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의 사람의 집 05_자녀양육1 >
2019년 10월 14일 월요일 / 정형모 형제님
< 하나님의 사람의 집 05_자녀양육1 >
오늘 저희들은 자녀들에 관해서 어떻게 양육할것인가? 하는 주제로부터 저희들이 생각해 보겠습니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22:6).
저희들이 이번 기간중에 하나님의 사람의 집, 이 주제를 놓고 말씀을 처음 시작하게 될때, 시편 127편 말씀을 상고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집을 세우시지 아니하면 집으 세우는자의 수고가 헛되다." 라는 말씀을 저희들이 생각해 보았지요. 하나님의 사람의 집, 또 하나님의 집, 성경이 말하고 있는 이 두가지, 집, 이 두집을 하나님이 생각하시고 고안하시고 계획하시고 또한 하나님께서 이 두 집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지어지기를 원하시고 또 말씀을 통해서, 성령님을 통해서 역사 하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사단이 두 집을 무너뜨리고자 처음부터 지금까지, 앞으로도 계속 노력할 것이다. 라고하는 현실을 저희들은 말씀에서 밝히 깨닫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언제나 하나님으로부터 도움을 얻고 또 마귀로부터 저희들이 반대를 받는 그 사실을 항상 저희들이 기억하게 되는데, 저희들이 이제, 자녀양육, 이것을 다른말로 하면 부모 노릇입니다. 부모노릇이라고 하는것을 세상 사람들은 이렇게 정의 하지요. 아이가 출생하고 난 다음 성장할때까지 육체적, 지성적, 감성적, 사회적 발달을 위한 노력이다. 과정이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정의하고 있는 부모 노릇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부모노릇을 뭐라고 말씀하고 계시는가? 하나님께서는 우리 자녀들을 기업으로 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맡기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태의 열매는 상급입니다. 그들은 고귀한 존재다. 귀찮은 존재나 성가신 존재가 아니라 자랑스러운 존재다. 상급이라는 것은 항상 자랑스러운 것이죠. 그리고 드러내 보여주기를 빠원하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신 이 기업과 상급, 그것을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선물로 받았기 때문에 그들이 성장하고 양육을 받는 것은 미래를 위해서 준비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어릴때에 무력합니다. 부모님에게 전적으로 의존되어 있습니다. 그는 자기혼자 살아갈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보호하고 그들을 양육하고 그래서 그들을 나중에 하나님께 도로 돌려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모 노릇입니다. 다시 말해서 부모는 부모노릇에서 청지기의 직분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물론, 그들이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감성적으로 사회적으로 지성적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성장하도록 도와줘야 합니다. 누가복음 2장 마지막절에서 우리 주님이 성장하신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요. 우리 주님은 완전하신 분입니다. 또 인간으로 오셔도 완전하신 분인데, 주님께서는 성장하셨습니다. 그 성장의 본은 우리에게 패턴이 되고 있습니다. 그 성장은 네가지로 말씀하고 있지요. 지혜가 자라고 키가 자라고 하나님에게 사랑을 받고 사람에게 사랑을 받았다. 키가 자랐다. 육체적으로 자라는 일에 있어서 부모는 양육할 책임이 있지요. 그 다음에, 지혜, 지성적으로 지식적으로 그리고 지혜를 가지고 자랄수 있도록 부모는 길러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에게 사랑을 받도록 길러야 한다. 사람에게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어떻게해야 겠습니까? 이기적인 사람은 사람에게 사랑을 받지 못하죠. 자기 주장만 하는사람, 다른 사람에 대해서 배려하지 않는사람, 사랑받지 못합니다. 사회적인 생활을 정상적으로 또한 아름답게 할수 있도록 가르쳐줘야 한다, 길러줘야 한다는 말이죠. 우리 주님께서는 그렇게 자라셨습니다.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영적으로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과 교통하는 그와 같은 삶, 영적인 삶. 부모 노릇에서 세상사람들의 정의에는 바로 이 부분이 전혀 결여되어 있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에게 부모 노릇이라고 하는것은 돌려드린다고 하는 개념이 없습니다. 하나님에게 돌려 드려야 한다는 개념이 없습니다.부모 노릇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린아이들이 의존적입니다. 출생에서부터 한살, 두살 성장하게 될때 성인이 되지요. 성인이 되기 전까지 부모에게 의존적으로 도움을 받아야 하고 양육을 받아야 하는데 그 과도기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청소년기 입니다. 10대라고 말하지요. 이 기간은 참 혼란스러운 기간이라고 흔히 말하는 이유중의 하나가 의존적인데서 독립으로 옮겨가야 하는 기간 입니다. 또한 특권을 항상 누리는데 익숙해 있지요. 왜냐하면 부모님이 항상 돌봐주지요. 그래서 항상 누립니다. 왜냐하면 부모님의 희생에 의해서 사랑에 의해서 돌봐줌에 의해서 누리지요. 그러나 성인이 된다고 하는것은 책임을 맡아서 이루어 드려야할 그러한 시기가 되지요. 이 과정중에 이것이 어떻게 정상적으로 아름답게 잘 과도기가 성인으로 이어질 것이냐? 하는 것이죠 결국은 독립하는 것입니다. 독립하기 위해서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독립하기 위해서는 가치관이 있어야 합니다. 독립하기 위해서는 분별하고 또한 선택에 있어서 바른 결정을 할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이와같은 기간까지 부모님들이 어떻게 돌봐줄 것인가? 어떻게 양육하고 훈련할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부모 노릇, 이것은 저희들이 생각할때 참 저희들을 겸소케 하는 주제고요. 이와같은데서 저희들이 마음속에 어려운 것들을 이 기간중에 느끼게 됩니다. 이 부모노릇과 관련해서 절망적인 요소중에 하나는 부모가 되서 자식을 낳고 자식을 기르고 이러한, 부모도 훈련과정입니다. 물론 부모가 자식을 훈련하기 위해서 그런 자질과 능력과 또한 지식과 이런 것들에 대해서 배워야 할 필요가 있지요. 그런데 부모가 되었을때 자식을 기르면서 여러가지 시행착오가 있습니다. 또한 어려움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하나씩 하나씩 배워나가다 보면 많이 배워서 익숙해질만하면 사실은 그때 가서는 아이들이 다 자라서요. 그때는 더이상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이 참 우리들이 안고있는 어려움 입니다. 그것이 만일 사실이라면 우리 자라나는 새 세대들은 아직 어린 세대들, 아직 성인이 되지 않은 세대들, 어떻게 미래를 준비해야 할까? 얼마 있으면 나는 부모가 됩니다. 만일 주님께서 나를 결혼으로 인도하는 길로 인도하신다면 나는 부모가 될 겁니다. 나는 자식을 길어야 합니다. 부모노릇을 해야 합니다.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 언제부터 부모노릇을 준비해야 할것인가? 부모노릇을 언제부터 준배해야 합니까? 결혼하고 다음날부터요? 아닙니다. 그것은 너무 늦은거죠. 사실은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사람의 집을 짓기 위해서 하나님의 사람, 즉 그리스도인이 되자마자 우리는 이제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저희들이 부모노릇을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생각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저희들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것이고요. 우리가 믿는 하나님, 그분은 우리의 아버지 이시다. 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되고 난 이후에 우리는 우리의 삶 전체가 자녀로서 아버지의 양육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부모노릇에 대해서 배워야 할 시기는 언제인가? 부모가 되서가 아니라 구원받자마자 우리는 나는 자녀고, 하나님께서는 아버지이신데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나를 자녀로 기르시는가? 하는 것을 믿음의 생활 안에서 한가지 두가지 세가지 계속해서 배워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 아버지는 나를 자식으로 어떻게 기르시는가? 내가 잘 했을때, 내가 못했을때, 내가 실패했을때, 내가 성공 했을때 우리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나를 다루시고 계시고 나를 성공하도록 하게 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셨는가? 라고 하는 점들을 나는 그리스도인이 되고 난 이후부터 계속해서 경험하게 되는 것이죠. 거기에서 부모노릇에 관해서 많은 통찰력을 우리는 얻게 됩니다. 부모노릇이라고 하는것은 어느 주말에 가서 세미나를 통해서 뭔가를 배워서 나는 이제 이것을 행할수 있다. 이 기술을 행할수 있다는 주제가 아닙니다. 부모노릇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 입니다. 그 삶을 통해서 우리가 이 일을 행하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를 자식으로 자녀로서 어떻게 다루시는가 하는 것을 생활 속에서 면밀히 주시하고 살펴보고 이제 복습하고 또한 관찰하고 그리고 그 모든 경험 속에서 주님께서 이렇게 다루시는가? 이렇게 훈련하시는구나, 라는것을 우리가 배워 가야겠다는 것이죠. 부모노릇에서 제일 첫번째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조금전에 사단은 항상 공격한다. 사단은 하나님의 집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각 단계마다 다 공격을 합니다. 출생, 출생때까지 잘 보존이 되어야 하는데 사단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까? 유산도 합법화 시키고 아이를 죽이는 것도 괜찮다. 의학적으로 또는 여러가지 사회적인 이유 때문에, 인권 때문에, 여성 권리 때문에, 이런 이야기로 사단은 인류 역사에서 각 나라마다 유산이 합법화되는 그런 일들이 있었죠. 있습니다. 각 나라마다 때는 다 다르지만 사단이 공격합니다. 출생 이전에 아예 지워버리라라는 식으로 공격하는 거죠. 우리는 모세가 태어났을때 히브리 부모들이 바로의 명령 때문에 벌벌 떨고 다 자기 아이들, 다 귀하지요. 아무리 그들이 노예라고 하더라도 부모로서 태어난 아이가 귀하지 않을 부모가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바로가 하수에 갔다 던지라고 했을때에 다 던졌습니다. 눈물을 흘리고 괴로움 가운데 다 던졌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서 대단히 암흑한 시대였습니다. 그 기간중에 위대한 부모가 있었습니다. 다른 부모와는 다른 부모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므람과 요게벳이죠. 그들은 사실상 자녀에게 위대한 유산을 남깁니다. 왕의 명령을 거역하고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두려워한 부모였습니다. 그래서 삼개월을 숨겨 기르지요. 그래서 나중에 더이상 숨길수 없을때에 갈상자에다가 안밖으로 역청을 칠하고 그 안에 모세를 넣고 하수에 던진게 아니라 뛰웠어요. 그리고 그냥 뛰워 있는것이 아니라 미리암이 살펴보죠. 그러나 주변을 보십시요. 악어가 사방에 둘러 있습니다. 이것이 현실 입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나안땅에 들어갈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사백년동안 종살이 하다가 가나안땅으로 들어가게 될때,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관영하게 될대 그리가서 그 족속들을 다 전멸시키라고 말씀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아모리 족속들의 실행에 대해서, 그들은 물론 우상숭배, 우상숭배는 애굽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모리 족속, 가나안 땅의 일곱족속들의 그들의 삶, 무엇이 하나님께서 견딜수 없는 그들의 실행이었습니까? 그들은 아이들을 불 가운데 통과하게 했습니다. 자기들의 신의 이름으로 아이들을 불에다가 넣어서 태워죽이는것을 신에게 헌신한다고 했습니다. 그런실행은 어떻습니까? 여기 신이 있습니다. 모압의 신, 암몬의 신, 그런 이방신들도 있고요. 가나안 사람들이 생각하는 신들이 있습니다. 그 금속으로 만들 신들 뒤에는 화로 입니다. 용광로 입니다. 거기에 불을 피웁니다. 그래서 이 금속의 상이 완전히 달구어졌습니다. 그리고 신의 이름으로 어린아이를 그 손에갔다 올려놓지요. 그때 아이는 어떻게 하겠어요? 아이의 비명소리, 그 비명소리가 그들에게 들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들의 양심을 무디게 하기 위해서 여기에 북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전혀 아이의 비명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자지러지는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아이를 드렸습니다. 나중에 저희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아하스 왕은, 자기 아들을 불에다가 넣었어요. 이스라엘 민족이 이 일을 답습했다 그 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도 이방 사람들의 이와같은 실행을 따라했다. 마귀는 어린아이 시절에 아이를 죽이려고 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집을 망가뜨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그 아이들이 자라게 될때, 구원받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것이 구원받지 못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성공적으로 하나님의 사람의 집을 망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구원받으면 그들이 이제 준비할수 없도록, 이제 준비해야 합니다. 이 시기는 아이들이 구원받으면, 빨리 구원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구원받으면 준비해야 합니다. 첫째, 아이들 부모노릇은 무엇인가? 아이들을 보호해야 합니다. 헤롯은 베들레햄에서 두살이하 아이들을 다 죽여버렸지요. 이게 다 사단이 하는 일들입니다. 이것은 물론, 육체적인 죽음이었습니다만 사단은 영적으로 아이들이 구원받지 못하도록 자기의 계획을 이행하도록 그는 부지런히 역사하고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점에 대해서 부모가 되려고 하는 사람들은, 결혼하는 사람들은, 이 점에 대해서 대단히 현실적으로 생각해야 됩니다. 우리는 이 일에 대해서 이 사단의 역사에 대해서 무언가 로맨틱하게, 이 세상에서 그냥 그런일이 있으려니 라는 생각이 아니고요. 이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이요, 영혼을 죽이는 일이요, 정말로 하나님의 집을, 하나님의 사람의 집을 무너뜨리려고 하는 줄기찬, 역사다. 라는것을 우리 마음속에 깊이 세기고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야 되겠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십니다. 그래서 이와같은 사단의 공격, 그래서 자녀들을 죽이려고 하는 이와같은 일에 대해서 우리 마음속으로 주님을 철저히 의지하고 주님의 말씀을 따라서 이와같은 공격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무너뜨릴수 있느냐? 하는 이 일을 강구해야 되겠다. 이것이 부모노릇입니다. 아이를 구원받지 못하게 하고요. 구원받고 난 다음에는 주님 안에서 그들이 말씀. 기도, 그들은 겸손한 법도 배워야 하고요, 정직한 법도 배워야 하고요. 다른사람을 배려하는 것도 배워야 하고요, 주님 안에서 그들은 근면한것, 책임감, 또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것, 어울리는 일들, 이런 모든것들을 그들은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그 아이이들이 어릴때, 자라게 될때 우리 자녀들을 잘 보호해야 합니다. 여러가지 점에서 보호해야 합니다. 그들을 구원받게 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육체도 보호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얼마나 많은 성추행, 성폭행 이런것들이 있습니까? 이와같은 일들에 대해서 쉬쉬 하고 이야기하기 참 부끄럽고 그래서 이야기하지 않는 동안에, 포식자들은, 우리 자녀들을 잡아먹으려고 하는 포식자들은 사방에 도처에 있다. 우리 부모님들이 이것을 잘 깨닫고 그 점에 대해서 준비하고 보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모의 책임입니다. 그들의 육체, 그들의 혼, 영 다 보호해야 한다. 그것이 부모노릇 아니겠어요? 보호만 하는것이 아닙니다. 양육해야 합니다.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딤후1:5).
디모데는요, 그의 아버지는 헬라인이고 그의 어머니는 유대인이죠. 유니게죠. 그의 외조모는 로이스 입니다. 아버지는 이방인이지만 그는 구원받지 않은 사람이죠. 그러나 어머니와 할머니는 믿는 사람으로서, 여기 대단히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거짓없는 믿음을 소유한 사람" 입니다. 거짓없는 믿음이라는 말은 무엇입니까? 믿음은 내가 주님을 믿었다고 하는 구원에 관해서 고백 합니다. 나를 구원하신 그분은 어떤 분이신가? 어떤 구원을 나에게 허락하셨는가? 어떤 생명의 선물을 나에게 주셨는가? 그리고 그분을 따라가는 특권은 무엇이고 그 기쁨은 어떤 것인가? 라고하는 점에서 고백 했지요. 그리고 그 고백에 따라서 일치된 살믕ㄹ 산다라는 말입니다. "거짓없는 믿음" 그것을 어머니도, 할머니도 가지고 있었고, 그 거짓없는 믿음이 디모데에게도 전달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말씀을 통해서 양육했기 때문입니다.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3:15).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다." 어떻게 알았어요? 부모님, 여기 디모데의 경우는 어미놔 외할머니가 거짓없는 믿은, 그것을 그대로 성경을 가르쳐주고 말씀해주고 그것을 전수해줌으로 디모데도 나중에 사실은, 아마 사도바울이 그곳에 가서 복음의 말씀을 증거하게 될때, 그는 말씀을 받고 구원받은 사람이 되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항상 나의 영적인 아들이라고 이렇게 말하고 있죠. 첫째, 아이들이 부모노릇을 통해서 부모님의 수고와 기도와 또한 그들에 대한 관심과 또한 주님앞에 매달리는 그 마음을 통해서 그들이 보호받고 양육받고 그 다음에 어떻습니까?
"한나가 마음이 괴로와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서원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나를 생각하시고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사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삼상1:10-11).
주님에게 드리는 것입니다. 주님은 부모님에게 자식을 맡겼어요. 그리스도인 부모라면 이 선물, 주님이 주신 이 선물을 어떻게 가꾸고 양육하고 또한 그들에게 믿음을 전달해 주고 또한 그들이 믿음 안에서 어떻게 미래를 준비하고 자기를 준비를 살아갈 것인가? 하는 점에서 그들은 노력하지요. 그리고 그들이 이제 성인이 되게될때 떠나 보내야 합니다. 독립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제 성인이 되었을때 가치관이 있어야 합니다. 자기 앞가림을 해야 합니다. 결정하게 될때 바른결정을 해야 합니다. 그것은 참 그들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위대한 가치, 영원한 가치를 알게되면 그들이 선택하는 모든일에 있어서 바른 선택을 할것이고, 그들은 성인이 되었을때, 만일 결혼 한다면, 가장으로서 돕는배필로서 그들이 나가야 할 길을 바로 걸어갈 것입니다. 그와같은때까지 부모는 그들을 계속해서 양육할 것이다. 그 다음에, 성인이 되었어요. 거의 대부분 결혼하지요. 결혼하면 부부가 되어서 어떻게 합니까? 부모노릇 끝났습니까? 아닙니다. 성인이 되었을때, 슬하에서 양육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제 그들은 독립 했지만 그들은 기도로, 그리고 모든물심양면으로 지원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또 자식을 낳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자식을 낳게될때 부모로서 이야기하게 될때 어떤 도움을 그 부모에게 줌으로 그 다음 세대에게 하나님의 위대한 은혜를 전달해 줄수 있을까? 라고 하는것에 대해서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부모가 이제 조부모가 되어서 행할 일들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우리가 태어나서 주님앞에 갈때까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일이다라는 것을 우리는 마음속에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부모노릇을 위해서 첫째, 자식들, 아이들을 보존해야 합니다. 마귀가 죽이려고 하는 이 모든 공격에서 첫째, 보호해야 합니다. 보호하는 것중에 하나가 이제 구원 입니다. 영적인 구원입니다. 물론 육체적인 모든 안보,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또 한 그들이 성적으로 고통받지 않도록 포식자에게 먹히지 않도록 부모는 조심해야 합니다. 항상 경계해야 합니다. 이것을 경계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때는 우리 자식들의 육체를 망가뜨리게되는 포식자에게 내 줄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의 부모들이 깊이 생각하고 항상 경계하고 살아야 하겠다. 그것은 그리스도인 부모들의 지혜 입니다. 마귀는 어릴때 구원 못받게, 그 다음 준비하지 못하게, 그 다음 청소년기에 들어서요. 십대에 들어서는 이와같은 수많은 일들을 소개함으로 그들로 하여금 혼란속에 빠뜨리고 미래에 대해서 성인이 되어서, 자기 책임을 감수하고 그리고 제대로 독립할수 있도록 하지 못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성인이 되었을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자기 앞가림을 해야 합니다. 자기 책임을 감당해야 합니다. 선택을 해야 합니다. 이 모든일에 있어서 주님의 인도를 받는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만일 그들이 주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주님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그들이 주님의 인도를 받지 못하도록 사단이 막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잘못된 결정을 하도록 한다는 것이죠. 또한 결혼도 마찮가지 입니다. 결혼을 귀히 여기는 것이 아니라 결혼을 천히 여기도록 만드는것, 그리고 떠나고 연합하고 한 육체가 되는것, 이 과정을 망가뜨리는 것, 여기에 대해서 잘못 생각하거나 잘못 실천하거나 함으로 인해서 이 가정은 대단히 어려워지고, 가정이 남편과 아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의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내는 간증을 나타내지 못하고 깜깜하도록 만드려는 것이 사단의 역사다. 부부관계, 마찮가지 입니다. 영과 혼과 욱의 전인의 교제, 주님의 말씀 안에서 이와같은 교제가 정상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도록 하는것, 이 모든것은 다 하나님의 사람의 집을 무너뜨리려고 하는 사담의 역사입니다. 오늘 부모노릇에 대해서요. 청지기 노릇, 청지기 직분, 이것을 하지 못하도록, 잘못된 개념, 자식에 대한 잘모소딘 개념, 부모노릇에 대해서 자녀 양육에 대한 잘못된 생각, 이런 것들은 사단이 우리를 향해서 노리고 있는 것이고, 물론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말씀에서 어떻게 해야 할것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 주님은 상세히 말씀 하셨지요. 그래서 사실상 사단의 공격이 있어서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 지혜롭게 나갈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오늘 그 점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부모노릇, 부모로서의 책임, 무엇입니까? 첫째, 자식들 앞에서 살아야 합니다. 자식들 앞에서 산다는 말은 자식들 앞에서 본을 보이고 산다는 말입니다. 자식은 항상 보고 있습니다. 가장많이 보고 있는것이 자식들 입니다. 자식들이 아버지와 어머니의 삶에 대해서 보고 있는데 어떤 본을 보일까? 라고 하는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죠. 부모노릇 부모의 책임에 대해서 제일 첫번째, 부모가 기억할것은 자식들 앞에 살고있다. 그래서 참 주님앞에 더울을 구하고 살아야 합니다. 일거수 일투족 내가 행하는 모든 발언, 말, 언어, 모든것이 다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점에 대해서 주님의 도움을 각별히 구하고, 기도하고 주님의 도움을 받고 부모는 살아야 될 것이라는 것을 저희들 모두가 다 주님 앞에서 깊이 생각하고 주님의 은혜를 구해야 할 것입니다. 자식들 앞에서 본을 보인다고 하는거요, 본을 보이지 못하면 참 낭패가 되죠. 사실상 부모노릇이라고 하는것, 부모노릇을 제대로 하려면 토양이 있습니다. 그 토양은 부부관계입니다. 부부관계라고 하는 그 토양이 있는데, 자녀 양육이라고 하는 나무가 자랍니다. 그렇게 어떻게 열매가 많이 맺힐까? 맻히지 못할까? 가장 중요한 터전은 부부관계 입니다. 결혼하고나서 바로 아이가 있지않죠. 적어도 신혼의 기간이 있고, 어느정도 기간이 흐르고 난 다음에 아이가 생깁니다. 그 후에도 물론 부부관계는 되지만 결혼하고나서 두 사람의 관계는 어떤 관계로 유지되고 있을까? 영적인 본을 보이고 있는가? 두 사람 사이의 이 일, 모든 생각과 그들이 교류하는 모든 것들은 신령한 것인가? 주님께서 원하시는 그런 목적을 위해서 두 사람은 한 마음이 되어 걸어가는가? 아닌가? 라고하는 것은 자식이 태어났을때, 그 자식들은 그 부부관계가 만들어주고 있는 분위기 속에서 그들은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으로부터 본이 되는 것이죠. 어떤 본인가요? 첫번째 자식들 앞에서 산다는 것을 저희들이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두번째, 자식을 인도하는 것입니다. 자식들 앞에서 본을 보이고 살 뿐만 아니라 자식을 인도한다. 어떻게 인도할까? 신명기 말씀에서 구약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씀 했습니다. "너희는 자식들에게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미간에도 세기고 이제 문설주에도 세기고 낮이나 밤이나 그들에게 계속 말씀을 가르치라. 그리고 그들에게 가르침으로 인해서 그들은 절기가 되면 뭐라고 질문하도록 유도 했습니까? "이 절기는 무슨 뜻입니까?" 아이들이 그렇게 부모에게 묻도록 만들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모임에서 만찬상에서 떡이 돌게될때, 우리 자식들은 마음에 의문이 생깁니다. 우리가 그것을 실천하면 자식들은 의문이 생깁니다. 왜 똑같은 떡인데 나는 못먹을까? 그런 의문이 생기지 않습니까? 대단히 단순한 의문이 아닙니까? 그러나 이와같은 일들은 우리가 매주 행하게 되는데 아이들이 그것을 보면서 이제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와같은 것들이 신령하고 경건하게 이루어지게 될때, 그들 마음속에는 무엇인가 전달되는 것들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주 어려서 아직 말을 못할때, 뭔가를 분별하지 못할때라도 그들은 무언가를 이제 습득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도해야 합니다. 말씀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자식들에게 영적인 유산을 남겨주는 것입니다. 이 영적인 유산은, 세상 사라믇ㄹ은 물질을 남겨주려고 하죠. 그 물질을 남겨주려고 그렇게 아둥바둥하기 때문에 결국에는 형제들이 싸움이 납니다. 그 유산 때문에 싸움이 나고 원수가 되고 이런 것들은 얼마나 흔합니까?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가장 안전하고 가장 고귀환 유산, 보이지 않는 유산 입니다. 만질수 없는 유산 입니다. 물질화 할수 없는 유산이지만 그것보다 훨씬 고귀하고 그 유산을 그들이 받게 되면 어떤것을 받지 않는다해도 그들은 넉넉히 이 세상을 살아갈수 있다. 그리고 풍요롭게 살아갈수 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부모를 통해서요. 자식들에게 남겨줄수 있는 보이지 않는 유산입니다. 아까도 말슴 드렸지만 요게벳, 아므람 이 부모는요, 다른 모든 부모는 왕의 명령이 무서워서 벌벌떨때 그들은 무엇을 행사 했습니까? 그들은 믿음을 행사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왕의 명령을 무시해 버렸습니다. 왕의 명령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이를 숨겼어요. 아이를 보호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유산을 남겼습니까? 그 부모는 아이를 오래 보지 못했습니다. 바로 궁으로 들어갔고요. 이제 그는 거기서 얼마동안 유모로서, 생모인데 유모로서 젖을 먹였지만, 그 부모가 아이에게 남겨준 위대한 유산은 뭡니까? 전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행사했던 똑같은 겁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 그리고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 그 유산이 모세에게 전달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히브리서 11장 말씀을 보면 모세는 임금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유월절을 제정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유산이 그대로 그에게 돌아갔습니다. 유산을 남겨줘야 합니다. 그 다음에 자녀로 가게해야 합니다. 자녀로 떠나게 해야 합니다. 아까 한나가 아이를 하나님께 도로 드리겠다고 말씀했지요. 이것은 그냥 떠나보내는 것이 아니고요.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일에 있어서요. 이것은 쉬운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아들달과 부모는 딱 하나로 뭉쳐져 있었기 때문에 더나간다고 하는것이 그렇게 쉽지 않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들이 성숙하고 부모노릇을 통해서, 양육을 통해서 그들이 성숙하고 또 영원한 가치를 깨닫고 또한 하나님을 그들이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귀히 여기고 그래서 그들 마음속에 무엇인가 사물을 결정하는 그런 마음을 갖게 되고 그래서 자기 자신들도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독립하는 그와같은 살믕ㄹ 살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모노릇이다. 그것은 청지기 직분이다라고 말할수 있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부모노릇이 청지기 직분이라고 하는 것에대한 개념조차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와같은 책임을 느끼고요. 자녀들을 양육하게 될때, 하나님 말씀을 따라서, 하나님께서 저희들에게 지시하신 내용을 따라서 저희들을 가르치게 될때, 그들은 이제 성인이 되서 그들은 독립해서 나가게 될때, 주님께 영광을 돌리고요. 부모로부터 받은 영적인 보이지 않는 유산을 통해서 그들은 하나님께 위대한 일을 할수 있고, 하나님을 섬길수 있고,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유익을 끼칠수 있고, 또한 그들 자신이 행복하도록 만들어줄수 있다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부모노릇이라고 생각 합니다. 이제 잠언 말씀에서 저희들이 몇구절을 살펴보겠습니다.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잠22:15).
이 말씀은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했다. 인간은 타락한 존재라는 위대한 이 교리를 축소해서, 압축해서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있는 구절입니다. 아이 마음속에 미련한 것이 얽혀 있습니다. 아이는 잉태하는 순간에 죄 가운데서 잉태되었습니다. 태어날때가 아니고 잉태된 순간에 죄 가운데 잉태되었습니다. 그래서 열달 뱃속에 있을때 계속해서 그는 죄 가운데 잉태되고 죄 가운데 출생한다. 기억하시죠? 성경은 이 말씀을 하고 있는데 이제 자녀들의 양육과 훈련과 진계와 관련해서 이 말씀이 가장 토대가 되는 말씀 입니다. 세계대전 이후에 세상 사람들의 마음속에 아이들에게 징계하고 훈련하고 이런 것들은 아이들의 자유 의사를 파괴한다. 창조력을 무너뜨린다는 생각이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그런 생각 속에서 사람들의 철학과 사상은 이 훈육에 관련해서 아이들을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 가장 좋다는 생각으로 점점 발달하게 되었습니다. 이와같은 사상은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또한 심리학자 마음속에 그것을 전파하는 일로 인해서 많은 부모들 마음속에 그것이 고상한 것으로 그와같은 것은 대단히 받아들일만한 것으로 그들이 받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어린아이에 대한 훈육, 또한 징계, 양육은 무엇을 토대로 있는가? 어린아이에 대한 양육은요, 사람들은 그에게 좀더 똑똑하게 좀더 능숙하게 능력있게, 창조력이 있게 만들어서 미래에 기여하는 사람으로 능력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그런과정이다라고 생각 합니다. 그것은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이고요. 하나님의 말씀과 너무나 거리가 먼 것입니다. 징계의 가장 기본은 터전은, 인간이 죄인이다라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죄인이기 때문에 이 미련한 것이 마음속에 얽혔다. 미련만 것이 마음속에 있다는 말이 아니예요. 미련한것이 마음속에 엵혀있다는 것은 집안에 가구를 놓고 책장을 만들고 할때, 책장을 사서 가져다 놓을수 있어요. 그것은 가구를 가져다 놓은 겁니다. 그러나 처음 집을 질때, 책장을 아예 벽에다가 만들어 놓는것, 빌트인 셀프, 그것은 처음부터 만들어 놓은 거예요. 아이 마음속에 미련한것이 그냥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미련한것이 얽혀서 거기 처음부터 존재한다. 잉태될때부터 그들은 죄인이다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죄가 그들의 마음속에서 멀리 가도록 하는것, 다른말로 하면요. 그들을 구원하는것 그것이 징계다는 말입니다. 물론 징계는 그것뿐만은 아닙니다. 구원받고 그들이 어떻게 자기가 자기의 미래를 위해서 여러가지 것들을 주님으로부터 받아서 그들의 미래를 정말로 영과 혼과 육으로 준비할수 있을까? 독립할수 있을까? 라는 점에서 부모는 역사하지요. 노력하지요. 그러나 가장 기본, 첫발자국은 어린아이의 양육에 있어서 첫 발자국은 구원받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22장 15절 말씀에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할 것이다" 라고 말씀 했습니다.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잠22:15).
두번째, 잠언 13장 24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잠13:24).
여기 초달, 이 초달이라고 하는것은 회초리를 가지고 때려주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선생님에게 아이들, 학생들을 보낼때 회초리도 같이 보냈어요. 많이 때려서 가르쳐 주십시요. 오늘날은 안그렇습니다. 어디 그런일이 있습니까? 체벌은 사라졌고요. 그것은 범법행위고요. 이제 세상은 많이 달라져 버렸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아이들을 갈쳐야 할 것인가? 새로운 세대들은 어떻게 훈련을 받을 것인가? 무슨 훈련을 받을것인가? 라는 것에 대해서 생각있는 교육자들은 고민하고 있습니다. 또한 생각있는 부모님들은, 말씀을 알고있는 부모님들은 마음속에 많은 부담들이 있습니다. "초달을 못하는 사람들은 자식을 자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초달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다. 징계는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마음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만일 징계하지 않는다면 자식을 미워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식들, 어떤 자식을 원합니까? 사람들에게 미움받는 자식을 원합니까? 이기적인 자식을 원합니까? 집안에서 오냐오냐 해줘서 자기밖에 모르고 다른사람것도 다 뺏고 그리고 그렇게해도 사람들은 언제나 자기가 옳다고 이야기 해 주고 그런 사람을 원합니까? 그런사람은 집안에서는 뭐 혹시, 용인될수 있고 받아들여질수 있어요. 그러나 조만간에 그는 사회에 나가게 될때 그는 사회로부터 버림받게 될 것입니다. 그는 어쩌면 범죄자가 될 것입니다. 이와같은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말씀 했어요. 초달을 하는 사람은 자식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자식이 나중에 사회에 나가서 독립해서 나가고, 하나님께 도로 돌려 드리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부모님들이 원하는 그런 목표가 있다면, 초달을 하라. 징계를 하라는 그런 말씀이죠.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치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죽지 아니하리라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 영혼을 음부에서 구원하리라"(잠23:13-14).
"아이를 훈계치 아니치 말라" 여기 부정의 부정입니다. 이중부정은 대단히 강조하는 것이죠. 아이를 반드시 훈계하라는 말씀이죠. 여기 채찍으로 때릴찌라도 죽지 않는다. 이 말씀을 어떤 사람은 사랑합니다. 그런 사람을 우리는 디스플리나리아라고 말합니다. 징계를 아주 사모하는 사람, 그런 사람은 잘못하면 아이를 학대할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우리는 잘 이해해야 합니다. 채찍은 무엇을 말할까요?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니라"(롬13:4).
여기 정부 관리를 뭐라고 말합니까? 정부 관리는 칼을 차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고대나 현대나 중세나 정부 관리가 항상 칼을차고 다녔습니까? 아닙니다. 칼이라는 이 말은 권위라는 말입니다. 정부가 행사해야 하는 이 권위, 그 권위를 칼이라 묘사했습니다. 여기 잠언 말씀에서 채찍으로 때린다는 말은 무엇을 말할까? 이 채찍이라고 하는것은 징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징계는 수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징계에는 칭찬도 있습니다. 또한 격려해주고 박수쳐주고 이런 저극적인 분야가 있고, 징계에서 부정적인 분야는 책망하고 꾸짖고 그리고 체벌하는 것입니다. 이 두가지 양면이 다 있는데 이와같은 징꼐, 모든 징계를 통해서 채찍으로 때릴찌라도 죽지 않는다. 징계한다고 하는 말입니다. 만일 채찍으로 때리면, 만일 징계하면 그를 지옥에서, 음부에서 구원하리라. 그렇다면 다 징계하면 구원받습니까? 이 말씀은 징계를 통해서 그가 궁극적으로 구원받게 된다. 오늘 저희들은 그 점에 대해서 조금 살펴보고자 합니다.조금후에 저희들이 어떻게 징계가 아이들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도록 할까? 하는 점에 대해서 생각하겠습니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22:6).
"마땅히 행할길" 이라고 하는것은 무엇이겠어요? 우리 아이에게 무엇을 가르칠까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누구에게 가르칩니까? 아이들에게 가르칩니다. 세번째는 "가르치다" 이것은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가르치는것이 아니고 훈련하라는 말입니다. 가르치는것과 훈련은 좀 다릅니다. 가르치는것은 이론적으로 가르쳐도 다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훈련은 무엇입니까? 가르친 내용들을 실제적으로 실행에 옮기도록 실제 생활에서, 실제 현장에 나가서 그것을 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반복해서 해서 그것이 제대로 되도록 코칭한다. 여러분, 군인이 되어서 군대로 나가게 될때 제일처름 훈련받지 않습니까? 그들은 교육을 물론 받습니다. 그리고나서 어떻게 합니까? 밖에 나가서 총 가지고 뒤어다기소 포복하고 그 다음에 총을 쏘고 구보를 하고 산을 넘고 줄을 타고 이것이 훈련입니다. 아이들을 교육하는 일은 그냥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 아이들로 가르친 것들을 그들의 생활속에서 실제로 하는 것을 보고 하는지 안 하는지를 확인하고 그래서 확인해서 그것이 몸에 베도록 만든다. 그것이 훈련 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마땅히 가르칫것, 아이들에게 마땅히 가르칠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 아이들은 죄인이기 때문에, 이련한 것이 마음에 얽혀있기 때문에, 이기적이기 때문에, 거기에서 이제 떠나야 합니다. 그 떠나도록 하는 과정에서 부모가 행할 일은 무엇인가? 가르쳐야 될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마땅히 가르칠것, 그것을 훈련시켜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 결과는 무엇인가? 노인이 되서도 떠나지 않는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아이가 노인이 되어도요. 그 가르침받는 그것이 결코 떠나지 않는 위대한 일, 하나님께서 그렇게 고안하셨고 하나님게서 우리에게 그렇게 당부하셨다. 그것을 저희들은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하게 버려두면 그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잠29:15).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여기 징계의 두가지 면을 말씀하고 있지요. 채찍과 꾸지람, 아까는 채찍 자체가 징계를 전체로 포함해서 말씀한 부분이 있었어요. 그러나 여기서는요. 채찍과 꾸지람이라고 하는 이 두가지가 나오기 때문에, 여기 채찍은 체벌을 말합니다. 꾸지람이라고 하는것은 말로 이야기하는것, 또는 책망하는것, 교훈서부터 시작해서 가르치는것부터 시작해서 나중에 그것이 되지 않을때에 꾸지람과 책망과 말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채찍은 체벌입니다. 이 두가지가 아이들에게 지혜를 준다고 말했습니다. "어리석은 것" 마음속에 얽혀있는것이 사라지고 그들에게 정말로 지혜를 준다. 지혜는 뭡니까? 잠언에서 지혜는, 여호와를 경외하는것이 지혜의 근본이다. 시작이다 이렇게 말씀 했어요. 여호와를 경외하도록 결국 만들어 준다. 그것은 결국 구원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임재를 아이들이 느끼고요. 두려움을 느낄때에 아이들은 구원받습니다. 그러지 않는다면 절대로 구원받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아이들이 처음부터 하나님을 두려워할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처음에 부모님을 통해서, 부모님은 하나님을 대변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대변자 입니다. 하나님을 대표하는 사람입니다. 아이들은 죄인이라 하나님을 못봅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려서 태어나자마자 부모와 같이 살면서 부모를 봅니다. 부모가 어떻게하는지, 부모가 하나님을 경외하는지, 하나님을 경외하는 분위기가 있는지,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양은 어떤 것인지, 그들은 피부로 느끼고 냄새로 맡는다 이 말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부모를 먼저 주셨어요. 그래서 아이들이 먼저 부모에게 순종하고 부모를 공경하는 것, 순종, 말을 듣는것이죠. 공경이라는 것은 순종 이상입니다. 부모를 영예롭게 만들어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을 배우게 될때, 그 다음에 무엇을 배웁니까? 하나님이 계시구나. 하나님이 여기 계시구나, 하나님은 경외할 분이구나. 라는 것을 부모님을 통해서 배운다는 말이죠. 그 순서는요, 먼저 부모님입니다. 그 다음에 부모님의 대변인으로서, 그들의 삶을 통해서, 말을 통해서, 그들에게 전달해주는 것을 통해서 그들은 하나님을 알게된다. 그것은 결국 나중에 구원으로 이어진다는 말입니다. 여기,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하도록 내버려두면" 이것은 방목하는 것입니다. 그냥 내버려두는거죠. 이것이 2차 대전 이후에, 사람들 심리학자, 또 깨어났다는 사람들 마음속에 생겨난 것이 애들을 방목해야 한다고 말했죠. 채찍과 꾸지람을 했다고해서요 아이들의 의사가 무너지지 않습니다. 여러분, 성경은 이렇게 말씀 했습니다. 징계하면 음부에서 구원한다. 영혼을 구원한다.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기 의사가 무너진게 아니라 자기 의사가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자기 의사대로 하나님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그들의 창조력은 절대로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일 부모가 자식을 학대하거나 구타하거나 이제 이와같은 것들 때문에 심리학자 마음속에는 아이들을 그렇게하면 안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징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체벌을 하게 될때 체벌에도 정도가 있습니다. 체벌에도 하나님이 말씀하신 지혜가 있습니다. 이제 그것에 대해서 조금후에 말씀 드리겠습니다.
"네 자식을 징계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평안하게 하겠고 또 네 마음에 기쁨을 주리라"(잠29:17).
"네 자식을 징계하라" 이것은 교정하라는 말입니다. 징계하면요, 어떤 결과가 있습니까? 80이 되고 마땅히 갈길로 갈 뿐만 아니라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평안한 마음을 주고 기쁨을 준다는 그 말입니다. 만일 징계하지 않으면 부모는 욕을 당한다. 수치를 당한다.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이와같은 주님의 말씀을 놓고 잠시 사사기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마노아가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주여 구하옵나니 주의 보내셨던 하나님의 사람을 우리에게 다시 임하게 하사 그로 우리가 그 낳을 아이에게 어떻게 행할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게 하소서"(삿13:8).
사사기 13장 8절은요, 삼손과 관련된 말씀인데, 여기 마노아의 기도가 나옵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마노아의 아내에게 나타났었죠. 그래서 그 아내가 그 이야기를 했어요. 그런데 또 나타났어요. 거기에 마노아가 없었어요. 아내가 즉각 달려와서 그분이 나타났다. 그가 이제 기도합니다. 그가 이 사자를 만나게 될때, 이렇게 질문하지요.
"마노아가 가로되 당신의 말씀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이 아이를 어떻게 기르오며 우리가 그에게 어떻게 행하오리이까"(삿13:12).
마노아의 질문은요, 모든 부모들이 하나님 앞에 자녀양육을 위해서 "하나님 어떻게해야 합니까?" 라고 그와같은 간절한 기도 입니다. 간절한 소원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십시요.
"포도나무의 소산을 먹지 말며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 무릇 부정한 것을 먹지 말아서 내가 그에게 명한 것은 다 지킬 것이니라"(삿13:14).
사실 마노아의 아내에게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서, 그 아내는 아이를 낳지 못했지요. 그런데 이제 아이가 태어날 것이라고 말씀 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소식이 들려 왔어요. 우리 잠깐, 이 당시의 영적인 상태를 보세요. 삼손이 태어나기 전에 이스라엘은 블레셋에게 40년 동안이나 지배를 받았습니다. 억압을 당했죠. 삼손은 사사 시대의 마지막 구원자 입니다. 그러나 사사시대의 마지막 구원자로 실패한 구원자 입니다. 그는 체포되어서 눈이 뽑히고 블레셋에 의해서 수치를 당하는 그와같은 해방자가 되지요. 그는 물론 하나님께서 사자를 통해서 말씀하시기를 "그가 블레셋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는 구원을 그저 시작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상태를 보면요.
"유다 사람 삼천명이 에담 바위 틈에 내려가서 삼손에게 이르되 너는 블레셋 사람이 우리를 관할하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같이 행하였느냐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그들이 내게 행한대로 나도 그들에게 행하였노라"(삿15:11).
삼손이 블레셋을 대항해서 공격하려고 할때, 오히려 유다 사람들이 삼손에게 가서 왜 그런일을 하느냐라고 물었어요.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다른 사사시대의 모든 사람들은 이제 백성들이 막 외쳤습니다. "우리는 도탄에 빠져서 살수 없습니다. 우리는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 우리를 살려주십시요." 그럴때에 하나님께서 갑자기 사사를 세웠어요. 그래서 그 사사가 나와서 군대를 이끌고 가서 싸워서 이겼습니다. 그러나 삼손 시대에는, 혼자 일하는 시대 입니다. 백성이 아무도 도와주지 않습니다. 혼자 나가서 싸워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블레셋에게 지배받는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그와같은 시대다. 싸우려고 하지도 않는다. 다시 말해서 이 당시의 영적인 상태가 얼마나 저조했는가? 얼마나 어두웠는가를 말해주고 있지요. 하나님께서는 한 사사를 탁 세워서, 에웃처럼, 기드온처럼, 이렇게 세워서 군대를 이끌고 나가서 싸워서 이기도록 한 것이 아니고요. 하나님께서 마노아의 아내에게 나타나셔서 그 하나님의 사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인이 된 사사가 탁, 일어나느 것이 아니고요. "네가 아이를 낳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가 해방자가 될 것이다. 그러면 얼마나 세월이 또 가야 합니까? 그 아이를 양육해야 하는 겁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사사기 13장 말씀에서 마노아는 기도 했습니다. "하나님 우리가 이 아이를 어떻게 길러야 합니까?" 사자가 말씀 했습니다. "포도주와 독주, 이런것을 집에 두지말라" 이것은 아이가 태어났을때가 아니고요.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부모에게 지금 얘기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환경을 정리하라, 악영향을 미치는 것들, 너희 집안에서 다 제거하라는 말이죠. 첫째, 이것은 부정적인 의미인데요. 가정안에 부정적인 것들을 다 제거해야 합니다. 악영향을 미치는 것들 다 제거해야 합니다. 정돈해야 한다는 겁니다. 또 하나는 삼손의 아버지, 어머니 마노아와 그 아내가 이 이야기를 들었을때, 제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제단에 염소새끼와 소제를 드리겠습니다라고 했어요. 결국 제단에다가 그것을 드리지요. 제단에 드렸습니다. 드렸을때 어떻게 됬습니까? 두가지를 드렸습니다. 하나는 번제, 염소새끼 번제 입니다. 또 하나는 소제 입니다. 이 소제와 번제 무엇을 말합니까? 소제라고 하는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말하지요. 번제라고 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그 죽음인데 특별히 그 죽음은 하나님 앞에 헌신을 드리는 전적인 헌신을 드리는 것을 그림으로 잘 보여주고 있는제사죠. 이 두가지 제사, 이 제사를 제단위에 드렸어요. 그때 무슨일이 벌어졌습니까? 하나님의 사자가 불꽃 가운데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여기에서 마노아는 무엇을 보았을까? 마노아와 아내는 무엇을 보았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예수그리스도의 승천을 본 겁니다. 이 냄새가, 불에 탈때 이 냄새가 나죠. 형제 자매님들, 우리는 부모로서 하나님의 사람의 집에는 이 집안에는 갈보리의 냄새가 계속해서 나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냄새가 계속해서 나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했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그 분은 부활 이후에 살아나셔서요. 그리고 하늘로 올라가서 승격되셨습니다. 보좌 우편에 앉아 계세요. 그것은 주님께서 다시 오실 겁니다. 이분의 이 높아짐, 승격됨, 그리고 그분께서 다시오신다는 것에 대한 소망, 이와같은것이 하나님의 사람의 집 안에 가득히 채워져 있는가? 더러운 것들은 다 제하고, 그 다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 사역입니다. 죽음과 승천, 다시오심.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갈보리의 냄새는 감사로 이어 집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과 재림은 우리로 하여금 그분앞에서 엎드리게하고 소망 가운데 기다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람의 집에 냄새로 가득한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제 마노아, 그는 이제 위대한 사람을 양육할 책임을 받은 사람입니다. 사사가 갑자기 일어나느게 아니고요. 어머니 아버지가 이 아이를 길러서, 이제 그가 주님 앞에서 어떻게 쓰임을 받게 될 것인가? 어떻게 주님께 도로 드릴것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 마노아는 마음속에 깊이 생각하고 있었고, 주님의 도움을 구했지요. 이 이야기를 가만히 볼때,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할까? 라고 하는 점입니다. 첫째, 주님 우리 아이를 어떻게 길러야 하겠습니까? 아이를 기르는 일에 있어서요. 아까 어린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혀있다. 죄인이다라는 그 말이죠. 그럼 이것을 채찍으로, 징계로 멀리한다. 어떻게 멀리할수 있겠습니까? 저희들은 아이가 태어나면 이제 태어나기 전에, 잉태할때 죄 가운데 잉태하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 현실에 대해서 너무나 우리는 확실하게 하나님 말씀에서 알고 있고요. 이것을 만일 현실로 받아들인다면, 이것은 현실입니다. 아무리 아이가 예쁘고 귀엽고 또 천진하고, 아이는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죄인이다. 그런데 죄인이지만 아이는 너무나 고귀하다. 왜 고귀합니까? 아이는 하나님의 기업이고 상급일뿐만 아니라 약속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주신 아이는 약속 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능성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앙속에 있는 잠재력입니다. 약속과 가능성과 잠재력, 아이는 그것을 가지고 있어요.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죄를 멀리하고 하나님의 약속과 가능성을 일으켜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모의 부모노릇이죠. 자녀교육입니다. 어떻게 교육을 할까? 첫째, 아이들이 탸어나서, 이것은 편의상 구분한 겁니다. 소통1, 소통2라고 말한 것은요. 소통1 은 아이가 아직 말을 못할때, 대화하기 전입니다. 그런데 여기 말한것처럼, 이것은 정확한 것은 아니고요. 편의상 지금 이렇게 그었는데요. 대게 두살정도 되면 몇마디를 하는것에서부터 말을 시작하죠. 그래서 두살에서 세살이 되었을때, 말을 조금씩 배우죠. 말이 없는것은 아니나 아직 미숙하죠. 어째든 그러나 그 이하에서는 말을 못합니다. 소통1 이라고 하는것은 말을 못할때에, 그리고 소통2 라고 하는것은 말을 할때, 우리는 어떻게 아이들을 다룰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 아이들을 구원으로 인도할 것인가? 우리가 잘못하고 생각하고 있는 여러가지 것중에 하나는요. 구원에 관해서는 아이들이 다 커서 말을 알아들을때부터 얘기해야 한다.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이것은 사단이 우리 마음속에 넣어주는 것입니다. 가장 고귀한 기회를 놓치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제 아이들이 말을 못할때요. 그들 마음속에는 죄로 얽혀 있죠. 어떻게 소통할까라고 하는것을 생각해 보십시요. 이렇게 말 못하는 아이들과 어떻게 소통을 할 것인가? 여러가지 소통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 이 아이들이 6개월이나 8개월 정도 되면 선악을 알기 시작 합니다. 이것은 경험으로 우리가 아는데요. 그것은 심리학자들도 이구동성으로 이야기 합니다. 선악을 아는 나이는 6~8개월부터 안다. 그것은 무슨 말인가? 그 아이가 못된짓을 하려고 할적에 그 아이들을 잘 살펴보세요. 엄마를 돌아보고 그 다음에 가요. 그게 증거입니다. 심리학자들도 그렇게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선악을 알기는 알지만 선을 행하지 못합니다. 악만 행합니다. 그것이 어린아이의 마음속에 미련이 얽혀있다. 즉 우리는 죄인이다. 그 말이죠. 바로 거기에서 이 죄를 어떻게 멀리할까 라는것을 이 기간은, 이 소통1이라고 하는 것은 구원으로 인도하는 준비기간입니다. 기초공사 입니다. 아직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복음을 이해할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선악을 알게되는 나이가 되고요. 이제 그들과 소통을 하게 될때, 부모는 특별히 어머니가 아이와 오래 있죠. 물론 아빠도 마찮가지 입니다. 아이하고 시간이 되면, 기회가 되면 더 많이 접촉해야 되요. 말을 못하더라도 계속 이야기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아이에게 관심을 줘야 합니다. 그 아이와 함께하고 손을 붇들고 시간을 보내고 이렇게 해야 합니다. 오늘날 수많은 아이들의 문제들 가운데 하나가, 현대 시대에 점점점 이와같은 문제가 많아지는데, 아이에게 관심을 안주고 있기 때문에 아이들은 혼자 방치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문제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말을 못한다해도 계속해서 아이들과 말해야 합니다. 그리고 접촉해야 합니다. 그다음 표정으로 통신 합니다. 어떻게 통신하냐면 아이가 선악을 아는 나이 이전에도 마찮가지이고요. 이후에도 마찮가지고요. 그들이 잘 했을때, 엄마 아빠의 표정으로 "너 잘했다." 그거 전달해 주어야 합니다. "너 그건 아냐."라는 것을 말로 아니고요. 표정으로 말해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분위기로 말해주는 것입니다. 잘못했을때, 엄마 아빠의 표정이 달라지고요. 분위기가 엄중한 것으로 바뀌는 것을 어린아이도 깨닫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 아이들이 그런것을 모르는것 아닙니다. 그래서 그와같은 기회를 십분 이용해야 합니다. 그래서 선이 무엇이고, 악이 무엇이고, 엄마 아빠는 무엇을 인정하고 무엇을 인정하지 않는가? 라고 하는것을 분명하게 메세지를 전달해 주어야 합니다. 무엇으로요? 어떤때는 바디 랭귀지로요. 몸짓으로, 어떤때는 표정으로, 어떤때는 분위기로, 알려줘야 합니다. 이와같은 의미에서 이제 아까 채찍에 관해서 말씀 했어요. 채찍이 어린아이를 지옥에서 건진다.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미련한 것을 멀리한다. 이것은 무슨 말일까요? 어린아이에게 채찍, 자녀교육에게 있어서 채찍, 즉 체벌이 가장 유효하게, 가장 효과있게 쓰여지는 기간은 언제인가? 많은 사람들은 아이들이 컸을때? 아닙니다. 말을 못할때 입니다. 이때 가장 효과있는 기간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체벌할까? 아니 어린아이를 그냥, 그렇게 함부로 때립니까? 당신은 잔인한 인간이 아닙니까? 잔인하지 않습니다. 만약 그 아이를 뼈가 부러지도록 때린다면 그 사람은 악한 사람이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요, 이것은 교통 수단입니다. 아이들이 말할수 없기 때문에 가장 효과 있는 것은 아이들에게 어딜 때립니까? 뼈가 탁 튀어나온데 때리지 않습니다. 가장 살이 있는데, 엉덩이나 종아리, 우리가 흔히 그렇게 때리지 않습니까? 거기를 어떻게 때립니까? 살속 싶은데까지 상처를 주는게 아니죠. 피부에 전달해주는 것입니다. 피부에 아픈것을 전달해 주는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아이에게 맞게 부모는 메세지를 전해주는 체벌입니다. "나는 네가 한일에 대해서 인정하지 않아." 아이에게 얼굴 표정으로요, 분위기로, 그 다음에 필요하면, 체벌입니다. 체벌은 때마다 체벌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불필요합니다. 체벌은 정확하게, 체벌을 한다고 했는데 아이가 별로 아프지 않아요. 그것 체벌 아닙니다. 체벌이라고 하는 것은 말이 아니라 매로 메세지를 전달해주는데, 어떤 메세지 입니까? "나는 너를 인정하지 않아."라는 것을 전달해주는 것입니다. "나는 너를 인정해 우리는 너무나 기뻐"라고 할때 그 얼굴 표정, "넌 정말 잘했어" 여러분, 우리 자녀들에게 박수를 많이 보내세요. 잘하면 아직 말 못하는 아이에게 박수를 보내세요. 아주 어릴때 박수를 많이 보내주세요. 그 아이들에게 격려가 필요하고요. 그 아이들에게 아니다라는 부정이 필요합니다. 이 두가지가 적절히 사용되게 될때, 아이들은 무엇을 점점 느끼게 되는가? "아, 이렇게하게 될때는 우리 아빠, 엄마가 인정 안하는구나." "이런 행동을 하게 될때는 아빠 엄마가 인정을 하는구나" 그것을 이미 선악을 알고 있어요. 그러나 선은 행할수 없고, 악을 행하고자 하는것이 아이의 죄성이죠. 그것을 물리치기 위해서 부모는 아직 말하기 전에 무엇이 바른 것이다. 무엇이 아빠를 기쁘게 하는 것이고 무엇이 엄마를 기쁘게 하는 것이다. 무엇이 옳은 것이다. 무엇이 아빠의 마음속에 행복을 주는 것이다라는것을 알려주게 될때 그 아이들은 서서히 아빠 엄마가 원하는 방향으로 갑니다. 어떤 방향으로요? 이런 것들은 잘못이구나. 라고하는것을 이미 마음속에 알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엄마 아빠가 기뻐하는구나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이제 말을 하게될때, 어떻습니까? 복음을 증거하게 될때, "아 인간은 죄인이다." 복음은 여러가지 내용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 내용들의 가장 중요하고 기초가 되는것은 우리는 죄인이라고 하는것 아니겠어요? 죄인이라고 하는것은 우리가 개념적으로 이론적으로 아는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죄인이라고 하는것은 그것은 피로 경험적으로 마음으로 인정하게 하게 될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엎드리게 됩니다. "하나님 나를 구원해 주십시요."라고 비로소 말할수 있죠. 그래서 이 기간은 그렇습니다. 이제 표정으로 아이들에게 전달해 줍니다. 체벌로 전달해 줍니다. 또 한가지는 분위기로 전달해 줍니다. 다시 말해서 아까 마노아의 집에서 그 부모가 아이를 낳기전에 그들은 무얼 배웠는가? "주님 아이를 어떻게 길러야 되겠습니까?" 주님 두가지 말했습니다. 부정적으로는요. "너희 집안의 더러운 것들, 악영향을 미치는 것들 다 제거하라." 그 다음에 긍정적인 것들은 무엇입니까? "너희 집안에 갈보리의 냄새가 가득하게 두라." 그리고 "승천의 냄새가 가득하게 하라." 다시 말해서 엄마 아빠가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해서 항상 감사하고 기뻐 합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고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서 영광 가운데 계시고 다시 오실것에 대한 소망, 예배, 이와같은 분위기가 집에 가득하게 될때, 그들은 이제 위대한 영향을 받게되는 것입니다. 이 아이들이 그런 영향을 받게 될때, 첫째 이 일을 위해서 아이들과 소통하라. 말을 못하는 아이들과 계속해서 소통하라. 두번째는요. 이 아이들, 인정하고 인정하지 않는것을 분명히 하라. 표정과 분위기와 또한 체벌을 통해서요. 분명히 하라. 그들은 점점 알게 됩니다. 그 다음에 집안에서의 영적인 분위기, 이 냄새를 가득하게 하라. 라고하는 것입니다. 형제 자매님들, 그 아이들은 부모의 모든 일들에 대해서 다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들은 냄새를 맡습니다. 엄마 아빠가 기도하게 될때, 식사때, 아니면 다른때 기도하게될때, 그들은 말을 알아듣지 못하지만 기도하는 폼과 기도하는 자세와 눈을 감는다든지, 그 앞에 엎드린다든지 할때, 그들이 서서히 느끼는 것은 저분이 누구 앞에서 저렇게하나? 라는 것을 느낍니다. 그래서 "엄마 아빠가 기도할때, 아멘 해?"라고 하면 아멘 하지요. 그것은 단순히 엄마 아빠를 따라서 행동만 따라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 마음속에 엄마 아빠는 하나님 앞에서는 엎드린다. 하나님 앞에서 경외심을 갖는다. 하나님 앞에 말씀 드릴때는 전혀 다르다라고 하는것을 느껴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모임에 왔을때 어떻습니까? 그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엄마 아빠와 보내지요. 그런데 모임에 옵니다. 모임에 오면요, 엄마 아빠 말고도 많은 부모들이 있습니다. 많은 성인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전체로, 엄마 아빠 두사람만이 아니라 가족 안에서만이 아니라 모임이라는 더 큰 스케일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데, 모두가 다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지요. 그래서 그들이 주님앞에 엎드리는 것이요. 엄마 아빠가 엎드리는 것이 아니라요, 모두가 다 엎드리는 분위기에 압도 됩니다. 그래서 마음속에 하나님이 계시구나. 그는 아직 모릅니다. 그러나 무언가를 지금 느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그들이 이제 말을 할수 있을때, 복음을 증거하게 될때요. 언어로 복음을 증거하게 될때, 그들 마음속에 기초작업이 그렇게 완성 되야 된다는 말입니다. 일상생활에서 엄마 아빠가 서로 사랑하는지, 엄마 아빠가 매일 싸우는지, 그들의 분위기는 무엇인지, 그들은 분위기로 느껴 간다는 그 말입니다. 모임에서나 또는 가정안에서나 그들이 느껴가는 것이 있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예배시간에 그들은 아주 어릴때, 잘 모르겠지만, 점점 커가면서, 아직 말을 못하지만 빵이 돌아가는것을 그들은 항상 관심을 가지고 지켜 봅니다. 저는 제 아이들도 그랬고요. 지금 자라는 아이들도 그러고요. 가끔 그렇게 봅니다. 떡 돌아가면요, 침을 꿀떡꿀떡 삼키면서 봅니다. '저거는 내가 언제 먹을수 있을까?' 봅니다. '저거는 왜 나는 못먹을까?' 생각 합니다. 그 모든것은 그들에게 도전을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구약 시대에 유월절을 지킵니까? 아이들이 모였을때, 가장 어린 아이가 가장 연장자에게 항상 물었습니다. "왜 오늘밤은 다른날밤과 다를까요?" 이것이 질문입니다. 그러면 가장 연장자가 거기에 대답해 줍니다. 항상 이와같이 세대를 지나면서 이 아이가 나중에는 여기에 앉아서 답변할 겁니다. 또 새로운 세대가 나타날 겁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그와같은 것을 고안하셨을까요? 이스라엘의 유익과 하나님을 기억함과 하나님의 구속에 대해서 기억함과 그들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정말 구원받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죠. 오늘날 마찮가지 입니다. 아직 말을 할수 없을때, 그러나 말을 할수 없는것은 교통할수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들과 대화할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많은 정보를 마음속에 깊이 세겨줄수 있다. 특히, 냄새맡는다고 하는것은, 그들은 냄새를 매일과 같이 맡고 있습니다. 우리 집안이 부모가 항상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앞에 엎드려 기도하고, 말씀을 읽고 그리고 항상 때가되면 예배 시간에, 정기 집회에 엄마 아빠는 애기를 안고 그곳에 가고, 거기에서 성도들이 모여서 주님앞에 예배드리고 하니님 앞에 엎드리고 그와같은 모임 안에서의 분위기, 가정 안에서의 그 분위기, 그것은 갈보리의 냄새 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로 올라간, 승천의 냄새 입니다. 승천의 분위기요, 갈보리의 분위기 입니다. 그 분위기를 그 아이들이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모임에서 아이들이 막 흐트러져서 울려고 하고 소리 지르고 이기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마음속에 어리석은 것들이 얽혀있기 때문에 그 아이들이 또 뭔가 문제를 만드려고 할때, 만일 필요하다면 아이를 데리고 가서 적절하게 체벌을 해줘 보세요. 이 체벌은 할때마다, 때마다 일마다 체벌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적절하게 메세지가 들어가도록 너무 아프게 말고, 그저 때렸다고는 하지만 별 의미가 없다. 느낌이 없다라고 하는 그런 체벌 말고요, 학대하는거 말고 가장 적절한 메세지, 피부에 전달되는 메세지, 부모라면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속에 어느정도의 체벌이 이 아이에게 합당한가? 여러분은 알 것입니다. 그것을 하면 그 아이들은 그것이 반드시 여기 기억되어 있어요. 두번째 나가려고 하면 절대로 안가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지난번의 메세지를 자기가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때부터 행동을 달리하는 것입니다. 저기 가는것보다 화장실 가는 것보다 여기 앉아 있는것이 훨씬 낫다. 이것을 깨닫습니다. 말 안해도 깨닫습니다. 체벌 한번이면 깨닫습니다. 한번 가지고 사실 족합니다. 체벌이라고 하는 것은 여기 하이틴, 열 여덟살, 열아홉살 애들에게 몽둥이로 때리는 체벌이 아닙니다. 그것은 학대 입니다. 그것은 폭력입니다. 바로 그런것 때문에 오늘날 세상은 체벌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의붓 아버지가 사랑하지 않는 의붓 자식을 미워서 분풀이로 때리고 이런 것들이 있기 때문에, 국가는 그런것을 불법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우리 자녀들의 미래를 위해서 그들이 정말 약속이고 가능성이 잠재력이라면 그들이 첫째, 제일 첫번째 되어야 할 일은 구원받아야 합니다. 그 구원을 위해서 아이들이 아직 말하기 전에, 말을 할수 있는 능력이 있기 전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교통할수 있는 수단이 있다. 우리는 그것을 이용해서 이제 말할수 있는 소통의 두번째 단계로 들어갈때, 우리가 어떻게 복음을 언어로 전달하게 될때, 말씀을 가지고 성경을 가지고 전달하게 될때, 효과있게 그들 마음속에 들어가서 가장 어릴때요. 이때가 구원기에 아주 적시 입니다. 여러분 구원받는 것은요, 나중에 십대나 되서 그때 구원받아야 한다. 그리고 주일학교 선생님에게 보내면 다 구원받을 것이다. 그것은 사단이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악한 생각 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주님 앞에서 마음 속에 깊이 생각하고 주님 앞에 기도하고요. 가장 적절한 순간에 주님께서 구원해 주시도록, 이 말은 이때 구원 못받으면 구원 못받는다는 말은 물론 아닙니다. 주님은 언제도 구원하실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위대한 기회, 그것을 우리는 적절히 사용할 지혜가 우리에게 필요하다. 주님의 말씀에 우리가 순종한다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라 믿습니다.
내일은 계속해서 자녀 교육에서요. 아이들이 말할때 우리는 어떻게해야 할까? 하는 점에서 살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