질은 안해도 26절, 분은 내는 것, 이것을 조심해야지요.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4:29).
29절을 보면 말입니다. 우리가 말 하지요. 가능하면 말이 은혜를 끼치고 세우고, 헐고 비판하는 말을 하지 말고, 이게 사실이 아닐찌라도 가능하면 세우고 다른 사람들을 위하고 해야 합니다. 이런말을 하지 못하는것, 그냥 자기 느낀대로 뱉어버린 말, 이런 것들이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엡4:31).
그래서 첫번째, 성령이 근심하는 것은 죄를 범할때에 성령께서 근심하십니다. 죄가, 그리스도인이 무슨 큰 죄를 범한다기 보다는, 그러면 안되지만, 도덕적으로 누구나 봐도 죄인것도 문제지만, 그것보다는 오히려 일상적인 경우에 누구를 싫어하고 미워하고 그래서 약간 비판적인 말을 할때, 이런 것들을 할때 성령께서 슬퍼 하신다. 항상 성경 원칙은 부정적인 것을 하지 말라는 것에서 그치면 안됩니다. 항상 긍정적인 것을 하라 쪽으로 와야 합니다. 그게 32절 입니다.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4:32).
이 적극적인 것이 있어야 합니다. 성령을 근심시키지 않으려면, 이 부정적인 것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고 긍정적인 것, 적극적인 것으로 꼭 채워 넣어야 합니다. 부정적인 말을 하지 않을뿐 아니라 긍정적인 말을 하고 오히려 세우는 말을 열심히 하고 그 다음에 화를 내는 대신, 칭찬해 주고 세워주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 하고 이쪽으로 갈때, 성령이 근심하지 않는다. 이것이 믿는 자들에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성령을 소멸시키지 말라 보겠습니다.
"성령을 소멸치 말며"(살전5:19).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서 항상 인도 하십니다. 우리에게 계속 주님의 뜻을 행하도록, 예를 들면 집회를 위해서는.. 그렇게하지 않습니다만, 예배때에 형제가 합당한 찬송을 골라라. 형제가 감사를 해라. 또 모임에서 어떤일을 보면 성령님께서 내 마음속에 '이것은 네가 좀 해라' 청소를 한다든지, 성령은 반드시 우리 안에서 모임을 세우기 위해서 혹은 다른사람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뭔가를 우리에게 자꾸 자극을 줍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것을 안해 버립니다. "에잇, 이걸 했다가.. 오히려 가만히 있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은데" "이건 내가 할 일이 아닌거 같아" 물론 그런일도 있지요. 하지만 성령께서 내 마음에 감동을 주셔서 무엇인가를, 모임과 다른 사람을 세우기를 원하시는데 그것을 내가 안할때에 성령이 소멸됩니다. 그래서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것은 하나님이 하라는 것을 안할때 입니다. 해서는 안되는 것을 하는것, 그것이 성령이 근심하는 거고요. 그 다음에 성령 소멸은 하나님이 하라는 것을 안할때 입니다. 하나님께서 틀림없이 이것을 해라. 하셨는데 그런데 그것을 안할때 성령이 소멸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소멸에 대해서는 살펴보겠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9절에 되어 있고요. 인근 구절들을 보겠습니다. 20절 "예언을 멸시치 말고"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이죠. 하나님의 말씀이 들릴때에 작은 거라도, 순종하는것. 이것이 성령을 소멸치 않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21절, "범사에 헤아려 좋은것을 취하고" 여러가지 것이 있는데 그 중에 좋겠다는 것을 순종하고, 이 20절 21절을 하는 것이 성령을 소멸치 않는 행동들 입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5:16).
여기서도 저희들이 이 구절을 다룰때에 늘 말하는 것이죠. 순서가 성령을 좇아 행하면 육신적인 욕심을 이루지 않습니다. 거꾸로 하면 안됩니다. 육신적인 욕심을 이루지 않으려고 애를써서 그 다음에 성령을 좇아 행하는것이 아닙니다. 순서가 성령을 좇아 행하면 육체적인 욕심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아까 성령에 대해서.. 믿는자 안에 성령이 계시고 우리는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성령은 그냥 계시면 안되고 성령이 나를 통제해야 합니다. 그럼 어떻게 성령 충만할 것이냐? 그리고 성령 충만은 어떻게 나타나느냐 하는것을 사도행전에서 쭉 살펴본 것입니다. 그 다음에 부정적인 거죠. 근심하거나 소멸시켜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긍정적인 것은 성령을 좇아 행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가시는 걸음을 같이 걷는 겁니다. 왜 이렇게 하느냐? 하는 질문이 있을수 있습니다. 이 부분은, 성경은 우리가 살게되는 모든 상황을 설명해 놓고 그 상황 속에서 이 길을 가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하면 책이 너무 많아집니다. 만약 결혼을 앞둔 사람은 이렇게 하라, 사업을 앞둔 사람은 이렇게 하라, 그런 것들을 다 적어놓을수 없습니다. 세상은 변화되고 시대마다 달라지고, 그래서 다 적어 놓을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주신것이 성령님입니다. 성령님의 인도를 받으라. 어느 시대에 어떤 상황에 있던지간에 성령을 모신 사람은, 성령과 함께 가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나를 어떻게 인도하시냐 하는 것입니다.
첫번째 성령님은 반드시 말씀대로 인도하십니다. 말씀에 두독질하지 말라 하셨는데, "이번 한번만 해라. 살짝 한번만 하면 그 후로 아주 좋아지겠다." 그것은 안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말씀과 어긋나는 것을 성령이 인도했다고 하면 안됩니다. 그래서 말씀 안에서 움직입니다. 그 다음에 뿐만 아니라 우리가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방법이 있습니다. 저희들이 이 부분을 어디서 다뤘느냐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방법" 이라고 해서 여러번 나옵니다. 내가 누구랑 결혼할지, 어느 대학교를 갈지, 어떤 직장을 잡아야 할지, 또 어디로 이사를 해야 할지, 이런것들을 결정합니다. 분명하지요. "이것은 위치는 좋은데 비싸고.." 이런것이 있을때에 어떻게 할 것이냐? 우리 지혜를 쓰지 않고 주님 뜻을 순종하고 싶은거죠. 그럴때 성령을 좇아 행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일단 말씀 안에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두번째 입니다.
우리가 늘 쓰는 방법이 먼저 된 영적인 사람과 상담하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모임 안에서 주님의 인도하심을 쭉 받아온 사람들, 그분들이 걸었던 여러 경험들.. 그래서 상담을 해 보는 것입니다.
세번째, 기도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주님 앞에서 말씀을 놓고 내 마음이 순수한지, 내가 이해관계에 휘둘리지 않고, 정말로 순전하게 주님을 따르고 싶은지, 그랬을때 주님께서 내 마음속에 어떤 마음을 주시는지, 그래서 말씀을 통해 인도하는가, 그 다음에 기도할때 평안이 있는가 본다. 그 다음에 상담을 한다. 그 다음에 주님께서 상황을 어떻게 이끌어가시는지를 본다. 이런 것들을 통해서 주님의 뜻을 분별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령을 좇아 행한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네가지를 하는 것입니다. 성령님과 함께 충만해야 하고 성령의 근심, 소멸을 피하고, 그 다음에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다.
그 다음에 교회와 관련해서는 성령께서 예배를 주관하시죠. 신령과 진정으로 진리로 인도하게 하시고 그 다음에 성령께서 교회의 모든 사람들이 영적인 사람들이 되어서 이 땅 가운데서 영적인 길을 걷도록 하시고, 그 다음에 은사를 주시고, 이 부분은 잠깐만 다른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종말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손할례당을 삼가라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빌3:1-3).
사도바울은 여기 2절에서 세가지 사람을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개, 행악자, 손할례당" 손은 사람의 손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요. 훼손 시켰다는 것입니다. 손할례당은 포경수술을 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피부를 잘라내는 할례를 행한 사람을 삼가하라 입니다. 세개 입니다.
그 다음 3절은 "성령으로 봉사하고" "주님을 자랑하고 육체를신뢰하지 않는사람" 이 둘을 비교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한번 성경을 이해해 볼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크게 두가지를 말한다고 하면, 하나는 복음을 전합니다. 복음서는 이 복음의 근원이신 주님을 제시 합니다. 주님이 어떤분인가를 통해서 주님을 믿는자가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되고 복음서는 복음의 내용이신 주님을 설명하고요. 그 다음 사도행전은 이 복음이 어떻게 확산되어 갔는가, 그 다음 서신서는 이 복음의 특징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계시록은 복음의 영광입니다. 복음의 결과 입니다. 이것이 신약성경이 말하는 내용입니다. 신약은 주님과 그리고 주님을 믿는 것과 또 주님을 믿을때에 일어나는 구원과 이런것들을 쭉 이야기 합니다.
이것이 주제의 하나라면, 두번째 주제는 성경은 그렇게 믿는 사람과 믿지 않은 사람을 구분해 냅니다. 둘을 구분합니다. 누가 진짜인가, 누구는 가짜인가?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시죠. 마태복음에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그때 어떤 사람들이 주님께 와가지고 "제가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좇아내고 기적을 행했습니다." 했을때에 주님이 이렇게 말하지요. "나는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그래서 복음을 증거하고 그 복음을 정말로 받아들인 하나님의 자녀와 겉으로는 하나님의 자녀 같은데 아닌 사람들을 구분해 냅니다. 이것이 성경의 중요한 두번째 주제 입니다. 주님께서 당시 바리새인들, 대제사장, 서기관들, 외모로 보자면, 이분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의 일꾼들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책망 합니다. "이 독사의 자식들아" 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이것을 구분해 내는 작업을 합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확증하라." 항상 두가지 입니다. 주님을 제시하고, 정말로 주님의 자녀인 사람과 아닌사람, 이것이 애매합니다. 그래서 이 둘을 구분해 내는 방법들을, 구분해내는 원칙들, 특징들을 제시 합니다. 빌립보서 3장 2-3절이 그렇습니다. 2절이 아닌 사람, 특징 세가지 입니다. "개, 행악자, 손할례당" 입니다.
진짜의 특징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다." 이것이 진짜의 세가지 특징입니다.
여기서 이 구절을 보는것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는 사람이 진짜이죠. "개들을 삼가고" 성경에서 개라고 하는 단어는 두가지가 있습니다. 우리도 그러지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보신탕 좀 먹었더니.. 우리는 사실 개를 식용으로 키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서양사람들이 이것을 애완용을 잡아먹는다고 오해해서 "세상에 그럴수 있느냐? 자기가 귀여어하고 예뻐하다가 배고프다고 잡아먹는다." 라고 막 뭐라고 그러는데 그것은 오해하는 거죠.
개가 두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성경도 두가지 종류를 말합니다. 이 개는 애완용 개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키우는 개가 아닙니다. 이 개는 집을 나가서, 들 고양이처럼 쓰레기 통을 뒤지고 병을 옮기고 하는 개들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방인을 개라고 불렀습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적이 있죠. 수로보니게 여인이 자기 딸이 흉악한 귀신들렸을때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난 이스라엘의 양 외에는 보냄받지 않았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에게 줄수 없다." 굉장한 말을 한거지요. 그런데 이 수로보니게 여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개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을 먹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그 여자의 믿음을 칭찬하셨지요. 하여간, 이방인들입니다. 하나님도 모르고 하나님의 법도 모르고 그래서 부정하고 죄인이고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개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사도바울이 "개들을 조심하라." 라고 했습니다. 이 개는 무엇이냐? 이 개는 유대인들입니다.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하면 뒤 쫓아가서 사도바울이 가짜라고 하고 그리고 율법을 집어넣고, 은혜로 구원 받는데, 뒤쫓아 다니면서 율법을 다시 지켜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 사람들이 개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개는 종교인들'입니다. 자기 행위로 의롭다함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 개 입니다. "나는 율법을 지켜서 의롭다." 라고하는 사람들을, 특히 그와같은 종교인들을 개라고 부르고 그리고 사도바울은 "이 사람들을 조심해야 한다."고 합니다. 가장 문제가 되는것이 항상,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도 불신자들이 아닙니다. 유대인 입니다. 그 중에서도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두번째, "행악하는 자"입니다. 행악하는자는 죄를 짓는 자입니다. 행악하는 자는 이렇게 분류해 보겠습니다. 행악이니까, 해서는 안되는 행동입니다. 죄악된 행동을 나쁜 동기로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를들면 도둑질이라는 나쁜 행동을, 다른사람을 해치고 자기의 배를 불리기 위해서 행하는 사람을 행악자라고 합니다. 행동도 악하고 동기도 악합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행악은 이것이었습니다. 정말 나쁜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좋은 행동을 나쁜 동기로 행하는 사람이 행악자 입니다. 예를들면, 하나님을 위해서 교회를 세웁니다. 겉으로보면 굉장히 좋은 행동이죠. 그런데 그것을 자기 의를 삼기 위해서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이 행악자 입니다. 조금 예를 들자면 우리 나라에 있는 어떤 신부가 의대를 공부하고 어느나라에 가서 가난하고 병든 사람, 내전으로 상처 받은 사람을 위해서 병원을 세웁니다. 이분이 신부 입니다. 카톨릭 신부입니다. 그런데 어느곳에 가서 선한 행동을 합니다. 그리고 뭘 안전하냐하면 신부인데도 불구하고 성경을 안 전합니다. 예수님을 말 안합니다. 그리고 선한 행동을 합니다. 학교를 세우고 병원을 세웁니다. 교회는 안 세웁니다. 이것이 그들의 정책입니다. 그래서 겉으로 보면 대단히 선합니다. 그들을 누가 비난하겠습니까? 가난한 사람들, 병든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인데요. 누가 그들을 비난합니까? 비난하면 나쁜 사람이 되잖아요? 저희들이 비난합니다. "그것은 신부가 할 일이 아니다. 신부는 결국 주님을 전해야 한다. 그런데 성당을 안 세운다." 테레사 수녀, 이런분들이 그렇습니다. 이런 분들이 인도에 있는 나환자 촌에 가서.. 정말로 그 행동을 보면 부끄러워서 비난할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구원의 확신이 없습니다. 그래서 선한일을 자기 의를 세우기 위해서 하는 사람, 이것이 행악자들입니다. 가룟유다도 그렇지요. "이것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었으면 좋았을 것을" 그런데 가룟유다의 의도는 무엇이죠? 그거 팔아서 주님께 헌금하면 자기가 빼다 쓰는것입니다. 선한 행동을 이기적인 동기를 숨긴 채,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행악자들입니다. 사도바울의 당시에 이와같은 사람들이 득실득실 했습니다.
그 다음에 손 할례당입니다. 할례는 창세기 17장에서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받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창세기 16장에서 아브라함이 하갈을 취해서 이스마엘을 낳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이 낳은 아들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행위로 나을 수 있는 아들 말고, 아브라함은 자식 못낳습니다. 그가 나이가 100세나 되어 이제 남자 구실을 못합니다. 그리고 사라도 마찬가지죠. 사라는 불임입니다. 그래서 출산이 불가능한 여자 입니다. 더군다나 나이가 들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둘다, 육체적으로는 자식을 생산할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줍니다. 그러면 이 아이는 그들이 만든 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약속하셔서 낳은 아이가 이삭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스마엘을 낳았을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제부터 네 후손들은 다 남자의 생식기의 표피를 짤라 버려라." 이것은 겉으로는 할례인데요. 표피를 자르는 건데요. 상징적으로는 거세하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못 낳는다. 너의 인간적인 능력으로는 낳을수 없는 것을 내가 준다." 그래서 할례는 거세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우리는 만들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셨기에 생긴 아이 입니다." 이렇게 고백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외적인 증거가 있습니다. 외적으로는 할례를 받았어요. 그러나 내적으로는 아닙니다. 자기의 행위를, 자기의 선함을 하나님 앞에 내미는 사람입니다.
"개, 행악자, 손할례당" 이들이 똑같은 사람입니다. 종교인들이고 자신의 선함과, 인간의 선함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복음의 반대자들입니다.
그 다음에 세번째 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합니다. 봉사라고 하는 이 단어는 두가지 의미를 갖습니다. 첫번째는 예배드리는 단어 입니다. 예배를 포함하는 단어 입니다. 예배드릴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합니다. 이것을 봉사라고 하는데요. 예배와 섬김이 성령으로 이루어진 사람, 내 안에서 성령이 충만하여서 내가 성령을 근심 시키지도, 소멸시키지도 않을때, 성령이 충만하시고 내가 성령과 함께 동행하면서 예배드리고 섬기는 사람, 이 사람이 진짜다.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주님만 자랑 합니다. 자기가 하나님 앞에 내세울것이 없지요. 주님만 사랑 합니다. 그래서 그런분이 있지요. 종이 밭에 갔다와서 일하고 오면 종에게 "네가 수고했으니 와서 밥 먹어라 하는 사람이 누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종이니 당연히 내 시중을 들고 내 밥 먹는것 다 시중을 들고 그 다음에 네 밥을 먹으라." 이렇게 해야 하는 거죠. 그리고 종이 밭에가서 일하고 와서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무익한 종이라 마땅히 할 일을 하였을 뿐이라." 입니다.
그것을 자기 공로로 세웁니다. 이렇게하면 안맞는거죠.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한다." 육체를 신뢰하지 않습니다. 외모를 보거나, 사람을 믿거나 하지 않고 오직 주님만 의뢰하는 이런 사람이 구원받은 사람의 대표적인 예 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배드릴때에 내 마음 속에서 정말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터져 나오고 있는가?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에 대한 감사가 내 마음속에서 생겨 나고 있는가? 이것이 성령으로 예배드리는 사람 입니다. 그 다음에 어떤일을 할때도 주님이 나에게 이와같은 마음을 감동하셨다. 그래서 그 일을 하고, 그와같이 한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은 주님이 하셨습니다. 제가 한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자랑하지 못합니다. 다 함께 주님께 영광을 올리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물론 저희들이 연약이 있어서 가끔 육체를 신뢰할때도 있고 자기에게 공로를 돌리고자 하는 마음이 들때도 있지만 다시 주님앞에 서서 객관적으로 말씀을 따라 볼때, 이와같은 마음을 품고 주님앞에 나아가는 사람, 이런 사람이 영적인 사람입니다. 그런사람이 될때에 모임에서 예배가 합당하게 드려지고 모임의 성도들이 영적인 마음을 품게되고 그래서 모임 안에서 은사가 사용되거나 또, 은사를 사용하는 원칙을, 말씀을 따르게 되고 이와같은 원리들이 이어지는 거죠.
주님께서 계속 저희들에게 성령의 인도함을 받을때, 교회의 주인이 주님이심을, 사람이 아니고 제도도 아니고, 주님이 교회의 주인이심을 나타낼수 있는 유일한 원리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이다. 이것이, 성령의 인도라는 것이 애매하지 않고 어떻게 할때에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건가, 성령은 어떻게 역사하시는 것인가 하는 것을 저희들이 계속 말씀을 통해 보고 그 다음에 실제 모임 생활에서 경험하고 입증해 내고 이렇게 하는것이 저희들의 책임이 되겠습니다. 주님께서 저희를 도우셔서 계속적으로 이와같은 면에 주님을 따라갈수 있게 되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