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찬 형제님/성도 말씀

그리스도인의 욕구

박이레 2021. 12. 23. 18:15

2021년 12월 19일 일요일 / 강성찬 형제님
< 그리스도인의 욕구 >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요일 2:15-16).

여기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이 세상의 실체에 대해서 보게 됩니다. 이 세상의 실체는 16절에 기록된 것처럼,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입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이 세상으로부터 좇아 온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에 대해서 생각할 때에 어떤 특별한 장소가 세상이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우리가 '아, 저기는 그리스도인들이 갈 만한 장소가 아니지.'라고 생각하는 장소가 있습니다. 물론 그러한 장소에서 특별히 세상적인 것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장소가 아니라고 해서, 예를 들어서 이런 교회 건물이라고 해서 그 가운데 세상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은 여기 기록된 것처럼,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 교회 건물 안에 들어와서 자신을 높인다면, 그 이생의 자랑을 추구한다면, 그는 이 세상을 교회 안에 끌고 온 것이고, 그리고 여전히 세상 가운데 세상을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잘 살펴봐야 됩니다. 참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이고 안목의 정욕이고 이생의 자랑인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 '육신의 정욕'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내부에서 일어나는 강한 욕구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욕구들이 육신의 정욕은 아닙니다. 특별히 여기서 '육신의 정욕'이라고 했을때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는,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자신을 위한 육신적인 강한 욕구를 특별히 육신의 정욕이라고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목의 정욕이라고 했을때는 외부에서 들어오는 자극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강한 욕구를 말하고 있습니다. '육신의 정욕'은 '내적으로 생겨나는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강한 욕구'이며 '안목의 정욕'은 '내 눈을 통해서 밖에서 들어오는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강한 욕구'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생의 자랑'은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높은 대우를 받아야 된다는, 그런 욕망', 그것을 이생의 자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이 세가지 것을 장려하고 있습니다. "너의 요국대로 살아라." "너의 눈에 좋아 보이는 것을 취하라." "네가 더 위대해 보이는 그런 일을 해라." 이런 것들이 세상이 말하고 있는 바입니다.
하지만 17절에 나와 있는 것처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7).

그것은 금방 지나가 버리고 말 것이라는 것, 그것은 지금 당장에는 우리 눈에 좋아 보이지만 그것은 신기루와 같이 금방 사라져버리고 말 것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말씀들을 통해서 그런 신기루와 같은 세상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좇고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기를 바라게 됩니다. 그런데 이 세상은 그런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가득 차 있는데, 참 이 말씀을 읽으면서 내 자신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내 안에는 어떤 욕구가 있는가?' 생각을 해 보았는데, 내가 가지고 있는 욕구들도 대부분이 그런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욕구들이 정말 나를 위한, 그런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그리고 나를 높이고자 하는 이생의 자랑, 그런 것들이 강하게 내 안에서 일어나고 있지 않은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왜 그런 욕구들이 내 안에서 있는 것일까? 그런 욕구들을 빼면 어떤게 남는 것인가? 그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욕구들을 가지고 살아가는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 나와 있는 '정욕'이라는 단어가 다른 성경에서는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찾아보았습니다. 여기 나오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이라는 단어가 성경에서 대부분 부정적으로 사용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그러한 정욕으로 사용이 됩니다. 그런데 간혹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된 것이 있었습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인의 경우에 있어서 그리스도인이 가지고 있는 긍정적인 욕구로 사용된 것이 딱 두번 나왔습니다. 그 두번을 한번 살펴보려고 하는 것인데요.

"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살전 2:17).

여기 '열정'이라고 나와 있는 단어가 앞에 나와 있는 '정욕'에 해당하는 같은 단어인데요. 그 단어보다 열정이라는게 원어에서는 두 단어로 되어 있습니다. 그레이트라는 단어가 붇어서 '큰 강한 욕구' 그러니까 육체의 정욕보다 더 큰 걸로 써져 있는 것이죠.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이 가지고 있는 첫번째 긍정적인 욕구 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다른 성도의 얼굴 보는 것을 열정으로 더욱 힘썼다고 되어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보기를 강하게 소원했습니다. 왜냐하면 2장 7절에 보면 "오직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 사도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마치 자신의 자녀처럼, 복음으로서 낳고 그들을 길러왔습니다. 그런데 그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어려움에 처해 있다는 소식을 들을 때에, 핍박 가운데서 그들이 고난 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을 때에, 그들을 다시 만나서 그들의 믿음을 채워주고 보호해주고자 하는 강한 열망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다른 성도를 향한 사랑이 그리스도인이 가지고 있는 첫번째 강한 욕구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찐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빌 1:22-23).

여기 보면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앞에 있는 정욕과 같은 단어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이것이 더욱 좋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강하게 소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앞에 데살로니가전서에서는 성도를 만나서 그의 얼굴을 보는 것을 강하게 소원하고 있었고, 여기서는 그리스도를 만나서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는 것을 강하게 소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가지고 있는 두번째 긍정적인 강한 소원은 주님의 얼굴을 뵙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가지고 있는 강한 욕구입니다.
그래서 사실 긍정적으로 명사로서는 딱 두번 밖에 사용되지 않았지만, 이것이 우리에게 많은 의미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게 사실 그리스도인들이 가지는 좋은 욕구를 대표적으로 말해주고 있는 그 두가지 예입니다. 하나는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성도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긍정적인 그런 소원이 다 이 두가지 카테고리 안에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같은 단어인데도, 이와 같이 정 반대로 사용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구약에서도 그러한 예를 찾아볼 수가 있는데요. 한가지 가인에 대해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창 4:5-6).

여기 특별히 가인이 자신이 준비한 자신의 행위를 나타내는 그런 제물이 하나님께 인정되지 않자, 그는 심히 분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분하다고 하는 것은 육신적인 그런 정욕과 감정의 대표적인 것이죠. 그런데 이 분하다는 단어가 구약 성경에서 대부분 안 좋게 사용되는데, 긍정적으로 사용된 부분이 한 군데 있습니다.

"그 다음은 삽배의 아들 바룩이 한 부분을 힘써 중수하여 성 굽이에서부터 대제사장 엘리아십의 집 문에 이르렀고"(느 3:20).

여기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벽을 만드는 사역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성벽을 다시 만들때에 사람들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는 내가 쌓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는 다른 사람이 쌓고 이렇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전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되어 있는데, 이 20절에 삽배의 아들 바룩은 자기가 맡은 부분을 "힘써서 중수하였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힘썼다는 것이 아까 "가인이 분노하였다." 그 분노와 같은 단어입니다. 그 뜨거운 마음으로 열정으로 중수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맡은 부분을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서 힘써서 중수한 것입니다. 그는 가인과 같은 그런 육체의 정욕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정 반대의 특별한 그 뜨거움을 가지고 그 일을 담당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의문을 생각하게 됩니다. 과연 어떠한 차이가, 무엇이 이러한 차이를 만들어 냈는가? 왜 어떤 사람은 그냥 육체의 정욕이고, 왜 어떤 사람은 하나님과 성도를 사랑하는 열정이 되는가? 이것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다시 신약으로 가셔서 에베소서 2장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 2:1-3).

여기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 구원 받지 않은 사람들, 거듭나기 전의 사람들의 상태의 사람들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허물과 죄로 죽어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제 사람들이 보기에는 살아서 움직이고 있다고 말하지만, 하나님에 대해서 반응하지 못하는 상태이기 때문에 그들은 허물과 죄로 죽어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의 현재 상태입니다. 그들의 상태는 "세상 풍속을 좇고", 세상에서 좋다고 말하는대로 그것을 좋다고 여기고 다 따라하는 것이죠. 그리고 안목의 정욕대로 따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공중의 권세잡은 자를 따랐으니" 이것은 지금 사단이 공중의 권세 가운데서 우리에게 역사하고 있습니다. 아직 하나님을 믿지 않은 자들에게 그 사단의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어떤 점에서 그러냐면, 불순종하는, 하나님께 대하여 불순종하고 모든 권위에 대해서 대항하는, 그 불순종하는 영 가운데서 사단은 구원받지 않은 자들을 이끌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직 믿지 않은 분들은 지금사단의 영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라고 말씀드리면 대게 인정하지 않으면서 "아니 그게 무슨 말인가? 아니 내가 왜 사단의 영향력 아래 있단 말인가?" 라고 이렇게 말씀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사단의 영 아래 있다는 증거가 있습니다. 그것은 내 마음 속의 모든 권위를 대항하는, 그 불순종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부모님이 뭐라고 할 때에, '왜 꼭 그렇게 해야 해?' 라고 불순종하는 마음, 선생님이 말씀하실 때에 불순종하는 마음, 그리고 정부와 나라에서 그 권위를 가지고 하는 것에 대해서 불순종하는 마음, 그리고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불순종 하는 마음, 이것이 바로 사단의 영 가운데 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이제 이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3절에 나와 있는 것처럼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 육체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 가득 찬, 오직 그런 욕구만 있는 사람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들은 육체가 원하는대로 아무런 저항없이 하는데 마음의 거리낌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러한 사람들이 구원받았을 때에 어떠한 일이 일어나냐면, 1장 13절을 보겠습니다.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엡 1:13).

여기 우리가 구원의 복음 말씀을 들었을 때, 여러분이 구원의 복음 말씀을 들었고, 그리고 그것을 믿는다면 약속의 성령님으로 인침을 받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성령님을 여러분이 인침을 받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인쳤다고 하는 것이 도장을 찍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의 소유다, 라고 도장을 찍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떠한 도장을 찍느냐면 거룩하신 성령님을 그 믿는 사람의 마음 속에 내주하게 하심으로 도장을 찍는 것입니다. 믿을 때에 성령께서 임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그는 완전히 다른 욕구를 가지게 됩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 갈라디아서로 가서 보겠습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6-17).

여기보면 "소욕"이라는 말이 17절에 나오는데요. 이것이 우리가 계속 보고 있는 '정욕'이라는 단어와 같은 단어입니다. 육체의 정욕이 있는데요. 또한 성령의 소욕이 있습니다. 여기서는 성령께서 강하게 소원하시는 것, 성령께서 강한 욕구가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그 성령님의 강한 욕구를 이제 자신의 새로운 욕구로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래는 그 육체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만이 가득찬 사람이, 가인처럼 분내는 사람이, 이제는 성도를 사랑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그 욕구를 가진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 바룩과 같이 열정을 가지고 하나님과 성도를 섬기는 일을 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여기 보면 16절에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 말씀을 우리가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분들은 이 16절 말씀을 이렇게 잘못 이해하는 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육체의 욕심을 느끼지 아니하리라.' 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구원 받으면 육체의 욕심을 느끼지 아니하리라, 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구원 받은 다음에는 이제 더 이상 그런 죄된 욕망을 느끼지 않겠지, 라고 생각하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바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 몸이 주님 오실 때에 변화될까지, 그 영광스러운 몸을 입을 때까지, 그런 욕구는 계속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성령을 좇아 행할 때에 그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을 좇아 행한다면, 성령의 욕구를 따라간다면, 우리는 그 육체의 정욕을 이루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성경이 약속하는 바 입니다. 우리가 구원 받으면 욱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을 것이다, 라고 그렇게 생각하는 분들은 성화에 대해서 잘못 이해하고, 그리고 잘못된 시도들을 하게 됩니다. 구원받았으니까, 더 이상 그런 욕망을 느끼지 않아야 돼, 하면서 금욕주의로 나가기도 하고 그리고 그것이 실패하여 다시 마음 속에 그러한 욕망이 들 때에, 오히려 낙심해서 그 믿음에서 떨어져 가게 되는, 그러한 잘못된 결과로 나아가게 됩니다. 하지만 이 성경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잘 보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우리가 성령을 좇아 행할 때에,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는 것을, 우리 마음 속에 다른 생각이 든다 할지라도, 그것 보다도 우리가 그 성령님의 욕구를 따라갈때에 그 육체의 정욕이 작아지고 더 이상 나에게 힘을 못쓰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그 육체의 욕구대로 행하지 않는 것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성령님을 좇아 행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 성령님께서 그러면 어떻게 우리로 하여금 인도하시는지,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 그 성령님의 욕구를 가지고 따라오게 하시는지를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26).

여기 요한복음 14장에서는 주님께서 이제 십자가 사역을 이루신 후에, 승천하사 성령님을 아버지께로부터 받아 우리에게 보내실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는 자에게 성령님께서 내주하실 것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성령께서 무슨 일을 하시냐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을 생각나게 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님께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 마음 속에 생각나게 하시고, 그래서 그 말씀으로 말미암아 그 말씀에 우리가 동의하게 하시고, 그것을 소원하게 하시고 강한 욕구를 가지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 마음 속에 생각나게 하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그 성령님의 욕구를 블러 일으키시고, 동의하고 따라오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해야 될 일은, 성령님께서 우리 마음 속에 그러한 마음을 불러 일으키실때에 그것을 순종하는 마음으로 따라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해야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 특별히 말씀 언급하고 싶은 것이, 이 성령님의 이름을 "보혜사"라고 언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분을 "보혜사"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한문으로 되어서 조금 어려운 단어인데요. '보호하고 은혜를 베푸는 분'으로 보혜사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원어적인 의미로서는 성령님께서는 우리 옆에, 우리가 도움이 필요할때 불러서 그래서 도와 주러 우리 옆에 계시는 분으로, 보혜사라는 원어 단어가 말해주고 있는 의미입니다. 성령님께서는 '바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도와 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영어로는 '위로자'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 옆에서 우리를 위로해 주시는 분, 그래서 우리가 첫번째 복음 시간에는 우리를 위로하시는 분, 그리스도에 대해서 보았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성경은 보혜사, 같은 단어로 보혜사, 대언자, 위로하시는 분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성령께서도 우리를 위로하시는 보혜사, 위로자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위로해주시는데 그것을 앞에 말씀드린 것처럼, 말로만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위로를 실제로 이루어 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성령께서도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말씀을 듣게 하시고, 그게 우리의 위로의 말씀이죠. 그리고 그 말씀이 실제로 이루어지게끔 하는, 도와 주시는 분입니다. 그게 보혜사라는 단어에 들어 있는 뜻입니다. 바로 이러한 것들이 우리에게 참된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 그리고 성령님으로 말미암은 구원 받은 이후의 삶,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 참된 위로가 되는 것이고 또 이런 것들을 이루어 주시는 분이 그리스도시요, 또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이제 그 성령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소원을 갖게 하시고 성도를 사랑하고 주님을 사랑하게 하십니다. 성도를 사랑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 예로 몇가지 말씀을 본 후에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디모데전서 3장 1절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서는 정욕이라는 단어가 동사로 '사모한다'라는 단어로 사용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이러한 선한 소원을 가지고 있는 것이죠.

"미쁘다 이 말이여,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하면 선한 일을 사모한다 함이로다"(딤전 3:1).

여기서 성도를 사랑하는 소원을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성도를 사랑하는 소원이라고 하는 것은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단지 어떤 높은 직분을, 높은 자리를 얻으려는 것이 아니라, 성도를 사랑하는 것은 그를 섬기고 그에게 유익이 되는 그 일을, 그 선한 일을 하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선 성도를 사랑하는 욕구에 대해서 첫번째가 그에게 필요한 선한 일을 하기를 바라는 것, 그것을 생각되게 됩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6장을 가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히 6:11-12).

여기서 '간절히 원하다'는 것이 정욕, 강한 욕구를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여기서 사도는 뭘 강하게 원하고 있느냐면, 그 성도들 각 사람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 성도들 각 사람이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런 사람을 본 받는 것, 그런 본 받는자 되는 것이 이 사도가 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성도를 사랑하는 욕구는 또한 이것입니다. 그 성도가 보다 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는 것, 이것이 우리가 바라는 것이고 성도를 사랑하는 것임을 보게 됩니다.
그럼 주님을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 주님의 얼굴을 뵙기를 소원하는 것은 우리가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는 소원이므로 쉽게 이해가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언제라도 주님을 만나 뵙기를 바라게 됩니다. 그런데 그 주님을 뵙기를 바라는 것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고후 11:2).

지금 하늘에 계신 주님을 만나기를 소원하는 것은, 마치 약혼한 신부가 결혼식에 신랑을 만나기를 바라는, 그것을 기다리고 있는 그러한 소원이라고 사도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결혼을 앞두고 있는 신부가, 결혼식을 기다리고 그 신랑을 만나기를 원하는 소원, 그 소원 가운데서 어떻게 하고 있는지를 사도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열심으로, 정결하게, 주님을 만날 때까지,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해서 정결하게 있는 것입니다.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고후 11:3).

오직 우리 마음이 그리스도만 향해 있도록, 다른 것이 섞이지 않도록, 그 일편단심의 마음으로 그 분을 기다리도록 열심하고 있다는 것을 사도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가 모두 주님을 만나보고 그 날을 소원하고 있지만, 또한 그러한 욕구를 가지고 있다면,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만을, 그 분 만을, 다른 것에 시선을 두지 아니하고 그리고 그리스도를 더욱 잘 알아가고, 신랑에 대해서 더욱 잘 알아가고, 다른 복음과 그리스도에 대해서 잘못 전파하는 다른 교리에 더럽혀지지 아니하고, 오직 그리스도만 향하고 깨끗하게 우리를 지키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들을 살펴보게 될 때에, 저에게 있어서도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우리 마음 속에 여러가지 그 구원받기 전에 가지고 있었던 다른 욕구들이 있지만, 이제 우리를 구원하실때 거룩하신 성령님을 우리 안에 두시고, 그래서 우리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욕구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주님을 사랑하고 다른 성도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계속해서 우리로 주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고 그 욕구를 불러 일으키십니다. 그리고 그런 소원을 따라 행하기를 원하고 계시고 그것이 우리의 책임인 것을 보게 됩니다. 참으로 이러한 말씀들을 통해서 우리 모두가, 도 오늘 하루도 성령을 좇아 행하고, 계속적으로 성령을 좇아 행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그런 우리의 삶을 드리는, 그런 대전중구 모임의 성도님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