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 생애의 교훈
< 아브라함 생애의 교훈 > 한봉래 형제님
안녕하십니까, 저희들이 아브라함을 살펴본 대로 이제 두 번째 시간에 그런 교제가 나왔는데요.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하나님, 어떤 하나님이 나타났는가 보겠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이름 네개 골라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다음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그렇게 나타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 자기에게 나타난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는 단을 4개를 쌓습니다. 그래서 4개의 단, 나타나신 하나님, 하나님의 단, 그리고 그에 대한 해석을 히브리서 11장에 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에서 4개, 이렇게 총 12개의 말씀을 가지고 아브라함 생애 전체를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말씀을 먼저 찾아보겠습니다. 제일 처음에 나타난 것은 신약인데요. 사도행전 7장입니다.
"스데반이 가로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행 7:2).
메소포타미아가 이제 갈데아입니다. 메소포타미아는 지역 이름이고요. 그 문명의 이름이 갈대아입니다. 그리고 이제 중심 도시가 우르입니다. 그 다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그래서 이제 첫 번째,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첫 번째 하나님은 '영광의 하나님'입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는 구약으로 가겠습니다. 창세기 14장입니다.
"아브람이 소돔왕에게 이르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창 14:22).
그래서 두 번째 아브라함이 경험한 하나님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입니다. 우리나라 말은 이렇게 돼 있는데요. 저기 히브리어 쪽은 이제 저희들 이런 게 있죠. 원급, 비교급, 최상급, '아름다운', '더 아름다운', '가장 아름다운' 원급, 비교급, 최상급, 이게 이제 서양식 방법이죠. 그런데 이 히브리 사람들도 최상급이라고 하는 개념이 없습니다. 그래서 '지극히 높으신', 이것은 저희들이 익숙한 영어식으로 표현하자면 최상급입니다. 가장 높으신, 그보다 더 높은 분은 없는, 가장 높으신 하나님, 이게 이제 아브라함이 이해한 두 번째 하나님 이름입니다.
그럼 세 번째로 가겠습니다. 창세기 17장 1절입니다.
"아브람의 구십 구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 17:1).
그래서 이제 세 번째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하나님은 '전능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 못할 일이 없다라고 하는 거죠. 하나님께 무엇이 어려운 일이 되겠느냐? 라고 하는 게 이제 전능한 하나님입니다.
그다음에 네 번째로 나타난 하나님, 창세기 21장 33절입니다.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생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창 21:33).
그래서 이제 네 번째 하나님이 '영생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영원토록 살아계신 하나님, 이게 이제 영생하신 하나님이죠. 이렇게 네 번 이제 그에게 계시되었습니다.
이 하나님을 알고 그가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와 경배를 드립니다. 드리는 게 이제 단인데, 단 4개 찾아보겠습니다. 우선 첫 번째 단은 창세기 12장 7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그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곳에 단을 쌓고"(창 12:7).
첫 번째 단은 세겜이라고 하는 곳에서 쌓은 단입니다. 세겜은 성경에서 이제 이때는 안 나와 있지만, 그다음에 이제 창세기에 보면 세겜이라고 하는 이 장소가 여러 번 나옵니다. 세겜은 여러 가지 이미지가 있는데요. 그중에 대표적인 이미지는 '반역의 도시'입니다. 세겜 하면 항상 반역했던, 반대했던 곳인데요. 그러니까 거기서 하나님이 나타나셨는데, 이렇게 된 거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갈 바를 말씀 안 하시고 어디로 가라, 이렇게 말씀 안 하시고 가라, 이렇게 하십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거죠. 그래서 이제 쭉 따라간 거죠. 그런데 이제 어딘지는 모릅니다. 하나님이 "여기다, 내가 지시한 곳이 여기다."라고 말씀 안 하셨어요. 쭉 오다가 가나안 땅 세겜이 가나안 땅의 한가운데입니다. 중앙에 해당하는 지역입니다. 여기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이 "내가 이야기했던 땅이 여기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드디어 하나님이 갈 바를 알지 못하던 자기에게 여기다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을 감사해서 단을 쌓은 것입니다.
그다음에 이제 두 번째는 하나님이 원래는 이제 "내가 너에게 지시한 땅에 가서 살아라." 이렇게 한 거죠. 그러니까 이 세겜 지역은 아브라함이 살 곳이죠. 그런데 이렇게 말합니다.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겠다."고 그럽니다. 아브라함한테 주겠다고 안 합니다. 하나님이 가라고 그래서 왔지만 이 땅은 아브라함이 소유하지 못하는 땅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살 땅입니다. 이제 이 부분이 이제 그 세겜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는 이 땅에 살지만 그는 하늘을 향해 가는 사람이어야 됩니다. 하나님이 지으시고 경영하실 성을 바라봐야 합니다. 이 부분이 이제 이 첫 번째 단에서 이제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단어 바로 그다음 절입니다.
"거기서 벧엘 동편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는 벧엘이요 동은 아이라 그가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점점 남방으로 옮겨 갔더라"(창 12:8-9).
창세기 12장은 전부, 이제 이렇게 생각되죠. 이 성경을 읽으면 어떤 느낌이 드냐면, 아니 이제 세겜에서 단을 쌓았으면 그냥 여기서 오랫동안, 혹은 지속적으로 여기서 단을 쌓고 하나님 예배드리고 살았으면 좋겠죠. 그런데 그렇게 안 하고 내려 벧엘로 갑니다. 벧엘도 아니고, 벧엘이 있으면 벧엘은 서쪽에 있고요. 벧엘 동쪽에 산이 하나 있었는데 그 산으로 옮겨갑니다. 산 위로, 그곳에서 장막을 치고 그곳에서 단을 쌓습니다.
그래서 이제 두 번째는 이제 벧엘 동쪽에 있는 산에서 단을 쌓았는데요. 그런데 왜 옮기냐? 이제 이렇게 생각이 되고, 그다음에 보면 계속 남방으로 옮겨가죠. 창세기 12장에서는 아브라함 생애의 큰 특징이 뭐냐 하면 아브라함은 믿음의 사람이죠. 저희들이 잘 아는 대로 믿음은 어디서 나와야 되냐면 말씀에서 나와야 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믿으면 안 됩니다. 자기 개념으로 믿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기에 그것이 내 생각과 다를지라도, 그것이 현실적인 가능성은 어떨지라도,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믿는 것입니다. 이게 이제 믿음입니다. 우리도 그렇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서 단번에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다라고 하는 것이 나에게 납득이 되건, 그게 현실적으로 그런 현상이 있는지와 상관없이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으면 나는 믿는다, 이게 믿음인 거죠. 그래서 이제 아브라함의 생애는 항상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그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믿는, 이게 아브라함 생애의 특징입니다. 말씀이 없는데 움직이면 다 재앙입니다. 기근이 왔어요. 물어봐야죠. "하나님 기근이 왔는데 어떡하죠?" 하나님 말씀하시겠죠. "그래도 있어라." 이렇게 하셨겠죠. "내가 너에게 준 땅 벗어나지 마라."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왔으니까, 어떻게 하나님이 기근을 해결하실지 알지 못하고 거기 있으면 되죠. 그런데 안 물어보고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자기가 독립적으로, 하나님의 말씀 없이도 무엇인가를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한 거죠. 이게 이제 착각한 거죠. 그래서 이제 어려움이 생기는 거예요. 그래서 아브라함의 생에는 항상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그 말씀을 순종한 삶, 이게 이제 아브라함 생애의 특징이고 이게 믿음의 특징인 거죠.
그래서 이제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세겜에서 단을 쌓았어요. 그다음에 벧엘 동편 산에서 왜 단을 쌓았을까요? 성경이 설명 안 해도 우리는 그 가운데 이게 있다고 딱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니', 하나님이 세계에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벧엘 동편으로 가라." 그래서 그가 간 겁니다. 그다음에 또 하나님이 남방으로 가라고 하니 그가 남방으로 옮겨갔더랍니다. 그래서 창세기 12장 초반부는 전부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아브라함이 순종하는 내용으로 쭉 차 있습니다. 1절부터 9절까지가, 그래서 이제 그렇게 이와 같은 흐름 속에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다시 보겠습니다. 두 번째 단은 벧엘 동편 산에서 쌓은 단입니다. 그리고 이제 이 성경은 누가 썼냐 그러면 하나님이 쓰셨지만, 이제 모세가 기록한 거죠. 이걸 그래서 이제 '모세 오경' 하잖아요. 창세기, 신명기, 이렇게까지 해서 모세 오경 하잖아요. 이 모세 오경을 이제 모세가 기록했습니다. 이 모세 오경의 첫 번째 독자가 누굽니까? 이 모세 오경을 전달받아서 처음으로 읽을 사람이 누굽니까? 이게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 중에서도 누구죠? 출애굽 2세대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겨냥해서 말합니다. 이제 출애굽 2세대들도 이제 쭉 들어갈 겁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죠.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이제 거기 벧엘도 나오고 아이성에서 그들이 또 전투도 하고 이런 것들을 다 지금 쓰고 있는 거죠. 그래서 이 벧엘 오른쪽에서 단을 쌓았다고 하는 것은, 아까 두 번째 나타난 하나님과 연결시킬 수 있고요. 그는 갈등 가운데 있습니다. 가운데니까 하나님의 집에 하나님의 집 쪽으로 가든지, 아니면 아이 성은 이제 아간이 범죄해서 이스라엘이 전투에서 실패한 거죠. 그래서 전쟁에서 실패한 쪽으로 가든지, 하나님의 집에 있든지, 그 가운데 있는 단이 이제 벧엘에 있는 단입니다. 일단 그렇게 이해하시고요.
그다음에 세 번째 단으로 가겠습니다.창세기 13장 18절입니다.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더라"(창 13:18).
세 번째 단은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죠. 이거 이제 단어들도 저희들이 다 세겜이 뭐고, 모레 그러면 교훈, 이렇게 했죠. 그다음에 이것도 이제 기본적으로 저희들이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헤브론, 그러면 교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도로 묻고, 하나님이 말씀으로 대답하시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게 헤브론입니다. 그리고 '마므레'라고 하는 것은 '기름지다'라고 하는 뜻인데 이 하나님과의 교제가 친밀했다. 항상 일어나고 있었다라고 하는 게 이제 이 마므레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에 있는 단입니다. 이 단은 이제 롯과 헤어지고, 하나님께서 너의 친척을 떠나라고 그랬죠. 그래서 이제 롯과 헤어지고 그가 있던 단입니다. 이게 세 번째 단위고요. 이제 나타나신 하나님은 영광의 하나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그다음에 전능하신 하나님과 이게 연관돼 있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네 번째 단이 창세기 22장 9절입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지시하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고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놓고"(창 22:9).
방금 전에 저희들이 성경읽기 했던 곳입니다. 모리아산이죠. 이 아브라함이 그곳에 단을 쌓고, 이제 모리아산에서 이삭을 번제로 드리기 위해서 단을 쌓은 단이 이제 네 번째 단입니다. 그래서 이제 나타나신 하나님이 네 가지 하나님의 성품이 나타나 있고, 그다음에 네 가지 단을 쌓았고, 그다음에 히브리서 11장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11장에서 아브라함이 이제 했던 행동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는데 이제 4번 이상이 돼 있죠. 이제 한 4개를 뽑아보겠습니다. 일단 히브리서 11장 8절입니다. 이게 이제 첫 번째 단, 영광의 하나님과 연관돼 있습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히 11:8).
즉, 하나님이 불렀을 때 순종했다. 이게 아브라함의 첫 번째 행동입니다. 두 번째입니다. 9절에 나와 있습니다. 두 번째 단은 이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경험했고, 그다음에 그는 벧엘 동편 산에서 단을 쌓았을 때입니다.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히 11:9).
이제 아브라함의 두 번째 단계는, 믿음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서 우거합니다. 그는 나그네로 삽니다. 이 하나님이 지시하신 곳이지만 그는 나그네로 삽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6절 보겠습니다. 마므레 상수리 헤브론에서 쌓았던 단인데요.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 11:16).
아브라함이 본향을 사모하고, 하늘에 있는 성을 사모하는 것이 세 번째입니다. 그리고 네 번째는 분명하게 나와 있죠. 이제 모리아산에서 쌓은 단이니까, 그건 17절부터의 거리입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히 11:17-19).
이게 내가 이삭을 죽이면 하나님이 이삭을 다시 살릴 것을 믿음으로 하나님께 드린 것, 이게 이제 아브라함이 했던 네 가지, 네 번째 행동입니다. 이걸 통해서 저희들이 원칙을 하나 말씀드려보겠습니다.
우선 첫 번째입니다. 영광의 하나님이 나타나기 전에 아브라함은 갈대아우르라고 하는 곳에 있었습니다. 갈대아우르는 메사포타미아, 두 개의 강 사이 유프라테스, 티그리스 강 사이에 있었던 인류의 최초 문명이 이렇게 발생한 곳입니다. 거기 '우르'라고 하는 아주 가장 발달된 도시에 아브라함이 살고 있었습니다. 한국으로 치면 서울에서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마 서울 강남에 살고 있었던 것 같아요. 세계로 놓고 보면 미국 뉴욕에 살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영광의 하나님이 나타납니다. 다시 말하면 세상에서의 화려한 삶은 허무한 것입니다. 하나님에 비하면, 이제 그게 사람들로서는 성공했다고 할 수도 있고, 나름대로 재미도 있고, 가치도 있고 하겠지만, 하나님의 영광과 비교하면 이건 허무하고 쓰레기 같은 것입니다. 거기서 하나님이 불러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첫 번째,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 어떻게 창조하셨냐면 하나님과 독립적으로 살도록 하나님이 창조해 놓고 이제 우리가 태어났죠. 이제 하나님과 무관하게 하나님은 놓고 내 나름대로 인생을 살도록 창조하신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인생을 창조하신 목적은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중심에 놓고 살기를 원하셔서 창조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일단 젖혀놓고 자기 나름대로 살아갑니다. 그리고 이렇게 살아갈 때, 그러니까 이게 아브라함이 구원받기 전이죠. 저희들도 구원받기 전에 어땠냐? 지금도 구원 안 받은 분들이 있죠. 구원 안 받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도 나름대로 산다. 나름대로 가치관도 있고, 내가 뭐 맨날 죄 짓고 타락해서 사는 게 아니고, 나도 나름대로 건전하게 인생의 목표를 가지고 잘 살아가는 사람이다." 이렇게 생각하죠. 생각할 수 있죠. 그런데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할 때 첫 번째, 하나님과 함께 살도록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 떠나면 행복하지 못하게 만들어 놓으셨어요. 그다음에 이제 실제로 어떻게 됐냐면, 우리가 이제 생각할 때 사람은 만족하며 살게 돼 있습니다. 만족이 있어야 합니다. 저희들이 이따가 이제 식사 갈 텐데요. 뭐 여기저기 고르셨는데요.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 있죠? 예를 들면 짜장면이다, 국밥이다, 그러면 이제 가서 먹고 나서 나중에 후기 올려주시기 바랍니다. 다음번에 이제 내년에 할 때 식당 바꿔요. 짜장면이라고 했을 때 기준이 있는 거예요. 이게 짜장이지, 우리는 기준이 있습니다. 기준에 안 맞으면 불만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은 자기 나름대로 살죠. 그런데 무엇인가 고통이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는 만족할 수 없는 인생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사람들을 보면 이렇게 생각하죠. 사람들이 큰 척으로 오면(?) "왜 세상에는 악한 사람이 잘 되고 불의가 횅행하는가?" "왜 선한 사람도 고통하는가?" 라고 하는 질문이 인류의 사람들이 하는 질문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의롭게 살면 그가 인정받고, 그래서 성실하고 착하게 정부에서 시킨 대로 잘하면 또 보상받고, 그 사회에서 인정받고, 이렇게 돼야 되죠. 그런데 이제 제가 요즘에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옛날에 보면 이제 농사 지을 때 정부에서 뭘 해라,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고 이게 사실인지 모르겠는데 그런 소문이 있어요. 정부에서 시킨 대로 하는 사람마다 망한답니다. 그리고 누가 뭐라고 시켜도 아니야, 거꾸로 해! 한 사람들이 성공한답니다. 이게 나쁜 세상이죠. 지금도 그러잖아요. 무슨 사고 났을 때 세월호, 가만히 있어라. 가만히 있는 사람은 다 죽어버립니다. 이거 가만히 있으면 안 되는데 상황이, 그러고 나온 사람이 살았습니다. 그러면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그래서 이 세상은 왜 이렇게 생겨 먹었는가? 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사람들이 세상이 원래 그런 거지, 하고 만족하며 살지 못합니다. 왜 이런가, 이유를 따지고 이걸 고쳐낼 수 없는가라고 하는 시도들을 하게 돼 있습니다. 사람은 반드시 기준을 가지고 있고, 그 기준이 만족되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사람입니다. 심지어 성경에서는 이렇게 돼 있죠.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하나님이 넣어주셨어요. 하여간 이제 그렇게 돼 있고요. 그래서 이제 사람들이 왜 세상이 불공평하고, 왜 인생은 이렇게 고난 속에 있고, 이제 이걸 명확하게 잘 느끼신 분이 저는 이제 시달타(?)라고 생각해요. 부처님이시죠, 그래서 왜 이런가, 왜 인생은 고통이 있는가, 그래서 이제 고통스러운 것, 생로병사에 대한 다 고통이 있는 거예요. 태어났다가 병들고, 늙고, 죽고, 이게 왜 있는가? 이제 이런 것을 고민한 거죠. 그래서 종교라고 하는 걸 만듭니다. 이게 왜 생겼는가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게 잘못된 것이지만 사람은 기본적으로 만족하게 돼 있습니다. 제가 누구를 생각하냐면 십자가에 달린 강도가 옆에 있는 강도한테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안 믿는 거죠. "너는 왜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냐? 하나님이 무섭지 않느냐?" 그러면서, 그런데 이 사람은 하나님이 무서운 거예요. 그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그 하나님 앞에 선다는 게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를 압니다. 그 이유가 뭐냐면 "생각해 봐라. 우리는 나쁜 짓 해서 사형 받는게 마땅하다. 그런데 이분은 잘못한 것이 없으신 분인데 우리와 똑같이, 의로우신 분인데 죄인처럼 심판받지 않느냐? 하나님이 이걸 놔두겠느냐? 하나님이 이 부당한 일을, 이 의로우신 분이 죄인 중에 최악의 죄인인 우리처럼 죽어가는 것을 하나님이 보고만 있을 것 같냐? 나는 그 하나님이 두렵다. 이 세상의 불의를 바로잡으실 하나님이 나는 두렵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거죠. 그래서 사람들 마음속에는 어떤 기준이 있어요. 이 만족, 이게 안 채워지면 불만이 생기는 겁니다. 왜 이래? 그리고 불만이 생기면 제가 이제 늘 그걸 하는 거거든요. 모든 사람은 죽습니다. 우리가 다 알아요. 모든 사람이 죽어요.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돌아가셨고 다 이제 자기가 죽을 때가 되면 "나도 죽을 때가 됐네. 죽어야지." 이렇게 안 하는 거예요. 아니 다 죽고, 죽음을 피할 길이 없어요. 그리고 자기가 죽을 때가 된 거예요. 그러면 자연스럽게 죽음을 받아들여야 되죠. 그런데 죽음을 못 받아들이는 거예요. 부모님 돌아가시면 안타까운 거예요. 아니 울면 안 되죠. 다 죽었네. 누구 안 죽는 사람이 있나요, 자기도 죽는데? 그런데 죽음 앞에서 우리는 거부감을 갖는 거예요. 이건 안 된다. 죽음은 왜 오는 건가? 해결책은 없는 건가?라고 하게 돼 있는 거죠.
그게 이제 아브라함이 영광의 하나님을 보고 만족을 하는 거에요. 이 하나님이 해결책이다. 하나님은 말씀을 들으니 내 마음속에 왜 인생에는 고통이 있고, 그 고통은 어떻게 해결되는지를 이 영광스러운 하나님을 봤을 때 내가 해결이 됐다. 그리고 그가 단을 쌓습니다. 감사의 단입니다. 저를 부르신 하나님, 저에게 진리를 알려주신 하나님, 그리고 이 복음이, 하나님의 말씀이 내 마음을 참으로 만족시켰다고 하는 것에 대한 감사가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 제가 잠깐 이야기 드리면 저도 이제 주님 뵙기 전에 불만이 많았어요. 세상이 왜 이러냐? 왜 대통령은 독재 정치를 해서, 그때 이제 박정희 대통령이죠. 맨날 데모했어요. 지금도 이제 정치 말고 다른 데 불만이 많죠. 아니 왜 시험 제도는 이래서 우리 우리 젊은 시절에 맨날 공부만 시키고, 막 여러 가지 불만들이 있을 수 있죠. 그런데 구원 받으면 이렇게 됩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나쁜 일인데 감사할 수 있어요. "항상 기뻐하라" 슬픈 일이 생겼을 때도, 그 슬픔은 슬픔 대로 있지만 기뻐할 수 있어요. 이게 영광의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그가 왜 세상이 이렇지? 왜 나는 인생이, 이제 외부에 적을 돌리지만 왜 나는 이럴까? 왜 나는 결심하고 결심한 대로 이제 못 살까? 저는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다닐 때 맨날 방학 때 시간표 짜거든요. 학교 다닐 때는 이제 다니지만 방학 때는 이제 시간표 짜라고 그러죠. 한 번도 그대로 못 살아갑니다. 시간표는 잘 짜죠. 몇 시 기상, 밥 먹는 시간만 잘 해서, 엄마 왜 밥을 안 줘? 공부하는 시간은 조금 넣어놨는데도 이걸 못 해요. 나는 왜 이럴까? 원래 이런 건가? 다 이렇게 사는 건가? 라고 하는 이런 데서부터 영광의 하나님으로 만족한 것으로 오고, 그 이유가 뭐냐? 하나님이 부르셨을 때 순종했었다라고 하는 것이 이제 아브라함 생애의 첫 번째 단계입니다.
두 번째로 넘어가겠습니다. 두 번째는 이제 하나님이 나타나신 거 보면 압니다. 첫 번째 영광의 하나님이 나타나셨으므로 아브라함한테 말한 것입니다. 너의 삶은 영광스럽지 못하답니다. 너는 허무한 인생을 살고 있다. 이렇게 한 것입니다. 두 번째 나타난 하나님은 "가장 높으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높다고 하는 것은 아브라함한테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너는 비천한 인생을 살고 있다. 그래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그보다 더 높으실 수 없는 하나님, 우리는 가난하게 삽니다. 우리는 수준 낮게 살고 있습니다. 거기에 비해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나옵니다.
이제 다시 하나님이 어떻게 사람을 만들어가냐면요, 우선 첫 번째 하나님과 만족스러운 관계를 이루고요. 두 번째 저희들이 잘 아는 내용을 보죠. 하나님이 어떤 성도를 구원하시면 그에게 이제 어떻게 살게 하시냐면, 그에게 새 생명을 주십니다. 성령을 주십니다. 죄를 용서하시고, 미래의 죄까지 다 용서해 놓고, 이제 죄에 대해서는 평안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에게 성령을 주시고 새 생명을 주셨습니다. 이제 성도들의 삶은 갈등의 삶을 삽니다. 단이 벧엘에 있고 아이 성에 있잖아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부름이 있고, 자기는 수준 낮게 살고 있는 거예요. 이 가운데 갈등이 시작됩니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놀라운 삶이 있고, 그는 구원받았지만 아직 구원받기 전에 나쁜 습관, 아직도 새롭지 못한 관점, 세상이 주는 것에 대한 영향, 세상은 딱 말하면 뭐가 이해가 돼요. 그런데 성경은 이해가 잘 안 되는 거예요. 이런 가운데 살아가기 시작합니다.
어떻게 사냐면, 그래서 이제 새 생명을 주셔서 이제부터 그리스도인은 영적인 전쟁 가운데 들어갑니다. 이 전쟁의 특징은 첫 번째입니다. 그는 항상 승리하지 못합니다. 100% 승리가 보장돼 있지 않은, 가끔씩 실패하게 되는 전쟁을 합니다. 참 전쟁이 그렇죠. 그다음에 두 번째 전쟁에서 실패할 때마다 용서는 완벽하게 돼 있습니다. 실패에 대해서 정죄하지 않습니다. 이미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어떤 경우도 정죄하지 않는다, 라고 하는 게 있습니다. 그런데 전쟁은 항상 이기지는 못합니다. 그리고 또 세 번째입니다. 그러나 궁극적인 승리는 보장돼 있습니다. 이 전쟁을 하는 것입니다. 내 안에서 말씀과 새 생명이 요구하는 것과 나의 아직 변화되지 못한 옛 성품, 옛 삶이 갈등하며 살아가는 삶을 그리스도인이 두 번째로 삽니다. 이제 이런 사람들이 가끔 나오죠. "나는 아 이거 힘들어 죽겠네. 맨날 이거 선택해야 되고 갈등 해야 되고" 새 생명을 무시하고 옛 생명 세상 사람하고 똑같이 살면 하나님이 징계하기 시작합니다. 그 삶의 고난을 주십니다. 이게 이제 고린도전서 11장입니다. 예배 때 누구는 먼저 먹고 배부르고, 누구는 취하고, 이렇게 되는 거죠. 주님 만찬 예배 때 막 함부로 행동한 거죠. 그때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냐? 너희 가운데 죽는 자도 있고, 약한 자도, 있고 병든 자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징계하시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징계가 없으면 사생자다. 구원받았는지 분별 다시 해야 합니다. 구원받기를 바라지만 징계가 없으면, 마음대로 사는데 하나님이 내버려 두면, 구원이 의심스러운 삶입니다. 이게 이제 그리스도인의 두 번째 단계입니다.
그래서 내가 어디에 있는가 잘 보셔야 합니다. 아직도 영광스럽지 못한 허무한 생을 살고 있는지, 그다음에 두 번째 이제 새 생명의 삶을, 갈등의 삶을 사는 단계, 이게 이제 벧엘에서 있었던 것이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는 '전능하신 하나님'인데요. 전능하신 하나님은 다시 말하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야 되는데, 이삭을 하나님이 주시겠죠. 자기에게 능력이 없죠. 그래서 너는 능력이 없다를 나타내기 위해서 "자기 몸이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같은 상태로 넣은 거죠. 일찍 주실 수 있지만 그들이 자식을 만들 자식을 생산할 수 없는 몸의 상태가 될 때까지 하나님이 기다리신 거죠. 그래서 이제 아브라함은 아는 거죠. 이삭은 나로서는 불가능하구나라고 생각한 거죠. 그러면 어떻게 생각 해야 되죠? 그렇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주어질 것이다라고 생각을 해야 되는데 이게 너무 이제 쉽지 않은 생각이죠.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도와드리자. 하갈 있잖냐? 하나님도 이렇게 머뭇머뭇 하시는 거 보면, 하나님도 난처하신 모양인데 우리가 도와드려야죠. 하갈 통해서, 안 되는 거죠. 하나님의 이름을 불명예스럽게 한 거죠. 이제 이 단계가 이제 세 번째 단계입니다.
저희들이 이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때 이제 이런 측면을 보겠습니다. 처음에 처음에 이 부분이 분명해야 합니다. 제가 성경 읽기 이렇게 참여하면서 느끼는 건데 이 부분이 처음부터 분명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우리는 죄인이었습니다. 놔두면 지옥과 마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나에게 하나님이 사랑할 만한 어떤 것도 없었습니다. 그런 나를, 그러니까 은혜죠. 전적인 은혜로 예수님이 사람이 되어 오시고, 내 죄를 지시고 그리고 죽으시고, 그리고 성령을 보내주셔서 내가 죄인인 것과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시고, 그래도 강퍅한 내 마음을 성령께서 감동하셔서, 그래서 믿음은 자랑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믿었죠. 그렇지만 믿음이 자랑할 수가 없습니다. 전적인 은혜입니다. 물론 믿어야 되죠. 믿음은 내가 발휘해야 되는 것이지만, 이게 행위하고 다른 것은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제 구원 받았어요. 이렇게 구원받은 사람은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입니다.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그러면 하나님이 그 같은 사랑과 은혜로 나를 구원하셨으면 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믿는 우리의 자연스러운 반응은 무엇입니까? "주님 제 인생은 당신 것입니다. 나는 없습니다." 이게 자연스럽죠. 그래서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말하는 거죠. 사도바울이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구원받을 때 이렇게 이제는 내 인생이 아니다. 이제 나는 주님이 원하는 인생을 산다. 나 같은 사람을 왜 부르셨을까? 왜 구원하셨을까? 무슨 목적을 가지고 그렇게 하셨을까? 주님 그 뜻을 이루시옵소서. 그래서 이제 세 번째 단계가 뭐냐면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늘에서 뜻이 이루어진 것 같이 이 땅에서도 뜻이 이루어지리다." 이게 이제 구원받은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인생을 살고, 그다음에 이 경험하면서 이제 우리들 뭘 경험하냐면, 내 뜻대로 안 하고 성경대로 뭐 할 때마다 아브라함처럼 기근이 오면 물어봐야 되죠. 다윗이 사울왕과 차이가 나는 게 뭐냐 다윗은 물었고, 사울은 안 물은 거죠. 그래서 이제 뭐 할 때마다 이게 주님 뜻이 뭔가 성경을 살피고 ,성경에서 잘 모르겠으면 먼저 신 형제님들한테 어떤 게 주님 뜻입니까? 이렇게 묻고 또 내 선한 양심과 또 이에 따라서 이제 사는 거죠. 그러니까 그는 자기 뜻대로 못 삽니다. 자기 원하는 대로 못 살아요. 맨날 물어봐야 돼요. 뭐 애도 아닌데, 애들이 그러잖아요. "엄마한테 물어볼게요." "엄마가 이래라고 그랬어." 완전히 그게 저희들이죠. 주님이 뭐라고 그러셨는데, 성경에 뭐라고 나왔는데, 하고 맨날 물으면 내 뜻대로는 못 살고 맨날 성경대로 살면 행복하더라, 이걸 아는 것입니다. 주님 말씀으로 치면 이것입니다. 마태복음 11장 "내 멍에는 쉽고 가벼우니 안식할 것이다"입니다.
이제 우리가 겉으로 보면 자기는 없고 맨날 완전히 종이지 뭐, 이게 주일날 아침에, 맑은 날 한 번도 밖에 나가서 놀지도 못하고, 이제 많이 그런 소리 하더라고요. 일요일 아침에 만화 영화 나오는데 나는 주일 학교 가야 되고, 그것이 행복이더라를 알게 됩니다. "내가 산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딱 고백하고 실제로 그 삶을 살다 보면 처음에는 '이게 좀, 이거 좀 너무한 거 아니야? 아니 그래도 나도 내 저기가 있는데, 나도 좀 내 뜻대로 한 번씩은 해야지.' 할 때마다 재앙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이 길로 가다가 그가 알게 됩니다. 이 길이 복된 길인 것을, 이제 특히 젊은 사람들이 그렇죠. 이제 어렸을 적에는 이제 부모님 뜻대로 하다가 사춘기가 되면 이제 자기 뜻대로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자기 뜻대로 하면 이제 놔두죠. 자기 뜻대로 하면 맨날 사고죠. 그리고 이제 어른이라고 하는 건 뭐냐 하면 부모님 말씀대로 하는 것이 옳았다. 자기 삶으로 경험하는 거죠. 이게 이제 그리스도인, 하나님 뜻에 순종하는 것이 복된 것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독재자가 아니다. 하나님은 나의 개성을 짓밟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나를 끌고 가는 독재자가 아니었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알고 나를 사랑하는 분이었다. 이게 이제 세 번째 단계입니다. 그래서 내 힘, 내 뜻, 내가 원하는 대로 하지 않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힘을 빌어서 사는 것이 행복이다라고 하는 것을 아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세 번째 단계입니다.
그다음에 이제 마지막으로 가겠습니다. 네 번째 단계는 이제 이삭을 드립니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드리는데요. 드릴 때 전번에 그런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창세기 1장부터 12장, 22장까지 단 한 번도 죽은 게 살아난 적이 없습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거예요. 들은 적도 없고, 생각한 적도 없는 것을 아브라함이 믿어요. 이제 우리는 예수님 부활도 있고 나사로도 부활하고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부활 믿으면 되겠네, 하지만 아브라함 입장에서는 그 부활이라고 하는 개념도 없을 때 그가 부활을 생각해 냅니다. 그리고 이제 드리는 거죠.
그런데 다시 우선 하나는, 하나님께 드려야 자기 것이 됩니다. 내가 갖고 있으면 내 것 안 됩니다. 하나님께 드리면 영원히 내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저희들이 찾은 거잖아요. 얻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가 얻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걸 안 거예요. 그게 드리는 거예요. 아까운 게 아니에요. "저기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우상들이나 자식 드리는 건데요. 하나님 우상 아니시잖아요." 하나님 우상 아닙니다. 우상은 나쁜 걸 요구하죠. 세상에 자식을 죽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의 기본 도덕을 해치는 거잖아요. 악한 거죠. 그런데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한 것은 하나님은 그렇게 요구하실 자격이 있으십니다. 왜냐하면 이분은 사망과 생명, 음부의 권세를 지고 계신 분입니다. 이분이 누구를 태어나게 하셨고 죽는 순간도 하나님이 다 결정합니다. 누가 언제 죽을지 하나님이 다 결정해 놓은 거예요. 그 하나님이 이삭의 생명을 요구하시는 것은 당연한 권리입니다. 이게 우상하고 차이가 있는 거죠.
그래서 이제 마지막으로는 저희들이 교훈을 하자면 이것입니다. 경륜을 아는 거예요. 저희들도 이렇게 하는 거죠. 저희도 요즘에 이제 계시록 공부하고 있는데요. 마포 모임에서, 이 세상이 어떻게 흘러갈지 압니다. 궁극적으로, 그래서 이제 저희들이 잘 아는 대로 주님이 공중에 오시면 그때 무덤에 있는 성도들이 부활하고, 살아 있는 성도들이 홀연히 영광의 몸으로 변화되고, 공중에 올라가서 주님을 뵙고, 그러면 그리스도 심판대가 있고, 그리고 혼인이 있고, 그리고 나서 이 땅에서는 환란이 시작이 되고, 그리고 이제 7년 환난이 끝나면 우리가 주님과 함께 이 땅에 내려와서 천 년 동안 왕국이 시작이 되고, 천년 왕국 이제 끝날 때쯤 사단이 잠깐 풀려났다가 또 한 번의 마지막 반역이 있고, 그리고 난 다음에 주님이 불로 이 지구를 없애버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드시겠죠, 라고 하는 전체적인 그림을 저희들이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어느 시점까지 와 있는지, 이제 주님 오실 것을 아는 건 아니지만 어디 시점에 와 있는지, 마지막 고통하는 때에는 어떤 특징들이 있는지, 그때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되는지, 이런 게 디모데후서에 다 나와 있는 거죠. 그래서 우리 시대가 하나님 손에 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끝날지도 압니다. 우리는 전체적인 그림을 보고 갑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드릴 때 이제 믿음으로 드린 거지만 그 마음속에는 그림이 있었던 거예요. 그리고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소망하다가 실제로 나의 때를 보고 즐거워했느니라" 아브라함이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를 보고, 그가 믿음으로 보고 즐거워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가 이 경륜을 이해한 것이죠. 이제 놀라운 게 베드로가 베드로후서를 쓸 때 뭐라고 말하냐면 자기가 이 땅을 떠날 때가 임박한 것을 알고 씁니다. 자기가 죽을 때를 알아요. 디모데후서에서 사도 바울도 "내가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자기가 죽을 때를 알아요. 왜요? 어떻게 알아요? 병원에 갔더니 "당신 얼마 남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안 게 아니고 자기를 부르신 주님의 임무를 거의 완성한 거예요. 그걸로 알아낸 거예요. 이제 내가 더 이상 여기 있을 필요가 없구나. 주님이 나에게 부르신 일을, 그래서 "내가 달려갈 길을 마치고" 이렇게 말하는 거죠.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출발 지점이 선거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임무 이게 마지막, 그거 끝나면 가는 거죠. 그래서 저희들이 이 전체적인 그림을 보고, 또 교회의 그림은 뭐고, 그래서 이제 계시록 2장 3장에 보면 7개의 교회가 어떻고, 이렇게 보는 거죠. 그래서 우리는 지금 어디 있는가? 어떤 특징들을 가지고 있는가? 내 생은 하나님이 왜 불렀고, 그리고 그 일을 내가 어떻게 이루어내고 있는가? 라고 하는 것으로 내 삶을 측정하는 것이 아브라함의 마지막 단계입니다.
다시, 우리는 '영광의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이 영광스럽구나. 그다음에 우리는 '하나님이 지극히 높으심', 하나님이야말로 수준이 있는, 고급한 하나님이다. 이걸 알고, 그다음에 '하나님이 전능'하시다. 그리고 하나님이 죽은 자를 살리시는, '영생하시는 하나님' 영원토록 하신 하나님, 이 네 하나님을 아브라함이 경험한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믿음의 조상입니다. 우리 모든 믿는 사람들이 이와 같이 하나님을 경험하고 지금 이 길 가운데 가고 있는 거죠. 그래서 내가 지금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만나서 이 갈등 가운데서 점점, 그러니까 우리는 첫째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야 나는 만족한다. 범사에 감사한다. 과거에는 불만 투성이었는데, 인생이 왜 이러고 세상이 왜 이러냐 그랬는데, 이제는 어떻게 돼도 나는 만족한다. 그다음에 그다음에 두 번째는 이제 내 안에 있는 새 생명을 따라 하나님이 의도한,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시고 하나님이 목표로 하고 있는 길을 가고 있다라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다음에 이제 세 번째 단계는 하나님이 나에게 시킨 일을 내가 하고 있다. 여러번 말씀드렸는데요. 우리 같은 인생이 놀라우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우리를 만났을 때 잘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관계로 들어온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을 만족시키는 일을 하고 있다라고 하는 만족이 있어요. 이게 세 번째 단계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금 현재 우리의 시대가, 그리고 이 우주를 향하여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계획, 그리고 나의 인생, 우리 지역 모임에 관한 하나님의 의도, 그래서 저희들이 성경 읽기 이제 어떻게 느끼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이런 걸 통해서 저희들이 의도하는 게 있습니다.
모든 형제님들이, 모든 성도님들이 말씀을 사랑하고, 말씀 한 단어 한 단어가 성령의 감동으로 된 단어들입니다. 이 단어들을 저희들이 비록 아직 모르는 게 많고, 아직도 부족하지만, 그러나 우리 수준에서 이 말씀을 읽고, 나름대로 깨닫고, 그것을 나누어 보고, 그리고 전체적으로 검증을 받고, 많은 형제님들이 쭉 이해했던 방향과 어긋나지 않게 얘기하고, 이런 것들을 계속해서 함으로써 저희들이 하나님이 얼마나 영광스러우시고, 높으시고, 능력이 있으시고, 그리고 처음부터 끝을 계획하신 분인가를 알고, 이 하나님을 섬기는자다운, 그리고 이 하나님을 주로 모시는 지역 모임이 과연 그 모임 안에 계신 주님은 그러한 분이다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알고 세상에 증거할 수 있는, 이런 일들이 주님 은혜로 저희 가운데 일어나서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합니다.