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형제님/크랙 먼로 형제님

요 14:1-27 : 재림의 소망, 또다른 보혜사

박이레 2025. 6. 12. 22:14

< 요 14:1-27 : 재림의 소망, 또다른 보혜사 > 크랙 먼로 형제님

안녕하세요. 다시 이 집회에 찾아주신 여러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참으로 여러분과 함께 교제를 나누는 데 있어서 큰 기쁨이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저에게 보여주신 모든 친절에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은 특별히 성경에서 우리가 익숙한 그 부분을 함께 보고자 합니다.
여러분 모두가 14장 이 처음 몇 구절에 대해서 아주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시간, 이제 여러분이 처음 읽는 것처럼 이것을 함께 저와 상고하기를 바랍니다. 요한복음 14장 1절부터 27절까지 읽도록 하겠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 도마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가룟인 아닌 유다가 가로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게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의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1-27).

하나님께서 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복 주실 것을 믿습니다.

우리 주님의 그 다락방 강화에서 우리는 요한복음 13장에서 주님께서 자기의 제자들에게 보이신 사랑의 그 행동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13장 1절부터 17절까지, 17절 이후 18절부터 그 장의 마지막 전까지 우리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마지막 말씀을 또한 보았습니다. 그 하신 행동과 그 하신 말씀을 통해서 이제 그 남겨진 무리가 어때야 되는지를 알려주신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그 남겨진 무리가 거룩하고 정결한 무리가 되길 바라셨습니다. 그래서 그 대야와 수건을 들고 그들의 발을 씻겨주신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또한 그 무리들이 서로 사랑하고, 서로 돌보고, 서로 친절을 베푸는 무리가 되길 바라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지난 시간에 함께 묵상한 바입니다. ‘거룩함’과 그리고 ‘사랑’입니다.

그리고 이제 14장 우리가 읽은 이 부분에서는 그 남겨진 그리스도인들이 '소망'을 갖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들을 이를 통해서 '격려'와 '위로'를 받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떠나버렸고 그리고 이제 베드로는 곧 부인할 것입니다. 참으로 그 다락방의 분위기는 아주 가라앉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그것이 14장 1절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27절까지 읽었는데요. 그 마지막 부분에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그 남겨진 무리들이 슬퍼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길 바라셨습니다. 참으로 그들이 서로 위로하고 평안한 가운데서 있는 무리가 되길 바라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우리 주님께서는 그들의 질문을 받으시고 또한 답변해 주십니다.
우리는 요한복음 13장에서 사도 요한 자신이 질문한 것을 보았습니다. 25절에 그가 질문한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 누구 오니이까?" 그래서 그의 질문은 '누구'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베드로가 37절에서 이렇게 질문합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그의 질문은 '어디'와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이제 14장 5절에서는 도마가 질문합니다. "우리가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 못하는데, 그 길을 어떻게 알겠나이까?" 그의 질문은 '어떻게', '어찌'와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8절에서는 빌립이 이렇게 질문합니다.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요 14:8).

그가 원하는 것은 '볼 것'을 주님께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을 볼 것인가.' 그리고 22절에서는 가룟이 아닌 유다가 이렇게 질문합니다.

"가룟인 아닌 유다가 가로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게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요 14:22).

그는 다시 한 번 '어찌하여', 이러한 질문을 주님께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성경을 자세히 읽는 것은 여러 성경의 지지를 받는 그런 공부 방법입니다. 우리가 사도행전 20장을 보면, 사도 바울이 이제 "밤늦게까지 강론하였다"라고 돼 그 '강론'하다는 단어는 우리가 단순히 '설교하다'라는 그런 말과는 다른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질문하고, 또 하나는 답변을 듣는, 그리고 그것을 함께 대화를 나누는 그런 것이 담겨져 있는 표현입니다. 아마도 마포교회에서는 화요일에 성경 읽기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성경 읽기에 대해서 우리는 그러한 성경적인 본을 근거로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린도전서 14장에서 자매들은 이제 남편에게 집에서 물을 것이라고 된 말씀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공적인 집회에서 형제들은, 남자들은 이제 소리를 내서 질문을 하는 것이 허용됐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특별히 젊은 성도님들이 이러한 질문을 가지고 계속 서로 묻고 답하기를 바랍니다. 또한 젊은 자매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개인적으로 와서 이것에 질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을 계속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마포에 와서 보고 좋아하는 하나의 것은 이것입니다. 젊은 성도님들이, 또한 젊은 자매님들이 이 앞에 나와서 저에게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참 하나님 말씀에 그와 같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는 것은 참으로 기쁜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부분에서 나온 그 질문과 답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요한복음 13장 마지막 주님의 말씀을 먼저 함께 보겠습니다. "닭이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그 방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아니 이런 일이 베드로한테 생긴다면 나는 도대체 어떤 일을 당하게 될 것인가?" 그렇게 걱정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주님께서는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이 1절은 참으로 놀라운 주님의 말씀입니다. "슬퍼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으라." 이것은 두 개의 명령어입니다. 두 개가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네가 나에 대해서 확신하지 못한다면 너희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평범한 사람이 할 수 있는 그런 말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이와 같은 말씀을 하실 수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만큼 너희가 믿을 수 있는 그런 존재이다."라고 주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제 나를 믿으라." 그리고 바로 이제 거기서부터 주님은 말씀을 시작하십니다. 이제 그들이 슬퍼하는 것을 보시고 그들에게 주님을 믿으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주님이 어떻게 말씀하시는지를 귀를 기울여 들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여러 가지 질문들을 하게 됩니다. 그들은 이제 주님의 대답을 듣기를 원합니다. 또한 13장에 베드로도 그와 같은 질문을 하고, 그런데 아직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을 듣지 못한 상태입니다.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그리고 이제 그것에 대해서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아버지의 집, 그곳에는 너희가 거할 곳이 많도다."라고 하십니다. 나는 지금 아버지의 집으로 가고 있다. 이제 하늘나라로 가고 있다. 아버지와 함께 있기 위해 가고 있다. 그리고 너희들이 알기를 바라는 것은 그 아버지의 집에 거할 곳이 많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이것을 말하지 아니하였을 것이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라. 갈보리를 말하는 것인가요? 그게 아니다. 주님은 갈보리로 나아가십니다. 나는 지금 하늘로 가고 있는 것이다. 내가 하늘의 그 임재 가운데서, 그리고 거기서 너희를 위한 처소를 예비할 것이다. 너의 하늘에서의 그 안전은 나로 말미암아 보장되는 것이다. 너희를 위한 처소를 예비하러 가는 것이다. 그런데 왜 너희가 슬퍼하겠느냐? 저는 여기에 그 하늘 나라를 '아버지의 집'으로 표현한 것에 큰 기쁨이 있습니다. 참으로 그 하늘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묘사하는 것들이 전부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것입니다만, 낙원, 그리고 동산, 제 고향에서는 제 집에 정원이 있습니다. 서울에서는 그 정원이 있는 집이 많지가 않죠. 예, 제가 그런 걸 이해합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질투하라고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어쨌든 저는 아름다운 정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그 정원의 단정함을 좋아합니다. 그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를 듣기 좋아합니다. 그리고 그 꽃들의 아름다움을 보길 좋아합니다. 그리고 다양한 색깔의 잎을 가진 나무들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천국을 가리키는 묘사로서 사용됩니다. 평안과 그 아름다움. 또한 하늘나라를 '집'이라고 표현하는 것을 또한 좋아합니다. 우리가 고린도후서 5장을 보게 될 때에 사도 바울은 이제 몸을 떠나서 주와 함께 그 본향에 거하는 것을 사모하였습니다. 제가 여기 한국에 온 뒤로 여러분이 저를 아주 잘 돌봐주셨습니다. 저는 집에 돌아가면 이 한국에서 접대를 받은 것을 자랑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놀라지 않길 바랍니다. 제가 이것을 말씀을 드립니다. 그런데 제가 말레이시아에 가고 나서, 그리고 나서 집으로 가는 것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집보다 더 좋은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정말 내 자신이 편안하게 있는 곳이 집이 아니겠습니까? 외부를 전부 만족하고 온전히 안식을 누릴 수 있는 곳이 집이라고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것이 바로 하늘을 묘사하는 것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는 이제 '아버지의 집'이라고 언급되고 있습니다. 거기는 돌봄을 받는 장소입니다. 거기 사랑을 받는 장소입니다. 그리고 함께 공유하는 장소입니다. 여기에 구원받지 않은 분이 있다면, 여러분과 저는 그 장소를 함께 공유하지 못합니다. 참으로 거기에 구원받은 자만 주님과 함께 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가 그 자리에 갈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특별히 구원받지 못한 분들에게 이것을 경고로써 말씀을 드립니다. 여러분은 지옥에 가는 것입니다. 참으로 여러분의 영혼의 구원을 참으로 귀한 것으로 알고 그것을 구하기 바랍니다. 나이가 드신 분들이거나 나이가 어린 분들이거나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구주로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참으로 이 소망 없이 죽질 않길 바랍니다. 여러분의 영혼이 어디로 가게 될지를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구원받은 자들은 분명한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그 초소를 예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상의 것을 주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를 위해서 다시 오시는 것입니다. 3절에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겠다." 참으로 이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위대한 소망입니다.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우리에게 다시 오시는 것입니다. 그분의 피로 구속받은 자들을 위해서 다시 임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주로서 영광 가운데 통치하시기 위해서 또한 이 땅에 임하실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다시 오시는 분입니다. 우리 모든 신자들을 위해서 다시 오시는 것입니다. 여기 제자들은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입니다. 이제 2천년이 시간이 흘렀습니다. 참으로 그렇지만 그들은 주님께서 "내가 다시 오리라" 하신 그 말씀을 그대로, 문자 그대로 믿고 있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작별 인사를 이렇게 하였습니다. 제가 이것에 대해서 작별 인사는 한국말을 배우지 못했습니다마는, 예, 제가 만났을 때 아침, 점심, 저녁으로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하는 것을 배웠지만은 작별 인사는 못 배웠습니다. 그런데 초기에 그리스도인들은 작별 인사를 이렇게 했습니다. "마라나타"라고 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십니다.' 이것이 그들의 인사말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죽기 전에 주님이 곧 오실 것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 고린도전서 15장 58절은 이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라 또한 변화하리라." 우리가 모두 그렇게 다 잠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또한 우리가 모두 다 변화할 것입니다. 참으로 그 마지막 나팔 소리에, 눈 깜짝할 사이에, 순식간에 변화될 것입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4장에서 이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참 이것이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 살아남은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 4:16-17).

우리는 언제라도 주님께서 오실 것을 믿고 있습니다. 참 우리의 컴퓨터와 태블릿 PC와 여러 가지 것들을 우리가 보고 있는데요. 거기서 많은 이 휴거를 부정하는 글들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지만 이 휴거에 대해서 요한복음 14장 3절이 무엇보다도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가면 다시 와서 나 있는 곳에 너희를 영접하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우리가 주님과 함께 있을 사실에 기뻐합니다. 제가 아주 큰 집과 큰 성을 가지고 있는 친구가 있다고 가정을 해볼 때, 저와 제 아내와 제 가족이 그와 함께 한 주간 지내는 것으로 초청을 받았을 때에, 참으로 아주 멋진 그런 순간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성에 도착했을 때 여기 작은 쪽지가 남겨져 있는데, '나는 지금 잠깐 휴가로 어디 가는데 너희가 이 성에서 잘 지내길 바란다.' 저는 이제 그 큰 성에서 지내게 될 것입니다. 물론 그것도 멋진 추억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내 친구와 함께 보내는 그 시간과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늘나라에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 위해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버지와 함께 있기 위해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늘을 그 하늘 나라답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그래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슬퍼하지 말라. 나는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의 집에 그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 그리고 슬퍼하지 말라. 나는 다시 너희에게로 각각 올 것이다. 너희들은 내가 어디로 가고 또한 그 길도 알 것이다.

그리고 이제 도마는 손을 들어서 질문합니다. 아마도 한국에서 이렇게 손을 들고 질문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제가 물리 교사일 때 저는 그 학생들에게 “질문 있는 사람 손들어서 질문해라.” 이렇게 자주 말했습니다. 도마는 자기가 주님이 하신 말에 지금 잘 이해 안 되는 부분을 질문을 하게 됩니다. 아마도 여러분은 도마의 질문에 대해서 주님께서 이미 답변하신 게 아닌가 생각이 들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제가 하고 싶었던 질문을 도마가 한 것에 대해서 저는 기쁘게 생각합니다. 도마가 그렇게 5절을 질문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6절에 주님의 대답을 듣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러분이 질문했을 때 그 답변을 성경을 통해 찾아볼 수 있는 것입니다.

"도마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요 14:5).

여러분은 이제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이후에 2천 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제 이 진리를 2천년 전에 가장 먼저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다." "도마야, 내가" 그 'Iam'이라는 그 하나님이심을 나타내는 그 이름을 먼저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 길을 개시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그 길을 여는 것도 아니고, 그 길을 만드는 것도 아니고, '내 자신'이다. 어떤 과정이 아니라 '내 자신', 이 인격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하늘나라에 어떤 과정을 통해서 도달하고자 합니다. 이것을 하고, 저것을 하고, 이것을 믿고, 그래서 하늘나라에 간다고 생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 길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내 자신이 바로 그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그 길이다. 도마야 내가 진리다. 내가 절대적인 한 진리다. 그것이 바로 내 자신의 인격이다. 내가 바로 그 생명이다. 내가 바로 하나님께서 가지신 그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그 생명이다. "도마야,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 여긴 다른 길이 없다. 오직 나를 통해서만 아버지께로 갈 수 있다.
이 자리에 아직 구원받지 못한 분이 있다면, 그리스도 외에 다른 구원의 길은 없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참으로 주님의 그 팔에 안기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내게로 오라라고 초청하고 있습니다. 너에게 안식을 주리라. 참으로 네가 주님께로 오기를 나에게 오기를 바라고 있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이 지금 가고 있는 여러분의 자신의 길은 틀린 길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분만이 그 유일한 길인 것입니다.
도마의 질문을 주님께서 약간 다르게 이렇게 표현해서 말씀하십니다. 사실 이것은 좋은 교사들이 항상 하는 일입니다. 학생들이 질문한 것을 이제 다시 잘 표현해 주시는 것입니다. 도마는 어떻게 그 아버지의 집에 갈 수 있는지를 궁금해 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 어느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의 집으로 올 자가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 집으로' 올 자가 없다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차이는 '아버지의 집'으로 올 자가 없다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라고만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차이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하늘나라가 아주 멀리,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하늘나라라는 곳은 우리가 지금 현재 누릴 수 있는 것이고, 그리고 미래에 또한 더 크게 누릴 수 있는 곳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하늘나라가 그 아버지 안에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 하늘나라가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는 것입니다. 너는 그 아버지께로 가기를 원하느냐?
그리고 이제 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알았다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 이미 내가 그 아버지에 대해서 너희한테 계속 말하고 있었다. 여기 7절에 '알았다'라는 단어가 두 번 나오는데요. 이것은 서로 다른 단어입니다. '너희가 나를 경험적으로 알았다면, 내 아버지도 절대적으로 알았을 것이다.' 이제 나로 하여금 네가 아버지를 알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네가 나를 보았다면 아버지를 본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아버지와 아들의 그 하나 됨을 말씀을 통해 알게 됩니다. 그 아들은 아버지를 온전히 표현하는 분입니다. 요한복음 1장 18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아버지를 본 자가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가 슬퍼하지 말라. 나는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의 집을 예비하러 가노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또한 "슬퍼하지 말라.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나 있는 곳에 있게 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슬퍼하지 말라. 나는 이미 너희들에게 그 아버지를 계속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여러분은 이 말씀을 듣는 제자들이 그것을 통해서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됐을 거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빌립이 또한 질문을 하게 이것이 8절입니다.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요 14:8).

빌립은 아직 그 아들을 통해서 아버지를 보는 것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있습니다. 빌립에게 있어서는 아버지를 본다는 것이 우리 주님께서 그 왕국을 세우시는 그때를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그 아마겟돈 전쟁에서 승리하시고 그 감람산에 그 발을 두고 서시는 때를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능력과 큰 영광으로 임하시는 것을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빌립은 이제 육체적인 눈으로 보는 그 아버지의 영광을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9절에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답변하십니다. 이것을 너희가 이렇게 이해해야 된다.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참으로 빌립이 말한 것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다루고 있었습니다. "빌립아, 네가 이렇게 오래 나와 함께 있었는데 이것을 아직 모르느냐?" 빌립이 그 무화과 나무 아래에 있는 나다나엘을 불러온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오병이어로 5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먹인 것을 빌립이 또한 경험하였습니다. "빌립아 네가 이렇게 오래 나와 함께 있었는데 왜 모르느냐? 빌립아 네가 나를 보았으면 아버지를 본 것이다." 빌립아 네가 더 이상 이것 외에 더 볼 곳이 없다. 네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싶다면, 나의 사랑을 보면 된다. 네가 하나님의 능력을 보기를 원한다면 그 바다와 바람을 잠잠케 하는 그 나의 능력을 보면 된다. 그 불쌍한 나사로가 무덤에서 살아난 것을, 그것을 보고 능력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내 안에서 역사하는 아버지의 능력을 보지 않았느냐? 빌립아 내가 바로 그 아버지를 온전히 나타내고 있었다. 우리는 골로새서에 기록된 그 말씀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십니다. 어떻게 보이지 않는 분의 형상이 있을 수 있습니까? 불가능한 것이죠. 하지만 바로 그리스도께서 그런 분이십니다. 그 놀라운 하나님을 온전히 나타내신 분입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을 믿어라." 여기에 마포 모임에 오시는 분들이, 혹시 이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해서 의문을 품고 있는 분이 있다면, 그 사람은 이단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신성에 대해서 여기서 분명하게 가르치시고 있습니다. 내가 말한 그 말들이 바로 아버지의 말씀이었다. 내가 하는 그 일이 아버지의 일이었다. 내가 한 모든 그 말들이 아버지의 말씀이었다. 내가 아버지의 잔을 마셨고, 아버지와 나의 다른 차이가 없다. 그리고 이것을 말씀하시고, 증명하시고, 믿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통해서 그들을 격려하기 위해서 가르치고 계십니다. 내가 이제 떠나가지만 너희들은 이제 계속해서 이 하나님의 사역을 하길 바란다. 내 일을 그들이 계속해서 하길 바란다. 이것에 대해서 우리는 12절부터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요 14:12).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참 이것은 분명히 그들에게 놀라움을 안겨주었던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이제 주님께서 떠나가시고, 이제 우리는 남아서 주님의 일을 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것은 이해합니다. 그런데 "나보다 큰 일을 할 것이라는 것"은 이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중에 우리가 죽은 자를 살아나게 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폭풍 후에게 말하여서 그것을 잠잠하게 할 수 있습니까? 분명히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더 큰 일이라는 것은 그 본질적인 것에서 크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이것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우선 첫 번째 의미는 그 '범위에 있어서 크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3년 반 동안 그분은 사역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그 갈릴리에서부터 사역을 시작하시고 그 유대의 예루살렘까지 주님께서 사역하신 그 지역을 살펴볼 때에 그 레바논 밑에 아주 조그마한 지역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것은 마치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과 같습니다. "도마야 너는 이제 인도로 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베드로야 너는 터키와 또한 이란, 그리고 네가 죽기 전에 바벨론까지도 갈 것이다.", "요한아 이제 너는 터키로 가고 그리고 그 앞에 한 조그마한 섬으로 가서 거기서 죽게 될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을 들고 주님께서 활동하신 그 지역보다 훨씬 더 넓은 지역으로 나가게 될 것입니다. 저는 한국에 어떻게 복음이 들어왔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이미 이 다락방에, 주님의 머릿속에 있었을 거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이 영역에 있어서만 더 큰 것뿐만 아니라 그 '스케일'에 있어서도 더 큰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사역의 기간 동안 많은 사람들이 축복을 얻었습니다. 그 주님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복을 누렸는지 그 수를 셀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주님은 여기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야 이제 지금으로부터 약 50일 후에 너는 설교를 하게 될 것이고 3천 명이 구원을 얻게 될 것이다.", "요한아 그리고 나서 며칠 후에는 또한 5천 명이 너희들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될 것이다.", 참으로 이제 수년간에 걸쳐서 이 모임의 사역이 그 지중해 지역을 벗어나서 더 넓은 곳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더 큰 일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영역에 있어서나, 또한 그 스케일에 있어서나 더욱 커지는 것입니다.
또한 '시간에 있어서도 더 큰 것'입니다. 주님의 사역은 3년 반의 기간이었습니다. "이제 요한아, 너는 나이가 들 때까지 사역을 할 것이다.", "야고보야 너는 곧 순교하게 될 것이다. 젊어서 죽을 것이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더 오랜 기간 동안 사역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너희들이 전한 사람들이 또한 더 나가게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2024년에 그 주님의 일보다 더 큰 일을 지금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 하늘나라로 간다. 그 모든 일을 마치고 하늘나라로 간다. 그리고 이제 남겨진 너희들이 나를 위해서 할 일이 있다. 우리는 이 구절이 말하고 있는 그 영광을 인식해야 됩니다.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여러분과 저는 바로 그리스도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배를 준비하면서, 여러분이 다른 형제님과 자매님을 신방하면서, 어떤 이들을 격려하기 위해서 성경 구절을 들고 찾아갈 때에, 여러분이 성경 읽기를 준비할 때, 어떤 영혼들을 위해서 복음을 들고 찾아갈 때에, 여러분은 바로 그리스도의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다시 오시기 전까지 그 기간 동안 그분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얼마나 우리에게 놀라운 영광입니까?

이것을 여기서 멈추지 않고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14절입니다. 이제 남겨진 무리들이 기도하는 무리가 되길 바라신 것입니다. "나는 지금 하늘로 가지만, 또 이 땅에서 너희는 내 이름으로 기도를 하라." 그것이 바로 14절입니다.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요 14:14).

이제 하늘나라에 가서 내가 있고, 그리고 거기서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너희들은 땅에서 기도하고 나는 하늘에서 기도한다,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시행하리라" 그리고 16절에,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대신해서 그분은 계속 활동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금요일에 이제 성도들이 기도하기 위해 모일 때에, 그것은 이제 특별히 기도하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남겨진 무리들이 그와 같이 하길 바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기도할 때에 또한 주님께서도 기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중보하시는 사역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로마서 8장 34절에서 이 말씀을 읽게 됩니다. 이 말씀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8장 34절입니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4).

그리고 히브리서 7장 25절을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히 7:25).

우리는 여기서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중보하시는, 간구하시는 사역을 계속하고 계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주님께서 하늘에서, 이제 우리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우리를 위해서 계속 기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내 이름으로 구하라'라고 말씀하셨을 때, 여기서 한국 성도님이 한국어로 기도할 때가 있는데요. 다른 것은 다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마지막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그 말은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단지 우리가 공식처럼 행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는 기도할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라고 해야 됩니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그냥 형식적으로, 공식적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마치 '그 이름의 사람이 하는 것처럼 기도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권위를 가지고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와 같이 기도할 때에 우리가 무엇을 기도해야 되는지 조심해야 된다는 것을 금방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단지 전부 여객기를 달라고 기도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너희가 무엇이든지 내 이름으로 구하면 내가 그것을 시행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형제 자매님 여러분 제가 여기서 매우 실제적인 면을 한 가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에 그냥 일반적으로 두리뭉실하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기도해야 됩니다. 제가 이 한국의 기도 집회를 잘 모르지만 스코틀랜드의 기도 집회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어떤 분들은 기도할 때에 그냥 일반적으로, 그냥 '세상에 있는 선교사들을 위해서 기도드립니다.' 이렇게 언급합니다. 그리고 어떤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 기도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한다면 이것이 어떻게 기도 응답이 됐는지 우리가 알 수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구체적으로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대답이 어떻게 이루어질지를 기대하고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교제를 나누는 그 영인 것입니다.
그래서 15절에 이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어떻게 이 한국어 성경에 번역됐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이것은 이제 한 '직설법'으로 한 사실을 말하는 그 문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그래서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주님께 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만약에 내가 불순종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을 때에 주님께서 내 기도에 응답하는 것을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순종하고 있을 때에, 내 이름으로 구할 때에, 그리고 구체적으로 구할 때에, 주님의 뜻대로 구할 때에, "내가 그것을 시행하리라." 그것이 바로 기도의 능력입니다.
우리가 스코틀랜드에서 복음을 전하고 구원받는 역사를 보게 될 때에 이런 많은 복음 전도를 통해서 구원받는 회심자들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제 그들에게 세 가지 무엇을 기도하고 있는지를 묻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어떻게 대답하는지를 들어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그것을 어떻게 응답하셨는지를 보게 될 때 놀라운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기도 응답을 받았을 때 항상 '감사합니다.'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그리고 먼저 감사를 드리고 또한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 떠나가지만 이제 남아 있는 무리들이 계속 주님의 일을 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떠난 후에도 그 사역은 계속 확장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너희들이 내 이름으로 기도할 때에 나는 너희들을 위하여 또한 일할 것임을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16절에서 "내가 지금 떠나가지만 나는 너희에게 다른 성령님을 보내신다."고 말씀합니다. 16절에 '또 다른 보혜사'라고 '성령님'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이 '다른'이라고 되어 있는 헬라어 원어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같은 종류의 다른 것'이 있고 '다른 종류의 완전히 다른 것'이 있습니다. 여기 쓰여져 있는 이 '다른'이라는 단어는 같은 종류의 다른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지금 이제 나와 똑같은, 그러한 다른 분을 너희에게 보낼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제 그분으로 말미암아 너희는 능력을 얻게 될 것이다. 너희들이 그 일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할 때에 성령께서 너희에게 능력을 주실 것이다. 너희들이 연약하다고 느낄 때 그분께서 너희에게 강하게 해 주실 것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능력을 똑같이 가지고 계신 분이다. 그분은 나와 똑같은 분이다. 그런데 여기에 더 좋은 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에게 영원토록 함께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 성령께서 너희 안에 있을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다시 떠나지 않고 영원토록 있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들은 내가 떠나는 것으로 슬퍼하고 있지만, 이제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영께서 너희에게 거하시고, 그분은 다시 너희를 떠나지 않는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언제 이 성령님을 받게 됩니까? 우리는 에베소서 1장 7절에 "너희가 믿을 때에 그 약속의 성령님으로 인치심을 받았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6장에서 "너의 몸은 성령님의 거룩한 성전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능력을 주고 계십니다. 우리를 용기를 북돋아 줍니다. 그리고 영원토록 다시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참으로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이분을 받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선물입니까? 주님께서 바로 그분을 우리에게 보내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아버지께 우리를 위해서 주님이 기도하십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에게 다른 보혜사를 주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에게 영원토록 거하시는 것입니다. 참 우리가 이 성령님에 대해서 더 많이 공부해도 부족할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이 성경을 통해서 계속 연구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령님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성령님에 대해서 참으로 그 금빛으로 글자가 빛나는 것처럼, 아주 이 성경에서 튀어나와서 말해주는 것처럼, 우리에게 말해주는 구절이 있을 것입니다. 참 성령께서 이것을 수백 번 우리가 읽었는데 깨닫지 못하는 것을 그렇게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인 것입니다.
이제 이런 생각이 여러분의 머릿속에 떠올랐을 때에 여러분은 이제 다른 형제님, 다른 자매님과 만나서 대화를 나누게 됩니다. 여러분께서 성령님이 알려준 그 생각을 그냥 무시하지 않길 바랍니다. 이것은 성령께서 여러분 마음속에 떠오르게 한 그러한 내용들입니다. 여러분이 만찬에 함께 앉아 있을 때에 성령께서 그리스도에 대해서 아주 그분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잘 조명해 주시는 그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어떤 분이 또한 옆에 있는 분은 다른 찬송가를 성령의 인도함으로 부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찬송가의 가사가 여러분의 영혼에 또한 작용을 해서, 그리스도에 대해서 또 다른 새로운 면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이 성령께서 역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큰 질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그것을 이해해야 될지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일어났을 때에 여러분이 성경의 어떤 부분들을 보고, 그리고 이제 여러분이 알았어야 되는 부분을 깨닫게 됩니다. 성령께서 여러분을 인도하신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 주님께서 떠나시지만 이 성령님을 우리에게 보내신 것입니다.
17절에 그분은 '진리의 영'이라고 불리우고 있습니다. "세상은 저를 알지도 못함이라." 여러분이 구원받지 않았다면 이 성령님을 모시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령을 이해할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도들이 모인 그 집회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참으로 이와 같은 집회 가운데서 '내가 왜 여기 있나?' 이런 생각이 들 것입니다. 참으로 그것은 여러분 안에 성령이 지금 내주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여러분이 구원받고 참으로 주님께 나아오기를 여러분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하지만 구원받은 우리들은 그것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를 아는 것입니다. "너희와 함께 거하시며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니라" 그분은 단지 우리와 함께 거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 속에 계신다고 되어 있습니다. 16절에서는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다"라고 말씀하셨고, 17절에서는 "너희 속에 계시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와 함께 거한다'라는 것은 '교제'를 말합니다. '너희 속에 계신다'라는 것은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오직 신약 교회 시대의 진리입니다. 구약 시대에서는 하나님의 성령님이 사람들 위에 잠깐 임하셨습니다. 우리는 민수기 11장 29절 말씀을 보게 될 때 하나님의 영이 사람들 위에 임했다는 기록을 보게 됩니다. 하지만 이 신약 교회 시대 때는 하나님의 영이 사람들 안에 거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18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제가 인디아의 '하이드라바'라는 곳에서 복음을 전한 적이 있습니다. 문바이었습니다. 여기에 이제 앞을 보지 못하시는 전도자가 있었습니다. 참 인디아에서 그런 앞을 못 보시는 전도자가 세 분이나 계십니다. 그리고 그 각 전도자들이 성경에 대해서 아주 잘 알고 계시는 분들입니다. 그리고 한 분이 뭄바이에 산티타운이라는 곳으로, 슬럼가 지역에 있는 그 모임에서 오신 분이 있습니다. 제가 그곳에 실제로 가본 적은 없지만 한번 가보고 싶습니다. 그 슬럼가에서 온 형제님이 "형제님 저는 고아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제가 그 형제님에 대해서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앞을 못 보는 그 전도자가 바로 이렇게 대답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더 이상 고아가 아닙니다. 요한복음 14장 18절에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리라고 바로 대답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너희들은 나의 가족의 일원이다.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들이 어떠한 배경을 가졌든지 간에, 이제 내가 너에게로 올 것이다. 주님께서 14장 2절에서도 다시 올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것은 휴거를 말하는 부분이었습니다. 여기서는 다른 온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8절은 부활을 말하는 수도 있고, 이것은 아마도 오순절에 내리시는 성령님을 통해서 주님께서 임재하시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여기서 18절은 '너에게로 온다'라고 끝난 것이 아니라, 이제 '너에게 계속해서 오고 있다.' 이 시제가 계속해서 오고 있다. 항상 너에게 오고 있다라는 표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나는 항상 너에게 오고 있다. 너희를 결코 혼자 내버려 두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이 구절이 말하고 있는 그 아름다움입니다.
19절에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 조금 있으면, 언젠가는, 그 다음 날 주님께서는 죽음을 겪으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 조금 있으면, 사흘 후에는 무덤에 사흘간 계셨습니다. 아니면은 "조금 있으면" 또한 40일을 말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은 부활하시고 40일 후에 승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조금 있으면" 그 하루를 말할 수도 있고, 3일 말할 수도 있고, 또한 40일 이후를 말할 수도 있지만,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입니다. 이 세상은 우리 주님께서 다시 재림하실 때까지 그분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그러나 너희는 나를 볼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주님, 주님은 하늘에 계신데 우리가 어떻게 주님을 볼 수 있습니까?” 왜냐하면 내가 성령님을 통해서 항상 너에게 오는 그런 존재이기 때문이다. 너희가 나로 말미암아 그 생명을 얻고 살기 때문에 나를 보는 것이다. 나는 지금 떠나가지만 바로 이 성령님을 너희에게 보낸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는 지금 하늘로 가지만 너희에게 나의 계명을 남겨 놓는다. 너희가 그 나의 계명을 지키길 바란다. 이 남겨진 무리가 순종하는 무리가 되길 바란다. 그리고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그리고 나를 사랑하면 또한 나의 사랑을 너희에게 나타낼 것이다. 그리고 내 아버지도 너희를 사랑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너에게로 와서 함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를 너에게 나타낼 것이다. 이것은 구원이 아니겠습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구원의 이상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 이후의 교제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들과 성령과 그 아버지께서 우리 안에서 함께 교제를 나누는 것입니다. 이것은 골로새서 1장 27절이 말하고 있는 바입니다. "너희 안에 있는 그리스도니 영광의 소망이라."
형제 자매님 여러분, 참으로 이것은 중요한 진리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가장 큰 배워야 될 것은 바로 이 교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가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는 그 능력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모든 인생에 걸쳐서 그 영을 따라서 걷고, 행하고, 배울 수 있는 그 능력을 얻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이 차를 운전하든지, 여러 가지 버스나 기차를 타든지, 참으로 여러분이 여러분의 사무실에 들어가서 일을 할 때에도, 여러분의 가정에서 가족과 함께 있을 때에도, 여러분은 하늘과 계속해서 접촉을 맺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가 누리는 이 축복은 얼마나 놀라운 것입니까?

그런데 여기에 이 순간에 가룟이 아닌 유다가 질문을 하게 됩니다. 22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도 이 질문에 이제 대답을 하실 수 있을 거라 생각이 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와 같은 질문한 것에 대해서 저는 기쁘게 생각합니다.

"가룟인 아닌 유다가 가로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게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요 14:22).

여기에 제자들이 한 질문을 보면 항상 그 질문을 하게 만든 어떤 단어들이 앞에 나와 있었던 것을 보게 됩니다. 여기 13장에서 사도 요한이 질문하게 된 것은 '"너희 중에 하나가"라는 그 '하나'였습니다. "너희 중에 하나가 나를 팔리라." 그래서 요한은 누굽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또한 13장에 베드로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다."라고 했을 때에, 그래서 베드로는 이렇게 질문합니다. "왜 따라갈 수 없습니까?" 왜 지금 내가 따라갈 수 없습니까? 도마에게 있어서는 "내가 가는 곳"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14장 4절에서 주님은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도마는 "아니,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거늘"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빌립에게 있어서는 "보았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8절에 빌립은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십시요. 그러면 족하겠나이다."라고 말합니다. 22절에 유다에게 있어서는 "나타내리라"라는 말씀이었습니다. 21절에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22절에 가룟이 아닌 유다가 이렇게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세상에는 안 나타나시고 우리에게 나타내신다는 것입니까?"
그는 여전히 주님의 왕국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께서 능력과 크신 영광을 가지고 임하시는 것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세상이 그분의 영광을 볼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께서 큰 구름을 타고 임하실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의 눈이 그분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 찌른 자도 볼 것입니다. 그 유다가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그런 광경이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답변하시는 것은 "유다야, 내가 지금 말하는 것은 그 세상의 마지막 때다.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은 내가 하늘로 간 후에 그 며칠 후에 일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너희들에게 그때 성령을 내려줄 것이다. 나는 지금 현재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주님께서 자신을 어떻게 나타내실 것인지 그 대답은 23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주님에 대해서 순종하면서 사는 그 사람들에게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그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이제 유다에게 이 비밀을 말씀해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너와 나는 이제 물리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요한복음 13장에서 그들의 발을 씻겨주시,고 또한 수건으로 씻겨 주셨습니다. 또한 요한복음 13장 후반부에 요한은 또한 그 실제적으로 그 몸을 주님께 기대었습니다. 그래서 너희들이 혹시 그런 육체적인, 실제적으로 물리적인, 그런 관계가 전부라고 생각하지는 않느냐? 그게 그 관계의 전부가 아니다. 진정한 관계는 영적이고 또한 내적인 것이다. 어떤 만지고, 우리가 이렇게 잡을 수 있는 것들은 오래 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늘나라에 갔을 때 너희들에게 성령을 내려줄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 안에 거하실 것이다. 그리고 주님께서 여기 서 계시고, 유다는 지금 여기 서 있지만, 하지만 며칠 후에는 나는 그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의 안에 있을 것이다. 그때 네가 가지게 되는 그 관계는 더 높은 수준의 관계를 나와 맺게 되는 것이다. 그냥 손으로 만지고 그런 관계가 아니라 더 깊은, 우리는 그것이 더 귀하고 더 영적인 그 귀한 관계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여기에 베드로가 앉아 있고, 그 베드로는 곧 주님을 부인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랬던 그가 며칠 후에 그는 능력으로 많은 사람들 앞에 일어나서 복음을 전하게 될 것입니다. 바로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그가 그 일을 행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24절에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그것은 이 세상은 이와 같은 관계를, 결코 나와 함께 즐길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참으로 그 하늘나라에 대해서 우리 주님의 그 내적인 관계를 전혀 그들은 느낄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내 말을 지키지 않는, 믿지 않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너희들은 내 말을 믿고, 그리고 내 말을 순종하고, 그래서 너희들이 그 관계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아버지의 집'의 진리를 말씀하신 후에 그리고 그것으로 인한 '위로'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모두 하늘나라에 갈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또한 이 땅에서 그 하늘나라를 누리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지금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얼마나 그들에게 큰 위로가 됐겠습니까? 나는 지금 가지만, 너희들을 위해서 그 아버지의 집에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 그리고 나는 지금 가지만 또한 다시 올 것이다. "나 있는 곳에 내게로 영접하여" 그리고 내가 지금 가는 것은 아버지, 그분 자신에게로 가는 것이다. 그 아버지는 내가 이미 계속적으로 너희에게 보여주고 있었던 분이다. 나는 지금 떠나가지만 나는 너희들에게 내가 한 그 일을 계속하라고 남겨 두었다. 그리고 너희들은 그 일을 더욱 확장하게 될 것이다. 나는 지금 가지만 너희들은 이제 계속 기도한다. 그리고 너희들이 기도할 때 나는 또한 하늘에서 너희를 위해서 함께 기도한다. 나는 지금 가지만 너희를 위하여 성령님을 너희에게 보낸다. 그리고 그분은 다시 너희를 떠나지 않는다. 너희 안에 거하신다. "유다야, 나는 지금 가지만 네가 내 말을 순종한다면, 그리고 나와 함께 계속해서 교제를 나눌 수 있는 것이다."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나와 아버지께서 너와 함께 교제를 나누는 것이다. 너와 함께 이와 같은 교류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2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이제 그들의 이 물리적인 관계가 영적인 관계로 바꾸는 시점이 온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마도 이 성경이 기록된 시대로 가본다면 '그거 되게 좋을 것 같은데.'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형제 자매님 여러분, 그때 당시에 살았던 사람들보다 우리가 지금 더 큰 축복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어떤 다른 곳으로 간다면, 내가 했던 말들을 너희들은 모두 잊어버릴지 모른다. 이렇게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참 우리는 나쁜 기억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참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것을 다 잊어버리고 말것 같아서, 아마도 제자들도 동일한 걱정을 하였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것에 대해서도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2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성령께서 너희에게 오사"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26).

"내가 말한 모든 것을" 이 성령께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을 그래서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주님의 말씀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그 복음서 기자들이 주님이 말씀하신 그 각각 말씀 하나하나를 정확하게 기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 받아 기록된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27절에서 이제 주님께서 이렇게 마치십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평안을 너에게 준다. 나의 평안을 너에게 준다. 이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이 세상이 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 세상은 어떤 집이나 어떤 기업들을 물려줍니다. 또 땅을 물려줍니다. 그 돈을 물려주기도 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물려주는 것은 이것이다. 세상이 너에게 줄 수 없는 다른 것을 주는 것이다. 그 세상이 결코 살 수 없는 이것을 주는 것이다. 세상이 결코 만들어낼 수 없는 이것을 준다. 그것은 나의 평안이다. 이것이 너에게 그리고 영원히 누리도록 주는 것이다. 이제 너희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두려워하지도 말라.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얼마나 놀라운 그 자원을 받은 것입니까? 우리는 얼마나 놀라운 축복을 받은 사람들입니까? 참으로 이와 같은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교제를 계속해서 누리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이 교제를 계속 이어가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내일 이 시간에 요한복음 15장을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여기서 '열매를 맺는 것'을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여기서 '참 포도나무'에 대해서 한 또한 보겠습니다. 이제 다시 우리가 함께 모여 이 말씀을 나누기를 바랍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 모두를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