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이레 2022. 7. 10. 01:01
2016년 12월 22일 목요일

강사 : 한봉래 형제님

<마태복음 강해 35>

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마7:13-14, 개역한글)

22 예수께서 각성 각촌으로 다니사 가르치시며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시더니
23 혹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 저희에게 이르시되
24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눅13:22-24, 개역한글)

얼마동안 해왔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저희들이 공부하는 7장은 산상수훈의 일부분입니다.
그러나 산상수훈의 제목은 별다른 내용이 없습니다. 산상수훈의 뜻은 '예수님께서 산에서 하신 말씀' 입니다. 저는 이 제목이 적당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내용을 중심으로 마태복음 5-7장을 설명하자면 이것은 '구원복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세상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실것입니다. 이 하나님 나라는 세상의 어떤 나라와도 다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의 특징이 다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딀 첫번째 특징은 심령이 가난하고 의에 굶주리며 애통하며 우는 사람입니다.
누가 구원받은 사람인가로 시작합니다. 주님께서 참으로 구원받는 사람과 구원받지 않은사람과의 차이를 계속 설명해 오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이 말씀의 말씀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제가 생각하기로 앞으로 세번 말씀을 교제하면 산상수훈이 끝나게 됩니다. 말씀의 맨 끝에는 항상 초청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선택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것인지, 하나님 나라 밖에 있을것인지 선택하도록 요구하십니다.
이것은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흐름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모세오경의 마지막 책인 신명기에 보면, 먼저 애굽에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다 죽었습니다. 모세도 가나안에 못들어갑니다. 이제 2세대들이 가나안에 들어갑니다. 이 가나안에 들어가는  이스라엘의 2세대들을 위하여 모세가 말씀을 쭉 기록합니다. 창세기부터 어떻게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함을 받았고 어떻게 애굽에서 종이 되었고 하나님께서 긍휼이 여기셔서 그들을 어떻게 구원하셨으며 이제 약속하신 땅으로 집어넣으시는가, 하나님께서 행하신 위대한 일들을 기록합니다.

그리고 신명기 28장부터 모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내가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을 다 썼으므로 이제 너희들은 선택하라. 여기 생명과 사망, 축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 즉, 선택하라. 순종하여 생명을 얻을것인지 불순종하여 하나님의 저주를 자청할것인지 선택하라."
이것이 모세오경의 끝입니다. 여호수아도 그렇게 했습니다.

여호수아는 괭장한 사람입니다. 여호수아는 출애굽 2세대를 이끌고 가나안을 정복합니다. 정복하고 그는 왕이 되지않습니다. 그땅을 다 정복한 후에 그는 평범한 이스라엘 사람으로 돌아갑니다. 이것이 그가 위대한 이유입니다.
그리고 죽기전에 이스라엘 사람을 다 모아놓고 이렇게 요구합니다. "당신들은 선택하십시오. 여러분 생각에 하나님을 섬기는것이 좋아보이면 하나님을 선택해서 섬기고 우상이 좋아보이면 우상을 섬기십시오 나와 내집은 하나님만  섬길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수아의 마지막 대목입니다. 이런것은 또 있습니다.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당시 바알을 숭배하던 이스라엘에게 여호와 하나님이 참 하나님임을 입증합니다. 내기를 합니다. "하늘에서 불이 내려 응답하는 신이 참 신으로 하자" 그때 엘리야가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이 언제까지 머뭇거리겠습니까? 이제 선택하십시오. 바알이 참하나님인지, 성경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참 하나님인지 선택하십시오"

이제 예레미야가 선택하는것을 살펴보겠습니다.

8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또 이 백성에게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신다 하라 보라 내가 너희 앞에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두었노니
9 이 성에 거주하는 자는 칼과 기근과 염병에 죽으려니와 너희를 에운 갈대아인에게 나가서 항복하는 자는 살리니 그의 생명은 노략한것 같이 얻으리라
(렘21:8-9, 개역한글)

예레미야는 저희들이 알고있는대로 눈물의 선지자입니다. 그는 자기조국 이스라엘이 멸망할것을 예언했던 선지자입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나라의 멸망을 외쳐야 했습니다.
바벨론이 공격해 봤습니다. 그의 메세지는 일반적인 사람의 생각과는 다릅니다.
일반적으로 이스라엘이 생각하는 선지자 같으면 "너희들이 하나님을 의지하여 싸워라. 하나님이 너희편이다. 그들이 많을찌라도 두려워하지말고 싸워라"라고 할것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의 임무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아서 이렇게 말합니다. "항복해라 싸우지 마라.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에 대한, 불신앙과 우상숭배에 대한 징계다. 항복하라"라고 말해야 했습니다. 그는 이 말을 맨정신으로 할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눈물로 말했습니다. 그러나 메세지는 똑같습니다. "항복하라. 하나님의 뜻대로 항복해야 사낟. 너희들의 생각대로 싸우면 반드시 망한다"
이것이 예레미야의 메세지입니다.

예수님의 생애 가운데, 분수령을 이루는 사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오병이어의 기적입니다. 주님은 유대에서 사역하시고 갈릴리에서 사역하십니다. 그리고 오병이어의 기적은 갈릴리에서의 마지막 사역입니다. 이 기적을 끝으로 주님은 가릴ㄹ리를 떠나가실것입니다.
가룟유다를 죄외한 주님의 열두제자가 다 갈릴리 출신입니다.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라고 했던 그 지역입니다.

그 어둠에 있던 자들이 광명을 보았습니다. 이 가릴리를 떠나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주님이 베푸신 기적이 오병이어의 기적입니다. 떡 다섯개와 물고기두마리로 남자만 5천명이 먹었습니다. 여자와 아이를 합하면 15000명, 2만명 정도가 먹은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이 베푸신 기적중에 가장 많은 사람에게 혜택이 돌아간 기적입니다.
부인할수 없는 노랄운 기적입니다. 사람들이 이 기적을보고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이 기적의 끝이 어떻게 됩니까?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다. 내 말을 듣고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가 생명을 얻는다>
이것을 사람들은 "이 말은 어렵도다"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사람의 살을 먹는단 말인가? 우리가 식인종인가? 받아들잉수 없다" 이 말을 듣고 많은사람들이 주님을 떠나갔습니다.

그 기적 이후로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따랐지만, 이 말씀앞에서 사람들은 주님을 따르기를 그쳐버립니다.
더이상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리고 열두제자만 남았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또한번 물으십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그들이 원하면 갈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7장에서 선택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특징, 그 나라에 살고있는 구원받은 사람들의 특징을 말씀하시면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이제 선택하라 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 나라에 들어올 것인지, 아니면 자기의 생각을 따라 하나님 나라밖에 있을것인지 선택하라는 말씀이 <좁은문으로 들어가라>입니다.

다시 몇가지 저희들이 잘 아는것 몇가지를 설명하고 들어가겠습니다.
선택은 둘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넓은문, 좁은문입니다. 중간은 없습니다. 믿든지 안믿든지 천국이든지 지옥이든지 입니다. 가운데는 없습니다.

두번째, 좁은문은 복음이고 넓은문은 세상이고가 아닙니다. 그렇게 대조되어 있지 않습니다.
좁은문은 믿음으로 사는것이고 넓은문은 세상에서 방탕하게 사는것이 아닙니다.

좁은문은 복음입니다. 넓은문은 종교입니다. 넓은문은 바리세인입니다. 바리세인들이 부도덕하게 살았습니까? 아닙니다. 깨끗하게 살았습니다. 사람으로써는 그보다 더할수 없게 살았습니다. <너희 의가 바리세인과 서기관보다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갈수 없다>라고 하셨습니다.

바리세인과 서기관은 사람이 자기의 노력으로 이루어낸 최고의 도덕적 수준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세상에는 두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은혜의 길입니다. 하나님이 의롭다 하시는길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길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많은종교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이런말을 한다고 합니다. "이 종교를 다 조사하고 진짜 진리를 말하는 종교를 찾을수도 없고 어찌한다 말인가?"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종교들을 다 조사할수 있습니다. 세상에 있는 종교를 나누자면 이렇습니다.
1. 하나님이 의롭다 하시는 은혜를 받아들이는 종교(종교라고 하기는 그렇습니다만, '길'이라고 표현하겠습니다)가 있습니다.
2. 사람이 자기 행위로 하나님앞에 의롭다하는 길을 얻는길입니다.

그런데 놀라운것은 구원으로 가는길이 좁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좁습니까?

좁은 이유는 사도행전 4장에 그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이름을 주신적이 없다> 그러므로 구원의 길은 좁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을만한 단 하나의 길은 예수그리스도를 믿는것입니다. 이것이 좁은길입니다.

넓은길은 "그렇게 편협되이 말하면 어떻하냐?"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번에 우리나라를 방문하신 교황들이 하는말이 그것입니다. 넓은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것만이 구원받는 길이라고 그렇게 편협되이 말하지 마라. 그렇게 문자적으로 성경을 해석하지말고 비유적으로 해석하자"

다른 종교가 세상적으로 살자고 말하지 않습니다. 죄짖고 살자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우리가 다 같이 지옥 가자"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한가지 길을 제시합니다. 그리고 그길을 가야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만이 유일한 길이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좁은길입니다.

두번째로 좁은 이유를 보겠습니다.
누가복음 13장 22절을 보면 주님께서 예루살렘을 여행하시는것을 봅니다. 그럼 우리는 즉각 알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려고 여행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예루살렘에 가는 유일한 이유입니다.

예수께서 각성 각촌으로 다니사 가르치시며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시더니 (눅13:22, 개역한글)

그 가시는 도중에 각 촌에 다니시면서 말씀을 가르치시는 이유는 그들이 구원받을수 있는 길을 제시하시는것입니다.

혹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 저희에게 이르시되 (눅13:23, 개역한글)

그들중 한명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주님 구원을 얻는자가 왜 적습니까?"
이 동행하는 사람은 아마 예수님의 마음을 이해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자가 세상에 온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라>라고 하셨습니다.
죄인을 불러 구원을 얻게 하려고 주님께서 오신것입니다. 주님께서 그것을 위해 얼마나 애쓰시며 작은마을도 놓치지 않고  존하시며 수가성의 범죄한 여자도 찾아서 구원하시려고 하시는것을 그 동행하는 사람이 알았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말씀하시는 구원이 참된 구원임을 입증하려고 주님은 그토록 구원을 행하셨습니다.
하나님만 하실수 있는 기적을 행하셔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구원이 참된 구원임을 입증하셨습니다. 그런데 동행하는 사람이 보니 구원얻는 사람의 수가 많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주님께 뭍습니다. "주님 구원얻는 사람의 수가 왜이리 적습니까?"
주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우리가 아는것은 이것입니다. 주님은 생명책에 누구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지 아십니다. 명명백백히 아십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양을 알고 양도 목자를 아는고로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른다>

주님은 교회를 아시고 창세전에 교회의 수를 정하셨습니다. 그 수가 차면 교회는 휴거될것입니다.

그 주님께 묻는것입니다. "주님께서 모든것을 아시고 창세전부터 계획해온대로 구원을 행하시고 복음을 전하는데도 왜 구원받는 사람의 수가 적습니까?"

저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제가 정물 묻고 싶은것을 물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눅13:24, 개역한글)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것은 하나님께서 어리석은 인생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들어가지 못하는자가 많습니다. 이 말씀은 저희가 부서진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서 들어야 하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3년간 사역하십니다. 유대에서 사역하시고 갈릴리에서 사역하십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고 대속하셨습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신후 지금은 하나님 우편에 좌정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30세까지 평범한 인간으로 섬기셨습니다. 그리고 3년 사역하시고 돌아가셨습니다. 그 기간동안 몇명 구원받았습니까?

사도행전 1장에 의하면 예루살렘에 120명이 모여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에 보면 주님께서 믿는자들 500명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주님은 부활하신후 믿는자들에게만 나타나셨습니다. 믿지않는 사람에게는 나타나시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나타나신 곳은 갈릴리로 추정됩니다.

주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갈릴리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갈릴리로 가지 않고 다른곳으로 갑니다. 주님꼐서 부활하신 주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곳에 문을닫고 있었습니다. 그때 도마가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평안할찌어다"
그 다음주 도마가 있을때에 주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2주나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있는것입니다.

부활하신 후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갈릴리에서 나를 본다고 말하라"
주님은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보기를 원하셨습니다만, 제자들은 갈릴리로 가지 않습니다. 나중에는 갈릴리에 갑니다만 산에 있지 않고 바닷가로 고기잡으러 갑니다.
어째든, 갈릴리 사역에서 500명이 주님을 믿고 유대 사역에서 120명이 주님을 믿습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3년간 사역하신 결과입니다. 그 수가 많습니까?

우리는 이렇게 질문해야 합니다. "주님 왜 이렇게 구원받는 사람의 수가 적습니까?"

옛날엔 복음을 전하면 구원받는 사람들이 구원의 역사가 많고 그랬는데 왜 지금은 수가 적을까? 하고 고민하시지요?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좁은문으로 들어가길 힘쓰라>
이것은 그 숫자는 우리가 알바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숫자와 상관없습니다.

사람들은 숫자에 관심이 많지만 하나님은 숫자에 관심이 없습니다.
숫자는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정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두번째로, 몇명이 구원받는것이 중요한게 아니고 그 중에 내가 포함되었는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좁은문으로 들어가길 '힘쓰라'> 힘쓰라 입니다.

다시한번 보겠습니다. <힘쓰다> 라는 단어와 똑같이 쓰인 구절이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묘사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마라톤 선수, 경주자로 묘사 합니다. 또는 군인, 농부로 비유합니다. 고린도전서 9장에서 사도바울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상 얻기를 위하여 '애쓰라'고 합니다.
여기서 '애쓰는 것' 이 힘쓰다와 동일한 단어로 사용됩니다.

또 다른곳에서 디모데전서 6장 12절을 보면 사도바울이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선한싸움을 싸우라'고 하는 단어로 사용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구원은 쉬운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좁은 문'입니다. 구원의 문은 좁습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살아가는 길도 좁은길입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에 영생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의 길은 넓은문과 넓은길입니다. 길은 두가지 밖에 없습니다.

지역모임에서 우리들이 복음을 전할때 "구원은 쉽다. 믿기만 하면 된다"라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주님께서는 구원의 문을 좁은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구원의 문을 넓은문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믿기만 하면 된다"
그래서 뭐라고 합니까? "손드십시오" " 믿기만 하면 됩니다" 이것은 넓은 문입니다.
그래서 들어온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의, 성도의 좁은길로 가지 못합니다. 넓은문으로 들어왔는데 어떻게 좁은길을 가겠습니까?

믿으면 다된다고 했는데, 교회생활하라, 성경 읽으라 합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하겠습니까? 안합니다.
원래부터 구원받지 않은 것입니다. 구원은 좁은문입니다.

쓰는 예화 중 제일 나쁜 예화가 있습니다. 복음집회에 이렇게 말합니다. "누군가가 선물을 줍니다. 나오십시오. 받으십시오. 이렇게 거저 받으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복음을 전하면 안됩니다.
그렇게 해서 수많은 가짜들이 나옵니다. 천국에 간다고 확신하면서 지옥으로 가는 영혼들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좁은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 좁고 협착하여 찾는이가 적다고 하셨습니다.

복음도, 세상에는 가짜 복음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참된 구원의 복음을 듣는것도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좁은문으로 들어가는것도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좁은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하셨습니다.

정말로 성경적인 좁은문으로 들어왔다면 그에게는 싸움이 시작됩니다.
복음앞에 섰을때 그의 마음에는 싸움이 시작됩니다. 이 싸움 없이 구원으로 들어올수 없습니다.
성도님들 모두 구원받을때의 경험을 생각해 보십시오. "아 구원이 이것이군요. 네 믿습니다."하고 들어온 것이 아닙니다.
그때 내 마음속에 갈등이 시작된 것입니다. 내가 이것을 믿을것인지, 말것인지. 이제까지 살아온대로 살것인지, 그 습관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굴복할것인지 갈등이 있는 것입니다.

어떤분의 구원간증은 그 갈등이 1년 이상을 갔었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잠깐 생각해보고 "됐습니다"라고 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다른 예를 더 들어보겠습니다. 부자 청년이 있습니다. 이 부자 청년이 주님앞에 나아옵니다. 마가복음에 보면 그가 예수님을 보고 달려옵니다. 그리고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질문합니다. "내가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그런데 그가 주님이 제시한 좁은문을 통과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가 돌아갑니다.

이 사건을 놓고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것보다 어렵다" 이말을 듣고 제자들이 주님께 질문합니다.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수 있겠습니까?"

좁은문이라는 것은, 부자 청년이 가지고 있는 이런것들이 통과할수 없기 때문입니다.
첫번째는 '자기 의'입니다. "그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
두번째는 부자청년은 한손에는 자기의를 쥐고 있었고 한손에는 돈을쥐고 있었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과 돈을 겸하여 섬길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가 계명을 지킬수 있었던 이유는 돈때문입니다. 돈이 주는 여유로움 덕분에 그는 다른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큰 죄를 범하지 않고 살아오게 만든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네가 돈 없이도, 나쁜 조건속에서도 다른 사람을 사랑할수 있는지 봐야 한다"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의'를 쥐고는 절대로 통과할수 없습니다.
그가 영적으로 파산해서 마음이 가난해지기 전에는 절대로 통과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가난해지기 전에는, 세상에서 하나님과 대적할수 있는 유일한 신이 돈입니다. 돈을 사랑하는것이 일만 악의 뿌리입니다.

오해 없으시기 바랍니다. 일을해서 돈을 버는것을 반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상적인 직장생활을 반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돈이 모든것을 해줍니다. 그 돈을 놓지 않고 구원의 문을 통과할수 업습니다. 그래서 좁은문입니다.

3 요한이 요단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침례를 전파하니
4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바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5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6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함과 같으니라
(눅3:3-6, 개역한글)

우선 여기까지만 읽겠습니다. 침례요한은 죄용서함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이 죄용서는 '회개'없이는 없습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을수 있지만 '회개'하지 않고서는 받을수 없습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손을 가지고 구원을 받을수 없습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이 회개를 비유적으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주의 길을 예비하라>
주님께서 한사람의 마음에 들어가는 길이 평탄해야 합니다. <골짜기가 메워져야 하고 산이 평탄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할수 있습니다.

죄용서를 받으려면 믿은과 회개로 받는것입니다. 회개는 무엇입니까?
침례요한은 이사야의 말을 들어 비유적으로 말했습니다. 골짜기가 메워져야 합니다. 골짜기는 자기만 알고 있는 죄입니다. 다른사람한테는 알려지지 않은 죄입니다. 그러나 내 양심이 알고있는 죄입니다.
그 죄를 하나님의 진리의 빛앞에서 죄라고 부르고 죄인임을 시인하고 그 죄때문에 지옥갈수밖에 없다는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렇게하지 않으면 그가 회개한것이 아닙니다.

<산이 낮아지고> 이것은 구원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자기 생애의 꿈이 있었습니다. 자기 생애의 가치관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그는 내려놔야 합니다. 여전히 구원받기전에도 구원받은 후에도 여전히 동일하게 자기 인생을 사는것은 불가능합니다. 이 문은 자기인생을 가지고, 자기 죄를 가지고서는 들어갈수 없는 문입니다.

<굽은것이 곧아지고 험한것이 평탄하여 질> 이것은 전부 하나님의 말씀을 외곡한 것입니다.
자기의 생각과 세상의 경험을 가지고 진리되신분을 거부하고 오해와 편견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설수 없습니다. 이 모든것들이 순종되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구원받을 때 이 좁은길로 통과하지 않고 넓은길로 온것입니다. 그런사람들은 구원받은 성도의 삶을 살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문도좁고 성도의 삶도 좁은길이기 때문입니다. 이세상을 살아가는 성도의 삶이 어떤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구원받은 후 구원받기 전과 똑같이 살면서 교회다니고 성경읽고 기도하는것이 추가되는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구원이 아닙니다. 구원은 거듭나는 것입니다. 구원은 변화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달라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들어온 문이 넓은 문이라면, 안됩니다.
구원받을때 이러한것이 처리 되어야 합니다. 자기 인생을 내려놔야 합니다.

이것이 제일 나쁜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위하여 아름다운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럼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래, 그럼 나도 내 인생을 아름다운 계획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님도 그런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요? 내가 가진것보다 더 좋은거라면 이루어 주십시오'
이것은 아닙니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시작할때, 그가 있었던 부텐부르크의 수도원에 95가지의 질문을 합니다. 그 당시 교황이 사실은 베드로 성당을 짖고 싶었습니다. 지금 가봐도 어마어마한 성당이긴 합니다. 문제는 돈입니다. 돈을 걷기 위해 면죄부를 판매해서 걷으려고 하였습니다. "이 면죄부를 사면 지옥에 있는 당신 아버지가 천국으로 가고 연옥에 있는 당신 어머니가 천국으로 간다" 라고 하면서 판매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 부모님을 위해서 샀습니다. 그러고 있는 사회에서 루터가 질문한 것입니다.
"죄 용서는 무엇으로 받습니까? 구원은 어떻게 얻습니까?"

그리고 대답한 것입니다. "믿으로만 받습니다. 돈으로  얻는것이 아닙니다. 선행으로도 아니고 행위가 아닙니다." 그렇게 종교개혁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때 루터가 했던 95가지의 질문 중 하나가 이것입니다.

<자기를 미워하지 않는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자기가 살던 그대로 그길을 계속 걸어가면서 구원받았다고 할수 있습니까? 이것은 주님께서 말하시는 좁은문이 아닙니다.

사단이 지어낸 거짓말 중에 하나가 <구원은 쉽다> 입니다.
구원은 쉽습니다. 죄인중의 괴수였던 사도바울도 구원받을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쉬운것입니다. 그러나 구원받으려면, 그가 올바른 구원의 문앞으로 왔으면 그에게는 전쟁이 시작됩니다.

이제 그는 갈등하기 시작합니다.
이제 내가 주인인 인생을 살것인지, 성경이 말하고 있는 진리의 빛을따라 내 생애를 살것인지 결정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특징들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요구하십니다.
"하나님 나라 안으로 들어와라 아니면, 하나님 나라 밖에 있을 것이다"

이 문을 통과하지 못한사람이 부자청년이며, 또 발람과 같은 사람은 통과할수 없습니다.
발람은 거짓 선지자입니다. 민수기에 나옵니다. 유다서에서 그 이름을 들을수 있습니다. 돈을 사랑하여 하나님의 의지를 타협했던 사람입니다.

빌라도가 들어갈수 없었던 문입니다. "진리가 무엇이냐?" 라고 물었지만 그가 들어갈수 없었던 좁은 문입니다.

오해를 막기 위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것은 행위로 구원받는다는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앞에 서서 우리의 심령이 가난해 져야 합니다. 그리고 애통해 해야 합니다. 내가 스스로 이 무능ㄹ 통과할수 없음을 애통해 해야 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는 하나님의 의를 사모하고 그 하나님의 의를 받아야 하겠다는 사명감이 있어야 합니다.

그때, 이 부서진 사람, 말씀을 통해 자신의 실체를 정확히 본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십니다.
이것없이 구원받을수 없습니다.

구원은 은혜이지만, 하나님은 단 한번도 거룩을 타협하시면서 구원을 베푸신적이 없습니다.

우상을,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한채, 문으로 들어올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적이 없습니다.
그 마음속에는 변함없이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에 대해서 반역적인데 구원받을 수 있다고요?
여전히 자기 중심적이고 하나님을 내몰고 있으면서, 몇가지를 알고 믿는다고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는것은 오해하는 것입니다.

57 길 가실 때에 혹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58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59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60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61 또 다른 사람이 가로되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 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
62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눅9:57-62, 개역한글)

주님을 쫒겠다고 하는 사람 셋이 있습니다.
어떤사람이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고 싶다고 의사표현을 한것입니다. 이 사람이 누구냐에 대한것은 다른 복음서를 보면 서기관으로 나와 있습니다.

그사람에 대한 주님의 대답을 보면 이렇게 이해할수 있습니다. 그사람은 감정적으로 흥분해서 주님을 믿고자 한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 놀라운 기적을 보고 주님을 따르고 싶다는 충동이 생긴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사람의 속을 아십니다. 우리는 사람의 겉의 행동의 변화를 보고 그사람을 분별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사람의 속을 아십니다. 즉각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이 길이 어떤 길인지 아느냐? 여우나 새만도 못한 삶을 사는 길이다 네가 생각하는 짐승만도 못한 삶을 사는 길이다"

다시 말하면 그는 일시적으로 흥분해서 주님을 따르고자 했지만, 마태복음에 보면 씨뿌려진 땅의 비유에서 보면 돌밭에 뿌려진 씨인 것입니다. 돌밭에 뿌려진 씨는 말씀을 듣지만 환란이나 핍박이 오면 넘어져 버립니다.
구원받지 못한 밭입니다. 이사람입니다.

그가 일시적으로 흥분해서 주님을 따르겠다고 말했지만 그는 가난을 견실수 없는 밭입니다. 그는 세상에 사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길이 무엇인지 알고 결정해야 한다고 말씀하신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주님께서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좆으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그가 "주님 가서 부친을 장사하고 오겠습니다" 라고 합니다.
주님께서는 성경에서 단 한번도 장례식을 반대하신 적이 없습니다.

주님은 나사로의 장례식에 참석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사람이 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장례식에 갔다오겠다는 것을 반대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아버지가 돈이 좀 있으신데, 내가 아버지를 모시고 돌아가시면 유산을 받아서, 그때부터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라고 말한것입니다. 주님께서 거부하셨습니다.
<죽은자들로 죽은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주님의 요구는 이것입니다. <이 세상에 속한일로 세월을 보내지 말고 너는 내가 부른 고귀한 일을 해야 한다>
돈을 가지고 주님을 따르는것이 아닙니다. 돈이 있다고 쉬운길도 아닙니다. 돈이 없다고 못따르는 길도 아닙니다. 돈은 필요한 만큼 주님께서 반드시 주실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을 따르는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것입니다. <내가 너를 귀한 일로, 고급한 일로 불러냈다>

이 말을 듣고 다른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쫓겠습니다만, 먼저 가족과 작별하게 하십시오"
그는 이렇게 제안한 것입니다. "아버지 돌아가실때까지 세월을 끈다거나 하지는 않겠습니다. 대신 가족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가족들이 주는 마지막 전별금, 여비를 받겠습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않다>
주님께서는 타협책을 거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이 제안하는 여러 타협책을 거부하셨습니다. 좁은길 외에 좁은 문외에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은 없습니다.

우리가 좁은 문으로 들어온 후에 그리스도인으로써 좁은길을 갑니다. 이 길이 좁은 이유는 세상에서 세상이 말하는 여러 평안함과 안락을 즐기는 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돈을벌고 즐겨하고, 안믿는사람과 같은길을 가는것이 아닙니다. 구분된 길입니다.

지금제가 읽지 않았습니다만, 어떤곳에서는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 <가족을 나보다 사랑하는 자도 나에게 합당치 않다>
심지어는 자기 목숨은 얻는자는 읽어버릴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요구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때에만 요구하고 지금은 요구하지 않으십니까?
그런데 구원받을때 이 문을 통과하지 않습니다. 구원받을때 구원만 받고, 그리고는 성도의 길을 못갑니다. 별별 핑계를 대며 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때, 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구원 받아놓고 그러면 안됩니다." 아닙니다. 그는 자기가 믿겠다고 했던 고백과 반대로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열매를 보고 그를 평가합니다.
그는 자기의 말을 자기의 삶으로 부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구원은 받은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는 구원받았다는 말을 자기의 삶으로 뒤집고 있습니다. 그는 좁은문으로 온것이 아닙니다.

그다음,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려운 이유 첫번째는, 세상에서 핍박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25 허다한 무리가 함께 갈쌔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눅14:25-27, 개역한글)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제자는 구원받은 성도입니다.
구원받은 성도 중에서 특별히 헌신된 사람을 제자라고 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28장에서 <너희는 모든족속으로 제자를 삼아>라고 쓰여 있습니다.
모든 족속으로 헌신된 성도를 삼는것이 아닙니다. 모든사람으로, 인종에 관계없이 구원받게 하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가족을 더 사랑하면 구원받을수 없습니다. 자기 목숨이 더 소중하면 구원받을수 업습니다. 구원받으면 세상에서 핍박받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에서 핍박받지 않는 성도의 삶은 없습니다. 요한복음 16장에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이 너희를 죽이면서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고 할것이다> 이것이 예언되어 있습니다.
핍박하면서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길이다 라고 핍박합니다.

구원받은 성도에게 어려움이 있는 것은 첫번째, 세상으로부터의 핍박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구원받은 후에 핍박이 반드시 있습니다. 이것을 생각하고 믿어야 합니다.
구원받은 후에 세상에서 칭찬하지 않습니다. 물론, 이러한것이 세상에서 없다는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세상에서 미워합니다.

그 핍박을 기꺼이 받는길을 가겠다 라고 하고 믿어야 합니다.

세번째, 구원받은 후 성도로써 잘못하면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징계할실 것입니다.
이것이 베드로전서 4장 17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집에서 먼저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심판하기 전에 교회를 먼저 심판합니다.
성도들을 먼저 다루십니다. 믿지않는자들은 나중에 다루실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말씀을 어길때마다 반드시 하나님께서 징계하실것입니다.
그 예가 바로 고린도전서 3장 11절입니다. 그들이 만찬예배를 잘못했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결과가 있었습니까? 그들가운데 병든자와, 약한자와, 심지어 잠자는 자까지 있었습니다.

성도의 길은 말씀에 어긋날때마다 징계받는 삶을 삽니다. 그리고 징계가 없으면 가짜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그 길을 가는것입니다. 세상 핍박을 받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잘못할때마다 근실히 책망을 받을 것입니다. 그길을 가는것입니다. 이 길이 쉽다고요? 좁은길입니다. 그래서 안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돌아가시겠습니다.
누가복음 13장 23절에서 질문했습니다. "왜 적습니까?"
24절 주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좁은문으로 들어가길 힘써야 한다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그들이 복음을 듣습니다. 구원에 대해서 갈등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 좁은 길을 가지 않기로 결정합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는길을 가기로 결정합니다. 자기 가족을 부인하는 길을 가지 않기로 결정합니다. 그리고 자기 목숨을 잃는길을 가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25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저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26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27 저가 너희에게 일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 가라 하리라
(눅13:25-27, 개역한글)

그리고 집 주인이 이 문을 닫습니다. 때가 되면 주님께서 이 문을 닫아버리십니다. 열자가 없습니다. 그들은 밖에서서 문을 두드리며 "열어 주십시오"라고 합니다.
왜 열어달라고 합니까? 그들은 뭔가 착오가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가 안에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들은 속은 사람입니다. 그들은 구원을 넓은 문으로 들어온 사람입니다. 좁은문으로 통과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구원의 복음을 듣고 저희들이 제일 먼저 생각한 것은 '우리 안에서의 내적인 싸움'입니다.
이 길을 갈것인가? 왜 이길을 가야 하는가?
이 세상에서 핍박받고, 인간관계를 망가뜨리고 내 스스로 어려움이 되는 길을 왜 가야 하는가? 라는 내적 갈등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 의지와 자기의 힘으로 힘으로 이길을 갈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자기 속에 이와같은 길을 가기 싫어하는 자신을 알고 스스로 놀랍니다. 내가 구원을 원하는 줄 알았더니, 주님을 찾는 사람인줄 알았더니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그는 절망속에서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세리처럼 구합니다.
자기가슴을 치며 <주님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저는 죄인입니다>
그리고 이 기도를 주님께서 반드시 들으십니다.

자기의 하나님 앞에서의 상태를 보고 절망한 사람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십니다.
그런데 여기까지 오지 않은 사람, 이것을 하지 않은 사람은 자기가 구원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의 숫자가 많습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은 적습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은 원래부터 적습니다.

그동안 많았던 것은 넓은문으로 들어가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뭔가 착오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열어주십시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렇게 말하십니다. <나는 너희가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

그들은 주 앞에서 먹고 마셨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주님이 기적을 행할때 그 옆에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을 전하실때에 듣는 청중 중에 하나였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주님과 연합되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죽으심에, 주님의 새명과 연합되지 않았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처럼 <이제는 내가 산것이 아니요, 내안의 그리스도께서 사신것이라 이제 내가 사는것은 나를 사랑하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안에서 사는 것이라>라는 대답을 그들은 할수 없습니다.

그들은 압니다. 복음이 무엇을 요구하는지도 압니다. 그러나 좁은문을 통과하지 않고 좁은길로 가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런사람을 만들어낼수 없습니다. 주님은 이런사람을 만들어내지 않았습니다.

교회가, 주님이 원하셨던 주님이 이세상에 오셔서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주님은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을 보고 우셨습니다. 예루살렘을 향하여 우셨습니다. <암닭이 병아리를 그 날개아래 모음같이 내가 너희를 모으려 한것이 몇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주님은 문을 넓히지 않으셨습니다. 길도 넓히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상산수훈의 마지막 결론입니다. 주님께서 말씀을 전하신 이후에 초정하셨습니다.

이길을 오라, 이제 심령이 애통한 자가 되라

자기가 죄를 짖고 있으면서, 그 죄때문에 괴로워하지 않는 사람이 되지말라.
그 죄를 극복할수 없다는 것을 알고 마음이 낮아진 사람이 되어라. 그리고 하나님의 의로움을 밥먹는 것보다 더 중히 여기는 굶주린 자가 되라고 초청하시는 것입니다.

이 길은 넓은길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길만이 영생으로 인도하는 길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은 쉬운길이 아닙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은 세상에서 미움받는 길입니다.
내가 잘못하면 하나님께 징계받는 길입니다. 이세상의 길을 거슬러 올라가는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길을 기쁨으로 가는사람들이 나옵니다. 주님의 멍에를 메고 주님의 영광을 보고 주님의 힘주심과 주님의 능력을 힘입어 가는 사람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여서 교회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들어오셔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구원에 대해서, 주님께서 요구하신것에 대해서 정확하게 성경적으로 이해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그때, 우리가 그길의 끝에서 주님을 뵈올것입니다.
좁은 길의 끝에 계신 주님을 뵈올것입니다. 넓은문,넓은길로 가면 주님을 볼수 없습니다.

이 문은 자기의를 가지고 통과할수 없습니다.
부서지고 애통해하는 마음만 가지고 통과 합니다. 주님외에 어떤것도 필요치 않다고 하는 마음만 들어갑니다.
주님외에 다른것을 붙잡고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좁은문입니다. 좁은길도 마찮가지입니다.

성도로써의 삶이 주님만 의지하며 가는 삶입니다.
세상의 오해와 조롱속에서 가는 것입니다.

세상이 싫어하는 것이 딱 두가지 입니다. 하나는 주님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이 나를 인하여 너희를 미워할 것이다>
두번째는 '의'입니다. <의를 인하여 핍박을 받는자는 복되다> 하나님이 의롭다 하시는 이 의를 싫어합니다.
인간이 만든 의는 좋아합니다. 우리가 다 이길을 가서 주님앞에서 칭찬을 받는 그런 성도와 교회가 될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