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데전서 4장 : 젊은 그리스도인들에게
< 디모데전서 4장 : 젊은 그리스도인들에게 > 2017년 / 조나단 블락 형제님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딤전 4:12).
영어단어로 치자면 여기에 스물여섯 단어가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흔히 핸드폰을 통해서 보내는 하나의 그 텍스트 메세지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읽은 이 말씀은 이천년 전에 한 젊은이에게 보내어진 그러한 텍스트 문자와 같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또한 오늘 이 시간 젊은 성도님들에게 말씀을 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세가지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모두 젊음과 관련되어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나이 든 성도님들에게도 많은 의미가 있는 구절입니다. 먼저 첫번째로 이 젊음의 가치에 대해서 이 구절을 상고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내용에서 우리는 젊은 가운데서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을 볼 것입니다. 그리고 두번째로 그 젊음이 내는 목소리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여러분이 내는 그 목소리가 하나님의 본에 따라서 어떻게 적절하게 되야 되는지를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젊음의 한 예로, 그 젊음의 목적, 비전에 대해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항상 성경을 상고해 볼 때에 그 문맥을 따라서 그 내용을 살펴봐야 됩니다. 이때 이 서신서의 수신자인 디모데는 에베소에 있었고 30세 후반이 되는 그런 나이였을 것입니다. 우리는 디모데전서 서신서에서 한 주요 단어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딤전 3:15).
그래서 이 서신서의 주제는 하나님의 집인 것을, 그리고 그 가운데서 어떻게 행해야 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서신서의 또 다른 주요 단어는 경건입니다. 그 단어는 이 서신서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제 사도바울이 디모데에게 이 서신을 보낼때에 그 젊은 디모데는 다른 사람들에게 있어서 업신여김을 받을수 있는 위험 가운데 있었습니다. 우리는 1장에서 그러한 디모데에게 사도바울이 명령을 전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3절에서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이제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다르게 말하자면 에베소에 있는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점점 멀어져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잘못된 사람들에게 이제 상대적으로 젊은 디모데는 그런 사람들에게 업신여김을 받는 위험 가운데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말하기를 "이 젊은 사람이 무슨 권리로 우리에게 이러한 것들을 가르치느냐?"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라고 하고 그를 격려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구절에서 사도바울은 젊음에 대해서 그것의 가치를 말하고 있는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 이 자리에 많은 젊은 성도님들이 참석해 있는 것을 볼 때에 기쁨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젊은 성도님들은 때때로 자신이 오해를 받고있다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업신여기는 그런것은 아닐지라도 여러분들이 좋아하는 어떤 일에 대해서 나이드신 성도님들이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제가 막 구원받았을때 저는 모든것을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 중에 또한 저와 비슷한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러한 저를 오래 참아주신 나이드신 성도님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분들은 이 젊음의 가치에 대해서 알고 인내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이 시간에 이 젊은 성도님들이 그러한 가치를 가지고 계시다고 제가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젊음을 높게 평가하십니다. 또한 이 모임의 나이드신 성도님들도 그 젊은 성도님들의 젊음을 또한 가치있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경에서 이 젊은것에 대해서 생각해 볼때, 때때로는 많이 오해되고 업신여김을 받는것을 보게 됩니다. 예를 들자면 여러가지 사람들을 생각해 볼 수 있는데 그 중에 다윗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 유명한 사무엘상 17장을 열어보시게 된다면 우리는 17장에서 다윗을 '소년'이라고 부르는 다섯번에 거친 언급을 보게 됩니다.
"다윗은 말째라 장성한 삼인은 사울을 좇았고"(삼상 17:14).
33절에 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블레셋 사람들과 자원해서 싸우기를 원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하지만 33절에서 사울은 그러한 다윗에게 말합니다.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기에 능치 못하리니 너는 소년이요 그는 어려서부터 용사임이니라"(삼상 17:33).
그리고 42절에 다윗이 골리앗을 마주하게 되었을때에 그 블레셋 사람이 둘러보다가 다윗을 보고 업신여깁니다. 그것은 그가 젊고 붉고 용모가 아름다움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55절에도 사울은 그 군장 아브넬에게 "이 소년이 뉘 아들이냐?"고 묻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고 돌아왔을때에 사울은 그에게 묻되, "소년이여 누구의 아들이뇨?"라고 묻습니다. 다윗은 어렸기 때문에 이제 그의 능력에 대해서 이런 의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알다시피 다윗은 그 어린 나이에 큰 가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놀라운 승리를 이루었던 것입니다. 그는 그가 어렸기 때문에 그는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저는 오늘날 많은 젊은 성도님들이 골리앗과 같은 거인들을 자주 마주치게 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젊은 시절 만나게 되는 그 거인들은 늙은 성도님들이 이제 만나지 않는 그러한 것들인 것입니다. 나이드신 성도님들은 오늘날 젊은 성도님들이 그들이 계속 직면해야 되는 그 큰 거인들에 대해서 잘 이해하고 계실거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 거인들 몇몇에 대해서 이미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는 인터넷이라는 큰 거인이 있는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이성에 대한 큰 거인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여러가지 차별이라는 거인이 있습니다. 또한 직장에서 느끼게 되는 커다란 압박의 거인이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있는 이 세상에서는 참으로 많은것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이 젊은 시절이라는 것은 많은 압박 가운데 보내야 되는 그 시기인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다윗을 통해 보듯이 이 젊은 시기라는 것은 커다란 가치가 있는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그 가치를 놀랍게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요셉에 대해서 생각해 볼 때에도 요셉의 나이가 강조되어 언급된 것을 보게 됩니다. 그는 17세 소년으로 양무리를 치는 목동으로 일했습니다. 이제 그는 몇년 후에는 사람들을 먹이는 그런 목동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술관원이 바로에게 요셉에 대해서 소개할땡, 히브리 한 소년을 만났다고 말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술관원은 그가 어린나이라는 것을 강조해서 말하며, 그가 그 꿈을 해석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요셉이 바로 앞에 섰을때에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의 나이는 30세 였습니다. 참으로 그와같은 소년에게, 어린 나이의 사람에게 자신의 인장반지를 요셉에게 준 것은 흥미로운 것입니다. 참으로 그것은 바로가 요셉에게 준 놀라운 자리의 가치인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의 형제들은 정작 그에게 은 20개로 가치를 매겼던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어린 동생에 대해서는 참된 가치를 몰랐던 것입니다. 그리고 요셉은 하나님의 눈 앞에서 그는 귀한 존재였습니다. 보디발이 이제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또한 저는 젊은 여성분들에게도 그와같은 가치가 있다고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룻이 보아스의 밭에 오게 되었을때, 보아스는 룻에게 "이 어떤 어린 소녀냐?"라고 묻게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히브리어 단어가 '어린소녀'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보아스는 모압땅에서 온 이 어린소녀의 가치를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첫번째 근족되는 사람은 그의 가치를 무시하였습니다. 그는 그들의 밭을 사기를 원했지만 룻과 결혼하기는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여러곳에 기록된 이 성경의 예를 통해서 이 젊은이라는 것이 여러곳에서 무시를 당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가치를 높이 사고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또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이 젊은이에 대해서 큰 가치를 두셨습니다. 제자들이 "누가 하늘나라에서 크니이까?" 라고 물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어린아이를 그 가운데 두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작은자를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라." "어린아이들을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와같이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누구도 너의 연소함을 업신여기게 하지 말라고 격려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모임에 여러분들보다 나이가 드신 분들이 여러분을 업신여기지 않을거라고 믿고있습니다. 참으로 사울과 같이 여러분의 젊음을 업신여기는 사람이 없을거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젊은이에게 있어서는 나이든 사람처럼 그 경험이 없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젊음이라는 것은 나이드신 분들이 하실 수 없는 많은 정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참으로 그리고 그러한 젊은이들이 세상과 접촉하고 있을때 이제 그들을 주의깊게 살피며 도와줘야 될 필요가 또한 있습니다. 참으로 사도바울처럼 이제 디모데가 거기서 어려움을 겪고있는 것을 알면서 그를 격려해주듯이 말입니다. 이것이 이 젊음에 대한 가치입니다.
이제 디모데전서 4장 12절에 두번째 문구에서 그 '젊음의 소리'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마지막 부분에 기록되어 있는데요.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사도바울은 디모데가 그 본이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많은 경우에 나이드신 성도님들이 젊은이에 대해서 본이 된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그것은 참으로 필요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보다 더 젊은 나이인 디모데가 이제 나이드신 성도님들에게 본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제는 또한 디도서에서도 발견하게 됩니다.
"너는 이와 같이 젊은 남자들을 권면하여 근신하게 하되 범사에 네 자신으로 선한 일의 본을 보여 교훈의 부패치 아니함과 경건함과"(딛 2:6-7).
이제 이 젊은 성도들이 사도바울이 디모데에게 서신을 통해 명령하고 있듯이 젊은 성도님들이 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선한 일에 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젊은이의 목소리에 대해서 생각하게 될 때에 여러분의 목소리는 이제 어떤 소리를 내고 있는지를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좋은 노래를 부를 수 있는지, 아닌지를 묻고 있는것이 아닙니다. 젊은이로서 여러분은 어떤 말을 하고 어떤 말로 대화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디모데전서 4장 말씀에서 특별히 말에 대해서 강조를 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보게 됩니다. 4장 1절에서부터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이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는 것은 이 말세에 우리가 어떤 목소리를 내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계신 것입니다. 대조적으로 어떤 사람들은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7절에서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말하지 말라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젊은 성도로서 하게되는 모든 일들은 그것을 통해서 다른 메세지를 전하고 있게되는 것입니다. 제가 몇분간 잠깐 실제적으로 이와같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의 목소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목소리에 대해서 여러 문맥에서 함께 살펴볼 수 있습니다. 저는 지난 시간에 소셜미디어와 인터넷과 관련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것을 다시 한번 이렇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온라인 상에서 내고있는 우리의 목소리는 어떻습니까? 다른 신자분들이 우리가 보내는 메세지와 또한 이메일들을 읽게 될때에 그들이 듣게되는 우리의 목소리는 어떻습니까? 저는 또한 나이드신 분들에게도 마찬가지로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 나이드신 분들은 이 젊은이들이 온라인을 통해서, 이메일을 통해서 내보내고 있는 목소리에 대해서 많은 염려가 있습니다. 참으로 그분들이 이제 저에게 말씀을 해 주시는 것은 참으로 젊은 성도님들이 개인적으로 만났을때 하는 말과 그런 내용들과는 다르게 그들이 온라인과 페이스북이나 다른 곳에서는 전혀 다른 내용들을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여러분이 이제 업신여김을 받지 않고 여러분의 말이 진지하게 들려지기를 원한다면 여러분은 이와같은 좋은 목소리를 내야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믿음의 본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임 안에서 어떠한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까? 그 집회에서 어떠한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까? 참으로 여러분은 그 집회에서 여러분의 가치를 존중받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참석을 통해서 내고있는 목소리는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참석에 대해서는 신경쓰지 않으면서 여러분의 목소리가 존중되기를 원하고 있습니까? 참으로 여러분이 그렇게 시간을 내서 드렸을때 여러분의 목소리가 잘 전달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모든 것들은 그 후에 여러분들에게 있어서 존중받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형제님들의 감사와 기도가 그 집회에서 계속 들려지고 있습니까? 그냥 단지 젊은 성도님들이 불평하는 그 목소리만 모임 가운데서 들려지고 있는 것입니까? 여러분의 도덕적인 목소리는 어떻습니까? 그리고 또한 여러분이 가시적으로 내고 있는 목소리에 대해서도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이 입고있는 그 옷과 외모를 통해서 여러분은 어떤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모두 다른사람에게 우리의 목소리를 내고있는 것입니다. 그렇지않고 살아가기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말과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은 거기에 우리의 목소리가 다른사람에게 전달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목소리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됩니다.
우리는 고린도 모임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들 가운데서 어떤 형제들을 통해서 정말 혼란스러운 그런 목소리가 나오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께 속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분리의 목소리였고 혼란의 목소리였습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로마서 16장에서는 뵈뵈자매에 대해서 천거의 목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 자매는 좋은 목소리를 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그에 대해서 천거하기를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목소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러한 것을 통해서 살펴보게 됩니다. 이제 다시한번 구약의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잘못 인도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 나라 전체를 잘못 이끄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왕이 노인의 교도하는 것을 버리고 그 앞에 모셔 있는 자기와 함께 자라난 소년들과 의논하여"(왕상 12:8).
"삼일만에 여로보암과 모든 백성이 르호보암에게 나아왔으니 이는 왕이 명하여 이르기를 삼일만에 내게로 다시 오라 하였음이라 왕이 포학한 말로 백성에게 대답할쌔 노인의 교도를 버리고"(왕상 12:12-13).
우리는 여기서 다시한번 그 젊은이와 나이든 성도님들의 교훈에 대해서 가치를 보게 됩니다. 여기서 르호보암은 늙은, 오래된 노인의 교도를 따랐어야 됐지만 그는 그것을 버렸습니다. 이제 저는 다시 한번 이와같은 도전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내가 내고있는 목소리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이 젊음의 가치를 두는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그것이 첫번째입니다. 또한 우리가 젊음의 그 목소리를 생각하게 될때에 우리는 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제 남은 시간에는 그 젊음의 목적, 그 비전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여기있는 젊은 성도님들은 "나는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겠습니까?" "내 목소리는 어떠한 목소리가 되어야 겠습니까?"라고 물으실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디모데가 어떠한 면에서 어떻게 본이 되어야 된다는 것에 대해서 분명하게 그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우리가 교려해야 하는 여섯가지 것에 대해서 보겠습니다.
디모데전서 4장 12절에 첫번째가 '말'이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여러분의 말로 표현이 됩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말이 여러분의 목소리가 어떤지를 결정합니다. 그래서 디모데의 그 인격과 그 목소리는 바로 그가 어떤 말을 하느냐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해서 생각하게 될때에 그분의 목소리에 대해서 생각하게 될때에, 그것을 가장 특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는것은 바로 주님의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그분의 말씀을 듣고 놀랐습니다. 제가 젊은 성도님들에 대해서 특별하게 생각하게 될 때에 다시 한번 우리가 살고있는 이 세상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는 계속해서 말을 그냥 다 함부로 던져버리는 그러한 가운데 있는것을 보게 됩니다. 그냥 짧은 몇개의 단어로 그냥 툭툭 말을 던져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던져낸 말은 어떠한 가치도 없이 그냥 다 삭제되고 맙니다. 어떠한 기록도 없고 어떠한 책임지는 것도 없습니다. 그것은 또한 우리가 보는 이미지, 사진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 신자들이 살고있는 환경인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게 될 때에 그것은 세세토록 변함이 없는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젊음과 관련해서 생각하게 될때에 그 젊은이들의 말을 통제하고 있는것은 무엇입니까? 그 말을 통제하는 것이 세상의 말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입니까? 이것은 또한 그리스도인들의 음악과 이 세상의 음악을 구별짓는 하나의 기준이 되고 있습니다. 참으로 세상의 음악의 그 가사는 그것은 불경건하고 건전하지 못한것을 보게 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이 듣는 그 음악은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는 것이어야 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높이는 것이 되어야 됩니다. 그리고 교리적으로 올바라야 됩니다. 우리가 이 말에 대해서 생각하게 될때에 과연 무엇이 우리의 말을 통제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될 것입니다. 참으로 그것이 바로 그 말씀이기를 바랍니다. 이 말에 해당되는 헬라어 단어는 흥미로운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그 헬라어 단어, '로고스'라는 단어입니다. 바로 우리가 쓰는 '로고'라는 표어라는 단어가 오게 된 헬라어 단어입니다. 오늘날 이 젊은 세대들은 특별히 로고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로고는 어떤 상품의 브랜드로 대표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상업세계에서는 그들의 브랜드가 확실하게 전달되도록 많은 돈을 투자해서 그 로고를 만드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는 그런 로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로고스'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저는 특별히 젊은 성도님들이 세상의 로고에 여러분의 말이 통제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그 광고들이 젊은이들을 집중적으로 대상을 삼고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계속해서 세뇌하는 것은 그들이 광고하는 상품이 없다면 우리의 삶이 그들의 로고처럼 온전하지 않다는 것을 각인시켜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와 대조적으로 젊은이의 삶이 본이되기 위해서는 특별히 세상과 또 나이드신 성도님들에게 본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말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통제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께 가장 높은 자리를 내어드리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와 그분의 말씀은 분리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분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바로 그 말씀인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또한 젊은 성도님들에게 여러분이 누구와 함께 지내고 있는지에 대해서 주의할 것을 당부를 드립니다. 디모데후서 4장에서 사도바울은 그러한 경고를 주고 있습니다.
"구리 장색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보였으매 주께서 그 행한대로 저에게 갚으시리니 너도 저를 주의하라 저가 우리 말을 심히 대적하였느니라"(딤후 4:14-15).
여기에 사도바울은 그가 가르친 것을 대적한 한 사람을 디모데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그 사람을 주의할 것을 여기에 당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건전하지 않은 말을 하는 사람을 주의해야 될 필요성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번 사도바울은 "미쁘다 이 말이여"라는 표현을 반복해서 사용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와같은 미쁜 말을 하는데 있어서 성도들의 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번째로 디모데전서 4장에 행실에 대해서 보겠습니다. 이 행실이라는 것은 우리가 어떠한 행동을 하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3장에서 우리가 "하나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이라고 했을때, 그 '행하다'와 같은 단어입니다. 그것은 우리 삶의 모든 그 방식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행실에 대해서 에베소서 말씀에서 많은 교훈을 받게 됩니다. 사도바울은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 아담 안에서 어떠한 행실을 하고 살았는지를 말합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이제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가는 욕심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버리라고 말합니다. 오직 성령으로 새롭게 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여기에 두가지 전혀 다른 삶의 방식과 행실이 있는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 했던 그러한 구습들은 벗어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을 우리가 입어야 됩니까? 여기서는 우리의 내는 못소리와는 다른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믿는 자들의 옷장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입을 것입니까? 제가 문자적인 그 옷을 말하고 있는것은 아닙니다. 그것도 역시 믿는자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그 사람들이 듣는 목소리는 우리가 무엇을 입는지에 따라서 많은것을 듣게되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특별히 오늘날에는 그 성별을 분명하게 구별하는 옷차림을 갖는것이 중요한 때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옷차림을 통해서 그와같은 것들을 행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에베소서의 문맥에서는 여기서 입는다는 것을 말할때에 그것은 우리 안에 있는 우리의 내면을 말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젊은 성도님들에게 이 시간에 그리스도로 옷입기를 제가 말씀을 드립니다. 여러분께서는 이제 밖에 나갈때 어떤 것을 입을지를 많이 고민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여러분 안에, 그리스도로 먼저 옷을 입는다면 그것은 밖으로 저절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다시 한번 여러분이 그 믿음의 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여러분이 나이드신 성도님들에게도 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여러분은 여러분보다 더 어린 성도님들에게 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와같은데서 여러분의 행실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사무엘상 17장에서 다윗의 연소함이 다섯번에 거쳐서 언급이 되고 업신여김을 받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18장에는 이제 그의 행실에 대해서 나와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5절에서 "다윗이 사울이 보내는 곳마다 가서 지혜롭게 행하였다"라고 되어있습니다. 또한 14절에 "그 모든일을 지혜롭게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니라" 또한 30절에 "다윗이 사울의 모든 신하보다 더 지혜롭게 행하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결과로 "그의 이름이 심히 귀중히 되니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에 우리의 행실과 그 이름의 명성이 직접적으로 연결이 되어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이 성경을 통해 보고있는 기준은 굉장히 높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유명한 디자이너의 그 상표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이 맞추고 있는 그 품질의 기준은 굉장히 높습니다. 그들은 그 품질 관리를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 최고의 것을 만들기 위해서 계속해서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이 그와같이 최고의 것을 이루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그 젊음에 대해서 많은 가치를 두고 있습니다. 바로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을 여러분을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여러분이 살고있는 이 세상에서 모든 사람들이 보고자 하는 그런 본이 되어야 됩니다. 그리고 또한 이 지역모임 안에서도 다른 성도님들이 보고자하는 그런 본이 되야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이제 세번째 것을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디모데전서 4장에서 세번째로 사랑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사무엘상 18장에서 1절에 요나단이 다윗을 사랑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경건한 것은 이 사랑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세상에서는 이 사랑이라는 것이 굉장히 허무한 것으로 변질되어 있습니다. 영국에서는 어떤 텍스트 문자를 보낼때에 그 끝에 LOL이라고 '사랑을 담아' 이런 뜻으로 보냅니다. 저는 그 뜻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한나님의 말씀에서 이 사랑이라는 것은 그것 이상의 깊은 뜻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사랑이라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성품이고 하나님께서 보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니라" 그리고 그 사랑이 우리를 그 갈보리로 다시 돌아가게 만듭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는 그 사랑의 본을 보이시기 위하여 이와같은 일들을 행하셨습니다. 저는 이것을 말씀드리기 위해서 다락방의 그 교제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참으로 우리가 주일에 나오기 전에 그 다락방에 대해서 묵상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 될 것입니다. 그 다락방에서 우리가 볼수있는 가치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 다락방의 부동산적인 가치를 말하고 있는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다락방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임재해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다락방에서 듣게되는 목소리는 무엇입니까? 그 방 안에는 많은 목소리가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 다락방 안에서 제자들이 누가 배반할 자인지를 서로 물어보는 그런 소리를 듣게 됩니다. 하지만 그런 모든 목소리보다도 어떤 한 목소리를 우리는 귀 기울여서 듣게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목소리를 2017년 오늘날에도 여전히 듣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목소리시며 그분은 그 떡을 드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다." 또한 그 다락방에 있었던 그 옷들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도 가치있는 일이 될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계명의 본으로서 주님께서는 그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우리는 또한 이 사랑이 사도바울이 디모데에게 명령하는 명령의 그 목적인 것을 보게 됩니다.
"경계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거늘"(딤전 1:5).
그래서 이 사랑이 디모데의 동기가 되는 것이며, 또한 디모데로부터 그 말씀을 듣는 신자들의 동기가 되는것을 보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릎을 꿇으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을때 우리는 참으로 그 사랑의 본을 보게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와 대조적으로 디모데전서 6장에서는 이제 돈을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 경고하고 있는것을 듣게 됩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딤전 6:10).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 대한 사람을 나타내셨을때, 참으로 그분의 그러한 행위의 동기는 돈에대한 사랑이 아니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희생적인 그분의 사랑이었습니다. 그 다락방에서 일어난 가장 놀라운 일 중에 하나는 이것입니다. 그분께서는 그 기록된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볼때에 가룟유다의 발도 씻기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가룟유다가 그 다락방을 떠나기 전에 그 발씻는 것이 있었던 것입니다. 제가 다시 한번 이 자리에 모인 젊은 성도님들께 말씀 드리겠습니다. 여러분들은 나이드신 성도님들에게 그들에 대한 여러분의 사랑을 나타내는 그러한 본을 보이고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가 여기에 오게 된 많은 사랑과 그 친절을 받았습니다. 참으로 젊은 성도님들께서 그와같은 사랑을 보이신 그 나이드신 성도님들에게 또한 존경과 가치를 돌려드릴 것을 믿고 있습니다. 참으로 여러분이 그분들을 위해서 할수 있는것은 참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을 위해서 보이신 그 사랑과 같이 행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그런 본을 보이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요 13:14-15).
주님께서 우리에게 행한 것처럼 너희도 행하게하려 하여 본을 보이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 나와있는 이 '본'이라는 단어는 디모데전서 4장에 나와있는 그 '본'과 같은 단어입니다. 우리는 슬프게도 이 발을 씻기는 것과는 정 반대의 것을 또한 하고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다른 그리스도인들의 발을 걸어 넘어뜨리는 일을 대조적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젊은 성도들이 나이드신 성도들의 발에 걸려 넘어지곤 합니다. 그리고 또 젊은 성도님들이 나이드신 성도님들의 발을 걸어 넘어뜨리고 무시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때때로 젊은 성도님들이 실수할 때가 있습니다. 다시 한번 그들이 일으킴을 받고 격려를 받아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의 발이 씻겨져야 될 필요가 있는 때입니다. 그들이 다시 한번 깨끗게 되야 될 필요가 있을때입니다. 이제 한달, 또 얼마 후에는 이제 대학교에서 그들이 모임으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이제 대학교를 위해서 떠나있던 성도들이 돌아왔을때, 이제 나이드신 성도님들은 또 그들을 돌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사랑은 성령의 열매임을 우리가 배우게 됩니다.
이제 그것을 생각해 봤을때에 디모데전서 4장에 네번째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 젊은 성도들은 영에 있어서도 본이 되어야 됩니다. 영어 성경으로는 이 사랑 다음에 '영'이라는 단어가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염두해 두어야 되는것은 여기 나오는 '영'은 성령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영어성경에는 이 영이라는 단어가 대문자 S로 시작하게끔 구별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나와있는 이 영이라는 것은 우리의 생각과 소망과 우리의 감정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니엘이 "그 뜻을 정하여" 라고 할때, 그 뜻을 말하고 있는 그러한 단어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영이라는 것이 비록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지만 우리의 이 영이 성령님의 통제아래 있어야 된다는 것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베드로전서 3장 말씀을 생각할때에 1-4절까지 보겠습니다.
"아내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이는 혹 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봄이라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벧전 3:1-4).
여기서 "심령"이 '영'으로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이제 함께 해야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그 아내와 또 남편의 대화가 어떠해야 됨을 보게됩니다. 또한 그 여자의 외모가 어떠해야 함을 보게 됩니다. 참으로 우리가 외부로 보이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금을 차는 것으로 꾸미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4절에 "마음에 숨은 사람"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온유하고 안정한 영으로 단장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값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번 그 가치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가치있는 행위에 대해서, 행실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기본이 되는 우리 안에 있는 우리 영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젊은이의 목표, 비전에 대해서 생각하게 될때 먼저 생각해야 되는것은 하나님의 시야에서, 하나님의 눈은 우리를 어떻게 보시는가? 입니다. 세상은 우리가 외적으로 어떻게 보이는지만 가치있게 평가합니다. 여러분이 어떻게 큰 소리를 내는지를 세상은 평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대담하게 그 목소리를 내는지를 세상은 높이 평가할 것입니다. 이 젊은이들이 그 극한 스포츠에서 얼마나 대담한 그 경지를 이루는지를 세상은 높이 평가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어떠한 가치가 매겨질 것인지에 대해서 여러분은 먼저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디모데전서 4장에서 사도바울은 육체의 훈련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딤전 4:8).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다고 되어 있습니다. 참으로 이것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 시대의 영이 무엇입니까? 이 시대의 영은 우리 자신의 육체를 멋있게 단련하는데 그 강조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 체육관에 등록하기 위해서 아주 비싼 돈을 내면서 그렇게 일을 하고있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몸을 건강하게 잘 유지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의 몸을 건강하게 지켜야 됩니다. 우리가 날씬하게 해야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조망하면서 그러한 일들을 또한 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너의 몸만, 육체의 연습만 하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연습하라고 말하지만 하나님의 일을 무시해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한다면 이제 영원한 가치가 그 신자에게 주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육체적으로 우리의 몸을 단련하는 것은 단지 이 짧은 시간에만 우리에게 유익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영적으로 이 경건을 훈련하는 것은 영원토록 우리에게 유익을 주는 것입니다. 참으로 베드로가 우리의 마음의 숨은 사람을 단장하라고 말한 것 같이 우리의 속사람을 우리는 주의깊게 살펴야 되는 것입니다. 그가 말하기를 "마음 속에 숨은 사람"에 대해서 말하였습니다. 저는 여러분의 외모를 보고 있지만 여러분은 그 몸과 관련되서는 잘 정비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 몸으로 하는 운동과 관련되서는 많은 성공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여러분의 그 속사람을 보실때에 그것이 아주 약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몸으로 하는 그 훈련의 성과에 대해서는 많은 격려를 받게될 수 있습니다. 저는 젊은 사람들이 아주 높은 곳에서 또한 무거운 것을 들고 뛰어내릴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와같은 극한 스포츠를 할수 있고, 하도록 격려받고 있는 세상인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담대한 용기가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전도지 한장 줄수 없는 용기가 없는 것을 볼때가 있습니다. 그 두 용기는 전혀 다른 것임을 보게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영에 있어서도 믿는 자들에게 본이되야 하는 그 중요성을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보시는지를 중요하게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제 다섯번째로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고 성경은 분명하게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 믿음 없이는 여러분의 시야는 이제 흐릿해 질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가 회심할때 필요합니다. 참으로 그 믿음을 확신할때에 그때 믿음이 필요합니다.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딤전 4:1).
우리는 여기서 믿음이 두가지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첫번째로 그리스도를 우리가 의지하고 신뢰할때에 그런 주관적인 믿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믿음은 또한 우리가 받아들인 객관적인 진리의 총체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 4장 1절에는 '귀신의 가르침'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 귀신의 가르침에 대해서 말할때는 '가르침들'이라고 복수로 되어 있습니다. 항상 귀신의 가르침은 여러가지 교훈인 것입니다. 이 세상의 가르침들입니다. 그들은 많은 다른 것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성경의 가르침을 생각할때는 그것은 항상 단수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결코 복수형으로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는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계속해서 전혀 힘썼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하나님 말씀 전체를 모두 다 하나로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기 어떤 중립지대가 있는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만약 믿음에서 떠난다면 우리는 그 위의 모든것이 다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젊은 성도님들은 때때로 이 하나님의 말씀의 부분부분, 여러군데에서 취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이 믿음에 있어서 본이 되기를 원한다면 여러분은 이 가르침의 하나로서의, 전체, 모든것을 다 받아들여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행전 2장에서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교제"했다는 그 순서를 보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근거한 그 교제이기 때문입니다. 4장 1절에서는 믿음에서 떠나는 어떤 사람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디모데가 직면해야 되는 그 어려움이었던 것입니다. 6장 10절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이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믿음에서 떠나는 사람들의 그 이유를 보게 됩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10).
이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서 믿음에서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과 대조적으로 11절에서는 이제 하나님의 사람은 이런 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아야 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12절에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권면합니다. 이것이 영생을 취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영생이 잃어버릴수 있는 것이고 그런 불완전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젊은 성도님들에게 여러분의 구원의 진리를, 그 영생을 말하는 진리를 굳게 붙잡고 있으라고 말하는 구절인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그와같은 확신 가운데 있을때에 여러분은 모든 믿는 자들의 믿음의 본이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그것은 이 세상에서 참된 가치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그것이 바로, 그렇게 할때에 여러분들이 하나님께 참으로 유용하게 쓰임을 받을수 있지 않겠습니까? 만약에 젊은 성도님들이 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흔들리는 그러한 자세 가운데 있을때에 어떻게 나이드신 성도님들이 여러분에게 책임있는 일을 맏길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특별히 젊은 성도님들이 이 진리의 말씀을 위해 싸울 준비가 되어야 될 것을 말씀을 드립니다. 그 나이드신 성도님들이 여러분에게 가르쳐주신 그 믿음의 진리들을 위해서 여러분은 서서 싸울 준비가 되셨습니까? 만약 여러분이 도전을 받을때, 아니면 단지 무너져 버리겠습니까? 여기에 마지막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에 '정결'이 있습니다. 우리는 특별히 2017년 이 시대에 이 정결의 필요성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요셉이 자신의 자유를 희생하면서까지 그의 정결을 지킨것을 보게 됩니다. 특별히 젊은 성도님들에게 여러분의 그 정결함을 계속해서 굳게 지키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나는 자유하기를 원한다."라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기억하셔야 하는 것은 여러분은 여러분의 것이 아닌 것입니다. 왜냐하면 값을주고 사신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그 성적인 죄가 하나님 앞에서 어떠한 것인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요셉은 그것은 오직 결혼 안에서만 허용되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한 남자와 한 여자만 그 결혼을 해야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여전히 지금도 변화되지 않는 원리인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5장에서 이 젊은이에 대해서 이러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권하되 아비에게 하듯하며..."(딤전 5:1).
그리고 이러한 교훈 가운데서 젊은 여자를 어떻게 대할 것인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젊은 여자를 일절 깨끗함으로 자매에게 하듯하라"(딤전 5:2).
그래서 여러분이 젊은 여자에 대해서 대하게 될때 마치 여러분의 자녀인 것처럼 그들을 대하고 그들에게 말해야 될 것입니다. 이것이 젊은 여자에 대해서 가져야 되는 그 정결한 관점인 것입니다. 참으로 이것은 이 세상이 지금 장려하고 전파하는 것과 전혀 다른 내용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그 광고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 헐리우드에서 만들어내는 영화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보게 됩니다. 그들은 그들 가운데서 정결함이라는 것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묻기를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겠느냐?"라고 묻습니다. "그의 가치는 진주보다 더하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을 통해서 그 젊음의 가치는 그 젊음의 정결함에 달려있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여러분의 젊음의 가치가 바로 정결함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그 정결함이 상하게 될때에 여러분의 가치는 떨어지게 됩니다. 참으로 이와같은 말씀의 기준은 높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있어서 이러한 최고의 것을 바라고 계십니다.
우리가 이제 이 말씀의 상고를 마치면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이 세상이 본 가장 가치있는 젊음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그분은 사람에게 멸시를 받고 거절을 당하셨습니다.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네 연소함을 업신여김을 받지 않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 예수께서는 그 나사렛 멸시받는 동네에서 나실것을 택하셨습니다. 나사렛은 세상의 관점에서 보기에는 전혀 가치가 있는 동네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가치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거기 계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분을 단지 은 30의 가치를 매겼을 뿐입니다. 그것은 단지 노예의 가치였을 뿐입니다. 하지만 그분의 보배로운 피의 가치는 우리가 측량할 수 없는 가치임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을 가치있게 여기고 높이고 있음을 믿습니다. 그분의 목소리는 지금도 세세토록 우리에게 들려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락방에서 그분께서 하신 말씀을 지금도 우리 귀에 듣고있는 것입니다. 내가 다시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어느날 그분의 임재와 함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젊은 성도님들이 오늘 이와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바로 주님께서 여러분을 가치있게 여기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제 곧 어느날에 주님께서는 여러분을 데리러 오실 것입니다. 참으로 그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그 결과를 보고 주님께서는 만족히 여길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밤 이 젊음의 가치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젊은 하나님을 위해서 놀라운 일을 할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젊은이의 목소리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과 이 지역모임의 다른 성도님들이 들을 수 있는 그 큰 목소리를 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그 목소리는 이 성경의 본을 따라야 되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젊음의 목적에 대해서도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이 이 세상 가운데 선한 간증의 본으로 나타내 보이시길 원하고 계십니다. 행실에 있어서, 그리고 사랑에 있어서, 그리고 영에 있어서, 그리고 믿음에 있어서, 그리고 정결에 있어서, 젊은 성도님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원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모임도 여러분을 필요로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여러분을 다른 사람들이 업신여기지 않게 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말씀들을 통해서 축복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