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봉래 형제님/미분류

< 로마서 1장, 바울의 인삿말 : 영적인 사람의 특징 >

박이레 2021. 7. 25. 22:40

2021년 6월 20일 일요일 / 한봉래 형제님

 

< 로마서 1장, 바울의 인삿말 : 영적인 사람의 특징 >

 

"첫째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을 인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어떠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 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함이니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을 인하여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형제들아 내가 여러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롬 1:8-16).

 

사도바울은 여러번 말씀을 드렸는데요. 사도바울이 교회에 보낸 서신들을 씁니다. 교회에 보낸 서신들이죠. 개인에도 썼지만 교회에 보낸 서신들이 있습니다. 로마서도 그 중에 하나지요. 그런데 사도바울이 교회에 보낸 서신 중에 사도바울이 개척하지 않은,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해서 세워진 교회가 아닌데, 사도바울이 교회에 보낸 서신을 쓴 곳이 두개입니다. 첫번째가 로마서입니다. 로마서는 사도바울이 세운 교회가 아닙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성령이 임하시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말하고, 그 다음에 그때 삼천명이 구원받고, 했던 사도행전 2장에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모였던 사람들 중에 로마인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이 오순절에 베드로의 전도 말씀을 듣고 구원받고 예루살렘 교회에 더해졌다가, 그 다음에 로마로 돌아가서 이제 로마에 교회가 세워집니다. 그리고 또 하나가 골로새서 입니다. 골로새 교회도 사도바울으 직접 세우지 않습니다. 에베소에 사도바우리 있을대, 에바브라 라고 하는 성도가 에베소에서 구원받습니다. 그런데 고향은 골로새입니다. 그래서 자기 고향에 돌아가서 교회를 세우고, 그 교회에게 사도바울이 편지를 쓴 것이 골로새서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도바울은 자기가 세웠든지, 다른 사람이 세웠든지, 상관하지 않고 다 하나님의 교회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교회에 필요한 말씀을 사도로서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두번째로 생각해 볼수 있는것은, 자기가 복음을 전해서 세워진 교회가 아니기 때문에 로마서에서 사도바울은 자기를 소개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기가 누구다, 라고 하는 것을 소개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의 8-16절 사이에 사도바울의 개인적인 간증, 그리고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그 대목에서 제가 하나 살펴보려고 하는 것은, 다시한번 읽어 드리겠습니다. 9절에 보시면, 자기가 이렇게 말합니다. 복음은 아들의 복음이고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이고요, 복음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 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그 다음에 자기는 하나님을 섬깁니다. 어떻게 섬기냐면 심령으로 섬긴다, 이렇게 표현 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싱령으로 섬긴다." 이거에 대해서 여러가지로 이 문장을 이해할 수 있는데요. 일단 단순하게 이렇게 이해해 보겠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영적으로 섬깁니다. 심령, 영인데요. 영어로는 스피릿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하나님을 섬기되, 영적으로 섬깁니다. 이것이 사도바울의 간증입니다.

그러면 이 개념을 가지고 다시 생각해 보겠습니다.그러면 영적이지 않게 섬기는 것이 있는가? 하나님을 섬깁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섬긴다는 단어는 첫번째, 예배 드리고, 두번째는 하나님을 위해서 복음도 전하고, 또 교회의 여러가지 필요한 일들을 수고하고, 이런 것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거죠. 그런데 이것을 영적으로 섬길수 있고 반대로 육신적으로도 섬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사도바울의 간증을 통해서 제가 살펴 보고자 하는 것은, 영적인게 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되, 영적으로 섬긴다고 했을때, 그 영적인 섬김의 특징들이 무엇인가를 살펴보고, 저희들이 그와같은 길을 걷기를 원합니다. 다시 말하면 예배도 육신적인 예배가 있고요, 그리고 악기를 갖다 놓고 하는것이 있죠.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성경에 있는 예를 들면요,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5장에서 장로들에게는 하나님을 섬기되, 이렇게 하면 안된다. 하면서 뭐라고 말하냐면, "더러운 이를 위하여 일하지 말라."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되, 돈을 위해서 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자기에게 돈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있는 것입니다. 모임에서는 많지 않다고 생각이 되지만, 교파에서는 당연한 것이죠. 그것이 직업입니다. 직업으로서 섬기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요한삼서에 보면 디오드레베라는 사람이 있는데요. 그 사람이 모임을 섬겼습니다. 모임을 섬긴 목적이 뭐냐? 모임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 입니다. 그래서 디오드레베가 모임을 섬겨서, 모임의 섬김에 가장 힘있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한것이 뭐냐? 사도 요한을 못 오게 합니다. 사도요한을 초청하자고 한 사람을 출교시켜 버립니다. 이것이 디오드레베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교회에서 주님을 왜 섬기냐, 힘을 가지려고, 그 섬김을 근거로, 교회에서 발언권을 갖기위해서 육신적인 섬김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를들면 바리새인들의 경우를 보면 하나님을 섬기죠.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어떻게 섬겼느냐면 외형적으로 섬깁니다. 외적으로는 하자가 없습니다. 안식일도 지키고, 십일조도 하고, 그렇게 합니다. 그런데 내적으로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섬겨서 하나님께 인정 받으려고 하는 사람은 다 바리새인 입니다. 그러면 영적인 섬김은 뭐냐? 인정받기 위해서가 아니고 사랑 받았기 때문에, 이미 하나님께 인정 받았기 때문에 감사해서 섬기는 것이 영적인 것입니다. 섬김을 통해서 하나님께 인정을 받거나, 사람에게 인정받으려고 하는것은 다 육신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유일한 이유,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에 너무 감사해서 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차이가 있는 거죠.

또 다른 세상에 있는 이야기인데요, 한번 해보면요. 제가 가끔 보면 하얀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매고, 외국인인데, 한국에서 복음을 전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둘씩, 둘씩, 다니면서. 이분들이 누구냐 하면 몰몬교입니다. 몰몬교라고 하는것은 뭐냐하면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서, 우리는 신약성경이 완성된 이후에 계시는 없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계시를 받아서 어디를 가서 파보았더니, 성경이 또 하나 나왔어요. 그들은 구약, 신약, 몰몬교 세개가 있는 겁니다. 이단이죠. 그것을 믿는 사람들이 몰몬교인데요. 그 사람들이 한국에 와서 하얀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매고 점잖게, 복음을 전하고 할까, 봤더니, 몰몬교는 거기 들어가면 반드시 2년간 해외 전도를 해야 합니다. 그들의 규정입니다. 그래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예를들면 한국만 오겠습니까? 어디 가난한 나라 가서, 2년을 선교하죠. 젊은 사람들이, 젊은 사람들의 2년이라는 세월을 희생해서 그렇게 하나님을 섬깁니다. 그런데 그것이 영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외모만 봐서는 이것이 정말 영적으로 섬기는 것인지, 그냥 어떤 의도를 가지고 섬기는 것인지 구분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자꾸 혼동하기도 하고, 또 저희들 같은 경우에도 보면, 함께 주님을 믿고 그 다음에 같이 예배 드리고, 같이 복음도 전하고, 같이 기뻐하고 있었는데, 나중에 보니까 어느날, 모임에 있지 않고 어디로 가버리고, 목사가 되려고 하고, 어떤 큰 일을 하려고 하고, 그런 분들이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분들을 만날 때마다 마음에 괴로움이 있고. 왜 그렇게 하려고 했을까, 처음에 같이 정말 순수할때가 있었는데, 정말 같은 마음이었었는데, 왜 이런 차이가 나올까,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이런 구절들을 볼 때에 주님 앞에 기도하고, 저희들은 영적으로 성령께서 우리 마음을 감동 하시고 주님의 십자가를 근거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섬길수 있기를, 예배가 그렇고, 복음 증거도 그렇고, 성도들 사이의 교제도 그렇고, 또 교회를 위해서 여러가지 수고할 때에도 이와같은 영적인 섬김이 있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 특징을 살펴보려고 하는데요.

 

먼저 줄거리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와 같이, 사도바울과 같이 영적인 섬김의 특징, 첫번째가 8절에 있는대로 그는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섬길 수 있는 것을 가지고 감사해야 합니다. 두번째는, 11절에 보시면 견고케 하는 것입니다. 섬김의 목표가 성숙입니다. 견고라고 하는것을 약간 바꿔보겠습니다. 저희들이 요즘에 잘 쓰는 단어로 바꾸면, 영적인 성장을 목표로 하는 사람입니다. 섬길때, 그가 목표를 가지고 섬깁니다. 그 목표가 무엇이냐면, 내가 섬기는 분들이 영적으로 성숙해 졌으면 좋겠다, 라고 하는 목표를 가지고 섬겨야 합니다.

그렇다면 영적인 성숙은 어떻게 주어지는가, 그 방법이 뭔가? 했을때, 그 방법 첫번째가 11절에 있는대로 신령한 은사입니다. 사람을 성장 시키는 것은, 영적으로 성숙 시키는 것은 '영적인 은사를 사용할때'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중에 설명하겠습니다. 첫번째 방법이고요. 그 다음에 두번째 방법은, 12절에 보시면, "피차 너희 가운데서 믿음을 인하여" '교제의 격려'입니다. 함께 교제하여, 격려함으로써 영적인 성장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방법 두번째 입니다. 그 다음에 세번째, 13절, '열매를 목표로 한다.' 입니다. 영적인 성장의 목표가 있습니다. 열매입니다. 열매는 눈에 보이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목표를 제시하고 그것을 이루어 낸다. 이것이 영적인 성장을 가져오려고 하는 세가지 방법입니다.

그리고 이제 세번째 입니다. 그러니까, 감사하는 사람, 영적인 성장을 추구하는 사람, 그리고 세번째, 그 자신이 변화되어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변화되어 있어야 하냐면, 14절 자신을 빚진 자로 봅니다. 15절, 복음 전하기를 원합니다. 16절,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이 세가지 특징을 가진 사람이 영적인 성장을 추구하는, 영적인 섬김을 하는 사람의 특징 세가지 입니다.

 

이렇게 놓고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첫번째 '감사'부터 보겠습니다. 저희들이 사도바울의 서신을 보면, 특징이 뭐냐하면, 초두에 인사를 하죠. 은혜와 평강, 이렇게 인사합니다. 그 다음 서신이 시작될 때, 맨 먼저 감사로 시작합니다. 감사로 시작하지 않은 서신이 없습니다. 딱 하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입니다. 갈라디아서에서는 편지를 쓰면서 갈라디아 성도들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습니다. 왜죠? 갈라디아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려는 사람들입니다. 구원은 성령으로 받습니다. 그 다음, 구원받은 후에 성도의 삶을 육체로 유지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도의 삶을 인간적인 지혜와 능력으로 성도의 삶을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들이 갈라디아 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뭘 도입하느냐, 율법을 도입합니다. 어떤 규칙들을 도입합니다. 이렇게 하고, 이렇게 하고, 이렇게 한다. 사도바울이 기뻐할 수 가 없습니다. 이것은 육신적인 일입니다. 그래서 육신적인 성도를 인해서 사도바울은 감사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나머지는 전부 서신의 초두에 감사가 들어갑니다. 놀라운 것은 저희들이 생각하기에, 고린도 교회 같으면 감사할수 없는 교회거든요. 분열되어 있지, 도덕적인 타락이 있지, 성도들이 성사를 하지, 만찬 시간에 어떤 사람은 술 취했지, 그런데도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에서 감사로 시작합니다. 놀랍게 말합니다. 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흠 없이 설것을 바라보고 말합니다. 그것은 굉장한 것이죠. 그렇다면, 왜 그럴수 있었을까, 를 잠깐 생각해 보면요. 성경에서 일관되이 흐르는 원칙 중에 하나입니다. 서신을 썼다고 하는 것은, 사도바울이 서신을 쓴다고 하는것은 뭔가 교정할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뭔가 문제가 있고 그것을 바꿔내야 되기 때문에 편지를 쓴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족이 있고 변화되어야 할 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감사로 시작하는 것은, 그와 같은 문제점들이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으로 바뀔수 있다고 하는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로마서 8장 28절이죠. "모든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입니다. 어떤 교회나 성도가 연약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믿냐면, 이 연약이 연약으로 끝나지 아니하고, 이 연약이 실패로 끝나지 아니하고, 이 연약 때문에 그가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고, 결국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다라고 하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사도바울이 가지고 있는 것이고요.

대표적으인 예가 저희들이 성경에서 보면 요셉입니다. 요셉을 형들이 미워해서, 죽이려다가 애굽에 종으로 팔렸습니다. 종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운명이 완전히, 그 인생이 끝난 것입니다. 종이 되었을 뿐 아니라 보디발의 아내가 모함을 해서 종이면서 또 감옥에 갇힙니다. 세상에 이런 비극이 어디 있습니까? 잘못하나 한적 없는데, 그런데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이 고난을 사용하셔서 그를 애굽의 총리로 만듭니다. 그래서 나중에 형들이 곡식을 구하러 왔을때에, 자기는 총리가 되고 종으로 팔아버린 형들은 자기 밑에 와 있는 거죠. 복수 안 합니다. 자기 말 한마디면, 형들을 감옥에도 보낼수 있고 죽일 수도 있습니다. 복수 안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애굽으로 보낸 것은. 형들이 아니고 하나님이 먼저 보냈습니다." 이것이 요셉의 생애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생애 이기도 하고요, 그리스도인의 생애 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떤 불행한 일, 종으로 팔리는 비극, 그리고 모함을 받아 감옥에 갇히게 된 이 비극, 이 비극을 당한다 할찌라도, 또 그런 일들이 그리스도인의 개인의 삶에, 혹은 교회 생활에 있어서 그와 같은 타격이 있다 할찌라도, 사도바울은 그것을 교정해 갑니다. 감사하는 겁니다. 이 시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 영적인 사람입니다. 이 시각을 놓치고 있으면, 배후에서 하나님이 이 비극을 영광으로 바꿀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고 있다를 보지 못하면 영적이지 않습니다. 그냥 인간적이고 사람의 생각으로 일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첫번째 이고요.

그 다음에 여기서 잠깐, 다른 이야기를 해보면요. 저희들이 2천년 후에 살고 있기 때문에, 로마에 대해서 잘 압니다. 지금 이 로마서를 쓸 때에, 황제가 글라우디오 황제 입니다. 사도행전 18장에 보시면, 글라우디오라는 로마 황제가 로마에 살고 있는, 로마시죠. 로마에 살고 있는 모든 유대인들은 떠나라고 합니다. 그래가지고 누가 떠나냐면, 브리스길라 아굴라 가정이 떠납니다. 브리스길라 아굴라가 로마에 살고 있었습니다. 로마에 살고 있는 유대인입니다. 로마는 세계적인 도시입니다. 지금으로 치면 뉴욕같은 곳입니다. 거기에는 각종 인종이 다 모여서 살고 있습니다. 세계적인 도시는 전부 다양한 인종을 포용해야 합니다. 어느 특정한 인종만 산다, 세계적인 도시 못됩니다. 예를들면 징기스칸이 정복하고 했잖아요? 그러면 징기스칸의 몽고의 수도에서는 각종, 황인종, 백인종, 다 모여서, 인종적인 편견 없이, 그런 것들을 뛰어 넘는 보편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어야 제국이 됩니다. 그래서 로마도 그렇게 되는 겁니다. 거기에 유대인이고, 흑인고, 백인이고 다 모여서 삽니다. 그런 인종이 문제가 되지 않고 로마가 추구하는 가치, 인간에 대한 이해, 사람의 행복의 삶에 대한 기준들, 그런것을 가지고 국가와 도시를 만들어 가고 있는거죠. 그러고 있는데, 글라우디오 황제가 유대인들은 떠나가라, 이렇게 합니다. 인종적인 편견을 보인 거죠. 왜 그랬죠? 이유는 간단합니다. 성경이 말하고 있지 않지만 저희들이 금방 추측해 냅니다. 유대인들 가운데 구원받은 유대인들이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이렇게 말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른 임금, 예수를 섬긴다." 로마는 뭐죠? 로마 황제를 신격화 하고 있는 중입니다. 로마 황제에게 제사 지내는 일들을 시도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그때, 그런건 우상이고, 진정한 왕, 예수 그리스도가 다스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전파하고, 그랬더니 예수님을 싦어하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는 유대인들, 이 유대인들이 또 극렬하게 반대합니다. 복음에 대해서, 그래서 로마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 사이에 갈등이 생기고, 그걸로 인해서 로마시가 안정을 훼손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보고 글라우디오가 "다 나가라. 이쪽이건 저쪽이건 유대인들은 다 나가라." 그래서 브리스길라 아굴라가 고린도로 가게 됩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을 성령님께서 인도하셔서 아시아로 가려고 했는데 유럽으로 넣어서 고린도에서 만나서 고린도 교회가 세워집니다. 그래서 이것을 보면, 사도바울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을 위해서 일을 합니다. 그들을 영적으로 섬기려고 합니다. 그런데 먼저 감사부터 합니다. 자기 같은 사람을 불러서, 하나님의 성도, 교회를 섬기게 하신 것에 대한 감사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감사 내용 중에 하나가 뭐냐면, 로마 성도들은 믿음입니다. 로마 성도들이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다시 말씀드리지만, 성경에서 믿음이라고 하는 단어가 나오면, 우리나라 말로는 '믿음' 이렇게 번역되어 있지만, 이것이 원어를 따지면 다릅니다. 믿음이 첫번째는 주관적인 구원받는 믿음, 내가 발휘하는 믿음이라는 단어가 하나가 있고요. 두번째는 믿음이 객관적인 내용을 의미합니다. 이 믿음은 다시 말하면 '교리'라고 번역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내용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 성도들이 믿고 있는 그 믿음의 내용을 생각할 때, 감사가 있는 거죠. 잠깐 다시 보면, 제가 그런 책을 한번 읽었는데요. '카타콤의 순교자'라고 하는 책입니다. 조그만한 소책자인데요. 제가 구원받고 나서 얼마되지 않아 읽었는데요. 거기보면 로마에 있는 성도들이 굉장한 핍박을 받습니다. 얼마나 핍박을 받느냐면 한 200년을 핍박을 받습니다. 사도바울 가고 나서, 사도들 끝나고 나서, 한 200년간 핍박을 받아서 313년에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할 때까지 기독교인들이 심각한 핍박 속에 들어갑니다. 그래서 로마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디서 사냐면, 로마 지상에서 못 살고 지하로 들어갑니다. 거기서 굴을 파고, 거기서 살고 죽고 합니다. 200년이니까요. 어떤 자매님께 그런 소리를 들었는데요. 그 자매님은 인간이 햇빛을 보지 못하고 살면, 카타콤 밑에서 결혼해서 자녀도 살고, 기르고 하죠. 그런데 바깥엘 못나갑니다. 햇빛을 보지 못합니다. 지하에서만 삽니다. 그러면 오래 못산다고 합니다. 20대를 넘기기 쉽지 않다고 합니다. 그렇게 핍박을 받습니다. 혹독한 핍박을 받습니다. 그들이 그 팝박을 받으면서도, 그런게 많잖아요. 사자밥이 되고, 네로는 그렇게 했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을 붇잡았다가 횟불로 씁니다. 기름을 칠해서 불 붙여서, 정원을 밝히는 불로 사용합니다. 굉장히 잔인한 거죠. 그리고 원형 경기장에 넣어서 사자밥이 되게하고, 그리스도인들을 그렇게 죽입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것들을 감당할 수 있는, 로마 성도들의 믿음을 인해서 그가 감사합니다. 그러면 이런 구절들을 놓고 저희들은 생각합니다. 로마 성도들의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됬다, 그렇게 말합니다. 잠깐만 적용해 보겠습니다. 우리도 믿습니다. 우리도 동일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 믿음이 다른 사람에게 전파되었나요?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저 사람 믿는 사람이다." 이렇게 인정할만한, 우리 교회를 보고, 우리 모임을 보고, 저기는 믿음이 있는, 성경대로 믿는 교회다, 라고 주위의 어두운 세상에서, 밝은 빛이 되고 있는가? 이것이 우리들이 도전 받아야 하는 대목입니다. 그러고 있지 못하다면 기도해야 합니다. 정말 저희가 성경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는데, 이 믿음이 저희 주위 친척들에게, 저희 이웃들에게, 증거될 수 있도록 주님 저희를 도와 주십시요. 그것이 저희가 이 세상에서 살아있는 이유 중에 하나입니다. 사도바울은 로마 성도들의 믿음을 보고 감사했는데, 주님께서 저희들의 믿음을 보고 기뻐하시도록, 저희를 붇들어 주옵소서. 이것이 우리들의 기도여야 합니다.

그 다음에, 두번째 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섬기는 사람은 여러가지 문제 속에서 문제로 인하여 낙심하거나, 비판적이 되지 않고,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문제를 변화 시켜서 하나님의 영광으로 바꾸실 주님을 보고, 그 주님이 자기를 일하게 하셨으므로, 그가 첫번째로 감사하는 자입니다. 사실 감사라고 하는것은 다른 의미로는 명령입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5장에 그렇게 되어 있죠.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그 다음까지 읽어야 합니다. "이것이 너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니라." 어떤 경우도, 어떤 일이 벌어져도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사렙다 과부의 집에서 갑자기 아이가 죽었어도, 그것 때문에 비난을 받아도, 엘리야의 마음 속에는 평안과 믿음이 넘쳐 있는 것입니다. 저희들이 실망없이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저희들도 처음에는 인간적인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다시 영적인 힘을 회복해서, 다시 감사로 돌아갈 수 있는 힘이 저희들에게 있어야 하는 거죠.

 

그 다음에, 영적인 사람은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 삶에 목표가 있습니다. 자기가 섬기는 성도들, 섬기는 교회가 성장해야 한다는 목표를 추구 합니다. 영적인 성장을 추구하고요. 성장에 대해서는, 여러번 말씀드리는데요.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성경에서 영적이다, 영적인 사람이라는 표현이 세번 나옵니다. 이 사람이 영적인 사람입니다.첫번째 나오는 것이 고린도전서 3장 1-2절입니다. 사도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책망하면서 나오는 말인데요. 역으로 말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젖으로 주고 밥으로 먹이지 못했다. 그래서 너희들은 어린아이다. 그리고 어린아이이기 때문에 내가 너희들에게 영적인 사람처럼 말을 못한다."고 말하는 대목인데요. 다시 보면, 영적인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항상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남에게 가르치기 위해서 보는게 아니고, 항상 자신을 살피기 위해서 말씀 앞에 서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도 두가지가 있습니다. 젖이 있고 밥이 있습니다. 어떤 말씀은, 말씀 가운데 은혜로운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너를 용서했다." "영원토록 너는 내 자녀다." "내가 너를 버리지 아니하리라." "어디를 가든지 내가 함께 하겠다."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이 젖입니다. 밥은 뭐냐?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내가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라." 이런 것들이 이제 밥에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냥, 편안 하고 주님의 축복의 말씀이 아니고, 그 축복을 받은 자의 하나님 앞에서의 책임, 그것을 말하는 말씀 앞에 자기를 늘 세우는 사람, 이 사람이 영적인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실은 어마어마합니다. 베드로전서에 그렇게 나오죠.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이유가 뭐냐? 첫번째가,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기 위해서입니다. 베드로전서 두번째 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두번째 이유, 우리로 하여금 뒤따라 오도록 먼저 그 길을 가신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이 십자가를 지신 그 길을 걷도록, 주님이 먼저 발을 내딛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 십자가는 내 죄를 용서한 것으로 끝나고, 나는 십자가 안지어도 되고, 아닙니다.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 남을 말할 것이 아니고 자기를 봐야 합니다. 내가 지금 십자가를 지고 가는가? 내 삶이 주님을 닮아 있는가? 주님은 고난을 피하지 않으셨는데, 나는 고난받고 있는가?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기를 세우는 사람, 이 사람이 영적인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로마 성도들이 이같은 사람이 되도록, 이같은 사람을 만드려고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먼저 그같은 삶을 살고, 그와 같이 가르치고, 그와 같이 행하도록, 격려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 두번째, 영적인 사람이 고린도전서 14장에 나와있죠. 고린도전서 12장이 은사고, 13장이 사랑이고, 14장이 그 은사를 사용하는, 그 은사를 사용해서, 지역교회가 어떻게 집회를 하는가, 하는 것이 14장 입니다. 그리고 14장에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말이 하나님의 말씀인줄 모르면 그는 영적이지 않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서 두번째 영적인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교회진리를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모여서, 어떻게 집회를 하라고 구체적으로 다 말씀했습니다. 예를 들어서 두세사람이 해라, 한 사람이 하면 한사람은 잠잠하라, 자매들은 잠잠하라, 이렇게 교회진리를 14장에서 쭉 말하고 있죠. 그리고 예언하는 자의 영이 예언하는 자에게 제제를 받는다. 이런 원칙들을 제시해 놓았지요. 이와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사람이 영적인 사람입니다. 자기 감정에 겨워서, 교회의 여러 원칙은 무시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해버리고, 제제받지 않고 이게 영적인게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꾸 이것을 영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두번째, 교회진리를 순종하는 사람이 영적인 사람입니다.

세번째가 갈라디아서 6장 1절이죠. 형제 중에 한 사람이 넘어지면,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정으로 그를 바로 세우는 사람입니다. 자기도 그와 같은 일을 당할까 두려워 하면서 세우는 사람입니다. 이게 영적인 사람입니다. 영적인 사람 세번째는, 어떤 형제가 연약해서 넘어지면 그 형제를 세울수 있는 사람입니다. 다시요, 어떤 한 사람을 잘 도와야 합니다. 그래서 그 형제가 넘어졌습니다. 출교에 해당하는 죄를 범한 건 아니지만, 그 형제가 실수를 했어요. 그러면 그 형제를 잘 인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시는 그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어떻게 반복하지 않을 수 있는지, 성경을 대고, 자기가 본을 보이고, 그로 하여금 잘 그렇게 실행하고 있는지 살펴보고, 또 그런 것들을 잘 못하면 가서 도와주고, 그래서 함께 그 길을 갈수 있도록 만들어 내는 사람, 그 사람이 영적인 사람입니다. 한 영혼을 세울수 있는 사람, 이론이 아니고 구체적인 한 사람의 삶을 영향을 주어서, 영적으로 바꿔내는 사람, 이 사람이 영적인 사람입니다.

그래서 세가지 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는 사람, 교회의 한 지체로서 순종하는 사람, 그리고 구체적인 한 영혼을 실질적으로 변화시키는 영향력을 주는 사람, 이게 영적인 성장입니다. 사도바울은 로마 성도들이 이와 같은 성도들이 되기를 목표로 삼고 사역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영적인 섬김입니다.

 

그 다음에 두번째로 보겠습니다. 그러면 그런 일을 어떻게 이루느냐? 이것은 약간 설명이 필요하니까,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 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함이니"(롬 1:11).

 

견고케 하기 위해서, 방법이 뭐냐? "선령한 은사를 나눠준다." '신령한'은 이런 뜻입니다. 성령으로부터 나오는, 성령이 근원이 되는, 혹은 성령께서 힘을 주시는, 이런 뜻입니다. 그리고 "은사를 나눠준다." 나눠준다는, 요즘으로 치면 공유한다, 입니다. 사도바울이 가지고 있는 그와 같은 것들을 함께 사용하게 한다, 이런 뜻입니다. 은사가 뭐냐, 그러면 여기서는 은사라는 단어가 여러가지로 번역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은사 하면, 말씀의 은사, 섬김의 은사, 방언의 은사, 병고침의 은사, 이런 것을 생각하는 데요. 여기서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여기서 은사는 첫번째는 주님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시는 아들을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 은사는 은혜로 주신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기뻐하시는 아들을 세상에 보내 주셨습니다. 이 주님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이 근거 구절을 하나 찾아 보겠습니다.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롬 5:15).

 

"그러나 이 은사는" 14절은 뭘 가리키냐면, 아담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15절에서 "이 은사는" 그랬으니까, 아담은 아담 한 사람의 범죄로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된 내용을 이야기 하고요. 그 다음에 15절은, 그런데 이번에는 한분의 순종하심으로 그 한분을 믿는 모든 자들이 의에 이르는 내용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보면 "이 은사는" 그랬습니다. 그래서 이 은사가 뭐냐면, 주님을 주신 것입니다. 주님의 인격과 사역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어떤 성도들을 영적으로 성장시키기 위한 방법은 주님을 가르치고 주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누구냐? 주님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분이냐? 주님의 인격은 어떠했는가? 주님은 이런 경우에 어떻게 행동하셨는가? 라고 하는 주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게 어떤 사람을 영적으로 성장 시키는  첫번째 방법입니다. 주님을 말한다.

그 다음에 두번째 방법입니다.  로마서 11장 29절을 보겠습니다. 11장 29절에서도 은사라고 하는 단어가 나옵니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롬 11:29).

 

이건 저희들이 좀 익숙한 구절이죠. 여기 있는 하나님의 은사는 이스라엘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들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그러니까 아브라함의 후손이죠.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선택하시고, 약속하시고, 그리고 그들의 수많은 후손들의 역사 가운데 하나님이 베푸신 수많은 은혜들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것은 주님보다는, 아까는 주님이고요. 이번에는 하나님이 택한 백성들에게 베풀어 주셨던 말할 수 없었던 여러가지 '도우심'을 은사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성도들을 세울때, 성장 시킬때, 두가지를 씁니다. 하나는 주님이 누군가를 가리킵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 어떤 은혜를 역사 가운데 베풀어 오셨는가를 설명합니다. 이 두가지를 통해서, 사도바울은 성도들을 영적으로 성장시키겠다, 이렇게 하는거죠.

그래서 어떤 사람이 영적인 섬김을 하느냐? 주님이 누군지 알아야 합니다. 주님을 닮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성경 역사에서, 인간들에게, 사람들에게, 어떻게 은혜를 베푸시고 인도해 오셨는가를 말하는 사람, 이것이 영적인 섬김을 하는 방법입니다.

 

그 다음, 두번째로 가겠습니다. 다시 로마서 1장으로 가시면, 성장 시키기 위해서, 주님과 은혜를 말한다. 두번째, 사도바울이 그들 가운데 방문해서 함께 있어서, 교제하면서 서로 위로하고 격려한다, 입니다. 그래서 함께 있는 건데요. 여기서는 이런 측면을 보겠습니다. 격려하는 것인데요. "안위한다"고 되어 있으니까, 위로한다는 뜻이고, 혹은 약간 다른 단어로 보면 '격려한다' 입니다. 믿음으로 살도록 격려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격려하는 내용은, 어디서 저는 굉장히 인상적이냐면, 사도바울이 로마로 가기 위해서, 죄수로 배를 타고 갑니다. 그런데 이 배가 풍랑을 만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제 해는 안보이고, 그리고 먹을 것도 다 버렸고, 그래서 14일동안 못먹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우리는 전부 다 죽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고 있는데, 사도바울이 일어나서 "어젯밤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배는 파선될 것이다. 그러나 이 배에 타고 있는 사람들은 머리카락 하나 다치지 않을 것이다. 라고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하셨다." 이 배에는 선장도, 군인들도 있고, 장사하는 사람들도 있고, 한 200명이 타고 있거든요. 그 중에서 사회적인 신분으로 보면 사도바울이 제일 낮습니다. 죄수입니다. 그래서 뭐 이렇게 말하면 사도바울의 말을 아무도 안듣습니다. 죄수인데요. 로마로 끌려가면 죽을지도 모르는 죄수인데요.그런데 상황이 바뀌어서, 가다가 여러가지 일들이 생겼죠. 이제 사도바울이 이들을, 거기에는 여러 사람, 돈 많은 사람도 있고, 권력자도 있고 그럴텐데, 영적인 사람이 그들 가운데 서서 "여러분은 죽지 않을 것입니다." 전부 죽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밥을 먹어야 합니다. 먹어야 우리가 기운을 내서, 이 배가 죄초될 때, 안전하게 도피할 수 있습니다. 먹으십시요." 하고 그들 앞에서 먹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이것을 보고 용기를 얻어서 같이 먹고, "아 살 수 있나 보다." 이것이 격려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격려죠. 하나님의 약속이 있고, 이 상황을 하나님이 어떻게 끝내려고 하시는지, 이 하나님의 의도가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 그 사람이 하는 격려고요.

그런데 이렇게 격려했는데, 또 하나 중요한게, 사도바울은 사도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보았습니다. 그는 낙원에도 올라간 사람입니다. 사람이 가히 말로 할 수 없는것을 보고 내려온 사람입니다. 그는 성경을 씁니다. 사도하고, 그 다음, 로마 성도들은요? 그냥 저희들처럼 평범한 사회인입니다. 죄인이었습니다. 복음을 듣고 구원 받았습니다. 사도바울의 가르침을 받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사도바울이 그들에게 격려가 될 뿐만 아니라, 이들도, "너희들의 믿음을 인하여 나도 격려받기를 원한다." 영적인 사람은 누구냐? 겸손한 사람입니다. 사도바울과 같이 영적인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런데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나는 로마 성도들의 믿음을 인하여 격려 받기를 원한다." 입니다. 우리 가운데 아무도 온전한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 가운데 아무도, 가장 연약한 성도의 믿음에 격려받지 못할 사람이 없습니다. 다시 또 적용해 보겠습니다. 내가 비록 연약하고 어린 성도지만 내가 누군가를 격려할 수 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것입니다. 이게 교회진리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의 겸손, 그리고 로마 성도들의 담대함, 이것이 그들의 교제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로마에 가서, 성도들과 함께 만나서, 피차 믿음을 인해서 서로 위로하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제를 통해서 영적으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겸손을 배우고, 자신의 작은 섬김을 하나님이 받으신다는 담대함을 배우고, 이게 성장하는 두번째 원칙입니다.

 

그 다음에, 세번째 열매 인데요. 열매는 이렇게 설명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영적인 성숙을 목표로 하는데요. 이 성숙은 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열매는 주님이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나무는 열매를 보고 안다." 반드시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그게 구체적인 삶의 변화와 행동의 차이로 나타나야 합니다.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고, 실질적인 삶의 변화와  모임의 분위기의 변화가 동반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론이 아닙니다. 실제적인 삶 속에서 드러나야 합니다. 이와 같은 것을 분명히 목표로 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영적인 성장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갖는 특징입니다.

 

그 다음에 보겠습니다. 시간이 많이 되었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영적으로 섬기는 사람이냐? 14절을 보면 "내가 빚진 자"라고 했는데요. 영적인 사람의 특징입니다. 자기가 아니고 다른 사람을 섬깁니다. 자기는 빚진 자니까요. 빚 갚아야 되죠.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의 특징이 뭐냐, 자기 중심성에서 벗어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지 전에는 전부 온 세상이 나 중심으로 돌아갔습니다. 자기에게 좋은 것이 선이고 자기가 싫으면 다 악입니다. 이것이 선악과를 먹은 사람들의 기준입니다. 내가 좋아야 합니다. 항상 선택할 때, 이것, 내가 좋아하는 것인가? 내 생각에, 이게 항상 믿지 않을 때의 특징입니다. 믿고 나면 확 변화가 됩니다.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 그래서 보통 그렇게 말하죠. 이제부턴 내가 아니고, 제일 먼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가? 두번째,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가? 나는 자기를 부인하고, 이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이게 기본적으로 모든 그리스도인의 생명 속에 들어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얼마나 실천하며 사느냐 하는 문제인데요. 사도바울은 그렇게 삽니다. 첫번째, 그는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있습니다. 자기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하여 삽니다. 그 다음에 두번째, 15절, 그는 기꺼이 필요한 일을 감당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영적인 순서입니다. 먼저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있고요. 그 다른 사람을 섬기기 위해서 필요한 일들이 있습니다. 복음을 전해야 되고, 심방을 가야 되고, 누구를 만나야 되고. 이런 일들을 기꺼이 희생하면서 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두번째 특징입낟. 그 다음에 세번째,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않습니다. 복음의 능력을 압니다. 잠깐 보시면, 15절에 이런 이상한 표현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롬 1:15).

 

로마서는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구도자에게 쓴 편지가 아닙니다. 로마에 있는 성도들입니다. 성도들에게 뭐라고 말하냐면, 복음을 전하기를 원한다. 성도들은 복음을 들어서 구원을 받았는데요? 구원받은 사람에게 왜 복음을 또 전하죠? 그래서 복음이 뭐냐? 죄인이 의이 되는 방법을 말하는 것이 복음이 아닙니다. 복음은 훨씬 넓은 개념입니다. 복음은 인간이 어떤 존재냐를 말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를 말하고 있는 것이 복음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이 죄인들을 어떻게 영광으로 끌고 가려고 하시는지, 그 경륜을 다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 시간에 너무 그냥, 죄를 용서받는 방법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계획을 말해야 합니다. 왜 창조하셨고, 사람들은 왜 타락했으며, 그것은 지금도 어떤 형태로 우리들에게 나타나고 있는지, 그리고 복음이 그것을 어떻게 치유해 가는지, 이것을 사도바울은 계속해서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첫번째 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괌심을 갖습니다. 두번째입니다. 주님의 일에 개입 되려고 합니다. 주님의 일을 기꺼이 감당하려고 하빈다. 세번째, 복음의 영광을 압니다. 복음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그 복음에 대한 이해가 점점 깊어지고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고, 우선 첫번째는 구원의 확신이 있어야죠.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은 죄 용서의 확신이 있어야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죄 용서 하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을 어떻게 성장 시키는지에 대한 이해가 있는 것입니다. 이 세가지가 변화된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관심, 주님의 일에 대한 헌신, 그리고 주님의 말씀에 대한 깊은 이해, 이게 영적인 섬김을 만드는 요소들 입니다. 이런 것들이 저희들이 없이 그냥 순전하게, 그냥 순수하게 마음만으로 그렇게 시작했다가, 많은 세월이 흐르면서 여러가지 고통스러운 일들을 겪고, 다시 한번 주님 앞에 기도하면서, 주님 저희들이 영적으로 섬기기를 원합니다. 육신적으로 말고, 세상적으로 말고, 인간적으로 하지 말고, 정말 성령께서 알려 주시고, 힘주시는 섬김을 해야, 그래야 저희들이 하나님 앞에서 칭찬 받는, 그리고 정말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섬김을 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 이런 구절을 놓고 기도하면서 꼭 저희들이 세가지를 추구하기를 원합니다.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영적인 성장을 어떻게 이룰 것인지를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자신이 변화되어 있어야 합니다.

 

잠깐만, 몇가지를 더 도전 드리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9절에 보시면 사도바울이 기도합니다. 쉬지 않고 기도합니다. 참으로 놀라운 간증입니다. 이런 말씀 앞에서 저희가 저 자신부터 살펴봅니다. 기도하십니까? 얼마나 자주 하십니까? 정말로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다시 보겠습니다. 우리 교회의 기도 집회는 어떤가요? 우리 교회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기도 집회는 합당한 제목들이 나오고, 성도들이 정말 하나님 앞에 이 간구를 드리고 있는가? 물론 드리고 있죠. 그렇지만 정말 성숙한 기도 집회가 되고 있는가? 더 하나님 앞에 합당하게 드리는 기도를 개인적으로 하고 있는가? 이것을 저희들이 살펴보면 좋겠고요.

그 다음에 두번째로, 11절에 보시면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사도바울은 소원이 있었습니다. 사도바울 마음 속에 열망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적용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뭘 원하고 있습니까? 내 생애를 통틀어서 무엇을 이루고 싶습니까? 무엇을 하고 싶으신가요. 내 삶의 목표가 무엇인가요.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땅에 있는것 말고 영원한 것을 위해서 투자해야 합니다. 영원한 것, 이 세상과 함께 사라질 것에 투자하지 말고, 세상이 사라져도 변치않고 존속하는 것에 투자해야 합니다. 크게 두가지 입니다. 하나는, 첫번째 하나님 말씀입니다. "천지는 없어져도 내 말은 일점 일획도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합니다. 그 다음에 두번째 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두번째 영원한 것, 사람입니다. 모든 사람이 믿으나, 믿지 않으나, 영원히 삽니다. 한 사람은 천국에서 영원히 살 것이고, 어떤 사람은 지옥에서 영원히 살 것입니다. 사람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두가지에 투자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영원, 이것이 사도바울이 투자한 것입니다. 우리는 어디에 투자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생애의 그 많은 시간과 관심과 에너지를 어디에 투자하고 있습니까? 사도바울처럼 영원에 투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영혼을 살리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투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같은 말씀 앞에서 저희들의 섬김을 생각해 보고 저희들의 삶의 목표도 생각해 보고, 주님 앞에서 저희들이 다 연약하고 부족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도우시길 원합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 마음을 감동해 주시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좀더 하나님을 영적으로 섬기는 성도들, 또 영적인 모임을 이루고 주님 앞예 설 수 있기를 원하고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저희 모두를 축복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이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