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이레 2022. 7. 12. 21:43

2017년 1월 15일 일요일

강사 : 한봉래 형제님

<에베소서 강해 4>

1 이러하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을 위하여 갇힌 자 된 나 바울은……
2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을 너희가 들었을 터이라
3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내가 이미 대강 기록함과 같으니
4 이것을 읽으면 그리스도의 비밀을 내가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
5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것 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게 하지 아니하셨으니
6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예하는 자가 됨이라
7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군이 되었노라
8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9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10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11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12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
13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치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
(엡3:1-13, 개역한글)

에베소서 1장은 교회란 무엇인가 입니다. 교회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그마음에 계획하셨던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드님 되신 예수님께서 자기의 피값으로 주고 사신 것입니다.
성령하나님께서 영원토록 보장하고 인치신 존재입니다.

에베소서 2장은 영원의 하나님의 마음속에 품어졌던 계획이 시간속에서 이루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승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집니다. 그리스도의 몸이 이땅에서 형성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우리는 그속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사실은 죽은자였는데 하나님께 속하게 되어서 그의 만드신바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여기까지 설명했습니다.

에베소서 3장의 주제는 교회에 대한 헌신입니다.
사도바울은 이 교회를 위해서 자기가 갖힌바 되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지금 로마의 감옥에 있습니다. 이번에 최소한 5년간 감옥에 갖혀있습니다. 가이사랴에서 2년 갖혀 있었습니다.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까지 가는데 1년 걸립니다. 그리고 로마감옥에 2년 있었습니다.
그는 총 5년간 감옥에 갖혀있는 존재입니다.

그는 왜 감옥에 갖혔습니까? 그가 예루살렘에 갔기 때문입니다. 왜 예루살렘 교회에 갔습니까?
그가 이방인의 헌금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전달하기 위해서 입니다.

이방인과 유대인이 교회안에서 하나되었다는 사실을, 이 교회의 비밀을 그가 실제로 애써서 실현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감옥에 갖혀 있습니다.
그는 감옥에 갖혀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내가 갖혀있는 것이 이 교회의 영광입니다. 내가 갖혀 있기에 이교회가 달라졌습니다. 내가 갖혀서 이 교회가 죽음을 마다하지 않고 살고 있습니다."

다시말하면 이 서신을 읽는 사람에게 이렇게 도전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생애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당신의 삶을 교회를 위해서 드리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에베소서 3장입니다.

첫번째는 비밀 이야기가 나옵니다. 교회는 과거에는 비밀입니다. 신약시대에 와서 비로서 열려진 비밀입니다.
비밀에 관하여는 신명기 29잘 1절에 이러한 표현이 있습니다. <오묘한 일은 우리 여호와 하나님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영원히 속했다>

그래서 첫번째로 비밀에는 영원한 비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생각하시고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은 비밀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결코 알아낼수 없을것입니다. 하나님께만 속한 비밀이 있습니다.

두번째로 하나님은 어떤 비밀들을 특정한 사람에게만 알려주셨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선지자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알려주십니다.
하나님께서 특정한 사람에게 그 마음을 알려주십니다. 그것이 주로 구약시대 입니다.

그러나 이 은혜에 시대에 와서는 이 세대를 사는 모든사람에게 알려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간직하신 비밀이있고 특정한 사람에게만 알려주신 비밀이 있고, 이 비밀은 알려주고 싶은 비밀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알려주고 싶은 비밀입니다.
비밀이라는것은 감추는 것이 아니라 모든사람에게 밝히 드러내서 모든사람이 누리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진리가 비밀입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이 시대에 태어나서 살고 있다는 복이 얼마나 놀라운 복인가를 감사하게 되는것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오순절 성령께서 이땅에 오신 이후에, 그리고 주님께서 다시 공중에 오시기 전에 이 시대에 태어났다고 하는 것은 우연한 행운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영원전부터 우리를 축복하시고 우리를 태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의 은혜, 알려주신 비밀에 대한 감사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비밀의 내용이 있습니다.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예하는 자가 됨이라 (엡3:6, 개역한글)

이 비밀은 다른세대에는 알려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교회시대에 비로소 알려진 내용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보기에는 이 내용이 새로워 보이지 않고 하나님께서 오랫동안 간직하셔야 되는 비밀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내용은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하나님이 구원하신 이스라엘 백성이나 구약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었던 이방인이 우리도 다 교회에 들어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방인과 유대인으로 민족적 차별이 없이 이루어 진다는 것입니다.이것이 뭐가 그리 대단한 내용이겠습니까?

그런데 이것이 저희들이 성경을 읽고 이해하는것이 그토록 어려웠던 이유입니다.
베드로가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파합니다. 고넬료는 로마의 군인입니다. 이방인이죠. 베드로가 복음을 전하러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고넬료에게 베드로를 초청하라고 알려주셨습니다.
베드로가 어디에 있다. 그를 초청하고 그에게서 복음을 들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고넬료는 사람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베드로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베드로에게 환상을 세번이나 보이십니다. 하늘에서 보자기가 내려왔는데 거기에 부정한 짐승이 있었습니다. 하늘에서 소리가 있어 <잡아먹으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저는 부정한것을 먹지 않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다시 하늘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깨끗하다 한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이게 무슨소리지? 라고 베드로가 생각하고 이쓴 고넬료가 보낸사람이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리고 열어보니 "고넬료라고 하는 사람이 천사의 지시를 받아 당신을 초대했습니다. 당신을 초청해서 복음을 들으려고 합니다." 라고 합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이해합니다.
이방인이 하나님을 받으심을 이해하고 고넬료의 집안으로 갑니다.

고넬료의 집안을 보면 고넬료가 자기 가족들과 자기 부하들까지 다 모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말씀만 하옵소서 우리가 듣겠나이다" 이와같이 준비된 영혼들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구원이 일어나냐면, 베드로의 복음전도를 통해서 구원받았다고 하기보다는 베드로가 말씀을 전하는 도중에 성령이 내려버리십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그들을 받으셨는데 내가 물침례를 거부하겠는가?" 라고 하며 침례를 줍니다.

그런데 이것은 물론, 저희들이 사도행전을 보면 에디오피아 내시처럼 이방이 구원받은 사례가 있습니다.
그러나 에디오피아 내시는 그냥 구원받고 갑니다. 교회를 이루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 고넬료는 구원받고 교회에 더해져야 합니다. 그래서 나중에 예루살렘 유대인 성도들이 베드로를 질책합니다.
"왜 이방인의 집에가서 먹고 마시고 자고 침례까지 주었느냐?"
베드로가 변명합니다. 간단합니다. "내가 그러려고 한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받으셨는데 우리가 누구관대 안받을수 있겠느냐?"

그럴때에 예루살렘 유대인 성도들도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면" 이라고 하면서 받습니다.
이것이 매우 어려웠던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다른측면에서 어렵습니다.
이런이야기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를 보면 안디옥 교회가 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이방인 교회입니다.
베드로가 거기에 방문했습니다. 거기에 있는 이방인 성도들과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예루살렘 교회의 야고보에게서 온사람들이 마침 그때 들어왔습니다.

베드로가 이 소식(이방인 성도들과 식사한 소식)이 예루살렘 교회에 전해지는것을 두려워 하여 식사를 안한 척 위선했습니다.
바나바도 그 외식에 넘어갔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은 그들이 복음의 진리대로 행하지 않는 것을 보고 베드로를 공개적으로 면책합니다.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던 것입니다.

제가 설명하고자 하는것은 9절로 가시겠습니다.
이 교회가 왜 비밀이었고 하나님께서 드러내고자 하는 내용이 무엇인지 보기 위해 9절을 보겠습니다.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예하는 자가 됨이라 (엡3:6, 개역한글)

이것은 하나님의 경륜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경륜속에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15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엡2:15, 개역한글)

이 둘은 항상 유대인과 이방인입니다.
제가 에베소서 2장 1-10절까지를 설명드렸습니다. 1-10절까지는 구원을 개인적인 차원에서 설명합니다.
이세상 풍속을 좇고 죽었던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할수 없었던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이해하고 하나님의 뜻을 즐거워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깨닫는 이 자리로 오게 된것을 설명한 것입니다.

11-22절까지는 구원을 개인적인 측면에서 보지 않고 집단적인 측면에서 봅니다. 구원을 이방인과 유대인이라는 관전에서 설명해 갑니다. 그런데 죽 설명하다가 15절에 이르러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2장 10절에서는 구원을, 교회가 되었다로 설명합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바라>

그리고 집단적으로 보자면, 15절에는 <한 새사람을 지었다> 라고 표현합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을 한사람으로 만들었다. 이것이 구원에 대한 설명입니다.

교회를 새로운 사람이라고 했을때 이 표현은 아담과 대조됩니다.
원래 하나님이 만드셨던 첫번째 사람 아담과 교회를 비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경륜입니다. 처음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아담의 범죄를 하나님이 내버려두십니다. 경륜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제 아들 예수님께서 사람으로 이땅에 오셔서 십자가로 그 죄를 용서하십니다. 교회를 탄생 시키십니다. 그런데 이 교회가 아담과 대조되는, 이제는 새로운 그러나 한사람입니다.
아담의 창조와 교회의 창조를 비교해 보겠습니다.

먼저 아담을 창조할때 하나님의 의도를 살펴보겠습니다.

26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1:26-27, 개역한글)

처음에 사람을 창조하실때에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보면 세가지를 말씀하십니다.
1. 남자와 여자로 만드십니다.  2. 이 사람으로 통치하게 만드셨습니다.  3.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습니다.

첫사람 아담은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시고 만물을 다스리게 창조되었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습니다. 이 세가지를 교회와 비교해 보겠습니다.

성도님께서 잘 아시는대로 첫사람 아담이 하나님의 창조목적대로 사랑가지 못합니다.
사단의 꾐에 빠져서 선악과를 따먹게 되고 죽게 됩니다.

첫번째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습니다. 남자와 여자로 만드신 이유도 분명히 나와있습니다. 여자는 돕는 배필로 지어주셨습니다. 그래서 하와는 아담을 도와야 합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따먹을때 사단이 뱀의 모양으로 하와에게 접근합니다. 뱀이 하와를 속여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아담에게도 줍니다. 아담도 선악과를 따먹습니다.

하나님의 계획대로 한다면 사단이 하와에게 접근했을때 "이 선악과를 따먹어라 하나님이 참으로 모든실과를 먹지 말라하시더냐?"할때 그 이야기를 하와가 계속해서 대화를 해서는 안됬습니다. 하와는 아담을 불러야 했습니다.
"여보 여기와서 말하는 뱀을 보세요"

그러나 하와는 이러한 하나님의 질서를 깨버립니다.
그래서 죄악이 세상에 들어온 것입니다.

여자는 아담에게 먼저 묻고 따라야 하는 질서가 있었는데 하와는 그것을 깨버립니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이러한 일이 일어납니다. 사람은 모든만물을 다스릴 권세가 있었습니다. 사람은 왕으로 태어났습니다. 통치하게 되어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10절에 보면 <우리는 왕같은 제사장이요>라고 쓰여 있습니다.
우리는 왕이면서 제사장입니다.

구약시대에 보면, 이스라엘의 경우 왕은 제사장을 할수 없었습니다.
왕이 제사장 하려고 했다가 문둥병에 걸린것이 웃시아입니다.
사울이 자기가 제사를 드렸다가 제사장 자리에서 쫒겨나 버립니다.
제사장은 왕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왕이면서 제사장입니다.
사람은 왕으로 통치하게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동물들이, 땅도 그렇고 사람에게 순종하지 않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개를 무서워 합니다만.. 그런 안되는데 지나가다 큰 개들이 짖으면 제속은 두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원리대로라면 큰 개는 사람에게 못짖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주님이 나타내시냐면요, 주님께서 오셨을때 이렇게 하십니다.

어느날 갈릴리 바다에서 베드로가 고기를 잡고 있었는데 그날 이상하게 한마리의 물고기도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이렇게 말하십니다.
"깊은데로 그물을 던져라"

베드로가 그말에 순종합니다. 그러자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가 잡힙니다.
주님은 물고기들에게 명령하신 것입니다. "베드로의 그물로 들어가라"

또 주님께서 가버나움에 계실때에 어떤사람이 주님께 물었습니다.
"성전 세를 안내느냐"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물었습니다. "세상왕들이 자기 아들들에게 세금을 받느냐?"
받지 않습니다. "우리도 성전세를 낼 필요가 없지만 저들로 오해하지 않게 하기 위해 바다에 가서 물고기를 잡으라 첫번째로 잡히는 그 물고기 안에 한세겔 동전이 있을테니 갖다 내어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통치하십니다.
주님꼐서 어떤 물고기에게 명령하십니다. "너는 가서 갈릴리바다 호숫가에 떨어진 세겔을 줏어라. 그것을 입에 물고 베드로가 낚시 던지는것을 기다리고 있다가 물어라."

우리 주님은 왕이십니다.
갈리리 바다에 파도가 칠때 주님께서 명령하셨습니다. "잠잠하라"
파도가 즉시로 잠잠해졌습니다.

인간으로 오셔서 원래의 인간이 어떻게 창조되었는지 원랴 인간의 영광이 무엇인지 보이신 것입니다.
사람은 통치하게 창조되었습니다.

세번째, 하나님의 형상과 관련해서는 항상 천사와 관련해서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셨을때, 그 전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천사들 세계가 있습니다.
저희들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있습니다. 뭐가 다르냐면 천사들은 처음부터 완벽하게 창조됩니다. 천사들은 결혼하지 않습니다. 숫자가 그대로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숫자 그대로입니다.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꼐서 아담과 하와를 지으시고 그다음부터 자녀를 쭉 낳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천사가 범죄했을때 그 천사들은 용서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범죄했을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십니다.
천사들이 보기에는 그것은 기이한 일입니다.

천사 중에서 하나님을 반역한 천사들이 나왔습니다. 그 반역한 천사들이 에덴동산에 찾아온 것입니다.
그리고 하와를 유혹해서 하나님께 동일하게 반역하도록 한것입니다.
왜 그랬냐면, 천사들은 압니다. 하나님께서 용서하지 않는다는것을

자기들의 운명에 대해서도 압니다.
그런데 이 천사들이 어떻게 수를 쓰냐면,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하시는 것을 잘 압니다. 그래서 자기들이 벌을 받지 않을수 있는 방법은 사람들이 자기들과 똑같은 죄를 짖는 것입니다.

예를들면 초등학교때에 친구들이 나쁜짓을 합니다. 그런데 나쁜짓을하면 걸리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 나쁜짓을할때 누구를 넣느냐면 선생님 아들을 끼워줍니다. 교장 선생님의 아들이 있으면 더 좋습니다.
같이 잘못을 범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혼이나도 이것은 덜 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유치한 예입니다만, 사람들이 자기들의 반역에 동조했을때 하나님을 자기들을 처리하시려면 똑같은 죄를 범한 사람들도 처리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입니다. 의로우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천사들이 그렇게 사람들을 끌어 넣은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것을 달리 처리하십니다.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위해서 그 아들을 십자가에 죽이시고 그들을 용서하시고 그러나 범죄한 천사들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었다는것은 항상 천사들을 겨냥하는 것입니다.

교회로 오겠습니다.
원래의 사람은 그렇게 남자와 여자로 만들었고 그다음에 통치하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 천사들을 겨냥해서 창조된 존재입니다.

교회도 똑같습니다.
교회는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이루어집니다. 남자와 여자로 이루어진것처럼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이루어 집니다.
그리고 교회는 통치합니다. 교회는 왕입니다.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통치할 것입니다.
세번째, 하나님의 형상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아들의 형상대로 본받도록 만들어진 교회는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천사들에게 알려줍니다.

그래서 자매님들이 너울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너울은 천사들을 위한 것입니다. 이 세가지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경륜입니다. 다시 설명하겠습니다.

첫번째, 유대인과 이방인이 남좌와 여자와 같은 실수를 반복해선 안됩니다.
구약으로 치면 유대인과 이방인은 서로 원수입니다. 그런데 유대인이 구원받으면 그는 유대인이 아닙니다. 그는 교회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0장에 인류를 셋으로 나눌수 있습니다.
유대인이 있습니다. 유대인에 대한 하나님의 경륜이 있습니다. 시간이 되면 하나님께서 유대인에 대한 시간을 돌려가실 것입니다.
이방인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교회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교회는 유대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닙니다.
유대인이 구원받으면 그는 유대인이 아니고 교회입니다. 이방인이 구원받으면 그는 이방인이 아니고 교회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교회는 사람에게 속한것이 사라지고, 인간과 문화같은것이 사라지고 한 새로운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이 충만한,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첫번째 특징입니다.

어떤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사람이 아니리요 (고전3:4, 개역한글)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고전3:3, 개역한글)

고린도 교회는 인도자들을 따랐습니다. 나는 바울이 좋다, 나는 베드로가 좋다, 나는 아볼로다 심지어 어떤사람은 나는 그리스도가 좋다 라고 하면서 네 파로 나뉘어 졌습니다.
사도바울은 이것으로 고린도교회를 책망합니다.

어떻게 사람을 쫒아갈수 있느냐고 책망합니다. 그 책망의 내용은 이것입니다. "너희가 이렇게 하면 너희는 사람이다"
다시 말하면 교회는 사람이 아닙니다.
교회는 유대인도 아니요, 이방인도 아닙니다. 새로운 존재입니다.

그런데 세상과 사람에게 속한것이 교회에 나타나면 하나님이 교회를 만드신 이우가 무엇이 되겠습니까? 왜 교회를 만드셨습니까?
교회에는 사람에게 속한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교회의 첫번째 특징입니다.

너울에 대해서 다시 설명드리겠습니다.
자매님들이 너울을 쓰시죠. 천사들을 위하여 쓰는 것입니다.
이 너울은 자매님들이 머리에 씁니다. 자매의 머리는 누구입니까? 형제입니다.
그래서 자매님들이 머리에 너울을 썼다고 하는것은 자매를 가리는것이 아니고 형제를 가리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형제님들이 말씀을 전하고 자매님들은 잠잠해야 합니다. 그런데 자매님들이 너울을 썼다고 하는것은 형제들을 덮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에서는 사람은 잠잠한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누가 말씀을 하려거든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것같이 하며>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져야 합니다. 인간적인 생각이나 개인적인 의견을 말하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사람을 따라 행하는 곳이 아닙니다.
인간관계를 따라 생각하고 세상 철학을 따라 생각하고 사람의 아이디어를 내는곳이 아닙니다.
이것은 세상가운데서 사회가운데서 할일입니다.

교회는 이방인과 유대인들이 다 가리워지고 사람에게 속한것이 사라지고 하나님으로 충만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인격과 목적이 드러나는 곳이여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 진리의 첫대목입니다.

이게 왜 비밀입니까? 유대인과 이방인이 다 속하는것이 무슨 비밀인가 하는 질문에 하나님꼐서 말씀하고 계신것입니다.
교회는 이방인과 유대인 상관없이 사람에게 속한 모든것이 사라지고 가리워지고 하나님의 말씀과 영광과 아름다움만이 전해지고 나타나는 곳이다.

두번째는 교회는 통치하는 곳입니다. 교회는 천년왕국때에 통치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오실때에 교회는 휴거 됩니다.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상을 받고 어린양의 혼인잔치를 할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 지상으로 내려올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이 지상에 천년간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십니다.
그때 교회가 주님과 함께, 신랑과 신부가 함께 이 세상을 다스릴 것입니다.

그나라의 모습을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이러한 주일학교 찬송이 있습니다.
'사자들이 어린양과 뛰놀고 어린이가 독사굴에 손을 넣어도 다치지 않는 그 나라가 속히 오리라'

그나라가 되면 거기에는 더이상 상처를 주는 그런 일들이 없습니다. 주님이 왕으로 통치하는 죄가 억제되는 그런 나라가 있을 것입니다. 그때에 교회가 주님과 함께 통치할 것입니다.

우리는 왕입니다.
이것은 어떻게 적용되냐면, 교회는 교회가 통치해야 합니다.
개인이 아닙니다.

제가 속한 모임에서 어떤분이 몸이 아파서 가게 되었습니다. 그럼  그 사실을 누구에게 말하냐면, 같은 가족이나 형제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이야기 하고 교회가 나중에 알고가 안됩니다.
예를 드는거지만, 어떤 일이 있으면 제일먼저 교회에 알립니다. 장로들에게 알립니다.

"제가 지금 급한일이 있어서 이렇게 되었습니다. 기도해 주십시오"

그럼 교회가 알고 성도들에게 알립니다. 특별히 금요일 기도집회때 기도제목으로 올립니다.
"어떤 형제님이 이러이러한 일로 입원해 계십니다. 성도님들 기도해 주십시오."
그리고 심방도 개인적으로 가지 않습니다. 교회적으로 갑니다.
먼저 교회가 가고 기도하고 주님의 선하신 뜻이 어디있는지 기도하고 주님의 은혜를 구합니다.

이것은 저의 개인적인 일입니다.
어떤 자매님이 아기를 가졌습니다. 그런데 그 소식을 자매님들이 먼저 알고 이야기가 돕니다.
제가 그것을 괭장히 싫어합니다. 그런일이 있으면 먼저 형제가 교회 장로들에게 먼저 알리고 교회서 먼저 안다음에 기도하고 출생할때까지 주님께서 선하게 도와주시기를 기도하고 훗날 이 아이가 주님을 섬기는 아이가 되도록 기도하고 교회에서 광고합니다.

그리고 또래 자매들이나 가족들이 나중에 압니다.
왜입니까? 교회가 통치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개인이 아닙니다. 교회가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다스리도록 창조하셧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범죄함으로 그러한 통치권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새로운 사람 교회를 지으셨습니다. 이제 교회가 주님과 함께 천년왕국에서 통치할것입니다.

이땅에서 지역모임이 모든일들을 다스릴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한 새사람이라고 하신 의도입니다.

세번째로 교회는 천사들과 관련됩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드라크마 비유도 있고 돌아온 탕자라고 하는 비유도 있습니다.
거기보면 이런 부분이 있습니다. 성경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죄인 하나가 회개하여 돌아오면 하나님의 사자 앞에서 말할수 없는 기쁨이 있다>

천사들이 말할수 없이 기뻐합니다.
한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생각하고 천사들이 기뻐합니다.
그리고 계시록에 보면 교회가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양할 것입니다. 예배드리고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천사들이 화답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을 순종하는 천사들과 함께 거룩하신 하나님을 찬양할 것입니다.

그리고 또하나는 하나님을 반역한 천사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자리를 떠나버린 천사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징계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 천사들과 영적인 전투를 우리가 하고 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사단이 찾아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케 했습니다.

만일 에덴동산에서 하와가 사단의 거짓말을 대적하고 선악과를 먹지말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했다면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을 얻으셨을것입니다.
만약에 선악과를 먹지말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사단의 말을 따르면 그로 인해서 사람들에게는 죽음이 오고 이 만물의 여러가지 괴로움이 오겠지만 그것보다도 우선적인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짖밟히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시고 하나님의 교회는 사단과 영적인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혈육에 대한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이 싸움에서 교회가 이겨야 합니다.

이것이 세번째,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다고 하는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신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영광스럽게 높이고 사단의 거짓말을 대적하며 이 영적인 싸움가운데 승리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도록 부름받았고 그렇게 될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이 우리의 대장이십니다.

세가지입니다.
교회는 사람에게 속한것이 완전히 사라지는 곳입니다.
교회는 왕으로써 통치하는 곳입니다.
영적인 사단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곳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감추셨고 이제 드러내신 교회비밀의 세가지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의 경륜과 관련하면 이렇습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엡1:10, 개역한글)

이것은 9절에 보면 <그뜻의 비밀>이라고 나와있습니다.
하늘에 있는것, 땅에 있는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세계입니다. 하나님꼐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이 모든것을, 그리고 영문에는 기록되어 있는데 우리나라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은 부분이 있습니다.
<다시> 입니다. <다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이 온우주를 다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교회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고 하나님이 다시 이 모든것들을 통치하는 이 일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예를들면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동물세계에도 괴로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생물들이 탄식합니다.
저희들이 동물들을 보면 동물들은 두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로 먹어야 합니다. 먹이를 찾아 해맵니다.
그리고 두번째로 종족을 보존합니다. 이 두가지 외에는 별로 하는 것이 없습니다.

참으로 우수운 것은 이렇게 후손을 만들어 놓으면 그 후손은 자기와 똑같이 괴로운 삶을 삽니다.
그래서 로마서 10장을 보면 피조물이 탄식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기대합니다.

이제 하나님은 원수되었던 이방인과 유대인을 하나로 만들고 화목케 하셔서 교회를 만드셨습니다. 이제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모든관계들을 하나님 앞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관계로 만들어 오실것입니다.
그 일을 하는 중요한 도구가 교회입니다.

하나님이 이 모든 피조물 세계의 주인으로써 하나님으로서 행동하실수 있도록 다시 관계를 복원하는데 하나님이 쓰시는 첫번째 도구가 교회입니다.
원수 되었는데 하나됩니다. 그것이 경륜입니다. 하나님의 경륜은 사람의 타락을 허용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교회를 만드시고 모든 피조물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십니다.

여기서 통일이란 하나된다라는 것보다는 주님의 통치권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교회가 부름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나의 환란을 인해서 근심하지 말라 이것은 너희의 영광이니라>

사도바울은 골로새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교회를 위하여 내육체에 채우노라>
고린도전서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내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내몸에 나타내게 하려 함이니라>
빌립보서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들이 드리는 제물이 내 생애를 관제로 드릴찌라도 나는 기뻐하고 기뻐하노라>

이것이 사도바울이 보이고 있는 헌신입니다.
그는 교회가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교회가 왜 비밀이었고 이제 하나님이 드러내신 비밀의 내용의 중요한 부분들을 알았기 때문에 교회에 대해서 기꺼이 헌신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삶을 드려도 아깝지 않은것입니다. 오히려 드릴수 있는것을 영광스럽게 표현하고 있는것입니다.

교회가 얼마나 대단하기에 그것이 얼마나 무겁기에 내 삶이 순교로 끝난다 할찌라도 그것까지 감사한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바울이 보이고 있는 태도입니다. 사도바울은 자기와 같은 마음을 에베소 3장을 읽는 모든 성도들이 함께 품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다시 본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 (엡3:12, 개역한글)

이제 교회는 하나님 앞에 나아갑니다.
다시 비교해 보겠습니다. 과거에 하나님의 임재앞에, 하나님이 이름을 두신곳에 사람들이 오는것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1년에 한차례 가능했습니다.

예를들면 지성소에 들어가는 일입니다. 지성소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입니다. 그곳에 대제사장 한명만 들어갑니다.
그도 대속죄일 하루만 들어갑니다. 피를 가지고 들어갑니다. 그리고 바로 나와야 합니다. 그곳에서 오래 머물를수 없습니다.

그와같은것을 교회는 담대히 하나님앞에 나갈수 있습니다. 담대히는 두려움없이 입니다.
내가 교회답게 살지 못했는데 혹시 하나님이 그것으로 나를 벌하실까, 그래도 나를 받아주실까 하는 두려움 없이 담대한 것입니다.

그리고 당당하게는 이런것입니다. 하도 자주 왔다갔다하니 이제는 친숙하게 입니다.
이제는 습관적으로 계속적으로 나갈수 있게 되었다 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영광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통치권을,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는데 교회는 필수적입니다.
교회를 통해서 <하늘에 있는것이나 땅에 있는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다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는 교회가 필수입니다. 우리에게도 교회는 필수적입니다.
우리에게 교회는 혹시 옵션이 아닙니까? 내 인생을 살면서 가끔 교회에 나가고 교회서 어려움 생기면 빠지고 살고 있지 않습니까?
사도바울에게 있어서 교회가 하나님께 어떻게 중요했는가, 하나님이 교회를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는가 제시하는것으로 우리 마음속에 우리도 동일하게 이 교회는 내삶의 목표고 내삶의 중심이고 내가 설령 죽는다 해도 교회를 위할수 있다면 그것보다 위대한것은 없다 라는 자리로 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저희들이 살아가고 있는 이세상은 교회를 위해서 있는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교회를 창세전에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놓고 시간과 장소를 만드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과 장소는 교회를 교회답게 만드는데 사용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현실을 적응하는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현실에 굴복하고 어떻게든지 적응해야 하는것이 아닙니다. 이 현실이 교회를 위해서 있는것입니다. 이 생각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유치한 예를 들어보면 제가 인터넷을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한국에서도 스티븐잡스의 아이폰이 아주 유행합니다. 어떤 형제가 찾아와서 아이폰을 딱 보여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제님 요즘에는 이것을 써야 합니다."

저는 이것을 킬줄도 모르는데 켜서 보여주었습니다. 괭장한 열풍이 불고 있습니다.
그런데 스티브잡스가 팹시콜라 사장을 애플사 사장으로 영입하려 합니다. 그런데 이분이 스티브 잡스가 자기를 영입하려 할때 이런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첫번째 조건은 "나에게 천문학적인 액수의 월급을 줘야 한다" 입니다. 스티브잡스가 ok합니다.
두번째 조건은 "나는 뉴옥에서 살거다.la로 못간다 사람들이 나에게 오면 결제한다" 애플회사는 la에 있습니다. 두번째 조건때문에 영입이 안될뻔 했습니다.
스티븐잡스가 이렇게 말합니다. "좋습니다. 그럼 당신은 세상을 살면서 물이나 팔아보십시오 아니면 나와함께 이 세상을 변화시키겠습니까?"
그말에 그가 팹시콜라 그만두고 애플로 들어옵니다.

세상사람들도 무엇이 가치있는지 압니다. 어떤것이 영광스러운 것인지 압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교회보다 영광스러운 것이 있느냐>
이 교회를 위해서 이 교회가운데 사람에게 속한것을 제거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높아지도록하는 교회의 원리를, 그리고 교회가 통치하도록 우리가 교회에 순종하고 교회가 통치할수 있도록 영적인 싸움을 싸워 내는것, 세가지를 해야 합니다.

이것보다 복된것은 없지 않습니까?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도바울은 감옥에서 말합니다. "나를 위해서 염려하지 마라. 나의 고난은 너희의 영광이다."
무슨말이냐면, 그 회라고 하는 큰 그림에서 볼때 위대한 사도바울도 엑스트라인 것입니다.

교회의 영광이 얼마나 크길래 사도바울의 고난이 필요했겠습니까? 사도바울도 고난받아야 합니다.
그 관계로 들어갈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이 교회의 영광입니다.
<너희의 영광이니라>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이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교회를 경험하며 그 교회를 세우는것, 그 교회가 되는것이 내 삶의 전부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이 마음의 소원과 기쁨을 채워주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