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이레 2025. 6. 21. 13:58

< 질의 응답 > 크랙 먼로 형제님

1. Q. 첫 번째 질문은 천년 왕국에 대해서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 천년 왕국에서 이제 어떤 종류의 사람들이 참여하게 되는지를 질문을 받았습니다.

A. 먼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먼저 오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임박한, 그 즉시 언제라도 오실 수 있는 주님의 다시 오심을 소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데살로니가전서에서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들려 올려 아버지의 집에 거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서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어린 양의 혼인식'이 하늘에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지는 동안에 이 땅에서는 이런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것은 '대환난'이라고 불리는 기관입니다. 그리고 그 기간이 끝난 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이 땅에 임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환난 기간 동안에 구원받은 사람이 또한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요한계시록 7장 후반부에 그 사람들에 대한 기록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이 천년 왕국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때에 구약의 성도들이 부활하게 됩니다.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들이 그 왕국에 있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천년 왕국에 환난 기간 동안 구원받은 성도들이 참여하고, 그리고 구약의 성도들이 참여합니다. 우리는 그 천년 왕국 동안 하늘에 있는 거룩한 성의 시민으로서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 왕국을 통치하는 자로 있을 것입니다. 그 땅에 거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리고 그 땅에 거하는 사람들과 우리는 여러 관련을 맺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이 질문에 대답이 되겠습니다. 그 천년 왕국의 시민들은 구약의 성도들이고 또한 환난 기간 동안에 구원받은 성도들입니다.

2. 여기에 대해서 혹시 추가 질문이나 관련된 질문이 있으신 분 있으신가요?

Q. 계시록 10장 여기서 4절에 "거기에 앉은 자들"이 누구이며, 마지막 6절에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에서 첫째 부활과, 첫째 부활 참여하는 자에 대해서 교제해주시면 좋겠습니다.

A. 첫째 부활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두 번째 질문을 먼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 첫째 부활은 천년 왕국이 시작되는 시점에 이제 구약 성도들이 부활하는 것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왜 이것이 첫째 부활이라고 이름이 붙여졌는지 궁금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 부활 앞에 다른 부활이 또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나사로가 그 죽음에서 부활한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야이로의 딸이 또한 부활하였습니다. 그리고 구약 성경에도 세 번의 부활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왜 이것이 첫째 부활인가? 또한 이전에 우리 주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죽은 자들 가운데 첫째 나신 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가 믿기로 주님께서 교회를 위해서 임하실 때에 데살로니가전서 4장 12절에서 17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들도 들려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되리니"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실 때에 그분의 몸이 부활하고 다시 죽지 않는 그러한 부활입니다. 하지만 나사로는 다시 한 번 죽게 되었습니다. 야이로의 딸도 다시 죽어야 됐습니다. 그리고 그 과부의 아들도 다시 죽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후에 다시 부활했을 때는 다시 죽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그분의 부활이 이 순서 가운데서 가장 먼저입니다. 그래서 "죽은 자들 가운데 먼저 나신 자"라고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로서, 그리고 여기에 구약의 성도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환난 때에 죽은 성도들의 부활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부활은 악한 자들의 부활을 말하는 다른 성격의 것입니다. 그들은 구원받지 않은 자들의 부활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이 또한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20장 계속 그 구절을 읽어가 보면, 그 천년 왕국의 끝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때 크고 흰 보좌가 준비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점에 둘째 부활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제 불못에 던지우게 됩니다. 그들의 몸과 그리고 영혼 모두가 던져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첫째 부활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시작된 그 특별한 성격의 부활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둘째 부활은 구원받지 않은 그 악한 자들의 부활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4절부터 6절까지 구절을 읽게 될 때에, 그 첫째 부활이 천년 왕국의 시작점에 일어나는 것이 분명하게 보여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부활의 순서상 맨 마지막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이 첫째 부활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성격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중에 임하실 때에 죽은 자들이 부활할 것입니다. 그리고 환난 기간 동안에 중반에 두 증인이 죽었다가 부활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구약에서 죽었던 성도들이 이 시점에 또한 부활합니다. 그들은 모두 이 첫째 부활의 동일한 성격을 가지고 부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다른 성격의 둘째 부활이 나중에 있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첫 번째 질문을 말씀드리겠습니다. 4절에 기록되어 있는데요. 이것은 꽤 어려운 질문입니다. 아무도 아마 단정적으로 말씀드리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24 장로들이 누구냐에 관한 또한 그 논쟁과도 이어지는 질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이 보좌에 앉은 이들이 누군가?" 그런데 분명한 것은 이 보좌에 앉은 자들에게 심판하는 권세가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12 제자들에게 "너희가 보좌에 앉아서 12지파를 심판하는 권세"를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6장에서 너희가 천사들을 심판할 것을 말씀하였습니다. 그리고 계시록 3장에서 라오디게아의 교회에게, 그 이기는 자들에게 21절에서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이것은 또한 두아디라 교회에도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계시록 2장 말씀을 보게 될 때에, 26절과 27절에, 그 철장을 가지고 저희를 다스린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참으로 형제 자매님 여러분, 우리는 그 왕국의 이 놀라운 권세를 실행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가 그 보좌에 앉게 하는 권세를 우리에게 입혀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계시록 20장 4절의 말씀에 그 권세가 교회에 주어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특별히 그 12 제자들을 포함하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이스라엘이 포함된다고 저는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이 땅에서 일어난 일들을 심판하는 그 일을 맡았다는 것을 말해주는 구절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것과 관련된 여러 가지 구절들을 여러분이 기억하셔야 될 것입니다. 첫 번째로 고린도전서 6장 1절부터 4절까지입니다. "천사들을 심판할 것을"이라고 말하는 구절입니다. 그리고 계시록 3장 21절에 라오디게아 교회에 그들이 "만국을 다스릴 권세"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계시록 2장 27절에 두 아들이라 교회 "철장으로 다스릴 것"을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12 제자들에게 그 12 보좌에 앉아 12지파를 다스릴 권세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우리가 고려해 봐야 될 구절이 요한계시록 4장에 24 장로들에 대한 것입니다. 그들이 보좌에 앉아 있게 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경우에서 그들이 교회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때에 이제 이 땅을 다스리는 권세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 모든 구절을 종합해 볼 때 20장 4절은 이제 교회가 이 권세를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이것은 이제 어려운 질문입니다. 우리가 여러 상세한 부분을 또 계속 묵상해 본다면 그 볼 만한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3. Q. 이제 부활은 이례적이 아니라는 것이죠. 부활의 순서를 나타내는 것이 그리스도로부터...(안들립니다.)

A. 예, 그렇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첫째라는 단어를 생각하게 될 때 우리는 항상 두 번째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 두 가지가 또한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살펴봐야 됩니다.
그래서 이 계시록 20장에서는 그 두 개의 부활이 얼마나 성격이 다른지를 보여주고 있는데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20장 12절을 보게 될 때에 "죽은 자들이 물론 대손하고 보좌 앞에 섰는데" 그리고 13절에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그리고 14절에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그리고 나서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그래서 이 악한 자들의 몸이 그들이 어디 있든지 간에, 그것이 바다에 있든지 땅에 있든지 간에, 그들이 그 몸이 다 이제 분해되어 있던지, 아니면 화장이 되었던지, 그들은 모두 이제 음부 가운데서 다시 나오게 되고, 그리고 이제 불못에 던지게 됩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이와 같은 일을 하실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이제 사람이 육체적으로, 또한 어떤 생물학적으로 할 수 있는 그런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이고, 그래서 이것을 "둘째 사망"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첫째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 분께서는 이제 첫 열매로서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로 언급됩니다. 부활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다시 죽지 않는다라는 것을 강조해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여러 사람들이 있는데, 여러 사건들이 있지만 모두 이 같은 성격을 공유합니다.
그런데 여기 요한계시록 20장 6절에서 특별히 말하고 있는 것은, 이 첫째 부활이 이 천년 왕국의 시작점에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천년 동안 천년 왕국이 시작됩니다. 스가랴서 14장에서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임하셔서 그 감람산에 서실 때에, 그 구약의 성도들, 아브라함 이삭과 야곱이 그때 부활할 것입니다. 그리고 4절에 기록된 것처럼 환난 기간에 죽은 자들도 부활할 것입니다. 그 그리스도의 증거를 위하여 목 벰을 받은 영혼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모두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특별히 6절에 기록된 그 부활은 구체적으로는 구약 성도들, 또한 환난 기간에 죽은 성도들을 먼저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부활이 이 그리스도의 부활과 다른 성격의, 뭔가 다른 부활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부활 외에 뭔가 다른 성격의 다른 부활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모두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잘 설명이 됐기를 바라고요. 혹시 부족한 면이 있으면 다음에 또 질문해 주시기 바랍니다.

4. Q. 질문하겠습니다. 한국 모임에서는 떡을 돌릴 때 그냥 돌리는 모임이 있고, 어떤 형제님이 나가서 찢어서 돌리는 모임이 있습니다. 찢어서 돌리는 모임은 주님이 찢었기 때문에, 혹은 주님의 죽음을 나타내야 되기 때문에, 찢어서 돌려야 된다고 얘기합니다.
그리고 제가 알기로는 북아일랜드 150개 모임 중에서 1개 모임 빼고는 찢지 않고 그냥 돌리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게 북아일랜드에서 본 게 감사하시고 그냥 나누지 않고 바로 이제 옮긴다는 거죠.
(그거는 좀 특이한 경우라고 하시네요.) 그런데 길리란드 형제님한테 물어보니까 150개 모임 중에서 1개 모임 빼고는 찢지 않고 돌린다고 저한테 분명히 얘기를 했거든요.
그래서 질문은 뭐냐 하면 형제님은 어떻게 분별하시고 (??)모임에서는 어떻게 하시는지 궁금합니다.

A. 누가복음 22장 19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서 한 구절을 읽어볼 텐데요.

"또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눅 22:19).

여기 이 말씀이 그 자체로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떡을 가지시고, 그리고 사례하시고, 떼셨습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여기서 "이것을 행하여" 이것은 주님께서 하신 일을 하라고 말씀하신 걸로 이해합니다. 주님께서 이 떡을 가지시고,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감사하시고, 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말씀하시기를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다." 말씀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1장도 이것을 가르칩니다. "우리가 이 떡을 뗄 때마다" 그리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이것은 주님의 죽으심을 증거하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믿기로는, 그리고 이 떡을 떼는 형제님이 이제 앞으로 나가서, 감사드리시고, 그리고 떼시고, 그리고 전달해야 됩니다. 그리고 이제 다른 형제 성도님들이 떼서, 그리고 먹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우리는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으심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이제 명백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게 스코틀랜드와 북아일랜드의 일반적인 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이제 다른 부류의 분들이 있는데요. 여기에 이 주님의 몸의 뼈가 부러진 적이 없다, 그래서 그들은 그 떡을 이제 떼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것에 대해서 좀 어려운 점을 가지고 있는데요. 우리가 떡을 이렇게 나누게 될 때, 그 떡을 뗄 때에 주님의 생물학적인 몸을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드리신 그 행동 자체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제가 이것을 다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그런데 주님께서 "이것을 행하라."라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떡을 떼는 것이 행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5. Q. 스코틀랜드 모임에서는 대체로 다 그렇게 실행하나요?

A. 예, 우선 스코틀랜드와 북아일랜드에서 제가 알기로는 이것이 일반적인 실행이고 그리고 이제 소수의 사람들이 이것을 떼지 않는다라고 알고 있습니다.
아까 저기 한 형제님이 조금 설명하신 것처럼, 코비드 기간동안에 떡을 떼가지고 이렇게 나눠주는 그런 실행이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이제 다행히 코비드가 끝났고요. 그런 실행은 이제 맞지 않는 실행입니다. 한 떡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을 미리 이렇게 조각으로 나눠서 그 조각을 먹는 것이 이 실행과 맞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여전히 그 떡을 떼기 좋게 맨 처음분이 이렇게 열어줍니다.  그리고 그것이 이 누가복음 22장에 나와 있는 주님께서 하라고 하신 것과 일치하는 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주님께서 이렇게 특별히 하신 일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 합니다. 먼저 이 첫 번째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분께서 이 떡을 드셨습니다. 그것은 참 아름다운 그런 모습입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의 몸을 취하셨습니다. 그것은 우리 주님께서 성육신하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분 자신의 몸에 대해서 감사를 드린 것입니다. 주님께서 자신의 몸에 대해서 그렇게 감사를 드린 것은 특별히 아름다운 어떤 면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 떡을 떼셨습니다. 그것은 십자가에서 주님께서 자신을 들이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나눠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떡으로부터 조각을 떼어 우리가 먹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그분의 죽으심을 전합니다. 저는 여기에 어떤 어려운 점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코비드 기간 동안에 여러 가지 복잡한 것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와 같은 실행을 계속해서 여기서도 계속하시기를 바랍니다.

6. Q. 이어서 이제 질문을 드리면 마태복음 26장 26절에서는 누가복음에서는 이것을 행하라고 했는데, 마태복음에서는 "이것을 행하여가 받아먹으라"고 한 것으로 보이는데요. 참고로 마가복음 14장에서도 "받으라." 우리나라 성경에서는 그렇게 되어 있지만, 이제 킹제임스는 "받아먹어라" 이렇게 돼 있는데요. 마태와 마가에서는 왜 주님이 "받아먹으라"고 했고, 누가에서는 "이것을 행하라"고 하셨나요?

A. 예, 여기 주님의 만찬에 대해서 이제 3개의 복음서에서 조금 차이가 나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요한은 그 주님의 만찬에 대해서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요한복음 13장에서 그 주님의 만찬에 어떤 특별한 성격을 그는 기록하였습니다. 요한복음은 아마도 다른 복음서들 맨 뒤에, 또한 다른 서신서들보다 나중에 기록된 그런 복음서일 것입니다. 그는 이미 마태, 마가, 누가복음이, 또한 고린도전서에서 그 주님의 만찬에 대해서 잘 기록하였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런 역사적인 기록 대신에 요한은 요한복음 13장에서 그 주님의 만찬에 담겨 있는 성격을 우리에게 알려주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태, 마가, 누가와 고린도전서를 통해서 그 역사적인 만찬의 기록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이 3개의 복음서, 또는 4개의 복음서에서 어떤 한 사건을 기록한 장면을 보게 될 때, 우리는 항상 그 같은 사건을 기록하는데 조금씩 차이가, 작은 차이가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차이점은 우리에게 귀중한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 복음서 기자들이 어떠한 관점에서 그 사건을 바라보고 있는지를 알려줍니다.
마태와 마가복음에서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되는지', 그러한 관점에서 이것을 기록하였습니다. "받아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라" 그리고 마가복음에서도 동일한 기록을 보게 됩니다. "받아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그리고 누가 복음에서는 반대로 '주님께서 행하신 측면'에서 우리에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가는 주님의 그 행하심을 기록한 것입니다. 우리가 고린도전서 11장을 보게 될 때에, 고린도서 11장에서는 주님의 행하심과 또 우리가 해야 되는 것을 모두 기록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먼저 '우리가 모두 모일 때'입니다. 그리고 고린도서 11장은 특별히 성도들이 이것을 잘못 실행하는 점에서 이 문맥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그들이 일반적인 식사처럼 그 만찬을 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것을 교정하기 위해서 말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11장에서 어떻게 이 만찬을 제대로 돼야 될 것을 듣게 되냐면, 24절에서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가 이것을 받아먹는 것을 명령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마태와 마가에 기록된 것과 동일한 내용이 고린도전서 11장에 기록된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또 더 기록하는 것은, 23절에 주님께서 행하신 것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떡을 가지사" 그리고 "축사하시고", "떼어", 이것은 누가 복음에서 기록한 것을 여기 11장에서 또한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께서 이 4개의 복음서를 읽게 될 때에, 여러분께서는 여러 다른 측면을 함께 보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행하신 측면, 그리고 우리가 봐야 되는 측면을 같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마가복음에서 이제 우리가 행하는 측면을 기록한 것을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특별히 마가는 '종의 행하심'을 기록하는 그런 복음서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와 같은 종의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가는 "받아먹으라" 이 우리가 행하는 측면을 기록하였습니다. 여러분께서 이제 마태복음에서도 우리와 관련돼서 기록한 것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왜 그러하냐면, 마태는 우리 주님께서 주권을 가지신 왕으로서의 기록하고 있는 복음서입니다. 그래서 '왕의 복음서'입니다. 그래서 마태에서는 항상 주님께 축복을 받은 자들이 주님을 "주여"라고 부르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그 복음서는 '주님의 권위'를 강조하는 복음서입니다. 그 복음서는 명령을 담고 있는 복음서입니다. 그래서 그와 비슷한 성격으로 "받아먹으라" 이것은 주님의 명령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여러 대화 가운데 주님의 권위를 가르치시는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누가는 그것과 좀 다르게 주님께서 가르치시는 가운데에 이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마태는 대화 가운데 주님의 주권을 가르쳐 주셨다면, 누가는 주님께서 계속 말씀하시는 가운데에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그래서 누가 복음에서는 6번에 걸쳐서 주님께서 '이런 이런 일들을 하셨다'라고 계속 그것을 이제 설명하듯이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주님께서 얼마나 온전한 인성을 가지고 계셨는지, 주님의 여러 행하시는 것을 이렇게 설명하는 가운데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누가복음 10장 1절을 보게 될 때에 그 예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후에 주께서 달리 칠십인을 세우사..."(눅10:1). 그리고 이제 바로 "이분이 나의 주님이시다"라고 이 일어난 사건의 기록을 통해서 누가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이와 같은 장면을 다른 이 여섯 부분에 걸쳐서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누가 복음이 이 주님의 만찬에 대해서 기록할 때 '주님의 측면'에서 그 사건을 기록한 것이 합당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행하신 일을 강조해서 그는 기록한 것입니다. 참으로 여기에 그런 의미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와 같이 복음서마다, 이 다른 측면에서 기록해서 이런 차이가 있다는 것을 설명으로 드리겠습니다.

7. Q. 그러면 형제님 말씀은 누가 복음이나 고린도전서 11장에서 "이것을 행하여"를 주님처럼 하라는 것으로 이해하면 됩니까?

A. 여기서 "이것을" 또한 "행하라" 이런 말씀이 있는데요. 여기서 주님께서 행하신 일을 가리키는 것인데요. 여기서 주님께서 행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그 떡을 떼시고, 감사를 드리시고, 그리고 떡을 떡을 들어서 감사하시고, 떡을 떼셨습니다. 우리가 물론 주님의 자리를 대체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종교계에서는 여러 가지 주님께서 행하시지 않은 다른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또 어떤 특별한 의복을 입고, 어떤 향을 피우고, 어떤 다른 의식적인 행동들을 합니다. 그리고 앞에서 여러 가지 행렬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그런 주님께서 행하시지 않은 그런 일들을 원치 않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은 그런 일을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자리를 차지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교파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다른 세레모니와 의식들을 행하지 않습니다. 단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기를 원할 뿐입니다.
주님께서 떡을 주시고, 감사하시고, 떼시고, "이것을 행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받아먹으라" 하셨습니다. 여기에 이것 외에 우리가 더 해야 되는 다른 일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 그 아름다움과 그 심오한 깊이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가 이것을 계속 행하실 거라 믿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실행이지만, 또한 아름다운 실행인 것입니다.

8. Q. 시간이 얼마 안 남아서, 이어서 한 가지만 더 질문을 드리면 고린도전서 10장 16절과 17절에 여기서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그러면 떡이 돌아올 때에 누군가가 찢어서 돌리게 되면, 각각의 성도들 앞에 왔을 때는 떡이 두 개가 되는데, 이 말씀에 대해서 어떻게 분별 하십니까?

A. 고린도전서 10장 17절과 관련된 말씀을 질문을 받았습니다. 이제 신약에서는 단지 이제 네 가지 의식을 행할 것을 명령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두 가지는 제 눈에 지금 계속 보이는 것입니다.
그 자매님들이 머리를 가리고, 또한 형제님들이 머리를 가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때때로 우리는 교회당에서 침례를 행합니다. 그 사람이 물속에 잠겼다가 다시 일어납니다. 마지막이 주의 만찬 때 하는, 우리가 떡을 떼는 것과 잔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 의식들은 아주 단순함을 성격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우리가 복잡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떤 형제님들은 "이 떡은 무교병이 돼야 된다." 주장하는 분이 있습니다. 어떤 곳에서는 이 자매님들의 너울이 그 안을 볼 수 있는, 그래서 그래야 된다고 또 주장하는 곳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때때로 어떤 곳에 가면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더 추가적인 것들을 말하는 데도 있었습니다. 그 어떤 규칙을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따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것들에 주의를 기울여야 됩니다.
제가 믿기로 이 사용된 떡은 아마도 이제 무교병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여기에 기록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뭐 유기병이든, 누룩이 들었든, 안 들었든, 이렇게 떡을 떼는 데 문제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떡의 모양에 대해서도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빵이 어떤 모양이 생겼던지 거기에 참여하는 데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이 떡이 떼어진다고 했을 때, 이제 떡이 나눠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모인 회중을 위해서 형제님이 떡을 뗄 때에, 그것은 집합적으로 그분이 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그 떡을 떼어 먹을 때, 그것은 이제 개인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그 떡을 개인적으로 떼어 먹을 때, 그것을 어떻게 잘 떼야 되는, 그런 규칙을 새로 부가하고 싶은 것이 아입니다.

이것을 이제 오순절의 예로 한번 말씀을 드려보겠습니다. 3천 명의 성도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여러 다른 기간 동안에 그 모임에 그런 많은 성도들이 있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성도들이 주일에 모일 때 어떤 일이 일어났겠습니까? 거기에 물론 한 개의 빵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 상의 한 떡이 있었을 것입니다. 여기에 단지 하나의 떡 외에는 다른 것이 없었습니다. 또한 거기에 큰 잔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분명히 아주 큰 떡이어야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떡이 그 많은 사람들에게 다 돌려간다고 생각했을 때, 이제 그들은 양을 계산할 것입니다. 여기에 또 이 수학을 잘하시는 분이 있나요? 그 떡을 떼어 먹고 이제 다른 사람에게 건네주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제 한 사람이 그 일을 하는 데 10초가 걸린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것을 이제 3천 곱하기를 하겠습니다. 그 떡이 전체가 다 돌아가는 데 얼마의 시간이 걸렸겠습니까? 그러한 상황 가운데서, 우리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틀린 생각인 것일까요? 여기에 이제 한 떡을 놓고 감사를 드렸습니다. 이제 그것을 3개나 4개로 나눕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30, 40명의 성도들이 있다면 문제가 아닐 것입니다. 저는 800명의 성도들이 모인 가운데 만찬에 참여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처음에 한 떡을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이제 두세 개의 접시에 그것을 나누게 됩니다. 저는 이것이 틀렸다라고 말할 수 있을지,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제가 그러한 상황에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어쨌든 좀 어려운 그런 상황입니다. 그리고 이 성경에서 그것에 대해서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저는 이제 내일 여러분과 함께 만찬을 기쁘게 나눌 것입니다. 그 한 떡을 떼는 것을 기뻐할 것입니다. 또 우리가 쭉 함께 나누는 것에 대해서, 한 떡에 참여하는 것을 또 기뻐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 한 떡으로 충분히 만찬에 참여할 수 있는 인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가 여러분에게 요청을 드리는 것은, 이 성경을 넘어서 다른 것을 말하는 것은 주의를 기울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이 상징의 단순성을 유지해야 됩니다. 그 잔을 개인적인 잔으로 바꾼다거나, 또 개인적으로 빵을 조각으로 만들어 놓는다거나, 우리가 그것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계속 한 잔과 한 떡을 유지해야 됩니다. 우리 주님의 죽으심과 그분의 몸을 상징하는 이 상징물의 단순성을 유지해야 됩니다. 하지만 여기에 뭔가 다른 것을 첨가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됩니다.

그래서 특별히 이제 장로 형제님들께 당부를 드립니다. 장로 형제님들은 이제 아주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될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께서 모임을 대표해서 그 결정을 내리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서 그 결정을 내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결국 그 각각의 모임이 나중에 주님 앞에서 책임을 져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실행을 했는지, 만약 이것에 대해서 이제 분명하지 않다면 또 나중에 와서 말씀해 주십시오.
한 잔과 한 떡이 좋은 것이고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저기에 어떻게 그것을 할지, 더 이제 상세한 부분에 대해서는 조금 말씀드리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마치며 : 질문이 몇가지 더 있지만 시간이 다되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혹 형제님의 마음을 어렵게 하였다면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A. 예, 여러분께서 또 여러 질문을 또 해 주신 것에 대해서 이제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혹시 이제 통역 과정을 통해서 전달이 되기 때문에 조금 명확하지 않은 점이 있었다면 다시 와서 확인해 주시면 감사를 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