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헤미야 04. 내부의 문제, 외부의 반대
< 느헤미야 04. 내부의 문제, 외부의 반대 > 2013년 / 정형모 형제님
어제까지 저희들이 느헤미야서 4장 말씀까지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성을 건축하는데 어떻게 행했는가, 하는 점을 3장에서 소상히 말씀을 하셨는데 4,5,6장에서 원수들이 반대하고 있다. 외적인 반대, 그리고 오늘 5장에 와서 내부 문제로 인해서 성벽 건축에 방해를 받고 있다. 발목을 잡히고 있다, 라고 하는 점을 저희들이 보게 됩니다. 어제도 저희들이 생각한 것처럼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고 성령님께서 인도 하시고 또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될때, 반드시 원수는 그 일을 용납할 수 없으며 시기하고 또한 그 일을 파괴하기 위해서 대단히 분주히 역사한다고 하는 점을 저희들이 보았습니다. 이것은 그저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확실한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 믿는 사람들이 이 분명한 사실에 대해서 미리 기대하고 또 준비하고 대비하고 있어야 되겠다 라고 하는 점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늘 5장 말씀에서 내부 문제로 인해서 어려움을 겪게 되는 모습을 살펴 보겠습니다.
"때에 백성이 그 아내와 함께 크게 부르짖어 그 형제 유다 사람을 원망하는데 혹은 말하기를 우리와 우리 자녀가 많으니 곡식을 얻어 먹고 살아야 하겠다 하고 혹은 말하기를 우리의 밭과 포도원과 집이라도 전당 잡히고 이 흉년을 위하여 곡식을 얻자 하고 혹은 말하기를 우리는 밭과 포도원으로 돈을 빚내어 세금을 바쳤도다 우리 육체도 우리 형제의 육체와 같고 우리 자녀도 저희 자녀 같거늘 이제 우리 자녀를 종으로 파는도다 우리 딸 중에 벌써 종된 자가 있으나 우리의 밭과 포도원이 이미 남의 것이 되었으니 속량할 힘이 없도다"(느 5:1-5).
어제 저희들은 원수들이 밖으로부터 역사를 반대한다 라는 점을 보았습니다. 조소를 하고 공격을 하고 또 흑색 선전을 하고 그렇게 해서 유다 백성들을 낙심 시키고 요란케 하고 그리고 두려움 가운데 빠뜨려서 역사가 중단 되도록 그들은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이제 실패했습니다. 사단이 언제나 그의 전략을 사용하게 될때, 다양한 것을 사용하고 한 가지가 실패하게 되면 또 다른 것을 쓰지요. 이제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반대, 그리고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불평이나 불만들, 이런 것들은 언제나 역사적으로도 반복되는 그런 모습입니다. 초대 교회가 처음으로 놀라운 역사 가운데 시작되게 될 때 반대가 외부로부터 들어왔지요. 그러나 이제 조금 후에 이와 같은 것들이 변모하면서 안에서, 이제 내부에서 문제가 일어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또 헬라파 유대인, 히브리파 유대인들의 서로간의 불만, 이런 것들이 언제나 우리가 하나님의 일과 관련해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오늘 저희들이 5장 말씀에서 이제 제일 첫번째, 울부짖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3장에서 하나님의 역사가 잘 일어나서 그냥 그렇게 잘 진행이 됬다. 이렇게 봐서는 안되겠다. 여기에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고 하는 것은, 석장에 거쳐서요. 3장에서는 봉사 과정을 저희들에게 보여줬습니다만 4장서부터 6장까지 석장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이 어떻게 방해를 받았는가, 하는 것을 보지요.
오늘 5장 1절에서 첫번째 부분에서 울부짖음이 있습니다. 왜 울부짖음이 있을까, 라고 하는 것이죠. 여기 귀인들, 그리고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 권력자들, 이와 같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탐심으로부터 이제 문제는 시작되고 있습니다. 저희들이 이 말씀을 보게 될때, 땅을 소유하지 못한 자, 그는 수입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근이 들지요. 식구 수가 많지요. 또 세금을 바쳐야 되는데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서 대단히 어렵습니다. 그들의 현실은 자녀들을 팝니다. 노예가 됩니다. 그리고 속량할 힘이 없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울부짖음이 나올 수 밖에 없는데, 이와 같은 상황에서 어떻게 성벽의 건축의 역사가 지속될 수 있을까? 이것은 불가능한 것이죠. 땅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들, 수입이 없습니다. 많은 식구를 먹일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기근이 들었습니다. 또 지주들은 음식을 사기 위해서 고 금리로 땅을 전당 잡힙니다. 또 세금을 내기 위해서 그들은 더 어려운 문제들을 안고 있지요. 따라서 이 세금들이 거두어 진다면, 이 세금이 거두어 졌을때 이것은 페르시아왕에게 바쳐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왕의, 또 고관들의 사치스러운 생활이나 또 군비를 위해서 들어가는 것이지 예루살렘 거민들의 유익을 위해서 쓰여지는 것은 물론 아니죠. 예루살렘 안에서 있었던 이 당시의 울부짖음, 그것은 왜 있었을까? 그것은 다른 사람 때문이 아니라 형제가 형제들에게 어려움을 주었기 때문이다, 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지켜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잠깐 율법에서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가? 율법 안에 하나님의 놀라운 질서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복지를 율법 말씀 안에 담고 있습니다. 먼저 히브리 종에 관한 율례를 보십시요.
"네가 히브리 종을 사면 그가 육년 동안 섬길 것이요 제 칠년에는 값 없이 나가 자유할 것이며"(출 21:2).
6년 동안 섬기고요, 제 7년에는 나갑니다. 이방 사람은 다르지요. 한번 종이 되면 영원히 종입니다. 그 후에 대대로 계속해서 압박과 탄압 속에서, 또 착취 속에서 사는 거지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종에 관한 규례에서 6년을 섬기고는 제 7년에는 자유케 된다고 하는 규례가 있습니다.
"매 칠년 끝에 면제하라 면제의 규례는 이러하니라 무릇 그 이웃에게 꾸어준 채주는 그것을 면제하고 그 이웃에게나 그 형제에게 독촉하지 말지니 이 해는 여호와의 면제년이라 칭함이니라 이방인에게는 네가 독촉하려니와 네 형제에게 꾸인 것은 네 손에서 면제하라"(신 15:1-3).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통해서 보게 될 때, 이와 같은 사면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동족에게는 꾸어 주어도 이자를 받지 말라고 말씀 했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야 5장에서 있었던 불행은 그들은 자기 동족을 향해서 이자를 받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명백한 율법의 말씀을 그들은 어기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은 순종하지 않을 때, 여기에는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특별히 재정 문제를 놓고 생각하게 될때에 이스라엘 사람들 마음 속에 이 성벽 건축에 있어서 지장을 받게 되는 것은, 백성들 마음 속의 탐심 이었습니다. 물질주의, 돈을 사랑하는 그런 마음, 바로 이것은 성벽 건축의 발목을 잡는 대단히 중대한 요소였다, 라고 하는 것을 저희들이 생각해 보게 됩니다. 저희들이 이제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 사도바울은 디모데서에서 이렇게 말씀했지요. 돈을 사랑한다. 그래서요, 돈을 사랑하게 되면 그 돈을 축적하기 위한 목적, 거기에 연연하게 되고 그 다음에는 일단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축적하려고 하는 마음 속에 빠지게 되지요. 이것은 올무입니다. 이것은 함정입니다. 그래서 부정직한 방법을 사용하게 되거나 불법적인 방법, 폭력적인 방법, 도박이라든지, 사기라든지, 또는 위증이라든지, 또는 살인, 절도, 이런 것들이 여기에 사용이 되는 것이죠. 작은 씨로부터 커다란 열매가 맺히게 되는 겁니다. 돈을 사랑하게 될때 또 염려하게 됩니다. 또 언제나 근심과 걱정 속에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저희들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부자를 하나님이 만드셨고 또 가난한 사람도 만드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경제에 대해서 명확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경제는 정상적으로 가동이 되야 됩니다. 경제는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 속에 만일 돈을 사랑하는 마음이 들어 온다면, 탐심이 들어 온다면 신약이 우리에게 말씀하는 것처럼, 그것은 우상 숭배라고 말씀했지요. 여기 지금, 이 백성들은, 유대 백성들이 우상 숭배하고 있었다. 느헤미야가 와서 성벽을 건축하고자 하는 노력을 하게 될때, 바로 그때에도 이 일이 진행되고 있었다. 느헤미야가 온 다음에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그 전부터 계속해서 있었던 일이죠. 따라서 이것은 이 역사의 커다란 장애물이 되었다, 라고 하는 겁니다.
돈을 사랑하게 될 때, 여러가지 결과들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을 망각하게 됩니다. 또 자기를 결국 찌르게 됩니다. 돈을 사랑하게 되면요, 정상적인 경제를 위해서 우리는 일하고,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사랑하는 문제를 놓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돈을 사랑하게 될때 하나님을 생각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두 주인을 섬길 수가 없지요. 매머니인가 아니면 하나님인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돈을 사랑하면 하나님을 절대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돈을 사랑하게 될 때, 함께 따라오는 여러가지 일들이 있습니다. 삶을 낭비하게 됩니다. 왜냐하면요, 돈에 우리의 모든 시선이 고정되기 때문입니다. 또 돈을 사랑하게 되면요, 반드시 자식을 세상에서 잃어버립니다. 돈을 사랑하게 되면요, 그 사랑하던 부가 어느날 한 순간에 사라져 버립니다. 그래서 커다란 슬픔을 가져옵니다. 돈을 사랑하게 되면 절대로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라일이라는 사람이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돈은 만족을 주지 못하는 소유물 중에 하나다." 돈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돈이 우리에게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돈이 필요하기 때문에 우리 염려를 없애주는 듯 하지만 사실상 돈은 우리에게 가장 큰 염려를 몰고오는 존재다. 돈을 볼때, 항상 문제가 있습니다. 돈 벌기 쉽지 않습니다. 돈을 벌게 될 때 우리는 합법적인 방법으로 버는가? 그러나 만일 돈을 사랑한다면 절대로 합벅적이거나 정상적인 방법으로 벌 수 없습니다. 또 돈을 사용하게 될때, 언제나 여기에는 시험거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돈을 사용하는데, 주님의 지혜와 또 영성이 필요합니다. 주님을 우선으로 여기고 이 돈을 사용할 것인가, 아니면 돈이 이제 우선인가? 사용할때도 문제입니다. 또 돈을 오용하게 될 때, 남용하게 될 때, 우리 마음 속에는 죄책감이 따라옵니다. 돈을 잃어버렸을 때, 이것은 엄청난 슬픔을 가져오고요. 좌절과 심지어는 자살과 또 이런 것을 인해서 질병과 많은 것들을 가져옵니다. 돈을 처분하게 될 때, 이것은 우리에게 당혹을 끼쳐줍니다. 그래서 이 세상 안에 발생하고 있는 말다툼, 투쟁, 그리고 소송 문제, 그런 것들에 의해서 약 2/3는 사실은 돈 때문에 온다고 말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초대 교회때 있었던 문제 아닙니까? 또 라오디게아 교회, 나는 부자라,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모임 안에 문제가 있었죠. 그래서 돈과 관련해서 사도바울이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고 있는 교훈을 디모데전서에서 보십시요. 사도는 이렇게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딤전 6:17-19).
돈과 관련해서 재물과 관련해서 사도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돈은 정함이 없는 것이라고 말씀 했습니다. 하나님은 정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을 저희들이 기대해야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 느헤미야 5장 말씀에 나오는 이 사람들, 어떻습니까? 그들의 치리자들 또 귀족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 이 사람들이요. 그들이 가지고 있는 부를 가지고 이자를 취함으로 인해서, 취리함으로 이제 엄청난 문제가 생겼습니다. 또한 기근과 세금과 또한 그들 안에 이런 일로 인해서 땅을 잃어버리고 심지어는 자식을 잃어버리고 자식이 노예가 되는, 그리고 속량할 힘이 없는 이러한 상황에 들어가 버렸죠. 그래서 그들 가운데 첫째, 탐심으로 인해서 이제 유다인들 가운데 예루살렘 안에서 눈물이 터졌습니다. 울음이 복받쳤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어떻게 성벽 건축이 진행 될 수 있겠습니까?
돈의 문제는 재정 문제는 이것은 대단히 신령한 문제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재정 문제를 바로 관리하는 성도, 그 재정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은 내가 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선물이요, 우리는 그것에 대한 청지기다. 그래서 그것을 어떻게 주님께 돌려 드리고 그리고 우리는 주님이 나에게 주신 것을 가지고 사용할 수 있는 것인가, 라고 하는 지혜 말입니다. 믿음 말입니다. 순종하는 실행 말입니다. 이와 같이 살게 될 때, 우리의 삶에 질서가 있습니다. 만일 우리의 마음 속에 돈이라고 하는 것, 그것은 나의 재능과 나의 기여와 나의 능력과 그것을 통해서 내가 얻은 것이라고 생각 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 앞에 부적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와 같은 일에 바른 개념을 갖고 재정 문제에 관해서 우리가 실행하게 될 때 주님께서 영광을 받습니다. 우리 가정이 보호가 됩니다. 내 마음이 돈을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이탈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을 섬기는데 우리 마음 속에 평안과 자유함이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돈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언제나 밤잠을 자지 못하고 계속해서 돈에 관한 문제 때문에 염려와 근심과 또한 많은 마음 속의 괴로움, 그리고 허상을 보는 것 같은 삶, 이러한 것 속에서 우리는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요, 오늘 저희들은 이와 같은 두번째, 이와 같은 울움 다음에 무엇이 있었습니까? 두번째는 6-7절 말씀에 느헤미야가 물론 이것을 보았지요. 그는 인도자로서 그 가운데, 지금 성벽이 건축되고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데 이 일에 발목을 잡는 요인에 대해서 느헤미야가 만일 그것을 몰랐다면 그는 인도자가 아닙니다. 그는 이 문제에 대해서 확실하게 보고 있었습니다.
"내가 백성의 부르짖음과 이런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중심에 계획하고 귀인과 민장을 꾸짖어 이르기를 너희가 각기 형제에게 취리를 하는도다 하고..."(느 5:6-7).
여기 느헤미야는요, 백성의 부르짖음, 백성이 소리치는 모양, 이런 것을 보았습니다.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첫째, 크게 노했습니다. 분노, 우리는 느헤미야가 가지고 있는 것 중의 특징 중의 하나는 의로운 분노입니다. 어제도 우리가 이것을 생각해 봤습니다만, 우리는 자칫 잘못하면 이 분노가 나의 개인적인 감정이나 아니면 보복적인 것이나 이런 것으로 변질될 수 있다고 하는 가능성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대단히 조심해야 합니다만 주님의 도우심과 또한 성령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해야 됩니다만, 우리는 틀린 것을 보고도 그것을 아무렇지 않은 것으로 여기는 그런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 마음 속에 의로운 분노가 있어야 됩니다. 우리는 악과 타협하거나 악을 용인하거나 악을 받아들이거나 악이 괜찮다고 인정하거나 이와 같은 것은 하나님 앞에 잘못된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분노 했습니다. 이 일을 그냥 넘어갈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 일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이제 그가 수산에서 예루살렘까지 온 모든 목적, 이제 성벽을 건축하고 능욕을 제거하자고 하는 이 위대한 목적은 다 수포로 돌아가는 것이죠. 다시 원수들은 즐거워 하겠지요. 그것을 그는 용인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용인할 수 없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때때로 의로운 분노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의로운 분노를 우리가 갖게 될때, 그것을 어떻게 집행할 것이냐, 라고 하는 것이죠. 그는 민장과 또한 귀인들을 불렀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꾸짖었습니다. 좋은 말도 필요합니다만 때때로 책망도 필요한 것입니다. 그들이 행한 일은 왜 책망을 받아야 됩니까?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적으로 정면으로 도전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형제들에게 취리하지 말라고 명확히 말씀하셨는데 그것을 정면으로 거역했지요. 따라서 책망을 받아야 마땅한 것입니다. "너희가 각기 형제에게 취리를 하는도다" 이것은 잘못된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이탈했다. 그래서 대회를 엽니다. 그는 이제 분노로 그치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꾸짖어도 그들은 그들의 행동을 고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대회를 엽니다.
"...대회를 열고 저희를 쳐서 이르기를 우리는 이방인의 손에 팔린 우리 형제 유다 사람들을 우리의 힘을 다하여 속량하였거늘 너희는 너희 형제를 팔고자 하느냐..."(느 5:7-8).
여기 대회가 열렸을 때요, 느헤미야는 이 민장과 귀족들을 향해서 이미 꾸짖었을 뿐 아니라 그들이 잘못됬다고 하는 것을 몇가지 이유를 들어서 그들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첫번째, 8절 말씀에서 우리는 이방인의 손에 팔린 우리 형제를 속량하려고 노력했는데 너희들은 오히려 속량할 수 없도록 무거운 짐 하에 구속하려 하느냐, 라고 책망하는 것이죠. 첫번째, 과거의 구속을 근거로 해서 책망합니다. 귀인과 민장들을 책망합니다. 그들을 향해서 도전했습니다. 누가 이와 같이 억울한 사람들, 연약한 사람들, 힘이 없는 사람들 편에 서서 그들을 돕겠습니까? 느헤미야는요, 이 일에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책망했을뿐 아니라 이제는 하나님 말씀을 토대로 해서 그들에게 회개를 촉구합니다. 바벨론에서 돌아올 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구속은 애굽에서 나올때도 마찬가지 였지요. 바벨론에서 돌아오게 될 때, 속량받는, 이 구속받은 민족들, 속박 가운데서 해방된 이 민족, 어려움 가운데 있는 동족들을 이제 어떻게 해서든지 살리기 위해서 노력을 하는데, 너희들은 계속해서 무거운 짐을 얹어놓고 그들을 속박하고 그들의 자녀들을 팔아서 노예로 만들고 그들의 땅을 뺏고, 이와 같은 일로 인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너희들이 방해하는 것이 아닌가?
두번째요, 이런 얘기를 했을 때, "저희가 잠잠하여 말이 없거늘" 아직도 그들의 태도에 변화가 없습니다. 잠잠하다고 하는 것은요, 책망을 받았는데 잠잠하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합당하지 않은 것이죠. 그들은 반응을 해야 됩니다. 그들이 책망을 받았을 때 잘못했다고 하는 것, 회개와 함께 그들의 변화된 삶, 변화된 태도, 보여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아직 잠잠합니다. 말이 없습니다. 마음이 아직도 물질에 가 있어요. 그것 도로 토해내야 하는데 도로 줘야 하는데, 사실 그것은 자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에 의하면 그 취리한 것은 자기 것들이 아닙니다. 그것은 도적질한 것입니다. 그것은 권력을 통해서 뺏은 것입니다.
"내가 또 이르기를 너희의 소위가 좋지 못하도다 우리 대적 이방 사람의 비방을 생각하고 우리 하나님을 경외함에 행할 것이 아니냐"(느 5:9).
현재, 우리가 이방 사람들 앞에서 어떤 간증을 보여야 할 것이냐, 이것을 이야기하고 있어요. 우리는 어떤 간증을 보여야 할 것인가? 우리가 이와 같은 문제를 놓고 볼때요. 우리는 과거의 구속을 우리가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가 생각할 필요가 있어요.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들로서 사람들, 이방 사람들이 보고 있는, 이 세상이 보고 있는 가운데 우리는 어떠한 간증을 나타내야 할 것인가? 이방 사람들이 이 사람들을 보십시요. 이방 사람들은 취리합니다. 이방 사람들은 노예를 사면 영원히 노예로 끌고 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다르다고 하는 것을 율법을 주실 때부터 하나님은 고안하셨습니다. 따라서 이방 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보게 될때, 종인데 6년이 지나고 나면 자유하게 되는 것을 보면 그들은 감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놀라운 은혜가 있다. 그들은 취리하지만 이 하나님의 선민들은 취리하지 않는 것을 보게 될 때, 그들 마음 속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겠습니까? 그 백성을 사모하지 않겠습니까? 그 백성의 하나님을 그들은 소망하지 않겠습니까? 그 하나님에게 돌아오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간증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이스라엘 민족이 이방 사람들을 향해서 나타내고자 하는 위대한 간증, 그것을 하나님은 원하셨는데, 이제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왔을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죠. 이방 사람들과 하나도 차이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이 시대에 교회 시대에 우리가 주님을 섬기며, 모임 안에서 우리가 주님을 섬기게 될때, 세상과 우리는 달라야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말씀을 우리가 순종하게 될때, 세상과 우리는 많은 차이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대조를 사람들은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으로부터 복음의 역사가 시작되고 하나님의 진리가 이제 우리 가운데 드러나지 않겠습니까? 만일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보게 될때, 별 차이가 없다. 그 하나님을 왜 그들은 믿겠습니까? 복음을 증거한들, 그들이 왜, 무엇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매력을 느끼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의 엄위함을 그들이 느끼겠습니까? 하나님의 죄에 대한 책망과 또한 위대한 구속과 은혜와 위대한 하나님의 사랑에 그들의 마음이 감동을 받겠습니까? 따라서 여기 두번째는 느헤미야는요, 우리의 간증을 생각해야 된다. 이방 사람들 앞에서 우리는 어떠한 하나님의 놀라움을 드러낼 것이냐, 우리는 이것을 생각해야 되겠다라고 하는 것이죠.
세번째요, 10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나와 내 형제와 종자들도 역시 돈과 곡식을 백성에게 취하여 주나니 우리가 그 이식 받기를 그치자 그런즉 너희는 오늘이라도 그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과 집이며 취한바 돈이나 곡식이나 새 포도주나 기름의 백분지 일을 돌려 보내라 하였더니"(느 5:10-11).
느헤미야는요, 자기의 개인 간증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나와 내 형제와 종자들도 역시 돈과 곡식을 취하여 주나니" 느헤미야의 간증은 그는 취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혹시 백성에게 돈을 빌려 주었는지는 모르지만 이식을 취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느헤미야서를 읽게 될때, 느헤미야는 어떻게 잘못 읽으면 그 사람은 자기 자화자찬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어감상이요, 그러나 만일 느헤미야가 자화자찬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신령한 인도자는 아닙니다. 영적인 사람은 아닙니다. 그는 교만한 사람이겠지요. 그러나 우리는 느헤미야의 삶을 보게 될때에 그가 그와 같은 성격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가 이와 같은 말을 할 때마다 그는 하나님의 대의와 영광 때문에 이런 얘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의 간증을 바로 앞에서 이야기 했는데, 그는 자기의 간증을 이야기하면서 이제 이런 일은 있어서는 안되겠다고 하는 것을 인도자의 본을 통해서 지금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11절에 와 보면요. 참회가 필요하다. 변화가 필요하다. 이제 취리한 것에 대해서 돌려줘야 된다. 그래서 여기서는 백분의 일을 돌려 보내라고 얘기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느헤미야의 용기를 보게 됩니다. 그는 총독으로서 이런 일을 쉽게 할수 있지 않았겠는가 생각할지 모르지만요. 총독이 아무리 권세를 가지고 있다 해도, 여기는 대중입니다. 거기에는 귀인들이, 한 두명이 아닌 여러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탐심을 가지고 또 이익을 위해서 재정적 이익을 위해서 그들은 똘똘 뭉쳐있는 사람들입니다. 민장과 귀인들,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이 함께 모여 있는 이 사람들을 향해서 이와 같은 말씀을 한다고 하는 것은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심지어 총독이라 할찌라도 용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전에 총독들은 백성들을 향해서 억압하고 또는 토색하고 또는 사람들에게 많은 거짓된 명목으로 돈을 취하고 이런 것을 우리는 그 후에 보게 됩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이런 일에 있어서 그는 하나님 앞에서 선한 양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와 같은 일을 추진했을 때에, 세번째 우리는 무엇을 봅니까? 울었습니다. 분노했습니다. 대회를 열였어요. "그때 너희들은 백분의 일을 돌려 보내라." 백분의 일이라고 한다면, 한달의 이자라 생각되는데요. 1%입니다. 연 이자는12%입니다. 이것 돌려보내라. 그때 그들이 답하지요.
"저희가 말하기를 우리가 당신의 말씀대로 행하여 돌려 보내고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아니하리이다 하기로..."(느 5:12).
놀라운 승리입니다. 이것은요, 그렇게 쉽게 그들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뺏은 돈을요, 거둔 돈을 도로 돌려 줍니까?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느헤미야에게 있어서는요, 저희들은 느헤미야가 이 무더기 성벽, 돌 무더기가 있는 것을 그날 밤에 나가서 보았을 때, 거기에는 예루살렘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현실로 인정했지만 저 무더기가 성벽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기대는 했을지 모르지만 유다 사람들이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그저 우리의 소원이지 그것이 성벽이 쌓여진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불가능하다고 인정하고요. 돌 무더기, 폐허가 된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까? 느헤미야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저것은 바로 세워져야 된다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것이 사실이라면 느헤미야 마음 속에요. 돌 무더기가 쓰러져 있는 것 이상으로 돈을 취리하는 일들이 계속 된다면 이것은 무더기보다 더한 쓰레기다. 이와 같은 부조리는 개혁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변화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절대로 하나님의 일은 이루어질 수 없다고 하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일을 여기까지 추진한 것입니다. 그래서 대회에서 백성들이 아멘 하도록 까지 인도한 겁니다. 이것은 그의 믿음입니다. 그것은 그의 용기입니다. 그의 결단입니다. 우리의 마음 속에 이런 것이 있어야 되겠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요, 또 나의 개인의 생활 속에서 나를 돌이켜 보게 될때, 우리 가정 안에서 하나님 앞에 합당하지 못한 것이 있다면 우리는 용기를 가지고 이것을 개혁해야 됩니다. 우리는 모임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지켜지지 않는 것이 있다면 우리는 그것이 우리의 편견이나 우리의 전통이나 우리의 고정관념이나 우리의 편리주의적인 생각이나 어떤 것이든지 우리의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지금 가고 있는 것이 있다면 우리는 변명하지 말고 그것에 대해서 정당화하지 말고 여러가지 이유를 들어서 그 일을 가지고 계속해서 추진 해야 되겠다고 고집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우리는 순종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고 그것이 사실은 우리에게 복지를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유익을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사실상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여러 부분들이 있기 때문에 그만큼 우리는 영적으로 많은 손해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의 후손들도 손해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내가 주님 앞에서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우리는 자녀들, 우리 후계들에게 계속해서 불순종 하도록 알게 모르게 인도하고 있는 범죄를 하고 있다 라는 생각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기 느헤미야는요, 아멘으로 이끌어 냈어요. 승리 가운데 들어왔습니다. 이 어려운 일들, 이것이 이제 놀랍게 해결될 기미가 보입니다.
그래서 그가 어떻게 했습니까? 첫째, 너희들이 만일 그렇다면, 너희들이 돌려보낸다고 이야기 한다면 말로 그칠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라,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 참 중요한 것이죠. 우리가 말로만 하나님을 사랑한다. 말로만 이거 이렇게 해야 되겠다 라고 하는 이야기는 우리에게 합당치 않습니다. 만일 그것이 합당하다, 하나님 앞에서 합당한 것으로 여겨지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것은 잘못됬다, 라고 선포 한다면 그것은 행동에 옮겨야 되는 것입니다. 순종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얘기 합니다. 제사장 입회 하에 맹세하라고 얘기했습니다. 그냥 말로만 그칠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지금 기근 속에 있다. 그들은 고통 가운데 있다. 그럼으로 인해서 백성들의 마음 속에 울분과 또한 고통, 슬픔, 그리고 자기 자녀들을 잃어버린 이 슬픔, 이것을 그들이 안고서 어찌 자원해서 성벽 건축에 계속해서 매진 하겠는가? 따라서 이 일에 대해서 제사장 앞에 나와서 선서하라. 두번째는요, 그는 상징적인 제스쳐를 씁니다.
"내가 옷자락을 떨치며 이르기를 이 말대로 행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이 또한 이와 같이 그 집과 산업에서 떨치실찌니 저는 곧 이렇게 떨쳐져 빌찌로다 하매..."(느 5:13).
두번째 그가 한 일은요, 그의 옷자락, 이것은 주머니와 같은 모양의 부분인데요. 이것을 흔들어 털었습니다. 이 제스쳐는 하나님 앞에서 만일 이 이야기를 하고서 순종하고 또한 이 일을 실천하지 아니하면 그래서 백성들을 고통 가운데 두고, 하나님의 율법의 말씀을 계속해서 거역 하겠다고 한다면 하나님이 너희들이 얻은, 그래서 너희들이 뺏어서 취한이 재물, 그래서 그 주머니 속에 넣은 것을 하나님께서 도로 꺼내서 다 흩어 버리겠다, 라고 하는 것이죠. 이것은 상징적인 제스쳐입니다만 느헤미야 마음 속에 있는 결단을 말해 줍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게 될 때, 느헤미야서에서 참으로 인상 깊은 것은, 그리고 마음 속에 도전이 되는 것은 그는 결단의 사람이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는 만사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면 그 일을 행하는데 있어서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일을 추진해 나가는데 그는 결단 가운데 이 일을 이루고야 만다고 하는 것입니다. 저는 느헤미야에서 기쁘게 발견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감동적인 것은 이것입니다. 그는 일을 시작하면 일을 끝내는 사람이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13절 마지막 부분에요.
"...회중이 다 아멘 하고 여호와를 찬송하고 백성들이 그 말한대로 행하였느니라"(느 5:13).
보십시요. 탐심 때문에, 백성들이 울음으로 시작했습니다. 이 5장은 울음으로 시작 됬습니다. 이 울음이라고 하는 사인은 역사가 중단 된 것을 말하는 것이죠. 그래서 이제 느헤미야가 역사 했습니다. 그래서 이 울음이 찬양으로 변합니다. 하나님 앞에 찬양으로 변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답답하고 괴로우면 울지요. 우리의 마음이 넉넉하고 만족하면 우리는 찬양을 올립니다. 감사가 가득하게 될 때만, 찬양을 올리죠. 이 문제가 이제 이와 같이 해결이 됩니다.
여기 우리는 14절 이하에서요,
"내가 유다 땅 총독으로 세움을 받은 때 곧 아닥사스다왕 이십년부터 삼십 이년까지 십 이년 동안은 나와 내 형제가 총독의 녹을 먹지 아니하였느니라"(느 5:14).
여기서부터는요, 느헤미야가 자기의 간증을 이야기합니다. 자기의 간증,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인도함을 받았는가. 간증이라고 하는 것은요. 간증은 나 자신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나를 드러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생애 가운데 일어난 일들 속에 하나님이 역사하신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만일 간증을 통해서 나의 위대함, 나의 자랑을 이야기 한다면 이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참으로 합당치 못한 일이죠. 느헤미야는요, 그가 이 간증을 하게 될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하나님이 자기에게 역사하신 일을 지금 말함으로 인해서 그때 듣는 사람들은 덕 세움을 얻겠죠. 그는 "유다 땅 총독으로 세움을 받은 때" 즉, 아닥사스다 이십년부터요, 아닥사스사 삼십이년, 십이년동안 그가 총독으로 예루살렘에 와서 일했습니다. 그는 사실 이 후에 자기의 회고록을 여기에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동안에 자기는 총독의 녹을 먹지 아니하였다. 전에 총독들과 비교합니다.
"이전 총독들은 백성에게 토색하여 양식과 포도주와 또 은 사십 세겔을 취하였고 그 종자들도 백성을 압제하였으나..."(느 5:15).
이것이 그 전의 총독들의 항상 해 오던 습관적인 그런 범죄였지요. 그러나 이와 같은 습관적 범죄는 용인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압력, 권력과 그들이 가지고 있는 지위를 통해서 백성들을 탄압한 것이죠. 그리고 아무도 그것을 반발할 수 없었습니다. 사실 이것은 역사죠. 우리 가운데 일어나는 흔한 일들입니다. 정치적인 인들입니다. 토색하는 일들, 부패, 그리고 돈을 갈취하는 것들, 겉으로는 멀쩡한 이야기를 하지만 그 안에 담겨있는 많은 부패, 그래서 엄청난 재물을 끌어 모으는 일들, 이런 것은 오늘날 세상에 도처에 깔려있는 일들입니다. 이와 같은 일들 가운데서요, 이와 같은 것이 만일 이 세상에 편만하다면 느헤미야는 바로 이와 같은 재물의 문제에 있어서도 그는 하나님 앞에서, 백성들 앞에서 그는 본이 되었어야 된다, 라는 말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일을 그는 간증하고 있습니다. 전에 총독들이 이것이 전례였다. 그리고 그것은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백성들은 아무 말 하지 못했다. 그러나 자기는 이것을 안 했다.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요. 하나님께서 자기 마음 속에 어떠한 심령을 허락하셨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와 같은 녹을 얻지 않고 토색하지 않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는 권력을 가지고 얼마든지 할 수가 있어요.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를 보내시게 될때 하나님의 대의와 영광을 그는 마음 속에 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그는 지금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마음 속에 어떤 마음을 주셨는가? 우리는 이 세상의 부패와 또한 타락과 또한 재정적인 많은 부조리와 이런것 속에서 우리는 재정적으로 돈 관리에 있어서 영적인 산다면 바로 이 에어리어에서만 해도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을 보게 될때 달리보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돈에 대한 부패, 재정적인 타락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도처에 깔려 있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돈 관리하는데 있어서 어떻게 철저히 합니까? 집사들은 이것을 관리하는데 어떻게 철저히 하고 있습니까? 이것은 정확하게 관리 하고 있습니까? 그 후 관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신령함 가운데 이 돈 관리가 잘 진행되고 있습니까? 이것은 우리가 잘 생각해봐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모임의 영적인 복지와 영적인 미래는 바로 이 재정적인 문제에서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그리고 신령하게 집행됨으로 인해서 모임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많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여러가지 조건들 중에 모임 안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될 중요한 부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간증하면서요. "나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이같이 행치 아니하고" 그가 왜 이렇게 안했습니까? 하나님을 경외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입니다.
"도리어 이 성 역사에 힘을 다하며 땅을 사지 아니하였고 나의 모든 종자도 모여서 역사를 하였으며 또 내 상에는 유다 사람들과 민장들 일백 오십인이 있고 그 외에도 우리 사면 이방인 중에서 우리에게 나아온 자들이 있었는데 매일 나를 위하여 소 하나와 살진 양 여섯을 준비하며 닭도 많이 준비하고 열흘에 한번씩은 각종 포도주를 갖추었나니 비록 이같이 하였을찌라도 내가 총독의 녹을 요구하지 아니하였음은 백성의 부역이 중함이니라"(느 5:16-18).
여기까지 간증하게 될때요. 그는 토색하지 않았어요. 왜?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총독으로서 일하게 될때 자기의 영달과 쾌락을 위해서 온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비록 페르시아왕이 자기를 임명해서 총독의 위치로 예루살렘에 왔습니다만 그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의 일이 이곳에 반드시 이루어져야 된다는 마음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 했습니다. 그래서 이와 같이 재정적인 문제에 있어서 그는 많은 사람들, 민장과 또한 귀인들, 아니면 평민과 그의 여러 각 분야에 있는 사람들 앞에서 그는 본을 보였습니다. 예를 들어서 자기가 총독 관저에서, 예루살렘에 총독 관저가 있었지요. 이 총독 관저를 그가 짓고 거기에 살게 될때, 그리고 이 성벽 건축의 역사를 진행하게 될때, 그에게 찾아오는, 총독이기 때문에 그에게 찾아오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매일과 같이 그를 방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공직자들, 아니면 외부에서 오는 사람들, 또는 이와 같은 중대한 일 때문에 총독을 만나기 위해서 오는 수많은 방문객들이 있었죠. 그들을 대접하는 일에 있어서 그는 그를 빙자해서 백성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을 경외했기 때문에 그가 재정 관리를 하게 될때 그의 백성들이 무거운 짐을 지는 것에 대해서 대단히 민감했습니다. 왜 백성들이 무거운 짐을 지는 것에 대해서 민감했을까요? 왜냐하면 백성들이 짐을 지지 말아야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9절 말씀을 보십시요. 여기 다섯번째 기도가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 백성을 위하여 행한 모든 일을 생각하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느 5:19).
이 말씀도 잘 보십시요. 자기 자랑, 자화자찬 아닙니다. "내 하나님이여" 이와 같은 비슷한 기도가 여러번 나오는데 이 기도 속에 느헤미야의 진실된 마음은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그리고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져야 되기를 소원합니다, 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와 같은 일을 하게 될때, 이렇게 일이 진행 되게 될때, 하나님께서 그는 인정해 주기를 원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입니다. 사람들에게 알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그의 진실된 마음을 토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내가 이 백성들을 위하여 행한 모든 일을 생각하시고" 왜 그렇게 했습니까? 그는 하나님의 대의를 언제나 마음 속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죠.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백성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이 순조롭게 잘 이루어져서 완성되기를 원했어요. 이 일이 완성 되어야 예루살렘 안에 거민들이 살고 그들은 거룩한 시민들이 되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이 성전에서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그런 백성이 되어야 이스라엘이 안고 있는, 유다 백성이 안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방 사람들에게 위대한 간증이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위대한 간증이 드러나야 하나님의 영광이 만방에 떨쳐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가 염려한 것은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느헤미야의 모든 관심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라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그는 하나님 앞에, "하나님, 나의 소원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의 눈은요, 자기 찬양, 이런데 있지 않았습니다. 현재의 무슨 찬양, 여기에 있지 않고요.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미래의 위대한 상급, 이것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면서 이와 같은 기도를 했습니다.
이제 저희들이 6장으로 들어가겠습니다. 6장으로 들어가게 될 때요. 우리는 4장에서 외부로에서의 반대를 봤지요. 5장에서 저희들이 본 것처럼 내부에서의 부패로 인한 장애를 보았습니다. 이것 다 발목을 잡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진행될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죠. 4장에서 우리가 본 것은요, 조소, 그리고 공격, 흑색선전, 이런 것을 통해서 백성들을 낙심키시고 요란케 하고 또 마음 속에 두려움, 공포를 안겨 주어서 이 일이 중단 되기를 원한 것이었죠. 6장에서는 다시 외부로부터 반대가 찾아옵니다. 마귀는, 원수는, 하나님 백성의 하나님을 향한 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고 하는 모든 역사가 중단 되기를 원하는데 그는 지혜롭게 모든 방법을 동원합니다. 방법이 실패한다면, 전략이 실패한다면 그는 즉각적으로 그것을 바꿔서 다른 전략을 쓰는 것입니다. 여기에서요, 백성들을 향해서 공격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6장에 들어와서는 느헤미야 개인, 인도자 개인을 향해서 공격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6장에서의 차이 입니다. 6장 말씀을 보면 "두렵게 하고자 한다"라는 말씀이 네번 반복해서 나옵니다. 두렵게 한다고 하는 것은 공포 가운데 빠뜨린다고 하는겁니다. 특별히 백성들이 두려움 가운데 빠진 것도 문제가 되지만 인도자가 두려워 하게 될때, 이 모든 일은 끝나고 마는 것입니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원수는 이제 느헤미야 한 사람을 무너뜨려야 되겠다, 라고 결심한 것입니다. 대단히 효과적인 일이죠. 인도자, 그래서 인도자를 위해서 기도해야 됩니다. 인도자를 공격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앞장서서 인도하는 그 사람을 쓰러뜨리게 될 때, 이제 모든 것이 와해 된다고 하는 기본적인 상식을 마귀는, 원수는 잘 알고 있다고 하는 것이죠.
6장에서의 문제는 두려움입니다. 두려움을 통해서 역사가 중단되기를 바랐다. 하나님 앞에 나가는 사람이 두려움이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께서 어떻게 우리를 위해서 행하시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 애정, 이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오기를 원합니다. 확신과 그분을 의지하는 마음과, 이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오기를 원하죠. 느헤미야, 그는 위대한 일을 지금 하고 있어요. 지금 일이 진행되고 있어요. 그를 넘어뜨리기 위해서요. 두려움을 넣고자 하는 것입니다. 1933년 3월 4일 미국의 프랭클린 델라노 루즈벨트 대통령이 취임식 하는 날이었습니다. 그 당시는 미국이 경제 대 공황 속에서 미국의 온 국민들이 대단히 두려움 가운데 사실은, 거의 공포 가운데 살고 있었습니다. 미국이 호황을 누리고 그런 나날들이 많이 있었습니다만, 그러나 미국이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대 공황이 찾아왔을때, 거의 대부분의 국민들이 이제 도탄에 빠져서 마음 속에 두려움 가운데 빠져 있을때, 루즈벨트 대통령이 취임 하던 날,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두려워야 할 오직 한 가지, 그것은 두려움 그 자체다." 마귀는요, 우리 마음 속에 두려움을 주입 시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요. 오늘 저희들은요, 6장에서 느헤미야가 이제 새로 도전을 받고 있는 새로운 양상, 이것을 저희들이 6장에서 보겠습니다.
"산발랏과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 게셈과 그 나머지 우리의 대적이 내가 성을 건축하여 그 퇴락한 곳을 남기지 아니하였다 함을 들었는데 내가 아직 성문에 문짝을 달지 못한 때라"(느 6:1).
여기 보세요. 이 원수들이 무슨 소식을 들었습니까? 퇴락한 곳을 남기지 아니하였다. 성을 건축하는데 퇴락한 곳을 남지기 않았다. 이것 참 원수들이 듣기에는 참 듣기 싫은 소리죠. 이 뉴스가 들려 왔어요. 원수들은 이제 분해 합니다. 이 단순한 진리, 하나님의 백성들이 실패하게 될 때, 하나님의 백성들이 진전을 보지 못하게 될 때, 원수는 기뻐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이제 진전을 얻고 성장하고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가 일어나게 될 때 마귀는, 원수는 낙심합니다. 이제 그들은 마음 속에 번민하는 것입니다. 이 둘은 언제나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 앞에서 추구해야 될 것은 우리는 성공인가, 실패인가, 우리는 전진인가, 아니면 후퇴인가,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것은 이행할 것인가, 아니면 실패하고 이루지 못할 것인가, 라고 하는 문제, 바로 이 두가지 중에 하나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모임 안의 성도들, 교제 가운데 있는 성도들의 우리의 비전은 둘 중에 하나다, 입니다. 두가지 가능성 중에 하나다. 그럼 우리는 어떤 것을 택해야 할 것인가? 너무나 자명한 것이죠. 여기 보세요. 퇴락한 것을 남기지 않았어요. 놀라운 뉴스였습니다. 이제 원수들은 가슴 아파하고 배가 아파하고 시기하고 이제 공격 하려고 하고 이럴 때에 여기 또 한가지 주님이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아직 성문에 문짝을 달지 못한 때라" 퇴락한 것은 없어졌는데요. 문짝은 달지 않았다. 이것 아직 완성되지 않은 거거든요. 형제 자매님들,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하게 될 때요, 주님의 일은 단숨에 이루어지지 않죠. 여기서도 성벽이 쌓여지게 될 때 조금씩 조금씩 올라가는 겁니다. 한순간에 다 쌓여지는 것은 아니죠. 그리고 또 문짝도 만들어서 달아야 됩니다. 이 과정 중에, 이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과정 중에, 하나님의 사람들, 인도자나, 또 인도자를 따라가는 모든 성도들이나, 마음 속에 우리는 한 순간도, '아 이제는 됬다.' 라는 생각을 해서는 안된다는 말이죠.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 대한 위험이 있습니다. 이 이뤄지지 않은 것에 대해서 우리가 근심 가운데, 또한 조바심 가운데 들어간다면 그것도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이뤄지지 않은 문제가 아니라, 이룬 문제에 대해서도 만족한다고 하는 것도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일이 진전되게 될 때, 그 순간 순간마다 하나님의 위대한 은혜를 하나님 앞에 구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고 매 순간마다 주님과 함께 동행해야 되는 것입니다. 아직 완성이 안됬는데, 만족도 합당하지 않습니다. 또한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불안도 합당하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주님의 인도를 따라 계속해서 그 프로그램을 따라서, 주님의 인도함을 따라서 갈 뿐입니다.
"산발랏과 게셈이 내게 보내어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오노 평지 한 촌에서 서로 만나자 하니 실상은 나를 해코자 함이라"(느 6:2).
산발랏과 게셈이 사람을 보내가지고요. 제일 첫번째, 6장을 보면요. 세가지 간계가 있습니다. 그 간계는, 첫번째 1-4절까지 첫번째 간계가 있어요. 이 모든 세가지 간계는요, '오라, 우리가 뭐 하자.'라는 말입니다. 원수가요. 원수의 언어 중에 '오라 우리가 뭐 하자.' 라고 얘기한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가 어리석어서요. 원수가 뭐 하자고 하니까, 그래도 뭐 좋은 일을 하나보다. 또 뭔가 일이 이루어질 수도 있지 않은가? 이와 같은 생각은요, 이것은 한마디로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그 이야기 속에는 단 한 코너도, 단 한 부분도 우리가 고려할 가치조차 없는 것입니다. "오라 우리가 함께 뭘 해 보자." 조금 전에요, 느헤미야가 2장 마지막 절에서 뭐라고 말씀했습니까? 원수를 향해서 그는 뭐라고 말했습니까? "오직 너희는 예루살렘에서 아무 기업도 없고 권리도 없고 명록도 없다." 이것 분명히 했습니다. 느헤미야는요, 원수와 관련해서는 절대로 여기는 권리도 없고 기업도 없고 명록도 없다, 선을 명확하게 그었습니다. 이 선을 명확하게 긋지 않는다면요. 원수가 우리에게 찾아와서 "오라, 우리가 뭐 이것 좀 해 보자." 라고 할때 이 선이 무너지고 마는 겁니다. 거기서부터 이제 문제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산발랏과 게셈이 내게 보내어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오노 평지 한 촌에서 서로 만나자" 여기서 제일 첫번째의 제안은 오노 평지에 있는 촌락에서 우리가 만나자, 라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거기서 만납니까? 오노 평지라고 하는 것은요, 예루살렘으로부터요. 북서쪽으로 약 40km 떨어진 곳입니다. 그곳은 위로 가면 사마리아죠. 또 이쪽은 아스돗입니다. 이 사이에 있는, 두 지역, 사마리아와 아스돗 사이에 있는 지역입니다. 그곳의 오노 평지에 존재하고 있는 작은 마을, 거기서 우리가 만나자는 이야기죠. 이 말씀 끝에 가면 느헤미야가 그 이야기를 딱 들었을때, 느헤미야는 인도자로서 이와 같이 개인적인 접촉을 하게 될 때, 원수가 느헤미야에게 개인적으로 찾아와서 이야기 하게 됩니다. 개인적인 제안 입니다. 그 제안에 대해서 그는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가,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 그 다음 말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조금도 주저없이 "실상은 나를 해코자 함이라" 그들은요, 그가 첫째, 일터에서 떠나기를 원하는 겁니다. 그래서 오라고 하는 거예요. 제 3의 지역에서 만나자고 하는 겁니다. 그것은 그럴듯 하고 또 멋진 것 같지만 그 사실은, 그 배후에는 "나를 해코자 함이라" 해코자 한다고 하는 것은, 첫째, 느헤미야를 죽이려고 하는 거죠. 둘째, 죽이기 이전에요, 그가 현장을 떠난다고 하는 것도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이 현장은 어떤 곳입니까? 이 현장은요, 매일과 같이 한 순간, 한 순간이 대단히 중요한 순간입니다. 왜? 이 성이 지금 빨리 건축이 되야 되기 때문에 하루도 지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성이 건축되는 장소에 거기에 인도자는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현장에 인도자가 있어야 됩니다. 지역 모임의 인도자, 장로입니다. 장로는 지역 모임을 항상 살펴봐야 됩니다. 목자로서 24시간, 365일, 계속해서 거기에 관심을 두고 살펴봐야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 만일 인도력이 부재된다면 거기에 인도력이 없다면 지역 모임은 이제 와해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무정부요, 거기에는 적절한 인도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무질서가 들어올 수 있습니다. 다스림이 필요한 것입니다. 지역, 하나님의 교회, 모임이라고 하는 것은요. 그곳은 다스리는 곳입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질서가 있어야 됩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대의가 계속해서 역사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 일에 대해서 인도자는 관심을 갖고 그 현장에 있어야 된다. 장로가 모임 안에 있지 않다면요. 마음이 거기 있지 않다면, 그리고 계속해서 일하는 그 수고가 바로 거기에 있지 않다면 그는 장로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신, 그리스도께서 사랑해서 자기 목숨을 버리신 것이 바로 그곳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왜 모임을 사랑하는가? 주님께서 가장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 모임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따라서요, 장로는 모임 안에 있는 성도들을 사랑합니다. 성도들이 주님 앞에 영광을 돌리고 이제 주님께 영광을 돌리며 주님을 위해 봉사하고 예배 드리고 교제하며 나가게 될 때, 거기에 장로의 사역, 거기에 인도자의 임재, 부재가 아니라 임재가 필요하다, 라는 겁니다. 이 산발랏과 게셈은요, 바로 느헤미야를요. 이 현장에서 끌어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잘 기억해야 됩니다. 이제 느헤미야가 이렇게 말하지요.
"내가 곧 저희에게 사자들을 보내어 이르기를 내가 이제 큰 역사를 하니 내려가지 못하겠노라 어찌하여 역사를 떠나 정지하게 하고 너희에게로 내려 가겠느냐 하매"(느 6:3).
이 말을 보십시요. 느헤미야가 한 말을 보세요. "내가 큰 역사를 하니" 이 큰 역사라고 하는 것은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만, 우리가 느헤미야서를 읽으면요. 느헤미야가 자화자찬하는거 아닌가? 자기가 하는 일이기 때문에 큰 일이라고 얘기하는 것 아닌가? 아닙니다. 느헤미야가, 이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지는 역사가 크다고 하는 것은 자기가 거기에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크다, 라고 자화자찬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만일 느헤미야가 하나님의 부름이 없는데 자기가 여기에 와서 자기가 계획하고 자기가 일을 한다면 그것은 큰 일이라고, 그것은 자화자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느헤미야를 부르셨다면 그것은 자기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신 일이기 때문에 그것은 큰 일입니다. 달리 큰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부르셨기 때문에 큰 일입니다. 그 큰 일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인식이 있어야 됩니다. 저희들이 모임에서 일하게 될 때요, 우리는 모임 안에서 내가 봉사를 하던지, 눈에 보이든, 보이지 않든, 공적이든, 사적이든, 아니면 여러가지 다양한 봉사를 우리가 하게 될 때, 주님께 영광을 돌리려고 할 때, 그 일에 대해서 나는 이것은 대단히 큰 일이다, 라고하는 확신을 가지고 하십니까? 그것이 어떠한 일이든지 간에 하나님이 나에게 부르신 일이라면 그것은 대단히 위대한 일입니다. 그것은 큰 일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확신이 있어야 됩니다. 이와 같은 확신이 없을 적에는요, 나는 다른 사람과 비교 합니다. 나는 이 일에 대해서 여러가지 확신 없는 태도를 보이게 됩니다. 이와 같은 자세는요, 모임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을 대단히 커다랗게 장애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발목을 잡는 것입니다. 모임 안에서 모임의 역사가 이루어지고, 그것이 복음이든, 그것이 성도의 교제든, 그것이 예배든, 그것이 기도든, 어떠한 일이든지 간에 이 일이 이루어지게 될 때, 성도들의 마음 속에 내가 하는 일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은 예배든, 봉사든, 기도든, 어떤 섬김이든, 이것은 위대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셨기 때문에 모임에 나가게 될 때, 성도들 교제하게 될 때, 제 마음 속에 확신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일은 하나님께서 신성하게 나를 부르신 일이다, 라고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크게 보시기 때문에 느헤미야는요, 내가 하는 이 일은 큰 일이다. 이 큰 일을 놔두고 내가 어딜 가랴? 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요. 하나님이 나에게 지정해주신 장소, 이것 대단히 중요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우왕좌왕 합니다. 내가 어디 있어야 될지 잘 모릅니다. 때때로 불만이 있어서 딴데로 가려고 합니다. 이것은 뭘 말합니까? 부름을 깨닫지 못하는 겁니다. 그것은 경거망동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자기가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은혜를 따라서 하나님 앞에 믿는 사람으로 나오는 것, 이것은 부름입니다. 또한 지역 교회에 우리가 부름을 받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섬기는 모든 일이 주님께서 나에게 의탁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모든 일에 대해서 나는 확신을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주님이 나에게 부르신 것에 대해서 고귀하다는 생각을 가져야 됩니다. 이 위대한 일, 이것을 놓고요. 느헤미야는 원수를 향해서 이렇게 얘기하게 됩니다. "이 큰 역사를 하니 나는 절대로 내려가지 못하겠다." 우리가요, 하나님이 나에게 허락하신 이 위대한 것을 내 마음 속에 깊이 생각하고 그 일에 충성하게 될 때, 그저 어떤 일이든지, 충성하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습니다. 놀라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작은 일에 충성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큰 일을 맡기십니다. 이것은 언제나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 원칙입니다. 느헤미야는요, 큰 역사를 하기 때문에, 나는 내려가지 못하겠다. 그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보호를 받습니다. 내려갈 이유가 없어요. 거기 내려가면 죽습니다. 그는요, 이와 같은 일에 있어서 그는 보호를 받았아요. 여러분과 제가요, 지역 교회 안에서 주님이 나에게 허락하신 것에 대해서 충성하시면요, 거기에는 내 모든 위험으로부터 내가 보호 받습니다. 내가 성장합니다. 주님께서 영광을 받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은요, 우리가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에 대해서 위대하다, 고귀한 것이다. 신성한 것이다, 라고 하는 자부심, 이것은 교만한 자부심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겸손한 마음 가운데 가지고 있는 자부심입니다. 이 자부심을 가지고 일하게 될 때, 하나님께서 나를 인도하시는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인도요, 하나님의 길입니다. 느헤미야는요, 제일 첫번째 공격, 간계 중에 "오라 우리가 오노 평지에서 만나자." 이것을 한마디로 일축해 버렸어요.
그런데 이 사람들은요, 한번에 끝나지 않았어요. 끈질깁니다. 원수는요, 끈질깁니다. 원수는 처음에 우리에게 공격합니다. 이렇게 공격하지요. "오라 우리가 오노 평지에서 만나자." 첫번째는요, "아니다. 나는 절대로 가지 않는다." "나는 이러이러한 이유 때문에 가지 않는다." 라고 이야기 하지만, 두번째 공격을 하게 될 때는요, 약간 생각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준이 조금 낮아지는 것입니다. 세번째, 조금 더 낮아집니다. 바로 이런 것 때문에 원수는 계속해서 부단히 공격하는 것이죠. 바로 그 목적 때문에요, 열번 찍어서 안넘어가는 나무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라 우리가" 라고 이야기 하게 될때, 그것을 한번하든, 두번하든, 세번하든, 네번하든, 그것은 언제나 똑같은 것이다, 라는 생각을 해야 됩니다. 그것이 우리의 일관성입니다. 초지일관, 하나님께서 옳다고 하는 것은, 처음이나 끝이나 언제 옳은 겁니다. 하나님께서 틀렸다고 하는 것은 언제나 그것은, 세번째 했다, 네번째 했다, 그것이 옳지 않은 것이 옳은 것이 되지는 않습니다. 옳은 것이 틀린 것이 되지 않습니다. 여기에 우리가 가져야 될 것은, 느헤미야가 우리에게 보여준 것은 그는 일관성이었습니다. 느헤미야의 결단, 그의 인도력의 탈월함, 그 중에 하나는 그는 결단력을 가졌을 뿐 아니라 일관성을 가지고 있다. 한번 확신한 것에 대해서는 그는 언제나 변치않고 그 가치는 언제나 보존이 된다. 그는 분명히 말했죠. "너희들은 예루살렘에서 기업도 없고, 권리도 없고, 명록도 없다." 이렇게 말했어요. 이 원칙, 이것은 언제나 같다. 한번 그렇게 말했을 때, 두번째, 오라, 오너 평지로 오라고 했을 때에, 두번째, 세번째, 네번째, 이야기한다 해도 언제나 "너희들은 아무 관계가 없다. 너희들은 아무 기업도 없다. 그러니 내가 왜 가서 너희들과 이야기하랴? 그것은 단순히 시간 낭비다." 라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일관성,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일광성, 대단히 중요합니다. 처음 붙든 것을 우리가 끝까지 붙들고 가는 것, 처음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 그 마음을 가지고 계속해서 간다고 하는 것, 일관성입니다. 그런데 이제 두번째, 오라 우리가 뭐 하자, 라고 할때요. 두번째, 네번까지 했는데 안됬어요. 어떡합니까? 원수는요, 이것으로 이제 중단합니까? 아닙니다. 그러나 네번까지 해보고는요, 바꿉니다. 어떻게 바꿉니까? 다섯번째 공격이 옵니다.
"산발랏이 다섯번째는 그 종자의 손에 봉하지 않은 편지를 들려 내게 보내었는데"(느 6:5).
이 원수의 사자가, 봉하지 않은 편지, 이것은 다른 말로 이야기하면 열린 편지입니다. 공식적인 서한, 이런 관리들 사이에 주어지는 서한이라면 그 서한은 반드시 기록이 되고 그것이 말아서 거기에 인을 치고 그것을 쓴 사람이 보내게 될 때, 읽는 사람만 그것을 읽는 것입니다. 그것이 봉한 편지입니다. 그것이 공식적인 편지입니다. 그런데요, 이 산발랏은 일부러 열린 편지를 보냈어요. 열린 편지라고 하는 말은, 송신인이 보냈을 때, 수취인이 그것을 받았을 때, 열린 편지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 편지 내용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다 보았다는 이야기죠. 이것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에 전략이 있어요. 산발랏이 그 내용, 그 편지 안의 내용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 글에 이르기를 이방 중에도 소문이 있고 가스무도 말하기를 네가 유다 사람들로 더불어 모반하려 하여 성을 건축한다 하나니 네가 그 말과 같이 왕이 되려 하는도다"(느 6:6).
이 내용은 뭡니까? 이 가스무, 그리고 산발랏, 가스무도 그렇게 이야기 했다. 산발랏이 이것을 보내게 될 때, 그 내용, 그것은 중상입니다. 사실이 아니다, 라는 이야기죠. 이것을 기록해서요. 열린 편지로 보냈어요. 그래서 이제 느헤미야를 압박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네가 성을 건축하는 이유는 다른 이유가 아니라 너는 왕이 되고 싶어한다." 이런 서한은요, 상당히 오랫동안 즐겨 사용됬던 것이죠.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돌아온 이후에 고토에 돌아와서 성전을 지을 때도 그랬고, 성벽을 지을 때도 그랬고, 원수는 계속해서 페르시아왕들을 향해서 그렇게 말해 왔지요. 이것은 하나도 변하지 않은 그런 전략입니다. 또한 그들이 생각하기를 가장 마지막 카드로 쓸수 있는 그런 것이다, 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느헤미야 너는 성을 건축하는데 너의 동기는 왕이 되려고 하는 것이다." 라고 함으로 인해서요, 이 말이 첫째, 페르시아왕에게 전달되기를 원하는 겁니다. 전달이 안됬다 해도 느헤미야가 이 서신을 읽었을 때, 왕이 나보고 뭐라고 하면 어떻게 될까, 하는 두려움 속에 빠뜨리려고 하는 것이죠. 또 이와 같은 중상의 내용이 백성들에게 전해 졌다고 하는 것을 깔아 놓은 것입니다. 열린 편지라고 하는 것은 이 내용은, 이 중상의 내용이 왕에게 이미 전해졌고 또한 백성들에게 다 전해 졌고, 모든 사람들에게 다 전해졌기 때문에 이 내용은 왕에게 결국은 전해질 것이다, 라는 사실을 깔아놓은 것입니다. 그것은 느헤미야가 그 얘기를 듣게 될 때, 페르시아왕의 총독으로 와 있는 사람이, 이제 페르시아왕에게 다시 소환되어서 그는 죽음을 당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그 말입니다. 이런 가능성이 있다면 느헤미야는 두려워 할 것이 아니겠어요? 이것은 참 커다란 시험이지요. 두려움, 마귀는요. 원수는 우리 마음 속에 두려움을 넣어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네가 그 말과 같이 왕이 되려 하는도다 또 네가 선지자를 세워 예루살렘에서 너를 들어 선전하기를 유다에 왕이 있다 하게 하였으니 이 말이 왕에게 들릴찌라 그런즉 너는 이제 오라 함께 의논하자 하였기로"(느 6:6-7).
이런 중상을 그가 편지에 기록하고 결론은 무엇입니까? 그러니까 와서 이야기하자고 하는 겁니다. 다섯번째 시도는 이제 강도가 높습니다. 그 전에는 오노 평지에 오라, 우리가 변론하자는 것으로는 안되겠으니까, 이제 중상이라고 하는 방법을 써서 느헤미야를 두렵게 해서 오게 하는 거죠. 오게 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가 만일 온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그는 반드시 죽을지도 모르죠. 그는 매복한 사람들에 의해서 살해당할지도 모르죠. 그들은 그것이 우리에게 상책이라, 원수들은 그렇게 생각 했겠죠. 그래서 그를 계속해서 유인합니다. 이제 저희들의 관심은요, 느헤미야가 이런 일을 당했을 때, 어떻게 대처했을까? 이것 참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느헤미야는 열린 편지를 보았고, 그가 읽은 중상의 내용을 읽었을 때에, 그는 이와 같은 두려운 현실 속에서 그는 어떻게 결정해야 될까? 중상이라고 하는 것, 마귀가 참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잘 쓴 것입니다. 거짓 송사, 거짓 증언, 이것은 사실은 율법에서도요. 거짓 증거하지 말라고, 거짓 증거는 대단히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율법에도 나와 있죠. 거짓 증거한다고 하는 것, 요셉을 향해서 보디발의 아내가 자기가 원하던 그러한 접근이 성사가 되지 않았을 때, 성사가 됬다면 그 여자는 더 이상 얘기 안했겠죠. 나중에 발각이 되면 또 다른 변명을 했을지 모르지만 그 여자는 다른 얘기 안했겠죠. 그러나 요셉이 끝까지 응하지 않았을 때, 어떻게 했습니까? 거짓 고소했지요. 그래서 감옥으로 들어갑니다. 중상이라고 하는 것, 이것은 해묵은, 마귀의, 원수의 무기인데요. 이 중상이 뭘까?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데로 내려가느니라"(잠 18:8).
그래서요, 우리는 많은 경우에요. 내 얘기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 얘기하기 좋아합니다. 또 다른 사람 얘기를 하지만 근거없는 얘기를 좋아합니다. 그것이 별식과 같아서요. 술술 뱃속으로 잘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제 때로는 의도하지 않은 대화 속에서도요. 마귀는 역사하고 의도하지 않은 대화 속에서 이상 야릇한 중상도 나오는 겁니다. 물론 의도한 중상도 있습니다. 한가지 더 보겠어요.
"나무가 다하면 불이 꺼지고 말장이가 없어지면 다툼이 쉬느니라"(잠 26:20).
말을 만들어내는 사람, 거짓 고소하는 사람, 자기의 어떤 목적을 위해서 상대방의 신용을 암살하려고 하는 사람, 이 신용 암살입니다. 중상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은 사람의 신뢰, 크레딧을 말살시키는 암살입니다. 이 중상, 이것으로 인해서 역사는 물들어 왔습니다. 여기 이 느헤미야 시대에 느헤미야를 향해서 또 다시 중상을 하게 되는데, 느헤미야가 과연 이것으로 인해서 두려워 했을까? 그래서 그는 안되겠다, 내가 오노에 가서 이 사람들을 만나서 나의 진실을 얘기해야 되겠다. 이것 참, 어리석은 이야기입니다. 이것 참 순진한 사람입니다. 원수를 향해서요, 원수와 만나서 변론하고 원수 앞에서 내 진실함을 이야기 한들, 그들이 그것을 받아들이겠습니까? 여기 느헤미야가 한 일을 보십시요.
"내가 보내어 저에게 이르기를 너의 말한바 이런 일은 없는 일이요 네 마음에서 지어낸 것이라 하였나니"(느 6:8).
그는요, 오노에 가서 그들을 만나서 변론할 이유가 없어요. 일고의 가치가 없습니다. 궁상이라고 하는 것, 그리스도인들이 이 중상모략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요. 나 자신이 중상을 당했을 때, 어떡할까? 그것을 나의 진실함과 순전함을 밝히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표하고 선포하고 이래야 될 것인가? 아닙니다. 요셉은요, 요셉이 체포되어서요. 감옥에 들어가게 될 때, 요셉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표하고 소리치고, 자기는 이랬다고 하는 것을 그는 이야기 했습니까? 그는 단 한마디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만 그냥 감옥에 들어갔어요. 다만 하나님께 이 모든 그 후에 될 일을 하나님의 손에 의탁했다 그 말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할 일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만일 중상을 모략을 당한다면, 우리가 해야 될 일은 그것에 대해서 나의 진실함과 나의 정당성과 이것을 많은 백성들 앞에서, 성도들 앞에서, 원수들 앞에서 그것을 선포하는 그런 일은, 그것은 지혜로운 일이 아닙니다. 이 모든 일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우리는 의탁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기 느헤미야가 한 일을 보십시요. 이런 일은 없다. 나는 내가 가서 이 일을 이야기 할 필요조차 없다. 왜? 그것은 그 사람이 만들어 낸 일이고, 이 일은 있지도 않은 일이다. 이 사실을 그는 선언 했어요. 그리고나서 그는 뭐라고 말씀했습니까? "이는 저희가 다 우리를 두렵게 하고자 하여" 그는 그 모든 목적, 왜 중상이라고 하는 무기를 쓸까? 왜냐하면 그는 나를 두렵게 하기 위해서라고 하는 겁니다.
"이는 저희가 다 우리를 두렵게 하고자 하여 말하기를 저희 손이 피곤하여 역사를 정지하고 이루지 못하리라 함이라 이제 내 손을 힘있게 하옵소서 하였노라"(느 6:9).
원수의 목적은요,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원수의 목적은요. 느헤미야가 가서 나는 이러이러해서 왕을 내가 모반하다니요. 내가 무슨 생각을 가지고 여기에 왔는데, 뭐 그런 여러가지 자기 마음 속에 있는 진실함을 얘기한다고 해서 그들은 절대 만족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만족하는 것은 예루살렘의 성 역사가 중단되는 것입니다. 만일 중단되지 않으면 무슨 얘기를 해도 만족이 없어요. 따라서 느헤미야는 이제 어떻게 합니까? 이 모든 일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찾아 나갑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이 느헤미야가 공격을 받게 될 때마다, 하나님 앞에 찾아 나갔는지를 우리는 잘 기억하죠. 하나님의 교회가 핍박을 당하게 될 때,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와 같은 일을 당하게 될 때, 하나님의 백성은 어떻게 해야 될까? 우리는요, 이론이나 논리나 이런 것이 아니라 이 모든 일을 알고 계시고, 이 모든 일을 주장하고 계시는 하나님 앞에 나가야 됩니다. 기도해야 됩니다. "이는 저희가 다 우리를 두렵게 하고자 하여 말하기를 저희 손이 피곤하여 역사를 정지하고 이루지 못하리라 함이라" 그리고나서 어떻게 했습니까? 그는 그 이유를 잘 알았어요. 왜 그가 그런 이야기를 하는지 잘 알았어요. 왜 그가 열린 편지를 보냈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 원인을 그는 잘 간파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원인을 잘 간파하고만, 거기서 끝날 것이 아니라 느헤미야는요,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참 유명한 기도입니다. 저희들의 마음 속에 잘 기억해야 될 기도입니다. "이제 내 손을 힘있게 하옵소서" 느헤미야의 손, 인도자의 손이 힘이 있어야, 어떤 힘입니까? 주님으로부터 오는 힘, 그 손이 힘이 있어야 백성들의 손도 힘이 있는 것입니다. 인도자가 강해야 백성들도 강한 것입니다. 인도자가 약하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하나님 앞에 거의 범죄입니다. 옳은 것이 쓰러지고 있다. 옳은 것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악한 것이 오히려 힘을 얻고 있다. 이것은 용납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악한 것이 힘을 얻고 불의한 것이 세력을 얻고 있다. 그것을 우리는 그냥 바라보고 있다. 그것은 합당한 것이 아닙니다. 의가 무너져가고 있고, 또 정의가, 또한 공의가 이제 쓰러져가고 있는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일에 대해서 무감각 하다면 우리는 범죄자입니다. 우리는 가장 통탄할 일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것이 힘을 얻는 것, 하나님을 불순종 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힘을 얻는 것,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이와 같은 일들이 용인되는 것, 그것을 찬양하는 것, 이런 모든 것들이 우리 가운데 있어서는 되지 않는다, 라는 생각을 우리는 가져야 된다는 그 말입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기도했어요. "주여 내 손에 힘을 주십시요. 내 손을 힘 있게 하옵소서." 우리에게 오늘 필요한 것은 이런 것입니다. 우리 모임에 필요한 것은 인도자의 손이 강해야 됩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힘, 이 확신, 주님의 인도하심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고 그것에 나아가는 것, 그래서 주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가운데 편만해지고 흥황하는 것, 이것을 보지 않고서는, 우리는, 나는 살수 없다고 선포해야 합니다. "주여 내 손에 허락해 주십시요." 이 기도 필요합니다. 특별히 중상모략을 당하게 될때, 이제 악이 역사하게 될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이것이 몇번째 기도입니까? 일곱번째 기도입니다. 느헤미야의 일곱번째 기도, "하나님 이제 내 손을 힘있게 하옵소서"
그리고나서요, 세번째 간계가 있어요. 오라, 우리가 뭐하자.
"이 후에 므헤다벨의 손자 들라야의 아들 스마야가 두문불출하기로"(느 6:10).
세번째 우리가 뭐 하자, 라는 공격이 오는데요. 이 사건은요, 두문불출 사건입니다. 방콕 사건입니다. 방에 콕 박혀 있는 사람, 이 스마야라는 사람이요.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이 예루살렘 성의 유지라고 생각합니다. 게다가요, 느헤미야가 전에 신임하던 사람입니다. 또 그는 원수에게 아주 잘 쓰임을 받는 앞잡이가 되 버렸어요. 그리고 그는 어쩌면 제사장 중에 하나든지, 아니면 제사장과 깊은 관련이 있는 사람이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또 하나 그는 자기가 자칭 선지자라고 자처하는 사람입니다. 이제 그는 연극을 꾸몄어요. 그는 시나리오를 만들었어요. 그리고 이제 그는 느헤미야를 초청하지요. 초청해 드리려고 하는 겁니다. 느헤미야가 그가 두문불출한다, 틀어박혀서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요. 염려가 되서 한번 찾아간 것 같습니다.
"이 후에 므헤다벨의 손자 들라야의 아들 스마야가 두문불출하기로 내가 그 집에 가니 저가 이르기를 저희가 너를 죽이러 올터이니 우리가 하나님의 전으로 가서 외소 안에 있고 그 문을 닫자 저희가 필연 밤에 와서 너를 죽이리라 하기로"(느 6:10).
여기 스마야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요. 스마야는 굉장히 느헤미야를 깊이 생각해 주는 것 같이 이야기 합니다. 완전히요, 일류 배우가 연출하는 것 같이 그는 모든 정성을 다 해서요, 느헤미야를 속이려고 하죠. 속여서 어떻게 하려고 합니까? 그를 두렵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두렵게 해서요. 누가 죽이려고 하니까, 이제 네가 살고 싶으면 성전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어떻겠느냐? 그 안으로 들어오면 거기는 정말 안전하다. 느헤미야가요, 만일 이 이야기를 통해서, 심지어 선지자를 자처하는 사람이예요. 그리고 느헤미야를 굉장히 위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예요. 왜? 느헤미야가 그를 신임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변절자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하는 이야기를 통해서 느헤미야가 다시 두려움 속에 빠진다면 그는 어떻게 했겠어요? 그는 성전으로 들어갔겠지요. 느헤미야는 레위 지파가 아닙니다. 느헤미야는요, 제사장이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 민수기 말씀에 의하면, 누구든지 외인이 들어오면 죽는다. 이것 하나님의 말씀이예요. 만일 느헤미야가 두려워 했기 때문에, 이제 두려움 때문에 자기를 보존하기 위해서 성소에 들어간다면, 그곳은 성소입니다. 지성소는 아니지만 성소 안에 들어가는 겁니다. 웃시아가 그곳에 들어갔을때 문둥병자가 됬지요. 느헤미야가요, 지금까지 주님의 일을 잘 해 왔어요. 이 역사를 이 많은 반대를 뿌리치고요. 안에서의 문제도 그는 해결했고, 이제 계속해서 또 두번, "오라 우리가" 다섯번의 이 도전에도 그는 굴하지 않고, 그는 두려워하지 않았고, 그는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그런데 전략이 또 바뀌었어요. 이제는 편지가 아니고요. 그가 신임하고 있는 이 사람, 이 사람이 자기를 위해 주는 척, 하면서 이제 이리 들어와서 숨어야 너는 산다는 얘기를 했을 때에 엄청난 테스트입니다. 느헤미야 마음 속에요. 하나님의 말씀이 언제나 그의 행방에 대해서 지침이 된다, 라고 하는 원칙이 없다면 그는 어쩌면 두려워서 그리로 들어갔을지 모릅니다.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발견합니까? 어떠한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고수할 것이냐, 아니면 내 사사로운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할 것이냐? 이와 같은 시험입니다. 그는 제사장이 아니었어요. 그는 어떠한 이유에서든지 그는 성소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가 만일 들어갔다고 생각해 보십시요. 이것은요, 그의 신뢰, 사람들로부터 받는 신임의 암살입니다. 신임이 무너지는 겁니다. 그가 아무리 하나님의 일을 성공적으로 해 왔다고 할찌라도 백성들로부터 그가 이 일에 대해서 흠이 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가 뭐 재정적으로 괜찮았어도, 좋은 간증을 보였어도, 그는 결단된 사람이었어도, 그가 놀랍게 순전을 보였어도, 그는 믿음이 있었어도,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했어도, 그러나 그는 이 부분에 있어서 제사장들과 예배와 성전과 이런 부분에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다고 하는 낙인은 그를 떠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인도자는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모든 부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해야 될 책임이 있고요. 이것에서 이탈되게 될 때, 그 신뢰는 추락되는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그 역사를 할 수 없게 되는 것 중에 하나는 그가 흠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 원수는 우리가 범죄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범죄하기를 원수는 그렇게 간절하게 기도하고 있다 그 말입니다. 따라서요.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들로서, 인도자로서, 성도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며 범죄하지 않고 거룩하게 산다고 하는 것, 하나님의 말씀을 나의 가장 고귀한 것으로 알고 믿고, 순종하고 그 길을 걸어간다고 하는 것은 그 자체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여기서요, 하나님의 말씀을 그는 끝까지 어기지 않았어요. 아무리 공포가 이제 거짓 공포였지만, 그 마음 속에 두려움이 찾아 오도록 만들었다 할지라도 때때로 우리는 이와 같은 공포에 빠지기도 하지요. 때때로는 나의 삶 속에서 재정 문제가 어려워질 때, 공포가 나에게 찾아옵니다. 질병이 찾아오게 될 때, 우리 자신에 문제가 생기게 될 때, 학생으로서 학교 안에서 여러가지 어려운 것들, 직장 안에서의 여러가지 동료들과 상관 관계서의 문제, 어떤 순간에 가면 정말로 두려워서 정말로 이것을 더 이상 견딜 수가 없는 순간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 우리는 어떤 원칙을 계속해서 고수해야 될 것인가? 하나님의 말씀이 그때도 여전히 적용될 것이냐, 아니면 이제 현실적으로 타협해 들어가야 될 것이냐, 만일 타협한다면요. 그 타협 자체가 나의 발목을 깊이 깊이 잡게 될 것이다, 그 말입니다. 느헤미야가 성전에 타협에서 들어갔다면요.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들어갔다면 그의 모든 사역은 여기서 끝나고 마는 것입니다. 더 이상 백성들은요, 그가 하는 말을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요. 모임 안의 인도자에게, 모임 안의 성도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일에 있어서 우리는 신임을 받고 있는가, 하나님으로부터 신임을 받고 있는가? 우리는 동료 성도들로부터 신임을 받고 있는가?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신임을 받고 있는가? 바로 그 말입니다. 마지막 이 도전에서요. 이 스마야는 대단히 강력한 공격을 했습니다. 사실상 이것은 마지막 공격이었습니다. 그것은 가장 위험한 공격이었어요. 이 수많은 공격들, 이 공격에서 느헤미야는 승리했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그 다음 말씀을 보면 52일만에, 엘룰월 이 성벽 건축은 완공되고 있습니다. 참 놀라운 일이죠.
오늘 여기까지 저희들이 생각해 보겠습니다. 어제, 오늘, 저희들은 하나님의 원수의 반대, 그리고 뿐만 아니라 놀라운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 안에서의 이와 같은 탐심, 물질 사랑하는 마음, 이것이 우리 가운데 엄청난 어려움을 가지고 온다. 모임 안에서 탐심이 역사할때요, 물질주의가 생기게 될 때, 사업을 위해서요. 무모하게 돈을 빌리고, 성도들 가운데 돈 빌리고, 이와 같은 일들, 모임이 얼마나 어려움을 당한지 아십니까? 이와 같은 문제에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지 않을 때에 모임은 엄청난 어려움을 당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일은 중단됩니다. 성도들의 마음 속에 분란이 일어납니다. 많은 이와 같은 어려움들, 우리가 생각해 보십시요. 오늘 외부에서의 반대, 그리고 내부에서의 장애, 이 모든 일에도 느헤미야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 앞에서 신뢰를 보존했다고 하는 것, 이것은 저희들의 마음 속에 많은 감동과 도전을 줍니다. 주님께서 저희들을 도와 주시기를 바랍니다. 저를 포함해서요, 우리 모두가 다 이 마지막 때 하나님의 말씀에 있어서 정말로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신뢰, 순종하는 일에 신뢰,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힘이라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이것을 드리게 될 때,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요. 하나님의 위대한 일이, 큰 일이, 계속해서 중단 없이 이루어 질 것이라 믿습니다. 주님께서 저희 모두를 도와 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