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러싱 모임 수양회/2019년 여름 수양회

< 07. 대 목자이신 주님, 심판자이신 주님 >

박이레 2021. 7. 25. 21:48

2019년 7월 25일 뉴욕플러싱 여름 수양회 / 정형모 형제님

< 07. 대 목자이신 주님, 심판자이신 주님 >

저희들이 그동안 우리 주님의 인격, 그분의 인격이 어떠하기 때문에 그분의 사역은 또한 이러하신 것이죠. 저희들이 우리 주님의 현재 사역에 대해서 살펴 보았습니다. 지난 시간에 주님의 현재 사역중에 여러가지가 있지만 대단히 중요한 세가지, 우리의 위대한 대제사장으로, 우리의 위대한 대제사장으로, 또 우리를 위한 대언자로, 또 우리를 위한 큰 목자로 일하고 계시다. 이 점을 저희들이 생각해 보고 있었는데요. 큰 목자로 저희들을 돌보시고 계신데, 이 점에 대해서 조금 남은 부분을 저희가 묵상하고 그리고 마지막 교제에 대해서 저희들이 살펴보겠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23:1).

성경은 목자로 가득하지요. 족장들이 다 목자였습니다. 모세도 목자였고 다윗도 목자입니다. 야곱이 말년에 자식들 앞에서 이야기 하게될때 여호와께서 목자가 되셔서 내 일생 나를 먹이셨다는 말씀을 합니다. 먹이시고 인도하시고.. 시편 23편에서 다윗의 시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분이 목자이기 때문에 돌보시고 공급하시고 인도하시고 안내하시고 이제 그분의 이와같은 돌봄을 따라서 저희들은 주님의 은혜 가운데 많은것을 받습니다. 공급받습니다. 보호를 받습니다. 안내 받습니다. 초장으로 인도하시죠. 그리고 푸른초장에 누이십니다. 또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창세기 22장에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리기 위해서 모리아 산으로 갔을때에 이삭이 질문하지요. "불과 나무는 여기 있는데 희생으로 드릴 어린양이 어디 있는가?" 했지요. 참으로 난감한 질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는 어떻게 됩니까? 여호와의 이레로 이미 입증 되었고 주님께서 다 준비하고 계셨죠. 수양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수풀에 뿔이 걸려서 온전히 그 양을 쓸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준비하고 계셨다. 준비하시고 공급하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래서요, 우리는 약속의 땅에서, 초장을 찾기가 어려운데 목자는 그것을 찾고 좋은 풀을 먹이기 위해서 인도하고, 그런데 여기 인도하신다는 말이 있습니다. 초장으로 또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신다. 이것은 누구를 위해서 합니까? 이것은 우리를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양들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보좌 우편에 앉아계신 그분은 큰 목자로서 우리의 필요, 먹을것, 마실것, 그리고 쉴것에 대해서 준비하고 계시다. 우리는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주님은 지금도 쉬지않고 그 일을 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 다음 말씀을 보면요.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시23:3).

여기 또 다시 인도하시는 도다라고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 영혼을 소생시키십니다. 목자가 항상 마음에 두고 있는것은 소생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양으로서 건강을 잃어버리거나 연약해지거나 때때로는, 양들을 털이 많아지기 때문에 조그만 풀밭위에 굴곡이 있다면 걸어가다가 팍 쓰러집니다. 그것을 전복 양이라고 말하는데, 쓰러지면 자기가 못일어 납니다. 하도 털이 많아서요. 그래서 목자가 가서 빨리 세워져야 합니다. 만일 그러지 않으면 양은 누워서 계속 숨을 쉬면서 공기가 들어가게 될때, 배가 점점 불러오고 나중에는 결국 죽습니다. 소생, 다시 건강하게, 연약한 상황에서 또한 병에 걸렸을때, 여러가지 이런 문제들이 있을때에 소생 시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소생시킵니다.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대언자로써 주님께서 어떻게 하시는지 우리가 보았죠. 또한 목자로서 우리를 소생시키시는데, 자기 이름을 위해서, 여기 인도하시는 것은 주님의 이름을 위해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첫째, 2절 말씀에 "푸른 초장과 물가로 인도하신다"는 것은 우리의 필요를 따라서 인도하실 뿐 아니라 주님께서는 자기 이름을 위해서 인도하신다. 우리의 필요를 따라 인도하시고, 하나님의 이름, 즉 간증을 위해서 인도하신다. 주님은 큰 목자로서 우리를 먹이시고 입히시고 쉬게 하시고 하는 이유가 하나님의 이름이 드러나도록 하기 위해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필요와 간증을 위해서 인도하신다. 그 다음에 4절 이하에 가보면 초장, 쉴만한 물가, 그 다음에 또 뭐가 나옵니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이것은 산이 언덕이 높이 있는 골짜기로 들어왔을때에 태양이 떠서 움직이게 될때, 그 골짜기에는 그림자가 생기게 되어 있습니다. 산 때문에 산 그림자가 생기지요. 그래서 그것을 가리켜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물론 그림자가 드리워진 골짜기, 그것을 그림과 같이 우리에게 표현하시면서 이와같은 것은 사망 자체일 수도 있고, 또 사망과 같이 대단히 어려운 역경일수도 있습니다. 여기를 통과 합니다. 목자는 이런곳을 잘 알고 있고 양들을 이리로 인도하시는데, 그때 양들이 무엇을 경험하는지 목자는 잘 알고 계시죠. 그래서 이제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해도 때때로 사망이 찾아오게 될때, 우리는 견딜수 없는 공포 속에서 두려움 속에서 슬픔 속에서 우리는 치이죠. 그런데 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다닐찌라도, 거기에 항상 다니는게 아니고요. 이 말씀을 좀더 정확하게 번역하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하여도"라는 말입니다. 통과하는 것입니다. 거기를 지나는 것입니다. 거기를 지나게 될때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가 있습니다. 목자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임재, 주님은 보좌 우편에 계시지만 다른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셨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고 계십니다. 성령님도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고 계십니다. 주님의 임재를 우리는 느끼고 있다. 이것은 우리에게 커다란 위로고 힘입니다. 주님의 임재를 느낀다고 하는것은 우리의 개인의 생활 속에서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고 또한 우리 가족이 모이게 될때, 주님이 우리 가족에게 함께 하신다는 것을 느낀다는 것은 커다란 특권이고 힘이고 모임은 당연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게 될때 주님이 여기 계시죠. 주님의 임재는 저희들에게 커다란 힘이 되는 목자의 인도 입니다. 큰 목자께서 그렇게 우리를 인도하시는데 그때 무엇을 사용하실까? 주와 지팡이와 막대기를 사용하신다. 목자는요, 지팡이를 사용하고 막대를 사용한다. 이 지팡이라고 하는건요, 우리말에 지팡이 이러면 이런 겁니다. 나무 뿌리가 있는데 이상한 나무예요. 이 나무는 덩어리가 있어요. 그리고 거기서 뿌리가 나옵니다. 이런 나무들을 잘라서 뿌리들을 다 제거하면 뭐가 남습니까? 곤봉입니다. 이 지팡이라고 하는것은 사실 곤봉입니다. 이 곤봉을 가지고요, 목자는 유용하게 양들을 인도합니다. 앵들을 보호합니다. 그 다음에 또 하나는 지팡이와 '막대기'라 되어 있는데, 이 막대기는 이런 겁니다. 어떤 면에서 이것을 지팡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구부러진 지팡이다. 영어 에서는 구부러진 지팡이라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이 두가지는, 하나는 이것을 손잡이로 해서 딱 쥐고 양들이 멀리 떠나게 될때, 양떼에서 떠나려고 하는 그룹의 양들이 있을때에 이 곤봉을 던집니다. 그러면 뱅글뱅글 돌아가면서 공중에서 꼰살같이 날아가기 때문에 소리가 납니다. 윙- 하는 소리가 나요. 양들은 그 소리를 압니다. 그래서 그 소리를 듣고 다시 양떼로 돌아옵니다. 이것을 또, 다윗이 물매를 가지고 돌을 가지고 맞추죠. 그런것 뿐만 아니라 야수가 올때 이것을 던져서 맞춰서 야수가 죽거나 다치거나 도망가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호하는 것입니다. 이 막대기라고 하는 것, 이것은 뭘 말할까요? 이것은 양들을 인도하게 될때, 양들은 이 지팡이를 가지고, 막대기를 가지고 옆으로 가는 양, 열에서 떨어져 나가는 양을, 옆구리를 톡톡 칩니다. 때리는게 아니고요. 톡톡 칩니다. 그래서 다시 열로 돌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인도하는 막대기, 지팡이 입니다. 또 이 막대기는 여기가 이렇게 구부러져 있기 때문에 양들이 구덩이에 빠졌을때 여기를 잡고, 아래를 잡고 탁- 해서 거는 겁니다. 그래서 앞두다리가 굴곡에 걸려서 꺼내는 겁니다. 우리 큰 목자는 여러분과 제가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게 될때 수많은 위험한 것들이 있죠. 원수가 있습니다. 또 곁길로 가서, 함께 가지 아니하고 곁길로 가는 위험한 양들이 있죠. 사실은 지역교회에서는 하 목자가 이와같은 양들을 돌보고 계십니다. 더나가지 않도록 계속해서 함께 한 마음으로 모임 안에서 주님을 섬길 수 있도록 하는 일을 하죠. 여기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보호하고 인도하고 막아주고 지탱해주고 안위하는 것입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23: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여기 '상'이라는 말은 '매사'라는 말인데요. 스페인 말로 고원입니다. 우리말로 산이라고 하는 것은 높은 지역인데 산이 아니고 고도는 높은데 그 위가 평평한 것입니다. 그와같은 곳은 목자들이 이야기할때 가장 이상적인 이상적인 목초지라 합니다. 거기에 올라가서 풀들이 있습니다. 그리로 인도하는데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푼다." 그리로 인도하고 거기에서 머리에 기름으로 머리에 바른다. 양에게 어떻게 기름부음을 하는 겁니까? 아니죠. 양들은 다 털로 덮여 있는데 코 있는 부분, 입 있는 부분, 여기만 노출이 되어 있습니다. 거기가 노출이 되어 있기 때문에 거기에 목자들은 그렇게 이야기 합니다. 거기가 노출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곳에 기생충이나 균이나 이런것들이 붙어서 양들을 괴롭히고 헌데를 만들거나 할수 있다. 그래서 양들을 기름을 바르는 것입니다. 감람유나 아니면 백향목 타르나 이런것을 가지고 거기를 발라줍니다. 그래서 벌레나 기생충이나 다른 어떤것들이, 가장 민감하고 부드러운 부분 입니다. 거기를 상하지 못하도록 보호해 준다. 기름이라고 할때 우리는 언제나 성령을 연상하게 되지요. 그 다음에 시원한 물을 가지고 잔에 붓습니다. 얼만큼 붓는가? 반? 2/3가 아니라 잔이 넘치게 붓습니다. 이 두가지, 기름으로 머리에 바른다. 그리고 잔이 넘치게 해 주신다. 이 두가지는 하나는 성령님의 역사고 또 하나는 말씀의 역사 입니다. 우리 주님은 큰 목자로 하늘 보좌실에 계세요. 주님 떠나셨지만 다른 보혜사를 보내셨지요. 우리속에 있습니다. 오늘 이 경륜에는 우리가 주님을 믿고 성령님께서 우리속에 계십니다. 이 성령님은 하나님의 말씀과 뗄레야 뗄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으로 감동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하늘에 계시지만 큰 목자께서 우리를 돌보시는데 성령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세요. 우리 속에 계세요. 그리고 말씀을 통해서 이 잔이 넘치게 한다. 이 잔이 넘치게 한다는 것은 목자의 양들을 돌보시는 일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하고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잔히 넘치지 못하면 많은 불만이 나옵니다. 목자가 양들을 돌보게 될때,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돌보실때 소원하시는 것은 우리 잔이 넘치는 것입니다. 잔이 넘쳐야 예배가 풍성해 지는 것입니다. 잔이 넘쳐야 우리는 주님을 섬기게 될때 우리는 합당하게 주님을 섬깁니다. 내 잔이 넘치지 않는데 어떻게 내가 다른사람을 돌보며 어떻게 주님의 대의를 위해서 내가 나를 희생하겠습니까? 잔이 넘치게 될때, 이것은 말씀이 넘치는 것이죠. 성령님의 도우심을 통해서 말씀이 넘칩니다. 우리 마음속의 하나님의 말씀, 거기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주제 입니다. 그분으로 인해서 내가 포화 상태에 되어 있다. 언제나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어제는 넘쳤는데 오늘은 넘치지 않는다. 주님의 인도를 받지 못하는 것이죠. 주님은 우리를 그렇게 인도하시기를 원하시고요. 우리는 매일과 같이 하나님이 주신 말씀으로, 오늘 주신 말씀입니다. 내가 아는 말씀이 아니고요. 내가 아는 말씀은 나에게 그렇게 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오늘 내가 읽은 말씀, 오늘 내가 묵상한 말씀, 오늘 내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말씀, 성령님께서 나로 하여금 새롭게 깨닫게 하시고, 전에 알고 있던 말씀이 신선하게 내 마음을 인도하고 그래서 그것은 나로 하여금 힘을 주고 또한 역경 속에서 내가 그것을 이겨낼수 있도록 나로 하여금 강하게 해 주시고, 또한 바른 선택을 할수 있도록 나로 하여금 분별력과 지혜를 허락해 주시고,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말씀 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를 도우시고요. 우리 주님이신 말씀을 우리에게 소개해 주시고, 그것을 매일과 같이 우리가 받게 될때, 따끈따근한것을 받아야 합니다. 바로 오븐에서 나온것을 먹듯이, 찬밥을 먹는 것 아니고, 어제 만들어놓은, 그제 만들어 놓은 그 떡을 먹는 것이 아니고, 오늘 우리가 만나를 매일 먹듯 먹어야 합니다. 여기 잔이 넘칩니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시23:6).

"나를 따른다" 여기 따르는 두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원수가 따라와요. 여기 보세요. "원수 앞에서 상을 베푸셨도다." 원수가 가까이 있습니다. 그런데 나의 생전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나를 따른다. 주님의 긍휼과 주님의 자비와 선하심과 이것이 따른다. 우리는 주님의 선하님을 생각항때 우리는 항상 주님앞에 감사합니다. 우리 주님은 선하신 분입니다. 우리에 대한 악의가 없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원수가 귀에 속삭이면서 주님은 굳은 분이다. 주님을 섬기는데 당신은 굳은 분이다. 이런 생각을 갖는다고 하는것은 원수가 이런 생각을 넣어주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주님을 생각할때 주님은 선하신 분입니다. 여러가지 어려움 속에서도 주님은 여전히 우리를 향한 선한 계획과 의도와 뜻이 있습니다. 큰 목자는 그와같은 마음을 가지고 계시죠. 그래서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마지막으로 여호와의 집이 나옵니다. 우리 주님은 먼저 가신 선구자 이십니다. 그래서 어디로 가셨어요? 하늘 성소로 가셨습니다. 그래서 그분께서 다시 오실겁니다. 주님께서 전에 떠나시게 될때,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해서 처소를 예비한다. 아버지의 집이죠. 그리고 가신 그분께서, 큰 목자께서 다시 오세요. 우리를 데러가실 겁니다. 어디로 데려가십니까? 아버지의 집으로 데려가실 것입니다. 거기에 여호와의 집에 우리는 영원히 거할 겁니다. 이와같은 목적지를 향해서 이 땅에서, 우리가 이 광야를 통과하게 될때 여기서 필요한 것들을 주님은 너무나 잘 알고 계시다. 우리는 주님이 큰 목자로서 좋은 풀이 있는데, 약초냐, 독초냐. 독초가 있는데가 아니고요. 독초를 잘 알아야만 목자가 될수 있습니다. 무엇이 독인가? 무엇이 좋은 풀인가? 목자는 알아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그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남겨놓은 것들이 있습니다. 말씀도 있고 성령님도 있고요. 우리로 하여금 죄 가운데서, 아니면 죄 짓기 전에,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것도 주님께서 다 장치해놓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땅을 걸어가게 될때 필요한 모든 것들을 공급하시기 위해서 큰 목자로서 지혜가 많으시고 선한 마음을 가지고 계시고 우리의 유익과 우리의 번영과 건강과 모든것을 원하시는 주님께서 우리는 인도하십니다. 풀의 성격뿐만 아니라 거기에 뱀들이 있느냐, 파충류가 있는가, 그래서 양들을 공격할만한 것들이 있는가 잘 살펴야 합니다. 그 다음에 풀 근처에 야수의 굴이 있는가를 목자가 잘 살펴야 합니다. 또 하나 막대기의 일이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뭔가하면 양들을 우리로 데려올때 우리에 가서 자야 하지요. 우리로 데려올때에 우리에는 문이 딱 하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양의 문이라 말씀 했어요. 이 문으로 양들이 들어가게 될때, 양들이 떼를 져서 갈때는, 수많은 양들이 둥그렇게 떼를 져서 가지요. 그런데 문으로 들어갈때는 일렬로 들어갑니다. 그래서 이 막대기를 가지고요, 이 지팡이를 가지고 하나씩 하나씩, 한마리가 가면 그 양에 대해서 알고 있지요. 양의 이름, 양을 목자는 개인적으로 알고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하나가 지나가면 하나, 둘, 셋, 목자는 양이 몇마리가 있는것을 언제나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베드로를 사람낚는 어부로 부르셨을때, 그물이 찢어졌어요. 그래서 새버렸어요. 복음 증거하게 될때는 어떤때는 구원받았다고 하고 그런데 아닌 사람들도 있고 그렇습니다. 그러나 어제 저희들이 말씀을 들었습니다만은, 갈릴리 바다에서 부활이후에 주님께서 베드로를 부르셨을때 그때, 그 당시에 밤새도록 물고기를 못잡았는데 거기다가 그물을 던지라고 했을때 153마리가 잡혔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면 내 양을 먹이라." 목자가 될때에는요, 양의 숫자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지역교회 안에서 어떤 성도가, 얼마의 성도가 교제안에 있는지 분명히 알고 그 모든 성도에 대한 관심, 그리고 배려, 이 모든것은 목자의 몫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목자는 우리를 개인적으로, 저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를 개개인으로 익히 알고 계시다. 필요도 알고, 그 필요를 공급하실수도 있고 그리고 안내하시게 될때, 우리의 필요를 따라서 뿐만 아니라 주님의 이름, 간증을 위해서 인도하신다고 하는것을 우리는 마음속에 언제나 기억해야 되겠습니다. 시편 23편, 양의 발자취를 우리가 추적할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목자의 인도하심의 발자취입니다. 우리는 초장으로부터 시작해서 물가, 의의 길, 그리고 음침한 골짜기, 그리고 지팡이와 막대기, 그리고 산, 높은 고지, 그리고 기름, 넘치는 잔, 그리고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우리를 따라오는 것, 목자의 인도하는 길을 우리는 시편에서 보았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앉아 계세요.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는 주님께서요. 큰 목자로 일하세요. 또한 대제사장으로 일하세요. 대언자로써 일하세요. 우리의 모든 현재, 구원받은 성도, 양이 필요한 모든 것들을 주님께서는 다 구비하고 우리를 위해서 일하시고 계시다. 얼마나 치밀하신 우리 주님이신가? 과거에 우리 죄를 위해서 피흘려 돌아가셨을뿐만 아니라 현재의 우리를 위해서 주님께서는 역사하고 계시다. 우리의 큰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을 위해서 일합니다. 사실상 죄짓지 전에, 우리가 죄짖지 않도록, 그리고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 앞에서 잘 드려질수 있도록, 주님께서는 큰 대제사장으로 일하고 계시다. 두번째, 대언자로서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가 죄를 지었을때, 그때 우리를 붇드시고 계시고, 우리가 자백하게 될때, 하나님 앞에서, 아버지 앞에서 말씀하심으로 인해서, 아버지와 자녀와의 교제가 계속해서 지속되도록 하신다. 또 큰 목자로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공급하시고 보호하시고 또한 우리로 하여금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따르는 것을 느낄수 있도록 아버지의 집 갈때까지, 따라가는 것을 느낄수 있도록 하신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8:26).

성령께서 간구하십니다.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모를때에도 성령님께서는 말할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십니다. 그런데 34절 말씀을 보면요.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8:34).

26절에는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서 간구하고 계시고요. 우리 속에서, 보혜사 입니다. 또 다른 보혜사, 하늫에 가신 보혜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하늘에서 간구 하십니다. 하늘에서 우리를 위해서 간구하시는 두 보혜사의 역사, 이것이 사실상 오늘 저희들이 기억해야 하는 대제사장, 우리에게 있는 큰 대제사장, 그래고 대언자, 그리고 큰 목자의 역할입니다. 주님은 떠나계시지만 주님은 여전히 우리를 돌보시고 계시고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우신다. 이제 우리는 마지막으로 우리 주님의 재림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4장 말씀을 보겠습니다. 우리 주님은 하늘에 가셨을뿐 아니라 다시 오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1-3).

주님께서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다시 오시겠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이 약속을 하신 분이 누구일까? 이분은 신사입니다. 신사가 누군가? 신사복을 입은 사람이 신사가 아니고요. 사기꾼도 신사복을 입었어요. 그러나 참된 신사는 약속을 하고 지키는 사람, 이 사람이 신사 입니다. 진정한 신사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락방에서 주님 떠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약속했습니다. 다시 오겠다. 약속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그래서 다른 보혜사를 보내고, 내가 떠나도 다른 보혜사가 이곳에 와서 너희를 위할것이다라고 말씀 했습니다. 우리 주님의 다시 오신다는 약속, 그것은 바드시 지켜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하늘의 신사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재림에 두가지가 있지요. 다 잘 아시기 때문에 길게 말씀은 안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교회를 위해서 오시는 휴거가 있지요. 휴거라는 말, 공중까지 오시죠. 지상까지 아니고, 공중재림이지요. 그것을 휴거라고 말하는데, 다른말로 영어에서는 '환희'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때는 너무나 기쁜 순간이기 때문에 그냥 일반적인 기쁨이 아니고요. 충만한 기쁨, 너무나 형용할수 없는 기쁨, '환희' 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 지상 재림하시게 될때 그것을 가리켜서 다른말로 '나타나심'이라 말합니다. 이 땅까지 오실겁니다. 감람산에서 떠나셨는데, 감람산까지 오실 겁니다. 우리 주님께서 휴거때에 새벽별로 오시지만 지상재림때는 의의 해로 오십니다. 휴거때에 모든 믿는 성도가 다 올라갑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도들 중에 좀 불성실한 성도는 휴거때 올라가지 못하고 땅에 남아서 환난을 통과한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리스도의 몸, 오순절로부터 시작해서 휴거때까지의 모든 구원받은 사람을 몸이라 말하지요. 다른 기술적 용어로 총 교회다 말하지요. 그렇다면 총 교회가 아직 완성이 안된 겁니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죠. 신부가 아직 완성이 되지 않았다 그말압니다. 그럴수는 없습니다. 휴거때, 이제 몸이 완성이 되고 모임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지요. 우리 주님께서 이제 남는자 없이, 모든 믿는자는 다 아버지의 집에 인도하실것입니다. 교회가 가지고 있는 소망을 두가지를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바울 사도께서, 하나는 베드로 사도께서 말씀합니다. 디도서에서 사도바울께서 말씀하고 있는것은 복스러운 소망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에서 베드로 사도께서는 산소망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복스러운 소망, 뭡니까?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다시 오시는 그런 소망 입니다. 이것이 복스러운 소망입니다. 사도바울은 주님이 오시는 것에 관한 소망, 그런 관점의 소망을 말씀하셨고 베드로 사도는 산 소망, 그것은 뭡니까? 우리가 그리로 갈, 하늘로 갈 소망입니다. 사실상 같은것을 다른 관점에서 말씀하고 있어요. 복스러운 소망은 주님이 오시는 소망, 그리고 산 소망은 우리가 갈 소망, 이 두가지를 두 사도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집에서 위로의 말씀을 하셨지요. "근심하지 말라." 권면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 믿지요. 그런데 주님 따나시면 보이지 않습니다. 부재시에 주님 보이지 않아요. 주님 거기 계세요. 그러나 우리가 믿음으로 그 분을 믿습니다. 그래서 권면의 말씀에서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말씀 했습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곳이 많도다." 이것은 계시의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지금 그 일을 하고 계세요. 아버지의 거할곳이 많다. 그것은 우리의 본향입니다. 거기에 우리가 가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놀라운 순간이예요. 그리고 난 후에 신부는 어린양과 결혼할 것이죠. 하늘에서 위대한 일들이 일어나요. 땅에서 환난이 진행되는 동안 하늘에서는 이천년동안, 기독교, 교회사의 이천년이 흘러갔는데요. 주님께서 곧 오시면 이 장구한 세월동안 있었던 모든 슬픔과 환난과 어려움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믿음 가운데 주님을 믿고 따라갔던 모든일들이, 성도들이 모두가 다 주님앞에 나타나서, 만나서, 우리 주님께서는 성도들을 아버지의 집으로 인도할 것이고, 거기가 우리의 본향일 것이고요. 거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설 것입니다. 이것은 실제적으로 우리에게 대단히 중요한 이야기라고 믿습니다. 중요한 사실입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을 섬기고 있는데요. 우리는 반드시 주님앞에 설 겁니다. 우리의 심판은 물론 다 이천년전 십자가에서 지나갔어요. 그러나 우리가 지금 어떻게 사는 내용에 대해서, 어떻게 사는 모습에 대해서, 사는 내용에 대해서, 우리 주님께서 심판하실 것이다. 그런데 그 심판은 상을 주실것이라는 심판이다. 벌이 아니고요, 상을 주시기 위한 심판이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마음속에 잘 두고 있어야 할것입니다. 갈보리에서 우리 주님께서는 사람을 예비하십니다. 십자가에 피흘려 돌아가심으로 구원의 길을 마련하셨고요.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치않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늘에 가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을 십자가에서 예비했어요.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 승천하시고 나서 지금 무슨일을 하고 계세요? 그 사람이 거할곳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갈보리에서 사람을 준비했고, 하늘에서는 믿는 사람이 거할 곳, 아버지의 집을 지금 준비하고 있습니다. 다시와서 내게로 영접할 것이다. 이것은 참 기대의 말씀이죠. 우리 주님 다시 오십니다. 하늘의 신사분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셨어요. 다시 오십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이것은 교회가 항상 주님을 향해서 고백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의 소망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분주히 살고 주님을 위해 헌신하고 살고 있지만 사실상 이 세상은 고난과 어려움 가운데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 고난을 우리는 광야를 통과하고 있지만, 우리의 본향, 그곳으로 갈때, 그곳에 가서 누리게 될 위대한 영광과 또한 기쁨과 즐거움과 모든 평안함, 눈물은 사라지고요. 더이상 고통과 괴로움과 이별과 또한 배반과 죄로 인해서 우리가 허덕이는 모든것으로 인해서 우리는 해방이 될 것이다. 그리고 완전한 곳과 죄가 없는 곳에서 온전하신 아름다운 그분과 우리가 교제할 것이다. 그리고 성도들 자신도, 나도, 모든 성도들도 죄가 없이 우리가 교제할 것이다.라고 하는 소망 말입니다. 이것은 절정의 말씀입니다.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이것은 절정입니다. 주님있는곳에 우리는 갈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땅에서 주님을 섬기게 될때 어떻게 주님을 위해서 준비해야 할 것인가? 우리는 어떤 상을 위해서 노력하고 수고하고 질력하지 않지만 우리 주님은 상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래서 우리는 이 점에 대해서 이 심판대, 그리스도의 심판대에 대해서 잘 알고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주권적인 선택입니다. 주권적인 선언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삶에 대해서 주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에 대해서 주님은 지대한 관심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허송세월 할것인가, 아니면 말씀대로 살것인가, 우리 생각대로 주님을 섬길 것인가, 아니면 주님의 말씀대로 주님을 섬길 것인가? 하고 하는 점에 있어서 주님은 판단하시고 심판하실 권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심판대가 있지요. 이천년전 십자가에서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심판을 받으셨어요. 그런데 지금 현재 우리가 하늘 가기전에 현재는 어떤 심판이 있는가? 첫째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 우리가 주님 앞에서 합당하지 못하면, 주님이 우리를 징계 하세요. 아버지이기 때문에 아들을 징계하세요. 이런 징계가 있습니다. 또 하나는 지금 이 시대는 주님께서 촟대사이를 다니신다. 그래서 지역교회를 심판하신다. 지역교회가 주님앞에 바로 서도록 책망도 하시고 칭찬도 하신다. 그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시대는 모임을 향해서나 또 개인을 향해서나, 주님이 우리를 징계하시고 훈련하시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의식하고 살고요. 또 모임에 관해서 주님께서 판단하시고 심판하시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민감하고 민감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장차 우리가 주님께로 갈때, 아버지의 집으로 인도되었을때 거기서 이제 그리스도의 심판대가 있습니다. 이땅에 사는 삶 속에서 어떻게 우리는 살았을까, 라고 하는것을 주님께서는 다 알고 계시죠. 이제 검사하실 겁니다. 우리 주님이 검사할 겁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아드님께 모든 심판할 권세를 주셨어요. 요한복음 5장 25절에서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고린도후서 5장 10절에서 그 심판대를 가리켜서 그리스도의 심판대라고 말합니다. 사실상 하나님의 판단, 하나님의 분별, 그것을 그리스도께서 심판하시는 그런것이기 때문에, 로마서 14장의 우리말에서는 하나님의 심판대라 말합니다. 흠정역에서는 그리스도의 심판대라 말합니다. 같은 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심판하십니다. 검사할때는 언제인가? 휴거되어서 우리가 공중으로 올라갔을때 주님을 우리를 인도해서 아버지의 집으로 인도하시죠. 이제 거기서 심판하실 것입니다. 여기에 원칙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심판대의 원칙은 신약에서 우리에게 몇가지 원칙을 말해주고 있어요. 첫째, 귀인의 비유, 므나의 비유, 누가복음 19장에 므나의 비유가 나옵니다. 거기서 모든 종들에게 한므나씩 주었어요. 그런데 달란트의 비유가 있지요. 달란트의 비유에서는요. 어떤 종에게는 한달란트, 어떤 종에게는 다섯달란트, 어떤 종에게는 두달란트, 서로 다른것을 주었어요. 이것은 뭘 말합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가서 우리가 이 땅에서 행한 모든 일들을 생각할때, 우리는 지금 그 생각을 잘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개개인에게 같은 책임을 주셨다라는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개개인에게 서로다른 은사를 주셨다. 이것을 어떻게 우리가 이행할까, 책임에 대해서, 은사가 서로 다르지만 상관 없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나에게 주신 은사이기 때문에 그것은 대단히 고유하고 귀한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나에게 주신 은사에 대해서 귀하다고 생각해야 할 모든 특권과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책임을 우리가 이행해야 되겠다. 그리고 주신 은사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은사에 대해서는, 그 은사만큼 우리가 주님앞에 돌려드려야 되겠다. 그 다음에 세번째 원칙은 뭡니까? 노동자의 비유가 있습니다. 주인이 어느날 시장에 나가서 노동자를 불러오죠. 포도원에 나가서 일해야 합니다. 일할것이 많습니다. 새벽, 우리 시계로는 새벽하면 6시가 새벽이죠. 우리 시계로 아홉시가 성경의 세시이죠. 그 다름에 정오가 여섯시고 오후 세시가 아홉시고 그 다음에 해질때가 열두시, 십이시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사실상 오후 6시 이죠. 이제 주인이 시장에 가서 노동자를 해뜰때, 그리고 아침 아홉시 정오, 오후세시, 그리고나서 다섯시, 끝나기 한시간 전에 또 사람을 불러 왔어요. 그런데 아침에 가서 뭐라고 얘기했냐면 포도원에 가서 일하면 한 데나리온을 주겠다고 이렇게 말했어요. 그리고 저녁때 일 다 끝나고 나서 쭉 줄을 섰는데 한데나리온을 누구에게 주었냐면 오후 다섯시에 와서 여섯시까지 딱 한시간만 일한 사람에게 한 데나리온을 주니까 아침서부터 와서 하루종일 일한 사람이 나는 한 열두데나리온을 주나 가서 봤는데 한 데나리온을 받았거든요. 참 모순과 같은 비유 입니다. 그런데 모순이 아니고요. 주님께서요, 주님 말씀에서요. "나는 하나도 잘못된 것이 없다. 아침에 약속하지 않았는가?" 일하면 한데나리온을 준다고 약속했는데요, 시간과 관련없이 그렇게 약속햇기 때문에 한 데나리온을 주었어요. 이 비유는 노동자의 비유는 우리가 평가해서 그리스도의 심판대에 앞에서 상을 받는것이 아니고, 우리 주님께서 평가해서 주님께서 상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잘 기억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자기를 평가 합니다. 그리고 주님앞에 가서 그것을 기대하려고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그런 사람은 흥정을 하게 되죠. 우리는 주님앞에 갔을때에 주님의 원칙을 따라 헌신해야 할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앞에 헌신하고 일하고 가서 심판을 받게 될때 어떤 기준으로 우리를 심판하실까? 첫째 로마서 14장 말씀을 보겠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롬14:10-11).

로마서 14장 말씀은 로마교회안에 서로 아웅다웅하고 서로 비판하고 서로 불만하고 연약한 사람, 강한사람, 이 두뷰가 서로 반목 했습니다. 그래서 이 교훈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서로받으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리스도의 심판대에 갔을때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어떤 것을 가지고 판단하실까? 평가하실까? 첫째, 우리 성도들 관계 입니다. 인격 관계 입니다. 모임은 하나의 작은 사회 입니다. 여기에 수많은 성도들이 있습니다. 성도들 사이에 관계를 어떻게 유지하고 살았는가? 우리는 항상 이와같은 것을 볼때에 주님의 표준을 우리가 생각하죠. 주님은 어떻게 다른 사람과 관계를 했을까? 우리 주님은 아버지 하나님과 성령님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하셨을까? 이런 모든것을 우리가 보게 될때 우리는 성도관계에서 우리의 주님 앞에서의 합당한 자세, 이것을 항상 우리가 항상 마음속에 두고 행동해야 할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상을 잃어버립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무슨일을 하던지간에 우리 생각대로 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것이 가하지만 모든것이 유익을 끼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모든것이 가하지만 모든것이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잘 생각해야 겠지요. 그래서 배마(??)라고 하는것은 높이 올리워진 단이예요. 거기서 심판을 받습니다. 거기서 상을 받습니다. 거기서 주님이 보시는것은 인간관계 입니다. 그 다음에 주님께서 보시는 것은 동기 입니다. 고린도 전서 4장 말씀을 보면, 또한 고린도후서 5장 말씀을 보면 우리 속에 깊이 감추어진 것이 있다. 동기라고 하는것은 우리속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동기를 잘 볼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볼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향해서 순수한 동기를 가지고 말씀을 순종하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주님께 영광이라는 그런 목표를 위해서 그런 동기를 가지고 주님을 섬기는가, 아니면 나를 나타내기 위해서 육적인 활동을 통해서, 이런것을은 우리가 조심해야 겠지요. 두가지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섬긴 재료가 있습니다. 금과 은과 보석인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아드님과 성령님 그런 재료를 가지고 하는가? 아니면 나무와 풀과 짚으로 하는가? 그것은 그날에 다 드러납니다. 불 가운데로 통과하게 될때 남는것은 상을 받고 불타버린것은 해를 받는다. 즉, 불가운데서 그냥 구원만 받은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갔을때에 육적인 생각, 육적인 활동을 통해서요, 내 생각대로 주님을 섬겼을때, 갔는데 상이 아무것도 없다. 그냥 겨우 구원받아서 하늘나라만 간다. 이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죠. 우리는 이것을 잘 마음속에 두어야 겠습니다. 그 다음에 우리가 어떤 방법으로 주님을 섬길것인가? 법대로 경기할 것인가? 아니면 법을 어기고 우리 마음대로 400m 트랙에서 트랙을 따라서 가야 하잖아요? 거기를 벗어나면요, 금메달을 받아도 다 뺏겨요. 법대 행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심판대에서 주님이 우리를 심판하시는 일에 대해서 우리는 심각하게 생각하고요. 우리가 어떻게 주님앞에 설 것인가 하는것을 우리는 마음속에 두어야 되겠습니다. 그동안 저희들이 그리스도의 하나님 되심에서부터 시작해서 인간되심, 성육신 하심, 무흠하심, 그리고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과 또 승천과 보좌 우편에서 현재 사역과 그리고 다시 오시는 주님을 보았습니다. 주님께서 저희들이 살펴본 이 말씀, 자세히는 우리가 생각할수 없었고요, 간추려서 저희들이 생각해 보았지만 가장 중요한것은 이와같은 주님의 인격을 저희들의 마음속에 두고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온전히 헌신하고 섬겨야 되겠다. 실천하고 실행하고 순종해야 되겠다라고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저희들에게 복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