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이레 2022. 7. 10. 00:55
2016년 6월 10일 금요일

강사 : 한봉래 형제님

<마태복음 강해 23>

38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40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41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42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마5:38-42, 개역한글)

저희들이 오해할수 있기에 말씀을 살피겠습니다.
첫번째로 문맥을 보겠습니다.

산상수은에서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은 인간들이 가진 종교를 지적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의 의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 합니다. 자신의 의가 받아지고 하나님께서 인정하리라고 오해하는 것입니다.
그와같은 유대인들의 외적인 종교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구하시는것이 내면적인 것이며 사람들이 이룰수 있는 수준의 것이 아니라는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산상수은의 교훈입니다.

~라고 하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같은 구절들이 계속나옵니다. 윗 구절은 종교이고 아랫부분은 참된 생명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나는 죄인이며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이 요구하는 수준에 이르지 못한다는것을 깨닳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39절로 넘어올수 있습니다.

21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마5:21-22, 개역한글)

그당시 사람들은 자신이 살인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은 정당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마음에 그사람을 미워하였으므로 이미 살인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27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마5:27-28, 개역한글)

종교는 행위가 깨끗하면 하나님께 인정될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외적인 행동뿐 아니라 마음속까지 깨끗치 못하면,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은자는 간음자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흐름입니다.

33 또 옛 사람에게 말한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찌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마5:33-34, 개역한글)

그 당시 사람들은 그 약속을 지켰습니다.
그 약속을 하고 반드시 지켰기에 그들은 신실한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너희의 사정이 어려워지면 피하고 싶고 거짓말하고 싶어하지 않느냐? 그러므로 너희는 거짓말 장이다. 너희의 속이 깨끗해져야 한다" 고 말씀하십니다.

<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이와같은 말씀에서도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스스로 공평하고 객관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모든일을 합리적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너희 마음속에는 용서하지 못한 마음이 있지 않느냐?"

두번째 하나님의 말씀을 외곡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금까지 하신말씀은 전부 십계명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십계명을 유대인들은 외곡시키고 있었습니다.

이전에는 오해하였지만 이제 유대인들은 외곡하고 있는 것입니다.

<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라는 말씀에 대해서 내가 손해를 당하면 그 손해를  그대로 되돌려 주는것으로 성경을 이해하고 있다면 그것은 잘못 읽혀지고 있는 것입니다.

19 사람이 만일 그 이웃을 상하였으면 그 행한 대로 그에게 행할 것이니
20 파상은 파상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을찌라 남에게 손상을 입힌 대로 그에게 그렇게 할것이며
(레24:19-20, 개역한글)

이것은 큰 원칙입니다.
계명은 크게 둘로 나뉩니다. 첫째는 하나님 앞에서의 계명입니다. 두번째 계명은 사람과 관련된 계명입니다. 사람과 사람사이의 지켜야할 원리입니다.

십계명은 기본적으로 도덕법입니다. 시대가 달라져도 이것은 변화되지 않습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법은 십계명이 아니라 민법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형사상의 민법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문제가 생겼을때 이런식으로 처리하라고 주어진 법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적용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의 큰원칙이고 이를 어떻게 적용할지가 출애굽기에 나옵니다.

22 사람이 서로 싸우다가 아이 밴 여인을 다쳐 낙태케 하였으나 다른 해가 없으면 그 남편의 청구대로 반드시 벌금을 내되 재판장의 판결을 좇아 낼 것이니라
23 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24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25 데운 것은 데움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찌니라
26 사람이 그 남종의 한 눈이나 여종의 한 눈을 쳐서 상하게 하면 그 눈 대신에 그를 놓을 것이며
27 그 남종의 한 이나 여종의 한 이를 쳐서 빠뜨리면 그 이 대신에 그를 놓을찌니라
(출21:22-27, 개역한글)

두사람이 서로 싸우다가 임신한 여인이 아이를 조산했습니다. 조산했지만 다른해가 없으면 벌금을 내되 판결을 좇아 내는것입니다.
그러나 다른해가 있으면, 이를 상하게 했으면 이를 갚아야 합니다.

이것을 읽고 어떤사람의 어떤부위를 상하게 했으면 그 부위 그대로 갚아야 하는구나라고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15 사람이 아무 악이든지 무릇 범한 죄는 한 증인으로만 정할 것이 아니요 두 증인의 입으로나 세 증인의 입으로 그 사건을 확정할 것이며
16 만일 위증하는 자가 있어 아무 사람이 악을 행하였다 말함이 있으면
17 그 논쟁하는 양방이 같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 당시 제사장과 재판장 앞에 설 것이요
18 재판장은 자세히 사실하여 그 증인이 위증인이라 그 형제를 거짓으로 무함한 것이 판명되거든
19 그가 그 형제에게 행하려고 꾀한대로 그에게 행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하라
20 그리하면 그 남은 자들이 듣고 두려워하여 이 후부터는 이런 악을 너희 중에서 다시 행하지 아니하리라
21 네 눈이 긍휼히 보지 말라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니라
(신19:15-21, 개역한글)

여기서는 위증의 경우에 대해서 말합니다.
어떤사람이 거짓모함을 하려 합니다. 특정한 사람을 해하려고 모함한 것입니다. 그 모함이 밝혀지면 그대로 모함한자가 당해야 합니다.

이에 대해서도 우리는 모함당하는 사람이 모함한 사람이 하려던것을 그대로 갚아도 되는구나라고 받아들여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직접적으로 복수를 하는것을 허락치 않으셨습니다.
성경에 나온 사상 중 하나가 '복수는 하나님의 것' 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라는 구절을 어떻게 해석하면 좋겠습니까? 신명기와 출애굽기를 보면 모두 재판장에게 갑니다.
재판장에게 가서 재판장이 그렇게 판결해서 쳐야 할것입니다.
개인적으로 복수할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유대인들은 개인적으로 복수 했습니다.
이스라엘인들은 개인적이지만 성경의 기준대 정당하게 복수 하였습니다.
그러나 세상사람들은 항상 당한것보다 과다하게 복수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의도는 개인이 복수하는것은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 사이에 문제가 있을때 반드시 법원을 통해서 해결해야 합니다.

다른것을 한번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저희들이 가지고 있어야 하는것 중 하나가 균형감각입니다. 사랑과 진리는 모순되면 안됩니다. 함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모순되게 여깁니다. 사랑을 하면 진리를 넘어가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랑하면 진리는 행하는 것입니다.

아이가 잘못했습니다. 부모는 분명하게 잘못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아이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잘못했을때 우리는 사랑하기 때문에 그것을 그냥 넘어가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징계해야 합니다.

짐베이커 형제님이 하신 말씀중에 이러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야곱이 결혼을 했습니다. 라헬인줄 알고 결혼했는데 아침에 일어나서 보니 레아였습니다.
이럴수가 있습니까? 그래서 아침에 외삼촌 라반에게 따졌습니다. 그러나 진짜 속인자가 누구입니까?
야곱이 아버지 이삭을 속였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야곱을 라반에 의해서 속임당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이일을 갈라디아서 말씀에 적용하셨습니다.
<무엇이든지 심은대로 거두리라>

무엇이든지 심은대로 거둡니다. 은혜는 심은대로 거두지 않습니다. 우리는 심판받아 지옥가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대속하셔서 우리는 정죄함을 받지 않습니다. 은혜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제외한 모든것은 심은대로 거둡니다.

다윗은 밧세바와 간음하였고 우리야를 죽였습니다. 아이가 태어나고 나단 선지자가 나타나서 다윗의 죄를 정죄합니다.
그 죄대로라면 다윗은 죽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다윗은 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네배를 갚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의 말대로 다윗의 자녀 네명이 죽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루실때 사랑과 진리가 공존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합니다. 그러나 우리죄를 그냥 넘어가지 않으십니다.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죄를 치루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공의없는 사랑이 아닙니다.

갈라디아서 2장에 보면 베드로가 안디옥에 내려와서 이방인과 식사를 하다가 야고보에서 온사람을 보고서 식사를 해놓고 안한척 위선하였습니다.
이를 사도바울이 베드로를 공개적으로 면책합니다.

사실 바울의 여러가지 위치를 보면 베드로에게 그렇게 할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일로 인해서 베드로가 사도바울을 미워했을까요? 베드로는 사도바울의 서신을 성경으로 인정합니다.

사도바울은 1차 전도여행에 마가를 데려갑니다. 그러나 마가는 도중에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버립니다.
바울은 2차 전도예행에서 마가를 데려가지 않습니다. 바나바와 싸우면서까지 데려가지 않습니다.

그러면 바울과 마가는 사이가 나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디모데후서를 보게 되면 바울은 마가가 자기에게 유익하다고 말합니다.

공적인일과 사적인 일이 공존합니다. 진리는 공적인 일입니다.
고린도전서 5장을 보면 출교해야할 죄목이 나옵니다.
우리 모임가운데 출교해야할 사람이 나왔습니다. 우리는 이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에 징계하면 안되는 걸까요? 아닙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징계하는것입니다.

바울과 베드로는 공개적으로 면책했어도 그것으로 인해 개인적인 감정을 가지거나 하지 않습니다.
마가는 바울의 거절을 받고도 바울과 동행합니다.

우리 모임에서 죄가 발생했을때 이 죄의 문제를 다루는 방법은 이와같습니다.
이것은 공적으로 처리해야 합니다. 두번째,  죄인을 처리해야 합니다. 우리는 죄인을 변함없이 사랑합니다.

그가 잘못한 행동은 원칙으로 행동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가 잘못한 행동은 법으로 처리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용서해야 합니다. 이것을 우리가 해내지 못하는 대목입니다.

누군가 우리에게 손해를 입혔습니다. 우리는 용서해야 합니다. 그러나 법대로 처리해야 합니다.

가정에는 부모들이 있고 교회에는 장로들이 있으며 사회에는 지도자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자들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존중해야 합니다.

서로 싸워서 이가 부러졌습니다. 우리는 이를 서로 마음으로 용서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일의 처리는 법대로 제사장에 가져가 처리해야 합니다. 이 두가지를 보시기 바랍니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5:38, 개역한글)

이 말씀의 하나님의 의도는 개인적인 복수를 금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재판장에게 가져가 재판장이 처리할 일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 말씀을 개인적인 복수의 근거로 삼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외곡한 것입니다.

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40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41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42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마5:39-42, 개역한글)

또한 이부분은 우리의 행동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상태를 말씀하고 계신것입니다. 한뺨을 치면 다른뺨까지 돌려대는것은 우리의 마음상태가 그래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그에 대해서 원한감이 없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일로 인해서 이가 빠졌다 하면  그 일에대해서 우리나라 민법상의 일대로 처리하면 됩니다.
그러나 마음으로는 용서해야 합니다.

'뺨을 때린다'는 것은 기본적인 인권을 이야기 하는것입니다. 오른뺨을 맞았다고 합니다. 사람은 보통 오른손잡이 입니다. 그런데 오른편뺨이 맞은것은 손바닥으로 때린것이 아니라 손등으로 돌려때렸다는 것입니다. 곧 그의 인격을 무시하고 짐승취급한 것입니다.

누군가에 의해서 비인격적인 대우를 받았을때 어떻게 하라고 말씀하십니까?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겉옷까지 주라>
이 말씀은 어떻게 이해하면 좋겠습니까?

25 네가 만일 너와 함께한 나의 백성 중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이거든 너는 그에게 채주 같이 하지 말며 변리를 받지 말 것이며
26 네가 만일 이웃의 옷을 전당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돌려 보내라
27 그 몸을 가릴 것이 이뿐이라 이는 그 살의 옷인즉 그가 무엇을 입고 자겠느냐 그가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들으리니 나는 자비한 자임이니라
(출22:25-27, 개역한글)

이옷은 그냥 옷이 아니라 이불인 것입니다. 바디메오가 주님께 입고 나갔던 그 겉옷입니다. 이 겉옷이 없으면 밤에 그몸을 덥힐것이 없습니다. 이 겉옷은 보호입니다. 그가 자기몸을 보호할 마지막 수단인 것입니다.

<십리를 동행하고>
이것은 같이 가는것이 아니라 임의 동행입니다.
곧, 경찰이 와서 연행해 갈때입니다.

이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 통치를 받았기 때문에 이와같은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이것은 자유가 제한되는 것입니다.

<구하는자에게 주고 꾸고자 하는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이것은 재산입니다.
이 말씀대로 한다면 우리는 항상 돈을 지갑에 가지고 다녀야 합니다. 그리고 지하철에서 구걸하는 사람들에게 매일 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그렇게 하는것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우리 재산에 대해서 탐을 낸다면 우리는 기꺼이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물질에 대해서 관대해야 합니다.
주님이 주신것에 대해서 관대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1. 인간의 인격적인 대우
2. 인간의 기본적인 보호
3. 인간의 기본적인 자유
4. 내가가진 재산이 걸려 있을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합당하게 행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재판을 받으시면서 맞으셨습니다.
그러나 말씀하신 것처럼 다른쪽 뺨을 내밀지 않으셨습니다. 곧 문자적으로 행동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일을 당해야 할 이유가 없으신 분입니다. 또한 이 모든일로부터 벗어날 힘이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잠잠히 있으셨습니다.

이처럼 우리에게 이러한 일이 있을때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자녀입니다. 우리의 인격이 주님을 닮는 쪽으로 가야 합니다.
우리가 부당한 대우를 당할때에 우리는 대한민국 법을 사용해서 방어해야 할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으로는 용서해야 합니다. 이 두가지를 다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최후의 보호장치까지 기꺼이 내줄수 있는 마음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보호자 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내가 너를 버리지 아니하리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를 지키시는 하나나님 졸지도 자지도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세번째, 우리의 자유가 제한될때, 우리는 그와같은 사람을 기꺼이 용서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주님안에서 자유로운 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영광스럽게 나타나서 자연까지 탄식을 그칠 자유로운날이 올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안에서 무엇이든지 구하면 주님께서 하신일을 이땅에서 할수있는 능력을 주님께서 주셨습니다.

네번째 재산문제를 보겠습니다.
마게도냐 교회는 극한 가난과 심한 핍박속에서 넘치는 연보를 하였습니다.
어떻게 이러한일이 가능합니까? 부요하신 주님께서 가난케 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진것을 누군가가 원한다면 우리는 기쁘게 줘야 합니다. 그럼에도 주지 않는것은 법에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손해를 끼치는 어떠한 사람도 마음으로 용서할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내 자아가 죽어있어야 합니다.

<이제는 내가 산것이 아니요 내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사신것이라 >

우리는 인격적인 모독을 받을때 나타나는 반응으로 우리의 자아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습이 주님을 닮아갈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31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32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8:31-32, 개역한글)

우리가 이런것에서 부터 자유로울수 있는 것은 우리가 진리를 알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신 진리 입니다.
이 진리는 제자가 압니다. 제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거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거하는 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계속적으로 보고 종일 묵상하는 자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생각하고 순종하고 실천하고 살고 계십니까? 그렇게 될때에 우리는 자유롭게 될것입니다.

말씀을 읽고 외우고 실천하려고하고 노력할때 성령께서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가 실천하게 하실것입니다.
우리는 예수그리스도를 닮은 주님의 자녀입니다.

그래서 누군가 우리의 뺨을 때릴때 모욕스럽게 생각지 않을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모든 모욕과 수치를 당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과 같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계속해서 저희를 축복하셔서 이 선한일이 우리가운데 이루어질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