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강단말씀 요약글 모음/2015년 플러싱수양회(요약)

< 뉴욕 플러싱 모임 여름 수양회 20 >

박이레 2022. 7. 13. 23:22

2015년 9월 8일 화요일                 강사 : 한봉래 형제님

 

< 뉴욕 플러싱 모임 여름 수양회 20 >

 

- 복음말씀 -

 

31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죽은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연고더라
32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무서워하더라
(막9:31-32, 개역한글)

 

여기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일만에 다시 부활하실것을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복음의 핵심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 하셨습니다. 이때 제자들의 반응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때에 어려운 단어가 사용되었기 때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단순하고 명백한 단어입니다.

 

왜 못알아 들을까요? 못알아 듣는다면 질문하면 됩니다. 그러나 질문하지도 않았습니다. 이 일이 제자들 가운데 일어납니다.
이 이상한 일이 우리 가운데서도 일어 나고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핵심적인 복음이 전파됩니다.
그러나 깨닫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리고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그 말씀을 알고자 하지 않고 회피합니다.

 

다른 이야기에 대하서는 궁금하여 물어볼텐데 성경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보겠습니다.

 

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9 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고전1:18-21, 개역한글)

 

사람은 만물의 영장입니다. 이세상의 많은 동물 중 사람이 모든 동물을 통제합니다.
사실 육체적인 힘으로 보면 사람보다 뛰어난 동물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이 모든 동물을 다스립니다.
그럼 사람이 동물보다 뛰어난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이성, 지혜입니다.
사람은 지혜를 가지고 이 세상을 다스리고 이 세상에 서 있습니다.

 

사람의 지혜가 얼마나 큰지 보면 우리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사람은 눈으로 보이지 않는 우주의 달에 가서 그 달을 발로 밟았습니다. 요즘은 로봇을 화성에 보내 그 성분을 조사합니다. 그 과정을 보면 인간의 지혜가 어마어마 합니다.
또한 DNA 세포를 조사해서 한 양에서 또다른 양을 복제해 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놀라운 지혜이고 문명입니다.

 

그런데 이 지혜로운 인간이 자신의 지혜를 하나님을 향해서 쓰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있을까?' '영혼은 무엇일까?' 그러나 재미있는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관해 이성을 쓰기 시작하면 정확하게 실패 한다는 것입니다.

 

힌두교에는 수천개의 신이 있다고 합니다. 다른신이 많다는것은 결국 답을 모른다는것입니다.
이토록 지혜로운 인간이 왜이렇게 하나님에 관해서는 모르는 걸까요? 이는 하나님꼐서 그렇게 만들어 놓으셨기 떄문입니다.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25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고전1:22-25, 개역한글)

 

사람들이 하나님을 자기 방법으로 찾아갑니다. 크게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나뉩니다.

 

첫번째 방법은 표적을 구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할때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있으면 내게 한번만 나타나면 믿겠다"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 한번만 하면 믿겠다"
많은분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자기가 기적을 경험한 것을 말합니다.
불치병에 걸렸지만 기도원에 가서 병이 나았습니다. 그 경험을 토대로 자신은 하나님의 자녀요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현대 교파 교회의 일반적인 복음전도지의 내용은 90%가 이렇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성경은 말합니다. 이들은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이다.

 

두번째 방법은 성경을 이해하고자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만드시고 왜 따먹게 하셨나요?" "선악과를 따먹은건 아담 한사람인데 왜 그 모든후손이 그 죄를 같이 감당하나요?" "복음이 전해지기 전의 사람들의 영혼은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까?"
이들은 성경을 비상식적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표적을 구하는 구도자에게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또한 이성에 납득이 가도록 성명을 요하는 사람의 말에 응답하시지 않습니다.
주님을 믿는것은 이러한 것에 납득했기 때문에 믿는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찾아 갑니다. 이것이 다 종교 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능력으로 모든것을 처리하다가도 그가 처리할수 없는 일에 부딧치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의 힘으로는 어쩔수 없는 죽음앞에 서야 합니다. 그는 죽음 앞에서는 무력해 집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지혜로 이루고 싶지만 자기로써는 할수없어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조선시대에서는 시집을 가면 며느리는 무조건 아들을 낳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 며느리는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들을 점지해주는 신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런신은 없지만 사람들이 만든 신인 것입니다.
사람이 만든 신의 특징은 능력이 있으나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에게 정성을 들여 신의 마음을 감동케 하는 것입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이 여기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종교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찾는것은 스스로 원하는것을 이루기 위해서 입니다.
그러나 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정성을 들여 신이 나를 위해서 능력을 쓰게 만드는 것이 종교입니다.

 

복음에 대한 반응은 대부분 나를 귀찮게 하지 말라 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신 이유가 무엇인가요? 가만히 있으면 지옥에 가기 때문입니다.
가만히 있으면 우리는 끔찍한 지옥속에서 고통을 받게 될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땅에 오신것입니다.
구원으로 우리를 초청하사 구원안에서 우리를 믿고 영생을 얻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쉽게 말하셨습니다. 성경에 많은 비유가 나오는데 비유란 이해하기 쉽게 설명할때 쓰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거리낌없이 받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표적을 구하는 사람에게 나타나시지 않으십니다.

 

제가 어떤 분의 구원간증을 하는 이야기를 들은적이 있습니다. 자기전에 기도하기를 "하나님 한번만제게 나타나시면 제가 믿겠습니다" 라고 기도하고 잤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 꿈에 하얀옷을 입으신 빛나는 분이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구원받았다고 간증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그 꿈에 나타나신 이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이는 하나님 답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관찰해서 입증할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인간보다 위대하고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은 피조물의 법정에 서서 자신을 입증해야 하는 분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궁금해 여기는 것을 설명해 주심으로써 우리의 믿음을 획득하려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대등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우리를 피조물로써 하나님 앞에 겸손히 서야 합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이는 전도서 5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이야기를 합니다. 선생님과 학생이 있습니다. 누가 더 말을 많이 해야 합니까:?
아버지가 말하고 아들은 들어야 하며 선생님이 말하고 학생은 들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합당한 관계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이 이해되지 않아 믿지 못하겠다고 하는것은 하나님에 대한 모독입니다.

 

<하나님의 미련한것이 사람보다 지혜있고 하나님의 약한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45 제 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하더니
46 제 구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마27:45-46, 개역한글)

 

예수님께서는 아침 아홉시에 십자가에 못박히십니다. 그리고 오후 3시에 돌아가십니다.
그리고 정오부터 오후 3시까지 온땅에 어둠이 임했습니다. 주님께서 이말씀을 하셨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 말씀을 하시고 어둠이 걷혀 갑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시는 장면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손발이 못박히십니다. 머리에는 가시관이 있었습니다.
주님은 피를 조금씩 흘리시고 죽으신 것입니다. 이것은 당대 로마의 잔인한 형벌입니다.

 

예수님의 손은 십자가에 못으로 박혀 있습니다. 이 손이 무슨 손입니까? 수많은 병자를 고치고 기적들을 행하신 손입니다. 능력이 있는 손입니다.
주님의 손은 무에서 유를 창조한 능력의 손입니다. 그런데 이 손이 어리석게도 십자가에 매달려 있습니다. 어째서 일까요?

 

예수님의 발은 어떻습니까. 물위를 걸으신 발입니다. 그 발이 십자가에 못학혀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어리석음이요 연약함 입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밤에 어떠했습니까? 많은 이들이 몽둥이와 칼을 들고 예수님을 잡으러 왔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나아가 "누구를 찾느냐?" 물으십니다. 그들은 대답합니다. "나사렛 예수이다."
그들의 말에 예수님은"그가 나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에서 주님께서 <나> 라고 표현하는것은 언제나 자기 계시입니다.
<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 이런 표현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나사렛 예수다"라고 하셨을때 예수님을 잡으러온 모든 사람들이 뒤로 엎드러 집니다.

 

예수님을 잡으러 온 자들은 전문적으로 사람을 잡고 싸우는 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스스로 본인을 밝히셨을때 그들은 예수님을 잡을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잡히신 것입니다.

 

자신이 죽지 않을 힘과 능력이 있음에도 스스로 죽는사람이 있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어리석음과 연약함입니다.

 

또한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버리는 사람이 있습니까? 선한사람을 위하여 죽는사람은 간혹 있습니다.
그러나 원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자기를 조롱하고 핍박하는 이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38 그의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이라 쓴 패가 있더라
39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40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41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42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눅23:38-43, 개역한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힐때 양쪽에 두 강도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처형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상징적입니다. 한쪽 강도는 구원받고 한쪽강도는 구원받지 않았습니다.
인류는 이 두 부류로 나눌수 있습니다.

 

이 구원받은 강도는 구원받기 매우 어려운 상황에서 구원받은 것입니다. 모든사람이 예수님을 죽이고 비난하는 상태에서 구원받은 것입니다.
지금의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서 긍정적인 반응이 있을때에 구원받은 것입니다.

 

또한 그 강도는 죽음의 고통속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고통받고 있지 않으며 살아갈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 강도는 죽기전에 구원받은 행운아가 아닙니다. 그는 가장 나쁜조건속에서 구원받습니다.

 

그가 구원받게 된 조건은 두가지 입니다.
1. 그는 자기 죽음에 대해서 당연하게 생각했습니다. 자기가 죽어 마땅한 죄인임을 알았습니다.
2.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고 있습니다.

 

로마에서는 십자가 형에 처할때 죄수가 십자가를 지고 가게 합니다. 이는 상당히 모욕적인 것입니다.
형이 집행되는곳까지 십자가를 지고 갈때 많은사람들이 지켜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강도들은 보았을것입니다. 
십자가 형을 받는 사람들을 위해 우는 사람들이 있을까요? 아마 있더라도 아주 소수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실때에 많은 이들이 가슴을 치고 울었습니다.
그리고 사람이라면 나를 위하여 우는 사람들의 동정을 기꺼할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위하여 울지 말라. 너희 후손을 위하여 울라" 이것은 이상한 일인 것입니다.
하지만 살펴보면 예수님의 죽음을 위하여는 울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진짜 울어야 할것은 AD70년에 있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후 40년 후에 예루살렘에 끔직한 환란이 있을 것입니다. 주님읕 이것을 향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한 강도는 주님의 기도를 들었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옵소서. 자기들이 하는일이 무엇인지 알지 못함이니이다"

 

그리고 강도는 주님의 죄패를 보았을 것입니다.
< 유대인의 왕 >

 

강도는 나를 기억해 줄것을 주님께 구합니다. 주님께서는 대답하십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강도는 먼 미래를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몇시간 남지않은 시간후에 있을 상황을 이야기 하십니다.

 

내가 보는 연약한 하나님을 나의 지혜보다 놀라우신 하나님으로 받아들여야만 우리는 구원을 얻을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