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솔로몬의 생애 04_솔로몬의 아내와 솔로몬이 지혜를 구함 >
< 솔로몬의 생애 04_솔로몬의 아내와 솔로몬이 지혜를 구함 > / 정형모 형제님
"솔로몬이 애굽 왕 바로로 더불어 인연을 맺어 그 딸을 취하고 데려다가 다윗성에 두고 자기의 궁과 여호와의 전과 예루살렘 주위의 성이 필역되기를 기다리니라 그 때까지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전을 아직 건축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들이 산당에서 제사하며 솔로몬이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부친 다윗의 법도를 행하되 오히려 산당에서 제사하며 분향하더라"(왕상 3:1-3).
저희들이 열왕기상을 펴게되면 다윗이 대단히 쇄약해져 있는것을 보고 이제 그때를 틈타서 아도니야가 반역을 일으키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아도니야가 반역을 일으키고요.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하느냐 하는것이 1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단이 여기 개입하고 또 다윗왕에게서 전후를 밧세바를 통해 말씀하도록 했고 또 다윗왕이 노쇄해서 추워서요, 아비삭을 데려다가 같이 살아야 할 정도로 어려운 상태에 있었던 때에 그 나라에서 무슨일이 되어지는를 그가 알지 못할때에 이런 일이 있었죠. 다윗이 이제 드디어 결단을 내리고 솔로몬을 왕으로 세우도록 명령을 해서 솔로몬이 이제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2장 말씀을 보면 이제 다윗이 죽기전에 유언을 솔로몬에게 하죠. 첫째 말씀을 잘 지키지고 그래서 국가가 견고하도록 하라고 말씀 했습니다. 또 한가지는 이제 다윗 자신이 떠나고 왕국 안에 왕국의 건립을 방해하는 여러가지 요인들을 제거하라고 말씀했습니다. 그 중에 여러 사람이 있었죠. 아도니야를 지지하는 요압이나 아비아달, 군장이나 제사장, 이런 사람들이 있었죠. 그들을 제거하도록 다윗이 이제 당부 했습니다. 유언 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왕으로서 잘 지키고 또한 왕궁의 안보를 해치는 요인들을 제거하라. 그것을 이제 말씀을 나누고 세상을 떠나죠. 그리고 2장에서는 다윗이 분부한대로 아도니야를 제거 합니다. 아도니야가 1장에서는 사실 반역을 일으켰을때, 솔로몬이 대관식을 하고 난 후에 도망해 제단뿔을 잡죠. 솔로몬이 은혜를 베풀어서 "앞으로 선한 사람이 된다면 그의 생명을 보존해 주겠다."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2장에 와서 아도니야는 자기 본색을 드러내죠. 아비삭을 자기 아내로 맞게 해달라. 이렇게 말함함으로 사실상 자기 자신은 여전히 왕이 되기를 꿈꾸고 있다는 것을 그대로 드러냈습니다. 아도니야가 제거 되고요. 그 다음에 아비아달이 파직되고요. 그 다음에 요압이 처형되고 그 다음에 시므이도 당장 처형이 되지 않았지만 예루살렘 성 안에 머물도록 명령을 했는데, 삼년후에 그 약속을 깨고 자기 종들이 블레셋으로 도망 갔을때, 그를 잡아가지고 오기 해서 예루살렘 성밖을 나갔기 때문에 그도 처형을 당합니다. 그렇게해서 1장과 2장 말씀을 보면 솔로몬이 왕국을 세워가는 일에 그에게 대단히 어려운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되죠.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이미 왕이 될것을 오래전에 말씀 하셨습니다. 다윗을 통해서 말씀을 했죠. 따라서 아도니야가 왕이 되느냐 솔로몬이 왕이 되느냐 이와같은 문제는 정치적인 문제가 아니고요. 사람들이 지지해주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문제가 아니고 그것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이루어지는 문제 였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뜻 그것이 이루어지느냐 아니냐고 하는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순종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우리가 일을 이루어나가게 될때, 저희들의 마음에는 확신이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그렇지 않다면 아도니야는 자기 나름대로 논리가 있었습니다. 다윗의 아들들 중에 그 당시의 아도니야는 가장 연장자 였습니다. 자기 자신을 생각할때 내가 왕이 될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이렇게 나름대로 자천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천을 하는것은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스스로 천거하고 내가 이렇게 할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는 확신, 이런것은 합당하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가, 또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가라고 하는데 달려 있다고 하는점을 우리는 배울수 있는데, 오늘 저희들이 3장 말씀에 들어오면 솔로몬이 그가 왕이 되고 난 다음에 40년을 통치를 합니다. 40년을 통치하는데 즉위한지 사년후에 성전을 건축합니다. 그런데 성전을 건축하기 전에 아주 초기에 있었던 일을 저희들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나라를 견고히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나라를 세운다고 하는것은 그가 왕이 되었을때 그가 나라를 어떻게 다스리느냐 하는것이 대단히 중요한 것이죠. 그래서 다스리기 위해서 첫째로 필요한 것이 지혜 입니다. 또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부요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3장 말씀에서는 그가 어떻게 지혜를 얻었느냐 라는 말씀을 하고 있고요. 4장 말씀에서는 그가 어떻게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서 부를 얻었는가 하는점을 말씀 합니다. 오늘 저희들은 그가 어떻게 지혜를 얻었느냐 하는 점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 부분을 저희들이 살펴보겠습니다. 저희들이 열왕기상에 나타나는 솔로몬의 왕국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하는데 왜 우리들이 솔로몬의 왕국을 살펴봐야 할까, 이 구약의 역사를 저희들이 살펴보는 것은 솔로몬의 왕국은 굉장히 탄탄하게 세워지고 찬란한 명예와 부와 지혜와 이런 것들로 가득해서 주변에 수많은 나라의 왕들과 여왕이 예루살렘을 찾아왔습니다. 이제 율법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신명기에 앞으로 때가 되면 사람이 왕이 되어서 나라를 다스릴때가 온다고 말씀 했습니다. 그러면 그 전까지는 누가 다스렸습니까? 하나님이 직접 다스렸습니다. 모세와 여호수아 시대에 하나님께서 다스렸습니다. 사사 시대도 하나님께서 다스렸습니다. 그런데 사사시대의 문제는 "당시에 왕이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이 자기 소견의 옳은대로 행했다" 이렇게 말씀하고 있죠. 그런데 당시 왕이 없었습니까?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 소견대로 행했다고 하는 것이죠.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고 우리를 인도하시고 통치하시는데 우리가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소홀히 하거나 또 하나님의 어떤 말씀의 것을 빼거나 아니면 자기 생각을 가미하거나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 앞에서 합당치 않은 것이고요. 그로 인해서 얻게되는 수많은 손해와 또한 하나님의 불쾌감 그리고 심판이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생각할때 다윗이 세상을 떠나게 될때 아들에게 "너는 보좌에 오르게 될때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라." 라고 하는 말씀을 저희들이 함께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왕이 되었을때 이제 그가 해야 될 일들을 신명기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이 왕이 되었을때 자기 아버지의 말씀을 잘 기억하고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저희들이 오늘 읽은 3장 1-3절 사이의 말씀, 특히 3절 말씀에 솔로몬이 여호와를 사랑했다고 말씀 했습니다. 성경에 여호와를 사랑했다고 하는 말씀은 솔로몬이 했다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한 사람이 많이 있지만 성경에 여호와를 사랑했다고 하는 사람은 솔로몬입니다. 그런데 슬프게도 그의 말년에 가서는 여호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아내를 사랑했죠. 그는 실패하고 그의 왕국은 곧 분열되고 말죠. 저희들이 솔로몬을 살펴보고요. 솔로몬의 왕국을 살펴보는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어떻게 그 나라를 다스렸을때 어떻게 세상의 수많은 왕들이 그의 나라의 아름다운 모습과 여호와의 위대함을 보고 찾아왔을까? 그러나 그가 어떻게 했을때 주변 사람들은 그의 나라를 비웃고 치소하며 또 조롱하고 했을까 하는 점입니다. 이와같은 것은 솔로몬의 왕국이 번영했을때가 있고요. 그 다음에 추락했을때가 있습니다. 사실상 그 아들때에 가서는 나라가 완전히 갈라지고 말죠. 왜 이와같은 일들이 있을까 하는것을 저희들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조심스럽게 살펴보면 오늘날은 오늘날은 우리가 왕국시대에 살고있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교회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율법시대가 아니고 은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 구약이 말씀하고 있는 역사속에 담긴 중요한 교훈들은 오늘날 우리에게 동일하게 적용할수 있고요. 이 말씀에서 우리가 지혜를 얻게 될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 또 우리의 가정, 그것을 아름답게, 견고하게 세울수 있다고 하는것을 저희들이 이 말씀에서 발견할수 있습니다. 그것이 사실상 이 역사를 통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있는 중요한 교훈이라 이렇게 생각합니다. 제일 첫번째 1절 말씀에 보면 솔로몬이 애굽왕 바로와 더불어 인연을 맺어서 그 딸을 취했다고 말씀합니다. 솔로몬은 그의 아버지로부터 그의 왕국을 물려 받았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얼마나 고생을 하고 사울에게 좇겨다니고 수많은 전쟁을 하고 그래서 일구어놓은 나라를 솔로몬은 아버지의 수많은 수고로 인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그냥 왕국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왕국을 세우는 일을 했고 솔로몬은 어떻습니까? 그가 받은 나라를 잘 가꾸어서 번영 시키는, 점점 더 흥황케하는 그와같은 일을 위해서 그는 부름을 받았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나오게 하는 일을 위해서 부름 받았죠. 그러나 모세 옆에서 항상 돕고 종으로 일했던 여호수아는 어떻습니까? 오랜 기다림을 통해서 그는 항상 옆에서 모세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일을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는가, 믿음가운데 그는 어떻게 걸어갔는가라고 하는 것을 현장에서 생생하게 모세를 통해서 보았습니다. 그는 사실상 그 기간을 통해서 많은 수고를 했지만 훈련 받았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세상을 떠나고 난 후에 하나님이 그를 부르셨을때 모세의 후계자로서 그는 무슨일을 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진입시켜 드리는 일을 했습니다. 각각 다른 역할을 하나님께서는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엘리야와 엘리사 마찬가지죠. 사도바울과 디모데 마찬가지 입니다. 사도바울이 그가 걸어간 길이 있습니다. 그의 영적인 아들 디모데에게 그는 이 말씀을 계속해서 전파함으로 그 다음세대에 전하라고 말씀 했죠. 이제 솔로몬은 하나님께서 그 아버지를 통해서 그에게 전달해 준 위대한 왕국을 받았는데 솔로몬의 역사, 사역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그 백성들,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을 어떻게 잘 인도하고 그들에게 복지를 안겨 주느냐, 통치자로서 그의 책임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솔로몬을 통해서요. 위대한 꼐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윗이 나는 백향목 궁에 거하는데 여호와의 궤는 휘장속에 있다라고 할때 그는 마음속에 어느날 내가 성전을 하나님을 위해서 지어드리겠습니다고 말씀 했지요. 그런데 그날밤에 나단을 통해서요.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전을 지을수가 없다. 네가 나에게 전을 지어준다는 것을 받아들일수 없다. 상당히 놀랄만한그런 답변이었죠. 그 답변을 받았을때요. 하나님께서 물론 다윗의 태도를 보셨을 겁니다. 다윗은 그때 어떤 태도를 취했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네가 나를 위해서 전을 짓는것이 아니고 내가 너의 집을 세워줄 것이다.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거기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집을 세워주신다고 하는것은 그의 왕가가 끊이지 않고 지속될것을 말씀 하셨는데, 사실상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후손으로 오셔서요. 그가 이룰 왕국은 영원히 변치 아니하고요 멸망하지 않는 그런나라 입니다. 하나님은 물론 그것을 생각하시면서 그 집을 짓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다윗의 후예중에 수많은 왕들이 지나고 난 다음에 유다 왕국은 망해 버립니다. 바벨론으로 가죠. 그러나 그것은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요. 이제 그리스도를 통해서 영원한 왕국이 이루어질것을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 집을 세우겠다고 말씀 하셨죠. 솔로몬은 그런 나라를 받았을뿐 아니라 솔로몬에게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성전을 짓는 것입니다. 솔로몬의 사역중에 그가 왕으로서 그의 나라를 통치하고 성전을 짓게 되는데요. 성전은 그가 왕이 된 후에 4년후에 짓는데 4년 그 안에, 그 초기에 그는 무엇을 했을까 라고 하는것을 지금 말씀하고 있는 것이죠. 성전을 짓기 전에 물론 다윗은 평화를 온 세상에 깃들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평화의 왕이죠. 평화가 있지 않고는 성전이 세워질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실상 성전이 세워질때도 소리가 안들리게, 채석장에서 다 돌을 다듬어서 거기서만 쇳소리가 났지요. 그러나 성전 자리에서는 소리가 안났습니다. 그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성전은요, 그것은 하나님이 고안하신 것이고 하나님이 거하시는곳은 화평한 곳입니다. 평화가 깃든 곳입니다. 왜냐하면 그곳은 우리 주님께서 평강의 왕이시고요. 그분께서는 우리의 평화를 위해서 이 땅에 오셨고요. 그것을 위해서 피흘려 돌아가시고 우리에게 위대한, 진정한 평화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성전이 이제 평화시대에 지어지고 또 성전이 지기지기 위해서요. 준비 작업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희들이 또 솔로몬이 어떻게 번영하느냐에 대해서도 보지만 사실상 3장에서 그가 어떻게 지혜를 받았느냐, 이것이 3장의 대부분의 말씀 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3장 1절에서 3절 말씀을 보면요, 솔로몬이 앞으로 어떻게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있는가 하는점을 지금 지적하고 넘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문제의 가능성, 문제의 잠재력, 이것에 대해서 우리는 잘 분별하고요.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와같은 문제가 이제 점점 싹이트고 잎이나고 자라지 않도록 처음부터 그 문제를 제거해야 합니다. 그래야 왕국이 잘 발전하고요. 확립되고 그 다음에 우리 그리스도인의 개인의 삶이나 가정이나 모임에 이 진리를 적용한다면 동일한 진리를 우리가 이 말씀에서 발견할수 있고 통찰력을 얻을수가 있는 것입니다. 첫째, 1절 말씀에 보면 이 석절 말씀에서 솔로몬이 그 당시에는 이와같은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그 당시에는 그렇게 큰 문제같아 보이지 않는데 나중에 이것이 문제가 될수있는 요지가 있다라는 점을 성령님은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첫째, "애굽왕 바로로 더불어 인연을 맺어 그 딸을 취하고 데려다가 다윗성에 두고 자기의 궁과 여호와의 전과 예루살렘의 주위의 성이 필역되기를 기다리니라" 첫번째, 바로의 딸, 공주와 결혼을 하지요. 솔로몬은 마흔살에 왕이 됩니다. 그것을 열왕기상 11장 말씀을 보면요.
"솔로몬이 예루살렘에서 온 이스라엘을 다스린 날 수가 사십년이라"(왕상 11:42).
"르호보암왕이 예루살렘에서 스스로 강하게 하여 치리하니라 르호보암이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사십 일세라 예루살렘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하여 그 이름을 두신 성에서 십 칠년을 치리하니라 르호보암의 모친의 이름은 나아마라 암몬 여인이더라"(대하 12:13).
솔로몬이 즉위하고 난 다음에 사십년을 치리했고 르호보암이 41세에 왕이 됬다면 계산상, 솔로몬의 즉위를 보면 한살이거든요. 다시 말해서 그는 그의 어머니가 나아마고 암몬 여인입니다. 이 암몬 여인과 이미 결혼해서 아이를 낳았어요. 그리고 아직 왕자때 낳았어요. 그리고 르호보암이 이제 한살이 되었을때 그는 왕이되죠. 그리고 난후에 열왕기상 3장 말씀에서는 그 후에, 왕이 되고 난후에 바로의 공주를 아내로 취했다는 말입니다. 솔로몬은 아내가 700이고요. 빈장이 300이라. 천명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경 말씀을 보면 그 천명 중에 몇명이 이스라엘 사람일까? 우리는 알수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단 한번도 그의 아내가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그의 아내중에 누가 이스라엘 사람이라 이렇게 언급한 적이 없습니다. 물론 모압에서 암몬에서 각국에서, 여기 애굽의 바로의 공주, 여러가지 데려왔다고 하는 기록이 있지만 이스라엘 사람의 여인중에 아내를 삼았다고 하는 말씀은 여기 없어요. 물론 그 말씀은 이스라엘 사람중에 단 한사람도 아내로 취하지 않았다고 단정할수 없습니다만은 분명한것은 성경 말씀에 그런 기록은 없다는 그 말입니다. 오히려 이방사람들을 취했다는 말씀은 곳곳에 있습니다. 그것은 무얼 말하고 있는가? 왜 솔로몬은 아버지도 마찬가지고요. 많은 아내들을 취했지요. 왜 아내들을 많이 취했을까? 특별히 정욕적인면 보다는이와같은 일을하게될때 아내가 많은것은요. 이 당시의 왕들의 권력을 상징해 주는 것입니다. 왕들의 그들의 힘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하나의 교만 입니다. 신명기 17장 말씀을 보면요. 이제 이스라엘 왕이 세워져야 되는데 그때가 되면 왕은 첫째, 하지 말아야 될것, 세가지를 말씀하고 있죠. 은금을 많이 축적하지 말고 말을 많이두지 말고 아내를 많이두지 말라 이렇게 말씀했어요. 솔로몬은 이것을 어기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나중에 가서는 수많은 아내, 천명의 아내와 첩을 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솔로몬은 아버지로부터 왕국을 받았을때 그는 국제적인 역할을 하는 그런 왕이 되었습니다. 전에 사울때에 블레셋에 의해서 두려워서 벌벌떨고 심지어는 낫이나 병이나 창이나 이런것을 만드는 대장장이들을 다 빼앗아가고 두려워서 갈수가 없는 그런 시대도 이스라엘에게 있었죠. 이스라엘은 대단히 연약했습니다. 사사 시대나 심지어 사울의 때나 연약했습니다. 다윗이 이제 골리앗을 격파하고 그 후에 다윗은 모든 전쟁에 나가서 승리했습니다. 단 한번도 그가 패했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그래서 평화를 가져왔고 그 아들 솔로몬이 왕이 되었을때 그의 위상이라고 하는것은 국제적인 것이었습니다. 모든나라 사람들이 그를 우러러 봤다라는 말입니다. 그와같은 때에 그가 그 마음속에 이런 마음이 있지 않았을까. '내가 국제적으로 이렇게 위엄이 있고 위상이 있는 왕이라면 그렇다면 권력의 상징인 아내들의 숫자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마음이 언제부터 있었을까, 그건 우리가 알수 없지만요. 적어도 여기 애굽왕 바로의 딸과 결혼한다고 할때 이것은 물론 그가 여자를 특별히 좋아해서라기보다요. 그는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요. 애굽과 연혼함으로 인해서, 공주와 연혼함으로 인해서요. 나라의 안보를 지킬 필요가 있다라는 생각도 했다는 것입니다. 이미요, 우리는 다윗 시대에 이스라엘 북쪽으로는 두로왕과 화친을 하고 있었고요. 두로왕 히람이 다윗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북쪽과는 전쟁이 없습니다. 그러면요, 동쪽은 어떻습니까? 동쪽은 이미 솔로몬이 암몬 여인과 결혼해서 르호보암을 낳았잔아요. 동쪽도 연혼을 한겁니다. 이제 남쪽과 애굽과 연혼을 함으로 인해서 또다시 이와같은 정치적 군사적인 유대관계과 동맹을 구축하고 있었다 그 말입니다. 율법에서요, 하나님 말씀에서 가나안 사람들과는 결혼하지 말라. 이렇게 분명히 말씀 했습니다. 그러나 애굽사람과 결혼하지 말라. 이런 분명한 말씀은 없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와같은 것에 대해서 그렇게 즐거워하고 계시지 않는것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왜냐하면 솔로몬의 아내가 바로의 딸이라고 하는것은 잘 아는데도, 열왕기상 이 말씀에서, 3장 1절 말씀부터 시작해서요. 11장까지 다섯번이나 반복해서 바로의 딸과 결혼했다는 말이 자꾸 반복해서 나온다는 겁니다. 그 말씀은 무슨말씀입니까? 성령께서 이 말씀을 기록하게 될때요, 그것을 마음에 두고 계시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후에도 이사야가 이런 말씀을 했죠.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찐저 그들은 말을 의뢰하며 병거의 많음과 마병의 심히 강함을 의지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를 앙모치 아니하며 여호와를 구하지 아니하거니와"(사 31:1).
도움을 위해서 애굽으로 가지말라. 이것은 하나님께서 항상 하신 말씀입니다. 애굽은 세상을 상징하고 있죠.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래서 애굽, 이것은 도움을 이스라엘이 자칫하면 구하러 갈만한 그런 가능성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말이 많습니다. 유명하고 가장 질 좋은 말이 거기 있죠. 하나님께서는 말을 의지하지 말라. 말을 의지하는 것은 그 근육을 의지하는 것이다라는 말씀을 하고 있죠. 그래서 애굽으로 가지 말라고 하는것은 하나님 뜻인데요. 솔로몬은 이제 바로의 딸과 결혼하고 있다. 그것은 온전히 하나님만 의지하고 그의 국가의 안보를 하나님을 향해서 요청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그런 자세는 아니었다라고 하는것을 우리가 이 말씀에서 살펴볼수 있는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하나님 말씀에 뭐 그런게 있냐? 라고 말하지만요. 이것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서 온전히 전심으로 하나님을 따른것은 아니었다고 하는것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것은요,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히 반대하는 행위가 있어요. 어떤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순전하게 전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것은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기는 하지만 전심은 아닌 그런 부분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문제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만일 이와같은, 우리의 행동이 이와같은 것이라면 두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런 자세에서 어느날 내가 주님을 섬기지 않았구나 라는 것을 깨닫고 전심으로 섬기든지 아니면 그보다 더 흔한 가능성은요, 전심으로 섬기지 않았는데 점점 더 전심으로 섬기지 않고요. 완전히 불순종할수 있는 길로 갈수 있는 가능성이 더 농후하다 그말입니다. 솔로몬의 나중의 이 위대한 영화로운 나라, 지혜가 가득하지요. 부가 가득하지요. 지혜를 듣기 위해서요. 수많은 왕들과 여왕들이 찾아왔어요. 예루살렘에 쇠도했습니다. 그 다음에 예루살렘에 돌이 도처에 있는것보다 은이 더 많다, 부가 넘쳤습니다. 나라의 위상과 명성과 여호와의 이름으로 얻은 이 위대한 이름, 이런 모든 것들이 어느날 증발해 버립니다. 사라져 버렸습니다. 왜냐하면 무언가 균열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는거죠. 우리가 세월호도 그렇고 모든 배가 침몰하게 될때요, 처음 쾅 하고 부딧칠때 그냥 바로 들어가지 않죠. 한 동안은 견딥니다. 그래서 물 위에 떠 있기는 떠 있어요. 그런데 시간이 점점 가면은 그것이 기울어지고 마지막으로 물속으로 들어가게 될때 대단히 급속히 들어가버리죠. 그러나 그 기간은 있다는 말입니다. 만일 우리가 부딧쳤어도, 당장은 물이 안빠진다는 것을 주장하면서 계속해서 그 길을 걸어간다면 우리는 마지막으로 영원히 빠져들어가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요. 우리는 여기 3장 1절 말씀에서 그런데 솔로몬의 3절 말씀에서 참 묘한 관계가 있어요. 그는 여호와를 사랑했다고 하는데요. 여호와를 사랑했고 그 뒤에보면 지혜를 또 얻었거든요. 그런데 성령님께서요. 이 사실을 1절에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왜냐하면요, 그가 번영할수 있는 놀라운 일들이 있긴 있었지만 그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었지만 그러나 여기에 구멍이 있었다고 하는것을 말해주는듯 합니다. 그 다음에 2절 말씀을 보면요, "그때까지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전을 아직 건축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들이 산당에서 제사하며" 산당에 관한 말이 나옵니다. 성전이 아직 건축되지 않았죠. 성전 건축이 안됬으므로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디서 예배를 합니까? 다윗은 예배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노래 잘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전쟁의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그 왕이 이제는 세상을 떠났어요. 솔로몬이 왕이 되었습니다. 다윗이 그렇게 당부한 것은 "너는 이제 반드시 성전을 건축하라" 다윗은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게 될때 솔로몬은 그 전 건축은 너무나 어마어마한 것이다. 너무나 영화로운 것이다. 그것을 건축하기 위해서는 솔로몬은 그것에 비해서 너무 어리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왕은 그것을 많이 염려하고 기도하고요. 그가 건축하는 일을 위해서 그가 그 모든일을 왕이되고 성전을 건축할수 있는 모든일을 할수 있도록 그가 살아 생전에 할수있는 모든 도움을 그는 모든힘을 다해서 기초를 쌓아놨습니다. 성전 건축의 수많은 재료를요, 전쟁에 나가서 승리함으로 인해서 전리품을 어마어마한 분량을 가져다가 쌓아놓고 준비해 놓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아들에게 당부했습니다. "네가 건축하는 그 전은 화려하고 장려한 그와같은 전이기 때문에 그것을 위해서 너는 모든힘을 다하라" 라고 말씀했죠. 솔로몬은요, 그의 아버지는 전에 대한 관심과 전에 대한 그와같은 소원, 그것은 너무나 각별했다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솔로몬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어떻게 자기를 위해서 준비했었고 모든힘을 다했는가라고 하는것을 솔로몬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요, 그 전이 이제 건축되고 하나님을 예배 드려야되고 이제 이런것을 알고 있었습니다만은, 그러나 아직은 전이 건축되기 전이었다고 말하고 있죠. 그렇다면 그 당시에 사람들은 어떻게 예배했을까? 우리는 사무엘 상을 펴면 제일 첫번째, 블레셋과 전쟁이 일어나죠. 그런데 전쟁에 패합니다. 그래서 장로들이 이스라엘의 인도자들이 이걸 어떻게 해결해야 될까, 하다가 그러면 언약궤를 끌고 나와서 이 언약궤가 옛날 모세때에 광야에서 언약궤와 함께 전쟁했을때 이기지 않았으냐? 그래서 궤를 끌어오곤 나가서 전쟁에 들어갔죠. 그 다음날도 여지없이 패했고요. 전날보다 더 엄청난 사망자가 나왔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겉모양은 궤를 모셔나오는 겉모양은 있었지만 그러나 그들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순종은 없었기 때문에요. 하나님께서는 그같은 겉모양, 형식,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역사하지 않지요.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패하게 하시고 그들에게 교훈하시고 경고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이제 궤는 뺏겼지요. 궤가 뺏기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 그리고 며느리가 아이를 낳게 될때, 죽으면서 이가봇이라고 했지요. 여호와의 영광이 떠났다. 사실은 엘리 가문이 멸망합니다. 사실은 아비아달이 파직을 당하면서요. 엘리가문은 완전히 멸망하죠. 왜냐하면 원래 아론의 아들들 중에서요, 첫 두 아들은 이상한 불을 드리다 죽었죠. 그래서 셋째아들 엘리에셀이 대제사장이 되는 것입니다. 엘리에셀이 대제사장이 되어 쭉 오다가 어떤 시대, 아마 사사시대가 아닌가 생각이 되는데요. 그때 이다말이라고 하는 넷째 아들쪽에 이제 대제사장이 되버렸어요. 그것이 엘리 입니다. 엘리의 가문이, 이제 홉니와 비느히스가 하나님의 예배에 대해서 불륜한 행동을 하고 하나님께서 심판하시죠. 엘리 가문을 심판하셨어요. 그리고 실로를 무너뜨려 버렸어요. 거기에 회막이 있었고요. 거기에 궤가 있었고, 실로는 가버렸죠. 세월이 지나고 난 이후에, 이제 오랜 세월이 지나고 난 이후에 실로는 떠나가버렸지만, 하나님의 영광은 떠났죠. 그러나 회막이 있었습니다. 언약궤는 뺏겼는데 회막을 어디에 쳤습니까? 기브온에 쳤습니다. 기브온에 쳤고 다윗때에, 다윗은 마음속에 언약궤를 기럇여아림으로부터 다시 모셔서 예루살렘으로 모셔왔지요. 그래서 그는 어느날 자기는 백향목 궁에 거하는데 언약궤는 휘장에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전을 지어드려야 겠다. 그런 생각을 한거죠. 그래서 이 당시에 솔로몬은 아직까지도 이상한 현상이 있었습니다. 회막은 기브온에 있었고요. 언약궤는 예루살렘에 있었습니다. 이렇게 따로따로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와같은 때에 어디서 예배를 드려야 될까, 사실은 구약시대에 회막이 있었으면 거기에 언약궤가 있어야 되고요. 거기가서 예배를 드려야 될텐데, 지금 이상한 시대가 상당히 계속되어 오고 있었어요. 그래서 다윗은 사실 그것에 대해서 마음을 주님앞에 드리면서 "제가 성전을 지어드리겠습니다." 하는 뜻은 바로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솔로몬 때까지 연장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아직 이 시대는 회막 따로 있고 궤는 따로 있었다. 이와같은 시대에 산당들이 있었습니다. 나중에 성전이 이제 세워지면 유대교라고하는 것은 언제나 일년에 세번, 유월절, 오순덜, 초막절 세번은요, 장정들이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하나님 앞에 알현해야 하죠. 예배 드려야 하죠. 이것은 하나님의 법이었습니다. 오래전에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이예요. 그렇다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언제나 전에 가서 주님이 계신 곳에 가서 드려야 되는데 예배를 드려야 되는데 이 당시에 산당이라고 하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산당 그러면 이스라엘 역사에서 우상숭배하는 그런곳이라 잘 알고 있죠. 그러나 처음에 산당은 그런곳이 아니었습니다. 여기저기 도처에 산에, 그러니까 산당이니까 높은곳입니다. 높은곳에 사당을 만들고 거기서 자기 나름대로 여호와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것이 산당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와같은 산당이 나중에는 우상숭배지로 완전히 변화되어 버리죠. 여기서 우리가 산당과 관련해서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요. 타락이라고 하는것은 어디서부터 오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조금씩 조금씩 무너뜨리게 될때 오는 것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원래 산당은요, 자기 나름대로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만든 것입니다. 우상숭배를 위한것이 아니었어요. 그런데 산당이라고 하는것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산당이라고 하는것을 생각하게 될때 한가지 생각할수 있는것은 편리주의 입니다. 왜냐하면 회막까지 가는것은 너무 멀다. 그러니까 옆에다가, 가까운 산에다가 뭐 하나 만들어서 거기서 예배드리면 그러면 우리 마음이 주님을 예배하는 것이 아니냐? 우리는 주님을 예배하는 것이지, 우상을 섬기는 것이 아니다. 뭐 이렇게 주장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 마음속에는 거기까지 가는것은 너무 멀다는 생각이 편리주의 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는데요. 편리주의가 하나씩 하나씩 우리 마음속에 들어오면요, 모임의 모양도 이렇게 저렇게 서서히 변하는 것입니다. 집회 참석하는 것부터 시작해서요. 여러가지 편리주의가 있습니다. 이런이유, 저런이유로요. 이 바쁜 시대에 할일도 많은일에 학생은 학생대로 바쁘고요. 사업하는 형제 자매님들은 그것대로 바쁘고 직장 생활 하는 사람들은 다 바쁘죠. 할일이 많이 있죠. 그것을 골몰하다보면 주님을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생각하지 않고요. 내 일에 대해서 먼저 생각하다보면 우리는 산당이라고 하는 원리가 우리속에 찾아 온다 그말입니다. 즉, 편리주의가 우리에게 온다. 그래서 회막까지 가지 않아도 얼마든지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할수 있다. 라고하는 새로운 철학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만들어 낸 것입니다. 인간의 발명품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어떤 원칙 일부를 끌어다가 개인의 생각을 가미해서 만들어낸 인간의 발명품이다. 전혀 나쁜것은 아니예요. 보세요, 여기 이 당시의 솔로몬 시대의 산당은 절대로 우상숭배하는 그런 장소가 아니었어요. 그래서 그들은 과감하게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주님을 예빼하기 위해서 산당을 만들었습니다." 라고 주장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마음속에 편리주의의 생각을 절대로 하나님 앞에서 가질수 없다 그말입니다. 바로 그 씨앗이, 그 편리주의라고 하는 씨앗이 나중에는 어디까지 갑니까? 우상숭배까지, 그래서 산당은 우상숭배 장소까지 변질해 버리는 것이다. 이 이스라엘의 역사를 우리가 잘 살펴볼때, 어떻게 변질되어 가는가, 어떻게 타락이 이제 시작되고 그것이 점점점 더 뿌리를 내리는가, 라고 하는 그 근원지를 우리가 살펴볼수 있습니다. 그와같은것을 우리가 발견하게 될때 그것은 우리의 개인적인 삶에 있어서나 가정 안에서의 생활이나 모임 안에서의 주님 섬기는 모든일에 모두가 다 공통적으로 적용이 될수 있다라고 하는 지혜 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이 말씀에서 발견하게 되면 우리는 좀더 주님 앞에서 우리 자신이 철저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주님앞에 철저하게 될때, 우리는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자라고 하면요, 많은 사람들 마음속에는 벌써 거부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 자꾸 나에게 강요하느냐? 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요. 여러분 이것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순종하지 않으면 여러분과 제가 당해야 될 많은 손실, 그리고 엄청난 손해, 이것은 말로할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요. 주님 말씀 순종하지 않는것은 편리주의적인 그런 생각을 가지고 불순종을 하던지, 일부 불순종이요, 그 일부 불순종이 나중에는 전체적인 불순종으로 바뀌어버릴수 있죠. 그런 모든것들을 우리가 생각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히 순종하는 것은 언제나 어느때나 누구에게나 우리에게 유익하다고 하는것을 마음속에 두십시요. 이 산당에 갔습니다. 사실, 산당이 우상숭배로 바뀌게 되는것이 누가 시작해 주는 것입니까? 이 멋지고 아름답고 유명하고 저희 마음속에 참 감탄할만한 왕, 솔로몬입니다. 그의 지혜가 얼마나 어마어마합니까? 그의 전에도 그런 사람이 없었고 그의 후에도 그런 지혜를 가진 사람이 없다.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잠언의 어마어마한 분량을, 잠언과 같이 우리에게 그 고귀한 책을 쓴 사람이 솔로몬인데 이 사람이 우상숭배를 도입했다고 하면 여러분은 믿겠습니까? 믿어지지 않는 기이한 일이라고 생각 되고요. 많은 부분에서 솔로몬은 위대한 사람이라 생각하고 그냥 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의 삶을 우리가 조심스럽게 살펴보게 될때, 어디서부터 이런 문제가 생겼는가라고 하는점을 보십시요. 여기 1절 말씀에 바로의 딸과 연혼했다, 여기서부터 시작해서 아직까지 그렇게 아내가 많지 않겠지요. 그러나 나중에는 어떻습니까? 천명에 이르는 수많은 여인들, 아내가 천명이면요, 일년에 얼마나 자주 만나면 몇번이나 만나겠습니까? 각인을 몇번이나 만나겠어요? 그것은 상징적인 것이고요. 권력의 상징이고요. 그리고 아내를 많이 들여온다고 한다면 하나님이 이때보다 오래전에 모세때에 경고하신 말씀이 있어요.
"왕된 자는 말을 많이 두지 말것이요 말을 많이 얻으려고 그 백성을 애굽으로 돌아가게 말것이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시기를 너희가 이 후에는 그 길로 다시 돌아가지 말것이라 하셨음이며 아내를 많이 두어서 그 마음이 미혹되게 말것이며 은금을 자기를 위하여 많이 쌓지 말것이니라"(신 17:16-17).
여기 아내를 많이 두어서 마음이 미혹되지 말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솔로몬이 많은 아내를 두었을때요. 그 아내들은 어떤 아내 입니까? 우상 섬기는 아내들입니다. 이방 여인들입니다. 그래서요. 그의 마음에는 물론, 우상을 섬기겠다는 그런 마음은 가지고 있지 않았고요. 산당은 여전히 하나님을 섬기는 곳이라 이렇게 생각을 했는지 모르지만요. 심지어는 그가 성전을 건립해 놓고 난 다음에 이것은 노년에 일어난 일입니다. 수많은 아내들을 얻었어요. 그는 성전을 건축한 사람이예요. 그 아버지의 그런 당부를 그는 실천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아내들이 언제부터 생겼습니까? 우리는 3장 1절 말씀에서부터 서서히 시작되어 왔다는거죠. 그래서 그 아내들을 통해서 미혹됬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아내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요. 그렇게 안할수가 없지요. 아내를 어떻게 기쁘게 안합니까? 그러니까, 그들이 우상을 섬기니까 우상을 섬기도록 장려를 해주었다. 혹시 자기는 섬기지 않아도요, 그것을 장려해 주다 보니까, 나중에는요. 감람산에 수많은 산당들을 세웠어요. 후에 여러분께서 열왕기, 역대기를 읽어보면 감람산을 부패산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거기가 수많은 우상숭배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이 만들었어요. 솔로몬이 아내들 때문에 만든 것입니다. 우리의 타락은요, 우리의 실패는 조그만것부터 시작된다. 그래서 저는 열왕기상 3장 1-3절 말씀이 대단히 중요한 것이라 이렇게 생각 합니다. 아무리 우리가 아름답고 말씀을 순종하고 주님을 사랑한다 해도요, 우리속에 찾아오는 이와같은 구멍들, 이것을 처음부터 조심스럽게 막아내지 못한다면, 그와같은 구멍은 조금씩 조금씩 커져서 나중에는 우리로 하여금 타락하게 만들수 있다라고 하는 교훈을 여기서 받게 됩니다. 3절 말씀에 "솔로몬이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부친 다윗의 법도를 행하여 오히려 산당에서 제사하며 분향하더라" 산당에서, 물론 여호와를 예배 했습니다. 그는 여호와를 사랑했습니다. 3장 3절 말씀에요, 여호와를 사랑했어요. 그런데 11장 말씀을 보십시요.
"솔로몬왕이 바로의 딸 외에 이방의 많은 여인을 사랑하였으니 곧 모압과 암몬과 에돔과 시돈과 헷 여인이라"(왕상 11:1).
여기 많은 여인을 사랑했다 했어요. 솔로몬이 여호와를 사랑했는데요. 우리의 첫사랑이 나중에 가서는 다른 사랑으로 변질되어 버린다면 어떨까라고 하는것을 생각해 보세요. 이것은 우리에게 많은 영적인 통찰력과 또 우리 마음속에 주님이 주시는 경고라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제 4절 말씀 보겠어요. 솔로몬이 이제 기브온으로 갔습니다. 거기에 산당이 있죠. 그래서 여호와를 예배하러 가서 거기에 산당이 컸습니다. 그리고 일천번제를 드렸지요. 형제 자매님들, 일천번제를 드렸다면요. 이게 하루 이틀에 되어질 일이 아니죠. 얼마나 많은 희생제물을 잡아서 그것을 깨끗케 씻고 또 제단에 올려서 주님앞에 드리는 일을 하나씩 하나씩 한다면 어느기간동안 그가 여기 머물렀어야 될까? 우리는 가히 짐작이 됩니다. 그리고 어느날, 거기 한동안 머물고 있는데 어느날 밤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셨어요. 여러분, 열왕기상 3잠, 6장, 9장 11장, 네번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제일 첫번째는요, 기브온에서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나타나셔서 솔로몬의 필요를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내가 너에게 뭘 줄까?" 이렇게 말씀했죠. 1-3절은 솔로몬의 미래가 이제 어떻게 어려움이 올까 하는 작은 암운이 기록되어 있었다면 4벌부터는요, 그가 이제 밤에 꿈을 꾸었을때요.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내가 너에게 무얼줄까? 라고 말씀하셨을때 그가 어떻게 답변하느냐 라고 하는 겁니다. 이 선택이라고 하는거죠. "내가 너에게 무얼 줄까?" 라고 할때 자기 마음속에 주님한테 "이것을 주십시요." 라고 말씀을 드려야 하는데요. 그러면 수많은 것들중에 무얼 선택해서 이것을 주십시요라고 말해야 할까, 선택입니다. 선택이라고 하는건요, 우리 일생을 살게될때 사실은 수많은 상황들이 나에게 찾아오는데 그 상황들은 나로 하여금 선택하게 만듭니다. 선택하지 않고는 내가 앞으로 나갈수가 없습니다. 거꾸로 말하면요, 우리의 선택은 우리가 무얼 선택하느냐 하는것은 결국 우리를 만들어준다고 하는 것입니다. 선택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런데 선택은요, 분별력이 있어야 되고 가치관이 있어야 됩니다. 분별력과 가치관이 없으면 절대로 바른 선택을 할수가 없죠. 선택은 아무거나 할수 있지만, 사지선다중에 넷중에 하나 선택, 열개중에 하나 선택, 선택은 아무나 할수 있지만 바른것을 선택하느냐, 아니면 틀린것을 선택하느냐 그것은 우리의 미래를 결정해주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요. 우리가 분별력을 얻고 하나님의 영원한 가치를 우리르 깨닫는다면 우리가 선택하게 될때 분별력과 가치관 속에서 바른것을 선택할 겁니다. 그렇다면 바른것을 계속해서 선택해가면 우리의 삶은 번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틀린것을 선택한다면 우리는 멸망하지요. 많은 손해를 보지요. 우리는 우리 자녀들이요. 선택하는 법을 가르쳐 주는것, 이것이 자녀교육의 중요한 부분이죠. 그렇다면 이미 선택은 분별력과 가치관이 있어야 한다고 했는데요. 그가 하나님을 알고요, 하나님의 영원하심과 영원한 가치를 안다면 그는 이제 거기서부터 선택할수 있는 그런 길을 알게 될 겁니다. 그렇지못하다면 잠깐있는, 반짝하는 그런것을 선택한다면 그것은 얼마가지 못하고 많은 손해를 보게되죠. 그래서 부모는 자식에게 그와같은 지혜를 알려 줘야 합니다. 주님을 통해서요. 그런데 이와같은 바른선택을 못하게 만드는 것 중에 중요한것은 동료 압력입니다. 아이들이 자기 주변에 아이들로부터 압박을 받게 될때요, 거기서 선택을 어떻게 합니까? 그들은 즉시 만족을 위해서 선택 합니다. 즉시만족, 그리고요. 외모를 중시하는 그런 선택을 하죠. 그것은 다 잠정적으로 있다가 말아버리는 그런 선택을 하는것, 동료 압력이라고 하는것은 언제나 즉시 만족입니다. 즉각적인 만족을 아이들은 이야기 함으로 인해서 즉각만족이니까 다 그걸 선택 합니다. 그걸 선택하지만 결국은 영원한 것을 다 놓치고마는 그런 선택을 하도록 동료 압력은 그것을 전해준다. 또 하나는 겉모양, 겉모양이 그럴듯하면 그것을 선택하라고 하는거죠. 성인들은 어떻습니까? 성인들도 동료 압력이 있어요. 어떤 동료 압력입니까? 학교 다닐때는 주변의 친구들이 나보고 이거 해라, 저거해라. 이렇게 동료 압력을 받지만 성인들은 어떤 동료 압력을 받습니까? 메스컴, 인터넷, 그리고요. 텔레비전에서 홈쇼핑, 여러분 요즘에 홈쇼핑이 텔레비전 채널에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그냥 틀어놓으면 홈쇼핑이예요 거의 전부가 홈쇼핑이예요. 얼마나 그럴듯한 이야기가 나옵니까? 얼마나 멋진 아이템들이 계속해서 나오고요. 빨리 안하면 다 매진된다고 얼마나 압박을 가합니까? 잡지나 티브이나 인터넷이나 이것은 폭격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정보의 과부하가 될 정도로 폭격을 하고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요, 즉흥구매, 여기서부터 시작해서 수많은 쓸데없는것들, 선택해서 거기에 내가 시간 들이고 또 돈들이고 또 에너지 들이고 모든것을 들이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사단은 모든 방법을 통해서요, 우리가 바른 선택이 아니고요. 영원한 가치가 있는 선택이 아니고요. 쓸데 없는것, 잠시 있다 사라져버리는 것, 별 유익도 없는 것들을 선택하도록 만들죠. 이것이 동료 압력입니다. 동료 압력은요, 어릴때부터 시작해서 죽을때까지 계속해서 동료 압력, 즉 세상의 압박입니다. 사단의 우리를 향한 공격입니다. 우리를 세뇌하려고 하는거죠. 우리의 가치관을 다른것으로 전향 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선택의 문제 입니다. 솔로몬이 밤에 꿈을 꾸었어요. 꿈을 꾸었을때 하나님께서 "내가 너에게 무얼 줄까?" 선택해야 합니다. 선택해야 하는데요, 어떤 선택을 했을까? 사실 하나님이 우리보고 "선택하라.내가 너에게 무얼줄까?"라고 하는것은 시험 입니다. 나에게 요구하면 내가 너에게 주겠다고 하는것은 어떤것을 요구하는것은 그사람의 마음이 완전히 발가벗겨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것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죠. 그 사람이 그때까지 무얼 원했는가 하는것이 그대로 나타나지 않겠어요? 뭐든지 네가 말하면 나는 주겠다고 할때, 그 사람 마음속에 그때까지 소원하던 것을 말하겠죠. 다시 말해서요. "내가 너에게 주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은요, 그것은 사실상 우리를 테스트하는 말씀 입니다. 우리속에 있는 소원이 드디어 드러나느 순간이 되는 것이죠. 이런 이야기를 들었을때, 꿈에 솔로몬은 나는 이것을 원합니다. 이렇게 말하지 않고요, 이 순서를 보세요. 솔로몬은 지혜로운 사람이었어요. 솔로몬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는 지혜로운 사람이기 때문에요, 그의 아버지가요. "너는 요압을 그냥 두지 말고 노년의 백발로 평안히 가게하지 말고 그를 제거하라."라고 할때 이렇게 말하죠. "너는 지혜로운 사람인즉, 그 지혜를 따라서 그를 처단하라." 왜냐하면 왕국의 안보는 요압이 살아있으면 안되는 겁니다. 그는 다윗의 생애 동안에 얼마나 다윗에게, 그가 수많은 공을 세우기는 했지만 그는 능력자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요압을 괘씸하게 생각하고요. 그는 다윗을 대단히 어려움과 곤궁한 곳으로 끌고갔던 그런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그가 세상을 떠나면 자기 아들이 왕이 되어서 왕국을 다스리게 될때 왕국이 견고하게 설수가 없다라는 의미에서 그를 처단하라고 말했어요. 다윗은요, 자기의 개인적인 감정 때문에 요압을 처단하라고 한 것이 아니었어요. 만일 개인적인 감정이라면요. 자기 생애동안에 얼마든지 자기가 처단할수 있었어요. 초기에는 어쩌면 힘들었을지 몰라요. 다윗이 초기에 왕이 되었을때 요압을 핸들하기가 어려웠을지 모르지만 말년에 갔을때는요, 후기에 가서 그가 얼마든지 그를 처단할수 있었어요. 그럼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에게 그것을 당부를 했습니다. 왜냐하면 왕국의 견고함 때문에, 그런데 여기 그가 지혜로운 사람으로요, 하나님이 무얼줄까라고 얘기할때 그는 대뜸 "지혜 주십시요"라고 말하지 않고요. 처음에는 하나님 앞에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감사하고요. 부왕을 통해서 얼마나 수고하셨는가,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어떻게 자기로 하여금 보좌에 오르게 했는가, 먼저 그것을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말씀을 드렸어요. 우리는 하나님 앞에 기도할때도 그렇죠. 우리가 간구부터 이야기 하는것이 아니고 하나님 앞에 나가게 될때 하나님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고 예배하고 그리고나서 우리가 우리의 필요를 얘기하죠. 주의 기도는 주기도문은 그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십시요." 나중에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그것부터 말하지 않고요. 먼저 하나님 앞에 그런 말씀을 하지요. 그리고나서요, 그는 자기가 너무 작다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종으로 종의 아비 다윗을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셨사오나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줄을 알지 못하고"(왕상 3:7).
자기는 작은 아이라, 우리는 그가 왕이 되었을때 이미 르호보암이 한살 되었을때였죠. 그리고 사십년을 통치했죠. 그는 적은 나이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요, 자기가 그의 백성들을 통치하기에는 너무나 작은 사람이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겁니다. 이것이 지혜자 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요, 자기가 지혜가 모자르다고 하는것을 아는사람이 지혜자 입니다. 자기는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이 겸손한 사람입니까? 겸손한 사람은요, 내가 참 겸손한 사람이다. 이렇게 말할수 없는 사람입니다. 겸손한 사람은요, "정말 나와같이 겸손한 사람이 있는가? 나와보라." 만일 이렇게 얘기한다면 그 사람은 참으로 오만한 사람이죠. 참 정신나간 사람이죠. 겸손과는 참 너무나 거리가 먼 사람이예요. 따라서요,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지식이 나에게 참 모자르다라는 것을 언제나 느끼는 사람, 그 사람이 지식이 있는 사람입니다. 지혜자 마찬가지 입니다. 그는 자기 백성들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자기 백성이 너무 많다. 그리고 그 백성들의 수많은 문제들을 내가 분별하고 그리고 그 문제를 해결해주기가 어렵다라고 하는 것을 절감하고 있었습니다. 자기의 무력함에 대해서 그는 느끼고 있었다 그말입니다. 모세도 그랬죠. 여호수아도 그랬습니다. 사도들도 그랬습니다. 무력함에 대해서 느끼는 사람은 책임감이 있는 사람이예요. 책임감이 있는 사람은 무력함을 느낄수밖에 없습니다. 책임감이 없는 사람은요, 책임감이 없기 때문에 그 책임을 감당할만한 그런 자기 마음속에 뜻이 없기 때문에요, 뭐 능력이 있고없고, 별 상관을 안합니다. 그러나 자기가 이 일을 정말로 잘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내가 정말로 모자라는데 어떡하면 나를 증진시킬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하겠지요. 그래서 솔로몬은 하나님앞에 "저는 작은 아입니다. 나는 무력합니다." 이렇게 말씀하고 있어요. 그 다음에 그 다음절 말씀은요, "백성은 너무 큽니다." 이렇게 말씀하고 있어요. 여러분, 르호보암때에 르호보암이 지혜가 없는 사람이예요. 사실상 솔로몬에게 슬픈것은 솔로몬은 지혜자인데 그의 아들은 지혜가 없었어요. 그래서요, 그 아들때에 가서 르호보암이 이제 나라가 분열되기 직전에 문제가 생겼을때, 그때 어떻게 합니까? 청년의 교도가 르호보암에게 와서 "당신은 얼마나 위대한 사람입니까?" 듣기 좋은 말 아니예요. 그는 아첨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받아들였습니다. 노인들은 어떻게 말했어요? "백성들에게 그들에게 필요한 것, 그들의 어려운 것, 그것을 잘 이해라고 백성들을 주시하고 백성들 앞에 가서 그들앞에 가서 엎드리라. 백성들의 고귀함을 알라." 라고 얘기했어요. 솔로몬은 그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었어요.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수많은 문제들, 그것을 해결하기에는 어마어마한 지혜가 필요하다. 백성들은, 여기 그는 뭐라고 말했습니까? 주의 빼신 백성이다. 주님이 선택하신 백성입니다. 그리고 그 백성은 큰 백성이라 말했습니다. 백성들을 우습게 안다던지 백성들을 소홀히 생각한다던지, 백성들에 대해서요, 우월감을 가지고 있다면 그 백성들을 인도하거나 다스릴수 없습니다. 그 백성들이 안고있는 문제에 대해서 깊이 마음속에 생각하고요. 그 문제에 대해서 주님앞에 고찰하고 숙고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주님의 도움을 구하고 그와같은 자세, 그것은 그 백성들을 큰 백성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큰 백성이 되기 위해서 그 백성들은요, 어떤 백성 입니까? 신명기 말씀을 보면 "너희들이 말씀을 순종하면 큰 나라가 된다"고 말씀했습니다. 선진국입니다. 솔로몬은요, 율법을 알고 있었다면 그것을 알고 있어야 했습니다. 그 백성은 큰 백성이 되어야 한다. 즉, 그 백성이 말씀을 순종하고 가야한다. 그러면, 그 말씀을 순종하고 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들, 백성들 가운데 있는 문제가 해결되야 하는것입니다. 백성들 가운데 문제가 해결이 안되면 백성들 마음에 무슨 생각이 있습니까? 불편한 겁니다. 또 억울한 겁니다. 또한 나는 합당하게 대우받지 못하다는 백성들이 많으면 어떻습니까? 그 나라는 흔들리는 겁니다. 분열하는 것입니다. 백성들의 마음에 편안함과 만족과 그리고 모든것이 공의로 다스려졌다고 하는것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할수 없어야 됩니다. 솔로몬은 나중에 잠언에서 보좌가 바로 서기 위해서는 공의와 의가 서야한다. 즉, 모든 백성이 재판을 하게될때 만족해야 하고 이의가 없어야한다 그말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사법부가 흔들리고요. 거기에 불의가 있고 백성들이 마음속에 어떻습니까? 불편합니다. 분노가 생깁니다. 그러면 국가는 흔들리는 거죠. 여기 솔로몬은 바로 그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요, 고린도 교회에서 문제가 있었어요. 그래서 성도들이 문제가 있으니까 어떻게 했습니까?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요. 법정에 갔어요. 법정에서 싸움을 했잔아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고린도서에서 긴급하게 교정서신을 쓰면서 이 문제를 이렇게 해결하지 말라고 말씀했어요. 그러면서 그는 이런 말씀했습니다.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 일을 판단할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고전 6:5).
다시 말해서 모임안에서는요, 만약에 성도간에 어떤 문제가 있다면요. 그 문제를 모임 안에서 해결할수 있는 지혜자가 있어야 된다. 그 문제의 본질을 알고 그 문제가 무엇인가, 그 이슈가 뭔가라고 하는 그 본질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 문제에 대한 판단과 결정을요, 해결할수 방향을 제시할수 있어야 한다. 그 말입니다. 그런 지혜가 있어야 한다. 그것은 어디서 옵니까? 주님으로부터 오는거죠. 바로 솔로몬은 그런 지혜를 원했습니다. 솔로몬은 지혜로운 사람이예요. 그런데 위로부터 오는 지혜를 그는 받기를 원했어요. 그래서 "주님 나에게 지혜를 주십시요." 이 아이에게 무얼 달라고 말했습니까? 그는 이제 열왕기상 3장 9절에서 이런 말씀을 했죠.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지혜로운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맞은지라"(왕상 3:9-10).
4장 20절 말씀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유다와 이스라엘의 인구가 바닷가의 모래 같이 많게 되매" 유다와 이스라엘의 인구가 바다의 모래같이 많다고 했죠. 그런데 29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지혜와 총명을 심히 많이 주시고 또 넓은 마음을 주시되 바닷가의 모래 같이 하시니"(왕상 4:29).
백성이, 인구가 바닷가의 모래같이 많은데 그들을 다스리기 위해서 지혜가 필요한데 지혜도 모래같이 많게 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충분하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충분하신 하나님입니다. 모든 필요에 대해서 그 필요를 채울수 있을만큼 충분하시다 그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와같은 일에 대해서 주님앞에 나가야 됩니다. 주님으로부터 얻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할수 있도록 왜냐하면 주님은 모든 일에 있어서 충분하십니다. 우리의 다양한 분야에 있어서, 그건 모든 분야 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 주님은 전능하거나 전지하시거나 무소부재 하시거나 또한 절대적인 하나님이 아니시죠. 주권적인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요, 충분하신 분이세요. 그래서 지혜를 구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셨어요. 그리고나서 우리 잘 알죠.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지혜만 주신것이 아니고요. 그에게 장수하는 오랜 생명도 주시고요, 부도 주시고, 그 다음에 원수 멸하는 것도 구하지 아니했다. 부도 구하지 아니했다. 생명도 구하지 아니했다. 내가 이런것들을 너에게 주겠다 말씀했습니다. 구하지 않은 것도 주셨습니다. 왜냐하면요, 하나님은 솔로몬이 이제 나라를 다스리게될때 그 나라가 견고하기를 원했어요. 그리고 그 나라가 견고해야 하나님께서 원래 가지고 있던 성전이 이제 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상 솔로몬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기브온에 꿈속에서 나타나셨을때, "내가 너에게 무얼 줄까?" 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어디 있다고 생각하세요? 솔로몬의 개인의 영예를 위해서요. 누구보다 지혜로운 사람을 만들어 주기 위해서 하셨습니까? 그것은 주님이 주신 위대한 은혜 였어요. 그러나 하나님 마음속에요, 솔로몬은 지금 어떤 역할을 감당해야 할 사람입니까? 나라를 견고히 함으로 인해서요, 가장 중요한 것은 성전을 짓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거기 거하시는 그곳에 하나님은 마음이 있었어요. 그래서 그 나라가 평화롭고 탄탄하게 건축하기를 하나님이 원하셔서 트겹ㄹ히 솔로몬에게 그와같은 은혜를 주시기를 원하셨다는 겁니다. 형제 자매님들, 오늘날 성전은 무엇입니까? 오늘날 성전은 모임입니다. 여기 주님이 계세요. 모임에 대한 관심, 모임에 대한 소원, 하나님이 모임에 대해 가지고 계신 모든 열정과 모임을 향한 하나님의 뜻, 이것에 대해서 우리도 똑같이 주님의 마음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내가 너에게 무얼 줄까?" 주님 말씀하실 겁니다. 왜? 모임이 중요하기 때문에, 그것은 반드시 견고하게 세워져야 하기 때문에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께서 다윗과 솔로몬이 가지고 있었던 그와같은 열의를 우리도 갖기를 원하고요. 그런 열의를 갖게될때 모임이 견고하게 건축되기를 하나님 바라시기 때문에 우리 마음속에 그런 지혜도, 그런 능력도 주기를 원하신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요. 우리 모두에게는 기브온의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기브온에 갔을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 "내가 이 지혜를 주겠다." 라고 하나님은 그런뜻을 가지고 와서 그에게 내가 너에게 주겠다고 말씀하신 거지요. 그는 바른 선택을 했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것을 얻었습니다. 이제 14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네가 만일 네 아비 다윗의 행함 같이 내 길로 행하며 내 법도와 명령을 지키면 내가 또 네 날을 길게 하리라 솔로몬이 깨어보니 꿈이더라 이에 예루살렘에 이르러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 서서 번제와 수은제를 드리고 모든 신복을 위하여 잔치하였더라"(왕상 3:14-15).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그는 기뻐했습니다. 잔치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지혜를 주실때에 뭐라고 말씀했습니까? 14절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 아버지 다윗이 떠나면서 유언으로 말씀하신 말씀이 있었죠. "너는 대장부가 되어서 하나님 말씀을 지키라" 여기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시면서 이런 말씀을 했어요. "네가 만일 네 아비 다윗의 행함같이 내 길로 행하며 내 법도와 명령을 지키면 내가 또 네 날을 길게 하리라" 언제나 주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슬프게도 솔로몬은요, 이 말씀을 그대로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나중에 실패하고 말죠. 이제 저희들은 남은시간동안요, 16절부터 마지막절까지 하나님은 지혜를 주셨어요. 지혜를 주시고 난 다음에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지혜를 얻었으면 지혜를 쓸데가 필요하죠. 그래서 많은 케이스가 있었겠지만 그 중에 유명한 케이스죠. 여기 창기가, 두 여인이 살고 있는데 한 집에서 살고 있었어요. 그래서 두 창기가 아이를 3일 간격으로 아이를 낳지요. 그런데 두 아이가 태어났는데 한 아이가 이제 죽었어요. 죽었을때 밤에 바꿔치기 했죠. 그리고나서 한 여인이 자기 아이라고 주장하고 딴 사람은, 보니까 죽은 아이는 자기 아이가 아니예요. 그래서 문제가 되서 그것이 드디어 솔로몬에게까지 왔습니다. 솔로몬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지혜를 받고 국민을 다스려야 하잔아요? 그런데 만일 지혜자 마음속에 온유한 마음과 겸손한 마음이 없다면 왕권만 유지하고요. 이제 창기와 같은 사람의 일에 대해서 무시했다면 그들이 왔어도요. 왕을 만나지도 못하고 갔을 겁니다. 그런데 이 문제를, 특히 창기에 관한 이야기가 왜 여기에 나오고 있는가? 수많은 다른 케이스도 솔로몬이 다루었을 겁니다. 왜냐하면 솔로몬이 말했죠. 그 나라를 견고케 하기 위해서 나라의 모든 백성들의 문제를 내가 분별하고 재판할수 있도록 재판한다고 하는것은요, 기울어지거나 편벽이거나 또는 한족편을 들거나 뇌물을 받거나 절대로 그와같이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주의 판단은 공의로운 것입니다. 그렇게 판단해야 되는데, 심지어는 가장 이와같이 사회적으로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 손가락질 받는 사람의 문제도 솔로몬은 다루었다고 하는 겁니다. 그리고 이 문제를 다룰때에 이 문제가 가장 어려운 것은 무엇입니까? 증인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집에 두사람밖에 없어요. 이 두사람이 서로 상반되는 주장을 하고 있는데, 증인이 없기 때문에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할수 있을까? 이것이 이 문제의 난제죠. 우리는 가정을 다스리다보면 이와같이 상상 할수 없었던 난제들이 튀어나오고요. 또 모임을 인도하다보면 이와같은 일이, 상상 못했던 일이 터지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어떻게 이것을 해결할수 있을까?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지식이라고 하는것은 수많은 정보 입니다. 지혜라고 하는것은 수많은 지식의 정보를 가지고 그것을 어떻게 실제 일어나는 일에 적용할수 있는가? 적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문제를 적절히 해결할수 있는 그런 힘입니다. 그것이 지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혜이실뿐만 아니라 지혜를 우리가 얻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 지혜는 마귀적인 지혜나 지옥에서 나오는 지혜가 아니고요. 위로부터 내려오는 지혜 입니다. 그것은 순결하고 온유하고요. 그것은 정결하고 편벽이 없고 의롭고 그런 것입니다. 그런 지혜를 우리가 가지고 일해야 되는데 솔로몬이 한것을 가만히 보세요. 솔로몬은요, 이 두 여자들이 서로 상반되는 자기 편에서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요, 재판할때는 한쪽편의 이야기만 들어서는 안되죠. 양쪽편의 이야기를 들어야 합니다. 언제나 공의롭게 해야 됩니다. 수많은 집안에서나 모임안에서 되어지는 일들, 일이 벌어지게 될때 쌍방의 이야기를 언제나 다 들어야 됩니다. 한쪽편의 이야기만 들어서는 절대로 안된다. 그것은 기본이죠. 공의롭게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래야죠. 솔로몬은 그 이야기를 양쪽에서 다 들었습니다. 서로가 다 산 아이가 자기라는 거예요. 죽은 아이는 상대방의 아이라는 겁니다. 어떻게 이것을 해결할수 있습니까? 솔로몬이 칼을 가져왔어요. 그리고 애를 가져와라. 칼로 반을 잘라서 하나씩 주겠다고 했을때에 즉각적인 반응이 나타났죠. 참된 어머니는 자기 아이기 때문에 자기가 못갖는다해도 그 아이는 반드시 살아야 하는 생각이 참된 어머니예요. 그래서 그 어머니는 그냥 주라고, 그런데 진짜 어머니가 아닌 사람은 어떻게 말합니까? "자릅시다. 반씩 나눕시다." 이것이 지혜입니다. 증인이 없는데요. 두세사람의 증인이 없습니다. 두사람이 있었던때 일어난 일이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본질이 그대로 드러났어요. 바로 이 칼 하나로 드러났다 이 말입니다. 솔로몬은요, 그 아버지가 이제 밧세바를 범하고 수많은 문제들이 있었고요. 여러 아들중에 다섯번째 아들입니다. 바셋바의 첫번째 아들은 죽었죠. 그 다음에 여러 아들이 있고 그 다음이 솔로몬이예요. 하나님은 죽은아들, 그 다음 아들이 왕이 되게 한것도 아니고요. 하나님은 왜 셋째도 아니고 넷째도 아니고 다섯째를 하셨을까? 우리는 다 설명할수 없어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선택 하셨어요. 솔로몬이 자기 아버지가 압살롬에 의해서 도망갈때 전에 므비보셋을 높였지요. 사울의 손자 입니다. 요나단의 아들입니다. "그 집에 산 사람이 있는가?" 그래서 요나단은 죽었죠. 므비보셋이 살았다고 해서 "그를 데리고 오라" 그래서 그를, 므비보셋은 벌벌 떨며 왕 앞에 갔을때에 왕이 그를 은혜롭게 대하고요. "내 상에서 같이 밥을 먹는다" 왕자같이 대해줬고 그리고 그에게 있었던 모든, 할아버지때부터 내려오는 모든 재산을 다 그에게 주었어요. 엄청난 일이죠. 다윗은 한마디로, 다윗을 표현하는 글자가 무엇입니까? 은혜 입니다. 그는 은혜를 베풀었는데, 이제 이 므비보셋이 다윗이 도망가던 날 시바라는 종이 므비보셋을 항상 보호하고 섬겼죠. 그런데 므비보셋은 이제 절뚝발이이기 때문에 자기가 원하는대로 갈수 없어요. 그래서 시바가 자기를 데려가주면 갈수 있고, 그래서 많은 물품을 가지고 왕을 위해서 찾아 나갔지요. 그런데 시바가 내려놓고 자기만 갔지요. 그래서 왕을 만났을때 중상모략합니다. 시바가 이렇게 말하죠. 그 사람이 자기 아버지, 할아버지의 나라가 다시 세울만한 이런 때가 됬다고 다윗이 그 말을 들었을때 얼마나 괘씸했겠어요? 그래서 그는 화가나서 시바보고 모든 재산을 네가 취하라고 얘기했어요. 그리고 마하나임까지 가서 거기서 진을 치고 그리고 압살롬과 에브라임에서 전투를 합니다. 결국은 이기죠. 그래서 다윗은 환궁 합니다. 돌아오게될때 그때 므비보셋이 나옵니다. 므비보셋을 길에서 만났어요. 므비보셋은 수염도 안깎고 발도 맵시나게 하지 않고 옷도 더러운것을 입고 왕이 떠났기 때문에 슬픔 가운데 그렇게 살았어요. 그러다가 만났죠. 여러가지 이야기를 하다가 이제 예루살렘에 왔을때에 다윗이 묻습니다. "너는 왜 내가 도망갈때 오지 않았는가?" 참 궁금한거죠. 다윗은 알수가 없죠. 다윗은 시바를 통해서 알았어요. 다윗 마음속에 아마 많은 생각이 있었을 겁니다. 므비보셋이 시바의 말대로 나를 배반했을까? 배반했다면 그 마음이 얼마나 씁쓸했겠습니까? 자기는 은혜를 베풀었는데, 사울집은 모두가 다 은혜를 베풀었어요. 원수의 집인데 그런데 므비보셋마저도 나를 배반했을까? 그는 마음속에 대단히 고통 가운데 있었을겁니다. 그러면서도 한쪽 마음속에는 그러지 않을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을 겁니다.다윗은 지혜로운 사람이기 때문에요, 그런 생각도 했을 겁니다. 그래서 물었어요. "너는 왜 내가 도주할때 그때 나와함께 가지 않았는가?" 그떄 그는 이야기 합니다. "시바가 내가 다 챙겨서 왕을 만나서 같이 가려고 할때 나를 버려두고 갔습니다. 그리고 나를 중상했습니다." 그때요, 다윗왕이 므비보셋의 마음속에 무엇이 정말로 있는가를 알기 위해서 뭐라고 얘기 했습니까? 그 모든 재산은 시바에게 넘어 갔었어요. 그때 왕이 칼을 들었어요. 그리고 그 재산을 칼로 쪼갰어요. 그리고 반씩 나누라고 얘기 했어요. 반씩 나누라고 하는데 므비보셋이 뭐라고 했습니까? 므비보셋이 만일 왕이 돌아오는것보다 재산에 눈이 멀었다면 "아니, 다윗왕이시여 내가 어떤 마음으로 당신을 섬겼고 당신이 나에게 은혜를 베풀었기 때문에 나는 어떤 마음으로 물품을 챙겨서 그날 왕을 만나기 위해서 시바와 함께 가려고 했는데 그가 거짓말하지 않았습니까? 중상모략하지 않았습니까? 나는 억울합니다. 내가 왜 반을 나눠야 합니까? 나의 원래 이 모든재산을 당신이 주지 않았습니까? 왕이시여 내게 재산을 주십시요." 아마 이런 변론을 했을 거예요. 그런데 왕은 지혜로웠어요. 칼을 가지고 재산을 잘랐어요. 그때 잘랐을때 므비보셋이 뭐라고 말했어요? 므비보셋의 진심이 나왔습니다. "그건 다 가지라고 하세요. 나는 왕께서, 다윗 왕께서 돌아오신 것만으로 행복합니다." 그의 마음속에, 죽을수밖에 없는, 죽은 개같은 나를 은혜를 베풀었다고 하는것을 그는 잊을수 없어요. 그리고 왕의 상에서 같이 먹게 했다고 하는것은 그것은 엄청난 특권입니다. 그래서 그는 재산, 이런것보다는 왕과 함께 먹는것, 왕의 임재 가운데 함께 교제하는 것, 이것을 원했습니다. 그래서 왕이 돌아오셨으니까, 나에게는 더이상 필요한 것이 없습니다. 시바가 다 갖게 하십시요. 나는 왕이면 만족합니다. 여러분 칼을 가지고 자를때에 언제나 답이 나옵니다. 므비보셋 마음속에 진심이 그때 나왔어요. 솔로몬은 그것을 배웠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아버지로부터 그것을 배웠다고 생각해요. 하나님이 주신 위대한 지혜를 가지고요. 이 창기의 문제가 나타났을때 그는 똑같이 칼을 가지고 와서 자르겠다고 했어요. 그때 누가 참된 어머니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 분명하게 드러났죠. 지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이와같은 지혜는요, 증인이 없을때도 가장 힘든 문제, 난제에 있어서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해결할수 있는 길을 주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수많은 일들, 모임 안에서 가정 안에서 이와같은 일을 어떻게 해결할까,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로 해결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를 우리가 받아야 합니다. 그 지혜는 어떻습니까?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니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니라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약 3:15-18).
위로부터 내려오는 지혜는요, 이런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 보세요. 첫째 성결하죠. 화평하죠. 주님이 주신 지혜를 가지고 해결하게 될때 반드시 나타나는 건요, 거룩한 겁니다. 그리고 평화 입니다. 투쟁이 아니예요. 만약에 어떤 문제가 있는데 해결이 안되고요. 투쟁이 된다면 그것은 아직 해결이 안된 것입니다. 그리고 또 관용하죠. 양순하죠. 긍휼하죠. 선한 열매가 있죠. 기울어진것이 없습니다. 편벽과 그리고 거짓이 없습니다. 그래서요. 이렇게 판단하고 이렇게 분별하고 이렇게 해결하게 될때 쌍방에서요. 누구도 반론을 제기할수 없어요. 이 두 창기가 와서 이야기 했을때에 서로 주장했죠. 왕 앞에서 팽팽 했습니다. 그런데 왕이 칼 하나를 가지고 해결할때 어떻게 됬어요? 쌍방이 아무도 답변할수 없습니다. 하나는 도둑질 하는 사람이죠. 사람을 도둑질하는 사람이죠. 또 하나는 어머니가 이제 억울한 겁니다. 자기 아이를 뺏겼는데 자기 아이가 반으로 잘린다고 하는것은 얼마나 괴로왔겠어요? 그러나 솔로몬의 판단으로 인해서 이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었고 그것뿐만 아니라 온 국민이 이 해결로 인해서 솔로몬의 지혜에 대해서 감탄했습니다. 다시 말해서요. 솔로몬은 나라를 세우게 될때 아도니야의 반역으로부터 시작해서 대단히 위태로왔어요. 그러나 아버지의 권면으로 인해서요, 그는 지금 그 나라를 견고하게 세워가고 있고 말씀을 순종하고 있을때 지혜를 받았어요. 그 지혜를 가지고 하나님이 주신것을 가지고 행했을때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사람들이 솔로몬은 알아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게 될때, 그리고 그것을 순종함으로 인해서 나타나는 결과는 저희들의 명성입니다. 그것은 내 명성이 아니고 주님이 나에게 주시는 명성입니다. 그것은 주님이 나에게 주시는 신뢰입니다. 그 신뢰가 이제 쌓이게 됨으로 사람들은 나의 인도력에 대해서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세도 마찬가지였고, 여호수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솔로몬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솔로몬이 계속해서 이런길을 가면 나라가 견고해지고요. 모든 국민들은 행복해 지고 모든 무넺는 온전하게 해결이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 성전이 세워지는 것입니다. 모임은요, 화평한 곳에서 세워집니다. 모임은 이런 문제들이 항상 원만하게 시비가 없이 언제나 주님의 은혜 가운데 계속해서 화평과 평안과 그리고 온유와 겸손과 이와같은 것으로 성결과 관용과 이런것으로 모임이 이루어진다. 지혜가 우리 가운데 계속해서 역사할때 인도력의 지혜가 필요하고, 성도들의 마음속에 지혜가 필요하고 우리 모두에게 지혜가 필요합니다. 주님께서 솔로몬의 왕국을 그렇게 견고하게 하시기를 원하셨던 것은 성전건축이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요. 주님께서 저희들에게 주신 교훈이 저희들 마음속에 있게 되기를 바라고요. 계속해서 주님께서 저희들을 말씀을 통해서 은혜를 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