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3장 : 사도바울의 삶의 목표
2022년 1월 16일 일요일 / 한봉래 형제님
< 빌립보서 3장 : 사도바울의 삶의 목표 >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찌니 만일 무슨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빌 3:10-16).
빌립보서 3장에서 사도바울은 자신의 생애의 목표를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자기의 삶의 목표를 제시한 것은 바울 자신이 그렇게 살았다고 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도바울은 항상 우리의 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도바울을 세우실 때에 우리의 본으로 세우십니다. 사도바울은 저희들이 잘 아는 고린도전서 11장, 만찬에 관한 규정이 나와 있는 거기도 보면 "내가 그리스도를 본 받는 자 된 것처럼 너희는 나를 본 받으라" 라고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만찬을 순종할 것을 이야기하는 데요. 그러니까 사도바울은 항상 우리의 본입니다. 사도바울이 자기의 생애의 목표를 말한 것은, 우리의 본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생애의 목표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어떤 목표로 살았는지, 이렇게 보고 저희들도 그와 같은 동일한 목표를 삼기를 원합니다.
사도바울은 자기 생애의 목표가 뭐냐 그러면, 12절에 "그리스도께 붙잡힌 바된 것을 잡으려고 좇아간다" 사도바울은 자기가 계획을 세우고, 내가 주님을 위해서 이렇게 이렇게 살아야지.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을 이루어 낸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나라에는 그런 사람들이 있죠. 나는 어릴적부터 대통령이 되겠다. 그래서 끝내 대통력직을 이루어 낸, 그런 분들도 있죠. 그것은 세상에서 하는 것이고요. 그리스도 안에서는 아닙니다. 주님이 사도바울을 잡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잡은 것을 자기가 잡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주님이 나를 무엇으로 불렀는가? 나를 왜 구원하셨는가? 구원하신 후에 나를 어떻게 사용하시기를 원하는가를 알고 그 주님의 뜻을 이루어 낸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바울의 생애의 목표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언제 사도바울을 잡았느냐 하면, 약간 단순하게 생각하면 사도바울은 다메섹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다메섹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기 위해서 다메섹으로 가고 있었는데 그 길 가운데, 주님이 좇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여기까지다. 네가 네 마음대로 사는 것은 이제 여기까지다." 하고 그를 중단 시켰습니다. 그의 생애의 길을 중단 시켰습니다. 하늘로부터 정오가 되었는데, 해보다 밝은 빛으로 주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도바울에게 질문하셨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사도바울은, 그때는 사울이죠. 첫번째, 그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는 예수님이 지상에 계셨을 때, 지상에서 33년간 사역하실때, 사도바울은 주님을 만난 적이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소문만 들었지요. 그런데 하여간, 사도바울은 예수님이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십자가에 죽었습니다. 나무에 달려 죽었습니다. 저주받은 죽음을 죽은거죠. 그래서 사도바울은 예수님이 죽고, 그는 이제 죽었으니 끝이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주님이 자기 앞에 나타났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 주님이 죽으셨을 뿐 아니라 부활하시고, 그리고 하나님 우편에서, 그분이 영광스럽게 나타나셨거든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분이 내가 생각할때는, 저주 받은 죽음을 죽은 분으로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고 하나님이 그를 살리시고, 그리고 지금은 영광 가운데 계신 하나님이시구나. 이것을 사도바울이 안 것이죠.
그 다음에 두번째, 사도바울이 잊을 수 없는 경험은 자기는 주님을 핍박한 적이 없습니다. 자기는 그리스도인을 핍박했을 뿐입니다. 나무에 달려 저주받은 사람을 영광의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그렇게 믿는 이상한 사람들, 그리스도인들, 이런 사람들은, 개종할 기회를 주고, 생각을 바꿀 기회를 주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우리와 같이 살수 없다. 이 사람들은 죽어야 한다. 이것이 사울의 신념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나를 핍박하느냐" 여기 교회 진리의 한 측면이 나타나 있는거죠. 주님이 하늘에 계신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그리고 모든 구원받은 성도들은, 교회의 지체는, 그리스도의 몸에 속해 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을 핍박하면, 그것은 즉각 그 고통이 머리이신 주님께 닿는 것입니다. 그것을 그는 잊을 수 없는 경험으로 갖고 있는 것이죠. 내가 내 나름대로, 자기 생각과 견해를 가지고 쭉 인생을 자기 확신과 신념대로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자기를 잡았습니다. "이제부터는 네 마음대로 사는 것이 아니다. 네 생각대로 사는 것은 여기까지다." 하고 그를 잡았습니다. 그랬을 때, 사도바울은 생각하는 거죠. 자기는 심판받아 마땅한 사람이죠. 그런데 자기를 하나님이 구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늘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는 죄인 중의 괴수이다.' 세상에 죄인이 많지만, 구원받지 않은 사람은 다 죄인이지만, 모든 사람이 죄인이죠. 구원받은 사람은 죄가 용서된 사람이죠. 그렇지만 모든 사람이 죄인이지만, 그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다. 이렇게 말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도덕적인 죄를 범한 것, 이런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부인하고 예수님을 핍박 했으니, 세상의 사람이 범할 수 있는 최고의 죄를 내가 범했다. 그래서 그는 자기를 죄인 중의 괴수다,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러면 왜 나와 같은 죄인을, 죄인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되, 본 보기로, 죄인 중의 한 사람을 골라서 죄가 얼마나 무서운지, 심판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본 보기로 삼아서 심판 할수 있는 최적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괴수 중의 괴수, 죄인 중의 최고의 죄인을 하나님이 용서하셨습니다. 이유가 뭐냐? 복음을 증거할 때, "나 같은 죄인도 구원받았으니 당신들은 얼마나 구원받기 쉽습니까?" 이렇게 모든 죄인들에게, "나는 죄가 너무 커서 구원받지 못할 거예요." 라고 하는 사람이 없도록, 이렇게 하나님이 세운 거죠. 그래서 사도바울은 자기를 하나님이 붇잡은 이유가 뭔가를 생각합니다. 그게 뭐냐면, '어떤 죄인도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하는 증거로 그가 서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죄인 중에 자기가 괴수다라고 하고요.
그 다음에 두번째는, 그는 자기가 사도로 부름받을수 없다고 이렇게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이죠. 거기에 사도들이 나오는데, 사도들은 주님 지상에 계실때에 주님께서 부르셨죠. 그래서 주님의 부르심을 따라, 주님에게서 배우고 그 다음에 사람들에게 주님을 증거하고, 구원받게 하고, 또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교회를 가르치고, 이것이 사도죠. 그런데 사도바울은 자기는 사도가 될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사도가 뭐하는 사람이냐? 주님 증거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구원 받으면 교회를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자기는 주님을 핍박했으니, 다른 것은 몰라도 나는 사도는 안된다. 그런데 자기를 사도로 하나님이, 주님이 부르셨습니다. 왜요? 그래서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모든 다른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했다." 사도바울이 가장 많이 수고합니다. 사도바울은 담대히 말합니다. "내가 가장 수고했다. 베드로보다 요한보다, 도마보다, 더 많이 수고했다." 그리고 이렇게 붙입니다. "그런데 내가 한 것이 아니고 은헤다." 이것을 이야기 합니다. 자격 없는 사람을 불러서 사도로 삼으시고, 자격이 없는데 부르셨기 때문에 그 놀라운 은혜에 감사해서 헌신, 봉사하는 것입니다. 헌신, 봉사한 후에 그는 다시 자기의 자격 없음을 돌아봅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내가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였다." 이것이 사도바울이 자기같은 사람을 사도로 삼으신 하나님의 뜻을 고린도전서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에베소서, 디모데전서에서는 죄인 중의 괴수라고 했고요. 고린도전서에서는 사도라 일컬음을 받을 수 없는 자다. 그 다음 에베소서 3장에서는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 중에 더 작은 자다.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같은 사람이 어떻게 성도가 될 수 있겠습니까? 구원 받으면 다 성도가 되는거죠. 성도가 되었는데, 자기는 구원받을 수 없는 사람이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성도로서는 제일 마지막 성도입니다. 제일 맨 밑에 있는 성도입니다. 그런데 나에게 그리스도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게 하셔서, 특별히 하나님께서 하신 놀라운 일은, 주님께서 구원하셨을 뿐 아니라, 신약에서 굉장히 중요한 것은 교회입니다. 그런데 이 교회진리는 누구한테 주로 가르치냐면, 사도바울을 통해서 주로 가르치십니다. 요한도 아니고 베드로도 아닙니다. 사도바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교회진리를 가르칩니다. 그 교회의 비밀, 교회의 영광, 교회의 목표, 이런 것을 가르칩니다. 그래서 자기는 이제 성도는 되었지만, 자기에게 교회 진리를, 그 영광스러운 교회를, 성도들이 이루게 되는 그 교회를 가르쳐 주신, 계시해 주신, 이 주님의 은혜를 이 에베소서에서 놀랍게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생각합니다. 왜 나같은 사람을 구원하셨을까? 그냥 심판해도 마땅한데, 왜 나같은 사람을 구원하셨을까를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는 이야기 합니다. 첫번째, 어떤 죄인도 구원받을 수 있는 본으로 내가 세움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복음을 전할때마다 항상 "당신은 나보다 나은 분입니다." 이렇게 하고요. 그 다음에 일꾼들끼리 모였을 때도, 다른 사도들은 사도라 할만하죠. 마태는 세관에 앉아 있다가 주님이 부르니까 세관을 버리고 갑니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 그물을 깁고 있다가, 혹은 그물을 던지고 있다가 주님이 나를 따르면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그러니까 놓고 따릅니다. 다 주님께서 부르신 거죠. 그런데 사도바울은 사도라고 일컬음 받을 자격이 조금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조금도 자격 없는 사람을 부르신 하나님의 뜻이 뭐냐? 누구보다도 헌신하라. 그리고 그 헌신에 대해서 조금도 자랑하지 마라. 이게 자기를 사도로 부르신 하나님의 의도를 알고, 행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성도, 자기같은 사람을 구원하신 것도 참으로 감사한데, 자기에게 교회를 가르쳐 주십니다. 그 교회의 영광을 다른 사도에게 계시하지 않고, 사도바울에게 계시하셔서, 그 교회진리를 실행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그는 예배 드리고, 주님을 높이고, 교회를 세우는데 헌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내가 그리스도께 잡힌 바 된 것을 잡으려고 좇아간다. 라고 하는 것이 사도바울의 생애의 목표입니다. 저희들도 마찬가지죠. 다 여러가지 삶의 상황 속에서 구원을 받았지요. 왜 나를 이 시점에서 이러고 있을때 구원하셨을까? 이것을 보고 이제 앞으로 주님을 어떻게 섬기라고 하는 것이다, 라고 하는 거죠 그래서 자기가 나름대로 계획을 가지고 꿈을 가지고 비전을 가지고 무엇을 이루어 낸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잡힌바 된 것을 잡으려고 간다. 이것이 사도바울 생애의 목표입니다.
그 다음에 그 생애의 목표를 다시 구체적으로 예를 들면, 그는 세가지를 듭니다. 첫번째, 그리스도를 아는 것, 이게 그의 생애의 목표입니다. 두번째, 부활의 능력을 아는 것, 그 다음에, 그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알고 싶어합니다. 이 세가지입니다. 그는 그리스도가 누군가? 그리고 부활의 능력은 뭔가? 그리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 세개를 알고 싶어 합니다. 이게 사도바울의 생애의 목표입니다. 우리도 이것을 알려고 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 이것을 알기 위해서 그가 사용한 방법, 그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의 수치스러운 죽으심을 본 받는 것, 죽으신 그 죽음을 나도 죽겠다. 이것이 그의 방법입니다. 이 세가지를 아는 방법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뒤따라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과가 뭐냐? 부활에 이르는 것입닌다. 부활에 이른다, 이것도 조금 설명이 필요한데요. 왜냐하면 부활은 이르는 것이 아니고 선물로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공중에 오시면, 주님이 먼저 죽어 있는 성도들을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시키실 것입니다. 마치 나사로에게 "나사로야 나오라." 했더니 그가 살아난 것처럼, 우리도 영광스러운 몸을 입고, 부활한 주님과 동일한 몸을 입고 살아날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부활에 이르려 한다, 어찌하든지 이르려 한다는 것은, 몸의 부활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몸의 부활은 주님이 은혜로 주시는 것입니다. 그가 부활에 이르려 한다는 것은 이 뜻입니다. 그가 이 땅을 천국처럼 사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이미 부활한 사람으로서, 이미 주님이 오셔서 우리를 영광스러운 몸으로 바꿔내고, 그래서 변화된, 그 몸까지 영광스럽게 된 사람답게 이 땅에 사는 것, 이것이 부활에 이른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대목을 설명을 드려보겠습니다. 그는 세가지를 알고 싶어합니다. 세가지를 알수 있는 방법도 있습니다. 이 방법을 사용해서 세가지를 알면 그의 결과도 나타나 있습니다. 이게 그가 말하고 있는 생애의 목표입니다. 그리고 이게 우리 생애의 목표이기도 해야 합니다. 잠깐 하나하나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그리스도를 알고" 했는데요. 그리스도를 안다고 하는 것은, 사도바울은 그리스도를 알지요. 처음 주님을 만났을 때부터 주님이 누군지 압니다. 그가 이렇게 질문하죠. 하늘에서 "사울아, 사울아," 소리가 들릴때에 그는 딱 압니다. 이분은 하나님의 음성이다. 하늘에서, 히브리 방언으로, 하늘에 계신데, 자기가 쓰는 언어로, 자기가 이해할 수 있도록, 내 이름을, 목자가 양의 이름을 아는 거죠. 부르는 거죠. 내 이름을, 창세 전부터 나를 택정하신, 영원한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 거죠. 이분은 하나님이죠. 그래서 첫번째 질문이 "주여" 이렇게 딱 나갑니다. "하나님" 그리고 이렇게 질문합니다. "하나님 당신은 누구십니까?" 그래서 그의 첫번째 원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이 원하는 것, 하나님을 알고 싶은 겁니다. 이 하나님은 도대체 어떤 분인가? 사람과 얼마나 다른가? 어떻게 죄인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리시고 우리를 건지실수 있는가? 내가 무엇이길래? 이 생각을 하는 거죠. 하나님을 아는 건데요. 이것은 잠깐 보면, 사도바울이 자기 생애를 간증할때 보면, 그가 어디서 구원 받느냐면 그가 다메섹에서 구원 받습니다. 다메섹 길에서, 그리고 다메섹 안으로 들어갑니다. 주님께서 "안으로 들어가라" 그래서 그가 직가라고 거리에 있는 어떤 집에 들어가서 있게 됩니다. 그때 그가 눈이 멀고 있었는데 아나니아라 하는 다메섹 성도가 찾아와서 그를 안수해서 눈에서 비늘이 떨어지고 그로 성령 충만하게 하고, 그리고 성령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을 그에게 전합니다. 이렇게 해서 그가 다시 정상적인 생활을 하게 되었는데요. 그리고나서 사도바울이 제일 먼저 한 일이 뭐냐? 다메섹에서 구원받아서 다메섹 모임의 성도가 됩니다. 다메섹 모임의 지체가 됩니다. 지체가 되고 나서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이 뭐냐, 하면 아라비아로 갑니다. 갈라디아서 1장에 보면 나오는데요. 아라비아 가서 뭐 했느냐? 아라비아가 어디냐? 그리고 사도바울이 거기를 왜 갔느냐? 이게 전부 그곳에서 그가 주님에 대해서 알아가게 됩니다. 그가 아마 이랬을 것입니다. 나도 이스라엘 백성이고,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믿었는데, 하나님에 대해서 나도 열심있게 하나님을 섬겼는데, 바리새 파 중에서도 율법을 따라 엄하게 말씀을 순종하는 쪽에서 열심히 배웠는데, 왜 그리스도를 몰라봤는가? 왜 그리스도를 죽이는 편에 셨는가? 굉장히 끔찍한 일입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했는데, 하나님을 위해서 살았는데, 그 결과가 하나님을 반대하는 쪽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게 얼마나 놀랍겠습니까? 내가 그토록 반대한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니, 그래서 그가 그것에 대해서 여러가지를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가 로마서 11장에서 이렇게 말하죠. 자기 문제가 뭔지를 깨닫습니다.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것이 아니다" 이것이 사도바울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아라비아에서 배운 것입니다. 사람의 열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어겼다. 엘리야가 했던 것과 똑같은 거죠. 그래서 그가 제일 처음에 한게 아라비아로 가서,하나님에 대해서 더욱, 성경에 대해서, 더욱 이해를 하게 됩니다. 이제 새로운 빛으로, 이제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하는 이 빛으로, 그는 구약 성경을 다시 보기 시작합니다. 율법이 왜 주어졌는지, 처음에는 율법을 지키면 의롭게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신약 성경을 보니까 율법은 죄를 깨닫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완전히 거꾸로 간 것이죠. 그래서 그가 새로운 빛으로, 예수님이 하나님이라고 하는 이 놀라운 빛으로 성경을 다시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게 사도바울이 맨 먼저 한 것입니다. 그럼 저희들에게도 적용해 보겠습니다. 우리도 "그리스도를 알고"입니다. 우리도 그리스도를 알아야 합니다. 어떻게 알죠? 말씀을 통해서 입니다. 그래서 올해 주님이 저희를 공중에 데리러 오시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더디 오시면, 올 한해 어떤 목표를 가지고 살까요? 주님을 알고 싶다. 주님이 어떤 분인지, 하나님이시면서 사람이신 이 신비로우신 주님, 십자가를 지셨지만 부활하시고, 지금은 하나님의 우편에 계신 이 주님이 어떤 성품을 가지고 계시고 영광스러운 분인지 알고싶다. 이것이 우리 생애의 목표여야 합니다.
어떻게 아느냐? 방법이 있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말씀을 통해서, 그리고 사람의 생각으로는 항상 오해하게 되어 있습니다. 말씀을 따른다고 하는 사람들이 늘 틀려왔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생각이 아니라 성령께서 성경을 밝히 보여주셔서, 우리 주님의 영광을 알고 그 주님을 예배드리고 그 주님을 찬양하고 그 주님의 뜻대로 섬기고, 이것이 우리 생애의 목표여야 합니다. 이런 구절이 있죠. 요한복음 17장 3절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영생은 천국에 가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고 여기서 시작됩니다. 구원받은 순간부터 영원한 생명의 삶을 삽니다.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안다'라고 하는 단어는 지식적으로 안다는 것이 아니고 경험한다는 뜻입니다. 주님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내 일상적인 삶 속에서 주님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를 들면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저희들이 모임에 이렇게 모였을때, 주님이 이 약속하신 대로 우리 가운데 임재해 계십니다. 이 주님이 임재해 계신 것을 내가 어떻게 느낄 수 있는가? 주님이 분명히 계신데, 우리의 육체의 감각기관으로는 안보입니다. 못느낍니다. 그런데 영적인 눈을 뜨면, 영적인 감각으로는 주님을 느낄수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성령께서 우리 안에 게십니다. 내 안에 성령이 계신 것을 어떻게 압니까? 이렇게 그리스도를 아는 것, 하나님에 대해서 더 경험하는 것, 하나님이 내 삶 가운데 어떻게 역사하시는지, 어떻게 섭리하고 계신지, 하나님의 손길이 어떻게 임하고 계신지를 경험하는 것, 이것이 우리 생애의 목표여야 합니다.
그 다음에 두번째로 넘어가겠습니다. 부활의 능력을 아는 것입니다. 부활의 능력은 에베소서 1장에 보면 교회에 관한 여러가지 설명들이 있는데요. 그 교회에게 역사하고 있는, 지금도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역사하십니다. 믿는 성도들 가운데, 교회로 모였을 때에 역사하시고, 성도들이 개인적인 삶을 살때, 하나님이 도와주시고 인도하시고 그러지요. 그런데 그 능력이 전부 뭐냐면 부활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이 십자가에 죽은 예수 그리스도를 살려 내셨습니다. 생명의 능력으로 살려 내셨습니다. 이 죽은 자를 살리시는 능력이 지금 성도들 가운데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능력입니다. 이것이 부활의 능력, 에베소서 1장에 나와 있는데요. 이 부활의 능력은, 다시 약간 말을 바꾸면 성령의 능력입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능력입니다. 그러면 이 부활의 능력은 뭘 의미하냐면, 우리가 일상적인 삶에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만드는 일을 하려고 할때, 이것을 방해하는 것들이 쭉 있습니다. 바쁘고, 또 걱정거리가 있고, 또 유혹이 있고 할때, 이 모든 장애물들을 뛰어 넘어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순종해 낼수 있는 능력이 부활의 능력입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고린도후서 1장에 보면 사도바울이 이렇게 설명합니다. 자기가 아시아에서 환난을 당했습니다. 얼마나 심한 환난이든지, 사도바울의 믿음으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사형선고를 내린 것이다. 어떤 어려움이 오니까, 이 어려움이 어디서 온 것인가, 왜 왔는가? 이런 생각을 사도바울이 하겠지요. 그랬는데 어려움이 오고 이것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딱 생각합니다. '주님이 부르신 것이다. 주님이 이제 오라고 하신 것이다.' 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가는 것을 사도바울이 두려워 하지 않기 때문에, '주님 알겠습니다. 이제 주님께 갑니다.' 하고 그 상황을 이렇게 가고 있었는데, 분명히 사형선고인 줄 알았는데 사도바울이 죽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고난이 해결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생각합니다. 내가 판단할때는 사형으로 느껴졌는데, 주님이 왜 살려 주셨지? 하고 그가 결론을 내립니다. 하나님이 그와 같은 경험을 하게 하신 것은, 자기로 하여금, 사도바울로 하여금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위해서 입니다. 그 경험을 통해서 사도바울은 배웁니다. 나는 하나님만 의지해야 된다. 그런데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 하면,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입니다. 부활의 능력을 가진 하나님을 의지하라. 다른 어떤 것도 의지하지 말고. 이게 고린도후서 1장에서 그가 경험한 것입니다. 우리도 일상적인 삶을 살지요. 살다보면 늘 우리를 방해하는 상황이 나타납니다. 뭘 방해하느냐 하면, 주님께 영광을 돌리고, 주님의 뜻을 알고 순종하고, 또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희생하고, 라고 하는 이러한 삶을 방해하는 것들입니다. 이것을 이겨낼 수 있는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 이것이 부활의 능력을 아는 것입니다.
다시 넘어 가겠습니다. 세번째, 고난에 참여하는 것. 사도바울은 주님께서 우리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실 때에, 그냥 단번에 죽는 것뿐만이 아니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길을 반대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얼굴을 굳게 하고 그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주님 홀로 가능합니다. 다른 사람은 그것 못합니다. 주님만이 우리의 죄를 대속하실 수 있죠. 그런데 사도바울은 자기가 대속의 십자가의 길을 따라간다는 것이 아니고, 다만 주님이 십자가를 가기 위해서 겪어야 했던 여러 고난들, 그 고난에는 참여하고 싶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갈라디아서 6장에,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에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을 전해서 구원받은 성도들이 모이고 있었는데, 나중에 다른 거짓교사들이 와서 할례 받아야 한다. 율법을 지켜야 한다. 처음에는 율법 지켜야 구원받는다고 하다가 또 혹은 구원받은 후에는 율법을 거룩한 삶을 살기위한 방법으로 써야 한다. 그래도 율법이 있어야 우리가 거룩하게 되지, 법이 없으면 되느냐, 막 이렇게 하고 있는데 사도바울이 아니다. 율법은 어떤 경우도 성도를 위한 것이 아니다. 이렇게 하면서 논쟁을 하니까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 6장 쯤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더 이상 나를 괴롭게 하지마라." 그러면서,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녔노라" 굉장한 발언입니다.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녔노라. 사도바울은 여러가지 고난을 받습니다. 사도로서 주님을 섬기다가, 세번 매를 맞고 일주일을 깊은 바다 속에 있었고 여러가지 고난을 이야기합니다. 그 고난이 사도바울의 육체에 흔적을 남겼습니다. 매를 찾았고, 물론 채찌을 맞았지요. 그것이 나중에는 회복이 되었지만, 아마 사도바울의 등에 그 채찍 자국이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주님의 흔적이다." 왜 그렇게 말하냐면,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받으신 그 고난에 사도바울도 참여하면서, 자기도 그 고난을 당하면서, 나는 그 고난을 받아 마땅하고 그런 죄인이고 부름 받았으니까 받는 것이지만, 죄 없으신 영광스러운 주님께서 그것을 안받으실 수 있는데, 겟세마네 동산에서 천사들을, 열두영 되는 천사들을 부르실 수 있었는데, 사도바울은 못부르죠. 그런데 주님은 부르실 수 있으셨습니다. 그런데 부르시지 않고 그 고난을 당하신 그리스도의 마음을 그가 느끼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게 사도바울의 세개의 목표입니다. 그리스도를 알고,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고, 그리고 주님이 고난에 참여하셧던 그 고난을 맛보고, 이 세가지를 사도바울이 목표를 삼았던 것입니다. 저희들도 생애의 목표가 그것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주님을 알고, 그리고 우리의 일상적인 삶 속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죄를 이기고, 주님과 친밀히 교제하는 모든 것을 넘어서고, 그리고 우리는 기꺼이 주님의 대속의 고난에는 참여할 수 없지만, 그러나 주님이 대속하시기 위해서 걸으셨던 그 고난의 길을 우리도 당하는 것. 그 다음에 그것을 하기 위해서 방법이 무엇이냐면 주님의 죽으심을 본 받는 것입니다. 죽으심을 본 받는다는 것은 이것입니다. 주님께서도 죽지 않으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죽음으로 가는 길을 계속해서 걸으십니다. 예를 들면 주님은 안식일에 꼭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렇게 요구합니다. 예를들면 38년 된 병자, 38년이나 베데스다 연못에 있었던 병자를 안식일에 고치십니다. 또 안식일에 허리가 굽은, 몸을 못쓰게 된 어떤 여자를 고치십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이 이렇게 비난하죠. 주님이 고치신 환자들이 응급 환자들이 아닙니다. 지금 당장 고치지 않으면 죽는 환자가 아닙니다. 38년이나 병들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이렇게 요구합니다. "이 사람, 안식일 다음날 고치세요. 고치는건 좋은데 안식일 다음날 고치세요. 안식일 다음날, 하루라도 아까우시면 안식일 전날 고치세요." 주님은 그렇게 안 하시고 안식일에 딱 고치십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마음 상해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주님이 묻습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어떤 것이 옳으냐?" 그리고 손 마른 사람에게 "네 손을 펴라." 해 가지고 바리새인들이 다 보는데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버립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주님은 바리새인하고 타협하지 않습니다. 하루 전에 고치시면 되죠. 그렇게 하지 않고 안식일에 고치십니다. 고치시고 이렇게 말합니다. "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주님은 이렇게 선언하신 것입니다. 안식일은 누가 지켜야 되죠?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서 만든 것입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한 것이 아니고, 안식일이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그 다음에 주님은 안식일을 왜 안지키죠? 주님은 사람이 아닙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치심으로서 주님은 선언하십니다. "나는 하나님이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안식일을 내가 만들었다." 하나님이 천지를 6일간 창조하시고 7일째 쉬신 하나님이라는 거죠. 창조주라고 주장하신 거죠. 주님은 진리를 타협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의 요구에 맞추지 않았습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셨습니다. 이게 주님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사도바울도 타협하지 않고 그것이 죽음으로 이끄는 길이라 할지라도 그 길을 갑니다. 예를들면, 사도바울이 예루살렘에 가려고 하는데요. 예루살렘에 가기 위해서, 팔레스타인, 가나안 땅, 이스라엘 땅에 도착했죠. 배를 타고 처음에 도착한 장소가 가이사랴입니다. 가이사랴에 도착해서 가이사랴 모임에 갑니다. 그때 이 가이사랴 모임에 성도들이 모여 있습니다. 거기 아가보라고 하는 선지자가 와서 사도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체포된다, 이렇게 예언합니다. 그러니까 모든 성도들이 사도바울을 사랑해서 예루살렘에 가지 마십시요, 라고 합니다. 가면 체포되는 데요. 그리고 웁니다. 가이사랴 성도들이 전부 그럽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사도바울과 동행했던 누가, 디모데, 이런 사람들도 다 가지 말라고 합니다. 그때 사도바울이 말합니다. "왜 너희들이 울어서 내 마음을 상케 하느냐? 나는 결박뿐만 아니라 죽을 각오도 되어 있다."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사도바울은 주님의 죽으심을 본 받는 것입니다. 그렇게 행동하면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주님께서 십자가에 체포되셔서 가야바, 안나스에게 재판 받으실때도 그렇게 하죠. 자꾸 사형 언도를 내려야 되겠는데 죄목이 없으니까 대제사장이 이렇게 하죠. "네가 하나님께 맹세하면서 대답해라. 네가 그리스도냐?" 이때 주님이 대답을 회피 안합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네가 말하였도다. 이제 인자가 하나님의 우편에 앉을 것을 네가 보리라." 그 대답만 안하시면, 약간 두리뭉술이 하시면 주님은 안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안하셨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말하면 딱 죽는 대답을 하십니다. 사도바울은 예루살렘에 올라갑니다. 목숨을 걸고 올라갑니다. 왜요? 교회진리 때문입니다. 교회는 어떤 거냐? 이방인도 유대인도 없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새로운 공동체입니다. 그들이 세상에서 어떤 민족이었는가? 사회적으로 어떤 신분이었는가는 다 소용없고, 이제 주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고, 주님이 주신 은사를 따라 주님이 주신 직분을 행하는, 피차간에 지체일 뿐입니다. 이 진리를 나타내기 위해서 사도바울은 목숨을 거는 것입니다. 이것이 죽으심을 본 받는 것입니다. 저희들도 이렇게 하다가는 우리에게 손해가 나고, 손해 정도가 아니고 내가 죽게 생겼는데, 그때 주님의 죽으심을 뒤따라 가는 것입니다.
이 주님의 죽으심을 뒤따라가는 사람이 세가지를 압니다. 그리스도를 알고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고 그리고 고난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그는 이제 이렇게 삽니다. 이 땅을 이미 부활의 사람으로 삽니다. 천국에 가서 영생이 시작되는 것이 아니고, 물론 거기서는 더 차원이 다르게 되지요. 그러나 여기서부터 이미 구원의 확신으로, 이 땅에서 이미 부활한 사람으로, 죽음에서 부활한 사람으로 이미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바울 생애의 목표입니다.
이 목표가 저희들에게도 올 한해 주님께서 허락하시면 저희들의 목표가 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사도바울이 그와 같은 생애를 살았고 그리고 사도바울은 "나를 본받으라" 했습니다. 저희들이 다 그 길을 가서, 주님께 영광을 돌리고 주님이 저희들에게 허락하신 이 땅에서의 저희를 붙잡으신 것이 이루어지는, 주님께서 잡은 것을 우리들이 잡아내는, 이와 같은 삶을 살게 되기를 원합니다. 이제 1월인데요. 주님께서 저희들 마음을 새롭게 하셔서 주님 더디 오시면, 주님께서 오시는 것이 가장 좋고, 주님께서 더디 오시면, 저희들이 이와 같은 삶을 살게 되기를 원합니다. 왜냐하면 목적지를 찍어야 그 다음에 네비게이션이 길을 안내합니다. 목표가 분명해야 우리가 이탈하지 않습니다. 잘못된 길로, 우회도로로 이탈하지 않고 목적지를 향하여 굳게, 곧게 갈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은혜가 주어지기를 원하고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