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찬 형제님/성도 말씀

포도나무의 가지, 친구, 증인

박이레 2022. 6. 24. 20:41

< 포도나무의 가지, 친구, 증인 > 22년 6월 19일 / 강성찬 형제님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이니라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함이로라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터이라 그러나 사람들이 내 이름을 인하여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하리니 이는 나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함이니라 내가 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나를 미워하는 자는 또 내 아버지를 미워하느니라 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저희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면 저희가 죄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저희가 나와 및 내 아버지를 보았고 또 미워하였도다 그러나 이는 저희 율법에 기록된바 저희가 연고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한 말을 응하게 하려 함이니라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거하느니라"(요 15:1-27).

읽은 말씀을 통해서 주님께서 복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요한복음 15장에서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보게 됩니다. 이것은 주님과 우리 믿는 자들의 관계를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는 그런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15장을 전체적으로 읽을때에,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 이 한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우리 믿는 자들의 관계를 또한 여러가지로 표현하고 있는것을 보게 됩니다. 우선 두번째로 '친구'라는 표현을 보게 됩니다. 이 친구도 참 복된 관계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최근에 우리 모임에서 구원받았다고 고백하고 있는 어떤 분이 주님께서 자신을 친구라고 부른 것에 대해서 특별히 감격하고 감사를 표하는 그런 고백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믿는 자가 누리게 되는 놀라운 주님과의 관계입니다. 그리고 또한 '증인'인 것을 보게 됩니다. 증거하는 것, 또 믿는 자는 주님을 증거하는 사람인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주님이 하나님 아버지를 증거하신 것처럼, 또한 믿는 자들이 주님을 증거한 다는 것을 이것 또한 놀라운 특권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상징적으로 주님과 믿는 자는 그런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포도나무와 가지에서는 우리가 생명적으로 연합된 관계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포도나무가 그 가지와 동일한 생명을 누리고 있는 것처럼 주님과 우리가 동일한 생명으로 연합된 관계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표현입니다. 친구라는 것은 교제를 나누는 관계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인간적으로도 침구와는 즐거움의 교제를 나눕니다. 그리고 주님과 믿는 자는 하늘의 기쁨을 교제 가운데서 누리는 관계라는 것을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증인을 생각할때, 우리는 또한 주님을 섬깁니다. 우리는 이제 사단의 종이 아니라 주님을 섬기는 그 복된 임무를 가지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여기에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관계를, 이런 상징적인 관계를 말씀하실때에 그 순서도 생각하게 됩니다. 먼저 포도나무와 가지가 먼저고 그리고 친구고 그리고 증인입니다. 우리가 금방 알 수가 있는 것이 주님과의 교제가 먼저가 있고, 그리고 그 전에 주님과의 생명의 연합이 먼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섬기는 것입니다. 이 순서가 거꾸로 되서는 안된다는 것을 또한 알게 됩니다. 먼저 섬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 가운데서, 그리고 주님을 닮아가고, 주님을 먼저 닮고, 그 주님을 닮은 열매가 나타난 후에, 그리고 섬기는 것입니다. 그 변화된 인격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반대가 되면 안된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항상 주님께서는 먼저 우리에게 공급해 주시고 그 공급 받은 것으로, 오직 그것으로만 우리가 주님을 섬길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여기에 균형을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가 섬김만 있어서는 안됩니다. 주님과 교제가 같이 있어야 되는 것이고 주님의 생명을 공급받아서 변화된 우리의 인격이 있어야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균형이 잡혀 있어야 됩니다. 그렇다고해서, "섬기는 것은 안해도 돼. 그건 나중이 되어야 돼." 그렇게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계속 주님을 닮아갈뿐만 아니라 또한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주님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야 됩니다. 이렇게 이 세가지가 우리의 삶 가운데서 균형잡혀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생명으로, 인격적으로 변화될뿐만 아니라, 주님과의 교제에서 기쁨을 누리고 있고, 또 주님을 증거하는 삶을 살고, 참으로 우리 삶 가운데서 이 세가지가 균형 잡혀서 돌아가고 있는지, 그것을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이 세가지의 관계에 대해서 차례대로 보도록 하겠습니다.

포도나무와 가지에서 4절에서 주님께서는 "내 안에 거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거한다는 것이 명령임을 보게 됩니다. 주님의 명령입니다. 물론 우리가 구원받고 나면, 구원받을때에, 우리의 생명이 주님과 연합되고 그 포도나무와 가지가 한 생명으로 붙어 있는 것처럼, 우리는 구원받을 때에 주님께 붙어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내 안에 거하라"고 또한 명령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명령대로 거하도록 해야 됩니다. 우리가 이 비유를 언듯 들을때에 이렇게 잘못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구원받으면 자연스럽게 거하게 되는 것이고, 자연히 거하게 되는 것이고 여기보면 절로 과실을 맺는다고 되어 있는데, 구원받으면 절로 과실을 맺는것 아닌가?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이미 구원받은 사람에게 주님께서 명령하신 것이고, 그리고 주님을 믿지 않은 가룟유다가 없을 때에, 그가 이미 주님의 만찬 가운데서 나간 후에, 믿는 자들에게만 주님께서 따로 분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그냥 구원 받으라, 구원 받으면 저절로 된다, 단순히 이것 이상인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특별히 언급하신 것이고 명령하신 것이고 그로 인해서 더욱 과실을 풍성히 맺기를 바라시는 주님의 말씀인 것을 보게됩니다.
이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성경에서 많은 수고가 들어가는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한 열매가 맺어지기 위해서는 농부의 수고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동역자들의 수고가 필요합니다. 정말 물을 주고 가꾸는 그런 수고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거하다는 것이 뭘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우선 첫번째로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앞에 말씀드린 것처럼 항상 우리의 책임을 요구하는 것이고 그 결과가, 열매가 나와야 되는 것을 말하는 그런 말씀합니다. 그럼 거하다는 것을 뭘까? 이것은 주님과 생명적인 그 연합을 계속적으로 추구하고 이미 그렇게 되었지만 그것이 풍성하게, 그 생명이 나타나도록 우리가 주님을 의지하고 애쓰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과 반대되는 것을 이해를 돕기 위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것과 반대되는 것은 이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을 "참 포도나무요"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냥 포도나무가 아니라 "참 포도나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참이라는 것은 이상적인 모델이라는 것입니다. 뭔가 이상적인 모델이 아닌 것이 있었던 것입니다. 참 포도나무가 아닌, 완벽한 모델이 아닌, 그 포도나무는 이스라엘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이스라엘에 대해서도 포도나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심은 포도나무, 가꾼 포도나무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들포도가 열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하셨지만 그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를 맺지 못한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이 겉으로 봤을때는 열매를 맺은 것처럼 보입니다. 형식적인 성전이 있고, 형식적인 예배가 있고, 형식적인 율법을 지키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스라엘 민족이기만 하면,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인정받는 사람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기만 하면 그 이스라엘이라는 포도나무에 붙어 있기만 하면 그 열매를 맺는다. 이렇게 말을 한 것입니다. 이것이 참 포도나무에 거하는 것과 대조되는 모습입니다. 예수님께 거한다는 것은 이스라엘 밷성들이 그렇게 했던 것 처럼, 단지 형식적인 모양만 갖추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원받고 나서, 그냥 형식적인 종교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원받고 나서 그냥 집회에 마음 없이 참석하고, 기도는 하지만 그것도 형식적인 것이고,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정말로 그 실체를 누리라는 것입니다. 변화된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게 예수님께 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때 주신 그 생명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그게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게 참 포도나무에 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도 많은 종교인들이, 꼭 이스라엘 사람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많은 종교인들이 그렇게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냥 단지 어떤 교회에 속했다는 것으로 그 교회의 지체가 되었다고 말하고, 그래서 우리는 열매를 맺는다고 말하고, 그것은 여기서 말하는 "거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로 우리는 예수님의 생명으로 살아야 됩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거한다는 것입니다.
여기 예수님께서는 그랬을때, 우리가 과실을 많이 맺는다. 과실을 맺는 것을 강조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정말 그 생명이 드러나는 것이죠. 여기서 과실을 맺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인격을 닮아가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 우리가 덕언 시간에도 잠깐 말씀을 드렸지만, 이 포도나무는 기쁨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 포도나무의 열매, 그 과실, 포도주, 이런 것들은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과실을 많이 맺을때에 주님의 인격을 닮아갈때에 이것은 오직 주님의 생명으로만 할수 있는 일이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이게 목적입니다.
우리가 요한복음에서 주님께서 "나는 무엇무엇이니" 라고 말씀하신 것을 여러군데 보게 됩니다. 요한복음에 그런게 많이 나와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는 생명의 떡이다."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의 빛이다." "나는 양의 문이다." "나는 선한 목자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신 것이 "나는 참 포도나무다." 라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는 무엇무엇 이다, 라고 일곱가지를 말씀하셨는데, 그 앞에 말씀하신 여섯가지와 이 "나는 참 포도나무다" 라고 말씀하신 것은 조금 차이가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어떤 차이가 있는가를 생각해 보았을때, "나는 생명의 떡이다." 이것은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구원받고 사람들이 주님으로 인해서 그 양식을, 그 생명을 얻도록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나는 세상의 빛이다." 어둠 가운데 있는 그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양의 문이다." "선한 목자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이게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마지막 하나는, "나는 참 포도나무다." 이것은 하나님 아버지를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닮을때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요 15:8).

하나님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여기 하나님께서 특별히 공개적으로 "내가 기뻐한다."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두군데를 찾아보겠습니다.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 3:17).

첫번째로 예수님께서 침례를 받으실때에, 그리고 침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실때에, 하늘이 열리고 하늘에서 소리가 있었습니다. "이는 내 사랑이라는 아들이라, 내 기뻐하는 자라." 하나님께서 기쁨 가운데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마태복음 17장을 보시겠습니다.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마 17:5).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영광스럽게 변화되었을 때에, 그 영광을 나타내실때에, 또한 여기서도 하늘에서 소리가 났습니다.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기뻐한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기뻐하시는지를 보게 됩니다. 참 하나님의 아들을 그분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분의 인격, 하나님 아버지께 온전히 순종하시는 그 아드님의 인격, 그것만큼 아버지를 기쁘게 하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이제 여기서 우리는 주님께서 그 침례 가운데서, 그 낮아지심 가운데, 우리는 침례가 참으로 우리 주님께서 죄인의 자리에 서시고 얼마나 낮아지셨는지를 보게 됩니다. 그것은 그 십자가를 앞에 내다보고 있는 그러한 상징입니다. 죄인의 자리에 서서 죽으시는, 그 지극히 낮아지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 침례입니다. 그리고 변화산에서의 영광은, 그 산에서 주님이 얼마나 높아자시는지, 주님께서 결국 영광 가운데 오사 모든 것을 통치하실 분이심을 나타나는 그 지극히 높은 것을 말하고 있는 순간입니다. 그 낮아지심 가운데도, 그 높아심 가운데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셨습니다.
우리 인간은 얼마나 변덕스러운지 모릅니다. 우리가 낮아지면 낮아져서 불평과 원망 가운데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지 못합니다. 우리는 그렇다고 해서, 또한 높아졌을때 잘 하냐? 높아지면 또한 교만해져서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지 못합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참으로 그분의 인격은 너무나 낮아졌을때에도 또한 너무나 높아졌을때에도 항상 하나님을 온전히 기쁘게 해 드린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그 주님의 생명을 받는 자로서, 그 포도나무에 붙은 가지로서, 이와 같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우리 힘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그러한 주님의 모습으로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게 실제로 이루어집니다. 그게 실제로 이루어진다는게 놀라운 것입니다. 잠깐 사도행전 7장을 가서 보시겠습니다. 여기는 우리가 잘 아는 스데반의 순교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참 그 스데반의 모습을 보면, 그의 자신을 죽이고자 하는 사람들의 기도를 보면, 그가 얼마나 주님을 닮게 되었는지를 보게됩니다. 정말 사람이 이렇게까지 주님을 닮을수 있구나, 그 증거를 보게 됩니다.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행 7:55-56).

우리는 여기서 56절에 스데반을 향하여 하늘이 열렸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늘이 열리고" 이것은 우리 주님께서 침례 받으실때에 하늘이 열린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성경의 기록상, 하늘이 열렸다는 두번째 기록이 여기 스데반의 기록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주님에 대해서 기뻐하시고 이제 그 주님을 닮을 스데반에 대해서 기뻐하시며 하늘이 열린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할때에, 그 주님의 생명이 우리 가운데 나타나게 할때에 ,주님을 의지하여 그와같이 할 때에 이와같은 이런 일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과실을 많이 맺는 것입니다. 주님을 통해서 아버지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참으로 여기 그 포도나무에서의 비유에서 보면, 잠깐 요한복음 15장으로 돌아와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기 아버지께서 제해 버리시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여기 보면 이들도 "므릇 내게 있어"라고 되어 있습니다.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요15:2).

이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 이름만 예수님 안에 있다고,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나도 예수님을 믿는다. 이름만 이렇게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형식적인 이름만 가지고 있는 자들은, 열매를 맺지 못하고, 그리고 아버지께서 제해 버리실 것입니다. 하지만 정말로 믿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깨끗케 하십니다. 우리가 믿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실때에 그것을 받아들입니다. 나의 잘못을 지적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리고 깨끗케 합니다. 말씀에 반응하는 사람이 정말로 이름만 주님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주님 안에 거하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깨끗해지고 더욱 주님의 인격을 닮은 열매를 내게 될것입니다. 참 이것을 우리 마음 속에 깊이 기억하기를 바랍니다.

이제 두번째로 '친구'에 대해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기 친구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친구의 특징에 대해서 15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요 15:15).

친구의 특징은 알게 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계획을, 자기의 비밀을 털어놓는 것입니다. 종은 그냥 "이거이거 해." 라고하면 그냥 하는 것이죠. 무슨 생각과 무슨 계획으러 그렇게 하는지 모르고 그냥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친구는 왜 그렇게 하는지, 어떤 계획이 있는지를 친구에게 말해줍니다. 왜냐하면 친구와는 마음이 통하기 때문입니다. 그 말을 했을때, 알아듣기 때문입니다. 친구는 말이 통하는 사이입니다. 아이들도 보면 친구들과 놀기를 좋아합니다. 친구들과는 말이 통하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를해도 알아듣고 "그래, 그거지." 하고 같이 좋아합니다. 같은 관심사, 그리고 같은 이해, 이것을 말하는 것이 재미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과 그런 관계가 된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알아듣는, 그리고 주님의 깊은 마음을 이해하는 그런 존재가 된 것입니다. 교제라는 것이 그런 것입니다. 교제라는 것이 그 말을 알아듣는 것입니다. 교제를 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말을 할 때에 그것을 알아듣고, 반응하고, 대꾸해주고, 그 사람이 "아" 말하면 그에 맞는 장단을 맞춰주는 것, 이것이 친구의 관계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을 통해서 그 친구가 어떤 관계인지를 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이 성경에 여러번 하나님의 벗이라고, 하나님의 친구라고 나와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아브라함은 나의 벗이다." 라고 말을 하였고, 성경에서도 야고보서에 그것을 인용하면서 "하나님의 벗 아브라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 살펴 보면서 친구 관계가 어떤 것인지를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를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중하니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하노라"(창 18:17-21).

여기보면 앞에서 주님께서 하신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자기가 하려는 것을,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라고 하시면서 그 소돔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을 말씀하실 것을 알려주십니다. 이것이 친구관계입니다.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소돔을 심판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알려주십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성도님들이 잘 아시는대로 중보를 하게 됩니다. 그들을 위해서, 그 부분이 좀 긴데요. 이 부분이 특별히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다 읽어보겠습니다. 이것을 여러번 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주목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가까이 나아가 가로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려나이까 그 성중에 의인 오십이 있을찌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치 아니하시리이까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불가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균등히 하심도 불가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만일 소돔 성중에서 의인 오십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경을 용서하리라 아브라함이 말씀하여 가로되 티끌과 같은 나라도 감히 주께 고하나이다 오십 의인 중에 오인이 부족할 것이면 그 오인 부족함을 인하여 온 성을 멸하시리이까 가라사대 내가 거기서 사십 오인을 찾으면 멸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이 또 고하여 가로되 거기서 사십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사십인을 인하여 멸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 주여 노하지 마옵시고 말씀하게 하옵소서 거기서 삼십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거기서 삼십인을 찾으면 멸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이 또 가로되 내가 감히 내 주께 고하나이다 거기서 이십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이십인을 인하여 멸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이 또 가로되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말씀하리이다 거기서 십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십인을 인하여도 멸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즉시 가시니 아브라함도 자기 곳으로 돌아갔더라"(창 18:22-33).

여기 보면 아브라함이 그것을 여러번 구하고 있습니다. "정말 그들을 멸하시겠습니까? 오십인의 의인이 있어도 멸하시겠습니까?"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께서 멸하지 않겠다고 하시니까, 다시 줄여서 사십오인을 말합니다. 또 줄여서 사십인을 말하고 삼십인을 말하고 이십인을 말하고 그리고 십인까지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읽으면서도 느껴지는 것이지만 굉장히 무리한 것입니다. 아브라함 자신도 "감히 나라도" "티끌같은 나라도"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여러분 같으면 이렇게 할수 있겠습니까? 온 만물을 심판하시는 심판자가 아니라, 여러분의 직장 상사, 혹은 여러분의 학교 선생님에게도 이렇게는 부탁을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아브라함이 할수 있었던 것은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이 그렇게 할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부분을 언듯 보면, 처음 딱 보면 하나님이 막 심판하시려고 하는 것 같고 아브라함이 조금 너그러운 마음으로 간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겉으로는 그렇게 보일찌라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마음을 안 것입니다. 하나님은 정말로 모든 사람이 회개하여 멸망에 이르지 않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아브라함이 그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친구라고 칭함을 받을만 한것이죠. 우리는 아브라함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됩니다.하나님은 정말로 심판하기를 원치 않으시는 분이구나. 하나님이 먼저 심판하기 원치 않으시는 분이구나. 아브라함 때문에 이것을 알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창 18:25).

하나님은 정말로 심판을 공의로 심판하시는 분이시구나. 이 세상이 어떻게 말한다 할지라도, 그 심판이 어떻게 보인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심판은 공의롭다. 우리는 이것을 알게 됩니다. 이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오해하고 하나님의 심판이 불의하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때에 항상 사람들은 이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예전에 조선시대에 복음을 듣지않은 이순신 장군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은 어린아이들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지는 못하지만, 우리는 바로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안심할 수 있습니다. 세상을 심판하는 이가 공의로 심판하실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마음을 드러낸 아브라함 때문에, 하나님의 벗 아브라함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우리는 안심할 수 있습니다. 그분의 심판이 공의로울 것을 우리는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고 드러내 주는 그 아브라함을 기뻐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주님과 관계를 맺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이 친구 관계를 말할때에 항상 생각나는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여러분도 한문 시간에 아마 들으셨을것 같은데요. 어떤 내용이냐면, 중국에 아주 거문고를 잘 치는 백아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백아라는 사람이 거문고를 치면, 어떤 한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가 자신의 연주를 기가막히게 알아듣는 귀가 있는 거예요. 자신이 산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연주를 하면 그 종작이라는 친구는 "아주 그 험한 절경의 산을 연주하는구나." 하고 이런 말을 하면서 그것을 딱 알아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백아라는 사람이 연주할 맛이 나는거죠. 그런데 자신의 친구, 그것을 잘 알아듣는 종작이라는 그 친구가 죽자 "이제는 연주를 안하겠다." 하고 그 거문고 줄을 끊어버립니다. '백아절현' 사자성어인데, 그렇게 잘 알아듣는 친구 관계를 그런 고사성어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과의 관계가 그런 것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높은 뜻, 뛰어난 능력이 있어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으면 재미가 없는 것입니다. 의미가 없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는 주님의 능력과 주님의 깊은 지혜를 알아듣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놀라운 교제 관계로 부르신 것이죠. 그 교제 가운데서 기쁨을 함께 누리는 것입니다.

이제 다시 요한복음 15장으로 가서 마지막 부분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증인'에 대해서 말을 하고 있는데요. 친구는 서로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 주님께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과 우리가 사랑할 뿐만 아니라, 이제 형제들이 서로 사랑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세상은 주님의 친구들을, 주님의 형제들을 미워하는 것을 18절부터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미움의 원인에 대해서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세상이 주님을 미워했기 때문에 우리를 또한 미워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주님을 미워하는 이유는 22절에, 주님께서 하신 말씀 때문에 "내가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주님께서 하신 말씀 때문에 그리고 또한 24절 주님께서 행하신 일 때문에 "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저희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면" 주님께서 행하신 말씀과 주님께서 하신 일들이 하나님 아버지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 아버지를 미워하고, 그래서 주님을 미워하고, 그리고 주님께 속한 우리를 미워하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과 관련되서 요한일서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가인 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요일 3:12-13).

여기 세상이 그리스도인들을 미워하는 것에 대해서 가인이 아벨을 미워한 것과 같은 것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미워한 것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굉장히 이상한 이유입니다. 아벨이 가인에게 무언가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가인은 아벨을 죽일 정도로 미워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가인이 그 아우를 죽인 것은 굉장히 폭력적으로 그를 죽인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가인이 아벨이 이 세상에서 없었으면 좋겠다는, 그와 같이 하고 싶지 않다는 그의 미움을 그의 폭력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세상에서 받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존재만으로 미움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뭐 다른 것을 하지 않았더라도 우리가 주님께 속하고 그래서 하나님을 나타냄으로 그래서 우리는 그 증인으로써 이 미움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미움을 다른 어떤 거승로 해결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여기서 보게 됩니다. 우리가 이 땅 가운데서, 이 세상에서 사는 한, 이 미움은 계속될 것입니다. 가인이 이유없이 아벨을 죽인 것처럼, 세상은 그 존재만으로 결딜수 없어 하면서 그를 죽이고자 할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우리 주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이 세상의 빛으로 그들의 잘못을 정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잘못이 드러나는 것을 원치 아니하며 그 빛을 꺼버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없어지지 않는 한, 계속될 것입니다. 제자 왜 이것을 계속 말씀을 드리냐면, 여기 나와있는 것처럼 우리가 세상의 미움을 받을때에, 이상히 여기고, 그 미움을 무마시키려고 하는 잘못을 범힐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미움을 미마시키려고 그들이 하는 것을 인정해 주고, 그들이 하고 있는 것을 옳다 말하고 타협하고자 하는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세상에서 미움을 받을 것을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그와같이 하지 않도록, 그리고 주님께서는 성령님을 말씀하십니다. 성령님께서 증거하시고 그리고 우리도 증거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계속적으로 성령님의 능력에 의지하여 주님을 증거하는 삶을 살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상히 여기지 않고, 세상에 동화되지 않고, 그것을, 그 미움을 무마시키려고 하지 않고, 이것은 우리가 존재하는 한, 무마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요한복음 15장을 통해서. 우리가 참 포도나무이신 주님께 거하는 가지이며, 주님의 친구이며, 주님을 증거하는 증인인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삶이 이와 같은 삼중적인 관계가 균형잡혀 있을때에 우리는 주님의 기쁨을 온전히 누리게 될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가 매일매일의 삶 가운데서 주님을 계속 닮아가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과의 교제 가운데서 주님의 비밀을 더욱 알고 그로인해서 기뻐하는 삶을 누리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거기서 그칠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주님을 빛처럼 밝게 증거하는 그런 삶을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이것을 원하시고 또한 이것을 우리 모두에게 말씀하여 주신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주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우리의 삶 가운데서 계속 이루어 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