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형모 형제님/솔로몬의 생애

< 솔로몬의 생애 09_ 언약궤 내전 안치 >

박이레 2021. 7. 19. 21:00

2018년 11월 3일 토요일

강사 : 정형모 형제님

< 솔로몬의 생애 09_ 언약궤 내전 안치  >

여기 오기전에 시흥모임에서 열왕기상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계속해서 열왕기상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이어서 열왕기상 8장 말씀을 살펴 보겠습니다.

1 이에 솔로몬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다윗성 곧 시온에서 메어 올리고자 하여 이스라엘 장로와 모든 지파의 두목 곧 이스라엘 자손의 족장들을 예루살렘 자기에게로 소집하니
2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다 에다님월 곧 칠월 절기에 솔로몬왕에게 모이고
3 이스라엘 장로들이 다 이르매 제사장들이 궤를 메니라
4 여호와의 궤와 회막과 성막 안의 모든 거룩한 기구들을 메고 올라가되 제사장과 레위 사람이 그것들을 메고 올라가매
5 솔로몬왕과 그 앞에 모인 이스라엘 회중이 저와 함께 궤 앞에 있어 양과 소로 제사를 드렸으니 그 수가 많아 기록할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었더라
6 제사장들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그 처소로 메어 들였으니 곧 내전 지성소 그룹들의 날개 아래라
7 그룹들이 궤 처소 위에서 날개를 펴서 궤와 그 채를 덮었는데
8 채가 긴고로 채 끝이 내전 앞 성소에서 보이나 밖에서는 보이지 아니하며 그 채는 오늘까지 그곳에 있으며
9 궤 안에는 두 돌판 외에 아무 것도 없으니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후 여호와께서 저희와 언약을 세우실 때에 모세가 호렙에서 그 안에 넣은 것이더라
10 제사장이 성소에서 나올 때에 구름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하매
11 제사장이 그 구름으로 인하여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함이었더라
(왕상8:1-11, 개역한글)

주님께서 읽은 말씀에 은혜를 주실 줄 을 믿습니다.
저희들은 계속해서 열왕기상 말씀을 살피고 있었습니다. 특별히 6장과 7장 말씀에서 솔로몬이 즉위한 이후 제 사년에 성전 건축을 시작해서 성전건축을 완성했습니다.
이 성전 건축을 다 마치고 나서 저희들이 읽은 8장에서는 두가지 중요한 사건을 말씀합니다.
첫째는 언약궤가 예루살렘의 휘장 안에 안치되어 있었습니다. 사실상 다윗은 전에 블레셋에게 빼앗겼다가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왔던 언약궤에 대해서 오래 전부터 생각했고 하나님의 거처에 대해서 많은 소원을 주님앞에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언약궤를 시온으로, 예루살렘으로 모셔와서 휘장 안에 모셔 두었습니다. 이 일은 꽤 오래되었습니다.

우리는 잘 아는대로 다윗이 자신은 백향목 궁에 거하면서 언약궤는 휘장에 있다는 생각을 하고 성전을 지어드리고자 하는 뜻을 밝혔지만 하나님께서 거절 하셨습니다. 그의 아들 솔로몬 때에 와서 이 일을 할것이라고 밝히셨습니다.
대신, 네가 나의 성전을 지어주는 것이 아니고 내가 너의 집을 견고히 영원토록 세우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래전에 다윗이 이미 언약궤를 예루살렘에 모셔 왔습니다. 그곳에 언약궤는 오래 있었습니다.

긴 세월을 통해서, 다윗부터 시작해서 솔로몬이 부친의 당부를 통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성전을 다 필역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약 11개월 이후에 언약궤를 성전으로 모셔 옵니다.
2절 말씀을 보면 <이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에다님 월 곧 칠월 절기에 솔로몬왕에게 모이고>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37 제 사년 시브월에 여호와의 전 기초를 쌓았고
38 제 십일년 불월 곧 팔월에 그 설계와 식양대로 전이 다 필역되었으니 솔로몬이 전을 건축한 동안이 칠년이었더라
(왕상6:37-38, 개역한글)

솔로몬이 보좌에 오른 후 제 사월 이월달에 건축이 시작되었고요, 건축이 마쳐진것은 십일년 팔월 불월에 건축이 완공되었습니다. 그리고 난 후에 2절 말씀처럼 에다님월 칠월 절기에 보이게 되었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에다님월은 칠월이고 칠월은 사실상 초막절의 때 입니다. 그때에 맞춰서 솔로몬은 언약궤를 성전에 모셔 드리고 성전 봉헌식을 하게 됩니다. 성전을 그동안 위해서 준비해 왔던 기간이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즉위한 이후에도 그렇게 했지만 그가 즉위하기 전에 다윗왕이 자기에게 간곡히 부탁했던 모든일을 생각할때, 그동안의 많은 노력을 통해서 드디어 성전이 완공 되었을때 솔로몬 마음속에 있었던 감격과 하나님께 향한 그 감사가 얼마나 컸을까를 저희들이 가히 생각해 볼수 있습니다.
이 건축은 적은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 일이 위대한 이유는 첫째로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그것을 계획하고 인간이 추진한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심중에 영원전부터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다윗왕때부터 그것을 오랫동안 마음속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위해서 온 마음을 드리고 또, 그의 생애를 바쳐서 성전 재료를 준비해 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식양을 받았습니다. 그것을 아들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솔로몬은 그 모든 과정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받들어서 성전을 짓게 될때 자기 자신도 성전 재료를 준비해 왔습니다. 그리고 성전을 짓게 될때 자기 자신이 실제로 한 일이 있습니다.

솔로몬왕이 여호와의 전을 위하여 만드는 모든 것을 마친지라 이에 솔로몬이 그 부친 다윗의 드린 물건 곧 은과 금과 기구들을 가져다가 여호와의 전 곳간에 두었더라 (왕상7:51, 개역한글)

솔로몬이 또 여호와의 전의 모든 기구를 만들었으니 곧 금단과 진설병의 금상과 (왕상7:48, 개역한글)

여기 기구를 만들었다는 것은 이 모든일을 하게 될때 솔로몬이 직접 감독했다는 것입니다.
이 일을 이루게 될때, 솔로몬 자신이 드렸던 관심과 노력과 그 마음은 대단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솔로몬 전이 건축되고,팔월달에 마쳐지고 다음해 십실개월 후 칠월달에, 초막절에 백성들이 모이고 궤가 성전으로 들어오고  봉헌하게 되는 것입니다.

11절 말씀까지 보면 궤가 드디어 자기의 자리로 들어 왔습니다.
오래전 이스라엘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패하고 궤를 빼앗겼을때 궤는 블레셋의 이곳저곳을 항상 다녔습니다. 블레셋에 갔어도, 궤는, 하나님 자신은 항상 방어합니다. 인간은 실패해도 하나님은 결코 실패하지 않습니다.
그리고나서 궤가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왔지만 궤에 대해서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렇게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궤에 대해서 어릴적부터 생각 했고 왕이 되기 훨씬 전부터 생각했고, 왕이 되고나서는 궤를 모셔오는 일에 힘썼습니다.

그리고 솔로몬이 그 궤가 들어가야 할 자리에 모셔 왔습니다. 그것은 대단히 놀라운 순간입니다. 솔로몬의 생애 중에 가장 놀라운 순간이었고 이스라엘 역사에서도 회귀할만한 순간이라고 생각 합니다. 궤가 바른자리에 모셔진다고 하는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궤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입니다. 회막에서 수많은 기구가 있지만 회막에 궤가 없다면 그것은 더이상 회막이라고 말할수 없습니다.

성전이 가장 값비싸고 귀한 재료로 수많은 시간을 들여서 성전을 건축했다고 해도 언약궤가 거기에 없다면 그것은 성전의 가치를 전체로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궤가 마땅히 들어와야 할자리에 모셔졌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놀라운 일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저희들의 삶속에서 적용해 본다고 생각해 보십시요. 궤를 모신다고 하는것은 우리 주님을 모시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을 우리 마음속에 가장 깊은 지성소에 모시고 있나요?
주님이 합당하게 경배를 받고 영예를 받고 존귀히 여겨지고 이러한 대우를 우리가 해 드리며 주님을 보좌에 모셔드리는것을 경건이라고 합니다. 그런사람은 경건한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경건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주님이 주님의 자리에 오시게 될때, 주님은 권위를 갖게 되고 주님의 말씀을 힘을 얻게 되고 우리는 그 말씀에 전폭적으로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했고 하나님을 멀리떠나 하나님과 원수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구원받게 될때 처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구원받고나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구원받기 전에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을 멸시하는 그런 마음이 혹 우리 마음속에 일부 남아서 우리 주님의 주권적인 은혜와, 또 그분이 마땅히 대접을 받아야할 자리에 우리가 모든 면에 있어서, 모든 상황에 있어서 그렇게 해드리지 못한다면 우리가 주님을 주님으로 여기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대단히 명확하고 대단히 중요한 진리 입니다.
만일 우리가 항상 주님을 주님의 보좌에 모셔 드린다면 우리의 삶은 달라질 것입니다. 개인의 삶에서, 가정의 삶에서, 모임의 성도들의 모든 교제의 모든 활동에 있어서 그 그림은 전혀 달라질 것입니다.

여기 온 궤를 말하게 될때 1절 말씀을 보면 <여호와의 언약궤>라고 합니다.
이 궤를 여러가지 모양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언약궤'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약속을 말씀하십니다. 약속을 말씀하시고 그 약속을 지키십니다. 우리 주님의 말씀이 땅에 떨어지는 법이 없습니다.
우리는 미쁨이 없을찌라도 주는 일향 미쁘십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언제나 어떤 상황에서나 주님께서는 언제나 충성스럽게 그 말씀을 지키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도 주님앞에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언약을 지킨다면 약속대로 우리의 전심을 다해서 힘을 다해서 온 마음을 다해서 주님을 사랑하고 섬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언약궤를 생각할때 우리는 그것을 상기하게 됩니다.

이제 궤가 진입을 했다고 할때 우리가 두가지 면에서 생각해 볼수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궤는 회막에 속했던 궤입니다.
회막은 시내산에서 만들어지고 항상 이동 했습니다. 여기저기 다녔습니다. 회막이라고 하는것은 한군데 있지 않고, 영구적인 구조가 아닙니다. 천막이기때문에 뜯었다가 다시 세웠다가 옮겼다가 했습니다. 구름이 가면 뜯어서 옮기고 옮기게 될때, 레위 사람이 어깨에 궤를 매고 갔었습니다. 그러다가 구름이 서면 궤가 멈추고 회막이 세워지고 지성소에 궤를 모시는 일을 반복해 왔습니다. 항상 이동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광야를 지났고 원수와 싸웠습니다. 이 모든 기간이 끝났습니다. 그리고 영구한 구조인 성전이 세워 졌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무엇을 상기할 수 있겠습니까? 궤는 우리 주님이십니다. 우리 주님께서 하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오셔서 거절당한 주님으로 이 세상에 사셨습니다. 수많은 일을 행하셨고 그 사역의 기간동안 주님께서 행하신 많은 일들이 있고 마침내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속의 위대한 계획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때까지 주님께서는 거절 당하신 주님입니다. 세상에 싫어버린 바 되었고 또한 사람들의 멸시와 조롱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사실상 우리 주님은 지금도 이 세상에서 거절 당하신 주님이시고 앞으로 영광 가운데 오실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셨을 때 무덤에 장사 되었고 사흘만에 부활하셨지요. 그리고 승천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보좌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가리켜서 승격이라고 말합니다.

주님께서 승격 되셨습니다. 거절 당하는 세상으로부터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 아들을 받으시고 보좌 우편의 영예 가운데 두셨습니다. 거절 당하신 주님이 아니고 이제는 승격 당하신 주님이십니다. 여태까지 여기저기 다니다가 왔던 언약궤 입니다.
이제는 영구한 제자리에, 영원한 영광 가운데 들어왔다는것을 승격하신 주님과 관련해서 생각해 볼수 있습니다. 또 한가지 주님께서는 지금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지만 시편 103편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원수가 발등상 밑에 와서 엎드릴때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이제 주님께서는 전에 이 땅에 오실때에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거절과 조롱의 대상으로 멸시를 당하식고 겸손한 주님으로 오셨습니다.

주님이 능력이 없으신게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주님께서 낮은 위치를 취하시고 하늘영광을 버리시고 가장 겸손한 위치로 내려오셨는데 말구유까지 오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 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주님께서는 계속 낮아지시고 구속을 완성 하셨습니다.
그분께서 슨천하시고 보좌 우편에 지금 앉아계십니다. 그리고 모든 원수가 발등상 될때까지, 다 굴복할때까지 주님께서는 기다리고 계십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주님께서는 이천년전 영광 가운데 오신것이 아니고 수욕과 멸시의 대상으로 오셨습니다. 왜내하면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주님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주님이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주님께서 그 모든 능력을 사용하지 않고 온유와 겸손 가운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땅에 오신 것입니다.
이 주님께서 십자가의 모든일을 마치시고 승천하시고 승격 되셨습니다. 이제 다시 오실때 영광 가운데 오실 것입니다. 그 모습을 우리는 시편 24편에서 보겠습니다.

7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찌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찌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 가시리로다
8 영광의 왕이 뉘시뇨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9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찌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찌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 가시리로다
10 영광의 왕이 뉘시뇨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셀라)
(시24:7-10, 개역한글)

시편 22-24편은 시편의 삼중주라고 말합니다. 시편 22편은 거절 당하신 우리 주님입니다. 과거에 이땅에 오셔서 고난받고 수욕을 당하신 주님 입니다. 22편은 그래서 선한목자 되신 주님 입니다. 선한 목자는 자기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그런데 시편 23장에서는 위대한 목자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선한목자는 과거에 우리를 위해서 피흘려 돌아가시고 죄인을 구속하신 목자라면, 지금은 승천하시고 영광 가운데 계시며 우리 믿는 사람들을 돌보시고 계시는 위대한 목자 입니다. 그것은 시편 23편이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시편 24편은 미래의, 우리 주님은 과거에도 목자였고 현재도 목자이시면 미래에도 목자입니다. 목자장으로 나타나실 것입니다.
그분이 영광과 능력 가운데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해서 오시게 될때 그 오시는 모습을 시편기자는 24편 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찌어다>

문이라고 하는것은 참으로 중요한 곳입니다. 성안으로 들어가고 성 안에서 성 밖으로 나오는 관문입니다. 성문은 세 부분으로 구성 됩니다. 첫째로 두 문짝이 있습니다. 성문 입구가 아치로 되어 있다면 밑에 두 문짝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두 문짝위에 그 위를 덮고있는 머리가 있습니다.
그 머리는 보통은 열리지 않습니다. 왕이 들어가게 될때 문짝이 열리고 위에 있는 머리도 열리는 것입니다.
영국의 트라팔가 스퀘어에 가면 트라팔가 스퀘어부터 시작해서 버킹엄 팰리스까지 몰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항상 중요한 예식이 벌어지게 될때 영국에서는 그 몰을 사용합니다. 버킹엄 팰리스까지 길인데요. 트라팔가 스퀘어에서 버킹엄 팰리스까지 가는 몰로 들어가기 위해서 문이 있습니다. 세개가 있습니다. 그 양쪽은 자동차가 왔다갔다 합니다. 가운데 문은 항상 잠겨 있습니다. 그 문은 여왕이 통과하게 될때 그문이 열립니다. 보통때는 열리지 않습니다.

성문이 보통 열리지만 일반 사람들이 왔다갔다 항때, 통행할때는 두 문짝만 열립니다. 그러나 왕이 통과하시게 될때 머리가 열립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찌어다>
이것은 드디어 오랫동안 기다렸던 왕께서 위대한 왕의 성인 예루살렘으로 입성하게 될때의 모습을 말하고 있습니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십니다. 위대한 능력과 권세와 영광을 가지신 그 분께서 전에는 배척을 받았지만 이제는 영광과 존귀를 받고 그 능력 가운데 만국을 심판하시는 왕의 왕이시요. 주의 주께서 들어가실 것입니다.

시편기자는 이것을 말씀하고 있고요, 이분께서는 목자장으로 오실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궤가 솔로몬의 성전이 다 필역 되었을때 지성소 안까지 드디어 들어 왔습니다. 방황하고 여행하고 쉬지 못했던 언약궤가 성전 안에, 그것도 가장 깊은곳 그분의 거할곳, 지성소로 들어갔습니다. 그분의 거할 곳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역사상에서 대단히 놀라운 순간 입니다. 솔로몬 마음속에는 아버지때로부터 항상 마음속에 그리워 왔던 이 위대한 뜻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부친의 부탁을 순종함으로 전이 완성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전이 완성되지마자 궤가 온 것이 아닙니다. 십일개월을 지나고 난 후에 초막절을 계기로 해서 궤가 들어왔습니다. 그렇게 때를 잡은것 같습니다.
아마 성전이 다 왕성되고 여러가지 준비할 일이 있었던것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초막절은, 그것은 일년에 일곱절기중에 유대인들 가운데 가장 행복하고 즐거운 절기입니다. 사실상 천년 왕국을 가장 잘 묘사하고 있는 절기는 초막절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그와같은 절기를 따라서 궤를 모셔오고 봉헌을 했던것 같아 보입니다.

여기 성전안에 들어올때 내소로, 즉 지성소, 내전-거기에는 언약궤 위에 속죄소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옛날에 한 금덩이로 쳐서 만든 두 그룹들이 있습니다. 이 그룹 천사가 속죄소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것은 옛부터 존재해 왔던 언액궤와 속죄소, 두 그룹입니다. 그리고  두 그룹 사이에 하나님께서 좌정하고 계시죠.
우리 여호와 하나님을 묘사하게 될때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하나님이라고 묘사 합니다.
그룹 사이가 보좌 입니다. 그 언약궤가 제자리에 들어오게 될때, 이미 거기에 있는것이 있습니다.
6장 말씀을 보게 될때, 돌로 성전 프레임을 만들었던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넗판으로 덮었습니다. 그 일이 있고 난 후에 많은 장식들과 기구들을 만들었습니다.
내소, 지성소 안에 거대한 두 그룹이 서 있었다 하는것을 우리가 기억합니다. 두 그룹이 서로 날개를 펴서 이 날개 끝은 저벽에 닿고 저 날개는 그 날개끼리 닿고 다른편의 구릅의 날개는 저쪽벽에 닿습니다. 이끝에서 저끝까지 두 그룹의 날개가 닿게 되는 거대한 그룹, 성소를 향해서 바라보고 있는 두 그룹 아래 언약궤가 모셔 졌습니다. 바로 거기가 언약궤의 바른 장소입니다.

그룹은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의를 경호하는 천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광이 항상 경호되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다른 존재가 취해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질투의 하나님 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어떤 존재와도 자기의 영광을 나누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은근히 나의 영광으로 취해보려고 하는것은, 그것은 하나님 앞에 합당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언제나 모든 영광을 하나님꼐 돌려 드려야 합니다. 인간이 그 영광을 나누려고 하거나 뺏을려고 하거나 하는 이런 모든것들은 하나님 앞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룹은 바로 그것을 항상 경호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의는 항상 보전 되어야 합니다.

보좌는 항상 의가 있어야 합니다. 보좌는 통치하는 곳입니다. 왕이 통치하게 될때 왕의 통치는 언제나 바른 공의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의로운 통치자이십니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의 보좌에는 그룹들이 있습니다. 그의 영광을 보존하고 그분의 의가 보호 되도록 그룹들은 그 옆에서 보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단은 바로 이것을 갈취했고 하나님의 영광을 자기것으로 하려고 했습니다. 인간은 거기에 타락함으로서 가담했습니다. 인간은 그래서 멸망 가운데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우리가 구속 받았다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그와 같은 상태로부터 우리가 구속을 받은 것입니다.

구속받은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려 드리는 것입니다. 그분의 위치, 그 궤가 그 자리에 마땅히 와야 한다는것 그것은 솔로몬이 오랫동안 생각해 오던 것이고 그 일이 드디어 이루졌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계속해서 그렇게 보존이 되어야 합니다.
궤의 지성소의 진입을 생각할때 다음과 같은 모습을 우리가 보게 됩니다.

다음 채에 관한 말씀이 있습니다.

채가 긴고로 채 끝이 내전 앞 성소에서 보이나 밖에서는 보이지 아니하며 그 채는 오늘까지 그곳에 있으며 (왕상8:8, 개역한글)

언약궤는 원래 궤를 만들때 조각목으로 상자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위의 뚜껑이 속죄소 입니다. 안밖을 금으로 씌웠습니다. 그것은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을 잘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조각목은 인성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얼마나 위대한 은혜입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셔서 베들레햄 말 구유에 누워 계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한 인간이 되셔서 우리가 행하는 모든것을 익히 다 알고 계시고 모든것을 다 느끼고 계시고 모든 인간의 연약을 동정하고 계십니다. 체휼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동시에 그분은 완전한 하나님이십니다. 금입니다. 조각목만 있는 것이 아니고 금입니다. 금이 안밖에 다 덮여 졌습니다.
그분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이시고 본체 이십니다. 하나님과 동등되신 분입니다. 그분은 일부가 하나님이 아니고 일부가 사람이 아니고 완전한 하나님이시고 완전한 사람이십니다.
어떤 인간도 하나님처럼 완전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모두가 다 죄인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인간이 되셨는데 죄인이 아니십니다. 성령으로 잉태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죄인이 아니시고 죄에서 떠나 계십니다.
죄가 그 안에 없으시고 죄를 진 적이 없습니다.
우리 주님은 절대적으로 거룩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이 궤에 또 한가지 구조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고리가 있었습니다. 양쪽에 고리가 있었습니다. 거기에 두채를 넣었습니다. 양쪽에 두 채가 고리사이에 들어가서 걸려 있고 레위사람들의 고핫자손들이 그 궤를 어깨에 매고 이동해야 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법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궤는 언제나 이동하는 궤 였습니다.
채와 고리라고 하는것은, 궤는 언제나 이동한다는것을 말씀하고 있는것입니다.
엔제 이동했습니까?
그 궤가 항상 광야를 통과하고 전쟁을 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와같은 모습으로 오셨을때 주님은 거절 당하셨습니다. 인간의 모습으로 성육신 하셨을때 주님은 처음에 거절 당하셨습니다.
그분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셨을 때, 완전한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하셨는데, 그 분께서 승천하시고 승격하셨습니다. 보좌 우편에 지금 앉아 계십니다.
그 분이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실때, 그분은 도로 하나님이 되시고 육체를 더이상 가지고 계시지 않는것이 아닙니다.

하늘보좌에 앉아계신분이 유일하게 육체를 가지고 계십니다. 완전하고 영광스러운 육체를 가지고 계신 주님이십니다.
거기에는 영의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고 영의 천사들이 경배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아무도 육체를 가지고 있는 분이 없습니다. 영광스러운 육체를 가지고 계신분은 없습니다. 우리 주님만이 육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전안에 궤가 들어왔는데 그 채는 여전히 고리에 끼어서 거기에 안장되었습니다. 모시고 있습니다. 그래서 밖에서 보면 그채가 성소에서도 보였다고 말씀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인간이 되어서 거절을 당하셨습니다. 많은 고난과 역경과 외로움과 슬픔을 당하셨습니다. 슬픔의 사람으로 이땅에 오셔서 고난을 받으시고 구속을 완성하셨습니다.
그리고 승격되셨습니다. 그분은 여전히 옛날 고난 당하실때의 몸을 가지고 계시지만 그분은 부활을 통해서 영광스러운 몸을 가지고 계시고 여전히 영광스러운 채로 하늘에 계십니다. 채는 그것을 우리에게 상징시켜 준다고 말씀할수 있습니다.

주님은 지금은 영광스러운 몸으로 보좌 우편에 안자 계시지만 옛날 이 땅에 오셨을 때 완전한 몸으로 오셨습니다. 피곤도 하셨습니다. 죄는 없으셨지만 배고프고 목마르셨습니다.
이런 완전한 육체를 가지고 계셨던 그분 입니다. 지금은 영광스러운 몸을 가지고 계시지만 과거에 그와같은 배척과 멸시와 조롱의 대상이 되셨습니다. 또한 슬픔의 사람이요 질고를 아는분으로 이땅을 가셨습니다. 그 육신을 가지고 계시고 인성을 가지고 계셨던 그 분을 우리는 여전히 상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그분은 승격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속에 기억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옛날 그분께서 하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오셔서 인간으로서 고난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멸시를 당하셨을뿐 아니라 죽음으로서 하나님께 모든 기쁨을 드리셨다는 것을 기억합니다.

이제 궤 안에는 두 돌판 외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원래 이 궤 안에 다른 두가지가 또 있었습니다. 하나는 아론의 싹난 지팡이 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금 항아리 속에 만나를 넣고 그 안에 두었습니다.
금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세번째, 가장 중요한것은 두 돌판이었습니다. 그러나 전자 둘은 다 사라지고 두 돌판만 남아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광야를 여행할때,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그렇게 위대한 능력을 많이 보고도 얼마나 많은 경우에 모세를 향해서 불평과 불만을 토했습니까?
불편과 불만의 연속이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학교에서 그가 배웠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그가 이땅에 끌어내릴 수 있는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었지만 그는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게 될때, 때때로 그 마음속에 견딜수 없는 고통과 고뇌와 심지어는 우울한 마음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떤때는 고라의 자손이 이렇게 말한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다 거룩한데 왜 네가 거룩한척 하느냐?"라고 말한적이 있습니다. 고라의 반역입니다. 광야 여행중에 수많은 반역이 있었습니다만, 고라의 반역은 대단히 독특하고 강력한 것이었습니다.
고라뿐만 아니라 그와 동조했던 여러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레위 사람으로 그가 주장하는것은 "우리가 다 거룩하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영적으로 말하면 '영적인 사회주의' 사고방식입니다. "우리는 다 똑같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서 다 똑같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같은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루시게 될때, 어떤 사람은 이런은사와 저런은사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각각 다른 성품과 성격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 각인의 신분 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독특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 교회안에 다스리게 될때, 거기에는 다스리는 사람이 있고 순종해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머리와 순종의 관계가 있습니다. 광야에서 고라는 여기에 대해서 도전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어떻게 대우하셨습니까?
모세는 이러한 일에 당면했을때 그는 고라와 함께 변론하고 그가 어떻게 인도자가 되었는지 설득하거나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모세는 자기 자신이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해야 겠다고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셨을때 그는 "나는 할수 없다"고 그의 무능을 하나님 앞에 고백할 정도로 그는 하나님 앞에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쓰셨고 그에게 일을 맡기셨습니다.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서, 이끌어 가라고 하는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이 그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따라서 만일 모세를 대적한다면, 그것은 모세를 대적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에게 일을 맡기신 일을 주신 분, 그 하나님을 향해서 대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자기의 인도하는 입장, 책임, 모든것들을 고라에게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고라가 행한 일들은 자기를 향해서 말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하나님을 향해서 대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모세는 하나님 앞에 엎드린 것입니다.
만일 모세가 자기가 어떠한 사람인데라고 하면서 고라에게 변론하고 분기 가운데 들어갔다면 주제 넘은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종입니다.

종은 주인의 일을 맡은 사람입니다. 따라서 그는 그 맡은 일에 대해서 대적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도록 맡긴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교회안에서 주님의 일을 하게 될때, 와왕 이와같은 일이 있습니다.
인도하는 일들은 내가 스스로 맡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탁하신 것입니다.
부르시고 맡기신 것입니다.
고라의 범죄는 대단히 심각한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인 사회주의적 개념입니다.
우리가 모두가 다 똑같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인도되는 일은 영적인 민주주의나 영적인 사회주의 같은 체제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것이고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로도 성령께서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집행하는 일이나 자격이나 이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있고, 성령께서 이 모든일들을 준비시키고 일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에 대적한다고 하는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고라가 이렇게 반역했을때 하나님꼐서는 이것을 어떻게 설명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논리적으로 설명한 것이 아니라 능력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가운데 각각 지파마다 지팡이 하나를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다 죽은 지팡이 입니다. 그리고 언약궤 앞에 갖다 놓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나서 그날밤이 설명해 주었습니다.
여기서 싹이 나는 지팡이, 그 사람이 인도하는 사람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그사람이 하나님이 선택하신 자라고 하셨습니다. 누구의 지팡이에서 싹이 났습니까? 아론의 지팡이에서 싹이 났습니다.
아론의 지팡이라고 하는것은 제사장의 지팡이입니다. 제사장은 무슨일을 합니까? 제사장은 연약한 사람을 돌보는 사람입니다. 제사장은 우리의 역약한것을 들어주는 사람 입니다.

우리의 주님께서는 과거에는 선한 목자셨지만 이제는 위대한 목자이십니다. 우리를 위대한 목자로서 우리 성도들을 인도하십니다. 성도들의 필요를 공급하십니다. 위대한 목자는, 오늘 구원받은 성도들은 양인데, 그 양에게 필요한것을, 위대한 목자는 필요를 따라서 공급해 주십니다.
또한 우리 주님께서는 오늘날 위대한 목자일뿐 아니라 대언자 이십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었을때,- 구원받은 사람들이 죄를 짓습니까? 죄를 짓습니다. 때로는 생각으로 때로는 행동으로 죄를 짓습니다.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하는데 죄를 지을때가 있습니다.-그러나 만일 죄를 짓는다면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 구원받은 사람들이 죄를 짓는것이 아닙니다. 우리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씨가 있기 때문에 계속해서 죄를 지으면서 살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근심합니다. 우리안에 성령님께서 오셔서 계속해서 우리를 다루시고 계십니다.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죄를 짓고 사는데 여전히 죄를 짓는데 아무런 감각이 없다면, 성령이 근심하는 것도 없고 아무런 것이 없다면 그 사람은 구원받지 않은 사람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계속해서 죄를 지을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근심 합니다. 이것은 현실 입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죄를 지었을때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우리 주님께서는 모든 장치를 해 놓으셨습니다.
삽자가에서 돌아가신 주님 그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셨음을 우리가 믿게 될때 구원을 얻습니다.
그런데 구원받은 사람이 죄를 지면 주님 앞에 가서 자백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때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실 것이요> 라고 말씀했습니다.

죄를 지었을 때 우리에게 필요한분은 대언자 입니다. 전에도 그는 선한 목자였는제 지금은 위대한 목자 이시고 지금은 또한 대언자 이십니다. 보좌우편에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또한 우리 주님께서는 지금 대제사장이십니다.
아론의 반차의 대제사장이 아니고 멜기새댁의 반차를 통한 영원한 대제사장이십니다.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을 돌보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범죄하기전에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죄를 짓지 않도록 우리를 붇들어 주십니다.
연약하기 때문에 지원해 줘야 합니다. 팔이 연약하기 때문에 팔을 못들면 누가 받들어주면 들수 있지 않습니까?
그와같이 대제사장의 역할은 연약을 돌보시고 붇들어주고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죄를 짓기전에 우리에게 필요한 분은 누구이십니까?
대제사장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죄를 짓기전에 대제사장께서 오셔서 우리에게 말씀해주십니다.
아브라함이 그돌라오멜을 파하고 롯과 모든사람을 구원해서 돌아올때 누가 나왔습니까? 두사람이 나왔습니다.
하나는 소돔왕, 사단을 말합니다. 또 하나는 멜기새댁 살렘왕입니다.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소돔왕은 아브라함이 범죄하도록 유도했습니다. 그러나 멜기새댁은 뭐라고 했습니까? 우리 하나님께서 천지의 주재 이시며, 아브라함의 능력으로 이 전쟁에서 승리해서 돌아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이 모든것을 다 소유하고 계시고 그 모든것을 다 주시는 분이시다라고 했습니다.
소돔왕은 그가 탈환한 물자에 대해서 자꾸 인용하고 마치 자기가 주는것처럼 이야기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멜기새댁은 이 전쟁에서 이긴것, 이 모든것을 주신분이 하나님이심을 말했습니다. 그것은 기억했을 때, 소돔왕이 시험할때 그것을 넉넉히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대제사장은 우리가 범죄하기 전에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우리로 죄를 짓지 않도록 강건하게 만들어주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늘나라에 갈때, 요한일서 3장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분이 오시게되면 우리가 그분과 같게 될것은> 그분과 같게 될것입니다. 더이상 우리속에 죄가 없습니다.
하늘나라에 가게 될때, 죄없는 완전한 몸으로 하늘나라에 갑니다.
구원받고서도 우리에게는 아직 옛 사람이 있고 육체적으로 쇠약하고 나중에는 죽는 불완전함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로마서 8장이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 영혼이 이 세상에서 탄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오실때까지 탄식하는 것입니다.
모든 피조물들은 죽을수밖에 없는 이 상황의 굴레안에서 이제 탄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오시게 될때 우리도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늘나라에 갈때 우리에게 더이상 연약이 없습니다. 물론 그분께서는 하늘나라에서 여전히 멜기새댁의 반차를 좇는 대제사장으로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세상에서 필요로 하는 대제사장의 역할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시험에 빠질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것은 그때에는 더이상 불필요 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언약궤 안에 아론의 싹난 지팡이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제 광야를 지나가게 될때 만나를 필요로 했습니다. 만나는 광야에 들어가자마자 만나가 내리기 시작했고, 언제까지 만나가 내렸습니까?
만나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서 만나는 더 이상 없습니다. 만나는 광야에서의 음식 입니다.
거절 당하신 우리 주 그리스도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시고 승격되신 주님을 여호수아에서는 뭐라고 묘사하고 있습니까?
볶은 곡식으로 묘사합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때는 만나를 먹지않고 곡식을 먹습니다.
부활하신 주님, 승격하신 주님을 우리는 먹고 삽니다. 그러나 이땅의 광야를 통과하게 될때 우리는 거절 당하신 주님을 먹고 삽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 말씀을 읽게 될때, 이 말씀은 만나입니다.
이 만나를 우리는 매일과 같이 거두어서 먹고 사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영적인 광야입니다. 이 광야를 통과하게 될때 우리에게는 이 영적인 말씀이 매일과 같이 필요합니다.
매일과 같이 이 광야를 통과하면서 우리 마음을 부요케 해주고 우리 마음을 강건케 해주고 여러가지 시험과 시련과 환난과 어려움 속에서 우리로 하여금 세워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포기하지 않도록 해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우리 영혼을 신선케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우리는 매일과 같이 만나를 아침에 거두는 것처럼, 매일매일 하나님의 메시지를 우리가 받고 있나요?
그 말씀이 우리 하루를 인도하도록 허락해 드리고 있나요? 우리가 지금 만나를 먹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늘나라에 갈때 다른분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영광 가운데 계신, 승격하신 그 분을 우리는 얼굴과 얼굴로 볼것입니다.

그래서 이 궤가 성전안에 들어온다는 것은, 이것은 거절 당하고 그와같은 광야의 기간이 아닌 것입니다.
영원한 이 자리에 들어왔고, 천년왕국의 위대한 아름다운 기간을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성전의 모습 속에서 궤는 나타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오직 두 돌판만 있을 뿐입니다. 말씀만 있을 뿐입니다.

이제 저희들에게 이 위대한 말씀이 언제나 필요합니다. 이 말씀은 저희들이 하늘나라에 가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세상은 변합니다. 세상은 계속해서 변해가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변하지 않습니다.
점과 회고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합니다. 이 돌판의 말씀, 주님께서 이 땅에 계실때도 우리 주님께서는 항상 말씀을 마음속에 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것이 주님에게는 음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 승격되시고 영원토록 우리 주님께서는 이 말씀을 언제나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 주님의 마음속에 그 말씀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들이 끝나고 난 후에 10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제사장이 성소에서 나올 때에 구름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하매 (왕상8:10, 개역한글)

10절 말씀을 보면 성전이 완성되자마자 영광의 구름이 성전을 덮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전과 관련해서 언제 이 영광의 구름이 찾아왔습니까?
언약궤가 성전의 지성소안에 진입해 들어왔을 때, 그때 하나님께서는 만족의 표를 하고 계십니다.
성전을 보실대에 흡족하셨습니다. 성전 자체도 흡족하지만, 그 식양대로 되었지만, 이제 가장 중요한 것은 언약궤가 바른 자리에 들어가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전에서도 핵심은 언약궤입니다. 회막에서도 핵심은 언약궤입니다.
언약궤 없는 회막과 성전은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말씀을 우리 모임에 적용해 보십시요.
오늘날 성전은 성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곳은 모임입니다.
<두세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곳에> 주님께서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신약교회의 핵심과 본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기 존재하시는 것입니다. 임재 하시는 것입니다.
인재하시는데 그 임재를 우리는 느끼고 있는가요? 주관적으로 느끼고 있는가요?
그것을 느끼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경외심을 갖고 있는가요? 경외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주님 앞에서 합당하게 처신하고 행동하고 있나요?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고 있는 위대한 책임을 우리는 느끼고 있나요?
그러므로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을 주님앞에 드리게 되고 헌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이 있는가 하는것은, 신약교회의 핵심입니다. 모임의 성장과 발전과 모임의 모든 번영은 주님께서 여기 계시고 우리 주님이 꼐시다고 하는것을 내가, 모든 지체가, 교회안의 모든 성도 각인이 매일과 같이 느끼고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늘 느끼는것과 내일 느끼는것과 다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매일과 같이 느껴야 합니다.
강물이 흘러가게 될때, 거의 수면이 같습니다. 그래서 홍수가 있거나 가뭄이 없다면 거의 수면이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항상 강을 지나가면서 볼때 강은 그저 언제나 똑같은 강같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똑같은 강은 없습니다.
1분전에 흘러간 물은 그 물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흘러가 버립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 모습 같지만 계속해서 흘러가는 것입니다. 물은 동적인 것입니다. 다이나믹한 것입니다.
그러나 겉으로 보게 될때 그것은 항상 같은 수면입니다.
그러나 만일 물의 양이 훨씬 늘어난다면 어떻습니까? 우리는 홍수때에 그것을 느낍니다.
그러면 수면이 점점 올라갑니다. 그러나 만일 물양이 가뭄에 의해서 줄어든다면 수면은 내려가겠지요.
저는 모임의 번영을 그와같은 것으로 묘사하고 싶습니다.

우리 각인이 주님께서 여기에 계시다고 하는것을 실제적으로 얼만큼 느끼고 있느냐 하는것은 우리의 모임의 교제의 질을 결정해 주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만약 물이 조금씩 늘어간다면 수면이 점점 올라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임이 번영하는 것이겠지요.
어제 말씀을 통해서 주님이 여기 계시다고 하는것을 느끼는것과 오늘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 주님을 더 알게 될때, 여기 주님이 계시다는 것을 더욱 더 깊이 느낀다면, 우리 물은 점점 분량이 많아질것이고 수면은 점점 올라가고 모임은 전체적으로 번영하게 될 것입니다.
만일 주님께서 여기 계시다는 것에 대해서 내가 느끼는 것이 점점 시들해진다면 나는 세상에 더욱더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될것입니다.
주님외에 다른것에 생각을 빼앗긴다면 우리 모임의 수면은 점점 내려가게 될것입니다.

저희들은 오늘 언약궤가 성전에 들어오게 된 것을 보았습니다. 성전에 들어오게 될때, 하나님께서는 너무나 만족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의 구름이 성전을 가득 매웠습니다.
그 하나님의 영광의 구름을 세키나의 영광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히브리어 인데고 그것은 하나님의 거처라는 말입니다. 물론 성경에 세키나라는 말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술적으로 이 말을 잘 씁니다.
그것은 구름입니다. 눈에 보이는 구름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거기 거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백성에게 톡특한 현실이었습니다.
어떤 민족이 광야에서 인도하게 될때 구름이 그들을 인도했습니까? 어떤 민족에게 이와같은 일이 있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이것들 외에도 많은 특권들이 있었습니다.
말씀과 그들의 양자됨과, 메시아께서 그들에게 오시는것이며, 그들에게는 언약이 있고 약속이 있고 율법이 있습니다.
이 모든 특권들 중에 가지고 있는 것 하나가 영광입니다. 영광의 구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궤가 그 안에 들어왔을때, 영광의 구름을 보내시고 주님께서 거기 계시다는 위대한 사인을 사람들이 볼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다윗때부터 시작하여 다윗이 성전을 건축해 드리고 싶다는 소원을 하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그날 나단과 말하고 나서 나단이 왕이 만일 그러시다면 그렇게 행하십시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밤에 대화한 후에 나단이 정색하고 와서 다윗에게 와서 하나님께서 거절하셨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거절 하셨을때 다윗은 거절 당했습니다.
이 선한 뜻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거절 하셨습니다.
그리고 세월은 흘렀습니다. 다윗은 이 일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거절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할수 있는 모든일을 이 성전 건축을 위해서 그의 생애를 바쳤습니다.
그리고 나서 솔로몬에게 이 위대한 뜻을 전달했고 하나님의 이 위대한 뜻이 솔로몬 시대에,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네가 만드시 이것을 건축해야 한다는 것을 부탁했습니다.
솔로몬은 그것을 기꺼이 받았고 다년간 수많은 사람들과 왕들과 달인들과 건축자들과 많은노동자들과 감독들과 내각자와 수많은 사람들과 만나서 이 일을 추진해 왔습니다.
심지어 성전 건축에 있어서 자기 자신이 깊이 관여 했습니다. 감독했습니다.

이 모든일을 마치고 나서 이 성전이 완성되었을때 그 마음속에 있었던 감격은 어땠을까요?
그 감격은 말로할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우리 마음속에 깊은 관심과 또한 하나님의 분부라는것을, 부름이라는 것을 우리가 깨닫고 그것에 대해서 우리의 모든 영혼을 바치게 될때, 하나님께서는 거기서 역사하십니다. 그 일이 이루어질때 우리 마음속에 찾아오는 위대한 감격은 말로할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감격이 있을때 솔로몬 혼자만 감격을 느낀것이 아니었습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했습니다. 그리고 언약궤를 제자리에 모셔 드렸습니다.
그럴때에 하나님께서 인정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미소지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영광의 구름으로 그가 행한 일에 대해서 인정하는 표를 보여주셨습니다. 이제부터 봉헌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초막절이라고 하는 절기는 이스라엘 일곱절기중에 가장 즐거운 절기로서, 속죄절기 이후에 뒤에 따라오는 것입니다. 이 절기는 천년왕국을 말해주고 있고 과거에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어떻게 고생하면서 그 조상들이 광야를 통과 했는지를 그들은 항상 대대로 기억하면서 초막절을 지켰습니다.

뉴욕에 살면서 수많은 유대인들을 곁에두고 생활합니다.
수많은 회당들이 있습니다. 매년 거의 9월달이 되면 숙곳이라고 하는 초막절이 시작됩니다.
그때 그들은 지금도 회당 주변에 수많은 나무로 천막같은 것을 만듭니다. 그 안에 가서 한 주를 보냅니다. 물론, 매일같이 거기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아직도 그 다음세대와 자녀들과  후손들이 계속해서 그 일을 하고 있습니다.
원래 그 의미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이 그 땅에 들어가서 번영하고 광야 생활이 아니고 정착된 생활을 하게 될때, 가나안 땅에서 정착된 생활을 하고 좀더 안정되고 부유해 졌을때, 모세는 말씀했습니다.

"너희가 그 땅에 들어가서 좀더 부유해 질때, 좀더 안락해 질때, 너희는 너희 삶 속에 빠져서 너희 부유한 삶에 익사하지 말고 주님을 기억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와같은 성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려울때에 주님을 찾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슬픈것은 우리의 삶이 안정되면 우리의 생각은 조금씩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성정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 모압땅에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전에, 그의 백성들을 향해서 모세가 경고하게 하신 것입니다.
"너희가 만일 그땅에 들어가서 평안하게 잘 살때, 너희 마음이 즐거울때, 안락하다고 할때, 그리고 하나님의 복을 누리게 될때, 너희들이 받은 복에 집중하지만 복을 주신분을 망각하는 실수를 범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에게는 이와같은 성향이 있습니다. 우리가 평안해 질때 우리는 주님을 잊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다시 어려우면 그때 다시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다시 편안해지면 우리는 또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이와같은 불행과 비극을 겪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만일 편안해져서 하나님을 잊게 될때, 우리에게 반드시 찾아오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그와같은 상황속에 그대로 내버려두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경고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그의 후대들을 향해서 이 절기를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절기를 말씀하시면서 유월절도 항상 후대에 이야기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의미가 무엇인지 묻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그 어린 아이들이 유월절의 의미를 물을때에 너희는 항상 대대로 대답해 주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위대한 진리가 한대에서 끝나지 않고 계속해서 대대에 이어지도록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초막절을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고 그 절기를 두가지 의미에서, 과거는 이스라엘의 광야에서의 고통과 겸손함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그들은 항상 천막을 치고 살았습니다. 그들은 항상 이동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언제까지나 우리가 이와같은 생활을 해야 할까 하는 삶속에서 그들은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 세월을 절대로 잊지 말라고 하는것이 초막절의 의미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대한 복을 따라서 좀더 편안한 생활,좀더 안락한 생활을 하게 될때, 우리 마음속에 절대로 하나님꼐서 나에게 어떠한 분이셨는가를 잊지 않고 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위대한 은혜입니다.
또한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당부하신 위대한 책임을 우리가 이행하는 것이라 할수 있겠습니다.
그 일을 위해서 유대인들은 계속해서 초막절이 되면 그들은 안락한 생활에서 떠나서 초막속에 살면서 과거에 우리 조상이 어떤 길을 걸어왔는가를 상기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녀들에게, 또 우리 자신이 이와같은 일에 있어서 어떻게 하면 우리가 안락한 상황속에 들어간다 해도 여전히 우리가 하나님을 기억할수 있을까 라는 점을 모색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만일 우리 자신이, 우리 자녀들이 안락 속에서 하나님을 망각한다면 반드시 우리와 우리 자녀에게 찾아올 위대한 비극과 수많은 저주와 수많은 해악들이 기다리고 있다는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바로 이것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초막절에서 또 한가지의 의미는 앞으로 오게 될 위대한 천년왕국의 행복입니다.
그때의 기쁨입니다.
솔로몬의 성전은 모든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도래했을때 지은 것입니다.
다윗이 성전을 지을수 없었던 것은 그가 전쟁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평화가 깃들기 전에는 성전을 지을 수 없는 것입니다.
성전을 짓는다는것은 평화가 깃들었을때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대단히 명백한 진리를 얻을수가 있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입니다. 오늘날 성전이라고 한다면 그곳은 교회입니다. 모임입니다.

모임안에 평화가 깃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평화가 있어야 모임은 세워지는 것입니다. 여기 다툼이나 분열이나 싸움이나 시끄러운 소리와 소음은 모임과 합당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그가 전쟁의 사람으로 그가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원수를 제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태평성대가 이루어지고 그때에 성전이 지어집니다.

사실 솔로몬의 왕국은 천년왕국에 가장 근접한 이스라엘 역사에서 나타나 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어떤 시대에 천년왕국을 어떤시대에 천년왕국을 가장 근접하게 묘사하고 있습니까? 솔로몬의 시대입니다.
그때는 평화가 있고 분열이 없고 번영이 있고 부유합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성전이 지어졌습니다.
그리고 모든 세상의 왕들이 그들을 찾아 옵니다. 이스라엘의 명성이 온 세상에 퍼져 있습니다.
그것은 천년왕국을 대단히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솔로몬의 왕국은 불완전 합니다.
천년왕국과 비교할때는 불완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근사하다고 말할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의 왕국보다 더욱더 근사란 다른 왕 시대는 없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통일왕국이 있고 분열 왕국이 있고 수많은 왕들이 있었습니다만, 그와같은 왕국은 전에도 후에도 없었습니다.

솔로몬은 천년왕국의 이 위대한 그림을 그의 왕국의 시대에 이루고 있음을 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성전이 지어졌고 하나님의 영광이 깃들었을때 그는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자 하는, 성전을 주님앞에 드리고자 하는 마음을 표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12 그 때에 솔로몬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캄캄한데 계시겠다 말씀하셨사오나
13 내가 참으로 주를 위하여 계실 전을 건축하였사오니 주께서 영원히 거하실 처소로소이다 하고
14 얼굴을 돌이켜 이스라엘의 온 회중을 위하여 축복하니 때에 이스라엘의 온 회중이 섰더라
15 왕이 가로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찌로다 여호와께서 그 입으로 나의 부친 다윗에게 말씀하신 것을 이제 그 손으로 이루셨도다 이르시기를
16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내 이름을 둘만한 집을 건축하기 위하여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서 아무 성읍도 택하지 아니하고 다만 다윗을 택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였노라 하신지라
17 내 부친 다윗이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할 마음이 있었더니
18 여호와께서 내 부친 다윗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할 마음이 있으니 이 마음이 네게 있는 것이 좋도다
19 그러나 너는 그 전을 건축하지 못할 것이요 네 몸에서 낳을 네 아들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하리라 하시더니
20 이제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대로 이루시도다 내가 여호와의 허하신대로 내 부친 다윗을 대신하여 일어나서 이스라엘 위에 앉고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하고
21 내가 또 그곳에 우리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실 때에 저희와 세우신 바 여호와의 언약 넣은 궤를 위하여 한 처소를 설치하였노라
(왕상8:12-21, 개역한글)

여기 솔로몬이 하나님앞에 기도하기전에 나오는 기도가 나옵니다. 그리고 이 기도는 성경에 기록된 기도 중에 가장 긴 기도 입니다.
이 기도가 있기전에 솔로몬은 하나님의 앞에서 하나님의 위대한 섭리, 마음에 감사하고, 하나님의 주권에 감격하고 그의 백성을 축복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상 그의 아버지 다윗이 하나님께 전을 지어드리겠다고 했을 때 거절 했을때, 네 아들이 짓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하신 이 말씀대로 모든일이 이루어졌습니다.
여기 특별히 20절 말씀을 보면 <이제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대로 이루시도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솔로몬은 하나님 앞에서 "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 전을 다 지었습니다." 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대로 다 이루어졌습니다." 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 마음속에 지금까지 전 건축을 위해서 일한 많은 날들을 돌이켜보며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모든 은혜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은 왕이 되게 될때, 열왕기상 제일 첫페이지를 펴보면 그가 왕이 되기 직전에 대단히 위급한 상황속에 들어간 것을 알수 있습니다.
그의 형 아도니야가 반역을 합니다. 왕국은 대단히 뒤숭숭해지고 대단히 어려워 집니다.

그때 어떤 결정을 내릴것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 노쇠한 다윗은 실정을 알수 없었습니다. 그때 나단이 개입함으로 인해서 아도니야가 왕이 되는 일로부터 왕국을 구하고 하나님이 원래 말씀하신대로 솔로몬이 왕이 되도록 했습니다.
이 과정을 우리는 열왕기상 초반에서 보게 됩니다.
솔로몬은 그 즉위하기 직전, 그리고 즉위하고 난 이후에도 그를 반대하는 많은 세력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그의 왕국을 견고하게 할때까지 몇년이 걸렸습니다.
적어도 그가 성전을 건축하는것은 그가 즉위한지 4년이 지난후 입니다.
그의 아버지가 죽기전에 유언을 남기고 그를 위해서 기도했고 당부했습니다. 많은 것을 준비했고 식양까지 받아서 그에게 전달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을 받았을때 그 마음 속에 가지고 있었던 깊은 책임이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이 책임감은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말씀을 꼐시해주게 될때 우리 마음속에 책임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의 것에 대한 책임감이 없다면 우리는 주님을 위해서 살아갈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읽게될때, 무엇을 읽게되는 것입니까?
첫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위대한 특원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얼마나 위대한 특권을 주셨습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지요. 영생을 얻게 하셨지요.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는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고 그 외에 하늘의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 복을 우리가 누리고 영적인 싸움에서 우리가 싸워야 합니다.
우리에게 위대한 특권이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에게 위대한 목자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대언자가 계십니다. 또한 대제사장이 계십니다. 우리를 지원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위대한 특권입니다.
전에 우리가 경험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구원받고 난 이후에 이와같은 특권을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씩 발견해 나가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셨을 뿐 아니라 우리를 지체로 부르셨고 주님 앞에 갈때까지 이 땅에 어떻게 살아가야 할것인가에 대한 수많은 책임들이 있습니다.
이 책임을 위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드리고 우리 주님 앞에서 어떻게 헌신해야 하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언약궤가 성전에 들어왔을때, 그 위대한 영광이 그들 가운데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셨다는 것을 솔로몬이 알게 된 이후부터 봉헌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본헌이라고 하는것은 성전을 하나님 앞에 헌신해 드리는 것입니다.
성막에는 기름부음받는 대상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제사장들입니다. 일꾼들입니다. 사람이 기름부음 받았습니다. 또 하나는 기구들이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기름부음을 받는다고 하는것은 주님앞에 드려지는 것입니다.
사람도 드려지고 기구들도 드려졌습니다. 그리고 이성전이 주님앞에 드려지는 것입니다.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입니다.

첫째로 우리는 신명기 말씀에서 가나안 땅에 들어오기 전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약속의 땅에 들어가면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하신 그곳에 나와서 제사를 드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에 들어갔을때, 이스라엘 백성이 기억할것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내 이름을 두는 곳> 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항상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처음 들어갔을 때 실로에서 회막이 세워졌고 거기에 하나님께서 거하고 계셨습니다.
그 이후 수많은 우여곡절 속에서 그 장소는 놉으로 변했고 그 장소는 기브온으로 바뀌었고, 이제 거기서 있었던 모든 기구들과 그리고 궤는 예루살렘에 와 있었습니다.
휘장속에 있었습니다. 이 모든것이 성전으로 옮겨왔습니다.
궤가 그 자리에 들어갔습니다. 우리는 이 성전을 보게 될때, 주님의 이름이 계신 곳입니다.

왜 주님의 이름이 계신 곳입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부르셨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구원의 하나님입니다. 그분만이 인류를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통해서 이 위대한 구원자,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을 이방 사람들이 알고 구원을 얻을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누리고 있는 이 위대한 특권을 그들도 함께 누릴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부르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본심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어떻게 타락 했습니까?
"우리가 특권을 가진 하나님의 선민이고 이방사람들은 개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대단히 이기적이고 육적인 생각입니다.
이와같은 상황 속에서 이스라엘은 어디로 변질해 버립니까? 나중엔 우상숭배를 해버립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방사람들의 본이 되는것이 아니라 이방사람들이 걸어가는 길을 이방사람들이 따라 갔다고 하는것, 그것이 그들의 멸망의 근거입니다.

우리가 성전을 짓게 될때, 이와같은 하나님께서 오랫동안 가지고 있었던 생각을 기억해야 합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게서는 이 전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이 전을 통해서 어떻게 세상으로, 살아계시고 유일하신 하나님께서 어두움 가운데 있는 이방 백성들에게 이 위대한 빛이 파고들어갈수 있을까 하는것을 하나님께서는 생각하고 계셨습니다.
이와같은 전이 다 완성이 되고 궤가 재자리에 들어갔을때,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오랫동안 생각해 오고 계획해 오셨습니다.
전쟁의 수많은 날들이 지나가게 될때, 하나님은 계속해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다윗이 이 모든 적군들을 제압하고 태평성대가 이루어질때가지 성전은 건축될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솔로몬이 즉위한 다음에도 그는 즉위하자마자 바로 성전을 건축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먼저 하나님께 지혜를 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나라를 견고하게 할수 있도록 먼저 토대를 쌓았습니다. 그리고나서 제 4년에 성전건축을 하는 이 위대한 일이 시작이 되었습니다.
7년 반 만에 이루어 졌습니다. 그리고나서 11개월 이후에 궤가 들어오고 이제 봉헌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카렌다가 있습니다. 그 달력은 하나님의 뜻대로 계속 가는 것입니다.
그 카렌다대로 하나님은 그뜻을 이루시는데, 솔로몬이 바로 그 시점에 섰습니다.
성전이 지어지고 모든것을 다 주님께서 이루셨는데 그 위대한 주님의 뜻이 이루어 졌으므로 그의 부친 다윗을 대신해서 솔로몬이 즉위했고 이제 하나님의 뜻대로 성전을 지었고, 여기에 주님의 이름이 있다고 하는것을 그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모임을 생각할때 우리는 여기에 주님의 이름이 여기에 있다는 것을 마음속에 깊이 생각하고 마음속에 세기고 있습니까? 모임에 오게 될때, 우리의 자세가 모임에 와서 얼마나 즐겁게 하고 갈까 라고 그렇게 생각한다고 한다면 우리는 모임을 제대로 건설할 수 없습니다.
모임에 하나님께서 주신 수많은 특권들이 있습니다.
그 특권들 때문에 우리에게 즐거운 많은일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것 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세상에서 누릴수 없는 놀라운 것들을 주셨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누려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누리기 위해서 하나님꼐서 계시로 주신 이 위대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 마음속에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 중에 가장 근본적인 책임은, 모임과 관련해서 여기에 주님의 이름이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여기에 이름을 두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이름을 여기에 두셨기 때문에 그 이름에는 영예가 있습니다. 그 이름에는 위엄이 있습니다. 그 이름에는 생명이 있고, 그 이름에는 복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분의 영예가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그 이름이 사람들 가운데 전파될수 있도록, 가장 효과적으로 전파될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복음을 전파할때 복음은 디모데서에 있는 말씀과 같이 그것은 영광스러운 복음의 메세지 입니다. 사람들을 살리는 메세지 입니다.
사람들이 세상에 눈을 두고 이제 멸망해가는 세상이 어디로 흘러가는지를 알지 못하는, 사단에게 굴레씌워거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을 우리가 말씀의 복음의 빛 으로 직시하게 될때, 우리는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복음을 그냥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영광스러운 복음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이름이 여기 있다는 것을 생각할때, 이 복음은 그냥 복음이 아니고 영광스러운 복음입니다.
이 복음의 말씀에 사람들이 주님앞에 엎드리게 될때, 놀라운 생이 변화되고 새로운 삶이 시작됩니다. 우리는 유한안 이 세상에서 죽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위대한 영생을 우리가 누리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 가운데 있게 됩니다.
하나님이 원래 우리 가운데 두셨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던 사람들입니다.
죄로 인해서 그 형상이 바래졌지만, 복음을 통해서 거듭나게 될때, 사람들은 하나님의 위대한 생명 속에서 신선하게 살아갈수 있고 앞에 있는 위대한 소망을 위해서 살아갈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영광스러운 복음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진리는 영광스러운 진리입니다. 이 진리는 우리를 살리는 것입니다. 이 진리는 우리를 살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 진리는 우리로 하여금 시간 낭비하지 않고 살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 진리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질서있게 살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 진리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은 주님을 바라보고 삶으로 우리 자신에게 위대한 행복과 우리 자손에게 위대한 행복을 안겨줄 수 있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아니고서는 수많은 사람들은 가치관을 잃어버립니다. 이 세상의 흐름속에서 표류하게 되는 것입니다.
가장 슬픈것은 구원받은 성도도 세상에 눈이 쏠리게 될때, 이 세상의 강력한 흐름 속에서 표류하고 떠내려가게 된다면 슬픈 것입니다.
그와같은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 이것을 우리 마음속에 영광스럽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이 여기 있고 주님의 이름을 여기 두셨다는 것을 생각할때, 우리는 모임에 우리가 모이게 될때, 주님의 위대한 이름이 어떻게 밖으로 전해질까, 우리의 집합적인 간증이 위대하게 드러나게 될까하는 점에 대해서 우리는 깊이 기도하고 주님의 말씀에 대해서 주님의 은혜를 구하고 살 것입니다.
여기 솔로몬은 성전 건축이 완성되고 봉헌하게 될때, 초막절을 당해서 너무나 절기 기간 중에  그는 하나님 앞에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돌아서서 그의 백성을 향해서 축복합니다. 그리고 아버지 다윗을 향해서 말씀했던 하나님의 이 모든 약속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대로 이루어 졌다고 하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성전을 건축하게 될때도 하나님께서는 친절하게 그에게 두번째 나타나셔서 '너는 절대로 하나님의 말씀과 법도와 율례를 잊지말라, 그것을 순종하라'라는 것을 다시한번 강조해서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주님 섬겨야 할지, 어떻게 주님과 동행해야 할지,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찾아와서 그렇게 친절하게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는 그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불과 얼마 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완성된 성전을 생각하면서 오래전에 모세가 그 땅에 들어가서 주님의 이름을 둘곳이 있는데 거기서 제사를, 희생제물을 드리기 위해서 너희들은 그곳으로 모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그 위대한 일이 회막과 휘장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던 영구한 구조입니다. 아름다운 전입니다.
비록 성전은 이방신전과 달라서 스케일이 작습니다. 이방신전과 비교해서는 너무나 작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은 너무나 고귀한 곳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수많은 신전들이 있지만 이곳에서 만큼은 살아계신 하나님이 여기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광의 구름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마음에 감사하면서 주님앞에 그의 마음에 복받쳐오르는 감사, 감격, 그것을 주님 앞에 말씀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는 이 말씀을 끝내고 나서 기도에 들어갑니다.

이 기도는 아까도 말씀드린 것처럼 성경에 기록된 수많은 기도 중에 가장 긴 기도입니다.
이 기도속에 그는 일곱가지 하나님 앞에 탄원을 합니다.
이 탄원속에 담긴, 여러가지 일들이 있습니다. 앞으로 이 백성들 가운데 있게 될수 있는 가능한, 여러가지 가능성을 그는 하나님 앞에 말씀 드리면서 하나님 앞에 탄원 합니다.
이 기도는 나중에 수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이 말씀을 인용하고 이 말씀을 마음에 둘수있는 바로미터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표준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을 안내하는 내용이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니엘이 바벨론에 가서 그가 하나님 앞에 기도할때, 하루에 창을 열고 세번씩 기도하게 될때, 예루살렘을 향해서 기도하게 될때, 그는 이 기도의 내용을 마음속에 두고 기도했습니다.
기도가 다른사람의 기도의 표준이 된다고 하는것, 기준이 된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것입니다.

시간이 가서 저희들이 여기서 마쳐야 하겠습니다.
내일은 솔로몬의 이 위대한 기도, 봉헌때에 드렸던 위대한 기도 그 기도는 솔로몬 마음속에 있었던 지혜와 하나님 앞에 의존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드렸던 기도이며 그의 민족의 미래를 내다볼수 있었던 기도 였습니다.
이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어떻게 응답하시며, 그의 후대를 향해서도 어떻게 답변하실 것인가 하는 하는것을 저희들은 기대할 수 있습니다. 이제 이 기도가 저희들에게 교훈해주는 수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오늘 저희들은 언약궤가 성전 건축 완성후에 들어온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 언약궤가 고귀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거기 거하셨고 주님이 바른 위치에 모셔 졌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인데, 오늘 저희들이 주님의 이와같은 말씀을 생각할때에 저희들이 주님 앞에서 개인적으로는 주님을 저희들의 마음속 지성소속에, 마음에 있는 주님의 보좌에 주님을 앉혀드려야 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그것은 위대한 특권입니다.
또한 가정의 가장 깊은 지성소에 우리 주님이 앉아 계신가요?
모임의 가장 깊은곳에 주님께서 합당한 위치에서 합당한 권위를 가지고 앉아 계신가요?
그것을 우리 각인은 매일과 같이 느끼고 사는가요?
그것은 저희들 마음속에 주님 앞에서 항상 검토해야 하는 주제라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저희들을 계속해서 복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