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플러싱 여름 수양회 03_하나님의 종. 하나님의 학교 >
강사 : 정형모 형제님
< 플러싱 여름 수양회 03_하나님의 종. 하나님의 학교 >
"내 입을 날카로운 칼 같이 만드시고 나를 그 손 그늘에 숨기시며 나로 마광한 살을 만드사 그 전통에 감추시고"(사49:2).
이사야 42장부터 여호와의 종의 노래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난번 우리는 이사야 42장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종에 관한 첫번째 노래를 보았습니다. 우리 주님의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오늘 49장에는 두번째 노래에 관해서 많은 말씀이 있습니다만 그 중에 2절 말씀을 봉독해 드렸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 주님께서 여호와의 종으로 성육신 하신 말씀(1절)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분께서 어떻게 준비하셨는가 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 입을 날카로운 칼 같이 만드시고 나를 그 손 그늘에 숨기시며 나로 마광한 살을 만드사 그 전통에 감추시고"(사49:2).
이 말씀은 하나의 그림으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완전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무슨 훈련을 통해서 더 갈고 닦고 개선하고 이래야 할 필요가 없는 분이시죠.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이 땅에 육신으로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육신을 가지신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생소한 일이고 독특한 일이지요. 그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완전한 인간이 되셨습니다. 열두살때 주님께서 성전에 가셨을때 그 나이에 맞게, 참 놀라운 분이시지만 그 나이에 맞게 박사들 가운데서 처신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성전에 가시게 될때 인간의 성장 과정을 튀어 나가서 이상한 방향으로 가신 분이 아니고요. 완전한 인간으로서 온전한 성장 과정에서 주님께서는 성장하시고 때가 되시매, 주님께서 30살이 되셨을때 공생애가 시작되는 것을 보지요. 주님께서 공생애에 나가시기 전까지 주님께서는 은밀한 곳에 사실은 숨어 계셨습니다. 가려져 계셨습니다. 아무도 그 분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습니다. 성경도 우리 주님의 탄생과 공생애의 시작, 그 사이에 말씀에 대해선 별로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여기 아름다운 그림은, 첫째 "내 입을 날카로운 칼 같이 만드시고" 입 입니다. 날카로운 칼을 만들기 위해서는 갈아야죠. 갈아야 날카롭게 됩니다. 우리 주님의 말씀,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은 좌우에 날선 검보다 예리하고 찔러 쪼개고 영과 혼을 가르고 이 모든 말씀은 우리 주님께서 하나님의 위대한 뜻을 드러내시고 또한 복음을 말씀하시고 하나님의 본심을 우리에게 드러내게 될때 사용되었던 놀라운 말씀 입니다. 성경은 아무도 그같이 말씀한 자가 없다고 말씀 합니다. 그분의 입술로부터 나온 말씀은 너무나 은혜로와서 사람들 마음속에 감동 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이제 날카로운 칼 뿐만 아니라 이 날카로운 칼은 무기지요. 주님을 사랑하고 그 말씀앞에 겸손히 나오는 자들에게 이 말씀의 칼은 놀라운 위로가 되었습니다. 힘이 되었습니다. 후원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반대하고 주님을 대항하는 자들을 향해서, 심지어는 우리 주님께서는 이 땅에 심판의 주로 오시지 않은 분이었는데 주님을 향해서 시험하고 넘어뜨리기 위해서 온 자들을 향해서 지혜로운 말씀으로 어떻게 격파하셨습니까? 날카로운 칼입니다. 수술용 칼은 대단히 날카로운 칼입니다. 그러나 그 칼은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지요. 우리 주님께서 이렇게 준비되신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준비하는 과정에서 어떻게 보존 되셨나요? 이렇게 그림으로 그리고 계십니다. "나를 그 손그늘에 숨기시며" 여기 손이 있습니다. 그 밑에 그늘이 있습니다. 그늘은 좀 어둡지요. 어두운 그 속에 그 속에 들어가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손그늘 하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공생애에 나타나시기 전에 주님께서는 은밀한 곳에 계셨습니다. 사람들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무명한 가운데 계셨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나타나시게 될때 하나님께서는 하늘문을 여시고 이제 만방에 선포 하셨지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또 한가지 여기 그림이 있는데 그것은 "마광한 살" 입니다. 칼 뿐만이 아니라 화살입니다. 마광했다고 하는것은 갈았다는 말입니다. 살을 쏠때에 쏜살같이 살이 날아갈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입니다. 화살이 울퉁불퉁하다면 화살로서 합당치 않습니다. 화살은 잘 갈아서 두께가 똑같고 곧아야 합니다. 그런 화살을 쏘아야 쏜살같이 날아가서 명중을 시키겠지요. 그런데 이 화살을 어디에 숨겼습니까? 전통에 숨겼습니다. 전통이라고 하는 것은 화살을 담는 통이지요. 그래서 활 쏘는 사람은 이 전통을 가지고 다니고 이 전통안에 화살을 담아 둡니다. 땅에 떨어진 화살이 아니고 전통에 들어가 있는 화살은 언제든지 쏘기 위해서 준비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활쏘는 사람에게 준비되어 있는 도구입니다. 오늘 저희들은 하나님의 종에 대해서 준비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모세가 장성한 후에 한번은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고역함을 보더니 어떤 애굽 사람이 어떤 히브리 사람 곧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본지라 좌우로 살펴 사람이 없음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죽여 모래에 감추니라 이튿날 다시 나가니 두 히브리 사람이 서로 싸우는지라 그 그른 자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동포를 치느냐 하매 그가 가로되 누가 너로 우리의 주재와 법관을 삼았느냐 네가 애굽 사람을 죽임 같이 나도 죽이려느냐 모세가 두려워하여 가로되 일이 탄로되었도다 바로가 이 일을 듣고 모세를 죽이고자 하여 찾은지라 모세가 바로의 낯을 피하여 미디안 땅에 머물며 하루는 우물 곁에 앉았더라 미디안 제사장에게 일곱 딸이 있더니 그들이 와서 물을 길어 구유에 채우고 그 아비의 양무리에게 먹이려 하는데 목자들이 와서 그들을 쫓는지라 모세가 일어나 그들을 도와 그 양무리에게 먹이니라 그들이 그 아비 르우엘에게 이를 때에 아비가 가로되 너희가 오늘은 어찌하여 이같이 속히 돌아오느냐 그들이 가로되 한 애굽 사람이 우리를 목자들의 손에서 건져내고 우리를 위하여 물을 길어 양무리에게 먹였나이다 아비가 딸들에게 이르되 그 사람이 어디 있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그 사람을 버리고 왔느냐 그를 청하여 음식으로 대접하라 하였더라 모세가 그와 동거하기를 기뻐하매 그가 그 딸 십보라를 모세에게 주었더니 그가 아들을 낳으매 모세가 그 이름을 게르솜이라 하여 가로되 내가 타국에서 객이 되었음이라 하였더라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한지라 하나님이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사 이스라엘 자손을 권념하셨더라"(출2:11-25).
주님께서 읽은 말씀에 복 주시기를 바랍니다.
남아는 다 하수에 던져지고 다 죽이려고 하는 바로의 명으로부터 모세가 어떻게 구원받았는지 우리는 잘 알지요. 그는 바로의 궁전에 들어가서 공주의 양아들이 되었습니다. 그의 미래는 바로가 될 만한 밝은 미래가 있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 볼때 어떻게 그와같은 일이 있을까? 그는 죽어야 할 사람인데 물에서 건짐을 받았다고 해서 모세였고 그는 이제 바로의 궁전 안에서 성장했습니다. 그가 사십세가 되었습니다. 사십세라고 하면 모세의 120년 생애 중에 한 챕터가 끝났습니다. 사십세가 되었을때 이 말씀을 보면 그것을 가리켜 "장성한 후에" 라고 합니다. 자기 형제들에게 나아가서 그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다고 믿습니다. 어머니가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그의 유모이지만 사실은 생모가 바로 궁전에 와서 젖먹일때에 그리고 그를 기르던 짧은 기간동안에 끼쳐 주었던 놀라운 영향력이 있습니다. 우리 자식들에게 영적인 이와같은 가르침과 유익, 이와같은 것을 전달해 주고자 하는 모양, 이것만큼 중요한 것이 있을까요. 요셉이 소년 시절에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아버지 하에서 받았던 그가 잠깐동안 받았던 영적인 영향력은 온 생애를 통해서 그를 온전히 이끌어 갔던 대단히 중요한 힘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주일학교에서, 아니 가정에서 우리 자식들을 가리치는 것, 아이들을 가르치는것이 얼마나 중요한가요? 이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다 그 말입니다. 모세가 그 말씀을 항상 마음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는 죽을때까지, 주님앞에 갈때까지 그의 백성들을 구원하는 일에 대해서, 그와같은 사명감에 대해서 아직 그는 준비가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음속에 그와같은 마음이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준비되지 않았음에도 그의 마음속에 있었다고 하는 것은 중요한 말입니다. 후배들과 자녀들과 우리의 어린 학생들과 주일학교 어린 아이들 마음속에, 아직 온전히 성장되지 않았고 아직 철이들지 않았다 할찌라도 그들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구원과 함께 주님을 사랑하고 이 시대에 우리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고 하는 것은, 그리고 그 마음속에 그것을 심어주고 그 생각과 하나님의 위대한 뜻이 무엇인가하는 것을 요만큼이라도 그 마음속에 있다면 그것은 그들을 지배할 것입니다. 고역함 때문에 나갔지요. 그리고 애굽사람이 자기 형제를 치는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쫓아가서 자기가 지금까지 배웠던, 바로의 궁전에서 그가 배웠던 모든 훈련, 가장 탁월한 교육 입니다. 당시 세상에서 배울수 있었던 가장 탁월한 교육이었습니다. 그것은 학문적인 교육일뿐만 아니라 군사적인 교육과 육체의 교육, 이 모든 훈련을 통해서 그는 한주먹에 애굽사람을 죽일수 있었습니다. 여기 이 말씀을 가만히 보세요.
"좌우로 살펴 사람이 없음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죽여 모래에 감추니라"(출2:12).
들키지 않기 위해서 사람이 없음을 보았습니다. 사람을 의식하고 산다고 하는것은 아직 모세가 온전히 훈련되지 않은 모습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가, 아니면 사람 앞에서 행하는가? 이것은 우리가 항상 도전받는 주제 입니다. 그를 죽여서 모래에 숨겼습니다. 다음날 나가니까 동족들이 서로 싸우지요. 그 동족은 가장 비참한 자기 백성들입니다. 그들이 모든힘을 합친다해도 바로를 이길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현실은 무엇입니까? 서로 싸우고 있습니다. 너무나 답답한 모습입니다.
어제 저희들이 이 시대가 고통하는 시대라고 말씀 했습니다. 이 시대에 누가 필요한가요? 하나님의 종이 필요합니다. 이 시대에 우리의 나갈 방향을 우리가 확실히 깨닫는것, 그리고 그것을 마음속에 두고 주님의 도움을 받고자 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만일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면, 육적인 생각, 자기 이해관계, 이기적인 생각, 경쟁심, 이와같은 것 속에서 서로 싸우고 이렇게 해서 이 백성이 어떻게 이와같은 비참한 현실로부터 탈피할수 있을까요?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없는 현실이지요. 모세가 답답해서 갔어요. 그래서 뜯어 말리려고 할때 뭐라고 했어요? "누가 너로 법관을 삼았는가? 그리고 어제 애굽사람을 죽인 것처럼 또 나를 죽이려 하는가?" 이 말은 모세로 하여금 그는 큰 펀치를 맞고 그는 모든힘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그는 그냥 주저앉아 버렸습니다. 그 모든 시도, 그의 백성을 구원하고자 하는 그와같은 정열적인 마음, 그리고 그의 어머니가 당부했던 모든 이야기, 어머니는 노예로 세상을 떠났을 것입니다. 자기는 바로가 될 사람이라고 하지만 궁전에서 모든 특권을 누렸지만 그 마음속에 그의 백성과 하나가 되고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구원하신다" 이런 모든 말씀을 통해서 백성을 구원하려고 하는데 이제는 모든힘이 다 빠져 버렸습니다. 바로를 두려워해서 미디안으로 도망가지요. 이 모든일에 모세는 철저히 실패 했습니다. 그는 미디안으로 도망갔는데 거기서 무슨일을 했습니까? 성경에 여러차례 창세기에도 중요한 일이 있을때마다 우물가에서 일이 일어났습니다. 신약에서도 주님은 사마리아 여인을 우물가에서 만났습니다. 여기 이 우물가에서 여 목자들을 만났지요. 이 여 목자들이 양들에게 물을 먹이려고 하는데 남자들이 와서 해롭게 하고 방해하고 협박하고 할때에 모세는 하나도 변한것이 없습니다. 비록 애굽에서 실패했지만 여기 와서도 똑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는 나가서 이 여인들을 보호해주고 이 여인들이 양들에게 물을 먹이는데 있어서 신속하게 할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아버지 르우엘이 딸들에게 어떻게 그렇게 일찍 돌아왔느냐는 이야기를 했을때에 자초지종을 다 이야기 했지요. 그때 아버지가 왜 그사람을 이끌어오지 않았느냐 하는 이야기를 합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봅니까? 애굽에서는 똑같은 일을 했을때에 실패 했어요. 그런데 미디안 광야 우물가에서는 거의 똑같은 일을 했을때에 다른 그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드로, 르우엘이 모세를 영접하고 존중히 여기고 환영하고 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섭리 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때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때, 하나님의 타이밍 테이블이 있었습니다. 모세는 그보다 약 40년 먼저 행동에 옮겼지요. 그는 하나님의 때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여기서 뼈아프게 배워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드로가 사는 미디안에 갔을때에 거기서 하나님의 위대한 섭리와 주권적인 영향력에 의해서 거기서 그는 영접받고 거기서 정착하고 살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삽니다. 아이의 이름이 뭡니까? 게르솜입니다. 게르솜은 '나는 이 땅에서 객이 되었다' 는 뜻입니다. 이방에서 객이 되었습니다. 그의 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요셉이 자기 두 아들의 이름을 짓게 될때 그의 마음을 그대로 대변해주고 있습니다. 아비집을 잊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창성했다. 그것은 요셉 마음속에서 그의 아들들의 이름을 지어줄때 마음에 현상을 그대로 반영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가 미디안에 왔을때 그의 마음속에 '나는 지금 이방땅에 와 있다. 객이다. 나그네다.'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와같은 생각 속에서 그는 목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커다란 충격입니다. 바로가 될 사람, 애굽에서 가장 큰 사람입니다. 그런데 애굽에서 평민이라도 가장 멸시하는 사람이 누구인가요?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지요. 목자 입니다. 그는 하루아침에 목자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그는 성실하게 하게 될때 그의 정신적인 충격은 어떨까요? 다시 말하면 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 가장 낮은데까지 하루 아침에 내려와 버렸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그 일을 그가 수행합니다. 하나님의 오묘하신 뜻입니다. 광야의 뒤안길로 그가 가서 그는 앞으로 언제까지 거기서 살아야 할지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정확히 40년을 인도하셨습니다. 40년동안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제공하시는 학교에 그날 입학했습니다. 그는 거기서 무엇을 배웠을까요? 첫째, 그가 거기서 받은 충격을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흔히 이민을 오게 될때 그것을 흔히들 문화적인 충격이다. 언어적인 충격이다. 많은 충격에 관한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의 환경이 순식간에 변하게 될때 우리에게 찾아오는 말로할수 없는 충격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와같은 것을 과연 잘 감당하고 버텨나갈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여러가지 종류의 충격을 허락하십니다. 이 충격 속에서 모세는 어떻게 견뎠을까요? 어떤 사람들은 이런 충격을 받아들일수 없기 때문에 그냥 주저앉아 버리고 포기해 버리고 마는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의 모세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우리는 이와같은 충격을 받아들일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를 계속해서 따라다니고 있었어요.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내 평생에 나를 따르리니" 모세를 주님께서는 계속해서 따라가고 계셨어요. 그래서 이 충격 속에서 그는 새로운 생활속에 목자가 되었습니다. 단조로운 생활입니다. 대단히 단조로운 생활이예요. 이것을 어떤때는 견딜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의 속, 그리고 세상의 수많은 물건들, 그리고 많은 재산들, 탐나는 많은 것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의 박수갈채,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이제 박수를 쳐줄때 느끼는 인기, 그리고 세상의 너무나 아름다운 것들, 세상의 소원들, 그리고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교만한 마음, 자랑하는 마음, 그 사람들 가운데서 인기와 모든것을 누리고자 하는 욕심, 그와같은 것이 가득한 세상으로부터 그는 완전히 격리 되어서 그는 너무나 고요한 삶 속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너무나 고요한 것입니다. 그는 애굽에서 그런 삶을 살지 않았어요. 너무나 거대한 변화와 충격이지요. 이 새로운 삶 속에서 그가 어떻게 살까요? 그가 목자로서 살아가게 될때 그의 마음속에 시시각각으로 찾아오는 후회 같은것이 있었을 것입니다. '차라리 내가 그냥 애굽에 남아 있어서 나의 동족을 구원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그와같은 후회 말입니다. 내가 잘못 선택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들이 때때로 그의 마음속에 찾아왔을 것입니다. 이와같이 목자가 되어서 앞으로 어떻게 할것인가 하는 그와같은 회의, 그리고 이와같은 시험거리, 그런것을 어떻게 그가 이기고 1-2년이 아니고 40년이라고 하는 장구한 세월을 통해서 그는 사막의 뒤안길에서 어떻게 그 시간을 보냈을까요?
인내가 필요 합니다. 그는 거기서 인내를 배워야 했습니다. 사람들이 알아주지 아니하고, 그는 사람들이 알아주는 것에 너무나 익숙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박수갈채와 모든 사람들의 시선의 중심과 이런 모든것에 너무나 익숙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그는 살아갈수 없는 그런 사람입니다. 오늘날 이와같은 사람들이 한순간에 이와같은 것을 잃어버리게 될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살하는지 아십니까? 모세는 이와같은 어마어마한 충격 속에서 그는 보존이 되었어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를 은혜가운데 보존하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여러가지 상황속에 환경속에 들어가게 될때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보존해 주시고 하나님의 위대한 뜻이 우리의 생애 속에서 이루어질수 있도록 우리는 주님앞에 마음을 드려야 하고 우리는 주님을 의지해야 하고 이제 40년 광야의 뒤안길에 하나님의 학교안에 들어가서 그가 알지 못하던 환경 속에서 새롭게 배워야 했던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것 같이, 보이는 분으로 알고 그분과 대화하고 그분과 교제하고 그분의 임재를 철저히 느끼는 이와같은 교육, 그것이 40년의 교육이었어요.
다윗이 기름부음을 받고 당장에 보좌에 올라간 것이 아니었어요. 성경은 우리에게 이와같은 수많은 예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셉이 하나님으로부터 그는 꿈을 받았지만 그는 그 꿈으로 인해서 형들에게 미움을 받고 그는 애굽으로 팔려가서 노예로 시작합니다. 가장 바닥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종이 될때 필요한 것은 바닥이 되는 것입니다. 가장 밑바닥에 들어가는것이 무엇이냐고 하는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우러러보고 사람들이 박수 쳐주고 사람들이 인정해 주고 이와같은 사회에서 떠나서 가장 밑바닥이 무엇이냐 그것을 체험하게 될때 겪는 경험의 맛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그는 알아야 합니다. 모세는 그것을 뼈아프게 광야에서 느끼고 살았습니다. 요셉이 노예로부터 시작했습니다. 다윗은 기름부음을 받았는데 어디서부터 시작 했습니까? 도망 다니면서, 들로 동굴로 가장 밑바닥에서 고통 가운데, 고난 가운데 그는 시작 했지요. 하나님께서 쓰시려고 하는 사람에게 어려움을 주십니다. 형제 자매님들 때때로 우리가 여러가지 어려움에 봉착하게 될때 우리는 좌절 합니까? 그것으로 인해서 여러가지 불평 합니까? 그것으로 인해서 나는 실패 했다고 자포자기 합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가지 우리의 부족으로 인해서 또는 하나님께서 여러가지로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다양한 어려움 속에서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오뚜기처럼 설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보존해 주고 세워주시고 우리를 유용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라고 하는 것을 생각한다면 모세처럼, 그는 이제 사막에서 그런 훈련을 받았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어떨게 대화 합니까? 그 하나님을 어떻게 의뢰하는가? 그 하나님의 인도를 어떻게 따라가는가? 옆에서 말씀하는 것처럼 어떻게 그와같은 음성을 내가 듣고 그분과 대화하고 그분과 동행하는 법을 조금씩 조금씩 배워갈수 있는가? 우리는 어디서 이러한 것을 배울수 있습니까? 구원받고 난 다음에, 하나님의 자녀가 된 다음에 우리는 어디서 이것을 배울수 있을까요? 어떤 사람은 어떤 기관에 들어가서 어느 학교에 가서 그것을 따로 배웁니까? 하나님에 관해서 우리는 그것을 그렇게 배웁니까? 우리는 구원받고 나서 하나님께서 우리속에 성령을 주셨어요. 우리에게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개인의 생활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서 교제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읽고, 왜냐하면 우리속에 성령이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이 말씀에 빛을 비춰주십니다. 구원받기 전에 우리는 이 말씀을 알수 없었어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내 속에 내주하게 하신 성령님께서 나의 개인적인 생활 속에서 나를 가르치십니다. 나의 성격을 변화시킵니다. 나의 여러가지 사상이나 생각이나 개념이나 이 모든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바꾸고 하나님께서 그와같이 개인의 생활 속에서 인도하십니다. 아침에 일어나게 될때 나는 어떤 책임을 이행할것인가요? 나는 게으를 것인가, 아니면 나는 부지런할 것인가? 나는 내가 맡은 이와같은 책임에 대해서 정말로 철저할 것인가, 아니면 나태하고 그냥 건너뛸것인가, 이것은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내 개인의 생활 속에서 그것을 하지 못한다면, 생활속에서 그것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흔히 그런 얘기를 합니다. "내가 어느 학교에 가서 뭘 배워야 할텐데.." 생활에서 삶은 대단히 부족하고 정렬되어 있지 않고 질서가 없고 그러면서 어디 위대한 학교에 가서 주님일을 하겠다고 하는 망상은 버리십시요.
둘째, 우리는 개인의 생활뿐만 아니라 가정의 생활 안에서 아버지와 어머니, 또 형과 동생들 사이에서 나의 생활을 어떻게 할것인가? 이것은 좋은 인격관계 입니다. 여기 인격관계에서 어떻게 관계를 유지하고 살 것인가요? 나는 어떻게 윗사람을 존중하고 아랫사람을 사랑하고 이 가운데서 어떻게 하면 가정을 세울수 있는 사람이 될 것인가 라는 생각을 하면서 말씀을 보게 될때, 말씀은 가정 생활에 대해서 명확한 방식을 제공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렇게 훈련하는 것입니다. 개인의 생활에서 경건하고 거룩한 생활을 하고 있는가요? 그리고 가정생활에서 나는 관계에서, 그리고 유지하고 가정을 세우는 일에 나는 내 나이와 관계없이 구원받았다면 어려서부터든지 내 구원받은 날부터 나는 가정을 세우는데 총력을 기울여야 겠다는 생각을 주님으로부터 받아서 그것을 매일과 같이 훈련하고 있나요?
셋째, 어디가 하나님의 학교입니까? 모임입니다. 모임에서 정기집회에 나는 정말로 철저히 참석하고 있나요? 아니면 나는 띄엄띄엄 건너뛰고 있나요? 나는 정말로 주님앞에 충실한가요? 아니면 내 여러가지 육적인 생각과 여러가지 다른 세상 생각으로 인해서 모임 생활에서 철저하지 않은가요? 모세가 광야의 뒤안길에서 적당히 살았다면 80세가 되었을때 하나님께서 그를 안부르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을 부를수가 없습니다. 40년동안 그가 생활하게 될때, 성경은 거의 기록이 없습니다. 그가 거기서 무엇을 했는지에 관해서는 별로 이야기가 없어요. 그러나 우리는 성경 말씀을 통해서 80세에 그가 부름을 받고 난 다음에 그 다음에 그의 많은 생활에 대해서 너무나 자세하게 말씀이 기록되어 있어요. 그때 그가 어떻게 했나요?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었고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어떻게 끌어내렸고 하나님과 대화하게 될때 마치 친구처럼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주님과 대화했던 이 모든 광경, 그리고 바로와 같은 왕 앞에서 조금도 두려움 없이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맏기신 위대한 일이지요. 그의 백성을 구원해내는 일을 온전히 행하고 40년 동안 광야에서 인도하게 될때 하늘로부터 만나가 내리고 홍해가 갈라지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인도하게 될때 그의 백성들이 온전히 따라갔던 모든 일들을 우리가 살펴보게 될때, "아- 모세는 광야에서 이런것들을 배웠구나!" 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히11:24).
그가 믿음으로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했습니다. 40세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40세에 그는 미디안으로 도망하게 될때 그는 부끄러움 가운데서 도망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그는 믿음으로 선택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고 하는 인간적인 명예를 초개같이 버려 버렸습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히11:25).
그는 쾌락보다는 고난을 택했습니다. 자기 백성들과 함께 고난받는 그것을 택했어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히11:26).
부귀보다 그리스도를 받는 능욕, 모욕을 더 값지게 생각했습니다.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히11:27).
이제 이것은 80세가 되었을때 입니다. 80세가 되어 그의 백성을 인도하게 될때 그는 인금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않았습니다. 바로가 얼마나 노했습니까?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이 노예들을 풀어주겠는가?" 노예들 한사람 한사람은 일당이 얼마씩 입니까? 그냥 공짜로 어마어마한 건축물을 짓게 될때, 한푼도 들이지 않고 노예로 잡아두고 그들을 부렸습니다. 어찌 그들을 호락호락 내줄수 있겠습니까? 이 바로, 무기가 있고 군대가 있고 권력이 있고 당시 세상에서 최 강대국의 수장인 이 바로, 그 사람 앞에서 "내 백성을 가게 하라"라고 이야기 할때 모세의 말 속에는 권위가 있습니다. 모세의 말 속에는 단순한 권위가 아니라 이제 바로가 감당할수 없는 위대한 하나님의 능력을 하늘로부터 끌어 내리는 힘을 모세는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모든것을 어디서 배웠나요? 그는 40세까지 애굽에서 그런 능력을 배우지 않았습니다. 그는 절대로 애굽에서 배운것 가지고는 그런일을 할수 없었어요. 그러나 40년 동안에 그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교육을 통해서 그는 더 바닥까지 내려간 경험이 있습니다. 거기서 어떤 쓰라린 경험을 한 것도 있습니다. 때로는 고독과 싸워야 하고 때로는 너무나 단조로운 생활 속에서 견딜수 없는 가슴을 쥐어안고 이집트에서의 그의 생활과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감당할수 없는것이 그의 마음속에 찾아오게 될때 그것을 그는 어떻게 소화 했을까요? 그는 주님앞에 갔습니다. 주님의 임재를 느끼는 것입니다.
여기보면 주님의 임재를 느낀다고 할때, 주님은 안보이시는 분이십니다. 성령님은 안보이지요. "두 세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곳에" 우리가 모이게 될때 우리 주님이 안보이세요. 그러나 주님은 여기 엄연히 계세요. 만일 우리가 주님이 여기 계시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우리의 말과 행동과 모든 처신이 전혀 달라질 것입니다. 그와같은 믿음, 주님을 의뢰하고 경외하는 이와같은 마음, 이것은 오늘날 모임생활에서 철저히 필요한, 간증을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필요한 그런 본질적인 요소 입니다. 그것을 모세는 광야에서 배웠어요.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히11:27).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 여기 중요한 말씀이 나옵니다. 보이지 않는 분, 우리눈에 안보이는 분입니다. 그런데 그는 볼수 있었습니다. 안보이는 분을 그는 40년동안 볼수 있었습니다. 그냥 볼수 있다고 가상하고 상상하고 그분과 대화하는것이 아니지요. 그것은 정신병자지요. 그러나 거기에 안보이시는 분이지만 인격이 있습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시는지 어떻게 돌보시는지 어떠한 계획을 가지고 계신지, 우리를 향해서 어떤 상세한 동정심과 우리를 사랑하는 무한한 사랑과 우리를 향하신 모든 계획을 그분께서 가지고 계신데 그것은 우리에게 가장 최선이다라는 것을 모세는 계속해서 터득했습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을 보이지 않아도 철저히 신뢰할수 있었습니다. 모든 문제를 놓고 그분앞에 엎드릴수 있고 그리고 아뢰면 그분께서 반드시 이루신다고 하는 것에 대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 그는 바로앞에 가서 이렇게 어망처망한 일을 할수 없었습니다. "보이지 않는자를 보는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 무엇을 이야기 합니까? 보이지 않는 분을 보이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을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인내 입니다. 그분 앞에서 인내해야 하는 것입니다. 인내할수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를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저희를 건드리지 않게 하려한 것이며"(히11:28)
유월절을 정했을 뿐 아니라 아홉가지의 놀라운 기적들을 그는 끌어내렸어요. 유월절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켰지요. 보이지 않는분을 보는 것처럼, 히브리서 11장 1절에 믿음은 뭐라고 말씀 했습니까?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내가 바라는것은 어떤 것입니까? 내 육신이 바라는 아무거나 입니까? 그런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내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소원해야 할것을 소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을 내 육신의 소욕 때문에 원하는것, 그것에 대한 실상이 아닙니다. 믿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우리가 소원하고 소망하고 바라야 할만한 것들에 대해서 확실한 증거가, 실상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것에 대한 증거가 있는 것입니다. 모세는 그것을 배웠습니다. 주님을 의지하는 법, 주님이 여기 계시다고 하는 것, 그것을 고요한 광야에서 양들을 치면서 배웠습니다. 양들을 친다고 하는것을 잠깐 생각해 보세요. 양들을 친다고 하는것은 엄청난 허드렛일이 따라다닙니다. 짐승을 기른다고 하는것은 엄청난 손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한 두마리가 아니고요. 여러마리를 기릅니다. 아침에 가면 우리에서 데리고 나와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인도해서 목초지를 찾아야 합니다. 어떤때는 목초지를 찾아야 하기 때문에, 그가 80세가 되어서 호렙산에 불 붙는 덜기나무 앞에 나가게 될때까지 그는 목초를 찾기 위해서 계속해서 가다가 그 불을 만난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때는 먼데까지 가야하는 것입니다. 양들을 먹이기 위해서 입니다. 양들을 먹인다고 하는것은 그가 수많은 인민들을, 그 백성들을 인도하는데 절대로 필요한 것입니다. 구약의 위대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을 한 사람들은 목자 입니다. 다윗이 목자였고요. 모세가 목자였고요. 이삭과 아브라함과 야곱이 목자였고 목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와같은 그림을 통해서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제 양들이 출산하게 될때 아마 밤잠을 자지 못할 것입니다. 한 두마리가 새끼를 낳습니까? 그 새끼가 나면 그를 어떻게 돌봐야 합니까? 새끼가 병들었을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제 밥주고 물주고 자게하고 돌보고 따라다니고 짐승들이 쫓아오고 수많은 허드렛일들이 그에게 따라왔습니다. 그것을 긴 시간동안 그는 담당 했습니다. 형제 자매님들, 우리는 주님의 종이 되기 위해서 허드렛일을 하기를 거부하고 있습니까? 허드렛일은 내 타입이 아니다고 여러분 생각하십니까? 허드렛일을 생각할때, 모세를 생각하세요. 우리는 그와같은 일을 하면서 주님께서 어떻게 화살을 갈듯이 나를 교육 시키시고 칼날을 갈듯이 나를 계속해서 연마시키는가, 하는것을 우리는 계속해서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준비시키길 원하시는지, 광야에 가서 무엇을 배우는지,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과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과 하나님의 계심에 대해서 보이지 않는 분인데 그는 뚜렸히 보고 있었습니다. 영적인 눈으로 그는 뚜렸히 보고 있었어요. 그것을 배웠습니다.
바로는 모릅니다. 세상은, 이집트 사람은 그것을 전혀 모릅니다. 죄인들은 그것을 알수 없어요.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은 주님이 여기 계시다는 진리를 알수 없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들 중에서도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이것을 모른다면 주님이 여기 계시는데도 망말을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여기 꼐시는데도 함부로 처신하는 것입니다. 함부로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여기 계시는 것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입니다. 지역교회에 가장 핵심은 무엇입니까? "두 세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곳에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여기 임재해 계시다는 것입니다. 만일 이 진리를 우리가 안다면, 그리고 그것을 내가 알뿐만 아니라 내 마음속에 그것을 너무나 소중한 것으로 여기고 실천한다면 우리의 모임은 수많은 문제가 사라질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 주님께서 영광을 받습니다. 위대한 간증이 드러납니다.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이 이곳에 왔을때에 너무나 충격을 받는 것입니다. 위대한 도전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아! 여기에 하나님이 계시다. 나도 그 하나님을 믿고 싶다."라는 생각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광야에 갔을때에 모세가 배운 것들이 있어요.
첫째, 하나님은 스스로 계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충분하시다. 하나님은 영원하시다.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예요. 우리는 그것을 그냥 신학적으로, 이론적으로 '영원하시다' 그리고 그것은 두뇌에서 잠깐 이해하고 그것으로 끝난다면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처신과 우리의 태도는 전혀 하나님이 마치 잠깐있다 사라지는 분처럼, 우리는 처신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십니다. 만일 그분이 영원하시다면 우리는 영원한 가치에 대해서 우리가 가장 일순위로 놔야 할 것입니다. 잠깐 있다 사라지는 그런 가치, 그것을 놓고서는 아둥바둥하는 그런 마음이 아니고요. 영원한 가치에 대해서 내 마음속에 나는 그것을 우선순위 1순위로 내 마음속에 소중히 여긴다는 생각을 너무나 당연하게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시다. 하나님은 무한하시다. 제한이 없고 끝이 없다. 우리는 그분앞에 나가게 될때, 영원하신 하나님, 무한하신 하나님 앞에 나갈때에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한하지 않고 유한합니다. 우리는 영원하지 않고 시간에 속해 있어요. 우리는 스스로 있지 않고요, 출생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조성하셨어요. 우리는 스스로 충분한 것이 아니라 우리는 언제나 필요한 것입니다. 이와같은 필요를 느끼게 될때, 우리의 유한함을 느끼게 될때 모세는 광야에 갔을때 유한함을 느꼈어요. 너무나 자기의 무능과 죄악과 이런것을 너무나 철저히 느꼈어요. 그는 조금전 실패 했잖아요? 우리는 하나님의 종이 되기 위해서 우리의 필요와 우리의 무능과 우리의 연약과 우리의 죄악을 너무나 뼈저리게 느껴야 합니다. 하나님의 종이 되는 사람이 나는 뭔든 할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자만과 망상, 착각입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종이 될수 없어요. 모세가 하나님의 종이 되는 첫 발자국은 실패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거기서 그는 나는 너무나 부족하다는 생각을 할때 그는 하나님을 바라보게 될때, 그 하나님을 마치스펀지처럼 물을 빨아들이듯이 그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너무나 감격 속에서 마음속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 하나님을 배우고 있었다는 그 말입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십니다. 우리는 불완전하지만 하나님은 완전하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전지하십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하나님은 무소부재 하십니다. 하나님은 지혜로우십니다. 그 지혜는 세상의 지혜가 아니고요. 위로부터 내려오는 지혜 입니다. 무한하신 하나님, 영원하신 하나님, 전지하신 하나님, 바로 거기에서부터 나오는 지혜 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우리가 어떻게 따라가겠습니까? 야고보는 말했어요. "너희가 지혜가 부족하면 하나님 앞에 말하라" 모세가 지혜가 부족하다는것을 너무나 절감 했어요.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그 지혜를 배웠습니다. 하나님은 불변하십니다. 하나님은 변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주권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누구나 이 온 세상, 온 우주를 다스리고 계시다. 제가 지금 말씀드리지만 이 모든것을 신학적으로 머리속에 암기하는 것으로 끝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절대로 모르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신학생들이 조직 신학에서 이것을 배워요. 그런데 그것은 머리로 끝나고 있어요. 만약에 우리 하나님께서 주권적인 하나님이라면 모세는 자기가 조금전에 실패 했는데, 그래서 그는 미디안으로 도망오게 될때, 조금전의 자기의 과거를 돌이켜보게 될때 광야에서 그는 생각했어요. '하나님의 주권이 하나님의 위대한 헙리가 나를 이렇게 인도하고 있다. 내가 이해할수 없는 생애 속에서 내 미래를 알수없는 이와같은 발걸음에 주님께서는 나를 붙들고 계시고 나의 발걸음을 인도하고 계셨다. 그것을 생각할때 하나님은 주권적인 하나님이다.' 그는 나중에 바로앞에 나가게 될때 바로가 세상을 통치하는 자이지만 당신을 통치하는 바로 그분이 계시다는 것을 그는 너무나 명확히 알고 있었어요. 하나님은 주권적인 하나님이며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지혜로, 지식으로 절대로 이해할수 없는 하나님이요, 하나님을 탐구할수 없는 하나님 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하나님입니다. 이 주제는 거룩이라고 하는것은, 하나님의 수많은 속성들 중에 모든것에 다 연루되어 있는 속성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하나님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거룩하지 않다면 우리 그리스도인은 빵점입니다. 하나님의 집안이 거룩하지 않다면, 가정이 거룩하지 않다면 이것은 빵점입니다. 하나님의 모임이, 교회가 거룩하지 않다면 그것은 모임으로서 존재 가치가 사실상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하나님입니다. 이 주제가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내일 조금 더 자세히 말씀 드리겠습니다. 거룩이 도대체 무엇인가? 이 거룩은 어떻게 유지되는가? 이 거룩이 하나님의 속성이라면 그 하나님의 속성이 온전히 우리가운데 드러나게 해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시고 공의로우시다. 하나님은 참되시다. 하나님은 충성되시다. 충성과 관련해서 며칠전에 보았지요. 하나님은 충성됩니다. 하나님은 충성되기 때문에 그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충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충성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약속을 어깁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충성하는 것입니다. 약속을 함부로하지 아니하고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우리는 약속을 이야기 하게 될때 대단히 신중하게 이야기 하고 일단 약속을 했다하면, 반드시 약속을 지켜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는 사과하고 그것에 대해서 정리하고 넘어가는 그와같은 충성이 필요합니다. 만일 하나님의 종이 이와같은 것이 없다면 우리는 내 생각대로 내 느낌대로 마음대로 걸어가게 될 것입니다. 절대로 하나님께서 쓰실수 없지요. 하나님은 어떻습니까? 빛이시다. 하나님은 오래참고 인내하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긍휼의 하나님이요, 은혜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영광스러운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대단히 독특하시다. 하나님은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수도없는 속성들이 있습니다. 모세가 광야의 뒤안길에 가서 하나님의 학교에 입학했을때, 여기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그때부터 배우기 시작할때 이 모든 속성에 대해서 그는 매일과 같이 배웠습니다.
형제 자매님들, 우리는 이와같은 하나님을 지식적일 뿐만 아니라 체험적으로 우리 생활에서 우리가 이것을 인정하고 이 앞에 엎드리고 이것에 대해서 소중히 생각하고 그와같은 하나님 앞에 우리는 우리 마음을 드려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으로서 우리는 이사야 42장에 종의 노래중에 두번째 노래에 대해서 구비하는 것, 준비하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모세를 예를 들어서 저희들이 생각해 봤습니다만, 주님께서 이 문제에 대해서 계속해서 저희들의 마음속에 은혜를 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