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이레 2022. 6. 29. 21:02

성경읽기 : 열왕기하 16장 10-20절(요약)

10 아하스왕이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을 만나러 다메섹에 갔다가 거기 있는 단을 보고 드디어 그 구조와 제도의 식양을 그려 제사장 우리야에게 보내었더니
11 아하스왕이 다메섹에서 돌아오기 전에 제사장 우리야가 아하스왕이 다메섹에서 보낸 모든 것대로 단을 만든지라
12 왕이 다메섹에서 돌아와서 단을 보고 단 앞에 나아가 그 위에 제사를 드리되
13 자기의 번제와 소제를 불사르고 또 전제를 붓고 수은제 짐승의 피를 단에 뿌리고
14 또 여호와의 앞 곧 전 앞에 있던 놋단을 옮기되 새 단과 여호와의 전 사이에서 옮겨다가 그 단 북편에 두니라
15 아하스왕이 제사장 우리야에게 명하여 가로되 아침 번제와 저녁 소제와 왕의 번제와 그 소제와 모든 국민의 번제와 그 소제와 전제를 다 이 큰 단 위에 불사르고 또 번제물의 피와 다른 제물의 피를 다 그 위에 뿌리고 오직 놋단은 나의 물을 일에 쓰게 하라 하매
16 제사장 우리야가 아하스왕의 모든 명대로 행하였더라
17 아하스왕이 물두멍 받침의 옆판을 떼어내고 물두멍을 그 자리에서 옮기고 또 놋바다를 놋소 위에서 내려다가 돌판 위에 두며
18 또 안식일에 쓰기 위하여 성전에 건축한 낭실과 왕이 밖에서 들어가는 낭실을 앗수르 왕을 인하여 여호와의 전에 옮겨 세웠더라
19 아하스의 그 남은 사적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20 아하스가 그 열조와 함께 자매 다윗성에 그 열조와 함께 장사되고 그 아들 히스기야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왕하16:10-20, 개역한글)


- 최재홍 형제님 사회 : 아하스는 하나님께 도우심을 구하기보다 앗수르를 위지했습니다. 그는 우상숭배했고 우상에게 자기 아들을 불에태워 죽였습니다. 이제 그는 앗수르에 가서 그곳의 제단을 보고 성전의 제단을 바꾸고 성전기구를 파괴하고 변형시키는 일들을 하게 됩니다. 자유롭게 교제 나눠주시기를 바랍니다.

- 김대현 형제님 : 앗수르를 의지했던 아하스는 앗수르에 굴복했을뿐 아니라 종교적으로도 종속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는 앗수르에 가서 제단을 보고 성전의 제단을 바꾸었을뿐 아니라 성전의 모양도 바꾸어 갑니다. 그런데 그 일을 실행하는 사람은 제사장 우리야였습니다. 그는 정치적인 타협없이 하나님이 말씀에 순종해야 했던 사람이지만 아하스의 말을 따라서 행했습니다. 그는 더이상 하나님의 종이 아닌 아하스의 종이었습니다.
세상에서도 사람이 어떤 잘못을 했을때 그가 종교지도자였을 경우에는 다른 사람보다 더 큰 지탄을 받습니다. 이처럼 종교지도자의 위치는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야는 여호와를 배교하고 자기뜻대로 행하는 아하스를 따라서 행했습니다. 그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의 모습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됩니다.

- 전의석 형제님 : 아하스가 앗수르에 간것 자체가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름을 두신 곳은 예루살렘임에도 불구하고 아하스는 도움을 받기 위해 앗수르의 수도에 갑니다. 이후 다른 어떤 나라보다 앗수르가 큰 위협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유다 사람들이 침략으로 고통을 받았던 이유는 하나님께서 사랑이 없음이 아니라 그들의 죄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아하스는 그럼에도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고 하나님을 버리고 앗수르왕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우리에게도 어떤 위협과 어려움이 있다면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께 회개하는 방법으로 회복히야 합니다. 만일 아하스와 같은 방법으로 세상을 의리한다면 아하스와 같은 방법으로 실패하게 될 것입니다.

아하스는 또한 성전과 성전기구를 바꿔갑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막과 성전을 지을때에 하나님께서 명하신 식양대로 지을것을 명하셨습니다. 그리고 모세와 솔로몬은 그대로 지었습니다. 그러나 아하스는 다메섹에 있는 단을 성전에 도입했고 하나님의 단은 북쪽으로 옮겼습니다. 예배의 모양이 바뀌게 되고 잘못된 제단에 잘못된 제사를 드립니다. 또한 물두멍이 해체되었습니다. 이는 제사장들이 제사를 드리기 전에 물두멍으로 손을 씻어 깨끗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늘 우리가 거룩함을 유지하기를 바라십니다. 제사를 드릴때마다 늘 자기 자신을 살피고 씻어야 하는데, 이와같은 것이 없애 버립니다. 그렇기에 더러운 제사를 드리게 됩니다. 또한 성전 낭실(복도)가 왕이 거하는 곳과 연결되어 있었는데 그 길을 폐쇄해버립니다. 곧 길을 막아버린 것입니다. 이와같은 안타까움으로 그는 계속해서 하락해 갑니다.
아하스는 16년간 치리했습니다. 36세에 죽습니다. 그가 이른 나이에 죽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못하고 패역했기 때문입니다. 또하 역대하를 보게 될때, 아하스왕은 대단히 악한 왕이었기에 열왕의 묘실에 들어가지 못하고 예루살렘에 장사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때때로 우리는 이러한 악한 유혹들을 받게 됩니다. 모이지 않고 모이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내는 유혹을 받습니다. 그 외에도 하나님께서 명하시지 않은 방법을 도입하는 유혹을 받습니다. 그러나 이와같은 것에 흔들리지 않고 믿음의 길을 걸어가기를 원합니다. 그다음 왕인 히스기야가 제일 먼저 한 것은 성전으로 향하는 문을 연 것입니다. 이와같이 성전을 향하는 자세가 참으로 복된 것임을 생각하게 됩니다.

- 김보영 형제님 : 아하스왕은 잘못된 길로 갔습니다. 앗수르로 간 것이 잘못된 것이고 하나님이 명하시지 않은 단을 도입한 것입니다. 앞선 두 형제님께서 깊이 교제해 주셨습니다. 저는 어떻게해서 아하스가 잘못된 단을 도입하게 되었는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었습니다. 그런 그가 눈앞의 웅장한 모습의 단을 보았을때 마음이 뺏긴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도 여러 우상들을 보게 됩니다. 그들은 대단히 웅장한 모습을 가지고 있었고 신비로운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것은 하나님의 교회에도 들어와 있습니다. 카톨릭의 중심의 성당에 들어가면 그것이 성경에 나오는 것들이라고 하지만 기괴한 우상들이 있고 사람들은 그것에 마음이 빼앗깁니다. 성당안의 웅장한 모습, 성스러운 모습이라고 자랑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을 갖고 마음이 간 것이 아니고 눈에 보이는 예배당의 거창한 모습, 신비로운 모습을 보고 마음이 빼앗긴 것입니다.
초대교회때에는 성화도 그리지 못하게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성화라는 그림이나, 물건에 마음이 빼앗길수 있기 때문입니다. 단순하게 이렇게 모이는 것 자체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웅장한 단의 모습을 보고 아하스의 마음이 빼앗긴 것처럼, 성전에 있어서는 안되는 단을 세웠을때 하나님의 심판은 직결적으로 임하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이와같은 것을 언급하신 적이 있습니다.

15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찐저)
16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찌어다
(마24:15-16, 개역한글)

성전에 단을 세웠다는 것은 하나님을 치욕스럽게 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향한 모독인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의 몸이 성전인 것을 기억하시기 원합니다. 우리는 성전인 우리의 몸을 얼마나 성결하게 유지하고 있는지요. 하나님의 전을 더럽히면 하나님께서 그를 멸하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성령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우리의 몸을 얼마나 깨끗하게 유지하는가에 대한 도전을 받게 됩니다.

또한 아하스가 앗수르의 단을 짓도록 우리야에게 명했을때 우리야는 전혀 거부감없이 그 명령을 수행했습니다. 그의 행위는 하나님을 거역한 것이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를 한 것입니다. 아하스가 그런 명령을 내렸다해도 그는 그것을 단호하게 거부하고 하나님의 편에 섰어야 했습니다.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현대를 사는 구원받은 모든 성도는 왕같은 제사장입니다. 그러한 우리에게 우리야와 같은 모습이 없는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왕같은 제사장으로서 단호한 모습으로 세상을 향해서 살아가고 있는가 생각합니다. 우리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고 행했다면 절대로 그렇게 행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구약에서 우리야를 짖지 못하는 개라고 말씀합니다. 그는 마땅히 행해야 할 일을 행하지 못하고 아하스왕과 같이 함께 범죄에 빠지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를 압박하는 아하스같은 존재들이 있습니다. 이 가운데서 얼마나 담대하게 제사장의 직분을 수행하고 그 길을 가고 있는가하는 도전을 받게 됩니다.

- 전의석 형제님 : 이 말씀을 공부하며 이사야 7장 말씀이 가장 마음에 남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징조를 구하라고 했을때에 이상하게 구하지 않습니다. 만약 구했다면 그의 인생이 바뀌었을텐데 그는 구하지 않습니다. 그 부분이 그의 인생의 가장 아쉬운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저희의 인생에서도 저희는 하나님께 구할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인생 가운데서 기도가 매우 중요하며 또한 기도가 우리의 인생을 바꿀수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 장승훈 형제님 : 앗수르 왕이 그 청을 듣고 곧 올라와서 다메섹을 쳐서 취하여 그 백성을 사로잡아 길로 옮기고 또 르신을 죽였더라 (왕하16:9, 개역한글)

이 말씀을 아모스 1장 3-5절 말씀을 성취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내가 다메섹 빗장을 꺾으며 아웬 골짜기에서 그 거민을 끊으며 벧에던에서 홀 잡은 자를 끊으리니 아람 백성이 사로잡혀 길에 이르리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암1:5, 개역한글)

아하스가 앗수르왕을 왜 만나러 갔을까를 생각하게 될때, 그에게 하나님은 앗수르왕이었을거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사야 7장 11절에서 하나님께서 아하스왕에게 징조를 구하라고 할때 아하스는 그것을 거부합니다. 여호와를 시험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그는 이미 앗수르에게 도움을 요청해 놓은 상태였습니다. 그 도움은 열왕기하 15장에서처럼 주변국이 북이스라엘을 위협할때 므나헴왕이 달란트를 주면서 앗수르왕에게 도움을 구하는 모습을 생각하게 됩니다. 북왕국과 남유다는 서로가 앗수르왕에게 서로 충성경쟁을 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7장 8-9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북이스라엘이 어떻게 될것인지를 말씀합니다. 남유다를 괴롭혔던 아람과 북이스라엘이 있는데 북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하고 그 심판의 칼날이 남유다, 하아스에게로 오고 있는 것입니다.(호세아 5장 14절)

내가 에브라임에게는 사자 같고 유다 족속에게는 젊은 사자 같으니 나 곧 내가 움켜갈찌라 내가 탈취하여 갈찌라도 건져낼 자가 없으리라 (호5:14, 개역한글)

아하스왕이 다메섹에서 본 단을 그가 돌아오기 전에 만듭니다. 그래서 왕은 단을 다메섹에서 보자마자 또 예루살렘에서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 단을 중심으로 살아갑니다.

20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이 이르렀으나 돕지 아니하고 도리어 군박하였더라
21 아하스가 여호와의 전과 왕궁과 방백들의 집에서 재물을 취하여 앗수르 왕에게 주었으나 유익이 없었더라
(대하28:20-21, 개역한글)

아하스는 앗수르왕에게 대단한 공을 들였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이런 꼴을 당하고 에브라임에 이어서 유다도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살려고 앗수르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그 생각 때문에 망하게 됩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겪을때에 당연히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어려움을 당할때에 우리는 눈에 보이는 해결책을 강구하게 됩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하스의 결국이 어떠했는가를 보고,(그외에 성경에는 좋은 예시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어떻게 결정할지를 교훈으로 얻을수 있습니다.

- 김보영 형제님 : 22 이 아하스왕이 곤고할 때에 더욱 여호와께 범죄하여
23 자기를 친 다메섹 신들에게 제사하여 가로되 아람 열왕의 신들이 저희를 도왔으니 나도 그 신에게 제사하여 나를 돕게 하리라 하였으나 그 신이 아하스와 온 이스라엘을 망케 하였더라
(대하28:22-23, 개역한글)

아하스가 섬겼던 우상들이 아하스와 이스라엘을 망케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우상을 섬기는 자체가 멸망이라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에 우상을 세운 아하스는 자기만 망하는 것이 아니라 온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였습니다. 우상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적인가를 다시 한번 마음속에 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 최재홍 형제님 : 아하스왕은 자기가 만든 제단에서 제사드리는 것을 기뻐했고 그렇게 했습니다. 그 제사는 하나님께 드려진게 아니라 다메섹의 우상들에게 드려진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보다 자기의 마음에 드는 것을 선택한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무시하고 불순종합니다.
또한 우리야는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야 했지만 왕의 명령을 따랐습니다. 반대로 침례요한은 헤롯의 잘못을 꾸짖었고 예수님께서도 종교지도자들의 잘못을 지적하셨습니다. 믿음을 행하는데는 침묵하지 않고 그 길을 지키는 것이 필요함을 생각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