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베소서 4. 측량할수 없는 그리스도의 부요 : 비밀, 바울의 두번째 기도 >
< 에베소서 4. 측량할수 없는 그리스도의 부요 : 비밀, 바울의 두번째 기도 > 정형모 형제님
어제 저희들은 에베소 성도들이 과거에 어떤 상태에 있었는가, 사단은 어떤 역사를 했는가,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떤 일을 하셨고 그 일을 통해서 성도가 어떤 역사를 하시기를 원하는가?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저희들을 시로, '포예마'로 만드셨다. 그리고 이제 우리 주님께서는 어떤 화평의 임무를 완성 하셔서 새 사람, 한 사람, 한 몸을 만들고 성전을 짓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오늘 말씀은요, 3장에서 사도바울께서 자신이 이제 갇힌자 된 자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죄수가 되었는가?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일 때문에 이방을 위해서 자기가 갇힌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오늘 3장 전반부에서는 그가 맡은 이 위대한 은혜의 사역, 즉 비밀을 나타내는 것을 말씀하고 있고, 후반에서는 이제 에베소서에서 두번째 나오는 기도의 내용이 있습니다. 오늘 저희들이 이 말씀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본문의 말씀을 봉독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러하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을 위하여 갇힌 자 된 나 바울은……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을 너희가 들었을 터이라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내가 이미 대강 기록함과 같으니 이것을 읽으면 그리스도의 비밀을 내가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것 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게 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예하는 자가 됨이라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군이 되었노라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치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 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엡 3:1-21).
읽은 말씀을 주님께서 저희들에게 복 주실 줄을 믿습니다. 이제 3장에 들어와서 저희들이 전반부에 비밀을 말씀하고 있는데, 사실은 이 이야기를 하기 전에 사도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1절에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예수의 일 때문에 이방을 위해서 갇힌 자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소개의 말씀을 저희가 잠깐 시간을 들여서 생각할 가치가 있다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나서 그가 왜 로마 옥 중에, 사실 로마에 가서 가택 연금 가운데, 지금 감금당한 상태에 있었죠. 그런데 그는 사실 이 위대한 교회진리를 에베소서라고 하는 서신을 통해서 발표하고 있는데, 자기 자신에 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도바울의 어떠한 연유로 그가 이와같이 됬는가, 라고 하는 점을 살펴 보겠습니다.
3장의 윤곽은 전반부, 13절까지는 '나는 비밀을 알고 있다.' 사도는 그 계시를 받았죠. 그 다음에 14절부터 마지막 절까지는 기도입니다. 능력을 위한 바울의 기도, 그런데 사실은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의 측량할 수 없는 부, 그것을 우리 성도들이 이제 소유하게 되었고 그와같은 부가 사실상 그의 삶 속에서 풍성하게 생활로, 그의 사는 삶속에 영으로 나타날 수 있게 되기를 그는 기도하고 있지요. 첫번째 부분을 우리가 나눠 본다면 1절은 말씀드린대로 사도바울이 자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 2-13절 말씀은 사실상 삽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삽입의 주제는 비밀인데요, 그리스도와 교회에 관한 비밀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부분의 마지막 절, 13절 말씀에서는 이 비밀을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와 교회를 생각합니다. 자기 자신이 감옥에 있는 이 상태를 에베소 성도들이 볼 때에 슬퍼하거나 자기를 불쌍히 여기거나 그런 생각을 할 필요가 없다. 이것은 영광스러운 것이다, 라고 하는 격려의 말씀으로 이 전반부를 끝내고 있습니다.
갇힌 자 된 바울입니다. 바울은 갇혔습니다. 이 갇힌 자는 사실 죄수라 이렇게 말할 수 있죠. 갇힌 자, 죄수가 무슨 자랑입니까? 보통 감옥에 들어간 사람은 자기 죄 때문에 들어간 겁니다. 그러나 사도는 자기 죄 때문에 들어간 것이 아니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마음 속에서 뭐를 감옥 속에서 느끼고 있었느냐? 패배감이나 동정을 구하는 마음, 자기연민, 그런것이 아닙니다. 그는 오히려 자기가 이 감옥에 들어온 이유가 그리스도 예수 때문에, 그리고 이방인들을 위해서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위대한 계획 때문에 자기가 그것을 받았고 그것을 나타냄으로 인해서 그곳에 왔다는 것에 대한 말씀 안에서의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고 있고요. 위엄이 있고요, 진리로 인해서 감격이 있고, 환희가 있고, 승리감이 있었습니다. 에베소서는 에베소 안에서 교회의 진리에 관한 성명서가 지금 발표가 되고 있는데요. 거기는 전혀 감옥 냄새가 나지 않는다. 로마 정부의 죄수가 아니라 사도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죄수다, 라고 지금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지금의 터키, 지중해 부분에 다소에서 태어났지요. 외부에서 태어난 유대인입니다. 그는 어려서 예루살렘에 와서 유학을 했지요. 가말리엘에게 배웠습니다. 그의 문하에서 그는 율법을 탁월하게 배웠습니다. 그는 학생들 중에서도 아주 탁월한 학생이었어요. 그의 열심과 그의 지식과 그의 믿는 바에 있어서 철저한 그의 행실과 이 모든 일들에 있어서 그는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이죠.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인들, 그들의 믿음,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이 모든 것들에 대해서 그는 증오했고 스데반을 죽일때, 가편 투표를 했고, 스데반을 죽이는 사람의 옷을 자기가 지키고 있었죠. 그러나 하나님께서 위대한 은혜로 때가 되심에 다메섹 도상에서 그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나서 아라비아로 갔지요. 그가 나중에 간증하게 될때, 사도행전 22장에서 보면 예루살렘에서 체포 되어서 사람들 앞에서 "부형들아"라고 말을 시작하면서 간증하게 될때, 그가 한 얘기가 있습니다.
"또 주의 증인 스데반의 피를 흘릴 적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줄 저희도 아나이다"(행 22:20).
사도바울 마음 속에는요, 구원받고 난 이후에 그가 핍박했던 모든 일들,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요, 그런 자신을 잘 알고 있고, 죄의 괴수인 것을 너무나 깊이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스데반이 죽을 때에 어떻게 죽었다고 하는 것을 그는 옆에서 잘 보고 있었고요. 그가 이제 구원을 받고 난 이후에 그 전모가 무엇을 의미한다는 것을 그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어요. 그는 훼방자고 핍박자고 포행자였지만 그래서 그가 거듭나고 난 이후에 자기 민족을 생각하게 될때, 자기 민족이 눈이 가리워 졌고, 불신 가운데 있고 메시아를 거절하고 있고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불신 속에 있는 것에 대해서 그는 사실상 자기 책임이라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1절에 포함)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찌라도 원하는 바로라"(롬 9:1-3).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민족을 생각하게 될때, 꼭 자기의 구원받기 전의 그의 모습을 보는 것 같고 스데반이 순교하게 될때 그는 어떠한 악을 행했는가? 그의 양심이 그것을 항상 느끼고 있었고요. 그래서 그는 사실 자기가 저주를 받아서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찌라도 자기 형제들이 구원 받기를 원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론적으로 신학적으로요, 말씀의 진리대로 결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수 없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그의 심령은 그의 민족을 향해서, 동족을 향해서 가지고 있었던 뜨거운 애정과 그들이 정말로 구원받기를 원하는 간절한 마음은 로마서 9장 1-3절 말씀에 잘 표현이 되고 있습니다. 그의 마음 속에는 큰 근심과 지속하는 고통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3차 전도여행이 끝나고 그가 돌아오게 될 때에 그는 예루살렘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거기가서 그의 동족에게 말씀을 전하기를 원했지요. 오는 도중에 밀레도에서요, 저희는 오늘 에베소서를 보고 있어요. 에베소에서 3년이나 그는 공을 들였습니다. 그는 여러번 교회들마다 각각 초기에 머물던 그 기간이 달랐지만 에베소는 상당히 긴 기간을 그들 가운데 머물면서 그들에게 말씀을 눈물로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돌아오는 길에 에베소 장로들과 밀레도에서 만나서 고별 연설을 하지요. 그들 앞에 그가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을 향해 간다, 심령의 매임 때문에 간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고별 연설에서 이런 말씀을 했지요.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2-24).
그는 예루살렘 행이 확고 했습니다. 결단된 마음으로 그는 그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심령의 매임 속에서 에베소 장로들에게 이야기 했지요. 그는 거기를 떠나죠. 눈물 가운데 다시는 아마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속에서 떠났습니다. 예루살렘에 가서 그는 체포됩니다. 그 백성들이 그를 증오 했지요. 그를 증오한 여러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은혜의 복음을 증거한 것, 이방인을 향해서 그가 사역을 하고 있다고 하는 것은 유대인들이 견딜 수 없는 그와같은 사도바울을 볼 때에 증오심을 돋구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언제나 살면서, 또는 말씀을 전할 때마다 그는 동족을 바라 볼 때마다 스데반의 죽음을 마음 속에 잊을 수 없었을 겁니다. 그는 아그립바 앞에서 이야기 했지요. 아그리바 앞에서 뭐라고 말했을까? 쭉 전도를 하고 난 후에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라고 말했죠. 그는 결박된 상태에서 지금 서 있었어요. 그래서 나 이렇게 결박된 거 말고, 다른 것은 다 당신들은 나를 따르시오, 라고 확신 가운데 전했지요. 죄수가 왕 앞에서 더 맣은 권위와 위엄을 가지고 이야기 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결국 가이사에게 호소했기 때문에 로마로 향하죠. 항해를 통해서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결국 그를 가이사 앞에 서게 합니다. 로마에 당도해서 형제들을 만납니다. 이제 가택 연금 속에 있게 되었습니다. 병사가 지키고 있습니다. 그는 많은 유대인들이 자기를 찾아오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일을 가택 연금된 상태에서도 계속했습니다. 그는 심령의 매인자였기 때문에 쇠사슬에 매였다, 라고 하는 겁니다. 이게 사실 에베소 3장 1절 말씀입니다. 그는 무슨 죄를 져서 쇠사슬에 매인것이 아니고 심령에 매였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대의를 위해서, 이방인의 유익을 위해서 그는 매였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을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다."라고 말하고 있죠. 그는 거기서 서신을 쓰고 기도하죠. 로마 제국의 수도, 바로 여기에 왔습닌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우리 주님께서 교회를 처음으로 언급하셨습니다. 그것은 가나안과 팔레스타인과 이방 땅의 경계 부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요, 교회진리를 처음으로 선포할때, 성명서를 발표할때, 제국의 수도에 가서 발표하게 되었습니다. 로마 제국의 수도, 로마. 여기서 그는 발표 했습니다. 아마 이것이 그 당시 로마를 레플리카로 만든것인데요. 아마 그는 여기 어디서 가택 연금 속에 있었을 겁니다. 제국의 화려한 것들은 그 속에서 매일과 같이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그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의 위대한 영원한 계획, 그리스도와 교회에 관한 이 영광스러운 진리가 그 마음속에 불타고 있었기 때문에 감옥에서도 그는 자기연민, 피배감? 이런 것은 그에게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상 로마제국은 전 세계의 수도였지만 사실상 전 세계의 실제적인 수도는 사도바울이 감금 되었던, 가택 연금되었던, 그 장소였다. 저는 그렇게 확실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로마에서 바울이 셋집 생활을 했지요. 자유가 없어요. 그러나 그는 이런 육체적인 자유가 없지만 그는 심령의 모든 자유를 가지고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어느날 이제 이런 말을 했어요. 고린도전서 15장은 부활에 관한 말씀을 할때에, 자기를 미숙아라 말합니다.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전 15:8).
그런데 왜 만삭되지 못해서 난 자라고 말했을까? 사도행전 전반부를 보면 베드로가 주인공입니다. 12장 까지는 베드로가 유대인과 이방인을, 천국으로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는 그런 열쇠를 가지고 있었죠. 복음을 통해서 그 일을 했어요. 오순절날, 그리고 고넬료 집에 가서 유대인과 이방인을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는 일을 했어요. 그러나 13장서부터는요, 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통해서 이제 계속해서 그 일을 이어갑니다. 그런데 여러분께서 사도행전 마지막 장, 마지막 절, 28장 31절 말씀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유하며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행 28:30-31).
여기 그는 복음을 전해서 물론 하나님 나라에 들어옵니다. 구원 받으면 그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그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옵니다. 그런데 그는 여기서 교회를 전파했다. 교회를 가르쳤다. 교회 진리를 이야기 했다, 그런 말씀은 아직 없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 일이 사도행전에서 이렇게 끝나고 있지만 얼마 후에 사도는요, 바로 여기에서 교회진리를 드디어 이야기 했다. 즉, 교회 진리라고 하는것이 최초로 선포되는 것과 관련해서 그가 태어나는 것을 말한다면, 그는 미숙아였다. 그는 아직 그 이야기를 하기 훨씬 전에 구원받고 그는 복음을 전하고 각처에서 교회를 심었고, 그리고나서 사도행전 끝까지 그는 하나님 나라를 전파했고, 그리고나서 에베소 성도들을 향해서, 로마에서 드디어 교회에 관한 진리, 그리스도께서 머리요, 교회는 몸이라고 하는 이 위대한 진리를 성명서로 이제 발표하고 있다고 하는 겁니다. 그것이 에베소서 입니다. 마침내 만기가 왔습니다. 드디어 교회의 성명서를 발표하게 됩니다. 유대인의 완고한 편견이 있어요. 베드로의 경우에 보세요. 고넬료의 집에가서 전도한 이후에 유대인들은 왜 거기 갔느냐, 힐난하죠. 바울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그를 반대하고 죽이려고 작정한 사람이 도처에 깔려 있었고요. 사도행전 23장 말씀을 보면요, 그를 죽이기로 결정한 사람들,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 사십명 이상이 그렇게 작정한 사람들이 있었어요.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그가 전도 여행을 할때, 아시아로 갈때, 일곱 형제들이 그를 보필하고, 옆에서 경호하고 가고 하는 이런 모습들을 저희들이 보지요. 유대인의 완고한 편견, 그들의 불치의 우월감, 바로 이런 것 때문에 이 은혜의 복음은 전파 되기가 어려웠고, 더군다나 교회 진리를 이야기 하기에는 더욱 더 어려웠다고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바울을 미워한 이유가 뭡니까? 은혜의 복음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한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이방인과 유대인이 하나된다. 이 교회의 비밀을 이야기 하고 있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했어요. 사도행전 끝까지 하나님의 나라가 전파 되었지만 드디어 사도바울은 때가 되었다고 느꼈습니다. 주님의 인도를 따라서 바른때에 이 교회 진리가 드디어 선포가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삽입 부분을 들어가 보겠습니다. 은혜의 경륜이라고 하는 것, 사도바울이요. 그가 은혜의 경륜을 받았다, 라고 말씀 했습니다. 이것은 청지기 직분을 말하는 겁니다. 은혜의 경륜이라고 하는것은 청지기 직분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관리하는 그런 청지기가 되었다라고 하는 것이죠. 왜? 사도는 택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에게는 은혜의 메세지가 있었습니다. 그 다음에요, 그 메세지에 합당하지 않은 이방인을 향해서 그는 그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청지기 였다는 말입니다. 경륜이라는 말은요, '오이코노모스'라는 말인데, 가법(house Law)이라는 말이죠. 또는 청지기 직분이다. 또는 관리하다. 시대에 따라 다른 관리를 한다. 이런 말인데요, 계시로 비밀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께서요, 이 비밀을 계시를 통해서 알려 주셨습니다. 그것은 참 놀라운 은혜죠. 어떤 비밀입니까? 그리스도의 비밀입니다. 그리스도의 비밀이라는 말은요, 머리와 몸의 진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머리고 그리고 뗄레야 뗄 수 없는 몸이 있는데, 그것은 교회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비밀입니다. 사도와 선지자에게 성령으로 나타나셨다. 5절에 그렇게 말씀하고 있는데요,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들의 아들들에게 나타내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때가 되었을때, 사도와 선지자에게 성령으로 나타내 보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 교회는 진리가 나타나게 되었고 이 터가 사도와 선지자들에 의해서 세워졌지요. 이 비밀의 중심 진리는 무엇입니까? 대단히 중요한 중심 진리가 있어요. 교회의 비밀, 그리스도의 비밀의 중심 진리는 이방인들은 어떤 사람이 되었는가? 이것은 전에 상상할 수 없는 그런 위치가 된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동료 후사가 되었다. 함께 하는 후사가 되었다. 후사라고 하는 것은 기업을 받는 사람이죠. 그런데 이방인이 기업을 받아요? 그것은 유대인들은 절대로 생각하지도 않았고 그와같은 이야기를 들을때에 유대인들은 격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요, 그리스도 안에서 이제 이방인들을 부르시고 구원받게 할 뿐만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기업에 함께 참여하는 그런 동료 후사가 되게 하셨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는 머리고 교회는 몸인데, 그 몸의 지체가 유대인 뿐만 아니라 이방인도 같은 지체가 되어서, 한 몸이 되도록 하셨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동료 참가자가 되었다. 어디예요? 복음으로 말미암아서요,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약속, 얼마나 많은 복스러운 약속들이 있습니까? 그 약속들에 참여할 수 있는 특권이 있습니다. 그것을 누릴수 있는 특권이 있다. 그래서 동료 참가자가 되었다. 이것이 교회의 비밀 안에 담겨있는 이방인을 향한 참 놀라운 소식입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그는 은혜의 이런 경륜, 청지기 직분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메세지가 있었다 그 말입니다.
사도바울은 7절에서 일꾼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는 일꾼인데, 어떻게요? 능력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의 은사를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셨기 때문에 일꾼이 되었다. 일꾼은요,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가 있습니다. 일꾼을 위해서 물론 준비 하십니다. 먼저 구원하게 하시고 그리고 준비케 하시고요.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은사를 주시는데, 그 은사를 잘 관리하고 은사를 개발하고 은사를 사용하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쓰고, 성도들의 유익을 위해서 쓰고 그렇게 해야죠. 그런데 그 일을 일꾼으로 하게 될때, 하나님의 능력이 내 속에 역사하는 그 일이 필요 합니다. 그래야만 효과있는 일이 이루어지죠. 여기 바울이 겸손함 가운데요, 자기를 가리켜서, 아까는 만삭 되어서 나지 못한 사람이다. 또 어떤 때는 자기는 참 죄인의 괴수다. 그것은 자기가 일부러 사람들 앞에서 자기를 과도하게 낮추기 위해서, 거짓 겸손으로 자기를 낮추기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사도는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요. 이 위대한 사도가요, 이렇게 항상 그 마음 속에서는요, 그는 위대한 일을 하고 있었고, 위대한 능력을 나타냈고, 그런데도 바로 그런 사람 속에 참 놀라운 모순과 같은 진리는 동시에 그 마음 속에는 항상 겸손이 충만히 있었다라고 하는 겁니다. 그는 자기를 생각할때, 언제나 연약한 사람, 가장 낮은 사람, 능력이 없는 사람, 겸손한 것이 완전히 그에게 베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현실이었습니다. 모든 성도 중에서 가장 작은자다. 죄인의 괴수다. 자기는 훼방자요, 포행자다. 또 가해자였다. 그것을 항상, 한 순간도 그는 잊지 않고 있는거예요. 바로 그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항상 받고 있었죠. 그래서 그는 겸손한 자세 중에서요,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은혜를 주신 이유가 있다고 하는 것을 이야기 하고 있어요. 8절에서는 그 은혜를 주신 이유가 뭡니까? 하나님은 뭘 사도바울을 통해서 기대하고 계셨습니까? 사도바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요. 이렇게 은혜를 주신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 이것을 다른말로 하면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부요함, 부를 이방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서다. 이방 사람들은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소망도 없었고 그들은 육체의 정욕을 따라서 살고 미래가 없고요. 완전히 멸망 속으로 가고 사단에게 끌려 다니던 소망이 없는, 기업도 없는, 따라서 영적인 부라고 하는 것은 전혀 파산 상태에 있는 그런 사람들이었는데요. 그 사람들이 구원을 받으면서부터 시작해서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이 위대한 은혜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도대체 무슨 일을 하셨는가, 우리 어제 2장에서 그것을 보았습니다. 주님께서는 막힌 담을 허시고 유대인과 이방인을 하나로 만들고요. 그리고 또 막힌 담을,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막힌 담을 허시고요. 우리 인간이 하나님과 하나님과 화목하도록 하신, 위대한 평화의 임무를 완전히 수행하셨다. 그래서 놀라운 복이, 부요함이, 이방인에게 그대로 마치 수문이 터졌을때, 말로 할 수 없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물살이 흘러 내리는 것처럼, 하나님의 위대한 부의 영광이 이방인들에게 전해지는 것입니다. 이 사명을 주셨다라고 하는 거죠. 하나님께서 사도바울에게 은혜를 주신것은 그리스도의 측량할 수 없는 부요함을 이방 사람들에게, 그 소망없던 바로 그들의 마음 속에, 이것이 홍수와 같이 그들 마음 속에 들어갈 수 있도록, 참 여러분과 저도 이방 사람입니다. 우리에게도 마찮가지, 미신 속에서, 사단에게 이끌려, 소망도 없던 사람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어떠한 부요함을 받았습니까? 사도바울이 바로 이와같이 자기 생애를 바쳐서, 그리스도 예수를 위해서, 이방인을 위해서 갇혔다. 우리는 사도바울의 사역의 고귀함을 특별히 이방인으로서 주님에게 물론 감사합니다만, 사도바울의 생애를 통해서 바친 모든 헌신이 우리에게 이와같은 것을 주었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9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도바울에게 은혜를 주신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두번째 이유는요, 왜 하나님께서 그에게 은혜를 주시고 그것을 하라고 말씀하셨을까? 감추었던 비밀의 경륜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라고 하는 겁니다. 감추었던 비밀의 경륜, 우리는 경륜이라고 하는 것을 아까 보았지요. '오이코노모스' 그것은 집마다 다른 법이 있다. 집마다 다 다른 규율과요, 그런 다른 법을 따라서 관리가 되고 다스려진다. 그래서 사실 이 경륜이라고 하는것은, 하나님께서 인류를 창조 하시고 아담과 하와를 이후에 인류가 번성하고 숫자가 많아지고 하게 될때, 그 시대가 있었습니다. 그 시대마다 하나님께서는 다루시는 방법이 달랐어요. 가장 ??한 예로요,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에 율법 시대가 있었어요. 그 율법 시대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 가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성전의 휘장이 이제 찟어지고 주님은 다 이루었다고 이제 외치시고 율법의 시대는 끝납니다. 그리고 사실 그 이후에는 은혜의 시대가 시작이 됩니다. 이 시대를 사실상 교회 시대라고 말하죠. 사도바울은 이 비밀을 이야기 하고 있었는데요. 그런데, 사도는 이와 같은 경륜, 전에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다루셨어요. 그리고 이 시대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새롭게 다루시는가. 이것이 비밀입닌다. 비밀의 경륜을 모든 사람이, 특별이 여기 모든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이것을 읽는 유대인과 이방인들 모두를 말합니다. 그들에게 알게 해야 한다. 그래서 사도바울은요, 3장에서 그는 갇혔습니다. 이방인을 위해 갇혔습니다. 왜냐하면 이방인을 위해서, 첫째 그리스도의 측량할 수 없는 풍성함, 부요를 알게 해주고, 전달해 주는 것, 두번째는요. 감추었던 비밀의 경륜을 낱낱히 알려 주는 것, 바로 이것이 사도바울이 가지고 있었던 책무였다. 영광스러운 책무였다, 라고 하는 것이죠. 여기에는 물론 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와같은 일을 통해서 교회가 천사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했다라고 하는거예요.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천사들에게 알려줘야 해요. 심지어는 우리 주님께서 전에 우리를 구원 하시기 위해서 천사보다도 잠깐 못한 바가 되시고요. 우리는 천사가 가지고 있는 능력과 힘과 천사들 중에서 악한 천사인 사단, 모든 악령의 가장 우두머리인 사단, 그가 가지고 있는 능력과 꾀와 있습니다. 인간보다 훨씬 강력한 그런 것도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 구원받은 사람들이 이제 천사를 향해서 행할 수 있는 여러가지 것들을 말씀 했습니다. 우리 위치와 또한 우리 사역과 또한 이런 점에서 하나님께서는 놀랍게 말씀 했어요. 그 중에 하나가 교회가 천사들을 향해서 가지고 있는 기능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천사들에게 알리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일은요, 교회가 천사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려주는 일은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다 정해진 것이다, 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계획은요, 어느날 무슨 일이 터졌기 때문에 임기 응변으로 거기에 적당히 맞춰서 새롭게 만들어 가는 그런 것 아닙니다. 만일 그렇다면 하나님은 참 격이 떨어지는 그런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요, 완전 하시고 영원부터 영원까지 다 보시는 분이시고요. 모든 계획이 그분 안에 있고요. 그 모든 계획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그 타임 케이블을 통해서 일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영원 전부터 계획된 이 일은 교회가 천사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려준다고 하는 것이죠.
하나님의 각종 지혜가 뭘까요? 우리는 앞에서 그것을 보았습니다. 6절에서 보았는데요. 이것은 교회가 천사들에게 보여주는 것인데요. 유대인과 이방인을 하나로 만드신 하나님의 지혜, 그것은 우리가 아까 보았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가 되어서요. 이방인도, 전에는 멸시받고 복도 없었고 소망도 없었던 이런 사람들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왔을 때, 그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업에 함께 참여하는 후사가 되었다. 이것 참 천사들이 모릅니다. 이것을 교회를 통해서 배워야 합니다. 교회의 중요한 기능, 수많은 기능들 중에 영광스러운 기능은 그리고 우리에게 어깨가 무거운, 그와 같은 영광스러운 책임은 그것은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천사들에게 알려 주는 것이죠. 기업에 함께 한 후사, 그리고 머리에 함게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한 몸이 되었다. 유대인도 이방인도, 그래서 한 몸이 되었다라고 하는 이 지혜, 이것은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이와같은, 지혜를 사용하시고요, 어떻게 이러한 일들을 할수 있을까, 이런 것들은요. 사단은요, 수천년이 지나면서 모르고 있었어요. 사단이 아는 것들이 많이 있었지만 사단이 모르는 것, 하나님은 과거에 이 비밀을 비밀로 유지해 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때가 되었을 때, 사도바울은 이런 비밀을 드러 냈고요. 그 안에 하나님의 각종 지혜가 있는데, 또 하나는 이방인도요, 믿는 유대인들처럼, 믿는 이방인들도, 약속에 함께 참여한 사람들이 되었다.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을까요? 이것도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엄청난 지혜입니다. 이것은 거룩한 천사들이 살펴 보기를 원하는 것들이었는데요.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교회가 되었고요. 괴가 천사들에게 알려줘야 할 놀라운 하나님의 지혜였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12절 말씀에서요. 이와같은 모든일들을 볼때에, 그리스도의 사역과 그리스도의 연합의 결과를 생각할때, 우리는 얼마나 부요한 자가 되었는가, 얼마나 놀라운 책임을 우리가 가지고 있는가, 우리가 얼마나 놀라운 천국의 직분을 가지고 있는가, 라고 하는 생각을 하게 될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그분의 임재 가운데 진입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위대한 특권인가, 말로할 수 없는 큰 특권입니다. 그분 앞에 담대히 나갑니다. 이 말은 경외심을 가지고 가지만 공포심이 없다, 라는 말입니다. 언제나 우리는 주님앞에 나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접근하는 것은 기도로 하나님 앞에 나가서 말씀드릴 수 있는 그러한 자유를, 우리가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에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를 의지해서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해서 자신감이 있습니다. 주님 앞에, 하나님 앞에 나가게 될때, 하나님이 우리를 받아 주신다고 하는 그런 확신 말입니다. 왜요? 우리는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있고요. 주님이 그렇게 약속하셨어요. 그래서 12절 말씀에서는 그런 말씀이 있는데, 우리 잠깐 이 전반부를 대강 살펴 보았는데요. 조금 더 세부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비밀이란 무엇인가? 비밀이라고 하는것은 여러가지 각도의 의미가 있습니다. 전에는 감추어 졌던 것인데 이제는 계시된 것이다. 교회의 비밀, 이것은 그 중에 하나입니다. 또 성경이 말하는 비밀이라고 할때요, 인간이 완전히 알 수 없는 하나님에 관한 진리, 이것도 비밀이라 말할 수 있어요.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요. 그런데 그것을 완전 이해할 수가 없어요. 우리는 그 사랑을 점점 더 알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점점 더 알아가게 될때, 많은 것들을 경험하게 되고요. 하나님과의 교제와 또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해서 우리는 많은 변화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는 완전히 알 수가 없어요.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또한 비밀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계시를 하지만 인간의 논리를 가지고는 다 이해할 수 없는 그런 것, 예를 들어서 삼위일체,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아드님과, 성령님, 세 인격이 계신데, 세 인격이 어떻게 하나님이신가? 그것을 어떻게 설명합니까? 우리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리입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창세 전에 선택하셨다. 그리고 예정하셨다. 그것을 우리가 잘 설명할 수 있습니까?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것의 깊이가 너무나 깊고요. 그 무한한 진리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진리를 받아 드리고 즐길 뿐입니다. 감사할 뿐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우리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것도 비밀이다, 라고 하는거죠. 그런데 오늘 에베소서에서 말씀하고 있는 비밀은 주로 1번, 전에는 감춰졌던 것인데 이제는 계시된 것이다, 라고 하는 의미에서 비밀을 살펴보겠습니다.
비밀이라고 할때, 그런 종류에서 비밀이라고 할때, 지나간 시대에 하나님에 의해서 감춰졌지만 그분의 가족이 된 이들에게 계시된 진리, 이것이 비밀인데요. 예를 들어서 천국 비밀이 있습니다. 휴거의 비밀이 있습니다. 교회의 비밀, 몸의 비밀이 있고요. 그리스도의 신부의 비밀이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안 에 있는 영광의 소망이신 그리스도의 비밀이 있습니다. 경건의 비밀이 있습니다. 불법의 비밀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소경된 것의 비밀이 있습니다. 일곱별의 비밀이 있고요. 음녀와 바벨론의 비밀이 있어요. 여러 비밀들이 있는데, 오늘 저희들은요, 에베소서 3장에서 교회에 관한 비밀을 사도는 이것을 에베소에서 선포하고 있지요. 첫째, 이 비밀이 중요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바울에게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울 사도에게 이것을 알려 주셨기 때문에 이것은 너무나 중요한 것이죠. 비밀은 사도바울에게 대단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유대인과 이방인을 한 몸으로 연합시킬 사람은 그와 같은 메세지를 증거할 사람은 사도바울이었기 때문이죠. 왜냐하면 그는 이방인의 사도였기 때문입니다. 비밀이 바울과 연관이 되게 될때 그는 죄수가 됬지요. 바로 이 비밀 때문에 그는 죄수가 됬어요. 그 다음에 바울은 이 비밀 때문에 청지기가 됬어요. 일꾼이 됬습니다. 그래서 대단히 이 비밀과는 사도바울은 뗄레야 뗄수 없는 관계에 있다. 사도들을 생각해 보세요. 주님 이땅에 계실때에 열두 사도가 있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떠나갔지만 맛디아가 대신 들어와서 열두사도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후에 사도바울을 따로 부르셨어요. 그래서 그를 이방의 사도로 부르셨죠. 로마서 11장 말씀을 보십시요. 13절에서 사도는 자기의 이방의 사도의 직분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롬 11:13).
여기 참 놀라운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직분에 대해서 고맙게 생각하고 그것에 대해서 감사하고 영광스럽게 생각하고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우리가 긍지를 가지고요. 그것에 대한 책임을 느끼고 한다고 하는것은 얼마나 마땅한 일입니까? 사도는 바로 그런데서 이방의 사도로 인해서요, 그가 수많은 핍박을 받았어요. 유대인에게 엄청난 반대를 받았어요. 유대인인데 왜 이방의 사도가 되었는가? 물론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지요. 그러나 사도는 그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하고 일을 했다. 그것은 우리에게 귀감이 되는 그런 말씀입니다. 그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였죠. 그러나 그는 거듭났습니다. 그래서 이방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거듭날 때, 주님께서 부르신 말씀이 있어요. 여러분, 사도바울의 구원 간증에 대해서, 성경 말씀에 여러 군데가 있습니다. 첫째 사도행전 9장에서는 누가가 그의 간증을 객관적으로 진술하고 있어요. 그 다음에 사도행전 22장에서는요, 천부장의 허락 앞에서 유대인들 앞에서 사도바울이 직접 간증 합니다. 그 다음에 사도행전 26장에서는 아그립바 왕 앞에서 간증합니다. 그리고 빌립보서 3장에서 서신서를 통해서, 그는 글을 통해서 빌립보 성도들에게 자기의 간증을 이야기 합니다. 그 다음에 디모데전서 1장에서는요, 디모데에게 개인적으로 편지할 때, 거기서 또한 자기의 간증을 이야기 했지요. 사도바울의 간증, 이것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요. 누가가 증거한 내용에서요, 우리가 이것을 볼 때에 바울이 회심할 때, 부름을 받았을 때, 그는 무슨 말씀을 들었을까?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세 그룹에게 가라." 이렇게 말씀했어요.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행 9:15-16).
첫째로 이방인들 앞에서 전하고, 둘때로 임금들 앞에서 전하고, 그 다음에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해서 이 사람은 택한 그릇이다, 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이 구원받을 때요,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이 핍박자를 구원하신 수많은 이유가 있어요. 하나님은 그를 이제 보내십니다. 사도로 보내시는데, 그때 그는 해를 많이 받을 것이다, 라는 것을 말씀하셨죠. 그는 그 말씀대로 되었어요. 그 세 그룹에게 보내졌을뿐만 아니라 정말 해를 많이 받았어요. 아그립바 왕 앞에 섰을때에 그는 어떤 사명을 가지고 증거할 것인가라는 이야기를 또 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의 간증의 내용을 잘 살펴볼 필요가 있어요. 아그립바 앞에서 그가 이렇게 말했어요.
"일어나 네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사환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저희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행 26:16-18).
"네가 나를 본 일" 이것을 가서 이야기 하라. 두번째,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 그것을 위해서 너를 종으로, 증인으로 삼았다. 그래서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저희에게 보내어" 여기 보세요. 이방인의 사도는 이방인에게만 가는 것이 아니예요. 그는 이스라엘에게도 가요. 우리는 사도행전을 보면 3차 전도 여행을 통해서 사도바울은 가는데마다, 언제든지, 어디부터 먼저 갑니까? 유대인들에게 찾아가요. 회당에 찾아가요. 이스라엘에게 전합니다. 그리고나서 그가 쫓겨나죠. 반드시 쫓겨나죠. 그 다음에게 이방 사람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했지요. 그리고 그는 왕들 앞에서 얼마나 많이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했습니까? 그는 하나님이 말씀한 대로 전했습니다. 그런데 말씀한 대로,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본 주님의 영광, 그것을 전했을 뿐만 아니라요, 장차 사도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실 모든 내용들을 조금도 가감없이 전했다, 라고 하는 것이죠. 바울이 사환과 증인으로 받은 임무, 정리해 보십시요. "네가 나를 본 일" 그것을 전해야 합니다. 이것을 누가 말씀하셨습니까? 부활하신 주님이 사도바울에게 명했어요. 바로 그분을, 부활하신 분을 사도께서 봤잖아요. 그것을 가서 전하라. 그 다음에 추후에 내가 네게 나타날 일들에 대해서, 너에게 해줄 말씀에 대해서 전하라. 예루살렘에서 그는 체포 되지요. 그래서 그는 이방인들에게 이 비밀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비밀은 이방인들에게도 대단히 중요해요. 왜 중요한가? 십자가 사역을 통해서 개인의 죄를 사하시고 구원하심으로 하나님과 사람을 화목케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의 위대한 임무, 위대한 미션은 우리 개개인의 죄를 사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막혔던 담을 헐고요. 화목케 하는 일을 했어요. 뿐만 아니라 십자가 사역은요,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막혔던 것을 또 허물어서요. 유대인과 이방인도 화목케 했어요. 그렇기에 이 비밀은 대단히 이방인들에게 중요한 일이다. 이방인들에게 이렇게 위대한 메시지가 있겠어요? 그러니 이방인들에게 이 비밀은 얼마나 중요한가?
비밀은 천사들에게도 중요합니다. 왜냐하면요, 왜 중요할까? 하나님이 오랜 세월동안 교회에 대해서는 딱 비밀로 지켜왔어요. 구약 시대에서는 이것이 비밀이었어요. 왜냐하면 구약시대에는 이스라엘을 통해서 이방인이 구원을 하나님께서 계시하고자 계속 했었어요. 물론 이스라엘은 많이 실패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이스라엘을 통해서 그 뜻을 나타내 보이기를 원했죠. 그러나 신약 시대에 와서요, 이제 이스라엘이 제쳐지죠. 그리고 교회의 진리가 이제 드러나는데,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구성된 새 창조인 교회를 계시했습니다. 이것은 유대인이 받기 어려운 거예요. 뿐만 아니라 천사들은 모르는 일이예요. 그러기 때문에 천사들에게 중요한 겁니다. 천사들에게 왜 중요한가? 천사들은 첫 창조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어요. 그런데 새 창조에 대해서는, 구속에 대해서는 그는 아는 바가 없어요. 사단이 알고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구세주께서 구속과 관련해서 오실 것을 알고 있어요. 구세주께서 언제 오실것, 알고 있어요. 구세주께서 어떻게 오실 것을 알고 있어요. 그래서 사단이 바로를 통해서 메시아의 라인을 끊기 위해서 유대인들을, 히브리 남아를 다 갖다 죽여라 그렇게 얘기 했고요. 어떻게 해서든지 구세주가 오지 못하도록 그렇게 역사하지 않았어요? 하만을 통해서 페르시아 시대에 역사하지 않았습니까? 헤롯을 통해서는요, 어린아이들을 다 죽이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사단이 모르는 것이 있었어요. 그것은 유대인과 이방인이 한몸, 교회가 된다고 하는것은 사단이 전혀 모르고 있었다. 하나님은 이것을 비밀로 고이고이 간직하고 있었다. 그리고 갑자기 이 사실이 이제 사도에 의해서 나타났을 때에, 마귀가 얼마나 분노 했겠어요? 그러니 유대인을 통해서 얼마나 사도를 핍박하도록 위에서 조종했을까? 라고 하는것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교회는 천사를 향해서요.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보여주는 실물 교제라고 아까 말씀을 드렸습니다. 실물 교제라고 하는 하는것은 원칙이나 추상적인 개념을 이해시켜 주는것 아닙니까? 시청각 재료를 통해서 보여주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교회가 시청각 재료다. 교회는 어떻게 이 진리를 말씀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행동을 통해서, 순종을 통해서 이제 보여줘야 할까? 우리의 거룩한 책임입니다. 실물교제, 돼지가 새끼가 많지요. 젖 먹는 것, 이런 시청각 교제가 있어요. 이것이 실물 교제 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우리는 많은 얘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많은 진리를, 많은 교훈을 아이들에게도 가르칠 수 있겠죠.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지구 본을 놓고 가르쳐 줍니다. 이 지구본을 놓고 여러가지 이야기를 할 수 있겠어요. 이것이 실물 교제가 되는것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이 지구본과 같이 되었다. 여기 아이들은 천사예요. 하나님이 이 교회를 통해서 천사들에게 이제 하나님의 교회의 비밀이 무엇인가, 라고 하는것을 가르쳐주고 있다. 참 놀라운 일이죠. 비밀은 현 시대에도 필요하다. 왜? 개개인의 지식과 실생활을 위해서요. 우리는 이 교회진리를 알게될때 우리의 지식이 위대해지고, 실생활에서 그 지식을 통해 적용하게 될때, 순종하게 될때, 놀라운 삶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리고 이 진리는 다른 사람에게 알려줘야 합니다. 다른 세대에게 알려져야 합니다. 우리 자녀에게 알려줘야 합니다. 우리 다음 세대들, 그리고 이 진리를 경호해야 하기 때문에, 보호해야 하기 때문에, 우리 신자들에게 매우 중요하다. 여러분 이 비밀과 관련되서 한번 생각해 보세요. '로제타 돌' 이것은 1799년 이집트 멤피스에서 발견된 돌이예요. 이 돌은요, 옛날에 애굽의 신전 안에요, 자기들의 신이 얼마나 자애롭고 이런가 하는 것을, 기록해 놓은 거예요. 그런데 세가지 다른 문자로 기록했어요. 애굽의 상형문자, 그리고 고대의 상형문자 말고, 또 다른 애굽어가 있어요. 그리고 고대 헬라어가 여기 기록되어 있어요. 그래서 이 로제타 돌을 통해서요, 해독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헬라어는 아니까, 이 상형문자가 이런 의미를 가졌구나, 하는것을 로제타 돌 때문에 상형문자를 해독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 하나님의 말씀의 비밀, 이 비밀은요, 우리가 어떻게 해독 합니까? 주님께서 사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우리는 알 수 있죠. 사도는 이와같은 비밀을 저희들에게 전해 주셨습니다.
이제 이 첫번째 부분에서 마지막 끝에 사도는 성도들에게요, 자신의 매임을 모습을 보고 그들이 낙심할까, 그들이 가슴 아파할까, 염려를 하고 계셨습니다. 사도바울은 아까 자기 자신을 가리켜서 죄수라, 매인 자라 이렇게 얘기 했지만 그는 당당 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이방인들을 위해서 자기가 갇힌바 되었다. 그랬지요. 그래서 우리는 로마 옥중에 있었던 사도바울을 볼 때에, 그의 옷에서는, 그는 감옥에서 조금도 자기 연민같은 냄새가 하나도 나지 않았다. 거기에는 오히려, 그 감옥에서는요, 위엄과 또한 놀라운 소망과 그리고 엄청난 하나님의 위대한 지식과 그리고 위대한 뜻이 나타나고 있다, 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요, 에베소 성도들이 자기를 향해서 언짧게 생각할까, 그런 생각은 다 버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주님이 주신 사역, 그것을 통해서 나타난 위대한 위엄, 그리고 결과, 그것을 보라 그 말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갇혀있는 그것은 구속된 그런 상태는 그것은 치욕이 아니라 영광이다. 그래서 그는 격려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도바울을 볼때요, 그는 복음 전도자이죠. 교사지요. 그는 목자입니다. 에베소 성도들의 그 마음 상태가 좌절 되거나 슬픔 가운데 빠지거나 혹시 오해할까봐, 그의 연약들을 이제 보충해 주고 붇들어 주고 그들 마음 속에 오히려 영광으로 가득 차도록 만들어 주는 사역을 여기서도 이 비밀을 이야기 하면서도 잊지 않고 있었다. 그의 균형된 사역을 한번 보십시요.
이제 우리는 두번째, 3장에서 두번째 부분을 보겠습니다. 이 두번째 부분은요, 사실상 에베소 서신 속에서 나타난 두번째 기도입니다. 이 기도, 두번째 기도는요, 에베소 성도들이, 당신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그리스도께서 주신 이 측량할 수 없는 부를 갖게 되었는가? 전에는 그 부를 몰랐는데, 이제는 이 부를 통해서 비밀을 알게 되었는가, 그렇다면 당신 손을 그 부에 얹어 놓고 한번 느껴 보십시요. 그리고 생활 하십시요. 라고 하는 겁니다. 에베소 서선에서 첫번째 기도는 1장에 있지요. 계몽을 위한 기도, 빛을 받아서요. 뭔가를 알고자 하는 알아서 알고 살아가는 기쁨 가운데 살아가고 능력 가운데 살아가도록, 먼저 알아야 합니다. 계몽이 필요해요. 빛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3장에서 사도바울은 이 비밀에 관해서 말씀하고 난 이후에 사도는 기도합니다. 에베소 성도들이 능력을 가지고서 살수 있도록, 그래서 이 두번째 기도는 능력을 위한 기도입니다.
이 능력을 위한 기도는요, 세 부분으로 되어 있어요. 처음 하나님을 향해서 기도하는 말씀을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부릅니다. 기도는요,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하나님을 부르는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울부짖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에 기도할 때는 언제나 부름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 기도 안에 들어갈 때,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 찬양하고 감사하고 예배하는 것도 있지만 탄원하는 것, 간구하는 것이 있지요. 이 기도에서는 탄원이 있었습니다. 그 다음에 마지막으로서는, 마지막 맺는말, 축도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부분을 하나씩 우리가 살펴보겠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에베소 성도들은 이방인들이거든요. 사도바울은 지금까지 이 비밀을 말씀했어요. 이 비밀을 말씀했다는 말은, 이방인들은 영적으로 완전히 파산된 거지였다. 그런데 이 비밀을 놓고 보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어떤 일을 하셨는가? 십자가 위에서 피흘려 돌아가신 이 구속의 사역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막힌 담을 헐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막힌 담도 헐고, 이제는 함께 후사가 됬고, 함께 몸이 되었고, 함께 약속을 우리가 즐길수 있는 참여자가 되었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위치가 된 겁니까? 그 위치가 되었을때는요, 엄청난 부를 이제 받은 겁니다. 하늘의 부가, 그리스도의 부요함이 측량할 수 없는 부요함이라고 하는 홍수가 이방인들의 마음 속에, 에베소 성도들의 마음 속에 들어왔어요. 여러분과 저도 이방인인데요, 저희들도 이와 같은 부요함이, 저희들의 마음 속에 홍수같이 들어왔어요. 그러면, 이 부가 우리 속에 들어 왔다면, 이제는 이 악한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이 참된 부를 우리는 만져봐야 합니다. 만져보고 느껴야 합니다. 부를 저쪽에다 갖다놓고 멀리서 "아, 나는 부를 가지고 있다." 이렇게 하는것 합당하지 않다. 바로 이것이 에베소 3장 말씀에서 사도바울이 지금 에베소 성도들을 위해서 가지고 있는 소원입니다. 에베소 성도들이요,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부를 옆에다 놓고, 손을 얹고 그것을 느끼고, 만지고, 이것이 얼마나 광대한가, 그것을 느껴보십시요. 그리고 그 부를 사용해 보십시요. 그래서 주님을 위해서 살아 보십시요. 그 부를 느끼면서 주님과 교제해 보십시요. 여러분, 어떤 때에 우리는 구원 받았지만 주님과 교제할 때, 참 부의 원천이었던 그분과 교제하는 것이 아니고요. 지극히 가난한 사람이 지극히 부요한 사람과 교제를 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지 않습니까? 그런 관계 속에 있지 않습니까? 사도가 지금 여기서 원하는 것은, 우리가 이렇게 부요한 사람이 되었으면 그리스도의 측량할 수 없는 부를 우리가 얻었고, 이런 위대한 지혜를 우리가 얻었다면, 우리는 이 부를 매일과 같이 느끼고 살라. 그래서 이 기도에서 사도는 첫째, 이 부와 연관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 에베소서를 한마디로 말씀 드리면, '좌,행,참'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늘에 앉았다. 주님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았다.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과 성령의 그 위대한 사역을 통해서요, 우리는 엄청난 복을 받았어요. 그래서 우리는 이제 주님이 죽음을 맛보고 장사되고 부활했고 승천 하시고 보좌 우편에 앉았는데, 에베소서가 계속해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것은 우리도 주님을 믿었을때, 주님과 함께 죽었고, 장사 되었고, 부활했다. 이것을 우리는 침례 때에 배우잖아요. 그리고 그 사실을 사람들 앞에서 예식을 통해서 우리가 간증 했잖아요. 그런데 거기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우리는 승천하는 것도 주님과 하나가 되었고요. 주님과 보좌에 앉은것도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가? 물론 우리가 땅에서 걸어 다니고 있지만, 하늘에 앉아있다. 주님과 바로 옆에 앉아있고, 그것은 상징적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앉아있고, 그분과 함께 그분이 가지고 있는 모든 부, 권력, 그것을 우리도 함께 지금 가지고 있다. 그것이 '좌'라는 말입니다. 앉았다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앉은 사람이라면 반드시 걸어가게 될때, '행', 걸어가게 될때, 우리는 어떻게 걸어가야 할까? 그것이 내일부터 나타난 말씀이예요. 에베소서 4장 말씀부터는 우리가 어떻게 걸어가야 할까, 라고 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어요. 그리고 마지막 장 6장에 가서는 '참', 어떻게 서야할까? 왜냐하면 이제 영적인 싸움에 돌입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이 부요를 뺏아가려고 하는 자들, 우리의 원수들, 이것을 뺏어가서요, 우리로 하여금 다시 가난하게 만들려고 하는 그런 노력이 있어요. 그래서 우리는 참, 스텐딩, 서야된다, 그 말입니다. 좌행참, 이 세가지는요, 에베소서의 흐름입니다. 에베소서의 흐름이라고 하는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의 흐름입니다. 이 흐름이 흘러가게 될때, 우리가 살아가게 될때, 이 세가지 좌도 기도와 연관이 되어 있고, 행도 기도와 연관이 되어 있고, 참도 모두가 다 기도와 연관이 되어 있다. 사도바울은 그것을 염두해 두면서요, 에베소서의 두번째 기도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지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시험에 빠져서요. 현실에 눈이 어두워서, 우리는 돈이 필요합니다. 경제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경제가 중요한 것과 돈이 필요한 것과 돈을 사랑하거나, 돈의 유혹을 받는것, 이것은 구별해야 됩니다. 에베소서는 이 문제에 대해서 대단히 분명하게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어요. 그것은 디모데전서와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다." 이것은 너무나 유치한 일입니다. 부요함을 정말로 알고있는 사람, 부요는요, 돈을 물질을 소유하고 있는 것만이 부가 아니라 그것의 일부예요. 진정 부라고 하는것은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었느냐, 어떤 위치에 지금 들어와 있는가, 우리가 주님과 같은 위치에 되어 있다. 그런 부를 우리가 가지고 있다. 그것을 우리가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마귀가 우리를 격파하기 위해서요, 원수가 찾아와서 우리로 하여금, 염려로 인해서, 세상적인 야망으로 인해서, 거기 시험에 빠지게 위해서 돈을 사랑하도록, 쥐덫에 걸린 사람을 보지요? 걸려서 안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기도를 하게 될때, 에베소 3장 앞 부분의 내용을 기억해야 됩니다. 그리스도의 측량할 수 없는 풍성, 우리는 이것을 받았어요. 그 다음에 감추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 그것을 우리가 전해야 된다, 라고 하는 이 위대한 책임, 이것은 고결한 책이예요. 영예로운 책임이예요. 특권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사도바울이 기도할 때에 우리는 모든 있는 힘을 다해서 아멘이라고 얘기해야 됩니다.
첫째, 부름, 기도할때 어떻게 하나님 앞에 말씀을 드렸는가? 기도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러하므로"라는 말로 말씀을 시작하죠. 이 기도는, 이러하므로 이런 대의 때문에, 라는 것은 앞에 우리가 그런 부를 받았다면 우리가 주님과 그렇게 동격이 되었다면, 그래서 하늘에 앉아있는 자가 되었고요. 이제 주님이 이 땅에 오시면 우리는 통치할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알수 있다면, 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될까? 그런 이유 때문에 사도는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분에게, 기도는 항상 대상이 있습니다. 누구에게 말씀을 드리는가, 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기도는요, 그저 내 어떤 유익,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누가 됬든지간에 부처가 됬든, 공자가 됬든, 그런 유머가 있죠. 코메디가 있습니다. 뭐 필요하면, 부처님, 공자님, 이렇게 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부처 공자 필요 없어요. 그들이 원하는 것은 그들이 원하는 소원입니다. 기도는 그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우리의 합당한 기도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누구에게 말씀 드리느냐, 어떤분 앞에 우리가 엎드리냐, 이것이 기도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그런데 여기서 사도는 어떤분에게 말씀합니까? 물론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을 여기서는 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하늘과 땅, 각 족속에게, 각 가족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께" 기도하고 있어요. 이것 중요한 겁니다. 우리가 기도할때요, 우리의 어떤 필요 때문에 기도하는 대상이 그 칭호가 달라지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떤 필요를 원하기 때문에, 우리 하나님은 수많은 이름을 가지고 있어요. 그말은 뭐냐? 우리의 필요를 다 채울수 있는 분이다라고 하는 칭호 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을 향해서 기도할때, 어떤 칭호가 있습니다. 그 칭호는 우리의 필요와 관련이 있다. 그래서 에베소서 3장에서 사도는 어떤 필요를 가지고 있어요. 뭡니까? 에베소 성도가 능력을 얻기를 원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분에게 기도를 했어요. 하늘과 땅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께 기도를 했습니다. 어떤 자세로 기도를 했어요? 무릎을 꿇었어요. 이것은 영적인 바른 자세지요. 그 다음에 이 부름에는 "비노니" 간구하는 거죠. 이것이 그의 부름속에 있는 요소인데, 기도하는 이유를 보세요. 이방인 에베소 성도의 변화가 있이죠. 죽음과 가난에서 승격되서요, 부요와 영광으로 들어갔어요. 그런데 이것은 예수님이 경험하신 거거든요.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똑같이 이제 이것을 경험 했어요. 에베소 성도들도 경험했어요. 그래서 에베소 성도가 이방인으로서 이런 승력된 위치에 있다면 실제로 그렇게 즐기고 살기를 원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능력이 필요하다. 사도는 지금 기도하고 있는거죠. 기도의 대상에 대해서 다시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천지의 모든 가족에게 이름을 주신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기도를 했어요. 특별히 여기서는 이름을 주신 분에 대해서 기도했다, 이것은 뭘 말하죠? 우리는 기억하죠. 아담이 동산 짐승에게 다 이름을 주었어요. 이것은 뭘 말합니까? 그의 권위예요. 그래서 이름을 주신 분이라는 말은 그는 권위가 있는 분이라는 말입니다. 그 다음에 인정하시는 분이다라는 말입니다. 에베소 5장에 가면 우리가 볼수 있는데요. 성도들 가운데 음행하는 자들, 탐람하는 자들, 이름도 함당하지 않다. 그런 이름도 나는 인정하지 않는다. 그런 말이거든요, 그리스도인이 간음하고 도둑질하는 그런 이름을 갖는것은 합당하지 않죠. 그런 이름은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입니다. 그 다음에 이름을 주실때는요, 최상권을 가지고 있는 분이예요. 승격하신 주님, 우리 주님에게 으뜸되는 이름을 주셨어요. 그 하나님은 그런 이름을 주셨어요. 그래서 그분은 최성권을 가지고 있어요. 바로 이분에게 기도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 이름을 주신 분은요, 어떤 일을 하실수 있습니까? 권위를 행사하실수 있어요. 뿐만 아니라 권위만 행사하실수 있는 분이 이름을 주신분이 아니예요. 각 가족을, 각 가족들에게, 하늘에 있는 여러 그룹들이, 천사도 있고요. 땅의 사람들도 있고, 전에 세상을 떠난 분도 있고 오는 세상에 있을 사람들도 있고요.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주신분, 그분은 다 다른 그룹마다 다 이름을 달리 지었는데요. 그것은 뭘 말하는가, 각 가족을 하나님 자신과 다양한 관계안에 두신 분이다라고 하는 겁니다. 바로 이런 분에게 지금 사도는 기도를 하고 있다. 기도하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무릎을 꿇었어요. 겸손한 자세죠. 아브라함은 서서 기도했고요. 다윗은 앉아서 기도했어요. 솔로몬은 하늘을 향해 손을 들고, 엘리야는 얼굴을 무릎 사이에 두고 예수님은 얼굴을 땅에 대고, 다양한 기도가 있지만 공통적인 것은 모두가 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나왔다는 거죠. 간정한 마음으로 나왔던 것입니다. 탄원할때요, 능력이 있고 깊이가 있고 이해, 충만함, 이런것을 위해서 그는 구하고 있습니다. 대단히 중요한 주제입니다. 첫째, 능력, 에베소 성도들이 능력을 갖기를 원했다. 첫번째 탄원으로 사도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이 영력을 갖기를 원한다. 영적인 능력이죠. 에너지의 근원은 성령입니다. 바로 이 성령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원천입니다. 샘입니다. 능력의 샘입니다. 사도행전은 성령의 행전이라고 말하죠. 그래서 그 책 안에는 성령님에 대한 이름이 거의 60번(59번)이나 나오고 있죠. 성령님의 인도, 성령님의 충만, 성령님의 역사, 성령님 안에서 기도, 성령님 안에서 말씀을 이해하고 능력을 받고 그러나 우리는 성령을 근심 시키면 안되고요. 성령을 소멸해서도 안됩니다. 능력은 성령님으로부터 오는데, 우리는 능력을 생각할때,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사도가 이렇게 기도했지요. 영광의 풍성, 그래서 성령님이요, 우리 속 사람을 강건하게 하실때, 무엇을 따라 하시는가, 이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영광의 풍성을 따라 한다. 여러분, 저희는 조금 전에 그리스도의 측량할수 없는 부를 우리가 받았지요. 그 부에는 위대한 영광이 있어요. 그 찬란함이 있어요. 이 영광 안에는요,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그 어떤것도 따라갈수 없는 독특함이 있습니다. 권세가 있습니다. 영광안에 담겨 있는 수많은 복들과 능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풍성하다는 거예요. 여러분 능력을 받기 위해서는요, 자동차 가스가 다 떨어지면 못가요. 주유소 가서 가스를 넣지요. 성령님으로부터 능력을 받는데, 이 영광이라고 하는것, 그리스도의 영광, 그분은 승격된 영광이 있어요. 그런데 우리가 그분과 동일시 되었다. 이것 참 얼마나 영광스러운 거예요? 우리도 승격된 겁니다. 우리는 참 하찮은 사람인데, 우리는 그렇지도 못한 사람들인데, 그런데 주님의 은혜를 따라서요, 우리가 주님과 함께 영광에서도 동격이 되었다. 참 놀라운 은혜입니다. 그래서 그 영광의 풍성을 우리가 누릴줄 알아야 되겠다. 여기서 영광의 풍성으로부터 라고 말했는데요, 영광의 풍성을 따라라고 말씀 했어요. 영광의 풍성으로부터가 아니라 영광의 풍성을 따라, 여러분, '부로부터'라는 말은요, 천만달러, 백만장자, 억만장자가 5불을 줬다. 이거는 부로부터 준거예요. 되게 조금 줬어요. 그런데 부를 따라 줬다면 억만장자가 어마어마한 부를 준것, 그것은 부를 따라 준것입니다. 사슴이 호수에 와서 물을 먹어요. 그는 배에 꽉 차요. 그래서 그는 충만해 졌어요. 그렇지만 호수의 물은 조금도 변한게 없어요. 이 풍성함, 이것이 풍성함입니다. 그는 그 풍성을 따라 마시는 거예요. 마시는데 한계가 있어요. 우리는 주님의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 능력을 조금씩, 조금씩 더 받고, 더 경험하고 하지요. 주님의 은혜 가운데 성령의 역사를 따라서 우리는 그렇게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어떤 종류의 영력입니까? 우리가 무슨 기적을 보고 호기심에서 그런 능력 말고요, 성숙하고 안정적이고 지성적인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생명력, 이런 영력입니다. 이런 힘, 우리 속사람을 사도는 지금 말씀하고 있어요. 속 사람이 강건하게 되기를 원하는데요. 속사람 안에, 속사람에 언네(어린아이)가 들어있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생각하는 것이 육적이고 생각하는 것이 짧고 분별을 못하고 능력이 없고 이러면 안되겠어요. 속사람이 있어야 되요. 능력있는 속사람이 되기를 기도해야 되겠다. 속사람은요, 힘과 성장과 발달이 필요해요. 그래서 속사람은 운동이 필요합니다. 경건을 연습하라. 엑소사이즈 하라는 말이죠. 정결해 져야 합니다. 속사람이 정결해지는 일을 해야 합니다. 속사람이 먹어야 합니다. 속사람이 새롭게 되어야 합니다. 속사람이 율법으로 인해서 기뻐해야 됩니다. 속사람의 두 기능이 있어요. 느끼는 것, 그 다음에 움직이는 것, 이 두가지가 있거든요. 여러분 우리 신경은요, 체신경에는 두가지 기능이 있어요. 하나는 첫째, 이렇게 딱 만지면 느껴요. 감각이 있어서, 이 감각은 손에서부터 머리까지 쭉 두뇌까지 가요. 순식간에 알아차려요. 그 다음에 두뇌에서 명령합니다. "너는 움직여라." 그러면 두뇌에서 내려와서, 이것은 운동신경입니다. 이 운동신경에 의해서 근육이 움직여요. 그래서 우리는 움직이는 겁니다. 우리는 능력을 발휘할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속사람은요, 잘 느낄줄 알아야 되요. 우리는 첫번째 기도에서, 영적인 오관에 관해서 말씀했지요. 그런데 이 두번째 기도에서는 영적인 다섯가지 능력, 이것을 다섯가지 이상의 여러 능력을 사도는 지금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움직여야 합니다. 역사해야 되는 것입니다. 에너지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고하여 가로되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 있어 애굽 땅 총리가 되었더이다 야곱이 그들을 믿지 아니하므로 기색하더니 그들이 또 요셉이 자기들에게 부탁한 모든 말로 그 아비에게 고하매 그 아비 야곱이 요셉의 자기를 태우려고 보낸 수레를 보고야 기운이 소생한지라"(창 45:26-27).
야곱이 아들들이 돌아왔어요. 그는 너무나 흥분했어요. 자기 동생과 화해도 했지요. 그런데 동생이 총독이 되었어요. 아버지에게 이런 얘기를 하는데 아버지는 믿지 못해요. 아들들이 얼마나 거짓말을 많이 했어요? 그래서 처음에는 믿지 못하다가 나중에 기운이 소생하는데요, 자기를 태우려고 요셉이 보내준 수레가 있었어요. 그 수레를 보고서 기운이 소생했어요. 힘이 났다는 말입니다. 기색을 했다는 말은요, 힘이 없어서 졸도하고 쓰러졌다 이 말인데, 소생했다는 말은요, 힘이 펄펄 난다는 거예요. 똑같은 사람인데 조금 전에는 기절할뻔 하던 사람이 이제는 펄펄 날아서 애굽까지 날아갈것 같은 그런 힘을 얻게 된것, 이게 야곱이예요. 왜 그랬는가? 수레를 보고 그랬어요. 이 수레, 애굽에서 온 수레예요. 여러분, 가나안 땅에 이런 수레 없어요. 이것은 요셉의 영광입니다. 오셉의 부요 때문에 있는 영광이예요. 여러분 이런 롤스로이스 차를요, 이렇게 딱 왔을때에, 여러분은 뭘 느낍니까? 육체적으로 말하면, 물리적으로 말하면 그런 겁니다. 이런 것이 왔을때, 사실 야곱은요, 롤스로이스를 본 거예요. 그 차를 딱 보고서는요, 소생했어요. 왜? 왜냐하면 그 롤스로이스 안에 담긴 요셉의 위대한 부요함과 영광 때문에 그는 소생했다. 힘을 얻게 됬다. 성령님은요, 이 위대한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서요, 우리에게 힘을 나눠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두번째, 우리는 깊이가 있어야 되요. 깊이 세가지 동사가 있습니다. 거하다, 뿌리를 박다, 터를 잡다, 이런 동사가 있는데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엡 3:17).
첫째 동사는 '거한다'라는 말은 했어요. 이 성령님이 힘을 우리에게 주실적에요, 우리가 어떤일을 할수 있는가?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거하실수 있다. 이거는요, 우리가 주님을 믿을때에 주님이 우리에게 들어오시거든요. 성령님이 우리에게 오시는데, 주님이 우리 가운데 거하세요. 그런데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모든 믿는 사람들은 다 주님께서 계세요.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 마음 속에 계실때에, 편안한 마음으로 거하실수 있게 해 드리는가, 그런 문제입니다. 여기에서 힘이 필요하다. 성령님의 힘이 필요하다라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 믿었지만요, 우리 능력이 없어요. 주님이 우리 안에서 편안하게 계실수 있도록 못해드리는 때가 많아요. 우리 악이 속에 있습니다. 우리가 시기심이 발동할때, 또 우리의 눈이 침침해 지고요, 그리고 능력이 없어질때, 우리 주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기가 대단히 불편해지는 것입니다. 첫째, 거해야 될 필요가 있다. 그 다음에 뿌리를 내려야 된다. 그래야 안정을 찾지요. 그 다음에 터를 잡아야 된다. 뿌리를 내릴뿐만 아니라요, 이제는 터를 잡아요. 이거는 절대로 못 움지는 것입니다. 뭘 필요로 하는 겁니까? 안정성을 필요로 합니다. 바람이 와도, 파도가 불어도, 어떤 영향력이 있어도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다. 그런 말이죠. 그것은 이제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때,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8-19).
사도는 이렇게 기도하면서 우리가 이해하고 깨닫고 그래서 충만해 지기를 원한다. 뭘 깨달아요?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기를 원한다. 사도가 탄원한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해할수 있게 되기를 원한다라고 했어요.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그 사랑을 우리가 안다면 우리는 정말 감격합니다. 우리가 처음 구원 받았을때도 이 사랑 때문에 주님 앞에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전에 그 사랑이 뭔지 몰랐는데, 그 사랑을 처음 깨달았을때 알게 되었죠. 기이함, 사랑을 깨달을 때 놀라움을 깨닫습니다. 우리 주님의 사랑을 깨닫게 될때요, 기이함과 감겨과 놀라움을 느끼지만 그때, 그래서 사랑을 주신 그분에게 예배를 드리는 거죠. 이 이해하다는 말은요, 컴프리핸드(Comprehend)라는 말인데요. 체포하다라는 말은 업프리핸드(Apprehend)라는 말이예요. 접미사가 프리핸드라는 말은요, 잡는다, 원숭이 꼬리를요, Prehensile Tail이라고 말해요. 다시 말해서 원숭이 꼬리는요, 나무를 잘 타기 때문에 꼬리도 손처럼, 나무 가지를 꽉 잡아요. 그래서 잡는다라는 말을 써요. 그래서 이해하는 것은 꽉 잡는 거예요.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해한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꼭 잡는다, 내 것으로 한다. 내가 경험한다. 사랑을 경험해 본 사람, 참 즐거움과 기쁨과 감격과 눈물과 그런 것 모두가 다 알아요. 사랑을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은 냉랭하고 참 무미 건조합니다. 그래서 거기에 차이가 있어요. 여러분 그리스도의 사랑을 어디, 여기다 견줄수 있겠어요. 그런데 한번 비유적으로요, 캐니다안 록키, 이 산 앞에 가면 참 마음에 느낌이 옵니다. 이것은 물론 육체적인 느낌인데, 강정인데요. 이 앞에 멀리서 볼때와, 좀더 가까이 갈때, 아주 가까이 갈때, 다 다른 느낌이 있어요. 상황에 따라서 또 느낌이 다릅니다. 그 크기와 그 거대함 광대함, 그 안에 들어가게 될때, 우리라는 존재가 얼마나 작고, 이 장엄함이 얼마나 우리를 압도하는지 느낍니다. 네셔널 파크에 있는 모습인데요. 이게 또 해가 질때 그 모습이 또 달라져요. 감흥이 달라집니다. 또 구름이 와서 쫙 꼈을때, 또 분위기가 달라져요. 햇빛이 뉘엿뉘였 지면서 거대한 산 한면을 비취게 될때, 그때 느끼는 느낌이 또 달라집니다. 이 에메랄드 레이크인데요, 초록빛의 호수, 그것이 우리에게 안겨주는, 그냥 파란 바다가 아니고, 파란 호수가 아니고, 초록빛의 호수가 우리에게 또 느껴주는 것이 있어요. 그리스도의 사랑은 이것보다 말할수 없이 놀라운 것입니다. 우리는 차원을 말할때에, 제로차원, 1차원, 2차원, 3차원 이렇게 말해요. 그것이 우리 인간 세상인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은 4차원입니다. 우리는 4차원을 이해할수 있는가? 하나님의 이 무한한 것을 우리는 이해할수 있을까? 우리는 물론 이해 못합니다. 4차원의 기업, 4차원의 사랑, 우리 그리스도의 사랑을요, 4차원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폭, 이 폭은 세상을 얘기할수 있어요.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셨어요. 이 넓은 세상을 사랑하셨어요. 길이, 그것은 영원한 사랑입니다. 높이, 그것은 하늘까지 도달하는 사랑이예요. 하늘로부터 내려온 사랑이예요. 그래서 우리를 하늘로 이끌어가는 사랑이예요. 그리고 그 깊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디까지 깊이 내려가셨는가? 그 주님의 죽음을 가리켜서 순종해서 죽었는데 십자가의 죽음까지라, 빌립보서는 말하지요. 그것은 십자가의 죽음의 깊이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위대한 사랑, 그 사랑 때문에 우리는 기업을 받았어요.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실때요, "너는 눈을 들고 내가 보여주는 이 땅을 동서남북을 종횡으로 다녀보라" 이거 우리 주님이 말씀하신 것은 다 4차원이예요. 그리스도의 사랑은, 무한한 사랑이죠. 4차원의 사랑이죠. 측량할수 없는 사랑이죠. 그리스도의 부요도 측량할수 없고 그의 사랑도 측량할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사랑 때문에 우리가 충만해 지기를 원한다. 진공은 자연이 싫어해요. 진공이 있으면요, 순식간에 바람이 확 들어가요. 그런데 하나님도 진공을 싫어해요. 그래서 하나님도 우리 그리스도인들 속에 꽉 채우시기를 원하세요. 악한 것, 말고요, 성령으로 채우고, 또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채우고요, 그래서 충만한 상태를 평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세요. 내가 그래도 상당히 충만해 졌다, 다른사람과 비교해서요? 그런것 안되요. 주님 앞에서 살펴봐야 합니다.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으로 충만해야 된다. 그런말씀 했잖아요?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충만으로 충만해 질수 없어요. 그것은 마치 해변이 없는, 하나님의 사랑은요, 해변이 없는 광활한 무한한 대양의 해변과 같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향해 가야 할 목표다. 그 하나님의 사랑은 무한하지만 우리는 더 많은 사랑을 경험하고 즐거워 하고 기뻐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아이가 바닷가에 가서요, 박스를 들고 박스 가득 채우지만 바다는 전혀 변화가 없어요. 이 바다가 그리스도의 사랑이라면 우리 마음속에 얼만큼 그것을 채우는가, 또 그것을 사랑을 먹고, 또 다시 가서 퍼오고, 또 다시 퍼오고, 주님과 사랑 가운데 교제하고 그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동기를 만들어주고 우리는 그 사랑 속에서 주님과 이제 아름다운 교제를 즐기고 그 사랑 가운데 다른 사람을 찾아 나가게 되고 그 사랑을 통해서요, 하나님의 이 위대한 부요를 전해줄수 있고요. 그 부요가 참된 부요가 되도록 그 사랑은 우리로 이 세상에서 살수있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사슴이 물을 마시죠. 이 위대한 호수, 그것처럼, 이 사슴이 이 위대한 호수와 같은, 거대한 하나님의 사랑, 그 사랑 앞에 이 사슴도 나왔어요. 그 사랑을 좀더 먹고 가기를 원하는 거죠. 우리도 마찮가지 입니다. 사슴처럼, 하나님의, 그리스도의 사랑을 우리는 계소개서 먹고 즐기고, 계속 채워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충만해져야 합니다. 내 잔이 넙칩니다, 라고 할때요. 잔이 넘치면 쏘서로 마실수 있다, 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언제 쏘서로 마실수 있을까? 잔이 넘칠때, 주님의 사랑이 충만할때, 이제 우리는 우리 자신도 충만하지요.
마지막으로 축도가 있습니다. 기도 기도인데요.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 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엡 3:20-21).
사도는 이제 이렇게 축도로 마치고 있는데, 이것은 송영입니다. 송영이라고 하는것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짧은 노래라고 하는 건데요, 사도바울의 이 두번째 서신에서 나오는 두번째 기도는 이 기도는 영혼을 감동시키는 송영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사도의 이 기도를 우리가 듣게 될때, 우리 마음의 깊은 감동이 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기 때문에요. 그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보세요. 이것을 피라미드 찬양이라고 말하고 싶은데요.
능히
능히 하실 수
우리가 구하는 것을 능히 하실 수
우리가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을 능히 하실 수
우리가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을 능히 하실 수
우리가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을 더 능히 하실 수
우리가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을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수
우리가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을 더 넘치도록 지나치게 능히 하실 수
사도는요, 이 하나님 앞에 찬양을 드리게 될때, 그 하나님은 이렇게 하실수 있다는 찬양을 드리고 있어요. 왜? 그분이 이런 분으로서 우리를 도우실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능력있게 하실수 있게 때문입니다. 영어에서는요, Exceeding abundantly above all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것을 , 더욱 더, 넘치고, 지나치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생각하는 것이나 기도하는 것보다 훨씬 더한 것으로 우리에게 주신다. 참 은혜로운 말씀이고요. 우리의 소망이 되는거죠. 이 기도는 우리에게 은혜와 힘이 됩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찬송 받으실 분입니다. 왜냐하면요, 만물이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다 드러내고 있다라고 하는 겁니다. 만물이 드러내죠. 짐승도 하나님의 지혜를 드러냅니다. 우주의 별들도, 또 인간들도, 또 천사들도, 다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드러냅니다. 그런데 또 다른 그룹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교회입니다. 교회가 이 위대한 일을 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교회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을 하게된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인데요. 이 교회가 영원한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드리게 될 것이다. 이것이 우리릐 특권이고 우리의 책임입니다. 그런데 앞으로 그렇게 할것만이 아니라 지금도 하고요, 앞으로도 그렇게 할것이다. 구속받은 우리들이, 그분의 놀랍고 비교할수 없고 필적할수 없는 은혜를 우리는 교회로서 여원히 증거할 것이다, 라고 하는 겁니다. 사도는 이와같은 마지막 송영으로, 축언으로 마치고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어떤 부를 안겨주셨습니까? 어떤 비밀을 통해서요, 이방인인 우리에게 어떤 풍요로움을 안겨주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이 풍요로움을요, 능력 가운데, 주님을 위해 살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될겁니다. 그냥 보통 피조물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정도가 아니라 교회가 이제 하나님 앞에 그 위대한 영광을, 그 필적할수 없는 은혜를, 만세에 드러내는 일을 해야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 이 시대에 그렇게 해야 되겠다. 주님께서 저희 모두에게 은혜를 주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