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윗의 생애 12_압살롬의 반역 >
2018년 10월 27일 토요일
강사 : 정형모 형제님
< 다윗의 생애 12_압살롬의 반역 >
사무엘하 13장 말씀에 당도했습니다. 1-5절까지 보시겠습니다.
1 그 후에 이 일이 있으니라 다윗의 아들 압살롬에게 아름다운 누이가 있으니 이름은 다말이라 다윗의 아들 암논이 저를 연애하나
2 저는 처녀이므로 어찌할 수 없는 줄을 알고 암논이 그 누이 다말을 인하여 심화로 병이 되니라
3 암논에게 요나답이라 하는 친구가 있으니 저는 다윗의 형 시므아의 아들이요 심히 간교한 자라
4 저가 암논에게 이르되 왕자여 어찌하여 나날이 이렇게 파리하여 가느뇨 내게 고하지 아니하겠느뇨 암논이 말하되 내가 아우 압살롬의 누이 다말을 연애함이니라
5 요나답이 저에게 이르되 침상에 누워 병든체하다가 네 부친이 너를 보러 오거든 너는 말하기를 청컨대 내 누이 다말로 와서 내게 식물을 먹이되 나 보는데서 식물을 차려 그 손으로 먹여주게 하옵소서 하라
(삼하13:1-5, 개역한글)
주님께서 저희들이 오늘 살펴볼 말씀에서 은혜를 주시기를 바랍니다. 저희들은 어제까지 다윗왕의 정욕으로 인한 실패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12장 마지막에 암몬의 왕도 랍바를 함락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13장은 < 그 후에> 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이 슬픈일이 있고 나서 있는 일입니다. 군사적으로는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왕국, 다윗이 치리하는 그 나라는 대단히 위태롭습니다.
저희들은 나단이 다윗에게 찾아와서 그에게 비유를 베풀고 그를 질책하고 그의 죄에 대해서 책망한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다윗은 수많은 왕들과 달리 그 죄를 시인하고 엎드렸습니다. 왕의 입장에서 이와같은 일을 행하는것은 쉬운일이 아닙니다. 그의 마음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한 이렇게 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단은 하나님의 은혜를 말씀하면서 그 죄를 하나님께서 용서하셨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정부는 그 죄의 결과에 대해서 말씀하실 것이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그의 죄에 대해서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저희들이 13장을 계속해서 살펴보게 될 때, 그의 삶에서 나타나는 여러가지 슬픈 면모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저희들이 이와같은 상황속에서 저희들이 받는 대단히 Delicate(섬세한) 교훈들이 있습니다. 이 교훈을 저희들이 주님으로부터 받고, 경계를 받고, 어떤 지혜를 받을 수 있을지 살펴보겠습니다.
압살롬에게는 아름다운 누이가 있습니다. 저희들은 다윗에게 암논과 길르압과 압살롬과 아도니야의 순서로 아들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미갈에게는 아들이 없고 아비가일의 소생, 길르압, 다니엘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이 없습니다. 문제는 암논, 압살롬, 아도니야, 첫번째 아들들 중에 세 아들이 여러가지 문제에 연루가 됩니다.
오늘 저희들은 암논의 문제 대해서 보게 됩니다.
압살롬에게는 누이 다말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아름다웠습니다. 압살롬은 그술의 왕의 공주의 아들입니다. 압살롬은 아주 잘 생긴 사람이고 그 누이도 대단히 아름답다고 성경은 말씀 합니다.
이것과 관련해서 나타난 비극을 저희들이 보고 있습니다.
암논이 심화로, 마음에 연애하는 일로 인해서 상사병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요나답이 있습니다. 요나답은 다윗의 형제 시므이의 아들입니다. 암논과 요나답은 사촌관계입니다. 그리고 그 둘은 대단히 친한 친구였습니다.
이 친구가 그에게 어떤 조언을 합니까?
우리는 어떤 친구를 사귀나요? 내 주위에 어떤 친구가 유익 할까요, 혹은 나를 망칠까요?
이것을 생각하는 것은 나의 모든 연령때에 다 적용이 됩니다. 특별히 청년, 청소년들은 주님 안에서 대단히 깊이 생각해봐야 할 주제 입니다.
누가 참된 친구이며, 누가 친구 같지만 친구가 아닌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암논이 연애하는 감정으로 인해서 힘든상황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요나답이 그를 도와 주려고 합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그를 향해서 뭐라고 말씀합니까?
<그는 심히 간교한 자라>
4 저가 암논에게 이르되 왕자여 어찌하여 나날이 이렇게 파리하여 가느뇨 내게 고하지 아니하겠느뇨 암논이 말하되 내가 아우 압살롬의 누이 다말을 연애함이니라
5 요나답이 저에게 이르되 침상에 누워 병든체하다가 네 부친이 너를 보러 오거든 너는 말하기를 청컨대 내 누이 다말로 와서 내게 식물을 먹이되 나 보는데서 식물을 차려 그 손으로 먹여주게 하옵소서 하라
(삼하13:4-5, 개역한글)
요나답은 암논에게 카운슬을 합니다. 우리는 누구로부터 카운슬을 받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서 모사라고 말씀합니다. 그는 카운슬러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카운슬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지혜가 있습니다.
야고보는 위로부터 오는 지혜가 있고 지옥으로부터 오는 지혜가 있음을 말씀했습니다. 지옥으로부터 오는 지혜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다 라고 말씀합니다.
아버지가 오면 꾀병을 부리고 다말을 불러다가 옆에서 식물을 차려서 먹이게 하라라고 말합니다.
이 이야기는 그대로 받아들여지고 그대로 실천하고 또 다윗은 그대로 그 이야기를 듣고 다말을 보냅니다. 다윗은 이와같은 이야기를 들었을 때 다말을 보냅니다. 다윗은 왜 이와같이 무분별할까요?
다윗의 약점은 그가 밧세바를 범한 것입니다. 그 문제로 인해서 깊은 수렁에 빠져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는 이미 용서를 받았지만, 그의 분별력에 있어서 상당한 손상이 있음을 우리는 13장에서 계속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의 마음속에 있는 연약한 스팟이 있습니다. 자식들을 향한 마음입니다.
밧세바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가 죽었을때 그의 곁에 있던 신하들은 다윗에게 아이가 죽었다는 말을 하기조차도 어려워 했습니다.
사무엘하 13장 마지막에 가면 압살롬이 도주하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다윗왕의 마음이 압살롬에게 향하여 간절하니 암논은 이미 죽었으므로 왕이 위로를 받았음이더라 (삼하13:39, 개역한글)
압살롬은 형을 죽이고 그술로 도망 갔습니다. 세월이 지나 암논이 죽은것에 대해서 마음이 가라앉자 다윗은 압살롬에 대해서 끌렸습니다. 다시말해 다윗의 마음에 감상적인 것이 있었습니다.
이런것은 자식을 인도하는 일에 있어서 대단히 커다란 장애가 됩니다.
만일 다윗이 요나답이 제의한 암논의 행동에 대해서 간파할 수 있는 시야가 있었다면 두 아들을 다 구할수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다윗은 다말을 보냅니다. 다말을 가서 암논을 위해서 과자를 만들고 시중을 듭니다. 그런데 암논은 모든사람을 다 나가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를 육체적으로 범합니다.
이와같이 그가 다말을 범하게 될때, 다말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12 저가 대답하되 아니라 내 오라비여 나를 욕되게 말라 이런 일은 이스라엘에서 마땅히 행치 못할 것이니 이 괴악한 일을 행치 말라
13 내가 이 수치를 무릅쓰고 어디로 가겠느냐 너도 이스라엘에서 괴악한 자 중 하나가 되리라 청컨대 왕께 말하라 저가 나를 네게 주기를 거절치 아니하시리라 하되
(삼하13:12-13, 개역한글)
다말은 이와같은 악을 행치 말라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왕께 말씀드려서 적절한 절차를 밟자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암논은 막무가내 였습니다. 이럴때에 암논은 어떻게 성장했을까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암논은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다시한번 생각하거나 고려하는 자세를 취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 이야기를 들어서도 힘으로 그의 정욕을 채워버립니다. 그리고 그 정욕을 다 채우고 난 후에 어떻습니까?
전에 가지고 있던 연애 감정이 너무나 강렬해서 상사병에 걸릴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요나답이 볼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이 일이 있고난 난 후에는 다말을 연애하는 마음보다 더 미워했습니다.
연애감정이 증오 감정으로 변해버렸습니다. 이것은 사랑이 아니고 정욕입니다.
오늘날 세상은 수많은 종류의 정욕을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사랑이고 말하고 사랑으로 노래 합니다. 그런것이 너무나 많아서 청년들의 마음속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스며들어 갈수 있습니다.
우리는 시편 119편 말씀에서 청년이 어떻게 깨끗케 할것인가에 대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주의하고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말씀한것을 압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스텐다드가 무엇이며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고 계시는가에 대해서 소년, 소녀가 청년들이, 장년, 중년, 노년들이 표준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리고 표준을 우리가 마음속에 항상 의식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의 수많은 물결이 내 속에 들어와서 내 수준이 저 아래로 떨어질 가능성이 있게 됩니다.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 (히13:4, 개역한글)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히 여기고>
결혼을 영예로운 것으로 여기라고 말씀합니다. 영예로운 것은 그것을 하나님께서 제정 하셨기 때문입니다. 결혼을 인간이 구상한 것이 아닙니다. 결혼은 인간의 제도나 인간의 생각이 아닙니다. 결혼은 하나님께서 창조때에 지으신 것입니다.
모든 만물을 짓고 마지막으로 인간을 지으실때에 먼저 남자를 짓고 여자를 지으셨습니다. 여자가 마지막 창조의 대상이었습니다.
그것은 사실 상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하나님께서는 마음에 두시고 아담과 하와를 지으신 것입니다.
에베소서 5장 말씀에서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그것으로 비유해서 우리에게 교훈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애초부터 가지고 계셨던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이와같이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결혼은 영예로운 것입니다. 우리 자녀들은 이와같은 것에 대해서 깊이 배우고 확신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미래를 준비해야 합니다.
이것 없이, 결혼을 남녀의 만남, 정욕의 만남이라고 생각 한다면 그것은 세상적인 생각 입니다. 또한 부모님의 결혼생활이 대단히 불행했기 때문에 내 결혼에 대한 대단히 부정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나에게 커다란 손실입니다.
그것이 현실적으로 사실일런지 몰라도 하나님께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오게 될때, 우리는 그와같은 부정적인 생각과 개념으로부터 해방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해방시키십니다.
결혼에서 가장 중요한 요인이 있다면, 그것은 서약과 축복입니다.
서약은 결혼하면서 두 사람이 주님의 인도를 따라, 결혼의 틀 속에서, 확신 속에서 일생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 앞에서 믿고 신뢰하고 결의 하는 것입니다. 이 서약은 결혼에서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만일 이 서약이 없다면 그것은 결혼이 사실상 아니게 됩니다.
또 하나는 축복입니다. 결혼식장에 수많은 하객이 옵니다.
여기모인 사람들은 정말로 결혼하는 두 사람을 축복합니까? 어떻게 해야 축복을 받습니까? 주님께서 인도하셨을 때, 주님께서 모든 일 가운데 역사하신 것을 사람들이 알게될때 사람들이 축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무엘하 13장 말씀에서 암논의 태도를 보게 될때 그에게는 전혀 이러한 것이 없음을 보게 됩니다.
그는 이제 다말을 밀어내치고 다말은 슬퍼하며 처량하게 돌아갑니다. 그의 오빠가 그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오빠가 어떤 찟어지는 마음이었겠습니까? 다말과 이 비극을 경험했을 때, 이 오라비와 누이 사이에 있었던 감정은 어떤 것이었겠습니까?
압살롬을 보시기 바랍니다. 압살롬은 이 사건이 있고 난 후에 매우 고요합니다. 전혀 반응하고 있지 않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의 마음속에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는 보복하고자 하는 마음이 너무나 강했기 때문입니다. 2년 동안 전혀 내색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 그는 보복을 가장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서 그와같은 기초를 2년동안 쌓았던 것입니다. 그는 모든 감정을 가렸습니다.
그는 이와같은 보복하는 일에 있어서 대단히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주변의 모든 사람이 속았습니다. 심지어는 암논도 속았습니다. 다윗도 속았습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와같은 일이 있을때에 전혀 아무일도 없이 그냥 넘어갈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이 사건을 내 입장이라고 생각하고 생각해 보십시요. 다윗은 이와같은 일에 왜 이렇게 무관심하고 무방비한 모습을 보였을까요? 이것이 마치 이웃나라에서 일어난 일과 같이 방관적인 태도를 취했습니다.
아브넬이 요압에게 죽었을때 그는 요압을 향해서 저주 했습니다. 그러나 처벌하지 않았습니다.
요압은 고살자였습니다. 그러나 살인자에 대해서 다윗은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내 힘이 너무나 연약해서 도저히 이 사람을 감당할 수 없다."
그런데 여기 보시기 바랍니다. 암논에 대해서 다윗은 왜 아무런 조취를 취하고 있지 않을까요?
그가만일 아무런 조처를 취하지 않는다면 무슨일이 벌어질까하는 것에 대해서 다윗은 왜 조금도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요?
톱은 재목을 잘라야 합니다. 그것이 톱의 역할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 톱의 날이 다 무뎌져 버렸습니다.
그는 이미 밧세바와의 범죄와 그런 모든 것으로 인해서 그의 도덕적이고 영적인 감각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와같은 일을 할 수 없었습니다.
가정 안에서 자녀를 징계하고 모임 안에서 징계하는 일은 그리 행복한 일이 아닙니다. 아버지가 자식을 징계하게 될때, 하루종일 마음속에 힘이 듭니다.
그런 가슴을 안고도 해야 하는일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하나님께서 아이를 사랑하기 때문에 징계해야 한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또한 그의 미래와 그의 모든 복지, 바른 성장을 위해서, 바른 가치관과, 바른 판단력이 그 아이의 마음속에 있도록 하기 위해서 징계 해야 합니다. 이러한 징계와 책망은 성실하게 따라 다니면서 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이러한것을 쉽게 소홀히 할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일을 대단히 수고가 들어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상황에서 때마다 그 아이에게 관심을 가지고 쫓아다니면서 하지 않으면 할수 없는 일입니다.
가정뿐만 아니라 모임 안에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이와같은 일이 있게 될때 이러한 일은 있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경외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두려워 하고 또한 말씀을 순종하고자 하는 영적인 분위기가 깔려 있을때 모임은 많은 유익을 얻습니다.
그러나 모임이 세속적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좀더 쉽게 생각하고 하나님의 말씀의 많은 부분에서 순종하고 있지 않는 영적으로 저조한 상태라면 반드시 징계할 일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나타나게 될때 징계하기가 대단히 어렵게 되는 것입니다.
징계가 없으면 본인의 회복이 없게 되고 모임의 간증은 사라집니다.
어제 저희들이 보았습니다. 다윗이 범죄했을때 그가 뭐라고 말했습니까? '원수에게 크게 훼방할 거리를 주었다.'고 말씀합니다. 원수는 이것을 빙자해서 공격해 들어 올려고 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기의 범죄로 인해서 책망할 근거를 상실해 버렸습니다.
사실 13장의 문제는 11장의 문제과 똑같지 않습니까?
똑같은 범죄를 저지른 자신이 어떻게 그에게 가서 이와같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근거가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커다란 문제는 우리의 영적인 문제에서 이러한 근거를 잃어버린다면 우리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딜레마에 빠져 버렸습니다.
이제 2년이 지난후에 압살롬이 초청을 합니다. 부친도 초청합니다. 양털깎는 축제기간동안 다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이날 암논을 죽이려고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아무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모르고 있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슬픈일이 아닌가요? 얼마나 무감각 한가요.
영적으로 얼마나 탄력성을 다 잃고 있는가요?
우리는 이런 일들이 진행 될때에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영적으로 내다볼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못하면 대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왕을 초청했을 때, 다윗은 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때 압살롬은 대단히 지혜롭게 암논이 올 수 있도록 질문을 합니다. 결국 아버지가 가게 합니다. 왕자들이 다 왔습니다. 그리고 술을 먹고 즐거워 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볼때 암논은 술을먹고 즐거워 할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는 2년전에 다말을 그렇게 더럽혀 놓고서 세월지 지나도 그의 마음 속에는 아무런 감각이 없을까요? 그는 술을먹고 그렇게 즐거워 할수 있을까요? 자기가 범한 다말의 오빠가 바로 옆에 있는데 거기서 그렇게 즐거워 할수 있는 여유가 있을까? 하는 의문입니다.
모두가 다 무감각한 상태에 빠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영적으로 다 무감각한 상태에 빠져 있다면 우리에게는 미래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영적인 탄력성과 영적인 감각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매일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의 무감각성이 나타나지 않도록 하게 하는것은 하나님의 말씀 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새롭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깨어 나도록 하고 우리로 하여금 경각심 속에 살도록 하고 우리로 하여금 준비하도록 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합니다.
여기 디데이가 왔습니다.
압살롬이 이미 그 사환들에게 분부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암논의 마음이 술로 즐거워할 때를 자세히 보다가 내가 너희에게 암논을 치라 하거든 저를 죽이라 두려워 말라 내가 너희에게 명한 것이 아니냐 너희는 담대히 용맹을 내라 한지라 (삼하13:28, 개역한글)
그렇게 했습니다. 그리고 압살롬은 도주합니다.
그때 왕자가 모두 죽었다는 소문이 들려 왔습니다. 또다시 간사한 이 요나답이 뭐라고 말합니까?
다 죽은것이 아니고 암논만 죽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요나답은 마음속으로 다 알고 있었습니다. 자기가 다 계획 했습니다. 자기가 암논에게 카운슬 했습니다. 그는 악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이와같은 친구를 사귄다면, 그리고 그와함께 사귀고 어울린다면 반드시 이 친구는 자기의 친구를 죽음으로 내 몬다고 하는것을 기억하십시오.
요나답이 그렇게 카운슬 했기 때문에 암논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정욕의 즐거움을 요나답은 제공해 준 듯 했습니다. 그리고 그 즐거움 때문에 암논은 2년후에 죽임을 당합니다.
우리의 잘못된 친구는 우리를 죽음으로 인도합니다. 잠언은 우리에게 참된 친구를 말씀합니다. 참된 친구는 우리에게 바른 말을 해주는 사람입니다.
때때로 우리에게 듣기싫은 말을 해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권면도 해 주는 것입니다. 권면을 듣는 사람은 삽니다. 권면을 싫어하는 사람은 죽습니다. 이것을 잠언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와같은 비극 속에서 암논은 죽었고 압살롬은 자기의 어머니의 고향, 그술로 도망가 버립니다.
다윗왕의 마음이 압살롬에게 향하여 간절하니 암논은 이미 죽었으므로 왕이 위로를 받았음이더라 (삼하13:39, 개역한글)
다윗은 상당히 감상적인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감정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와같은 감정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지배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감정없는 사람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의 감정은 단순히 감상적인 것에 빠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말씀에 의해서 우리가 지배를 받게 될때, 성령의 인도를 받게 될때, 우리의 감정은 대단히 건전하고 유익한 감정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저 압살롬이 멀리 갔을때, 그에 대한 뜨거운 마음 애정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애정이 전부라면 대단히 심각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14장을 보시기 바랍니다.
요압은 다윗의 마음이 압살롬을 향하는 것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왕으로 하여금 압살롬을 다시 데리고 오도록 하는 일에 발벗고 나섭니다.
요압은 교활한 정치가 입니다. 그는 군인으로서는 대단히 탁월한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이 요압에 대해서 어떻게 할수 없었던 이유 중의 하나는 그의 군사적인 탈월성 때문입니다.
다윗도 물론 군사적으로 탁월한 사람이지만 그는 왕으로서 자기 옆에 군장으로 요압같은 사람이 꼭 필요 했습니다.
그런데 요압에게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는 군장으로서 정치에 개입 합니다.
그는 정치에 개입해서 이 나라의 후사가 누가 될것인가를 생각합니다. 다윗이 왕이 되기전에 사울왕이 있었습니다. 그 후에는 사실상 왕조가 바뀌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의 어떤 아들도 왕이 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고 다윗을 세워 왕으로 만드셨습니다.
따라서 요압이라고 하는 이 사람은 그의 마음속에 압살롬이야 말로 왕이 될 사람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왕은 압살롬을 마음속에 상당히 생각하고 있으니 압살롬을 어떻게 해서든 다시 데려오는 일에 앞장서려고 합니다. 그렇게 할때, 이 나라의 후사와 왕 사이에 끼어 들어서 줄다리기 하면서 자기의 위치를 견고히 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것 같습니다.
그래서 드고아의 한 여인을 불러왔습니다.
요압이 하는 일 중에 하나는 사람들의 입에 자기의 꾀를 넣어주는 것입니다. 그는 이 일을 아주 잘 했습니다.
드고아 여인에게 그는 이야기를 넣어 주었습니다. 그는 과부를 자처합니다.
5 왕이 저에게 이르되 무슨 일이냐 대답하되 나는 참 과부니이다 남편은 죽고
6 아들 둘이 있더니 저희가 들에서 싸우나 말려 줄 사람이 아무도 없으므로 저가 이를 쳐 죽인지라
7 온 족속이 일어나서 왕의 계집종 나를 핍박하여 말하기를 그 동생을 죽인 자를 내어놓으라 우리가 그 동생 죽인 죄를 갚아 저를 죽여 사자 될것까지 끊겠노라 하오니 그러한즉 저희가 내게 남아 있는 숯불을 꺼서 내 남편의 이름과 씨를 세상에 끼쳐두지 아니하겠나이다
(삼하14:5-7, 개역한글)
이 이야기를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저희들은 어제 다윗이 범죄하고서 무감각하게 죄를 은폐하고 살아가고 있을때, 나단이 찾아와서 비유를 베푼것을 보았습니다.
그 비유는 어떤 비유였습니까? 그것은 너무나 단순하고 분명한 비유였습니다. 그것은 다윗과 우리아, 다윗에게 수많은 처첩들이 있는가 반면, 우리아에게는 밧세바 한사람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정욕이 찾아왔을때, 이 악한 방문객이 찾아 왔을때, 이 어린 암양을 잡아다가 대접했습니다.
이 비유의 이야기를 듣게 될때, 이것은 다윗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습니까?
드고아의 여인이 슬기로운 여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지혜는 주님으로부터 온 지혜가 아닙니다. 그것은 여전히 지옥으로부터 온 지혜입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를 가지고 과부인 행세를 하고 이 이야기를 함으로써 다윗으로 하여금 자기를 도와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만일 왕이 도와 준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이야기를 다윗에게 적용해 보면 압살롬을, 사람들은 다 죽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나타나서 압살롬을 두둔하고 압살롬을 불러오고 압살롬을 세우고자 하는 방향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 이 여인은 요압이 넣어준 말들로 그 이야기를 펴는 것입니다.
왕은 거기에 넘어갑니다. 우리는 다시한번 이 슬기롭다고 하는 여인의 이야기 속에 다윗이 빠져들어 갔을때, 다윗에게 분별력이 없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개인으로서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정의 가장이나 가정안의 지체들로서, 모임의 인도자나 모임의 성도들로서 분별력이 없다고 하는것은 대단히 커다란 문제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깨닫지 못하고 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옳은 것인지, 무엇이 그른 것인지를 잘 모르고 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분별력의 부재처럼 두려운 것이 없습니다. 우리의 삶은 결정의 연속입니다.
우리의 매 순간마다 크고 작은일에 대해서 우리는 결정해야 합니다. 주님의 인도를 따라서 우리는 바른 결정을 할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될때 우리는 번영할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번영할수 있고 바른 선택으로 인해서 나 자신을 유지해 나갈수 있습니다. 그런데 분별력이 없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선택을 내가 할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와같은 것에 빠져 있었습니다. 결국 이 여인의 농단에 빠집니다.
삼천년 전에도 국정농단이 있었습니다. 요압이 이 여인을 이용해서 왕 앞에 세우고 압살롬을 끌어들입니다.
압살롬은 살인한 사람입니다. 물론 압살롬에게는 그 살인의 이유가 있습니다. 압살롬은 억울했습니다.
다말이 더럽혀진것에 대해서 그가 격분한 것을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와같은 사실에 있어서 자기 자신이 가서 암논을 죽이는 것은 합당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정부가 할 일입니다. 그것은 다윗이 해야 될 일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지 않았습니다. 이 모든 일들은 비극을 불러오고 있습니다.
다윗은 이 비극을 불러오는 일에 대해서 느낌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이 범죄 자체도 슬픈 일이지만 그 범죄로 인해서 나타나는 여러가지 일들은 피를 흘리는 일이 계속해서 반복되도록 하는 것은 어디서부터 왔습니까?
그것은 죄로 인해서 나타나는 계속해서 눈덩이처럼 불려지는 일입니다.
우리는 이와같은 일을 중간에서 멈춰야 합니다. 혹시 잘못했다면 빨리 주님앞에 나와서 자백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그래서 더이상 이 문제가 계속되도록 하지 않게 하는 것이 범죄를 했을때의 지혜입니다.
범죄를 하지 않는 것이 가장 지혜입니다.
요한일서 말씀을 보면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다고 말씀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 짓지를 않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대제사장을 주셨습니다.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대제사장은 우리가 죄 짓기 전에, 우리가 죄 짓지 않도록 우리를 도와주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만일 우리가 죄를 졌다면 우리에게는 누가 있습니까? 우리에게는 대언자가 있습니다.
대언자에게 우리는 죄를 자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교제를 아버지와 함께 회복하도록 하는일을 주님께서 하게 하십니다. 죄를 짓지 않는것이 주님의 뜻이지만 죄를 지었을때 빨리 주님앞에 나와서 자백하고 회복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문제가 생깁니다.
고린도전서에서 우리가 발견하는것은 고린도 성도들은 죄를 짓고 계속해서 죄 가운데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일이 되면 만찬상 앞에 가서 계속 만찬을 떼었습니다.
계속해서 그렇게 가니까 눈덩이처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병 들던지, 주님께서 데려가시던지 하는 일들이 생긴 것입니다.
우리는 신약에서도 그와같은 예를 볼수 있습니다.
이제 저희들이 드고아의 여인이 이와같은 이야기를 하는것을 보게 됩니다. 이 여인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압살롬을 데려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요압이 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율법과 정 반대되는 것입니다. 여기 이 이야기 속에 있는 대단히 교묘한 것은 이것입니다. 이 여인이 이야기 하기를 "내 남편의 이름과 씨가 마르지 않도록"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남아 있는 숯불이 꺼지지 않도록" 이라고 합니다.
율법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형제들이 있고 형에게 아내가 있었는데 자식이 없이 그 형이 죽으면 동생은 수혼을 합니다. 그래서 그 집의 씨가 끊기지 않고 자식들이 끊기지 않도록 동생이 형수에게 들어가는 제도가 있습니다.
그것은 율법입니다. 마치 그것이 율법이기 때문에 수혼과 같은 이야기를 이용하면서, 율법과 정 반대가 되는 일을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을 죽인 살인자를 불러다가 높이라고 하는것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교묘한 이야기 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하나님의 뜻과는 정 반대로 이끌어가는 사람들이 있는것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다 지옥에서 오는 것이요, 마귀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바로 분별하지 못할때에 우리는 그것도 하나님의 말씀같고, 저것도 하나님의 말씀 같습니다.
그리고 그런 상태에 들어갈때 우리는 분별력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이제 다윗의 경우는 나라를 그르치는 것입니다.
압살롬의 반역으로 인해 온 나라가 내란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다윗은 환영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마음으로 기쁘게 환영했다고 볼수는 없지만 그는 그가 한 일로 인해서, 무감각한 일로 인해서 그는 무언 속에서 환영한 것입니다.
이와같은 일을 통해서 요압이 여인에게 할 말을 다 넣어 줬다는 것을 여인이 고백합니다.
그리고 왕은 압살롬을 데려 오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그 다음 이야기에 들어가기 전에 25-27절을 보시겠습니다. 여기에서 압살롬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나옵니다.
25 온 이스라엘 가운데 압살롬 같이 아름다움으로 크게 칭찬 받는 자가 없었으니 저는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흠이 없음이라
26 그 머리털이 무거우므로 년말마다 깎았으며 그 머리털을 깎을 때에 달아 본즉 왕의 저울로 이백 세겔이었더라
27 압살롬이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낳았는데 딸의 이름은 다말이라 얼굴이 아름다운 여자더라
(삼하14:25-27, 개역한글)
압살롬은 아름다움으로 크게 칭찬받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이 당시의 영적인 상태를 우리에게 잘 말해 줍니다. 압살롬은 그 속에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아름다웠습니다. 그는 바닥에서부터 정수리까지 아름다웠습니다.
이사야 1장을 보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면서 가는 그들의 죄악된 모양을 말하게 될때, 그들이 맞아서 온 몸이 상처투성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표현할때에 '발바닥부터 정수리'라고 합니다.
여기서도 압살롬의 아름다움을 이야기 할때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의 아름다움을 아가서에서 이야기 할때, 그분을 전체로 아름답다고 이야기 할때, 발바닥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머리부터 아름다운것들이 내려 갑니다.
여기 사람의 아름다움은 외모의 아름다움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에 사람들은 매료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오늘날과 같습니다.
오늘날은 외모가 아름다우면 모든것이 다 오케이 됩니다. 모든것이 다 통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와같은것이 사람들에게 어필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이 그 사람을 추종하는데 나타나는 대단히 커다란 민족적인 비극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정직하지 않고 오만하며 음탕 합니다. 이 사람은 부도덕 합니다. 반역적이며 이 사람속에 아무것도 아름다운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의 외모를 보고 민족은 매료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커다란 비극입니다.
오늘날 세상은 이런 형태로 끌려가고 있습니다.
특별히 그의 머리털에 대해서 이야기 합니다. 그의 머리털은 왕의 저울로 이백세겔이었습니다.
어마어마한 머리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죽음은 무엇으로 이루어지게 됩니까? 그는 도망가다 상수리 나무에 머리털이 걸려 죽었습니다.
결국 요압은 그술에 가서 압살롬을 다시 예루살렘으로 데려옵니다. 압살롬은 반역도 일으키고 아버지를 대적하고 내란을 일으키는 일을 감행 합니다. 그러나 그의 결과는 그의 위대하다고 하는 머리털 때문에 죽음을 맞이할 것을 성경은 예고합니다.
하나님은 내다보고 계시는 분입니다. 영원을 보시는 분입니다. 여기 우리는 소돔성에 롯이 들어가게 될때, 창세기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소돔 사람은 악한 사람이고 아직 하나님께서 소돔을 멸하시기 전이었던고로 여호와의 동산과 같이 아름다웠더라.'
롯의 결정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를 예고하고 있지 않습니까?
요압은 그술에 가서 압살롬을 데려 옵니다.
그런데 왕은 압살롬을 보지 않습니다. 그래서 압살롬은 예루살렘에 왔지만 사실 상 가택연금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그는 대단한 불만에 가득 찼습니다.
압살롬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가 죽지않고 예루살렘에 와서 사는 것만으로도 대단히 커다란 은혜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는 오만하고 교만합니다. 그는 거만 합니다. 자기가 누군지를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보내서 요압을 부릅니다. 요압이 오지않자, 요압의 밭에 불을 지릅니다. 결국 요압이 오게하고 왕에게 내가 왕을 알현할 수 있도록 하라고 합니다.
그는 안하무인인 사람입니다. 그는 그렇게 자란 사람입니다. 그의 성품은 그렇게 변해 버렸습니다.
이런 사람이 왕이 된다고 하는 것처럼 비극이 없습니다. 우리는 다윗을 생각하게 될때, 하나님께서는 그가 왕이 되기 전까지 그를 훈련시키셨습니다.
들에서 동굴에서 수많은 눈물 가운데 긴 세월 동안 하나님께서는 훈련 시키셨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아들들은 훈련이 없습니다.
그는 감사할 줄 모릅니다. 무엇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 권력을 가지고 휘두르는 것처럼 위험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 안에서 구원받고 성장하게 될때, 주님의 도와 성품과 모든 것들을 훈련받고 있습니까?
내일을 위해서 미래를 위해서 하나님의 위대한 영광을 위해서 우리는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의 열매 가운데 절제와 인내를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권력을 휘두르게 되면 그 밑에서 백성들은 고통 당하게 됩니다. 그 백성들의 신음이라고 하는것은 말로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폭군들을 길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와같은 일이 있지 않도록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훈련 시키시를 원하십니다.
그것은 가정에서 징계를 통해서, 훈련을 통해서 우리가 다듬어지는 것입니다. 모임 안에서 구원받고 교제에 들어오게 될때, 각 모임에서는 이와같은 훈련을 통해서 우리 성품이 정제되고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으로 변화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 압살롬은 그런 상태로 결국 왕에게 나아갑니다. 그리고 왕과 입맞춥니다.
입맞춘다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왕이 받아들이겠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받아들임은 불의한 영접이었습니다.
모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불의한 영접이 있다면 모임은 심각한 문제를 나중에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영접에 합당한 태도, 영접에서의 바른 자세를 갖는것은 모임에서 대단히 중요한 이슈입니다.
15장으로 들어오겠습니다.
이제 압살롬이 일을 시작합니다. 압살롬은 이미 일을 저질렀습니다. 자기 형 암논도 죽였고 여러가지 어려움 속에서 그는 사형에 합당한 사람이었지만 왕과 입맞췄습니다.
그 다음은 무엇입니까? 그는 왕을 밀어내고 자기가 왕이 되려고 합니다.
15장에 들어와서 그가 행하는 일은 자기를 위해여 병거와 말을 준비하고 전배 오십명을 세운 것입니다.
전배 오십명이라고 하는것은 왕이 나갈때에 그 앞에 오십명의 군대가 나가는 것입니다. 그 군병은 왕의 것입니다.
이 사람, 압살롬은 이런것을 좋아했습니다. 외모를 좋아했습니다.
그 사람의 내실은 없는데, 외모는 대단히 좋아했습니다. 왕의 모양만을 갖춥니다. 그런데 왕의로서의 실제적인 자질과 자격은 그와는 너무나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왕의 아들로서 또한 요압이 지지해주는 사람으로서 왕이 되기를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성문에 앉습니다.
압살롬이 저에게 이르기를 네 일이 옳고 바르다마는 네 송사 들을 사람을 왕께서 세우지 아니하셨다 하고 (삼하15:3, 개역한글)
성문앞에 많은 문제들을 가져오고 재판합니다. 그곳에 장로들이 있었고 그곳은 재판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송사를 들어줄 사람이 없는데 내가 들어주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의 마음에 많은 만족을 아첨을 통해서 줍니다.
무릇 이스라엘 무리 중에 왕께 재판을 청하러 오는 자들에게 압살롬의 행함이 이 같아서 이스라엘 사람의 마음을 도적하니라 (삼하15:6, 개역한글)
그래서 6절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 사람의 마음을 도적질 했다고 합니다.
사람의 도적질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20장을 보면 에베소 장로들을 불러서 사도바울이 전하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떠나면 밖에서 흉악한 이리가 들어오고 안에서는 자기를 쫓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나타날 것이다." 라고 예언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도적질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사역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도적질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해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역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의 사역은 무엇입니까?
이 사람은 사람들의 마음을 도적질해서 자기를 쫓게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얻기 위해 아첨이나 뇌물을 쓰는 것입니다.
잠언 말씀을 보면 뇌물은 우리의 판단을 흐리게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뇌물이 물건이라면 아첨은 말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사람의 가치를, 판단력을 흐리게 하는 것입니다.
압살롬은 그런 방식을 취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4년만에 아버지께 나가서 말합니다.
내가 그술에 있을때 하나님 앞에 서약한 것이 있으니 헤브론으로 가겠다고 말합니다. 그의 마음 속에는 헤브론으로 가서 왕이 되려고 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겉으로 표방하게 될때 독실한 말을 합니다.
여호와, 여호와의 대의를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서원을 했기 때문에 헤브론으로 가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서원을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일을 하는 사람들의 행동은 이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도적질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왕은 전혀 느낌이 없습니다. 평안히 가라고 축복하고 압살롬은 헤브론에 가서 자기가 왕이라고 선포합니다.
그 때에 압살롬에게 청함을 받은 이백명이 그 사기를 알지 못하고 아무 뜻 없이 예루살렘에서 저와 함께 갔으며 (삼하15:11, 개역한글)
이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압살롬은 멋진 사람이라고 하는 매료됨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초청 받았을때 영광이라고 생각하고 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뭐라고 말씀합니까? 그런 사람들의 발걸음을 <사기를 알지 못하고> 라고 합니다. 곧 분별하지 못하고 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행동이 주님의 말씀을 토대로 해서 분별력 가운데 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사기를 알지 못하고 유행따라서, 사람들을 따라서, 느낌 따라서, 감정 따라서 가고 있습니까?
오늘날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 십니다. 말씀으로 우리를 부르시고 말씀으로 우리를 기르시고 하나님의 뜻 가운데 우리가 성장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섬기도록 우리를 부르십니다.
여기 이 사람들은 사기를 알지 못하고 따라갔습니다. 이제 사람들이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대세가 압살롬에게 기울었습니다. 그리고 왕은 도주 합니다. 왜 왕은 도주했을까요?
13절 이후에 왕의 도주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왜 왕은 도주했을까요?
왕은 전쟁의 배태랑 입니다. 압살롬을 따라 간 수많은 사람과 군대와 군장도 있습니다. 모든것이 다 있지만 만일 다윗이 작심하고 압살롬과 대항 한다면 압살롬을 여지없이 격파시킬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때 무슨생각을 하고 있었나요? 그는 도주할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아들과 전쟁한다고 하는것은 아버지의 마음으로서 힘든 것입니다. 물론 아들은 아버지를 공격할 수 있습니다. 패륜아 입니다. 얼마나 많은 아들이 그렇게 할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아들이 그렇게 할수 있더라도 아버지는 아마 못할 것입니다.
수많은 사건들 속에서 패륜아의 아버지가 경찰서에 가서 자신의 몸이 만신창이라도 아들에게 죄가 없다고 하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그것이 아버지의 심정이 아닙니까?
압살롬에 대해서 아버지 다윗은 그렇게 이야기 했고 그는 차라리 도주하는 형식을 취합니다.
그리고 그의 마음 속에는 이러한 것이 있습니다. 압살롬이 자기를 향해서 공격을 하고 반역을 하게 될때, 그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한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다윗은 분별력도 없고 무능하고 방치하고 아무일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국정을 완전히 침몰해가고 있는것을 보게 될때,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그는 무능합니다. 그는 아무 일도 할수 없습니다. 그는 근거도 없고 영력도 없습니다. 그는 뭐라고 이야기 할 아무런 근거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런 태도를 취합니다.
"하나님의 손에 맡길테니 하나님께서 처분대로 하여 주십시요."
그는 그 이후에 하나님의 매를 든 손이 너무나 무섭고 두려울 때에 그가 취했던 일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다만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나를 대우해 달라고 하는 자세를 보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치시면 나는 맞을 수 밖에 없습니다. 라는 태도입니다.
우리는 바로 여기에서 다윗의 아름다움을 보게 됩니다. 이상하지요? 그는 범죄한 사람입니다.
집회 시작 전에 다윗이 11장에 그러한 사건이 있은후에 싹- 망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물론 싹 망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싹 망한것 속에서 하나님께서 또 어떻게 역사하고 계신가는 우리가 살펴 볼 주제 입니다.
나중에는 시므이가 와서 다윗을 마구 저주 합니다. 옆에서 아비새는 칼을 가지고와서 저 사람을 단칼에 베어버리겠다고 이야기 할때, 다윗은 뭐라고 이야기 합니까?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서 그 사람이 하는 것이니 내가 그 모든 것들을 받아야 함이 마땅하다고 이야기 합니다.
이러한 것은 다윗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위대한 은혜를 받는 사람이 보여줄 수 있는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물론 그가 범죄한 일에 대해서 정당화 하거나 또는 그가 범죄한 일에 대해서 아름답다거나라고 절대로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처해 있는 이런 상황 속에서 그가 보여줄수 있는 또 하나의 아름다움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나가게 될때, 거기에는 언제나 길이 있습니다. 어떠한 상황에 빠져있다 할찌라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간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우시는 길이 있습니다. 바로 이 사실 때문에 우리가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만사에서 완전하지 않고 온전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루시는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앞에 나가서 엎드리게 될때, 우리는 거기서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또다른 놀라운 일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다윗은 도주 합니다. 도주할때에 후궁 열명을 궁을 지키도록 남겨 둡니다.
왜 이렇게 했는지는 불분명 하지만, 아마도 떠나게 될때 궁의 질서를 책임지고 남아서 운영할 사람이 필요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일로 인해서 이 후궁들은 어떻게 됩니까?
후궁 열명을 압살롬이 범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의 집에 칼이 떠나지 않고 너의 침상은 더렵혀 질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이 엄위하고 두려운 것인지 보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가게 될때 경외심을 갖는것은 너무나 합당하고 마땅하며 지혜로운 것입니다.
아직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얕잡아 보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어떤것은 쉽게 생각합니까?
어떤 것에 대해서는 무시해 버립니까? 여러분이 주님을 따라가게 될때, 아직도 그런 부분이 남아있습니까?
주님앞에서 그것을 바꿔야 합니다. 바꾸지 않으면 우리는 주님앞에 지불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개입 하십니다. 주님이 나의 삶 속에 반드시 찾아 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이 주시는 위대한 지혜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는 듣고 순종해야 합니다. 그것 이외에는 다른길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가장 행복한 길입니다. 가장 유익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우리 자신이 이 땅에서 번영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제 그는 떠나게 됩니다. 떠날때에 그는 가드사람 잇대를 만나게 됩니다.
잇대를 향해서 다윗은 "네가 섬길 왕이 있다." 라고 합니다. 곧, 압살롬을 섬기고 예루살렘에 남으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때 잇대가 한 말이 있습니다.
잇대가 왕께 대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사심과 우리 주 왕의 사심으로 맹세하옵나니 진실로 내 주 왕께서 어느 곳에 계시든지 무론 사생하고 종도 그곳에 있겠나이다 (삼하15:21, 개역한글)
아름다운 말씀입니다. "주께서 어디를 가든지, 배척을 당하든, 고난을 당하든 나는 끝까지 가겠습니다."
룻이 시모에게 이야기 한 말과 같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나는 어머니를 따라서 그곳에 가고 어머니와 함께 죽겠습니다." 라고 합니다.
어머니 때문이 아니라 '어머니가 믿는 하나님 때문에 가겠습니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고생을 해도, 비난을 받아도, 왕이 고통 가운데 있다 해도 나는 왕이 계신 그곳에 있겠습니다. 라고 잇대는 말합니다. 거절 당하는 왕의 모습을 다윗은 우리에게 잘 말해 줍니다.
사울에게 쫓기던 때의 다윗은 거절당한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때는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범죄와 실수로 인해서 그는 거절 당하는 때가 되었습니다.
바로 그때에 누가 그의 곁에 있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 후에 여러 인물들이 나옵니다. 어떤 사람들은 다윗과 함께 했고 어떤 사람들은 다윗을 떠났고 어떤 사람들은 반역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믿음은 이와같은 위기의 순간에 뚜렸하게 드러 납니다. 우리가 정말로 주님을 섬기는지 아니면 적당히 따라가는지, 아니면 기회주의자인지 분명히 나타나는 때가 있습니다.
잇대는 시험대에 올랐습니다. 왕은 가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왕께서 가는곳 어디에든지 내가 있겠습니다." 라고 합니다.
이것이 주님을 향한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할것입니다.
사독과 그와 함께한 모든 레위 사람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메어다가 내려놓고 아비아달도 올라와서 모든 백성이 성에서 나오기를 기다리더니 (삼하15:24, 개역한글)
사독이 언약궤를 모셔 왔습니다. 왕이 떠난다고 하니 제사장이 언약궤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때 왕이 뭐라고 말씀합니까? 여러분들은 기억하시 바랍니다.
사무엘상을 열어보면 제일 첫번째, 블레셋과의 전쟁이 있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타락했습니다.
한나가 오죽하면 남아를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블레셋과 전쟁할 때 이스라엘은 패전 했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장로가 뭐라고 결정 합니까?
"오늘은 패전 했지만 언약궤를 가지고 나가면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할테니 이긴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언약궤를 끌고나가 전쟁했습니다. 그러나 더 크게 패전하고 결국 언약궤를 빼앗깁니다.
이스라엘 장로들의, 리더들의 영적인 불찰이었습니다. 그들은 언약궤를 신화와 같이 생각했습니다.
광야에서 언약궤가 나갈때에 이스라엘을 보호해 주었습니다. 모세와 여호수아 시대의 언약궤의 행보를 우리는 잘 기억합니다.
그때 모세와 여호수아의 인도하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었던 하나님 앞에서의 순종이 있었습니다. 사무엘상의 때는 달랐습니다. 언약궤가 있으면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생각을 다윗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사실상 도주 하게 될때, 이 언약궤과 같이 도주하는 것 조차도 자기가 가당치 않다고 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다윗은 주님 앞에서의 처신과 자기의 입장에 대해서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는 허황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궤를 이끌고 나감으로 인해서 백성들 앞에서 왕권을 보여주거나,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고 하는 상징적인 모습을 드러내고자 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기 죄를 깨닫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궤가 나와함께 간다고 하는것은 나에게 합당치 않다고 하는 자세를 가졌습니다.
회개하는 자세는 이러한 것입니다. 회개하는 사람은 "내가 무슨 죄를 지었는데? 지은죄가 있으면 나한테 말해보라." 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회개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회개하는 사람의 가장 첫번째 모습은 자기 죄가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입니다. 그것을 알지 않고서는 절대로 회개할 수 없습니다.
모임의 징계가 내려질때 회복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회복될때 가장 첫번째 단계는 범죄한 성도가 자기 죄를 알고 자기가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이는 회복이 있을ㅍ수 없습니다.
그 외에 다른 이야기는 회복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회개를 표방하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것에는 회개가 있을ㅍ수 없고 회복도 있을수 없습니다. 이제 다윗은 궤를 보냅니다.
그리고 사독과 아비아달 두 제사장이 있습니다.
두 아이가 있습니다. 아히마하스와 요나단이 있었습니다. 두 제사장의 아들들은 나중에 예루살렘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 전갈해 주는 메신저로 사용됩니다.
그래서 사독과 언약궤는 돌아갔습니다.
다윗이 감람산 길로 올라갈 때에 머리를 가리우고 맨발로 울며 행하고 저와 함께 가는 백성들도 각각 그 머리를 가리우고 울며 올라가니라 (삼하15:30, 개역한글)
슬픈 순간입니다. 범죄하게 되면 이와같이 슬픈 나날들이 있습니다.
감람산에 올라가게 될때, 이러한 일이 있었습니다.
혹이 다윗에게 고하되 압살롬과 함께 모반한 자들 가운데 아히도벨이 있나이다 하니 다윗이 가로되 여호와여 원컨대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하옵소서 하니라 (삼하15:31, 개역한글)
다윗이 이 소식을 들었을때, 아픈 상처에 칼이 꽃히는 고통스러운 순간이었을것이라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범한 밧세바의 할아버지가 아히도벨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기에게 유능한 카운슬러로 일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그와 같은것을 범해버렸습니다. 그리고 아히도벨은 압살롬에게 들어가 모사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위험한 것입니다. 그의 모사가 성공하면 다윗은 죽는 것입니다.
그는 이제 어떻게 합니까? 그는 변명할 것이 없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뭐라고 설명할 수가 없는 순간입니다.
여호와 앞에서 무슨 염치가 있어서 말하겠습니까?
그래서 그가 기도하는 내용은 이것입니다.
<여호와여 원컨대 아히도벨의 모략은 어리석게 하옵소서>
하나님께서는 이 기도를 들으십니다. 아히도벨의 모략이 압살롬에 의해서 받아들여 졌다면 아마 다윗은 몰살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는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 다음 말씀이 아름답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마루턱에 이를 때에 아렉 사람 후새가 옷을 찢고 흙을 머리에 무릅쓰고 다윗을 맞으러 온지라 (삼하15:32, 개역한글)
대단히 놀라운 순간입니다. '마루턱' 언덕 꼭대기에 올라갔을때 그곳이 경배하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다윗은 영적으로 대단히 즐거운 상태에서 성전에 올라가서 찬양을 드리는것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가장 수치스럽고 가장 위태로운 순간에, 백성들 앞에서 얼굴이 없고 하나님 앞에서 할 말이 없는 상태에서 마루턱에 올라갈때 예배를 드렸습니다.
예루살렘이 있고 언약궤가 있고 휘장이 있는 그곳을 향해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만일 그가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는 예배드릴 자격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이런때도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까? 이런 순간에도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까?
때때로 우리는 일주일 동안 어떤 사건 때문에 주일날 아침 모임에 오기를 거부하는 때가 있습니다.
이런 상태로 내가 무슨 예배를 드리러 가겠는가 하는 자세로 참석을 하지 않거나, 참석해도 떡을 떼지 않거나 하는 불상사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주님앞에 자백 하세요. 그리고 주님앞에 나오세요. 그리고 떡을 떼세요.
떡을 뗄때 나같은 사람을 위해서 주님께서 피흘려 돌아가셨다고 하는 것은 더욱 더 새로운 것입니다.
다윗은 마루턱 위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것은 예배드린 마루턱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에 후새가 왔습니다. 그는 아히도벨로 인해서 마음애 매우 무거운 상태였습니다. 이 후새는 다윗을 살려 줄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와같은 때에 그를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심정에 통회하는 사람,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사람을 받으십니다. 그것을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잘 나가게 될때, 우리가 하나님 앞에 무언가를 이야기 할 수 있을때, 이럴때에 하나님께 찬양하고 예배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잘 나가기에 예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하는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무릎을 꿇습니다. 나같은 사람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내가 깨닫지 못한다면 그는 예배드릴 자격이 없습니다.
예배드릴 자격이 없는 사람은 나의 공로를 느끼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사람만이 예배드릴 수 있습니다.
사실 상 성전 건축에서 준비하는것 중에 무엇이 있습니까?
"죄를 짓고 회개하는것이 무슨 성전 건축의 준비인가?"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나중에 인구조사로 범죄 했습니다. 그때에 심판 받고 백성들이 죽어나갑니다. 그리고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나를 치시고 양들을 치시지 말아달라고 기도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이제 되었고 거두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 땅을 삽니다.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을 삽니다. 그리고 거기가 성전지대가 됩니다. 성전건축의 바로 그 장소가 됩니다.
그런데 그 장소를 살때의 심정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 와서 회개하는 장소입니다.
성전은 우리 마음이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장소 입니다.
"나는 백향목 궁에 거하는데 주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 있으니 내가 조금 도와드리겠습니다. 내가 조금 적선해 드리겠습니다." 라는 장소로는 성전을 건축할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전 건축에는 제물도 있어야 하고 평화적인 시기도 필요하고 여러가지 준비할 보화도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건축 기술도 있어야 합니다. 이와같이 여러가지 테크닉컬한 것들이 필요하지만 중요한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그 앞에 구하는 사람들이 나올때에 성전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모임이 바로 그러한 곳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구원하셨습니다.
아렉사람 후새가 옷을 찟고 적시에 나왔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구할때에 아무리 우리가 저주를 받는다 해도 하나님 앞에 예배할때, 하나님께서 들으십니다.
다윗에게는 구원이 필요한 때였습니다. 어떤 모사가 압살롬에게 들어가냐는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때에 후새가 나왔습니다.
아히도벨은 자기를 반역했지만 후새가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후새에게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거기서 네 할일을 하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는 돌아갔습니다.
16장으로 들어오겠습니다.
마루턱을 조금 넘게 될때, 제일 첫번째로 나오는 사람이 시바인것을 보게 됩니다. 시바는 므비보셋의 집사인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원래 사울을 섬기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므비보셋이 다윗앞에 불려 왔을때, 다윗은 므비보셋에게 은혜를 베풀고 상에서 같이 먹고 그에게 모든 재산을 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시바에게 이 므비보셋을 섬기라고 명했습니다.
그래서 시바는 므비보셋의 집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왕이 필요로하는 많은것을 가지고 나옵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므비보셋이 가져온 것입니다.
그런데 므비보셋을 그는 따돌렸습니다. 므비보셋은 절뚝발이가 아닙니까? 따돌리면 그는 올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것을 가지고 와서 그는 므비보셋을 헐뜯습니다. 그의 중상모략하는 이야기가 여기 있습니다.
왕이 가로되 네 주인의 아들이 어디 있느뇨 시바가 왕께 고하되 예루살렘에 있는데 저가 말하기를 이스라엘 족속이 오늘 내 아비의 나라를 내게 돌리리라 하나이다 (삼하16:3, 개역한글)
이것은 거짓말입니다. 나중에 다윗이 환궁하는 때가 오는데 다윗은 므비보셋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는 그것을 다음시간에 살펴보겠습니다. 여기 첫째, 다윗에게는 미소가 있습니다. 시바가 미소를 짓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독이 있습니다. 그의 말은 사실이 아닙니다.
다윗왕이 바후림에 이르매 거기서 사울의 집 족속 하나가 나오니 게라의 아들이요 이름은 시므이라 저가 나오면서 연하여 저주하고 (삼하16:5, 개역한글)
시므이는 사울의 대의에 대해서 굳게 마음속에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에 대해서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드디어 때가 왔습니다. 이제 다윗이 몰락할때가 왔다고 여겼기에 그는 너무나 기뻤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도주하는 길에 나와서 그를 저주 합니다.
7 시므이가 저주하는 가운데 이와 같이 말하니라 피를 흘린 자여 비루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8 사울의 족속의 모든 피를 여호와께서 네게로 돌리셨도다 그 대신에 네가 왕이 되었으나 여호와께서 나라를 네 아들 압살롬의 손에 붙이셨도다 보라 너는 피를 흘린 자인고로 화를 자취하였느니라
(삼하16:7-8, 개역한글)
그는 다윗을 향해서 저주 했습니다. <피를 흘린자여> 이 말 자체는 맞습니다. 다윗은 전쟁에서 많은 피를 흘린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사울의 가문을 향해서 피를 흘리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사무엘하 1장에서부터 쭉 보아 왔습니다. 사울이 죽었을 때, 아말렉 소년이 자기가 사울을 죽였다고 주장하며 왔을때 어떻게 다윗은 행했습니까?
너무나 기뻐서 너야말로 나의 친구라고 이야기 했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사울을 죽일 기회가 있었지만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브넬이 죽었을때도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스보셋을 죽인 두 장군을 처형했습니다.
이 모든일에 있어서 그는 사울의 집에 칼을 들고 피를 흘린 사람이 아닙니다.
그가 왜 이런 비참한 상태에 빠져 있습니까? 시므이가 저주할만한 상태가 되었다고 여길 정도로 그는 왜 저주를 받았습니까? 왜냐하면 그는 범죄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우리아의 피를 흘렸습니다.
다시말해 시므이의 저주는 맞는 저주가 아닙니다. 잠언 말씀에 이러한 말씀이 있습니다.
<까닭없는 저주는 맴도는 참새나 날아가는 제비와 같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여기 그의 저주는 합당하지 않습니다. 물론 다윗은 피를 흘리고 범죄했습니다. 그래서 도주할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저주는 합당하지 않은 저주였습니다.
다시말해 이것은 세상의 찌푸린 얼굴입니다. 세상의 찌푸린 얼굴이 있습니다. 그리고 시바는 세상의 미소입니다. 이 두가지가 다 다윗에게 찾아왔습니다. 다 시험거리 입니다.
우리에게는 때때로 세상의 미소가 찾아올 수 있습니다. 때때로 세상이 나를 향해서 찡그리는 때가 있습니다.
그때 이 모든것은 우리를 다 테스트하는 것입니다. 그럴때에 우리는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요?
시바가 중상 했을때, 다윗이 어떻게 반응 했습니까? 므비보셋의 재산은 다 네것이라고 했습니다. 오판했습니다.
이 미소에 말려들어가 버린것입니다. 뇌물에 말려들어가든지, 아첨에 분별력을 잃어버린든지 하는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두번째 시므이가 있습니다. 그는 저주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오히려 저주를 받았을때, 찡그린 얼굴을 만났을때 더욱 더 밝아집니다. 아비새가 가서 시므이를 죽이기를 구합니다. 그때 다윗의 말은 무엇입니까?
왕이 가로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저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저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하고 (삼하16:10, 개역한글)
다윗은 시므이의 저주를 시므이가 하는 것으로 받지 않고, 여호와께서 나에게 저주하는 것이라고 받았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할수 있습니까? 우리는 삼라만상 속에서 어떤 사건의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손길을 우리가 볼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까? 우리에게 그러한 눈이 있습니까?
다윗은 저주 배후에 있는 하나님께서 뭔가 하고 계시다는 관점으로 그 일을 보았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눈이 필요합니다.
11 또 아비새와 모든 신복에게 이르되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저에게 명하신 것이니 저로 저주하게 버려두라
12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날 그 저주 까닭에 선으로 내게 갚아주시리라 하고
(삼하16:11-12, 개역한글)
그가 저주하는 것들을 주님께서 다 판단하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주님께서 판단하시기에 합당하지 않은것이 있다면 주님께서 나에게 갚아 주실것이라는 소망도 있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시므이의 저주가 옳지 않음을 다윗은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고 이야기 할수 있는 겸손하고 회개하는 자세가 그의 마음속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의지합니다.
회개하는 사람은 모두가 다 하나님의 은혜에, 처분에 맏깁니다. 그것은 믿음의 자세 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처분에 의지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선대 하십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그런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통해서 이 땅을 구원하셨습니다. 모든 방법과 그분의 모든 의도는 그것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확신 합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을때도 은혜로 얻었지만 구원을 얻고 난 후에 하루하루 살아가는 동안, 주님 나라에 갈때까지 계속해서 은혜에서 은혜로 가는 것입니다.
이제 다윗이 갈때에 시므이는 따라오면서 돌을 던지면서 저주했습니다.
이것을 얼마나 참을 수 있나요? 다윗은 왕입니다. 명령만 내리면 아비새가 가서 시므이를 죽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 모든것을 감수했습니다. 이것은 커다란 은혜입니다. 다윗이 보여준 위대한 덕입니다.
범죄했을 때, 수치스러울 때도 나타내 보일 수 있는 덕입니다.
이제 15절 이하에서는 장면이 바뀝니다. 예루살렘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15 압살롬과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이르고 아히도벨도 저와 함께 이른지라
16 다윗의 친구 아렉 사람 후새가 압살롬에게 나아올 때에 저에게 말하기를 왕이여 만세, 왕이여 만세 하니
17 압살롬이 후새에게 이르되 이것이 네가 친구를 후대하는 것이냐 네가 어찌하여 네 친구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느냐
(삼하16:15-17, 개역한글)
압살롬이 나오고 후새가 나옵니다. 이때 압살롬은 후새에 대해서 약간 의심 합니다.
그리고 후새는 이야기 합니다.
18 후새가 압살롬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내가 여호와와 이 백성 모든 이스라엘의 택한 자에게 속하여 그와 함께 거할 것이니이다
19 또 내가 이제 누구를 섬기리이까 그 아들이 아니니이까 내가 전에 왕의 아버지를 섬긴 것 같이 왕을 섬기리이다 하니라
(삼하16:18-19, 개역한글)
그는 예루살렘에 남습니다. 그리고 아히도벨의 모략을 그는 듣습니다.
아히도벨의 모략은 무엇입니까?
아히도벨이 압살롬에게 이르되 왕의 아버지가 머물러 두어 궁을 지키게한 후궁들로 더불어 동침하소서 그리하면 왕께서 왕의 부친의 미워하는바 됨을 온 이스라엘이 들으리니 왕과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의 힘이 더욱 강하여지리이다 (삼하16:21, 개역한글)
이 사람의 모략은 대단히 개인적 입니다. 그리고 세상적으로, 정치적으로 말하면 지혜로운 것입니다.
그런데 그 근원은 마귀적입니다. 그는 후궁을 취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어디서 동침 합니까? 지붕에서 동침 합니다.
이 지붕은 11장 말씀에서 다윗이 잠자고 일어난 후에 거닐던 그 지붕입니다.
바로 그 장소에서 후궁을 취하라고 압살롬에게 이와같이 격려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와같이 우리가 심은것을 그대로 거두게 하십니다. 우리가 육으로 심으면 육으로 거두고 영으로 심었으면 영으로 거두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둡니다. 그리고 그것이 적용이 됩니다. 다윗이 심은대로 그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아히도벨이 궁녀를 취하라고 조언했을 때, 압살롬은 그것을 기꺼이 받아 들입니다.
왜냐하면 이와같은 과정을 통해서 돌이킬 수 없는대로 들어가 버리는 것이기 때문 입니다.
아버지와 또한, 아버지와 함께하는 사람들과 더 이상 회복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미움을 굳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쟁으로 돌입하고 아버지를 죽이는 일로 들어가도록 아히도벨은 조언했습니다. 모사를 폈습니다.
아히도벨은 자기의 손녀 밧세바가 어떻게 더럽혀지고, 그의 남편인 우리아가 어떻게 죽었는지를 생각할때, 이렇게 얘기해도 모자르다고 그는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보복적인 모략을 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 하나님께서 나단을 통해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참으로 기이합니다. 인간의 선과 악 이 어우러지는 모든것을 하나님께서는 다 사용하셔서 그 뜻을 이루십니다.
이제 아히도벨의 베푸는 모략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 때에 아히도벨의 베푸는 모략은 하나님께 물어 받은 말씀과 일반이라 저의 모든 모략은 다윗에게나 압살롬에게나 이와 같더라 (삼하16:23, 개역한글)
이 말씀은 그의 모략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의 모략은 하도 유명해서 사람들이 언제나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그럴 정도로 그의 모략이 유명했습니다. 그리고 그와같은 사람의 모략이 그대로 여러사람에게 받아들여진다면 그것은 얼마나 해를 끼칠까요?
우리는 어떤 모략을 주님으로부터 받아야 합니까?
우리는 나 개인의, 주님을 섬기는 영적인 삶을 위해서, 가정의 영적인 번영을 위해서, 모임이 주님앞에 순종하고 위대한 간증을 드러내고, 주님앞에서 번영하기 위해서 어떠한 분별력과 어떠한 지혜를 주님으로부터 받아서 실천해야 할까요?
아히도벨은 유능한 사람입니다. 요압도 유능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행동을 통해서 대단히 위태롭고 해로운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이것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유능한 것이 우리를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세우는 것에 유능도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유능도 필요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이 주님앞에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고 드려질때 그 유능은 빛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없이 우리의 유능은 오히려 커다란 해가 됩니다. 그것을 우리는 요압의 케이스로 압니다.
드고아 여인의 경우와 아히도벨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저희들의 마음을 이와같은 역사를 통해서 저희들이 살펴볼때, 미묘하고 섬세한 마음의 역사와, 여러가지 상황에서 선택해야 할 순간에 도달했을 때, 어떻게 일하고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어떤 결정을 했을까 하는 모든것에서 우리는 주님께서 주시는 지혜를 보게 됩니다.
주님께서 저희를 도와주시고 어떤 순간에도 주님의 은혜를 의지하고 살아가는 저희들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