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강단말씀 요약글 모음/2016년 플러싱수양회(요약)

<뉴욕플러싱 여름 수양회 8. 시험 >

박이레 2022. 7. 13. 23:32

2016년 9월 5일 월요일

강사 : 한봉래 형제님

<뉴욕플러싱 여름 수양회 8>

< 시험 >

1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2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창22:1-2, 개역한글)

하나님께서 믿는 사람을 시험하십니다. 이 시험은 죄에 빠지게 하는 시험이 아닙니다.  이 시험을 통해서 그의 믿음을 입증하고 그의 믿음을 강화시킵니다.
아브라함의 시험에 대해서 살피겠습니다. 이 대목을 읽을때마다 마음에 엄숙한 생각이 듭니다.

저도 자녀들을 길렀던 입장인데, 아브라함의 시험은 부모가 자녀를 죽여야 하는 시험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입니다. 아브라함은 모든 믿는자들의 생애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생애를 살피는 것입니다. 그의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시험하셨습니다. 자식을 죽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은 보통 세가지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고 합니다. 지식이 있고 감정이 있고 의지가 있습니다. 이 세가지를 시험을 받습니다.

우선 감성적인 면에서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아들>
아브라함의 아들은 미워하는 아들이 아닙니다. 그를 위해 죽을수도 있는 사랑하는 아들입니다.

의지적으로 보면 아브라함은 그 시험을 거절할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것인지 도망갈 것인지 결정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다음 장면을 보면 아브라함은 사흘길을 갑니다. 그는 사흘동안 돌아설수 있었습니다.
저의 상상력을 하나 더해 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산으로 갑니다. 그리고 가는길에 첫째날 노숙을 했을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곤히 자는 아들의 모습을 보고 그래도 죽이기로 결정합니다.

저는 이시간에 지적인 면에서의 시험을 살피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육하원칙적으로 명령하셨습니다. 하지만 왜? 라는 것은 알려주시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유를 알지 못한채 순종해야 했습니다. 아마도 아브라함은 이부분에서 가장 순종하기 어려웠을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어째서 이 명령을 내리셨는지 하나님께서는 설명해 주시지 않았고 아브라함도 그 이유를 납득할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내내 그 시험을 통과하면서, '왜'라는 단어가 그 마음속에 메아리 쳤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에 대해서 어떻게 했는지 신약성경을 통해서 살피겠습니다.

<믿음으로 아나니>
17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18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19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히11:17-19, 개역한글)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알게 됩니다. 지적인 시험을 이길수 있습니다.
이 시험을 받았을때,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첫번째로, 이삭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이 약속한 후손입니다. <너의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땅의 티끌처럼 많아질 것이다> 라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사실 아브라함의 후손은 단수로 쓰였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세상의 모든 인류의 죄가 용서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아브라함입니다.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사람이 취할수 있는 최고의 영광입니다.

그래서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중요한 사람입니다. 그는 죽을수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성패가 달려있는 중요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죽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머리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원하셨을까, 생각했을때 이삭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약속의 후손임을 아브라함은 기억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이삭과 관련해서 말씀하신 것들을 떠올렸습니다. 아브라함이 하갈을 취하여 자식을 낳고 세월이 흘렀을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이것이 이삭과 관련되어서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또한 아브라함이 낮에 장막에 앉아 있을때, <내년에 사라에게서 아이가 생길것이다>라고 약속하시기 위해서 주님께서 천사 둘을 대동하시고 아브라함에게 방문해 주셨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아브라함의 생애 최고의 절정기를 이때로 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만나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라에게 이야기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주님께 접대합니다. 성경에서 주님께서 사람이 접대한 음식을 잡수신 일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 마누아가 주님께 "제가 음식을 준비하겠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주님께서 드시지 않습니다. "번제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드린 빵과 고기를 잡수십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자식이 있을것이다" 그때 아브라함도 웃고 사라도 웃습니다. 이삭의 이름의 뜻이 '웃음'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마음속에 살아 있었을것입니다. '하나님께 능치못할일이 없다'
아브라함의 생애에서 하나님은 두번 말씀하십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너의 능력으로 자녀를 낳을것이 아니다>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능력으로 낳은 자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삭은 아브라함의 능력으로 나을수 없는 자식이었습니다. 사라와 아브라함은 이미 죽은몸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삭을 낳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능치못할일이 있겠는가, 이것이 이삭의 탄생과 관련되어 나타난 교훈입니다.

능치 못할일은, 하나님에게 기이한 일이 있겠느냐, 놀랄일이 있겠느냐? 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렇게 생각합니다.(히브리서) '하나님께서 이삭을 바치라고 하셨다. 그러나 이삭은 죽어서는 안되는 아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갖고 있기 떄문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삭을 내게 죽이라고 하셨으니, 하나님께서 이삭을 다시 살려낼 것이다' 라고 믿은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머리속에 하나님이 설명하지 않으신 그 이유에 대해서 그가 정리한 것입니다.
'나는 죽이고 하나님은 이삭을 살릴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삭을 다시 살리실것을 믿은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조금만 살피겠습니다.
첫번째, 죽은 사람이 살아난다는 것은, -저희들은 성경에서 많은 죽은자들이 살아난 경우를 알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입장에서는 한번도 본적도 들은적도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역사에서도 없던 것입니다.

두번째, 하나님은 능력이 있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실까요? 이 두가지는 다른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삭을 살려낼 능력이 있으시지만 이삭을 살려주시겠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마태복음 8장을 보면 산상수훈이 쭉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산에서 가르치시고 내려오실때에 어떤 한 문둥병자가 예수님께 나아와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원하시면 저를 고치실수 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그에게 손을 내미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그가 문둥병에서 낫습니다. 앞에 산상수훈에서 <심령이 가난한자는 복이 있나니> 그는 심령이 가난합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가 하나님을 볼것이요>

주님께서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신 내용들을 구제적으로 삶에서 사는 사람 한명을 보여주십니다. 그가 문둥병자입니다. "주께서 원하시면, 저를 꺠끗케 하실수 있나이다"
주님은 능력이 있습니다. 그는 주님께서 자기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실것을 믿은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나를 위하여 이 능력을 사용할 것이다' 아브라함은 전례가 없음에도 이것을 믿었습니다.

세번째는, 번제입니다. 번제라고 하는것은 태워드리는 제사입니다. 남김이 없습니다. 이삭은 재가 될것입니다. 한줌의 재가 되어버릴 것이지만 거기서 하나님이 이삭을 살리실것이라고 아브라함은 믿었습니다.
흔적조차 사라져도, 하나님이 이삭을 살려낼것이다. 이것을 아브라함이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렇게 말할수 있습니다. "내가 이삭을 죽인다 할찌라도 하나님이 다시 살려내시리라"

이 결론이 이 과정들을 거쳐서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같은 믿음이 어디 있는가?" 누가 이같이 믿었습니까?
그래서 믿음으로 행한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벗'이라 하는 칭함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브라함의 후손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이 아니고 우리의 믿음입니다.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창22:12, 개역한글)

여기 사자는 우리 주님이십니다.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칼을빼고 이삭을 죽이려 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말리셨습니다. "손대지 말라"
말리지 않았으면 아브라함은 이삭을 죽였을 것입니다. 이것은 실제적인 순종입니다. 이것이 입증이 된 것입니다.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하나님의 성품 중 첫번째가 전지 입니다. 하나님은 모든것을 아십니다.
만물보다 부패한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또한 모릅니다. 천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마음속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의 마음을 아십니다. 하나님은 전지하십니다.

두번째,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하나님이 못하시는 것이 없습니다. 실패한것처럼 보여 하나님은 그 일을 이루어 내십니다.

세번째 하나님은 편재하십니다. 어디에나 계십니다.
네번째, 하나님의 생각은 인간의 생각과 다릅니다. 하늘이 땅에서 높음같이 그분의 생각은 다른 것입니다.
이와같은 것들이 성경에서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기본적인 하나님의 속성들입니다.
그래서 이 속성들을 생각할때 위 단어는 매우 이상한 것입니다.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하나님은 원래 아십니다. 처음부터 아십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표현하셨을까요?
그리고 이 소리는 하늘에서 들립니다.

 그 맏아들은 우스요 우스의 동생은 부스와 아람의 아비 그므엘과 (창22:21, 개역한글)

'우스', '구스' 가 나옵니다. 우스 하면 생각나는 분이 있습니다. 바로 욥입니다.
욥은 아브라함보다 먼저시대의 사람입니다. 욥은 우스땅에 살고 있었습니다.

우스 땅에 욥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욥1:1, 개역한글)

창세기 22장에 우스라는 족보가 나오는데 아브라함을 욥과 연결시켜주고 있습니다. 욥과 아브라함의 공통점은 둘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둘다 엄청난 시험받은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을 죽이라는 시험을 통과합니다.
믿는자는 반드시 시험을 받습니다. 믿으면서 시험받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시험은 통과하는 시험입니다.

사단의 시험은 유혹하며 넘어지게 하는 시험입니다.
하나님의 시험은 그 믿음을 입증해내는 시험인 것입니다. 그가 믿는자인것을 입증해 냅니다. 그리고 그의 믿음을 성장시켜 줍니다.

믿음을 성장시키는것은 두가지 입니다. 첫번째는 말씀입니다. 말씀이 그의 양식이고 말씀이 그를 자라게 할것입니다.
두번째가 시험입니다. 고난 당하지 않고 성장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고난이 믿는자를 넘어뜨린 적이 없습니다.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앗의 비유를 보십시오. 가시떨기는 시험입니다. 고난이 왔을때 성장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구원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네개의 땅 중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만 열매를 맺습니다. 구원받은 자인것입니다.
시험에서 넘어지는것은 그가 가짜인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진정히 믿는자는 넘어지지 않았습니다. 잠시 넘어질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강한믿음으로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욥은 끔찍한 시험에 갖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임을 입증해 냅니다.
가족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중시하는 사람입니다.

또한 아브라함과 욥은 그 수명을 다하고 죽습니다. 오래 살았다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 인생에 가지신 뜻을 다 이루고 죽은것입니다.

6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단도 그들 가운데 왔는지라
7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땅에 두루 돌아 여기 저기 다녀 왔나이다
8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9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욥1:6-9, 개역한글)

이 장소를 뭐라고 이름 붙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이렇게 붙여 보겠습니다.
'하늘법정'
여기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 있습니다. 사단도 와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을 천사로 보고 있습니다. 사람과 천사를 비교하자면 천사는 하나님께서 각각 다 직접 창조하셨습니다.
사람은 아담과 하와만 하나님께서 지으셨고 그 두사람이 결혼해서 그 후세가 태어납니다.
그 의미에서 천사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이제 생명의 말씀으로 거듭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하나님과 직접적인 연결이 있는 것입니다.
그 천사들 중에 간악한 천사가 사단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에서 통치하십니다. 하나님의 통치 특징 세가지가 있습니다.
첫번째, 하나님의 보좌는 의롭습니다. 공의롭습니다. 그래서 사단까지도 하나님의 통치앞에 나아와 발언할 기회가 주어집니다.

두번째, 하나님의 통치는 피조물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만이 하실수 이 통치에 피조물을 사랑하십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 소돔을 심판하실때 하늘에서도 심판하실수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과연 사실대로 그러한지 확인하러 왔노라" 하시며 이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천사 둘을 대동하셨습니다. 천사들은 하나님께서 부리는 종입니다.

구원받은 후사를 섬기도록 천사를 두셨고,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고 찬송하도록 천사를 부리셨습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셨을때 여인들이 주님의 무덤에 왔을때 주님이 누우셨던 자리에서 "왜 산자를 죽은자 가운데서 찾는냐"고 말했던 이들도 천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어제 말씀드린대로 하나님께서 에디오피아 내시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직접하실수 있으셨지만 사마리아에서 사역하고 있는 빌립을 불러다가 광야로가게 하셔서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천사를 사용하는 것과 사람을 사용하는것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천사들은 그 영광이 고정되어 있습니다. 천사들은 계급이 있습니다. 천사장이 있고 스랍이 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사용하시고 상주시는 존재입니다. 그것이 다릅니다.
우리의 섬김에 대해서 낱낱이 보상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통치 장소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영광스럽게 하나님의 통치에 참석하고 있는 천사들이 있고 사단도 와서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땅에 두루 돌아 여기 저기 다녀 왔나이다 (욥1:7, 개역한글)

다시 말씀 드리겠습니다만, 하나님이 물으시는 것은 몰라서 물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최초의 질문은 "아담아 네가 어디있느냐?" 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르셔서 질문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질문하시는 이유는 사람으로하여금 자기가 지금 어디에 숨어 있는지 스스로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죄를 범하여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그는 이제 자기에게 벌어진 이 끔찍한 일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단이 어디를 다녀왔는지 아십니다. 그러나 뭍습니다. 사단이 대답합니다.
사단에 대해 신약성경에 비유가 두가지가 있습니다.

첫번째는 베드로전서에 나오는 비유입니다.  <우는 사자같이 삼킬자를 찾아 두루 다닌다>
사단은 우는사자입니다.

두번째는 사도바울이 말했습니다. <그는 광명의 천사로 가장합니다>
그는 빛난 천사로 나타나 속입니다.

여기 나온 사단은 우는 사자처럼 세상을 두루 다녔습니다. 이제 그는 삼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온세상을 두루살피시는 분입니다. 역대하 말씀에 보면 <지금도 하나님은 두루 살피사 전심으로 자기를 향하는 자가 있는지를 보고 능력을 베푸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느니라>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욥1:8, 개역한글)

저희는 이대목에서 이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왜 욥을 자랑하셔서 욥이 고난을 당하게 됐을까'
욥의 고난은 그가 죄가 있어서 당하는 고난이 아닙니다. 욥의 친구들이 잘못한 것입니다. 욥의 친구들은 욥을 찾아와 욥이 잘못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저희들은 욥이 고난받는 이유가 그가 의롭기 때문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입니다.

시험의 내용을 보면 이렇습니다.
사단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욥을 축복하셨기 때문에 욥이 하나님을 경외합니다. 축복을 뺏으면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단의 뜻대로 그 축복을 빼앗으라 허락하십니다. 욥은 하루만에 모든 자식과 재산을 잃습니다.

그때 욥이 뭐라고 말했습니까. "축복을 주신분도 하나님이시요, 축복을 가져가신 분도 하나님이시니 하나님께 영광이 있을지어다"
미션을 통과 했습니다. 욥기 2장에서 사단이 또 이렇게 말합니다. "욥을 건드리지 않았잖습니까, 욥 자신을 건드려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생명만 빼고 욥을 건드릴것을 허락하십니다.
욥에게 악창이 납니다. 이것을 보고 얼마나 끔찍했는지 그의 아내가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합니다. 그때 욥이 이렇게 말합니다.
"축복을 받았은즉, 하나님께 재앙도 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2장의 시련이 끝난후에 사단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사단은 고소할것이 없습니다. 욥기 13장쯤에 가면 욥이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죽이실찌라도 나는 하나님을 신뢰하리라"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 하나님이 내리시는 재앙, 심지어 하나님께서 자신을 죽이실찌라도 변함없이 하나님을 신뢰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의롭게 통치하시는 그 장소에 하나님의 아들들, 천사들이 와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통치를 반대한 사단도 와있습니다. 사단이 온땅에 두루 다니고 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욥을 유의하여 봤느냐?"
삼킬자 입니다. 진짜로 봐야 할 사람을 보았느냐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것입니다.

사단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의롭게 통치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 의로운 통치에 하나님을 찬양하는자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셔야만 하나님을 찬양하지, 어려움을 주셔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그 사단의 도전에 대해서 욥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욥은 까닭없이 이유없이 당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통치는 의롭다고 말할수 있는 한사람을 하나님은 갖고 계셨습니다.

다시 욥과 아브라함을 비교해 보겠습니다.
욥과 아브라함의 시험의 차이는 두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아브라함은 이 시험을 피할수 있었습니다. 욥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두번째는  욥의 시험에 대해서 성경은 그 이유를 댑니다. 아브라함의 경우에는 왜 그랬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 두가지를 보고 욥의 시험에 관한 이유를 아브라함에게 적용해 보겠습니다.
그날도 그자리에 하나님과 천사들과 사단이 있었을지 모릅니다. 사단은 이렇게 고소합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을 이유도 모른채 하나님께 드릴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낌없이 내어 주시겠지만, 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이 의로운 통치에 대해서 헌신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라고 말했을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으로 가서 죽이라고 명령하십니다.
아브라함은 두말하지 않고 순종합니다. 그리고 12절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창22:12, 개역한글)

<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하나님의 법정에서 천사들과 사단을 놓고 하신 하나님의 선언인 것입니다.
사단이 들으라고 하신 소리입니다.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고전4:9, 개역한글)

사도바울은 구경거리가 되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이땅에서 복음을 전하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이것을 천사들이 하늘에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자매님들이 너울을 쓰고 있습니다. 너울은 누구를 위하여 쓰느냐면, 천사들을 위하여 쓰는 것입니다.

하늘법정에서 하나님과 천사들과 고소자 사단까지 들어와서 교회가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지 하나님께서 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세상은 주님을 거부했습니다. 주님은 이땅에 계시지 않습니다. 교회가 사람과 세상이 거절한 주님을 섬기며 그분을 따르며 그분의 통치를 따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단에게 말씀하십니다.

그가 타락시키는데 성공했던 사람이 예수님의 피로 구원을 받고 이제 자기에게 어떤 피해가 온다 할찌라도, 이유를 알수없는 고난이 온다 할찌라도 "이렇게 행하시는 하나님이 의롭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합당합니다" 라고 고백하는, 하나님에대한 믿음을 말하는 교회를 보십니다.

그래서 저희가 죽는다 해도 주님앞에 나아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높이고 경배하고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사단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네가 내 아들의 피로 세운 이 교회를 유의하여 보았느냐?" ,  "그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줄을 내가 아노라"

한가지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사건을 보면 그는 아무에게도 이일을 말하지 않습니다. 이후 이일로 인해서 사라와 논쟁이 있었을수 있습니다. 종들에게도 말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것은 자신과 하나님 사이에서만 일어난 헌신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이 끝난후에 하나님께서는 놀랍게 축복하십니다. 저희들도 하나님과 나만 아는 헌신이 있습니다. 다른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는 희생의 헌신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들어날것입니다. 그날에 낱낱히 축복하시고 보상해 주실것입니다.
우리들이 묵묵히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를 승복하며 겉게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