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이레 2022. 11. 6. 15:59

< 복음 : 야곱과 에서 > 2022년 11월 6일 일요일(요약2) / 장승훈 형제님

27 그 아이들이 장성하매 에서는 익숙한 사냥군인고로 들사람이 되고 야곱은 종용한 사람인고로 장막에 거하니
28 이삭은 에서의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더라
29 야곱이 죽을 쑤었더니 에서가 들에서부터 돌아와서 심히 곤비하여
30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곤비하니 그 붉은 것을 나로 먹게 하라 한지라 그러므로 에서의 별명은 에돔이더라
31 야곱이 가로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날 내게 팔라
32 에서가 가로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33 야곱이 가로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34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서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김이었더라
(창25:27-34, 개역한글)

이 말씀으로 복음 말씀을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창세기 25장에 이삭의 두 아들 야곱과 에서가 태어나게 된 배경과 그들이 어미의 복중에 있을때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셨는지의 내용이 있습니다.

그 아이들이 장성하매 에서는 익숙한 사냥군인고로 들사람이 되고 야곱은 종용한 사람인고로 장막에 거하니 (창25:27, 개역한글)

어느날 에서가 사냥을 하러 갔는데 고생만 하고 허탕을 치고 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굉장히 배가고픈 상태였습니다. 야곱이 때마침 떡과 팥죽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생각하기로 에서가 사냥을 제대로 하지 못했을때에 야곱이 이를 준비했다고 생각합니다.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곤비하니 그 붉은 것을 나로 먹게 하라 한지라 그러므로 에서의 별명은 에돔이더라 (창25:30, 개역한글)

그때 야곱은 그것을 그냥 주지 않습니다. 형의 장자의 명문을 자기에게 팔라고 합니다. 야곱은 그것을 노리고 있었습니다. 계속 바라보고 계획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배경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면 위로 올라가 보겠습니다.

21 이삭이 그 아내가 잉태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 아내 리브가가 잉태하였더니
22 아이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가로되 이같으면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
23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24 그 해산 기한이 찬즉 태에 쌍동이가 있었는데
25 먼저 나온 자는 붉고 전신이 갖옷 같아서 이름을 에서라 하였고
26 후에 나온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 하였으며 리브가가 그들을 낳을 때에 이삭이 육십세이었더라
(창25:21-26, 개역한글)

이삭과 리브가가 자녀를 갖지 못했습니다. 이런 사례는 성경에 굉장히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그랬고요, 한나도 그랬습니다. 여기도 역시 하나님께서 그들의 간구를 들으시고 자녀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한명이 아니고 둘이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뱃속에서부터 싸웁니다. 이런 사례는 일상적으로는 거의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삭은 이 일을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창25:23, 개역한글)

야곱이 형의 발꿈치를 잡았다는 것은 야곱이 형의 장자의 명분을 노리고 있었다는 것과 같습니다. 야곱은 왜 장자의 명분을 갖고자 했을까요? 이삭과 리브가는 하나님의 이 말씀을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고 에서와 야곱에게 이야기 했을 것입니다. 야곱은 이 얘기를 마음에 두고 원했을 것입니다. 야곱이 장자의 명분을 갖고 싶었던 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거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의 행동이 너무 치사해 보일수 있지만, 야곱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의도를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 (마1:2, 개역한글)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마1:16, 개역한글)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족보입니다. 왕의 족보입니다. 그런데 야곱의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야곱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나시는 것입니다. 야곱은 이것을 그토록 원했습니다.
많은 연구자들이 그토록 원하는 것은 아주 저명한 저널에 자기의 이름이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매우 유명해지고 더 많은 기회를 얻게 됩니다. 그래서 수년동안 열심히 좋은 결과를 내려고 노력합니다. 그것은 세상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1장에 기록된 것은 예수님의 족보입니다. 우리가 알고잇는 라합이 여기 등장합니다. 라합의 출신을 우리가 알고 있지만 그의 이름이 여기 들어갑니다. 만일 여기에 우리의 이름이 들어간다면 저명한 저널에 그 이름이 들어가는 것보다 비교할수 없는 영광일 것입니다. 야곱은 그것은 원했습니다.

야곱이 가로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날 내게 팔라 (창25:31, 개역한글)

이는 예수님의 족보에 자기의 이름을 넣고 싶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제게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저의 생애를 어떻게 계획하고 계시고 어떻게 이끄실지를 제가 들었으므로 제가 그렇게 살기를 원합니다, 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가 어떠한 인생을 살게 되는지를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이 어떠한 삶을 추구하는지를 오늘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에서는 어떠한 자세를 가지고 있습니까?

에서가 가로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창25:32, 개역한글)

에서는 하나님이 저주하시는 자의 대표적인 표상입니다. 그는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겼습니다. 아까 심히 곤비하였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가 사냥을 하려고 했지만 얻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당장 내가 팥죽을 먹지 않으면 죽게 생겼으니 죽으면 장자의 명분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라고 하는 것입니다.
곧, 세상을 사는것이 너무 힘들어서, 당장 내가 죽게 생겼는데, 내가 죽는다면 하나님을 섬기는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먹는것을 선택하면 주릴 것이지만, 하나님의 의를 구할때에 하나님께서 먹이실 것입니다. 에서는 그 말씀과 반대의 길을 갔던 것입니다.

장자의 명분은, 차자에 비해서 두배의 유산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것을 귀히 여겨야 되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가서 받게 될 것을 귀히 여겨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때에 네가 잘하는것, 사람들이 칭찬해 주는것을 하고, 너의 인생을 살고, 네가 하고싶은 것을 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자신을 먼저 생각하라고 합니다.
이와같은 생각은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겼던 것으로 대표되는 것으로 이해할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저주한 인생의 특징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야곱이 장자의 명분을 구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족보에 자기 이름을 넣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야곱과 같은 마음을 품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물론, 인간적인 꾀로 얻은 축복은 하나님께서 그를 다루심으로 보여주십니다. 그가 나중에 이스라엘이라고 불리게 되었을때는 이때의 야곱의 모습과는 전혀 다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그를 변화시켜 가 주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