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러싱 모임 수양회/2018년 여름 수양회

< 플러싱 여름 수양회 01_하나님의 종. 충성 >

박이레 2021. 7. 24. 15:34

2018년 10월 4일 목요일

강사 : 정형모 형제님

< 플러싱 여름 수양회 01_하나님의 종. 충성 >

저희들이 말씀을 상고하게 될때 주님께서 어떻게 이땅에 오셔서 섬기셨는지를 보고자 합니다. 우리 또한 하나님의 종으로 부름받아 어떻게 주님을 섬겨야 할것인가, 어떻게 헌신적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섬길것인가를 보고자 합니다. 주님께서 저희를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 마음이 신실한 자는 그런 것을 숨기느니라 (잠11:13, 개역한글)

여기 두루 다니면서 남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잠언의 말씀은 많은 경우 대조합니다. 어리석은 사람, 지혜로운사람, 악한사람과 의로운 사람을 말합니다.

여기는 한담하는 사람이 나옵니다. 그는 두루 다니며 문제를 만듭니다. 그는 사단에게 쓰임을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와는 대조적으로 잠언기자는 마음이 신실한자(마음이 충성된자)를 말합니다.

저희가 주님을 섬기게 될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고 기대하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만, 충성됨이 있습니다. 오늘 잠언말씀에서 충성됨을 살펴보겠습니다.

충성됨이라고 할때, '성'은 한자로 '정성 성'입니다. 충성되게 섬긴다고 하는것은 정성을 다해서 섬기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어떻게 구원해 주셨는지, 그리고 무엇 때문에 구원해 주셨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땅에서 우리가 살아갈때 주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우리가 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럴때에 우리는 주님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것으로 여기지 않고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로 오셨습니다. 이 땅에 오셔서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셨나요?

주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때 하나님께서 하늘문을 여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마태복음 25장 23절에는 달란트의 비유가 나옵니다. 세 종에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두달란트를 받은 종은 두달란트를 남겼습니다. 이 세 종들은 받은 양이 다 달랐습니다. 그리고 남긴것이 어떻습니까? 앞의 두 종은 전부 100% 남겼습니다.

주님께서 어떻게 말씀하고 계신가요?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찌어다 하고 (마25:23, 개역한글)

<착하고 충성된 종아>

충성한다는 것은 진실하고 정성스럽게 주님께서 무엇을 기뻐하시는지를 알고 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자기 삶의 목표를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그 삶의 순간에 목표가 있습니다. 언제나 무엇을 하던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는것을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다른 하나는 다른사람에게 유익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이라고 하면 그 중에는 성도가 있습니다.

성도에게 유익이 되고 신령함이 되고 덕 세움이 되고 힘이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또한 믿지 않는 사람들이 구원받을수 있도록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도바울은 그렇게 했습니다. 충성스러운 마음으로 충성되게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고자 그렇게 하였습니다.

악한 사자는 재앙에 빠져도 충성된 사신은 양약이 되느니라 (잠13:17, 개역한글)

여기 두사람을 또 대조하고 있습니다.

악한 사자와 충성된 사신입니다. 둘다 사자로 대조하지 않았습니다. 잠언 기자가 사실 얘기하고자 하는 사람은 충성된 사신입니다. 사신은 대사를 말합니다.

'대사'가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그는 본국의 모든 이익과 모든 위엄과 모든 목표를 외국에 와서 달성하는 사람입니다.

그의 모든 활동은 본국의 뜻에 따라 그것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 신약에서 두군데 대사에 관해 언급하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엡6:20, 개역한글)

여기 사도바울은 자신을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는 아그립바 왕이 "네가 적은말로 나를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느냐?" 라고 물었을때 "내가 쇠사슬에 매인것 빼고는 당신도 나와같게 되기를 원한다."라고 대답 한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편지하면서 <나는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담대하게 할말을 한다고 합니다.

사신이 하는말은 어떤 말인가요? 본국에서 훈련받은 말을 합니다.

우리는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하늘의 사신입니다. 하늘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뜻을 가지고 있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 원대한 구원을 이루셨는가를 펴내야 합니다. 그리고 한 사람이 구원받았을때, 그 성도가 주님의 나라에 갈때까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가를 알고 이루어 내기를 원하십니다.

잠언에서 '충성된 사신'을 말했습니다.

신약의 또 다른 사신을 보겠습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고후5:20, 개역한글)

사도는 사도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해서 사신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내 말을 하는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말을 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는 메세지를 전하는 것입니다.

잠언 13장 17절에 악한사자와 충성된 사신이 있습니다.

충성된 사신의 반대는 악한 사자입니다. '사자'는 메신저입니다. 말을 전달하는 사람입니다. 자기의 이야기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 뜻을 다른곳에 전달하는 자입니다.

사신은 다른나라에 와서 대사로서 주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는 자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 메세지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의탁하셨습니다.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 말씀을 의탁하셨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아야 합니다. 말씀을 잘 알고 이 말씀이 효과있고 능력있게 잘 전파될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말씀을 알고 잘 순종해야 하며 잘 지켜나가야 합니다. 그러한 고고한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위대한 사랑으로 나를 값주고 사셨습니다. 나를 부르셨습니다.

우리 마음에는 주님에 대한 감동이 항상 있습니다. 만일 우리 마음속에 주님에 대한 감동이 없다면 우리는 타락한 사람입니다.

어떻게 나를 위해서 피흘려 돌아가신 분을 향해서 내 마음이 덤덤하고 아무 느낌이 없을수 있나요?

우리는 충성된 사신입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주님께서 하늘에서 오셨습니다. 주님께서 또한 하늘로 돌아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이 땅으로 오실 것입니다. 우리를 주님께서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땅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세상에 사신으로 와 있습니다.

주님의 메세지를 계속해서 전달하고 하나님의 뜻이 계속해서 이루어지도록 주님께서 남겨 두셨습니다.

신실한 증인은 거짓말을 아니하여도 거짓 증인은 거짓말을 뱉느니라 (잠14:5, 개역한글)

여기 또한 대조가 나옵니다. 신실한 증인과 거짓 증인입니다. 신실한 증인은 다른말로 하면 충성된 증인입니다. 증인이 하는일이 무엇입니까? 증인은 주로 법정에 서게 됩니다. 그는 진실만을 말할것을 손을 들고 선언합니다.

만일 법정에서 증언할때에 사실이 아닌것을 증언한다면 그는 거짓증인입니다. 이것은 위증죄에 해당합니다. 이 세상에서도 대단히 심각한 죄입니다.

십계명에서도 제 구계명은

에 거짓증거하지 말라 하였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메신저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사람입니다. 어떻게 증거하나요?

말씀으로 증거하고 삶으로도 증거합니다. 또한 우리의 언행와 표정으로 증거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행동으로 증거합니다. 우리는 메세지로도 증거합니다. 그 메세지가 우리의 삶과 일치 되는가, 아닌가는 매우 중요합니다.

증인이 증거하게 될때, 그 증거가 사실이라고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그것은 심각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짓증인은 매우 큰 문제가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종으로써 충성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충성을 요구하십니다. 그리고 충성된 증거가 얼마나 중요한가요? 우리는 주님께서 무엇을 소원하시는지를 잘 알아야 합니다.

복음을 통해서 세상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주님께서 원하십니다.

또 하나, 성도의 모든 삶이 개인에 있어서 가정에 있어서 모임에 있어서 사회 생활에 있어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알고 그대로 순종하고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게 하고 살때에만 사신의로서의 삶의 모든 역사는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효과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잠언 14장에서 신실한 증인(충성된 증인)을 보았습니다.

이제 잠언 20장 6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많은 사람은 각기 자기의 인자함을 자랑하나니 충성된 자를 누가 만날 수 있으랴 (잠20:6, 개역한글)

<충성된 자를 누가 만날 수 있으랴>

종으로써 충성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충성된 종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충성된 사람을 만나기는 쉽지 않습니다.

애굽의 바로가 두가지의 꿈을 꾸었습니다. 그는 큰 나라의 왕이었습니다. 그는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기를 바라는 군주였습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께서 두가지 꿈을 보이셨습니다. 그는 그 꿈의 뜻을 알기 위해서 전국을 수소문 했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그 꿈을 해석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에 술관원이 요셉에 대해서 이야기 했습니다. 그리고 요셉이 바로의 꿈을 해석했습니다.

그때 바로가 뭐라고 이야기 했습니까? "이렇게 지혜로운 사람을 어디서 구할수 있을까?"

하나님의 충성된 하나님의 종은 어딜가나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대단히 고귀한 보석입니다. 아무데서나 찾을 수 있는 돌이 아닙니다. 반짝인다고 해서 모두가 고귀한 금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흠이 있는 자들이 아니고 충성된 사람입니다.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그런자를 원하십니다.

주님께서 나를 부르셨다면 나의 생애는 이와같은 충성됨으로 주님께 드려야 합니다.

주님을 섬길때에 어떤때는 충성하다가 어떤때는 세상으로 갔다가 하면서 마음이 흔들린다면 이것은 충성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초지일관 첫사랑을 유지하면서 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에 대해서 항상 마음에 박동하는 사람이 충성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사람, 모든 에너지를 주님앞에 드리고자 하는 사람이 충성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을 우리가 어디서 만날수 있을까요?

히브리서 11장 말씀을 보면 거기에는 믿음의 영웅들이 있습니다. 구름같이 둘러싼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수가 수만이라고 하지만, 인류 역사의 총 인구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수만의 사람이 많은 사람입니까? 대단히 희귀한 충성된 사람입니다.

충성되다고 하는것은 영어로 faithful 입니다. 여기서 ful은 가득찼다는 것입니다. 그는 구원받을때에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그대로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라는것은 너무나 고귀합니다. 하나님은 그 약속을 결코 버리지 않으시며 그렇기에 하나님의 약속을 너무나 사랑합니다. 그리고 믿으면서 내가 주님께 한 약속을 지키고자 합니다. 그것이 충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인류의 역사를 보시며,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실패했습니다. 때로는 다윗과 솔로몬의 시대와 같이 놀라운 시대도 있었습니다만, 그러나 이스라엘 전반에 거쳐서 그들은 하나님을 실망시켜 드렸습니다.

그들은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의 말씀을 처음부터 어겼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노를 격발시켰습니다.

주님께서 다락방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참 포도나무요, 참된 이스라엘인이다>

하나님께서 하늘문을 여시고 또한 이렇게 선언하지 않으셨습니까? 얼마나 하나님께서 기뻐하셨나요? 하나님께서 정말로 원하시는 사람은 이렇게 충성된 사람입니다. 어디서 이런 사람을 구할수 있을까요?

잠언 기자는 이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번 기회를 통해서 우리가 주님 앞에서 "주님 나는 충성된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라고 말씀드리기를 원합니다.

주님을 말씀에서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위대한 은혜와 약속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나를 어떻게 구원하셨나요? 주님께서 나에게 베푸신것을 생각할때 나는 주님의 요청과 소원을 무시할수 있습니까? 내가 어찌 그것을 가볍게 생각할수 있습니까?

주님은 모든 약속을 다 지키셨고 그것을 또한 영원토록 지키실 것입니다.

나는 주님앞에 충성된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또한 그 말을 주님 앞에 드릴수 있기를 원합니다.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 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케 하느니라 (잠25:13, 개역한글)

여기 또다시 충성된 사자가 나옵니다. 그 충성된 사자는 보내는 분이 있습니다. 스스로 나오는 사자는 없습니다. 사자는 항상 보내어집니다.

추수할때 많이 힘듭니다. 농사일은 매우 힘듭니다. 추수때에 뙤약볕 아래에서 일하면 얼마나 목이 마른가요? 충성된 사자는 그런때에 얼음 냉수와도 같습니다.

얼음 냉수를 목이 갈할때 마시면 너무나도 시원합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서 여호와의 종으로 행하신 모든 일은 아버지의 마음을 시원케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것은 사단이 이룬 모든 타락으로 인한 모든결과를 주님께서 역전시킨 것입니다.

그래서 사망이 더이상 우리를 쏠수 없고 우리를 끌고 갈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모든것을 이루시고 우리를 아버지께로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말씀을 의탁하셨습니다.

사도바울의 고백을 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사실 핍박자요, 포행자였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충성되게 여겨, 나에게 이 말씀을 의탁하셨다." 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의탁하셨을때 그 말씀을 어떻게 전달해야 할까요?

그 말씀을 바꿀까요, 아니면 능력가운데 전달할까요, 아니면 그냥 전달할까요?

충성은 정성이라고 했습니다. 정성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너무나 고귀하고 하나님의 사랑이 언제나 내 마음을 감동하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할때에 정성스럽게 전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듣는 사람들 가운데 성령이 역사 하도록, 그 마음에 파고들도록 전달해야 합니다. 사자는 그런 것입니다.

사자는 보낸분에 대한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보낸 분이 정말로 기뻐하도록, 보낸분의 마음을 시원케 해드리도록 하는 것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첫 아담은 실패 했습니다. 하나님의 명예가 추락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계획이 마치 무너진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실패에 대해서 우리 주님은 마음에 두고 계셨습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얼굴을 부싯돌과 같이 하고 십자가의 길을 가실때에 사단을 이기셨습니다.

인간의 불순종으로 인해 하나님의 마음에 실망과 불쾌감을 드렸던 모든것을 역전하리라고 생각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이야기하게 될때, 여호와의 종으로써 하나님의 모든 메세지를 하나도 빠짐없이 전달했습니다.

그리고 또한 그분의 행동과 호흡과 모든 행동을 통해서 주님께서는 <다 이루었다>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추수때에 목마른 사람이 얼음물을 마실때에 시원한 것처럼 아버지의 마음을 시원케 해드린 것입니다.

주님은 이러한 생각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구원받고 나서 주님을 섬기게 될때, 어떻게 섬겨야 할것인가에 대해서 잠언 25장에서는 '나를 보내신 분을 시원하게 해드리는 것'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이러한 목표를 가질수 있기를 바랍니다.

5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나으니라

6 친구의 통책은 충성에서 말미암은 것이나 원수의 자주 입맞춤은 거짓에서 난 것이니라

(잠27:5-6, 개역한글)

면책은 얼굴을 보며 권면하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권면은 대단한 위험이 따르는 것입니다. 권면을 잘못하면 어려워 집니다.

받는 사람이 그것을 받지 않을때, 또한 권면하는 사람이 합당한 영을 가지고, 태도를 가지고 하지 않을때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보시기 바랍니다. <친구의 통책은> 통책이라고 하는 것인 책망을 하는데 아프게 하는 것입니다. 아픈 상처를 남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친구라면, 그것은 아프지만 충성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정말 충성에서 나왔는지, 아니면 다른 동기에서 나왔는지를 어떻게 알수 있습니까?

권면하게 될때, 권면 받는 사람에 대해서 바르지 않은 동기를 가지고 권면하게 되면, 권면하는 사람의 마음에는 아픔이 없습니다.

그것은 바른 동기가 아닙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친구의 통책은, 아픔을 동반하는 권면입니다.

왜 수술을 합니까? 수술은 환부에 칼을 대는 것입니다.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그 수술을 하는 의사가 악한 사람입니까?

정말로 바른 통책은 충성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충성된 통책은 아픕니다. 상처를 남기는 권면입니다.

부모님이 자식에게 권면하고 때로는 때립니다. 자녀를 때릴때에 친 부모는 마음속에 하루종일 아파합니다.

아이들은 그것을 다 이해하지 못할지 모르지만 나중에 어른이 되면 그것을 알게 됩니다.

어린아이가 꾸중을 듣고 매를 맞으면 아프지만 어머니 아버지는 그 마음이 더 아픈 것입니다.

그것이 충성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충성된 권면이 아닙니다.

복음을 증거하게 될때 사람들은 그것을 받기 싫어합니다. 죄인이라는 말을 듣기 싫어합니다. 그래서 종교는 그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종교는 뭐라고 얘기합니까? "우리는 다 의인이고 노력하면 하늘나라에 갈수 있다." 라고 말합니다.

숨은사랑은 5절에 뭐라고 말씀합니까? 숨은사랑은 면책보다 덜하다라고 말씀합니다.

면책은 대놓고 책망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위험한 것이고 쉬운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충성으로 한다면, 성도간에도 마찬가지 입니다.

장로가 통책 한다면 여러분은 받아들입니까?

여러분이 통책을 싫어하기 때문에 여러분은 많은 손실을 보고 있습니다. 장로의 인도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통찰력과 지혜에 듣게 될때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양약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충성으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저희들은 잠언 몇장에서 잠언 기자가 충성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종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종입니다. 어떤 특별한 사람만 하나님의 종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다 하나님의 종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주님을 섬겨야 할까요?

여러가지 수많은 각도에서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만 만일 한가지로 묶어서 이야기 한다면 '충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번기간을 통해서 저희들의 마음이 충성되고 그러한 종으로서 우리 마음을 불살라 주님께 드릴수 있게 되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