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이레 2022. 7. 12. 21:43

2017년 1월 15일 일요일

강사 : 한봉래 형제님

<에베소서 강해 3>

1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4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7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10 우리는 그의 만드신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엡2:1-10, 개역한글)

에베소서 1장은 은혜란 무엇인가, 우리는 누군가에 대해서 어디서 보았냐면 하나님께서 영원전에 품으셨던 그 계획속에서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품으신 계획이 역사 속에서 우리의 구체적인 현실속에서 일어난것을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1장이 영원이라면 2장은 시간입니다.
우리는 구원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났습니다. 나는 죄용서를 경험했습니다. 나는 죽어도 천국에 갈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구원을 이해합니다.

그런데 에베소서 2장은 구원을 다른각도에서 설명합니다.
우리가 실제 인생으로 태어나서 살아가가다 구원을 경험합니다.
이 구원을 에베소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너희는 죽었는데 살아났다> <너희는 교회가 되었다>
<죽었던 너희를 예수님과 함께 살리셨고 예수님과 함께 하늘에 앉혀졌다>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바라>

하나하나 살펴보겠습니다. <너희는 죽었는데 살아났다>
<너희는 죽은자라> 죽은자는, 믿지 않으신 분은 영적으로 죽은 사람입니다.
구원받지 못한사람은 하나님이 이 가운데 계신데도, 우리는 지금 모여서 주님의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너희가운데 함께하리라" 주님께서는 육체적으로 이곳에 계시지 아니하지만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구원받지 못한분은 주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또 대표적으로 구원받지 못한사람은 성령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들어도 무슨말인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반응하지 못하고 감각하지 못하고 관계를 맺지 못하면 이것이 죽은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 주님께 나아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 제가 주님을 따라가겠습니다 제자가 되겠습니다. 그런데 집에서 소식이 왔는데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얼른가서 아버지 장례식을 마치고 돌아와서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이 대답을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죽은자로 죽은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누가 죽은자입니까? 돌아가신 아버지가 죽은자입니다. 누가 장례식을 합니까? 죽은자들로 장례식을 해야 합니다.
육적으로 죽은 아버지를 영적으로 죽은 나머지 친척들이 장례식을 치루게 하라 입니다.
그리고 살아있는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구원받지 못한사람을 죽은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자기가 죽었는데 죽었는지 모르고 돌아다니는 시체가 있습니다.
동양에서는 그 시체를 강시라고 부릅니다.서양에서는 좀비라고 부릅니다.
믿지않는 사람은 그와같습니다.

연락을 좋아하는 사람은 죽은 자입니다. 살았으나 죽은자 입니다.
자기의 만족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은 죽은자 입니다. 자기의 즐거움을 수없이 표현할찌라도 성경은 말합니다. <죽은자다>

그럼 무엇으로 죽은것입니까? 죄와 허물로 죽은것입니다.
이 부분을 성경의 말씀을 찾아가면서 설명드리겠습니다.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느니라 (눅6:32, 개역한글)
저희들이 가족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친구를 사랑합니다. 가족이나 친구가 어려움이 닥치면 자기를 희생하면서 도와줍니다.
동창간의 친목회를 가집니다. 우애를 잘 가집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살아갈찌라도 죄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가 가족과 친구를 사랑하므로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행복하게 살아 갑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죄인이다>

너희가 악할찌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눅11:13, 개역한글)

이것도 주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어 이땅을 거니셨습니다. 주님께서 죄인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죄인이라도 부모는 자식을 위해서 희생합니다. 자기는 좋은것을 못먹어도 자녀에게는 좋은것을 주려고 합니다. 자식에게 좋은 교육을 시켜주려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악한자들이다>

사람들은 자기가 자녀를 위해서 최선을 다해서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잘 지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양보도 하고 희생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죄인이라고 하십니다.

자식을 위해서 그렇게 헌신적으로 희생해도, 심지어 자녀가 물에 빠지면 자식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어머니도 계십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아니다>

사도바울이 로마로 가고 있는데 그 배가 파선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섬에 헤엄쳐 도착했습니다. 그 섬의 원주민들이 그들을 불쌍히 여겨 모닥불을 피우고 선대해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죄인입니다.
낫선 사람들에게 자기들의 물건을 제공해주고 모닥불을 피우고 친절히 대해주었지만 그들은 죄인입니다.
그들은 사도바울에게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선과 악의 기준이 무엇이며 죄인과 의인을 가르는 기준이 무엇인가? 하는 기분이 듭니다.
여러가지 일을 했다 할찌라도, 내가 사랑하고 자녀들을 잘 길러냈다 할찌라도 모든 사람들이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한 공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근거로 자기가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반드시 행해야 할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하지 않은 그 일을 말합니다. 그래서 죄인이라고 합니다.
자기의 의로운 행동에도 불구하고 마땅히 했어야 했을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모든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 것입니다.
영광스런 하나님 앞에 나올수 없는것, 반박하지 못하고, 느끼지도 못하는것이 죄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얼마나 영광스럽게 만드셨는데, 그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것이 죄입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영광의 수준이 있습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데리고 잘 사랑하는것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보다 높은 수준이 있습니다.
자녀를 잘 기르는것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보다 훨씬 고급하게 요구하고 계십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함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저희는 영광과 거룩과 온전을 추구해야 합니다.
거기에 이르러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기준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이르지 못합니다.
영광슬럽지도 않고 거룩하지도 않고 온전하지도 않으면 완전하지 못합니다. 성경은 그것을 죄라고 말합니다.

허물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인생에 부여하신 이 목표를 추구하지 않고 다른 목표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이 죄와 허물로 죽어 있습니다.

죄와 허물로 죽어 있다고 증거가 <이 세상 풍속을 좇고 있다> 고 쓰여 있습니다. <공중의 권세잡은자를 쫓아가는 것> 입니다.
저는 과학적인 것을 잘 모릅니다.
제가 핸드폰을 로밍해 왔습니다. 그래서 한국과 연락할수 있습니다. 전화를 걸면 비싸기 때문에 주로 문자를 주고받습니다.

한국과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문자가 서로 주고받아집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공중에는 전파들이 있습니다. 그 전파들을 이용해서 저희들이 티비도 보고 여러가지 문명의 이기들을 만들어서 즐기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여러가지 강력한 것이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사단입니다. 그는 공중의 권세잡은자 입니다. 그는 사람들의 정신, 가치관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이세상 풍속입니다.
이 세상은 세가지를 추구합니다. 첫번째는 휴머니즘입니다.
인간이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가를 말하는것이 휴머니즘입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어떤 여자분이 히말라야의 열두 봉우리를 올라갔다고 해서 뉴스에 나오고 그렇습니다.
히말라야에 올라간것이 뭐 그렇게 대단한 일입니까? 그런데 사람들이 그것들을 가지고 칭찬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위대함을 말합니다. 대단히 나쁜조건, 산소도 없고 대단히 많은시간을 걸어야 하는 대단히 열악한 조건에서 이겨내고 뚫어내는 인간의 집념 의지, 열정을 칭찬합니다.

그들은 인간이 위대하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무엇이든지 할수 있다고 말합니다.
인간의 위대함이 스며있다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두번째는 물질주의 입니다. 물질이 힘이 있습니다. 실제로는 교회에서도 어떤 집회를 하려고 할때 한국에서는 기도를 하자고 합니다. 그러나 요즘은 성도들의 경제력이 아주 좋아졌습니다.
그래서 수양회를 하려고 한다 하면 교회에는 그 수양회를 할만한 얼마든지의 돈이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기도는 우리가 가진것인데 이것은 기도하지 않습니다.
다른것은 영적으로 대체해도 물질적인것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물질이 일을 성사 시키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것이 물질주의입니다.

세번째는 상대주의 입니다.
요즘세상은 '절대'는 없다고 말합니다. 전부 상대적이라고 합니다.
종교도 마찮가지라고 합니다. "왜 기독교는 자기들만 구원받는다고 말하느냐? 불교도 천주교도 다른 길이 있고 목적지는 같다 다른견해가 있을 뿐이다. 기독교는 편협적이다."
이런 사상이 나오는것은 상대주의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절대적인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모든것은 상대적이라고 말하는 세상에서 절대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일점 일획이라도 고칠수 없다고 하면 그것을 이상하게 보는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현실입니다.

인간의 힘으로 무엇이든지 이룰수 있다고 말하는 휴머니즘
물질이 최고다 라고 하는 물질주의, 절대는 없다 모든것은 상대적이라는 상대주의 이 모든것은 사단이 만들어내고 우리가 사단의 풍속을 따라 살았습니다.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죽은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기가 살아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죽은사람입니다.
이러한 죄인을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살려내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에 앉히셨습니다.

잠깐 구원에 대해서 흔히 오해할수 있는 무언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구원은 마치 수영을 못하는 사람이 물에 빠진것과 같습니다.
그 사람을 건져내기 위해서 밧줄을 던져줍니다. 그런데 그가 밧줄을 잡으면 구원받고 잡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 라고 설명하면 구원의 일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전체를 생각하지 못합니다.

에베소서 2장에서 구원을 설명하는 것과 맞지않습니다.
에베소서 2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구원받지 못한자는 죽은사람이다.
<죽은사람을 살려낸 것이지, 구덩이나 웅덩이에 빠져 혼자힘으로 못나오는 사람을 건져낸 것이 아니다.>

물론, 웅덩이에서 건져낸 측면이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 외에 성경은, 에베소서 2장에서는 구원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가 밧줄을 잡아낼 힘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가 붙들지 않으면 하나님도 그를 구원하지 못하는 것처럼 설명하면 안된다>
그는 죽어있는 시체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살려내셨습니다.

저희들이 구원간증을 할때, 이런면에서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전에는 나쁜짓을 하던 사람이 있습니다. 싸움도 하고 바람도 피고 나쁜짓을 하고 살았는데 구원받고 신실하게 살고 도덕적으로 살고가 아닙니다.
물론, 도덕적인 그러한 것도 구원은 포함합니다.

그래서 어떠한 일이 일어나냐면, 1세대는 분명한 삶의 변화가 있습니다.
2세대 들은 세상과 분리된 분명한 삶을 살게 합니다. 그래서 이들의 구원간증이 별로 죄를 진것이 없습니다. 뭔가 나쁜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구원간증이 희미합니다.

그래서 큰죄를 지었어야 복음을 깨닫고 구원을 받아야지 그 삶의 변화가 뚜렷한데 그런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주일학교에서 복음을 듣고 구원받은 사람은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죄는 부도덕 한것이 아닙니다. 물론 부도덕한것은 죄에 포함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것이 죄입니다.

머리로는 알고 있어도 실제 삶의 중심에서 하나님을 나의 주로 인정하지 않은 것입니다.
부도덕한 죄를 짖는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불순종 한것입니다. 거기서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나를 위한것이다. 이제 그분은 나의 하나님이라고 해야 합니다. 이렇게 바꾸어진것이 구원입니다.

조금 애매하지만 다른말씀을 드려보겠습니다.
한국에서 보편적으로 알려져 있는 유교에 '효도'라는 것이 있습니다. 부모를 공경하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에서도 부모를 공경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두개는 차이가 있습니다.

유교에서 부모를 공경하는 이유는 부모님이 나를 낳아주시고 길러주셨기 때문입니다.
나의 존재를 이땅에 있게 하셨고, 이제까지 나를 길러주셨고 희생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연히 존경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그래서 유교에서는 당연히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관점은 다릅니다. 성경에서는 부모님이 나를 낳아주셨고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을 나의 부모로 세워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분을 통해서 나를 이땅가운데 태어나게 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질서적으로 부모는 가정에서 하나님을 대변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순종하는 것입니다.

똑같은 공경이지만 그 동기가 다른것입니다.

이와같은 갈등을 세상에서 소설로 표현한 사람이 있습니다. 톨스토이가 죄와 벌이라는 유명한 소설을 썼습니다.
<살인하지 말라> 왜 살인하지 말아야 합니까?
소설의 주인공은 이렇게 느낍니다. 이세상에 쓸모없는 노파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녀는 전당포로 돈을 벌고 정말로 돈이 필요한 사람에게 돈을주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회에 필요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주인공은 그 노인을 죽이고 그 돈을 가지고 필요한 사람에게 주는것을 옳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대로 실행합니다.
그런데 자기 이론대로 되지 않습니다. 자기 마음속에 양심이 있습니다. 그것은 살인입니다. 합리적인 살인입니다. 세상에서 유익한 살인인데 그것이 자기를 괴롭혔습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인명이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누구에게나 살아갈 권리가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성경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한국에서 매우 큰 도사견 같은것을 길러서 어린아이들이 지나가다가 개에게 물려 죽습니다.
그러면 그 개를 반드시 죽입니다.
성경에서 살인한 사람은 반드시 죽이게 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렇게 이해 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졌습니다.

이 자연세계에서 인간은 하나님을 대변합니다. 인간은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만약 짐승이 사람을 공격하면 그 짐승은 사람을 공격한 것이 아닙니다. 그 짐승은 창조주 하나님을 공격한 것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죽이게 되어 있습니다.
복음은 도덕과 차이가 있는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도덕적으로 생각하려고 합니다.
나쁜짓을 했는데 내 혼자의 힘으로 그것을 극복할수 없었는데 하나님께서 도움을 주시고 내가 그것을 붙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거기서 빠져 나왔다 합니다.

그러나 에베소서 2장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죄로말미암아 죽었는데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는데 이제 살려냈다고 합니다. 이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렀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나쁜사람이었는데 이제 착한사람이 되었다가 아니고 죽었는데 살아났다고 하는것입니다.
성경에 대해서 반응 할수 없었는데 성경에 대해서 깨닫고 이제는 하나님을 깨닫고 순종하려고 하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높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늘에 앉히시니>
하늘은 항상 하나님을 상징합니다. 그 하늘에 앉힌것은 하나님의 임재앞에 나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을 높이는 자리에 올라와 있다는 것입니다.

하늘은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장소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데 기뻐하고 하나님의 임재앞에 즐거움으로 나가는 존재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에베소서 2장은 구원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우리 실제 삶에서 일어난 구원을 주님의 관점에서 설명합니다. <죽었는데 살았다>
과거에는 죽은것이다. 과거에는 불쌍하고 부도덕한것이 아닙니다. 죽은것입니다.
그리고 밧줄을 던져주니 그것을 잡아 우리가 살아난것이 아니고 죽었는데 살려준 것입니다.

그다음, 2장 10절을 보시겠습니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엡2:10, 개역한글)

교회는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만드신바라>는 자연과 대조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똑같이 하나님이 교회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바라는 단어는 이렇게도 해석됩니다. <걸작품이다>
저희들이 자연을 보고 감탄합니다. 미국 캐나다에 와서 자연을 보면 한국의 아기자기한 자연을 보다가, 몇십층 아파트 크기의 나무들 산을 보면 어마어마 합니다.

그 앞에 서면 감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렇게 교묘하게 아름답게 만드신 분이 있는가! 하고 감탄하고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그렇습니다.
교회를 자연과 비교합니다. 교회를 보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이렇게 만드실수 있는가, 이렇게 영광스럽게 만들수 있는가! 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연과 비교할수 없는 뛰어난 걸작품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자기자신에 대해서 이렇게 이해해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죽은 우리를 살려서 만들어낸 놀라운 걸작품입니다.

요즘도 믿지않는 사람들중에 많은 사람들이 피크닉을 간다고 자연속으로 갑니다. 자연속에서 그렇게 느끼듯이 교회가 그런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그 다음, <선한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았다>
자연은 선한일을 위하여 지음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선한일을 위하여 지음받았습니다. 선한일이 무엇입니까?

성경에 그런 대목이 나옵니다.
부자청년이 주님앞에 나옵니다. 그는 주님을 이렇게 부릅니다 "선한 선생이여"
그말에 대해서 주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하느냐. 하나님 한분 외에는 선한이가 없느니라"
그것은 이 부자청년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네가 나를 사람선생으로 본다면 그앞에 선한자 라는 호칭을 붙이지 마라.'

여기서 선하다고 하는것은 도덕적으로 사람의 기준에서 선한것이 아닙니다.
선한것은 하나님의 영광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교회를 창조하셨습니다.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얻으시고자 하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되기 위해서 선한일을 해야 합니다. 그 선한일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입니다. 그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일은 전에 예비하신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겠는가? 그래서 전도를 하자." 이런것이 아닙니다.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해 놓으신 것입니다. 전에가 언제입니까? <창세전에> 입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만드실때 목적을 만드시고 가지고 만드셨습니다. 선한일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영광을 돌리는 일이라고 하는것은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계획하신 선한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영원전에 세우신 계획을 따라 하나님이 영광을 얻으시는 이 일을 행하고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행한다고 하는것은 행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영원전부터 계획하신 교회 진리들을, 원리들을 순종하며 한걸음 한걸음씩 걸어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한일을 이루어 내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연을 보고 감탄하듯이, 교회를 보고 교회를 만드신 창조의 하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얼마나 위대한 하나님이십니까?

죽은사람을 살려내신 이같이 영광스러운 일을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와같은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라고 감탄하는것이 교회여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원을 이렇게 이해합니다. 구원은 교회가 된것입니다.
교회는 자연과 비교할수 있는것입니다. 자연을 창조하셨듯이 하나님께서 교회를 만드셨습니다.

자연은 무에서 말씀으로 창조하셨지만, 하나님께서는 죽은자를 주님의 십자가의 피로 살려내셔서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물질 세계를 만드실 때도 목적이 있으셨습니다.
이제 이 영적인 세계를 만드실 때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위대한 계획이 있었습니다. 그 선한 일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서, 그 선한일을 이루고자 하는 하나님의 계획이 창세전에 있었습니다.

이 위대한 계획을 배우고 그것에 순종하여 영광스러운 교회를 이루고 이루어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이와같은 관점에서 봐야 합니다.

"나는 이제 어떤일을 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다. 나는 하늘에서 나의 하나님과 함께 영광스러운 복락을 누릴것이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구원하셔서 교회로 부르신 하나님의 의도를 알고 그분의 목적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중요한것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배우고 계획한 인생을 살아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계획하신 인생을 순종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생각이 바뀌어져야 합니다.
내가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최고의 것을 알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의 한 지체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우주적인 교회의 지체일뿐 아니라 지역모임의 한 지체로 더해주셨습니다.
우리는 교회에 참석하는게 아니고 교회를 다니는게 아니고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의도하신 교회의 영광을 이루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신 의도입니다.

이것이 에베소서 2장에 1-10절까지 하나님께서 교회를 이해하고 계신 관점입니다.
저희들이 말씀을 듣고 배우고 실제 경험하고 그와같은 것들이 이루어 져서 주님께 영광돌릴수 있는 일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