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인 교회와 지역교회의 구분
< 몸인 교회와 지역교회의 구분 > 조나단 블랙 형제님
에베소서 1장 19절부터 23절까지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엡 1:19-23).
요한계시록 2장 1절부터 5절까지 읽도록 하겠습니다.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 2:1-5).
고린도전서 12장 말씀 보겠습니다. 12장 4절입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고전 12:4).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고전 14:33).
오늘 이 시대는 특별히 영적인 것과 관련돼서는 아주 혼란의 시대인 것입니다. 특별히 젊은이들이 인터넷을 통해서 이와 같은 영적인 부분에 있어서 너무나 혼란스러운 정보를 그들이 접하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금방 고린도전서 14장 말씀을 읽은 것처럼 하나님은 결코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혼란스러운 여러 가지 상황 가운데서 이 말씀을 기준으로 우리는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 혼란스러운 것을 발견하게 될 때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 아님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혼란의 한 가지 원인은 이 성경적인 진리에 대해서 그들이 감정적으로 대응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제가 오늘 밤에 다루고자 하는 그런 주제입니다.
우리가 단지 이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것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나누어서 살펴볼 수 있어야 됩니다. 제가 말씀을 드리고자 하는 것을 여러분은 이미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이러한 말씀 집회를 통해서 다시 한 번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을 더욱 분명히 하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것들을 확실하게 구분을 나누고자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분명하게 우리에게 나누어서 말씀을 해 주십니다.
첫 번째로 우리가 성경을 열어서 보게 될 때에 우리는 즉시로 이 성경도 구약과 신약으로 나눠져 있음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구약에서 하나님의 진노가 그 죄인들한테 임하는 그런 모습들을 강조해서 보게 됩니다. 그 죄에 대해서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지만 신약에서는 죄인들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면이 강조되어 말씀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구약'과 '신약'이라는 그 단어에서 알 수 있듯이 이것은 '두 개의 다른 언약'을 강조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이러한 부분에서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많이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여러 가지 언약들이 어떻게 하나님이 의도하고 계시는지 구분해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노아에게 하나님이 언약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자신이 그리고 그 언약을 맺으면서 그 언약의 상징으로서 무지개를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도 또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언약과 관련된 상징은 할례였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슬프게도 이러한 할례를 또한 침례와 혼동해서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두 가지 것은 전혀 상관이 구분되어져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아브라함의 언약은 특별히 이스라엘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할례는 특별히 이스라엘과 관련된 상징입니다. 또한 우리는 모세와 하나님이 언약을 맺으신, 특별히 율법이라고 부르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언약은 어떤 기간에 한정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율법을 하나님이 주신 이유는 특별히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이것은 죄로 말미암아 더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또한 그것은 우리에게 몽학 선생으로서 우리를 가르치기 위해서 주어졌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이 바로 '율법'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율법과 관련된 상징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안식일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안식일을 준수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윗에게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또한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영원한 왕국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이제 다윗의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우실 그 왕국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특별히 그분이 어떤 면에서 왕인지 구별해 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분이 어떤 통치를 할 것인지 또한 알아야 됩니다. 또한 그분은 교회의 머리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부르는 찬송가에 '그분이 교회의 왕이시다.' 이렇게 찬송을 부를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이 두 가지를 혼합해 버린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예레미야 31장에 나와 있는 '새 언약'에 대해서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이스라엘에게 1차적으로 주어진 언약입니다. 그리고 아주 특별한 그런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언약들이 말하고 있지 않은 특별한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 마음의 죄악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언약은 바로 보배로운 피로 말미암아 맺어진 언약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컵을 들고 "이것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이제 뭔가 예전과는 다른 새로운 것을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유월절에 속한 그 4개의 잔과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날 한 잔을 드시고, 그리고 한 희생 제사를 가리키고 그리고 놓여 있는 한 떡은 한 몸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장면에서 다른 예전 언약과 다른 이 '새 언약'을 볼 뿐만 아니라 또한 이스라엘과 다른 '교회'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또한 '구약 성경'이 말하고 있는 '성령님'의 모습과 '신약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성령님'의 모습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구약에서 이제 성령께서 사람들 위에 임하게 됩니다. 다윗도 역시 그러한 성령이 그의 위에 임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오순절에 이제 성령께서 강림하사 믿는 자들 안에 거하게 됩니다. 그것은 또한 아주 특별한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건은 이제 교회 시대를 특별하게 규정짖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가 어떤 교리에 대해서 분명하게 구별해서 분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복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칭의와 속죄가 무엇이 다른지 구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칭의라는 것은 사람에게 하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제 사람에게 여유롭다라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속죄라는 것은 '하나님을 향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만족하시는 면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분께서 온전히 만족하셨기 때문에 이제 의롭다라고 선언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주님께서 첫 번째 오시는 것과 두 번째 오시는 것을 구별해야 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세 번째 오는 것은 교회에서 성경이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두 번째 오시는 것에 대해서 두 단계로 나눠져 있는 것은 볼 수 있습니다. 우선 교회를 위해서 공중에 임하시며, 또한 감람산에 통치하기 위해서 오입니다.
그리고 특별히 이번 시간에는 이 중요한 구별 한 가지를 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 교회, 주님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 또한 지역 교회에 대해서 구별을 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에베소서 1장에서 아주 놀라운 이 진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그 교회'를 보게 됩니다. 우리는 또한 요한계시록 2장에서 에베소에 있는 '지역 교회'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인 이 교회를 먼저 살펴볼 때에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 그 '신분'을 먼저 살펴보게 됩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는 존재이며 우리가 누구인지를 살펴보게 됩니다. 우리는 바로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들'입니다. 우리가 죄 가운데 있을 때에는 아담과 연결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연합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 그리스도의 몸, 이것을 교회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라고 부르는데 왜냐하면, 이 믿는 자들이 불러내어진 무리들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성령님의 능력으로 불러냄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몸이라면 반드시 머리가 있어야 됩니다. 그러면 그 머리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 머리가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하늘에 계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교회와 그 이스라엘과 큰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 땅에 속한 백성들입니다. 그들은 이 땅에 속한 성소가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과 저는 교회로서 하늘의 성소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머리는 지금 하늘에 계십니다. 여기에 있는 젊은 성도님들이 이제 다른 그리스도인을 또 만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교파 교회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중심지가 이 땅에 어디 교단 건물에 있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되는 것은 우리의 머리는 하늘에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분의 우리가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에베소서에서는 이 교회에 대하여 '드러난 비밀'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구약에서는 교회에 대해서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우리는 그 가운데서 교회의 그림은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구약이 말하고 있는 그 그림들이 아주 정교하게 교회를 말하고 있을 때, 참으로 발견하고 기뻐하게 됩니다. 그것은 이미 교회에 대한 진리가 하나님의 마음속에 영원 전부터 그 안에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주님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속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교회에 대해서 또한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대해서 얼마나 사랑하고 계신지 그것을 말해주고 있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몸인 이 교회는 언제 시작한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오순절 날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것에 대해서 첫 번째로 언급하신 분이기도 합니다. 마태복음 16장에서 이 교회를 언급하십니다. 그분께서 이 교회에 대해서 처음으로 언급하신 분입니다. 베드로가 그리스도에 대해서 고백을 하였을 때, 주님께서는 "내가 이 반석위에 교회를 세우리라" 미래형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이 교회의 반석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의 머리 되심에 놀라운 진리를 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교회의 머리이신 것입니다. 이 교회는 오순절 날 탄생하였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그날 강림하셨기 때문에 이 교회가 탄생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교회에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놀라운 진리를 또한 보게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패턴이 역사를 거쳐서 계속해서 보여져 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하시기를 원했다는 그 패턴입니다. 그것은 에덴 동산에서도 그와 같이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죄가 그것을 망쳐놨습니다. 그리고 아담은 거기서 쫓겨나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이 다시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나올 수 있는 그 길을 마련해 놓으셨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이스라엘 나라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계시하십니다. 하나님의 임재하시는 그 영광이 성막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영구적으로 만든 건축물인 솔로몬 성전을 또한 짓게 하십니다. 그리고 성막이 있었고, 그와 같이 성전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성전도 바벨론에 의해서 무너진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성전은 다시 스룹바벨로 말미암아 복구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사람들 가운데 거하시기를 원하시는 그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계속적으로 반복해서 역사하셨습니다. 하지만 슬프게도 우리는 이스라엘 나라가 다시 한 번 죄에 빠지고 실패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신약 시대에 와서는 헤롯 성전을 보게 됩니다. 거기 안에 언약궤가 있지도 않습니다. 그 지성소가 비어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성전 가운데 어느 날 하나님의 임재의 그 영광이 비추게 됩니다. 그분은 바로 자기 자신을 가리켜 성전이라고 부르시는 분이었습니다. 이 헤롯의 성전은 70년에 무너지고 맙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거기서 떠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메시아를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예루살렘에 아직 성전이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보고 "이제 하나님께서는 성전이 없지 않냐?"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그분께서 거하실 백성을 가지고 계시고 그것이 바로 교회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예전과는 다른 특별한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에베소서에서는 "새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거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입니다. 이것은 오순절에 시작하였고, 이것은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계속 이어질 것입니다. 그때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신부를 취하시는 날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위해서 신부를 구하기 위해서 그 종을 보내서 리브가를 데려온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리브가가 와서 이삭을 만나는 장면에 그 아름다운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삭이 그녀를 바라보며 지금 오는 자가 누구냐고 묻습니다. 그리고 리브가가 종과 함께 이삭에게 다가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신부를 위해서 오시는 아름다운 그림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삭이 리브가를 취하고 그를 사랑하였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도 역시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사 자기를 주셨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삭은 리브가를 만났을 때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주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버지와 그 단에서 있었던 일을 말해줄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아름다운 그림을 통해서 그리스도와 교회의 그 사이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제 이삭을 그 모리아 산에서 그를 죽이지 않고 살려주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창세기 24장에서 하나님께서는 또한 이삭에게 신부를 주시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 그리스도의 신부는 구원받은 자들이 그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 여기에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또한 살아있는 자들과 함께 같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과 저에게 아주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 주위에 여기 구원받은 성도들이 함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와 함께 지금 이 지역 교회로 모이지 않는 밖에 다른 그리스도인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우리의 형제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매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을 사랑해야 되는 의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 그분의 '몸인 교회'와 또한 '지역 교회'의 차이점을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그 지체들은 구원의 조건이 있습니다. 구원을 받아야지 그 몸에 들어가는 조건입니다. 사람이 구원받으면 바로 이 교회에 더해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어떤 사람이 구원받았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지역 교회에 더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사도행전 2장에서 구원받은 자들이 '침례'를 받은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더해졌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침례도 그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더해지는 데 조건은 아닙니다. 물론 모든 구원받은 자들이 침례를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는 사도행전 2장에서 교제에 대한 어떤 조건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먼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사도의 가르침 가운데, 그것을 배우는 가운데 거해야 됩니다. 그리고 교제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교재는 떡과 잔을 함께 나누는 것으로 표현되고, 또한 함께 모여 기도하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을 지역 교회로 영접하기 위해서는 특정한 조건들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마치 성막에 특별한 패턴이 필요한 것처럼, 다윗에게 그러한 솔로몬의 성전을 지으라고 특별한 본을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처럼, 당연하게도 이 지역 교회를 세우는 데 있어서 하나님은 그와 같은 분명한 패턴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본이 바로 이 신약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대해서 먼저 말씀을 하셨고, 또한 마태복음 18장 20절에서 주님께서는 교회에 대해서, 특별히 지역 교회에 대해서 처음 언급하십니다. 우리가 이 가치 있는 구절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디서 모이냐'를 먼저 언급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점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 지역 교회의 첫 번째 차이점이 있습니다. 이 지역 교회라는 것은 첫 번째로 항상 '어떤 특정 지역에 관여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불과 수년 전에 이 지역 교회를 온라인상으로 변경하고자 하는 그런 위험을 겪은 적이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그런 코로나 기간 동안에 온라인을 통해서 어떤 말씀을 들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또한 감사드리는 면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항상 기억해야 되는 것은 지역교회라는 것은 다른 지역에서 각각 모이는 그 모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역 교회라는 것은 그 특정 장소에 모이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도 특정한 장소를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두세 사람이 모이는 곳에" 그런 장소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 '모이다'라는 단어에 헬라어 시제는 과거에 모이기 시작했고 그리고 계속적으로 모이고 있는 그러한 시제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임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그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직 그분의 이름만으로 향하여 모이고 있습니다. 우리가 바로 그 이름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고, 그리고 그 이름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침례를 받았고, 그리고 오직 그분의 이름을 향하여 우리는 모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다른 조직의 이름으로 모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떤 나라의 이름으로 모이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한국 교회', 이런 표현을 볼 수가 없습니다. 또한 '아일랜드 교회'에 이런 이름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오직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은 각 지역교회 이름만 찾아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고 있는 성도들입니다. 참으로 여기에 이 아름다운 이름이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 이름에 우리의 권위와 우리의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 세워지는 이 교회가 하늘과 관련되어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역교회에서 결정하는 일들이 아주 큰 책임을 가지고 있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늘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지역 교회의 아름다움은 그 가운데 그리스도께서 임재하신 것에 있습니다. 우리는 성막에서 거기에 세키나 영광이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의 구름이 있었던 것을 보게 됩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임재가 아주 특별한 방식으로 나타나 보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에 이 지역 교회에 세키나 구름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바로 우리에 가지고 있는 그 하나님의 임재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임재'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머리됨과 이스라엘의 머리됨은 분명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에 한 대제사장이 있었던 것을 보게 됩니다. 그는 아론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머리는 가려져 관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들도 제사장이 됩니다. 그리고 그들도 머리에 관을 쓰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지역 교회를 보게 될 때 여기에 차이점을 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 지역교회 안에서는 모든 각자가 제사장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큰 대제사장이 하늘에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역교회에 관련된 '머리됨'은 남자들은 머리를 가리지 않고, 구약에서는 대제사장들이 머리를 가렸는데 왜 신약에서는 남자들이 머리를 가리지 않는 것입니까? 왜냐하면 이제 옛적에는 드러나지 않았던 그 머리 대신 그 비밀이 지금 이 시대에는 드러나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리스도께서 머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그리고 여자의 머리는 남자입니다. 남자는 머리를 가리지 않는데 이제 그리스도의 머리 되심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십니다. 이것들이 이스라엘과 교회의 차이점들 중에 하나인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 임재에 대한 시선을 놓치게 될 때가 있습니다. 제가 어떠한 지역 교회를 듣게 되었는데요. 그리고 거기에 이제 장로들이 모여서 집회를 하게 됩니다. 그들에게 어떤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그 문제를 다루다가 이제 열띤 격론를 하게 되었습니다. 서로에 대해서 이제 심한 논쟁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것은 아주 2시간 동안이나 계속되었습니다. "이제 마치고 집에 가자."라고 하였습니다. 결코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말입니다. "다음 주에 다시 만나서 의논합시다." 거기에 이제 5명의 장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모여서 앉았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이 일어나서, 그리고 다른 한 의자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 그 의자를 그들이 모여 있는 그 원 안에 놓았습니다. 다른 장로들은 "아니, 여기 올 다른 사람이 있나요?"라고 물었습니다. 여기 5명 장로가 다 와 있는데요.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임재하시다라는 것을 기억해야 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이제 10분 만에 그들의 어려운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그들이 주님의 임재를 인식하자 그들의 문제는 쉽게 풀렸던 것입니다. 참으로 이 지역 교회가 모이는, 그 가운데 우리 주님께서 임재하신다는 것을 결코 놓치지 않길 바랍니다.
또한 이 지역 교회가 가지고 있는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로 '그리스도의 몸이 교회라는 사실'을 또한 잊지 말아야 됩니다. 우리가 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들어오게 된다면 거기서는 우리가 출교라는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몸인 교회의 자격은 오직 구원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역교회 안에서는 어떤 사람을 그 가운데서 내쫓는 '출교'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사람을 지역 교회 안으로 영접할 때는 아주 중요하게 다뤄야 되는 그 영접의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교회의 숫자를 늘리기 위해서 어떤 사람을 영접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물론 항상 그렇게 하고자 하는 유혹이 있는 것입니다. 이제 들어오고자 하는 사람이 이 지역 교회가 무엇인지를 알고, 그것을 인식한 가운데 들어오도록 그 영접을 분명하게 해야 됩니다. 물론 우리는 계속해서 지역교회에 대해서 배워갑니다. 하지만 이 지역 교회가 무엇인지 그 기본적인 진리는 반드시 이 지역 교회 안으로 들어오고자 하는 사람에게 가르쳐주고 그가 동의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속하는 사람들은 모두 진정한 신자들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 지역교회 안에는, 이 지역교회 안에 들어오는 사람은 그가 거짓 형제일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도 실제로 이 지역교회 안에 있었지만, 형제로 불리고 있었지만, 나중에는 그가 실제로 구원받지 않았던 사람이라는 것이 드러난 경우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나중에 그가 다시 구원받았음을 시인하고 그것이 확인됐을 때 다시 영접한 그런 경험이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 지역교회 안에 들어오고자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물론 거짓 형제가 분명히 있는 것이지만 그렇지 않도록 항상 주의를 기울여야 됩니다.
우리가 또한 요한계시록 2장에서 보게 되는 그 차이점은 이것입니다. 여기서는 지역 교회가 이제 '등대'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것을 에베소에 있는 이 지역 교회를 등대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 지역 교회는 좀 괜찮은, 좋은 교회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문제는 처음 사랑을 버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회개하라고 그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와서 그들의 그 촛대를 옮길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지역 교회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간증을 옮길 수도 있는 그러한 곳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몸인 이 교회를 하나님이 옮기시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몸인 교회는 영원토록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지역 교회는 휴거 때에 다 위로 올라가 땅에서 사라질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이 '촛대'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참으로 이 촛대, 이 등대가 말해주고 있는 지역교회의 중요한 특징들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 계시록 2장과 3장에서 나오는 이 등대는 그 하나가 분리되어 있는 개별적인 촛대입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이 그들이 가지고 있는 그 등대가 가지가 나와서 연결돼 있는, 만화라고 불리는 그 등대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계시록에 나와 있는 지옥 교회를 상징하는 그 등대는 하나만 있는 등대이고 각각의 개별적으로 주님께만 책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그 지역에 두신 것입니다. 복음을 전파하는 것으로 주님께서 그곳에 두신 것입니다. 영혼들이 구원받는 것으로 그 장소에 두신 것입니다. 그리고 침례받고, 그리고 성령께서 진리를 가르쳐 주시고 이제 그들이 함께 진리를 배우는 가운데 모인 것입니다. 그것이 사도행전 18장에서 우리는 그 예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 오게 됩니다. 그리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함께 돕게 됩니다. 그들은 회당을 방문하여 복음을 증거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그것을 싫어해서 쫓아냅니다. 하지만 바울은 포기하지 않았고, 여기에 어떠한 집을 세를 내고 빌리게 됩니다. 유스도의 집을 빌려서 사용한 것입니다. 그것은 회당의 바로 옆에 있는 집이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복음을 증거합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구원받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거기에 2년 반 동안 거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서 모임이 세워지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고린도전 3장에서 그와 같은 순서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나는 심었고" 이것은 복음을 전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고" 하지만 "자라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자면 바로 하나님께서 이 모임을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와 같이 고린도전서 1장에서는 이 서신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1장 2절에,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그래서 그는 이 교회를 '하나님의 교회'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이 지역교회의 기원이 바로 하나님께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계시록 2장 3장에서 그리스도께서 그 촛대의 '가운데'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단지 등대가 아니고 '금 등대'였습니다. 이 금등대라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그 신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지역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을 비추는 곳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목적으로 여기 이 목포 중부교회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곳에 모인 목적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모인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등대는 주위의 그 암흑 가운데 빛을 비추고 있습니다. 그리고 먼저 그 빛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비추는 데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목포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살고 있는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이 과연 어떻게 이 아름다우신 우리 주님에 대해서 듣고 있습니까?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듣도록 여러분을 이 장소에 두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증거할 때 우리는 그와 같은 빛을 밝게 비추게 되는 것입니다.
계시록 2장과 3장에서 이 등대들이 각각 지역에 따로따로 독립적으로 서 있는 것이지만,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자치적으로', '독립적으로', 이제 이런 말로 표현합니다. 참으로 이 지역교회들을 관장하는 그런 중앙 기구가 이 땅에 없지만,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됩니다. 이 지역 교회는 또한 서로가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각 지역 교회들이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장에서는 사도 요한이 "그가 본 것을 기록하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그래서 이 요한계시록에 각각의 교회에 보낸 서신서들은 사실 모든 교회가 보고 읽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성경책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실 어떤 한 지역 교회에서 어떤 지역교회와 교제를 나눌지 그것을 결정하는 데 장로들은 많이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우리는 그것을 결정하는데 세 가지 것을 상고해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가,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해서, 우리가 또는 그 교회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다른 말로 하자면 저 지역 교회는 그리스도를 전파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들이 잘못된 다른 복음을 전하고 있는가? 그런 교회라면 우리는 교제를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우리는 이 똑같은 책으로에서부터 가르치고 있는가? 또한 세 번째로, 이 지역 교회가 교제를 나누는 것은 성령님을 통해서 교제를 나누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각 교회에 보낸 서신서의 말미에는 항상 이 문구가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께서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 교회들을 복수로 모든 교회를 향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결론적으로 다시 한 번 이것을 질문하게 됩니다. '도대체 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 또한 지역 교회의 차이점이 그렇게 중요한 것인가?' 이것은 우리가 어떻게 모이게 되었는지 그 기반을 그 가장 중요한 것을 말해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모여 있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에 속해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 자리에 모여 있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를 공통적으로 서로 공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리스도의 몸인 그 진리는 아주 아름다운 진리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다 함께 동의하고 인정하는 바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특별히 이 장소에 모인 것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기 때문에 이 장소에 모이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에 속했기 때문에 이렇게 모이고 있다면, 그러한 모임을 이루는 조건은 단지 '당신이 구원받았느냐, 아니냐?' 이제 이것만 따지게 될 것입니다. 슬프게도 오늘날 오직 그 기준으로만 교회를 만들고 형성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영접에 대한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도바울이 예루살렘에 처음 방문했을 때 일을 알고 있습니다. 그곳에 있는 형제들은 바울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바나바와 함께 오게 됩니다. 그리고 바나바와 함께 이제 예루살렘 성도들과 함께 출입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로마서 마지막 장 16장을 보게 될 때, 우리는 로마서 16장이 사실상 '천거서'임을 보게 됩니다. 바울은 그 자매인 뵈뵈에 대해서 성도의 합당한 예절로 영접해 달라고 쓰고 있는 것입니다. 왜 여기에 '성도에 합당한 예절'이라고 언급하고 있습니까? 이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요. 첫 번째로 참으로 주 안에서 그녀를 영접하라는 의미가 첫 번째가 있고, 단지 그녀를 구원받았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영접할 뿐만 아니라, 그가 주되심을 인정하고 있는 사람이므로 그래서 그를 영접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성도의 합당한 예절로'라고 말했을 때 두 번째로 사도는 그 교회가 거룩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지금 이제 '성도'라는 말을 아주 혼란스럽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종교계에서는 어떤 사람이 죽고 난 이후에 그는 이제 '성자였다'라고 그런 성도의 칭호를 붙이게 됩니다. 이 성도라는 것은 '거룩한 자'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 성도들이 모이는 지역 교회가 정말 그 거룩한 곳인지, 그것을 질문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진리가 고린도전서 3장에서 가르치고 있는 진리이기도 합니다.
특별히 고린도전서 3장에 나와 있는 지역 교회에 대한 세 가지 그림을 말씀을 드리면서 결론적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지역 교회에 대한 첫 번째 그림으로 여기서는 '경작하는 밭'이 나옵니다. 9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참으로 우리는 이 하나님의 밭에서 함께 일하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입니다. 왜 여기서 바울은 '밭'이라는 이 그림을 사용하고 있습니까? 왜냐하면 이 고린도 교회가 성장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절에서 "너희들은 어린아이들과 같다"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그들의 구원에 대해서는 문제가 없었지만 그들의 성장에 있어서는 문제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가 3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 교회에 그 분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분쟁의 이유가 여기 언급되고 있습니다. 참으로 어떤 지역 모임에 분쟁이 있다면 그 분쟁의 원인이 분명히 이것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 분쟁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분쟁의 원인이 된 그것을 해결을 해야 됩니다. 3절이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참으로 그리스도인들 안에서 시기심, 이 질투심이 참 심각한 문제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서로 경쟁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더 뛰어남을 보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서로에게 다툼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이제 논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제 편가르기를 하게 됩니다. "나는 바울에게 속했고", "나는 아볼로에게 속했고", 또 어떤 사람들은 너무나 또한 높은 위치인 채 하면서 "나는 그리스도께 속했다."라고 자랑합니다. 하지만 모임 안에서는 이렇게 어떤 한 편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분명히 지역교회는 '하나의 밭'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안에 일치가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그들에게 성장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문제 때문에 성장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육신에 속한 자들이었던 것입니다. 영적으로 자라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두 번째로 이 그림으로서 지역 교회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건축물'이다. 밭이라는 것은 경작이 돼야 됩니다. 이 건축물이라는 것은 이제 세워져 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빌딩이라면 그 밑에 터가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 터가 그리스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건축물과 관련돼서는 사도바울은 지역 모임의 질적인 섬김에 대해서, 그 '섬김의 질'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건축물을 세우는데 금과 은과 보석으로 세워야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무엇으로 세워졌는지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이 지역 모임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곳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함께 수고한 자들은 그리스도로부터 상급을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상급은 지역 교회와 관련돼서 어떻게 섬겼는지를 상급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두 함께 일을 하는 것이지만 각각이 행한 대로 주님께 상급을 받는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내가 혼자 일을 다 한다.'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마는 하지만 여러분은 여러분이 행한 그 일에 마땅한 상급을 받게 될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또한 여기에 해를 당하는, 그 상급을 잃어버리는 것이 또한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염두에 두고 세워야 됩니다.
그리고 세 번째 지역 교회를 말해주고 있는 그림은 '성전'입니다. 이 성전이 사실상 말하는 단어 그 단어는 '성소'를, '거룩한 곳'을 말하는 단어입니다. 참으로 그 성막 안에, 또한 성전 안에 있는 그 안의 '거룩한 장소'를 말하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이 단어가 높이 올라가는, 세우는 그 건축물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을 '잘 간수하고 있는' 그러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그림입니다. 이 성전과 관련돼서는 이것을 해치는, 더럽히는, 이런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유다의 역사 가운데 이 한 왕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왕 중에 악한 왕은 그 성전을 더럽혔습니다. 그 거룩한 곳에 가져와서는 안 되는 그런 것들을 서스름 없이 가져와서 성전을 더럽힌 것입니다. 참 우리도 거룩하지 않은, 여기 가져와선 안 되는 것을 가져오므로 이곳을 더럽힐 수가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 고린도에는 부도덕한 것들을 성도들이 가지고 안에 들어온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것은 여기에 있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라,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시간 참으로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이 지역 교회가 다른 어떤 것들과 다른 특별한 장소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참 이 지역 교회가 우리가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러한 모임들의 또 다른 형태라고 그냥 그렇게 생각하지 않길 바랍니다. 참으로 이 지역 교회는 신약 성경에서 아주 특별하게 우리에게 제시해 주고 있는 그러한 것입니다. 혹시 이 자리에 이 지역 교회를 떠나서 다른 곳으로 가볼까 생각하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그런 분에게 던지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만약에 이곳을 떠나 여러분은 간다면 과연 어디를 가고자 하시는 것입니까?" 왜냐하면 성경에는 이 지역 교회 외에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모이는 장소가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는 이 지역교회 안에서 우리는 또한 실수가 많은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이 지역 교회에 대해서 하나님이 알려주신 그 양식은 온전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도전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이 양식대로 그것을 온전히 순종해 나갈 것인가? 하지만 이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많은 대가를 치러야 됩니다. 이 성도님들의 이제 2세대는 이 지역 교회를 하나님의 양식대로 모이는데 많은 대가를 치르지 않고자 하는, 이제 그런 경향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어떤 성도들은 심지어 지역 교회에 모이기 위하여 다른 가족과도 연이 끊어지는 그런 핍박을 받으면서도 지역 교회에 모인 것을 보게 됩니다. 이 그리스도의 이름이 항상 세상 가운데서 멸시를 당하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인터넷에 그 인기 있는 그런 것과는 다른, 참 인기 없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보시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그리스도인들이 모이는 유일한 장소가 바로 이 지역 교회입니다. 우리가 이 떡과 잔을 떼게 될 때, 우리가 매 주의 첫날 우리가 그 만찬을 나눌 때에, 우리는 그분께서 오실 때까지 그분을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든지 우리에게 오실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고대하는 미래입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다시 오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나 있는 곳에 너희를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참으로 그리스도의 몸인 그 아름다운 교회가 있습니다. 참으로 이 등대인, 빛을 밝히는 아름다운 등대인 지역 교회가 있는 것입니다. 참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축복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