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형모 형제님/하나님의 사람의 집

< 하나님의 사람의 집 08_청소년기2 >

박이레 2021. 7. 20. 23:15

2019년 10월 16일 수요일 / 정형모 형제님

< 하나님의 사람의 집 08_청소년기2 >

오늘 저희들이 청소년기에 관한 또 다른 주제에 대해서 살펴보고 주님께서 저희들 마음속에 은혜를 허락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저희가 이리 저리 구르며 취한 자 같이 비틀거리니 지각이 혼돈하도다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서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광풍을 평정히 하사 물결로 잔잔케 하시는도다 저희가 평온함을 인하여 기뻐하는 중에 여호와께서 저희를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시는도다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을 인하여 그를 찬송할찌로다"(시107:27-31).

읽은 말씀에 복 주시기를 바랍니다. 십대 시대에, 청소년 시대를 어린이 방식과 성인의 포부, 이 두가지가 기이하게 혼합된 기간이다. 이렇게 말할수 있습니다. 실제 생활 방식은 어린아이 방식인데 마음은, 포부는 독립된 상태, 어른이 된 상태, 이와같은 두가지가 묘하게 섞여있다. 그것이 사실 십대의혼란이고요. 이런 혼란을 피하기 위해서 부모님들이 기도하고 또 십대가 되기전에 청소년이 되기전에 구원으로 인도하고 또 말씀안에서 자신들을 준비하는 그런 일을 위해서 노력하고 또 본인 자신들도 주님 말씀으로부터 지혜를 얻어서 미래를 준비해야 되겠다. 라는 생각을 가져야 되겠다고 생각합니다. 인생의 처음 출생에서 부터 시작해서 여러 단계들이 있습니다. 그 각각의 단계들을 우리가 생각해 볼때, 그 다음 단계로 들어가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저희들이 주님을 알고 하나님 말씀을 통해서 준비하는 기간이라 그런 기간을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아직 말하기 전에 부모는 그 아이들에 대해서 준비 시키고 구원에 이를수 있도록, 복음의 말씀이 증거될때, 그들이 복음의 말씀을 받고, 죄인임을 잘 알기 때문이지요. 그 말씀에 순종함으로 복을 누리고 만일 그렇게 하나님께서 인도 하셔서 말을 할수 있을때에 복음을 말씀을 듣고 구원을 받는다면 그들이 그 기간중에 준비해야 될 것들이 있죠. 무엇을 준비하겠습니까? 십대에 닥쳐오는 여러가지 도전들, 마음속에 부담이 되는것들, 특별히 저희들이 십대에 여러가지 문제들을 보게 될때 주변에서 찾아오고 있는 동료 압력, 압박, 많이 있습니다. 사단이 이제 개개인을 공격하고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사람의 집을 무너뜨리고자 호시탐탐 끊임없이, 부단히 노력하고 있는 현실이기 때문에 저희들 부모님들은 우리 자녀들을 생각하고 기도하고 주님께서 보호해 주시고 또 각 단계를 준비 가운데 잘 헤쳐 나갈수 있도록 저희 부모들은 노력하고 우리 자녀들은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많은 도움과 안내를 받아야 되리라 생각 합니다. 십대에 자기의 생각대로 나가고자 원하는 자녀들이지요. 특히 동료 압력으로 인해서, 사실 이 동료 압력 배후에는 마귀가 있지요. 다양한 방법을 통해서 그들이 영원한 가치나 또하나님을 통해서 받는 고귀한 복, 그런것과는 관계없이 그들 마음속에 오만함, 교만함, 그리고 세속적인 것, 그리고 사치하는 것, 세상의 여러가지 유행, 수많은 것들을 동원해서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또한 그렇게 하는것이 어른이 된것같고 그리고 마음속에 기쁨을 준다고 믿는 그런 아이들, 구원받지 않았기 때문에 그럴수 있고요. 또 그 다음에 구원받았는데도 그럴수 있습니다. 이것 참 저희들이 주님 앞에서 생각하고 기도하고 주님의 도움을 구해야 되겠지요. 저희 자녀들이 십대 기간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정말로 마음속에 받고 지혜를 가지고 그 다음 단계를 위해서 준비할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것은 부모들의 기도고, 모임의 성도들의 기도고, 또한 지혜로운 자녀들은 본인 자신들이 주님 앞에서 그렇게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고 이제 세상의 영향을 받아서, 구원받지 않았기 때문에, 또 구원 받았는데도 이제 세상의 영향을 받아서요. 동료 압력으로 인해서 그것을 수용하고 그와같이 함께 하려고 하는 마음가짐이나 자신의 뜻, 이런것을 펴려고 하는 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와같은 부모님들은 대단히 고통 가운데 빠지게 되죠. 절망적인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또 평안을 잃습니다. 그리고 쉽게 자주, 죄책감에 빠집니다. 무엇을 잘못했기 때문에 이와같이 될까? 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죠. 물론 일차적으로는요, 이 모든일의 일차적인 것은 인간의 타락한 성품 때문에 이와같은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님들은 이와같이 반항하는 자녀들을 두고 있을때에 마음속에 많은 고통과 말 못할 괴로움과 주님앞에 기도하고 엎드리고 하지만 너무나 자주 절망 상태에 빠지게 되고 평안을 잃게되고 자주 죄책감에 빠집니다. 사실상 이와같은때에 뒤를 돌아보고 후회하거나 하는 이와같은 것은 도움이 되지 않고 자신의 위를 바라봐야 합니다. 주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이와같은 때에 부모님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자식이 반항하지 않고 주님의 말씀을 따라서 구원을 받고 주님앞에 오든지, 구원을 받았지만 세상에서 오라고 하는 손가락질에 순응하고 잘못된 친구들과 함께 어울리고 세상의 가치가 멋지게 보이게 되는 그와같은 자녀들의 마음으로 인해서 세상이 흘러 갔을때에 어떻게 될까? 첫째, 자녀들을 주님에게 맡겨야 합니다. 주님앞에 의탁을 해야 합니다. 두번째요, 부모님 자신이 주님앞에 의탁해야 합니다. 오늘 저희들이 말씀을 읽었습니다. 시편 107편 말씀에 "저희가 이리저리 구르며 취한자 같이 비틀거리니 지각이 혼돈하는도다" 배가 흔들리게 될때, 바다의 폭풍과 풍랑이 심하게 될때, 근심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고통중에 인도해 내시고 광풍을 평정케 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십대가 풍랑의 기간이 되든지 아니면 평온한 바다로 이루어 지든지, 둘중에 하나인데요, 아니면 풍랑으로 시작했다가, 여기 말씀처럼 평온한 바다로 잠잠케 되는 그런 경험을 할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30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평온함을 인하여 기뻐하는 중에 여호와께서 저희를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시는도다" 우리 자녀들이 반항하고 자기의 길을 걸어가게 될때, 첫째 자녀를 주님에게 맡기고 부모님 자신도 주님앞에 맡기고요. 또 한가지는 자녀를 다루는 방법에서 뭔가 적절하지 못한일이 있었다는 점을 인정하고요. 이제 주님앞에 자백하고 그리고 자식에게도 그와같은 일을 이야기하고 고백하는 그와같은 일은 그것은 도움이 되는 일입니다. 만일 이와같이 하지 않을때에 자식과의 거리는 점점 멀어지고요 자식은 부모를 이제 불신하게 되고 더욱 더 불신하게 되고 그러나 이와같은 부족한점에 대해서 첫째 정직하게 주님앞에 고백하고 또 자식과도 적절한 대화속에서 실패한 일들에 대해서 인정한다고 하는것은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데 중요한 계기가 되리라 생각 합니다. 반항하는 십대를 다루게 될때, 아버지 어머니가 그 일을 놓고 한 마음이 된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아이들이 말을 잘 듣고 순종하게 될때보다도 아이들이 순종하지 않고 반항하게 될때, 부모님 마음속에 아버지와 어머니 마음속에 부모사이에 잦은 이견이 생기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견이 생기게 될때 더욱 더 어려워지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두 사람이 한 마음으로 주님앞에 기도하고 이미 이야기 한 것처럼, 자녀를 주님앞에 의탁하고 아버지 어머니가 주님앞에 한 마음으로 자기 자신들도 의탁하고 또 다루는 방법에 있어서 결코 이견이 생기지 않도록 주님에게 도움을 구하고요. 마음에 주님께서 위로와 또한 견고케 해주심을 부부는 주님을 향해서 구해야 합니다. 왜야하면 그와같은 때는 대단히 어려운 때이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부부의 이견이 생길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 아이가 왜 이와같이 되느냐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 하게 될때, 이견이 생긴다면 이와같은 이견으로 인해서 나중에 때때로 아이는 나중에 돌아왔는데, 부부 자체가 균열이 생겨서요. 아이는 돌아왔음에도 불구하고 부부 사이에 마음속에 거리감이 생긴다고 하는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부모가 이와같이 어려운 때에 주님앞에 더욱 더 의지하고 만일 다루는일에 있어서 잘못된 일이 있었다면 주님앞에 자백하고 그것을 고치고 한 마음으로 이제 아이들을 인도해 나가는 일, 대단히 중요하리라 생각 합니다. 또 한가지는 우리 자녀가 십대 자녀가, 계속해서 부모의 말에 거역하고 반항하고 그리고 악한 나쁜 친구들과 계속해서 가는 그런 흐름속에 빠지게 될때, 본인의 마음이 당시에 고정되 있습니다. 이제 결단되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리가고 악한 친구들과 동행하고 그것이 기쁨이라고 생각하고 이미 결정된 상황이라면, 자녀와 함께 계속해서 다투는 일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부모의 마음에서는 그렇게 강요해서라도 바로 잡기를 원하죠. 그것은 부모님의 마음입니다. 그것은 주님 앞에서의 소원이라 믿습니다. 그러나 그와같은 방법으로 계속해서 강요하면 할수록 더욱 더 결과는 어려워질수 있다. 그래서 이미 저희들이 생각한대로 주님앞에 자신을 의탁하고요. 자녀도 의탁하고 부모 자신도 주님앞에 의탁하고 주님앞에 인내 가운데 기다려야 될 것입니다.

"오래 참으면 관원이 그 말을 용납하나니 부드러운 혀는 뼈를 꺾느니라 "(잠25:15).

오래참는것을 여기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래 참는다면 관원도 그 말을 용납한다라고 말합니다. 그 다음에 "부드러운 혀는 뼈를 꺾는다." 혀가 어떻게 뼈를 꺾을수 있겠습니까? 혀는 대단히 부드럽거든요. 그러나 혀는 육체 자체는 부드럽지만 뼈 보다는 훤씬 부드럽지만, 뼈가 행할수 있는 힘이라고 하는것은 대단한 것입니다. 때로는 악하게 때로는 말로할수 없이 선하게 때로는 대단히 육적으로 때로는 대단히 영적으로 그 효력을, 힘을 발휘하는것이 혀지요. 그래서 이 말을 종합한다면 오래참음과 그리고 부모님의 마음속에 주님을 의지하는 믿음 가운데 자녀와의 대화 속에서 이제 자녀의 오만함, 자녀의 고집, 자녀의 자기주장, 이것이 뼈 입니다. 뼈를 녹인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인내해야 합니다. 당장에 이 이슈를 놓고 계속해서 다툰다면, 다툴수는 있습니다만 별로 효과는 없습니다. 어쩌면 더욱더 자기의 고집을 부리고 자기 주장을 가지고 나갈수 있겠다 하는거죠. 그래서 저희들은 주님앞에 맡깁니다. 잠언 말씀을 읽게될때 지혜로운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때, 자기가 실제로 경험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말슴의 경고와 하나님의 말씀의 교훈과 그 말씀을 들었을때 지혜로운 사람은 그대로 순종 합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은 어떻습니까?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 생각대로 걸어가서 부딧치고 터지고 깨지고 난 다음에, 그 다음에 너무 아파서 돌이킨다. 이것은 어리석은 것이죠. 지혜로운 사람은 그렇게 부딧치거나 깨지지 않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을때 대단히 두려운 마음으로 그 말씀 속에는 엄청난 지혜가 담겨있다. 그 말씀을 순종하면 내가 다치지 않는다. 라는 생각을 가지고, 그것은 주님을 경외심으로부터 나온 생각이죠. 그것은 지혜죠. 그 지혜를 가지고 그렇게 한다면 좋죠. 반항아들은 반드시 부딧칩니다. 반드시 깨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잠언 말씀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자녀가 사실은 어려서부터 "너희가 어려서부터 성경 말씀을 알았나니" 디모데에게 그렇게 말씀했죠. 어려서 그 말씀을 알고 그 말씀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고 있다면, 굳이 부딧치고 깨지기 전에 말씀이라면 그앞에 벌벌떨고 엎드린다 그 말입니다. 이것이 사실은 잠언이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지혜죠. 그러나 이제 슬프지만, 반항하게 될때, 나타나는 결과는 무엇입니까? 계속해서 이야기한다 해도 듣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갑니다. 그러면 어디에 갔겠습니까? 그래서 부모는 주님앞에 기도하죠. 주님 저희 자녀가 돌아올수 있도록, 더많이 다치지 않고 상하지 않고 돌아올수 있도록 인내 가운데 기도하고요. 주님께 의탁해야죠. 그리고 주님의 역사하심, 시편 107편 말씀에서 폭풍 가운데 울부짖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개입하시고 이 폭풍을 잔잔케 하셨다. 그래서 안전한 항구로, 안심이 되는 항구로 하나님께서 인도하심을 보지요. 어제 저희들은 주님께서 갈릴리 바다에서 폭풍이 있을때에 비슷한 말씀을 저희들이 보았습니다. 주님이 일어나서셔 말씀 하셨을때 폭풍이 잔잔해졌죠. 우리는 때로는 십대의 반항을 더이상 핸들할수 없는 지경까지 갔을때, 주님앞에 포기하고, 포기한다고 하는 것은 버리는 것은 아니죠. 주님께서 역사하신다는 확신 속에서 자녀를 주님앞에 의탁하는 것입니다. 이 당시에 부모의 마음은 절망적입니다. 고통스럽습니다. 아이가 만약 먼데로 계속 가버리면 어떡할까? 하는 괴로움 때문에 잠을 잘수가 없는 것입니다. 기도하고 주님앞에 매달리는 것입니다. 이때, 주님께서 들으십니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119:67).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71).

자기 주장과 고집, 그리고 친구들의 압력, 그리고 그와같은 것이 즐거운 것이라고 생각했던 아이라해도 고난 당할 겁니다. 계속 고집한다면 심는대로 거두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주님을 처음 다메섹 도상에서 만났을때, 계속해서 가싳를 뒷발질 하기가 네게는 고난이라고 말씀 했습니다. 가시채가 있습니다. 거기에 가서 발로 친다면 아픈것은 누구입니까? 가시채는 하나도 아프지 않습니다. 발로 차게 될때, 계속해서 발은 상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거역하고 하나님 말씀을 이제 등지고 자기 주장대로 걸어가게 될때 다치는 사람은 본인입니다. 그것을 부모님이 계속해서 이야기하고 그러지 말아야 한다라고 이야기하고 ????를 얘기하고 때때로는 달래기도 하고 많은 방법을 통하지만 듣지 않을때에 부모님의 마음은 얼마나 절망적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앞에 절망하지 말고 기도해야 한다. 의지해야 한다. 주님은 반드시 개입할것이다. 라는 소망을 절대로 버려서는 안됩니다. 상황은 절망적이지만 아이에 대한 기대와 주님을 의지함으로 기대하는 것에 대해서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죠. 이것은 믿음이죠.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죠. 비록 지금 상황이 아름다운 상황은 아니라 할찌라도, 그리고 마음속에 절망감을 느끼고 때로는 죄책감도 느끼지만 주님앞에 절대로 포기해서는 아니된다. 이것은 십대의 부모들이 때때로 경험하는 현실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에서, 시편 말씀에서 고난 당하기 전에는 그릇 행했다. 그러나 그 일 이후에 주의 말씀을 지킨다. 고난 안당하고 순종했으면 얼마나 지혜롭고 가장 이상적이었을까요? 그러나 고난 당한 이후에, 그래서 하나님께서 부모님의 마음을 아십니다. 자녀의 고귀함도 아십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주님앞에 엎드리게 될때 "주님께서 선처해 주십시요. 우리 자녀가 아파도 주님께서 아시니까 돌아올수 있도록 가장 적은 도세지로 그에게 말씀해 주시고 고통을 주셔서 돌아올수 있게 해 주십시요.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너무나 아파서 괴로워하지 않도록" 그것이 부모의 마음 아니겠어요? 저희들의 부모는, 저희들의 아버지는 하나님 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십니다. 그 아버지께서 우리를 다루셨습니다. 우리를 자녀로 다루셨습니다. 우리는 거기서 배웠습니다. 그래서 부모님, 우리의 아버지 되신 그분에게 부모의 마음으로 "주님 우리 아들, 딸 선처해 주십시요."라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여기 시편 기자가 이야기 한 것처럼, 고난 당하기 전에는 그릇했다. 고난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 본인이 그렇게 말할때까지 주님께서 인도해 주십시요. 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자녀들이 자기 주장을 계속해서 요구하게 될때, 그리고 자기 길로 가게 될때, 과연 어디까지 타협을 해야 할까? 자식과 어디까지 타협해야 할까? 타협하자고 한다면 본인이 하자고 하는대로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이거든요. 그대로 내버려두는 그런것을 용납하게 될때 그렇게 허락하게 될때, 여러가지 문제가 생깁니다. 과연 본인에게 유익할까? 그리고 그 일로 인해서 다른 자녀들, 동생이나 형이나 그들에게 어떤 영양을 끼칠 것인가? 부모님 마음속에는 많은 생각이 있을 겁니다. 이런일에 대해서도요. 우리는 타협해서, 그가 주장하는대로 타협해서 모든일을 이룰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와같은 일에 있어서 지혜를 주시고 무엇보다도 믿음을 주셔서요. 자녀가 다시 돌아올수 있도록 주님앞에 의지하고 의탁하고 뒤를 돌아보지 말고 위를 봐야 되겠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반항하는 십대의 행동은 용납할수 없지만 그가 돌아오게 될때 부모는 언제나 환영하고 있는 것이죠. 왜냐하면 자녀이기 때문이죠.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다루시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십대는, 이제 십대가 지나면 많은 경우에 좀더 깨닫고 돌아오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가장 이상적인 것은 아니지만, 소망의 빛입니다. 어째든 주님께서 오늘 저희들이 읽은 말씀처럼 폭풍 속에서 주님앞에 엎드리고 기도하게 될때, 주님을 의지할때, 주님이 개입하신다. 결국은 소망의 항구로 인도하신다는 말씀을 어려움 가운데, 고통 가운데, 절망 가운데, 때때로 느끼는 죄책감 속에서도 주님앞에서 저희들은 그와같은 믿음을 절대로 버려서는 안된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제 저희들은요, 어제 몇가지 십대의 문제들을 저희들이 생각해 보았는데요. 동료압력이라든지, 이성에 관한 문제라든지, 친구에 관한 문제, 어떤 사람이 참된 친구고 어떤 사람이 찬된 친구가 아닌가? 이것 분명하게 부모님들은 자식들과 교제하고 교통하고 이해 하도록 교훈을 주어야 되리라 생각합니다. 오늘 저희들이 십대 시대에 오늘날 당면하고 있는 심각한 문제, 이것은 네트웍의 문제 입니다. 인터넷의 문제 입니다. 여기는 물론 인터넷 뿐만 아니라 수많은 문제들이 있지요. 게임.. 이런 것들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까? 하는 생각들을 해보고자 합니다. 인터넷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것은 중립적이라 말할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유용하게 사용할수도 있고 그것을 우리는 사용하게 될대, 많은 손실을 가져오거나 아니면 우리가 노예가 될수도 있다라는 생각을 해야죠. 첫째, 인터넷을 사용하게 될때, 어떻게 사용해야 할까? 이것은 십대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다 생각해야 할 주제이기도 합니다. 인터넷은 순결함 가운데 사용해라. 인터넷에 범람하고 있는, 사단이 인터넷을 통해서 이 시대에, 우리 십대의 마음, 우리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고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게 하고 수많은 부작용과 문제들을 이끌어내려고 하는 이런 일을 저희들은 직시해야 합니다. 인터넷을 통해서요. 얼마나 많은 영혼들의 마음이 세상으로 향하고 그 다음에 세상의 수많은 육적인 일들로 우리 마음이 집중함으로 인해서 주님을 섬길수 없고, 주님과 교제하기가 어려워지고, 뭐 이런쪽으로 이제 몰아가려고 하는가? 특별히 인터넷을 통해서 들어오고 있는 불순한 것들, 외설물들, 야동, 이런것들은 대단히 강력한 힘을 가지고 수많은 우리 자녀들, 십대의 청소년들 마음속에 강력하게 역사하고 있습니다. 어제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이와같은 야동을 통해서 아이들의 마음이 아주 어린 나이에 그들 마음속에 대단히 강력하게 역사하고 그들을 완전히 포로로 잡아서 이제 끌고갈수 있는 힘이 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저희 자녀들을 훈육하게 될때 여러가지 힘이 있었죠? 기도의 힘이라든지, 말씀의 힘이라든지, 모임의 힘이라든지, 관찰의 힘, 관찰의 힘이 뭡니까? 자녀들이 무얼 하고 있는가? 뭘 보고 있는가? 뭘 읽고 있는가? 어디 접하고 있는가? 하는점에서 부모님들이 특별히 어린 나이에 그들을 가이드하고 이와같은 일에서 보호할만한 책임이 부모에게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것에 대해서 저희들의 모든 지혜를 가지고 저희들 가정 안에서 아이들이 불순하거나 또한 성적인데 완전히 노출됨으로 인해서 그들이 당하게 되는 어려움으로부터 보호해야될 책임이 있다고 믿습니다. 여기에 한번 발을 들여놓게 되면, 그리고 그것이 서서히 습관화가 된다면 이것은 대단히 대단히 어려운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방은 대단히 중요하다. 또 이와같은 일을 위해서 이것은 절대로 접촉해서는 안된다는 말로만 끝나서는 안된다. 저희들은 저희들 자녀들과 함께 이 문제에 대해서 정직하게 아이들과 이야기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와같은데에 노출이 된다면 그 다음에 나타나는 결과는 무엇인가? 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상세하게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고요. 아이들이 그것에 대한 이유에 대해서, 그리고 왜 이와같은데에 노출되서 점점 중독이 되거나 그와같은 문제로 인해서 어려움을 당하게 될때, 앞으로의 삶은 상당히 어려워진다. 학업에서도 어려워지고 이제 생활에서도 어려워지고 사회 생활에서도 어려워지고 인생 삶의 전반에서 어려워진다고 하는 점에 대해서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눠야 됩니다. 그리고 우리 자녀들이 그와같은 논리적이고 또한 현실적인 이야기를 통해서 본인들도 이 문제에 대해서 대비할 필요가 있고, 이해하고 이제 자유를 자유답게 사용해야 할 책임감을 서서히 배우고 실천해야 겠다는 것입니다. 십대는 아직까지 독립하지 않았습니다. 부모의 가이드와 안내 가운데 있습니다. 그래서 이와같은 일에 대해서 부모의 지시와 또한 부모의 통제와 또한 부모의 권면과 또한 부모의 교훈, 이것은 전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이죠. 두번째, 안전하게 사용해야 합니다. 인터넷, 안전하게 사용해야 한다. 왜냐하면 인터넷을 통해서 포식자가 있다. 우리 자녀들을 잡아먹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에 인터넷을 통해서 자녀들이 마음속에 호기심, 이 호기심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어려움들이 있습니다. 특별히 채팅, 이것을 통해서 알지 못하는 사람과 접촉하려 합니다. 이 포식자들은 자기들의 정체성을 가립니다. 속입니다. 때로는 나이도 속이고 성별도 속이고 그렇게해서 접촉하려 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두려운 것은 아이들과 만날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일이 대단히 대단히 위험하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심지어 수많은 미국의 대학생들이 이런 채팅을 통해서 유럽까지 갑니다. 그런 수많은 청년들, 남녀들이 이성을 만나기 위해서, 그러다가 어떤때는 이상한 사람을 만나기도 하고 어떤때는 그로 인해서 좌절감 속에서 자살하려고 하는 계시도 많이 있습니다. 오늘날 인터넷은 대단히 위험한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잘 소화하고 이해하고 바른 방법으로, 또한 합당한 방법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보호하는 길을 걸어가지 않는다면 언제 어떻게 될른지 알수없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터넷을 안전하게 사용할수 있도록 부모님과 자녀들의 긴밀한 대화가 필요하다고 믿습니다. 또 인터넷과 관련된 문제에서 인터넷은 시간을 소모해 버리는 그와같은 장치다. 우리가 잘 사용하지 않으면 시간을 킬링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시간을 아끼라. 시간을 구속하라. 왜냐하면 때가 악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씀했죠. 인터넷에 빠져들면, 여기에 조심해야 될 것은요. 우리가 정말로 절제하지 않으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앉아서 5분 10분은 물론이고요. 다섯시간 열시간도 순식간에 지나가 버릴수 있는 기계가 인터넷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일에 대해서 이제 한번 생각해 보십시요. 쉽게 중독되 버리는 것입니다. 절제하지 않으면요. 수많은 인포메이션들이 계속해서 버튼만 누르면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 자기를 절제하지 않고 사용하게 될때, 학업에 있어서 상당한 어려움이 될 뿐만 아니라 우리는 학교문제만이 아니라 일상 생활에서도 만찮가지고요. 하나님의 자녀라면 성경 말씀을 읽고 기도하고 또 자기 자신을 미래를 위해서 준비하는 시간, 대단히 아까운 것입니다. 십대의 시간, 이 시간이라는 것이 십대 뿐만 아니라 이십대, 삼십대, 사십대, 오십대 다 시간은 아까운 것입니다. 시간은 흘러갑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인생에 이 시간을 우리가 어떻게 쪼개서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쓸까? 하는 생각을 마음속에 주님 앞에서 다짐을 하고 또한 생각을 하고 결심을 하고 주님앞에 나 자신을 헌신하고 우리는 그렇게 해야 될 때인데, 인터넷을 통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습관적으로 시간을 소모해 버리는 이와같은 습관, 그것은 대단히 손실이다. 커다란 손실이다. 200명을 놓고서요. 소셜미디어를 24시간 보지 못하게 해봤어요. 엄청난 금단증상들이 나왔습니다. 24시간 소셜 미디어를 안봤더니 학생들이 막 토할거 같고 허탈감을 느끼고 땀이 막 나고 그 다음에 갈망증이 막 생기고, 이런것들은 무엇입니까? 이런 것들은 거의 중독상태에 들어가 있다는 말입니다. 점점 많은 인구가요. 이와같은 인터넷의 중독 상태에 빠지고 있기 때문에 이것은 심각한 사회 문제 입니다. 그런데 만일 이와같은 일에 우리 자녀들이 빠져 들어간다면, 어떻겠습니까? 이와같은 일도 있기 때문에 부모님들이 자녀들과 함께 이야기 하고 또한 경고하고 또한 권면하고 또한 예방하고 해야 될 필요가 있다, 믿습니다. 인터넷을 어떻게 써야 할까? 인터넷, 진실하게 써야 합니다. 게임이 있죠.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게임의 즐거움, 미국에서 제가 아는 마취과 의사가 있습니다. 그 사람은 십대가 아닙니다. 그 사람은 중년입니다. 그리고 유능한 마취과 의사 입니다. 그는 수술을 위해서 마취를 걸고, 마취과 의사는 그 다음부터는 거의 할일이 없습니다. 그 다음에 수술에서 깨어날때, 다시 움직이죠. 그 사이에, 이 사람은 게임에 거의 중독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수술실 들어와서 게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병원 안에서 적당한 관계, 그 사람은 실력있는 사람이고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고 자기 동료들도 잘 알고 있고 상관이고 자기 아래에 있는 사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는 그런 상황에서 항상 게임하는 것이 용인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다른 병원으로 옮겼을때요. 그가 이제 똑같이 게임을 하고 있다가 한 환자가 죽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면허증을 박탈 당했습니다. 그가 그날까지 살아오는 동안에 모든 수고와 노력과 또한 평판과 또한 사람들 가운데서의 그가 지금까지 행한 뭐 선한일도 있지요. 그 모든 일들은 다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습니다. 게임 중독 때문입니다. 중년의 의사가요, 게임으로 인해서 환자가 죽고, 그로 인해서 나타난 결과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우리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면, 절제하지 못하면요. 이와같은 불상사와 수치와 손실과 말로 할수 없는 어려움속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인터넷, 가상 세계에 들어가 있습니다. 판타지 속에 사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실제 현실이 아니고요. 스크린 안에 있는 가상 세계속에 완전히 빠져들어가서 거기 살고 있다.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가상 세계에서 살고있고 그것을 굉장히 즐거워 한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상상의 유토피아, 스크린 안에 있는 유토피아에서 사는 것입니까? 그것이 어떤 간증을 나타내겠습니까? 우리는 시원체 속에 삽니다. 하늘나라는 현실이고요. 지옥도 현실이고 이 세상도 현실이고 오늘날 이 세상에서 저희들이 주님의 말씀을 받고 또한 복음 말씀을 통해서 수많은 죽어가는 영혼들을 향해서 우리는 말씀을 증거해야할 그런 책임이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 자녀들은 그런 위대한 일을 위해서 그들이 구원을 받고 이제 성장하고 교육을 받고 그들의 훈육을 따라서 그들은 그와같은 일을 해야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그와같은 교육을 받아야 하는데 우리 아이들이 가상 세계속에 빠져들어 산다면, 그것은 어떤 결과를 나타내겠습니까? 물론 그 자체가요, 시간킬링하는 그런 세계속에 들어가 있습니다. 그리고 또 시간뿐만 아니라 그 세계가 실제가 아니라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는요. 인터넷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가장 이상적으로 만들어서 광고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사진을 이렇게 찍고 저렇게 찍고 수도 없이 찍어서, 백개이상 찍어서 백개중에 어떤게 제일 멋져서 사람들이 봤을때에 나라는 사람을 가장 멋지게 받아줄까? 백개를 다 체크해서 이게 좋았을까? 이게 좋을까? 아니면 이건가? 한번 해 보세요. 백개중에 선택하기 위해서 얼만큼 시간을 보내야 합니까? 그와같은 것을 통해서 가장 멋진것을 뽑았어요. 그래서 그것을 넣어서 전송합니다. 그래서 만족을 얻는다. 사람들이 나를 대단히 멋지다고 생각한다는 생각속에 빠져 들어갑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난 다음에요. 우리는 어떤 부름을 받았습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옛 사람들은 죽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더이상 나는 내가 아니다. 나의 삶의 전체는 그리스도다. 나의 삶에서 나타내려고 하는것은 내가 아니고 그리스도다. 그것이 크리스찬의 믿음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런데 이와같은 성향 속에서, 경향 속에서 오늘날, 자칫 잘못하면 이와같은 속에 빠져서 어떻게하면 내가 나를 이 스크린에 넣어서 보내서 사람들에게 박수갈채를 받고 인기가 있으면 좋겠고, 이것은 사실상 오늘날 연예계에서 일어나는 일이고 가상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이고 무대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원하는 바가 아닙니까? 그것을 그리스도인들이 따라한다고 하는 것은 수치 입니다. 시간 낭비다. 그것은 아무런 의미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만족을 한다는 자체가 주님 앞에서 슬픈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이런것에서 우리는 떠난 사람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드러내고 나를 드러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입니다. 또한 인터넷, 90년대 까지는 우리 대중은 소비자였습니다. 그 인터넷 회사들이 만들어낸 창작물들을 가지고요. 그냥 우리는 보고 즐기고 그런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21세기에 들어와서요. 이제는 대중이 자기가 뭔가를 만들고 전송해 보내는 시대가 되어버렸죠. 다시 말해서 나 자신이 뭔가를 만들어서 계속해서 전송하고 하는 일도 시간이 많이 걸리지만, 문제는 이와같은 일에 내가 빠져들어서 자기 탐닉속에 내가 빠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나시즘에 빠지는 것입니다. 내가 나의 멋에 내가 매료되가지고요. 자기 호수에 자기 얼굴이 나타난 것을 보고 몰두한 이야기가 있지요. 인터넷과 관련해서 이제는 우리가 뭔가를 만들어서 전송해 보내려고 할때, 계속해서 빠져들면 이제 나는 나의 아름다움에 내가 매료되서 빠져들어간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나의 아름다움이 아니고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에 빠져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분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와같은 것은 주님의 말씀을 믿고 주님을 위해 살아간다고 하는 그리스도인에게 합당하지 않다. 그래서 만일 그와같은것을 만든다면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만들어야 하고 나의 아름다움에 매료되는 그런것이 아니고요. 또한 그와같은 창작물을 만든다고 할때, 우리는 어떻게해야 인터넷을 인터넷답게, 아름답게, 그리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쓸수 있을까? 인터넷은 자체가 악한 것이 아니라 말씀드렸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다르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만일 이것을 쓸수 있다면 그 창작물 안에있는 모든 언어와 내용들은 거룩해야 한다. 그 내용들은 은혜와 악에서 떠나야 한다. 다른사람을 중상하거나 또한 적개심을 일으키거나 이러한 것들은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만들어서 보내고 있는 것들 아닙니까? 오늘날 얼마나 이와같은 많은 문제들이 야기되고 있습니까?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와같은 점에서 마음속에 주님앞에서 생각하고 합당한 태도를 우리가 취해야 할 것입니다. 특히 페이스북에 해악들을 생각해 보십시요. 많습니다. 그 중에 몇가지만 생각해 보겠습니다. 페이스북이 우리에게 주는 악 중에 하나가요, 내가 다른사람처럼 쿨하지 않다라고 생각하는 그런 느낌속에 빠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을 만들어 냅니까? 다른 사람과의 경쟁, 시기 이런것을 만들어 냅니다. 친구의 성공을 부러워하게 됩니다. 그리고 시기 합니다. 그리고 질투 합니다. 사단은 이와같은 것을 통해서 우리 마음이 주님앞에 아름답고 건전하고 신령하고 이런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육적으로 떨어져 버리도록 만든다는 말입니다. 많은 비밀들이 원치 않아도 누설될수 있고요. 그로 인해서 때때로는 잊고 싶은 사람을 계속해서 만나야 됩니다. 이 모든 일들은 특별히 십대 어린 아이들이 이와같은데에 결부 된다면 어떤 성격 형성과 실제적으로 그들이 시간을 다 잃어버리고 또한 주님을 위해 사는법을, 그런 것으로부터 멀리 떠나가 버리고 그것은 얼마나 그들에게 유익이 되지 않겠어요? 이것은 십대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도 경고가 되는 현실이예요. 또 한가지 학교 폭력에 대해서 잠깐 생각해 보겠습니다. 1990년대에 한국에는 일본으로부터 수입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집단 따돌림입니다. 일본사람들은 특별히 그와같은 일을 많이 하죠. 집단 따돌림하는 성향이 강한 민족인데, 그와같은 것이 성행 했습니다. 그것이 한국에 수입이 됬습니다. 그것을 이지메(괴롭힘)라고 이야기 할때, 그것을 한국에서는 '왕따'라 번역 했습니다. 집단 따돌림인데요. 사실 이 왕따는 21세기에 새로 생긴거 아니고, 일본에 새로 생긴거 아니고 성경에는 이와같은 왕따는 예부터 존재해 왔습니다. 요셉, 어떻습니까? 자기 형이 열인데요. 아버지가 자기를 사랑한다. 그리고 그는 바른 교육을 받았어요. 그래서 불의를 싫어합니다. 형들이 행하는 일들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어떤떄는 견디다못해 아버지에게 와서 이야기 했습니다. 그것은 고자질 한것이 아니고요. 요셉 마음속에 그것을 받아들일수 없고 그와같은 불의는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린 요셉은 아버지에게 와서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요셉 뿐만 아니라 사실상 우리 주님도 이 땅에서 버림 받았습니다. 따돌림 받았습니다. 멸시 당했습니다. 조롱 받았습니다. 이와같은 따돌림 때문에 오늘날, 왕따를 보면 대단히 사악하고 비루하고 때로는 힘이 없는 아이에게 집단으로 악한 행동을 하고 때로는 폭력을 사용하기도 하고요. 언어로 몰아주고 이런 많은 것들이 있죠. 중학교 2학년 학생에게 물어 봤어요. 왕따의 원인이 뭔가? 굉장히 많습니다. 그중에 몇가지만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또래와의 외모의 차이 때문에 왕따, 외모 차이 때문에 왕따를 합니까? 합니다. 그냥 아무 이유없이, 그냥 주는거 없이 밉다. 그것을 왕따 한다고 합니다. 이와같은 생각들은 도대체 어디서 왔습니까? 가해자의 영웅심리에서부터 시작해서 오해와 신체 장애, 지능장애, 내성적인 성격, 그리고 남과 다른 취미를 가졌다고 하는 그런 이유, 그다음 유행에 뒤졌기 때문에, 이런 수많은 이유 외에도 굉장히 많습니다. 이런 많은 이유를 가지고 왕따를 한다. 이와같은 아이들은 어떤 아이들입니까? 가정에서 가정 교육을 받지 못하고 오냐오냐하고 이기주의적으로 자라고 자기 원하는대로 자란 아이들입니다. 아니면 그 가정이 파괴 되어서 자기 마음속에 울분이 있는 아이들, 사랑을 받지 못했습니다. 어느 아빠는 집에 돈이 없어서, 혹은 집에 돈이 많아도 자기를 버리고 다른데로 가버리고 자기를 버려, 밥먹고는 살지만 자기에는 진전한 사랑을 보여주지 않는 이와같은 수많은 이유들 때문에 그들 마음속에 울분이 있습니다. 이 울분을 펴기 위해서 이제 약자를 찾는 것이죠. 그리고 약자를 찾을뿐만 아니라 자기혼자 하기 뭐 하니까, 이제 그룹을 만들고 조성하고 그와같은 힘을 가지고 공격하고 자기 마음속에있는 그와같은 불만을 그렇게 해소한다. 사단은 공격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다양한 방법을 통해서 공격합니다. 저는 미국에서 학생들, 부모님들이 한국에서 너무나 왕따가 심해서 도저히 살수가 없어 미국에 왔다. 그런집도 많이 보았습니다. 물론 미국에 온다고 해결되는것은 아닙니다. 저희들은 이와같은 문제를 놓고 가만히 생각해 볼때, 우리 자녀들이 이와같은 환경속에 노출되고 있다. 여기서 어떻게 우리들은 우리 자녀들이 이와같은 해악으로부터 자유롭고 이와같은데 어려움이 없이 살아갈수 있을까? 라는 것입니다. 첫째, 우리는 이 왕따가 요즘에 21세기 와서 생기고 일본에서 오고 그런것이 아니고요. 그것은 인간의 악으로부터 생긴 것이고, 사단은 그와같은것을 조장하고 인간을 불행하고 비참하도록 만드려고 하는 노력중에 하나다. 때로는 사단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때로는 사람을 학대하기도 하고 때로는 사단은 사람을 이용해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다양한 악을 행함으로 인해서 인생이 괴롭고 비참하고 인생을 살아갈수 없다고 포기할 정도로 만들고 그것을 보면서 사단은 즐거워하는 감정,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와같은 세계에 살면서 어떻게 하면 여기서 자유로울수 있을까? 생각해야만 합니다. 이와같은 비겁한 왕따 가해자들은 내성적인 사람, 그런 학생을 봅니다. 그리고 자기들 이야기에서 외모에서 그들은 이유도 없이, 싫다는 이유, 자기 다름대로의 이유를 가지고 괴롭히죠. 그와같은 사회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자녀들이 주님을 알고 주님 안에서 이 원리를 항상 자녀들과 교제해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경건하게 살려고 하면 반드시 핍박을 당한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이 감당할수 없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왕따를 당하는 아이들의 마음속에는 항상 그에대한 두려움과 공포와 그리고 거기에서 헤어나오려고 하는 노력과 그 다음에 자포자기와 이 모든 것들이 함께 갑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창세기서부터 시작해서 요한계시록까지 나타난 많은 인물들을 보십시요. 그들은 핍박 당했습니다. 핍박 당해도 그들은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경건하게 살때 그것은 당연한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핍박하는 사람들을 불쌍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왕따 당하는 아이들은 절대로 가해자들을 불쌍하다고 생각할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너무 힘이 연약하기 때문에요.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인 부모들과, 그리스도인 자제들에게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소망이 있고 또 세상이 반대해도 우리는 하나님께섶지원해 주는것이 있고, 하나님이 인정해주시는 것이 있고,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는 위엄이 있다. 이 가해자들은 이와같은 위엄에 대해서는 감당할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믿음. 요셉은요, 열 형들의 반대, 그리고 미움. 그리고 나중에 팔아버리죠. 나중에 죽이려고 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따 당한것에 대해서 이제 버려지거나 또한 그 후 그것으로 인해서 완전히 무너져 버리거나 또는 자살을 하거나 아니면 완전히 폐인이 되거나, 그는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어떻게 계속해서 일어났어요? 왜요? 요셉이 강해서요? 아닙니다. 요셉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었고요. 하나님의 약속이 그 마음속에 있었고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신다는 임재를 그는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둘러싼 수많은 사람들, 때로는 보디발의 아내, 유혹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거절했고 나중에는 감옥에 끌려 들어갔어요. 범죄자로 인정받아서 끌려 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옥에서도 그는 포기하거나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왕따 당한다고 하는 아이들처럼 그런 생각을 갖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위엄이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함께 한다고 하는것에 대해서 확신이 있었습니다. 우리 부모들은 우리 자녀들이 이와같이 취약한 상황속에, 어려운 상황속에 빠져들어갈때, 지원해줘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자녀들이 학교가게 될때, 주변에 있는 학생들을 집으로 초청하세요. 먼저 행동에 옮기세요. 우리 자녀들에 대해서 부모님들이 얼만큼 지원하고 있는지, 어떤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를 그 학생들에게 보여줘야 합니다. 그들 마음속에 넘볼수 없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와같은 외적인 지원만이 우리 자녀 마음속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것은 어떤 것이냐? 라고 하는 현실에 대해서, 말씀에 대해서 교제해 줘야 하는 것입니다. 그들 마음속에 이와같은 왕따를 하려고하는 가해자들은 비루한 사람들이다. 불쌍한 사람들이다라고 하는 생각을 우리 자녀들 마음속에 가져야 됩니다. 그리고 너희들에게 소망을 묻는자들에게 그 이유를 대답하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과 같이 우리 자녀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복음에 가까이 하고 또한 그 이유를 마음속에 품고 사는, 그런 삶을 산다면 그와같은것을 교제해야 합니다. 그와같은 현실을 우리 자녀들이 마음속에 느끼고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자녀는 이와같은데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이 가해자들이 가장 손쉽게 이제 따돌리고 하는 대상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자기를 돕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항살 벌벌 떠는 상태, 그런 학생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런 아이들을 선택해서 왕따 시키면 딱 좋다고 생각하는 비루한 학생들입니다. 그 학생들은 불만이 있는 학생들입니다. 그 학생들은 사실 세상에서 실패자들입니다. 따라서 우리 자녀들이 이와같은 환경속에 노출될때, 우리 자녀가 하나님으로 인해서 보호받을수 있어야 합니다. 그들 마음속에 말씀에 대한 확신이 있어서요. 주님을 믿는 위엄이 있어야 합니다. 요셉은 그런 위엄이 있었어요. 형들 앞에서나, 또한 애굽에 팔려갔을때, 다른 많은 사람들, 주변의 사람들과 달리, 때로는 사랑한 주인, 또 가족들, 또한 그 주변에 있는 수많은 인물들, 심지어는 왕,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그는 어떻게 처신 했는가? 주님께서 우리에게 잘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학교폭력, 이것은 또 십대의 중요한 이슈입니다만, 우리는 우리 자녀들의 마음속에 지원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살아가게 될때, 학교에서 어려움이 없이 오히려 주님을 드러내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과 적극적으로 나가서 대화하고 하는 이와같은 방식으로 학교에서 생활할수 있도록 우리는 모든것을 통해서 지원하고 교제하고 격려해야 되리라 생각합니다. 이 기간, 십대 기간은 준비하는 기간이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소통2의 기간에서도 준비하는 기간이었습니다. 무슨 시대를 위해서 준비하는가? 가까이는요. 십대를 위해서, 십대의 혼란기, 도전이 되는 이 기간을 준비하기 위해서 이제 여러가지를 그들이 마음속에 소유해야 한다는 점을 저희들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각 기간은, 십대는 성인이 될때, 행해야 될 여러가지 책임이 있습니다. 이제 성인이기 때문에 독립합니다. 독립하고 자기 가치관을 가지고 있고요. 결정하는 것을 자가기 할수 있어야 합니다.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성인이 되게 될때, 자기는 확실히 독립할수 있다. 진정한 독립이라고 하는것은 하나님을 온전히 의존하는 것이죠. 이와같은 기간은 많은 도전이 되고요. 때때로 성인이 되서 어려움을 느끼게 되는 시기 입니다. 이 시기가 오기전에 성인이 되서 어떻게 독립할수 있을까? 라고 하는것은 사실은 이 기간동안에 우리 자녀들은 배워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십대 초기에는요. 다리와 같아서, 이쪽은 완전히 의존입니다. 부모님이 주는 특권을 누립니다. 그러나 이쪽으로 완전히 건너가면 여기는 완전히 자기의 책임을 이행해야 되고 실제로 독립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과정의 언제 이렇게 될까요? 어느 순간에 이렇게 되는것은 아니고요. 이 기간중에 점점 배워가는 것이죠. 전에는 의존 했지만 점점 독립하는것이 무엇이다. 책임감을 느끼고 이행해야 하는것이 무엇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능력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입니까?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이죠. 그것을 이 기간동안에 배워야 하는데, 이것을 배우고나서 이제 성인이 되죠. 성인이 된 다음에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합니까? 그 다음에는 아직 독신 입니다. 결혼을 하거나 아니면 그를 독신 삶으로 부르시기 때문에 그는 계속해서 독신이 될수도 있고 또 더 오랜후에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그가 후에 결혼할수 있습니다. 이 모든 가능성 속에서 앞에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결혼한 다음에는 책임이 있죠. 부부간의 삶, 여기에는 많은 주님앞에서의 말씀 가운데 주님을 알고 또한 배우자들 사이에 행해야 할 모든 예의와 또한 사랑과 책임과 헌신과 많은 것들, 행해야 합니다. 이 일을 위해서 준비해야 합니다. 자녀를 위해서 자녀 교육을 위해서 또 준비해야 되는 것이죠. 이 단계별로 계속해서 넘어가기 전에 준비해야 되는데, 이 청소년기에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하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독립을 위해서 준비하는 것입니다. 책임을 이행할수 있는데로 옮겨가야 하기 때문에 그것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상 이와같은 기간중에 부모님을 멀리 떠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멀리 떠나고 자기 주장대로 간다고 한다면 사실은 독립을 배우기가 어렵습니다. 독립을 배운다고 하는것은 책임을 이행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자기를 어떻게 부르셨는지, 지금 아직 독립하지는 못했지만 독립을 위해서 이 당시에 배워가야 한다. 그 예를 잠깐 생각해 보겠습니다. 다니엘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요. 다니엘은요, 열다섯살 정도에 바벨론으로 끌려갔죠. 그래서 그가 왕이 주는 음식 거절하죠. 그는 이제 하나님 앞에서요. 뜻을 정합니다. 더럽히지 않겠다고 환관장에게 이야기 합니다. 환관장에게요. "왕이 주는 음식은 나를 더럽힌다. 그러니까 나를 여기서 면제해 달라"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될때 환관장이 상당히 듣기 거북한 말 아니겠어요? "아니 왕이 주는 음식이 너를 더럽힌다고?" 그것은 왕을 모독하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어떤 면에서는 그런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니엘은요. 자기가 믿는바에 의해서 입니다. 자기의 프라이드 때문이 아니고 히브리인의 어떤 자만 떄문이 아니고요. 하나님의 말씀에 의거해서, 레위기 11장 말씀에서 정하고 부정한 음식에 관해서 그는 알고있고 그는 전부터 그것을 배워왔고 그것을 실행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뜻을 정하고 환관장에게 이야기 했죠. 하나님께서 그에게 은혜와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그래서 환관장이 그것 때문에 격노하고 그런 말도 하지 못하도록 만든것이 아니고요. 그것을 거절은 했지만 수렴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열흘동안 테스트해 주십시요"라고 환관장 아래 있는 관리에게 요청하지 않습니까? 열흘동안 테스트를 해주십시요. 라는 말은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열다섯살 소년이 외국에서 아무도 자기 주변에 없습니다. 자기 부모도 없고요. 자기 친구들만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은 거기의 고관들이고요. 외국 사람들입니다. 그 가운데 그가 그런 제안을 했다고 하는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다니엘 마음속에 있는 용기 입니다. 이 용기는 어디서 나왔을까요? 하나님 말씀에서 나오지요.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 자만이나 프라이드나 아니면 민족주의적인 정신이나 이런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요. 하나님 말씀을 경외하고 두려워 하는대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환관장이 두렵지 않았어요. 하나님이 두려웠기 때문에 환관장이 두렵지 않았어요. 환관장은 높은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너무나 높은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로 내가 거역할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음식을 바꿔주십시요. 라고 이야기 했지요. 그래서 결국 열흘후에 결과가 나오지요. 어떤 결과 입니까? 혈색이 아주 좋아졌습니다. 혈색이 어떻게 좋아질수 있을까? 이론적으로는 합당하지 않습니다. 그런 음식을 먹고 어떻게 혈색이 좋아질까? 그런 테스트를 제안할수 있었을까? 있었습니다. 그리고요. 그가 그런 용기를 가지고요. 그것은 개인의 용기가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에서 나온 용기인데, 다니엘이 그와같은 용기를 가지고 있었다면 우리 자녀들에게 필요한것은 앞으로 성인이 되었을때, 위대한 일들을 결정하고요. 독립하고 그 다음에 가치관을 가지고 자기 앞길을 헤쳐나가게 될때 하나님의 말씀에 의거해서 헤쳐 나가야되는 그와같은 미래가 있습니다. 그 미래를 위해서 이 기간중에 하나님 말씀을 귀히 여기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엎드리고 절하고 그 말씀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그와같은 십대의, 그것이 우리 자녀가 되지 않겠느냐는 말입니다. 그것은 말씀에서 다니엘은 이와같은 삶을 살았다는 것을 깊이 교제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어찌 다니엘 뿐이겠습니까? 다니엘은요, 얼굴 혈색만 좋아진 것이 아니거요.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것이 있습니다. 네 사람들에게 주신 것이 있어요. 지식과 학문에 있어서, 아주 기술, 재주, 그리고 지혜 이 세가지를 주셨어요. 게다가 다니엘은 특별히 더해 주셨어요. 꿈과 몽조과 비전을 그가 해석할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바로 그것때문에, 물론 그는 왕 앞에 섰어요. 왕 앞에 섰고 왕을 섬기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박수들, 바벨론에 있는 박수들보다 지혜와 지식에 있어서 열배나 많은것을 얻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열흘동안 테스트로 인해서 바벨론의 박수보다 열배나 더 지혜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후에 하나님께서 왕에게 꿈을 주죠. 그 꿈을 누가 해석합니까? 박수들은 해석 못했습니다. 그래서 느부갓네살 왕은 너무나 격노해서 다 죽이겠다고 하죠. 그때 다니엘도 죽을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죠. 아리옥에게 찾아갑니다. "왕이 왜이리 급합니까? 기한을 주시면, 조금 늦춰주시면 해석해 드리겠습니다." 라고 이 소년이, 청년 아니고요. 장년, 중년 아니고요. 소년입니다. 십대 입니다. 그 아이가 아리옥, 장관을 만나서 그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시간만 조금 주시면 해석해 드리겠습니다. 다니엘서 1장에서 열흘 주시면 입증해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그는 용기 가운데 제안 했습니다. 그는 피동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었고요. 그는 능동적으로 왕의 관리 앞에서 제안 했습니다. 2장에서 아리옥이라는 다른 장관앞에 나가서 조금만 시간을 주시면 왕의 꿈도 얘기해주고 왕의 꿈도 해석해 드리겠습니다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리고 돌아와서 자기 친구들 셋과 함께 기도회를 시작 했습니다. 그 기도회는 유명한 기도회죠. 바벨론의 네 소년들이 머리를 맞대로 앉아서 기도하고 있었다. 우리의 자녀들은 이제 성인이 되기 전에 아직 십대인 때에 머리를 맞대고 기도하고 있는 친구들이 있는가? 그 친구들을 인도할만한 다니엘의 인도력과 같은 인도력이 있는가? 그런 인도력이 필요하다. 세상의 동료 압력에 의해서 끌려다니는 우리 자녀들이 아니라 이제 동료 압력을 밀어붙이고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말씀을 통해서요. 다른사람을 사로잡고 친구로 만들고 복음을 전해서 구원받게 하고 그런데 관심을 가지고 있고 그런 일에 마음을 두려고 하는 그와같은 열의, 이것이 청소년기에 필요한 것이 아닙니까? 우리는 청소년기를 이야기하게 될때, 항상 동료 압력 때문에 우리 자녀들이 어떻게 어려움을 겪고 있느냐 하는것을 많이 말합니다. 그것이 청소년기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십대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와같은 생각을 지워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다니엘을 생각할때, 요셉을 생각할때, 마리아를 생각할때 그런 것입니다. 요셉, 요셉은요. 자기 형이 미워해서요. 애굽에 팔아버렸을때, 그는 마음속에 분노와 그 다음에 절망과 그리고 보복하려고 하는 마음과 그리고 자기 연민, 이런데 빠질만한 가장 적절한 후보자 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하지 않았습니다. 창세기 말씀을 읽게 될때 십대에 17세 소년이 애굽에 팔려 갔을때에 그는 이렇게 생활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마음속에 슬픔이 있었을 겁니다. 자기 형들이 알수도 없는 나라에다가 자기를 팔아버리고 이제 앞으로 어떻게 이 외국에서 살아야 할까? 라는것을 생각하게 될때 그는 절망적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밝히 말씀하고 있죠. 이것은 비현실적인 것을 우리에게 적절히 설득하기 위해서 성경을 쓴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현실 입니다. 이것은 과거에 입증한 사실입니다. 과거에 요셉이 입증했다면, 동일하게 우리 시대에도 입증할수 있다는 겁니다. 만일 우리가 주님의 말씀에 엎드리고 순종 한다면 우리 자녀들이 요셉처럼, 억울할때 분노로 표출하지 아니하고 억울하고 절망 가운데 빠졌을때 자기연민속에 빠져서 쓰러지지 아니하고 이제 그와같은 어려움 속에서도 분연히 일어나서요. 어떻게 일어났습니까? 자기 아버지가 자기에게 그동안 어릴때부터 가르쳐준 교육이 있습니다. 야곱은요, 초기부터 영적인 사람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우리는 요셉의 형들을, 그들의 성품이나 그들의 행동이나 이런것을 볼때, 그는 그의 아버지로부터 그런 교육을 받았구나. 우리가 그렇게 유추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달랐습니다. 야곱은요, 자기 아내가 아이를 못낳고 세월이 흘러갔어요. 자기 아내들 라헬과 레아 뿐만 아니라 실하와 빌하가 서로 경쟁 했습니다. 그들은 서로 경쟁하며 살았어요. 그들은 경쟁 속에서, 야곱은 자기 자신도 가누지 못했어요. 그런 속에서 자녀들을 교육할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자녀들은 사납고 불의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중상하고 그런 자녀들이 되었지요. 그래서 요셉은 고통을 당했습니다. 요셉이 애굽에 갔을때, 십대 소년입니다. 삼십대나 사십대 아니고 십대 소년입니다. 그가 자기 아버지가 그동안에 자기에게 이야기 해줬던 내용들을 마음속에 항상 품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내용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자기 아버지가 자기에게 구두로 얘기해줬던 내용, 성경도 없습니다. 찬송가도 없습니다. 모임도 없습니다. 아버지가 얘기해 준 내용, 그것을 마음속에 저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17세에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두 꿈을 다 이해 못했으나 마음속에 그것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것이 그가 가지고 있었던 재산의 전부였습니다. 영적인 재산의 전부였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애굽에서 견딜수 있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것을 보디발의 집에서 입증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가정 총무가 되지 않았어요? 그의 아내,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하게 될때 그는 거기서 쓰러지지 않았어요. 만일 그가 쓰러졌다면 그는 절대로 애굽의 총리가 될수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프로그램 가운데 계속해서 나갈수 없습니다. 그는 어떻게 이와같은 것을 저항할수 있었을까? 그는 감옥에 거짓 고소로 인해서 빠져 들어갔을때 거기서 쓰러지지 않았다. 그는 감옥 속에서도요, 절망 가운데 좌절 가운데 자살을 생각하고 "이제 난 더이상 살아갈 이유가 없다" 그런 생각을 하거나 그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관리 두사람이 들어왔을때, 그 사람의 모양을 보면서요. 그들에게 접근해서 "왜 그렇게 염려 하는가?" 하면서 도우려고 했습니다. 요셉의 가장 독특한 삶의 특징은 그는 적극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가장 정말 가운데 포기 할만한 순간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 것입니까? 주님으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가 가지고 있었던 영적인 재산, 마음속에 품고 있었던 아버지의 말씀,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꿈, 그 전부를 가지고요. 언제나 그것을 항상 손으로 만지작 거리고 있었고요. 마음속에서 그것을 꺼내서 다시 들여다보고 있었고, 그와같은 것을 통해서 그는 계속해서 주님 말씀 속에서 궤도를 벗어나지 않았다. 그것은 요셉이 오늘날 우리에게 계속해서 말씀해주고 있는 내용입니다. 우리 자녀들이 하나님의 음성과 하나님의 이 말씀과 부모님들이 따뜻한 사랑과 기대 가운데에 양육하고 훈육해주는 말씀들을 놓쳐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요셉은요, 만약 그가 레코드가 있었다면 아버지가 하는말을 때마다 틀어서 다시 들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밖에는 그가 가지고 있는 영적인 재산이 없었기 때문 입니다. 우리 자녀들에게 성경이 있습니다. 우리 자녀들은 그리스도인의 가정이라면 믿는 부모님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교제할수 있습니다. 모임에 나오면 성도들과 교제할수 있습니다. 엄청난 분량의 영적인 재산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사용하고 또한 주님을 바라보고 미래를 바라보고 준비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얼마나 아름답고 합당한 것이겠습니까? 마리아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마리아는 가브리엘이 그에게 찾아왔을때,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약 14살 정도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에서는 열두살이 되면 정혼하고 그리고 몇달후에, 아니면 몇년 후에 결혼한다고 보고 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한 14살 정도가 아닐까? 대단히 어리죠. 십대에서도 초기 입니다. 틴에이저의 초기에 속하는 소녀지요. 가브리엘이 찾아왔습니다. 마리아는 헬리의 딸이었죠. 가브리엘이 찾아와서, 자기가 다 감당할수 없는 수용할수 없는 자기가 다 이해할수 없는 그런 메세지를 전하죠. "성령이 너의 몸 속에서 역사하고 이제 오래전부터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메시아께서 탄생하신다. 그는 하나님, 거룩하신 분의 아들이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할수 있습니까? 그런데 마리아는 그렇게 대단히 어려운 순간에요, 자기는 다 이해할수 없지만 "말씀대로 되어지리이다" 우리는 그 말씀을 보게될때, 여성으로서 그가 할수 있는 위대한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말씀대로 그냥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라고 대답하죠. 그는 그것에 대해서 거부하거나 이해가 안되기 때문에 받아들일수 없다고 항거하거나 그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가 안되는데도요. 우리는 구약시대에 사라, 아기를 낳지 못했습니다. 한나, 또한 삼손의 어머니, 여러사람들이 아기를 낳지 못했습니다. 라헬도 오랫동안 아기를 낳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침례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 그리고 아버지 사가랴 그들에게도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해서 아들을 낳는다고 예고 했었죠. 그런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와같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정상적으로 임신해서 아이를 출산하는 그와같은 것이 아니고요. 자기는 처녀 입니다. 이와같은 일은 전에도 없었고 그 후에도 없습니다. 유일합니다. 한번도 자기의 전임자나, 자기보다 선배가 그 일을 한적이 없다는 그 말입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가브리엘이 전해주는 말씀에 의해서 그는 이해할수 없지만 그것이 그대로 되어지기를 바랍니다라는 말을 위대한 말을 남겼습니다. 누가 남겼습니까? 약 14세의 소녀가 남겼다 그말입니다. 이제 마리아의 이와같은 순종의 모습, 그것을 보고요. 우리는 누가복음에 보면 마리아가 어떻게 노래하고 있느냐 하는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그것을 잠깐 보겠습니다. 이해할수 없는일을 가브리엘이 전달 했을때, "말씀대로 되어지겠습니다"라고 대답하고 그가 노래 합니다.

"마리아가 가로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 계집종의 비천함을 돌아 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눅1:46-48).

이 노래를 가리켜서요. 메그니피캇(Magnificat)러고 말합니다. "내 영혼이 주를 광대케 합니다." 마리아의 찬양입니다. 마리아의 찬양의 내용, 짧은 내용이지만 이 노래안에 담겨있는 내용을 가만히 살펴보면요. 마리아가 열네살 소녀인데요. 얼마나 많은 말씀들을 구약에 그는 소화하고 있느냐하는 것을 이해할수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께서 마리아를 통해서 메시아를 하나님의 아들을 탄생시키고자 한다는 것에서 대단히 기뻐하고 있어요. 이것은 마리아 자신이 이 구약의 하나님께서 계획하고 계시고 이러한 뜻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에 대해서 그는 알고 있었다. 배우고 있었다는 그 말입니다. 이거 이후에, 그 이후에 여러 말씀을 통해 볼때, 구약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그는 누구로부터 이 말씀을 배우고 있었다. 그의 부모님들로부터 배웠겠지요. 그 말씀을 마음속에 두고 있었죠. 그래서 우리는 두 소년과 소녀를 보게 될때, 전부 십대 입니다. 십대로서 그들은 어떤 간증을 본을 우리에게 남기고 있는가? 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그리고 십대를 자녀로 둔 부모님들에게 지금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요셉이 왜 외국에서 성공했을까? 그리고 그의 아버지 야곱은 죽는 순간에 그 아들을 생각하면서 남긴 말씀이 있습니다. 그 말씀은 요셉이 어떻게 해서 성공했는가를 우리에게 잘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십대에, 17세의 소년이 그때로부터 그의 삶은 시작하는데, 삼십세에 그는 초독이 되죠. 13년동안 그는 외부에서 말할수 없는 고통과 또한 시련 속에서 통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서 놀랍게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우리는 마지막으로요, 창세기 49장 말씀을 보겠습니다.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창49:22).

요셉의 성공 비결은 17세의 소년, 십대 소년으로서의 성공비결. 그것도 외국에서, 가장 열악한 환경 속에서 그를 지원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를 붇들고 있었던분은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느끼고 있었죠. 그의 성공비결은 샘입니다. 그리고 담입니다. 그리고 무성한 가지, 무성한 가지라는 말은 열매가 가득한 가지라는 말입니다. 요셉은 가지다라고 말했어요. 열매가 풍성합니다. 그런데 요셉의 성공비결은 담이 있습니다. 담이라고 하는것은 성별입니다. 동료압력, 이런거 안받아들입니다. 절대로 안받아들입니다. 왜 안받아 들입니까? 우리가 내가 좋은것을 가지고 있는데, 좀 질떨어지는 것을 가지고 와서 가지라고 하면 가지겠습니까? 나는 너무나 가련한 것을 가지고 있는데 너무나 좋은것을 준다면 받겠지요. 그러나 나는 너무나 놀라운 것을 가지고 있어요. 그런데 허접한 것을 나에게 가지고 와서 가지라고 하면 나는 절대로 안갖습니다. 담이라고 하는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오셉에게서 세상의 동료 압력이라고 하는것은, 세속적인 모든 영향력이라고 하는것은요. 그것은 요셉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요. 거기에 담이 있었습니다. 이 담이라고 하는것은 요셉이 알고있는 가치관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있는 영원한 것에 대한 가치관, 그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밖에 오는것을 받아들일 이유가 없었다. 그렇다면 그는 고립된 겁니다. 여기에는 문이 없어요. 고립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나무는 어떻게 자랍니까? 샘이 있습니다. 여기 샘이 있어서 샘에서 계속해서 물이 공급됩니다. 양분이 공급됩니다. 그래서 밖에서 들어오는 아무런 재원이나, 또한 공급하는 것들이 필요 없어요. 이 안에서 자급자족할수 있어요. 그리스도인은요, 세상으로부터 우리 자녀들은, 십대 자녀들은 세상에서부터 무언가를 받아야할 이유가 없어요. 왜냐하면 세상에서 들어오는 것들은 허접한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것은 그것은 영원한 것이고 너무나 고급이다. 너무나 고질적인 귀한 것들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샘으로부터 오는 원천입니다. 그것은 결코 마르지 아니하고 우리의 마음속에 영원한 것들을 계속해서 공급할수 있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래서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이 나무는요, 열매를 엄청나게 맺고 그 가지는, 요셉이예요. 이 가지는 밖으로 나가서 사람들이 따먹어요. 밖에서 사람들이 와서 따 먹습니다. 위대한 간증, 좋은것은 안에서 밖으로 나갑니다. 밖에서 안으로 들어올것이 없다. 이것이 십대의 우리 자녀들이 이 어려운 시대에 많은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도전을 받게 될때, 우리 자녀들은 안온하게 그리고 성결 가운데 주님과 교제함으로 그래서 그는 많은 열매를 얻고 위대한 간증을 드러낼수 있는 절호의 찬스가 십대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폭풍이나, 아니면 잔잔한 바다인가? 잔잔한 바다는 그냥되는것이 아니고요. 거기에 주님이 계십니다. 우리 자녀가 주님과 함께 같은 배를 타고 이제 가게 될때, 풍랑이 와도 우리는 어려움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여러가지 다양한 문제들에 직면해 있고 사단이 공격하려 하는 우리의 십대의 자녀들, 그 자녀들에게 주님께서 보호하시고 주님께서 막아주시고 또한 주님께서 보양하시는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또한 부모님의 사랑과 또한 헌신적으로 근면한 훈계와 훈육과 이런 모든것들은 우리 자녀들을 계속해서 미래를 준비하고 영원을 준비하고 가까운 미래라면 성인을 위해서 준비하고 그들은 주님을 위해서 살아가고, 마리아와 요셉과 다니엘처럼 그들은 주님앞에 위대한 믿음을 행사하고요. 주님을 영광스럽게 해 드리고 그리고 자기 자신이 마음속으로 기뻐하고 준비하는 그런 십대들이 되리라 믿습니다. 주님이 저희 부모님들 도와주시고요. 또한 이런 도전속에 노출되어 있지만 그러나 주님이 보호하시고 계시는 이런 십대들, 계속해서 저희들이 기도하고 또한 함께 미래를 향해서 나아가게 되리라 믿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