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이레 2022. 7. 10. 01:02

2016년 12월 29일 목요일

강사 : 한봉래 형제님

<마태복음 강해 37>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25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26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27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28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29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마7:21-29, 개역한글)

마태복음 5-7장은 흔히 산상수훈이라고 하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이제 이 말씀의 결론부분입니다.

다시 산상수훈의 말씀을 쭉 요약해 보겠습니다. 예수님은 메시아이십니다. 그리스도와 메시아는 같은의미입니다. 메시아의 중요한 의미는 예수님이 왕이시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왕으로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통치하시는 왕이십니다.
그리고 그 나라에 들어가는 백성의 특징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백성은 복된 백성입니다. 그들은 의로운 통치를 받으며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보이지 않는 나라입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 나라의 백성입니다.
누가 그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것인가 하는 조건을 예수님께서 5장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5:20, 개역한글)

예수님께서 다스리는 나라에 들어가는 자는 의인만이 들어갈수 있음을 주님께서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어느정도의 의인이어야 합니까? 바리세인보다 나아야 합니다.

바리세인이 누구입니까? 우리는 이렇게 이해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쓰신 문맥에서 바리세인이 상징하는바가 무엇이냐면, 인간이 도달할수 있는 의의 최고의 수준에 도달한 사람들입니다.
바리세인들은 기도했고 일주일에 두번씩 금식하고 구제했습니다. 그들은 음행이나 살인같은 부도덕한 죄를 범한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율법의 작은것이라도 지켰습니다.

그래서 당대의 누구라도 바리세인을 보면 '의인이다'라고 평가했습니다.
바리세인이었던 사도바울은 훗날 이렇게 간증합니다. "내가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였다" 바리세인 중의 바리세인입니다.
약간 과장해서 말한다면 바리세인은 "저사람이 천국에 가지 못한다면 누가 천국에 들어갈수 있겠는가?" 라고 말할수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바리세인의 의보다 나아야 한다>
이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수 있는 수준을 사람이 도달할수 없는 수준으로 높이고 계십니다.
최고의 사람이 평생에 걸쳐서 수많은 행위를 통해서 이루어 낸 의보다 높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마5:48, 개역한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의로우신 것처럼 의로워야 합니다.
그런자만이 들어갈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 어떤 생각을 해야 하겠습니까?
이 말씀을 들으면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이렇게 생각해야만 올바로 들은것입니다.

"나는 이 기준에 도달할수 없다. 나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수 없는자다. 내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나를 들여보내주는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이것이 산상수훈에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반응이었습니다.
산상수훈은 구약의 율법과 같습니다. 우리는 로마서를 통해서 이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이유는 율법을 들어서 구원 얻으라고 주신것이 아닙니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닳음으니라>

사람들은 율법을 듣고 "아, 나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수 없다" 라고 깨닳아야 합니다.

갈라디아서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율법은 몽학선생입니다.
"내 행위와 능력으로는 천국에 들어갈수 없다. 나는 그리스도께 가야 한다" 라고 해야 합니다.

주님의 산상수훈은 율법의 기능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율법을 폐하러 온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온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반응해야 합니다.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마5:3-6, 개역한글)

산상수훈을 듣고 사람들의 마음은 이래야 합니다.
첫째로 심령이 가난해야 합니다. 심령이 가난하다고 하는것에 대해서 설명을 드렸습니다.
헬라어로 가난하다고 하는것은 두가지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그렇습니다. 가난이라고 하는것은 상대적인 것이 있습니다. 또한 절대적인 가난이 있습니다. 누구와 비교할것 없이 그 자체로 먹을것과 입을것과 잘것도 없습니다.
절대적인 가난은 '거지'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이 심령은 이렇게 낮아져야 합니다.
"하나님 그래도 제가 이거 하나는 하지 않았습니까? 이거 하나를 보시고 저를 천국에 넣어주세요" 라고 할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내가 의로울찌라도 하나님앞에서 내세울것이 없다고 느끼는자가 '심령이 가난한 자'입니다.

그는 거지입니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거저 은혜로 주어야만 그는 먹을수 있는 사람입니다. 심령이 그래야만 합니다.
그는 자기의 죄악된 상태를 보고 애통해야 합니다.
그는 의에 굶주리고 갈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산상수훈의 마지막은 상산수훈의 첫대목으로 돌아오게 되는것입니다.
우리는 다시 돌아와야 합니다. 우리는 다시 겸손해야 하며 온유해져야 합니다.

사람에게는 두가지 선택이 가능합니다.
이렇게 첫대목으로 돌아갈 것인지, 아니면 바리세인처럼 내 힘으로 내가 생각하는 하나님 나라, 내가 생각 하는 천국, 조건, 의를 추구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바리세인들은 이 말씀을 듣고도 변함없이 그길을 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우리도 선택할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 앞에서 내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될때 '하나님께서 나를 이 기준으로 보실것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의롭다 하실것이다' 라는 내 개념을 가지고 인생을 살수 있습니다.

두번째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의 의는 인간의 최고의 노력과 최선의 결과로도 하나님의 수준에 이르지 못한다. 하나님의 의만이, 하나님과 같은 온전만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한다'라는 말씀을 받아들여서 자기를 낮추고 이것을 받는 유일한 길을 은혜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외에는 불가능하다고 하는 길로 나올 것인지 선택할수 있습니다.

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마7:13-14, 개역한글)

두가지 길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사람으로는 불가능하고 하나님만이 해주실수 있는 구원받고 계속적으로 성도의 삶을 살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두번째는 바리세인의, 종교적인, 멸망의 길이 있습니다. 결과가 어떻든지간에 최선을 다하면 된다라고 하는 길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주님께서 제시하신 길을 '좁은문'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찾는이가 적다>

다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왜 주님이 제시하신 이 길을 걷는 사람이 구원받을때나, 구원받은 이후에나 적을까요?

첫번째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렘29:13, 개역한글)

마태복음 7장에서도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찾는이가 적음이라>
이 길은 찾아야 합니다.

이 길은 찾는사람이 발견합니다. 찾지 않으면 발견할수 없습니다. 그 마음속에 '하나님의 길은 어디 있습니까?'라고 찾아야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찾지 않습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것은 어쩌다보니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날 자고 일어나보니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울부짖고 애통하고 다른 어떤것보다도 하나님을 찾고자하는 이와같은 추구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찾는이가 적은 이유입니다.
많은사람들이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많은사람들이 그냥 살아갑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계신가, 주님이 왜 십자가에 죽으셨는가, 그 이유에 대해서 찾아야 합니다.

두번째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요일2:15, 개역한글)

이 길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걷지않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위에 이 길을 걷는사람은 항상 소수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이 길은 세상과 구분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있는것을 사랑하지 않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세번째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눅13:24, 개역한글)

좁은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야 하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말씀은 외적인 갈등을 불러 일으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내적인 갈등을 불러 일으킵니다.
세상이 이길을 걷는것을 방해할뿐 아니라 우리 스스로 죄인이기에 본능적으로 세상을 좋아합니다. 우리는 죄인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좁은길을 가려고 할때 외부에서도 방해하지만, 내부에서도 갈등이 있는것입니다. 내 속에서 이 생각이 튀어나오는 것입니다. '꼭 이길만 가야 하는가? 너무 좁지 않은가? 넓혀도 되지 않는가?'
속에서 이러한 영혼의 갈등이 있습니다. 이 갈등이 심한 사람은 오지 않는 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길을 좁은길이라고 하셨습니다.

네번째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마7:15, 개역한글)

거짓 선지자들 때문입니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우리가 길을 선택해야 하는 이 갈림길에 거짓선지자들이 서서 넓은길로 안내하기 때문입니다.
"이 길이 넓고 편하고 확실하게 천국으로 안내하는 길입니다"라고 속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이 최대한 노력하면 하나님은 그것을 받으십니다"

제가 대학 다닐때, 유명한 소설 '괴테의 파우스트'이 있습니다. 지금도 세계전집 중 하나 입니다.
그 책의 주제는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 하나님은 노력하는 자를 구원하신다> 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모든 사상의 근본입니다. '최선을 다하면 하나님이 알아주시고 그것을 받으신다'고 거짓말 합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세인의 의보다 낫지 아니하면 들어갈수 없다> 이것은 바리세인도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갖지 않으면 못들어갑니다. 이것이 주님의 가르치심입니다.

다섯번째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것이 저희들이 오늘 다루게 될 주제입니다.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25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26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27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마7:21-27, 개역한글)

앞에서는 거짓선지자가 서서 사람들을 속였습니다. 마태복음 7장 21절부터는 자기가 스스로 속은 것입니다.
그는 자기가 천국에 들어간다고, 하나님의 자녀라고 생각했습니다. 무엇인가 잘못된 근거를 가지고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는 스스로 속은 것입니다.

속은 사람은 말하기 시작합니다. <주여 주여> 그리고 23절을 보면 주의 이름으로 세가지 일을 했다고 말합니다.
그는 말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사람은 많은것들을 하였지만 안한것들이 있습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24-27절까지 이 사람은 '예수님의 산상수훈' 의 가르침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을 행하지 않았습니다.

앞의 사람은 말하고 행하지 않았습니다.
뒤의 사람은 듣고 행하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을 뭐라고 표현하는지 야고보서를 보시겠습니다.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말라 (약1:22, 개역한글)

21절부터 나온 사람을 우리는 스스로 속은사람으로 볼수 있습니다.
구원은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여> 이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받을때 두가지 요소가 작동합니다. 마음과 입입니다.

여기 두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앞의 사람은 입으로 주님을 주라 시인했습니다. 그런데 입으로 시인하고 시인한대로 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시인했기 때문에 자기가 진짜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입으로 시인하면 그것은 옳은것이고 합벅적인 것이지만 말한대로 살지 않으면 그것은 합법적이지 않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들은 듣습니다. 그리고 행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들었습니다. 그 속에 지식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이 그 지식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7:21, 개역한글)

여기서 핵심은 '행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자입니다.
다른말로 하면 그가 영적인 삶을 살지 않으면 그가 어떤말을 하건, 그가 어던 지식을 가지고 있어도 하나님은 그에게 <너는 영적으로 속은자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은 이 말씀앞에 서야 합니다. 성령이 교회에 하시는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내 고백, 내 마음에서 알고 있는 복음을 내 나름대로 고백할수 있습니다. 이것은 잘한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살고 있지 않다면, 우리가 속고 있지 않은지 봐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지식이 있습니다. 성경이 어떻게 말함을 압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적인 삶을 살지 않으면 우리는 속은자 입니다.

이 구절을 이렇게 이해하시는 분들이 있고, 이에 대해서 완전히 틀렸다고 저도 보지 않지만 이러한 부분이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부분에서 걸립니다. 종교 생활을 했던 분들이 걸립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해야 한다>

그런데 이 부분을 요한복음 6장으로 넘어갑니다.

28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요6:28-29, 개역한글)

이곳으로 넘어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뜻을 <예수님을 믿는 것> 이라 하고 넘어갑니다.
이렇게 넘어갈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마태복음 7장의 의미를 바꿔서는 안됩니다. 행하고 있어야 합니다. 영적인 삶을 살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다른 무언가로 대체하는것은 말씀을 어긋내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의 삶을 봐라> <그리고 네가 하나님의 백성의 특징을 갖고 있는지 점검해봐라> 라고 호소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삶을보지 않고 나의 믿음만 보고, 나의 성경적인 지식만 보고 '나는 됬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이같은 혼동을 불러 일으킬까요?

첫번째는 잘못된 가르침이 전해졌기 때문입니다.
혹시 직접적이건, 간접적이건 이렇게 생각하고 계신분은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복음을 들을때, 전도자들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십시오." 그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 내 마음을 엽니다. 내 마음에, 내 삶의 중심에 들어오셔서 나의 주인이 되옵소서"
그럴때 전도자들이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이제 당신은 영접했으니 그리스도인 입니다. 혹시라도 회의가 들거나 내가 그리스도인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거든, 그것은 사단이 넣어준 생각입니다. 그 생각을 물리치고 이 영접한 순수한 마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는 마음을 유지하십시오."

이렇게 잘못 가르쳐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알고 있습니다.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우리를 책망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어야 합니다> 이것은 성령님께서 하시는 사역입니다. 이것을 사람이 대체했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도록 우리는 조심해야 합니다.
누군가가,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한국 최고의 전도자가 그렇게 말해 줬습니다. 그런데 그게 어쨌다는 것입니까?

우리는 주님 말씀 앞에서 우리 자신을 점검해야 합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지 않으면 나는 너희의 말을 듣지 않고 너희 지식도 보지 않는다.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들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올것이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것은 구원을 흔들고자 함이 아닙니다.
성령님께서 친히, 우리가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길을 가면 성령님께서 틀림없이 확신을 주십니다. 주님이 주시는 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롬8:16, 개역한글)

성령께서 우리의 심령속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것을 증거해 주실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갖고 싶은것입니다.
우리는 올바른 근거속에서 살고 있어야 합니다.

첫번째, 우리가 혼란스러워 하고 흔들리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하시는것을 사람이 가르치는 잘못된 행동에서 근거한 것일수 있습니다.

두번째 이유는 우리가 자기를 살피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찌니 (고전11:28, 개역한글)

주님께서 지역모임에 만찬이라고 하는 집회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참으로 복된 시간입니다. 구원받은 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후에 만찬에 참여하지 않는것은 합당한 것이 아닙니다. 예배드린다고 하는 구원받은 사람의 기본을 하지 않는 것은 말이 안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사람이 당연히 해야하는것이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자매들은 잠잠하게, 형제들이 입을 열어서 감사드리는 복된것입니다.
얼마나 복된것이냐면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에 복된자리입니다. 우리가 유익을 얻기에 복된 자리입니다. 매주 우리는 자기를 살피는 것입니다.

자기를 살피고 있어야 합니다. 자기를 살피지 않았기 때문에 고린도교회를 징계하셨습니다. 그들 중에 잠든자가 나왔습니다. 병든자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약한자가 나왔습니다.
우리가 자신을 잘 살펴보면, 만찬상 앞에서 잘 살펴보면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주님의 징계를 볼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중에 아무도 완전하게 사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부모가 자식을 신실히 징계하듯이 징계합니다.
징계가 없으면 사생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게 영적으로 100% 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신실하게 징계하십니다. 그 징계의 손길을 느끼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백하고 고치고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그러한 방법으로 우리를 고치고 계신 것입니다.

구원받은 이후에 우리가 어떻게 주님을 닮아갈수 있을까요?
그 중요한 장치가 무엇일까요? 만찬 예배에 나와서 자신을 살피고 자백하고 고쳐내는 것입니다. 주님의 징계의 손길을 느끼고 감사하고 고쳐내는 것입니다.
이것만큼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는 장치가 없습니다.

이 예배시간이 제대로 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혼란이 있는 것입니다.
안믿는 사람들이 자주하는 잘못이며 믿는 사람들도 가끔 하는 잘못이 있습니다.

천국은 어떻게 들어갑니까?
"세상에 죄만 짖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 아무리 악한 죄인이라도 가끔 선행을 하고 아무리 선한 사람이라도 가끔은 죄를 지을것이다. 그래서 천국에 들어가는 방법은 이렇게 계산할 것이다. 잘한것과 잘못한 것을 놓고 잘한것이 못한것보다 한개라도 많으면 주님이 천국으로 넣어주실 것이다."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도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내가 잘못한 것만 있는가? 잘한것도 많다. 잘못은 적다. 대부분 주님을 사랑하고 말씀을 순종하고 기도하고 산다."
자기가 잘한것에 촛점을 맞추고 자기가 잘못한 것에 대해서 관대하게 넘어가는것입니다.

주님의 계산은 이렇습니다. <네가 죄를 지을때마다 왜 그 죄를 짖는지 그 마음의 동기를 살펴봐야 한다. 어떤 구조로 그 죄가 너를 장악하고 있는지 살펴야 한다. 그리고 만약 네가 그 죄를 사랑하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커다란 문제가 될것이다>

죄는 점점 그 사람을 장악해 갑니다.

또 이렇게 사람은 변명합니다. "흠없는 사람이 없느냐? 다 만찮가지다"
맞는 말씀입니다. 우리중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가 온전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내 죄를 정당화 할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질문해 보는것입니다.
<우리는 실패 했을때, 애통해 하는가? 아니면 변명하는가?>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 백성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실패하면 그는 애통해하는 것입니다.
실패할수 있습니다. 실패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애통해 합니다. 낮아집니다. 그는 겸손해져야 합니다.

우리가 혹시 구원받은 후에 하나님의 영광보다 나의 유익을 중요시 하고 있지 않은지 위에것을 생각지 않고 땅의 것을 중시하고 있지 않는지 우리는 조사해야 합니다.

그때 우리가 우리마음이 자꾸 높아지는것은 우리가 좁은길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나는 그 완벽에 이룰수 없고 그래서 나를 구원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할 수밖에 없고 성령께서  내속에 역사하시는것을 따라갈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백하기보다는 변명하고 겸손하기보다는 교만해지고 부서지기 보다는 자기중심적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구원받은 후에 우리는 좁은길로 갈것인지 넓은길로 갈것인지 선택해야 합니다.

다시 마태복음 7장으로 가시겠습니다.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마7:21-22, 개역한글)

이 사람은 21절에서 '주여 주여'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는 주님을 존중히 여기고 주님을 시인하고 주님을 인정하는 태도입니다.

그런데 이 '주'라는 단어는 22절에 다시 사용됩니다. 신약성경에서 '주'라고 하는 단어는 전부 구약성경의 '여호와'의 번역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신성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실뿐 아니라 부활하신것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는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주여 주여'라고 두번 말함으로써 그의 열심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그를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참으로 충격적인 일입니다. 어떻게 그럴수가 있겠습니까?

그는 자기 생각으로 '이것이 주님을 위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의 인물은 '사울왕' 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아말렉을 진멸하라. 남녀노소를 구분하지 말고 죽이라짐승까지 전부 진멸하라>

그런데 사울왕은 살찐 짐승을 남겨놓습니다. 왜 그랬냐는 질문에 그가 하는 변명은 "하나님께 제사 드리려고 남겨 두었습니다"
사무엘은 이렇게 말합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한다고 하지만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이 아니면 하나님은 그것을 하나님을 위하는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여기 이 사람은 세가지를 말합니다. <선지자 노릇하며 귀신을 쫒아내며 권능을 행>합니다.

성경을 보면 악한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선지자 노륵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구약의 발람입니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가 가고 싶어서 묻고 또 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가 가서 이스라엘을 저주하라는 부탁을 받습니다. 그가 이스라엘을 바라보고 어떻게 했습니까? 그가 축복했습니다.
이스라엘을 바라보고 놀라운 예언을 했습니다. 그가 선한사람입니까? 악한사람입니다. 베드로는 베드로후서에서 말합니다. <그가 불의의 삯을 위하여> 그는 당나귀의 책망을 받은 선지자 입니다.
선지자 노릇을 했다고 다 하나님의 사람이 아닙니다.

신약성경에도 한사람이 나옵니다.
가야바가 그사람입니다. 그는 그 해의 대제사장입니다. 그가 이렇게 예언합니다.
"한사람이 죽어서 온 백성이 망하지 않는것이 유익하지 않느냐"

그가 놀랍게 주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은 은혜를 말합니다. 그가 그해의 대제사장입니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의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선지자 노릇을 한다고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권능을 행한 사람을 예로들면, 욥기에 나온 사단이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 욥의 모든 사업을 일거에 망하게 합니다. 놀라운 능력입니다. 그리고 욥의 자녀들이 함께 식사하고 있는 그 집을 무너뜨려 한꺼번에 죽게 합니다.
그러나 그는 사단입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애굽의 술사들이 모세가 행하는 기적의 일부를 따라서 행합니다. 물론, 한계가 있지만 행합니다.
그래서 기적을 행하고 능력을 행한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증거가 아닙니다.

대표적인 사람으로 신약에서 살피겠습니다.

9 그 성에 시몬이라 하는 사람이 전부터 있어 마술을 행하여 사마리아 백성을 놀라게 하며 자칭 큰 자라 하니
10 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다 청종하여 가로되 이 사람은 크다 일컫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하더라
11 오래 동안 그 마술에 놀랐으므로 저희가 청종하더니
(행8:9-11, 개역한글)

시몬도 믿고 침례를 받은 후에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 다니며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라니라 (행8:13, 개역한글)

18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함으로 성령 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19 가로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
(행8:18-19, 개역한글)

이사람은 사마리아 교회에 영접 됐지만 가짜입니다.
베드로가 <너는 분깃도 없다>고 하였기 때문에  그는 하늘나라에 들어갈수 없습니다.
그의 관심은 능력에 있습니다.

하나님 기준으로 자기 삶을 사는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애통해하며 의에 굶주리며 이와같은 특징들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것이 능력입니다.

이것이 마태복음 7장에 나와있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착각입니다.
지금도 많은사람들이 우리가 인정하지 않을수 없는 화려한 일을 합니다. 큰 교회를 세우고 많은복음을 전하고 많은 사람에게 칭송을 받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는것은 다릅니다. 그가 성경에 말하는 기준에 따라 삶을 살고 있는가, 그가 잘못할때마다 만찬상 앞에서 자신을 살피고 있는가, 그리고 자신의 속에 남아있는 그 죄에 대하여, 자기가 거지라고 생각하며, 애통해하는가, 그리고 온유하고 겸손한가입니다.
이 마음이 없으면 주님께서 이렇게 말하실것입니다. <너는 속은 것이다>

한사람만 더 언급하겠습니다.
데마입니다. 데마는 사도바울이 쓴 서신서에 두번이나 나옵니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에 세상을 사랑하여 데살로니가로 갑니다.
우리는 유의해야 합니다.

요한일서 2장에서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

세상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그속에 없는 것입니다.
대마가 사도바울의 동역자 일찌라도, 사도바울과 함께 놀라운 일을 감당했을찌라도 세상을 사랑하여 가면 그는 하늘나라에 없을 것입니다.

그 다음 반석으로 가겠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마7:24, 개역한글)

먼저 마태복음 16장을 살피겠습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마16:18, 개역한글)

반석위에 교회를 세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반석이 무엇입니까?

베드로는 예수님에 대해서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어떻게 고백했습니까? 17절에 보시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베드로에게 알려주신 것입니다. <이를 알게하신 이는 혈육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어떤분인지 알려주셨습니다. (물론 이것은 저희들과는 상황이 다른 것입니다)
사도바울도 똑같이 말합니다. <하늘에서 보이신것을 베드로가 그대로 순종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뭐라고 평가할찌라도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뜻과 음성앞에서 베드로가 순종한것입니다.

"맞습니다. 주님, 하나님의 뜻이 옳습니다. 내 뜻이 틀렸습니다"

이것이 반석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지 않고 인간적인 방법, 세상적인 지혜를 따라 내가 삶을 살면 하나님께서 무너질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반석이 무엇이냐? 마태복음 7장에 와서 적용해 보시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신 여덟가지 8복이라고 하는 것을 취하는 것입니다.

내가 온전하지 않기 때문에 그는 마음이 가난하며, 애통하며 온유하며 의에 굶주리며 자신에 대해서 항상 이같은 태도로 항상 자신을 평가하는 사람이 반석위에 세운 사람입니다.

또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은 부패해 있고 망할것입니다. 우리가 세상 가운데 있는것은 우리가 세상의 부패를 막는 소금이 되어야 하고 이세상에 생명의 복음을 비추는 빛이 되어야 합니다.
그는 세상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는 세상을 향해서 소금의 기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1점 1획이라도 이루어질것을 신뢰합니다.
그는 기도와 구제와 금식에 대해서,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행동에 대해서 겉의 문제가 아닌 마음의 문제다라는 견해를 항상 유지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는 돈에 대해서 하늘에 보화를 쌓고 마음에 염려하지 않고 이와같은 태도를 취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와같은 태도로 사는것을 반석위에 세웠다고 합니다.

그렇게하지 않고 흔히 세상에서 말하는 지혜로움, 세상 가치관을 따라서 자기가 섬기고 있는 지역모임을 이끌어 가거나 행동하는것이 모래위에 세운것입니다.

잠깐 모래위에 세운것에 대한 다른비유를 들겠습니다.
왜 사람들이 모래위에 세울까요? 모래위에 세우는 것은 넓은길로 가는 것입니다.

모래위에 집을 세우면 아주쉽게 세울수 있습니다.
반석위에 세우는것은 쉽지 않습니다. 좁은길입니다.
넓은길은 자기가 하고싶은것을 다 행하면서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그는 거리낄것이 없습니다.
죄를 짖고도 최선을 다하면, 믿기만 하면 천국에 갈것입니다. 넓은길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영적인 인생을 살지 않으면 도덕적이라 할찌라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요? 요즘 메르스가 유명합니다. 이에 대해서 영적인 견해를 갖지 않으면, 사람들이 다 갖고 있는 견해를 갖고 있지 않으면 우리는 영적인 사람들이 아닙니다.
무모하자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길을 가야 합니다.

왜 그렇게 하냐고 말한다면,

첫번째 견해입니다. 이것은 어리석은 사람의 특징입니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크게 명철하여도 마음이 조급한 자는 어리석음을 나타내느니라 (잠14:29, 개역한글)

어리석은 사람, 즉 모래위에 집을 짖는 사람의 특징은 <조급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들은 항상 지름길을 좋아합니다. 이것은 다 반성해야 하는 것입니다만,  한국사람의 특징은 빨리빨리입니다. 이것은 어리석은 길입니다.

영적으로 보겠습니다. 복음을 전할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때 서두릅니다.
어떤사람이 구원받게 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구원받게 하기 위해서 지금당장 이 전도집회에서 이번에 만나서 끝장을 보려고 합니다. 빨리 되기를 원합니다. 서두르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급합니다. 주님께서 언제 오실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도 서두르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자기 때를 갖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그 영혼에 대해서 지금다루고 계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급해서 지금당장 해결하려고 합니다.
이것에 대해서 성경은 말합니다. <어리석다> <모래위에 짖고 있다>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으니 큰 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히되 잘 지은 연고로 능히 요동케 못하였거니와 (눅6:48, 개역한글)

누가복음에서는 반석위에 집을 짖는것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깊이 파고>
어리석은 사람의 특징은 깊이 파지 않습니다. 바로 모래위에 지어버립니다. 그는 구원에 대해서 믿는다고 하는것에 대해서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서 가볍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모임에서 저희들이 영접할때 주로 이런 부분을 이야기 합니다. 모임안에 들어온 사람들의 책임을 말합니다.
이것은 무거운 것입니다.

지역모임의 교제가운데 있다고 하는것은 무거운 것입니다. 삶을 걸고해야 합니다. 목숨을 걸고서 해야 합니다.
그의 인격과 그의 하나님 앞에서의 진지함을 걸고 하는것입니다.

그냥 교회갔다가 마음에 안들면 나와버리고 이사 갔다고 천거해버리면 되고 하는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물론, 이사가면 천거해야 겠지만...

뵈뵈자매를 보면 로마서를 보면 천거해 줍니다. 그가 어디로 가는지 지역교회가 다 알고 있는것입니다.
아볼로에 대해서도 한 지역모임에 속해서 그다음 그의 영적인 행로에 대해서 지역모임가운데 계속 추적되고 있는것입니다.

마음에 안들면 옮기고, 그럴수 없습니다.
한 지역모임의, 몸으로 비유하면 한 지체로 들어간 것입니다. 거기서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냥 구원받았다고 너무 좋아서 영접을 했는데 같이 살다보니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처음엔 안그런줄 알았는데, 다 천사같은줄 알았는데 인간적인 것들이 나타나는것입니다. 그래서 실망이 생기고 싸우게 되고 모임생활을 안하는 것입니다.

불편해서 인상쓰고 살고, 모임내에서 악수하기도 불편할정도로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그래도 모임에 나갑니다.
이래서는 안됩니다.

구원에 대해서나 교회에 대해서나 깊이 파야 합니다. 어려울찌라도, 뭐 그렇게까지 파야 하는가 말을 들을찌라도 깊이 파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8장에 보면 에디오피아 내시가 있습니다. 빌립이 가서 복음을 전합니다.

그가 이사야 53장을 읽고 있었습니다. " 그 양이 누구인가? 털 깎는자 앞에 잠잠한 이분이 누구냐?" 질문했습니다. 빌립이 예수님을 제시했습니다. 그런데 무엇까지 이야기 합니까? 침례까지 다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내시가 말합니다.
"내가 침례받는데 무슨 거리낌이 있느냐?" 그래서 물에 들어가 침례를 받고 나옵니다.

침례는 로마서 6장입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 전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느껴집니다. 구원받은 후에 성도로써 잘 성장하지 않는 이유 중에 상당한 부분이 좁은길을 통해서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애통해지고 겸손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후에 성도로써의 책임을 말하면 이제 힘들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요한일서 5장입니다. <그의 계명은 무겁지 아니하다>

주님의 명령은 무겁지 않습니다. 주님의 명령을 무겁다 라고 말하는 분이 계십니까?
그는 율법가운데 있는 사람입니다. 왜 무겁지 않습니까?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기꺼이 따르고자 하는것입니다.

나를위해 목숨을 버리신 주님께서 나에게 작은것을 부탁하셨습니다. 그것을 행하는데 무슨 거리낌이 있겠습니까?
침례를 받는것에 거리낌이 있다고요? 너울을 쓰는것에 자존심이 상한다고요? 만찬은 형식적인데 매주 해야 한다고요?

이러한 말들이 있는것은 전부 좁은길로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좁은길을 통해 주님께 나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첫번째는 너무 서둘렀기 때문입니다. 어리석은자는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않습니다.
자기 계획에 맞춰 무엇인가 일어나게 하려 합니다. 그는 피상적입니다.

세번째, 어리석은 사람의 특징은 배우려하지 않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바리세인입니다. 주님께서 이와같이 말씀하셨어도,  여러번 바리세인들에게 율법에 대해서 안식일에 대해서 가르치셨어도 그들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왜입니까?

자기 개념이 확고하게 세워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모임에서 제일 난처한 경우는 배우려고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빌립보서 3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그는 셋째하늘에 갔다온 사람입니다.
그는 부활하신 주님을 다메섹도상에서 눈으로 뵌 사람입니다. 그는 교회를 위해서 핍박과 환란을 당하고도 자기마음의 가장 큰 고통은 그 외적인 핍박이 아니라 교회를 향한 염려라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빌립보서 3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요 오직 앞에있는 부르심의 상을 향하여 쫓아가노라>

사도바울의 소원은 그리스도와 그 고난을 알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그 고난에 참예하려고 한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많은 사람들 가운데 가장 배우지 않아도 좋을 사람입니다.

사람이 가히 말로 표현할수 없는 것을 보고 왔습니다. 계시받은것이 너무 큼으로 자고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그 몸에 육체의 가시를 주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분의 표현이 어떠합니까?

빌립보서 3장에서 그는 배우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배우고자 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배운것으로, 자기가 지금까지 행한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왜 더 나아가려 하느냐? 나보다 못한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나보다 잘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것 같은데?"

아까 저희들이 읽은 사도행전 8장에서의 시몬이 그와같습니다.
시몬은 능력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기준에 따라 자기인생을 살아가는것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중요한 변화를 놓쳤기 때문입니다.

그가 과거 구원받기 전에는 '크신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마술을 행했습니다.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았습니다. 베드로가 기적을 행했습니다. 베드로가 안수하니 성령이 내렸습니다. 시몬은 그 기적을 사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시몬이 모르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가 과거에 행했던 그 기적으로 인해 누가 영광을 받았습니까? 그 기적을 행한 시몬이 영광을 받았습니다.

베드로가 안수해 사마리아에 성령이 임했습니다. 누가 영광을 받습니까? 베드로가 아닌 베드로와 빌립을 사용하셔서 성령을 임하게 하시고 유대교회와 사마리아 교회가 하나인것을 성령이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빌립이 사마리아에 정확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들이 구원받았습니다. 정확하게 복음으로 구원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안수할 때에야 성령이 임했습니다. 왜 입니까? 이것은 빌립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단 하나의 교훈을 가지고 있는것입니다.

사마리아와 유대가 과거에는 서로 원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주님안에서 그와같은 관계는 사라지고 새로운 하나된 관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하나되게 하신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사람들은 다 낮아져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 사람은 영광을 받지 못합니다. 우리 가운데 주님의 영광만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매님들이 너울을 쓰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몬은 그것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과거에 자기의 영광을 위해서 살았다면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변함없이 자기의 영광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말합니다. <너는 가짜다>
왜 배우려고 하지 않습니까?

배우지 않아야 이정도 수준에서 자기가 영광을 얻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영광을 얻는것에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세상에서 죄때문에 넘어졌을때 그가 애통해하는 방법이 하나님의 말씀인것을 압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쳐지는 곳에 옵니다.

왜입니까?
<내가 죄를 범치 아니하려 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그러고 싶은 것입니다.

어떤 말씀이 나로 하여금 이 죄를 능히 이기게 할수 있는가, 사모하고 기도하고 듣고자하여 모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말씀을 받고 죄와 싸워 이기고 과연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으로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의 마음의 소원입니다.

죄를 범하고도, 자신이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시인하지 않고 그것을 극복하는일에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주님은 마지막날에 이렇게 말씀하실것입니다. <너는 네 말에, 네 지식에 속은 것이다> <너는 항상 불법을 행했다. 나를 떠나라>

25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26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27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마7:25-27, 개역한글)

그리고 두번에 걸쳐서 그가 평생 살아온 날을 시인하는 날이 있을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시험해보기를 원합니다. 그날이 아니고 지금 시험해 보기를 원합니다.

스스로 깨끗한 자로 여기면서 오히려 그 더러운 것을 씻지 아니하는 무리가 있느니라 (잠30:12, 개역한글)

여기 참으로 모순된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을 깨끗하다고 하면서 분명히 더러운것이 있는데도 그것을 씻지아니하는 이상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고전6:9-10, 개역한글)

<미혹을 받지 말라> 속지 말라는 것입니다.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이 부분에서 오해가 없어야 합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구원받았기 때문에 이런일을 해도, 한번받은 구원은 영원하기 때문에 술취해도, 도적질을 해도, 탐람해도 그는 천국에는 들어갈 것이다라고 속지 말아야 합니다.
들어갈수 없습니다.

구원은 그런 피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사람을 반드시 바꾸어놓는 것입니다.

19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갈5:19-21, 개역한글)

이 죄에 걸려있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것입니다.

5 너희도 이것을 정녕히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6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를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엡5:5-6, 개역한글)

속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의 삶이 성경적인 기준을 따르지 못하면서 과거에 영접기도를 한적이 있다고 과거에 회심의 경험을 한적이 있다고 그 근거로 안전하게 천국에 갈것이다 라고 속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 제 마음에 들어오십시오. 제 삶의 주인이 되십시오." 요한복음 1장 12절을 따라 영접기도를 한것은 축복된 일입니다.
그런데 그 기도는 이렇게 살때만 합법적 입니다. 삶이 달라졌을때만 합법적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가르침입니다.

이제 주님의 가르치심에 대한 반응입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가르치시니 듣는 사람들이 그 말씀에 놀랬습니다.

28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29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마7:28-29, 개역한글)

제가 다른곳에서도 말씀드린적이 있습니다만, '놀랐다'라고 하는것은 구원받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강력한 말씀앞에 자신의 생각이 흔들려서 충격을 받았다는 뜻에 불과합니다.

가르침에 놀라는 정도 이상을 해야 합니다.
주님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이분이 누구십니까? 방금 설명한 그 하나님 나라를 여실 분입니다.
이분이 누구십니까? 우리가 갈수 없는 하늘나라를 들어갈수 있도록 사람이 되어 오신 우리의 왕이십니다.
이분을 우리가 의지할수 있습니다. 이분의 말씀을 우리가 붙들 수 있습니다.

자기의 생각을 내려놓고 이 좁은길로 기꺼이 들어가서 자기의 삶을 개편해야 합니다. 그러나 놀라고서만 만것입니다.

그리고 놀람의 큰 이유는 29절처럼 그 말씀에 권세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가지신 권위는 말씀 자체의 내용이 주는 권세입니다. 서기관들의 권세는 사람들이 세운 권세입니다.
사람들이 인정하는 권세입니다. 그 체계가 가지고 있는 권세입니다. 주님의 권세는 그 말씀 자체의 권세입니다.

그래서 그 말씀을 듣는 사람의 마음속에 계속적으로 살아 역사할수 있는 권세입니다.
저희들이 이 말씀의 권위앞에 설수 있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반석에 대해서 몇가지 말씀드리고 마치겠습니다.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이 반석위에 집을 짖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반석이 나옵니다.
첫번째 나온 반석은 모세가 때린 반석입니다. 이 반석은 하나님 입장에서는 맞은 반석입니다.
두번칠수 없는 한번만 맞아야 하는 반석입니다.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이 반석은, 잠시 말씀을 찾아보시겠습니다.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롬9:32, 개역한글)

행위를 따라서 이 은혜를 믿음으로 받지 아니하고 자기의 행위를 따라서 가는 사람들은 이 반석에 넘어질 것입니다.
그다음은 교회입니다. 교회에게 있어서 이 반석은 모퉁이 돌입니다.

6 경에 기록하였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7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벧전2:6-7, 개역한글)

<모퉁이 머릿돌>입니다. 교회의 사이즈와 그 범위를 결정하는 돌입니다.

그리고 이방세력에게는, 다니엘서에 나오는 신상이 있습니다. 머리는 금이고 가슴은 은이고 그 밑으로 동과 철과 철과 진흙이 섞인 신상이 나옵니다. 그리고 나중에 사람의 손으로 뜨지 않은 돌이 나와 그돌이 신상을 깰것입니다.
이방세계 세상을 하나님이 멸망시키시고 하나님 나라를 세우실것입니다.
그때, 이 돌은 주님이십니다. 사람의 손으로 뜨지 않은 돌입니다.

또 다시 보겠습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실때에도 돌입니다. 반석입니다.
이스라엘에게는 주님께서 재림하시게 되면 이런 돌이 됩니다.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그가 머릿돌을 내어 놓을 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찌어다 하리라 하셨고 (슥4:7, 개역한글)

주님께서 재림하실때 이스라엘에게는 머릿돌이 되십니다.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 (마21:44, 개역한글)

주님께서 재림하실때 열방 사람들을 심판하시는 돌이 될 것입니다.

10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찌니라
11 이 닦아 둔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고전3:10-11, 개역한글)

교회에게 주님은 반석이십니다. 주님이 기초 터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교회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믿는자의 마음속에 이루어진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의인들이 들어갑니다.

그 의는 바리세인보다 나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의로움처럼 의로워야 합니다.
이 말씀을 받는사람마다 그 마음이 가난해야 합니다. 애통해야 합니다. 그 의에 굶주려야 합니다. 핍박을 기뻐해야 합니다.

이 기준을 따라 우리가 살고 있습니까?
이렇게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듣고 있습니다. 이렇게 살고 있습니까?

주님께서 저희를 인도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마지막 때의 기준을 미리 알려주신 주님께 감사하게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