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이레 2022. 11. 10. 18:14

< 디모데후서 1장 > 히긴스 형제님

다시 한번 여러분과 함께하게 되서 큰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제가 솔직히 말하자면 여러분 모두를 다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4년 전에 여러분이 보여주신 큰 친절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대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찌어다 나의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 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 그러므로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저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반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 이를 인하여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이 일을 네가 아나니 그 중에 부겔로와 허모게네가 있느니라 원컨대 주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옵소서 저가 나를 자주 유쾌케 하고 나의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 아니하여 로마에 있을 때에 나를 부지런히 찾아 만났느니라 (원컨대 주께서 저로 하여금 그날에 주의 긍휼을 얻게 하여 주옵소서) 또 저가 에베소에서 얼마큼 나를 섬긴 것을 네가 잘 아느니라"(딤후 1:1-18).

하나님과 이와같이 공적으로 읽은 말씀에 축복해 주실것을 믿습니다. 이제 사흘간 우리는 디모데후서 1장부터 4장까지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각 장의 상세한 부분들에 대해서 교제를 나눠보겠습니다.
이제 먼저 사도바울의 서신서의 전체적인 개관을 먼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사도바울은 그의 선구자적인 복음 전도의 일을 하면서 여러가지 일들을 하게 됩니다. 그것들이 사도행전에 잘 나와 있습니다. 그와같은 과정 중에 사도바울이 보낸 서신이 이제 로마서, 갈라디아서, 고린도 전후서, 그리고 데살로니가 전후서가 되겠습니다. 그 서신서에서는 주로 복음의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모여야 하는지도 또한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데살로니가에 보낸 서신에서는 우리 주님께서 오실 그 영광스러운 날을 또한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사도행전이 끝나감에 따라서 사도바울이 로마에 있는 한 가택에 연금된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그는 네개의 옥중 서신을 보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옥중 서신이라고 부릅니다. 에베소서와 빌립보서, 그리고 골로새서와 빌레몬서가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그 네가지를 함께 상고해 본다면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네가지 다른 각도에서 우리가 찾아보게 됩니다. 골로새서에서는 교회의 머리로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에베소서에서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가지고 있는 축복들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빌립보서에서는 지역교회에서 어떻게 기능해야 하는지,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빌레몬서에서는 그리스도인의 경건함, 특별히 형제들 가운데서 어떻게 행해야 할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도바울이 목회서신을 보낸것이 있습니다. 디모데전서에서는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해야 될것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디도서에서는 하나님의 교훈을 선전하는 것을, 아름답게 하는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디모데후서에서는 이제 하나님의 사람이 맞닥뜨리는 그런 상황 가운데서 어떻게 균형을 잡고 앞으로 전진할 것인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디모데전서에서는 그의 교훈을 그가 보존하고 높일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디모데전서에서 지역모임에 대해서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말한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 터로서 이 진리를 보존하게 됩니다. 그리고 기둥으로서 그 진리를 지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리를 보존하는데 있어서 가장 좋은 방법은 그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디도서에서는 그 진리를 지키고 증거하는 것보다는 그 진리를 행하는 것을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리고 디모데후서에서는 그 교훈을 전파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디모데후서는 사도바울의 마지막 서신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위한 그 간증이 계속적으로 지속되는 것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디모데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그는 이제 앞으로 장래 세대에서 계속적으로 하나님을 위한 간증이 지속될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때 당시에 사도바울은 다시 감옥에 갇힌 자가 됩니다. 그것은 처음과 다르게 집에 가택연금이 된 것이 아니라 이제 감옥에 갇혀있는 것입니다. 그는 이제 목자와 같이 디모데를 돌보는 목회서신을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아버지로서 보내는 편지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으로서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편지를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굉장히 개인적인 편지입니다. 27번이나 거쳐서 그는 "나 바울은"이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옥중 서신입니다. 그는 형을 앞두고 있는 죄수로써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별하는 서신입니다. 그는 마지막 작별의 말을 남기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여러 부분에 이와같이 마지막 말을 남긴 부분을 찾아보게 됩니다. 창세기 49장에 보면 야곱이 자신의 자손들을 모아놓고 마지막 말을 남기게 됩니다. 그리고 신명기에서 모세가 그와같이 마지막 말을 남기게 됩니다. 그리고 여호수아도 그가 죽기 전에 마지막 말을 남기게 됩니다. 그리고 다윗의 마지막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주 예수께서 그분께서 다락방에서 마지막으로 남기신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에 사도바울의 마지막 말을 보고있는 것입니다. 참 믿음의 가정에서 어떤 분이 소천하기 전에 남기는 마지막 말은 그 가정에 있어서 굉장히 소중한 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도바울이 남긴 이 마지막 말은 굉장히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이 서신서는 예언적인 성격이 있습니다. 이것은 장차 어떤일이 일어날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매우 실제적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모임에서 우리가 어떻게 실행하고 행할지를 말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이 이 편지를 보내게 한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는 감옥에 있고 그의 마지막이 가까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한때는 신앙고백을 하였지만 지금은 다르게 행동하고 있음을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에 이제 악한 자들, 거짓 교리들이 슬금슬금 기어들어 오고 있는것을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디모데에게 이와같은 모든 것들에 맞서 싸울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계속해서 디모데를 훈련하였고 디모데를 격려하면서 이것을 행할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참으로 이와같은 것을 볼 때에 우리는 나이드신 분들이 젊은이들에게 계속적으로 멘토로서 그들을 양육하고 미래를 위해서 준비시켜야 된다는 것을 교훈받게 됩니다. 그것이 여러분이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서 나이들어가는 것이 무엇인지를 그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78세이지만 여전히 제가 젊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가 할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디모데를 격려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번에 거쳐서 그는 '부끄러워 말라'고 하고 있습니다. 8절에 "부끄러워 말고" 그리고 12절에 "부끄러워 하지 아니함은" 그리고 오네시모로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여" 그래서 세번에 거쳐서 그는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는 용기를 디모데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이 영적인 면에서 부끄러워 하지 아니하는 것이 필요한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이 용기를 격려하기 위해서 이 편지를 썼고 또한 헌신을 격려하기 위해서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몇가지 교리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선 첫번째로 하나님의 진리에 있어서 충성될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2장에서는 하나님을 위한 수고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3장에서는 하나님의 진리를 위해서, 그리고 4장에서는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는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면에서 볼때에 1장은 '부끄럼없는 용기'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2장에서는 (..?..) 그리고 3장에서는 '계속적으로 견고하게 행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4장에서는 '하나님의 진리에 합당한 계속적인 삶'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가지 측면에서 디모데가 가지고 있어야 될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1장에서 또 이렇게 말해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사람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무언가 디모데에게 주어져 있고 이제 디모데는 그것을 충성스럽게 지켜내야 됩니다. 이 자리에 있는 우리 모두에게도 하나님께서는 의탁하신 것이 있습니다. 단지 해외에 나가서 말씀을 전하는 사람에게만 주어져 있는 임무가 아닙니다. 이 자리에 있는 모든 분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지키는데 책임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2장에서는 하나님의 사람과 그의 시험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여러가지 환경과 어려움 가운데서 시험을 받게 됩니다. 우리 모두도 이와같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여러가지 시험을 받게 됩니다. 3장에서는 하나님의 사람과 그가 가진 보물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가진 성경책입니다. 4장에서는 하나님의 사람과 그의 승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에서 불의한 일을 겪고 있지만 결국에 그는 승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4장에서 이 사도바울이 또한 그리스도를 그림으로 보여주고 있는것을 보게 됩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무시를 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불의하게 고소를 당합니다. 그리고 오해를 받습니다. 그는 아주 심한 핍박을 받게 됩니다. 모든 사람에게 버림을 받게 됩니다. 불의한 재판관에게 이제 잘못된 판결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의 삶의 끝은 매우매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있습니다. 여러분이 빌립보서 3장을 보게 될 때에 사도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를 닮기를 매우 바라고 있는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함과 그 죽음에 대해서 더 알기를 원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디모데후서 4장에 와서 그의 기도가 응답된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밤은 이 디모데후서 1장을 보고자 합니다. 세번에 거쳐서 사도바울은 하나님을 위한 간증이 계속되어야 함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선 첫번째로는 모임으로서 하나님의 진리를 계속적으로 증거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번째로는 가족 안의 간증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각 개인이 하나님의 진리를 보존하고 증거하는 책임을 또한 말하고 있습니다. 가족에 있어서는, 그리고 개인에 있어서, 그리고 모임에 있어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장래에 이 하나님을 위한 간증이 계속되기 위해서는 가족과 모임과 개인이 모두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우선 첫번째로 모임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딤후 1:14).

모임은 이 하나님의 진리를 지키고 있어야 됩니다. 모임은 하나님의 진리 위에 서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사교적인 모임을 갖는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단지 사람들이 좋아서 다른 사람들과 잘 맞아서 모이고 있는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바로 하나님의 진리로 말미암아 모이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아주 중요한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교리에 대해서 읽게 됩니다. 그리고 성도들에게 단번에 주어진 믿음이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하나님의 진리라는 표현으로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교회의 진리라는 표현은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진리라고 언급이 될때 항상 단수로 언급이 됩니다. 그것은 그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모든것이 하나로 조화롭게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진리에서 한개만 취해서 "이것이 내가 좋아하는 진리다." 이렇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단 하나의 진리를 취해서 그것을 바꿔버린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진리 모든것을 바꿔버리는 것이 됩니다. 여러분이 한가지 진리를 손상시킨다면 모든 진리를 손상시키는 위험에 처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엄중하게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모든 진리는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향한 것입니다. 우리가 붇들고 있는 모든 진리는 그리스도에게로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진리 가운데서 하나를 타협하고 바꿔 버린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인격을 손상 시키고 부인하는 그런 엄중한 죄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첫번째로 이제 권면하고 있는것은 하나님의 진리를 지키고 그 가운데 굳게 서 있는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3절에서도 "지키고"가 있습니다. 여러분에게서 어떤것이라도 뺏기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임의 삶에 있어서 하나님의 진리가 모든것을 주관하고 통제하고 있어야 됩니다. 그것을 주의깊게 듣고 그리고 순종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리라는 것은 그냥 우리 마음속에 보관하고 있는것이 아니며 우리가 편리할때에 그냥 말하는데 사용하는 용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나를 통제하고 내 삶을 주관하게 하셔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에스라'라는 위대한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제사장이며 또한 유능한 학사였습니다. 우리는 에스라서 7장에 그에 대해서 언급된 것을 보게 됩니다. 그는 7장에서 그가 마음을 정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그것을 이스라엘에게 그 율례를 가르치고 지키게 하는데 마음을 정한것을 보게 됩니다. 그 순서를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첫번째로 그는 그것을 알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나서 행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나서 그는 가르칠 준비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먼저 나를 주관하고 그리고나서 가르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서신서에서 사도바울은 계속해서 그 진리를 지킬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장에서는 그 하나님의 진리를 다음 세대에 전달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우리가 받은 이 진리를 다음 세대에 전달해야 되는 책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내일 이 시간에 이것을 보겠지만 디모데후서 2장에서는 네 세대에 거쳐서 그 진리가 전달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섬기는 것은 다음 대에 그 진리를 전달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모임에서 성경읽기를 통해서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모임에서 말씀집회를 통해서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나이많은 성도님이 젊은 성도님들과 개인적으로 대화를 하면서 또한 그 진리가 전달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진리를 계속 지키실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역시도 오는 세대에 그 진리를 전달해야 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임에 있어서 하나님의 진리를 지키고 다루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것임을 우리는 2장에서 보게 됩니다.
저는 디모데후서 1장이 어떻게 시작하고 어떻게 끝나는지를 보게 될 때에 특별히 의미를 얻게 됩니다. 초반부에서 한 가족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으며 또한 끝내면서 또 한 가족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로이스와 유니게를 언급하였고 그리고 디모데를 언급하게 됩니다. 그리고 1장의 마지막에서는 오네시보로와 그의 집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외조모와 어머니가 디모데의 그 인격의 형성에 있어서 굉장한 책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특별히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에 대해서 그 책임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참으로 손자들은 놀라운 존재들입니다. 우리가 늙어감에 있어서 일종의 보상을 하나님께서 해 주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참으로 그들과 함께 그들을 잘 대해주고 그들과 놀아주는 것은 참 놀라운 시간입니다. 그런데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손자, 손녀들에게 굉장히 중요한 영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배워야 되는 교훈들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히브리서에게 아브라함이 이삭과 야곱과 함께 장막에 거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참으로 제가 그것을 정확하게 계산해 말씀드리지 않겠지만 그들은 그렇게 함께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았을때 그는 백세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삭이 에서와 야곱을 낳았을때 육십세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175세에 죽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얼마나 많은 세월을 같이 살았습니까? 15년을 같이 살았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야곱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것입니다. 창세기로 돌아가서 여러분이 한번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에서는 들의 사람이었고 야곱은 장막의 사람이었습니다. 왜 야곱이 장막에 있기를 좋아했을까요? 야곱이 혹시 아브라함과 함께 있는 시간을 좋아해서 그런것은 아닌지 생각한다는 것이 너무 지나친 상상일까요? 무엇이 야곱이 그렇게 영적인 축복을 갈망하게 되었을까요? 물론 그가 잘못된 방법으로 아버지를 속여서 그렇게 하기는 하였지만, 하지만 그는 정말로 그 축복을 원한 사람입니다. 저는 분명히 아브라함이 그와같은 영향을 끼쳤기 때문에 야곱이 그런 선한 소원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이 듭니다. 참으로 야곱이 그 할아버지의 무릎에 앉아있는 장면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참으로 할아버지에게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보신 그 영광의 하나님이 나타나신 것은 어떠했습니까?" 라고 묻는 장면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모리아산에 올라갈때에 그 손을 들었을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 장면에 대해서 말해 주세요."라고 하는 장면을 생각해 보십시요. 참으로 아브라함은 그와같은 손자에게 많은 선한 영향력을 주는 그런 할아버지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요셉이 또한 그이 손자들을 그의 무릎에 앉힌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나오미를 생각하게 됩니다. 룻이 아이들을 낳았을때 사람들은 말하기를 나오미에게 그 아이들을 낳게 하였다고 말합니다. 나오미가 그 아이들을 돌보고 양육했던 것입니다. 이 할머니로서 자기 자신의 손자 손녀들을 하나님을 위해 양육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외조모 로이스, 그가 자신의 손자에게 많은 선한 영향력을 준 것을 보게 됩니다. 참으로 사도바울이 강조하고 있는것은 이 여인들이 믿음을, 그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쳤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거짓이 없는 믿음, 위선이 없는 진실된 믿음이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에 믿음으로 사는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믿음으로 사는것이 단지 돈이 지금 없는데, 돈이 나에게 어떻게 올 것인지, 그런 상황 가운데 사는것을 믿음으로 산다고만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믿음으로 사는것이 선교사나 전심 사역자들이 하는 것이라고만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말하기를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 어머니에 대해서 먼저 생각해 보겠습니다. 여러분이 자녀들을 키울때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러분의 자녀들을 키운다면 여러분은 믿음으로 살고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내일 아침 일어나서 직장에 나가서 이제 여러분의 상사를 위해서 일할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그와같은 말씀의 태도로 일을 한다면 여러분은 믿음으로 살고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학생으로서 정직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행동하고 살고 있다면 여러분은 믿음으로 살고있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산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단지 맹목적인, 그냥 어둠 속으로 뛰어 들어가고 있는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빛 가운데서 한 걸음을 내딛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 믿음이라는 것은 여러분의 매일매일의 순간에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의 원리로 살아가고 있다면 그 순간 여러분은 믿음으로 살고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실제의 믿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네 속에 있는 거짓없는 믿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매일매일의 삶 가운데서 그의 믿음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네 속에 있더니" 그것은 그 믿음이 집에 편안히 있는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이 그 가정에서 일어나는 모든 결정에 있어서 중요한 방향키를 한 것입니다. "그 믿음이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에 있었고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줄을 확신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아이들을 우리 자신이 구원받게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세대를 거쳐서 자녀들이 부모의 믿음을 본받는 것을 볼때에 얼마나 놀라게 됩니까? 우리는 사무엘이라는 구약의 놀라운 기도의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어머니 한나의 기도 가운데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리고 히브리서의 11장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모세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믿음이 그의 부모로부터 시작된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와같이 믿음이 이와같은 형태로 세대를 거쳐서 다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믿음의 삶이 장차오는 세대에서 또 동일하게 나타나게 해야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임이 보존되기 위해서는 가정이 중요한 것입니다. 가정이 잘 지켜져야 됩니다. 제가 그렇다고해서 이 하나님의 모임 가운데 독신인 사람에 대해서 무시하는 말이 아닙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것은 하나님의 교회에서 가정이 많은 축복을 가져다 줄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가정에서의 믿음의 유산이 또한 이 장의 마지막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여기 오네시보로가 있습니다. 저는 이 언급을 보게 될 때에 저 자신에게 여러분 스스로에게 자문하게 됩니다. '나는 내 자녀에게, 그리고 내 손자 손녀에게 어떠한 유산을 남기고 있는가?' 여기에 자신의 가정을 위해서 엄청난 유산을 남긴 한 사람을 보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의 말을 통해서 이 오네시보로가 어떤것을 남겼는지를 볼수 있습니다. "원컨데 주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옵소서"라는 것이 명확하게 그가 어떤 의도로 했는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심판대를 생각하면서 언급했을 수 있습니다. 또 다른 가능성은 이 오네시보로가 지금 구속되서 감금 상태에 있다는 것입니다. 로마 당국에 의해서 그는 지금 감옥에 잡혀있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로마에 잡혀 있을때 오네시보로는 자주 찾아와서 유쾌케 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네시보로가 그와같은 입장에 처해지게 되었을때에 그가 판결을 받을때에 당국으로부터 긍휼을 받기를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오네시보로가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돌봤는지를 보게 됩니다. 자녀들이 다른 사람을 돌보는 것은 부모가 아니면 다른 누구에게 배울 수 없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 모임을 방문하면서 확인하게 되는것이 참으로 이것이 사실이다라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다른 성도들을 잘 접대하는 어머니라면 또 자녀들이 그런 성향을 가지게 됩니다. 참 우리는 성경 말씀을 통해서 아이들을 가르칠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을 통해서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오네시보로는 확신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사도바울을 자주 방문하면서 위험을 감수했던 것입니다. 그는 가정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가 그와같은 행동을 했을때에 자신의 가정에 어떤 위험을 가져다 줄 것인지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을 위해서, 또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서 그러한 위험을 감수하기로 한 것입니다. 우리의 하나님을 위한 삶은 이와같은 희생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에서는 더이상 죄를 위한 제사가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히브리서 13장에 와서 볼 때에 히브리서 기자가 또한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선을 행하는 것을 잊지 말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와같은 희생제사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희생하는 것은 여전히 우리에게 주어져있는 책임인 것입니다. 저는 히브리서 13장의 이 말씀이 참으로 저의 정곡을 찌르는 말씀으로 듣고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하나님을 위해서 섬기고 있을때에 나는 희생하고 있는가? 내가 하나님을 위해 섬길때에 희생하는 것이 하나도 없다면 그것은 가치가 하나도 없다. 우리는 이것에 대해서 올바른 관점을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오늘밤 제가 지금 하고있는 것보다 더 많은 희생을 하고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제 집에 혼자있는 제 아내가 있습니다. 그녀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제가 지금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습니다. 모임의 인도자들의 아내들이 또한 많은 희생을 하고 있습니다. 전도자들의 아내들이 또한 많은 희생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그 부인들이, 그 아내들이 그 남편들보다 더 큰 상급을 받을걸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오네시보로에 대해서 주목해서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열심히, 부지런히 사도바울을 찾아왔습니다. 여러분은 사도바울이 어떠한 감옥에 있었는지를 알아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인터넷에서 그 로마 감옥이 어떠했는지 한번 찾아 보시기 바랍니다. 역사는 그것은 단지 땅속에 파여져 있는 구덩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는 여러 구덩이에서 사도바울이 어디에 있는지를 계속 찾아다녀야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전혀 쉬운일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로 인해서 사도바울은 마치 신선한 공기를 섭취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이 용기를 주는 사역을 하시기를 권면드립니다. 여러분이 마음에 용기가 필요한 사람을 생각하고 그를 돕는다면 참으로 여러분은 합당한 일을 하고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다른 이에게 이와같이 찾아가서 용기를 주는것은 굉장히 필요하고 가치있는 일입니다. 여러분은 요나단이 다윗을 크게 힘있게 하였다는 말씀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디도가 고린도 성도들의 돌이킨 소식을 가져왔을때 그것은 참으로 사도바울을 힘있게 해주는 소식이었습니다. 그리고 디모데도 사도바울을 힘있게 하였습니다. 다른 사람을 힘있게 하기 위해서 그들의 모든 문제의 해답을 알려줘야 된다고 생각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요나단은 단지 다윗에게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예비한 것이 무엇인지를 말했을 뿐입니다. 디도는 고린도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시 돌아왔다는 것을 말해준것 뿐입니다. 단지 다른 사람과 함께 있어주는 것 만으로도 그를 크게 힘있게 할 수 있습니다. 욥은 세 친구가 있었습니다. 참으로 그 세 친구들은 합의해서 우리 같이 만나러 가자고 해서 오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그를 만나서 7일동안 아무말도 하지 않고 앉아만 있게 됩니다. 그리고 여기에 그들이 행한 결론적인 것이 있습니다. 그들이 입을 열자마자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욥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큰 어려움 가운데 있는 성도에게 단지 그들과 함께 있어주기만 하는것도 큰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이 오네시보로는 항상 똑같은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로마에 있을때뿐만 아니라 에베소에서도 그랬습니다. 여기서 이제 다른 이들은 모두 변절한 그런 상황 가운데서도 오네시보로는 그렇게 한 것입니다. 사도바울을 저버린 다른 사람들과 대조적으로 이 오네시보로의 충성됨이 아주 빛나고 있는 것입니다. 참 우리가 삶 가운데서 징계가 있을때에 실망을 하게 됩니다. 이 인생 자체가 많은 실망을 담고 있습니다. 모임 생활도 많은 실망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낙담하는 순간이 우리를 더욱 성장한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어 줍니까, 아니면 더욱 후퇴하는 그리스도인으로 하게 만들어 버립니까? 우리가 굉장히 어려운 일들을 뚫고 지나가는 일은 쉬운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 가운데서 사도바울을 더 어렵게 한 것은 많은 사람들이, 그로 인해서 구원받은 사람들이 사도바울을 저버린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네시보로는 사도바울에게 충성되고 그것은 사도바울에게 큰 기쁨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 모임이 계속적으로 축복의 장소가 되기 위해서 굉장히 필수적인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도바울은 디모데가 하나님의 그를 향한 목적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도록 하고 있습니다. 6절에서 디모데는 그 하나님을 섬기는데 있어서 하나님께서 뜻을 가지고 계심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많은 분들이 디모데처럼 사도바울이 안수해서 그 은사를 불일듯 하는 그런 경험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이곳에 있는 모든 분들과 함께 하시며 이제 그들이, 여러분이 그 모임에서 할 일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은사를 불일듯 하게 할 뿐만 아니라 그리고 그를 견고하게 만들어 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다, 라고 그를 견고하게 만들어주고 있습니다.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 사랑이 그 동기이며 근신하는 마음이 그의 삶을 균형잡히게 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여러분이 주님을 위한 섬김에 합당하도록 온전하게 만들어가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불일듯하게 함으로써 그 사역에 합당하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9절에서는 이 부르심이, 이 섬김이 영원한때 전부터 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과 저의 삶에 있어서 영원한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삶을 단지 컴퓨터 게임을 하는데 낭비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은 영원한 그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내가 하고있는 것은 단지 주님을 위해서 아주 작은 것일 뿐이야.'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가운데 있는 어느 누구도 우리가 하는 그 일들이 얼마나 큰 의미가 있는지,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 가운데서 어떠한 결과를 가져다 줄지는 아무도 측량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와같은 예를 하나님의 말씀마다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제가 시간 관계상 한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아리마대 요셉이 주님을 장사지낸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100% 확신하는데요. 그 아리마대 요셉이 자신이 하고있는 일의 그 의미를 완전히 알지 못했을거라고 생각합니다. 아리마대 요셉이 하고자 했던것은 단지 주 예수님께 명예로운, 그 무덤을, 장사를 지내주자, 라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풍습은 큰 바위를 깎아 만들고 거기에 시체를 장사지내는 것입니다. 로마인들은 십자가에서 죽은 시체를 그냥 산채로 내버려두고 독수리가 와서 그것을 뜯어먹도록 남겨두었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그 예수님의 몸을 내린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서에서 그것을 어떻게 언급하고 있는지를 자세히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새로운 무덤이었고 사용되지 않은 장사된바 없는 무덤이었습니다. 그리고 커다란 바위를 깎아만든 무덤이기에 오직 하나의 출입구만 있는 무덤이었습니다. 그리고 "큰 돌을 굴려 막았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아침에, 그 부활의 아침에 열려있는 무덤은 부활을 증거하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주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비어있는 무덤이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시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어떻게 주님께서 부활하신 것을 증거할 수 있겠습니까? 아리마대 요셉은 그가 선의로 한가지 작은 일을 하였지만 그것은 주님의 부활에 대한 강력한 증거가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여러분이 작은 헌신을 한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생각하지 못했던 너무나 큰 결과를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주일학교에서 봉사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다른 이웃들에게 선하게 대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모임 집회에 충실히 참석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직장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작은 헌신이 영원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영원한 시간이 올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놀랍게 만드실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을 위한 성별이 있고 그리고 그 은사를 개발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디모데에게 은사를 주셨습니다. 성령께서 그에게 임재하시고 필요한 능력을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사도바울이 언급하고 있는것을 보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하게 하기 위하여" 여러분과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은사를 개발해야 되는 개인적인 책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첫번째로 우리는 우리의 의무를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해야되는 무언가를 주셨고 그것을 해야되는 책임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일을 하기 위해서 우리가 극복해야되는 많은 장애물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많은 살상무기가 있는 그러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핸드폰입니다. 인터넷입니다. 그리고 여러가지 인터넷 사이트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인터넷에서 낭비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우리가 페이스북같은 쇼셜미디어를 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허비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의 매일매일의 삶 가운데서 압박감을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고용인은 더 많은 일을 하도록 여러분을 압박하고 있습니다. 또한 학교에서는 많은 시험의 압박감이 있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위해서, 여러분이 유용하게 사용되기 위해서, 해야되는 것들을 많은 장애물들이 방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것을 극복해야 되는 개인적인 책임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우리의 삶을 우리가 훈련하도록 말하고 있습니다. 이 인생 가운데서 여러분이 "아니야."라고 말해야 되는 인생의 좋은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것은 "내가 좋은것을 하고 나쁜것을 하지 않은거야." 단지 그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것은 더 좋은것을 택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하나님을 위해서 유용하게 살기를 원한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선택에 있어서 굉장히 주의깊게 행해야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젊은 분들이 놀라운 지적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참으로 유기화학을 여러분은 머리로 계산해 낼수 있습니다. 그리고 물리를, 양자역학을 여러분이 머리로 생각할 수 있습닌다. 세 네개의 다른 외국어를 할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와같은 지적 능력을 왜 하나님을 위해서 사용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단지 성경이 있는데 여러분의 지적 능력을 사용하라고 말하고 있는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시작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이 성경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형제 자매들을 필요로 하십니다. 그것은 수년을 필요로하는 일입니다. 제가 앞에 말씀드린 것처럼 개인적인 희생이 따르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것이 여러분이 하나님을 위한 간증을 계속해내는데 필요한 것들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1장에서 이 젊은 형제, 자매들에게 그와같은 일을 계속 하도록 그들의 동기를 그가 할수 있는한 최대한 불어넣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의 그 큰 바람은 하나님을 위한 간증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는 모임에 있어서 하나님의 진리가 계속적으로 지켜져야 된다는 것을 말했습니다. 그리고 가정 생활에 있어서 다음 세대를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훈련해야 되는것을 말했습니다. 또한 개인적으로 그들이 받은 은사를 어떻게 개발해야 되는 책임을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이 시간에 나눈 말씀들을 통해서 여러분 모두를 축복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