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이레 2022. 7. 11. 22:44

2017년 5월 7일 일요일

강사 :한봉래 형제님

< 누가복음06_부활 >

13 그 날에 저희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 오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촌으로 가면서
14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15 저희가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저희와 동행하시나
16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인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 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18 그 한 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당신이 예루살렘에 우거하면서 근일 거기서 된 일을 홀로 알지 못하느뇨
19 가라사대 무슨 일이뇨 가로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여늘
20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1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된지가 사흘째요
22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저희가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23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으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24 또 우리와 함께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의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
25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26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27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28 저희의 가는 촌에 가까이 가매 예수는 더 가려하는것 같이 하시니
29 저희가 강권하여 가로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저희와 함께 유하러 들어 가시니라
30 저희와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
31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32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33 곧 그시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 한 사도와 및 그와 함께한 자들이 모여 있어
34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는지라
35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눅24:13-35, 개역한글)

50 예수께서 저희를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저희에게 축복하시더니
51 축복하실 때에 저희를 떠나 [하늘로 올리우]시니
52 저희가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53 늘 성전에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눅24:50-53, 개역한글)

이 시간에는 주님의 부활에 대해서 살피겠습니다.

다시 말씀 드리겠습니다. 누가복음은 예수님께서 하늘의 영광을 떠나 이땅에 오신 이야기가 전반부입니다. 후반부는 주님께서 이 땅에서 다시 원래 영광스러운 하늘로 돌아가시는 이야기 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누가복음 9장에서 시작됩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기로 굳게 결심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은 주님께서 이 지상에서 영광을 얻으시는 장소입니다.
이 예루살렘에서 기이한 일이 일어납니다. 주님께서 나귀를 타고 들어가셨습니다. 사람들은 환호했지만 그 환호는 주님을 금요일에 못박으라는 저주로 바뀔것을 주님은 아셨습니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나라가 연기되고 교회가 세워집니다. 그래서 두번째 에루살렘에 들어가실때 주님께서는 만찬을 제정하시고 교회를 세우십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죽음은 세상 죄를 대속하는 죽음입니다. 이 죽음이 하나님을 만족케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님을 높이십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셨고 성령님께서 예루사렘으로 오십니다. 이 예루사렘은 주님께서 이름을 두신 성입니다.
그런데 이 예루살렘에 주님과 함께 들어가고 주님이 예루살렘에 오시는것을 환영했다가 예루살렘을 떠다는 두제자가 있습니다. 이들이 엠마오로 가는 두제자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이 예루살렘을 떠난다고 하는것은 예수님을 왕으로 시인하는것을 포기한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주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때 주님을 "호산나 나윗의 자손이여" 라고 환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죽으셨기 때문에 그것을 포기하고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나타나셔서 이 두제자를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려보내는 이야기 입니다.
주님께서 이 제자들에게 주님의 죽음이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죽음이며 필요한 죽음이었다는 것을 설명해 주십니다.

주님의 부활하심에 대해서 네복음서에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는 엠마오로 가는 두제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주님의 부활하심의 증거로 이 이야기가 핵심적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금요일에 돌아가셨기에 금요일 안식일에 쉬고 토요일이 지나 주일 아침 미명에 여자들이 향품을 챙겨 주님이 계신 무덤으로 갑니다.
이 여자들은 무덤에 예수님의 시신이 당연히 있을것으로 예상하고 갑니다.

그런데 무덤에 가보니 시신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가장 확실한 증거는 빈 무덤입니다.

잠깐 다른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모든 위대한 사람들의 무덤에 그 시신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대 성인 중 하나인 소크라테스의 무덤에는 그의 시신이 있습니다.
공자의 무덤에도 공자의 시신이 있습니다. 물론 지금 그들의 시체는 다 흙으로 돌아갔지만 그 무덤에 그 시신이 있었음을 모두가 다 압니다.
석가모니의 시체는 화장하였지만 그 몸에서 나온 사리가 지금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만은, 이세상에 주님의 시신은 없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증거입니다.
이 사실에 대해서는 두가지 주장이 있습니다. 첫번째는 성경의 말대로 주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두번째는, 유대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가고 부활했다고 거짓말 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맞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때 용기있는제자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다 도망가고 없었습니다.
그 제자들 중에 담대히 예수님의 무덤에 들어가서 시체를 꺼낼만한 용기있는자가 없었습니다.

또한 그 예수님의 무덤을 로마의 군인들이 지키고 있었으며 그 무덤을 아무도 열수 없도록 인봉해 놓았습니다. 이것을 제자들이 밤새 로마 군인들을 피해서 예수님의 시신을 꺼내간다는것은 말이 안됩니다.
이 주장은 설명이 안되는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왜 이렇게 주장을 할까요?

로마군인들은 예수님의 부활로 놀랐습니다. 사실대로 말하면 자기들이 빌라도에게 어려움을 당하기에 거짓말을 한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많은 반대에 부딧힙니다.
유대교의 지도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반대했습니다. 대제사장들은 사두개인들이었습니다. 사두개인은 부활을 믿지 않습니다. 이들이 주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사도들을 감옥에 가두고 핍박합니다.
이들은 이 부활의 복음이 확산되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왜냐하면 이 복음이 자기들을 정죄하기 때문입니다.

종교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을 죽였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루어졌고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음으로서 사람들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 이것이 복음의 내용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의 이 복음을 묵살낼수 있는 간단한 방법은 예수님의 무덤의 시신을 보여주는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로 그 일을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의 첫번째 증거는 빈 무덤입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를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하십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예수님께서 바로 나타나셔서 자신의 모습을 보이시고 "내가 부활했다"라고 하시는것이 빠르고 쉬울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렇게 하시지 않고 구약 성경을 통해서 설명하십니다.

부활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믿을수 없는 증거입니다. 인류 역사상 일어난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가라사대 무슨 일이뇨 가로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여늘 (눅24:19, 개역한글)

여기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부활을 믿지 못한 첫번째 이유가 나옵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제자는 예수님을 선지자로 봅니다.
물론 예수님은 선지자가 맞지만 그 이상 이십니다. 하나님이십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누구냐라는 인식에서 실패하고 있기에 부활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두번째 이유를 보겠습니다.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눅24:20, 개역한글)

그들은 예수님의 죽음에 반대했지만 어쨋거나 그들에게는 대제사장들의 권위가 살아 있습니다.
대제사장들이 예수님을 죽인데는 무슨 이유가 있을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잘못된 지도자들의 권위를 인정할때 부활을 믿는데 장애가 옵니다.

세번째 이유를 보면, 그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봅니다.
구약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무에 달려죽는 자마다 저주받은 자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저주받은 죽음입니다. 그 예수님의 죽음의 강렬한 인상이 그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데 장애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저희가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눅24:22, 개역한글)

여자들은 예수님의 시체가 안치된 무덤을 봅니다. 이 무덤은 한사람을 위한 무덤이기에 착각이 있을수 없습니다.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으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눅24:23, 개역한글)

그러나 여자들이 예수님의 무덤에 찾아 갔을 때 시체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살아계신 증거를 눈으로 보지 못하고 천사들의 증거를 보았습니다.

4 이를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5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6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
7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기워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
8 저희가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눅24:4-8, 개역한글)

두번째, 부활의 강력한 증거는 주님의 예언,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시는데 있어서 어떤 특이한 일을 기록해져 있는지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실때 나귀를 타고 들어가십니다. 주님의 초림은 겸손히 사람으로 죽기위해 오십니다.
두번째 오실때는 말을 타고 정복자로써 적들은 발앞에 두기위해 오실 것입니다.

주님은 나귀를 타실때 어떻게 하셨나요?
제자 둘을 보내어 매어있는 나귀 새끼를 가져오라 하였습니다. 주인이 막으면 "주께서 쓰시겠다"하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똑같이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만찬을 제정하시러 두번째 예루살렘에 들어가실때 이번에도 제자를 보내어 성중에 물동이를 이고가는 남자를 따라 그 집에 들어가서 "선생께서 유월절을 잡수실 방을 보이라"고 말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일은 주님꼐서 말씀하신대로 똑같이 일어납니다.

주님께서는 부활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여자들은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합니다. 그때 천사들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기억하라 고 합니다.

모든것을 말씀하시고 그 일을 말씀대로 똑같이 이루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서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슴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그리고 천사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기억하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을 저희들에게 적용하면 두가지를 적용할수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지금도 살아계십니다.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두세사람이 내 이름으 모인곳에 나도 그들중에 있느니라>
이것을 어떻게 느끼고 이 진리위에서 행동하느냐가 우리 책임입니다.

두번째, 주님께서 살아서 일하고 계신것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래서 압니다. 주님께서 여기 계십니다. 그리고 그 사실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것이 두제자 사이에 섰던 예수님의 모습을 우리로 적용할수 있습니다.

두 제자는 왜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는지를 계속 살피겠습니다.

세번째, 이 소식을 여자들이 사도들에게 전합니다.
그런데 사도들 중 베드로 요한이 예수님 무덤에 달려가보니 여자들이 말한바와 똑같았습니다. 그리고 베드로 요한도 천사를 발견합니다.

또 우리와 함께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의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 (눅24:24, 개역한글)

그러나 결정적으로 예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살아계시면 어디 있느냐 하는것입니다만 예수님은 그들과 지금함께 계시며 말하고 계셨습니다.

그럼 우리는 예수님이 곁에 계심을 어떻게 알아봐야 할까요?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눅24:25, 개역한글)

예수님은 그들이 제대로 믿지 못함을 책망하십니다.
<믿을수 있었다. 못 믿는것은 너희들이 책임이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고 깨닫지 못하면,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하시지 않습니다. "성경이 어렵지.. 66권이나 되고 복잡하니.."

성경이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미련한 것입니다.

26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27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눅24:26-27, 개역한글)

말씀에 그리스도가 비참한 죽음을 죽을것이 구약에 나와 있었습니다.
이것은 모세오경, 창세기부터 구약 끝까지 나와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의 절정은 죽음입니다.
이 사실이 구약 성경의 중요한 대목마다 다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구절을 읽고도 모르고 있습니다.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눅24:25, 개역한글)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눅24:27, 개역한글)

<모든>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는 구약성경을 압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죽으셨을때 부활을 못믿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받아들이고 그 약속이 성취되길 바라는 신자들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성경대로 오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셨을때 이것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을 읽으면서도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당한다고 하는 부분을 읽었으나 살피지 않고 넘어가기 때문입니다.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은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리스도의 고난을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 나름대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성경을 이해하지 못하는 중요한 이유입니다.
성경은, 성경대로 사는사람이 이해합니다.

성경은 영리하고 오랫동안 성경을 살펴보는 사람이 이해하는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신학을 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을 할것입니다. 그렇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성경대로 사는 사람이 이해합니다. 그들은 자기삶의 고난을 기꺼이 당하는 사람입니다.

자기 삶의 고난을 당하기 싫고, 당하지 않기에 그리스도의 고난을 읽어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오시면 로마의 압제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할것이라는 현실적인 고난의 해방만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부분적으로 이해하는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말씀의 한 측면만 강조해서 갖고 있는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특별히 말씀 중에서 축복만을,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것만 강조하는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한가지 예를 들면, 구원을 이야기 할때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죄가 용서되었다는것만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만 전해지면 사람들이 자기 마음대로 삽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아서는 안됩니다.

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롬6:1-2, 개역한글)

죄 용서의 부분만을 강조하기에 죄를 짖고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균형잡히게 성경의 모든것을 전해야 합니다.

<내가 네게 가르친 모든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죄용서를 받은 자는 새 사람입니다. 새로운 생명, 새로운 가치관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또 말이 아닌 삶으로 입증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행위로 구원받는다는것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사람이 삶으로 그 은혜를 드러낸다는것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그리스도인 계속해서 영적으로 산다는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넘어질때도 있고 연약이 있습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주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에 영적인 사람과 신령한자와, 어린아이가 나옵니다.

어린아이는 젖만 먹습니다. 신령한 자는 밥을 먹습니다. 하나님의 엄위하심을 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실수에 대해서 반드시 책임을 묻습니다. 우리는 은혜받을만자가 아니지만 주님께서 은혜를 베푸셨음을 압니다.

하나님께서 징계하실때 하나님의 집에서 징계하십니다. 징계가 없으면 사생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계속해서 실수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징계하십니다. 징계가 없는사람은 가짜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우리가 세상적으로 살때마다 하나님께서 징계하십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우리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나를 징계하시고 나를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저희의 가는 촌에 가까이 가매 예수는 더 가려하는것 같이 하시니 (눅24:28, 개역한글)

헤어질때가 되자 저희가 강권합니다.
왜 일까요? 그 이유는 말씀을 더 듣고 싶어서 입니다. 말씀보다 더 좋은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도집회를 할때 외부사람이 오면 식사도 불편하고 잠자리도 불편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초청을 하는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입니다.

저희와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 (눅24:30, 개역한글)

음식이 왔으나 사람들은 음식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떡을 떼십니다.

주님께서 12살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일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이 동행중에 있는줄 알고 가다가 예수님이 없는것을 알고 찾으면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성경 학자들 가운데 계셨습니다.

주님께서 가운데 계시면, 우리는 항상 이렇게 이해해야 합니다.
주님은 항상 중심에 계시지 않으면 주님이 아닌 것입니다.
12살 소년이 성경 학자들 가운데 있으면서 질문하시지만 그 중심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하나님이십니다.
12살된 주님은 성경의 어떤 학자보다도 위대하십니다.

마리아가 걱정했을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서 내 아버지의 일을 해야 함을 모르십니까>
그러나 주님꼐서 순종하고 가십니다. 여기서 주님의 신성과 인성이 나옵니다.

주님께서 글로바의 집에 들어가지만 주님께서 그 집의 주인이신 것입니다.
이제 두제자들은 예수님꼐서 떡을 뗄때에 주님이 주님이심을 알아봅니다.

주님은 지금도 살아계십니다. 그 살아계신 주님을 알게되는것은 성경이 우리마음에 밝혀지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우리는 주님의 임재를 알고 의식하고 기뻐합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된지가 사흘째요 (눅24:21, 개역한글)

<사흘째요>
이때는 주님의 부활이 일어난 때입니다만 그들은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메시아가 오셔서 하는 축복이 현실적인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스라엘을 로마에서 독립해주고 세상중의 제일가는 나라로 이스라엘이 회복될것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영적인것을 못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속에 살면서 주님을 나의 왕으로 모시고 살지 못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살면서 주님이 받으신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고난을 싫어합니다. 주님을 잘 섬기지 못하는 사람은 고난을 안받을것이라고 생각하고 고난을 받고자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고난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방해하는것이 아니라 고난이야 말로 그리스도답게 만드는 수단입니다.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눅24:26, 개역한글)

우리도 이 세상에서 고난을 받고 하늘에 들어가야 합니다.
두 제자는 이 세상에서 주님께서 현실적인 축복을 줄것이라고 생각하기에 넘어진 것입니다.

또 하나는 그리스도가  죽는다고는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입니까?

구약에서 처음부터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아야 할것이 예언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최초의 예언은 창세기 3장 '여자의 후손' 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영향력 아래 있는 사람과 세상의 영향력 아래 있는사람사이에 갈등으로 이루어집니다.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고 승리할 것입니다. 그리고 뱀이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물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고난이 예언되어 있습니다.

그 후 바로 가인과 아벨의 제사가 나옵니다.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는 양을 피를 흘리고 잡아야 합니다.
인간이 범죄했을때에 하나님께서는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곧, 한 동물이 그 옷을 만들기 위해서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것을 풀어서 다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이해할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말씀을 추구할때에 성령님께서 다 이해하게 해주십니다.
그렇지 않을때에 미련하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잠깐, 남은 시간에 고난에 대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은 네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1.첫째는 죄인들을 위한 죄용서의 피를 흘리신 죽음입니다. (갈라디아서 2:20)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이것은 사도바울이 한 고백이지만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다 고백할수 있습니다.

2. 둘째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은 교회를 탄생시키신 것입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엡5:25, 개역한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셨습니다.

3. 세번째, 예수님은 메시아로써 죽으십니다.

주님께서는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았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빌라도는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일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체포할때 군인들을 보낸자가 빌라도 입니다. 군인들이 예수님을 체포한것을 빌라도에게 보고 했습니다.

어디에 있더냐, 뭐하고 있더냐, 누구랑 있더냐, 빌라도의 물음에 군인들은 대답했을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 있었습니다." "제자들과 있었습니다."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빌라도는 바로 예수님이 로마황제의 반역자가 아님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변명하지 않으십니다. <네가 말하였노라> <내가 진리를 증거하러 왔노라>

4. 네번째, 주님은 두번째 사람으로 오셔서 죽으십니다.

첫번재 사람은 아담입니다. 아담이 범죄하면 그 믿의 모든사람이 범죄한 것입니다.
예를들면 대한민국이 일본과 전쟁을 선포하면 전쟁으로 들어갑니다. 일부의 국민이 전쟁을 거부한다 하더라도 머리가 결정하면 그것이 모든 지체에 영향을 미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두번째 사람으로 오십니다. 사람을 대표하여 오시고 사람으로 죽으십니다.

이것이 주님이 받으신 고난 네가지 측면입니다.
그리고 이 네가지를 사단은 전부 방해합니다.

주님은 죄인을 죽으시지만 죄인이 아니십니다.
죄없는 사람만이 죄인을 위해서 죽을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주님의 죽음을 모독합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을 두 죄인 가운데 넣어 죽여버립니다.

두번째, 주님께서 교회를 위해서 죽으신 죽음은 요한복음10장에 나왔있습니다.
<나는 스스로 목숨을 버리노라>

예수님은 스스로 죽으십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신 죽음은 예수님이 자원하여 선택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굳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기로 결심하시고 얼굴을 돌같이 하시고 올라가십니다.

그러나 사단은 예수님이 도망갈것처럼 군인을 보내 검과 망치를 들고 체포하러 옵니다.

예수님은 말씀화셨습니다.
<이 양뿐만 아니라 다른 우리에 있는 내 양들을 한 목자에게 있게하기 위해서 죽는다>

그러나 예수님을 잡으러 오고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하게 못박는것이 예수님의 자발적인 죽음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세번째, 예수님의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씌웁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왕으로써의 죽음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네번째, 예수님은 온 인류의 대표자로 죽습니다. 사람의 타락 이후에 하나님의 주신 은혜는 옷을 입히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실때에는 벌거벗으십니다. 그리고 죽입니다. 사람으로써 부끄럽게 죽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은 네가지 측면에서 다 전합니다.
믿는자는 구원을 얻는다. 은혜의 시대에 믿는자는 예수님의 사랑하는 신부가 될것이다. 교회의 복음입니다.

세번째,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것입니다. 그때는 심판하기 위해서 오실것입니다.
네번째, 주님께서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주님이 다스리는 나라에서는 어린양이 사자들과 뛰놀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에던동산의 시대가 다시 올것입니다. 하나님께 모든생물이 복종 할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권한을 사단이 어떻게 모독했고 그럼에도 복음이 어떻게 전해졌는가 입니다.

우리에게 적용해 보겠습니다.
고난에 대해서 가장 많이 생각해 볼수 있는사람이 욥니다.
그는 잘못없이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가 왜 고난받는지 이유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우리도 왜 고난 받는지 그 이유를 알 필요가 없습니다.

욥기에서 하나님께서 욥에게 보이신 것은 하나님의 위대함입니다.
<세상을 만들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우박창고를 가보았느냐, 악어를 길들일수 있느냐>

고난의 이유를 찾지않고 하나님의 위대함을 보는것이 고난을통과하는 방법입니다.

사도바울도 체의 가시를 없애줄거을 하나님께 구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허락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에게 고난이 유익합니다.
고난을 제거하는것이 유익이 아닙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약해야 내가 영광을 받는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약한것을 자랑합니다.

이것이 고난을 받는 우리의 태도여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골1:24)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워야 합니다. <나의 고난이 너희의 영광이니라>

우리가 고난을 이해하지 못하면 주님의 십자가를 우리가 이해할수 없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에 대해서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고 우리의 삶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주님의 영광에 대해서 오해하게 되고 우리가 갖게될 영광에 대해서 오해하게 됩니다.

주님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에게 교육하셨습니다.
<고난이 영광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고 고난을 받는것이 영광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수단이다>

고난을 통해서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를 더 잘 이해할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