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의 사람의 집 03_결혼생활 >
2019년 10월 11일 금요일 / 정형모 형제님
< 하나님의 사람의 집 03_결혼생활 >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히13:4).
히브리 저자는 저희들에게 결혼의 영애로움, 우리말로는 귀히 여긴다고 말씀하고 있는데요. 결혼은 영예로운 것이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제 저희는 결혼은 하나님이 제정하신 것이다라는 것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결혼은 사람이 고안하거나 또는 사람이 생각하거나 또는 사람이 지어서 발전시키고 또 그 모양을 개선하고 이렇게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많은 그렇게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결혼은 하나님이 제정하신 것이다. 그래서 그 제정하신 내용 속에는 하나님의 의도와 또 하나님께서 생각하고 계신 계획이 있습니다. 사단은 우리가 첫날 생각해 본것처럼 하나님의 교회를 공격합니다. 하나님의 집을 공격합니다. 그래서 모임의 간증을 무너뜨리려고 하죠. 사단은 동시에 하나님의 사람의 집, 그리스도인의 가정도 무너뜨리려고 하는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죠. 사단이 가정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여러가지 생각하고 있는 계획들이 있습니다. 그중에 가장 근본적인 것은 결혼에 관한 개념 자체를 비트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것을 무엇이든지 사단은 파괴하려고 하지요. 결혼에서 대단히 두드러지게 그와같은 일은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엡4:14).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저희들이 덕 세움을 받게 될때 말씀을 저희들이 이해하고 그 의미를 깨닫고 분별하게 될때, 저희들은 사람의 궤술이나 또는 간계, 간사한 유혹에 이끌리지 않는다. 그래서 흔들리지 않는다. 여기 사도는 모든 교훈의 풍조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요. 사람들의 생각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생각은 사람들의 가르침, 교훈에 바람이 있고 조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리저리로 흔들리죠.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불변하는 진리 입니다. 그래서 이제 결혼과 관련해서 하나님이 하신 말씀, 그 말씀을 저희들이 굳게 받아들이지 않게 될때 우리는 사람의 생각과 또한 흔들리는 풍조에 이끌려 흘러떠내려 갈수 있다 하는 것입니다. 저희들이 결혼과 관련해서 하나님은 결혼을 제정 하셨는데, 결혼과 관련해서 사람들은 어떻게 잘못 생각하고 있는가? 잘못된 개념 말힙니다. 결혼과 관련해서 많은 사람들이 인구에 회자하고 있는 잘못된 개념들 중에 하나가 '결혼은 더러운 것이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개념은 첫째, 모든 성도들이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결혼에 관해서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고 계시는가? 둘째, 특별히 결혼하는 당사들은 이것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 그 다음에 세번째, 우리의 다음 세대들, 우리의 자녀들이 결혼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저희들은 이제 자녀 교육과 관련해서 생각해 볼 터인데요. 태어나고 한살, 두살 먹어가면서 우리는 어떻게 그들을 교육할 것인가? 가장 먼저 중요한 것은 그들을 어떻게 구원할 것인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서 그들은 어떻게 깨닫고 구원받는 자녀가 될수 있을까? 라고하는 고민과 기도와 노력, 그것은 부모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죠. 그들이 점점 성장해 나가게 될때, 사춘기 이후에 청소년기가 되면 이성에 대해서 눈 뜨고 또 이성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될때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하게 될것인가? 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그들이 세상 사람들의 동료들의 압력으로 인해서 그들이 결혼의 관점에 대해서 달리 생각하는 사조들을 먹기전에 받아들이기 전에, 영향받기 전에 그들에게 하나님 말씀에 결혼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알게 될때 이성에 대한 관심이 생기게 될때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생각이 조율될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냥 방치해 둔다면, 그냥 소홀히 한다면 이와같이 중대한 부분에서 그들은 잘못된 생각을 세상으로부터 전폭적으로, 부분적으로 흡수할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죠. 첫째, 결혼에 대한 잘못된 생각, 오념은 '결혼은 더러운 것이다' 왜냐하면 결혼은 히브리서 13장 4절 말씀에서 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결혼은 영예로운 것이다." 왜 이와같은 생각이 났을까? 세상의 수많은 결혼들을 보게 될때도 또한 거기에서 일어나고 있는 부부간에 불충성이나 또한 그들이 세상에 나가서 부정한 행동들을 하는 것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자식들은 보고 있는가? 결혼의 테두리 밖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성관계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은, 또 많은 어린아이들이 바라보고 있고 그와같은 관점에서 볼때, 결혼은 더러운 것이라는 생각을 사단은 사람들 마음속에 깊이 주입시켜주고 있다. 그 말입니다. 이와같은 것에 대해서 상당히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혼이라고 하는것은 부정한것을 합법화 시키고 있는 과정이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 잘못된 개념중에 하나는 결혼은 반드시 부서지게 될 것이다. 라고 하는 비관적인 생각속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입니다. 부모들이나 친척들이나 또는 친구들이나 많은 부부들 가운데서 일어나고 있는 이혼과 가정의 파괴와 이런것을 너무나 많이 보고 있기 때문에 마음속에 결혼이라고 하는것은 두려움부터 생긴다고 하는 것이죠. 부정적인 관점이 이미 깔려 있다. 사단은 그것을 계속 사람들 마음속에 주입시키고 '결혼이라고 하는것은 대단히 위험스러운 것이다'라는 생각으로 사로잡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만사에 대해서 우리가 생각할때, 사람의 생각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우리가 믿음으로 붙들 것인가? 이것은 언제나 저희들에게 도전이 되는 그런 말씀이죠. 그래서 경험에 의해서 만사를 판단하게 될때, 주변에서 일어난 통계적인 일에 대해서 '아, 결혼은 대단히 위험한 것이다. 그것은 불안정한 것이다.' 라는 생각이 마음속에 들어와 있다면 그것은 어떻게해야 할까?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정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언제나 해답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죠. 그 다음에 또 한가지 오류는 결혼이라는 것은 인생에게 행복을 보장해주는 것이다. 라는 생각 입니다. 결혼은 행복해야 되지요. 또 행복이 있습니다. 그러나 결혼 그 자체가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점을 우리는 마음속에 생각해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서 결혼을 제정하셨고, 하나님이 중매 하셨습니다. 참 놀라운 결혼이죠. 이와같은 결혼이 또 있겠습니까? 그들에게는 상대에 대해서 선택할 여지도 없이 하나님께서는 확고하게 일부일처로 그들은 결혼이 제정 되었고 결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이 그렇게 됬다해도 결혼을 유지하는 일에 소홀히 한다면 그 결혼은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혼이라고 생각할때 저희들은 이제 첫날, 시편 127편 말씀에서 집을 짓게될때 하나님께서 세우지 아니하면 수고가 헛되다 이 말씀을 우리가 기억하지요. 결혼이 우리에게 안전과 행복을 보장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 결혼을 통해서 그 인도받은 상황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주님을 의지하느냐? 그리고 어제 저희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헌신 가운데 어떻게 그것을 만들어 가느냐? 주님의 도움과 주님을 의지하는 것은 절대로 필요한 것이죠. 그래서 결혼 자체가 우리에게 행복을 보장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와같은 생각 속에서 판타지 속에서 살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주님이 우리에게 권면하시고 또한 당부하시는 말씀에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결혼에 관해서 세상 사람들의 생각, 때때로는 사랑에 관한 노래들, 또한 가요들, 이런데서 나오는 가사를 통해서 결혼에 대한 어떤 철학을 가지고 있는 성도도 저는 보았습니다. "결혼을 해도 후회하고 결혼을 안해도 후회한다." 이게 유행가 가사와 비슷하죠. 그와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왕 후회할거면 나는 안한다는 사람도 있고요. 이왕 후회할거면 나는 한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디다 장단을 맞춰야 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무엇인가 건축하게 될때, 반석위에, 아니면 모래위에 세우는 것인데 지혜로운 사람은 반석위에 세우죠. 변치않는 하나님의 말씀, 그 말씀위에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결혼과 관련해서 운명론을 가지고 거기에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신 약속과 또한 진리의 말씀 위에서 바른 개념을 가지고 주님의 말씀을 순종해야 하는 것이죠. 결혼에 대해서 또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결혼은 매이는 것이다. 결혼하는 순간 모든 자유함을 잃어버리는 순간이 된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결혼이라는 것에 밀려서 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결혼이라고 하는것은 불행의 시작이다. 라는 생각을 가지면서도 해야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면서 하는 것입니까? 세상의 생각과 사단의 생각은 우리로 하여금 대단히 불안정하게 만들고, 불편하게 만들고, 불확실속에 끌어가는 것입니다. 결혼이라고 하는 것에는 특권과 또한 책임이 있는데 결혼 중에, 결혼 안에서 나는 책임은 싫고 특권만 누리기를 원한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요. 그것은 결혼이 요구하고 있는 많은 거룩한 책임을 회피하는 이기적인 생각이 아니겠습니까? 이와같은 결혼을 통해서요. 사단은 승리하고 있죠.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서의 잘못된 생각 그것은 하나님의 원수인 사단으로부터, 그래서 많은 사람들의 속에 역사하고 있는 생각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과연 그와같은 영향을 받아야 할것인가? 우리는 물론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가 언제나 돌아가고 그 말씀이 우리를 세워야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히브리서 13장 4절에서 말씀하고 있는대로 "혼인을 귀히 여기라, 혼인을 영예롭게 생각하라" 이런말씀을 하셨는데요. 왜 혼인은 영예로울 것인가? 라는 점을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 혼인(결혼)을 하나님이 제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많은 제도는요, 사람에 의해서 전달되거나 아니면 천사에 의해서 전달 되었습니다. 율법은 천사가 전달해 주었습니다. 또한, 인간의 정부는 모세가 전달해 주었습니다. 또 교회라고하는 것은 사도바울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결혼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제정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하와를 친히 인도해 오셨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최초로 제정하신 제도가 결혼 입니다. 그리고 결혼이라고 하는 제도는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 에덴동산에서 지어졌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게 될때, 최종적으로 만든 대상은 여자입니다. 어제 저희들이 생각해 본 것처럼 아담과 하와를 지으실때, 하나님의 마음속에는 그리스도와 교회를 이 원대한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 라고 하는것을 생각해 보았죠. 하나님께서 이와같이 지으셨고 이 제도를 만드셨기 때문에 그것은 영예로운 것이다. 하나님이 친히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영예로운 것입니다. 두번째, 아드님도 이 결혼에 관해서 관련하고 계시고 이 결혼을 존귀하게 만셨습니다. 우리 주님 자신이 요셉과 마리아가 정혼했을때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 우리 주님이 탄생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요셉의 가정 안에서 그는 자라셨지요. 여자의 후손으로 약속되었던 그분께서는 출산을 통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가정에서 자라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갈릴리 가나 잔치에 참석하셨습니다. 갈릴리 가나 잔치에서 위기가 찾아왔죠. 포도주가 모자랐죠. 그때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드님께서 거기 참석하셨을뿐 아니라 이와같은 위기에서 극복하도록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의 공생애 중에서의 최초의 기적이 결혼식에서 이뤄졌던 기적입니다. 물을 포도주로 만드셨죠. 바리새인들이 우리 주님에게 찾아와서 시험하게 될때에 이혼과 관련해서 말씀하게 될때, 주님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것을 사람이 나눌수 없다." 이것을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 친히 결혼에 관한, 원래 하나님의 제정에서의 뜻을, 주님께서 친히 그 입술로 확인하셨습니다. 세번째, 성령님께서도요, 결혼을 영예로운 것이라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사도바울을 통해서 결혼에 관해서 말씀하시게 될때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에 빗대어 말씀하고 계시죠. 위대한 진리를 결혼에 적용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 결혼과 관련해서 남편과 아내의 삶에 있어서, 그 삶은 바로 구속자와 구속받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 즉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향해서 어떻게 사랑하셨고, 교회는 그리스도를 향해서 어떻게 순복 했느냐? 라는 모본을 보이시고 말씀하셨지요. 이와같은 말씀들을 생각할때, 아버지와 아드님과 성령님께서 모두 다 "결혼은 존귀한 것이다"라는 것을 말씀하고 계시다.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말라. 음행하는자, 간음 하는자를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희들은 이 결혼이 이와같이 존귀한 것이다. 영예로운 것이다. 라는 것을 성도들이 알고 결혼하고 가정을 세우게 될때 나타나는 결과는 무엇이겠습니까? 첫째, 하나님께 영예를 드리는 것입니다. 둘째, 부부 자신이 행복해 지는 것입니다. 또 하나, 자녀들을 교육하게 될때 그리스도인의 가정 안에서 주님이 주시는 선물을 통해서 얻게되는 자녀들을 교육하고 훈육하게 될때 그들을 바로 주님 앞으로 인도하고 또한 주님을 위해 살수 있도록 인도할수 있는 기반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녀들이 어머니와 아버지가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이 영예로운 결혼이라는 것에 대해서 인정하고 그와같은 영예롭다고 하는것에 대해서 사실상 결혼이 영예롭다는 것을 느낄수 있고 볼수 있도록 살고 있기 때문에 자녀 교육에 대해서 그것은 초석이 되는 것이다. 라는 것이죠. 또한 세상을 향해서요. 결혼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영예로운 것이라는 것을 드러내게 될때 세상을 향해서 바로 간증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이와같은것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가정에 대한 간증은 세상을 향해서 신선한 충격이 되는 것입니다. 복음증거하는데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모임의 간증에게도 대단히 중대한 유기적인 관계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결혼을 영예로운 것으로 우리가 말씀을 따라서 그렇게 살고 그래서 결혼이 영예로운 것이라는 것이 드러나도록하게 될때 사단의 입을 막는 것입니다. 사단은 결혼이 더러운 것이다. 결혼은 하찮은 것이다. 결혼은 무너질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혼은 불확실한 것이다. 이와같은 것으로 접근하지요. 그 모든 거짓에 대해서 그리스도인들이 집을 세우게 될때, 결혼은 존귀한 것이다라는 것을 드러내게 될때 사단의 입은 막혀지는 것이다. 사단은 패배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사단은 승리하고자 수많은 불신자들 영속에서 역사하고 있고요. 그와같은 견해를 조성하고 있습니다. 이와같은 곳에서 그리스도인의 간증과 그리스도인의 가정의 간증과 그리스도인의 모임의 간증은 그것을 격파하는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저희들은 이와같은 주님의 고고한 부르심에 대해서 저희들 마음속에 굳건한 믿음과 또한 순종을 통해서 주님의 도우심을 통해서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도록 주님앞에 저희들이 도움을 구하고 또한 주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어제 저희들이 생각한대로 결혼이 정말로 하나님이 지으신 영예로운 것이라 한다면, 저희들의 삶 속에서 아내는 남편에게 순복하되, 존경하는 순복을 표하고 남편은 아내를 향해서 사랑하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우리는 보면서 순종하고 그와같은 것을 드러낼수 있도록, 저희들은 노력하게 될 것입니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한다라고 할때, 참, 아가페 사랑인데요. 너무나 놀라운 사랑이죠. 그것을 어떻게 실천할수 있을까? 생명을 주님께서 교회를 위해서 드렸는데, 그와같은 사랑을 과연 불완전한 남편들이 실천할수 있을까? 우리가 이와같은 것을 실천할때 가장 실제적으로 어려운 것은 매일과 같은 일상 생황에서의 사소함에 있어서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거대한 일을 생각하기 이전에 일상생활의 사소한 일에 있어서 정말로 사랑하는가? 라는 점이죠. 주님께서 이와같은 도전을 우리는 받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와같은 일에 있어서 우리 모두가 주님앞에 순종할수 있고, 또 이것이 가능할수 있도록 그래서 결혼이 정말로 영예로운 것이라는 것을 실제적으로 드러내고 간증 할수 있도록 주님께서 저희들에게 지혜도, 믿음도 은혜도 저희들에게 허락해 주시기를 바라는 것이죠.
이제 저희들은 이와같은 일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결혼을 통해서 원하시는 것은 무언가? 그 표본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 입니다. 결혼을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의 축소판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것은 우리의 너무나 당돌한 주장입니다. 우리는 그와같은 모본과 기준을 보지만, 저희들은 불완전한 저희 자신들을 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같은 표본에 대해서 저희들은 주님의 은혜를 구하고요. 그렇게 살기를 원하고 주님의 도움을 구하는 거죠. 그래서 주님이 저희들에게 그와같은 표준을 주셨기 때문에 저희들은 결혼 생활을 통해서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배워가는 것입니다. 매일의 삶속에서 이와같은 관계가 어떻게 현실화 될수 있을까라고 하는 점에서 우리는 주님 안에서 배워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예를 저희들이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성경에 많은 부부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지만 여기에 대표적으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를 저희들이 생각할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8장 말씀은 이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로 시작합니다.
"이 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하나를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업이 같으므로 함께 거하여 일을 하니 그 업은 장막을 만드는 것이더라"(행18:1-3).
여기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는요, 유대인으로서 불행한 시대에 살고 있었습니다. 로마에 살고 있었고, 그는 본래 본도에서 왔지요. 당시의 로마황제 글라우디오가 반 유대 감정 엔타이세미티즘이죠. 그런 사상은 오래부터 있었습니다. 그가 유대인을 추방하죠. 그래서 할수없이 그들은 거기를 떠나야만 했습니다. 떠나게 될때부터 시작해서 이 두 부부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들은, 그들 전 생애를 통해서 항상 함께 다녔다. 이 두 부부는요. 떨어져서 산 것에 대해서 성경은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두 부부가 항상 함께 가고 있다. 그들의 연합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결혼이라고 하는것은 히브리서 말씀이 존귀한 것이다라는 것 대로, 그들의 삶에 있어서의 결혼은 결혼을 통해서 하나님은 하나됨을 말씀하고자 하셨다는 것을 어제 저희들은 생각해 보았는데요. 그들의 결혼 생활은 연합속에서 걸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첫째, 로마에서부터 나와서 어디 다른곳으로 가야 하죠. 추방 당했으니까요. 불행한 시기 입니다. 그가 어디로 가긴 가야 하는데, 어떻게 갈까? 라고 할때, 여기에 우리는 무엇을 발견 합니까? 인도력을 발견합니다. 거기에 질서를 발견 합니다. 아마 그들이 여러가지로 논의했을 것입니다. "어디로 갈까?" 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 많은 논의중에 결론이 무엇입니까? 이제 고린도로 가는 것입니다. 고린도로 가서, 사실상 고린도로 가서 사도바울과 만났고, 업이 같았기 때문에 장막 만드는 일을 이 사람들은 했지요. 이 부부와 사도바울은 함께 일했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섭리 속에서 그들은 거기서 만났습니다. 이 두 부부는 가장 위대한 사도, 사도바울을 만나서 놀랍게 동역하는 일을 시작하게 되지요. 그들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이들이 연합을 잘 드러내고 있다. 결혼의 본질인 연합을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이 두 부부가 항상 동행 했습니다. 그리고 동역했습니다. 부부가 동역 합니다. 이 부부가 사도바울과 동역 했지만 부부 자신이 서로 동역하고 있다. 동반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고요, 동역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그래서 결혼은 참으로 영예로운 것이다라는 것을 그들을 생활 속에서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연합 속에서 가장 아름답고 절묘하고 가장 고고한 간증이 있다면 그것은 로마서 16장에 있는 말씀 입니다.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놓았나니 나 뿐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롬16:3-4).
"저희는" 브리스길라 아굴라 부부죠.
이 두부부가 사도바울과 동역하고 복음에 있어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있어서 함께 일하게 될때, 얼만큼 연합 했는가? 사도바울과 동역하게 될때, 사도바울의 목숨을 위해서는 자기들의 목, 아굴라의 목만이 아닙니다. 브리스길라의 목도 함께 내놓겠다라고 하고 함께 연합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결혼 질서에 있어서요, 남편과 아내, 아내와 남편의 역할과 위치를 그들은 잘 지키고 있습니다. 권위와 순복, 사실 로마에서 떠나게 될때 어디로 갈 것인가? 많은 논의가 있었지만 결국은 결정 됬습니다. 누가 결정 햇을까요? 많은 논의 끝에 결국에 가장이 결정하지요. 그와같은 질서, 그 질서가 보존이 되어 있다. 만일 결혼이 영예로운 것이라면, 이와같은 하나님이 제정하신 질서가 보존이 되어야만 영예로운 결혼이 유지가 되는 것이죠. 그와같은 점에서 이들은 아름다운 간증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 다음 부부의 역할에 대해서 아굴라 브리스길라 이 언급이 성경에 여섯번 나오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8장 말씀에서 3번 나옵니다. 어떤때는 아굴라가 먼저 나오고요. 어떤때는 브리스길라가 먼저 나옵니다. 이 여섯번중에 사도행전 18장 2절, 26절에 나옵니다. 그다음 로마서 16장 3절에나옵니다. 그 다음 고린도전서 16장 19절에 나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디모데후서 4장 19절에 나오는데, 세번은 아굴라가 먼저 나오고요. 세번은 브리스길라가 먼저 나옵니다. 세번 아굴라가 먼저 나올때의 상황은, 그것은 언제나 가장으로써 남편으로서 인도하고 가르치는 일, 예를들어서 아볼로를 만났을때 가르치는 일은 아굴라가 먼저 나옵니다. 그러나 브리스길라가 먼저 나오게 될때 사도바울과 동역하는 일에 있어서 자주 언급이 되는데 그때는, 브리스길라는 사도를 섬기고 대접하는 일에 대해서 브리스길라가 먼저 나왔다. 그들의 역할이 잘 구분이 되 있다 하는 것입니다. 위치도 역할도 잘 구분이 되 있다. 이것이 질서죠. 혼인의 영예로움에 나타나는 그와같은 모습들입니다.
"브리스가와 아굴라와 및 오네시보로의 집에 문안하라"(딤후4:19).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이 부부에게 문안하라. 누구와 함께요? 오네시보로와 함께 이 두 부부에게 문안하라 당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 두 부부가 얼만큼 동역에 있어서 충성하고 있는가, 그들이 하고 있는일에 하나님을 위한 일에 충성하고 있는가, 이것을 잘 나타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네시보로는 누구 입니까? 사도바울이 옥에 갖혔을때, 모든 사람이, 사도를 알고 있는 그리스도인들 거의 대다수가 다 떠났습니다. 그러나 오네시보로는 언제나 지하 감방에 찾아와서 생명의 위험이 있습니다. 그와함께 친구라고 하는것은 이 당시에 대단히 위험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옥에 자기를 자주 찾아와서 자기를 유쾌케 했다고 했었죠. 이 오네시보로의 충성, 그의 사도를 향한 사랑을 나타내 보인 충성, 사도를 향한 사랑, 이런것을 나타내보이게 될때 그들이 나타내 보인 충성 입니다. 그것을 이 부부가 같은 입장에서 나타내보이고 있다. 우리는 로마서 16장 말씀에서 사도바울의 목숨을 위해서 두 부부가 다 목숨을 내 놓으려고 했다. 이것은 대단한 충성 아닙니까? 그와같은 충성에서 이 부부 본이되고 있다. 이 부부는 처음부터 끝까지 항상 함께가고, 그 집에서 교회가 있었고, 또한 사도와 함께 동역하는 일에, 복음과 진리의 말씀에서 전 생애를 다 바쳤다. 일생을 통해서 그들의 마음과 손과 발은 주님의 일에 있어서 위대한 사도와 함께 모든 힘을 다 쏟고 있었다라고 하는 것이죠. 그들은 결혼을 통해서요. 결혼이 대단히 영예로운것이다라는 것을 잘 나타내보이고 있습니다. 일생, 일심으로 헌신한 부부 입니다. 이제 저희들은 이와같은 결혼이 정말로 영예로운 것인데, 그와같은 결혼을 우리가 한번 각 분야에서 살펴보겠습니다. 부부가 결혼할때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어제 저희들이 부모를 떠나서 하나가 되서, 연합해서, 한 육체가 된다. 그것을 창세기부터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가 되는 것인데요. 이렇게 하나가 되는데 어떤 영역에서 하나가 되는가? 첫번째, 영적인 부분에서 부부는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물론, 한 육체가 된다고 할때 육체로서 하나가 됩니다. 그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결혼에 있어서의 연합, 그와같은 사랑은 플라토닉한 사랑이 아닙니다. 그냥 이성적으로, 생각으로 하고 있는 육체와는 관계없이 그런 생각으로만 하는 사랑이 아니고 이것은 육체적인 사랑입니다. 실제적인 사랑입니다. 육체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육체의 교제가 있습니다. 육체의 결합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과 혼과 몸으로 구성되어 있는 전인입니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5:23).
우리 주님이 강림하실때까지 그리스도인의 전인이 보존되기를 원한다고 해서 영과 혼과 몸과 보존되기를 원한한다고 말씀했습니다. 구원받지 않은 사람은 영이 없죠. 영이 죽었죠. 그래서 사실, 혼과, 육, 이것이 기능을 발휘하고 있죠. 슬픈것은 그들은 영이 죽었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 우리도 그랬죠. 하나님과 교제할수 없고 하나님과 대화할수 없고 하나님 말씀을 읽어도 무슨 의미인지 알수 없었고 우리는 하나님께 말씀드릴수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읽을수도 없었고 알수도 없었고 기도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은혜로 우리가 구원받고 나서 영이 살았습니다. 그래서 이제 구원받은 사람들은 정말로 주님이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그와같은 전인이다 하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주님께서 다시 오실때까지 우리의 전인이 보존되기를 원한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공중에 와서 데리러 가실때까지 지금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살고 있을때, 태어나서부터 그때는 영이 죽어 있다가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고 영이 살았습니다. 이제 그때부터 전인의 세 기능이 역사 합니다. 세 부분이 역사 합니다. 어떻게 역사 합니까? 우리는 몸이 역사합니다. 그런데 몸은 사실은 혼이 없으면 몸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정신 시계가 있고 지적인 그런 기능이 있고, 감정적인 기능이 있습니다. 혼이 가지는 그와같은 기능이 있습니다. 이와같은역사가 있기 때문에 몸이 움직이죠. 그러나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영이 혼을 통제하고 영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영이 혼을 통제하고 혼이 몸을 통제하고, 이것이 정상적인 그와같은 기능이 아니겠어요? 그래서 부부의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것은 한 사람의 전인이 우리 주님이 오실때까지 잘 보존되기를 원한다고 말씀 하셨는데요. 결혼한 부부가 이 다른 세 영역에서 교류가 있다고 하는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영적인 그와같은 영역에서 어떤 교류가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의 결혼이라고 한다면 남편과 아내가 구원받은 사람이죠. 영이 살아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주님과 각각교제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것은 결혼 이후에도 계속 그와같이 이루어져야 되겠지요. 그래서 각인이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사실상 부부가 교제하게 될때, 영적으로 교제하게 될때, 그 교제 이전에 남편도 주님과 교제하고 아내도 먼저 주님과 교제를 하고, 그리고 그와같은데서 피차 부부가 배우자들끼리 교제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적인 교제, 이것은 얼마나 중요합니까? 왜냐하면 영적인 교제, 이와같은것이 혼의 교제와 육의 교제도 영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전도서에 있는 말씀에서 삼겹줄에 대한 말씀을 읽게 됩니다.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전4:11-12).
여기 삼겹줄이 있습니다. 두 사람은 한 사람보다 더 낫다. 그런데 삼겹줄은 끊어지지 않는다. 왜 그럴까요? 남편과 아내가 두 줄이라면 그 가운데 주님이 계십니다. 남편과 아내는 주님과 각각 교제하고 있고요. 주님이 붇들고 계십니다. 주님의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두사람은 주님과 교제하는 것을 통해서 모든 힘을 얻고 또한 모든 근원을 얻게되고 그것을 가지고 우리는 교제하는 것입니다. 그것 없다면 우리의 교제는 무슨 교제가 되겠습니까? 우리 생각의 교제, 그리스도인이라 할찌라도 우리 생각을 가지고 교제 하는것, 그것은 불충분하죠. 그것은 때때로 우리에게 해롭습니다. 주님과 교제를 통해서요.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지식도, 지혜도 얻고 또 믿음도 은혜도, 또한 긍휼도 또한 모든 도움을 얻습니다. 모든 정보를 얻습니다 모든 지혜를 얻고 힘을 얻습니다. 그와같은 교제가 부부사이에 이루어져야겠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요. 함께 기도함을 통해서, 이와같은 것은 나중에 자녀들이 태어나게 될때, 이와같은 교제가 지속되게 될때 자녀들은 그와같은 교제를 눈으로 보게되고 피부로 느끼게 될 것입니다. 자녀 교육에 있어서 이것은 이미 그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부부는 교제하고 있습니다. 어떤 교제입니까? 영적인 교제를 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어떻게 섬겨야 할것인가? 왜 우리가 이 세상에 가는가? 사는 목적이 무엇인지, 무엇이 가장 우선인지, 주님이 우선이다. 어떤 것보다 주님이 우선이다라는 그와같은 교제가 삶 속에서 계속해서 이뤄지고 있다고 하는것은 얼마나 큰 특권 입니까? 또한 부부가 이와같은 교제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 부부가 배워가길 원하는 것,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는 무엇인가? 사실상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수많은 것들을 지으셨고 많은 일들을 행하고 계십니다. 세상을 통제하고 있고, 국가의 흥망성쇠를 주님께서 역사하고 있고, 그러나 이 수많은 일들, 그 가운데 많은 사람들 각인은 하나님께서는 다 알고 계시고 역사하고 계신데, 가장 최종적이고 가장 하나님의 마음속에 영우너전부터 가지고 있었던 가장 정점에 있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리셨고요. 교회를 얻으셨고, 교회를 아름다운 교회로 만드시는 이 모든 일들, 그것이 하나님께서 원대한 계획속에 가지고 계셨던 최종적인 목표다. 그것을 우리는 주님과 교제와 또한 부부의 교제를 통해서 항상 확인하고 그것을 이뤄가고자 하는 교제,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것을 남편도 가지고요. 아내도 가지고요. 그와같은 마음을 부부가 교제하는 것, 이것이 부부의 영적인 영역에서의 교제가 아니겠습니까? 영적인 영역에서 결합이 아니겠습니까? 영적인 결합니다. 그래서 부부는 영적인 교류를 통해서 계속해서 영적으로 성장합니다. 우리는 영적인 영역에서의 교제뿐만 아니라 혼의 영역에서도 교제를 합니다. 아까도 말씀드린 것처럼 영이 혼을 통제하고 지배한다고 말씀했지요. 우리들의 정신적인, 지성적인 생각과 정보를 얻고 정보를 교류하고 하는 이와같은 모든 활동,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도 이와같은 활동을 합니다만, 그리스도인들의 혼의 역사, 즉 지성적인 정신적인 세계에서의 역사는 믿지 않는 사람과 무엇이 다를까요? 가장 결정적인 차이는 믿는 사람들의 지성적인 활동은 영의 활동에 의해서 지배받고 있다는 것이죠.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지배받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의 수많은 정보를 얻고 그것을 교류하고 나누지만 그 모든 정보들을 우리들을 필터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불필요한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들에 대해서 그것을 거부하고 그것을 받아들이고 하는 것은 영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을 통해서 우리는 그와같은 능력을 얻게 되지요. 그것은 세상사람들과 그리스도인들과의 차이다. 이와같은 혼의 역사, 즉 지성의 역사가 부부 사이에 교류가 된다고 하는 것은 참 아름다운 것이죠. 이와같은 지성적인 역사가 있기 때문에 매일의 생활을 가능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활에서 지성적인 이와같은 기능이 없다면 어떻게 살겠습니까? 그러나 이와같은 기능은 영에 의해서 통제받고 있다. 또한 감정도 그렇습니다. 감정적인 영역이 있습니다.. 혼의 영역이죠. 우리는 인간으로서 수많은 감정을 느끼고 있습니다. 부부 사이의 이 감정에서의 교류, 이것은 감정의 교류라고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죠. 감정은 마치 물과 같아서 이렇게 흔들립니다. 올라갔다 내려갔다가, 매 순간 변하지요. 그와같은 것에 물은 그릇에 담아야 그것이 안정적으로 보호되고 이동할수 있게되고 그렇게 됩니다. 감정이라고 하는 것은 그대로 내버려두면 계속해서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의해서 통제되고 있는 혼의 역사, 거기에서 감정의 역사는 우리로 하여금, 부부가 감정적으로 교류하게 될때 어떻게 할까? 감정적으로 안정성을 취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서로 배려해야 하는 것입니다. 돌봐야 하는것입니다.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교류는 감정적으로 안정을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것은 대단히 중요하죠. 본인들 자신들에게도 중요할 뿐만 아니라, 왜냐하면 안보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감정적인 이와같은 교류가 정상적으로 이루어지게 될때, 부부는 안정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돌봄을 받고 있다. 관심의 대상이 되고있다는 것을 확인할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같은 친근함, 감정적인 친근 입니다. 이 감정적인 친근은 안보를 가져다주고요. 그것은 본인들 자신에게뿐만 아니라 자식들에게도 안정을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부부 사이에 감정적인 이와같은 혼란, 오르락 내리락 하는 이와같은 불완전한 상태가 있다면 자식들에게 대단히 어려움을 가져다 주는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모든 것들은 여전히 영의 통제를 받는다. 주님의 말씀과 주님과 교제하는 것을 통해서 말씀을 읽고, 교제하는 것을 통해서, 이와같은 감정도 통제를 받는다. 어떻게 아내를 향해서, 남편을 향해서, 관심과 배려와 이 모든 것들을 주고 받을수 있겠어요? 그것은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그 교제를 통해서 우리는 이와같은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또 하나의 영역이 있습니다. 영의 교제와 혼의 교제와 육의 교제 입니다. 두 사람이 한 육체가 된다. 정말 말 그대로 육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는 부부의 성적인 생활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결혼이라는 것을 바로 그것만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모든 만족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와같은 것은 계속해서 줄달음치는 주제일뿐만 아니라요, 거기에서 많은 사람들은 행복을 추구하지만 거기서 행복을 발견하지 못하고 실망하게 되고 그들은 상대를 통해서 불신하게 되거나 많은 실망속에서 떠나가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육체에서 하나가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고안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고안하셨기 때문에 이것은 결혼의 한 부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하나됨의 표현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절대로 중요힌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와같은 점을 말씀하시면서 히브리서 13장 4절은 결혼은 영예로운 것이라고 말씀할때에 영적인 교류도 영예로운 것입니다. 혼의 교류도 영예로운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부부에서 육체의 결합, 이것은 하나님께서 고안하시고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의도하신 것이기 때문에 영예로운 것이다. 부부의 성적인 생활, 부부의 육체 관계는, 그것은 결혼을 업그레이드 시켜주고 결혼을 강화시켜 줍니다. 그런데 이것 역시 영의 지배를 받고 혼의 지배를 받고, 육체는 두가지 다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의 근원은 영의 지배 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과 교제하는 이와같은 상태에서 부부는 서로 사랑을 느낍니다. 육체적인 하나가 되기 이전에 영적인 교제와 또한 혼적인 교제를 통해서 영의 교제를 통한 만족과 또한 소망과 또한 능력을 얻게 되고 주님과 교제함으로 마음속에 만족을 느끼게 되고 그리고 살아가는 삶에 있어서 확신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그와같은 상태에서 지성적인 교제와 감성적인 교제는 우리로 하여금, 부부로 하여금 대단히 안정적으로 만들어줍니다. 이와같은 것을 토대로해서 육체적으로 하나가 될때, 그것은 우리에게 진정한 만족을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점에 있어서 믿지 않는사람들의 육체적인 관계라고 하는것에는 엄청난것이 빠져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죠. 따라서 우리는 결혼에서 주님을 영예스럽게 한다는 것은 세가지 영역에서 우리는 주님앞에 하나가 됬다고 하는것을 표현해 드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거죠.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제안하시고 또한 고안하시고 계획하시고 만드신 것을요, 누가 실현하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지으신 우리 사람,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그것이 사실이라고 하는 것을 생활을 통해서, 영의 생활에서, 또 혼의 영역에서, 육체의 영역에서 이뤄드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은 그리스도인의 부부를 보는 것입니다. 그들의 질적인 그와같은 연합이 과연 무엇이냐 하는것을 나타내 보이는 것입니다. 저희들은 결혼 생황에 있어서, 부부의 설 생활, 영어에서는 컨섬에이션이라고 말하면 결혼한 부부가 첫날밤을 치루는 것을 말하죠. 그 다음에 부부의 일상적인 삶을 인티머시, 친밀함이라고 말합니다. 이 친밀함, 그리스도인 부부의 성적인 생활, 이 자체는 세상은 이것을 비하하고 있습니다. 사단은, 사실은 사단이 비하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고안하신 두 사람의 육체적인 결합은 하나님이 그것을 영예롭다 거룩하다고 말씀했는데요. 그렇기 때문에 사단은 그것을 부수려고 하고 비하시키고 마치 더러운 것으로 만드려고 하는 많은 노력을 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합니까? 결혼의 테두리 밖에서 성적인 활동이 이루어지는 것을 통해서 사단은 성생활이라고 하는것은 비루한 것이다라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죠. 그러나 하나님 말씀은 무엇입니까? 결혼의 테두리 안에서 이와같은 관계는, 이와같은 성적인 생활은, 그것은 하나님께 영예를 돌리는 것이다. 그것은 거룩한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결혼의 한 부분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그것을 우리가 알고 우리의 자녀들에게도 이 사실을 알려줘야 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 자녀들이 알게 된다면, 우리 자녀들이 이제 이성에 대해서 눈을 뜨기 전부터 알게되고 이성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될때에도 수많은 동료의 압력이나 세상의 잘못된 개념과 사단의 오류로부터 우리 자녀들을 확고하게 보호할수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가정 안에서와 교회 안에서 우리 자녀들의 교육, 여러분야가 있습니다만, 그 중에 한 분야에서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라고 강조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 부부의 성적인 생활은 다시 말해서, 한 육체가 된다고 하는것은 무엇을 의미할가? 저희들이 이제 그와같은 부분에서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다. 하나님이 만드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거룩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와같은 것에 대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순종해 드릴것인가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부간의 성적인 생활에는 창세기 2장 25절이 말씀하는 것처럼 부부간에 벌거벗어도 수치가 없다고 말씀하고 있죠. 이것은 두 사람 사이에 투명한 것입니다. 숨기는 것이 없는 것지요. 그래서 그와같은 삶 속에서 한 육체가 되는 것입니다. 사실상 이와같은 일을을 위해서 전혀 거리낌없는 대화, 숨김없는 대화가 계속 이뤄져야 되겠지요. 한 육체가 된다고 하는것은 그냥 단순히 육체로만 만나는것이 아니고요. 우리가 이미 생각하는 것처럼 영적인 부분과 혼적인 부분과 육체, 이 모두가 다 함께 연루가 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부부가 한 육체가 되게 될때 전혀 거리낌없는, 담장이 없는 대화는 얼마나 중요한 것입니까? 숨기는 것이 없는, 정직함이라고 하는것은 투명함이라고 하는 것은 얼마나 기본적인가라고 하는것을 우리는 기억하겠죠. 저희들은 이제 이 순결을 위해서, 결혼 생활에 있어서 순결이라는 것을 너무나 중요하다. 사도바울은 데살로니가서에서 우리에게 이와같은 것을 권면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취할 줄을 알고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좇지 말고"(살전4:3-5).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거룩함 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일반적인 그리스도인의 거룩함을 말하는 그 이상을 우리에게 지금 여기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곧 음란을 버리고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결혼은 존귀한 것이다, 영예로운 것이다라고 말씀드렸죠.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을 가지고 자기 아내 취할줄을 안다" 자기 아내를 취한다고 하는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자기아내 취하는 방법을 안다. 우리는 그 방법을 이야기 했습니다. 영적인 영역에서 또한 지성적이고 감성적인 부분에서 또한 육체적인 부분에서 하나가 되고 교류하고 그리고 한 육체가 되는것, 그것은 하나님께서 바라시고 소원 하시고 또한 계획하신 하나님의 의도다라고 했죠. 그와같은 법을 우리가 알 필요가 있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처럼 색욕을 좇지말고 이 일의 분수를 넘어서 ㅎ형제를 해하지 말라" 헤롯 안디바는 자기의 팀심과 욕심 때문에 자기의 제수를 자기의 아내로 취하죠. 다른사람에 해를 준거죠. 부도덕한 이와같은 일들은 이와같은 슬픈 일들을 낳지요. 다윗은 밧세바를 범함으로 인해서 그 가정도 풍지박산 내고 자기 가정 안에서도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습니까? 이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경고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부부관계에서 주님이 말씀하고 있는 도덕 수준을 이 말씀에서 우리가 보고 있지요. "이 일의 분수를 넘어 형제를 해하지 말고 이는 우리가 너희에게 말하고 증거한 것과 같이 이 모든일에 주께서 신원하여 주심이라" 주님이 심판자가 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히브리서 13장 4절 말씀과 상당히 평행하게 달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케 하심이 아니요 거룩케 하심이니 그러므로 저버리는 자는 사람을 저버림이 아니요 너희에게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림이니라"(살전4:7-8, 개역한글)
"저버리는자" 이 말씀을 거절하는 자, 이 말씀을 소홀히 하고 또한 잘못 걸어가는 사람에게는, "그것은 사람을 저버림이 아니고 너희에게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림이라" 대단히 엄숙한 말씀 입니다. 도덕성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도덕성을 요구하고 있는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부자연스럽고 우리 자유를 말살시키려고 하는 그러한 노력이 아니고요. 우리의 자유를 파괴하려고 하는 이와같은 포식자로부터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자유를 보호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고 계시다는 것이죠. 이 도덕성에는 여섯가지의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거룩을 요구하고, 아내 취할줄 아는 법을 요구하고 있는것은, 첫째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부르심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또한 우리속에 거하시고 계시는 성령님이 존재하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부도덕한 것을 행하게 될때, 하나님께서는 정부로써 심판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아는 그 자체, 바로 그것이 우리의 거룩이다. 바로 그것은 우리의 도덕 가운데 걸어갈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다. 또한 그렇게 걸어가게 될때, 형제를 해하지 않는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죠. 우리는 이와같은 부부의 하나됨, 한 육체가 됨, 친밀함, 부부의 성적인 생활, 여기에 대해서 성경은 또한 우리에게 무엇을 조언하고 있는가?
"남편은 그 아내에게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찌라 아내가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이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의 절제 못함을 인하여 사단으로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고전7:3-5).
우리말에는 "기도 할 틈"이라고 말했는데, "기도와 금식할 틈" 이라고 말씀 했습니다.
여기 부부의 생황에 있어서 저희들이 어떻게 해야할까 하는 점에서 또 한가지 조언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남편과 아내가, 남편이 아내에게 아내가 남편에게, 피차간 상대에게 대한 "의무다"라고 우리말에는 되어 있습니다만 영어 표현에서는 "합당하게 드려야 할 혜택이다"라는 말씀으로 되어 있습니다. 의무 하면 무언가 책임감에 하는 그런 뉘앙스가 담겨 있습니다만, 의무라기보다는 남편은 아내에게 마땅히 전해줘야 할 유익, 혜택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남편은 아내에게, 아내는 남편에게, 상대에게 유익한 것, 선한것, 혜택이 되는것을 전해주는 일에 있어서 그것은 억지로가 아니고 기쁨으로, 그것은 사실상 특권입니다. 의무가 아니라 특권입니다. 그것을 행해주라. 여기 저희들은 남편과 아내를 머리와 순복의 관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그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그것은 질서 입니다. 그러나 이와같은 질서보다 더욱 위에 있는 놀라운 질서가 있습니다. 그것은 부부관계에 있어서요. 육체적인 하나됨에 있어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질서 입니다. 그것은 남편이 아내에게 전해주어야 할 합당한 혜택, 선함, 아름다운것 그것을 전해준다. 아내가 원하게 될때 남편은 기꺼이 그것을 행해준다는 말입니다. 남편이 원하게 될때 아내는 기꺼이 행해준다는 그 말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그 이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4절에요, "아내가 자기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자기몸은 자기 소유가 아니다. 그 말입니다. 자기의 소유가 아니고요, 남편의 소유다라고 상대를 향해서 생각합니다. 남편은 아내를 향해서 마찮가지 입니다. 이것은 피차 마찮가지로 생각하고 그와같이 처신한다고 하는거죠. 여기 5절 말씀에 "서로 분방하지 말라" 이제 결혼의 테두리 안에서 부부가 육체가 하나가 되는 이와같은 생활, 그것은 친밀함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요. 그 친밀함을 유지하게 될때 어떠한 마음가짐, 어떠한 부부간의 예의,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필요할까? 라는점을 말씀하고 있어요.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이것은 의무가 아니라 상대에게 마땅히 전해줘야 할 선행이다. 상대의 유익과 즐거움을 위해서 내가 행해야 할 일이다. 라는 겁니다. 특권이다. 왜냐하면 내 몸이 나의 것이 아니다. 이 관계에서는 바로 그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남편이 이제 아내를 향해서 고려 합니다. 또 상대의 요구에 대해서 들어 줍니다. 이기적이 아닙니다. 또한 이와같은 성적인 관계를 이용해서 어떤 사람들은 무기로 사용할때가 있습니다. 이와같은것을 통해서 파업플레이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악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거스르는 것입니다. 부부관계에서 ??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가 되는, 이 한 육체가 되는 일에 있어서 부모를 떠났습니다. 둘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한 육체가 되었습니다. 그와같은 삶을 살아갑니다. 이 삶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해주신 유익과 질서는 바로 그것이다. 그것은 상당히 상대를 배려하는 것이죠. 그러나 때때로 이와같은 일을 지속할수 없을때가 있습니다. 그 어떤 상황이 있습니다. 그 상황을 인해서 그 다음말씀은 우리에게 "서로 분방하지 말라" 일반적으로 분방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아까,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항상 함께 다녔다고 말씀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부부는, 그리스도인 부부는 함께 가야 합니다. 함께 자야 합니다. 그리고 함께 시간을 나눠야 됩니다. 이 대화에 있어서요. 육적인 이와같은 기쁨을 누리게 될때, 영적인 교제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리고 정신적이고 감정적인 교류가 선행되어야 한다. 라고 말씀을 드렸어요. 왜냐하면 마음속에 안보를 느끼고 있고 투명한 것을 통해서 대화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대화가 가능하지 않는데, 육체적으로 하나가 된다한들, 거기서 느끼는 기쁨이나 즐거움은 상당히 제한될 것이고 아마 전적으로 사라질수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이와같은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개인을 향해서는 주님이 오실때까지 전인이 보존되기를 원한다. 이것을 다른 의미에서 생각한다면 우리 주님께서 오시게 될때까지 부부관계에 있어서 세 영역이 모두가 보존되기를 원한다고 주님은 말씀하시는 것이겠죠. 그래서 여기 이제 부부관계에서요. 상대가 원하고 요구할때는 언제나 나는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또한 나의 마음이 이기적인 것이 아니고 항상 상대에게 합당한 것을 전해주고자 하는 그와같은 마음이 부부 상호간에 있어야 한다고 하는것을 주님께서 부부간의 질서로 말씀하고 계신데요. 그렇지못하게 될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 분방하지 말라고 했지만, 분방해야 할 때를 말하고 있습니다. 세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분방 합니다. 여기 기도할 틈이라고 했는데요, 사실 기도와 금식이라는 말씀으로 영어 성경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는데요. 그와같은 것을 위해서, 기도와 금식, 그것을 원한다면 이제 분방하는 것입니다. 같이 자는것이 아니예요. 따로 자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그러나 이와같은 일, 분방하게 될때, 한사람이 일방적으로 결정해서 하는일이 아니다. 여기는 합의상 해서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합의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얼마동안 하는 것입니까? 무제한 하는것이 아니고요. 잠깐동안 하는 것이다. 얼마동안 하는것이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이 세가지가 지켜져야 합니다. 기도와 금식할 틈을 얻기 위해서, 그리고 서로간에 합의에 의해서 그리고 잠깐동안 행하는 것이다. 그 이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이후에는 다시 합하라." 왜냐하면 우리의 절제하지 못함 때문이다. 우리의 육체의 연약을 사도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결혼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결혼한 부부에 대해서 이 이야기를 말씀하고 있는것은, 그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을 지금 하는것이 아니겠어요? 주님의 지혜를 가지고 지금 말씀하는것이 아니겠습니까? 왜냐하면 우리는 연약하다고 하는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결혼의 이유중의 하나가,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대단히 고고한 이유서부터 많은 이유가 있는데, 가장 낮은 이유를 7장 초반에서 말씀하고 있지요.
"너희의 쓴 말에 대하여는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음행의 연고로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고전7:1-2).
결혼의 이유 중에 하나가 음행의 연고다. 다시 말해서 육체의 연약 때문에 절제하지 못함으로 인해서 시험에 빠질수 있는 것에서 구원받는 길이다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물론 결혼의 전부의 이유는 아닙니다. 그러나 이 분야를 우리는 무시할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제 분방하게 될때, 무제한 할수 없다. 왜냐하면 사단이 여기에 틈탈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을 내다봐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서 우리의 육체를 가지고 있고 연약함에 대해서 우리는 주님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이 말씀하신대로 우리는 순종해야 될 것입니다. 그래서 부부는 언제나 함께 있어야 됩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인해서 따로 방을 쓰거나 따로 거하게 될때 나타나는 여러가지 어려움들이 있지요. 우리는 그것을 마음속에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결혼의 테두리 안에서 부부의 친밀함, 성적인 생활을 이제 하나님의 영예 가운데 유지하게 될때 우리는 무슨 생각을 해야 할까? 이 친밀함이라고 하는것은 남편을 향해서, 아내를 향해서, 배우자를 향해서 나타내 보이고 있는 선행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기적인 것이 아니고 우리가 지금까지 7장 말씀에서 보는것처럼 그것은 선생이다. 상대를 위한 배려다. 상대를 위한일이다. 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이것은 비형적이거나 지탄받을만한 일이 아니다는 그 말입니다. 그것은 오히려 거룩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옳은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께서 지으셨기 때문에, 그분께서 고안하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것은 대단히 성서적인 것이다. 그리고 부부관계에서는 항상 원수가 끼어들려고 하는, 원수가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마음속에 기억하고 마음속에 거기에 대해서 대비하고 살아야 한다. 우리의 연약을 인정하고 사단이 역사한다고 하는 가능성에 대해서 내다 본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인해서 주님의 뜻을 결혼 안에서 이루게 될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저희들이 신명기 말씀에서 결혼의 우선순위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사람이 새로이 아내를 취하였거든 그를 군대로 내어 보내지 말 것이요 무슨 직무든지 그에게 맡기지 말것이며 그는 일년 동안 집에 한가히 거하여 그 취한 아내를 즐겁게 할찌니라"(신24:5).
"그를 군대로 내어 보내지 말 것이요" 다른말로 하면 그를 전쟁ㅇ로 내어보내지 말것이요. 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언듯 읽게 될때, 결혼과 관련해서 일년동안 한가히 살면서 육적인 것을 추구하고 그렇게 살라고 하는것과 같이 들릴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좀더 조심스럽게 우리가 살펴보겠습니다. "사람이 새로이 아내를 취하였거든" 이 아내를 취하다라는 말의 원래 뜻은 지나가다가 낚아채는 것입니다. 결혼이라는 것은 전혀 새로운 환경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특히 신부는 새로운 환경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슨 말이냐면 과거에 자기가 살고 있던 모든 연관 관계, 친구, 부모님, 식구들, 그리고 친구들, 친척들 자기가 살고있던 배경, 심지어는 어머니가 나에게 주시던 음식, 맛, 이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살아 왔습니다. 왜냐하면 부모의 슬하아래서 나는 선택의 여지없이, 어떤때는 입맛도 어머니의 손맛에 의해서 나는 결정이 되었습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나의 모든 생각과 환경과 또한 관계와 이 모든것이 익숙해 왔습니다. 그 익숙하던 시대가 끝나고 결혼에 들어가게 될때, 아내를 취했다고 하는 것은 새로운 전격적인 변화, 또는 환경속에 들어가서 적응해야 한다는 그런 말입니다. 이와같이 대단히 어려운 환경속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대단히 위태로운 환경속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점에 대해서 신혼 초기에 피차간 잘 모르고요. 남편이 아내에게 요구하고 아내는 또 남편에게 요구하고 이와같은 일에 대해서 서로 맞지 않는다고 해서 어려움을 경험하는 때가 있죠. 게다가 남편과 아내 사이에 친척들이나 또는 부모님 때에서 이와같은 점에서 압박을 가하는 이와같은 때도 있죠. 어려운 상황속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와같을 때에 어떻게 해야 할까? "그를 군대로 내보내지 말라" 군대로 내보내지 않아서 많은 특권을 누리고요. 신혼의 아름다움을 계속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살라는 것을 찬양하기 위한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이런 아내를 취했기 때문에 그 아내로 하여금, 제일 끝에 이런 말씀이 있지요. "즐겁게 할찌니라" 그것은 이제 결혼생활 자체를 방종 가운데로 이끌고 그저 육체적인 즐거움을 만끽하는 가운데로 가라는 말씀이 아니고요. 아내를 즐겁게 한다고 하는것은, 아내를 격려한다는 말입니다. 아내를 붙들어 세워준다. 새로운 환경 속에서 적응해야 하는 기간 입니다. 이 기간중에 남편이 군대로 간다. 아니면 다른 공무에 바삐 들어가게 된다라고 한다면 이 관계는 대단히 위태로워 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염려하셨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은 다른 많은 외적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얼마나 잦은 전쟁이 있었는가 하는 것을 보지요. 주변에 암몬 모압, 또한 북쪽의 시리아, 레바논, 두로와 시돈, 그리고 블레셋, 이집트, 에돔, 상당히 많은 국가들로 에워싸여 있고요. 멀리는 바벨론, 앗수르, 구스, 에디오피아 이런데서 수많은 군대가 계속해서 쳐들어왔습니다. 이스라엘에게 가장 중요한것은 예나 지금이나, 지금도 마찮가지 입니다. 국가의 전쟁, 국가의 안보 입니다. 국방입니다. 그것처럼 이스라엘에게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너무나 잘 알고 계세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 결혼한 사람에게 신랑은 전쟁에 보내지 말라. 그리고 공무에 전념하도록 하지말라.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 무얼 하는 것입니까? 새로 취한 아내, 새로운 환경속에 적응해야 하는 아내에게 그의 마음을 격려하고 세우고 이 관계를 적립하고 부부 관계를 공공히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혼을 세우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마음속에 결혼이라는것, 결혼이 보존된다는것, 그것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것이고요.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신 사람들 가운데, 이제 인간의 번성과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위대한 영광을 얻되,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와 교회의 위대한 관계, 구속자와 구속 받는사람의 관계, 하나님의 구원의 위대한 뜻을, 사실은 결혼을 통해서 드러내고자하는 이와같은 뜻이 계셨다면, 하나님의 마음속에는요. 이스라엘에게서는 국방보다보다 더 우선적인 그런 순위가 있다면 그것은 결혼이다. 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다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일년동안 한가히 거하며 그 취한 아내를 즐겁게 할찌니라" 이것은 그냥 탐닉속에 빠져서요. 방종 속에서 그저 육체의 즐거움을 구가하고 추구하라는 말씀이 아니고요. 하나님께서 결혼의 중요성, 다시 말해서 부부관계에서 정착됨과, 부부관계의 안정과 그리고 서로간의 이해와 돕고 사랑하고 배려고하고 그래서 이 관계를 세우고, 그래서 결혼을, 가정을, 견고히 세우는 것이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라고하는 하나님의 중요성을 여기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사실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집에 대한 중요성을 성경은 누누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사람의 집, 그리스도인의 가정, 이것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왜냐하면 거기에는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들, 특별히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의 가정을 세운다고 한다면, 그 가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기대하고 소원하시는 위대한 간증이 있습니다. 그 간증은 세상을 향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요. 본인 자신들이 행복을 느끼고 성취감을 느낄뿐만 아니라, 이제 곧 태어나게 될 자녀들을 향해서, 합당한 훈육을 통해서 그들로 하여금 미래가 있도록, 하나님께 미래가 있도록, 가정을 세우는 일에 또한 모임을 세우는 일에,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일에 그들을 하나님께서는 쓰기를 원하신다. 라고하는 하나님의 위대한 뜻이 있다는 거죠.
저희들은 오늘 결혼과 관련해서요. 두번째 시간으로 여러가지 점에 대해서 살펴 보았습니다. 결혼에 대한 잘못된 개념, 그것은 궁극적으로 사단이 저희들 마음속에 심어주고 있는 악한 생각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말씀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이 결혼을 제정하시게 될때 어떤 뜻과 기대와 소원을 가지고 계셨는가? 그것을 저희들이 잘 이해하고 또한 분별하고 순종한다면 우리는 히브리서 13장 4절이 말씀하고 있는바, 혼인은 영예로운 것이다라는 것을 하나님 앞에 이루어 드리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 모든일에 주님께 기쁨을 드리고요. 저희들에게도 유익이 되고 저희들의 미래의 소망이 있도록 주님께서 저희들에게 소원하고 계시다. 주님께서 저희들을 이런일에 이해하고 순종하고 이루어 나감으로 인해서 주님께서 영광을 받을수 있도록 저희들이 주님앞에 함께 엎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