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러싱 모임 수양회/2019년 여름 수양회

< 복음_간음 중에 잡힌 여자(요한복음 8장) >

박이레 2021. 7. 25. 21:53

2019년 7월 23일 화요일

한봉래 형제님

< 복음_간음 중에 잡힌 여자(요한복음 8장) >

"예수는 감람산으로 가시다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저희를 가르치시더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저희가 이렇게 말함은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저희가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가라사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다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8:1-12).

먼저 이 사건을 다시한번 설명드려 보겠습니다. 주님은 예루살렘에 오시면 머무실곳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로 감람산, 베다니 마리아의 집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침이면 다시 그 감람산을 거쳐 성전 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주님이 오시면 주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많은 사람이 또 아침마다 주님께 나아왔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날도 주님이 일찍 성전에 오셨고 말씀을 기대하고 오는 백성들을 원하셨고 또 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말씀을 가르치고 계셨는데 갑자기, 보통 말씀을 전하고 있을때는 좀 늦을수도 있고 부득이한 경우에 조용히, 방해하지 않고, 이것이 기본적인 예의지요. 그런데 말씀을 듣고 있었는데 저 뒤에서 소란한 소리가 났습니다. 사람들이 말씀을 듣다 뒤를 돌아보니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입니다. 성경에서 서시관과 바리새인들이 많이 주님께 나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동시에 언급된 곳은 이곳 하나뿐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묶어주는 고통점은 율법 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준행해서 율법을 지킴으로 자신을 의롭다하고 그래서 하늘나라에 갈수 있다고 확신한 사람들입니다. 서기관은 성경을 베끼는 사람들이므로 당연히 율법에 대해서 준수할 것을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두사람들의 공통점은 율법 입니다. 갑자기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웅성웅성 거리는 소리를 냈습니다. 어떤 여자 하나를 끌고 온 것입니다. 소리를 치고 비난하고 하면서 말씀을 듣고 있는 장소로 그들이 곧 왔습니다. 존경심 없이 말씀집회에 대한 경외심 없이, 무례하게 어떤 한 여자를 끌고 그 여자를 수치스럽게 만들기 위해서, 한 여자의 인격에 대해서 생각하지 아니하고 끌고왔습니다. 그리고 가운데. 사람들은 이제 당황해서 비켜주었겠지요. 가운데 주님앞에, 그 여자를 내팽겨쳤습니다.

정 반대의 경우를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주님앞에 가고자 하는데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주님을 뵐수 없어서 여러가지 방법을 쓴 사람들이 성경에 있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삭개오 입니다. 그는 나무위에 올라갑니다. 자기 체면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어떤 분인지를 보고 싶어서 나무위에 올라갑니다. 주님께서 그의 이름을 불러주십니다. "내려오라." 그가 구원받습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임하였다." 또 그런 죄인도 있었죠. 사람들이 많아서 주님의 옷가만 만져도 낫겠다 싶은 혈루병 든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 사이를 밀치고 가서 주님의 옷을 만졌던 여자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주 대조적인 사람으로는 이런분이 있습니다. 중풍병에 걸려서 주님앞에 나갔으면 좋겠는데 사람들은 많고, 그래서 주님이 말씀을 전하시는 집, 지붕위로 올라가서 지붕을 뜯고, 아마 이 경우도 참 이상했을 것입니다. 주님이 어떤 집에서 말씀을 전하고 계셨는데 갑자기 지붕이 무너지는 소리가 나는 것입니다. '달그락, 달그락' 뭔가 이게? 집중을 할수 없었죠. 그런데 한 중풍병자를 침대째 주님 앞으로 지붕을 뚫고 내려 오게 했던 것입니다. 주님은 알아주십니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아, 중풍병에 걸려서 얼마나 간절하게 병 낫기를 원해서 실례를 무릅쓰고 이렇게 했을까? 이해할수 있겠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네 죄사함을 얻었느니라." 주님이 본 것은 그가 병 낫기를 원한 것이 아니고, 병 낫기를 원했지만, 죄 용서를 원한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그 무례를 이해하셨습니다. 인간의 체면과 환경을 넘어섯 내 죄가 하나님 앞에 용서되길 원한다고 하는 그 간절한 소망을 주님은 기뻐 받으셨던 것입니다. 이번에는 거꾸로 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 입니다. 주님께서, 사실 주님이 누구 십니까? 하나님의 아들께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분입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 내 말은 내가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일러주신 말이다." 주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본체의 형상으로 와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하나님의 음성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그것에 대한 고려없이 한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도 없이 한 여자를 수치스럽게 만들기 위해서, 그리고 그 여자를 이용해서 주님을 죽이려고 하는 의도를 가지고 그와같이 주님께 물어보았습니다. "이 여자가 간음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이와같은 여자는 돌로 쳐서 죽이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신은 어떻게 말씀하시겠습니까?" 질문합니다. 이 질문은 아주 그 의도가 분명 합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이 여자를 율법대로 돌로 쳐 죽여라." 라고 하신다면 주님은 구세주가 되지 못하십니다. 율법이 있는데 주님이 또 오실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예수님이 이 여자를 어떻게든지 용서해 주신다면 죽여야 한다고 하는 율법을 피하게 하신다면 주님은 율법을 어기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 딜레마속에 주님이 빠져나갈수 없도록 올무를 계산하고 이제 드디어 이렇게 질문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어떻게 처리하시는가. 주님은 아무 말씀도 안하시고 땅에 글씨를 쓰고 계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주님이 왜 그 질문을 받고 대답하지 아니하시고 그냥 땅에다가 글을 쓰고 계셨을까요. 주님께서 그렇게 하신 이유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번째, 사람들이 주님이 그렇게 하시니까 '뭐라고 쓰시나?' 저희들도 궁금하지요. "뭐라고 쓰셨을까?" 사람들의 시선을 자신에게 주목을 끄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여자에게서, 이 여자를 보고있는 시선을 주님이 자신에게로 끌고 있는 것입니다. 이 여자의 수치를 가려주기 위해서 사람들이 전부 이렇게 끌려온 이 여자를, '이 여자는 이제 돌로 맞아서 주겅야 하나? 아니면 어떻게 해야 하나?' 라고 하는 생각에서 주님 자신에게로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이런 의미로 이해할수 있습니다. "너희들은 내 대답을 들을 자격이 없다. 나는 너희들에게 말해주지 않겠다." 주님은 질문하면 무조건 대답해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질문할때, 하나님 앞에 나갈때에 그가 기본적인 태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는 자신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것을 먼저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합당한 태도로 드러나고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누구나 와서 말을 걸고 질문하고 대답을 들을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은 그들의 그 질문을 무시하셨습니다. 그들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아마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이렇게 해석했을 것입니다. 주님의 행동에 대해서, 땅에 글을 쓰고 있는 주님의 모습에 대해서, '당황하고 계시는 구나.' '어떻게 대답할지 생각하고 계시는 구나.' '바로 답이 안나오는구나.'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다시 재차 물었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돌에 맞아 죽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당신의 견해는 무엇입니까? 당신이 성전에서 가르치시는데 하나님의 권위로 가르치시는데, 또 백성들이 당신을 메시아로 오해할 가능성도 있는데 당신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주님은 여러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주님께서 대답해 주십니다. 주님은 여러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희들도 이번 집회때에 인용 했는데요. 주님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율법을 온전케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주님은 그 율법을 온전케 하십니다. 첫번째, 주님은 이 여인이 죄인이라는 것을 아십니다. 그 여자의 행위가 죄라는 것도 인정 하십니다. 그리고 그같은 죄를 지었을때, 율법이 돌로쳐서 죽이게 되어 있다고 하는 율법도 인정 하십니다. 그런데 하나 더 남았습니다. 그들은 거기까지만 알고 있지만 돌로쳐서 죽일때에 율법이 어떻게 되어 있느냐면, 증인이, 그것을 본 사람이 이 여자의 죄를 고소한 사람이, 증인이 맨 먼저 돌을들어 쳐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 율법을 온전케 하십니다. "너희중에 죄 없는자가 돌을 치라." 그 말은 자기를 간음을 안한 사람만이 간음을 한 사람을 칠수 있다. 그런뜻이 아닙니다. 여기서 죄 없는자라고 하는 것은, 이 사건의 이 여자를 간음이라는 죄로 고소하는 이 사건에, 고소자 가운데 이 사건을 조작 했거나, 이 사건을 일부를 일으켰거나, 이와같은 죄가 없이 순전하게 이 사회의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죄가 있어서는 안된다는 마음으로 이 사건을 처리한 사람, 그게 아니고 다른 음모를 가지고 이 사건을 일으키고 죄 없는자라는 뜻은 그런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쳐라. 대신 죄 없는자가 '먼저' 율법대로 돌을 들어 쳐라." 그리고 주님께서 땅에 몸을 굽히셔서 글을 쓰고 계셨습니다. 주님은 이제 주님의 이 말씀에 대해서 그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그들 자의로 맏기신 것입니다. 그들이 정말로 돌을 들어서 칠지, 아니면 "아, 우리가 이 사건을 조작 했는데 그걸 어떻게 아셨지? 칠수 없겠구나." 하던지, 아니면 "어째거나 이 사건으로 예수님을 고소하는 것은 안되겠구나." 했던지 우리의 선택에 예수님을 믿을 것인지, 복음을 받아들일 것인지, 아니면 내 생각대로 그냥 갈것인지 우리가 선택하는 것입니다.주님은 강요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호소 하시고 초청하시고 간청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종적으로 결정해야 합니다. 주님은 다시 몸을 구푸려 땅에 글을 쓰셨습니다. 이제 이들이 선택해야 합니다. "상관하지 않겠다. 너희들이 어떤 선택을 해도 나는 받아들인다. 선택해라. 죄없다고 생각해서 돌로 치든지, 이 말이 너의 양심을 찔러서 치지 못하든지, 아니면 다른 제 3의 생각이든지 선택해라." 그들은 아마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이 사건을 일으킬때, 예를들면 이 사건의 문제가 뭐냐면 남자는 없는 것입니다. 왜 남자는 없죠? 간음은 혼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자가 없습니다. 저희가 그냥 놔뒀지요. 현장을 어떻게 확보 했지요? 거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 사건을 조작해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고소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율법대로 행하면 예수님은 불필요한 분입니다. 예수님이 율법을 어기면, 율법을 무시하면 이제 그것을 빌미로해서 "이분은 메시아가 아니다." 그렇게 하고자 하는것이 그들의 의도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생각은 이랬을 것입니다. 그들은 아마 주님께서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이냐면, "용서하실 것이다. 이제까지 주님이 해 온것으로 보면 이분은 틀림없이 용서로 갈 것이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세상에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 내가 세상에 온 것은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구원하려 함이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켜 용서하려 함이라." 이것이 주님의 일관된 가르침이며 행동이셨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기대했습니다. "틀림없이 주님은 용서쪽으로 갈것이다. 어떻게해서든지 이 간음중에 잡힌 여인을 용서해 주려고 할 것이다." 이것이 그들의 예측이었습니다. 우리들도 그렇게 생각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돌로 쳐라." 주님은 율법을 폐한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율법을 그드르이 생각 이상으로 율법을 정확하게 알고 계셨습니다. 돌을 칠때 누가먼저 쳐야 하는 것인지 율법이 말하고 있었습니다. "죄 없는자가" 그리고 주님이 다시 몸을 구푸려 땅에 글을 쓰고 계시자 사람들이 찔려서 하나씩 하나씩 사라지기 시작 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가 버렸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모였던 여러사람들, 그들도 가 버렸습니다. 그리고 이 여자 혼자만 남아 있었습니다. 이 여자가 갈수 있었나요? 이 여자가 간다면 갈수 있었습니다. 이 여자도 이 자리를 가장 피하고 싶은 첫번째 사람입니다. 그녀가 간다면 주님은 잡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녀는 남아 있었습니다.

이제 이 여자를 주님이 어떻게 대하시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주님이 이렇게 질문하십니다.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자가 어디 있느냐? 너에게 간음 죄인이라고 법에 따라 재판을 받아야 한다고 너를 고소한 사람이 없느냐?" 여자가 대답합니다. "없나이다." 그녀는 자유 입니다. 고소인이 없으면 재판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이 재판은 무효 입니다. 기각된 것입니다. 그러나 단 한분, 죄없으신 분이 있습니다. 그녀를 심판하실수 있는 유일하신 분이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재판하실수 있습니다. 재판은 없어졌습니다. 그런데 주님만이 문제 입니다. 주님만이 자격이 있습니다.그런데 주님이 이렇게 판결 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치 아니한다." 왜 정죄치 아니하시죠? 그리고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주님이 정죄하지 않는 이유는, 주님은 재판하실 것입니다. 사람들이 범한 그 죄를 반드시 율법대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행위만 가지고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고 마음으로 음욕을 품기만 했어도 간음죄로 재판하실 분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닙니다. 지금은 은혜의 날이며 구원의 때 입니다. 지금은 주님께서,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이제 곧 이후에 십자가에 피 흘리고 죽으실 것입니다. 지금은 주님께서 죄인들을 부르고 계시지만 자기의 죄를 용서받고 싶은 사람, 자기가 죄인인것을 알게 된 사람, 그 죄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 사람을 부르고 계십니다. 그래서 정죄치 아니하십니다. 그러나 언제까지가 아닙니다. 언제인지 모르지만 주님 교회를 휴거시키는 날이 옵니다. 이제 구원의 날은 끝납니다. 그리고 환란의 때로 들어갈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이 여자에게 정죄치 아니합니다.

하나만 더 보겠습니다.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우리는 어떻게 죄를 미워하게 될까요? 우리는 어떻게 죄를 피할수 있을까요? 주님은 그 여자에게 두번째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그녀를 지금 심판하실수 있지만, 지금 지은죄를 가지고 당장 심판하실수 있지만 구원의 날, 은혜의 때에 그녀를 그 심판에서 연기 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는 죄를 범치 않는다. 우리가 죄를 범치 않는 것은, 죄를 범치 않게 하는 것은, 율법의 무서움이 아닙니다. 율법의 무서움이 우리로 하여금 죄를 두려워하게 합니다. 그러나 정말로 우리로 죄를 피하게 하는 것은 은혜 입니다. 나를 심판하셔야 할 분께서 나를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나에게 다시한번 살수 있는 두번째 기회를 주셨다. 새롭게 살수 있도록 은혜를 베푸셨다. 이제 이 두번째 삶에는 이 죄가 들어와서는 안된다. 이것이 그 여자에게 긍휼이 심판을 이기고 승리한다고 하는것을 주님이 보이고 계신 것입니다. 사람을 궁극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은혜인 것입니다. 용서 입니다. 여기서 저희들이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첫번째 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중에 죄 없는자가 돌로 치라." 라고 말씀하시자 거기있는 자들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그리고 주님의 말씀을 듣기위해 아침부터 성전에 모였던 모든 사람들이 양심에 가책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첫번째 입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을때에 율법을 하나님의 기준으로 받아들일때 우리는 양심의 가책을 받는 것입니다. 이게 필요합니다. 서시관과 바리새인들은, 흩어진 사람들은 자기가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앞에서 자기의 양심이 찔렸던 것입니다. 이게 구원받을수 있는 첫번째 단계 입니다. 성경을 읽고 이것이 거룩하신 하나님, 심판하실 하나님,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 그 음성으로 들어야 합니다. 그 음성으로 듣지않고 항상 맨날 읽은 말씀이고 이건 내가 다 아는 소리고 그래서 양심이 살아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적용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엄위한 말씀 앞에서, 심판 하시겠다고 하는 하나님 말씀 앞에서 죄를 지적하시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어떤 형제님이 간증 하셨습니다. 로마서 1장에 죄의 목록들이 나오는데요. 그러면, 부모를 좀 거역했지만 그렇다고 사형을 처하는 것은 너무하지 않느냐? 이런 생각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천지를 좌지우지 할수 있는, 이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이 세우시기를 부모를 거역하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라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을때에 "내가 부모를 거역하는 것이 사형에 해당하는 죄였구나. 이제 나는 사형을 당해야 하는구나. 어찌할꼬, 어떻게 이 사형에서 피할수 있는가?" 이렇게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 두번째, 이 여자처럼 부끄럽고 수치스럽지만 그 자리에 머물러야 합니다. 주님앞에 머물러야 합니다. 두번째는 항상 하나님 앞에 있어야 합니다. 말씀 앞에 있어야 합니다. 잠시 그와같은 깨달음이 있었을찌라도 세상에 나가서 살아버립니다. 다 잊어먹고 뜻하는대로 하고 그래가지고 이제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살펴 볼수 있었던 그 복된 경험이 흐려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하시면 좋습니다. "주님 제가 이 자리에서 구원 받기를 원합니다." 또 나갔다가, 할수없이 사람의 생활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학교도 다녀야 하고 직장도 가야하고 또 다른 일상적인 것도 처리해야 하고.. "주님 그와같은 일을 하지 않고 구원받기 전까지 제가 일어나지 않겠습니다. 주님, 이 자리에서 저를 구원해 주십시요." 이 여자처럼 하나님, 예수님 앞에서 물러가지 말아야 합니다. 말씀 앞에서 말씀이 나에게 영향을 줄때, 말씀이 나를 찌르고 내 마음을 움직일때, 그때 내가 구원에 이르기까지,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세번째 입니다.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잡히지 아니하고 생명을 얻으리라." 주님이 행하시는 일을 계속 받아야 합니다. 주님이 빛이십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분이 실제로 무엇을 하셨는지 계속 봐야 합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한다." 이 말씀속에 주님의 십자가가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여자를 정죄하지 않기 위해서 주님이 대신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그 심판을 피하고 주님이 대신 죄 겂을 받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어야 합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어야 합니다. 그랬을때 죄가 생각이 납니다. 죄인인 것을 알수 있습니다. 죄인인 것을 ㅇ라고 내 마음이 하나님 앞에 통회하는 마음이었을때 그때 주님앞에 간구하고 "주님 이 시각, 하나님의 말씀으로 내 마음을 해결해 주십시요." 기도하고 그리고 주님이 십자가에서 행하신 위대한 일을 봐야 합니다.

여기 잠깐, 주님의 모습을 보겠습니다. 성경은 주님이 누구냐 하는것이 항상 주제 입니다.

첫번째, 주님은 겸손하신 분입니다. 주님은 하늘영광을 떠나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수 있도록, 아침일찍 일어나 성전에서 말씀을 가르치신 분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그래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말씀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그 장소가 어때야 할까요? 구약 같으면 영광의 구름이, 그룹 천사들이 주님을 보호하고 그와같은 영광이 나타나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렇게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무도 주님의 영광을 보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자신을 낮추시고 말씀을 가르치실때에도 평번한 낫빛으로 사람들에게 선전하지 아니하고 "여기오면 위대한 말씀을 들을 수 있다." 광고하지 아니하고 자원해서 오는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는 겸손하신 주님.

두번째 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으로 도전하시는 하나님 입니다. 율법을 행해라. 율법대로 해보면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이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것은 기준이 낮기 때문입니다. 자기 기준이 아주 낮기 때문에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 앞에 서면 그는 죄인이 아닐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 자기가 죄인이 아니라고 한 사람이 있지요. 부자 청년이 그랬습니다. 주님께서 당장, 두가지 질문을 하십니다. "재산을 다 팔아라. 그리고 나를 따르라." 두가지 질문에 딱 넘어집니다. 그는 돈을 사랑합니다. 주님을 따르지 않습니다. 자기를 따릅니다. 그래놓고도 자기가 율법을 다 지켰다고 속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로 율법을 지키려고 한다면 진지한 마음으로 정직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법을 준수하려고 하면 그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도전 하십니다.

그 다음에 세번째, 예수님은 다시 기회를 제공하시는 분입니다. 다시 은혜를 베푸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생각을 놓고 우리의 삶을 바꾸고 주님이 주시고자 하는 새 생명, 그 복된 은혜 가운데 올수 있도록 초청하시는 주님 입니다. 이 주님의 겸손하심.

네번째, 주님의 지혜로우심. 어떻게 율법을 어기지 않으면서 율법을 어긴 죄인을 용서할수 있을까요? 사람으로서는 불가능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올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으로서 가능한 것입니다.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하되 오직 하나님은 가능하시느니라. 하나님만이 주실수 있는 이 구원을 우리에게 주시는 지혜로운 분입니다. 겸손하시며 지혜로우시며 우리에게 도전하시며 우리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시는 분입니다. 이분앞에 나아와 이분의 은혜를 구하고 이분을 나의 주님으로 모시고 이분의 말씀을 내 생각위에 놓고 이분이 하신 일을 나의 모든 죄보다 더 거룩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요한복음 8장에서 성령께서 우리에게 호소하시는 음성입니다. 이 음성을 듣고 주님앞에 나오시기를 원합니다. 주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