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강단말씀 요약글 모음/한봉래 형제님(요약)
창세기9_소돔 중보기도
박이레
2022. 7. 10. 00:43
2017년 7월 19일 수요일
강사 : 한봉래 형제님
<창세기9_소돔 중보기도>
16 그 사람들이 거기서 일어나서 소돔으로 향하고 아브라함은 그들을 전송하러 함께 나가니라
17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18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를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19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20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중하니
21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하노라
22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23 가까이 나아가 가로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려나이까
24 그 성중에 의인 오십이 있을찌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치 아니하시리이까
25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불가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균등히 하심도 불가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26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만일 소돔 성중에서 의인 오십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경을 용서하리라
27 아브라함이 말씀하여 가로되 티끌과 같은 나라도 감히 주께 고하나이다
28 오십 의인 중에 오인이 부족할 것이면 그 오인 부족함을 인하여 온 성을 멸하시리이까 가라사대 내가 거기서 사십 오인을 찾으면 멸하지 아니하리라
29 아브라함이 또 고하여 가로되 거기서 사십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사십인을 인하여 멸하지 아니하리라
30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 주여 노하지 마옵시고 말씀하게 하옵소서 거기서 삼십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거기서 삼십인을 찾으면 멸하지 아니하리라
31 아브라함이 또 가로되 내가 감히 내 주께 고하나이다 거기서 이십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이십인을 인하여 멸하지 아니하리라
32 아브라함이 또 가로되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말씀하리이다 거기서 십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십인을 인하여도 멸하지 아니하리라
33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즉시 가시니 아브라함도 자기 곳으로 돌아갔더라
(창18:16-33, 개역한글)
아브라함 생애 가운데 소돔을 위해서 중보기도를 하는 아브라함의 모습이 나와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생애를 16장부터 저희가 보고 있습니다. 16-18장을 살펴보면 16장에서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의 말을 듣고 하갈을 취합니다.
그래서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느 누구에게도 행복이 되지 못했습니다.
사라에게 불편이 있었고 하갈도 도망가야 했고 아브라함도 갈등을 받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자식을 사람들이 자기 힘으로 이루어보려고 하는 시도를 한것입니다.
16장은 아브라함의 생애의 하강곡면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떨어졌을때 입니다. 아내의 인간적인 생각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어려움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13년간 하나님께서 침묵하셨습니다. 창세기 17장은 하나님이 13년만에 하나님께서 다시 아브라함을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다시한번 반복합니다. "내가 네게 아들을 준다. 내년에 아들을 낳을 것이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너는 내 앞에서 완전히 행하라."
그리고 창세기 18장으로 오면 이제 아브라함이 성숙한 모습을 보입니다.
창세기 18장을 통해서 그리스도인들이 성숙한다고 하는 것은 어떤 특징을 갖게되는가 하는 측면에서 이 말씀을 보려고 합니다.
또 하나는 아브라함을 19장에 나오는 롯과 비교할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리스도인으로 비유할수 있습니다. 롯은 구원받은 성도입니다. 그가 의인입니다. 그가 소돔성에 살고 있기 때문에 그의 심령이 날마다 상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는 성도이지만 세상속에서 세상과 타협하여 삽니다. 그는 소돔을 나와야 합니다.
한번 그에게 경고가 있었습니다. 소돔이 전쟁에 휘말려 소돔에 있는 모든 사람과 재물이 포로가 된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의 도움으로 롯은 구출을 받았습니다. 롯은 그때 소돔성을 나왔어야 합니다.
그러나 롯은 변함없이 소돔성에 삽니다. 이것을 아브라함과 비교해야 합니다.
말씀대로 사는 그리스도인과 세상적으로 사는 그리스도인을 비교해 볼수 있습니다.
그러나 측면에서 살펴보려 합니다.
그 사람들이 거기서 일어나서 소돔으로 향하고 아브라함은 그들을 전송하러 함께 나가니라 (창18:16, 개역한글)
<그 사람들이 거기서 일어나서>
그 앞의 18장 1절을 보시겠습니다.
1 여호와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오정 즈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았다가
2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섰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3 가로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컨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옵시고
(창18:1-3, 개역한글)
구약시대에도 육체를 입고오신 하나님, 주님이십니다. 두명의 천사를 대동하고 오셨습니다.
아브라함을 달려나가 절하고 접대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일어나서 가십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배웅합니다.
천사 둘은 계속 소돔성으로 가고 주님께서는 서 계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시고 아브라함을 선택한 이유를 말씀하시고 또한 소돔성을 심판하실것을 말씀하십니다.
그 소리를 듣고 아브라함이 소돔을 향하여 중보기도를 하는 장면 입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즐거워 합니다.
그 대표적인 모습이 식사로 나와 있습니다. 물론, 아브라함이 함께 식사를 한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식사를 제공하고 그 옆에 서있습니다.
식사라고 하는것은 교제를 나타냅니다.
14 때가 이르매 예수께서 사도들과 함께 앉으사
15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눅22:14-15, 개역한글)
19 또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0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눅22:19-20, 개역한글)
28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29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30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눅22:28-30, 개역한글)
주님께서 열두사도와 함께 유월절 잡수시기를 원하고 원하셨습니다.
마지막 유월절을 잡수시고 그 유월절을 잡수시는 과정에서 만찬을 제정하십니다. 그리고 열두사도들에게 약속하십니다.
나중에 주님 나라가, 천년왕국이 이땅에 설때에 제자들이 예수님의 상에서 먹고 마실것입니다.
왕이 식사할때 함께 식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열두사도 입니다.
식탁에서 함께 식사하는 것은 애찬과 만찬예배입니다.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떡과 잔입니다.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말합니다.
또 하나를 보면 이러한 예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일곱교회가 있는데 그 중에 마지막 교회가 라오디게아 교회입니다. 제일 타락한 교회이며 교회라고도 할수없는 교회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문밖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안에서 통치하셔야 교회인데 주님을 문밖으로 내쫓아버린 교회입니다.
문밖에서 주님께서 문을 열어달라고 호소하십니다. 그리고 문을 열면 "내가 들어가 너로 더불어 먹고" 라고 하십니다.
원래 식사는 가족끼리 하는 것입니다. 친밀한 교제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두 천사와 함께 식사합니다.
친밀한 교제를 우리에게 의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실때 보면 그가 갈대아 우르에 살고 있을때, 하나님께서 그를 불러내십니다.
그것을 스데반이 이렇게 말합니다.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
처음의 하나님은 영광스러운 하나님으로 아브라함에게 제시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처음 만날때에 그 사건은 특별한 사건 속에서 특별한 경험 속에서 만납니다. 예를들면 저희들이 구원받을때 어떤분은 병에 걸려 죽음을 앞두고 구원받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이처럼 여러가지의 경우로 주님을 만날때 많은성도님들이 주님을 만나는것이 드라마틱합니다.
아브라함의 경우 같은 식탁에서 식사했다고 하는것은 이러한 경우 입니다.
아브라함은 처음에 어떠한 사건 속에서 주님을 만납니다. 그러나 이제는 일상적인 모습속에서 주님을 경험해야 합니다.
항상 먹는 세끼, 그 식사속에서 주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특별한 사건이 있어서 주님과 교제하는것이 아니고 매일매일 친근히, 주님과의 교제가 일상적인 삶이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성숙한 사람의 특징입니다.
다른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엘리야가 이스라엘인들을 모아놓고 갈멜산에서 바알을 숭배하는 선지자들과 내기합니다.
"누가 진짜 신인지 확인하자. 여호와 하나님이 하나님이면 하나님만 섬겨야 한다. 언제까지 머뭇거리겠느냐? 하늘에서 불이내려 응답하는 신이 진짜 신이라고 하자."
그리고 바알신이 하늘에서 응답을 하지 못합니다. 엘리야의 하나님이 하늘에서 불을내려 응답합니다.
그리고 바알 선지자 400명을 그 자리에서 죽입니다. 그랬는데도 상황의 변화가 없습니다.
이스라엘인들이 바알은 없다. 우리는 하나님만 섬긴다 라고 변화된 것이 아니고 변함없이 왕은 아합왕이었고 그 왕비가 이세벨이었습니다.
이세벨이 갈멜산에서 바알선지자 400명이 죽은 소식을 듣고 그 선지자들이 죽은것처럼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호언장담을 합니다.
그 소리를 듣고 엘리야가 낙담이 되어 죽으려고 합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시는데 아주 상징적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람 가운데도 계시지 아니하고 지진 가운데도 계시지 아니하고>
처음에 바람이 불었습니다.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불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바람 가운데도 지진 가운데도 불 가운데도 계시지 않고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큰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찾아오시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고 작은 소리로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창세기 18장에서 하나님은 일상적인 사람의 모습으로 오십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알아봅니다. 이것이 성숙한 사람입니다. 특별히 분명한 사건속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일상적인 삶에서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특별한 모습으로 나타나셔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모습으로 나타나 말씀하십니다.
"내년에 사라에게 아이가 있을것이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 있을때에는 영광의 하나님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일상적인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것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특징입니다.
이것은 조금 인간적인 예입니다만, 저희들이 결혼을 할때에도 처음에 만나 데이트를 할때에도 레스토랑 같은 곳에서 식사 합니다. 처음에는 물론 그래야 합니다. 그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결혼하고 몇년이 지나면 결혼 기념일에도 굳이 비싼 레스토랑에 가지 않아도 이 사람과의 관계가 친밀한 것입니다.
그곳에 가지 않아도 그런곳과 상관없는 것에 그 친밀함이 베어 있어야 합니다.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친해야 합니다. 이것이 성숙 입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매주 만찬상 앞에 온다는 것은 복된 일입니다. 이것은 귀찮은 일이고 의무감이 아닙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주에 드렸던 만찬 예배의 내용이 이번주에도 똑같은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우리 교회의 일상적인 정상적인 삶의 형태여야 합니다.
항상 교회에 와서 주님의 임재를 다시 확인하고 말씀을 기억하고 떡을 통해서 하나님인데 사람이 되신 우리 주님, 그리고 잔을 통해서 우리의 죄를 단번에 속하신 주님을 기억하는것이 우리에게 항상 기쁨이 되고 그 가운데서 주님과의 교제가 베어있어야 합니다.
다시 창세기 18장으로 오겠습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첫번째 특징은 일상적인 삶속에서 하나님을 인식하고 특별히 말씀을 통해서 그분이 하나님인것을 확인하는 관계에 있는것입니다.
두번째를 보시겠습니다.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창18:19, 개역한글)
19절에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이유와 목적이 나와 있습니다.
창세기 18절에 보시면 <천하 만인은 그를 인하여 복을받게 될것이 아니냐> 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이유입니다.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인류의 죄가 용서되는 것을 이야기 합니다.
하여간 아브라함을 통해서 모든 사람이 축복을 얻을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을 부른 목적입니다. 그런데 이 18절의 큰 목표를 19절의 방법으로 이루십니다.
<그의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키는 것> 입니다.
아브라함을 축복하면 그가 하나님께 축복을 받을것이고 아브라함을 저주하면 그가 저주를 받을것입니다. 이렇게 표가 서 있는데 이렇게 되려면 아브라함이 잘 서 있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자식에게, 자식은 가정입니다. 권속을 직장입니다.
곧 가정과 직장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도를 지켜야 합니다.
가정과 직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하면 복을 얻습니다. 불순종하면 심판을 받습니다. 의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것이고 공도는 심판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면 반드시 축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면 반드시 어려운 결과가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가정과 직장에서 이것을 입증해 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축복받는 이유는 말씀에 순종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도가 있습니다. 도는 길이라는 뜻입니다.
일부일처는 하나님의 길 입니다. 일부 다처는 어려운 길입니다. 한번도 일부다처가 성공적인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갈을 취한것이 그의 가정에 불행을 가져온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해야 합니다.
가정에서 말씀을 지켜야 하고 직장에서 상전을 주님 섬기듯 해야 합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중심의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였을때 그 자녀들이 축복을 얻고 영적이 되고 직장이 하나님 앞에서 번영합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복을 얻기 위해서 아브라함이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이 부름받은 이유입니다.
저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저희가 부름받아 구원을 받았습니다. 세상이 저희들을 봅니다. 저희들의 가정을 봅니다. 저희들의 개인적인 인격도 봅니다. 또한 저희들이 다니는 직장도 봅니다. 그리고 믿는 사람은 다르며 거기에 하나님의 손길이 있다는것을 알게해야 합니다. 그리고 구원을 얻게 해야 합니다.
물론 저희가 입술로 복음을 전해서 구원의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말로 복음이 전해져야 할뿐 아니라 그것이 저희들의 삶에서 뒷받침되고 있어야 합니다.
저희들이 세상에서 잘되건 못되건 저희 마음이 항상 평안하고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행복한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세운 질서가 거기에 있어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순종되고 있어야 합니다.
직장은 대부분 믿지 않는 사람이 사장으로 있을것입니다. 그때 직장을 다니면서 노조활동을 한다던지 하면 안됩니다.
시간을 아끼고 회사를 섬기는 모습으로 달라져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 저희들이 보면 기도하는것은 아브라함처럼 자식에게 여호와의 도를 지키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희는 첫번째로 자녀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자녀들의 이름을 부르며 매일 기도해야 합니다.
두번째, 항상 가정집회를 해야 합니다. 참 이게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일주일에 한번, 한달에 한번이라고 꼭 가정집회를 해야 합니다. 아버지가 말씀을 준비하고 자녀들이 함게 모여 꼭 가정집회를 해야 합니다.
말씀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아버지가 본이 되어야 합니다. 그 삶이 설득력이 있어야 아이들이 말을 듣습니다.
이것을 저희들이 적용해야 합니다. 이것이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의 특징입니다.
주님이 주인인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그럴때 우리를 통해서 세상이 복을 얻는것입니다.
주님을 중심으로 살고 주님을 높이고 말씀대로 살면 그와같은 복이 내려오는것을 세상이 알도록 아브라함이 부름받았고 저희들이 부름받은 것입니다.
이것을 이루어내야 합니다.
성숙은, 우리가 왜 구원받았는가, 하나님이 왜 우리에게 가정을 주셨는가, 또하나 하나님이 왜 우리에게 직장을 허락하셨는가 이런것들에 대해서 분명히 인식하고 그것을 이루어내는 사람입니다.
100% 이루어내지 못한다 해도 그것을 위해서 기도하고 나아가는 것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특징입니다.
세번째로 보시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한 이유를 두번째로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20절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금방 이어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모든사람이 복을 얻어야 합니다.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당연히 아브라함이 하는것은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기도 입니다.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을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리고 앞에 아브라함을 부른 목적을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기도할때 그 기도하는 원리에 대해서 보겠습니다.
22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23 가까이 나아가 가로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려나이까
(창18:22-23, 개역한글)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가까이, 친밀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기도합니다.
특별히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할수 있습니다. 지금 창세기 18장에서 나오는 이 기도는 성경에 나온 최초의 중보기도 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하나님과 친밀하게 살아가는 사람만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가까이 있어야만 합당한 관점을 얻기 때문입니다. 합당한 시각을 갖고 합당한 필요를 보게 됩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에 대해서 잘 알게 될수록 세상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세상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영적인 눈으로 뚫어보게 되고 참된 필요를 봅니다.
두번째로 기도의 특징을 보시겠습니다.
하나님게서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신다고 하셨을때 아브라함이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불가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균등히 하심도 불가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창18:25, 개역한글)
아브라함의 기도는 하나님의 성품에 기초해 있습니다.
기도의 근거가 하나님의 성품 때문에 기도합니다. "의인 하나라도 살리심이 하나님의 공평하심 입니다."
그래서 기도의 근거는 항상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저희들이 두가지를 보겠습니다. 25절을 보면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말합니다.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창18:14, 개역한글)
이 두가지를 아브라함이 붙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의로우심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불가능한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들도 하나님께 나아갈때 항상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성품, 어떤때는 모순되어보니는 성품,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또한 진리이신 이 성품을 붙들고 우리는 기도하고 있습니다.
제가 최근에 어떤 구도자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분과 구원에 대해서 토론을 했습니다. 이분도 복음을 많이 들었지만 믿지 않습니다. 그분이 이렇게 반문했습니다.
"당신이 믿는 하나님은 안믿는 사람들을 지옥으로 보내는데 믿는 사람은 소수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옥에 가는데, 자기가 창조한 인간들을 대부분 지옥에 보내고도 그 하나님은 행복하십니까? 그런 하나님은 못믿겠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오해가 늘 있습니다.
인간이 지옥에 떨어지는것을 하나님 책임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옥에서 건질수 있는데 안건지는것을 보면 사람의 불행을 내버려두는 하나님으로 생각합니다. 잘못은 자기가 저지르고 모든 책임은 하나님께 돌립니다.
그분 생각을 듣고 저는 기본적으로 그렇게 생각할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것을 어떻게 설득력있게 설명할수 있을까... 결국에는 설득이 아니라 그분이 말씀에 자기 생각을 순종시켜야 하는 문제입니다.
그런것이 늘 안타깝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 하나님의 성품이 모순되어 보일찌라도 하나님은 전능하시며 의로우시며 아브라함을 선택하셨습니다.
이것을 근거로 아브라함이 기도하는 것을 볼때 이것이 저희들에게도 도전이 됩니다.
그 다음 세번째를 보시겠습니다.
아브라함이 중보기도할때 첫번째로 하나님께 나아가서 기도합니다. 하나님과 친밀해야만 참된 기도를 할수 있습니다. 두번째는 하나님의 성품을 근거로 기도합니다. 조카 롯을 살려달라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말씀하여 가로되 티끌과 같은 나라도 감히 주께 고하나이다 (창18:27, 개역한글)
30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 주여 노하지 마옵시고 말씀하게 하옵소서 거기서 삼십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거기서 삼십인을 찾으면 멸하지 아니하리라
31 아브라함이 또 가로되 내가 감히 내 주께 고하나이다 거기서 이십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이십인을 인하여 멸하지 아니하리라
32 아브라함이 또 가로되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말씀하리이다 거기서 십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십인을 인하여도 멸하지 아니하리라
(창18:30-32, 개역한글)
세번째로, 기도할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앞에서 합당한 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티끌과 같다는 사실을 잊지 않습니다.
그가 그렇게 말했을때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교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시인합니다.
우리는 감히 하나님앞에서 담대히 기도할수 있습니다. 그렇다 할찌라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위치에 서 있어야 합니다.
1 너는 하나님의 전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찌어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제사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저희는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
2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
(전5:1-2, 개역한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 앞에 무엇이든지 구할수 있는자가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앞에 경외심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두려움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어서 다 이루었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 (사66:2, 개역한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돌보십니까(권고)?
하나님의 말씀앞에 그 마음이 떨리는 사람, 하나님의 엄중한 말씀앞에 마음이 가난하고(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사람) 통회함이 있는 사람의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십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기도할때 하나님께 은혜로 나아갈수 있지만 하나님에 대한 존경심이 항시라도 있어야 합니다.
또 한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실때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에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 짐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리이다>라고 먼저 말합니다.
곧 하나님에 대한 기도가 세가지 입니다. 그리고 나서야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이렇게 들어갑니다.
기도는 하나님 중심으로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의 필요를 구하는것이 첫번째가 아니고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것을 기도해야 합니다.
소돔성에는 의인 세명이 있었습니다.-롯과 두 딸입니다-그 의인과 악인을 함께 하나님께서 멸하시면 혹시라도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 사람들이 오해할까봐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기도의 특징입니다.
네번째를 보시겠습니다.
아브라함은 50명에서 숫자를 10명으로 줄여갑니다. 이 수를 줄일때에 우리는 이 기도의 원리를 생각해 볼수 있습니다. 기도는 끈질기게 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도 항상 기도하고 낙심치 말도록 비유로써 이야기 해 주셨습니다.
잠자리에 들었을때 친구가 와서 떡을 달라하여도 잠자리에 누웠으니 떡을 줄수 없다 하지만 그 간청함을 인하여 준다고 비유 하셨습니다. 그리고 불의한 재판관에 대해서도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택한자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겠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도는 끈질기게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때에 이루실 것이기에 하나님의 뜻에 맞는 기도이기에 우리는 실망하지 말고 항상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거두지 말고 계속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기도는 하나님을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내가 변화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내 마음을 맞추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기도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께서 하셨던 기도입니다.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에 맞추는 것입니다. 내뜻에 하나님의 뜻을 맞추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가시고 아브라함도 자기 길로 갑니다.
저희들이 계속적으로 살펴보고 있는것은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어떤 특징들을 갖는가를 보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 이같은 특징들을 어떻게 개발해 낼것인가 하는 것들을 생각해보고 있습니다.
또 하나 말씀드리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소돔성의 심판을 알려주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미래에 대한 예언을 알게 된 아브라함의 태도가 중보기도 하는 것입니다.
저희들이 지금 양천구청에서 정형모 형제님을 초정해서 요한계시록 강해를 듣고 있습니다. 지금 계시록 21장 쯤 나가고 있습니다. 저희들이 요한계시록을 듣는것은 거기에 있는 666이 누구냐, 14만 4천이 누구냐는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서 듣는것이 아닙니다.
휴거되고 나면 무슨 사건이 이 지구상에 벌어질 것인가를 알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지금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곧 소돔이 멸망시킬것을 미리 알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미리 알게하신 이유를 아브라함이 압니다.
아브라함이 중보기도를 합니다.
2 곧 그 통치 원년에 나 다니엘이 서책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고하신 그 년수를 깨달았나니 곧 예루살렘의 황무함이 칠십년만에 마치리라 하신 것이니라
3 내가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무릅쓰고 주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하기를 결심하고
(단9:2-3, 개역한글)
다니엘은, 구약성경으로 치면 다니엘서 전에 있는 부분까지만 구약성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후반부는 그에게 없습니다.
그가 성경을 봅니다. 다니엘에게서 가장 가까운 시대가 예레미야서 입니다.
예레미야는 유댜의 멸망을 예언했고 바벨론 항복할것을 말했던 선지자 입니다. 그래서 그는 매국노로 몰렸습니다. 예레미야가 항복하라고 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 배후에 계신다는것을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채찍이며 하나님의 징계에 순응해야 할것을 말한것입니다.
순종하면, 아프지만 맞으면 70년만에 돌아올것을 예레미야가 예언했습니다.
그리고 다니엘이 이 말씀을 읽으며 70년만에 돌아오는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70년이 찼습니다. 귀환할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니엘이 기도합니다.
다니엘은 70년이라는 포도생활의 이유를 깨닫습니다. 70년이라는 사실을 모르는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는 기도할때 약속되로 70년이 되었으니 돌아가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가 왜 하나님이 바벨론 포로를 허락하셨는지, 왜 귀환을 허락하셨는지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냅니다. 그리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했을때 하나님께서 주신것은 바벨론 포로가 끝났다는것이 아니고 70이레, 이스라엘 역사 전체를 풀어주십니다.
왕이 일어날때-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할때-부터 7년 환란을 다 계시해 주십니다.
이와같이 미래에 대해서 알게 되는것은 지적인 호기심 때문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왜 선택하셨고, 그 선택의 목적을 위해서 어떻게 이루시는가, 그리고 사람들은 얼마나 하나님의 의도에 대해서 무지하고 항상 반대로 갔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어떻게 자기뜻을 이루시는가.
그 하나님 앞에 엎드려 경배와 찬양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니엘이 한것입니다.
저희들로 와 보겠습니다.
11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14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벧후3:11-14, 개역한글)
베드로후서 3장은 주님의 강림하신다는 약속, 그리고 그것이 이천년이 지나도 이루어지지 않자 사람들의 조롱, 그리고 주님께는 하루가 천년같으심을 말합니다. 그리고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옴을 말합니다.
주의 날이 오면 이세상을 이루는 모든 원소들이 해체될것입니다. 세상이 해체될때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나올것이고 그것이 불로 풀어진다고 쓰여 있습니다.
이와같이 지구의 미래, 종말, 새 하늘과 새 땅을 아는 사람들은 그것이 언제 그일이 어떻게 일어나느냐에 대한 지적인 호기심이 있는것이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벧후3:11, 개역한글)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것은 우리를 어떠한 사람으로 만들고자 함이냐, 그러니 우리는 당연히 어더한 사람이 되어야 하냐, 입니다.
<거룩한 행실, 경건함으로 소망을 사모하는것>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벧후3:14, 개역한글)
이것이 결론입니다. 미래를 아는사람, 이 지구가 어떻게 끝날것을 아는사람의 행동은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과 소망과 평강입니다.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벧후3:15, 개역한글)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주님께서 빨리 오시지 않는 이유는 아직도 구원받아야 할 영혼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영혼들의 구원을 위해서 우리는 복음을 말로 전하고 그것이 우리의 삶으로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입니다.
아브라함을 불러서 만민이 복을 얻는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복을 얻고 누리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자가 누리는 복과 행복 그 특권이 드러나야 합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먼저 저희 자신과 가정이 주님앞에서 행복한 가정, 영적인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저희들이 들어가는 직장마다 소속된 단체마다 영적인 단체가 되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16장에서 실패했지만 18장에서 성숙의 길을 걸어갑니다.
물론 완벽하지 않습니다. 20장에서 또 실수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이 자리에 와 있습니다.
저희들도 이 자리로 가야 합니다.
온전하지는 않지만 계속해서 지혜와 생각과 영적인 모습에서 계속해서 성숙해서 주님께서 저희를 부르신 뜻이 이루어지고 특별히 저희들이 섬기는 모임이 주님의 환한 간증으로 세상에 빛이 될수 있기를 원합니다.
주님께서 저희를 도와주시기를 원합니다.
강사 : 한봉래 형제님
<창세기9_소돔 중보기도>
16 그 사람들이 거기서 일어나서 소돔으로 향하고 아브라함은 그들을 전송하러 함께 나가니라
17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18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를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19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20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중하니
21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하노라
22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23 가까이 나아가 가로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려나이까
24 그 성중에 의인 오십이 있을찌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치 아니하시리이까
25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불가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균등히 하심도 불가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26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만일 소돔 성중에서 의인 오십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경을 용서하리라
27 아브라함이 말씀하여 가로되 티끌과 같은 나라도 감히 주께 고하나이다
28 오십 의인 중에 오인이 부족할 것이면 그 오인 부족함을 인하여 온 성을 멸하시리이까 가라사대 내가 거기서 사십 오인을 찾으면 멸하지 아니하리라
29 아브라함이 또 고하여 가로되 거기서 사십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사십인을 인하여 멸하지 아니하리라
30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 주여 노하지 마옵시고 말씀하게 하옵소서 거기서 삼십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거기서 삼십인을 찾으면 멸하지 아니하리라
31 아브라함이 또 가로되 내가 감히 내 주께 고하나이다 거기서 이십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이십인을 인하여 멸하지 아니하리라
32 아브라함이 또 가로되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말씀하리이다 거기서 십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십인을 인하여도 멸하지 아니하리라
33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즉시 가시니 아브라함도 자기 곳으로 돌아갔더라
(창18:16-33, 개역한글)
아브라함 생애 가운데 소돔을 위해서 중보기도를 하는 아브라함의 모습이 나와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생애를 16장부터 저희가 보고 있습니다. 16-18장을 살펴보면 16장에서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의 말을 듣고 하갈을 취합니다.
그래서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느 누구에게도 행복이 되지 못했습니다.
사라에게 불편이 있었고 하갈도 도망가야 했고 아브라함도 갈등을 받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자식을 사람들이 자기 힘으로 이루어보려고 하는 시도를 한것입니다.
16장은 아브라함의 생애의 하강곡면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떨어졌을때 입니다. 아내의 인간적인 생각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어려움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13년간 하나님께서 침묵하셨습니다. 창세기 17장은 하나님이 13년만에 하나님께서 다시 아브라함을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다시한번 반복합니다. "내가 네게 아들을 준다. 내년에 아들을 낳을 것이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너는 내 앞에서 완전히 행하라."
그리고 창세기 18장으로 오면 이제 아브라함이 성숙한 모습을 보입니다.
창세기 18장을 통해서 그리스도인들이 성숙한다고 하는 것은 어떤 특징을 갖게되는가 하는 측면에서 이 말씀을 보려고 합니다.
또 하나는 아브라함을 19장에 나오는 롯과 비교할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리스도인으로 비유할수 있습니다. 롯은 구원받은 성도입니다. 그가 의인입니다. 그가 소돔성에 살고 있기 때문에 그의 심령이 날마다 상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는 성도이지만 세상속에서 세상과 타협하여 삽니다. 그는 소돔을 나와야 합니다.
한번 그에게 경고가 있었습니다. 소돔이 전쟁에 휘말려 소돔에 있는 모든 사람과 재물이 포로가 된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의 도움으로 롯은 구출을 받았습니다. 롯은 그때 소돔성을 나왔어야 합니다.
그러나 롯은 변함없이 소돔성에 삽니다. 이것을 아브라함과 비교해야 합니다.
말씀대로 사는 그리스도인과 세상적으로 사는 그리스도인을 비교해 볼수 있습니다.
그러나 측면에서 살펴보려 합니다.
그 사람들이 거기서 일어나서 소돔으로 향하고 아브라함은 그들을 전송하러 함께 나가니라 (창18:16, 개역한글)
<그 사람들이 거기서 일어나서>
그 앞의 18장 1절을 보시겠습니다.
1 여호와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오정 즈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았다가
2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섰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3 가로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컨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옵시고
(창18:1-3, 개역한글)
구약시대에도 육체를 입고오신 하나님, 주님이십니다. 두명의 천사를 대동하고 오셨습니다.
아브라함을 달려나가 절하고 접대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일어나서 가십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배웅합니다.
천사 둘은 계속 소돔성으로 가고 주님께서는 서 계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시고 아브라함을 선택한 이유를 말씀하시고 또한 소돔성을 심판하실것을 말씀하십니다.
그 소리를 듣고 아브라함이 소돔을 향하여 중보기도를 하는 장면 입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즐거워 합니다.
그 대표적인 모습이 식사로 나와 있습니다. 물론, 아브라함이 함께 식사를 한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식사를 제공하고 그 옆에 서있습니다.
식사라고 하는것은 교제를 나타냅니다.
14 때가 이르매 예수께서 사도들과 함께 앉으사
15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눅22:14-15, 개역한글)
19 또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0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눅22:19-20, 개역한글)
28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29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30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눅22:28-30, 개역한글)
주님께서 열두사도와 함께 유월절 잡수시기를 원하고 원하셨습니다.
마지막 유월절을 잡수시고 그 유월절을 잡수시는 과정에서 만찬을 제정하십니다. 그리고 열두사도들에게 약속하십니다.
나중에 주님 나라가, 천년왕국이 이땅에 설때에 제자들이 예수님의 상에서 먹고 마실것입니다.
왕이 식사할때 함께 식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열두사도 입니다.
식탁에서 함께 식사하는 것은 애찬과 만찬예배입니다.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떡과 잔입니다.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말합니다.
또 하나를 보면 이러한 예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일곱교회가 있는데 그 중에 마지막 교회가 라오디게아 교회입니다. 제일 타락한 교회이며 교회라고도 할수없는 교회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문밖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안에서 통치하셔야 교회인데 주님을 문밖으로 내쫓아버린 교회입니다.
문밖에서 주님께서 문을 열어달라고 호소하십니다. 그리고 문을 열면 "내가 들어가 너로 더불어 먹고" 라고 하십니다.
원래 식사는 가족끼리 하는 것입니다. 친밀한 교제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두 천사와 함께 식사합니다.
친밀한 교제를 우리에게 의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실때 보면 그가 갈대아 우르에 살고 있을때, 하나님께서 그를 불러내십니다.
그것을 스데반이 이렇게 말합니다.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
처음의 하나님은 영광스러운 하나님으로 아브라함에게 제시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처음 만날때에 그 사건은 특별한 사건 속에서 특별한 경험 속에서 만납니다. 예를들면 저희들이 구원받을때 어떤분은 병에 걸려 죽음을 앞두고 구원받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이처럼 여러가지의 경우로 주님을 만날때 많은성도님들이 주님을 만나는것이 드라마틱합니다.
아브라함의 경우 같은 식탁에서 식사했다고 하는것은 이러한 경우 입니다.
아브라함은 처음에 어떠한 사건 속에서 주님을 만납니다. 그러나 이제는 일상적인 모습속에서 주님을 경험해야 합니다.
항상 먹는 세끼, 그 식사속에서 주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특별한 사건이 있어서 주님과 교제하는것이 아니고 매일매일 친근히, 주님과의 교제가 일상적인 삶이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성숙한 사람의 특징입니다.
다른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엘리야가 이스라엘인들을 모아놓고 갈멜산에서 바알을 숭배하는 선지자들과 내기합니다.
"누가 진짜 신인지 확인하자. 여호와 하나님이 하나님이면 하나님만 섬겨야 한다. 언제까지 머뭇거리겠느냐? 하늘에서 불이내려 응답하는 신이 진짜 신이라고 하자."
그리고 바알신이 하늘에서 응답을 하지 못합니다. 엘리야의 하나님이 하늘에서 불을내려 응답합니다.
그리고 바알 선지자 400명을 그 자리에서 죽입니다. 그랬는데도 상황의 변화가 없습니다.
이스라엘인들이 바알은 없다. 우리는 하나님만 섬긴다 라고 변화된 것이 아니고 변함없이 왕은 아합왕이었고 그 왕비가 이세벨이었습니다.
이세벨이 갈멜산에서 바알선지자 400명이 죽은 소식을 듣고 그 선지자들이 죽은것처럼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호언장담을 합니다.
그 소리를 듣고 엘리야가 낙담이 되어 죽으려고 합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시는데 아주 상징적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람 가운데도 계시지 아니하고 지진 가운데도 계시지 아니하고>
처음에 바람이 불었습니다.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불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바람 가운데도 지진 가운데도 불 가운데도 계시지 않고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큰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찾아오시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고 작은 소리로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창세기 18장에서 하나님은 일상적인 사람의 모습으로 오십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알아봅니다. 이것이 성숙한 사람입니다. 특별히 분명한 사건속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일상적인 삶에서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특별한 모습으로 나타나셔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모습으로 나타나 말씀하십니다.
"내년에 사라에게 아이가 있을것이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 있을때에는 영광의 하나님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일상적인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것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특징입니다.
이것은 조금 인간적인 예입니다만, 저희들이 결혼을 할때에도 처음에 만나 데이트를 할때에도 레스토랑 같은 곳에서 식사 합니다. 처음에는 물론 그래야 합니다. 그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결혼하고 몇년이 지나면 결혼 기념일에도 굳이 비싼 레스토랑에 가지 않아도 이 사람과의 관계가 친밀한 것입니다.
그곳에 가지 않아도 그런곳과 상관없는 것에 그 친밀함이 베어 있어야 합니다.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친해야 합니다. 이것이 성숙 입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매주 만찬상 앞에 온다는 것은 복된 일입니다. 이것은 귀찮은 일이고 의무감이 아닙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주에 드렸던 만찬 예배의 내용이 이번주에도 똑같은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우리 교회의 일상적인 정상적인 삶의 형태여야 합니다.
항상 교회에 와서 주님의 임재를 다시 확인하고 말씀을 기억하고 떡을 통해서 하나님인데 사람이 되신 우리 주님, 그리고 잔을 통해서 우리의 죄를 단번에 속하신 주님을 기억하는것이 우리에게 항상 기쁨이 되고 그 가운데서 주님과의 교제가 베어있어야 합니다.
다시 창세기 18장으로 오겠습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첫번째 특징은 일상적인 삶속에서 하나님을 인식하고 특별히 말씀을 통해서 그분이 하나님인것을 확인하는 관계에 있는것입니다.
두번째를 보시겠습니다.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창18:19, 개역한글)
19절에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이유와 목적이 나와 있습니다.
창세기 18절에 보시면 <천하 만인은 그를 인하여 복을받게 될것이 아니냐> 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이유입니다.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인류의 죄가 용서되는 것을 이야기 합니다.
하여간 아브라함을 통해서 모든 사람이 축복을 얻을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을 부른 목적입니다. 그런데 이 18절의 큰 목표를 19절의 방법으로 이루십니다.
<그의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키는 것> 입니다.
아브라함을 축복하면 그가 하나님께 축복을 받을것이고 아브라함을 저주하면 그가 저주를 받을것입니다. 이렇게 표가 서 있는데 이렇게 되려면 아브라함이 잘 서 있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자식에게, 자식은 가정입니다. 권속을 직장입니다.
곧 가정과 직장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도를 지켜야 합니다.
가정과 직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하면 복을 얻습니다. 불순종하면 심판을 받습니다. 의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것이고 공도는 심판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면 반드시 축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면 반드시 어려운 결과가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가정과 직장에서 이것을 입증해 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축복받는 이유는 말씀에 순종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도가 있습니다. 도는 길이라는 뜻입니다.
일부일처는 하나님의 길 입니다. 일부 다처는 어려운 길입니다. 한번도 일부다처가 성공적인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갈을 취한것이 그의 가정에 불행을 가져온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해야 합니다.
가정에서 말씀을 지켜야 하고 직장에서 상전을 주님 섬기듯 해야 합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중심의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였을때 그 자녀들이 축복을 얻고 영적이 되고 직장이 하나님 앞에서 번영합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복을 얻기 위해서 아브라함이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이 부름받은 이유입니다.
저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저희가 부름받아 구원을 받았습니다. 세상이 저희들을 봅니다. 저희들의 가정을 봅니다. 저희들의 개인적인 인격도 봅니다. 또한 저희들이 다니는 직장도 봅니다. 그리고 믿는 사람은 다르며 거기에 하나님의 손길이 있다는것을 알게해야 합니다. 그리고 구원을 얻게 해야 합니다.
물론 저희가 입술로 복음을 전해서 구원의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말로 복음이 전해져야 할뿐 아니라 그것이 저희들의 삶에서 뒷받침되고 있어야 합니다.
저희들이 세상에서 잘되건 못되건 저희 마음이 항상 평안하고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행복한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세운 질서가 거기에 있어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순종되고 있어야 합니다.
직장은 대부분 믿지 않는 사람이 사장으로 있을것입니다. 그때 직장을 다니면서 노조활동을 한다던지 하면 안됩니다.
시간을 아끼고 회사를 섬기는 모습으로 달라져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 저희들이 보면 기도하는것은 아브라함처럼 자식에게 여호와의 도를 지키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희는 첫번째로 자녀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자녀들의 이름을 부르며 매일 기도해야 합니다.
두번째, 항상 가정집회를 해야 합니다. 참 이게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일주일에 한번, 한달에 한번이라고 꼭 가정집회를 해야 합니다. 아버지가 말씀을 준비하고 자녀들이 함게 모여 꼭 가정집회를 해야 합니다.
말씀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아버지가 본이 되어야 합니다. 그 삶이 설득력이 있어야 아이들이 말을 듣습니다.
이것을 저희들이 적용해야 합니다. 이것이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의 특징입니다.
주님이 주인인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그럴때 우리를 통해서 세상이 복을 얻는것입니다.
주님을 중심으로 살고 주님을 높이고 말씀대로 살면 그와같은 복이 내려오는것을 세상이 알도록 아브라함이 부름받았고 저희들이 부름받은 것입니다.
이것을 이루어내야 합니다.
성숙은, 우리가 왜 구원받았는가, 하나님이 왜 우리에게 가정을 주셨는가, 또하나 하나님이 왜 우리에게 직장을 허락하셨는가 이런것들에 대해서 분명히 인식하고 그것을 이루어내는 사람입니다.
100% 이루어내지 못한다 해도 그것을 위해서 기도하고 나아가는 것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특징입니다.
세번째로 보시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한 이유를 두번째로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20절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금방 이어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모든사람이 복을 얻어야 합니다.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당연히 아브라함이 하는것은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기도 입니다.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을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리고 앞에 아브라함을 부른 목적을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기도할때 그 기도하는 원리에 대해서 보겠습니다.
22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23 가까이 나아가 가로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려나이까
(창18:22-23, 개역한글)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가까이, 친밀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기도합니다.
특별히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할수 있습니다. 지금 창세기 18장에서 나오는 이 기도는 성경에 나온 최초의 중보기도 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하나님과 친밀하게 살아가는 사람만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가까이 있어야만 합당한 관점을 얻기 때문입니다. 합당한 시각을 갖고 합당한 필요를 보게 됩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에 대해서 잘 알게 될수록 세상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세상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영적인 눈으로 뚫어보게 되고 참된 필요를 봅니다.
두번째로 기도의 특징을 보시겠습니다.
하나님게서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신다고 하셨을때 아브라함이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불가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균등히 하심도 불가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창18:25, 개역한글)
아브라함의 기도는 하나님의 성품에 기초해 있습니다.
기도의 근거가 하나님의 성품 때문에 기도합니다. "의인 하나라도 살리심이 하나님의 공평하심 입니다."
그래서 기도의 근거는 항상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저희들이 두가지를 보겠습니다. 25절을 보면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말합니다.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창18:14, 개역한글)
이 두가지를 아브라함이 붙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의로우심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불가능한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들도 하나님께 나아갈때 항상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성품, 어떤때는 모순되어보니는 성품,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또한 진리이신 이 성품을 붙들고 우리는 기도하고 있습니다.
제가 최근에 어떤 구도자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분과 구원에 대해서 토론을 했습니다. 이분도 복음을 많이 들었지만 믿지 않습니다. 그분이 이렇게 반문했습니다.
"당신이 믿는 하나님은 안믿는 사람들을 지옥으로 보내는데 믿는 사람은 소수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옥에 가는데, 자기가 창조한 인간들을 대부분 지옥에 보내고도 그 하나님은 행복하십니까? 그런 하나님은 못믿겠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오해가 늘 있습니다.
인간이 지옥에 떨어지는것을 하나님 책임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옥에서 건질수 있는데 안건지는것을 보면 사람의 불행을 내버려두는 하나님으로 생각합니다. 잘못은 자기가 저지르고 모든 책임은 하나님께 돌립니다.
그분 생각을 듣고 저는 기본적으로 그렇게 생각할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것을 어떻게 설득력있게 설명할수 있을까... 결국에는 설득이 아니라 그분이 말씀에 자기 생각을 순종시켜야 하는 문제입니다.
그런것이 늘 안타깝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 하나님의 성품이 모순되어 보일찌라도 하나님은 전능하시며 의로우시며 아브라함을 선택하셨습니다.
이것을 근거로 아브라함이 기도하는 것을 볼때 이것이 저희들에게도 도전이 됩니다.
그 다음 세번째를 보시겠습니다.
아브라함이 중보기도할때 첫번째로 하나님께 나아가서 기도합니다. 하나님과 친밀해야만 참된 기도를 할수 있습니다. 두번째는 하나님의 성품을 근거로 기도합니다. 조카 롯을 살려달라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말씀하여 가로되 티끌과 같은 나라도 감히 주께 고하나이다 (창18:27, 개역한글)
30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 주여 노하지 마옵시고 말씀하게 하옵소서 거기서 삼십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거기서 삼십인을 찾으면 멸하지 아니하리라
31 아브라함이 또 가로되 내가 감히 내 주께 고하나이다 거기서 이십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이십인을 인하여 멸하지 아니하리라
32 아브라함이 또 가로되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말씀하리이다 거기서 십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십인을 인하여도 멸하지 아니하리라
(창18:30-32, 개역한글)
세번째로, 기도할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앞에서 합당한 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티끌과 같다는 사실을 잊지 않습니다.
그가 그렇게 말했을때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교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시인합니다.
우리는 감히 하나님앞에서 담대히 기도할수 있습니다. 그렇다 할찌라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위치에 서 있어야 합니다.
1 너는 하나님의 전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찌어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제사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저희는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
2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
(전5:1-2, 개역한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 앞에 무엇이든지 구할수 있는자가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앞에 경외심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두려움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어서 다 이루었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 (사66:2, 개역한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돌보십니까(권고)?
하나님의 말씀앞에 그 마음이 떨리는 사람, 하나님의 엄중한 말씀앞에 마음이 가난하고(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사람) 통회함이 있는 사람의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십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기도할때 하나님께 은혜로 나아갈수 있지만 하나님에 대한 존경심이 항시라도 있어야 합니다.
또 한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실때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에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 짐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리이다>라고 먼저 말합니다.
곧 하나님에 대한 기도가 세가지 입니다. 그리고 나서야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이렇게 들어갑니다.
기도는 하나님 중심으로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의 필요를 구하는것이 첫번째가 아니고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것을 기도해야 합니다.
소돔성에는 의인 세명이 있었습니다.-롯과 두 딸입니다-그 의인과 악인을 함께 하나님께서 멸하시면 혹시라도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 사람들이 오해할까봐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기도의 특징입니다.
네번째를 보시겠습니다.
아브라함은 50명에서 숫자를 10명으로 줄여갑니다. 이 수를 줄일때에 우리는 이 기도의 원리를 생각해 볼수 있습니다. 기도는 끈질기게 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도 항상 기도하고 낙심치 말도록 비유로써 이야기 해 주셨습니다.
잠자리에 들었을때 친구가 와서 떡을 달라하여도 잠자리에 누웠으니 떡을 줄수 없다 하지만 그 간청함을 인하여 준다고 비유 하셨습니다. 그리고 불의한 재판관에 대해서도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택한자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겠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도는 끈질기게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때에 이루실 것이기에 하나님의 뜻에 맞는 기도이기에 우리는 실망하지 말고 항상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거두지 말고 계속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기도는 하나님을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내가 변화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내 마음을 맞추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기도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께서 하셨던 기도입니다.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에 맞추는 것입니다. 내뜻에 하나님의 뜻을 맞추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가시고 아브라함도 자기 길로 갑니다.
저희들이 계속적으로 살펴보고 있는것은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어떤 특징들을 갖는가를 보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 이같은 특징들을 어떻게 개발해 낼것인가 하는 것들을 생각해보고 있습니다.
또 하나 말씀드리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소돔성의 심판을 알려주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미래에 대한 예언을 알게 된 아브라함의 태도가 중보기도 하는 것입니다.
저희들이 지금 양천구청에서 정형모 형제님을 초정해서 요한계시록 강해를 듣고 있습니다. 지금 계시록 21장 쯤 나가고 있습니다. 저희들이 요한계시록을 듣는것은 거기에 있는 666이 누구냐, 14만 4천이 누구냐는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서 듣는것이 아닙니다.
휴거되고 나면 무슨 사건이 이 지구상에 벌어질 것인가를 알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지금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곧 소돔이 멸망시킬것을 미리 알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미리 알게하신 이유를 아브라함이 압니다.
아브라함이 중보기도를 합니다.
2 곧 그 통치 원년에 나 다니엘이 서책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고하신 그 년수를 깨달았나니 곧 예루살렘의 황무함이 칠십년만에 마치리라 하신 것이니라
3 내가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무릅쓰고 주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하기를 결심하고
(단9:2-3, 개역한글)
다니엘은, 구약성경으로 치면 다니엘서 전에 있는 부분까지만 구약성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후반부는 그에게 없습니다.
그가 성경을 봅니다. 다니엘에게서 가장 가까운 시대가 예레미야서 입니다.
예레미야는 유댜의 멸망을 예언했고 바벨론 항복할것을 말했던 선지자 입니다. 그래서 그는 매국노로 몰렸습니다. 예레미야가 항복하라고 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 배후에 계신다는것을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채찍이며 하나님의 징계에 순응해야 할것을 말한것입니다.
순종하면, 아프지만 맞으면 70년만에 돌아올것을 예레미야가 예언했습니다.
그리고 다니엘이 이 말씀을 읽으며 70년만에 돌아오는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70년이 찼습니다. 귀환할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니엘이 기도합니다.
다니엘은 70년이라는 포도생활의 이유를 깨닫습니다. 70년이라는 사실을 모르는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는 기도할때 약속되로 70년이 되었으니 돌아가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가 왜 하나님이 바벨론 포로를 허락하셨는지, 왜 귀환을 허락하셨는지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냅니다. 그리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했을때 하나님께서 주신것은 바벨론 포로가 끝났다는것이 아니고 70이레, 이스라엘 역사 전체를 풀어주십니다.
왕이 일어날때-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할때-부터 7년 환란을 다 계시해 주십니다.
이와같이 미래에 대해서 알게 되는것은 지적인 호기심 때문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왜 선택하셨고, 그 선택의 목적을 위해서 어떻게 이루시는가, 그리고 사람들은 얼마나 하나님의 의도에 대해서 무지하고 항상 반대로 갔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어떻게 자기뜻을 이루시는가.
그 하나님 앞에 엎드려 경배와 찬양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니엘이 한것입니다.
저희들로 와 보겠습니다.
11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14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벧후3:11-14, 개역한글)
베드로후서 3장은 주님의 강림하신다는 약속, 그리고 그것이 이천년이 지나도 이루어지지 않자 사람들의 조롱, 그리고 주님께는 하루가 천년같으심을 말합니다. 그리고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옴을 말합니다.
주의 날이 오면 이세상을 이루는 모든 원소들이 해체될것입니다. 세상이 해체될때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나올것이고 그것이 불로 풀어진다고 쓰여 있습니다.
이와같이 지구의 미래, 종말, 새 하늘과 새 땅을 아는 사람들은 그것이 언제 그일이 어떻게 일어나느냐에 대한 지적인 호기심이 있는것이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벧후3:11, 개역한글)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것은 우리를 어떠한 사람으로 만들고자 함이냐, 그러니 우리는 당연히 어더한 사람이 되어야 하냐, 입니다.
<거룩한 행실, 경건함으로 소망을 사모하는것>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벧후3:14, 개역한글)
이것이 결론입니다. 미래를 아는사람, 이 지구가 어떻게 끝날것을 아는사람의 행동은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과 소망과 평강입니다.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벧후3:15, 개역한글)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주님께서 빨리 오시지 않는 이유는 아직도 구원받아야 할 영혼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영혼들의 구원을 위해서 우리는 복음을 말로 전하고 그것이 우리의 삶으로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입니다.
아브라함을 불러서 만민이 복을 얻는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복을 얻고 누리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자가 누리는 복과 행복 그 특권이 드러나야 합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먼저 저희 자신과 가정이 주님앞에서 행복한 가정, 영적인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저희들이 들어가는 직장마다 소속된 단체마다 영적인 단체가 되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16장에서 실패했지만 18장에서 성숙의 길을 걸어갑니다.
물론 완벽하지 않습니다. 20장에서 또 실수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이 자리에 와 있습니다.
저희들도 이 자리로 가야 합니다.
온전하지는 않지만 계속해서 지혜와 생각과 영적인 모습에서 계속해서 성숙해서 주님께서 저희를 부르신 뜻이 이루어지고 특별히 저희들이 섬기는 모임이 주님의 환한 간증으로 세상에 빛이 될수 있기를 원합니다.
주님께서 저희를 도와주시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