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이레 2022. 7. 14. 15:03
2018년 3월 30일 금요일

성경읽기

<베드로후서 1장>

*이번 성경읽기는 사회자 형제님 한분과 인도하시는 형제님 그리고 많은 형제님들의 질문과 답변을 들리는 그대로 적어 내려갔기 때문에 질문자와 대답자의 구분이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종과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2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찌어다
3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5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6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7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8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9 이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라 원시치 못하고 그의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었느니라
10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
11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벧후1:1-11, 개역한글)

성경을 여러 세상에서 공격합니다. 거짓 가르침이 참 가르침을 공격합니다.
이것(베드로전서)은 아마도 바벨론에서 기록된 것일 것입니다. 베드로후서도 동일하게 기록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은 특별히 말세를 기록하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첫번째 1장에서는 우리의 인생 가운데서 실족하지 않게 하는것을 가이드라인으로 제시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늘나라에 넉넉하게 들어가는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두번째 장에서는 거짓 교사들에 대해서 경고하고 있습니다. 거짓 형제들에 대해서 경고하고 3장에서는 명백하게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심판하실것을 말하고 있습닌다.
베드로 전서와 후서의 차이점은 전서에서는 주님의 초림을 강조합니다. 주님의 십자가와 고난 그리고 그 고난으로 말미암은 우리의 소망을 말합니다.

그리고 당시의 고난의 압박 가운데서 사도는 전서를 기록했습니다.
후서는 두번째 주님의 재림에 대해서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여기서는 분명하게 아는것에 대해서 강조해 말합니다. 이것이 베드로 전서와 후서 1장의 개요가 되겠습니다.

1장에서는 그리스도인의 삶과 생명이 개발되어야 함을 말합니다. 2장에서는 거짓 교훈을 말하고 3장에서는 주님의 다시 오심을 말합니다. 그리고 1장에서는 <원시치 못하고 그의 깨끗케 하심을 잊은> 것과 같이 개인적인것을 말합니다.
2장에서는 이제 모임적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적이지 않은 것을 가르치는 모임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 많은 다른 나라에서 오신 분들이 계십니다. 이 세상에 여러 복음주의적인 단체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여러가지 사람들의 방법에 대해서 그것이 좋은지 나쁜지를 떠나 성경적이냐 아니냐를 묻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잘못된 가르침에 대해서 3장은 심판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1장에는 지식과 삶에 대해서 말합니다. 처음 1-2절은 배경을 말합니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 이 부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이 사업을 시작할때 무엇을 알아야 합니까?
자본에 대해서 먼저 잘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격과 연습을 해야 합니다. 세속적인것초자 이러한 연습이 필요합니다.

8-10절까지는 어떤 사람을 고용할만지, 어떤 사람을 고용할 수 없는지를 설명합니다.
11절은  은퇴한 후의 일을 말합니다. 은퇴한 후에 어떠한일을 할수 있는지 없는지를 말합니다.

이렇게 단락으로 나눌수 있고 한 단락씩 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 다섯부분으로 나누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11절까지 다루기를 원하기 때문에 시간을 조절하겠습니다.

처음 단락은 무엇을 말합니까?
베드로는 자기에 대해서 두가지를 말합니다. 처음에는 '종'이라고 말합니다. 그의 겸손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사도'입니다. 그의 존귀함을 말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는 겸손과 존귀가 필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과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벧후1:1, 개역한글)

두번째, 보배로운 믿음을 받았다는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번째 베드로전서와 달리 사도가 자신을 소개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베드로전서에서는 사도라고 자신을 소개했지만 후서에서는 낮아진 인격이 제시되어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베드로전서에서 베드로는 요한복음에서 <양들을 치라>는 주님의 명령을 따라 말씀을 가르쳐야 했습니다.
그러나 후서에는 그의 인격적인 모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전서는 믿는 유대인들에게 보냈고, 후서는 일반적으로 주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을 수신자로 두고 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러한 겸손이 필요하지 않았을까요?

우리는 언급된부분을 보게 됩니다. '시몬 베드로' '사도'
시몬은 주님께 베드로라는 이름을 받고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주님께서 부르심을 뜻하고 사도가 된것을 말하고 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

베드로는 높은자세에서 가르치고 있는것이 아니고 겸손한 자세에서 권위를 가지고 말하고 있습니다.

시몬은 히브리 이름이고 베드로는 헬라 이름이며 주님께 받은 이름입니다.
다른 이름은 다른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두 언어의 이름은 모든 민족을 포함하는 수신자로 하고 있습니다.

이 서신서는 베드로가 나중 그의 생애 마지막에 기록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몬 베드로의 성장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는 이름입니다.

우리가 점점 나이가 들수록 점점 주님을 닮아가고 겸손해져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알게 될수록 점점더 겸손해 집니다.

두번째 단락을 보겠습니다.
앞부분은 저자에 대해서 말하고 후반부는 서신을 받는 수신자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보배로운 복음을 받은것은 은혜로 구원을 받은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공평한 시민권을 받았습니다.

이 믿음이 진리의 믿음을 말하나요? 아니면 주관적인 믿음을 말하나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기서의 요점은 우리가 이것을 받았을때에 이것은 보배로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에베소서 2장 8절과 어떠한 관계가 있을까요?

저는 이 베드로후서에서 거짓된 믿음을 가르치는 자들이 있었기에 그와 대조되는 참된 진리되는 믿음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에서 선물은 믿음이 아니라 구원을 말합니다.
여기서도 동일하게 우리가 주관적인 믿음을 받은것이 아니고 객관적인 진리를 선물로 받은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여기의 믿음이 성경에서 말하는 진리의 대상이 되는 믿음을 말한다고 봅니다.
우리가 '같이 받은' 이것은 하나님께서 차별치 않고 모든자들에게 동일한 시민권을 주신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찌어다 (벧후1:2, 개역한글)

은혜와 평강은 단지 유대인들이 말하는 인사를 말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어떠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까?
더 많은것을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1절에서는 보배로운 믿음, 그리스도인들이 믿은 믿음에 대해서 말했고 2절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축복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절 그리스도인들의 믿음 2절은 그리스도인의 축복 3절은 그리스도인들의 행함에 대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더욱 많을찌어다> 그리고 이것은 더욱 많아져야 합니다. 세상의 것은 한계가 있지만 이것은 모든 믿는자들에게 동일해야 하는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말하는 평강을 넘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더 많은 축복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 은혜와 평강은 더 많아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 주 예수를 알때에 확신 가운데서 은혜가 더 많아집니다.

우리가 구원받았을때 이러한 은혜와 평강안으로 들어왔을뿐만 아니라 교제 가운데 들어와서 이 은혜와 평강이 더욱 많아집니다.
더 많아지는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성장할수록 이 은혜와 평강은 지수적으로 많아집니다.
2,3,5,8절 2-3장에서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두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안다>는것은 무엇을 말하는것이고, 하나님과 우리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온전한 지식을 앎이라는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요?

여기 지식을 사용하는데 있어서 두가지 원어가 사용되었습니다. 2절의 지식은 하나님께 속한 지식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지식입니다. 3절에 나온 <우리를 부르신자를 앎으로> 이것은 여전히 하나님과 관련해서 사용합니다.
그리고 5절에 나온 지식은 우리가 더하는 지식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더할수 있는 지식입니다. 8절에서는 또한 <우리의 지식>입니다.

2절과 3절에 나와있는 지식은 하나님께 속한 지식입니다.
그러나 이후에 나온 지식은 사람의 책임을 말하고 있는 지식입니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찌어다 (벧후3:18, 개역한글)

마지막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여기서 지식을 말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가운데서 나타나는 지식입니다.

이제 3-4절로 가겠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인들의 사업에서의 자본이 무엇인지를 말해줍니다.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것을 주셨습니다. 이것으로 인해서 죄의 형벌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소중한 자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어떠한 그리스도인들도 이러한 죄에서 제약이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책임이 있습니다. 계속 더해야 하는 책임입니다.

3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벧후1:3-4, 개역한글)

3절에서 이 지식은 하나님의 영광과 덕으로 말미암아 알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가 알게 된 것입니다.
요한복음 17장 3절에서도 <영생은 곧 그와 그를 보내신 하나님을 아는 것이니이다> 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3절에서 안다라고 할때 우리는 영생을 생각하게 됩니다.
여기에 우리 영광과 덕은 성육신하신 주님을 통해서만 볼수있는 영과 덕이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베드로는 후에 우리 믿음에 덕을 더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덕이 무엇일까요?
이것은 우리의 성품의 탁월함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요?

여기서 자기의 영광과 자기의 덕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주님의 영광과 덕을 생각하게 됩니다.
1절에서는 우리 주님의 사역을 보았고 3절에서는 우리 주님의 사역에 대해서 보게 됩니다. 이 덕은 때때로 '용기'로 번역이 되고 있지 않습니까?
이 덕이라는 것은 실제로 어떤 도덕적인 것을 행하는 그러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에서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이요>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거기서 왕같은 제사장이 하는일이 하나님의 덕을 선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좋은 간증을 통해서 선전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인격의 훌륭한 것들을로 선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훌륭한 행동을 함으로서 그리스도인들의 덕을 선전할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도덕적인 것을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덕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가지신 것을 실제로 행하는 것입니다.
5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그것을 믿음으로 행하므로 덕을 더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제 신의 성품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자가 되게 하였도다>라고 합니다. 이것은 거듭나면서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자가 된것이 아니라 거듭나면서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자가 된 것입니다.

참예한다는 것에 대해서 서신서에서는 여러번 거듭날때 되는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은 구원과 관련된 약속인 것입니까?
구원의 약속을 말씀하고 있으며 구원을 받아서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것을 말하고 있는것인가요?

이 <보배롭고>라는 말은 일곱번 사용되는 말인데요, 우리는 이 귀한것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 성경말씀을 통해서 스스로 도울수 없는 자들이 이러한 놀라운 구원을 받게 된다는것을 알게 됩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이 되는 복음의 말씀은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있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있어서 신의 성품을 가지는것이 가장 기본입니다. 우리는 인간과 다른 하나님의 성품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의 속성은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이 성품은 하나님, 주님, 성령님께서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자들은 이러한 특권을 가진 자들입니다.

이러한 성품이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두가지 성품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성품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영적인 삶에 있어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6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7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벧후1:6-7, 개역한글)

6절과 7절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의 덕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5-7절까지 3-4절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자본을 가지고 우리는 모든 노력을 다해 이것을 발전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업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하는 것이고 여기서 나오는 성장은 우리 인격의 성장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게으르지 않고 부지런히 해야 할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위해서 더욱 힘써야 합니다.
힘쓰는것은 기도하고 이것을 개발하기 위해서 더욱 지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 <더욱 힘쓰라>는 말씀을 5절에서 보게 됩니다. 이것은 모든 열정을 가지고 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모든것을 주셨으므로 우리는 우리의 책임을 다해야 하는것입니다.

6절에서 절제와 인내가 나옵니다.
이 절제는 무엇입니까? 자기를 조절하고 통제하는 것입니다.
인내라는것은 핍박 가운데서 견디는 것입니다. 경건은 하나님께 합당히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절제라는 것은 다른 사람이 원하는 것을 내가 해내는 것입니다. 인내라는 것은 내가 하고싶지 않은 것을 하는 것입니다. 경건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인격의 성장을 말해주고 있는 부분입니다. 우리는 더 높은 가치를 더해야 합니다.
저는 이것에 인내나 절제와 경건 하나에만 촞점을 맞추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동시에 진행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바울의 서신서에서 이러한 덕들의 순서를 발견합니다.
로마서에서는 믿음에 대해서, 갈라디아서에서는.... 에베소서에서는 사랑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각 서신서에서 이 덕에 대해서 다루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이것에 대해서 보완적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7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형제우애가 나옵니다.
형제우애라는 것은 헬라문헌에서는 항상 가족 관계에서만 사용된 단어 입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이 단어가 더 넓은 의미로 성도들간에 사용됩니다. 이것은 참된 사랑이고 다른 형제를 사랑하고 또 그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가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이고 필레오의 사랑을 가족간의 사랑으로 이야기 합니다.
베드로전서 1장 21절에서도 이 사랑에 대해서 말합니다.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는데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피차 뜨겁게 사랑하라>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벧후1:8, 개역한글)

8절 말씀은 우리가 고용할만한 사람입니다. 9절 말씀은 우리가 고용할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는 소경이고 원시치 못한다고 말씀합니다.

이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라 원시치 못하고 그의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었느니라 (벧후1:9, 개역한글)

5-8절까지는 긍정적인 그리스도인의 성장에 대해서 말했고 9절은 부정적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바리새인들에게 소경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주님에 대해서 참된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소경이라고 불렸습니다.

9절의 '소경' '원시치 못하고' '옛죄' 특별히 마지막 부분은 기억과 관련된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이러한 상태에 들어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주님의 쓰임을 받을수 있는 상태에 있어야 합니다.

시몬 베드로에서 '시몬'은 옛날 이름을 말합니다. 베드로로서 그의 성장을 말해줍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이와같이 그이 본을 따라야 합니다.

<여기서 옛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었느니라> 이것은 기본적으로 죄사함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을 말합니다.
옛 사람은 죽었다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은 나타내야 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그는 그렇지 못하고 있습니다.(9절의 사람)

원시치 못하다는것은 그들은 미래를 보지 못하고 지금만 생각하며 살고 있는것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영적인 것을 생각지 못하고 물질적인것만 생각하고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영원의 영광을 생각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가 잊었다는것은 주님께서 보배로운 피를 흘려 그를 구원한 목적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대해서 이렇게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우리가 침례받고 어떠한 삶을 살게 되나요?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우리는 살아야 합니다. 주님의 뜻을 따라 주님을 섬기는 삶을 살기를 원해야 합니다. 이 모든것을 구원받은 구속과 관련해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구원의 복음을 실제적인 삶에서 드러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침례로 고백하게 됩니다. 그런데 침례받고 나서 그러한 것들을 하지 않겠다고 하는것은 전혀 맞지 않는 것입니다.

10-11절 마지막 말씀을 보겠습니다.

10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
11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벧후1:10-11, 개역한글)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하라> 그리고 이것을 행하라고 말씀합니다.
이 부르심과 택하심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입니다.

부르심이 먼저 일어나는 것이고 택하심이 그 후에 일어나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을 어떻게 굳게할수 있습니까?
이 택하심은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복음으로 우리를 부르셨을때 우리가 긍정적으로 반응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택하심안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11절을 보시겠습니다.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벧후1:11, 개역한글)

우리가 1장에서 말하는 바를 행하면 우리는 하늘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받게 됩니다.
믿음의 덕을 공급하였을때에, 그리스도인들의 사업을 위해서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였을 때, 우리는 이 나라에 넉넉히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이땅에서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였을때 하나님께서 이 영원한 나라에 필요한것을 공급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행한 일들을 바라보시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주십니다.
우리가 이땅에서 지불한 모든 비용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모두 계산하시고 보상해주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고려할때 우리의 삶은 완전히 다른것이 되는 것입니다.

1-4절까지는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것, 5-10절까지는 우리가 공급해야 하는것, 11절은 하나님께서 보상해주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