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강단말씀 요약글 모음/한봉래 형제님(요약)
마태복음 강해 32 <염려말라>
박이레
2022. 7. 10. 00:59
2016년 10월 9일 일요일
강사 : 한봉래 형제님
< 마태복음 강해 32>
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28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마6:25-34, 개역한글)
저희들이 읽고 있는 마태복음 6장은 보통 산상수훈, 산상보훈이라고 명명되어진 주님의 말씀중의 일부입니다.
주님께서 지상에서 3년 반 공생애 사역을 하실때 초기에 하신 말씀입니다.
산상수훈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인 메세지였습니다.
잘 아시는대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그 당시 많은 유대인과 종교인들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십계명에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살인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계명을 범하지 않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산상수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미워하는자마다 살인하였느니라>
십계명 중 하나로 <간음하지 말라>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 말씀을 듣는 유대인들 중 상당수 유대인들은 간음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간음 하였느니라>
이 말씀이 그들에게 어떤 충격으로 다가 왔습니다.
주님은 산상수훈에서 하나님의 기준을, 새로운 기준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구약에서 약속된 기준을 분명하게 제시하신 것입니다.
이제 주님께서 말씀하시다가 물질에 관한 주제로 바꾸셨습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충격적이어야 합니다.
물질과 돈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태도가 어찌해야 하는가 주님께서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제가 잠시 짧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저희들은 물질주의적인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돈이 이토록 큰힘을 발휘한 시대가 없습니다. 이 시대는 돈이 최고인 시대입니다.
돈이 있으면 다른것들이 다 따라옵니다.
이 세상 이야기입니다만, 어떤분은 우리나라를 '삼성 공화국'이라고 부릅니다. 권력은 바뀌어도 재벌들은 바뀌지 않습니다.
이런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성도들도 우선순위 1번이 직장입니다.
왜 직장입니까? 직장은 돈을 주기 때문입니다. 직장에서 짤릴까봐 직장에서 잘못될까봐 염려하고 삽니다.
직장이 결혼보다 중요합니다. 아이보다 중요합니다.
다시말하면 돈이 사람보다 중시되는 시대를 삽니다.
돈을벌기위해 직장생활을 합니다. 결혼하면 아이가 생깁니다. 물질주의의 사회에 원치않는 아이가 침입해 들어옵니다.
그래서 이 아이가 돈을 버는데 방해되지 않도록 돈으로 아이를 키우기 시작합니다.
우리들의 삶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깨어있는 시간의 상당한 부분을 돈에 대해서 걱정하며 삽니다. 누구나 걱정하며 삽니다.
써야 할것, 카드 결제대금은 돌아오는데, '어떻게 그 돈을 마련할수 있을까' 하는 것이 우리삶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삽니다.
그리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죄다>
어떤 분이 이런말씀을 하셨습니다. "걱정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의 생각속에 흘러가는 작은 시냇물이다. 그러나 이 걱정이 홍수를 이루게 되면 나머지 모든 생각들이 다 익사해 버린다"
이런 경험을 저희들이 개인적으로 다 한적이 있을 것입니다.
이와같은 상황속에서 주님을 말씀하셨습니다.
살인하지 않은 사람에게 "미워만 했어도 살인자이다"라고 말씀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돈을 걱정하는것은 그리스도인답지 않다>
그리스도인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물질에 대해 걱정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물질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는사람이 그리스도인 입니다. 이것이 주제 입니다.
문맥을 살펴보겠습니다.
19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20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21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22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23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마6:19-24, 개역한글)
물질에 대해서 주님께서 두부분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첫번째 부분에서는 보물에 관한 부분입니다.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두번째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라고 하십니다.
이 두 주제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앞의 주제를 다시 복습하며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보물이라는것은, 우리들의 삶에 기본 생계비가 있습니다. 사람은 먹어야 삽니다. 그래서 쌀을 사야하고 반찬을 사야하고, 거주지를 마련해야 합니다.
사람이 먹고 자고서만 살수 없습니다. 이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최소한의 필요경비가 있습니다. 그것이 최저임금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최소한의 필요이상으로 돈을 주십니다.
넉넉하게 주십니다. 그랬을때, 이 남는 부분을 성경에서는 보물이라고 부릅니다.
쓰고 남은 것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것을 저축해 두지 말라>
남는돈을 우리는 저축해 두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서 입니다.
걱정도 믿음의 일종입니다. 걱정을 부행과 재앙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비하려 저축하려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것을, 쓰고 남는것을 하늘에 투자하라>고 하십니다.
주님께서 물질을 주시고 남는부분은 주님이 왜 주셨는가를 생각하고 주님이 주신 목적대로 써야 합니다.
'무슨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저축해 두지 말라' 이것이 첫번째 가르침 입니다.
그래야 할 이유 세가지를 주님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첫번째, 하늘에 쓰면 내마음이 그곳에 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에 투자하면 그 일에 대해서 관심을 갖습니다. 은행에 투자하면 내 마음은 항상 주식에 가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주님께서 주신 돈을 주님께 투자하면 나는 그일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되고 기도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늘에 투자해야 합니다.
두번째,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의 영적인 눈이 어두워지기 때문입니다.
세번째, 주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순전한 마음, 온전한 마음으로 섬기는 것을 받으시지, 두마음을 받지 않으십니다. 그것이 보물에 관한 교훈입니다.
그리고 나서 두번째 주제로 넘어오십니다.
우리가 살면서 필요한 기초 비용이 있습니다. 우리가 먹고 살려면 먼저 쌀이 있어야 하는데 쌀을 살 돈이 없을때 어떻게 하냐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여섯번 말씀하십니다. <염려하지 말라>
염려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주님은 세가지를 드십니다.
1. 아버지 하나님이 너희를 돌보고 계시기 떄문이다.
2. 염려하는것은 믿음과 배치된다. 그것은 이방인들의 사고 방식이다.
3. 그것은 지혜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일일은 내일 염려하라.
기본적으로 하나님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이세상에서 먹고 자는것으로부터 해방시키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위에것을 찾으라> <너희는 하늘을 보라>
<이세상의 너희들의 삶은 하나님인 내가 책임진다. 내가 책임지는 것을 너희는 염려하지 말라. 이세상에서 어떻게 살것을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서 살라>
이것이 성도의 삶의 영적인 원리 입니다.
이 원리가 우리의 삶을 바꿔내야 합니다. 이 원리를 넘어오지 않으면 영적으로 살수 없습니다. 항상 세상일에 발목이 잡혀 영적인 일을 감당할수 없습니다. 겨우 집회에 나오는것에서 주님은 우리를 해방시키십니다.
이땅의 것을 염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하십니다>
하나하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친히 이세상의 삶을 돌보신다는 것을 주님은 세가지 예를 드십니다.
첫번째는 새입니다.
하나님이 새를 창조하실 때에 새를 만드신 후 "나는 너를 만들었으니 먹고 사는것은 네가 해라"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새에게 생명을 주셨을 뿐 아니라 그 새가 생명을 유지할수 있는 식량을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까마귀 새끼가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먹을 것이 없어서 오락가락할 때에 그것을 위하여 먹을 것을 예비하는 자가 누구냐 (욥38:41, 개역한글)
까마귀 중에 새끼라고 되어 있기 때문에, 아마도 어미를 잃은 새일수 있습니다.
새들도 자식들이 자립할수 있을때까지 어미새가 길러냅니다. 자연계는 보통 정글이라고 합니다. 인간의 세계와 자연계는 다릅니다. 아마도 불행한 사고로 어미새가 죽습니다. 그랬을 때 이 새끼새가 먹을것이 없어서 오락가락할때 이 까마귀 새끼에게 먹을것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들짐승과 우는 까마귀 새끼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도다 (시147:9, 개역한글)
주어는 8절에 있습니다. <저가> 저는 누구입니까? 7절에 나와 있습니다. <여호와>
여호와 하나님께서 울고 있는 까마귀 새끼에게 먹을것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생켱체를 창조하셔서 나머지는 네 책임이다라고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생명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 생명을 주셨을 때 그 생명이 유지되도록 까마귀에게 먹을것을 주시는 하나님 이십니다.
이제 우리입니다. 사람을 이세상에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제 네가 알아서 살아라' 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를 태어나게 하실 뿐 아니라 우리의 삶에 복지에 공급하시고 채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새들에 대해서 조금 더 설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새들에게 본능을 주십니다. 먹을것을 찾아내고 먹을수 있는 본능을 새에게 넣어주셨습니다.
새는 본능을 따라 먹을것을 찾아냅니다. 그리고 벌레를 만나면 본능적으로 이것이 먹을것임을 압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만족해 하며 삽니다.
이 새들이 사람들에 대해서 비난합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나 있는가 말합니다.
어떤 새도, 최고의 새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지 않았습니다. 어떤새도 영원한 나라에서 하나님과 함께 영광을 누리지 못할것입니다.
어떤 새도 주님께서 처소를 예비하고 데리러 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도는 아닙니다.
성도는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창조되고 구속받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영원한 나라에서 하나님을 찬송할 자로 선택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데려가기 위하여 공중에 오실것입니다.
<하물며 우리일까 보냐>
새를 먹이시는데 우리를 안먹이시겠습니까? 염려하지 마십시오.
이것도 아까 말씀드린 원리입니다.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목숨을 주신분이 그 목숨보다 작은 음식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인체를 주신분이 그 신체를 입을 옷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이를 걱정하는것은 합리적이지도 않고 우스꽝스러운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하루종일 돈 걱정을 합니다.
평생동안 그 걱정에 매여 종노릇 하다가 하나님의 나라와 의는 구하지도 않고, 새만도 못하게, 들에 핀 들꽃만도 못하게 살다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이 우리에게 충격을 주고 우리의 삶의 원리와 구체적인 것을 바꿔내야 하는 것입니다.
두번째, 27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마6:27, 개역한글)
요즘은 키를 한자나 더할수 있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성경을 보시면 이 '키'에 줄을 그어놓고 작게 목숨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키를 목숨으로 바꿔보겠습니다.
목숨을 염려함으로 자기 목숨을 한시간이라도, 일초라도 연장할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 합니다. 오래 살고싶어 합니다.
그래서 여러가지 장수할수 있는 방안을 생각해 냅니다. 요즘은 사람들이 다 비타민과, 건강식품을 먹습니다.
그리고 정기 건강검진을 합니다. 저는 그것을 반대하지 않습니다.
북한의 위대한 지도자는 평생동안 비행기를 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죽을까봐 염려하기 때문입니다. 정적이 비행기를 격추시켜 자기가 죽을까봐 기차만 타고 갑니다. 사람들이 자기 목숨을 염려합니다.
그러나 구약에서부터 말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며 또 그에게 부종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시니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하리라 (신30:20, 개역한글)
하나님이 우리의 장수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자기의 수명을 다하고 살아갈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면 우리는 재앙으로 인해서 죽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축복입니다.
그가 주님을 순종하면 어떠한 불행도, 사고도 그를 덮치지 못할 것입니다. 그것이 구약의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수한을 정해놓으셨습니다. 사람이 자기의 수명을 일분 일초라도 연장하지 못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이 정하신 충분한 시한까지 사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약으로 오면, 장수할수 있는 딱 한가지의 방법이 있습니다.
<자녀들아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약속에 있는 첫 계명입니다. 이 말씀을 순종하는 자녀는 장수할 것입니다. 장수하는것이 90세 100세를 산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정해놓은 수한을 다 살다 갈것입니다. 사고를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암에 걸리지 않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오래사는 것을 원치 않고 영적인 삶,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염려함으로 자기 수한대로 사는 사람을 보았느냐? 염려함으로 자기 수한대로 살지 못한다. 그러므로 염려하지 말라>
어떤 사람의 수명은 사람이 연장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목표를 가지고 정해 놓으셨습니다.
세번째는 옷입니다.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마6:28, 개역한글)
옷에 대해서는 몇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들이 대형마트를 가보면 많은 옷들이 있습니다. 그 종류가 어마어마합니다. 특히 여성들을 위한 옷은 굉장히 다양합니다. 이것은 죄악입니다.
디자인이나 패션은 죄악입니다. 특히 보면 한국사람들이 옷을 잘 입고 다닙니다. 중국에 가보면 다들 후줄근하고 낡은 옷을 잘입니다.
그래서 다른나라 사람들은 한국사람들이 전부 연예인인줄 압니다. 그정도로 한국사람들이 옷을 잘 입습니다.
외국에서 팔리지도 않는 그 비싼 등산복이 우리나라에서는 100만원 200만원하는 등산복이 뒷산 가기 위해서 팔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특별히 이부분에 있어서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떤 분위기에 자기가 초라한 옷을 입고 어울리지 않는 상황에 처할까 염려합니다.
이 상황들을 알고 디자인 회사들이 그렇게 우리들의 머리들을 공격해 갑니다.
옷에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들이 자기의 외모를 위해서는 그렇게 투자하면서 속사람을 위해서는 투자하지 않는다> 이것이 성경의 비난입니다.
3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4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벧전3:3-4, 개역한글)
사람의 마음이 온유하고 안정되 있고 영원한 것을 가지고 있어야 그것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옷이 아름다운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비싼옷을 입으면 벌써 다릅니다. 사람의 수준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학교에서 벌써 학생들이 유명한 메이커의 잡바를 입지 않으면 도태됩니다. 이 모든것을 어른들을 보고 배운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이세상에 사셨던 가장 아름다우셨던 우리 주님은 아무것도 가지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여자가 낳은자 중 가장 위대한 이라 부름을 받았던 침례요한은 낙타 털옷을 입었습니다. 그것은 패션이 아닙니다.
이런면에서, 옷에 대해서 도전 받아야 합니다.
옷을 사기 위해서 가게에서 수많은 돈과 시간을 들여서 찾아내는 것에 대해서 반성해야 합니다.
내 속사람이 주님을 닮아가는 것에 대해서는 투자하지 않으면서 그런것에 대해서는 감각도 없으면서 세상에 투자해서는 안됩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름다운 것은 하나님만이 주신다>
28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마6:28-29, 개역한글)
이 백합화는 길가에 피어있는, 주님께서 말씀하실때 길가에 피어있는 들풀이었습니다. 이 들풀을 보시면서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솔로몬이 입었던 옷이 이 들풀보다 못하다>
솔로몬이 얼마나 영광을 누렸던 사람입니까? 당대 최고의 의상 디자이너가 그의 옷을 만들고 솔로몬이 입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평가를 보십시오.
우리의 생각에는 "하나님 아닌데요? 솔로몬의 옷이 훨씬 좋은데요?" 할수 있습니다.
이것은 가치가 다른것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쓸수 있는 모든 자원을 다 동원해서 자기를 입힌다 할찌라도 하나님이 사람을 위하는 것과는 비교할수 없다>
심지어 내일 곧 아궁이에 던져버릴 그 작은 풀에게 하나님이 하시는 것과 사람이 자기를 위하여 하는 어떤것과도 비교할수 없는 것입니다. 아름다운것은 하나님에게서만 나옵니다.
아름다움의 기준은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그렇게 말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기까지 세가지 예를 들었습니다. 1. 공중의 새 입니다. 그는 창고가 없어도 새들은 그낭 먹은 벌레를 먹고 만족합니다. 창고를 만들어 벌레를 저축해 두지 않습니다.
2. 사람의 목숨도 사람의 염려로 1초도 연장시킬수 없습니다. 3. 들의 백합화가 사람의 옷보다 낫습니다.
세가지를 들어서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돌보고 계시다. 너희는 얼마나 더 하나님께서 돌봐 주시겠느냐?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 이십니다.
7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8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9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10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마7:7-11, 개역한글)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의 경험을 봐라" 부모가 자녀들을 위해서 얼마나 헌신적으로 희생했는지 저희들을 잘 압니다. 그런데 하물며 하나님은 어떠시겠습니까?
그리고 인간은 악하고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십니다. 전능하시고 선하시고 사랑이십니다.
그분께서 자녀인 우리에게 얼마나 좋은것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 온 우주가 자기것인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공급하고 계신데, 왜 염려합니까? 왜 자기가 하려고 합니까?
<하나님께서 너희를 먹이게 하라> 입니다.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찌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시34:10, 개역한글)
사자가 동물들의 왕입니다. 특별히 젊은 사자는 굶주릴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이 자연세계는 어려워 졌습니다. 그래서 그 젊은 사자라 할찌라도 먹을것을 구하지 못하는 어려움이 있을수 있습니다. 래서 동물 세계는 잔인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의 경우에는 그런 경우가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 할찌라도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를 먹이시는데는 아무런 하자가 없습니다. 이것을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약간 비틀어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들풀과 새들이 인간들의 삶을 보면서 이렇게 대화 할 것입니다.
"저 사람들은 왜 저렇게 걱정이 많대?" "저 사람들은 왜 그렇게 바쁘지?"
새와 들풀과의 대화입니다. 대답이 무엇이겠습니까? "저 사람들은 우리와 달리 하늘의 아버지가 없대, 그래서 저렇게 산대"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이 보이고 있는 행태입니다.
특별히 구원받은 성도가 보이는 행태입니다.
두번째는,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자기를 믿고 이땅의 것을 추구하면 그것은 '자기를 믿지 않는 사람의 위치로 놓는 것' 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은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다>
이방인들의 목표가 무엇입니까? 그들의 목표는 이땅에서 잘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들의 목표의 전부입니다. 그들은 저세상에 대해서 모르며 하늘나라에 대해서 모릅니다.
성경은 이렇게 그들을 조롱합니다. <내일 죽을터이니 오늘 먹고 마시자>
인류가 아무리 발전해도, 기술이 발전해도 인류의 모토는 항상 같습니다. <내일 죽을 터이니 오늘 먹고 마시자> 입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면 이방인과 다를것이 없는 것입니다.
이방인과 그리스도인의 차이를 하나님과 우상과의 차이로 바꿔 보겠습니다.
이방인에게도 믿는 신이 있습니다. 자기들의 한계를 느낄때마다 신을 만듭니다. 그 우상과 우리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차이를 보겠습니다.
5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6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코가 있어도 맡지 못하며
7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구멍으로 소리도 못하느니라
8 우상을 만드는 자와 그것을 의지하는 자가 다 그와 같으리로다
9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 도움이시요 너희 방패시로다
(시115:5-9, 개역한글)
우상도 사람이 만들었기에 그 모양이 있습니다. 그러나 눈코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냄새를 맡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보시며, 말씀하십니다.
우상은 있지만 인간을 도울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상이 있지만 이방인들은 자기의 인생을 책임지고 가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능력이 있으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충분히 우리의 인생을 책임지실수 있는 분입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께 맡기지 않고 내 스스로 내 인생을 책임지려 하면 이방인과 다를것이 없습니다. 안믿는 사람과 같을 것입니다.
다시한번 질문하겠습니다.
구원받으면 여러가지가 변해지고 달라져야 합니다. 구원받으면 죄가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그는 천국에 대한 소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인생에 대한 견해가 달라집니다.
구원받기 전에는 나 중심으로 살았다면, 구원받은 후에는 주님께서 나를 구원하신 이유를 구합니다.
그리고 구원받으면 돈이나 물질에 대한 태도가 달라집니다.
어떤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지갑이 회개하지 않으면 그는 회개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헌금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돈에 대한 개념이 달라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전에는 내가 벌어서 내가 먹고 살았다면 이제는 하나님이 나를 먹이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일을 하시도록 맡겨 드려야 합니다. 내가 염려해서는 안됩니다. 내가 염려하는것은 하나님께서 그일을 하시도록 맡길수 없다고 하는것입니다. 하나님을 못믿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이 달라져야 합니다.
그래서 점검해야 합니다. 내가 구원받은 후 물질에 대해서, 이세상의 관념에 대해서 주님의 말씀대로 바뀌어 졌습니까?
바뀌지 않았다면 지금이라도 바꿔야 합니다.
세번째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돌보시기 때문에 우리는 인생의 기본 필요에 대해서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걱정하고 우리가 돈벌어 우리의 인생을 살아가려 한다면 우리는 이방인 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지혜롭지 못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마6:34, 개역한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서 만나로 먹이셨습니다. 광야는 농사지을곳이 없는 땅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곳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서 40년간 먹이셨습니다.
우리 주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오병이어를 가지고 수천, 수만명을 먹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만나로 먹이실때, 하나님께서는 매일매일 만나를 내려 먹이셨습니다.
22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23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
(애3:22-23, 개역한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루 단위로 먹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기도할때 <오늘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그날그날 필요를 채우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내일일을 염려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원리에 맞지 않는 것입니다.
사단은 우리를 영적으로 살지 못하도록 공격합니다. 그의 시선이 하늘에 있지 않고 땅에 있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사단은 우리의 구원을 뺏을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구원받았지만 구원받지 않은것처럼 살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 방법이 뭐냐면 '걱정' 과 '염려' 입니다. 매일 그 생각을 하며 살게 합니다. 그것을 해결하려고 하지만 해결이 안됩니다.
그래서 그것에 사로잡혀 평생을 보내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책임지시는 것을 빼앗아서 내가 하도록 만듭니다. 그러니 해결되지도 않고 걱정만 하다가 인생을 허비하는 것입니다.
두번째 사단의 방법은 '오늘 내일일을 걱정'하게 합니다.
오늘을 살아야 하고 오늘 일을 생각하고 오늘 하나님께서 공급하시고 오늘 필요를 하나님께 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내일 일은 내일 해결하십니다. 그 문제는 그때 해결할수 있는 힘을 그날 주실것입니다.
아직 주님께서 그날 해결할 일의 힘과 지혜를 주시지 않은 시점에서 걱정하는 것은 지혜로운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스스로 고통을 두배나 짊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결론 부분으로 넘어가겠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6:33, 개역한글)
33절을 보면 한국어 성경에는 표현되어 있지 않습니다만, 영어성경을 보면 <그러나> 라는 접속사가 붙어 있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러나 라는 뜻은 이런 것입니다.
'걱정하는 대신에,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
부정적인 것에대한 명령문은 '염려하지 말라'라고 6번 쓰였고 긍정적인 것에 대한 명령문은 한번 쓰였습니다.
이방인 처럼 하지말고, 걱정말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오늘 구하라 입니다.
나라는 저희들이 학교 다닐때 배운것처럼 나라를 이루려면 3요소가 있어야 합니다.
땅이 있어야 하고 국민이 있어야 하고 주권이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나라라고 하는것은 항상 주권, 통치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왕인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통치>를 구해야 합니다.
'주님 저의 생애의 왕이 되십시오' 라고 구해야 합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이 저의 생애의 주인이 되신것을,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을 구해야 합니다.
이것을 맨 먼저 추구하는 것입니다. 다른 어떤 것보다도 먼저 구하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를, 내 생애를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다스리시고, 주님의 뜻을 보이시고 주님이 살아계셔서 지금도 자녀들을 돌보시고 이끄시는 것을 저로 알게하시고, 세상으로 알게하옵소서" 이것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맨 먼저 해야 합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희들이 염려가 많은 세상을 삽니다. 특별히 어려운 시대를 삽니다. 물질적으로 풍요했다가 갑자기 어려워지는 시대를 삽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이세상을 살때 일시적인 이런것들을 걱정하고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를 부르신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사람입니다.
물론, 이것은 우리 마음에 있는 형태의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크게 세가지로 분류됩니다.
첫번째 하나님의 나라는 '천년왕국' 입니다.
그때, 예수님이 왕이 되어 실제로 에덴동산처럼 회복된 이 지구를 통치하실것입니다. 누구와 같이요? 교회와 같이, 나와 같이 입니다. 주님의 통치권을 우리를 통해서 행사하실 것입니다.
그나라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통치할수 있는 지혜를, 안목을 이때 배워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또 '영원한 나라' 입니다. 천년왕국이 끝나고 우리는 영원한 나라로 들어갈 것입니다.
영원한 나라는 그저 가만히 앉아서 하나님만 찬양하는 그런 나라가 아닙니다. 영원한 나라에도 많은 일들이 있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지 알고 그분에게 합당한 영광을 돌리는 일이 있습니다. 예배드리는 일이 있을것입니다.
하나님을 예배드릴때, 하나님에 대해서 알아야 경배를 드립니다.
저희들이 내일 예배를 드릴것입니다만, 주님을 알아야, 주님의 영광에 대해서 마음이 깨닳아지면 그것을 가지고 와서 주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말씀이 깨닳아지지 않으면 예배는 드릴수 없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그 영광을 알지 못하면 그 예배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영원한 나라에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찬양할수 있는 그것이 우리들의 맨 첫번째 목표여야 합니다.
여기서 물러나서는 안됩니다. 우선순위라는것은 하나만 바꾸면 맨뒤로 가게 됩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걱정하는 대신에, 이땅의 것을 구하는 대신에, 물질을 구하는 것 대신에 하나님의 통치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것의 예를 하나 보겠습니다.
22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23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행20:22-24, 개역한글)
이것이 하나님 나라를 먼저 구하는 예입니다.
사도바울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그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 결박과 환란이 기다린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도 그는 올라갑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입니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임무가 있습니다. 그의 생애의 목표가 있습니다.
그가 이세상에서 살아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는 그리스도께 붙잡힌바 된 것입니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그는 옷을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는 음식을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는 목숨을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올라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구하는 것입니다.
질문해 보겠습니다.
성도님들의 마음은 어디에 가 있습니까? 이 세상에서 어떤것에 삶의 목표를 두고 있습니까?
이세상 나라를 보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보고 있습니까?
천년왕국에서 내가 어떻게 될것인지 그것이 관심사 입니까? 아니면 이땅에서 내삶의 모습을 중요시 하고 있습니까?
다른 사람앞에서는 아니지만 하나님앞에서는 이 질문을 해야 합니다. 스스로 해야 합니다.
내가 무엇을 위하여 살고 있는지, 무엇이 이루어졌을때 내가 기뻐하고 있는지, 무엇을 그렇게 간절히 원하고 추구하는지 하나님 앞에서 질문해야 합니다.
그것이 이세상 나라, 이 불타버릴 나라가 아니고 하나님의 나라인지 질문해야 합니다.
그다음은 <하나님의 의> 입니다.
의라는 것은 항상 두가지가 있습니다. 첫번째는, 신분적인 의 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었을때 우리의 모든 죄는 용서 됩니다. 우리가 질 미래의 죄까지 용서됩니다. 다시 묻지 않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셨던 모든 의가 우리것이 됩니다. 이것이 신분적인 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에서 말하는 이 <의>는 신분적인 의가 아니고 실제적인 의입니다.
말을 바꾸면 이 '의'는 경건한 것입니다. 거룩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솔로몬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물어보셨습니다.
"너의 소원을 구하라 들어주겠다"
그때 솔로몬은 부를 구하지 않습니다. 장수도 구하지 않습니다. 명예도 구하지 않습니다.
솔로몬은 옷과 음식과 목숨을 구하지 않습니다. 원수를 없애달라는 것도 구하지 않습니다. 무엇을 구했습니까?
<지혜>를 구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구해야 할것은 지혜다는 것이 아닙니다.
솔로몬이 지혜를 구한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에게 지혜를 주셨을 뿐 아니라 그에게 부귀 영화를 더해 주셨습니다.
원리는 항상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면 나머지는 항상 하나님께서 더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럼 '지혜'를 구한것이 왜 하나님의 마음에 맞았을까요?
이는 솔로몬이 자기의 부르심을 이해했다는 뜻입니다.
그는 무엇으로 부름 받았나요? 그는 왕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왕은 무엇을 하는 사람입니까?
백성들을 재판하는 사람입니다.
백성들의 여러 삶속에서 나타나는 여러가지 복잡한 일들을 공평하고 의롭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정리해 가는 일입니다.
그가 자기를 부르신 하나님께 그 부르심에 따라 순종할수 있도록 지혜를 구한 것입니다.
우리는 성도다운 삶을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받았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닮는자로 부름 받았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인격과 그리스도의 향기를 나타내는 자로 부름받았습니다.
우리의 삶이 실제로 그래야 합니다.
우리는 신분적으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죽으면 천국에 갈것입니다. 영원토록 주님과 함께 영광을 누릴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여기서 그와같은 경건을 드러낼수 있는 실질적인 경건이 있어야 합니다.
이를 구해야 합니다.
이것을 구하는데 우리의 삶을 먼저 드려야 합니다.
돈을 버는데 우리의 시간을 먼저 드려서는 안됩니다. 좋은차를 사는데 우리의 에너지를 다 쏟아 버리고 그리고 경건을 구하려니 피곤하고 시간도 없고, 되지도 않고, 그렇게 살면 안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사회도 마찮가지 입니다.
제가 고등학교 다닐때 배운 교과서에 한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사람이 17세기에 유럽나라들이 강성한 나라가 됩니다. 그가 그 이유를 분석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결론을 내냐면 '기독교 윤리'에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쓴 책이 <기독교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이라고 하는 유명한 책입니다.
읽어보진 않았지만, 내용이 그런 것입니다.
한 사회가 경제적으로 부강해지고 탄탄해질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성경적인 가치관을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유럽도 프랑스에서는 혁명이 일어날때, 왕을 단두에서 죽여버립니다.
그런데 영국은 명예혁명이라고 해서 그 왕이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영국에는 부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증거되고 구원받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차이를 가져옵니다. 사회를 다르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가 개인적으로 믿음을 따라 살면 하나님께서 저희의 삶을 책임 지십니다.
저희들이 우선순위를 분명히 하면 주님께서 우리가 세상에서 존중받으면서 살수 있도록 도우십니다.
그런데 주님을 존중히 여기지 않고 우리가 추구하는것을 높이면, 그리고 주님의 말씀을 무시하면 거기에 무슨 축복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의를 구해야 합니다.
경건한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경건한 삶을 살수있을까?' 이것이 우리의 목표 1번이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잘 살수 있을까, 자녀교육을 잘 시킬수 있을까가 1번이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그렇게 살면 주님이 우리를 이렇게 부르십니다.
<믿음이 적은 자들아>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마6:30, 개역한글)
복음서에 보면, 특히 주님께서 하신 말씀중에 <믿음이 적은 자들아> 라고 한 표현이 복음서에, 마태복음 6장 말고 4번 나옵니다.
찾아보겠습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눅12:28, 개역한글)
누가복음 12장에서 나온 <믿음이 적은 자들아>은 옷을 염려하는 자들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대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마8:26, 개역한글)
여기서는 목숨을 걱정하는 제자들입니다.
예수님과 같이 바다를 배를타고 건너가다 풍랑이 일어서 배에 물이 찼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주무시고 계십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주님을 깨웁니다. "주님 우리를 도우시옵소서. 우리가 죽게 되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일어나셔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믿음이 적은 자들아>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함으로 자신의 목숨을 한시간이라도 연장하려는 시도를 하는 것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책망하십니다.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마14:31, 개역한글)
주님께서 물위를 걸어오셨습니다. 주님인줄 알고 베드로가 "주님이시면 나를 물위로 오라하십시오" 그리고 베드로가 물위를 걸어갑니다. 그런데 풍랑을 보고 베드로가 빠집니다.
그리고 그가 외칩니다. "주님 구원해 주십시오" 그래서 주님께서 그를 다시 물위에서 배로 옮겨주시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믿음이 적은자여>
그가 무엇을 구했을때 입니까? 목숨을 구했을 때 입니다.
그다음 마태복음 16장입니다.
예수께서 아시고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음으로 서로 의논하느냐 (마16:8, 개역한글)
주님께서 누룩을 조심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제자들은 먹을것을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꾸짖으셨습니다. <믿음이 적은 자들아>
세가지를 구할때 입니다.
<어떻게 먹고 살까?>
우리는 먹고 살아야 합니다. 먹지 않고서 살수 없습니다. 먹고 사는 것은 우리의 삶의 생명의 기본적인 요소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없으면 죽는것을 염려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믿음이 적은 자들아> 입니다.
이 말씀은 항상 제자들에게 사용되었습니다. 주님을 믿은 자들에게 사용됩니다.
믿음이 없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믿음이 적은 자들아> 입니다.
그들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런데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도 먹고 살아야 합니다. 이세상에 살고 육체가 있으니 먹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음식에 대해서 걱정할때마다 믿음이 적은자라고 책망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옷을 입고 다녀야 합니다. '누드'는 주님의 뜻이 아닙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에덴동산에서는 옷을 입지 않았다' 그러나 타락 이후에는 옷을 입어야 합니다.
어떤 옷을 입을까요? 합당한 옷을 입어야 합니다.
옷값이 비쌉니다. 그래서 염려가 되는 것입니다.
사회적인 체면에 그 분위기에 맞는 옷을 입어야 합니다. 그래서 좋은옷을 입고 싶은데, 세상이 그것을 알고 옷값을 황당하게 비싸게 해놓았습니다.
어마어마하게 비쌉니다. 염려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염려하면 믿음이 적은자 입니다.
다시 말해 보겠습니다.
주님은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말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죄용서함을 받은 이들에게 <믿음이 적은 자들아> 라고 말씀하십니다. 죽으면 천국에 갈수 있다고 확신을 가진 자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옥에서 건지셔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로 옮기실수 있는 분입니다. 우리의 그 많은 죄를 단번에 용서해 주신 분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믿는자입니다.
우리가 죽어서 눈을 감을때, 우리의 영혼을 하나님이 임재해 게신 그곳으로 데려가실 분입니다.
그런데 그러신 그가, 하나님께서, 이땅의 필요를 채우실 분이라는 것을 못믿습니다.
그래서 걱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일하는 것입니다.
그때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어마어마하게 큰것을 믿어 놓고 말도 안되게 작은 것을 못믿는다"
<믿음이 적은 자들아>
영혼의 구원을 믿으면서 이세상에서의 기본적인 필요에서의 구원을 못믿는다는 말입니까?
이것이 말이 됩니까?
이것이 새와 들풀이 조롱해 마땅한 일 아니겠습니까?
그것을 우리가 하고 있습니다.
염려는 작은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잊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진리를 따르기 보다 상황에 의해서 오더되고 있다는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돌볼 능력이 없으시다. 그러므로 내가 나서야 되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와같은 마음이 들때 우리는 이와같은 기도를 해야 합니다.
사도바울이 에베소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했던 내용입니다.
18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19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엡1:18-19, 개역한글)
우리가 마음의 눈이 떠져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무엇으로 부르셨는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천녀왕국과 영원한 나라의 영광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어떤 능력으로 일하고 계시는지 봐야 합니다.
이 기도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 저의 눈을 뜨게 해주십시오"
걱정이 들때마다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제 눈을 떠서 하나님이 지금 저의 삶 가운데 어떻게 역사하시는지 밝히 보고 저의 삶을 맡기고 그 하나님께서 저의 생에서 일하실수 있도록 맏기는 믿음을 허락하옵소서"
다시 말하지만 우리가 항상 믿음이 없는것은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누군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말씀을 통해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하나님이 어떤 약속을 주셨는지, 이 내용으로 우리의 생각을 채우지 않으면 우리의 생각속에 사단이 들어옵니다.
아주 구체적이고 이땅에 필요한 현실적인 필요들과 그에 대한 대비책이 없는 우리의 상황으로 우리의 염려들을 채웁니다. 우리를 걱정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이방인처럼 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쓸데없는 걱정까지 미리 얹혀서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빠져나와야 합니다.
여기서 빠져나온 분의 한 예를 들겠습니다. 베드로가 여기서 빠져 나옵니다.
베드로는 아까 찾아봤습니다만, 주님이 자기 눈앞에 계신대도 불구하고 염려했습니다.
바람을 보고 파도를 보고 염려했습니다. 그리고 물에 빠져 들어갔습니다. 걱정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실때 걱정이 되었습니다.
"내가 십자가를 져야 한다. 내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십자가를 지고 삼일만에 부활해야 한다."
그때 베드로는 주님에 대한 염려가 생겼습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죽으셔야 한다는것에 염려가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그것은 이런 뜻입니다. '주님 그런일이 생기도록 내가 내버려 두지 않겠습니다' '주님께 그같은 비극이 생기도록 제가 보고 있을것 같습니까? 어떻게 제몸을 불살라서도 그일을 막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한 것입니다. 쓸데없는 걱정을 한 것입니다. 해서는 안되는 염려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다음 겟세마네 동산에서 베드로는 또한번 주님을 염려합니다.
사람들이 주님을 체포하러 왔습니다. 횟불을 들고 칼을 들고 왔습니다. 주님이 이사람들에게 잡혀가면 어떡하나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칼을 빼어들었습니다.
잘못 염려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따르는 생애 가운데 여러번 해서는 안되는 걱정을 했던 사람입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벧전5:7, 개역한글)
베드로전서를 마치면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권고'라는 단어가 '심방'이라는 단어입니다. 우리를 찾아오시고 우리의 구체적인 상황속에 우리를 만나러 오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심으로 모든 염려를 주님께 맡기라고 그는 쓰고 있습니다.
그는 어떻게 해서 염려하게 되었는지 압니다. 그리고 그 염려를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도 압니다.
그리고 이제 믿음의 자녀들에게 맡기라고 권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권고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해서는 안되는 염려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 불안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어쩔수 없는, 어떤때는 필요한 행동이라고 미화시켜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불신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일을 빼앗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 것을 염려하지 말라 너희들의 이 세상에서의 삶은 내가 책임진다. 너희들을 영광스럽게 만들려고 내가 결정했다. 이세상의 일은 내가 돌본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 지상에서의 일에서 해방되어서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 너희들의 삶에 필요한 모든것을 내가 책임진다>
정말로 그렇게 믿으십니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라고 믿으십니까?
이제 우리의 삶에서 이 예수님의 약속이 진실됨을 입증하는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주님은 거짓말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우리 가운데 그리스도의 나라가 확장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통치가 넓혀져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으로 하여금 보게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걱정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그 험학한 가운데서도 아무런 걱정이 없는 자들입니다.
세상이 '나도 저와같은 평안을 누리고 싶다' 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간증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도 세상과 똑같이 걱정합니다. 세상사람과 똑같이 삽니다. 누가 구원받길 원하겠습니까?
구원은 무엇입니까? 이론입니까? 우리의 실제적인 삶에서, 돈문제에 있어서,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현실입니까?
아니면 성경이 그렇게 기록되어 있고 말로는 그렇게 하지만 실제로는 비슷한 것입니까?
우리들이 주님을 믿는자답게 살아야 합니다.
주님은 산상수훈에서 사람들의 생각과 견해를 부수고 계십니다.
살인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지켰다고,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미워만 해도, 형제더러 라가라 한번만 말해도 지옥불에 들어갈 것이다>
그 주님께서 동일하게 말씀하십니다. <염려하지 말라> 여섯번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들의 이세상에서의 삶을 책임진다. 너희는 놓여나서 하나님 나라만 구하라>
이것이 저희들의 삶의 원리가 될수 있기를 바랍니다.
강사 : 한봉래 형제님
< 마태복음 강해 32>
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28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마6:25-34, 개역한글)
저희들이 읽고 있는 마태복음 6장은 보통 산상수훈, 산상보훈이라고 명명되어진 주님의 말씀중의 일부입니다.
주님께서 지상에서 3년 반 공생애 사역을 하실때 초기에 하신 말씀입니다.
산상수훈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인 메세지였습니다.
잘 아시는대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그 당시 많은 유대인과 종교인들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십계명에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살인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계명을 범하지 않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산상수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미워하는자마다 살인하였느니라>
십계명 중 하나로 <간음하지 말라>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 말씀을 듣는 유대인들 중 상당수 유대인들은 간음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간음 하였느니라>
이 말씀이 그들에게 어떤 충격으로 다가 왔습니다.
주님은 산상수훈에서 하나님의 기준을, 새로운 기준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구약에서 약속된 기준을 분명하게 제시하신 것입니다.
이제 주님께서 말씀하시다가 물질에 관한 주제로 바꾸셨습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충격적이어야 합니다.
물질과 돈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태도가 어찌해야 하는가 주님께서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제가 잠시 짧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저희들은 물질주의적인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돈이 이토록 큰힘을 발휘한 시대가 없습니다. 이 시대는 돈이 최고인 시대입니다.
돈이 있으면 다른것들이 다 따라옵니다.
이 세상 이야기입니다만, 어떤분은 우리나라를 '삼성 공화국'이라고 부릅니다. 권력은 바뀌어도 재벌들은 바뀌지 않습니다.
이런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성도들도 우선순위 1번이 직장입니다.
왜 직장입니까? 직장은 돈을 주기 때문입니다. 직장에서 짤릴까봐 직장에서 잘못될까봐 염려하고 삽니다.
직장이 결혼보다 중요합니다. 아이보다 중요합니다.
다시말하면 돈이 사람보다 중시되는 시대를 삽니다.
돈을벌기위해 직장생활을 합니다. 결혼하면 아이가 생깁니다. 물질주의의 사회에 원치않는 아이가 침입해 들어옵니다.
그래서 이 아이가 돈을 버는데 방해되지 않도록 돈으로 아이를 키우기 시작합니다.
우리들의 삶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깨어있는 시간의 상당한 부분을 돈에 대해서 걱정하며 삽니다. 누구나 걱정하며 삽니다.
써야 할것, 카드 결제대금은 돌아오는데, '어떻게 그 돈을 마련할수 있을까' 하는 것이 우리삶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삽니다.
그리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죄다>
어떤 분이 이런말씀을 하셨습니다. "걱정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의 생각속에 흘러가는 작은 시냇물이다. 그러나 이 걱정이 홍수를 이루게 되면 나머지 모든 생각들이 다 익사해 버린다"
이런 경험을 저희들이 개인적으로 다 한적이 있을 것입니다.
이와같은 상황속에서 주님을 말씀하셨습니다.
살인하지 않은 사람에게 "미워만 했어도 살인자이다"라고 말씀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돈을 걱정하는것은 그리스도인답지 않다>
그리스도인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물질에 대해 걱정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물질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는사람이 그리스도인 입니다. 이것이 주제 입니다.
문맥을 살펴보겠습니다.
19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20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21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22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23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마6:19-24, 개역한글)
물질에 대해서 주님께서 두부분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첫번째 부분에서는 보물에 관한 부분입니다.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두번째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라고 하십니다.
이 두 주제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앞의 주제를 다시 복습하며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보물이라는것은, 우리들의 삶에 기본 생계비가 있습니다. 사람은 먹어야 삽니다. 그래서 쌀을 사야하고 반찬을 사야하고, 거주지를 마련해야 합니다.
사람이 먹고 자고서만 살수 없습니다. 이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최소한의 필요경비가 있습니다. 그것이 최저임금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최소한의 필요이상으로 돈을 주십니다.
넉넉하게 주십니다. 그랬을때, 이 남는 부분을 성경에서는 보물이라고 부릅니다.
쓰고 남은 것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것을 저축해 두지 말라>
남는돈을 우리는 저축해 두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서 입니다.
걱정도 믿음의 일종입니다. 걱정을 부행과 재앙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비하려 저축하려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것을, 쓰고 남는것을 하늘에 투자하라>고 하십니다.
주님께서 물질을 주시고 남는부분은 주님이 왜 주셨는가를 생각하고 주님이 주신 목적대로 써야 합니다.
'무슨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저축해 두지 말라' 이것이 첫번째 가르침 입니다.
그래야 할 이유 세가지를 주님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첫번째, 하늘에 쓰면 내마음이 그곳에 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에 투자하면 그 일에 대해서 관심을 갖습니다. 은행에 투자하면 내 마음은 항상 주식에 가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주님께서 주신 돈을 주님께 투자하면 나는 그일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되고 기도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늘에 투자해야 합니다.
두번째,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의 영적인 눈이 어두워지기 때문입니다.
세번째, 주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순전한 마음, 온전한 마음으로 섬기는 것을 받으시지, 두마음을 받지 않으십니다. 그것이 보물에 관한 교훈입니다.
그리고 나서 두번째 주제로 넘어오십니다.
우리가 살면서 필요한 기초 비용이 있습니다. 우리가 먹고 살려면 먼저 쌀이 있어야 하는데 쌀을 살 돈이 없을때 어떻게 하냐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여섯번 말씀하십니다. <염려하지 말라>
염려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주님은 세가지를 드십니다.
1. 아버지 하나님이 너희를 돌보고 계시기 떄문이다.
2. 염려하는것은 믿음과 배치된다. 그것은 이방인들의 사고 방식이다.
3. 그것은 지혜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일일은 내일 염려하라.
기본적으로 하나님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이세상에서 먹고 자는것으로부터 해방시키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위에것을 찾으라> <너희는 하늘을 보라>
<이세상의 너희들의 삶은 하나님인 내가 책임진다. 내가 책임지는 것을 너희는 염려하지 말라. 이세상에서 어떻게 살것을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서 살라>
이것이 성도의 삶의 영적인 원리 입니다.
이 원리가 우리의 삶을 바꿔내야 합니다. 이 원리를 넘어오지 않으면 영적으로 살수 없습니다. 항상 세상일에 발목이 잡혀 영적인 일을 감당할수 없습니다. 겨우 집회에 나오는것에서 주님은 우리를 해방시키십니다.
이땅의 것을 염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하십니다>
하나하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친히 이세상의 삶을 돌보신다는 것을 주님은 세가지 예를 드십니다.
첫번째는 새입니다.
하나님이 새를 창조하실 때에 새를 만드신 후 "나는 너를 만들었으니 먹고 사는것은 네가 해라"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새에게 생명을 주셨을 뿐 아니라 그 새가 생명을 유지할수 있는 식량을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까마귀 새끼가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먹을 것이 없어서 오락가락할 때에 그것을 위하여 먹을 것을 예비하는 자가 누구냐 (욥38:41, 개역한글)
까마귀 중에 새끼라고 되어 있기 때문에, 아마도 어미를 잃은 새일수 있습니다.
새들도 자식들이 자립할수 있을때까지 어미새가 길러냅니다. 자연계는 보통 정글이라고 합니다. 인간의 세계와 자연계는 다릅니다. 아마도 불행한 사고로 어미새가 죽습니다. 그랬을 때 이 새끼새가 먹을것이 없어서 오락가락할때 이 까마귀 새끼에게 먹을것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들짐승과 우는 까마귀 새끼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도다 (시147:9, 개역한글)
주어는 8절에 있습니다. <저가> 저는 누구입니까? 7절에 나와 있습니다. <여호와>
여호와 하나님께서 울고 있는 까마귀 새끼에게 먹을것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생켱체를 창조하셔서 나머지는 네 책임이다라고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생명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 생명을 주셨을 때 그 생명이 유지되도록 까마귀에게 먹을것을 주시는 하나님 이십니다.
이제 우리입니다. 사람을 이세상에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제 네가 알아서 살아라' 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를 태어나게 하실 뿐 아니라 우리의 삶에 복지에 공급하시고 채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새들에 대해서 조금 더 설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새들에게 본능을 주십니다. 먹을것을 찾아내고 먹을수 있는 본능을 새에게 넣어주셨습니다.
새는 본능을 따라 먹을것을 찾아냅니다. 그리고 벌레를 만나면 본능적으로 이것이 먹을것임을 압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만족해 하며 삽니다.
이 새들이 사람들에 대해서 비난합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나 있는가 말합니다.
어떤 새도, 최고의 새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지 않았습니다. 어떤새도 영원한 나라에서 하나님과 함께 영광을 누리지 못할것입니다.
어떤 새도 주님께서 처소를 예비하고 데리러 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도는 아닙니다.
성도는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창조되고 구속받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영원한 나라에서 하나님을 찬송할 자로 선택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데려가기 위하여 공중에 오실것입니다.
<하물며 우리일까 보냐>
새를 먹이시는데 우리를 안먹이시겠습니까? 염려하지 마십시오.
이것도 아까 말씀드린 원리입니다.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목숨을 주신분이 그 목숨보다 작은 음식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인체를 주신분이 그 신체를 입을 옷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이를 걱정하는것은 합리적이지도 않고 우스꽝스러운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하루종일 돈 걱정을 합니다.
평생동안 그 걱정에 매여 종노릇 하다가 하나님의 나라와 의는 구하지도 않고, 새만도 못하게, 들에 핀 들꽃만도 못하게 살다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이 우리에게 충격을 주고 우리의 삶의 원리와 구체적인 것을 바꿔내야 하는 것입니다.
두번째, 27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마6:27, 개역한글)
요즘은 키를 한자나 더할수 있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성경을 보시면 이 '키'에 줄을 그어놓고 작게 목숨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키를 목숨으로 바꿔보겠습니다.
목숨을 염려함으로 자기 목숨을 한시간이라도, 일초라도 연장할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 합니다. 오래 살고싶어 합니다.
그래서 여러가지 장수할수 있는 방안을 생각해 냅니다. 요즘은 사람들이 다 비타민과, 건강식품을 먹습니다.
그리고 정기 건강검진을 합니다. 저는 그것을 반대하지 않습니다.
북한의 위대한 지도자는 평생동안 비행기를 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죽을까봐 염려하기 때문입니다. 정적이 비행기를 격추시켜 자기가 죽을까봐 기차만 타고 갑니다. 사람들이 자기 목숨을 염려합니다.
그러나 구약에서부터 말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며 또 그에게 부종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시니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하리라 (신30:20, 개역한글)
하나님이 우리의 장수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자기의 수명을 다하고 살아갈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면 우리는 재앙으로 인해서 죽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축복입니다.
그가 주님을 순종하면 어떠한 불행도, 사고도 그를 덮치지 못할 것입니다. 그것이 구약의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수한을 정해놓으셨습니다. 사람이 자기의 수명을 일분 일초라도 연장하지 못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이 정하신 충분한 시한까지 사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약으로 오면, 장수할수 있는 딱 한가지의 방법이 있습니다.
<자녀들아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약속에 있는 첫 계명입니다. 이 말씀을 순종하는 자녀는 장수할 것입니다. 장수하는것이 90세 100세를 산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정해놓은 수한을 다 살다 갈것입니다. 사고를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암에 걸리지 않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오래사는 것을 원치 않고 영적인 삶,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염려함으로 자기 수한대로 사는 사람을 보았느냐? 염려함으로 자기 수한대로 살지 못한다. 그러므로 염려하지 말라>
어떤 사람의 수명은 사람이 연장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목표를 가지고 정해 놓으셨습니다.
세번째는 옷입니다.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마6:28, 개역한글)
옷에 대해서는 몇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들이 대형마트를 가보면 많은 옷들이 있습니다. 그 종류가 어마어마합니다. 특히 여성들을 위한 옷은 굉장히 다양합니다. 이것은 죄악입니다.
디자인이나 패션은 죄악입니다. 특히 보면 한국사람들이 옷을 잘 입고 다닙니다. 중국에 가보면 다들 후줄근하고 낡은 옷을 잘입니다.
그래서 다른나라 사람들은 한국사람들이 전부 연예인인줄 압니다. 그정도로 한국사람들이 옷을 잘 입습니다.
외국에서 팔리지도 않는 그 비싼 등산복이 우리나라에서는 100만원 200만원하는 등산복이 뒷산 가기 위해서 팔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특별히 이부분에 있어서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떤 분위기에 자기가 초라한 옷을 입고 어울리지 않는 상황에 처할까 염려합니다.
이 상황들을 알고 디자인 회사들이 그렇게 우리들의 머리들을 공격해 갑니다.
옷에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들이 자기의 외모를 위해서는 그렇게 투자하면서 속사람을 위해서는 투자하지 않는다> 이것이 성경의 비난입니다.
3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4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벧전3:3-4, 개역한글)
사람의 마음이 온유하고 안정되 있고 영원한 것을 가지고 있어야 그것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옷이 아름다운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비싼옷을 입으면 벌써 다릅니다. 사람의 수준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학교에서 벌써 학생들이 유명한 메이커의 잡바를 입지 않으면 도태됩니다. 이 모든것을 어른들을 보고 배운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이세상에 사셨던 가장 아름다우셨던 우리 주님은 아무것도 가지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여자가 낳은자 중 가장 위대한 이라 부름을 받았던 침례요한은 낙타 털옷을 입었습니다. 그것은 패션이 아닙니다.
이런면에서, 옷에 대해서 도전 받아야 합니다.
옷을 사기 위해서 가게에서 수많은 돈과 시간을 들여서 찾아내는 것에 대해서 반성해야 합니다.
내 속사람이 주님을 닮아가는 것에 대해서는 투자하지 않으면서 그런것에 대해서는 감각도 없으면서 세상에 투자해서는 안됩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름다운 것은 하나님만이 주신다>
28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마6:28-29, 개역한글)
이 백합화는 길가에 피어있는, 주님께서 말씀하실때 길가에 피어있는 들풀이었습니다. 이 들풀을 보시면서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솔로몬이 입었던 옷이 이 들풀보다 못하다>
솔로몬이 얼마나 영광을 누렸던 사람입니까? 당대 최고의 의상 디자이너가 그의 옷을 만들고 솔로몬이 입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평가를 보십시오.
우리의 생각에는 "하나님 아닌데요? 솔로몬의 옷이 훨씬 좋은데요?" 할수 있습니다.
이것은 가치가 다른것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쓸수 있는 모든 자원을 다 동원해서 자기를 입힌다 할찌라도 하나님이 사람을 위하는 것과는 비교할수 없다>
심지어 내일 곧 아궁이에 던져버릴 그 작은 풀에게 하나님이 하시는 것과 사람이 자기를 위하여 하는 어떤것과도 비교할수 없는 것입니다. 아름다운것은 하나님에게서만 나옵니다.
아름다움의 기준은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그렇게 말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기까지 세가지 예를 들었습니다. 1. 공중의 새 입니다. 그는 창고가 없어도 새들은 그낭 먹은 벌레를 먹고 만족합니다. 창고를 만들어 벌레를 저축해 두지 않습니다.
2. 사람의 목숨도 사람의 염려로 1초도 연장시킬수 없습니다. 3. 들의 백합화가 사람의 옷보다 낫습니다.
세가지를 들어서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돌보고 계시다. 너희는 얼마나 더 하나님께서 돌봐 주시겠느냐?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 이십니다.
7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8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9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10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마7:7-11, 개역한글)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의 경험을 봐라" 부모가 자녀들을 위해서 얼마나 헌신적으로 희생했는지 저희들을 잘 압니다. 그런데 하물며 하나님은 어떠시겠습니까?
그리고 인간은 악하고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십니다. 전능하시고 선하시고 사랑이십니다.
그분께서 자녀인 우리에게 얼마나 좋은것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 온 우주가 자기것인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공급하고 계신데, 왜 염려합니까? 왜 자기가 하려고 합니까?
<하나님께서 너희를 먹이게 하라> 입니다.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찌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시34:10, 개역한글)
사자가 동물들의 왕입니다. 특별히 젊은 사자는 굶주릴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이 자연세계는 어려워 졌습니다. 그래서 그 젊은 사자라 할찌라도 먹을것을 구하지 못하는 어려움이 있을수 있습니다. 래서 동물 세계는 잔인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의 경우에는 그런 경우가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 할찌라도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를 먹이시는데는 아무런 하자가 없습니다. 이것을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약간 비틀어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들풀과 새들이 인간들의 삶을 보면서 이렇게 대화 할 것입니다.
"저 사람들은 왜 저렇게 걱정이 많대?" "저 사람들은 왜 그렇게 바쁘지?"
새와 들풀과의 대화입니다. 대답이 무엇이겠습니까? "저 사람들은 우리와 달리 하늘의 아버지가 없대, 그래서 저렇게 산대"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이 보이고 있는 행태입니다.
특별히 구원받은 성도가 보이는 행태입니다.
두번째는,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자기를 믿고 이땅의 것을 추구하면 그것은 '자기를 믿지 않는 사람의 위치로 놓는 것' 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은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다>
이방인들의 목표가 무엇입니까? 그들의 목표는 이땅에서 잘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들의 목표의 전부입니다. 그들은 저세상에 대해서 모르며 하늘나라에 대해서 모릅니다.
성경은 이렇게 그들을 조롱합니다. <내일 죽을터이니 오늘 먹고 마시자>
인류가 아무리 발전해도, 기술이 발전해도 인류의 모토는 항상 같습니다. <내일 죽을 터이니 오늘 먹고 마시자> 입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면 이방인과 다를것이 없는 것입니다.
이방인과 그리스도인의 차이를 하나님과 우상과의 차이로 바꿔 보겠습니다.
이방인에게도 믿는 신이 있습니다. 자기들의 한계를 느낄때마다 신을 만듭니다. 그 우상과 우리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차이를 보겠습니다.
5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6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코가 있어도 맡지 못하며
7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구멍으로 소리도 못하느니라
8 우상을 만드는 자와 그것을 의지하는 자가 다 그와 같으리로다
9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 도움이시요 너희 방패시로다
(시115:5-9, 개역한글)
우상도 사람이 만들었기에 그 모양이 있습니다. 그러나 눈코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냄새를 맡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보시며, 말씀하십니다.
우상은 있지만 인간을 도울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상이 있지만 이방인들은 자기의 인생을 책임지고 가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능력이 있으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충분히 우리의 인생을 책임지실수 있는 분입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께 맡기지 않고 내 스스로 내 인생을 책임지려 하면 이방인과 다를것이 없습니다. 안믿는 사람과 같을 것입니다.
다시한번 질문하겠습니다.
구원받으면 여러가지가 변해지고 달라져야 합니다. 구원받으면 죄가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그는 천국에 대한 소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인생에 대한 견해가 달라집니다.
구원받기 전에는 나 중심으로 살았다면, 구원받은 후에는 주님께서 나를 구원하신 이유를 구합니다.
그리고 구원받으면 돈이나 물질에 대한 태도가 달라집니다.
어떤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지갑이 회개하지 않으면 그는 회개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헌금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돈에 대한 개념이 달라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전에는 내가 벌어서 내가 먹고 살았다면 이제는 하나님이 나를 먹이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일을 하시도록 맡겨 드려야 합니다. 내가 염려해서는 안됩니다. 내가 염려하는것은 하나님께서 그일을 하시도록 맡길수 없다고 하는것입니다. 하나님을 못믿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이 달라져야 합니다.
그래서 점검해야 합니다. 내가 구원받은 후 물질에 대해서, 이세상의 관념에 대해서 주님의 말씀대로 바뀌어 졌습니까?
바뀌지 않았다면 지금이라도 바꿔야 합니다.
세번째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돌보시기 때문에 우리는 인생의 기본 필요에 대해서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걱정하고 우리가 돈벌어 우리의 인생을 살아가려 한다면 우리는 이방인 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지혜롭지 못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마6:34, 개역한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서 만나로 먹이셨습니다. 광야는 농사지을곳이 없는 땅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곳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서 40년간 먹이셨습니다.
우리 주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오병이어를 가지고 수천, 수만명을 먹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만나로 먹이실때, 하나님께서는 매일매일 만나를 내려 먹이셨습니다.
22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23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
(애3:22-23, 개역한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루 단위로 먹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기도할때 <오늘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그날그날 필요를 채우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내일일을 염려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원리에 맞지 않는 것입니다.
사단은 우리를 영적으로 살지 못하도록 공격합니다. 그의 시선이 하늘에 있지 않고 땅에 있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사단은 우리의 구원을 뺏을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구원받았지만 구원받지 않은것처럼 살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 방법이 뭐냐면 '걱정' 과 '염려' 입니다. 매일 그 생각을 하며 살게 합니다. 그것을 해결하려고 하지만 해결이 안됩니다.
그래서 그것에 사로잡혀 평생을 보내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책임지시는 것을 빼앗아서 내가 하도록 만듭니다. 그러니 해결되지도 않고 걱정만 하다가 인생을 허비하는 것입니다.
두번째 사단의 방법은 '오늘 내일일을 걱정'하게 합니다.
오늘을 살아야 하고 오늘 일을 생각하고 오늘 하나님께서 공급하시고 오늘 필요를 하나님께 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내일 일은 내일 해결하십니다. 그 문제는 그때 해결할수 있는 힘을 그날 주실것입니다.
아직 주님께서 그날 해결할 일의 힘과 지혜를 주시지 않은 시점에서 걱정하는 것은 지혜로운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스스로 고통을 두배나 짊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결론 부분으로 넘어가겠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6:33, 개역한글)
33절을 보면 한국어 성경에는 표현되어 있지 않습니다만, 영어성경을 보면 <그러나> 라는 접속사가 붙어 있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러나 라는 뜻은 이런 것입니다.
'걱정하는 대신에,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
부정적인 것에대한 명령문은 '염려하지 말라'라고 6번 쓰였고 긍정적인 것에 대한 명령문은 한번 쓰였습니다.
이방인 처럼 하지말고, 걱정말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오늘 구하라 입니다.
나라는 저희들이 학교 다닐때 배운것처럼 나라를 이루려면 3요소가 있어야 합니다.
땅이 있어야 하고 국민이 있어야 하고 주권이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나라라고 하는것은 항상 주권, 통치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왕인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통치>를 구해야 합니다.
'주님 저의 생애의 왕이 되십시오' 라고 구해야 합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이 저의 생애의 주인이 되신것을,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을 구해야 합니다.
이것을 맨 먼저 추구하는 것입니다. 다른 어떤 것보다도 먼저 구하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를, 내 생애를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다스리시고, 주님의 뜻을 보이시고 주님이 살아계셔서 지금도 자녀들을 돌보시고 이끄시는 것을 저로 알게하시고, 세상으로 알게하옵소서" 이것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맨 먼저 해야 합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희들이 염려가 많은 세상을 삽니다. 특별히 어려운 시대를 삽니다. 물질적으로 풍요했다가 갑자기 어려워지는 시대를 삽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이세상을 살때 일시적인 이런것들을 걱정하고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를 부르신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사람입니다.
물론, 이것은 우리 마음에 있는 형태의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크게 세가지로 분류됩니다.
첫번째 하나님의 나라는 '천년왕국' 입니다.
그때, 예수님이 왕이 되어 실제로 에덴동산처럼 회복된 이 지구를 통치하실것입니다. 누구와 같이요? 교회와 같이, 나와 같이 입니다. 주님의 통치권을 우리를 통해서 행사하실 것입니다.
그나라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통치할수 있는 지혜를, 안목을 이때 배워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또 '영원한 나라' 입니다. 천년왕국이 끝나고 우리는 영원한 나라로 들어갈 것입니다.
영원한 나라는 그저 가만히 앉아서 하나님만 찬양하는 그런 나라가 아닙니다. 영원한 나라에도 많은 일들이 있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지 알고 그분에게 합당한 영광을 돌리는 일이 있습니다. 예배드리는 일이 있을것입니다.
하나님을 예배드릴때, 하나님에 대해서 알아야 경배를 드립니다.
저희들이 내일 예배를 드릴것입니다만, 주님을 알아야, 주님의 영광에 대해서 마음이 깨닳아지면 그것을 가지고 와서 주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말씀이 깨닳아지지 않으면 예배는 드릴수 없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그 영광을 알지 못하면 그 예배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영원한 나라에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찬양할수 있는 그것이 우리들의 맨 첫번째 목표여야 합니다.
여기서 물러나서는 안됩니다. 우선순위라는것은 하나만 바꾸면 맨뒤로 가게 됩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걱정하는 대신에, 이땅의 것을 구하는 대신에, 물질을 구하는 것 대신에 하나님의 통치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것의 예를 하나 보겠습니다.
22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23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행20:22-24, 개역한글)
이것이 하나님 나라를 먼저 구하는 예입니다.
사도바울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그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 결박과 환란이 기다린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도 그는 올라갑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입니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임무가 있습니다. 그의 생애의 목표가 있습니다.
그가 이세상에서 살아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는 그리스도께 붙잡힌바 된 것입니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그는 옷을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는 음식을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는 목숨을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올라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구하는 것입니다.
질문해 보겠습니다.
성도님들의 마음은 어디에 가 있습니까? 이 세상에서 어떤것에 삶의 목표를 두고 있습니까?
이세상 나라를 보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보고 있습니까?
천년왕국에서 내가 어떻게 될것인지 그것이 관심사 입니까? 아니면 이땅에서 내삶의 모습을 중요시 하고 있습니까?
다른 사람앞에서는 아니지만 하나님앞에서는 이 질문을 해야 합니다. 스스로 해야 합니다.
내가 무엇을 위하여 살고 있는지, 무엇이 이루어졌을때 내가 기뻐하고 있는지, 무엇을 그렇게 간절히 원하고 추구하는지 하나님 앞에서 질문해야 합니다.
그것이 이세상 나라, 이 불타버릴 나라가 아니고 하나님의 나라인지 질문해야 합니다.
그다음은 <하나님의 의> 입니다.
의라는 것은 항상 두가지가 있습니다. 첫번째는, 신분적인 의 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었을때 우리의 모든 죄는 용서 됩니다. 우리가 질 미래의 죄까지 용서됩니다. 다시 묻지 않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셨던 모든 의가 우리것이 됩니다. 이것이 신분적인 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에서 말하는 이 <의>는 신분적인 의가 아니고 실제적인 의입니다.
말을 바꾸면 이 '의'는 경건한 것입니다. 거룩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솔로몬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물어보셨습니다.
"너의 소원을 구하라 들어주겠다"
그때 솔로몬은 부를 구하지 않습니다. 장수도 구하지 않습니다. 명예도 구하지 않습니다.
솔로몬은 옷과 음식과 목숨을 구하지 않습니다. 원수를 없애달라는 것도 구하지 않습니다. 무엇을 구했습니까?
<지혜>를 구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구해야 할것은 지혜다는 것이 아닙니다.
솔로몬이 지혜를 구한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에게 지혜를 주셨을 뿐 아니라 그에게 부귀 영화를 더해 주셨습니다.
원리는 항상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면 나머지는 항상 하나님께서 더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럼 '지혜'를 구한것이 왜 하나님의 마음에 맞았을까요?
이는 솔로몬이 자기의 부르심을 이해했다는 뜻입니다.
그는 무엇으로 부름 받았나요? 그는 왕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왕은 무엇을 하는 사람입니까?
백성들을 재판하는 사람입니다.
백성들의 여러 삶속에서 나타나는 여러가지 복잡한 일들을 공평하고 의롭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정리해 가는 일입니다.
그가 자기를 부르신 하나님께 그 부르심에 따라 순종할수 있도록 지혜를 구한 것입니다.
우리는 성도다운 삶을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받았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닮는자로 부름 받았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인격과 그리스도의 향기를 나타내는 자로 부름받았습니다.
우리의 삶이 실제로 그래야 합니다.
우리는 신분적으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죽으면 천국에 갈것입니다. 영원토록 주님과 함께 영광을 누릴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여기서 그와같은 경건을 드러낼수 있는 실질적인 경건이 있어야 합니다.
이를 구해야 합니다.
이것을 구하는데 우리의 삶을 먼저 드려야 합니다.
돈을 버는데 우리의 시간을 먼저 드려서는 안됩니다. 좋은차를 사는데 우리의 에너지를 다 쏟아 버리고 그리고 경건을 구하려니 피곤하고 시간도 없고, 되지도 않고, 그렇게 살면 안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사회도 마찮가지 입니다.
제가 고등학교 다닐때 배운 교과서에 한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사람이 17세기에 유럽나라들이 강성한 나라가 됩니다. 그가 그 이유를 분석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결론을 내냐면 '기독교 윤리'에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쓴 책이 <기독교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이라고 하는 유명한 책입니다.
읽어보진 않았지만, 내용이 그런 것입니다.
한 사회가 경제적으로 부강해지고 탄탄해질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성경적인 가치관을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유럽도 프랑스에서는 혁명이 일어날때, 왕을 단두에서 죽여버립니다.
그런데 영국은 명예혁명이라고 해서 그 왕이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영국에는 부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증거되고 구원받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차이를 가져옵니다. 사회를 다르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가 개인적으로 믿음을 따라 살면 하나님께서 저희의 삶을 책임 지십니다.
저희들이 우선순위를 분명히 하면 주님께서 우리가 세상에서 존중받으면서 살수 있도록 도우십니다.
그런데 주님을 존중히 여기지 않고 우리가 추구하는것을 높이면, 그리고 주님의 말씀을 무시하면 거기에 무슨 축복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의를 구해야 합니다.
경건한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경건한 삶을 살수있을까?' 이것이 우리의 목표 1번이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잘 살수 있을까, 자녀교육을 잘 시킬수 있을까가 1번이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그렇게 살면 주님이 우리를 이렇게 부르십니다.
<믿음이 적은 자들아>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마6:30, 개역한글)
복음서에 보면, 특히 주님께서 하신 말씀중에 <믿음이 적은 자들아> 라고 한 표현이 복음서에, 마태복음 6장 말고 4번 나옵니다.
찾아보겠습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눅12:28, 개역한글)
누가복음 12장에서 나온 <믿음이 적은 자들아>은 옷을 염려하는 자들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대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마8:26, 개역한글)
여기서는 목숨을 걱정하는 제자들입니다.
예수님과 같이 바다를 배를타고 건너가다 풍랑이 일어서 배에 물이 찼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주무시고 계십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주님을 깨웁니다. "주님 우리를 도우시옵소서. 우리가 죽게 되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일어나셔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믿음이 적은 자들아>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함으로 자신의 목숨을 한시간이라도 연장하려는 시도를 하는 것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책망하십니다.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마14:31, 개역한글)
주님께서 물위를 걸어오셨습니다. 주님인줄 알고 베드로가 "주님이시면 나를 물위로 오라하십시오" 그리고 베드로가 물위를 걸어갑니다. 그런데 풍랑을 보고 베드로가 빠집니다.
그리고 그가 외칩니다. "주님 구원해 주십시오" 그래서 주님께서 그를 다시 물위에서 배로 옮겨주시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믿음이 적은자여>
그가 무엇을 구했을때 입니까? 목숨을 구했을 때 입니다.
그다음 마태복음 16장입니다.
예수께서 아시고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음으로 서로 의논하느냐 (마16:8, 개역한글)
주님께서 누룩을 조심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제자들은 먹을것을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꾸짖으셨습니다. <믿음이 적은 자들아>
세가지를 구할때 입니다.
<어떻게 먹고 살까?>
우리는 먹고 살아야 합니다. 먹지 않고서 살수 없습니다. 먹고 사는 것은 우리의 삶의 생명의 기본적인 요소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없으면 죽는것을 염려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믿음이 적은 자들아> 입니다.
이 말씀은 항상 제자들에게 사용되었습니다. 주님을 믿은 자들에게 사용됩니다.
믿음이 없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믿음이 적은 자들아> 입니다.
그들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런데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도 먹고 살아야 합니다. 이세상에 살고 육체가 있으니 먹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음식에 대해서 걱정할때마다 믿음이 적은자라고 책망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옷을 입고 다녀야 합니다. '누드'는 주님의 뜻이 아닙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에덴동산에서는 옷을 입지 않았다' 그러나 타락 이후에는 옷을 입어야 합니다.
어떤 옷을 입을까요? 합당한 옷을 입어야 합니다.
옷값이 비쌉니다. 그래서 염려가 되는 것입니다.
사회적인 체면에 그 분위기에 맞는 옷을 입어야 합니다. 그래서 좋은옷을 입고 싶은데, 세상이 그것을 알고 옷값을 황당하게 비싸게 해놓았습니다.
어마어마하게 비쌉니다. 염려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염려하면 믿음이 적은자 입니다.
다시 말해 보겠습니다.
주님은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말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죄용서함을 받은 이들에게 <믿음이 적은 자들아> 라고 말씀하십니다. 죽으면 천국에 갈수 있다고 확신을 가진 자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옥에서 건지셔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로 옮기실수 있는 분입니다. 우리의 그 많은 죄를 단번에 용서해 주신 분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믿는자입니다.
우리가 죽어서 눈을 감을때, 우리의 영혼을 하나님이 임재해 게신 그곳으로 데려가실 분입니다.
그런데 그러신 그가, 하나님께서, 이땅의 필요를 채우실 분이라는 것을 못믿습니다.
그래서 걱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일하는 것입니다.
그때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어마어마하게 큰것을 믿어 놓고 말도 안되게 작은 것을 못믿는다"
<믿음이 적은 자들아>
영혼의 구원을 믿으면서 이세상에서의 기본적인 필요에서의 구원을 못믿는다는 말입니까?
이것이 말이 됩니까?
이것이 새와 들풀이 조롱해 마땅한 일 아니겠습니까?
그것을 우리가 하고 있습니다.
염려는 작은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잊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진리를 따르기 보다 상황에 의해서 오더되고 있다는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돌볼 능력이 없으시다. 그러므로 내가 나서야 되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와같은 마음이 들때 우리는 이와같은 기도를 해야 합니다.
사도바울이 에베소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했던 내용입니다.
18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19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엡1:18-19, 개역한글)
우리가 마음의 눈이 떠져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무엇으로 부르셨는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천녀왕국과 영원한 나라의 영광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어떤 능력으로 일하고 계시는지 봐야 합니다.
이 기도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 저의 눈을 뜨게 해주십시오"
걱정이 들때마다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제 눈을 떠서 하나님이 지금 저의 삶 가운데 어떻게 역사하시는지 밝히 보고 저의 삶을 맡기고 그 하나님께서 저의 생에서 일하실수 있도록 맏기는 믿음을 허락하옵소서"
다시 말하지만 우리가 항상 믿음이 없는것은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누군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말씀을 통해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하나님이 어떤 약속을 주셨는지, 이 내용으로 우리의 생각을 채우지 않으면 우리의 생각속에 사단이 들어옵니다.
아주 구체적이고 이땅에 필요한 현실적인 필요들과 그에 대한 대비책이 없는 우리의 상황으로 우리의 염려들을 채웁니다. 우리를 걱정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이방인처럼 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쓸데없는 걱정까지 미리 얹혀서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빠져나와야 합니다.
여기서 빠져나온 분의 한 예를 들겠습니다. 베드로가 여기서 빠져 나옵니다.
베드로는 아까 찾아봤습니다만, 주님이 자기 눈앞에 계신대도 불구하고 염려했습니다.
바람을 보고 파도를 보고 염려했습니다. 그리고 물에 빠져 들어갔습니다. 걱정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실때 걱정이 되었습니다.
"내가 십자가를 져야 한다. 내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십자가를 지고 삼일만에 부활해야 한다."
그때 베드로는 주님에 대한 염려가 생겼습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죽으셔야 한다는것에 염려가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그것은 이런 뜻입니다. '주님 그런일이 생기도록 내가 내버려 두지 않겠습니다' '주님께 그같은 비극이 생기도록 제가 보고 있을것 같습니까? 어떻게 제몸을 불살라서도 그일을 막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한 것입니다. 쓸데없는 걱정을 한 것입니다. 해서는 안되는 염려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다음 겟세마네 동산에서 베드로는 또한번 주님을 염려합니다.
사람들이 주님을 체포하러 왔습니다. 횟불을 들고 칼을 들고 왔습니다. 주님이 이사람들에게 잡혀가면 어떡하나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칼을 빼어들었습니다.
잘못 염려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따르는 생애 가운데 여러번 해서는 안되는 걱정을 했던 사람입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벧전5:7, 개역한글)
베드로전서를 마치면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권고'라는 단어가 '심방'이라는 단어입니다. 우리를 찾아오시고 우리의 구체적인 상황속에 우리를 만나러 오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심으로 모든 염려를 주님께 맡기라고 그는 쓰고 있습니다.
그는 어떻게 해서 염려하게 되었는지 압니다. 그리고 그 염려를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도 압니다.
그리고 이제 믿음의 자녀들에게 맡기라고 권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권고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해서는 안되는 염려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 불안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어쩔수 없는, 어떤때는 필요한 행동이라고 미화시켜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불신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일을 빼앗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 것을 염려하지 말라 너희들의 이 세상에서의 삶은 내가 책임진다. 너희들을 영광스럽게 만들려고 내가 결정했다. 이세상의 일은 내가 돌본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 지상에서의 일에서 해방되어서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 너희들의 삶에 필요한 모든것을 내가 책임진다>
정말로 그렇게 믿으십니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라고 믿으십니까?
이제 우리의 삶에서 이 예수님의 약속이 진실됨을 입증하는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주님은 거짓말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우리 가운데 그리스도의 나라가 확장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통치가 넓혀져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으로 하여금 보게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걱정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그 험학한 가운데서도 아무런 걱정이 없는 자들입니다.
세상이 '나도 저와같은 평안을 누리고 싶다' 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간증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도 세상과 똑같이 걱정합니다. 세상사람과 똑같이 삽니다. 누가 구원받길 원하겠습니까?
구원은 무엇입니까? 이론입니까? 우리의 실제적인 삶에서, 돈문제에 있어서,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현실입니까?
아니면 성경이 그렇게 기록되어 있고 말로는 그렇게 하지만 실제로는 비슷한 것입니까?
우리들이 주님을 믿는자답게 살아야 합니다.
주님은 산상수훈에서 사람들의 생각과 견해를 부수고 계십니다.
살인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지켰다고,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미워만 해도, 형제더러 라가라 한번만 말해도 지옥불에 들어갈 것이다>
그 주님께서 동일하게 말씀하십니다. <염려하지 말라> 여섯번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들의 이세상에서의 삶을 책임진다. 너희는 놓여나서 하나님 나라만 구하라>
이것이 저희들의 삶의 원리가 될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