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강단말씀 요약글 모음/2016년 플러싱수양회(요약)

<뉴욕 플러싱 여름 수양회 22. 예배7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 >

박이레 2022. 7. 13. 23:44

2016년 9월 28일 수요일

강사 : 정형모 형제님

<뉴욕 플러싱 여름 수양회 22>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 >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요4:23, 개역한글)

오늘 저희들이 마지막 시간에 예배하는 자세와, 예배하는 태도와, 예배하는 영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고 계십니다. 이것은 저희가 첫시간에 살핀 것입니다.
이스라엘인은 하나님의 선민이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에게 가지고 있던 자세를 보겠습니다.

이사야서 말씀을 보면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공경하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에스겔서 말씀을 봐도 비슷한 말씀이 있습니다.

<입술과 입술로는 나에게 가까이 하나 마음은 멀도다>

구약에는 일곱 여호와의 절기가 나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땅에 오셨을때 '유대인의 절기'라고 말합니다. 변질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고 선민이었지만 입술로만 하나님을 사랑하고 위선했고 마음은 하나님께로부터 멀었습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변질되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선 하나님의 요구에 맞춰야 합니다.
첫째, 예물을 드리는 자의 태도나, 예물이나, 희생이 열납되어야 합니다. 어떤자세로 우리는 예배드려야 할까요?

하나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십니다.
우리의 예배는 신령해야 합니다. 영적인 예배를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히4:12, 개역한글)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날카로운지, 우리몸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합니다.
위의 예는 육입니다만, 또 <영과 혼>도 쪼갭니다. 분리하는 것입니다.

영은 육체적인것이나 감정적인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소통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받기 전에 영으로 죽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교제할수 없고 하나님의 소리를 들을수 없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수 없고 하나님께 기도드릴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게되면 성령이 내안에 내주하시고 내 영이 살게 됩니다. 그래서 셩령과 내영은 함께 갑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성도는 하나님께 예배드릴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혼으로 예배드리는 것이 아니라 영으로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후 항상 그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때로는 성령을 근심시켜드립니다. 예수님께서 떠나시기 전에 <다른 보혜사>를 이땅에 보내신다 하셨습니다. 그분이 성령님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성령님께서 근심하시게 됩니다. 이때 우리가 자백하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할수 없습니다.
또한 <성령을 소멸시키는> 일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못했을때에 하나님께 자백하지 않고 그 잘못을 고치지 않고 내 맘대로 행하면 그것은 성령을 소멸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19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20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21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엡5:18-21, 개역한글)

성령이 충만할때 여기 네가지 모양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 합니다.
우리의 마음으로 화답하는 것이 아니라 신령한 것으로 화답하게 됩니다. 우리가 주님과 교통교제할때 참으로 높은 수준의 대화로 화답하게 됩니다.

우리의 삶에 걸리적 거리는게 있다면 그것은 화답이 아닙니다. 가장 고상한 대화는 화답입니다. 화답은 평화가운데 답하는 것입니다.
이땅에서도 천상의 교제를 느끼는 것은 성령이 충만할 때 가능합니다.

둘째, <노래하며 찬송하며> 입니다.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자는 범사에 찬양하는 자입니다. 찬송에도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고난가운데 찬양하고 소망가운데 찬송하기도 합니다. 그 중 예배 찬송이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아드님의 깊은 묵상이 담겨 있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고고한 사람들이 가장 아름답게, 가장 고상하게 하나님을 예배한 시가 있습니다. 시편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예배할때 그런것으로 예배하고 노래하고 찬양하고 그런 생활이 지속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옛날 선조들은 대화할때 성령에 취한것이 아니라 술에 취해서 시를 썼습니다.
그 시를 쓰는 자들은 세상에서 가장 고상한 지식을 알고 그런 것들을 누릴줄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끼리만 서로 시를쓰고 대화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그런 세속적이고 육적인 것이 아니라 신령하고, 성령이 충만한 가운데 화답하고, 범사에 감사할수 있습니다.
때때로 힘들고 고통스럽더라도 하나님앞에 감사할수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실때 감사할수 있습니다. 그리고 피차 복종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권력에 오르고 높이 오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다릅니다. 피차 복종할때 하늘나라에 갈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늘나라에 갈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안에 내주하실때, 우리 영혼이 성령에 젖어 있어야 하고 성령과 동해하고 따라야 합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고전2:14, 개역한글)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고전2:16, 개역한글)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2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고전3:1-2, 개역한글)

여기서 '밥'이라는 것은 '고기'입니다.

여기 세가지의 사람이 있습니다.
제일 첫번째는 육에 속한 자입니다. 그는 자연인입니다.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그 죄성을 전수받은 사람입니다. 그는 영에 속한것을 전혀 알수 없습니다.

믿는사람도 두가지 종류입니다. 육신에 속한 사람이 있고, 신령한 사람입니다.
육신에 속한 사람은 구원받았지만 아직 어린아이 입니다.
우리가 망령된 행실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망령된 행실이 계속 나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예배드리기 어렵니다.

어떤 사람이 육신에 속한 사람입니까? 그 사람은 젖만 먹고 고기는 먹지 못합니다.
성인은 젖도먹고 고기도 먹을수 있습니다. 고기를 왜 먹습니까? 고기는 씹을수록 더 맛이 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수록 그대로 받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해할수 없고 어린아이는 모르지만 성인은 아는 것입니다.

다시한번 말씀드리지만 예배는 성숙과 관련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에서 성숙한 이들은 전쟁에 나갈만한 계수받은 자들이요, 그들보다 더 성숙한 자들은 레위사람으로 하나님께 봉사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보다 더 성숙한 사람은 제사장입니다.

예배를 드린다는것은 성숙을 요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령으로 예배드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시야가 예수님을 발견해야 합니다.

시편 119편을 보면 <내 눈을 밝혀서 주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마포모임에는 '시율'이라는 아이가 있습니다. 시율(주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 입니다.
마음에 참으로 남는 이름입니다. 법속에 있는 기이한 것을 보게하소서.

우리가 말씀속에 있는 주님의 기이함을 우리가 보지 못하는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성령의 힘으로 주님의 기이한 것을 봐야 합니다. 아가서 말씀에 우리 주님을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전체로 사랑스럽구나>

일부분이 아니라 전체가 아름다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령한 예배를 찾고 계십니다.
우리가 육신에 속하거나 세속적이거나 우리의 생각이 산만해지는것 말고 우리의 생각이 성령이 충만한 가운데 우리 주님을 깊이 묵상하고 즐거야 합니다.
이것은 주님을 발견하기 때문에 즐거운 것입니다.

우리 형이 딱지치기를 아주 잘했습니다.
딱지치기를 해서 모은 딱지를 땅을 파서 뭍었습니다. 얼마있다 다시 파보니 그 딱지들은 썩어있었습니다.
형은 모으는것을 좋아했습니다. 온갖종류의 딱지를 모으는데 빠졌습니다.

저는 형의 딱지모을때 얼굴을 압니다. 그 희열의 얼굴이 대단합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우리 주님의 모습을 찾는 재미를 알기를 바랍니다.
그것을 알때 예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힘들어도 말씀속에서 그 보화를 찾을때에 마음속에 즐거움이 있는 것입니다.
이 즐거움을 아는 사람은 그 발견한 것을 예수님께 말씀드리면서 기쁨을 누립니다.
발견할때 기쁘고 말씀드릴때 기쁩니다.

두번째, 하나님께 예배드리는자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라'고 했습니다.
진정은 '진리'입니다. 곧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진실'하게 드리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인은 하나님 앞에서 말로 멋드러지게 예배하는데 그 속은 아무것도 없다면 얼마나 분통 터지는 일입니까?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했습니다.

로마시대에 위대한 조각들이 많이 있습니다.
조각을 컨테스트 할때 뜨거운 뙤악볏아래 세워놓습니다. 세워놓고 왁스를 뿌렸나 안뿌렸나(예전에는 잘못만든 조각품을 가리기 위에 그위에 왁스를 발라 잘못된 모양을 보정하기도 했습니다) 검사하는 것입니다. 뜨거운 햇빛을 받은 조각품에 바른 왁스가 녹아내리기 때문입니다.

이것으로 그 조각품이 진실한가 진실하지 않은가를 판가름 합니다.
정확하게 조각한 조각품이 진실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드릴때에 우리가 입술로는 엄청나게 예배드릴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우리는 진실하지 않은 사람과 사귈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진실로 예배드릴뿐 아니라 신실하게 예배드리는 자를 찾으십니다.

아모스나 선지자의 글을 읽어보면 이중장부, 위선은 언제나 선지자들에게 책망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진실한 예배를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전에 만찬을 드리기 전에 정리하고 나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진실한 예배가 아닌 것입니다.
우리의 생활속에서의 잘못들을 주님앞에 자백하지 않고 덤벙덤벙 산다면 주님앞에 진실하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죄악에 빠트리는 것입니다.

예배를 준비하게 될떄, 바구니에 하나님에 대한 묵상, 주님의 묵상을 담아서 가야 합니다. 바구니가 가득해야 합니다.
우리는 바구니에 가득 담아갈뿐 아니라 주님앞에서 항상 검사하고 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항상 아무리 안되도, 매일매일 주님앞에 자백하고 가야 합니다.
'분을 내어도 해가 질때'까지 가지고 가서는 안됩니다. 부부싸움을 하더라도 계속해서 냉전으로 가서는 안됩니다.
부부관꼐뿐 아니라 성도 사이의 관계도 정리하고 가야합니다. 주님앞에서의 일도 정리하고 가야 합니다.

다윗이 범죄했을때에 다윗을 즉시 회개하고 시를 썼습니다.
<중심의 진실함을 하나님꼐서 원하시오니>

하나님께서는 '중심의 진실함'을 원하십니다.
우리의 죄는 철저하게 판단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것들에서 핑계나 모오함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투명하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눈으로는 그냥 넘어갈수 있으나 하나님 앞에서는 숨길수 없습니다. 주님앞에서 진실함은 꼭 필요한 것입니다.

세번째, 우리는 예배드릴때 지성적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아버지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사도바울 형제님은 많은 서신서에서 이와같은 말씀을 많이 하십니다.

알기를 원한다고 하지 않으시고 모르기를 원치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대단한 강조입니다.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조심할것이 있습니다.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고전8:1, 개역한글)

지식은 교만하게 하고 사랑은 덕울 세웁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알게될때 첫째로, 무지가 덕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주님의 말씀을 읽고 주님의 뜻을 발견하고 성령님을 깊이 묵상하고 즐겨야 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기억해야 할것은 <지식은교만하게 하고 사랑은 덕을 세운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 지식을 심령으로 알아야 합니다.
이 지식이 우리를 교만하게 만드는곳으로 가서는 안됩니다.

예배를 드릴때에 지식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세월이 갈수록 하나님에 대해서 더많이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자를 찾으십니다.
하나님은 그 아들에 대해서 감사하고 예배드리는것을 기쁘게 받으십니다.

참으로 오랜 세월동안 선지자를 통해서 메시아가 올것을 얼마나 많이 예언하고 마침내 주님께서 오셔서 고난과 슬픔을 통과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것을 역사와 함께 따라가셨습니다. 주님께서 오셔서 고난당하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이 모든것을 이루셨습니다.

그 아들이 얼마나 고귀하고 위대한 분인가를 말하는 사람들의 예배를 하나님은 그렇게 듣고자 하십니다.
우리는 말씀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지식으로 교만해지면 안됩니다.

이 지식은 하나님 앞에 드려야 합니다. 사람들 앞에 자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지식은 마음을 감동시키는 지식입니다.

고린도전서 10장에서 사도바울은 <하나님께 영광이며 다른사람에게 유익이다>라고 했습니다.
내가 아는 지식이 하나님께 영광을 못드리고 사람들에게 유익을 끼치지 못한다면 이 지식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무슨 지식을 알아야 합니까? 아버지 하나님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해서도 알아야 합니다. 나 자신이 얼마나 불행하고 누추한 사람이었으며 하나님께서 이런 나를 어떻게 구원하셨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알때에 하나님께 감사하게 됩니다.

이런나를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나를 아시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뜻을 가지고 이 교회를 세우시기 위해서 얻으시기 위해서 그 아들이 어떠한 고난을 당하셨습니까?

이 놀라운 진리를 우리는 하나님 말씀에서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예배를 드리게 될때 어떤결과가 올까요?

우리가 신령과 진정으로, 그리고 주님을 아는 지식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예배드리게 될때 어떤 결과가 나오겠습니까?

물론 우리가 예배드리는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해서 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하나님께서 마땅히 앉으셔야 할 자리로 모셔드리는 것입니다. 이세상은 예수님을 부인하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악한 곳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마땅히 앉으셔야 할 보좌에 모셔드리는 것입니다.

영국왕이 보좌에 앉아있었습니다. 그런데 찬송가가 울려 퍼졌습니다.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이신 예수님께서 다시오신다" 그때 영국왕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왜냐하면 만왕의 왕이 오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무식한 사람들은 그 찬송이 울려퍼져도 그대로 앉아 있습니다.

우리는 예배드리게 될때 주님의 영광을 구해야 합니다. 주님을 합당한 자리에 앉혀드려야 합니다.
만일 그분을 그분 자리에 앉혀 드렸다면 우리는 어떻게 행해야 겠습니까?
전해지는 말씀에 토를 달수 있겠습니까?

첫번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구해야 합니다.
예배와 우리의 삶을 구분해서는 안됩니다. 예배는 예식일 뿐만 아니라 우리 삶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릴수 없습니다.

진정한 예배를 드리는 개인, 가족, 모임의 삶은 달라지는 것입니다.

두번째로 하나님은 빚지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는 참 힘들게 예배를 드립니다.
종이나 노예는 힘들게 일을 합니다. 그러나 그 보상은 밥세끼 정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공경하고 섬기게 될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반드시 주십니다. 하나님은 주시는 분입니다. 복의 근원이십니다.

어떤 복을 주시겠습니까?
첫번째는 즐거움입니다. 기쁨입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눅6:38, 개역한글)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실때 쩨쩨하게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후히 되어 주시며,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주십니다.
우리는 예배드릴때 기쁨을 얻습니다. 또한 주님께서 기쁨을 주십니다.

9 여자 중 극히 어여쁜 자야 너의 사랑하는 자가 남의 사랑하는 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가 너의 사랑하는 자가 남의 사랑하는 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기에 이같이 우리에게 부탁하는가
10 나의 사랑하는 자는 희고도 붉어 만 사람에 뛰어난다
11 머리는 정금 같고 머리털은 고불고불하고 까마귀 같이 검구나
12 눈은 시냇가의 비둘기 같은데 젖으로 씻은듯하고 아름답게도 박혔구나
13 뺨은 향기로운 꽃밭 같고 향기로운 풀언덕과도 같고 입술은 백합화 같고 몰약의 즙이 뚝뚝 떨어진다
14 손은 황옥을 물린 황금 노리개 같고 몸은 아로새긴 상아에 청옥을 입힌듯하구나
15 다리는 정금 받침에 세운 화반석 기둥 같고 형상은 레바논 같고 백향목처럼 보기 좋고
16 입은 심히 다니 그 전체가 사랑스럽구나 예루살렘 여자들아 이는 나의 사랑하는 자요 나의 친구일다
(아5:9-16, 개역한글)

여인은 사랑하는 자가 아름다운 이유를 서론, 각론, 결론으로 말합니다.
세상은 우리 주님을 싫어하고 멸시합니다.

성막을 보면 제일위에 덮는것은 흉악하게 보이는 털로 덮습니다. 그러나 성막으로 들어가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주님께서 이땅에 오실때에 그랬습니다.

사람들은 "나사렛에서 선한것이 날수 있느냐?" 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에 대한 깊은 기쁨과 만족이 있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과 같은 주님에 대한 만족이 있습니다.
그 뿐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애인에 대한 '자랑'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제일 멋져야 합니다.

입은 심히 다니 그 전체가 사랑스럽구나 예루살렘 여자들아 이는 나의 사랑하는 자요 나의 친구일다 (아5:16, 개역한글)

이렇게 이야기하는 여인은 말하면서도 즐거운 것입니다.
주님을 발견하며 예배를 드리면, 아버지하나님께서 얼마나 즐거워 하시며 미소지으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아버지가 좋아하는것을 선물로 드리면 아버지는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그럼 선물을 드리는 자식들도 기뻐하는 아버지를 보며 기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할때 왜 기쁩니까? 주님께서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예배드리는 사람은 더욱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예배드리는 사람은 더욱 예배 드리고 헌신하고 봉사하고 더욱 기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는 동기는 예배안에서 흘러가는 것입니다.
베다니 마리아가 주님께 어떻게 예배했습니까? 주님의 그 발에 향유를 부었습니다. 베다니 마리아의 그 헌신은 참으로 큰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 기뻐하셨습니다.

베다니 마리아 빼고는 아무도 예수님께서 돌아가신다는것을 몰랐고 예수님을 대적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아무도 모르는 어떤 도시에 간다면, 그곳에서 만일 한국사람을 만난다면 얼마나 반갑고 기쁘시겠습니까?
주님께서 이땅에 계실때 아무도 없고,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베다니 마리아가 주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주님께서 기뻐하셨습니다.

그 기뻐하심으로 마리아도 기뻐했습니다. 마리아의 보상은 주님께서 기뻐하신 것입니다.
이세상은 주님을 미워하고 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에서 고개를 돌려 주님께 와서 주님께 예배드리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그리고 우리가 주님께 예배를 드리게 될때 우리 마음은 고조되는 것입니다.
이 고조되는 것은 이세상에서 얻을수 없는 것입니다.
봉사하며 헌신할때,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럴때 때때로 낙심이 되고 슬프게 됩니다. 그럴때 성도들이 위로하는 위로가 얼마나 고맙습니까.

사도바울은 말했습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가고 끝까지 믿음을 지켰다>

바울은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얼마나 많이 맞았습니까? 동족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산의 위험, 얼마나 많은 위험을 겪었습니까? 그뿐 아니라 성도들까지 사도바울에게서 등을 들렸습니다.
이런데도 사도바울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끝까지 가고 믿음을 지켰습니다. 왜 입니까?

사도바울은 예배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예배할때 마음이 고조됩니다. 세상은 사도바울을 반대하지만 하나님은 사도바울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나는 일편단심 내마음을 그분에게 드린다.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워도 고조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은 하늘을 바라봐야 합니다.

주님께 예배드릴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기쁨을 주십니다. 그리고 내 마음속에 참된 만족 성취감이 있습니다. 또한 그 마음이 고조되기 때문에 더욱 더 주님을 섬기고자 합니다.

그리고 떡과 잔, 만찬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만찬 앞에서 과거를 기념할때 주님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앞을 볼때 어떻습니까?
<너희가 이것을 자주 행함으로 주의 죽으심을 오실때까지 전하는 것이라>

주의 죽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예배로 어떻게 주님을 전합니까? 예배는 보이는 것입니다. 예배드리는 것을 보임으로 세상을 향해서 주님을 계속해서 전파하는 것입니다. 복음의 방법입니다.

어떤 메세지가 끊이지 않고 계속해서 전파되는 것은 얼마나 중요합니까?
예수님의 죽음은 이세상의 어떤 비지니스보다 가장 중요합니다.
이 메세지를 만찬을 통해서 주님께서 오실때까지 선포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예배를 통해서 다음세대를 교육합니다.

하나님께서 유월절을 제정하실때 어떻게 하셨습니까?
한가족이 다 모여서 피흘린 양을 삶은 고기를 먹었습니다. 그리고 장자가 죽는것을 면했습니다. 그리고 맏아들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길갈이 열두돌이 있습니다. 거기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이들이 "이것이 무엇입니까?" 라고 물으면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 조상들이 마른땅을 건넜다> 라고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서 다음 세대들을 교훈합니다.
저는 구원받기 전 예배시간에 예배드리는 것을 보고 한가지 이상하게 생각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사람들은 뭐가 그리 감사할까?' 인 거입니다.

그당시 성도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것을 봄으로 인해 제 마음에는 엄청난 도전이 되었습니다.
'왜 감사할까?'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나중에 구원받고 깨닳았습니다. 예배라는것은 지역교회의 간증입니다.

예배라는 것은, 만찬이라는 것은 지역교회가 하는 것입니다. 지역교회가 연합된것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드릴때 떼는 것은 한떡과 한잔입니다. 연합된것을 가시저긍로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배를 통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많은 결과가 있습니다.
저희들이 주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고, 우리의 감사와 봉사와 헌신이 지속적으로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이삶은 생활속에서 계속해서 이어져야 합니다. 그래야만 주일날 주님께 예배드릴때 주님께서 기뻐 받으실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저희들을 인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