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봉래 형제님/빌립보서

빌립보서 1장 : 영적인 기쁨

박이레 2021. 7. 25. 23:05

2020년 10월 11일 일요일 / 한봉래 형제님
< 빌립보서 1장 1-4절 : 영적인 기쁨 >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는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찌어다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빌 1:1-4).

사도바울이 빌립보 감옥에, 빌립보서는 사도바울이 로마의 감옥에 갇혀서 쓴 편지 입니다. 누구에게 썼냐하면 빌립보에 사는 성도들에게 쓴 편지 입니다. 그리고 빌립보서에 보면 '기뻐하라'는 표현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말씀을 통해서 저희들이, 영적인 기쁨, 하나님께로 오는 기쁨을 어떻게 누릴수 있는가, 이런 주제로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먼저 서론적으로 몇가지 보겠습니다. 첫번째로 이 빌립보서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사도바울이 교회에 보낸, 신약성경의 상당한 부분을 사도바울이 썼습니다. 그 중에서 사도바울이 교회에 보낸 서신이 일곱개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주님께서 사도요한을 통해서 일곱개의 교회에 편지를 쓰십니다. 2, 3장에 보면, 그래서 아마 이 일곱이라는 숫자가 모든 교회를 총 망라하는, 그런 내용으로 볼수 있습니다. 그리고 신약성경에서 사도바울이 교회에 보낸 서신이 일곱개 입니다. 한번 살펴 볼까요? 제일먼저 로마서가 있고요. 그리고 갈라디아서가 있습니다. 그 다음에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그리고 데살로니가, 고린도서 그렇게 해서 일곱개의 교회에 보냈습니다. 잠깐 그 서신들을 내용적으로 분류해보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는 복음을 다루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이 구원의 도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희들이 잘 아는대로 에베소서는 교회에 관한 서신입니다. 그런데 에베소서는 몸된 교회, 우주적인 교회를 다루고 있고 그 다음에 고린도서가 지역교회를 다루고 있는 서신입니다. 그리고 골로새서는 교회의 머리되신 주님을 다루고 있습니다. 주님을 높여서는 안된다는 내용이 골로새서 입니다. 다섯개고요. 그리고나서 여섯번째가 데살로니가 전후서가 있고, 데살로니가에 보낸것 그리고 빌립보 교회에 보낸 서신이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서에는 주로 소망을 다루고 있습니다. 교회의 휴거라든지, 혹은 적그리스도가 오는 문제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빌립보서 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다루고 교회를 다루고, 그리고 교회의 미래에 대해서 다루고, 그럼 빌립보서는 무엇을 다루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의 주제는 '실질적인 삶' 입니다. 교회가 이 지상에서 구체적으로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갈것이냐 하는것이 빌립보서의 주제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빌립보서의 주제를 다시 구체적으로 이야기 하면, 빌립보서 1장 21절입니다. "내게 사는것이 그리스도니 죽는것도 유익함이라" 그래서 빌립보서의 주제는 '헌신'입니다. 교회는, 혹은 성도들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주님께 헌신하며 살아야 합니다. 자신의 삶을 주님께 드리며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살때 두가지가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첫번째가 기쁨입니다. 우리에게 영적인 기쁨이 없는것은, 우리가 헌신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헌신하는 사람은 반드시 영적인 기쁨을 누릴 것입니다. 그 헌신의 예들이 나옵니다. 빌립보서 2장에 보면 주님, 사도바울, 디모데, 에바브라 디도 이런 사람들의 헌신이 나오고 그들이 누렸던 기쁨들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에 두번째, 빌립보서에 대해서 서론적으로 살펴보았고요. 두번째는 빌립보라는 도시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빌립보라는 도시는 유럽의 첫번째 성입니다. 2차전도 여행때에 복음이 아시아쪽으로 가지않고 유럽으로 방향을 틀게 됩니다. 주님께서 사도바울이 전도여행을 할때 이쪽길도 막고 저쪽길도 막고 유럼쪽으로 방향을 틉니다. 그래서 마게도냐 사람이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환상을 보고 그리 건너가게 됩니다. 그래서 빌립보가 유럽에서 세워진 최초의 모임입니다. 그런데 여기 빌립보라는 도시 몇몇 특징들을 보겠습니다. 사도행전 16장쪽을 보시면, 나중에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거기엔 빌립보를 로마의 식민지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저희들이 아는대로 당시 세계는 로마제국 시대 입니다. 제국하면, 성경이 말하는 제국은 항상 세 대륙을 다 점령해야 제국입니다.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이 세 대륙을 점령해야 제국입니다. 그렇게 한 제국이 세계사에서 네가지 제국 밖에는 없습니다. 바벨론, 페르시아, 헬라, 로마 이 네가지 제국 외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당시 로마가 제국이기 때문에 빌립보는 당연하게 로마의 수중에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빌립보를 로마의 식민지라고 표현 합니다. 빌립보가 독특한 곳인데요. 저희들이 세속 역사를 보면 로마는 원래 한 사람이 통치하지 않고 몇몇 사람들이 통치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한사람의 통치로 바꾼 사람이 그 유명한 시저 입니다. 그가 황제 제도로 바꾼거죠. 로마가 너무 넓어졌기 때문에 로마의 크기가 너무 커졌기 때문에 몇몇 사람들이 통치해서는 안되고 권위있는 한명이 결정해야 한다. 그래서 시저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요. 그리고 그는 암살 당합니다. 자기가 믿었던 친구에게마저 암살을 당하지요. 그리고나서 혼란에 빠집니다. 그리고 시저가 양아들로 삼은 옥타비아누스와 전쟁이 벌어지게 됩니다. 그때에 전쟁에서 이 빌립보 근처에 있는 바다에서 해전이 벌어집니다. 국가의 운명을 거는 전투가 바다에서 벌어집니다. 그리고 빌립보가 시저 편에 섭니다. 하여간, 지금 저희들로 치면 주님이 오시기 몇년전에 로마는 마게도냐, 헬라쪽을 점령하는데요. 점령을 해서 전체가 로마 식민지 입니다. 그런데 로마가 이렇게 결정을 합니다. 빌립보라고 하는 도시를 정하고 그 도시에 로마식 건물들을 세웁니다. 거기를 작은 로마로 만듭니다. 그리고 로마의 충성스러운 군인들, 로마의 자부심을 느끼는 사람들을 그쪽으로 이주 합니다. 그래서 거기는 로마의 군대가 거주하고, 그리고 로마식으로 살고, 로마어를 쓰고 로마 풍습을 따르고 하는 사람들의 후손이 빌립보입니다. 그래서 특별한 곳입니다. 나머지는 전부 그리스라고 하는 국가 입니다. 그리스라고 하는 국가에서 빌립보 하나만은 로마식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 빌립보 성도들에게 사도바울이 이렇게 씁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이것이 굉장히 대조되는 것입니다. 우리 이 세상에 삽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늘 백성입니다. 우리는 하늘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마치 빌립보에, 나머지는 전부 헬라식으로 살지만 로마식으로 사는 도시가 빌립보 였듯이 나머지 세상은 세상식으로 살지만 하늘식으로 사는,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주님의 성품처럼 행동하는 사람들이 사는 곳, 이게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교회에 관한 말씀들 입니다. 그 다음에 다시 빌립보의 특징을 보면, 그래서 빌립보 사람들은 로마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특별히 빌립보에서 복음을 반대할때 그들이 내세운 명분이 뭐였냐면, 이것도 사도행전을 읽어보시면 이렇게 나옵니다.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을 수 없는 풍속을 전한다." 그들은 로마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로마 방식, 로마의 관점,로마가 가지고 있는 세계관으로는 받아들일수 없는 풍속을 전한다. 그래서 사도바울을 빌립보 감옥에 가두고, 그 다음에 매를 때리고 했던 것입니다. 이게 빌립보라는 도시가 가지고 있는 어떤 특징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연결사항을 보면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할때 보면 항상 어떤 새로운 지역으로 가든지간에, 유대인들은 바벨론에 의해서 포로된 이후로, 유대인들은 세계 각지에 흩어져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어느 지역에 가든지간에 회당을 먼저 찾아갑니다. 유대인들이 열 가정이 되면 유대인들은 회당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성경을 읽고, 안식일을 지키고 이렇게 살았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항상 먼저 회당을 찾아갔습니다. 회당에서 먼저 복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거절 당하면 나와 가지고 다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사도바울의 일반적인 전도 방법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빌립보에 와서도 제일먼저 회당을 찾아봅니다. 여기 유대인이 살지않을리가 없는 도시 입니다. 그런데 여기 회당이 없었고 기도처가 있었습니다. 기도저라고 하는것은 유대인들이 열가정이 안되는 경우에 만드는 것이 기도처 입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의 숫자가 빌립보에 적었다는 것이죠. 그럼 아까 그거와 비교해보면, 빌립보는 로마에 관한 자부심이 강한 곳입니다. 그곳에 유대인들이 정착하기가 어려웠었다는 것을 짐작해볼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저희들이 잘 아는대로 유대인들은 이방인을 뭐라고 불렀냐면, 로마인도 이방인이죠. 유대인이 아니면 전부 개로 취급 했습니다. 이것이 유대인이 가지고 있는 이방인에 대한 경멸적인 태도 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고, 그들은 율법을 지키고, 그와같은 것을 근거로 하나님도 모르고 율법도 모르고 자기들 나름대로의 법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아주 무시했던 것입니다. 거기에 반해서, 로마 사람들도, 자기들의 법, 지금도 법 하면 로마법이 굉장히 유명하고 견고하고 이론이 탄탄한 법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로마 사람들은 로마 사람들 나름대로 자부심이 있는데 유대인들이 무시하는 거예요. 그래서 유대인과 로마 사람과의 관계가 적대적입니다. 이것을 배경으로 놓고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어떤 표현이 나오냐면, 다시 또 빌립보는 유럽에 있는 도시 입니다. 사도바울은 예루살렘, 예루사렘은 유럽에서 보면 아시아 쪽입니다. 그래서 유럽과 아시아는 또 민족적으로도 다릅니다. 언어가 다릅니다. 사실 사도바울은 헬라어를 잘했지만 그는 히브리어를 쓰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언어가 다르고 민족이 다릅니다. 그리고 이 둘 사이에는 적대관계가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을 설명할때마다 예를들면, 히틀러가 유대인 600만명을 죽입니다. 그 적대감이 있는 것입니다. 계속 인류 역사 가운데 민족적 갈등이 있어왔습니다. 그런데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빌립보 성도와 사도바울의 관계가 다른 어떤 교회보다 관계가 끈끈 합니다. 저희들이 나중에 보면, 지금도 마찮가지 입니다. 빌립보서에 보면 어떤 부분이 나오냐면, 사도바울이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쫓겨 납니다. 그래서 어디로 가냐면 데살로니가로 갑니다. 그런데 이제 데살로니가에 사도바울이 있을때에 빌립보 성도들이 두번 헌금을 보냅니다. 그리고 이제 소식이 끊겼습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이 다시 로마의 감옥에 갇혔다는 소식이 10년만에 빌립보 성도들에게 들립니다. 빌립보 성도들이 그 소식을 듣고 당장 물질을 보냅니다. 그리고 에바브라 디도라는 성도를 로마로 파송합니다. 그에게 물질을 들려 보내면서 사도바울에게 전달하고, "형제님은 아예, 로마에서 사도바울 옆에서 사도바울을 돕다 오십시요."라고 한 성도를 보냅니다. 그래서 빌립보는 저릐들이 성경을 읽어보면, 어떤 교회보다 사도바울과의 관계가 긴밀 합니다. 그리고 그와같은 사랑과 감사가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빌립보서도 감사서신 입니다. 에바브라 디도를 통해서 보낸 선물에 대해서 감사하는 내용이 기본 내용입니다. 그러면 빌립보서에서 저희들이 볼수 있는것은 세상에서 사회적으로 인종적으로 적대 관계일수밖에 없는데, 주님 안에서 이들이 얼마나 새로워 졌는가, 그리고 얼마나 영적이 됬는가, 그래서 여러가지 편견에도 불구하고, 그들 사이에 주님 안에서 놀라운 위치를 보이고 있다. 이점을 저희들이 빌립보라는 도시를, 성경밖에 있는 것들을 근거로 살펴볼때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두가지 정도 서론적으로 말씀드리고요. 그 다음에 1절부터 살펴보겠습니다. 1장 1절에 보시면 사도바울은 자신을 "그리스도 예수의 종" 이라고 표현 합니다. 서신을 살펴보시면 맨 먼저 사도바울이 자기를 소개 합니다. 자기가 누구라고 하느냐고 할때 구체적으로 사도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빌립보서에서만은 종이라고 표현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우선 첫번째는 사도바울이 사도라고 말했을때는 그것은 권위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사도로 임명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가 쓴 서신들은 그가 지어낸 말이 아니고, 그가 생각해 낸 사상이 아니고, 주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받은 것을 전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지요. 그래서 그는 권위있게, "내가 사람에게서 배우지 않았다. 사람에게 받은것도 아니다. 사람이 나를 세운것도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세운 권위를 가지고 말합니다." 그런데 빌립보서에만은 사도라고 말하지 않고 종이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빌립보서 2장은 예수님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요, 본체의 형상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리고 뭐가 되셨죠? 종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는 예수님을 종으로 표현 합니다. 그리고 성경에 그런 예가 있습니다. 이사야서에 보시면 여호와의 종의 노래가 4개가 나옵니다. 하나님이 찬양하십니다. 하나님이 노래하시는데 그 중요한 노래가 여호와의 종의 노래, 이것이 4개 나옵니다. 그중에 저희들이 잘 아는 네번째 노래가 이사야 53장입니다. 52장부터 시작되는 53장 까지가 여호와의 종의 노래 네번째 노래 입니다. 하여간 빌립보서는 예수님을 종으로 표현 합니다. 사도바울이 자기를 사도라고 표현할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종이라고 합니다. 잠깐 다른 이야기를 해 보면, 히브리서를 보면 누가 히브리서를 썼는지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바로 시작합니다. 누굴까? 많은 형제님들이 사도바울일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도바울 이외에, 성경은 사도들이 쓰는거죠. 그렇다면 사도중에서 누구일까? 사도바울일 것이다 생각하는데 성경이 말하지 않으니까 지나치게 주장할수 없는거죠. 그러면 왜 히브리서를 쓴 분은 자기를 말하지 않았을까? 사도가 썼을텐데.. 왜냐하면 히브리서에서는 주님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히브리서 3장에서 주님을, 사도요, 제사장이라고 표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의 사도라고 표현 합니다. 그러면 주님이 사도니까 자기를 표현할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성경을 쓰는 분들이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자신에 대해서 표현 할때도, 그냥 사도니까 사도라고 쓰고, 종이니까 종이라고 쓰는것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정확하게 그것들의 영적인 의미가 있게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자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또 하나를 보시면 실제로 사도바울이 구원 받을때의 모습을 보면 사도행전 9장 즈음에 나오죠. 그가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기 위해서 대제사장에게서 천거서를 받고 그가 다메섹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다메섹에 들어가기 전에 길에서 구원받습니다. 정오에 낯 열두시쯤에 사도바울은 구원 받습니다. 해보다 밝은 빛이 드러납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타나셔서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왜 나를 핍박하느냐?" 그때 사도바울이 두가지 질문을 합니다. 첫번째 질문이 "주여 뉘시오니이까" 당신은 누구십니까? 주님이라고 부르고 누구십니까라고 그가 묻습니다. 이것이 첫번째 질문이고요, 두번째 질문이 "주여 내가 무엇을 하리이까" 입니다. 우리나라 성경에는 이 두번째 질문이 잘 표현이 안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킹제임스를 보거나 사도바울이 구원간증을 네번 합니다. 그 네번의 구원간증을 다 취합해서 보면 두가지 질문을 합니다. "주님 당신은 누구십니까?" 자기가 알고 있는 하나님, 하나님만이 이렇게 나타나실수 있습니다. 하나님이신데 "당신은 누구십니까?" 그때 주님께서 대답하시죠.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그 다음에 두번째가, "이제 저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이게 그가 구원받자마자, 자기의 위치를 종으로 인식한 대목입니다. 구원받으면 종입니다. 이 대목은 나중에 설명하겠습니다. 구원받아놓고 자기가 주인으로 살수 없습니다. 그것은 구원 아닙니다. 구원은 뭐냐,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시다. 예수님이 주인이시면 우리는 자동적으로 종의 자리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묻는 것입니다. "주님, 제가 무엇을 할까요? 저를 왜 부르시고 왜 구원하시고, 그 구원의 목적과 목표가 무엇입니까?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제가 오늘하루 무엇을 해야 할까요?" 이것을 묻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바울의 구원에 이미 표현되어 있는 것입니다. 종에 대해서 다른것을 하나 보면요. 아주 아름다운 종이 있습니다. 히브리 종입니다. 구약에 보면, 히브리 종이 있는데, 그 종은 이렇습니다. 주인이 그를 샀어요. 그러면 구약 율법에 의하면 그가 6년간 일합니다. 그리고 7년째에 풀어줍니다. 세상에서는 종을 한번 사면 평생동안 부려먹지만 이스라엘은 그렇지 않습니다. 율법에 따라서 6년간 일하면 풀어줘야 합니다. 그래서 6년간 주인집에서 일했습니다. 그래서 주인이 풀어줬습니다. "자유다." 그런데 그 6년 동안에 주인이 그에게 아내를 주었습니다. 이것은 다 그림자 입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자녀도 나았습니다. 이 종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주인을 사랑하고" 주인을 사랑하게 됬습니다. 종으로 일하다 보니까, 보통 주인과 종 사이는 안좋지요. 주인이 까다롭게 굴고, 일 시키고 그러니까 안좋지요. 그런데 이상한 주인 입니다. 그래서 이 종이 주인을 섬기다가 주인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아내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내 사이에서 낳은 자녀들도 사랑합니다. 그래서 그가 자유의 몸이 됬습니다. 그러나 그가 스스로 ,자발적으로, 강요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내가 자유하지 않겠다. 내가 자유롭지만 자유를 쓰지 않겠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영원히 종이 되겠다." 주인을 사랑하고 아내와 자녀를 사랑함으로, 사랑에 의해서 종이 됩니다. 사랑 때문에, 이것이 히브리 종입니다. 이 본이 주님이십니다. 주님이 그러셨고, 사도바울이 그렇습니다. 종이다. 사도바울은 자유인 입니다. 얼마든지 자유롭게 살수 있습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인인데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자유롭게 풀어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자유를, "아 이제 자유롭다. 이제 마음껏 자유를 누려야지."가 아니고, "나는 자유하지만 이 자유를 쓰지 않겠다. 나는 종이 되겠다. 나를 자유케 하신 이분, 이분의 종이 되겠다." 이것이 종입니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그 다음에 두번째 대목으로 넘어가겠습니다. 1절에 보면 사도바울은 자기를 종이라고 부르고요. 그 다음에 '디모데'라는 이름을 넣습니다. 이 빌립보 서신은 사도바울이 썼습니다. 디모데가 기여 했느냐? 아닙니다. 사도바울이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쓴 것입니다. 물론 성령께서 감동하셔서 쓴 것이지만 이것은 사도바울이 쓴 것입니다. 디모데는 전혀 쓴게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고린도전서도 보면 그렇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을 보면 사도바울이 씁니다. 사도바울의 서신입니다. 그런데 거기 소스데네라고 하는 사람의 이름이 들어갑니다. 사도바울은 왜 자기가 써놓고 우리 생각과는 달리 디모데 소스데네를 집어 넣을까요? 이것이 종의 특징입니다. 종은 어떤 사람이냐 하면요, 종이라는 단어도 여러개가 있는데요. 그 중에 이 종이라고 하는 단어는 둘로 쓰는데, 이것은 노예라고 번역하는것이 더 우리의 감각에 맞는 것입니다. 노예입니다. 보통 저희들은 직장에 나가죠. 아침에 출근했다가 퇴근하는, 종은 출퇴근이 없습니다. 아침에 출근하고 그런것이 없습니다. 퇴근 없습니다. 24시간이 주인 것입니다. 그 다음에 우리는 월급을 받죠. 많건 적건 댓가를 받습니다. 종은 댓가를 받지 않습니다. 그가 주인의 재산입니다. 이것이 종입니다. 사도바울이 뭘 하건 그건 자기 것이 아닙니다. 사도바울의 서신이 아닙니다. 사도바울이 이 편지를 쓸때, 주인께서 그 옆에 디모데와 함께 일하게 하셨습니다. 그는 디모데와 함께 영광을 나눕니다. 자기것이 없는것, 이것이 종의 특징입니다. 자기 인생이 없습니다. 자기 시간 아닙니다. 자기가 댓가를 얻지도 않습니다. 자기가 한 모든 것은 주인것 입니다. 이것이 종의 정신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사실 나이로보나 경험으로 보나 디모데는 사도바울과 같이 설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빌립보서에 그가 기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디모데를 함께 넣는 종의 마음, 이것이 그리스도의 마음 입니다. 그 다음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들과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보겠습니다. "성도들",성도는 무슨 뜻이냐하면 거룩한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거룩한 자, 이 단어는 사실 뭐로 바꿔야 하냐면, 저희들의 개념으로는 카톨릭엣, 성당에서 어떤 특정한 사람을 성인이라고 부릅니다. 순교를 했거나, 아니면 보통 사람이 이루기 어려운 업적을 남겼거나, 우리로 치면 노벨상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성인이라고 특별히 치고, 예를들면 자기가 세례명 같은것을 받을때에 그 사람의 이름을 따기도 하고, 그 성인입니다. 그 개념이 여기에 나온 성도 입니다. 아주 익숙하게 쓰니까 뭐 다 성도 하지만, 이것이 거룩하게 된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다시요, 성도라고 하는것은 하나님께 구별된 자라는 뜻입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이 따로, 세상에 여러 사람이 있지만 "여기는 내 사람이다. 나에게 속한 사람이다." 라고 따로 구분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그런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세상 가운데 "내 자녀들이다. 내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게 했다. 내가 말씀으로 내 자녀로 새 생명을 주었다." 라고 하는 사람들이 성도들입니다. 성도에 대해서 대표적인 구절을 하나보면 고린도전서에서도 나옵니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고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 이렇게 고린도전서 1장 1절이 시작되죠. 저희들이 보면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엉망입니다. 1장부터 보면 서로 분쟁을 하고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5장에 가면 세상에도 없는 죄를 범했습니다. 음행이 있었습니다. 6장에는 성도들이 소송을해서 세상 법정에 소송했습니다. 그래도 성도입니다. 그들의 행위 때문에 성도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부여하신 신분 때문에 그들이 성도인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8장을 잠깐 보시면 간음중에 잡힌 여인이 나옵니다. 주님이 그 여인에게 두가지를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주님께서는 그 죄를 묻지 않습니다. 댓가는 주님의 십자가의 보혈 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그녀를 위해서도 피흘리실 것입니다. 그것을 미리 당겨서 말씀 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성도입니다. 그 말은 이런 뜻입니다. "나는 네 죄를 보지 않는다. 네 행위로는 많은 죄가 있지만 나는 그것을 전부 하나도 보지않고 너를 깨끗한 사람으로 보겠다." 이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두번째로 말씀하셨습니다. 그 여자를 보내시면서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성도는 신분이 죄가 용서된 사람입니다. 상태는 신분과 일치해야 마땅합니다. 물론 일치하지 못해서 저희들이 괴로울때가 있고, 부끄럽고 주님앞에 죄송할때가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둘을 일치시키려고 하는것이 성도인 것입니다. 그 다음에 감독들, 집사들. 감독은 저희들이 사도행전 20장을 보면 이렇게 되어 있죠. 사도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 위헤서, 시간이 없기 때문에,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밀레도라고 하는 항구로 오게 합니다. 시간이 안맞으니까.. 그래서 옵니다. 이분들이 장로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장로들을 초청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성령께서 너희를 감독자로 삼으셨다." 그래서 장로와 감독자는 같은 사람입니다. 장로는 그의 인격적 성숙을 이야기 한다면, 그의 인격을 말한다면, 감독이하고 하는것은 그가 하는 일입니다. 그가 항상 성도들을, 목자로서 양들을 돌보고 있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성도들이 어떠한 상태에 있는지, 위험한 상태에 있지 않은지 영적으로 잘 성장하고 있는지를 끊임없이 잘 살피고, 이 일을 가지고 그들이 하나님 앞에 다시 서야 합니다. 자기가 계산해야 합니다. 그래서 감독이고요. 감독이라는 말은 장로와 같고요. 이것은 저희들이 교회진리에서 많이 했고요. 이것만 이야기 드려보겠습니다. 성경에서는 장로들에 대해서 어떻게 할하느냐 하면은, 디모데전서 3장에 자격이 나옵니다. 디도서 1장에서도 자격이 나옵니다. 그리고 데살로니가 전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를 다스리는 자들을 알아주고" 알아주고 입니다. 그래서 장로에 대한 성경의 큰 흐름은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장로들을 세우실 것입니다. 그 세운 사람들을 알아보고 그들을 존중해 주어야 합니다. 그들이 그 수고로운 일을 잘 할수 있도록, 이 얼마나 수고로운지, 희생적이어야 하는지, 그럼에도 그 일을 하고있는 사람들을 인정하라. 이것이 성경의 큰 흐름 입니다. 다시 말하면 장로는 사람이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투표해서 세우거나, 혹은 지명해서 세우거나 그런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세우십니다. 하나님이 세우시면 틀림없이, 교회가 성경적으로 움직이고 있다면,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인도자들을 반드시 세우십니다. 그리고 세울때 그것을 알아보고 존경하고 이렇게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저희들이 늘 그런 실수를 조금 해왔는데요. 주님의 은혜로 이렇게 되기를 원하는 것은, 장로를 세운 다음에 그가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하는 사람을 세우는 것입니다. 장로로 세워놓고 이제 장로가 되었으니 일하십시요. 그렇게하면 안됩니다. 이미 성령께서 어떤 사람의 마음속에 감동 하셔서 영혼들을 돌보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 하는 사람들을 잘 보고 인식하고, 인정해주고, 이것이 장로의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집사들에 대해서도 오해가 있기 때문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집사는 어떤 뜻이내 하면, 성경으로 보면 사도행전 6장에 일곱명을 세웁니다. 히브리파 과부와 헬라파 과부들 사이에 문제가 생겨서 일곱명을 세우니까 집사다 그렇게 하는데요. 성경에서 말하는 집사, 저희들이 교파 개념으로는 조금 잘못된 것이 있기 때문에 조금 교정을 하자면, 성경에서 말하는 집사는, 섬기는 사람은 다 집사 입니다. 섬기는 사람, 두가지 섬김이 있습니다. 영적을 섬기는 사람, 말씀을 전하는 사람, 이게 집사 입니다. 성경에서는 주님도 집사라고 되어 있습니다. "할례의 수종자가 되었고" 이 수종자가 집사장입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말씀을 가지고 섬기고, 어떻게든지 은사를 따라 섬기는 모든 분들이 집사 입니다. 두번째, 영적인 섬김이 아니고 이땅에서의 문제를 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건물을 관리하고, 그 다음에 여러가지 필요한 비품들, 땅에서 교회가 행정적으로 필요한 일을 하는 분들도 집사 입니다. 그래서 집사는 두개가 있습니다. 하나는 교회가 이 땅을 통과할때, 세금도 내야하고, 통장도 정리해야 하고, 의자도 새로사고, 이런것들을 하는 집사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두번째 집사 입니다. 영적으로 교회에서 은사를 따라 섬기는 사람들이 집사 입니다. 그렇게 두가지가 있고요. 그리고 또 한가지는 저희들이 오해를 피해야 하는것이 집사 하다가 장로되는것이 아닙니다. 집사는 장로보다 하위 개념이 아닙니다. 그래서 집사 하다가 잘 하면 장로로 세우고, 이것은 교파가 하는 것입니다. 계급적인 겁니다. 임무가 다릅니다. 집사의 자격을 보면, 디모데전서 3장에 나와 있습니다. 장로의 자격에 비해서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조금 더 영적인 사람은 장로하고 덜 영적인 사람은 집사하고가 아닙니다. 그런면에서 저희들이 성경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성경적인 집사는 무엇인가? 하는 것들을 주님 앞에서 배우고 실행해 나갈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 다음에 2절로 넘어가겠습니다.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임할찌어다" 은혜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성도님들이 잘 아시는대로 은혜라고 하는것은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베푸는 것입니다. 예를들면 저희들은 천국 갈 자격이 없습니다. 저희들이 어떻게 거룩한 천국에 가겠습니끼? 늘 영광스러운 하나님 앞에 어떻게 예배자로 서겠습니까?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주님의 은혜로 그와같은 자가 된 것입니다. 그 다음에 반대 게념이 긍휼이죠. 긍휼은 마땅에 지옥에 가야하죠. 죄 때문에, 그런데 그것을 면제받는것이 긍휼 입니다. 그 다음에 은혜에 대해서 한가지 더 말씀 드리면, 예를들면 은혜를 동정하고 비교해 보겠습니다. 저희들이 아프리카에 있는 어떤 불쌍한 아이들, 태어날때부터 문제가 있으면서 태어나고, 또 환경이 그러기 때문에 학교도 다닐수 없고, 이런 아이들을 보면 우리 마음속에 동정심이 생깁니다. 그런데 이것은 은혜와 다릅니다. 은혜는 무엇을 그 배후에 두고 있냐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지불한 댓가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사랑하는 아들을 십자가에 죽여야 합니다. 이것이 은혜의 배후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는 우리에게는 거저지만 은혜를 베푼자에게는 비싼 댓가가 지불된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거저다'라는 것이 강조되는데요. 베푸는 자에게, 은혜를 베풀기 위해서 하나님이 지불한 댓가가 뭐냐? 최고의 댓가를 지불한 것입니다. 더이상 치룰 수 없는 값을 지불하고 우리에게 거저 주어졌다. 이것이 은혜에 관한 성경적인 개념입니다. 하나만 더 보겠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빌 1:29).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면 은혜를 받는 자의 책임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그를 믿을뿐 아니라" 우리의 책임입니다. 은혜 앞에 사람의 책임입니다.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감사함으로, 그리고 두번째 입니다. 그 은혜를 받은 사람은 고난도 받는 것입니다. 이게 그 댓가를, 은혜 배후에 있는 하나님이 치르신 희생을 알기 때문에 참으로 그 은혜를 알고 책임있게 믿은 사람은 당연히 은혜받은자의 고난속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에 관한 것입니다.
다시 평강을 보겠습니다. 평강에 대해서는, 사실 평안인데요. 저희들이 인삿말이 '안녕하세요.' 이것이 사실 평안입니다. "살롬" 마음에 근심이 없고 평안하느냐는 질문입니다. 평안에 대해서는 두가지가 있습니다. 이 두가지를 구분하셔야 합니다. 첫번째 평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롬 5:1).

'화평' '평안' '평강' 다 같은 단어입니다. 우리나라 말로는 번역을 달리 했습니다만 앞 원어가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믿어 의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신분을 의인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와같은 의인이 된 사람은 이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것입니다. 여기서 화평의 반대는 전쟁입니다. 구원받기 전에는 하나님이 하라고 하는것마다 싫습니다. "하나님은 도대체 왜 그러라고 하느냐?"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하는 것마다 하고 싶습니다. "선악과를 왜 못 따먹게 하느냐?" 그런데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따라갑니다. "말씀이 옳습니다. 이 말씀이 저에게 유익입니다. 이 말씀이 진리일뿐만 아니라 참으로 복된 말씀입니다. 제가 기꺼이 순종합니다." 이게 하나님과의 화평입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사람에게 당연히 일어나는,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그리고 두번째 입니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7).

여기 '하나님의 평안'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두가지 평안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평안한것, 두번째는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평안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평안, 하나님은 평안하십니다. 왜냐하면 전지전능하시거든요. 무슨일이 벌어져도 눈 하나 깜박 안합니다. 모든것이 하나님의 통제속에 잇습니다. 아담이 범죄해도 하나님은 평안 하셨습니다. 그들을 위하여 짐승으로 가죽옷을 지어 입힐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그림자고 사랑하는 아들을 십자가에 피흘리게 하실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평안하십니까? 모든것을 아시고 통제하심으로 평안합니다. 이 평안이 우리에게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저번에도 말씀드렸는데, 시카고에 살고 있는 스탠포드 라고 하는 사람이 영국에 있는 무디의 복음집회에 자기 아내와 딸을 보냅니다. 가서 집회도 참석하고 도우라고, 그런데 전보가 왔습니다. 대서양을 건너는 동안 아내 혼자 살고 딸 넷을 잃어 버렸습니다. 태풍을 만나 배가 좌초 됩니다. 아내가 그런 전보를 보냈습니다. 그는 황급히 하던일을 멈추고 그 다음 배로 영국으로 건너 갑니다. 배를 가고있는 동안 선장이 자기 딸이 빠져죽은 그 지점을 지날때에 말했습니다. "여기서 사고가 났습니다." 그때 그 마음속에 평안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쓴 시가 "내 영혼 평안해" 입니다. 어떻게 평안할수 있을까요? 자기 딸이 죽은 그 지점을 지나면서 그 마음속에 든 평ㅇ안은 뭘까요? 하나님의 평안 입니다. 하나님은 왜 평안하시죠? 모든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모든것이 하나님의 통제 가운데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모든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동기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평안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바울이 빌립보 성도들에게 하는 것이고요.

세번째는 감사가 나옵니다. 사도바울은 빌립보를 생각할때마다 하나님께 감사 합니다. 잠깐 이렇게 설명해 보겠습니다. 이 두개를 비교해 보겠습니다. 사도바울은 빌립보 감옥에 갇혔습니다. 사도행전에서, 빌립보 감옥에 갇혀서 바울과 실라가 밤 열두시가 되었는데 그가 찬양합니다. 어떻게 그랬을까요? 지금은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하다가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빌립보 감옥에서 하나님께 찬양하다가 로마의 감옥에서는 하나님께 감사 합니다. 빌립보 감옥에서 어떻게 감사했는가를 감깐 보겠습니다.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하니까, 빌립보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떤 점치는 귀신들린 여종이 사도바울을 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으로서 너희에게 구원의 길을 전하는 자다." 사도바울이 이 말을 듣고 굉장히 괴로워 했습니다. 저희들이 생각할때는 '귀신은 들렸어도 말은 똑바로 했네.' 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런데 사도바울은 고통스러워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래서 귀신을 쫓아버립니다. 그러니까 점치는 여종이, 점을 잘쳐서, 복채를 두둑히 받고 있었던 여종의 주인들이 고소 합니다. 그 고소 내용이 아까 말씀드린대로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을수 없는 풍속을 전한다." 였습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그런데 그렇게 한거죠. 그래서 감옥에 갇힙니다. 잠깐 보시죠. 사도바울은 왜 괴로워 했을까요? 첫번째로 괴로워한 것은 이렇게 생각해 볼수 있습니다. 그 귀신은 이렇게 말합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이다." 맞는 말이죠. 그런데 자기는요? 자기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반역한 자 입니다. 자기는 반역하면서 말로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모순들이, 자기는 불순종 하면서, 하나님은 지극히 높으시다고 말하는 것이 사도바울의 마음속에 고통을 주는 것입니다. 말이 안맞는거죠. 그 다음 두번째 구원의 길을 전한다고 했는데요. 이것은 언어적인 부분을 참고해 보시면 우리는 구원하면, 관사가 없으니까요. 영어로는 이게 관사가 있습니다. '구원' 했을때에 'are'를 쓰느냐 'the'를 쓰느냐가 다른 것입니다. 여기 뭐라고 표현되어 있느냐면 부정관사를 씁니다. 구원은 유일한 'the'를 써야 합니다. 그 구원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는 구원 외에 다른 구원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종이, 귀신이 어떻게 말하느냐하면 "여러 구원중에 한 구원의 길을 전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런 구원은 없는 것입니다. 요즘에 많이 그러지요. 기독교도 좋고 불교도 하나의 나름대로 구원이고, 아닙니다. 불교의 구원은 아닙니다. 이렇게 말하면 저희들이 아주 굉장히 독단적이 되고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는데요.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 구원을 받을만한 다른이름을 우리에게 주신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유일한 구세주 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는, 그 분 외에는 아버지께로 갈자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흔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괴로워 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감옥에 갇혔습니다. 감옥에 갇혔을때 다시 성경을 보시면 "착고에 매어" 사도바울과 실라를 착고에 매었습니다. 아마, 우리식으로 하면 수갑을 채운거죠. 그런데 이 '착고'라는 하는 단어가, 저희들이 성경을 이해하고 접근할때 저희 기도인데요. 저희가 다른 방법이 없고 성경을 살펴볼때, 기본적으로 단어들을 살펴봐야 합니다. 그런데 단어들을 우리나라 말로 살필수도 없고, '착고' 그러면 저희들도 잘 안쓰는 단어잖아요. 그럼 영어로 봐도 그렇고, 결국에는 원어로 봐야 합니다. 그런데 저희들은 원어를 직접할수 없고, 영어를 통해서 보고 있는데요. 청년들은 직접 헬라어를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성경을 이해하는데 필수적이기 때문입니다. '착고'라고 하는 단어가 '나무'라는 단어 입니다. 그래서 아마 그 수갑이 나무로 만들어진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에 갇혔을때 그들을 가둔, 이것이 나무로 되어 있습니다. 이 단어가 성경에서 "저가 예수님을 나무에 달아"라고 하는 단어와 같은 단어 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감옥에 갇혀서 무얼 생각했겠습니까? 주님의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은것이 다가 아닙니다. 삼일후에 주님이 부활하셨습니다. 영광스럽게 승천하셨습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우편에서 통치하고 계십니다. 이 주님의 고난과 영광을 생각한 것입니다. 그랬을때 그들의 마음속에 찬양이 나온 것입니다. 이 찬양이라는 단어도 어디에 쓰이냐면, 예수님께서 저희들이 교회진리 할때에 다룬 것인데요. 예수님께서 만찬을 제정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감란산으로 가실때, 제자들과 주님이 찬양 하셨습니다. "찬미하고 가니라" 그 단어와 똑같습니다. 그 단어를 쓴 것입니다. 그리고 저희들이 히브리서 2장에서 주님께서 훗날, 모든 교회의 성도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양할 날이 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주님이 우리의 찬양을 앞서 부르시고 우리가 따라 부르는, 그 광경이, 그때가 올 것입니다. 그때 그 불렀던 그 찬송이 바울과 실라가 했던 그 찬송입니다. 그 다음에, 이렇게 찬송 했을때 하나님께서 기적을 행하십니다. 하나님이 어덯게 기적을 행해서 빌립보 간수를 구원하셨냐하면, 지진을 일으킵니다. 지진은 이 세상을 한번 흔드는 거잖아요? 땅과 근거를 흔들어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히브리서에 의하면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습니다. 요동함이 없는나라, 영원한 나라, 쇠하지 않는 나라, 변함이 없는 나라를 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흔드십니다. 이 세상은 안정된 것처럼 보여도 이게 허무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진 나고, 그 다음에 감옥에 있는 사람들의 감옥문이 다 열려 버렸습니다. 그런데 죄수들이 하나도 도망가지 않았습니다. 이 사건을 영적으로 해석하면 하나님은 어떠신 분이냐? 이 세상을 흔드시고 새로운 나라를 만드시며, 그리고 그 가운데 살고있는 사람들의 종된 상태를 해방시키시는 분입니다. 사단으로부터, 죄로부터, 세상으로부터 묶여있는 우리를 흔드시는 분입니다. 이 광경을 보고 빌립보 간수가 "어떻게하면 구원을 얻을까?" 질문을 하고 "주 예수를 믿으라." 라는 대답들이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빌립보 감옥에서 찬양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왜 감옥에 들어갔는지를 아니까, 그리고 그 감옥에서 그리스도의 고난과 그 후에 이를 영광을 보고 있기 때문에 찬양할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는, 로마의 감옥에서 사도바울은 왜 감사하고 있나요? 이 대목은 사도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생각할때마다 감사 합니다. 이렇게 접근해 보겠습니다. 사도바울은 유대인 입니다. 히브리인이고 베냐민 지파고 어릴적부터 율법을 지켰습니다. 그는 다소에서 태어났습니다. 예루살렘 밖에 있죠. 지금은 시리아 입니다. 지리로 보면 어떤 분은 터키쪽이라고 하더라고요. 거기서 태어났는데, 그가 젊었을때 예루살렘으로 와서, 유학을 옵니다. 그리고 가말리엘 문하에서 율법을 배우고 율법을 지키고, 스스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율법의 의로는 내가 흠이 없다. 기가막힌 일이죠.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살고 있는 사람인데, 그리고 데메섹에 살고 있던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기 위해서 그가 가다가 구원받은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제 복음을 오히려 전하게 됬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볼때는 진짜 밉상입니다. 우리에게서 최로고, 정말 율법사가 될, 가말리엘을 이어서 율법을 지키고 율법을 설명할 사람으로 지목 했는데, 그렇게 기대했는데 갑자기 정 반대편 적이 되어 돌아온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을 죽이려고 했던 사람의 숫자가 많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 쪽에서 보자면 자기가 자라면서 가지고 있었던 모든 인간관계를 그는 다 깨야 합니다. 부모님에 대해서 잘 알수 없지만 로마서 16장에 보면 사도바울의 친척 이야기도 나옵니다. 그는 모든 혈통적인 관계를 다 끊어야 합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아주 철저합니다. 지금도 예수님을 믿는다하면 우리식으로 하면 호적에서 파버립니다. 그때 그에게 유일한 기쁨이 되는것이 성도들입니다. 세상에서는 비난 받아도 어디에서 사랑과 평안을 누릴수 있었느냐면 성도들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을 생각할때마다 기뻤던 것입니다. 감사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지요. "나를 위하여 부모와 처자와 전토를 버린자마다 백배를 얻고" 그가 많은것을 버렸지만 주님께서 새로 주신것이 그의 교회인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생각할때마다 하나님께서 내가 희생한 모든 것들을 하늘에 속한 것으로 영적으로 대신 채워주신 사람들, 그것이 교회입니다. 그것을 생각할때마다 감사한 것입니다.
그리고 보겠습니다. 4절, 그래서 그는 교회를 위해서 기도할때마다 기뻐했습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사도바울은 영적인 기쁨이 어디 있었는가? 단 하나입니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고 다른사람을 위해서 기도할때 기뻐했습니다. 우리가 영적인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나를 위해서 살기 때문입니다. 촛점이 나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할때 영적인 기쁨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 두번째 입니다. 기도할때 입니다. 다른사람을 위해서 기도할때 입니다. 내가 잘 되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이 주님 앞에서 영적으로 성숙하는것이 기쁨이다 라고할때 기쁨이 주어져 있습니다. 영적인 기쁨은 어떻게 오느냐? 다시 보겠습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될때 영적인 기쁨이 있습니다. 두번째 하나님의 은혜를 알때 기쁨이 있습니다. 세번째, 하나님의 평안을 경험할때 기쁨이 있습니다. 그리고 네번째, 저희들이 교회 서신서 중에서 빌립보서만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집사와 장로와 성도들입니다. 이게 세워진 교회입니다. 성경적인 장로들이 있고 성경적인 집사들이 섬기고 그리고 죄 용서를 받아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이 모여서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들을 순종해 가는 교회, 이 교회를 생각할때마다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쁨은 어디 있습니까? 교회에 있습니다. 교회가 성경대로 세워질때 그것을 위해서 수고할때, 우리의 마음속에 주님께서 기쁨을 주실 것입니다. 계속 저희들을 도우셔서 이 말씀을 통해서도 내가 종인가, 나는 종으로 살고 있는가,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충분히 알고 있는가? 정말 하나님의 은혜를 안다면 믿음을 가질뿐만 아니라, 고난을 받기 은혜가 주어져 있다는 것을, 그리고 평안, 이제 지옥가지 않는다 하는 이런 평안 아니고 하나님의 평안, 어떤 일이 일어도 평안한 그 하나님의 평안을 가지고 있을때, 그리고 교회를 생각할때 주님께서 저희에게 넘치는 기쁨을 허락하실 것을 기대해 봅니다. 주님께서 저희의 심령을 다 선히 인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