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강단말씀 요약글 모음/2016년 플러싱수양회(요약)

< 뉴욕 플러싱 여름 수양회 12. 복음말씀 >

박이레 2022. 7. 13. 23:35

2016년 9월 25일 일요일

강사 : 한봉래 형제님

< 복음말씀 >

13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14 너는 잣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짓되 그 안에 간들을 막고 역청으로 그 안팎에 칠하라
(창6:13-14, 개역한글)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 (히11:7, 개역한글)

제가 세사람의 믿음과 구원에 대해서 살피고자 합니다.
첫번째는 노아입니다. 노아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땅에서 살면서 호흡하는 모든 생물을 물로써 심판하겠다"
그리고 방주를 지을것과 어떻게 지을 내역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노아는 방주를 지었고 하나님께서 경고하신대로 홍수가 나서 이땅에 호흡하는 모든 생물들이 죽었습니다. 오직 방주안에 들어간 생명들만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믿지 않은자, 구원받지 않은자는 백보좌의 심판대 앞에 설 것입니다.
그리고 이 진노의 심판을 피할수 있도록 예수님의 십자가를 제시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에서 노아가 홍수의 심판을 받아들이고 방주를 지었듯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로운 십자가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와 노아와 공통점 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을 알았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피할 방법을 알았습니다. 그럼 노아와 같은 반응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서 노아는 그와같은 받응을 한것일까요?

믿음으로 경고하심을 받아 그와같은 진노를 피했는가를 살피고자 합니다.

먼저 세상에 있는 예를 살피겠습니다. 2차 세계대전 때 일본 히로시마에 미국 비행기가 삐라를 뿌리고 갔습니다. 삐라의 내용은 이것입니다. 몇월 몇일 히로시마 상공에 폭탄이 떨어질 것이니 대피하십시오.
원자탄이라는 것은 이전에는 없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원자탄이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히로시마 시민들이 삐라를 읽고 피한다면 살수 있을것입니다. 그러나 삐라를 읽고서도 그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원자탄의 투하를 경험해야 했습니다.

미국군대의 경고를 무시한 사람은 그 대가를 지불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경고가 있습니다. 믿지 않으면, 죄용서함을 받지 않으면 그는 영원토록 부활해서 그 끔찍한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문제는 이것을 실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보면 노아시대에서는 비 한방울 내린적이 없습니다. 비라는 것은 노아홍수 후에 생긴것입니다. 그 전에는 하나님께서 이슬로 이 지구의 모든 습기를 공급하셨습니다.
비도 경험한 적이 없는데 하나님께서 홍수를 말씀하셨습니다. 실감할수 있겠습니까?

노아 당시의 사람의 숫자가 얼마인지 모릅니다만, 추즉 하기로는 최소 10억의 인구가 살았을것으로 예상합니다. 그 중 노아가족 8명만 구원받습니다.
다시 말하면 주위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믿지 않았을 뿐 아니라 조롱했을 것입니다. 비도 내리지 않는데 산위에 방주를 120년이나 만들었습니다.
크기가 어마어마한 배입니다. 사람들이 왜 배를 만드는지 물어봤을것입니다. 그때 노아는 홍수를 대비한다고 하나님께 들은대로 말했을 것이고 전부 비웃었을 것입니다.
세대와 다르게 믿음의 길을 간 사람이 노아 입니다.

우리들은 가족들이 예수님을 믿고 친구들이 예수님을 믿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노아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방주를 120년에 거쳐 지었습니다. 어떻게 그럴수 있을까요?

성경은 믿음이라고 합니다. 또 다르게 말하면 하나님을 경외했기 때문입니다. 경외함은 두려움입니다. 무서운 드려움이 아니라 존경심을 가진 두려움인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 경외심이 노아가 방주를 짖고 순종하게 한것입니다.
노아는 심판의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이 심판을 말씀하신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 때문에 방주를 지은 것입니다.

경외심은 아버지를 존경한다, 대통령을 좀경하거나, 학교 선생님을 존경한다는 것은 그 사람들의 말씀을 내 판단보다 높이 두는 것입니다. 그 말을 어기는 것을 두려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거짓말 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하신 말씀이시라는 것을 안다면 내 판단을 앞세우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순종하는것이 경외심입니다.

한국만화 성경을 보면 방주를 배 모양으로 그립니다. 그러나 사실 성경을 보면 거대한 네모상자 입니다.
창세기에는 네모상자가 세번 나옵니다. 첫번째는 노아의 방주 상자이고 두번째는 모세의 네모 상자입니다. 모세가 어릴때에 바로 왕이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모두 강에 던지게 했습니다. 모세의 부모가 아이를 6개월 아이를 숨겼습니다만 더이상 숨길수 없어 아이를 상자에 넣어 나일강에 떠나 보냅니다.
세번째, 네모상자는 언약궤 입니다.

노아의 방주는 하나님의 심판에서 우리를 보호해 줍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그림자로써 가리키고. 있는것입니다.
모세의 상자는 악한 왕, 사단의 공격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준 상자입니다.
세번째, 언약궤 안에는 돌판이 들어가 있습니다. 돌판은 율법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언약궤가 우리를 보호해 주고 계십니다.

세가지 보호를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으로부터, 사단의 공격으로부터,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어겼다는것에 대해서부터 입니다. 그리고 이 세개의 상자속으로 들어갈수 있는것은 경외심입니다.
경외심은, 내 생각과 다른 하나님의 말씀을 높이는 것입니다.

두번째 사람으로 가 보시겠습니다.

1 아람 왕의 군대장관 나아만은 그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니 이는 여호와께서 전에 저로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 저는 큰 용사나 문둥병자더라
2 전에 아람 사람이 떼를 지어 나가서 이스라엘 땅에서 작은 계집아이 하나를 사로잡으매 저가 나아만의 아내에게 수종들더니
3 그 주모에게 이르되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저가 그 문둥병을 고치리이다
4 나아만이 들어가서 그 주인에게 고하여 가로되 이스라엘 땅에서 온 계집아이의 말이 이러이러하더이다
5 아람 왕이 가로되 갈찌어다 이제 내가 이스라엘 왕에게 글을 보내리라 나아만이 곧 떠날쌔 은 십 달란트와 금 육천개와 의복 열벌을 가지고 가서
6 이스라엘 왕에게 그 글을 전하니 일렀으되 내가 내 신하 나아만을 당신에게 보내오니 이 글이 당신에게 이르거든 당신은 그 문둥병을 고쳐주소서 하였더라
7 이스라엘 왕이 그 글을 읽고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내가 어찌 하나님이관대 능히 사람을 죽이며 살릴 수 있으랴 저가 어찌하여 사람을 내게 보내어 그 문둥병을 고치라 하느냐 너희는 깊이 생각하고 저 왕이 틈을 타서 나로 더불어 시비하려 함인줄 알라 하니라
8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이 자기 옷을 찢었다 함을 듣고 왕에게 보내어 가로되 왕이 어찌하여 옷을 찢었이나이까 그 사람을 내게로 오게 하소서 저가 이스라엘 중에 선지자가 있는 줄을 알리이다
9 나아만이 이에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이르러 엘리사의 집 문에 서니
10 엘리사가 사자를 저에게 보내어 가로되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번 씻으라 네 살이 여전하여 깨끗하리라
11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가로되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12 다메섹강 아마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이켜 분한 모양으로 떠나니
13 그 종들이 나아와서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을 명하여 큰 일을 행하라 하였더면 행치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14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씀대로 요단강에 일곱번 몸을 잠그니 그 살이 여전하여 어린아이의 살 같아서 깨끗하게 되었더라
(왕하5:1-14, 개역한글)

나아만이 문둥병이 낫는 장면입니다.
1절에 보시면 나아만을 표현하기를 그는 그 왕앞에 참으로 존귀한 자며 귀중한 신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아주 중요한 전투에서 그가 승전했기 때문입니다. 그 전쟁에서 이기지 못했다면 아람 왕국은 이땅에 없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 중간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 이는 여호와께서 전에 저로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니라 >

그는 몰랐겠지만 그가 전쟁에서 자기 나라를 지킬수 있는 놀라운 공적을 쌓은 것은 하나님꼐서 그의 생을 축복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의식하지 못해도 하나님께서 그의 삶에 개입해 계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가 높이 오르고 국가의 높은지위에 오르는 축복이 아니라 그가 엘리사를 만나 오직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인것을 알게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진정 주시고자 하는 축복입니다.

그래서 그가 세상에서 위대한 사람이 되는 축복에 한가지를 더 추가하셨습니다. 그가 문둥병자인 것입니다.
물론 이스라엘 같았으면 그는 격리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시리아인이었습니다.

이 문둥병은 그에게 큰 절망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 문둥병으로 인해 이 세상의 것을 마음껏 누릴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집중하고자 하는것은 나아만이 엘리사에게 가서 고침을 받기까지 또 이스라엘 하나님을 참 하나님으로 인정하기까지 <내 생각>을 내려놓는것을 보게 됩니다.

나아만은 처음엔 화가나서 선지자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자기 생각을 내려놓고 선지자의 말을 들은 것, 이것이 경외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자기 생각을 내려놓고 복종하는것, 이것이 경외심이요 믿음입니다.

아람은 이스라엘과 국경을 대고있는 나라였습니다.
그래서 종종 전쟁이 있었고 약탈과 침범이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이스라엘에서 작은 계집아이를 잡아왔고, 집에서 허드렛일을 시켰을것입니다. 아주 작은 어린아이를 통해서 하나님은 복음을 듣게 하십니다.
문둥병은 아무도 고치지 못합니다. 그러나 작은 여자아이가 문둥병이 나을수 있는 방법을 알려 줍니다.

그 말을 한 아이는 어리며, 종이며, 포로였습니다.
그의 말을 들어야 하겠습니까? 그는 자기의 지위와 경험을 다 내려놓고 작은 계집아이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여기서 내 생각을 복종 시키도록 하나님은 만들어가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작은 계집아이의 말 외에는 문둥병을 고칠 방법이 어디에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인 나아만 장꾼께서 사마리아에 있는 엘리사에게 있었으면 좋겠나이다 그가 주인의 병을 고치리이다"
여자아이는 분명한 복음을 전했지만 나아만은 잘못갔습니다. 이스라엘 왕에게 간 것입니다.
그리고 금과 은과 옷과 같은 보물들을 들고 갑니다. 자기의 생각을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왕이 어찌 그 병을 고치겠습니까?

그래서 엘리사가 "나에게로 보내십시오" 라고 합니다. 나아만은 보물들을 들고 엘리사에게로 갑니다. 엘리사는 나와보지도 않았습니다. 나아만은 인접국가의 장군입니다. 인간적으로 치자면 엘리사는 반드시 나와 인사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나오지 않습니다. 이것이 영적인 일인것을 안 것입니다.

그래서 종을 보내서 요단강에 일곱번 몸을 담그라고 명합니다.
이것을 순종할까요? 내가 이런 대접을 받는데요? 그는 이런 대접을 받아본적이 없을 것입니다.
자기가 찾아왔는데 나와보지도 않고 모멸감을 느끼게 만드는 요구를 하는 이 말을 들어야 할까요?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기생각을 낮추고 계신 것입니다.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는 중대한 이유는 '자기 생각' 때문입니다.

그때 나아만의 종이 놀라운 역할을 합니다. "만약에 저분이 큰일을 하라 했어도 우리가 했을 것이 아닙니까?"
구원받기 위해서 열심히 합니다. 행위로 구원받을수 있다면 성경도 읽고, 교회도 참석하고, 금식도 할것입니다.
지옥을 면하고 천국에 들어갈수 있는데 안하겠습니까? 그러나 그길을 천국에 들어갈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사람의 행위로 들어가는 길은 천국길이 아닙니다.

천국에 들어가는것은 하나님께 인정받을만 한 일을 해서가 아닙니다. 우리는 천국에 들어갈수 없는 죄인입니다. 죄인이 무엇을 한다고 하나님께서 받으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그 아들이 하신 일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우리가 하나님께 뭔가를 열심히 해드리는것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것이 나은 것입니다.

그 종이 말했니다.
"요단강에 씻으라고 한것보다 더 위대한 일을 하라고 했어도 할것이었는데, 이 간단한 일을 왜 못하십니까?"
그래서 나아만이 요단강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가 낫습니다.

그래서 그는 인정합니다. 요단강 물이 깨끗해서 나은것이 아닙니다. 선지자가 훌륭해서 나은것이 아닙니다.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그를 낫게 하신것입니다.

노아는 보지도 못한 홍수 심판에 대해서 준비했습니다. 그 마음은 경외심으로 가득 차 있었고, 120년간 홀로 어마어마한 방주를 짖습니다.
나아만 장군은 그 문둥병을 낫기 위해서 끝까지 자기 생각을 버려놔야 했습니다.
노아도 자기경험, 자기 판단이 아닌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계속 순종했습니다.

세번째 사람을 보시겠습니다.

43 이틀이 지나매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며
44 친히 증거하시기를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하시고
45 갈릴리에 이르시매 갈릴리인들이 그를 영접하니 이는 자기들도 명절에 갔다가 예수께서 명절 중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음이더라
46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왕의 신하가 있어 그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47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에 오심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주소서 하니 저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48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49 신하가 가로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50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하신대 그 사람이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51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았다 하거늘
52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제 칠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53 아비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았다 말씀하신 그 때인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이 다 믿으니라
54 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니라
(요4:43-54, 개역한글)

여기 또 한사람이 있습니다. 병들 아들을 둔 아버지 입니다.
그의 아들의 병이 아주 중해졌습니다. 성경에서는 거의 죽게 된 것입니다. 아버지의 눈으로보면 죽은것과 같은 상태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시에 가나에 계셨습니다. 그래서 가나에 가서 예수님을 모셔와 죽어가는 아들을 살리고자 하였습니다.
그의 말은 두번이나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려오셔서>
<죽기전에 내려오셔서>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렇게하지 않으십니다. 그저 말씀하십니다.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그 사람은 믿고 갔습니다. 그리고 자기 아들이 산것을 보며 <자기와 온 집이 다 믿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온 가족을 구원받게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거절하셨을찌라도 그것을 영적인 축복을 위한 것입니다.
가나안 여인의 예가 있습니다. 그녀의 딸이 흉악한 귀신이 들렸습니다. 그 여인은 예수님께 귀신을 쫒아내 주시기를 간구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거절하셨습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다"

아주 냉정한 거절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말합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주님께서 "네 믿음이 크도다" 칭찬하셨습니다.

배경을 잠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의 제자를 삼고 침례를 주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 (요4:1, 개역한글)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쌔 (요4:3, 개역한글)

주님께서 유대를 떠나 다시 갈릴리로 가시는것은 주님께서 인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조용히 갈릴리로 가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군중들을 피하셨습니다. 입으로만 주님을 따르는 많은 무리를 피하셨습니다. 주님은 참된 제자들을 찾으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요4:48, 개역한글)

예수님께서는 <너희는>이라는 복수형의 동사를 사용하고 계십니다.
아이의 아버지는 아마도 가버나움에서 와서 여기저기 예수님이 계신곳을 수소문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한 친절한 사람이 그를 예수님께로 인도해 주었을 것입니다.
갈릴리 가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시는 기적을 행한 곳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또 어떤 기적을 행하시는지 보려고 모여들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려고 모여들었습니다.
주님의 기적,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것을 보려고 주님께서 몰려드는 사람들을 주님께서는 원치 않으셨습니다.
주님께서 책망하십니다. "너희는 왜 기적을 보려고 하느냐? 기적을 보면서 왜 기적이 의미하는바를 생각지 아니하느냐?"

기적이 말하는 바는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리의 구원자이심을 믿지 않고 기적과 표적만을 보면서 따라 다니는 사람들을 책망하셨습니다.

< 네 아들이 살았다 >

주님께서는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가버나움으로 갔습니다. 만일 군중들이 정말 제대로 된  기적을 보고 싶었다면 아버지를 따라 같이 가버나움으로 갔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가지 않습니다. 왕의 신하 혼자만 갑니다. 군중들은 진정한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기적이 아니라 주님이 누군가에 대한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이 아버지는 이렇게 믿지 못했습니다.
"예수님 내 아들이 죽기전에 내려오십시오"
그는 자기 아들이 죽는다 해도 그 아들을 살려주실수 있다고 믿지 못합니다. 병은 고치실수 있다고 믿지만 다시 살려내실것을 믿지 못합니다. 그리고 먼곳에서 예수님께서 아들을 살리실것을 믿지 못합니다.

그래서 계속 같이 내려가자고 하는 것입니다.
그의 믿음은 연약합니다. 그의 믿음의 근거는 예수님께서 물을 포도주로 만든 기적에 근거해서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기적에 근거한 믿음을 원치 않으십니다.

많은 분들이 어떻게 구원받으셨습니까? 하고 물으면 기적에 근거한 구원을 말합니다.
"병원에서 불치의 병이라고 한 병을 기도원에서 기도했더니 고쳐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고쳐주신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것이 틀림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이와같은 간증이 많이 있습니다.

"제가 기도했더니 방언이 터졌습니다. 방언이라는 것은 사람이 할수있는 것이 아니고 초자연적인 언어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이것은 성경의 가르침과 어긋납니다.
이 왕의 신하가 주님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꾼것을 근거해서 '그 일을 하셨으니 내 아들의 병을 고칠것이다' 라는 믿음을 가지고 왔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믿음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말씀을 믿는 믿음으로 올라오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온집이 믿으니라>가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을뿐 아니라 예수님의 인격을 믿는 것입니다.

왕의 신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내려갔습니다. 종은 집에서 주인이 언제오나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아들이 나은 것입니다. 그리고 아들을 걱정하고있는 주인의 마음을 생각하며 주인을 만나러 갑니다. 길 중에서 주인과 종은 만납니다.
"아들이 살았나이다"
주인이 언제 그런 변화가 있었는지 뭍습니다. 그 아들이 나은 시간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시간과 일치합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을뿐 아니라 예수님을 믿습니다. 예수님이 누군가를 믿습니다. 그리스요, 구세주요, 하나님으로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계실때 많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니고데모가 한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와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생님임에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로부터 오시지 않았다면 그같은 기적을 행할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수 없느니라"
예수님은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습니다. "늙었는데 어찌 다시 태어납니까?" 요한복음 3장까지 그는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기적을 보고 온 그에게 예수님은 말씀을 주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 말씀을 믿을때 구원받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말씀을 믿을때 이 말씀을 하신 주님이 누군가 하는것에까지 올라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수가성 여인이 나옵니다. 요한복음 4장의 인물들에게는 전부 말씀을 주십니다. 수가성 여인이 예수님의 말씀을 믿습니다. 그리고 성에 들어가서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고 그가 그리스도가 아니냐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수가성 사람들이 듣고 예수님께 와서 이틀을 더 유하기를 청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과거에는 너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믿었지만 이제는 예수님의 말을 듣고 우리가 직접 믿는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으로 와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믿기 위해서는 '자기 생각을 내려놔야 합니다'

신하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집으로 가야지. 그럼 예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그 능력으로 다 죽어가는 내 아들을 살리실거야'
주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더 놀라운 축복을 주시기 위해서 입니다.

그 생각이 거절되고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지 않는 중요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 생각이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내 생각이 말씀보다 위에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기 위해서는 내 생각이 하나님의 말씀위에 복종 되어야 합니다. 노아의 경우가 그러했습니다. 나아만이 그랬습니다. 신약에 와서는 왕의 신하가 그러했습니다.

이제다시 성경앞에 서서 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당신 말씀이 옳습니다. 내 생각이 틀렸습니다. 당신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제 생각을 부인합니다."

<모든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이 죄를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할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해서 하나님 앞에 가는것이 아니고 유일한 해결책은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이 되어 오셔서 십자가에서 단번에 놀라운 속죄를 이루셨습니다. 이 놀라운 일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납득이 가지 않을수 있습니다. 이해가 가지 않을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생각을 내려놓고 '예수님의 피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의 피가 우리의 모든죄를 깨끗케 하지 못하겠느뇨'라는 말씀에 굴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말씀이 높아지기를 원해야 합니다.

이때에 구원이 우리에게 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높이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