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헤미야 07. 자백과 기도, 그리고 언약
< 느헤미야 07. 자백과 기도, 그리고 언약 > 2013년 / 정형모 형제님
"그 달 이십 사일에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여 금식하며 굵은 베를 입고 티끌을 무릅쓰며 모든 이방 사람과 절교하고 서서 자기의 죄와 열조의 허물을 자복하고 이 날에 낮 사분지 일은 그 처소에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낮 사분지 일은 죄를 자복하며 그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는데 레위 사람 예수아와 바니와 갓미엘과 스바냐와 분니와 세레뱌와 바니와 그나니는 대에 올라서서 큰 소리로 그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고 또 레위 사람 예수아와 갓미엘과 바니와 하삽느야와 세레뱌와 호디야와 스바냐와 브다히야는 이르기를..."(느 9:1-5).
어제 저희들이 8장 말씀에서 수문 앞 광장에 모여서 에스라의 말씀을 낭독하는 것을 듣고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울며 나왔을때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라. 이렇게 말씀하심으로 그들 가운데 하나님 말씀을 더욱 더 찾고 초막절을 지키되 하나님 말씀 안에서 더욱 더 철저히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초막절을 이와 같이 지킨 적이 없다고 할 정도로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크게 기뻐하고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또한 낭독하는 것을 듣고 모였던 모습들을 저희들이 봅니다. 초막절이 7월 22일까지 지속되었고요. 성회까지 다 마쳤습니다. 9장 1절 말씀을 보면 이틀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놀라운 변화가 있습니다. 그들이 이제 모여서 굵은 베를 입고 티끌을 무릎쓰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이해하게 될때 그 말씀에 순종하게 될때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 것이죠. 그때 그들은 하나님께 말씀을 드리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저희로 하여금 하나님께 말씀을 드리게 합니다. 왜냐하면 저희가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리고 하나님께 말씀을 드리는, 이것이 언제나 순서이기 때문이죠. 여기 놀라운 것은 수문 앞 광장에서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음 속에 커다란 감동, 또 변화, 그리고 하나님 앞에 합당한 반응, 그리고 기뻐함, 순종, 이런 것들을 그들이 경험 했을때에 9장에서 놀라운 기도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이 기도는 자백의 기도입니다. 그들은 이제 하나님 말씀으로 인해서 잠깐동안 흥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때로 우리는 우리 감정적으로 잠깐 건드림을 받아서요. 잠깐 심령이 이제 흥분하거나 그래서 우리의 열정이 조금 있다가 사라져 버리는 그런 것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느헤미야서 9장 말씀에 보면 이제 성회가 다 끝난 22일 후에, 24일 이틀 후에 그들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또한 듣습니다. 그들은 또한 기도합니다. 그들의 태도를 보면 1절에 "다 모여 금식하며 굵은 베를 입고 티끌을 무릎쓰고"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서 잠깐동안 흥분이 아니라 확고한 변화가 있었습니다. 첫째 그들의 모양에서 변화가 있습니다. 굵은 베를 입었습니다. 그것은 내적인 회개를 외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겠어요? 또 티끌을 무릎쓰고 있었다. 그들 마음 속에 심령에 슬픔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게 될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기쁨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읽게 될때 저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못한 것에 대한 슬픔이 있습니다. 이들이 굵은 베와 티끌을 무릎쓰고 모였고 그들의 모양이 변했습니다. 또한 그들의 행동에서 그들의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금식하고 있습니다. 영적인 문제에 그들은 몰두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이방인들과의 절교, 그들은 성별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사실 상 느헤미야서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성벽 아닙니까? 성벽은 성별 아니겠어요? 성별, 그들은 이방인들과 절교했습니다. 그것은 본래 하나님의 뜻 아닙니까? 왜냐하면 이방인들과 교제를 함으로 인해서 그들의 간증은 사라지고 하나님을 드러내는 길이 막혀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고 그것은 율법의 말씀에 잘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이제 그들이 에스라의 이 율법 말씀을 들었을때 그들은 깨달았습니다. 이방인과 절교함으로 인해서 그들은 성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 다음에 자기의 죄를 자복하고 있다, 라고 9장의 서두는 시작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의 죄와 열조의 죄를 하나님 앞에 자복합니다. 효과있는 기도는 그것은 자백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오게 될때 우리가 우리 마음 속에 있는 참된 변화를 가지고 주님 앞에 나오게 될때, 그리고 하나님 앞에 정직할때, 그래서 자복하게 될때, 여기 놀라운 기도의 역사가 있습니다. 9장의 기도가 위대한 것은 그들이 이와 같은 자세로 주님 앞에 나왔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또한 책을 낭독하고 있습니다. 여기 보면 3절에 "이날의 낮 사분의 일은 그 처소에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낮 사분의 일, 약 세시간 정도 율법책을 낭독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그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책을 낭독할 뿐만 아니라 "또 낮 사분의 일은 죄를 자복하며 그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는데"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는데 그들이 죄를 자복함으로 경배합니다. 주님 앞에 성별 가운데 나올때에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십니다. 헌신이 없는 성별, 그것은 고립입니다. 그런데 성별이 없는 헌신, 그것은 위선이죠. 이제 이 백성들이 이와 같은 자세로 임했고요.
4절 말씀에 레위사람, 여덟사람이 첫째, 단에 대에 올라가서 큰 소리로 하나님 여호와를 부르짖습니다. 그 다음에 5절 말씀을 보면 또 다른 레위사람, 여기 다섯 사람은 첫번째 여덟명의 그룹과 두번째 여덟명의 그룹에서 다섯명은 서로 공통된 사람들인데요. 이 두번째 그룹은 자기의 동무들을, 자기의 백성들을 인도하는 레위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나와서 "너희 무리는 마땅히 일어나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신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찌어다"(5절) 하나님 앞에 부르짖은 그룹이 있었고 또 이들은 이제 하나님 앞에 송축하면서 이제 기도를 시작합니다. 이 기도를 누가 인도했느냐? 어떤 이는 에스라가 기도한 것이 아닌가, 또 어떤 이는 레위사람 중에 한 사람이 기도한 것이 아닌가. 어째든 이 기도는 성경에 기록된 가장 긴 기도들 중에 하나입니다. 이 기도를 저희들이 5절서부터 보게 될때, 장장 37절까지 이 기도가 진행이 됩니다. 이 기도는 언듯 보게 될때, 저희들이 말씀을 추적하게 될때 이 기도 내용은 이스라엘 역사의 흐름을 따라서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저희들이 발견합니다. 기도에 있어서요. 기도는 이스라엘 역사를 하나님 앞에 강의하는 것이 아니고 이 레위사람이 이 기도를 인도하게 될때 마음 속에 두가지를 가지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선하심이나 또한 하나님의 광대하심과 하나님의 성실하심, 하나님의 자비롭고 의로우심, 하나님의 약속을 지키심, 이런 것들에 대해서 기도하는 사람은 마음에 두고 이스라엘 역사를 처음부터 이제 추적해 내려가고 있는데 이것은 순서대로 모든 것을 다 열거한 그런 기도가 아니라 이 역사 속에서,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하나님께서 어떠하심과 이스라엘 백성이 그와 같이 성실한 하나님에 대해서 합당하지 못한 태도를 취한 것에 대해서 자복하는 마음으로 이 역사를 추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실했는데요. 이스라엘 사람들,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 반역했고 노를 격발시켰다는 내용입니다. 이 기도 속에 이와 같은 현격한 대조입니다. 하나님은 선하시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택하셨을뿐만 아니라 그들을 민족으로 세우시고 인도하시고 보호하시고 또 그들을 징계할때도 그들을 버리지 않고 그들을 계속해서 세우시고 이런 선하심을 보이셨는데 이스라엘 백성들, 우리들은, 우리 열조나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절대로 합당하지 않은 태도를 취했다라고 하는 점에 대해서 이 기도는 대단히 확고합니다. 따라서 이 기도의 끝에 가서는 자기 자신의 비참한 상태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고백하고 있고 이와 같은 비참한 상태, 여기에서 그들은 이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벗어나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말씀을 드립니다. 그들이 이 기도 끝에 가서 내린 결론은 '우리는 비참해 졌습니다. 우리는 열조의 죄와 우리의 죄로 인해서 우리가 열방의 종이 되었습니다.' 라고 결론을 내리는 것입니다. 열방의 종이 되어서 우리의 곤란이 심히 중하다, 라고 하나님 앞에 표합니다. 이게 그들이 마음 속에 내리고 있는 결론입니다.
저희들이요, 이 두가지 주제. 하나님께서 위대하시다. 하나님께서 충성되시다. 그러나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 절대로 실패했다고 하는 점을 명확히 이야기 하고 있는데요. 이 기도 안에 있는 흐름을 저희들이 간략하게 추적하면서요. 몇가지, 하나님은 어떤 분이셨는가? 그리고 우리 이스라엘 사람들은, 열조나 우리나 어떠한 태도를 취했는가? 이 점을 기도 속에 말씀하고 있는데 살펴 보겠습니다. 이 기도의 특징, 역사의 흐름을 이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은 추적하고 있다고 말씀 드렸는데요. 사실 이 내용을 우리가 조심스럽게 살펴보면 창세기부터 시작해서요.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신명기, 민수기, 여호수아, 사사기, 그 다음에 열왕기, 역대기까지 이 포로되어 가는데까지 이 모든 역사를 추적해 가고 있다고 하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요. 이것은 단순한 역사를 그저 마음 속에 암기하거나 아니면 열거하는 그와 같은 기도가 아니라 이 역사 속에 있었던 하나님의 위대하심, 또 놀라운 돌보심, 또한 기적, 또한 그 백성들을 위해서 행하신 기이한 일들, 이런 것들을 이 기도하는 사람 마음 속에 선택해서 열거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위대하고 그 역사에서 놀라운 일들은 처음부터 있었는데, 그 가운데 기도하는 사람 마음 속에 감동된 것으로 하나님께서 어떠한 선하심과 위대하심을 나타내셨는가, 라고 하는 점을 말씀하고 그 중간에 이와 같은 분 앞에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절대로 합당하게 행하지 못했다. 우리의 자백은요. 하나님은 선하신데 우리가 그 하나님 앞에 합당하지 못했다라고 하는 점을 우리가 정직하게 인식하고 주님 앞에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여기에서 이제 변화가 있지요. 이 변화는 물론,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가게 될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은혜이기도 합니다.
첫째, 저희들이요. 6절 말씀을 보면, 제일 첫번째, 우리 여호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오직 주는 여호와시라" 독특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은 독특하신 분이신데 천지를 창조하셨죠. 그 다음에 이 땅을 보존하시죠. 또한 천군이 주께 경배하는 그런 독특한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섬긴 이 하나님은 바로 이 하나님이십니다. 어떠한 신도 이 세상의 이 분과 비교할 수 없는 신입니다. 두번째 7절에는요. "주는 하나님 여호와시라" 7절 이하에 8절까지 우리가 이러한 여호와라고 하는 점을 이 기돠는 자가 상기하면서요.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시고 그 약속을 지키셨다라고 하는 점을 이제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 보면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갈대아우르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주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은 엘로힘,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 그분은 언약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놀라우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셨습니다. 사실 이스라엘 민족은 아브라함부터 시작 됬지요. 그 선택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 가운데서 있었던 일입니다. "아브라함이라고 하는 이름을 주시고 그 마음에 주 앞에서 충성됨을 보시고 더불어 언약을 세우사" 아브라함과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십니다. 언약을 세우시게 될때, 하나님께서는 그 언약을 성실하게 이행하셨습니다. 사실 이 기도 끝에 가서 그들은 하나님 앞에 그들의 비참한 상태를 이야기하고 커다란 곤고함 가운데 빠져 있다는 것을 이야기 하면서 하나님 앞에 언약을 세웁니다. 언약의 하나님, 그 하나님은 성실하셨는데 우리는 성실치 못했습니다. 라고 하는 이 말씀은 이제 아브라함서부터 시작해서요. 하나님의 언약과 그 언약을 이행하시는데 있어서 대단히 철저하시고 성실하신 분은 그들은 기억합니다. 그것을 기억하게 될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 자신들은 하나님 앞에서 그러지 못했다고 하는 점에 대해서 이 느헤미야 시대에 이 위대한 기도는 철저했습니다. 그래서 여기 이제 8절 이하에 언약을 세우셨을 뿐만 아니라 가나안의 일곱 족속의 땅을 그 씨에게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지요. 그리고 그 말씀대로 이루셨다, 그랬습니다. 이 기도의 흐름은요. 하나님의 성실하심입니다. 이스라엘의 성실하지 못함입니다. 그래서요. 첫째, 독특하신 하나님. 그리고 하나님 여호와. 그리고 세번째는요, 8절 하반절에 "주는 의로우심 이로소이다" 그분이 의로우신 것은요. 애굽에서 고난 받게 될때, 애굽에서 우리 백성들을 구원해 내셨다. 출애굽의 놀라운 역사를 이 기도하는 분은 몇가지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애굽에서 바로를 치셨지요. 또 바다를 갈라지게 하셨지요. 11절입니다. 그 다음에 12절 말씀을 보면 낮에는 구름기둥, 또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 행할 길을 비췄다고 하는 점을 기억합니다. 또 시내산에 강림하셔서 하늘로부터 율법을 주셨다고 하는 점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출애굽에 수많은 사건들이 있습니다만 이 기도하는 분 마음 속에요. 애굽에서 기사와 이적을 베푸시고 바로와 그의 신하와 애굽 국을 치신 것을 그는 기억했습니다. 이것은 참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닙니까? 아브라함을 세우셨습니다. 창세기 안에 나타난 것은 선택된 가족입니다. 그런데 출애굽에 나타난 것은 선택된 민족입니다. 한 가족이 애굽에 가서 거기서 나오게 될때 민족을 형성하지요. 그 민족이 바로 느헤미야 시대의 민족입니다. 이 민족을 위해서 하나님이 어떠한 일을 하셨는가? 여러분과 저를 위해서 하나님은 어떠한 일을 하셨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기억하게 될때 우리는 언제나 이것을 마음 속 깉이 기억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어떠한 주권적인 뜻을 가지고 죄인된 저희들을 구원하셨는지, 어떻게 우리들을 생각하셨는지, 구원하시기 위해서 어떠한 값을 치루셨는지 하나님께서 아드님과 함께 우리를 구원하실 언약을 오래 전에 영원 전에 세우셨는데 그 일을 그렇게 장구한 세월이 지난 후에도 잊지 아니하시고, 또한 실패하지 아니하시고, 그 일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주저하지 아니하시고, 정확한 때에 아들을 보내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놀라운 은혜를 저희들은 기억해야 합니다. 이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시게 될때, 바다를 가르셨다. 이거 절대로 잊을 수가 없는 것이죠. 또 광야를 지나게 될때,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것을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또한 더욱 더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요. 이 백성들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실때 시내산에 강림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율법을 주셨다. 이 세상에 어떤 이와 같은 민족이 있는가? 이 세상에서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정의롭고 공의로운 법, 여기 말씀에 의하면 13절에 "정직한 규례" 그 다음에 "진정한 율법과 선한 율례와 계명"을 주셨다고 하는 겁니다. 이와 같은 법은 없습니다. 이 세상의 인간의 법, 고대 함무라비 법, 로마의 법전과 히랍의 법전, 또 현대의 수많은 법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어떠한 법도, 어떠한 종교 안에 있는 어떠한 종류의 법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것과 같은 법이 없습니다. 그 하나님의 법 안에 독특한 것이 있습니다. 십계명을 한번 잘 생각해 보십시요. 십계명, 하나님을 향한 법이죠. 또 인간들이 행해야 될 마땅한 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열개의 법 중에 한가지, 마지막 법은 이 세상 법에는 결코 우리가 찾아볼 수 없는 법입니다. 탐심을 갖지 말라. 이 세상의 법에서요. 어떻게 우리 마음을 놓고 정죄 할수 있는 그런 법이 있습니까? 마음 속에 역사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서 어떻게 그것을 이끌어 내며 그것을 정죄하며 그것에 대해서 책임을 물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영원하신 분이시고 우리의 속을 알고 계신 분이십니다. 이 율법, 이 율법은 공의로운 법입니다. 이 율법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법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이 율법은 의로울 뿐만 아니라 이것은 자비로운 법입니다. 율법 안에 담겨 있는, 엄위한 말씀 속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위대한 은혜를 우리는 곳곳에서 살펴 볼수 있습니다. 이방인의 법과 다른 법을 하나님께서는 이 백성에게 주셨다. 이 모든 하나님의 역사가, 그 모든 하나하나가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향해서 신실함을 집중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 14절 말씀을 보면 이제 거룩한 안식일에 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15절 말씀을 보면 "주의 종 모세의 계명과 율례와 율법을 저희에게 명하시고 저희 주림을 인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주시며 저희 목마름을 인하여 반석에서 물을 내시고" 그들의 영적인 필요도 공급하시고 그들의 육적인 필요도 그들에게 채우셨다. 라고 하는 것을 말씀합니다. 우리 하나님은요,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는 하나님, 그들이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주님 앞에 정직히 나왔을때 그들은 하나님 앞에 진실했습니다. 그 하나님의 성실하심에 대해서 그들은 마음 속에 고맙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성실하심에 대해서 마음 속에 감사하는 마음이 없으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납니다. 하나님께 감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들에 대해서 우리는 당연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 속에서요, 가장 두려운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에 대해서 우리가 그것을 그저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하시게 될때 우리의 마음이 높아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떠한 은혜를 주셨는가, 그것에 대해서 감사하게 될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여러울때,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풍족한 것을 받게 될때 하나님 앞에 여전히 엎드립니다. 하나님 앞에 감사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면 우리는 어려워지면 하나님을 향해서 불평하고 또 우리가 풍족해지면 그것을 내가 이룬 것처럼 교만해지는 것입니다. 여기 이 기도 내용에서는요. 구절구절이 하나님의 성실하심, 하나님의 충성되심에 대해서 그들은 깊은 감사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또 주께서 옛적에 손을 들어 맹세하시고 주마 하신 땅을 들어가서 차지하라 명하셨사오나 저희와 우리 열조가 교만히 하고 목을 굳게 하여 주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거역하며 주께서 저희 가운데 행하신 기사를 생각지 아니하고 목을 굳게하며 패역하여 스스로 한 두목을 세우고 종 되었던 땅으로 돌아가고자 하였사오나..."(느 9:15-17).
여기서 특별히 이제 지금까지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기억하다가 이제 그들의 자세, 그들의 영적인 태도에 대해서 여기서 정직하게 고백합니다. 그들의 열조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반역 했는가? 하나님의 성실하심에 대해서도 어떻게 그들은 등을 돌리고 목을 곧게 했는가? 특별히 여기서 그들이 기억하고 있는 것은 가데스바니아에 와서 그 약속의 땅에 들어가도록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요, 정탐꾼을 보내고 불신 가운데 열두명 중에 열명의 보고를 의지하고 이제 우리는 한 장관을 세워서 애굽으로 돌아가야 되겠다고 하는 이 특별한 사건을, 이 기도하는 사람은 마음 속에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어떠한 반역의 마음을 표했는가? 그들은 결코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는, 첫 세대는 들어갈 수 없는 그와 같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지요. 여기에 이제 지금까지 하나님의 선하심과 섬실되심에 반해서 이스라엘 민족이 어떻게 반역을 행했는가, 라고 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그 다음에 다시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기억합니다. 17절 하반절에 보면, "오직 주는 사유하시는 하나님이시라" 우리 주님은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은혜로우시며 긍휼히 여기시며 더디 노하시며 인자가 풍부하시므로 저희를 버리지 아니하셨나이다"(느 9:17).
이 후에는요, 출애굽의 역사 이후에는 이제 그들은 무엇을 이야기 합니까? 광야에서의 삶과 가나안 땅의 진입에 관한 역사를 마음 속에 두고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18절 말씀을 보면요, 또 한가지 이스라엘의 하나님 앞에서 실수한 것, 범죄한 것, 그것은 18절과 사실은 26절 말씀에 두번 나오는데요. 그것은 하나님을 향해서 노를 격발하게 한 겁니다. 18절 말씀에는 저희가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송아지 부어 만든 사건을 이들은 기억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상숭배 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모욕한 겁니다.
"또 저희가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이르기를 이는 곧 너희를 인도하여 애굽에서 나오게 하신 하나님이라 하여 크게 설만하게 하였사오나"(느 9:18).
26절 말씀도 보십시요. 여기도 하나님의 노를 격발케 했는데요.
"저희가 오히려 순종치 아니하고 주를 거역하며 주의 율법을 등뒤에 두고 주께로 돌아오기를 권면하는 선지자들을 죽여 크게 설만하게 행하였나이다"(느 9:26).
이 두 구절, 18절 말씀과 26절 말씀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노를 격발케 한 사건을 18절에서는요. 우상숭배한 것, 금송아지 만든 사건, 그리고 26절에서는 저희들이 율법을 등지고 주께로 돌아오기를 권면하는 선지자들을 죽인 일, 이 두가지를 지적했습니다. 우상숭배와 그 다음에 우상숭배에서 돌아오라고 말하는 선지자들을 죽인 일, 이 두가지를 가리켜서요. 하나님의 노를 격발케 한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이 두가지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요. 이스라엘은 어떤 범죄를 행했는가? 첫째, 하나님에 대해서 범죄 했습니다. 하나님은 어떠한 하나님이신가? 어떻게 그들을 세우셨고, 어떻게 그들을 구원하셨고 해방하셨고, 어떻게 인도하셨고, 어떻게 그들을 먹이셨고, 어떻게 보호하시고 그들을 위해서 싸우셨는가? 이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그들은 그 하나님을 우상으로 대체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노를 격발시켰습니다. 그들의 행동을 가리켜서 우리말 성경에서는요. 크게 "크게 설만하게 하였다" 이 18절 말씀과 26절 말씀에서, '설만하게 하였다'는 말씀으로 표현합니다. 설만하다. 설만이라고 하는 말은요, 그 행동이 거만하고 방자하다는 이런 말씀인데요. 원래 이 설만이라는 말은, '설'자는 속옷 설자입니다. '만'이라고 하는 것은 태만한, 게으른 만자입니다. 게을러서요. 속옷 바람으로 그냥 사방 돌아다니는, 그런 것을 원래 표현하는 말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들은 옷깃을 여미고 나오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태만하고 게으릅니다. 그들의 마음은 높아 있습니다. 방자합니다. 얼만큼 방자합니까? 이와 같이 성실한 하나님을, 하나님은 없다고 말하는 거죠. 그 다음에 우상숭배를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하는 성실한 선지자를 그들은 죽였습니다. 여기까지 저희들이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조상, 우리죠. 여호와 앞에서 우리들은 무엇을 했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반역했습니다. 하나님의 노를 격발했습니다. 하나님은 선하신데요. 하나님은 은혜로우신데 하나님께서는 그들 가운데 놀라운 능력도 베푸시고 그들을 보호하셨는데, 이런 분을, 그들은 이와 같이 대우했다고 하는 점을 이 장장의 기도 속에서 기억합니다. 저희들은요, 시편에도 이와 비슷한, 하나님께서 행하신 위대한 역사를 긴 시 속에서 말씀하고 있는 내용들을 저희들이 종종 보지요. 시 안에서 경건한 하나님의 백성은, 옛 하나님의 위대한 일, 그것은 과거의 일이었습니다. 그 과거의 일 안에 담긴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의 성실함, 하나님의 마음, 이것을 기억한다고 하는 것은 언제나 유익합니다. 저희들이 저희들의 과거를 돌이켜보게 될때, 저희들 자신의 위대함이나 저희들 자신의 공정, 아니면 저희들 자신이 범한 범죄로 인해서 저희들 마음 속에 괴로움이나 아니면 자만함에 빠지는 것은 저희들이 주님을 섬기는데 있어서 대단히 해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시편이나 또 이와 같은 경건한 성도의 기도, 내용 안에 하나님께서 과거에 행하신 일들에 대해서 성실하게 기도한다고 하는 것, 성실하게 노래한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유익합니다. 이 긴 기도를 읽게 될때, 이 사람은 기도를 하게 되는데 그 역사,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 그리고 그 민족의 역사 속에 계속해서 함께 하셨던 하나님의 모든 행사에 대해서 그는 상세히 알고 있고 마음 속에 하나님 앞에 그것을 열거하고 있다. 그것은 단순한 기계적인 열거가 아니라 그 한가지 사건, 사거마다 담긴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사랑과 정성에 대해서 이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은 감사하고 있다라는 것이죠. 저희들은요, 이 기도를 추적해 가게 될때, 이 사람 마음 속에 이것은 어느날 갑자기 이와같은 기도가 나오는 것은 아니죠. 이 사람 마음 속에 평소에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창세기서부터 시작하여 그들의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에 관한 하나님께서 기록한 말씀에 대해서 이들은 능통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도 하나님의 말씀에 익숙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가 기도하게 될때,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행하신 위대한 일을 기억했습니다. 그런데 저희들이 발견하는 것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선하심 가운데 이스라엘의 실패와 범죄는 너무나 대조가 되고 있다, 라고 하는 점을 이 기도는 거듭거듭 말씀하고 있지요.
저희들이 이제 19절 말씀에서부터 25절 말씀을 보면 계속해서 광야 여행에 관한 여러가지 사건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요. 19절 말씀 보면, "주께서는 연하여 긍휼을 베푸셨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이 이 기도하는 사람 마음이죠. 하나님은요, 한번이 아닙니다. 반복해서 계속해서 은혜를 베푸셨다. 그런데 광야의 역사도 우리가 기억하게 될 때도, 하나님은 그렇게 성실하셨는데 어떻게 이스라엘은 그렇게 때마다 일마다 하나님을 불신하고 하나님의 위대한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불평하고 원망했는가? 저희들은 참 이상하게 생각하죠. 그런데 때때로 저희들이 바로 그와 같은 모습을 행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주께서는 연하여 긍휼을 베푸사 저희를 광야에 버리지 아니하시고..."(느 9:19).
여기 보면 또 다시 반복하는 것이 있어요.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길을 인도하셨다.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광야의 역사에서의 성실하신 인도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경건한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습니까? 이 기도 안에도요. 여기 다시 이 사건은 반복되고 있습니다. 반복되는 것은 이 시건이 이 사람 마음 속에 커다란 감동으로, 커다란 인상으로 찾아왔다고 믿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낮에만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밤에도 인도하십니다. 낮에는 낮에 필요한 것으로 인도하시고 밤에는 밤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로 안전하게 지키시기 위해서 인도하십니다. 그 다음 말씀을 보십시요.
"또 주의 선한 신을 주사 저희를 가르치시며 주의 만나로 저희 입에 끊어지지 않게 하시고 저희의 목마름을 인하여 물을 주시사"(느 9:20).
가르치는 하나님이십니다. 인도하실뿐 아니라 가르치는 하나님이십니다. 만나로 먹이시는 하나님입니다. 목마를때 마시게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40년 동안 옷도 헤어지지 아니하고 신도 구멍 뚫어지지 않도록 인도하신 분이셨다. 그분의 성실하신 공급입니다.
"또 나라들과 족속들을 저희에게 각각 나누어 주시매 저희가 시혼의 땅 곧 헤스본 왕의 땅과 바산 왕 옥의 땅을 차지하였나이다"(느 9:22).
하나님께서는요, 그들에게 요단 저편의 땅도 주셨습니다.
"주께서 그 자손을 하늘의 별 같이 많게 하시고 전에 그 열조에게 명하사 들어가서 차지하라고 하신 땅으로 인도하여 이르게 하셨으므로"(느 9:23).
오래전에 약속하신, 언약하신, 이 하나님께서요. 그 약속의 내용을 지키신 겁니다. 그들의 열조들의 반역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 민족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첫 세대를 광야 땅에서 쓰러졌지만 하나님께서는요, 다음 세대에게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이, 언약이 이루어지게 하셨습니다. 그들로 약속의 땅에 들어가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들이 그 안에 들어갔을때 어떠한 은혜를 받았습니까? 이 기도하는 사람 마음 속에 이제 반역 했는데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완전히 버리지 않고 드디어 가나안 땅으로 약속대로 들어가게 하셨는데 얼만큼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셨는가? 여기 25절 말씀에 몇가지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저희가 견고한 성들과 기름진 땅을 취하고 모든 아름다운 물건을 채운 집과 파서 만든 우물과 포도원과 감람원과 허다한 과목을 차지하여 배불리 먹어 살찌고 주의 큰 복을 즐겼사오나"(느 9:25).
그들이요, 한번도 땅을 파서 과목을 심어본 적도 없는 과수원을 차지했습니다. 그들이 한번도 힘써서 가구 그와 방 안에 집어 넣고 또한 여러가지로 준비한 그런 집, 그런 집을 그들은 그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미 준비된 이와 같은 아름다운 땅과 과목과 과수원, 그리고 집과, 또한 그 안에 많은 물품들에 대해서 그들은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서 그 땅에 와서 그냥 얻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복을 즐겼다고 되어 있습니다. 왜 이와 같은 것을 이 기도 속에 이 사람은 언급하고 있을까요? 왜냐하면 우리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이와 같은 복을 받고도 하나님 앞에서 합당하게 행하지 못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모임의 중요한 진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임 안에 거하신다고 하는 진리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모임 안에 거하신다고 하는 진리는 참 위대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첫째, 모임 안에 거하시는 주님은 저희들을 사랑하신 분이십니다. 영원 전부터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구속을 계획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 계획을 집행하기 위해서 희생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위대한 말씀으로, 또 위대한 능력으로 이 땅에 오셔서 구속을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완성하신 이 구속을 토대로 해서 주님께서 승천하시고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모임 안에 들어가게 될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과거게 이와 같은 복을 받고, 선택을 받고, 인도함을 받고, 또한 공급함을 받고, 이러한 은혜와 이와 같은 자비를 받고도 그들은 이 위대한 복에 대해서 감사치 못함으로 인해서 반역과 격발시킨 이와 같은 범죄, 이것을 이들은 기억했지요. 저희들은요, 오늘날 이 시대의 모임을 생각하게 될때, 이 모임은 인간적인 차원에서, 인간적인 안목에서 모임을 생각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모임 안의 여러가지 부족한 것이나 모임 안에 때때로 슬픈 일들이 있긴 하지만 그러나 이 모임은 그와 같은 것으로 모임을 평가할 수 없는 것입니다. 모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기에 계신 것입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주신 위대한 은혜와 위대한 공급과 또 우리를 향한 위대한 자비와, 은혜로 우리를 대해주신 것들, 그리고 말로할 수 없는 복으로 모임 안에 채워주신 것들, 이것에 대해서 우리는 주님 앞에 감사하는 마음을 표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감사하는 마음을 표하게 될때, 하나님께서요. 저희들에게, 저희들 마음 속에 계속해서 더욱 더 많은 복을 주실 겁니다. 이 백성이 실패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 백성을 향해서 대하신 태도와 이 백성이 하나님을 향해서 대한 태도는 너무나 차이가 있었다, 라고 하는 점을 거듭거듭 지적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보게 될때, 그것은 하늘보다 높은 것입니다. 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설만한 교만한 자세, 그들의 하나님을 향한 범죄, 그것은 너무나 깊고 깊은 것이다, 라고 하는 이러한 대조 말입니다. 계속해서요.
우리는 27절 이하에서 사사시대 때에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노를 격발시키고 거듭거듭 그들은 하나님을 떠난, 그리고 우상숭배하고 멀리 떠난 일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들을 다루셨는가, 라고 하는 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주의 율법을 복종하게 하시려고 경계하셨으나 저희가 교만히 행하여 사람이 준행하면 그 가운데서 삶을 얻는 주의 계명을 듣지 아니하며 주의 규례를 범하여 고집하는 어깨를 내어밀며 목을 굳게 하여 듣지 아니하였나이다"(느 9:29).
말씀을 순종 안했다고 하는 겁니다. 고집을 부리고 목을 곧게 했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어떤 말씀입니까? 여기 특별히 여기 기도하는 분이 말씀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준행하면 그 가운데서 삶을 얻는 주의 계명"이라 말씀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것을 준행하면요, 준행하는 그 삶 속에서 삶을, 생명을 얻고, 삶의 만족을 얻고, 삶의 성취감을 얻고, 기쁨을 얻게 되는 그런 말씀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순종하면 놀라운 복이 우리에게 옵니다. 그 말씀 순종하지 아니하면 엄청난 불행과 슬픔이 우리에게 찾아오는 것입니다. 사실은 8장 말씀에 수문 앞 광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여서 에스라의 말씀 낭독을 들을 때에 무엇을 들었습니까? 율법을 들었습니다. 율법 안에 있는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무엇입니까? 신명기에 있는 말씀을 요약한다면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게 될때 하나님께서 엄청난 복을 눌러 주신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나 이 하나님의 동일한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할때,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 저주를 주시겠다. 이스라엘 백성이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을 때에, 우리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수많은 역사에서요. 그들이 이 말씀의 원칙 하에 있었던 것을 저희들이 봅니다. 그들이 저녁에는 "아! 아침이 되었으면" 이렇게 한탄했습니다. 그들이 아침이 되면 "아! 저녁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들은 끝없이 고통 속에서 계속해서 하나님의 누름, 하나님의 압박 가운데 그들은 있었다고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 했기 때문이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이 거절할때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죄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십시요." 하나님께서 돌리셨습니다. 신명기 말씀을 따라서 돌리셨습니다. 그들이 나치의 캠프안에 들었을때, 또한 그 죽음의 장소로 그들이 기차에 실려서 짐승과 같이 끌려가게 될때, 그들은 하루하루를 지나게 될때 신명기에 있는 말씀은 현실로 실현되었습니다. 아침이 되면 "아! 저녁이 되었으면" 저녁이 되면 "아! 아침이 되었으면" 이와 같은 것이 하루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그것이 반복되었던 역사 말입니다. 나치의 역사를 보세요. 나치가요, 유대인 아기를 잡아서 공중에다 던지고 총을 가지고요. 떨어질때까지 몇번 명중하느냐, 이런 장난을 했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잔인함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은 도대체 어디서 왔을까요? 전쟁은 잔인한 것이고 그것은 비극적인 것이고 슬픈 것입니다만 그러나 이와 같은 것들은 그냥 전쟁의 잔인함에서 오는 것이라고 우리는 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거기 가감 할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으면 바로 그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 속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는데, 하나님께서 아마 다른 것을 이야기 하셨는가, 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설만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 이 기도하는 사람은 이제 계속해서 사사 시대의 역사, 그리고 그 후에 열왕 시대의 역사, 이것을 계속해서 열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요, 참 장장의 기도입니다. 그것은 한마디로도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이 길게 기도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 사람은 바리새인이 사거리에서 자기의 거룩함과 또한 멋진 것들을, 영적인 위대함을 사람들 앞에 자랑하기 위해서 위선 가운데 이렇게 긴 기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까? 때로 긴 기도는요, 위선의 기도입니다. 바리새인은 중언부언 했습니다. 그 기도는요, 의미없는 말의 반복이요, 그것을 통해서 사람들 앞에 자기의 겉으로의 위대함이나 영적인 위대함, 또한 영적인 자만을 사람들 앞에 드러내기 위한 그런 태도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서에 나온 이 기도는, 가장 긴 기도입니다. 열두번의 기도 가운데 가장 긴 기도입니다. 그러나 이 기도는 바리새인의 그와 같은 위선적인 기도가 아닙니다. 우리는 2장 말씀에서 이 기도는 느헤미야가 페르시아 왕 앞에 나갔을때, 아닥사스다왕 앞에서 왕이 질문하게 될때, 그는 얼마나 짧은 기도를 했습니까? 그것은 찰나의 기도였죠. 화살 기도였습니다. 그것은 일초도 안되는 기간 사이에 왕의 질문과 그의 대답 사이에 있었던 대단히 짧은 기도였습니다. 그러나 이 기도는 대단히 긴 기도입니다. 이 긴 기도는 장황한 기도입니까? 아닙니다. 이 역사를 통해서 그는 한 구절, 한 구절, 한 역사의 페이지, 그 다음 페이지를 그가 마음으로 추적해 가게 될때,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그들을 향해서 성실하셨느냐, 라고 하는 것을 마음에 되세기고 그 기도를 듣는 모든 사람들이 이에 아멘 했던 것입니다. 또한 이와 같은 하나님의 성실하심에 대해서 우리 조상이나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교만히 행했는가, 라고 하는 점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철저히, 그리고 정직하게 나왔던 것입니다. 저희들이 이와 같은 긴 기도를 통해서요. 여기 또 한가지 하나님의 칭호에 대해서 저희들이 보는 것은, 여기 31절 말씀입니다.
"...주는 은혜로우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느 9:31).
은혜롭고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앗수르 열왕의 때로부터 오늘날까지 당한바 환난을 이제 작게 여기시지 마옵소서"(느 9:32).
앗수르때부터. 앗수르는 이스라엘 북방 왕국이 멸망하도록 이끈 제국이죠. 그때부터요, 지금까지, 그 사이에 남방 왕국 유다도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당한 역사가 있습니다. 이 슬픈 역사, 이 비극적인 역사, 이스라엘이 불순종함으로 인해서 그들이 이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이 슬픈 역사를 그는 생각하면서 하나님 앞에 탄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시고 긍휼이 여기시는 하나님이시니 이것을 기억해 달라고 그는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으로 또 한가지 하나님의 칭호를 여기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당한 모든 일에 주는 공의로우시니 우리는 악을 행하였사오나 주는 진실히 행하셨음이니이다"(느 9:33).
우리 주님은 공의로운 분입니다. 왜냐하면요, 이스라엘 백성이 악을 행했는데도요. 하나님은 여전히 공의 가운데 행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요, 격분한 가운데, 하나님께서 불의한 가운데 그들을 대하시지 않았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심판은 공의롭다고 하는데 하나님께 찬양을 올립니다. 우리 예배 내용 중에 하나가 하나님의 위대하심, 하나님의 창조, 하나님의 구속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심판하시는 그 심판은 공의롭고 의롭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심판은 정말로 의롭습니다. 우리가 악을 행해도요, 그 악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상대적으로 행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로 행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공의 가운데 행하십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악인을 보시면서도 오래 참으시는 것입니다.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와 같았다면 우리는 악을 행하는 그들을 향해서 즉각적으로 즉결 심판에 넘겼을 겁니다. 하나님께서는요. 그 모든 일을 오래 참음 가운데 그리고 심판하실때도 모든 일에 있어서 공의 가운데 행하십니다. 그래서 이 기도하는 하나님은 "우리는 악을 행하였사오나 하나님께서는 신실히, 진실히 행하셨다."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태도의 차이, 행동의 차이를 여기 다시 한번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 열왕과 방백들과 제사장들과 열조가 주의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며 주의 명령과 주의 경계하신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고 저희가 그 나라와 주의 베푸신 큰 복과 자기 앞에 주신 넓고 기름진 땅을 누리면서도 주를 섬기지 아니하며 악행을 그치지 아니한고로"(느 9:34-35).
여기 말씀을 지키지 않았지요. 말씀을 순종치 않았지요. 그 다음에 하나님을 섬기지도 않았지요. 악행을 중단하지도 않았아요.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36절에 결론이 나옵니다.
"우리가 오늘날 종이 되었삽는데 곧 주께서 우리 열조에게 주사 그 실과를 먹고 그 아름다운 소산을 누리게 하신 땅에서 종이 되었나이다"(느 9:36).
여기 보십시요. 이 긴 기도 속에서요. 이렇게 긴 역사를 지금 다시 한번 추적해 왔고, 하나님의 성실하심, 그러나 이스라엘의 반역, 그리고 격발케 한 이 모든 일들을 생각하며 우리는 이제 종이 되었다고 하는 겁니다. 이 당시 이스라엘은 종입니다. 페르시아 제국 하에 눌려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아직도 자기들은 하나님을 자기들 마음껏, 자유 가운데 섬길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속국이었습니다. 그들은 노예였습니다. 그들은 물론 바벨론에서 다시 귀환하긴 했으나 그들은 아직도 속국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종된 상태, 이것을 이제 마음 속으로 깊이 되세기고 있다, 라고 하는 겁니다. 이 종된 것은 이 당시에만 종이 된 겁니까? 이들은 종 된지 벌써 오래 되었습니다. 바벨론에 포로 가면서부터 종 되었고요. 귀환 했어도 여전히 속국입니다. 그런데 이 기도를 하게 될때, 이 엄연한 사실, 이것은 지금 일어난 사실이 아니고 옛부터 일어난 사실인데 이 사실이 이 기도 하게 될 때는 대단히 고통스럽게, 그리고 대단히 현실적인 것으로 기도하는 사람 마음과 아멘하는 모든 이스라엘 사람 마음에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가 돌아가게 될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영적인 저조함에 대해서 전에 느끼지 못했던 마음, 그런 마음이 우리 속에 생기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볼 것을 보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스라엘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어떠하심에 대해서 더욱 더 철저히 알수 있도록 하는 겁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머리로 대부분 알고 있는 역사입니다. 이것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기도를 하게 될때, 이스라엘의 역사는 이 순간 이스라엘 백성에게 새롭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 성실하심, 그것이 그들에게 대단히 강렬하게 찾아오는 것입니다. 동시에 그들의 악함과 반역과 불순종에 대해서 그들은 대단히 고통스럽고 부끄럽고 수치스럽게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와 같은 상황에서 우리는 종된 것에 대해서 그들은 고통 가운데 하나님 앞에 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이와 같은 현실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우리가 범죄하고 우리 영적인 저조함에도 우리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모임적으로 영적으로 저조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별로 느낌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정상적으로 생활한다고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야 할 수많은 복을 받지 못하며 살면서 답답한 것입니다. 그 답답한 것이 세월이 지나고 이제 날이 가고 달이 가면서 그것은 우리에게 그냥 정상적인 것으로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처음에 뉴욕에 갔을때, 다리를 건널때, 다리 세가 대단히 비싼것에 대해서 너무나 놀랐습니다. 그런데요. 한달, 두달 지나고 나서는 그와 같은 것에 대해서 덤덤해 집니다. 우리에게 문제는요, 덤덤해지는 것입니다. 무감각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요, 우리의 영적인 저조함에 대해서 무감각해 지는 것처럼 두려운 것이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발전을 저해하고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서는 것과 또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는 것에 대해서 완전히 차단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이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제 여기 모여 있습니다. 함께 기도합니다. 그들이 종 되었다고 하는 것, 새로운 사실 입니다. 그러나 종 되었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그들은 이날처럼 고통스럽게 느낀 날이 없었어요.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 앞에 이제 그 다음 말씀으로 토합니다. 237절 말씀을 보십시요. "우리 죄로 인하여" 여기 자백이 나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위대하심, 선하심을 말씀했고요. 그들의 죄에 대해서 자세히 말씀드렸어요. 뭐가 죄였습니까? 하나님 앞에 그들의 교만한 마음, 하나님 앞에 목이 곧은 것들, 하나님 말씀 앞에 불순종한 것들, 하나님 앞에 그들은 반역한 것, 하나님을 무시한 것, 우상숭배한 것, 하나님 앞에서 그들은 선지자를 죽인 것들, 하나님의 노를 격발케 한 것들, 이 모든 것들에 대해서 그들은 구체적으로 하나님 앞에 자백했습니다.
"우리의 죄로 인하여 주께서 우리 위에 세우신 이방 열왕이 이 땅의 많은 소산을 얻고 저희가 우리의 몸과 육축을 임의로 관할하오니 우리의 곤란이 심하오며"(느 9:37).
그들의 현실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종 되었다. 이것을 지적하고요. 그리고 우리는 이제 열왕들이, 이 왕들이 우리를 관할하고. 우리의 몸과 육축, 그리고 우리의 많은 소산을 우리 마음대로 할 수가 없고 그들이 주장하고 있다, 라고 하는 점에서 그들은 고통스러워 했습니다. 이것은 사실 처음부터 고통스러운 것이었거든요. 그런데 그들은 고통스러우면서도 고통스럽다, 그렇게 느끼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요, 우리가 고통스럽게 느껴야 할 것을 고통스럽게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 이제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여기 최종 결론은 이것입니다. 최종 결론은요, 37절 마지막에 "우리의 곤란이 심하옵니다." 이 곤란이라는 말, 곤란이라는 말은 무슨 말씀입니까? 곤란이라는 말은, 배로 얘기하면 배가 파선하는 것을 얘기합니다. 배서 파선하게 될때 그 배에 탄 사람이 무엇을 느끼는가? 그것이 곤란입니다.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곤란입니다. 배가 파선하게 될때요. 배가 부서지는 것을 눈으로 목격합니다. 그들은 막 두렵습니다. 그 다음에 두렵기 때문에 하늘로 올라갔다가 바다로 곤두박질 치고 어두움 속에서 폭풍 속에서 파도 속에서 추위 속에서 그들은 먹지 못하고 계속해서 사투를 벌이는 것입니다. 이 사투를 벌이지만 용기 가운데 벌이는 것이 아니라 절망 가운데 벌이는 것입니다. 그들은 피곤합니다. 영혼과 육체가 그들은 거의 지쳐 있습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곤란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백성들이요, 이 기도를 하게 될때, 이 곤란을 이렇게 느낀 적이 없었다, 이 말입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 와서 살면서 그들은 페르시아 왕에게 짖밟히면서 그들은 그 주변의 백서들에게 조소를 당하면서 그들은 이와 같은 것을 당연한 것으로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저희들은요, 이들이 이와 같은 일에 있어서, 한가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이 기도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도록 만듭니다. 기도하게 될때, 이들은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나왔습니다. 정직하게 나오면서 그들은 이제 곤란이 결론이 아니고요. 곤란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왔어요.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 앞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이 모든 일을 인하여 이제 견고한 언약을 세워..."(느 9:38).
견고한 언약이라는 말은요, '아멘'이라는 말입니다. 이들이 기도하게 될때, 이 기도에 대해서 모든 사람들은 아멘 했어요. 이 아멘하기 때문에, 그 말이 맞다. 하나님 앞에 우리는 반역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이제는 아멘한다. 이 모든 말에 우리는 동의한다, 라고 하는 거죠. 이 동의하게 될때 그들이 세운 것은 뭡니까? 언약입니다. 하나님 앞에요. 그들은 이제 견고한 언약을 세우고요. 견고한 언약을 세워서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인을 쳤습니다.
9장 말씀은 사실 10장과 뗄레야 뗄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9장에서는 이 장장 기도가 진행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곤란 속에, 곤란이 너무 극심합니다, 라고 말하면서 그들은 하나님 앞에 견고한 언약을 세우고 기록하지요. 그리고 그들은 인칩니다. 이 인을 치게 될때 그들은 어떠한 언약을 세웠습니다. 그들은 대단히 구체적인 언약을 세웁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부흥하고 회복이 되게 될 때요. 우리의 기도는 자백 가운데 주님 앞에 진실한 마음으로 나오는 기도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의롭습니다. 우리 주님을 통해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죄 용서함을 받았어요. 십자가 위에서 피 흘려 돌아가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해서 우리는 영원히 구원을 받았습니다. 죄와는 더 이상 관계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 위대한 은혜, 우리를 용서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세상에서 짓는 죄에 대해서 우리가 주님 앞에 자백하게 될때, 그분은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의 모든 죄에 대해서 용서하신다고 말씀하셨죠. 그래서 아버지와의 교제가 다시 원활하게 하신다고 말씀하셨죠. 여기 이 백성들이 이제 주님 앞에 나와서요. 그들은 정말로 정직하게 자백했어요.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마음의 의지를 주님 앞에 표합니다.
이제 10장에 오면 이들이 어떻게 언약을 세웠는가를 소개합니다. 첫째요, 1절서부터요. 27절 말씀까지 84인이 서명합니다. 여기에 서명한 사람은요, 제일 첫번째, 느헤미야입니다. 그리고 시드기야. 이 두사람, 인도자입니다. 느헤미야, 총독이죠. 그리고 시드기야, 그가 누구일까? 어떤 학자들은 이 사람이 느헤미야의 개인적인 서기관이 아니냐, 어째든 이 사람은 느헤미야의 가까이에 있는 인도자입니다. 이 두사람이 먼저 서명을 했습니다. 이들은 이와 같은 일에 있어서 본을 보였지요. 그 다음에 스가랴서부터 시작해서요. 2절서부터 8절 말씀까지 21명의 제사장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의 대부분은 개인의 이름이 아니고요. 그 가족의 우두머리의 이름입니다. 여기에 기록된 '스라야'라고 하는 사람은 사실 에스라가 여기에 빠질 수가 없지요. 에스라는 제사장인데요. 그런데 에스라가 빠져있고 대신 그의 부친이 여기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째, 인도자가 기록되어 있고요. 제사장들이 서명했습니다. 그 다음에 9절서부터 13절에 기록된 여러분의 이름이 나오는데요. 레위 사람들이요. 물론 여기 레위 사람들은 개인의 이름입니다. 그 다음에 14절서부터 시작해서 27절 말씀까지 여기 백성의 두목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이름입니다. 여기 느헤미야서는요, 명단의 책이라 이렇게 말씀드릴 정도로 많은 명단이 기록되어 있지요. 3장에 보면 누가 일했느냐, 이름들이 기록되어 있지요. 7장에 와도 성을 이제 경비하는 일에 있어서 명단이, 족보가 기록됩니다. 그 다음에 8장 말씀에, 에스라가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하게 될때, 낭독하게 될때, 그 옆에 서 있는 사람들, 그를 지지한 사람들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죠. 10장에 보면 여기 84인의 인친, 언약에 인친 사람들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 형님들과 함께 전쟁 역사관이 갔스빈다. 제일 처음에 들어갈때에 6.25 전쟁에서 참전했고 죽은 사람들의 모든 이름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 이름은요, 정말로 저희들도 거기 갔을때, 그 이름들을 다 읽지 못했습니다. 저는 전쟁 역사관이나 그런 곳에 갔을 때에 그 죽은 사람들의 이름을 다 읽는 사람들이 과연 몇명이나 될까, 그러나 저희들은요, 그 역사관 앞에 계단에 저희들의 평화와 생명을 위해서 생명을 바친 영웅, 이 사람들을 기억하자라고, 하는 말씀, 믿습니다. 어찌 그 사람들의 이름을, 그 사람들의 공적을 우리가 기억 안 할수가 있습니까? 우리들이 여기 존재하고 있는 것은 그 사람들이 새명을 바친 이유 때문입니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단의 모든 속박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분이 공을 세우시고 영웅으로서, 또한 구세주로서 그분의 보혈이 우리를 완전히 자유케 하셨다는 것은 더욱 더 놀랍고 감사한 일입니다. 따라서 우리 주님께서는 "이것을 행함으로 나를 기억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역사관 안에 들어가게 될때, 기록된 그 많은 이름들, 알링턴 국립묘지에 가서 거기에도 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의 이름, 그 사람들의 이름은 언듯 볼때, 대단히 지루해 보이는 이름 같지만 그 이름 하나하나는 대단히 유명한 역사가 그 이름과 함께 담겨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 고통스러운 역사와 그들의 생애를 바친 그들 각인이 그들이 전쟁에 참여해서 죽는 순간까지 그들은 어떠한 가슴의 떨림과 두려움과 공포와 그리고 용기와 수고와 그리고 피와 땀을 흘리며 그들은 거기서 죽었는가. 우리는 그것을 다 거기에 열거할 수 없지만 아주 깨끗한 이름으로만 거기에 기록되어 있지만 그것은 우리에게 주는 말로 할 수 없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여기 느헤미야서에 명단의 책입니다. 오늘 여기 84인의 명단, 그것은 우리가 일일히 다 시간이 없어 읽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한 사람, 한 사람들은 다 각기 자기의 의도와 하나님 앞에서의 자기들의 헌신하고자 하는 마음, 이와 같은 마음으로 그들이 주님 앞에 찾아 왔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놀라운 것입니다. 우리가 이와 같이 짧은 시간에 여기에 21명이 있습니다. 17명이 있습니다. 이렇게 넘어갈만한 그런 사람들이 아닙니다. 84인이 여기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요. 28-31절 사이에는 그 사람들, 인친 사람들, 이들은 인을 치지는 않았지만 인친 사람들의 그들의 행위, 그들의 하나님 앞에서의 헌신, 이것에 대해서 우리도 함께한다, 라고 하는 사람들의 그룹들이 여기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 남은 백성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문지기들과 노래하는 자들과 느디님 사람들과 및 이방 사람과 절교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준행하는 모든 자와 그 아내와 그 자녀들 무릇 지식과 총명이 있는 자가 다 그 형제 귀인들을 좇아 저주로 맹세하기를 우리가 하나님의 종 모세로 주신 하나님의 율법을 좇아 우리 주 여호와의 모든 계명과 규례와 율례를 지켜 우리 딸은 이 땅 백성에게 주지 아니하고 우리 아들을 위하여 저희 딸을 데려오지 아니하며"(느 10:28-30).
여기에 이제 성별된 백성들이 있습니다. 여기 제사장들과 레위인, 문지기, 노래하는 자, 느디님 사람,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다 어떤 사람들입니까? 성별을 위해서 전적으로 헌신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자기 자신을 커밋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율법책을 정신적으로만 인정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 사람들은 이제 실제적으로 그렇게 살겠다고 구체적으로 그들의 삶을 선언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이 사람들을 가리켜서, 성령님께서는요,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지식과 총명이 있는 자" 라고 말씀했어요. 그들은 저주로 맹세 했습니다. 아까 말씀드린대로 에스라가 낭독한 이 율법의 말씀은 순종할때 복이 있고 불순종할때 저주가 있다. 이들은요, 그들이 이 일을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오게 될때, 그들은 저주로 맹세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요, 맹세하고 주님을 섬긴 사람들이 아닙니다. 구약 시대의 이 사람들은 언약을 하고 또 맹세를 하고 이렇게 했지만 우리는요, 주님 앞에 나가서 우리의 힘으로 이렇게 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는 것은 이와 같은 맹세로 주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고마움, 그분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과 또 우리를 위해 핼하신 그 위대한 일을 생각할때, 그 위대함을 마음 속에 감사함으로 생각하고 주님께 우리를 바치는 것입니다. 주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성령의 인도하심이 없이는 성령의 도우심 없이 우리는 이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들이 이제 이 구약 시대, 느헤미야 시대에 그들이 주님 앞에 나가게 될때, 언약, 몇가지가 있었습니다.
첫째, 30절 말씀을 보면 이방 사람들과 결혼하는 거죠. 이방 사람들과 결혼하는 일, 이것은요.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금하셨죠.
"너는 삼가 그 땅의 거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찌니 이는 그들이 모든 신을 음란히 섬기며 그 신들에게 희생을 드리고 너를 청하면 네가 그 희생을 먹을까 함이며 또 네가 그들의 딸들로 네 아들들의 아내를 삼음으로 그들의 딸들이 그 신들을 음란히 섬기며 네 아들로 그들의 신들을 음란히 섬기게 할까 함이니라 너는 신상들을 부어 만들지 말찌니라"(출 34:15-17).
여기 가나안에 들어가게 될때, 그들과도 언약을 맺지 말고 그들과 혼인하지 말라. 여기 중요한 이유는 만일 그렇게 하게 될때, 그들이 너희들로 하여금 우상을 섬기게 할 것이다. 하나님을 멀리 떠나게 할 것이다. 사실 느헤미야서 마지막 장에 가면 느헤미야 자신도요. 솔로몬이 옛날에 이와 같은 일로 범죄 했다, 라고 그는 기록 했습니다. 심지어 솔로몬도요. 아내들을 많이 두었을때, 그 이방 아내들이 솔로몬의 마음을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멀리 떠나게 했습니다. 그것은 참 우리에게 어떠한 경고입니까? 다른 사람이 아니고요. 하나님으로부타 엄청난 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요. 이 여자들로 인해서, 이 결혼으로 인해서 그의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가 버린 그와 같은 역사. 그래서 그 왕국이 남북으로 분열되어 버리는 그런 비참한 결과를 초래하게 되지요. 이 백성들은 이 기도후에 하나님 앞에 언약을 세우게 될때, "하나님 우리는 이 일에 대해서 분명하게 결정을 하겠습니다." 라고 이야기 한 것입니다. 부동멍에로 인해서요. 부동멍에가 가져오는 여러가지 슬픔, 그것은 말로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결혼뿐만 아니라 사업상의, 자선 사업의 사교적인 문제, 종교적인 활동에서의 이 모든 부동멍에, 우리에게 가져오는 엄청난 어려움이 있지만 결혼을 통해서 이제 이 부동멍에가 가져오는 해악과 또한 부작용과 또한 슬픈과 비극을 생각할때 그것은 여기서 다 말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알지만, 그와 같은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정말로 믿음을 행사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경시하게 될때 나타난 그 슬픔은 돌이킬수 없는 불행입니다. 오늘 저희들은 이 언약에서요. 이제 제일 첫번째, 그들이 하나님 앞에 헌신하겠습니다. 결혼 문제, 이것은 성별에 관한 문제가 아닙니까? 느헤미야, 성벽을 건축하는 것, 그것은 성별입니다. 이 느헤미야서에서 느히메야가 회고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앞에 언약을 세우게 될때, 제일 먼저 그들이 하나님 앞에 언약한 것은 그것은 성별에 관한 문제다. 결혼에 관한 문제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지 않기 위해서 그들과 언약하지 않을, 이와 같은 일에 그들은 하나님 앞에 마음을 드린 겁니다.
두번째요. 안식일입니다. 31절 말씀을 보면요.
"혹시 이 땅 백성이 안식일에 물화나 식물을 가져다가 팔려 할지라도 우리가 안식일이나 성일에는 사지 않겠고 제 칠년마다 땅을 쉬게 하고 모든 빚을 탕감하리라 하였고"(느 10:31).
두번째는 안식일에 관련된 문제입니다. 안식일 뿐만 아니라 안식년과 관련된 문제입니다. 또 안식년과 관련해서 빚을 탕감하는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6일 창조 이후에 안식한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이 참으로 아름답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러나 범죄로 인해서 이 모든 아름다운 것은 파괴되었어요. 그리고 그 안식도 파괴되어 버렸어요. 그래서 사실상 창세기 2장에서 안식을 처음 말씀하셨지만, 그 다음에 가서요. 출애굽기 16장에 가서 이스라엘의 구속에 관한 말씀이 나오기 전까지는요. 이 안식이라는 말씀이 언급조차 되지 않습니다. 그 이후에 19장에서 율법에 관해서 이제 안식일에 관한 규례를 말씀하시고요. 그 후에 출애굽기 31장에 가면 안식일에 관한 규례를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을 지킬 것, 안식일을 더럽게 하지 말것, 만일 그렇게 할때 백성이 끊쳐질 것, 이런 말씀들을 하셨습니다. 안식일을 지키게 될때, 이것이 왜 어려운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말씀 하셨는데, 하나님은 그들에게 율법으로 주셨습니다. 왜 이것이 어려울까? 여기 특별히 느헤미야 시대에요. 안식일과 관련해서 장사와 관련한 문제가 나오고 있습니다."물화나 식물을 가져다가 팔려 할지라도 우리가 안식일이나 성일에는 사지 않겠고" 사실 이것은 안식일 뿐만 아니라 성일, 그리고 여호와의 절기, 다 마찬가지입니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안식일은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향해 그들의 마음을 헌신할 것을 기대하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안식일을 그들이 지키게 될때 하나님께서 주신 특권을 즐기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영광을 얻습니다. 그리고 이 안식일을 지킴으로 인해서 그 주변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이유 때문에 안식일을 주셨어요. 그러나 여기 보면 이 당시에 안식일을 지키기 어려운 이유 중에 하나는요. 주변의 이방 사람들이 이 예루살렘에게 들어와서 계속해서 장사하기를 원한 겁니다. 주중의 모든 날 장사하지만 안식일에도 계속해서 장사해서 이를 얻기를 원하는 겁니다. 이와 같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을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안식일을 지키기가 그렇게 쉽지 않은거죠. 왜냐하면 첫째는 주변 사람들 때문입니다. 두번째는요, 이와 같은 환경 속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와 같은 것에 동참하려고 하는 그와 같은 마음, 다시 말해서요. 우리는 일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안식일을 지키지만 그래도 물건을 사는 것은 우리가 일하는게 아니지 않느냐? 라고 정당화하는 노력 말입니다. 이방 사람들이 장사하려고 찾아오는 것도 문제가 되지만요. 바로 그와 같은 문제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 안에서 그와 같은 것을 오히려 마음으로 환영하려고 하는 그와 같은 마음. 그래서요. 자기들이 행하는 이 일을 정당화하고 안식일을 지키는 이 일을, 그 수준을 추락시키는 겁니다. 그들은요, 우리가 물건 사는 것, 우리가 물건 팔고 사는게 아니라, 우리가 장사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이 우리에게 왔을때, 우리는 그냥 사는 것 뿐이다. 우리는 여전히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아니냐? 라고 하는 핑계 말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보게 될때요. 이 당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어려운 이유를 생각할때, 우리도 이와 같은 것에 대해서 경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그 말씀을 부인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우리에게 와서 접근하게 될 때에 우리의 마음이 거기서 드러나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이 만일 하나님을 향한다면요. 그 사람들이 와서 장사를 하겠다고 할때, 우리는 절대 사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사기를 원한다면요. 이제 하나님의 안식일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 우리는 이렇게 이렇게 하는 것이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며, 라고 하는 변명을 하게 될 것이다. 이 말입니다. 우리 신앙 생활에 있어서요. 우리를 어렵게 하는 것 중에 하나, 우리 신앙 생활에 있어서 영적인 상태에서 우리가 서서히 타락하게 될때 우리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많은 변명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지키게 될때, 우리는 담백한 삶을 삽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 그 외에는 다른 얘기를 하지 않습니다. 다른 이야기를 꺼낼 것이 없습니다. 그냥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가는 겁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알면서도 지키지 않게 될때, 우리는 자꾸 이론을 제춣합니다.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변명하고 정당화 하려고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말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여기 이스라엘 사람들은 안식일과 관련해서요. 바로 이런 상태에 있었습니다. 법적으로 무슨 핑계거리를 찾는다고 할때, 영어에서는요. 룹홀(loophole)이라고 합니다. 구멍을 찾는 겁니다. 작은 구멍을 찾는 겁니다. 그래서 뭔가를 이렇게 나의 필요한 것, 이롭다고 생각하는 것을 그 구멍을 통해서 꺼내려고 하는 겁니다. 안식일과 관련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와 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 앞에 확실한, 그리고 선명한 안식일로 하나님 앞에 드릴 수가 없었다고 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요. 물욕 때문에, 이해 관계 때문에, 여러가지로 인해서 그들은 구차한 변명을 계속해서 하고 있었다. 뿐만아니라 안식년에 관해서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보면 "제 칠념마다 땅을 쉬게하고" 제 칠년마다 땅을 쉬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요, 바벨론에 포로되어 가기 전에 약 490년 동안요. 이 일을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6년 동안 일하고 그 다음에 1년은 땅을 기경하지 말아야 됩니다. 이것이 안식년입니다. 안식년에는 땅을 갈아서는 안됩니다. 6년 동안 거기서 자라던 식물들이 7년에는 땅을 기경하지 않으니까 저절로 나오면 그것을 딴 사람들이 먹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땅은 보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땅을 보전한다고 하는 것, 어떤 의미일까요? 이것은 땅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변 백성들에게 안식년을 지킴으로 인해서 그들의 믿음을 사방 사람들에게 전달해 주는 것입니다. 간증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6년 동안 그들은 일합니다. 그 6년 동안 일한 것을 가지고 7년을 사는 겁니다. 안식년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그것을 말하는 겁니다. 6년을 일하고 7년을 산다. 그런데 만일 우리 마음 속에 탐심이 있다면요. 만일 우리 마음 속에 경제적으로 더욱 부요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7년째 일을 할 겁니다. 바로 이와 같은 것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한 범죄였습니다. 왜 이스라엘 백성들은 70년 동안 바벨론에 포로되어 갔을까요? 그들은요, 70번의 안식년을 범했습니다. 그래서요. 이스라엘 땅은 70년간 쉬어야 됬어요. 그래서 그들은 포로되어 끌려간 겁니다. 물론 그것은 그들의 범죄로 인한 결과였습니다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서 안식년과 관련해서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지 레위기에 있는 말씀을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간 후에 그 땅으로 여호와 앞에 안식하게 하라 너는 육년 동안 그 밭에 파종하며 육년 동안 그 포도원을 다스려 그 열매를 거둘 것이나 제 칠년에는 땅으로 쉬어 안식하게 할찌니 여호와께 대한 안식이라 너는 그 밭에 파종하거나 포도원을 다스리지 말며 너의 곡물의 스스로 난 것을 거두지 말고 다스리지 아니한 포도나무의 맺은 열매를 거두지 말라 이는 땅의 안식년임이니라"(레 25:2-5).
이스라엘 백성이요. 6년 동안 하나님께서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7년 째에 안식년을 지킵니다. 이렇게 살면, 주변 사람들이요. 제 7년에 그들이 땅을 기경하지 않는 것을 이방 사람들이 보는 겁니다. 이방 사람들이 그것을 보게 될때 그들 마음 속에는 의아한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이방 사람들은요, 7년 계속 일해야 산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어쩌면 7년까지 일해도 다 먹고 못산다고 항상 근심하는 사람들입니다. 이와 같은 사람들 가운데서요. 6년동안 일하고 7년은 땅을 쉬게 하는 이와 같은 모습은, 이방 사람들에게 엄청난 간증거리 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 백성은 오직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먹이신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안식년을 지킴으로 인햬서 이방 사람들 앞에 언제나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이 살고 있습니까? 우리의 사는 삶이라고 하는 것은 내 손과 발로 인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은혜로 인해서 산다. 그리고 그 은혜는 충분하여, 내가 살아가는데 하나님께서 넉넉하게 주신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마음 속에 믿고 있습니까? 아니면 이방인들과 염려하고 살고 있습니까? 산상보훈에서 주님께서 하신 말씀은, "너희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이런 것들은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이렇게 말씀했지요. 다시 말해서 이방 사람들이 하고 있는 이와 같은 근심, 그들은 언제나 근심 속에 살고 있어요. 왜? 살아계신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언제나 자기 손과 발과 또 파종과 또 땅을 가는 것과 곧식 거두는 것, 여기에서만 마음의 쉼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은 달랐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다. 하나님의 약속은 언제나 지켜진다. 그 언약을 지키시고 그 언약을 지키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응답하신다고 하는 간증 말입니다. 안식년을 지키지 못함으로 인해서 이스라엘은 긴 세월 동안 하나님을 드러내지 못했습니다. 이것 참 하나님 앞에 슬픈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여기 또 한가지를 말씀합니다. 안식년뿐만 아니라 "땅을 쉬게 하고 모든 빚을 탕감하라" 모든 빚을 탕감하라고 말씀했습니다. 빚진 경우에도요. 안식년이 되면 탕감하는 겁니다. 그 빚을 다 탕감하라는 것인지, 아니면 그 해만 갚는 것을 면하게 해 주는 것인지는 불분명 하니다만, 어잿거나 안식년이 되면요. 빚을 탕감해 주는 겁니다. 6년 동안 일하고 일을 안하는 것도 어렵다. 이방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 합니다. 그런데 그 해가 되면 빚까지 탕감해 줍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그들은 무엇을 기대하는 사람들입니까? 하늘이 다스리는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은요, 하늘에서 내리는 은혜를 먹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을 간증하는 것이죠. 오늘날 저희들은 주님을 믿게 될때, 개인, 가정, 모임의 삶에서요. 하나님이 우리를 먹이신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충분히 먹이신다, 라고 하는 점에 대해서 우리는 세상을 향해서 증거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주님을 섬기는 증거입니다. 우리 믿음의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할때 기뻐하십니다.
이제 그 다음에요. 성전 예배를 위한 매년 헌금에 관해서 우리가 보겠습니다. 32절에 "우리가 스스로 규례를 정하기를" 자원해서 규례를 정했습니다.
"우리가 또 스스로 규례를 정하기를 해마다 각기 세겔의 삼분 일을 수납하여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쓰게 하되 곧 진설병과 항상 드리는 소제와 항상 드리는 번제와 안식일과 초하루와 정한 절기에 쓸 것과 성물과 이스라엘을 위하는 속죄제와 우리 하나님의 전의 모든 일을 위하여 쓰게 하였고"(느 10:32-33).
여기 보면요. 이제 또 한가지 그들이 하나님 앞에 언약한 것은요. 이제부터, 다음 세가지, 두번째는 첫 열매, 세번째는 십일조입니다. 이것은 모두 성전의 봉사와 예배가 진행되도록 하는데 지지해주는 그들의 헌신입니다. 첫째, 성전 이 예배가 지속되도록 그들은 지원할 것을 마음 먹었습니다. 특별히 여기 10장 마지막 절 말씀을 보십시요.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전을 버리지 아니하리라"(느 10:39).
이것이 그들의 결단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성민이 되어야 합니다. 성과 문이 만들어지면 그 안에 사는 백성은 거룩한 백성이 되어야 됩니다. 이 거룩한 백성으로서 그들은 예배가 지속되어야 한다. 그곳에서 예배를 위해서 봉사하는 사람들을 그들은 지원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게 되면 예루살렘은 더 이상 예루살렘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백성들은요, 이제 헌신하기를 작정했어요. 어떻게 헌신합니까? "해마다 각기 세겔 삼분 일을 수납하여" 출애굽기 말씀을 보면요, 인구조사를 하게 될때.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네가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를 따라 조사할 때에 조사 받은 각 사람은 그 생명의 속전을 여호와께 드릴찌니 이는 그 계수할 때에 그들 중에 온역이 없게 하려 함이라 무릇 계수중에 드는 자마다 성소에 세겔대로 반 세겔을 낼찌니 한 세겔은 이십 게라라 그 반 세겔을 여호와께 드릴찌며 무릇 계수 중에 드는 자 곧 이십세 이상 된 자가 여호와께 드리되 너희의 생명을 속하기 위하여 여호와께 드릴 때에 부자라고 반 세겔에서 더 내지 말고 가난한 자라고 덜 내지 말찌며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속전을 취하여 회막의 봉사에 쓰라 이것이 여호와 앞에서 이스라엘 자손의 기념이 되어서 너희의 생명을 속하리라"(출 30:11-16).
여기 속전에 관해서 말씀했습니다. 이 속전을 내는 이유는요. 온역을 없이하고요. 여호와 앞에서 회막의 봉사에 쓰게 하기 위해서 이것을 냈습니다. 반세겔을 내게 되는데요. 여기 보면요. 느헤미야 시대에 그들이 하나님 앞에 내겠다고 하는 것은 삼분의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반세겔에서 금액에 있어서 떨어진 것이 아니냐, 우리는요. 이것은 계수할때 드리는 돈이 아닙니다. 이것은 성전 봉사를 위해서 그들이 자원해서 매년 드리겠다고 작정한 것입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30장에 있는 계수할때 속전을 위해서 드리는 것과는 다릅니다. 이 삼분의 일 세겔을 내는데 이것들이 하나님의 전의 모든 일을 위해서 쓰여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건 그들이 하나님 앞에 매년 내는 것입니다. 항상 낸다고 하는 것은 주님 앞에 그들의 지속적인 헌신을 말하지요. 그들은 잡혼의 문제, 안식일의 문제뿐만 아니라 이제는 성전 봉사에 있어서 필요한 것들을 지원하는데 아끼지 않겠다고 하는 언약을 하나님 앞에 드리고 인친 겁니다. 또 하나, 34절 말씀을 보면요.
"또 우리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백성들이 제비 뽑아 각기 종족대로 해마다 정한 기한에 나무를 우리 하나님의 전에 드려서 율법에 기록한대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단에 사르게 하였고"(느 10:34).
이 화목을 드립니다. 레위기 6장 말씀을 보면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레위기 6장 12절에요. 항상 드리는 번제에 관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나무를 드려야 했습니다.
"단 위에 불은 항상 피워 꺼지지 않게 할찌니 제사장은 아침마다 나무를 그 위에 태우고 번제물을 그 위에 벌여 놓고 화목제의 기름을 그 위에 사를찌며 불은 끊이지 않고 단 위에 피워 꺼지지 않게 할찌니라"(레 6:12-13).
여기 항상 드리는 번제요. 항상 드리는 번제는 계속해서 드려집니다. 아침 저녁으로 드려집니다. 그래서 여기에는 화목이 필요합니다. 끊임없이 타는 이 나무를 위해서요. 나무를 주님 앞에 드려야 됩니다. 이것은 겉보기에는 참 반복해서 드려야 되는 수고로운 일입니다. 언듯 보면 이것은 별로 매력적인 그런 일 같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만일 화목이 드려지지 않으면 항상 드려지는 번제는 중단됩니다. 이것은 대단히 심각한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예배에 있어서 번제같이 중요한 것이 있습니까? 이와 같은 것이 중단되게 하지 않기 위해서 겉 보기에는 대단히 매력이 없어보이는 일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대단히 중요한 일로 생각하고 지속적으로 헌신한다고 하는 것, 이것은 얼마나 중요합니까? 오늘날 우리 모임 안에서요. 이런 일들이 많지요. 언듯 보기에는 매력적이지 않아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우리가 성실하고 지속적으로, 한번 하고 한동안 하다가 그만두고 말고, 가장 중요한 것은 주의 일은요.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됩니다. 우리가 어떤 일이든지 주님께서 우리에게 부르신 일들을 행하게 될때, 그것은 끊임없이 주님이 우리를 부르실때까지 우리는 그 일을 계속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기 항상 드리는 번제와 관련해서 화목을 드리는 것, 이들이 바로 이와 같은 의미에서 바로 하나님 앞에 이런 언약을 드린 겁니다. 그 다음에요. 35절 말씀에요.
"해마다 우리 토지 소산의 맏물과 각종 과목의 첫 열매를 여호와의 전에 드리기로 하였고"(느 10:35).
우리가요. 주님 앞에 드리는 문제에 있어서 초실을 드리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 첫 열매를 드린다. 이 첫 열매는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드리게 될때 가장 좋은 것을 드리는 겁니다. 그래서 첫 열매를 드립니다.
"너의 토지에서 처음 익은 열매의 첫것을 가져다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드릴찌니라..."(출 23:19).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그들이 어린양의 보혈로 구원 받을때, 장자가 어린양의 보혈로 구원 받았습니다. 애굽의 모든 장자와 초태생 다 죽었어요. 그러나 이스라엘의 장자와 초태생 다 살았어요. 왜 그랬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그렇게 된 겁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요. 율법에서 이스라엘의 장자는 다 내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가 첫 번째 얻는 열매를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하나님 앞에 헌신의 자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가장 으뜸 되는 것, 우리는 8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으뜸이다. 라고 생각하고 주님 앞에 나왔어요. 하나님 앞에 나가게 될때 가장 좋은 것을 드리는 것, 이것은 우리의 기본적인 자세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먼저'라고 하는 것. 우선순위, 그리고 최상, 이것을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요. 느헤미야 10장 말씀에서 그들이 언약을 하게 될때, 첫 번째 것, 주님께 드리겠다. 가장 좋은 것을 드리겠다. 그들은 그렇게 안했어요. 그러나 이제 이들은 새로운 마음으로 주님 앞에 이와 같은 것으로 나가고 있습니다. 한가지 더 남았는데요. 십일조입니다.
저희들이 여기서 마쳐야 되기 때문에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만, 저희들이 10장을 생각해 보고요. 9장과 연관해서 생각해서 생각한다면 어떻습니까? 이 자백의 기도는요, 말씀을 이해함으로 인해서 그들 가운데 찾아온 겁니다. 우리는요.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과 교제해야 됩니다. 그리고 이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마음을 감동해서요. 하나님 앞에 기도하게 해야 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말씀을 읽는 사람입니다. 말씀을 읽는 사람은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실 초대 교회의 시대에 모임에, 교회에 문제가 있을때, 사도들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이런 문제로 인해서 우리의 마음이 뺏기는 것이 가하지 않다. 우리는 말씀과 기도에 전무하리라." 말씀과 기도, 이것은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너무나 중요한 것이죠. 이스라엘 백성이요. 하나님 앞에 다시 돌아오게 될때, 말씀이었습니다. 그 다음에 기도입니다. 자백하는 기도입니다. 이 자백하는 기도, 그것은 그들에게 놀라운 부흥을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이 기도끝에 그들은 견고한 언약, 다시 말해서 이것을 그들은 아멘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그들은 헌신하고자 그들의 마음을 드렸습니다. 이 언약에 있어서요. 구체적인 문제들이 여기 열거가 되었어요. 여기 여섯가지, 잡혼의 문제, 안식일에 관한 문제, 성전이 가동되기 위해서 그들은 성전을 지원하고자 하는 그런 마음, 그리고 화목을 드리고자 하는 그런 마음, 항상 드려지는 번제가 지속되기 위해서 지금 화목을 드리는 거지요. 그 다음에 첫번째 열매, 주님 앞에 가장 좋은 것으로 드리고자 나오는 마음, 이것을 드렸습니다. 오늘 시간이 없어서 11장을 내일 저희들이 생각해 보겠습니다.
오늘 저희들이 이와 같은 모습을 생각하게 될때 느헤미야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될것, 기억하십시요. 성문과 성민입니다. 성과 문이 세워졌으면 그 다음에 그 안에 거하는 백성은 영적이고 성스럽고 거룩한 백성이 되어야 한다. 예배가 지속되는 백성, 하나님 앞에 헌신한 백성, 하나님 앞에 봉사하는 백성, 또한 하나님을 우선으로 여기는 백성, 그래서 그 백성이 이 주변 백성들 가운데 위대한 간증이 드러나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고 하나님의 이름이 명성을 끼치는 이와 같은 일, 이것은 느헤미야서의 주제입니다. 오늘 이 시대에 저희들이 주님 앞에 이와 같은 마음을 드려서요. 저희들 가운데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을 얻도록 그리고 그의 증거가 사방에 전파되도록 주님앞에 힘써야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