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린도전서 11장_ 머리되심 >
2019년 3월 1일 금요일
강사 : 짐 자비스 형제님
동시통역 : 강성찬 형제님
< 고린도전서 11장_ 머리되심 >
이번시간 고린도전서 11장 말씀을 보겠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너희가 모든 일에 나를 기억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전하여 준대로 그 유전을 너희가 지키므로 너희를 칭찬하노라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무릇 남자로서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요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머리 민것과 다름이 없음이니라 만일 여자가 머리에 쓰지 않거든 깎을 것이요 만일 깎거나 미는 것이 여자에게 부끄러움이 되거든 쓸찌니라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에 마땅히 쓰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또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니 이러므로 여자는 천사들을 인하여 권세 아래 있는 표를 그 머리 위에 둘찌니라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것 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으나 모든것이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 너희는 스스로 판단하라 여자가 쓰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마땅하냐 만일 남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욕되는 것을 본성이 너희에게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만일 여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영광이 되나니 긴 머리는 쓰는것을 대신하여 주신 연고니라 변론하려는 태도를 가진 자가 있을찌라도 우리에게나 하나님의 모든 교회에는 이런 규례가 없느니라"(고전11:1-16).
우리는 고린도전서 11장에서 가르치고 있는 머리되심의 진리를 오늘 이 시간 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읽지 않았지만 11장 후반부에는 주님의 만찬에 대해서 우리가 기념하는 주님에 대해서 예배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흥미롭게 이 장을 통해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머리되신 진리가 주님을 기념하는 주님의 만찬과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고린도 지역에 사도바울이 처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방문하게 된것은 기원후 약 50년 정도입니다. 그때 사도바울의 복음전파를 통해서 여러 영혼들이 구원받았음을 사도행전 18장을 통해서 봅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18장에서 그때 당시의 고린도 지역의 상태가 어때했는지도 확인할수 있습니다. 고린도 지역은 그 당시에 우리가 흔히 말하는 같은 직장의 연합체, 철학 문학이 발달한 지역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그리스도인들은 구원받기전에 그런 많은 동호회, 사회적인 그룹에 소속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도시에는 여러 우상을 섬기는 신전이 있었고 우상숭배와 관련해서 창기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고린도 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것과 연관되어 부도덕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제 그런 가운데서 구원받은 성도들은 그런 부도덕한 사회 속에서 여러가지 압박을 받게 됩니다. 여러분이 그러한 상황들을 아신다면 그것이 오늘날 이 시대에 그리스도인이 사는 상황과 비슷하다고 느낄실 수 것입니다. 동시대에 그러한 사람들로부터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이제 그들 역시 우리들과 같이 그리스도인들에 대해서 적대적인 사회를 살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고린도 교회의 가르쳐지는 머리되심의 진리는 그러한 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대단히 중요한 진리였습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에서는 각 장마다 주님의 주되심을 강조하는 말씀이 가르쳐지게 됩니다. 우리가 머리되심을 온전히 순종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주되심에 온전히 순종해야 함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는 각자 자기가 생각하는것을 주장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고린도전서 11장에서 가르치는것은 이것입니다. 11장 전반부에 나타난 머리되심에 우리가 온전히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는 실제적으로 후반부에 나타난 만찬에 참여할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다시한번 말씀드리면 11장 전반부에 나타난 주의 머리되심에 온전히 순종하지 않는다면 후반부에 나와 있는 주의 만찬, 상징물에 참여할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너울에 대해서 말씀을 가르칠때에 자매들은 "이것은 나에대한 말씀인가?" 하면서 그분들만 긴장하면서 듣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머리되심에 대한 진리는 여자뿐만 아니라 남자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진리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흐름은 고린도전서 11장에서 가르치고 있는 머리되심에 대한 질서와 완전히 반대로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1960년대의 문화혁명이라는 시절부터 고린도전서 11장에 나온 머리되심의 질서를 크게 훼손해 왔습니다. 그 후 50년 이상 공개적으로 고린도전서 11장이 말하는 진리를 대적하고 반대하며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그 결과로 말미암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움츠려들고 여기서 말하는 진리를 더이상 실행하지 않기를 원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이러한 세상에서 이 진리를 계속해서 실행해 나가기는 너무나 어렵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번 이렇게 생각해 보겠습니다. 남자들이 여자들에게(자매들에게) 정말로 너무나도 하기 힘든 실행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까? 하지만 우리가 11장 말씀을 살펴 본다면 우리가 주님께 순종하고 그분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이 일이 그렇게 어렵지 않음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하는, 물론 우리가 그분들을 존경하기는 하지만 많은 분들이 그 머리되심에 순종하는 너울을 쓰지 않는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특별히 여기 기록된대로 머리되심을 증거하는 여자들이 너울을 쓰는것과 긴머리를 여자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다섯가지에 거쳐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어떻게 이 질서에 따르지 않고 있었는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이제 이러한 실행을 하지 않는 이유에 첫번째로 사람들은 그것은 문화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더 이상 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여기 나와있는 사도바울이 이 문제를 다루는것은 특별히 고린도 지역에 있는 문화적인 문제 때문에 이것을 언급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해당되는 가르침이 아니고 오직 1세기의 고린도 성도들을 위한 그런 가르침이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16절에서 우리가 이미 읽은대로,
"변론하는 태도를 가진 자가 있을찌라도 우리에게나 하나님의 모든 교회(들에는)복수형으로 이러한 규례가 없느니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는 특별히 이것은 고린도 교회에만 국한된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교회에 적용되는 문제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만일 그것을 문화적이라고 주장 한다면 우리는 "그렇다면 그들은 무슨 문화를 가지고 있었습니까?"라고 반문할수 있겠습니다. 제가 속해있는 캐나다 브림튼 모임의 성도들은 여러나라, 여러민족으로 구성된 모임입니다. 우리 모임의 성도님들 중에는 아프리카 케냐에서 오신분도 있고 말레이시아에서 오신분도 있고 중국에서 오신분도 있습니다. 그리고 필리핀, 자매이카, 아일랜드에서 오신분도 계시고 또한 캐나다분도 계십니다. 그리고 또한 제 아내의 고향인 뉴폴랜드에서 오신분도 계십니다. 그리고 어느 성도님들은 캐나다 본토에서 살았던 원주민들도 계십니다. 그래서 이 한 모임에 열한가지의 다양한 문화가 섞여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분명하게 믿는것은 고린도전서 11장에서 말하는 진리는 모든 문화에 적용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같은 실행을 하지 않는 두번째 이유로 사람들은 종종 개인적인 이유를 듭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것은 단지 사도바울의 개인적인 의견이다' '사도바울이 개인적으로 여성들에 대해서 차별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와같은 차별적인 주장을 한 것이다.' 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다른 여성들에 대해서 자신의 어깨 아래로 낮추어보고 그렇 태도를 가지고 있었기 떄문에 그렇게 주장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고린도전서 14장 37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줄 알라"(고전14:37).
그러나 이 말씀을 보면, 이 구절이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는것처럼 이것은 사도바울이 개인적으로 말하고 있는것이 아니고 주님의 명령인 것입니다. 또한 사도바울은 여성에 대해서 차별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전혀 발견할 수 없습니다. 사도바울은 참으로 여성이든 남성이든 차별없이 동등하게 그들을 존중하며 그들 모두의 복지를 그는 구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세번째로 이와같은 실행을 하지 않는 이유로 "이것은 단지 형제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의 유전일 뿐이다."라고 합니다. 만일 이러한 실행이 우리가 고안해낸 것이라면 그렇게 말할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실행인 것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장에서는 "그러므로 형제들아 이미 있는 그 진리에 굳게서라" 라고 말합니다. 말로나 서신으로 받은 그 진리를 굳게 붇잡을 것을 사도바울은 말씀 합니다. 우리는 이것이 단지 사람들이 만들어낸 그런 전통이 아니고 오직 성경에 근거한 실행임을 분명히 찾아볼수 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이러한 실행을 하지 않는 이유로 그들은 이것은 단지 율법적인 것이라고 그들은 말합니다. 당신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는 형식적인 것에만 매달리고 있다고 비난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율법주의적이 되었다고 비난 합니다. 물론 어떤 분들이 이 말씀을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것을 넘어서 지나치게 강요하는 실수를 할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러한 것들을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성경 자체가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래서 그러한 예로 15절의 말씀을 가지고 너무 지나치게 범위를 넘어서 가르치고 있는 한 예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만일 여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영광이 되나니 긴 머리는 쓰는것을 대신하여 주신 연고니라"(고전11:15).
자세하게 말씀드리지는 않겠지만 어떤 형제님들이 이것에 대해서 이 말씀을 가지고 여자의 머리가 얼마나 길어야 하는 것으로 논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단순하게 가르치고 있는 것은 여기에 사용된 동사가 능동형이라는 것입니다. 여기 "여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이것은 능동형이기 때문에 그 여자 자신이 머리를 길게하고 있으면, 이것은 단순하게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 여성이 머리를 길게 기른다는 의미입니다. 어떤 여인의 경우에는 머리가 긴것이 그 여인에게 맞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여성의 경우에는 신체적인 문제상 머리카락을 길게 기르지 못하는 제한이 또 있을 수 있습니다. 제가 복음을 전한 집회에서 만난 캐나다의 젊은 자매님은 발꿈치까지 닿는 긴 머리 길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분은 아름다운 금발 머리를 길게 길렀습니다. 참으로 주님을 위해서 그렇게 했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어떤 자매님들은 간신히 그 머리가 어깨에 닿는 길이를 가지고 있는 자매님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자매님들 역시 그 머리를 길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주제는 그녀 자신에 대한 영광의 주제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머리되심보다도 그녀의 영광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가지 더, 이와같은 머리되심의 진리를 실행하지 않는 이유를 사람들은 외형적으로 들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속을 관심을 두고 보시지 외향적인 것을 어떻게 하는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신약성경에서 우리의 마음을 강조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또한 신약성경에서 우리의 행동도 중요하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외형적으로 어떻게 하라고 하신 분명한 명령을 우리가 따르지 않을 권리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성의 긴 머리에 대해서 말씀드렸는가하면 베드로전서 3장에서는 그 여성의 옷에 대해서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전서 3장에서 여성의 옷을 말씀하신 후에 그 다음에 그 마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외형적인 것 세가지를, 특별히 고린도전서 11장에 나와있는것을 중점적으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구약성경에서는 많은 것들이 외형적으로 가득차 있는것을 보게 됩니다. 성막과 성전과 그리고 그 안에있는 여러가지 제사들이 그렇습니다. 그리고 신약성경에서는 우리의 마음 내적에 있는 것을 강조하여 말씀 하십니다. 하지만 신약성경에도 하나님께서 특별한 진리를 나타시내기 위해서 말씀하신 외형적인 것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중에 세가지가 바로 여기 11장에 있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한국어 성경에서 다른 상징물을 발견하신 다면 저에게 나중에 말씀해 주십시요. 이 세가지가 이것입니다. 여인들이 쓰고 있는 너울, 두번째가 떡, 세번째가 잔입니다.
이 세가지가 유일한 하나님께서 우리가 밖으로 나타내보이기를 원하시는 상징물입니다. 그래서 감사하게도 이 시간 제가 여러분을 바라볼때 바로 이러한것이 나타나지고 전시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남자들에게 그가 입으로 해야되는 책임을 말씀하셨고 여자들에게는 눈에 보이게 해야 하는 책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소리로 하는 증거는 남자들에게 주신 것이고 가시적으로 하는 증거는 여자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몇가지 것들이 이것을 이해하는데 방해가 됩니다. 그것을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첫번째 어려움은 우리가 그것을 볼때에 실행하기 너무 어려운 것이라 그것을 희석시키고 약화시키려 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주 최소화해서 그것을 개인의 선택에 맏겨 버리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고싶어하면 행하고 하고 싶지 않으면 그들의 선택에 맏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말씀을 읽어볼때 이 명령은 개인이 선택해서 하거나 말거나 할수 있는 성향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예를들어 3절에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한다."라고 말씀 합니다. 그리고 이 부분을 살펴보게 될때 "마땅히 ~해야한다" "마땅히 ~하면 안된다" 이렇게 강조해서 말씀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14장에서 우리가 본 것처럼 이것은 주의 명령이라 말씀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주의 명령으로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11장의 진리를 육신적인 성향으로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영적인 방법으로 영적인 태도로 그 말씀을 받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가 이 말씀을 행하게 될때 한가지 어려운 것은사람들이 "다음에는 또 어떠한 어려움이 있는거야?" 하면서 이것을 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두려움을 만들어내는 이유는 우리가 그것을 왜 행해야 하는지 모르고 그냥하기 때문에 때때로 그러한 두려움이 생겨나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잠시 우리가 왜 그것을 해야하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 설명하고자 합니다. 단지 이것을 그냥 해라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고 이 견고한 진리를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1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머리되심에 대한 진리를 한가지 설명해주는 예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첫번째 질문은 과연 머리되심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단지 여자들에게만 해당하는 진리인가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앞에서 말씀드린것처럼 이것은 자매뿐만 아니라 형제에게도 중요한 진리 입니다. '머리'라고 했을때 이것은 물론 우리의 신체 일부 입니다. 그러나 머리는 어떤 '조직의 장'을 가르킬때 사용되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머리라는 것은 지위나 권위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장에서 질서와 행정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머리되심의 진리가 훼손 된다면 질서도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복음적인 단체들을 둘러보게 될때에 놀라게 되는것은 그 가운데 머리되심의 진리가 무너졌기 때문에 그 가운데 질서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행하고 있는것이 하나님의 말씀과 얼마나 멀어져 있는가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성경적으로 행하고 있는 모임을 바라보게 될때 참으로 그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머리되심의 진리가 굳게 지켜지고 있는것을 보게 됩니다. 참으로 그 가운데 그 모임에 속해있는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그 말씀에 그대로 순종하고 있다는 것에 기쁨을 느낄 것입니다. 머리되심에 대한 진리를 보게 될 때에 하나님 자신이 머리되심에 통해서 나타나시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3절 후반부에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바로 이 머리되심의 진리는 우리를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이끌어 갑니다. 여기서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는것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분명한 권위를 가지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 여기에 어떠한 차등이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본질적인 신성은 영원히 그 두분에게 있어서 동등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 기능에 있어서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 아들 하나님의 기능은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이 놀라운 진리를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께서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 드릴때에 찾아보게 됩니다. 주님께서 기도하시기를 "아버지여 이 잔이 내게서 옮겨지기를 원하옵니다. 그러나 내뜻대로 하지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참으로 이 주제는 우리가 많은 시간 다룰 수 있는 내용일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여기서 간단히 강조해서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은 동등하신 분이시지만 그분의 권위와 기능에 있어서 이 차이가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번째 구별이 되는것은 성별의 차이 입니다. 남자와 여자에 대해서 그 차이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3절에서 분명하게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라고 말씀 합니다. 여기 어떤 결혼 관계가 생각되어 있는것이 아닙니다. 어떤 현대적인 번역에서는 "아내의 머리는 남편이요"라고 말씀하지만 여기서는 단지 성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7장에서는 결혼관계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11장에서는 단지 여자와 남자의 차이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8-9절은 이렇게 또한 말씀 합니다.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또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니"(고전11:8-9).
하나님께서는 이 질서를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실때부터 정하신 것입니다.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창조된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간에 있는 질서를 이제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때 남자와 여자에게도 그와같은 질서를 만드시고 나타내 보이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여자는 남자를 돕는자로 창조된 것입니다. 그를 주관하는것이 아니고 남자를 돕는자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사단은 이러한 것들을 지켜보며 하나님께서 어떠한 의도와 질서를 가지고 남자와 여자를 만드신 것인지 알았습니다. 그리고 사단은 하나님이 왜 그와같은 방식으로 질서를 두셨는지도 이해했을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단은 그 질서를 깨고 여자를 먼저 미혹한 것입니다. 사단은 아담에게 먼저 다가간 것이 아니고 하와에게 먼저 다가간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믿기로 그것은 창세기 3장에서 우리가 확인해 볼수 있는데요. 아담은 그와같은 일이 일어날때 그냥 지켜만보는 자리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질서가 거꾸로 뒤바뀌어 버린 것입니다. 하와가 사단이 미혹하는 말을 들었을때 그는 자신의 남편인 아담에게 지도와 도움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가정의 머리로 창조된 아담은 하와에게 다가가서 하와를 돕고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결과가 어떤지를 우리는 보지 않습니까? 바로 인류가 타락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실때 처음에 제정하신 질서를 사단은 완전히 뒤바꿔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이 시대에도 사단은 똑같은 일을 지금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질서를 뒤바꾸는데 열심인 것입니다. 우리는 아담과 하와의 성별의 차이를 여기서 보게 되며 아담과 하와의 영광의 차이도 여기서 보게 됩니다. 아담의 영광은 그가 여자의 머리로 있는 것입니다. 하와의 영광은 돕는자로 있는것이 그의 영광입니다. 그리고 사단은 바로 이것을 바꾸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뀌어진 질서의 결과는 영광은 훼손되고 수치만이 남은 것입니다. 그리고 11장에서 말하고 있는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이 질서가 이 지역교회 안에서 나타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같은 질서를 나타내는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선택하신것이 바로 여자들은 너울을 쓰고 남자들은 머리를 가리지 않는 것입니다. 제가 한국에 도착했을 때 마포모임에 방문해서 즉시로 제가 하는것은 청중들의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지켜본 결과 제가 내리는 결론은 제 마음에 큰 기쁨이 있다는 것입니다. 자매님들이 너울을 쓰고 있음으로서 고린도전서 11장에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질서를 순종하고 있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자들이 머리를 가리지 않은 모습을 볼때에 하나님의 머리되심을 나타내고 있는 역할을 담당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집회를 같이 참여하면서 더욱 확인하게 되는 것은 남자들이 입을 열어서 소리로 증거하며 여자들은 잠잠하게 머리되심의 진리를 나타내고 있는 것을 볼때에 참으로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와같은 것을 하지 않고 뭔가 다른방법으로 하고자 할때 하나님께서 정하신 질서를 훼손하고 그분께 영광을 돌려드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왜 너울을 통해서 이와같은 머리되심을 나타내셨는지를 일곱가지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첫번째로 교리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3-6절까지 그것이 나와있고 이에대해 이미 여러분께 설명 드렸습니다. 그리고 두번째 이유를 말씀드리기 전에 다시한번 강조드리는 것은 남자와 여자의 차이에 차등이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하나님께서 두신 위치의 차이 입니다. 우리가 앞에서 예로 말씀 드린 것처럼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하나님께서는 동등하신 분이십니다. 아들 하나님께서 아버지보다 못한 그런분이 아니신 것입니다. 러나 그 기능에 있어서 차이가 있는것을 말씀 드렸습니다. 그리고 이제까지 자매님들을 주제로 하는 말씀들이 더 많았다면 이제는 형제님들을 대상으로 하는 말씀을 좀더 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이 진리를 온전히 이해하면 할수록 우리는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더 열등한 존재라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인격에 있어서 지적인 능력에 있어서 모든면에 있어서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열등하지 않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매님들은 순종의 자리에서 우리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와같은 일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형제님들에게 말씀드리고자 하는것은 자매님들에게 존경과 조심스러운 돌봄을 해야하는 대상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다른 자매님들을 열등한 존재로 느끼게 하는 말이나 행동을 조심해서 하지 말아야 할것입니다. 또한 이 모임의 남자들을 향한 이 말씀을 순종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순종으로 존경하는 마음으로 대해야 할것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현 시대에 머리됨의 질서가 공격받고 조롱받고 비판받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한국의 문화적인 성격으로 그것이 아직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았다 할찌라도 이 질서가 온 서계에서 다 무너지고 있는것을 보게 됩니다. 첫번째로 머리되심에 대한 이유로 교리적인 가르침을 보았습니다.
두번째 이유가 하나님께서 이와같은 방식으로 의도로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7-9절 입니다.
그리고 10절에서 우리는 다른 흥미로운 이유를 살펴보게 됩니다. 그것은 천상에 있는 존재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천사들이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매님들은 여러분들이 너울을 쓰는 가운데 잠잠한 가운데 이것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을 천사들이 지켜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을 사용하셔서 그들로부터 천사들이 머리되심이 어떻게 실행될수 있는지를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11절과 12절에서는 네번째 이유로 상호적인 이유라고 말씀 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머리되심을 나타내시면서 그런 가운데 남자와 여자가 상호간에 존중하는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13절부터 15절까지 우리의 본성적인, 육체적인 이유로서 또한 머리되심의 진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여기 이것이 왜 본성적이고 육체적인 이유라고 말씀드렸는지 잠깐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언제나 남성과 여성간에 분명한 구별이 있기를 원하십니다. 단지 우리가 남자와 여자로 태어난 차이뿐만 아니라 다른사람이 볼수 있는 형태로 그 차이가 나타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성경을 연구할때에 다른 이 성의 차이를 나타내는 두가지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한가지는 율법하에 주어진 것이고 다른 한가지는 은혜 아래에서 주어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두가지 원리는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여자는 남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요 남자는 여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라 이같이 하는 자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자니라"(신22:5).
그리고 두번째 것은 우리가 읽은 고린도전서 11장에 있습니다. 남자는 짧은머리를 갖는 것이고 여자는 긴머리를 갖는 것입니다. 첫번째, 이 한가지는 우리가 어떻게 옷을 입느냐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리고 두번째 우리의 외모와 관련된것은 우리의 머리 길이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만일 남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욕되는 것을 본성이 너희에게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만일 여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영광이 되나니 긴 머리는 쓰는것을 대신하여 주신 연고니라"(고전11:14-15).
14절에서 분명하게 남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욕이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조적으로 여자에게 긴 머리는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제까지 이 말씀을 잘 따라오셨을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과 관련해서 에덴동산에서 어떤일이 있었는지를 우리는 함께 생각해 보았습니다. 바로 처음부터 사단은 하나님이 정하신 이 질서를 훼손하고자 시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사단은 계속해서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를 훼손하고 있는 시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지냈던 60년대에 분명히 기억하지만 그때 당시에 모든 세상은 이 질서를 다 지키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온 세상은 오늘날 이 질서가 다 훼손되어 있습니다. 유일하게 지역 모임만이 남아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대에 통념상 남자는 바지를 입고 여자는 치마를 입는다는것을 알고 있습니다. 형제 자매님 여러분 우리가 이러한 구분을 할수 있는한 최대한 지켜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러한 질서로부터 멀리 떠나 간다면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지 못하는 불명예가 되는 것입니다. 며칠전에 저는 이런 뉴스를 듣게 되었습니다. 아주 크게 알려진 뉴스 입니다. 이제 헐리우드에서 오스카상을 시상하는 어떤 유명한 배우가 여자옷을 입고 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여자옷을 입고 간 배우는 아주 칭찬을 받고 아주 용감한 행동이라고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 일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영광이 되지 않는 일을 그가 행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정하신 것을 분명하게 세상에 증거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어야 합니다. 제가 이것을 마치면서 요약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처음에 의도하신 분명한 차이를 우리가 섞으려고 희미하게 하려고 하는 시도를 하지 맙시다. 참으로 기쁜것은 제가 만나는 형제 자매님들이 이와같은 사회를 분명하게 민감하게 인식하고 이와같은 차이를 유지하고자 하신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에 대해서 "아, 캐나다에서 온 어떤 전도자 분이 이렇게 이야기 했더라"하고 생각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마지막 우리가 이 실행을 해야하는 두가지 분명한 이유를 16절에 설명하고 있습니다.
"변론하려는 태도를 가진 자가 있을찌라도 우리에게나 하나님의 모든 교회에는 이런 규례가 없느니라"(고전11:16).
그는 이것이 사도의 권위를 가지고 말하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이러한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우리가 머리됨의 진리를 분명하게 실행해야 하는 이유로서 고린도전서 14장 37절이 분명하게 말씀 합니다.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줄 알라"(고전14:37).
우리는 오늘날에는 선지자가 없는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신령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령한 그리스도인은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명령인줄 알고 이것을 실행하기를 기뻐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말씀들을 통해서 주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속에 축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집회후에 이 주제에 대해서 더 질문할 것이 있는분은 언제든지 와서 질문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