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이레 2021. 7. 24. 15:29

2018년 4월 28일 토요일

강사 : 머빈 위샤드 형제님

< 에스라 2장 >

우리는 지난 시간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여러 유대인 중에 제사장들이 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제 에스라 2장에 나와있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여러 사람의 명단의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전을 건축하고 하나님께 경배하는것을 보게 됩니다.
그때 약 5만명의 사람들이 그 여정에 동참했습니다.

그 여정을 가는 사람들에게 당신이 잠시 멈추어 서서 당신은 어디로 왜 가고 있느냐고 물어 본다면, 그들은 동일하게 대답할 것입니다.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으며 성전을 건축하기 위해 가고 있습니다"

그 무리중에 제사장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오늘날에도 그리스도인으로서 그와 동일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이와같은 건축일에 동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에서 이것에 대해서 말해 줍니다. 여기 한 터가 놓여져 있고 다른 터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터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입니다.

그리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놀라운 사역에 동참 합니다.
그리고 이 일에 대해서 우리에게 경고로서 말씀 합니다.

<누구든지 그 위에 어떻게 세울것을 조심하라>

그리고 그 동일한 단락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이라고 말씀 합니다
여러분들은 이와같이 구약과 신약에서 유사한 부분을 발견할수 있습니다. 또한 지역교회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입니다.
주님의 성전인 이것을 어떻게 세워 나가고 무엇으로 세워 나가야 하는지 주의깊게 보게 됩니다.

또한 에스라 2장에서 여정에 있는 사람 중에 여리고에 있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지난 시간 말씀드린대로 여리고 자손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특징되어진 자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주님의 성전을 짓는데 일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합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제사장들이 있었습니다.
그 제사장들이 70년 포로 생활 가운데 어떻게 제사장 일을 할수 있었을까요? 그들은 바벨론 70년간 포로 되었습니다.
거기에는 어떤 성전도, 제사도, 제사장의 임무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마음은 그들이 앞두고 있는 제사장의 일을 생각하며 감동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우리는 또 다른 성경 구절에서 제사장들이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살피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이 시대에 믿는 자들인 우리도 하나님께 경배 드리는 제사장들이기 때문입니다.

아므람의 아들들은 아론과 모세니 아론은 그 자손들과 함께 구별되어 몸을 성결케 하여 영원토록 지극히 거룩한 자가 되어 여호와 앞에 분향하며 섬기며 영원토록 그 이름을 받들어 축복하게 되었으며 (대상23:13, 개역한글)

우리는 지난시간 요한 계시록 1장의 말씀을 인용하며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셨다는것을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와같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이라는것은 상세하게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나요?

제사장 일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처음 아론을 제사장으로 삼았을 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사장의 일을 이해하기 위해서 아주 중요하게 읽은 구절이 역대상 23장 13절입니다.

제사장은 두개의 책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여호와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여호와 앞에 분향하며 섬기며>
두번째 그의 임무는 <영원토록 그의 이름을 받들어 축복하는 것> 입니다.

첫번째 임무는 여호와 앞에 나아가서 그분께 분향하며 그분을 섬기는 것입니다. 두번째 임무는 그는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축복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첫번째 임무는 하나님을 향한 것이고 두번째 임무는 사람을 향한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우리가 제사장으로서 가지고 있는 임무입니다.
우리는 제사장으로서 하나님께 나아가며 하나님께 경배 드리는 일을 합니다.
하지만 또한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우리 주위의 사람들에게 해야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름을 받들어 사람들을 축복하는 것입니다.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찌니라 (벧전2:5, 개역한글)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2:9, 개역한글)

여기서 우리는 오늘날 믿는자들의 제사장으로서의 임무가 두가지로 제시되어 있다는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두가지 임무는 우리가 역대상에서 본 두가지 임무와 동일한 것을 보게됩니다.

한가지는 하나님에 대한 것입니다. 그것은 5절에 나와 있습니다. <거룩한 제사장이 될찌니라>
두번째로는 우리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에게 대한 것입니다. <왕같은 제사장이요>

5절에 나온 것처럼 거룩한 제사장으로서 우리는 하나님께 경배를 드립니다. 그리고 9절에 왕같은 제사장으로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책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책임은 신령한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의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바로 그분의 임재 앞으로까지 나아가서 드리는 것입니다.
바로 그분께 이 신령한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9절에서 사람에 대한 책임으로서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우리는 소유된 백성이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수 있다는것을 말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맞는 것이지만 핵심적인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주위의 사람들에 대한 믿는 사람으로서의 책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왕같은 제사장으로서의 책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연약한 이 섬김을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높이셔서 왕같은 제사장이라고 부르시나요?

우리는 역대상에서 제사장의 임무를 보았습니다. 제사장은 그 이름을 영원토록 받들어 축복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베드로전서 2장에서 동일하게 찾아볼수 있습니다.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참으로 주변에 그리스도를 믿는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분명하게 필요합니다. 그 복음을 듣지 못한자는 영원한 멸망 가운데로 들어가기 때문 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복음이 가리워 졌다면 그것은 멸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워 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기 가리워 진것은 단지 말로 전하는것이 가리워진 것이 아닙니다.

왕같은 제사장으로서 아른다운 덕을 선전하다는 것은 우리의 삶을 통해서 보여주는것을 강조하고 있는 표현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라스도의 삶과 인격과 덕을 우리 삶을 통해서 보여 주어야 합니다. 만약 우리의 삶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볼수 있다면 사람들은 여러분의 말에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구세주가 필요한 것을 말해줄수 있을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의 친절을 보여 줄수 있다면 그들은 그리스도에 대해서 듣고자 하는 관심이 생길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5절에는 거룩한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에 대한 책임을 말했습니다. 그리고 9절에서는 왕같은 제사장으로서 우리 주변에 대한 책임을 말했습니다.
우리의 삶이 더욱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삶이 된다면 우리 주위의 사람들은 더욱 그리스도에 대해 듣고자 하여 나올 것입니다.

이제 에스라서로 돌아가겠습니다.

제사장들은 예수아의 집 여다야 자손이 구백 칠십 삼명이요 (스2:36, 개역한글)

제사장들에 대한 부분을 먼저 말씀드렸습니다. 그들의 옷과 관련된 부분에서 특별히 언급된 것을 보게 됩니다.

역량대로 역사하는 곳간에 드리니 금이 육만 일천 다릭이요 은이 오천 마네요 제사장의 옷이 일백 벌이었더라 (스2:69, 개역한글)

<제사장의 옷이 일백벌이었더라>

하지만 그들은 성전이 다 완공되고 난 후에 이 옷을 입을 것입니다. 성전이 아직 완성되지도 않았는데 그들은 그옷을 입고서서 일이 다 끝나면 제사장의 일을 하겠다고 하는것이 아닙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모든 자들은 동일하게 하나님의 성전을 짖는 일에 동원 되어야 합니다.

36절에 제사장이 언급되고 40절에 레위사람들이 언급 됩니다. 여리고 사람들은 44절에 언급되었습니다.

레위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제사장들은 레위지파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지난시간 레위지파 사람들 중에서도 특별히 아론 자손만이 제사장이 되는것을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아론 가문에 속하지 않은 다른 사람들은 무슨 일을 할까요? 그들은 제사장이 될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역시도 성막과 관련해서 성전과 관련해서 아주 중요한 임무를 맡게 됩니다.

예를들어 이스라엘의 진이 광야에서 이동하게 될때, 레위사람들이 성막의 재료와 가구들을 옮기게 됩니다.
그리고 이 일을 하는 사람들은 30-50세 사이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지난시간 강조해 드린 사실을 다시한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일을 하는 젊은 사람들을 계속해서  찾고 계십니다.
가장 많은 일을 힘있게 할수 있을때에 하나님을 섬기시기 바랍니다. 은퇴한 후에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레위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시기가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오직 30-50세 사이의 사람들만 일할수 있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30세 미만의 사람이나 50세 이상의 성도님들이 하나님을 섬길수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레위 사람들은 힘을 써야 했기에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젊은 자들의 나이를 지정해 놓으신 것입니다.

41절에 특별히 노래하는 자들이 나옵니다. 이들은 하나님께 찬송 드리며 예루살렘으로 가는 다른 동료들을 격려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들은 아삽의 자손들입니다. 시편의 많은 시들이 아삽의 시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삽은 다윗 왕 시절에 이스라엘의 찬송을 인도했던 인도자 였습니다.

특별히 시편 중에서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가 있습니다.
왜 올라가는 노래라고 이름이 붙어 있느냐면, 이스라엘 자손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서 부른 노래였기 때문입니다.

지난 세계대전때 많은 군인들이 전쟁터에 나가면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저는 그들이 찬송가를 불렀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노래를 부르면서 그들의 군기를 붙드는 일을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노래를 부르면서 하나님을 향한 마음을 더욱 붙들었을 것입니다.

<너희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찬송을 부르면서 마음으로 하나님을 높여 찬송을 드리는 것입니다.
특별히 사도바울이 <주께 노래하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이 찬송을 부를때에 이것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단지 이 노래는 우리가 서로를 격려하기 위해서 부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께 노래하며 주님에 대해서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찬송을 할때 마음을 다하여 충성스럽게 노래를 불러야 합니다.

저는 노래를 잘하지 못합니다만, 사도바울의 말처럼 마음을 다하여 주께 찬송합니다.
이와같은 노래 부르는 자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여정 가운데 함께 하고 있었습니다.

같은장 65절을 보면 <노래하는 남녀가 이백명>이라는 구절을 보게 됩니다.
이와같이 많은 노래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참으로 노래 부를만한 가치가 있는 주제를 알고 있습니다.

시편 40편에서 우리가 진토 가운데 노래 부르도록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우리를 기가막힌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발을 반석위에 두사>

<새 노래 하나님께 부를 찬송을 내입에 두셨도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을 독려하는 사역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제 친구 중의 한명은 스코틀랜드의 석탄 광산에서 일했습니다.
그들은 아침부터 광산의 암흑 가운데로 내려가서 오전 내내 일하게 됩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빛은 자그만한 전구 몇개일 뿐입니다.
그러나 이 형제님은 그가 어느곳에 있든지 항상 찬송을 불렀습니다.

석탄을 운반할때나 땅을 파고 있을때나 그 형제님은언제나 찬송을 불렀습니다.
석탄 광산에서 일하기에 그 형제님은 머리에서 발끝까지 까맣게 석탄으로 뒤덮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일할때에 옆에서 일하는 다른 한 사람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찬송을 부르며 노래할때 그 옆에 있던 동료의 얼굴에 눈물이 흘렀기에 그 얼굴에 석탄재의 자국이 남았습니다.
제 친구 데이빗 형제님은 그분에게 무슨일이냐고 물었습니다.

"당신이 부른 찬송 소리를 들었을때 눈물이 났다"고 그는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어서 말했습니다.

"저는 믿는 자였는데 몇년동안 침륜 가운데 있었습니다."

데이빗형제님이 부른 노래는 그러한 내용의 가사를 담은 찬송 이었습니다. 마음으로 부르는 찬송은 그러한 놀라운 간증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 21편에서 다윗은 <주의 구원의 기쁨을 회복시키시고>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내가 범죄한 자를 가르치며 그를 돌아오게 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참으로 이러한 노래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여정 가운데 있었습니다.
예루사렘의 모든것은 다 훼파되었지만 다시 돌아가는 길은 소망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들은 올라가며, 고향으로 가며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42절에 또한 문지기의 자손들이 있는 것을 봅니다.
문지기라는 것은 단어에서 말해 주듯이 성전의 문을 지키는 사람들 입니다 그 성전 안에는 아주 귀한 것들이 들어 있기에 바로 앞에서 문지기들이 지키고 있어야 합니다.
또한 이 문지기 들은 성전 안으로 누가 들어가고 나오는지 살피고 있습니다. 그것이 그들이 해야하는 일입니다.

여러분은 한나가 어린 사무엘을 엘리 제사장에게 데려 갔을때 사무엘이 받은 임무를 알고 있습니다. 그는 아침에 문을 열고 또한 닫는 일을 했습니다.
저는 이 문지기에 대해서 자세히 살피기를 원합니다.

택함을 입어 문지기 된 자가 모두 이백 열 둘이니 이는 그 향리에서 그 보계대로 계수된 자요 다윗과 선견자 사무엘이 전에 세워서 이 직분을 맡긴 자라 (대상9:22, 개역한글)

이 문지기가 동 서, 남, 북 사방에 섰고 (대상9:24, 개역한글)

저희는 하나님의 전을 맡은 직분이 있으므로 전 사면에 유하며 아침마다 문을 여는 책임이 있었더라 (대상9:27, 개역한글)

22절에 그들이 이제 성전과 관련해서 택함을 입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24절에 또한 성전 동서남북 사방에 문이 있었고 문지기가 그 수만큼 이었어야 함을 말합니다.
27절에 이 문지기들은 성전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가까운 곳에 거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아침마다 물을 열어야 하는 책임이 있었기 떄문입니다.
아침마다 문을 여는 책임을 맡은 자는 멀리 살아서는 안되었습니다.

이러한 문지기가 여정에 함께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들이 돌아가는 시점에서는 성전도 없고 닫아야 할 문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믿음의 사람으로 성전이 완공될것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해야 할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많은 수의 사람들이 이 할일을 믿으며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오래된 구약의 기록을 읽었을 때 우리가 얻게 되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자기가 해야할 일에 대해서 잘 의식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우리 또한 문지기로써 그 문을 여는 책임을 맏은 자로써 너무 멀리 있어서는 안됩니다. 성전으로부터 너무 먼곳에 살아서는 안됩니다.

제시간, 그 일을 해야하는 시간에 늦을 염려가 있기 때문 입니다. 사람들을 들어오게 하는 중요한 임무를 놓쳐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지역모임에서 우리가 가지는 책임과 어떻게 연관 지을 수 있을까요?

우리가 다른곳으로 이사하게 될때, 여러분은 주님의 뜻을 생각하며 이사 계획을 하고 있나요?
참으로 지역모임과 가까운 거리를 고려하며 모임에 참석하고 도울 수 있는것을 생각하고 있나요?

참으로 그 장소가 여러가지 면에서 편리하고 그곳이 좋아서 그곳으로 옮기려 하고 있나요?
문지기들은 주님의 일에대한 책임을 맡고 있었고 그것을 위해서 성전에 가까운 곳에 거했던 것입니다. 참으로 그 문지기들이 자기가 해야 하는 일 가까이서 거하고자 했던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43절에서는 이제 느디님 사람들이 나옵니다. 참으로 이들은 흥미로운 그룹들 중 하나입니다. 여러분들 중에 "느디님 사람들이 누구지?" 하는 질문을 하실런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분들은 여호수아 9장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여호수아 앞에 자신의 종족을 속이고 나아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고 이방의 다른 자손 이었습니다.
그들은 여호수아 앞에 나왔을 때 아주 먼곳에서 왔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아주 낡은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옷을 보여주면서 "우리가 우리 나라를 떠날때에 이곳은 새옷이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신발을 보여주면서, 곰팡이가 핀 빵을 보여주면서도 같은 의미로 말했습니다. 그들은 여호수아를 속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그들의 말을 믿고 그들을 받아들이고 그들이 이스라엘 자손과 함께 있게 하였습니다.
여호수아가 그와같은 선언을 하였을때, 그것은 다시 취소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속았을찌라도 그것을 무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그들에게 해야 할 일을 주었습니다. 드것은 두가지 입니다.
한가지는 물깆는 일입니다. 두번째는 나무를 자르는 일입니다.

여러분은 그일이 간단한 일이라고 생각하실런지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그와같이 물을 길어오고 나무를 베는일을 하였습니다.
저는 분명히 그 베어온 나무들은 음식을 만드는 재료로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무가 난방용 재료로는 사용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느디님 사람들이 지역교회에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그들이 하는 그것은 아주 하찮아서 아무도 하지 않으려고 하는 일을 말한다고 생각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매력적이지 않더라도 그것이 반드시 필요한 일임을 여러분들은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무도 물을 길어오지 않아서 물이 없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5만명의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여정 가운데 있습니다. 또 그뿐 아니라 여러가지 가축들이 그들과 함께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와같은 여정 가운데 필요한것은 물을 길어오는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여정 가운데 음식을 먹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수많은 요리를 하기 위해서 나무들이 항상 준비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지역교회 안에서 어떤 일이 있든지 기꺼이 하고자하는 마음을 나타내 줍니다.
참으로 느디님 사람들은 여호수아가 받아 주기만 한다면 어떠한 하찮은 일이라도 기꺼이 하기위해서 들어왔던 것입니다.

이후에 여러가지 그룹들이 나오며 우리가 더욱 살펴볼 부분들이 있습니다.

64-65절에서 이 일행의 전체 수를 보게 됩니다.

64 온 회중의 합계가 사만 이천 삼백 육십명이요
65 그 외에 노비가 칠천 삼백 삼십 칠명이요 노래하는 남녀가 이백명이요
(스2:64-65, 개역한글)

이 모든 사람들이 다 먹을 음식이 필요 합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그 여정 가운데 몇달동안 먹을 음식인 것입니다.

66-67절은 말과 노새와 약대와 나귀등 함께 하는 가축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66 말이 칠백 삼십 륙이요 노새가 이백 사십 오요
67 약대가 사백 삼십 오요 나귀가 육천 칠백 이십이었더라
(스2:66-67, 개역한글)

우리는 성경이 왜 이스라엘 자손들이 데리고 가는 가축들의 수를 적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 주님께서는 주님의 백성들의 삶과 관련된 상세한 부분까지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삶 가운데서 선을 그어놓고 "이것은 영적인 부분이고 이것은 주님과 상관없는 부분이다."라고 말할수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만찬에 참여하는것은 영적인 것이라고 부르고 월요일부터 직장에 가서 일하는 것은 세속적인 일이라고 말하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구약과 신약에서 이 두가지 일은 차이가 없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가운데 모든 상세한 부분에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너희가 무엇을 하든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라>

우리가 비록 세속적인 직장 생활을 할때라도 우리는 그것을 주님께 하듯 해야 합니다.
그래서 여기 이스라엘 자손들이 데리고 가는 가축들에 대해서도 관심있게 기록해 놓은 것입니다.

이제 68절에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얼마나 주님을 위해서 헌신적으로 드렸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에스라 1장에서는 바벨론에 남아 있는자들이 이스라엘 성전 건축을 위해서 자원해 드린것을 보았습니다.

68절에서는 어떤 족장들이 이스라엘 여호와의 전토에 이르러서 하나님게 드리기 위해서 즐거이 드린것을 보게 됩니다.
바벨론에 남아 있는자들이 자원하여 드렸고, 또한 여정과 함께 돌아온 자들이 이 사역을 위하여 자원하여 드린 것입니다.

역량대로 역사하는 곳간에 드리니 금이 육만 일천 다릭이요 은이 오천 마네요 제사장의 옷이 일백 벌이었더라 (스2:69, 개역한글)

<역량대로 역사하는 곳간에 드리니>

'역량대로'라는 말씀을 주의깊게 보시기 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드릴 수 없는것 이상의 것을 드리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매주 첫날 우리가 일하여 얻은만큼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고린도전서 16장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의 첫날에 이 두가지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의 첫날에 함께모여 주님을 기억하게 됩니다.그리고 주의 첫날에 함께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막이 지어졌을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넘치도록 드린것을 보게 됩니다.
또한 출애굽기에서 그들이 넘치도록 자원하여 가져온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모세는 그들에게 "이제 충분하니 더이상 가져오지 말라"고 말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그만큼 후히 주님께 드렸던 것입니다.
이제 그들은 70년 동안 포로생활에도 불구하고 후히 드리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주님께 자원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69절 마지막 부분에 제사장의 옷이 일백벌 있었던 것을 기억하게 됩니다.
이 제사장 옷은 70년간 간직되어 오며 그것이 다시 사용될 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제사장 옷은 영광과 아름답게 특별히 제작된 것입니다.

아름답게 그 옷에 수가 놓여있고 아름다운 보석들이 달려 있습니다.
그 중에 대제사장의 옷은 더 특별히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습니다. 모든 제사장의 옷이 영광과 아름답게 지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 제사장의 옷을 가져오면서 어느날 다시 사용될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70절의 이 긴장의 마지막에 이 말씀을 보게 됩니다.

이에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백성 몇과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과 느디님 사람들이 그 본성들에 거하고 이스라엘 무리도 그 본성들에 거하였느니라 (스2:70, 개역한글)

그 여정의 끝에 그들은 마침내 다다랐습니다. 이것은 몇달이 걸릴 여정이었습니다. 아마도 4개월이 걸렸으리라 예상 합니다. 우리는 에스라가 그가 인도하여 귀환했을때 정확이 얼마나 걸렸는지 기록하였는지를 보게 됩니다.

3장 1절에 <칠월에 이르러> 라는 표현을 봅니다. 그리고 여기 한 사람에 대해서 특별히 언급 합니다.
그들은 5만명 정도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은 아주 많은 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사람들이 모두 한 마음으로 모였습니다.

그들은 <여기 일제히 예루살렘에 모인지라>라고 기록합니다. 개별적인 것이 아닌 한 마음으로 모인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동일한 것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그갓은 바로 "우리가 어떻게하면 성전을 빨리 지을까" 입니다.

우리는 2장 마지막 절에서 그들이 후히 드린것을 보았습니다.
3장 1절에서는 그들이 하나된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과 관련해서 하나됨이라고 하는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지나치게 강조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17장에서 주님께서 세번에 거쳐 <그들을 하나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한것을 보게 됩니다.

세계 대전기간에 윈스턴 처칠은 이런 말을 한적이 있습니다.
그는 여러번 이런말을 했습니다. "하나가 된다면 우리는 버틸 것이다."

세계 지도자들의 말은 성경의 말처럼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의 말은 성경의 가르침과 같은면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마음으로 일제히 예루살렘에 모인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방향으로 이끌고자 하지 않았고 어떤사 람들은 저 방향으로 가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한마음으로 하나님의 성전을 빨리 짖기위해서 모인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행전 2장에 나온 오순절의 축복을 보게 됩니다.
그 자리에는 그다지 많은 사람들이 모이지 않은것을 보게 됩니다.

예루살렘에 모인 사람들은 5만명이었고 오순절에 모인 성도들은 120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들이 한 마음으로 한 장소에 모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한 장소에 사람들이 모이는 것은 쉬운 일 입니다. 그러나 한 장소에 사람들이 한 마음으로 모이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하지만 오순절 날에 그들은 한 마음으로 같은 장소에 모인 것입니다.

참으로 거룩하신 성령님께서 임하셨을 때 이 놀라운 축복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곳에 모인 사람이 성령의 충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단지 성령이 집을 가득 채우신 것만이 아니라 집안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가득 채우신 것입니다.

이제 그들과 함께 베드로가 일어나 복음을 전파할 때 그 복음을 듣고 삼천명이 구원받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참으로 그 하나됨의 축복을 주신 것입니다. 그 하나됨의 축복을 지금도 주시고 계십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형제가 연합하여 함께 있는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축복을 내리십니다.

제 고향에 있는 모임에는 약 70명의 성도가 있습니다.
제가 할수 있는 일은 하나님께서 주신 하나됨의 축복이 더욱 견고하게 유지 되도록 돕는 것입니다.
다른말로 하자면 저로인해 이 하나됨이 손상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사도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것을 힘써 지키라>

우리가 이 구절을 통해서 배우는 것은 우리 자신이 하나됨을 만드는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하나됨은 오순절날 성령님의 축복으로 하나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성령의 하나됨을 유지해야 합니다.

성령의 하나됨은 이미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것은 성령께서 하나되게 하신것을 힘써 지키는 것입니다.
힘써 지키는 것은 무엇을 의미 합니까?

우리가 어떤일을 하게 될때 그것을 하는데 있어서 힘쓰는 것입니다.

제가 어릴적에 <힘쓰는 그리스도인들> 이라는 책이 있었습니다.
젊은 성도들이 모여서 힘쓰는 그러한 내용이었습니다.

힘쓰는 것은 어떠한 임무를 하는 것을 또한 말해줍니다. 그 임무는 쉬운것이 아닙니다. 그 임무를 이루기 위해서 어려운 여정이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성령께서 하나되게 하신것을 힘써 지키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나요? 나에게, 가정에게, 모임에게 각각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됨에 대해서 손상되지 않도록 우리 책임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각자의 모든 책임 입니다.
참으로 우리는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것을 힘써 지켜야 하는 각자의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는 에스라 2장에서 후히 드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3장 초반부에서 하나되게 하신것을 보았습니다.
이제 그들은 훼파된 성전의 예루살렘 성의 가운데 있게 됩니다.

그러한 상황 가운데서 그들은 무엇을 처음해야 합니까?
여기 그들이 어떠한 대화를 나누었을지 생각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가족들을 보십시오. 우리 가족들의 집을 먼저 만들어야 합니다." 라고 말했을지 모릅니다.
혹은 어떤 사람들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성벽을 먼저 만들어야 합니다." 라고 말했을지 모릅니다.

참으로 그들에게 여러가지 생각들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어떤 한 사람이 영적으로 말하기 전까지 많은 말을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영적인 사람이 말하기를 "우리가 제일 처음 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을 위한 단을 만드는것 입니다. 다른 모든일은 그 후에 할수 있습니다."라고 했을 수 있습니다.
참으로 그들은 70년 동안 멈추었던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일을 가장 먼저 하자고 한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항상 우선순위에 두어야 합니다.
그것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동일하게 성경이 가르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을수 있습니다.

예를들어 에스겔에 나오는 여러가지 의미에 대해서 우리는 어려워 하고 모를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약 성경에서 모르는 부분이 있을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는 것을 말한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명백하게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명백한 가르침 중의 하나가 하나님을 항상 우선순위에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어떻게 시작하고 있습니까? <태초에 하나님이..>

하나님께서 모든 창조의 처음에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에서도 똑같이 마치고 있습니다.
율법이 처음 주어졌을 때 처음의 계명이 무엇입니까? <나 외에 다른신을 두지 말찌니라> 항상 하나님이 먼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천지창조에서부터 그 계시록으로 마칠 때까지 율법을 주실때에도 동일한 것입니다.
제사드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우선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원리에 따라 사람들은 단을 가장먼저 만들게 됩니다.

젊은 성도님들이든지 나이많은 성도님들이든지 항상 우리는 하나님을 가장 먼저 두어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엘리야가 한 과부의 집에 방문한 것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아주 슬픈 장면입니다. 과부는 자기가 가진 자원을 모두 썼기 때문입니다.

엘리야가 과부의 집에 갔을때 과부는 마지막 식사를 만들기 위해서 나뭇가지를 줍고 있었습니다. 그녀와 아들이 먹을것 외에는 남은것이 없었습니다. 엘리야는 그런 과부에게 먼저 나를 위하여 음식을 만들것을 명합니다.
우리는 그를 보고 어떻게 그렇게 동정심이 없느냐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이야기가 어떻게 끝나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과부에게 다하지 않는 가루통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기름 한병은 결코 거기서 기름이 다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 가뭄이 끝날때까지 멈추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그녀는 이 풍부하고 놀라운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까?

그가 엘리야에게 먼저 주었을때, 하나님을 가장 먼저 둔 것입니다.

시간이 다 되었는데요. 오늘 우리는 하나님을 우선순위에 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우리는 얼마나 놀라운 사실을 에스라서에서 보고 있나요?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사람들은 하나님을 가장 우선순위로 두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 말씀들로 축복해 주시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